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더스 문명과 인도사회
1605년에 악바르가 죽고 그 뒤로는 자항기르(재위 1605~1627), 샤하자한(재위 1628~1658), 아우랑제브(재위 1658~1707)가 즉위하였다. 악바르에 의해 이룩된 무굴제국은 이들 3인의 황제의 재위 중에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며, 영토 면에서도 반도 남부를 제외한 전체의 지역이 그 지상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악바르 말년에 전국은 15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자항기르 시대에는 17주 그리고 아우랑제브 시대에는 21주로 늘어 반도 최남단을 제외한 전 인도가 무굴 왕조의 지배 하에 들어오므로써 제국의 최대판도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광대한 제국 내부에 이미 분열의 씨가 배태되고 있었다. 즉 아우랑제브 통치시대의 후반기는 장기간에 걸친 데칸 고원에의 출병으로 말미암아 재정적 파탄과 중앙집권적 정치권력의 약화가 초래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국의 동요와 그 붕괴를 더욱 촉진시킨 것이 마라타족의 활약이다.
이 시기에 마라타족의 활약이 활발해진 중요한 원인은 황제가 취한 정책, 그 중에서도 특히 종교정책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즉 악바르 황제는 인도 주민의 대다수는 어디까지나 힌두교도가 차지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종교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던 아불 파즐의 건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과감한 절충안을 종교정책에 반영함과 동시에, 스스로 라즈푸트 왕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그들로부터 충성과 동맹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아우랑제브는 이슬람교 순니파의 입장을 엄수하여 많은 힌두사원의 파괴를 명하거나 힌두교도에게는 아라비아 말(馬)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 매사에 그들의 종교심을 자극하는 듯한 차별정책을 취하여, 제국의 중요한 군사적 지주였던 라즈푸트족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1679년에는 악바르 황제가 폐지했던 인두세를 부활시켰기 때문에 힌두교도의 불만은 한층 높아졌다. 이리하여 무굴 왕조의 횡폭하고 차별적인 지배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이런 가운데 힌두교도인 마라타족은 그 활동범위를 급속히 확대해갔다.
1707년 데칸 공략에 실패한 아우랑제브가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나자 또 다시 황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황제가 자주 바뀌었는데 재위 기간 수 개월 밖에 안된 예도 적지 않았다. 그 배후에는 황위의 폐립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유력한 궁전귀족이 암약하고 있었다.
무굴 왕조에서는 황위계승에 대한 성문법이 없었기 때문에 부황(父皇)의 사거 내지는 황위의 공백이 생긴 경우에는 황태자들 중에서 황위를 탐내는 항쟁이 끊임 없이 되풀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항쟁에 궁정귀족들의 파벌투쟁이 관계했기 때문에 황우계승시에는 제국 전체가 심히 동요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문제가 더욱이 아우랑제브의 사후에 제국의 혼란과 붕괴 과정에 미친 영향에는 매우 큰 것이었다.
황실이 혼란한 틈에 델리의 서북지방에는 힌두교에서 파생한 개혁자의 일파인 시크교도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무굴군대를 번번히 위협함과 동시에 펀잡 지방에 그 정권을 부식하였다. 그들은 한때 무굴군에게 심한 타격을 받았지만 그들의 세력은 이 지바에 계속 유지되었다.
제12대 황제로 즉위한 무하마드 샤하는 예외적으로 오랫동안 제위에 머물러 있었는데(1719~1748), 실은 이 시대에 제국의 결정적인 와해가 진행되고 있었다. 즉 데칸 지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파견된 총독 아사프 자하(Asaf Jah)는 하이더라바아드에 웅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니자므(Nizam) 정권을 세웠다. 벵갈을 비롯한 인도 각지에서 잇달아 지방정권이 출현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뿐만 아니라 1739년에는 나디르 샤하(Nadir Shah)에게 심한 굴욕을 당하게 된다. 나디르 샤하의 군대가 저항군을 쉽게 격파하고 델리의 입성하자 황제는 오직 강화를 청하기에 급급했고, ‘나디르 샤하의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행위를 그대로 방관하는 형편이었다. 이때 나디르 샤하는 무굴 왕조의 황제권을 상징하는 유명한 ’공작의 왕조(孔雀의 王座)‘를 델리(城)으로부터 페르시아로 가져갔다.
그 후 20년도 채 못되어 델리는 다시 나디르 샤하의 침입 당시와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의 뒤를 이은 두르라니(Durrani)가 1756년에 또다시 침입해 온 것이다. 침입자는 1년 후에 델리에서 철수해 갔지만, 페르시아ㆍ아프간군에 의한 이 두 차례의 침입은 무굴 왕조의 권위를 완전히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한편 마라타족에 있어서는,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지배의 실권이 세습적인 페쉬와(Pesva, 莘相)의 손에 옮겨지고 세력범위를 한층 확대하였따. 그리고 18세기 중엽에는 판잡 지방까지 그 세력이 미쳤으며 각지의 마라타족을 규합한 마라타 연합은 이 당시의 인도에서 가장 큰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1760년 마라타 연합군이 북상하여 델리에 난입하니 북인도의 이슬람 세력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만일 마라타 군대가 그 여세를 몰아 북인도를 제압한다면 그들에 의한 힌두 지배가 무굴제국의 페허 위에 수립될 것이라고 생각한 이슬람 교도들은 수 년 전에 델리에 침입했던 두르라니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리하여 마라타군과 두르라니가 거느린 이슬람군은 1761년 싸움을 벌였다. 장소는 역시 파니파트였다. 평원에서의 총력전은 마라타족의 특기인 게릴라전이 주효하지 못한 탓으로 그들의 쓰라린 패전으로 끝남으로써 마라타 연합국에 의한 전인도 제패의 꿈은 깨어졌다. 한편 두르라니는 전리품만을 손에 넣었을 뿐, 인도에서 곧 철수해갔다. 그리고 이 전투 뒤의 무굴 왕조는 겨우 델리 주변의 영토를 보유한 채 명목뿐인 황제권을 유지했을 뿐이다.
무굴 왕조의 이 해체기에 델리에는 샤하 왈리울라(Shah Wali-ullah)라는 사상가가 있었다. 그는 당시 해체되던 제국의 쇠퇴요인이 무위도식을 일삼는 사람들의 사치풍조와 농민이나 도시인들의 과다한 세금부담의 두 가지 점에 있음을 지적하고, 사회정의의 원리에 입각하여 부의 편재를 제거함과 동시에 시대에 맞지 않게 된 낡은 정치제도를 개혁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였다인도의 지형을 크게 구분하면, 기후적으로 문화적으로 인도를 아시아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대체로 격리시켜 온 히말라야 산계(山系), 인도 반도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는 데칸 고원 그리고 데칸 고원과 히말라야 남쪽 기슭 사이의 평탄하고 광대한 힌두스탄 평원으로 나눌 수 있다. 이 힌두스탄 평원을 인더스, 갠지스, 브라흐마푸트라 등 인도의 3대 강이 흐르고 있다. 이 중에서도 인도문명이 가장 먼저 일어날 곳은 인더스 강 유역이다.
이 지역은 농경생활에 필요한 평야지대라는 점도 있지만 주변의 다른 문명권과의 접촉이 유리한 지리적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즉 인더스 강 유역은 비옥한 토지가 넓게 전개되어 있었고 강우량과 기후가 농경에 알맞았으므로, 원시 농경민이 정착하기에 적당하였다. 또한 강의 하류지역은 바다를 통하여 페르시아만, 메소포타미아 지방, 홍해 그리고 이집트 지방과 교섭할 수 있었고, 강 상류의 펀잡 지방은 육로를 통하여 중앙아시아와 중동지방을 왕래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인더스 문명의 유물을 통해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인더스 ANSDUAD인들은 보리와 밀이 주요 식량이고, 깨, 콩, 대추, 야자열매 등을 먹고 살았다. 또한 출토된 동물의 뼈로 미루어 보아 소, 물소, 양, 코끼리, 낙타 등의 가축이 있었다. 소는 이륜차를 끄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나 말을 사용한 흔적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외에 생선도 식용하고 있었다.
금속제의 낚시바늘과 추로 보이는 물건이 많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사냥과 고기잡이도 성행했으며, 특히 그물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레가 남아 있으며, 실의 종류는 양털과 무명실을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스스로 실을 직접 뽑아 옷을 마련한 것 같다.
발달된 도시문명과 아울러 유물 가운데 특색이 있는 것은 정교한 채색토기와 유약도기이다. 특히 유약도기는 다른 문명권에 앞서 독자적인 발전을 보인 것이다. 인더스 문명인들은 세계에서 최초로 면화를 생산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신드 지방에서 생산되는 명화를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신돈(Sindon)이라고 불렀다.
로마 시대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공중 목욕탕의 시설, 인장 등에서 보이는 인더스 미술의 사실적인 표현, 독특한 장식을 한 채색 항아리, 천을 짜는 무명실, 저울 그리고 상형문자의 사용 등에서 인더스 문명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의 장신구가 여럿 발견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금, 은, 상아 등의 보석류를 즐겨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아주 세속적인 유회용 작품도 있다.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색다른 상, 풍자적인 상, 몸을 뒤틀고 있는 요염한 무희의 청동상, 목을 흔드는 동물이라든가 노끈으로 끄는 조그만 손수레 등 매력적인 테라코타 장난감도 발견되었다.
