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潭스님의 한국불교사에서의 위치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청담스님의 ‘마음철학’ 형 성 배경으로서의 원융사상 Ⅱ-1. 원융불교사상의 당위성 Ⅱ-1-1. 대립의 극복으로서의 원융사상 Ⅱ-1-2. 대립과 갈등의 불교사 Ⅱ-2. 원융사상의 한국적 전개 Ⅱ-2-1. 원효의 화쟁(和諍) Ⅱ-2-2. 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 Ⅱ-2-3. 서산의 선교겸수(禪敎兼修) Ⅲ. 원융사상 통섭으로서 청담스님의 마음철학 Ⅲ-1. 청담스님의 마음철학 형성 Ⅲ-2. 청담스님 마음철학의 내용 Ⅲ-2-1. 인간주체로서의 마음 Ⅲ-2-2. 진리로서의 마음 Ⅲ-3. 청담스님 마음철학의 실천 Ⅳ. 맺음말 |
Ⅰ. 들어가는 말
우리는 한국 문화의 기본성격을 조화지향성에서 찾는다. 우리 민족은 자연지리적으로는 대륙성과 해양성의 양면성(兩面性)을 지니고 있고, 역사적으로는 다린성(多隣性)과 고립성(孤立性)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주변성(周邊性)과 중심성(中心性)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 민족문화의 창조적 발달은 이러한 양면성을 생산적으로 조화시킨 데에서 가능했다. 이와 같이 한국문화는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하여 독자적인 완숙한 문화를 창조함에 있어서 가능한 한 여러 세계관과 가치관을 조정 합일시키는 정합적(整合的) 성격을 잃지 않았다. 이러한 조화지향적 성격을 잘 드러낸 대표적인 예(例)는 유·불·선 3교의 기본정신을 융합한 화랑도 정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불교를 받아들인 후 우리문화의 기본 성격인 조화지향성의 사조를 원융(圓融)의 불교로 발전시켰다. 그것은 우리문화의 조화지향적 성격을 불교적인 차원에서 해석하여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를 떠나서 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불교의 영향을 떠나서 한국의 사상과 문화를 생각할 수 없다. 현재도 그렇거니와, 특히 삼국시대와 고려·조선시대에 있어서 불교의 영향 하에서 우리 민족의 생활과 문화는 발달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선조(先祖)들이 남긴 수많은 유적(遺跡)과 예술작품 중에서 갖가지 불교적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여러 가지로 다양한 견해와 이론(異論)을 지양(止揚)하여 하나의 화음(和音)을 형성한 각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들의 철학의 주개념(主槪念)을 알아보고자 한다.
불교는 그 발상지인 인도에서 수백 년이 흐른 후 중국에 전래되어(A.D. 67) 많은 영향을 준 후, 다시 3백여 년이 지나 우리나라 고구려 소수림왕 2년(A.D. 372)에 처음 수용되어 1600여 년 동안이나 정신적 지주가 된 종교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원효(元曉, 617∼686)는 어느 입장에도 치우침이 없이 여러 종파가 주장하는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거기에 편집(偏執, obstinacy)하는 것을 깨우쳐 원융(圓融)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불교를 ‘화쟁(和諍)’불교가 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그 때까지의 외래 종교 사상에 머물렀던 불교를 원효는 비로소 대승적인 한국불교로서 토착화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고려시대에 의천(義天, 1055∼1101)과 더불어 한국불교의 이론적 체계를 완성한 사람은 지눌(知訥, 1158∼1210)이다. 원효와 의천은 외래불교를 순수하게 이해하는 데 그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우리의 고유한 전통 사상으로 융화시킴으로써 우리 민족의 고유(固有)정신을 드높였다. 특히 지눌은 이를 보다 심화시켜 한국불교의 독자성을 정립시키는데 이바지하였다. 원효와 의천이 각기 다른 시대에 있어서 민족적 자각 하에 창의적으로 민족의 이념을 화쟁과 원융의 논리로써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면, 지눌은 그러한 정신을 주체적으로 심화시키고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지눌은 의천의 교관겸수(敎觀兼修)의 이념을 ‘정혜쌍수(定慧雙修)’로써 천명하였고, 선교의 원융합일을 돈오점수(頓悟漸修)로 밝혀 한국불교의 독자적인 입장을 확립함으로써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굳건한 기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서산은 원융불교의 전통에서 그 중흥조로 기억된다. 서산(西山, 1520-1604)은 조선불교에 있어서 선교 일치를 이론적으로 완성시킨 최고의 사상적 봉우리이다. 그는 사상적으로 지눌의 정신을 이어받아 ‘선교의 겸수’를 주장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려들로 조직된 의용군 5천을 거느리고 묘향산으로부터 남하하여 평양·개성의 전투에서 왜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이처럼 서산대사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여 의용군을 조직하여 국방에 투신한 예는 인도나 중국 등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특유의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은 한국불교의 호국사상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종교적 행동과 윤리적 행동은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섭중생계(攝衆生戒)를 가지고 이타행으로 호국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불교는 그 시대에 따라서 그 사상의 내용을 약간씩 달리하면서 그 시대의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주어 왔다. 우리민족 사상과 문화의 원류를 이루었던 불교는 조선조 500여년의 오랜 박해와 억불(抑佛)에서도 서릿발 같은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이 살아 숨 쉬는 청정승가(淸淨僧伽)의 전통이 이어 왔었다. 그러나 한일합방(1910) 이후 일제(日帝)의 왜색불교에 의해 정법(正法, saddharma)은 왜곡되어 말법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정법을 세우는 것은 대승보살의 본원(本願)이라고 자각한 청담대종사는 27세(1928년)시 정화의 횃불을 들고 청정한 조계가풍(曹溪家風)을 세우는데(1928∼1962) 주도적 역할을 한 명안종사(明眼宗師)였다. 또 스님은 통합종단을 이룩한 후(1962)부터 입적 시(1971)까지 말법불교·산중불교에서 정법불교·대중불교로 구도화·보편화하는 운동에 선도적인 보살행을 실천한 불교계의 최고지도자였다.
