인도 철학

인도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I_(7)

수선님 2021. 2. 28. 11:40

② 유행수행에서 정사수행으로

초기의 상가 구성원, 즉 수행자들은 ‘숲에 머무는 사람’, ‘나무 아래서 사는 사람’, ‘맨땅에서 사는 사람’ 등으로 불렸다. 초기의 경전은 출가 수행자들이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삼림 속 깊숙한 나무 아래나 바위 위에 앉아서 명상에 잠기고, 나뭇잎이나 나무껍질 또는 짚으로 주위를 둘러친 간단한 오두막에서 비바람과 이슬을 피하고, 평지에서는 지붕이나 나무 그늘 같은 덮개가 없는 옥외의 맨땅에서 자며, 때로는 산 중턱에 있는 자연 동굴을 이용하여 수행하고 그곳에 머물렀음을 전하고 있다.

부처님시대에 무성하던 원시림의 옛 모습을 지금의 인도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바위산의 동굴이나 바위 그늘,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주는 갖가지 신령스런 나무들은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에 당시를 회상해 볼 수 있다. 왜 출가 수행자들은 나무 밑이나 동굴 속에서 수행했을까? 

 

​ 출처 : The Theravāda Buddhist Society of America. 1994. The illustrated history of Buddhism. Friendship Printing, Inc., Brisbane, CA.

인도는 겨울을 제외하고는 섭씨 30℃~ 48℃에 달하는 폭염과 살인적 더위가 작렬하는 곳이다. 수행자들은 큰 나무 아래는 시원하므로 樹神이 깃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신령스런 나무 그늘은 휴식과 명상의 장소로 선택되었다. 또한 동굴로서는 靈鷲山 동굴이 이용되었다. 수행자들은 낮 동안 태양의 직사광선을 피해 그 곳에 있던 동굴 속에 들어가 있었다. 당시 다른 수행자들도 큰 나무 밑이나 동굴 속에서 기거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러한 생활양식을 불교가 도입한 것이다. 물론 그런 장소에서 수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출가자들은 먼저 인간적 속박을 피할 수 있었고, 깨달음의 길에 이른다는 확신을 가졌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출가자들은 당시 사문들의 생활양식을 채용하여, 여러 지역으로 우행하면서 이른 아침에는 근처의 인가에서 탁발을 하고, 공양을 마치면 나무 아래나 계곡, 산 속 동굴, 묘지 등에서 神定을 닦으며 노숙을 하였다. 당시의 수행생활은 四依止(nissay)’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분소의(糞掃衣), 탁발(托鉢), 수하좌(樹下坐), 부란약(腐爛藥)이 그것이다. 문자 그대로 출가 – 집을 떠난 사람 – 의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인도의 기후는 매년 7월부터 ‘몬순’의 영향을 받아 많은 비가 내린다. 하천은 홍수로 범람하며, 이 기간 동안 출가자의 유행생활은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처음에 비구들은 이 시기에 각자 오두막집을 짓고 그 속에서 수행을 했지만, 차츰 공동 피난처를 마련하는 관습이 생겨서 마침내 安居(Vassa) 혹은 雨安居가 정해지게 되었다. 당시에 바라문교 수행자들 역시 우기 3개월 동안 각지를 돌아다니는 유행을 중지하고 한 곳에 거주하는 습관이 있었다.

 

 만물이 고갈되어 타버릴 정도로 살인적인 무더운 여름인 건기가 지나가고, 또 다시 우기로 접어들면 대지는 푸르름을 되찾고 벌레 등이 일제히 활동을 시작하여 밟아 죽일 염려가 있었으며, 비로 인해 도로가 유실되어 유행자가 촌락까지 가지 못하여 탁발의 기회를 잃어버릴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기에 사문들은 한 곳에 머무는 습관이 있었다. 이에 따라 불교 수행자들도 초기에는 각자가 자신의 친척, 친지등에 의지하여 우기인 3개월 동안에 매일 탁발할 곳을 확보한 다음, 그 가까이 거주하면서 수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교단 비구들의 식생활은 걸식·탁발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安居地는 도시나 마을 가까이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 住處와 園이라고 하는 두 가지 형태의 안거지가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주처는 비구들이 일시적 안거지로서 만들어진 것으로 안거가 끝난 뒤에는 내버려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은 도시나 마을 가까이 있는 과수원이나 화원 등을 말하며, 소유자가 상가에 기증하여 ‘상가의 원(saṃgha ārāma, 僧伽藍家)’이라고 불렸으며 비구들의 영구적 안거지가 되었다.

 

출처: The Theravāda Buddhist Society of America. 1994. The illustrated history of Buddhism. Friendship Printing, Inc., Brisbane, CA.