현재 이 지방은 연 강수량 15cm가량의 척박한 곳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벽돌을 굽는 연료로 장작을 쓸 수 있을 만큼 주위에 숲이 울창 했던 것 같다. 또 관개설비의 유적으로 보면 당시 수량이 풍부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도장 등에 새긴 동물을 보아도 습한 땅에서 서식하는 호랑이, 물소, 코끼리 등이 자주 나오는 반면 건조한 땅에 사는 사자는 보이지 않는다. 기원전 4세기에 이곳에 들어왔던 알렉산더 대왕도 신드 지방은 매우 비옥한 땅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여튼 여러 가지 유물이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인더스 강 유역은 현재와 같이 극도로 메마르고 생활조건이 나쁜 황량한 땅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인더스 문명을 이룩한 주민의 대다수는 상인과 농부였을 것이다. 갖가지 도안이나 상형문자를 새긴 인장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인장은 한 변이 약 2.5cm 정도의 정사각형으로, 그것은 아마 재산이나 재물의 소유권을 표시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무역이나 상거래를 위해 도량법을 쓰고 있는데, 무게의 단위로는 16의 배수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계속 이어져 그 후에도 16 아나(anna)는 1루피(rupee)로 통용되었다. 모헨조다로에서만도 1000개 이상의 인장이 발굴 되었고, 인더스 문명의 인장이 메소포타미아나 그 동쪽 산악 지대인 엘람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면 상인들의 거래가 먼 나라에까지 미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인더스 문명인들은 발달된 도시생활을 영위하였다. 무기나 도구에 구리와 청동을 사용하고 석기를 병용하고 있었으며, 녹로를 사용하여 훌륭한 도기 항아리를 만들었다. 또한 바퀴달린 수레를 발명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불에 굽거나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하였고, 그림문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인더스 문화가 아리아인의 문화보다 오히려 진보했던 것으로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인더스 문화의 주인공들은 농업과 더불어 상업을 영위하면서 도시생활을 한데 반해, 아리아인들은 유목 생활을 하다가 점차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촌락생활을 하였다. 또 인더스 문명인들은 멀리 서남아시아까지 무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 곳에서 발견된 유물로 증명되고 있지만, 아리아인들은 특히 그 초기에 있어서 무역을 했다는 뚜렷한 증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에 들어온 아리아인이 인더스 문명인들을 정치적으로는 지배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아리아인이 선주민에게 동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2. 베다시대의 인도사회
가장 오래된 문헌인 리그베다에도 아리아인이 인도에 침입하기 이전 시대에 과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리그베다는 인도에서 생겨 완성돈 것으로 여기서 나오는 지리적 명칭도 모두 인도의 것이다. 리그베다에는 펀잡에 정주할 당시의 생활상을 인드라(Indra) 신에게 자주 가축의 번식을 기원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점으로 미루어 여전히 목축이 주가 되고 농업은 이차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도 유럽 여러 민족 사이에서 통하는 가축의 이름에는 비슷한 것이 많은데 비해서, 농산물의 이름은 각 민족마다 다른 것으로 보아 아리아인이 인도에 들어오기 전에도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 정착한 아리아인들은 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가축을 기르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인도에 들어온 아리아인에게는 여러 가지 직종이 있었는데, 그들은 유목민이었던 만큼 목축을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소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의해서 개인의 부가 측정되었기 때문에 소를 쟁취하기 우해 싸움을 벌였다. 이윽고 그들도 농경에 종사하기 시작하였으나, 곡물의 수확량보다는 가축의 수가 자신의 지위를 결정한다는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리그베다에는 토지가 아니고 소나 여자 하인이 사제자에게 바쳐졌다고 언급하고 있어 이러한 재산의 단위로서의 소의 존재가 뒷날 소를 신성시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도니다. 그리고 베다에서는 인드라신을 ‘소의 주재자’, ‘소의 증식자’로 찬미하고 있다.
아리아인이 정복민으로서 농촌지역에 정착함에 따라 점차 농업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농토를 개간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관개에 의해서 물을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주식이었던 보리, 밀, 쌀 등을 철로 만든 쟁기를 이용하여 경작하였다.
가축으로는 소, 말, 양 등이 사육되고 있었다. 특히 소는 우유뿐만 아니라 노동력과 연료를 공급해 주었기 때문에 가장 귀중한 동물로 여겨졌다. 유지(乳脂)를 걷어 내어 버터(혻ㅁ)를 만들었는데, 리그베다에는 그것을 인간과 신이 누리는 최고의 기호물로 기리고 있다. 그들은 가족 단위로 종교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족이 혈연관계를 유지해 씨족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 소를 신성시하는 사상은 확립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후세인들처럼 살생을 꺼리지 않았다. 리그베다에는 신도 인간도 모두 쇠고기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도박과 음주를 즐기고 육식의 향연을 벌이기도 했다.
리그베다 시대의 아리아인들의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모두 같은 조상을 가진 혈연단체라는 의식으로 결합한 집단을 단위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집단 가운데서 최대의 규모를 가진 것이 부족이며, 그것은 몇몇 씨족으로 나뉘고 씨족은 다시 여러 갈래의 지족(支族)으로 나뉘어진다. 이들 지족으로 구성되는 최초의 다위가 가족(grha)이다. 당시의 가족은 고대 로마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큰 가족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삼대에 걸친 혈족이 한 집안에서 살고 잇는 복합가족에서는 그 가장이 죽으면 가족은 자연 분가되어 세대를 거듭할 때마다 여러 지족으로 갈라지지만 이들 새 가족은 서로 도울 수 있도록 가까이에 모여 살았다. 친족 집안인 이들 지족이 정주한 지연적인 집단이 촌(grama)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을 주민들의 서로간의 연대 의식은 결국 같은 조상에 대한 제례의식에 의해 긴밀히 유지되었다.
리그베다에 나타난 문화는 펀잡 지방으로부터 사라스와티 강(지금의 델리 서북부)을 무대로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리아인은 이 지방에 정주한 후 약 500년 간에 걸쳐 일부는 더욱 동쪽으로 향해 갠지스 강 상류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또 일부는 남으로 향해 빈디야 산맥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아리아인의 갠지스 강(Ganga) 유역으로의 동진은 그리베다가 편찬된 시대부터 서서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갠지스 강의 명칭이 리그베다에 단 한번 적혀 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후기 베다 문헌에 보이는 지리와 풍물은 분명히 갠지스ㆍ 야무나 두 강 상류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더욱 그 동쪽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이 동진하여 도아브(갠지스와 야무나라는 두(애) 강의 물줄기(메)의 중간 지점이라 해서 ‘doab'라 함) 지방에 정착한 사람들은 다시 동쪽과 남쪽으로 전진하였다. 이곳은 토지가 비옥하고 고온다우한 기후의 혜택으로 말미암아 농업이 발전하였다. ’야주르 베다‘에는 아리아계 사람들이 점차 목축에서 농업으로 옮겨간 과정이 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폐쇄적인 농천을 단위로 하여 부족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3. 마우리아왕조 이전의 인도사회
초기의 힌두 문화는 브라만 문화라고 할 요소가 많았지만, 이는 결코 정체적ㆍ고정적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 아리아인의 생활 문화가 표면화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아리아인과 원주민의 인종적ㆍ문화적 흔혈이 서서히 진행되어 갔던 것이다. 경제적ㆍ사회적으로도 다야한 변화를 겪으면서, 기원전 6~5세기의 소위 인도 고대사의 격동기로 이어져 갔다.
대략 기원전 800년경에는 철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이 시대에 와서는 농업과 목축 부문에 큰 진보가 있었다. 철의 사용에 의해 농기구와 그 이외의 도구가 개량되었으며, 이는 농업 생산의 증대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하여 호미도 그 모양이 커지고 무거워졌으며, 쟁기 하나를 24마리의 소가 끈 기록도 보인다. 관개 이외에 비료의 사용에 관한 기록이 몇 군데 보인다. 여러 종류의 곡식들이 재배되었고, 이들 곡식의 재배 계절이 적혀 있기도 하다. ‘아타르바 베다’에는 가뭄을 이겨내고 풍요한 수확을 거두기 위한 수많은 주문이 적혀 있다. 또한 철의 사용은 다양한 수공업 제품의 증산에도 도움이 되어 수공업은 더욱 현저한 발전을 이룩했다. 직업의 종류도 대장장이, 농기구 제조공, 전차 제조공, 도공, 염색공, 직물공 등으로 세분화되고 있다.
농업과 목축업의 진보에 따라 토지가 증가하고,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유한 농민이 나타나게 되었다. 풍부하게 생산된 제품은 자급자족의 범위를 넘어 상품으로 취급됨에 따라 이를 사고 파는 상인 계층이 출현하였다. 그들은 도적과 교통의 불편함 등의 난관을 극복하고 시골과 도시 사이를 왕래하며 교역했다. 그들은 점차로 이 교역의 안전을 위하여 무력을 지닌 왕족과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무력에 의해 보호 받으며 교역의 이익을 확장하였으며, 동시에 왕족은 재정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육로와 하천을 이용한 교통로가 개척되고, 시장이 생기면서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리와 도시가 나타났다. 이에 따라 폐쇄적인 농촌의 부족 사회는 점차 도시에서 붕괴되어 갔다.
이 시대에는 또한 여성의 지위에 커다란 변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의 가치는 최하층의 카스트인 슈드라와 같은 위치에까지 떨어졌다. ‘수트라(sutra) 문헌’에 여성이 살해된 경우의 배상금은 슈드라의 경우와 같다고 정해져 있다. 또 처는 상속권이 없으며, 남편이 죽으면 유산과 함께 시가(媤家)의 것으로 귀속된다. 재산의 소유권도 없었으며, 처가 모은 재산도 남편 또는 시아비의 재산이 되었다.
4. 마우리아왕조 시대의 인도사회
인도에서 최초로 중앙 집권적인 왕조 체제를 갖춘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 중앙에서 부임한 왕족들이 머물면서 그 지방 행정의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하였다. 고대 인도의 도시들은 후세와 같이 교통의 요지에 생긴 경제도시가 아니라 순수한 정치도시이다.
파탈리푸트라는 그 대표적인 도시이다. 메가스테네스에 의하면 파탈리푸트라는 갠지스 강과 그 지류의 합류점으로 세로 13km, 가로 2.4km 의 평행사변형의 도시였다. 시가 주위에는 성벽을 쌓고, 성벽 위에는 570개의 탑이 있었으며, 또 많은 성문이 있었다.
즉 당시의 도시는 정치도시이면서 군사적인 방어설비를 갖춘 성채도시로서의 성격을 겸하고 있었다. 만일 외적에게 공격을 당하면 근교의 주민들까지도 안전한 성내로 맞아들일 수가 있었다.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는 농촌의 마을을 산스크리트어로 그라마(grama)라고 하여 도시를 나타내는 푸라(prua), 나가라(nagara)와 대칭어로 쓰였다.
마을(촌락)은 자치적인 공동체(panchayata)를 이루고, 촌장(長老)이 지배적인 지위에 있어 마을 사람들 간의 다툼이나 분쟁도 이들에 의하여 중재되었다. 마우리아 왕조도 이들 촌락의 장로를 중시했으며, 아쇼카 왕은 작지의 장로를 방문하여 돈을 지급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농민들로부터 받는 조세가 촌락공동체마다 일들 장로를 통하여 장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농촌에서 바치는 토지 부과세는 토지를 측량하고 관개공사를 관리하는 지방관리관에 의해서 징수되었다.