청담스님의 발자취는 지난날(1928∼1971) 한국불교의 역사이다. 청담스님은 마음철학을 통해서 그 시대의 문제를 회통(會通)하면서 1600여 년 한국불교 전통의 법등(法燈)을 지켜 새로운 정법불교의 좌표를 정립한 칸트(Kant, 1720∼1804)적 인욕보살이었다.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사 위치에서 볼 때에 하나의 큰 바다에 비유될 수 있다. 그 이전의 선(禪)과 교(敎)가 그에게 흘러들어 갔고 그 이후의 모든 선교원융의 보살사상이 그로부터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청담스님은 당대 한국불교를 대표한다. 한국불교의 이상, 한국불교의 고민, 한국불교의 비극, 한국불교의 위대성이 청담스님의 사상과 생활 속에 구현되어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원용사상이 어디에서 유래되어 선조(先祖)의 원융사상이 어떻게 전개되고, 그것이 청담스님에게 흘러들어가 어떻게 그의 방식으로 채색(彩色)되고 구상되었는지, 그러한 그의 ‘마음철학’이 무엇이고, 그의 이념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내용을 탐구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논자는 한국불교사 위에서 그의 위상을 재정립해 보고자 한다.
Ⅱ. 청담스님의 ‘마음철학’ 형성배경으로서의 원융사상
Ⅱ-1. 원융불교사상의 당위성
Ⅱ-1-1. 대립의 극복으로서의 원융사상
‘원융(bhūtātattatā; perfect harmony among all differences)'이란 말은 불교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원(圓)’은 모자람이 없이 원만한 뜻. ‘융(融)’은 융통·융화의 뜻. 차별상을 인정하지 않고, 무애(無礙)한 것. 불교에서 사사물물(事事物物)의 차별적 현상의 실재(實在)를 인식하는 것과, 사물의 본성에 소급(遡及)하여 평등상을 인정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평등상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事)는 이치에서 생긴 것이므로, 이치를 여의고 사가 없어 한결같이 평등하여 이와 사가 걸림이 없다. 평등계에서 나타난 차별적 현상계의 사물도 서로서로 무애원융하다고 말하는 것이 ?화엄경?에서의 요지이다.”
위의 개념정의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원융적 사고방식은 일체의 여러 법의 사리(事理)가 구별 없이 널리 융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사고이다. 원융적 사고방식은 모호한 절충주의(折衷主義, syncretism)와는 다르다. 원융사고방식과 절충주의의 사이에 그 차이를 특징 지우는 것은 ‘일즉일체, 일체즉일(一卽一切, 一切卽一)’의 정신이다. ‘하나의 마음(一心)’이 사실은 하나라고 불려지지만 그 물질적 단편과 같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그 하나 안에서 모든 것이 다 그 존재 의미를 찾고 그 가치를 지니게끔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 것은 사상이나 교리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획일적인 방향에서 하나의 절대를 지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가운데에서 화합하여 하나로 되게 하는 것, 즉 여러 가지 소리를 가진 부분으로 이루어진 합창단의 각 부분의 소리를 살려가면서 하나의 화음(和音)을 이루는 예와 같다.