이 곳에 그 지역에서 재력있는 재가 신도가 精舍(vihāra)를 지어 기부하였던 것이다. 정사는 처음에는 명상과 수도를 위한 장소나 오두막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교단이 발전하고 많은 비구들이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대규모의 건물이 건조되자 ‘僧院’을 의미하게 되었다. 마가다의 빔비사라(Bimbisāra, 頻毘娑羅)왕이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竹林園(Veluvana)을 라자그리하(Rājagṛha, 王舍城) 안에 만들었던 것은 그러한 예이다. 일찍이 부처님을 위해서 쉬라와스띠의 장자 수닷따(Sudatta, 須達多)가 기수급고독원, 즉 祇園精舍를 기증한 것이 원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이러한 정사 건립을 비롯하여 초기의 불교 교단을 경제적으로 지원한 것은 마가다국의 왕실이나 여러 도시의 부유한 상인들, 즉 장자들이었다. 비구들은 이런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주로 정사를 중심으로 실천, 수행에 힘쓰게 되었다. 초기불교의 교단 성립시에는 홀로 조용한 곳에서 선정 수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으나, 점차 우안거를 계기로 하여 영구적 거주처인 정사가 건립되면서 비구들은 정사를 중심으로 수행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비구들이 오로지 정사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포교활동을 소홀히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승원에 정주하는 일이 제도화되었지만 종래와 같이 유행하는 수행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또 유행과 승원생활을 번갈아가며 수행하는 수행자들도 있었다고 전한다.

 

 앞서도 고찰한 바와 같이 부처님 자신도 동쪽으로는 마가다의 수도 왕사성으로부터 서쪽으로 꼬살라의 사위성 사이를 왕래하였고, 또 밧지(Vajji)족이 거주하는 바이샬리(Vaiśālī)에도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이러한 여러 도시의 근교에서 우안거를 마치면 다른 도시나 마을로 여행하면서 교화활동을 하였는데, 그러한 교화활동의 생활은 꾸시나가라에서 80세에 입멸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부처님의 이와 같은 교화활동은 비구들 역시 실천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부처님도 녹야원에서 최초로 다섯 비구를 교화한 후, 이 다섯 비구에서 설했다는 다음의 법문은 초기불교 교단의 교화활동에 관한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다.

 

비구들이여, 사방으로 유행하여 교화하라.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해, 세간에 대한 연민을 위해, 인간이나 諸天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 두 사람이 함께 가지 말라.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도리에 맞고 언설이 잘 정돈된 법을 설하라. 참으로 완전하고 청정한 梵行을 밝혀라. 세상에는 塵埃에 적게 물든 사람들이 있으니 만약 법을 듣지 못하면 법에서 멀어질 것이요,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역시 우루벨라(Uruvelā)의 세나(Senā)마을로 가서 법을 설할 것이다.

 

출처 : The Theravāda Buddhist Society of America. 1994. The illustrated history of Buddhism. Friendship Printing, Inc., Brisbane, CA.

불교 상가의 생활양식은 여름안거(雨安居)를 계기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비구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행하던 遊行布敎의 형태는 얼마 후 교단이 확대되고 재가신자들이 토지와 건물을 보시함으로써 定住布敎의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이 관습을 따르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비판과 권유를 받아들여 ‘우기의 정주’를 허락하였다고 『율장』에 기록되어 있다. 부처님 생존 당시 우안거의 관습은 바라문교나 자이나교에 공통적인 것이었다. 불교사의 흐름에서 볼 때, 유행편력의 출가생활이 승원에 정주하는 생활로 바뀐 것은 부처님 재세 당시에 이미 일어난 변화였다.

 

우안거는 90일간 계속된다. 우안거가 언제 시작되든 그 안거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는 自恣 의례를 행했다. ‘자자’란 우안거의 마지막 날에 3개월 동안 함께 지낸 동료들끼리 율의 가르침을 지키고 그것을 깨뜨린 일이 없었는가를 서로 반성하고 참회하는 의식이다. 이것은 수행자들에게 절차탁마를 통해서 안이한 생활상태를 지양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까티나(Kaṭhina)의식이라고 하여 신자가 보시한 승복을 분배하는 관습이 있었다.

 

 비구들은 새로이 보시받은 의복을 입고 다시 9개월의 유행생활을 하는데, 여기서 ‘4의지’ 가운데 ‘분소의’ 원칙이 안거생활로 인해 붕괴하게 된다. 이는 상가가 성스러운 존재로 간주되어 재가신자에게 공덕을 쌓아주는 매체로서의 기능이 중시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보아야 한다. 상가는 재가 신자의 공덕을 쌓을 기회를 주기 위해 분소의를 두르던 습관이 신자가 보시하는 새로운 옷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승원생활이 정착되면서 비구가 항상 동료들과 함께 정사 안에 정주하였으므로 우안거때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일로서 이러한 종류의 의례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것이 菩薩의례였다.

 

 포살은 오래 전부터 바라문들이 월 2회 성스러운 날 재계하는 습관으로 단식이나 절식을 하면서 청정한 생활을 하는 관행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부처님이 성도한 후 몇 년이 지나서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말씀드렸고, 불교 교단이 이것을 채택함으로써 실행하게 되었다. 포살은 후에 정비된 형식으로 한 달에 2회, 15일과 30일에 같은 지역(界, sīmā)의 출가수행자가 모여 바라제목차, 즉 출가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의 조항이 낭독되는 것을 듣고, 자기반성을 통해 죄과를 고백, 참회하는 의례이다.