그리고 이들 지방관 스스로가 직접 농촌에 출장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촌락공동체의 장로를 통하여 부락별로 징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농민은 병역의 의무가 없는 대신에 경작한 토지의 생산물을 세금으로 바쳤다고 메가스테네스는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식으로 말하면, 시민권을 갖지 못한 평민은 병역의무가 없는 대신 그 대상으로 병부(兵賦)를 바쳐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 불교도들이 스투파(strpa; 탑, 聖者의 유골이나 유품을 모셔놓은 큰 무덤)에 석주(石柱)나 개석(蓋石) 따위를 헌정(獻呈)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의 가족공동체(kula)가 전체 명의로 헌정하는 경우를 본다. 아마 공동재산의 관리자로서 상당히 강한 가부장권을 가진 족장을 중심으로 한 가족공동체의 모습이 존속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권은 어디까지나 가족을 중심으로 삼고 그것이 오래도록 종족들 사이에 계승되어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고대 가족의 염원에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가장 개인적인 자신의 특권은 크게 제한을 받고 있다.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 가족공동체 전체의 명의로 증정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가족공동체의 습속과 제도가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도가 증정한 이러한 유품들을 살펴보면, 상당수가 개인의 증정에 의한 것으로 가정 주부까지도 개인 명의로 증정한 실례도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시대에는 이미 가족원이 가족재산에 대하여 균등한 권리를 가짐과 더불어 가부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밖의 가족원까지도 스스로 마련한 재산은 이를 가족 재산에 포함시키지 않고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농촌의 경우에는 경지나 미개간지를 포함하는 부동산은 이른바 ‘합의상의 배당분’으로 분배된 듯하다. 즉 가족원도 토지의 산물을 일정 비율로 부여받을 권리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저수지, 우물, 목초지 등은 물론 공동으로 사용되었다.
가족공동체에 있어서도, 또 거기에 속하는 하나하나의 가족에 있어서도 노예 및 종이 가족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효 또한 무척 많았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쇼카 왕 비문에도 노예(dasa)와 종(bhrtaka)을 구별해 쓰고, 이들에 대하여 친절을 베풀도록 훈계하고 있다.
‘다아사(dasa)'는 펀잡에 침입해 온 아리아인이 그 땅의 선주민을 가리킨 명칭이었는데, 포로가 된 이들이 노예로 부려졌기 때문에 뒤에 가서는 그것이 노예를 뜻하는 보통 명사로 되고 말았다. 노예에는 팔려온 것, 처음부터 노예로 태어난 것 등 모두 15종류로 알려지고 있다.
브리타카는 ‘고용되어 있는 자’란 뜻을 가지며 법전류(法典類)에서 카르마카라(Karmakara:노역에 복무하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들은 주인의 시중을 들고 집안의 궂은 일을 맡아 하는 것이 본래의 의무였으나, 뒤에는 주인의 비서 노릇까지도 하게 된 이른바 일종의 가내노예였다.
그런데 메가스테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도인은 모두 자유인이며, 인도인으로서 노예란 존재는 없다." 이상의 메가스테네스의 기록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인도 사회에 있어서 다아사는 그 수가 극히 많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리타가와 아울러 가족원 중에 포함되어 그 일부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노예 신분은 상당히 완만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스ㆍ로마에 있어서의 노예와 같이 쇠사슬이 채워지고, 낙인이 찍히고, 매질을 당하며 혹사되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고, 온정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메가스테네스는 그렇게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인도에서 농경노예도 볼 수 없다고 메가스테네스가 기록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쌀농사를 짓는 수전(水田)경작지대에서는 단위 면적당 투입되는 노동량이 맥류(麥類)등을 재배하는 건조농경지대에 비하면 훨씬 크다. 이러한 집약농경을 영위하는 지대에서는 자연히 그 토지에 정주하는 익숙한 농업 노동자가 아니고서는 충분한 생산을 올릴 수가 없다. 가족과 함께 그 토지에 정착하여 가족노동을 주체로 한 농업 노동자, 즉 예농(隸農)이라든가 소작노예라 불리는 비자유민에 의하여 토지가 보유되는 형태가 아시아의 고대 사회에 일찍부터 발생한 것은 이 때문이다. 단순히 육체노동력을 공급하는 ‘미숙한 노동자로서의 농경 노예를 집단화시켜 감독자의 매질 밑에 조방농경(粗放農耕)을 행하게 하는 서양 고전 세계에서 보이는 노예 농경과는 상당히 다른 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메가스테네스가 인도에는 농경 노예조차 없다고 한 것은 그 당시 인도 농촌에 있어서의 농민의 지주에 대한 예속정도가 완만한 가족을 가진 소작노예 내지 예농과 흡사했던 실정을 전해 주는 것일 것이다.
메가스테네스는 인도인은 누구나 자기의 카스트 이외의 사람과 결혼할 수 없으며 자기 카스트가 종사하도록 규정된 직업 또는 기술이 아닌 다른 일에는 종사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브라만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예외로서 직업을 자유로이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가 반드시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는 불교, 자이나교 등 이단의 종파가 성하여 브라만 중심의 사회질서가 흔들리고, 그리스인, 샤카족, 파르티아족 등의 외국인이 이주해 온 것 등의 여러 가지 원인에 따라 카스트 사이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예전에는 크샤트리아 출신이 아닌 왕은 비합법적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마우리아 왕조의 왕은 크샤트리아가 아닌 비천한 가문 출신으로 난다 왕국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낮은 계층의 사람이 높은 계층의 사람을 실력으로 타도하고 이에 대신하는 것이 예사로 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민족이 침입해 와서 넓은 지역은 정치적으로 지배하게 되고 이에 새로 이주해 온 외국인들이 가입함으로써 크랴트리아 계급은 팽창하여 카스트의 순수정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관리들도 반드시 세습되지 않고 국왕이 각 지방의 유력자 자제들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바이샤와 슈드라 두 카스트 사이에는 종전과 같은 구별이 없어지고, 농부, 목축인, 상인 따위의 직업에 의한 종성구분(직업 카스트)이 생겨나고 있다.
마우리아 왕조 시대는 실력에 의해 전통적인 카스트의 질서가 깨어지고 새로운 카스트가 탄생한 혼란기이다. 아쇼카 왕은 현실 사회에서는 신분의 상하, 계급의 구별, 빈부의 차 등을 인정하고 있으나,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거기에는 아무런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현실 사회에서의 신분차별을 완화시키는 데 어떠한 효과를 나타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활기 있고 유능한 관료조직을 형성해 가고 있던 마우리아 왕조의 통일제국이 붕괴하고, 점차 세습적인 지위를 존중하는 국가가 성립하는 시대가 되면, 다시 브라만 계급의 관렴이 사회에 부활하게 된다.
5. 카스트제도
1) 카스트 발생
카스트 제도는 스스로 고매한 브라만들에 의해 그들 자신의 권익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안된 제도로써, 모든 인도인들을 필요에 따라 세분해 놓은 교묘한 사회 제도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카스트 제도와 같이 역사적으로 복잡한 발달 과정을 거치면서도 유기적으로 잘 얽혀 있는 사회 제도가 단지 브라만이라는 한 계층에 의해 인위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면 인도 특유의 사회 제도인 이 카스트 제도가 시작된 발단을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의 충분한 논의가 있어 왔으나, 어느 것이 정설이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그저 학설에 그치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발표된 카스트 제도 기원론 중에서 중요한 것만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바르나 사이의 잡혼설(雜婚說) : 베다 말기의 찬가 '푸루샤 숙타(Purusa Sukta)'에는 아득한 옛날 여러 신들이 모여서 사람의 조상인 원인(原人)을 제물로 삼고 제사를 지낼 때 그 원인의 "머리는 브라만이 됐고, 그의 두 팔은 크샤트리아가 됐고, 그의 다리는 바이샤가 됐고, 그의 두 발에서는 슈드라가 태어났다"고 노래하고 있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네 개의 바르나로 구분되어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는 다종다양한 혈연집단이나 직능집단 그리고 종족이 혼재해 있다. 브라만은 이들 집단과 이들이 바르나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곧 바르나 사이의 잡혼과 바르나의 타락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불가촉민인 찬달라는 브라만의 여성과 타락하여 바르나의 특권을 상실한 크샤트리아로 본다. 네 개로 구분된 바르나를 절대시하는 브라만은 ‘푸르샤 숙타’의 인간 기원론에서 비롯되었다는 바르나의 기원을 혼혈과 타락(의무불이행)이라는 두 가지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역사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다.
직업 중시설(職業重視設): 직업 중시설은 직업에 관계 없이 성립된 카스트도 많다는 점 그리고 인종과 종교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결혼과 식사의 금기 및 카스트 사이의 의례적인 상하관계를 설명하기 어려운 학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직업의 채택에 의해서 새로운 카스트와 서브 카스트(sub-caste)가 생기는 경우가 많고, 공통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카스트를 이루는 경우가 많으므로 카스트의 기원과 직업의 관계를 전혀 부정할 수는 없다.
인종 중시설(人種重視設): 피부색이 희고 코가 높은 아리아인이 피부색이 검고 코가 낮은 선주민을 정복한 다음 자신의 피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만든 내혼제에서 그 기원을 찾으려는 학설이다. 아리아인의 인도정복의 경우에는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의 인종과 피부색이 다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혼혈이 생겨나지만, 얼마 후 정복자 집단은 내혼의 규정을 만들어 혼혈을 억제한다. 시간이 경과하고 정복지도 확대됨에 따라 이러한 현상은 반복되며 혼혈의 정도에 따라 여러 개의 내혼집단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학설은 근대 서구적인 인종 차별관을 가지고 고대를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카스트 제도의 특색인 식사와 직업문제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난 점이 있다. 그러나 아리아안의 선주민 정복이 카스트 제도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바르나 제도의 성립을 촉진시킨 점을 중요시하여, 다른 인종과의 접촉, 혼혈에서 카스트 제도의 기원을 찾으려는 학자들이 많다.
종교 기원설(宗敎起源設): 인도의 동북부에 사는 나가(Naga)족에서는 정령신앙(祖靈信仰), 마력신앙(魔力信仰)이 강하여 결혼ㆍ 식사ㆍ 음식물에 관한 복잡한 금기를 지키고 있으며, 주민은 독자적 기능을 수행하는 촌락에 나뉘어 살고 있다. 허튼(J. H. Hutton)은 이것이 아리아인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인도에서 널리 볼 수 있었던 현상이라고 추측한다. 즉 원주민들 사이에도 원시신앙에 기인하는 어떤 종류의 카스트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원주민을 아리아인이 정복한 결과 상하 관계의 원리가 도입되어 오늘날의 카스트 제도가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허튼이 말하는 원시신앙은 인도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왜 인도에만 카스트 제도가 지금도 존속되고 있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막스 베버(Max Weber)같은 학자는 원시종교와 종교 의례에서 카스트 제도의 기원을 찾고 있다. 그는 카스트 제도가 인종 ㆍ 직업 ㆍ 정치 등 각종 요인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그 근원에는 혈족 카리스마의 신앙이 존재하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인도 사회에서는 주술신앙에 뿌리박은 혈족 카스리스마가 모든 힌두 사회 분야에 고양되어 유지되고 있어 부라만과 직업 카스트가 배타적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절충설(折衷說): 이는 자티와 바르나를 구별하여 자티는 선주민의 부족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바르나는 선주민을 정복한 아리아인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고 한다. 선주민 부족은 원시적인 신앙과 관습에 의해서 서로 나뉘어 있었다. 이러한 선주민 사회에서 문화가 발달된 집단과 발달하지 못한 집단 사이에 찰별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 차별이 나중에 천민제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인도에 들어온 백색의 아리아인은 흑색의 선주민을 정복해서 바르나 제도를 성립시켰다.