그런 의미에서 원융적 사고방식은 고대 인도의 철인들의 사유에서 나타났다. 인도인들은 고래(古來)로 여러 가지 다양한 개별 현상은 모두가 유일한 절대자의 현현(顯現)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인도철학에서 형이상학의 주류는 일원론이었다. 형이상학적 일원론적 입장에서 모든 개별적 특수상(特殊相)을 관조(觀照)하게 되면 현현되는 현실 차별은 크게 문제시 되지 않는다. 인도에서 불교 경전보다 훨씬 오랜 옛날 B.C. 1000년경에 작성된 ?리그웨다(Ṛg-Veda)?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하나의 실제를 철인(哲人)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이 구절에서 실제(sat)는 단수로 그리고 철인(viprā)은 복수로 나타났다. 철인으로 번역되는 원어(viprā)는 성인(聖人)·현자(賢者)·지자(智者) 등, 어떤 이치를 통달하고 오득(悟得)한 인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최고의 이치를 오득한 현자·지자·철인들은 각기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르게’ 오득의 경지를 말씀으로 표현하지만, 그 여러 가지 말씀은 결국 ‘하나의 진리’를 말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말씀은 ‘하나’를 가리키는 지표로 끝난다. 그 후 초기 우빠니샤드(B.C., 700∼500)시대에 와서는 모든 지류(支流, tributary)의 흐름이 마침내는 큰 바다에 이른다고 설하고 있다. 또 중기 우빠니샤드(B.C. 350∼300)인 문다까 우빠니샤드에는 모든 것(法)은 하나로 돌아간다(歸一)는 생각으로 발전하였다. 위에서 차이보다는 동일을 추구하려는 경향은 인도의 고대 성전에서 이미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B.C. 6세기 경 부처님의 시대에는 많은 신흥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각기 상반된 학설을 주장하면서 논쟁을 일삼고 있었다. 극단적인 쾌락주의를 주장하는 짜르와까(Cārvāka)가 있었으며, 극단적인 금욕적인 고행주의를 강조하는 자이나교(Jainism)도 있었다. 불교 경전에서는 62종의 학설이 논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육사외도(六師外道)라 하여 불교 이외의 여섯 사상가의 학설이 주목되어진다. 당시 이같은 지적 불확정 시대에 가장 철저한 반성을 한 신흥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 불교의 교조 부처님이었다.
부처님은 당시의 우빠니샤드의 상주론(常住論, śāśvatavāda)적 인간관이나 짜르와까의 단멸론(斷滅論 , ucchedavāda)적 유물론적인 인간관, 또는 운명(niyati)에 의한 결정론이나 우연에 의한 무결정론을 모두 배척하고 연기설(pratītyasamutpāda)에 입각한 인간관을 설한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관을 중시하여 설하시기를 “연기를 본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본 자는 연기를 본다”고 교시한 것이다.
부처님은 당시의 사상가들이 자설의 절대성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 눈먼 소경들이 코끼리를 만진 다음 그들 각자에게 코끼리를 만져본 소감을 말해 보도록 했다는 고사를 비유적으로 인용해 보였다고 한다. 부처님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yathābhūta-artha-darśana) 고정적인 견해를 초월한 입장인 중도에서 보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중도(majjhimā paṭipadā)의 내용은 팔정도(ariyo aṭṭhaṅgiko maggo)이다. 부처님은 중도적인 입장에서 선입견이나 편견을 초월해 있었던 사실은 부처님이 사성(四姓)의 평등을 제창한 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부처님은 모든 논쟁을 초극(超克)한 중도의 경지에서 ‘내심(內心)의 적정(寂靜)’을 찾으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러한 중도관은 부처님의 실천의 근본을 나타냄과 동시에 초기 대승불교에 이르러 연기, 공과 함게 중요한 교설이 되었다. 우리가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겪는 모든 문제와 고통은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진리를 알고 우주와 인생의 실상을 앎으로써 가능하다고 ?금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고 있다.
모든 형상은 다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형상을 보되 인연의 법칙에 의해 잠시 머무는 것(假相)으로 참된 실상(實相)이 아닌 것으로 직관한다면 곧 진리를 보고 여래(如來)를 본다.
청담스님께서는 이 사구게가 ?금강경?의 핵심은 물론 반야 6백부 전체의 뜻을 유감없이 표현했다는 뜻에서 ‘반야제일게(般若第一偈)’라고 해석하셨다. 이 사구게는 공(śūnya)이라는 술어를 쓰지 않으면서 ‘즉비(卽非)의 논리’로 공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게(偈)가 나타내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화합에 의한 것이므로 영원한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相, lakṣaṇa)이 영원한 실체가 아님(非相, 無我)을 깨달으면(空), 그 즉시 바로 부처님이 된다(妙有)는 것이다. 이 사구게의 가르침은 초기불교의 무아관을 계승하여 모든 대립과 갈등을 초월하는 원융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강경?의 공(空, śūnya)의 이론은 무분별·무집착의 반야바라밀을 내세워 분열과 집착의 문제점을 해결코자 하였다.