 

 초기교단에는 포살이 도입되어 비구·비구니·재가신자 모두가 이를 실행했다. 재가신자의 포살은 매월 8,14,15,23,29,30 즉 六齊日에 사원을 참배하고 설법을 듣기도 하고, 비구·비구니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등, 여덟 가지의 계(八齊戒)를 지키는 일을 말한다. 출가수행자의 포살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참회, 고백에 의해 상가의 청정성을 유지하는 의례가 되었다. 이것이 잘 지켜지는 것은 상가의 존속과도 관련되었다. 또한 포살은 상가의 구성원으로서 연대의식을 낳는 원천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출가 수행자들이 승원에 정주하는 생활로 정착됨에 따라 정주하는 비구의 생활 습관도 변화하며 고정되어 갔다. 이를테면 사의지 가운데 樹下座도 적어졌으며, 분소의는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탁발·걸식하는 습관은 남아 있었으나 점차적으로 정사 안에 재료를 비축하여 두고 재가의 고용인이 승원 안에서 조리하는 것으로 변천되어갔다. 陳棄藥에 대해서도 율전은 오줌이 아니라 고가의 약초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출가수행자들은 승원에 정주하면서 독송, 탁발, 정오 이후의 단식, 명상, 상좌장로의 설법을 듣는 일 등으로 일과를 삼았다. 또한 후배 수행자들을 가르치고, 여름철의 우안거때가 되면 재가신자에게 설법을 하며, 한달에 2회 계율 조항(prātimokṣa)을 독송하고 참회·고백하는 것이 수행자들의 생활이었다. 유행의 편력생활에서 승원에 정주하는 생활로의 전환은 당시 사문집단 가운데에서 불교가 제일 먼저 변화를 시도하였다고 한다.

 

출처 : The Theravāda Buddhist Society of America. 1994. The illustrated history of Buddhism. Friendship Printing, Inc., Brisbane, CA.

그러면 불교사에서 출가수행자들이 유행·편력의 생활이 정사에 정주하는 생활로 전환된 의의는 무엇일까?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의미에 있어서 출가수행자들이 승원에 정주함의 의의는 부처님의 교법과 교단을 존속시키는 기반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보다 더 구체적인 의의를 奈良康明는 그의 『불교사I – 인도·동남아시아』에서 상가의 수행생활 중 유행에서 정사생활로의 정착은 불교사에 있어서 의의는 매우 크며 후대 불교의 전개에 있어서 아래와 같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기술했다.

 

첫째, 정사의 상가는 수행자의 생활공동체로서 출가수행자의 수행, 행위규범 등 생활문화를 공부하고 전달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단순한 유행자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았던 당시의 신흥종교 집단들 중에서 현대에까지 존속이 된 것은 자이나교 외엔 하나도 없다. 정사의 상가는 부처님의 교단이 유지되고 존속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정사의 상가는 부처님 교법을 전수하는 장소가 되었다. 깨달음의 수행과 그 전수도 정사의 상가가 있음으로써 가능하며, 상가의 구성원들인 수행자들이 청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정사의 덕택이다. 또한 정사생활의 정착은 기존의 교설을 분석, 종합, 정리하여 새로운 의견을 첨가하여 논서를 편찬케하고 이를 전승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아비달마(abhidharma)’의 교학 체계는 정사에 정주하는 생활 속에서 싹텄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정사의 상가는 재가신자가 공덕(puṇya)을 쌓는 場이 되었다. ‘공덕’의 관념은 업과 윤회의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사람들은 선행을 하며 수도자에게 보시를 하고 공덕을 쌓아 그로 말미암아 죽은 다음 천계에 태어나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염원했다. 그런데 천계는 안락한 세계이긴 해도 윤회의 세계이다. 따라서 불교도들은 그것이 궁극적이거나 최종적인 목표는 될 수 없다. 그렇지만 현실 문제로서 당시의 사람들 – 불교 신자를 포함해서 – 은 마음속으로부터 진심으로 천계에 나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여하튼 공덕에 대한 관념은 불교도의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가치관인 것이다. 상가에 대한 보시는 공덕을 낳는 것으로 믿어져, 상가는 ‘복덕과 공덕을 산출하는 밭’이라는 뜻으로 福田(puṇyakṣetra)이라고 불린다. 원시경전에도 이 말이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인도의 보편적 사고방식이 불교에 채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후대 보시의 공덕을 출세간적 깨달음과 결부짓는 교리로 발전한다. 부처님이 정사의 기증을 받아들인 것은 재가 신자로 하여금 공덕을 쌓게 하기 위한 일종의 종교적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 상가의 출가수행자들은 세속적인 세계를 초월하고 있긴 하지만, 세속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속세를 초월한 데서 오는 성스러움을 계기로 세속 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구체적으로는 공덕을 쌓게 하는 매개체로서의 상가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정사를 세우는 위치로서 도시나 촌락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는 것에도 적당한 곳”으로 가르친 것도 출가자로서의 法施와 재가신자의 財施를 위해서, 양자의 ‘만남의 장’을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인도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I_(7) |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