아리아인은 종족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혼인규제를 발달시켜 나감으로써 순수성을 유지한 브라만은 최고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였다. 또 아리아인이 노동을 부정(不淨)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피정복 선주민에게 강제함으로써 사회 하층에 다수의 직업 카스트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부족제에서의 원시신앙, 인종, 직업의 용인을 절충한 기원론이다.
2) 바르나제도의 성립
인도에는 왜 카스트 제도가 뚜렷이 발달하여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직업 ㆍ 인종 ㆍ 종교ㆍ 부족제ㆍ 가족 제도등의 갖가지 용인을 총괄하여 카스트 제도가 성립하도록 이끌어간 힘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살펴보려면 가장 먼저 신분체계의 최고 지위인 브라만의 실체와 그들의 주도 하에 생겨난 바르나 제도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유목민이었던 아리아인들이 스스로 작물을 재배할 수 있을 만큼 농업기술을 획득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리아인은 인도 내부로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초의 근거지였던 인더스 강 유역과 펀잡 지방을 떠나 남동쪽으로 진출하여 힌두스탄 평원의 중앙부, 즉 현재의 델리 지방에 정착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갠지스 강을 향해 계속 전진하였고, 이어서 갠지스 강을 따라 남하하여 베나레스(바라나시) 주변에 정착했다. 이 이동은 매우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아리아인이 데칸 고원에 들어가기까지에는 약 600년이나 되는 세월이 흘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갠지스 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아리아인의 사회는 점차 그 구조가 복잡하여 갔다. 사회적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왕이 종교ㆍ 군사ㆍ 정치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기에 벅차게 되었다. 그 결과 아리아인 사회에서는 종료의식이 복잡해짐에 따라 이를 맡을 전문적인 사제인 브라만(Brahmana, 僧侶) 계층이 생겨나게 되었다. 종교의식을 주관하는 브라만은 처음에는 소박한 농업, 목축생활민이 의지하는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갠지스 강 유역에 정착한 기원전 1000년에서 500년 사이에는 베다와 더불어 제사에 필요한 ‘브라마나’도 편찬하였다. 이들 브라만 계층은 왕이 정치적 안정에 주력하는 한편 정복 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베다에 근거를 둔 브라마니즘의 교리를 체계화하고 그 의식을 제정하여 마침내 왕권에 앞서는 소위 브라만 제일(지상)주의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브라만 계급이 사회의 최상층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점유해 가면서 그 사회에서는 내부적인 계급 분화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신에 대한 제사를 맡은 성직자, 즉 브라만(Brahmana)계급을 중심으로 한 브라마니즘이 서서히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부족 간의 전투와 행정조직의 발달에 따라 왕족을 비롯한 정치, 군사의 지도층인 크샤트리아(Ksatriya) 계급이 형성되고, 농경의 발달과 도시의 성장에 따라 바이샤(Vaisya) 계급이 형성되었다. 이들 계급은 피정복민이며 가장 천한 노예 계급인 슈드라(Sudra) 계급과 함께 신분 제도인 바르나 제도(四姓制度)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이 바르나 제도의 성립은 아리아 사회의 내부의 발전을 나타내는 계층의 분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부족제 문제와 더불어 고대 인도를 해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제도는 좁은 의미로는 브라만 계급이 자기의 특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나 다름 없다. 동시에 역사적으로는 이 시대에 여러 군소 부족이 중앙집권화된 왕권으로 집결됐으며, 사이군으로 직업 군인이 생겨났고, 농민과 서민계층은 자기의 생업에만 전념하고, 노동력은 노예계급이 전담하는 사회적 분업이 확립된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바르나 제도는 복잡한 사회조직의 질서와, 지배계급의 특권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일정한 형식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바르나 제도나 오늘날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는 다른 면이 많다. 즉 오늘날의 음식물이나 식사의 방법, 결혼이나 직업에 관한 규제 따위는 이 무렵에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각 계급과 그 멤버의 각자가 분담하는 임무는 완전히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왕은 다른 어떤 귀족보다도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그의 역할은 귀족계급의 일원으로서의 그것을 넘지는 못했다. 그는 신성시 되지도 않았고 사제를 겸한 왕도 아니었다. 그가 행할 수 있는 종교상의 역할은 독자적인 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사제처럼 단지 부족을 위해 공물의식을 집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끊임 없는 아리아인의 이동과 베다 시대가 계속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틀은 점점 변화하여 더 복잡하고 엄격한 것이 되어 갔다.
브라만들은 리그베다에서 볼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의식을 바탕으로 매우 복잡한 제례를 만들어 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만일 제례를 어김 없이 집행하지 않으면 큰 환난을 겪는다는 사상을 강조했다. 제단의 벽돌 한 장이 조금이라도 비어져 나와 있던가, 산 제물로 바쳐진 산양(山羊)이 틀린 장소에 놓여지기만 해도 ‘리타(rta)'라 불리는 우주의 질서가 무너져 이 세상에는 대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제례상의 정확성의 요구는 사제들의 제단 제작기술을 향상시키고 해부학적인 지식을 발달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제의 지위를 높여준 일이었다. 브라만의 지위가 확고해지면서 우주적 질서인 리타는 제례가 바쳐지는 대상인 신들보다도 제례를 정확하게 집행하는 일에 더 크게 좌우된다고 믿게 되었다. 신들은 리타를 수호하는데 지나지 않고,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제례라고 믿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제례를 행할 수 있는 것은 사제뿐이었으므로, 그들은 우주 속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논리를 성립시켰다.
영역국가를 형성한 서사시 시대에는 점차 정치조직이 복잡해짐에 따라 왕에게 전속된 브라만 사제의 세력이 비대해졌다. 그들은 제례의식의 집적과 주문을 독점함으로써 왕의 전승(戰勝)과 치적 조차도 모두 그들이 올리는 의례의 효과이며 영위(靈威)의 결실이라고 주장하여 그 특권을 독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왕은 그의 신성한 권위를 사회적으로 승인받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브라만 사제의 보증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왕 조차도 사제가 이러한 영예를 누리는 데에 협력했다. 그 대신 사제는 왕과 왕국을 종교면에서 지원했다. 때로는 이 지원에 의해 신앙과 권력정치가 교묘하게 결부되었다. ‘아슈바메다(asvamedha, 말의 공희제)’의식은 그 좋은 예이다. 말 제물의식을 위해서는 한 마리의 훌륭한 종마가 신에게 헌납되기 위해 꼬박 1년 동안 방목된다. 이 말이 들어갔던 땅은 모두 의식을 의뢰한 왕의 것이 된다. 말에는 무장한 병사가 따르고 있으므로, 땅을 빼앗긴 다른 왕은 ‘단념하지 않으려면 싸울 수 밖에 없다. 최후로 말은 제자리로 되돌려져 정중한 보살핌을 받은 후 수백 명의 제관이 참가하는 정성들인 제례에서 산 제물이 된다.
바르나 제도를 만들고 유지케 한 것은 분명히 브라만이었다. ‘리그베다’의 말기에 속하는 푸루샤 찬가에 나오는 창조설(인류기원설)이 있다. 여러 신들이 모여서 사람의 조상인 원인(原人, purusa)을 제물로 삼고 제사르 지낼 때 그 원인의 머리로부터 브라만, 양 팔로부터 크샤트리아, 두 다리로부터 바이샤, 두 발로부터 슈드라가 생겨났다고 한다.이것은 계층제도가 틀이 잡혀 간 당시의 아리아인의 사회구조를 반영한 것이다. 이는 브라만이 신들과 동등한 위치의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신분체계의 구조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처음부터 카스트 체계에서 최고 지위를 확보하려고 하는 브라만들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이 브라만의 특수한 지위가 곧 인도와 인도의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브라만은 베다 성전을 연구하고, 신 앞에 희생을 바치고, 조상이나 정령 그리고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승려였다. 그들이 제사나 복잡한 의식을 어김 없이 행하기 위해서는 베다에 정통해야 했으므로 브라만은 승려인 동시에 당시의 천문학ㆍ 역학ㆍ 수학의 연구자이기도 했다.
홍수나 가뭄 그리고 태양의 은혜로움 등과 같은 자연이나 자연 현상을 신으로 숭배하며 오로지 신을 섬기고 신에 기원함으로써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던 고대 인도인은 신비스런 영감으로 신의 뜻을 전하며 천문, 수리, 측량의 지식을 구사하는 브라만에게 인간인 동시에 신이나 다름 없는 절대적인 존경을 보냈다. 당시 인도에서는 왕도 사회적인 권위란 점에서는 브라만의 밑에 있었다. 인도적인 농촌의 씨족제 조직이 확립된 사회에서는 국왕의 세속적인 권력도 종교적인 권위 밑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브라만은 계속 그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종교적인 의식을 다른 계급의 사람들로서는 알 수 없게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결혼의식은 물론 사회의 도덕, 습관, 법률까지도 신의 가르침이라 규정해 놓았다.
브라만들은 자기들의 가계에만 특이한 씨족 영위가 점지되어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유명한 성선(聖仙, rsi)을 가계의 시조로 삼는 관습을 만들었다. 성선 중에 어느 하나를 시조로 삼은 데서 18개의 부계 집단으로 갈라졌다. 이들 부계집단들은 씨족집단과 매우 흡사한 고트라(gotra)라는 씨족집단을 만들었다. 곧 이들 하나하나의 집단이 마치 시족집단과 같은 외혼 그룹을 형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 18의 고트라 중 어느 하나의 성원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같은 브라만 혈통주의가 인도에 있어서의 계급제도를 조장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점성술을 비롯한 지식과 복잡한 의례로 이것을 뒷받침하며 부락의 제사에 참여하여 부족적인 제사를 주관하는 한편, 브라만의 사회적 우위를 전제로 한 종성의 의무를 다르마(達磨)로 정함으로써 인도 사회에 있어서의 각 종성의 사회적 서열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이러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킨 계기가 된 것은 여러 번 거듭된 이민족의 침입과 혼혈로 말미암아 잡다한 부족 카스트와 여러 갈래로 나뉜 직업 카스트의 출현이라 할 수있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 정치적인 지배와 예속관계가 얽혀 이것이 복잡한 인도의 사회를 구성하는 모체가 되었고, 후기 베다 시대(기원전 1000~600년경)에 브라만 계급에 의해 그 질서가 잡히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이 성립된 바르나 제도는 브라만을 최고의 청정(淸淨)으로, 불가촉민을 최저의 부정(不淨)으로 하고 그 사이에 직능과 결부된 배타적인 내혼집단을 배열한 제도이다. 그리고 바르나 제도의 성격은 카스트제도와 공통되는 부분이 많아 카스트 제도 성립의 기본이 되는 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나 제도의 이론은 후기 베다 시대에 이어진 다르마 수트라(Dharma Sutra,法典158)의 성립 시대에 이르러 브라만의 손으로 다시 정리되어 마누법전을 대표로 하는 힌두 법전류의 결집에 의해서 완성을 보았다. 이 기간에 바르나 제도는 아리아계 문화의 전파에 수반하여 인도아 대륙의 거의 전역에 전해지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그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도 사회에서 그 기능이 계속되고 있다.