?화엄경?은 사법계설(四法界說)을 전하는데 그 중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본체와 현상이 서로 어우러져서 걸림이 없듯이 현상과 현상이 서로 상즉하여 걸림이 없는 것을 설하고 있다. 일체의 현상이 모두 본체계에 상즉하는 것이라면 그 현상들끼리도 또한 서로 상즉할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예를 들어 모든 파도가 물이라는 체성을 여의지 않는다면 파도와 파도 역시 서로 걸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낱낱의 차별적인 현상들은 모두 본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므로 한 티끌 안에도 전 우주가 담겨 있고, 하나의 사물 안에도 모든 법계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가 곧 일체(一卽一切)이고, 일체가 곧 하나(一切卽一)여서 공간적으로는 하나와 전체가 서로 상용하고 시간적으로는 십세(十世)가 서로 상즉하며, 원융하여 걸림이 없고(圓融無碍), 아무리 거듭하여도 다함이 없다(重重無盡). 이것이 바로 연기론의 극치인 법계연기론이다. 신라시대의 의상(義湘, A.D. 625∼702)스님은 그의 ?법성게?에서 법계연기론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하나 안에 일체(一切)가 있고, 다(多) 안에 하나(一)가 있어, 하나가 곧 일체이고 다(多)가 곧 하나이다.
여기서 ‘하나’라는 말은 획일주의, 전체주의적인 의미의 하나가 아니라 불이(不二, advaita)즉 두 가지 것들의 대립 없이 두 가지, 세 가지, 여러 가지 것들이 상호 마찰 없이 원만한 융화의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사사(事事)가 무애하고 원융하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유마경?이 대승의 이상을 소승에 대립시켜 논하고 있는 반면에, ?법화경?은 이러한 대립적 견해를 초월하여 불타(佛陀)의 여러 교설들은 결국 모든 중생의 교화를 위한 방편(upāya)에 지나지 않고 성문(śrāvaka), 연각(pratyekabuddha), 보살(Bodhisattva)의 3승(三乘)은 결국 일승(一乘, ekayāna)에 귀결한다(會三歸一)는 대승불교의 포용적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대승들이 소승이라고 멸시하던 대상을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융화한 것이다.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 A.D.)는 ?중론?의 귀경서(歸敬序)에서 “불생(不生)·불멸(不滅)·불상부단(不常不斷)·불일불이(不一不異)·불래불거(不來不去)로써 능히 모든 희론을 적멸시키는 길상한 연기를 설하셨고, 모든 설법자 중 가장 훌륭한 정각자에게 경배드린다”고 하면서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연기’로 해명하는 것을 ?중론?의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용수가 초기불교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연기를 ‘불생불멸’ 등의 ‘팔부중도(八不中道)’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십이연기’에 입각한 초기불교의 입장을 새롭게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중론?의 ‘팔부중도’는 초기불교의 전통을 잇는 것이지만, 그 바탕에는 ‘공’ 사상이 있다는 점에서 ?반야경?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겠다. 공(śūnya)의 입장에서는 유라든가 무라든가 하는 형태로 파악되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시간적 존재자의 진실된 모습인 것이다. ?중론?에서는 ‘제법의 실상’은 나와 너, 선과 악, 고와 락 등의 대립과 상대적 가치가 없어진 세계, 즉 공의 세계라고 한다. 이상의 인도불교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단(異端)을 파문(破門)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도리어 저변에는 이단까지 포섭하는 ‘원융’의 흐름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이상은 인도철학사의 고대철학의 아드와이따(advaita)전통에서 본 대립을 극복하자는 원융의 이론이다. 그러나 시대마다 사안이 다르므로 ‘원융’이라는 일관된 표현으로 쓰여지지는 않았지만 중도(中道)라거나 공(空)이라거나 원융(圓融)이라거나 일승(一乘)이라거나 일여(一如)라는 등등의 용어를 빌어서 대립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2천 5백여 년의 불교사는 다름 아닌 대립의 극복으로서의 원융사상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Ⅱ-1-2. 대립과 갈등의 불교사
불교사에서 원융불교사상이 왜 당위성이 요청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심각하게 원융하지 못했던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이 원융사상이 갖는 불교사적 의의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자비를 주장하는 종교이다. 그 자비는 불타(佛陀)의 연민에서 나온 것으로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상해(傷害)나 살생(殺生)을 금한 것이다. 불교에서 살생을 금하는 것은 인과응보의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설(說)과도 교리적으로 관련이 있다. 윤회전생의 설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그 ‘업(業)’에 따라서 모든 생명체들 사이는 전전하여 전생(轉生)하는 것이므로 사람이나 동물이나 서로 연결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동일한 생명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은 하찮은 짐승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나 더구나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모두 악업을 짓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의 살생금기(殺生禁忌)의 윤리는 바로 이 자비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불교는 자비를 실천하는 종교라서 다른 종교와 대립하거나 투쟁한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 인도불교불교사에 있어서 슝가(Śuṅga)왕조(183∼71B.C.)를 비롯한 다른 종교의 억압에도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교단사적으로는 경설의 취의(趣意)와는 다르게 현실의 불교사는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불교의 본분을 떠난 이권을 위한 파벌의 조짐으로까지 나타났다. 불교사에서 최초의 분열과 대립은 불멸(佛滅) 100년 경에 원시교단에 ‘10사(十事)’의 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의 공식적인 교단분열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표방하는 보수파의 장로들을 중심으로 한 상좌부(上座部, Sthaviravāda)와 교리와 승단의 규율에 있어서 신축성을 허용하는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 Mahāsāṁghika)와의 분열이었다. 이것을 인도불교사에서는 근본이부(根本二部)의 분열이라고 한다. 이들은 일불(一佛)의 같은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십사’를 둘러싼 계율해석을 위하여 와이샬리(Vaisālī)에서 모인 제2차 결집 때 양극화되어 B.C. 1세기까지 내려오면서 지말(枝末) 18부라는 부파를 파생시켰다.