3) 카스트제도의 발달
브라만에 의해서 이론화되고 크샤트리아가 그를 지지함으로써 성립된 바르나 제도는 말하자면 ‘위에서부터의 카스트와’라고 할 수 있다. 종종 다수의 카스트(jati)는 4개의 바르나가 세분화됨으로써 성립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오늘날의 카스트의 이름과 서브 카스트의 이름의 어원을 살펴보면 민족 ㆍ 부족 ㆍ 씨족 ㆍ 선조의 이름으로부터 나온 것, 지명에서 나온 것, 직업이나 도구 ㆍ 기술 ㆍ 재료 등을 나타내는 말에서 유래하는 것, 종교명 ㆍ 종파명 혹은 풍속 ㆍ 습관을 나타내는 말에서 유래하는 것 등 매우 다양하다. 카스트의 이름이 반드시 그 카스트의 기원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기원을 알 수는 있다. 카스트의 이름으로부터 오늘날의 카스트의 기원이 민족적ㆍ부족적ㆍ지리적ㆍ직업적ㆍ종교적 원인 또한 정복이나 이주ㆍ혼혈ㆍ사회습관의 변화 등 매우 다양하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서사시 시대에는 원주민과의 잡혼을 경계하고 혼혈아를 멸시하면서도 이에 대한 법규를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혼혈이 끊임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원주민인 노예종성이 특히 직업을 통해 평민종성으로 그 지위를 향상시킨 반면, 아리아인으로서 평민종성을 가진 자 가운데 최하급인 농민게층의 생활이 궁핍해짐에 따라 노예종성과 합쳐지려는 경향을 보인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다. 이 경향을 촉진시킨 것이 원주민과의 광범한 혼혈로 인한 잡종성의 발생이란 사실이다.
후기 베다 시대에 바르나 제도가 형성되면서 크샤트리아 계급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왕을 정점으로 하고 촌락 유력자를 경계로 하는 지배층으로서 정치ㆍ군사면에서 백성을 보호하는 책임을 졌다. 왕의 지위 역시 ‘영웅 카리스마’에서 비롯되므로 전쟁에 패하거나 기근을 초래한 경우에는 군주의 주술적 과오 및 태만과 카리스마의 부족에 그 책임이 돌려져 교체 또는 속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이샤 카스트는 고대의 평민으로서, 상급 카스트인 브라만 사제계급과 크샤트리아 전사계급처럼 의례적 ㆍ 경제적 특권은 갖지 못했으나 하급 카스트인 슈드라가 누리지 못한 토지 소유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고전적 문헌에는 바이샤가 주로 농민으로 나타나 있으나, 법전류의 문헌에 의하면 그 외에 상업과 고리대금업이 더 추가되어 있다. 인도에 있어서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농사일에 종사하는 것을 천하게 보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상업이 사회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농민으로서의 바이샤는 오늘날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상업과 대금업이 중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바이샤의 생업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바이샤의 세력은 위축되어 슈드라와의 구별이 모호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유민인 바이샤속에 분열이 생겨 세분된 것이다. 이 때문에 바르나 제도가 발달하여 복잡해졌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는 바이샤와 슈드라라는 단순한 구분 밖에 없었던 하급종성 내부에 분파작용이 일어나 한 직업 또는 몇 종류의 직업에만 종사할 수 있고, 같은 직업을 가진 동료끼리만 족내혼을 하는 새로운 세습의 직업 카스트가 끊임 없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처럼 종성 제도의 내용이 베다 시대와 같이 혈통의 순수성에 비중을 두기보다는 정치 ㆍ 사회 등 실제적인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슈드라 카스트는 크게 두 가지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사회적ㆍ 의례적으로 격이 낮은 슈드라로서 부정(不淨)한 그들로부터는 브라만 계급이 물을 받지 않는다. 이 계층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촌락 수공업자, 즉 토지소유권을 거부당함으로써 현물급여나 임금으로 생활하는 직공 노동자들이 이에 속한다. 또한 이들과 비슷한 계층에는 여러 부족에 흩어져 있는 수공업 중에서도 보통 그 규모가 가장 큰 직장(織匠)카스트가 있다.
또 다른 슈드라 그룹은 격이 그리 낮지 않은 사트 슈드라(淨슈드라)라는 계층이다. 농업 카스트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외에도 수효는 적으나 질적으로 중요한 도시수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슈드라가 이에 속한다. 즉 향수 ㆍ 향료 ㆍ 유류 판매인, 제과업자, 정원사 때로는 도공도 이에 속한다.
이들과 대등하거나 또는 한 단계 상위에 금은 세공업자, 칠기(漆器) 제조업자, 미장이, 목수, 비단레이스 제조공 등의 사치품 수공업자, 또는 도시 수공업자가 있다. 기타 고객의 몸에 손을 대어 직무를 수행하는 몸종과 이발사 등 정(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각종 가복(家僕)들의 슈드라 카스트가 있다. 도시의 발흥과 함께 생긴 이들 수공업자는 촌락에 몸이 매인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들보다 사회적으로 상급 지위에 있게 되었고, 자연히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성(四姓)외에 최하층의 不淨카스트(초뭉밈)가 있다. 오랑캐의 땅을 정복했을 때는 그 곳에 사성제도(四姓制度)를 확립하고, 정복한 오랑캐를 찬달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마누법전’에 기록되어 있다. 동남 지역의 찬달라는 대부분 정복 당시 이 규칙을 적용한 데서 생긴 것이다. 따라서 마누법전에 따르면 오랑캐들은 최하위 카스트에서부터 입신할 수 밖에 없었고, 승급의 방법도 윤회에 의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또한 인도에는 집시의 유사한 특수민이 일찍부터 매우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떠돌아만 다니는 유랑민은 결코 아니었다. 부족의 형태로 도시안팎에 모여 살면서 그들 전래의 특수한 수공업제품을 만들어 마을에서 교역했고 수확기에는 임시로 품팔이꾼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 중 어떤 무리는 원래 산악지대에 거주하던 민도가 낮은 부족이었으나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에 평지로 이주하여 촌락과 도시의 일반민이 종사하지 않는 천한 일이나 종교적으로 부정한 일을 도맡게 된 것이다. 이들 특수 직업을 가진 천민은 일반인과의 통혼도 할 수 없고 식탁에도 동석할 수 없어 의례상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들 특수민을 보통 ‘불가촉천민’이라고 한다.
베다 시대의 초기 단계의 사성제도에서는 신분이 별로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기의 직업상의 위치를 어느 정도 변경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계급제도가 완전히 형성된 이후로 카스트의 직업은 세속된다. 중세사회는 신분제가 매우 잘 발달된 사회이다. 중세에는 신분제가 보다 세분화되고 견고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같은 카스트 안에도 상하의 구별이 생겼다. 사회의 계층 분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각 카스트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같은 카스트 안에서도 여러 가지 신분이 엄격하게 구분되기에 이르렀다. 즉 네 개의 주된 카스트 안에서도 다시 수많은 세분화된 계층인 자티의 분화가 일어났으며, 서로 다른 계층간에는 혼인이 금지되거나 아니면 친교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카스트의 구성원은 다른 카스트에 대해서 고립 ㆍ 배타적이어서 상호간에 혼인을 금하고,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을 금하며, 한자리에서 음식을 드는 것도 금하고 있다. 음식은 카스트 안에서 조리해야 하며, 다른 카스트 사람의 손이 닿아서는 안된다.
마누법전에는 사성(四姓) 가운데 슈드라를 제외한 상위의 3성을 ‘드비자(dwija: 다시 난 사람들이라 하여 재생족이라고 함)’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의 가문에서는 6~7세가 되면 스승인 브라만을 따라서 베다 성전을 배울 의무가 있으며, 그것을 재생(再生)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이 사람들이 우파나야나(upanayana: 일종의 성인식으로성스러운 끈이 수여되며, 이때 받은 성스러운 끈을 평생동안 어깨에 걸치고 살아야 한다)를 통해 다시 재생한 사람이 된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힌두교도는 이 의례에 의해서 정신적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육체적 탄생과 아울러 두 번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육체적 탄생과 아울러 두 번 태어나게 되므로 상위의 3성은 재생족이라 할 수 있지만, 이에 슈드라는 일생족인 것이다. 그러나 재생족이란 실젤는 브라만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베다 말기의 문헌에는 사성 계층 외에 짐승처럼 취급되는 천민이 나온다. 브라만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계급체계에 속하지 못하는 경외(境外)의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오늘날의 인도에는 어느 카스트에도 속하지 못하는, 카스트에서 제외된 천민이 약 2억 가량 된다. 이들 불가촉 천민은 천대를 받으며 비참한 생황을 하고 있다. 다른 카스트들은 그들과의 접촉은 물론 보는 것조차 부정하다고 꺼린다.
4) 바르나와 자티
인도를 방문했던 외국인들은 인도에 특색 있는 사회제도가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기원전 300년경 마우리아 왕조에 그리스의 외교사절로 파탈리푸트라에 왔던 메가스테네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도에는 철인(哲人), 농부(農夫), 목인(牧人), 공인(工人), 상인(商人), 군인(軍人), 감찰관(監察官), 고문관(顧問官) 등의 7종류의 집단이 있다. 인도인들은 모두 이 7개의 집단 가운데 어느 하나에 종사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집단과의 통혼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7세기경에 인도를 여행한 중국의 승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도에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슈드라(淨行, 王種, 商賈, 農人)라고 하는 네 신분이 있는데, 그들은 각각 전혀 별개의 사회집단들이다. 결혼은 각 신분 안에서 또는 그들이 구성하는 집단 내부에서만 행해진다. 사성에 속하지 않는 잡성도 아주 많으며 각각의 종성은 함께 모여 살고 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서남해안에 도착하면서 인도에 온 포르투갈인들은 인도 사회가 결혼에 대해 배타적인 내혼집단(혼인을 그 내부집단에서만 하는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았다. 인도인들은 이 집단이 탄생을 같이 하는 집단이라고 해서 자티(jati)라고 불렀으나 포르투갈인들은 이것을 가지 나라 말로 ‘가문’, ‘혈통’, ‘종족’을 뜻하는 casta(어원은 라틴어의 castus)라고 불렀다. 그 후 인도에 들어온 프랑스인이나 영국인들도 그대로 이 말을 사용하여 오늘날의 ‘카스트(caste)'가 되었다.
처음의 네 가지 계층은 베다 시대의 용어로 ‘빛깔(色) ’을 의미하는 ‘바르나(varna)'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 말은 ’jati'(사회적으로 족내혼을 하는 친족 내지는 길드 집단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는 곧 인도에서 카스트를 가리키는 말이다)라는 말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고대 인도에서는 집단을 구별하는데 ‘빛깔’로 표시했었다.(원래는 아리아인이 인도에 들어 왔을 때, 피부색이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나타내 주었기 때문에 피부색의 차이를 구별하는 관념이라고 한다). 승려는 흰색, 무사들은 빨간색, 평민은 노란색 그리고 노예나 천민은 까만색으로 표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본다면 ‘바르나’라는 말은 계급이라기 보다는 ‘계층들의 집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초기의 신분제도는 사회적인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우선 직업의 동일성 여부에 따라 발생한 사회 계급이 점차 브라만 계층을 정점으로 하는 엄격한 신분제도를 낳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바르나 제도가 확립된 이후에 새로이 ‘신분’, ‘계급’이라는 의미가 첨가되고 혼혈이 진행되어 피부색이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지 않게 된 때에도 이 바르나라는 말은 여전히 신분 ㆍ 계급의 의미로도 사용되게 되었다.
오늘날 ‘카스트’ 라는 말은 사회의 각 층에 개인을 고정시키는 뜻으로 쓰이게 되어, 결과적으로 ‘카스트 제도’라는 말은 사회적ㆍ종교적 구조의 기반이 되는 인도의 독특한 사회제도라는 말로 기술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카스트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인도어로 자티(jati)라고 하는 것이며, 우리가 카스트라고 하여 일괄적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실은 고대에는 바르나라고 부를 따름이었다. 바르나는 색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르나라고 하면 흔히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슈드라 등의 종성(種姓)을 의미하는 고대적 신분제를 의미한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중세에 오게 되면 직업의 세속화와 출세 등이 불가분의 것으로 생각되어, 여기에 출새을 의미하는 ‘자티’가 신분을 의미하게 되었다. 훨씬 더 넓은 범주를 가리키는 바르나보다는 자티라는 말이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더 직접적으로 제시해 주는 개념이다. 바르나로써 구분되는 네 가지 일반 범주를 넘어서서 자티는 비슷한 직종에 종사하며 그 테두리 안에서만 혼인하고 사회적 친분 관계를 유지하는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네 개의 바르나로 구분하는 것은 사회의 신분 구조를 이론적으로 구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지역 사회에서 일상 생활을 하는 데 독자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배타적인 집단을 이름하여 자티라고 하는데 그 수효는 이도 전체에 2000 내지 3000개가 있다고 한다.
자티와 바르나라는 두 개의 사회 구분 사이에는 공통적인 성격(자기 집단 내에서의 결혼ㆍ직업과의 결합, 상하ㆍ귀천의 질서)이 있고 또한 각 자티는 불가촉천민의 자티를 제외하고는 네 가지 바르나 중 어느 하나에 속해 있다. 그 때문에 예전부터 바르나와 자티가 혼동되어 두가지 모두가 카스트로 불려졌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바르나 제도와 자티 제도를 합하여 카스트 제도로 총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가급적이면 바르나 제도와 자티 제도를 구별해서 쓰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는 카스트라는 말은 자티의 의미로 사용했고 바르나에 대해서는 그 호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카스트 제도’라고 할 경우, 그것은 바르나라는 커다란 틀과 그 틀 내외에 존재하는 다수의 자티집단을 포함하는 제도 전체를 의미한다.
5) 카스트제도의 특징
카스트는 발생적으로 보면 ‘부족 카스트’와 ‘직업 카스트’의 둘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러나 계층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청정ㆍ부정 관념에 기초한 관례에 따른 상하의 계층적 위치가 고정되어 있다. 이 외에도 경제적 요인에 의해 상하가 결정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자즈마니 제도라고 하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어떤 것은 민족적인 것을 배경으로 하고 어떤 계층은 본래부터 종교적인 원리에서 발전되었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전문적인 직종이 생겨나고, 또 그들이 집단화하여 최근까지 인도에는 약 2000 내지 3000개의 카스트가 있다고 추정된다. 이들 복잡 다양한 카스트는 각기 성으로 구분되며, 각 카스트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 카스트는 각기 성으로 구분되며, 각 카스트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 카스트에 의해 구속받는다. 그들은 그들이 속한 성의 이름을 듣는 것으로 어느 정도 각각의 사회적 위치나 생활수준 등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서로의 이해가 가능하다.
이처럼 카스트를 ‘부족 카스트’와 ‘직업 카스트’로 반드시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카스트의 역사적 기원이 부족에서 비롯되었든 직업 분화에서 비롯되었든 간에 카스트 제도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된 특색이 있다.
첫째는 카스트의 내혼제이다. 카스트 사회에 있어서는 카스트 내혼제가 항상 본질적인 근본 원칙으로 되어 있다. 내혼에 관한 규제는 카스트마다 다양하며, 원칙적으로 카스트는 외혼집단을 포함하고 있는 내혼집단이다. 즉 카스트의 구성원은 자신과 같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과 결혼할 의무가 있는 것(내혼)과 동시에 같은 카스트 내의 특정한 외혼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카스트 제도의 중요한 특징은 자신의 카스트로부터 이탈하지 않으려고 공통적인 의식을 수행하며, 같은 성을 가진 사람끼리 논함으로써 같은 혈통을 가진 조상을 고집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융통성과 지역에 따른 다양성 때문에 이 카스트 제도를 일정한 틀에 박힌 말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내혼규제에도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스트 상호간은 물론 때에 따라서는 수 백 갈래로 세분되어 있는 서브 카스트의 사이에서도 서로 통혼이 엄금되어 있다. 이미 ‘마누법전’ 등에서도 다른 계층의 카스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는 그 양친 어느 쪽 보다도 낮은 카스트에 편입되며, 어떠한 경우에 해당할지라도 상위의 3성(재생) 카스트에 들 수 없었다. 내혼제 원칙은 순수한 직업 카스트만큼이나 엄격하였으며, 부유한 하위 카스트 구성원이 상위 카스트의 예절과 의무를 본받거나 이들과 통혼한 경우는 카스트 밖으로 추방했다. 카스트로부터 파문을 당하는 것은 지금까지 카스트라는 공동체로부터 받아온 모든 비호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므로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심한 고초와 곤란을 겪어야 한다.
결혼은 카스트 전체를 보호하고 내부의 결합을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결혼은 힌두교에서 가족과 카스트에 대한 사회적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발전에 따라 새로운 직업이 나타나고 그 직업을 중심으로 하나의 사회 계층을 구성하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인도에서는 태어남과 동시에 그 인간의 사회적ㆍ가족적 관계의 모든 생애가 결정되며 그 카스트 내에서 결혼하고 산다. 이처럼 카스트 제도는 엄격한 사회적ㆍ신분적 제약을 갖고 있는 것이며, 내혼을 통해 이를 유지하려고 한다.
둘째는 직업의 세습이다. 혈통과 직업이 굳게 묶여 있어 대장장이의 아들은 대장장이의 직업을 이어야 하고, 구두장이의 아들은 구두장이가 되기 마련이다. 아들이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게 마련이었고, 또 자식은 부친의 직업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직업의 세습은 가족의 독점물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카스트는 여러 고유의 지업과 맺어져 있으며 그 구성원들은 직업을 세습한다. 따라서 카스트의 명칭에는 직업과 관련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상인 카스트인 vaniya는 산스크리트어인 vanij를 어원으로 하는 이름이고, 금세공 카스트인 sonar는 suvarna(금), 유류 카스트인 teli는 taila(식용유), 대장장이 카스트인 rohar는 roha(철), 도기공 카스트인 kumbar는 kumba(도기)를 각각 어원으로 한다.
힌두교에서는 카스트 고유의 직업을 세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는 같은 카스트에 속하는 무리가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많다. 카스트와 직업의 결합은 결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상당히 유연성이 있는 것이다. 특히 근래에 와서 전통적인 경제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카스트와 직업의 결합도 점점 완화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도 공화국 헌법은 원칙적으로 모든 직업을 모든 인도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실제로 상층 카스트가 부유한 하층 카스트의 가정에서 잡일을 돌보아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카스트 고유의 직업을 떠났더라도 카스트 그 자체에서 이탈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출신 카스트에의 소속의식이 아주 강하다.
셋째는 다른 카스트의 성원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는 배타성이다. 그것은 동일 카스트 성원만으로 영위되는 ‘공동생활’과 거기서 볼 수 있는 공찬(供饌: 식사를 함께하는 것)의 의례로 대표된다. 동일 카스트 성원만으로 공동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신분적인 차별대우가 그들의 폐쇄성을 낳아 그것이 카스트 관습으로 전환한 것으로, 인도 주변지역에 오래 전부터 있어 온 ‘타부’의 관념과 그 사회적 관습이 이 제도가 공고화되도록 조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공동생활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이 공찬의 의례이다. 힌두교도들은 식사를 일종의 의례로 여기고 있다. 또한 친족들이나 동료 카스트들이 모여서 회식하는 경우에 이것은 친족의식이나 동료의식을 서로 확인하는 일종의 예식이다. 식사 예법은 카스트에 따라 또는 지방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다른 카스트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일이나 하위 카스트로부터 물이나 음식물을 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힌두교의 식사 규칙은 세세한 점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 내용은 누가 무엇을 공동 식탁에서 먹을 수 있으며, 식사를 누구의 손으로 받아 먹어야 하고(누가 조리하는가), 식사를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하는가 등등이다. 또한 음식의 내용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물을 부어 익힌 음식(kachcha)과 기름이나 버터로 익힌 음식(pakka)과는 구별이 있어, 전자의 경우 규칙이 특히 까다롭다. 이들 규칙은 그 어느 것이나 카스트의 사회적 서열(신분)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브라만이며 브라만이 누구의 손에서 캇차와 팍카를 받아들이며 누구와 함께 음식을 들고 담배를 피우는가에 따라 모든 카스트의 사회적 서열이 결정되는 것이다.