승가(僧伽, saṁgha)의 생활이 점차 조직화되고 안정된 경제적인 기반을 갖춤에 따라 출가승들은 재가신도들의 삶과 종교적인 관심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사원(寺院)에 안주하며 명상과 열반의 적정(寂靜)만을 추구하는 고답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한편 재가신도들은 그들에게 물질적 보시(dāna)를 하고 세속적인 공덕(puṇya)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것이다. 더욱이 사원의 안정된 생활을 기반으로 하여 발달된 교학적(abhidharma) 불교는 한가롭게 번거로운 이론적 논의를 일삼게 됨에 재가자들의 종교적 필요와 욕구로부터 점점 더 유리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교단적 상황에 대한 재가자들의 각성에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대승불교 운동자들은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는 이타행을 강조하는 행동주의적인 불교를 제창하고 나왔다. 이러한 대승의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보살의 개념이다. ?금강경?의 「대승정종분」에서는 보살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셨다. 모든 보살마하살(Bodhisattvamahāsattva)은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을지니라. 있는 바 일체의 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卵生), 어미 태 안에서 태어난 것(胎生), 습기로 태어난 것(濕生), 자체가 없으며 의탁한 데 없이 홀연히 생겨난 것(化生), 욕계와 색계에 사는 형상이 있는 것(有色), 순 정신적 존재인 세계의 형상이 없는 것(無色), 생각이 있는 것(有想), 생각이 없는 것(無想),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非有想非無想), 이것들을 내가 무여열반(無餘涅槃, anupadhiśeṣa- nirvāṇa)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였으나 실로 멸도(滅度)를 얻는 중생이 없느니라.
어떤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과 인상(人相)과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 있다고 한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대승의 이상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보살(菩薩, Bodhisattva)의 개념이다. 대승의 이상주의적 핵심은 인간상의 초점을 아라한에서 보살로 옮긴 점에 있다. 보살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근본적 차이를 보여주는 근거였다. 부파불교시대를 거쳐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혁신불교로서 나타난 대승불교운동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보살(菩薩, Bodhisattva)을 제시하고, 부파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아라한(阿羅漢, Arhat)을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폄하하였다. 부파불교에서 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은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위였고 범부중생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경지였다. 하지만 대승불교지도자들은 이러한 보살의 이상을 보편화하여 누구든지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를 ‘깨달음(bodhi, 菩提)을 얻고자 하는 사람(sattva, 薩埵)’이란 뜻으로 ‘보살(菩薩, bodhi-sattva, 菩提薩埵)’이라 칭했다.『금강경』에서는 보살을 단순히 보살이라고만 하지 않고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Bodhisattva-mahāsattva)이라 하여 구별하였다. 『금강경』에서는 보살,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는 자리(自利)의 완성을 향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것은 성문(聲聞, Śravaka)이나 연각(緣覺, Pratyekabuddha)도 가능하므로 이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타(利他)에 대한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위의 예문(주 26)에서와 같이 ‘보살마하살’로 표현한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일체의 중생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는 자비의 원력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 있다. 『금강경』의 보살마하살은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중생, 즉 구류중생(九類衆生)들을 제도한다고 하는 이타행을 강조하는 실천주의적 불교를 제창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깨달음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회향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일체제법의 공관에서 보면 제도하는 자와 제도받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위의 인용문(주 27)에서 설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소승 중에서도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라는 부파(部派)가 주장한 ‘아공법유(我空法有)’의 주장을 바로 잡으려는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또 위의 예문(주 28)에서는 아상(ātman-saṃjnā)·인상(pudgala-saṃjnā) ·중생상(sattva-saṃjnā)·수자상(jiva-saṃjnā), 즉 사상(四相)의 부정이 보살(Bodhisattva)이라는 대승의 종지를 설하고 있다.『금강경』은 사상 을 부정하는 ‘무상(無相)’을 설함으로써 초기 불교의 무아관을 새롭게 해석하였다(第十七 究意無我分). 다시 말해 ‘무상’의 실천은 초기불교의 무아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승불교운동은 ‘석존의 불교’라는 원래의 관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무상의 실천은 반야의 지혜를 현현시키므로 위의 예문에서 ‘멸도(滅度)의 행위를 부정하는’인식론적 근거가 된다(第八 依法出生分). 이 四相의 부정은 당대의 인도 모든 사상, 즉 정통파나 비정통파의 모든 사견(mithyā dṛṣṭi)을 타파하여 회통한 새로운 보살승(Bodhisattva-yāna)운동의 진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대승정신은 보살정신이요, 보살정신이 바로 반야사상이며, 반야사상은 바로 사상(四相)의 부정이라고 볼 수 있다. 『금강경』은 대승운동의 일환으로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nāpāramitā)’을 최초로 명쾌하게 설하고 있다. 제법이 공함을 깨닫는 것이 반야, 즉 지혜이며, 보살의 인식이다.