요즈음 식사에 관한 번잡한 규제는 전반적으로 완화되어 가고 있다. 특히 도시의 생활자들 사이에는 이러한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상당수의 도시인들은 쇠고기를 제외한 육식을 하고 있다.
각 카스트의 구성원은 결혼 ㆍ 식사 ㆍ 직업, 그 밖의 독자적인 종료적 ㆍ 사회적 관행으로 서로 맺어져 있다. 그리고 이들 관행을 위반한 무리에 대해서는 카스트 장로회의인 판자야트(panchayat)나 카스트 구성원 집회인 사바(sabha)의 결정에 따라 제재가 가해진다. 제재방법으로는 대개 카스트 밖으로의 추방이다. 일시적인 추방의 경우에는 속죄 행위나 정화의례를 한 뒤에 동일 카스트 내로 복귀할 수 있는데, 영구 추방된 사람은 다른 카스트에서 받아 주는 일도 없으며, 가족도 돌보아 줄 수 없다. 위반사항이라고 해야 대부분 사소한 것이지만, 카스트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카스트의 명예를 지켜 다른 카스트로부터 멸시를 초래하는 일이 없이 다른 카스트와의 상대적 지위를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조그마한 규제를 엄수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불가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낮은 카스트의 조직일수록 또한 지리적으로 한정된 범위의 주민들로 구성된 카스트일수록 결합이 강하고 조직은 튼튼하다.
이와 같이 카스트는 자치적 기능을 가진 배타성이 강한 집단이며 인도인들은 중대한 죄를 짓고 카스트 밖으로 영구히 추방되지 않는 한 일생 동안 자기 카스트를 이탈할 수 없다. 카스트 제도 하에서 개인의 생활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규제되어 있으며 개인의 선택의 자유는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한편 카스트에 속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직업에 종사하는 한 최초의 생활은 보장되었다.
6) 카스트의 분업관계과 상하관계
분업관계: 전통적인 인도 사회는 배타적인 카스트가 경제적 상호 의존관계, 말하자면 분업관계에 의해서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카스트 사이의 분업관계는 도시와 촌락에서 그 양상을 달리 하고 있지만, 인도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촌락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인도의 촌락은 일반적으로 10~30개의 카스트별로 모여 사는데, 가장 좋은 장소는 상층 카스트, 촌락 외곽 지역은 불가촉민 카스트의 거주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촌락에서 카스트간의 분업관계를 조사한 사회학자 와이저(Wiser)는 1936년에 발표한 저서에서, 이 관계를 자지마니(jajimani)제도라고 말하고 있다. 자지마니란 ‘고객’, ‘단골 손님’을 의미하는 자지만(jajiman)의 파생어이며, 단골 손님에 대해 갖고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자지마니 제도란 농민을 주체로 하는 촌락을 예로 들면, 촌락에 사는 직공 카스트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스트 각각에 소속한 가정이 농민 카스트에 속하는 가정이나 다른 카스트에 속하는 가정을 위해서 특정한 일을 세습적으로 해 주고, 그 보수로서 곡물이나 서비스를 전통적으로 정해진 양만큼 제공받는 제도이다. 와이저가 조사한 북인도의 한 마을을 예로 들면 이발 카스트 집안의 가장은 마을의 장로 등 중요한 고객에 대해서는 주 2회, 상위 카스트 고객에겐 주 1회, 그 밖의 고객의 경우엔 적당한 날에 그들에게 가서 면도를 해 주고 손톱을 깎아 준다. 이발은 대개 월 1회 정도로 행해진다. 이 가장의 아내는 고객의 여자가족에게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발사 집안은 고객을 위해서 새로운 소식을 마을 안팎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결혼식에는 중매인 역할을 하며 이러한 봉사에 대해서, 고객들은 일정량의 보수를 지불한다. 고객 집단의 관혼상제 일에는 특별한 수입도 기대할 수 있다. 마을 안에 사는 그 밖의 다른 카스트 구성원도 이발사 집안의 경우와 같이 각각의 카스트 고유의 직업에 종사하고, 그 보수로서 다른 카스트 고객으로부터 현물이나 서비스 제공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이 인도 촌락의 자급자족성에는 한도가 있었으나, 전통적인 촌락사회의 경제관계의 기초는 촌락 내의 고정적 분업관계로서의 자지마니 제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촌락 내에 있어서 카스트끼리의 분업관계는 반드시 대등한 것만은 아니고, 경제적ㆍ정치적 힘을 가진 카스트에 유리하게 구성되어 있다.
자지마니 제도는 대개의 현상을 보면 집과 집 사이의 개별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촌락의 단위를 전제로 해서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현물이나 서비스의 교환관계가 성립되어 화폐의 매개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이 카스트간의 고정적 분업관계에 의해 자급자족적 성격이 강한 촌락의 생산활동이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분업관계는 인도 사회의 근대화와 함께 무너져 가고 있다. 촌락의 주민 중에는 세습되는 직업을 버리고 도시로 나가는 사람도 많아지고, 화폐경제의 침투나 도시 상품이 유입된 결과, 이제까지의 자지마니적인 교환관계에서 이제는 화폐에 의한 보수지불이 요구 되고 있다.
상하관계:촌락은 흔히 10~30개 정도의 카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카스트는 경제적 상호의존관계로서 분업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브라만 카스트를 최상위로 하고 불가촉민 카스트를 최하위로 하는 의례적인 상하관계로 맺어져 있다. 직업의 종류나 식사 ㆍ 결혼 ㆍ 규제 등의 여러 관습이 브라만적인 청정ㆍ부정의 관념에 의해서 종합적으로 평가되어 상하관계가 정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상하관계는 지역차도 다소 있고, 또 직공 카스트와 같은 중간 카스트의 상하관계는 애매한 경우도 많다.
의례적인 의미의 상하관계와 정치적 ㆍ 경제적 의미의 계층 차이는 본래 다른 성격의 것이다. 가령 농경 카스트가 지배적인 촌락에서는, 브라만은 경제적으로 토지를 소유한 농민 중의 유력자에게 종속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상하관계가 애매한 주간층 카스트들간의 상대적인 등급이 경제적ㆍ정치적인 힘의 대소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도 있다.
지역사회 내에서의 카스트의 상하관계는 정치적 ㆍ 경제적 ㆍ사회적인 변화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유동성을 나타내 왔다. 사회적 지위를 올리려는 카스트가 일반적으로 시도하는 방법은, 카스트 구성원 전체가 새로운 관습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브라만적인 견지에서 청정한 정도가 높다고 보여지는 채식, 금주, 과부 재혼의 금지 등의 관습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리고이들 새로운 관습이 전체 구성원에게 강요되어 때로는 높은 카스트의 이름을 차용하려는 경향도 있다. 인도의 사회학자 슈리니바스(M.N.Srinivas)는 이러한 움직임을 힌두교 성전에 있는 브라만 문화의 상징이기도 한 산스크리트어에 연관시켜서 ‘산스크리트화(sanskritization)'라고 부르고 있다.
전통적 사회가 흔들리고 있던 19~20세기에 중위 카스트 사이에서 활발한 산스크리트화의 움지임이 있었다. 그 결과 이들 카스트 사이에서는, 카스트 규제가 오히려 강화되는 현상을 빗기도 하였다. 산스크리트화 경향이 중ㆍ하위 카스트 사이에서 오히려 탈산스크리트화, 즉 서구화(westernization)로의 움직임이 진행되었다.
전통적인 인도 사회는 이처럼 카스트를 횡(상호 의존 관계, 분업 관계)과 종(상하 신분 관계)의 관계로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카스트 사회는 반드시 공정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유동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도라는 커다란 도카니에 용해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본래부터 카스트적 차별을 인정할 이유가 없는 불교도, 자이나교도, 이슬람교도, 시크교도, 기독교도 사이에서도 카스트 제도는 용인되고 있으며, 때로는 이들 자체가 카스트 조직을 갖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인도의 근대화와 함께 이 횡과 종의 관계는 도시의 주산층을 중심으로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다.
7) 카스트를 유지하는 사상
사회계급은 고대 사회에 일반적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인도의 계급제도같이 엄격하고 복잡하며 오래 지속된 제도는 일찍이 없었다. 인도의 계급제도가 그와 같이 엄격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종교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브라만들은 그들의 계급을 신성하고 고귀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카스트의 차별을 엄격히 지키도록 규칙을 만들고, 이는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믿게 하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주로 부정사상과 업 ㆍ 윤회사상이다.
청정ㆍ부정(淸淨ㆍ不淨)사상: 카스트 제도의 근저에는 힌두교의 부정개념이 놓여 있다. 종교의식의 청결성 때문에 브라만 계층은 스스로를 다른 계급과 구별하였던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청정ㆍ부정의 관점에서 분류하고 있다. 각 카스트의 직업과 관습이 브라만적인 관점에서 청정ㆍ부정의 관념으로 평가됨으로써 카스트의 등급이 정해졌다.
배설물과 피, 죽음ㆍ부패에 관한 것은 극히 부정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살생, 피혁가공, 배설물 청소, 세탁 등 이와 관련되는 일에 종사하는 카스트는 부정하게 여겨졌다. 예를 들어 주검이나 인간의 배설물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러한 것과 늘 접촉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 불결한 것이 그에게 부착 ㆍ 고정되어 있으므로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힌두교도는 부정하다고 보여지는 것과 접촉하면 일시적 또는 영구적으로 더러움이 오염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더러움은 직접적인 접촉은 물론 간접적인 접촉에 의해서도 오염된다고 믿고 있다. 그 때문에 피혁업자 따위는 수천 년 이래 모든 촌락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직업인임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다고 여겨졌다. 단지 동석한 것만으로도 그 자리의 공기가 더렵혀지고 음식은 주술적으로 부정을 타게 되므로 마귀를 제거하기 위해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출생 ㆍ 배설 ㆍ 사망 등에 의한 더러움을 피할 수 없으므로 현실에서 생기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화의례가 발달하였다.
각각의 카스트가 그 자체로서 가진 정성(淨性)은 집단적인 것이고 카스트 구성원 모두가 다 같이 일생을 통하여 가지게 도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느 카스트이든 각각 그에 따르는 의례적 정성을 가지는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카스트가 그 구성원에 강제하는 결혼 ㆍ 식사 ㆍ 직업 등에 관한 복잡한 규제도 결국은 자기의 카스트를 부정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각 카스트 공동체는 부정을 피함으로써 다른 카스트와의 의례적 상하관계를 유지하고, 가능한 적성이 높다고 보여지는 새로운 관습을 채택하여 자기의 계급(신분)을 높이려고 노력해 왔다. 상위 카스트가 하위 카스트보다 높은 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하위의 각 카스트가 부정하다고 보여지는 여러 일을 각각 분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상위 카스트는 하위 카스트의 이러한 희생을 바탕으로 스스로 가장 청정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청정ㆍ부정사상은 힌두사회를 카스트로 분할하는 원리가 되는 동시에 카스트의 집합체로 된 힌두사회를 체계있게 만드는 원리가 되고 있다. 결국은 종교적 ㆍ 의례적인 의미를 가진 상하의 신분 질서가 경제적인 분업관계를 뒷받침하고 영속화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도 최근에 와서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업ㆍ윤회사상:기원전 5~6세기에 이르는 브라흐마나 시대에 베다에 규정되어 있는 제례의식의 내용이 완성되고 그들 각 종성의 의무가 결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베다의 권위에 근거를 두고 정해진 의례적인 의무(澾磨)에 각 종성이 복종해야 함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여 브라만의 사회적 우위를 결정짓는데 이용된 것이 윤회와 업의 사상이다. 카스트 제도는 그 형성과정에서 보더라도 인도의 기본적인 종교관념이라 할 수 있는 윤회와 업사상이 카스트 제도를 이론적으로 뒷받침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전생의 행위에 따라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태어날 수 있다는 이러한 사상은 사실상 브라만들이 신분제도에 대한 철학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카스트 제도는 ‘업의 법칙’과 연결되어 불평등한 삶의 현실을 포괄해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하겠다.
윤회와 업의 두 근본원리는 힌두교의에도 유입되어, 카스트의 질서에 복종함으로써 얻어지는 복리를 설명하는 데 다음과 같이 원용되었다. 인간은 영원히 반복되는 삶과 죽음과 재생의 윤회 속에 살고 있으며, 개인은 전생에서의 삶의 응보로써 일정한 종성을 가진 집단에 태어난다. 부정 카스트의 구성원도 종성의 의례에 따라 모범적인 생활을 하면 재생할 때 보다 높은 카스트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생존의 안전을 찾기 위한 동질성의 고수는 다른 계층과의 배타적 관계 속에 더욱 영속적인 상태로 굳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브라마니즘의 윤회설(환생설)은 모든 사람이 영속적으로 네 계급으로 나뉘어 태어난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합리화시킨셈이다.
이와 같이 카스트 제도는 샤회구조에다 업과 윤회라는 관념을 빌어 일종의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슈드라로 태어나는 것은 전생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더 나은 운명을 누릴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한편 브라만의 지위와 특권을 마음껏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전생에서 행한 선행공덕 덕분에 현세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카스트의 계층분화에서는 사회의 기존 가치관에 대해 정신적인 순응의 정도에 비례해서 결정된다고 하는 관념을 볼 수 있다. 카스트 제도가 도덕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해서 정당화됨으로써 사회적으로 야기된 결과가 또 한 가지 있다. 사회의 불평등을 수정하려는 시도나 좀더 폭넓은 사회정의와 보상의 이념을 마련하려는 시도는 부도덕한 행위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스트 사회에서는 전쟁에서 행한 행위에 대해 이승에서 공정한 대가를 치른다고 하는 ‘업의 법칙’을 의심하는 것은 이단 가운데에서도 가장 못된 이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브라만의 권위를 거부하고 베다와 의례를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배척한 불교도는 의례면에서는 어느 카스트에도 속하지 않게 되었고, 또한 교의면에서도 이단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현실적인 면에서 볼 때 이승에서 열심히 착하게 살면 내생에서 그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바로 그 다음 생에서도 틀림 없이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보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위안이 돌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보다 더 낮은 신분으로 태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브라만들이 카스트 제도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업과 윤회 그리고 다르마(達磨)라는 도덕적 관념을 부여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 윤회ㆍ업의 관념은 숙명론적인 사유방법을 낳았다. 과거에 이루어진 행위의 결과로 현재의 상태가 결정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상황을 개선코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무위가 되고 만다. 이러한 업이론은 당시 사회의 괴로운 생활상황에 처한 하층민들의 불만을 교묘하게 설명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우파니샤드 시대 이후에 이러한 생각이 급속히 일반화되었던 사실은 이 사상이 당시의 정신적 요구에 응당하는 것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불교에서는 업의 법칙이 자신의 행실을 통해서 오히려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업의 법칙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의 법칙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카스트 제도는 업의 법칙과 연결되어 불평등한 삶의 현실과 포괄해서 설명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out caste(카스트 外人), untouchables(不可181民), harijan(신의 아들), dalit(억눌린 자) 또는 scheduled caste(지정 카스트)라고 불리는 ‘불가촉민’에 대한 차별이 불법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약 2억의 ‘불가촉민’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예전에 그들의 처지는 정말로 비참한 것이었다. ‘마누법전’에서 지극히 천시해서 집 없는 개와 같이 여긴 찬달라처럼, 불가촉민은 세상에서 가장 경멸스러운 존재로 여겨져 왔다. 그와 접촉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그림자만 밟아도 오염된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지방에서는 불가촉민이 거리를 갈 때면 스스로 큰 소리로 알려야 하도록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오염될 우려가 있는 ‘양민’으로 하여금 미리 피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공공도로와 시장에 나타나는 것이 금지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사원에서는 일정한 거리 안으로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한다. 공동우물에서는 물을 깃지 못하며, 자기 집단의 우물만을 사용해야 한다. 브라만이 다가올 때면 길을 비켜 길 옆으로 숨어야 한다. 불가촉민과 너무 가까운 거리로 지나친 브라만은 목욕 제례하고 성삭(聖索)을 새 것으로 가는 등 일련의 정화를 치룬다. 카스트 외인은 상인의 손에서 직접 물건을 건네 받지 못하고 상인이 그것을 땅에 놓고 멀리 떨어져 갈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던져 주는 것을 받도록 하는 곳도 있다.
상위 카스트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선하는데 보다는 불가촉민을 그토록 학대하는데 훨씬 더 적극적인 것처럼 보인다. 상위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은 이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업의 법칙’을 원용해 설명하려고 한다. 불가촉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그들이 저지른 전생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8) 카스트제도와 인도의 근대화
카스트 제도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통합하는 힘이라 하겠다. 즉 이 제도는 인도사회를 구성하는 각종 집단(직업집단, 종교집단, 부족집단 등)에 각각 독자성과 부분적 역할을 부여하여 이들을 총체적으로 하나의 유기적 사회로 통합하여 온 것이다.
한편 카스트 제도는 인도사회를 고착화ㆍ 무기력화 ㆍ 비능률화시켜 인도인의 보수적 성격을 북돋우고, 기술의 진보와 경제의 발달을 지연시켰다고 지탄받아 왔다. 또 카스트간의 배타적 단결심이 독선주의와 외부인에 대한 불신감 및 차별의식을 기르고, 애국심과 민족적 자각의식을 막았다고 비난받고 있으며, 더욱이 카스트 사회에서는 상위자의 교만성과 하위자의 비굴성이 극단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 인본적인 차원에서 심각하게 지적받고 있다.
그러나 카스트 사회는 결코 고정화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인도아대륙 내부에서의 지역차 및 경제생활의 변화와 정치적ㆍ사회적 원인으로 인한 카스트의 분열과 새로운 카스트의 탄생 그리고 특정 카스트의 지위의 상승 ㆍ 하강 등의 움직임도 종종 나타났다. 또 카스트적 진분제도를 비판하는 종교운동이 일어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국에 가서는 카스트 사회 내부에 약간의 충격을 주었을 뿐 카스트 사회구조와 이를 떠받치고 있는 힌두적 사상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카스트의 유기적 통합으로 이루어진 인도사회는 그 유연성을 바탕으로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힌두교도의 지배자들은 물론이고 이슬람교도와 영국인 지배도 카스트 사회를 허물어뜨리는 방법보다는 그 바탕 위에서 통치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인도에서 신분차별을 반대하고 나왔던 자이나교와 불교는 힌두교의 부활로 완전히 제자리를 잃는 수난을 겪었다. 이 두 종교는 지금가지 힌두교 여러 카스트에 부속되어 있던 사람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여 당시까지의 인습에서 해방시켰다. 그 결과 그들 개종자는 그때까지 소속하고 있던 카스트로부터 추방된, 카스트에 소속되지 않는 유랑인이 되었고, 이윽고 그들은 그대로 일종의 카스트(宗派카스트)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구성원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더욱 세분화 되었다.
상류층인 사제가, 지주, 부유한 상인은 각각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가 되고, 평민은 슈드라가 되어 힌두사회에서의 사회적 ㆍ 경제적 특권을 나누어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시 카스트 질서로 환원하게 된 것이다.
중세에 브라만과 카스트의 질서에 대해 맹렬한 개혁운동을 전개한 링가야트(Lingayata)도 나중에 그 내부에서 전형적인 신분 분화현상이 일어나 카스트 질서에 적응하는 경향을 띠게 되자 영국 통치하에 실시된 인구조사에서 그 소속원을 네 개의 카스트로 나누어 등록해 주도록 유구할 정도였다.
유일신 알아 앞에 모든 신도의 평등을 부르짖는 전형적인 일신교인 이슬람교 조차도 인도에서는 카스트화의 경향에 영향을 받아 이슬람 초기의 신분구성에 결부되어 예언자의 자손과 그 혈연관계자들에게 특권이 주어졌고, 다시 이슬람 사회의 봉건적인 특징에 따라서 지주와 천한 혈통을 가진 농민 사이에 차별이 생겼다. 이러한 차별은 시대와 더불어 변천을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이 인도에서의 이슬람교 특유의 카스트 제도를 낳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카스트 제도와 밀접하게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힌두 사회의 질서 속에 전통적인 지위가 부여되고 경제적인 이익을 누리게 되는 힌두사회의 질서가 가지는 놀랍고도 끈질긴 동화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과 같이 카스트 제도는 힌두사회 조직의 모든 분야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고 그 근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인도 고유의 각종 기술과 재능의 올바른 전승을 돕고 있다. 그리하여 가족생활을 유지하고 동일 카스트에 속하는 성원의 단결을 도모하여 상호부조의 실효를 거두는 것에 이바지하고 있다.
[출처] 인도 사회와 카스트 제도|작성자 평산
'인도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I_(8) (0) | 2021.02.28 |
---|---|
인도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I_(7) (0) | 2021.02.28 |
인도의 종교 (0) | 2021.01.17 |
인도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I_(6) (0) | 2021.01.03 |
인도불교 교단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쇠퇴I_(5) (0) | 2021.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