대승불교의 운동자들은 부파불교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기존의 부파불교를 소승(小乘)이라고 폄하하면서, 스스로는 대승(大乘)임을 표방하였다. 이에 의한 대·소승의 양극화된 대립은 심각한 분열로 이어졌다. 이러한 대·소승의 대립은 치열한 공방이 계속 되어, 물리적 행동도 나타났다.
사상적으로는 기존의 부파불교를 소승이라 폄칭하고, 그들은 ‘소승법에 만족해 하는 근기가 둔한 사람들로 상(相)에 집착하고 교만하여 일승법(一乘法)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대승에 미치지 못하는 낮은 단계로 규정했다. “혹 어려운 질문을 받더라도 소승의 법으로 대답하지 말고, 오직 대승의 법으로써 해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체의 종지를 얻게 하여라”고 설하고 있다. 대승은 성문의 가르침을 술찌꺼기와 같은 존재들이라고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불교는 양한(兩漢)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이후 송대(宋代)에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그 사이에 불교가 번영했던 시대는 동진(東晋)·남북조(南北朝)·수당시대(隋唐時代)의 약 600여 년간이다. 이 기간에 중국불교는 학파의 성립에서부터 종파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겪었다. 그래서 중국불교의 특징은 종파불교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불교종파 중에서 수당시대의 천태종(天台宗), 삼론종(三論宗), 법상유식종(法相唯識宗), 화엄종(華嚴宗), 선종(禪宗)이 철학적 색채를 가장 풍부하게 띠고 있는 종파이다. 이 중에서도 천태종, 화엄종, 선종이 가장 창조적인 종파이며, 중국화된 불교 종파이다. 이 세 종파의 불교철학은 이미 중국 전통의 철학사상과 다르고, 또 인도불교의 철학사상과도 다르다. 이것은 인도불교의 사상을 흡수하고 중국 전통사상을 참작하여 소화·융합을 거쳐서 성립된 새로운 철학이론이다. 이 세 종파의 철학사상이 곧 중국 불교철학사상의 주체이다.
그러나 이 종파간의 대립도 심각했다. 종파마다 그들 나름대로의 교판(敎判)을 통해서 자기 종파의 소의경전이 최고 경전임을 주장하였다. ‘교판’이란 불교의 여러 불전과 각 파들을 통일적으로 배치한 것인데 이를 통해서 자신들의 종파의 소의경전을 부각시키고 자신들의 종파의 지위를 가장 높은 곳에 두었다.
선종은 스스로를 ‘전불심인(傳佛心印)’이라 하고 중생심성의 본원(佛性)을 깨닫는 것을 주지(主旨)로 삼은 중국화한 불교종파이다. 그 전법의 계보는 달마(達摩, ?∼528), 혜가(慧可, 487∼593), 승찬(僧璨, ?∼606), 도신(道信, 580∼651), 홍인(弘忍, 602∼675), 홍인의 제자 신수(神秀, 606∼706)와 혜능(慧能, 638∼713)이다.
신수는 점오(漸悟)를 주장하고, 혜능은 돈오(頓悟)를 주장했으며 각각 남방과 북방에서 홍법하여 ‘남돈(南頓)’, ‘북점(北漸)’의 양 파를 형성하였으므로 역사에서는 ‘남북선종(南北禪宗)’ 또는 ‘남북종(南北宗)’이라 한다. 후에 혜능의 남종이 북종을 대신하여 중국 선종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래서 혜능을 선종의 실제 창시자라고 한다.
혜능의 법을 이어 받은 제자 중에 남악 혜양(南嶽懷讓, 677∼744)과 청원행사(靑原行思, ?∼740) 두 계통이 당말(唐末)까지 번성했다. 당말 오대 기간에 남악은 또 위앙(潙仰)과 임제(臨濟, ?∼867) 두 종파로 나뉘었고, 청원은 조동(曹洞, 807∼869), 운문(雲門, ?∼949), 법안(法眼, 885∼958) 3종으로 나뉘어서 모두 선종5가, 또는 5종이라고 불린다. 혜능의 선종은 중국불교 중 번성기간이 가장 오래고, 영향력도 가장 큰 종파이다. 혜능의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여 신수의 북종을 포함한 교종의 가르침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票月指) 정도로 낮추었다.
선종은 그 후 서로 종지를 달리하여 북송 때 임제종의 초원(楚圓) 문하에 혜남(慧南, 1002∼69)과 방회(方會, 996∼1046)가 각각 강서(江西)에서 황룡(黃龍)과 양기(楊岐) 두 파를 개창하였다. 그래서 원래의 임제종 등의 5가와 합하여 ‘7종’이라고 부른다. 남송에 이르러 황룡파는 점점 쇠락하고 양기파가 임제종의 정통을 이루었다. 양기파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8∼1163)는 '간화선(看話禪)'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앞선 조사들이 시비, 미오(迷悟)를 판단하던 언론(公案) 중의 몇 어구를 가지고 ‘화두(話頭)’를 삼아 내성식(內省式)의 참구를 진행하는 것인데, 아주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선종의 대립은 종지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적 이권과 야합하여 치열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이 같은 대립양상은 한국불교에서도 일찍부터 나타났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원효의 십문화쟁(十門和諍)은 십문상쟁(十門相諍)의 극복으로서의 원융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라 중기에서부터 중국의 선풍(禪風)이 도입(A.D. 822)되어 화엄과의 대립은 상대를 마설(魔說)이라고까지 혹독하게 비판했다. 고려의 의천(1055∼1101)은 선과 교의 대립을 비판하면서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하였다. 지눌(1158∼1210)은 의천의 교관겸수의 염원을 정혜쌍수론(定慧雙修論)으로 천명하여 한국불교의 사상적 특성을 이론적으로 정립시켜 한층 승화시켰다. 이런 주장을 한 것으로 보아 선교의 대립구도가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5교9산의 파벌은 고려후기 불교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논증이다.
이렇듯 화합과 평화를 지향해야 하는 불교교단사의 내부는 치열한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연유로 원융사상은 줄기차게 탐구되었고, 원융사상이 가지는 가치를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면 한국불교사에서 원융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어 청담스님에게 흘러들어가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알아보자.
Ⅱ-2. 원융사상의 한국적 전개
Ⅱ-2-1. 원효의 화쟁(和諍)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669) 문무왕대 부터 국내외에서 신라의 스님들은 교학연구가 매우 활발하였다. 그들은 당(唐)의 영향으로 뭇 종파를 연구하거나 또는 그 제도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어도 당시의 중국처럼 어느 한 분파(分派)와 일가(一家)에 치우쳐 개종(開宗)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만법(萬法)이 귀일(歸一)하는 총화불교(總和佛敎)로서 일승불교(一乘佛敎)를 지향한 그들의 학풍이 삼국통일의 정신이었으니,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천성적으로 지닌 조화원융의 정신적 재질이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원융의 정신을 한국의 불교를 정리하여 사상적으로 토착화(土着化)시킨 이론을 정립한 것이 원효(617∼686)의 화쟁이다.
원효는 의상(義湘, 625-702)과 더불어 요동(遼東)을 거쳐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려고 하다가 해골물을 마시고 주관적 인식이 객관을 변형시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음이 생한 즉 갖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없어진 즉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 그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관념적 지혜를 실천적으로 터득하고 시공을 넘어선 인간의 보편성(一心)을 발견하고 신라로 되돌아와 ‘일심(一心)’의 인식틀을 제창하였다. 그는 ‘일심’을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가? ‘일심’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마음’이다. 그 ‘하나’란 무슨 뜻이며 ‘마음’이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에 대해 원효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모든 사물과 관념의 맑음과 흐림을 가리지만 그 본성은 둘이 아니고, 또 참됨과 거짓됨의 두 문(門)을 세우지만, 진(眞), 망(妄), 염(染), 정(淨) 등이 따로 별개의 것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라고 한다. 이원적, 다원적이 아닌 이 하나인 자리에 제사물(諸事物)과 관념은 그 근거를 가지며 알찬 것이 되는 것이니, 이 ‘무이(無二)’의 자리는 허공과 같지 아니하여 자연히 모든 것을 신비롭게 환히 아는 것을 그 본성으로 하는 까닭에 이를 칭해 마음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둘이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일심’인들 있을 수 있으랴? 하나란 누구의 것도 아니란 말이다. 어찌 마음을 누구의 것이라고 하랴? 이러한 마음의 도리는 언설과 사려를 떠난 것이므로 무엇이라고 칭할 바를 몰라 구태여 ‘일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을 통하여 ‘하나의 마음’은 ‘무소유’며 ‘도리(道理)’이며, ‘이언절려(離言絶慮)’의 경지로 밝혀졌다. 즉 ‘일심’은 그 자체가 언설을 초월한 ‘무소유’ ․ ‘이언절려’의 정신이며 이는 인간의 모든 의식활동의 원천이 되고 또 그 의식활동은 선(善), 불선(不善)의 두 가지 경향으로 이상화(理想化)하지만 이 활동은 조금도 ‘일심’의 바탕을 떠날 수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을 더 보완해 주는 구절에 원효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붓다는 실로 중다(衆多)한 음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소리란 소리는 모두 그가 돌리는 진리의 수레의 소리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이 없다. 다만 이 붓다의 육성은 장애가 없이 자유로운 것이어서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인 것이다. 일체가 곧 하나인 까닭에 일음이라 하고 하나가 곧 일체인 까닭에 이를 원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인용문을 통해서 앞에서 보아온 ‘하나의 마음(一心)’의 ‘하나’의 뜻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알게 하는 자료가 된다. 그런데 그 ‘하나(一)’는 곧 ‘일체(一切)’며 그 ‘일체’가 곧 하나라고 한다. 이 때 이 ‘하나’의 뜻은 초험적인 보편성을 떠난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그 초험적인 보편성을 원효는 기신론과 그 밖에 대승불교의 일반적 견해를 원용하여 다음과 같은 상징적 용어로 표현한다.
① 대지혜의 광명(大智慧光明)
② 온 세상 만물을 남김 없이 비추는 것(徧照法界)
③ 있는 그대로 아는 것(眞實識知)
④ 그 본성이 맑고 깨끗한 것(自性淸淨)
⑤ 시원하고 서늘한 것(淸凉)
⑥ 변함없는 것(不變)
⑦ 스스로 존재하는 것(自在)
이것은 一心的 모습을 말한 것이다. 소승부파불교에서 열반을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요해된 것에 익숙한 불교이해자들에게는 실로 파격적인 언명(言明)이 아닐 수 없다. 원효의 ‘일심’은 바로 소승의 열반을, 보다 깊이 통찰한 결과로 얻어진 표현이며, 그것은 체(体)·상(相)·용(用) 삼대의 논리, 즉 모든 것을 이 세 가지 면에서 보는 새로운 안목이 서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파할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이 마음을 더 부연(敷衍)해 주는 구절에 원효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하나인 마음 이외에 다시 무슨 다른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리석어서 그 하나인 마음을 잘 모르고 방황하는 까닭에 그 고요해야 할 마음 바다에 파랑(波浪)이 일고 기복(起伏)이 생기며 갖가지 평화롭지 못한 인간의 한계상황은 생겨나는 것이다. 실로 하나인 마음의 빛이 가려짐으로 말미암아 여섯 갈래의 어두운 인간상(相)이 나타남으로 널리 그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원(願)을 바랄 수가 있으며 여섯 갈래의 어두운 인간상이 하나인 마음 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므로 일심동체의 인류애를 실천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원효의 말에서 ‘발홍제지원(發弘濟之願)’하고 ‘기동체대비(起同體大悲)’라고 한 이 두 사실은 바로 원효의 종교관의 중심사상을 이루는 것이다. 널리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말하고 모든 중생을 동체로 보고 대비심을 발하는 이 두 가지 요건 없이 종교는 성립될 수가 없다.
필자는 원효의 종교관이 대승불교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구성되었다고 본다. 그의 견해는 화엄경의 ‘사사무애(事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정신에 일치하는 것이며,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열반경의 ‘불신상주론(佛身常住論)’, 능가경의 ‘심식론(心識論)’ 같은 정신에 의해 확고해지고, 기신론의 ‘일심이문삼대(一心二門三大)’의 논리로 체계화되어 왔음을 알 수가 있다. 원효는 이들 경전이 가르치는 대승의 정신을 통해서 종교관을 형성하였다.
원효가 활동하던 당시 당나라의 불교계는 13개 종파가 세워져 서로의 학설이 옳다고 주장하던 때이다. 이 물결이 신라에도 전래되어 불교의 심오한 뜻을 천명하려 하기보다는 자기 일파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해석과 고집이 여러 종파를 낳게 하였다. 바로 이 점을 문제 삼아 각파의 장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들의 이론의 설 자리를 마련해 주고 동시에 그 단점을 지적하여 서로의 길은 다르나 근본취지와 목적은 같다는 것을 인식시켜 조화된 한국불교를 건설하려고 심각하게 생각한 사상가가 원효이다. 원효는 ?십문화쟁론?의 서문에서 당시의 신라불교사상계를 다음과 같이 걱정했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부처님의 원음(圓音)에 의하여 중생이 혜택을 입었으나 부처님이 열반한 후 오랜 세월이 경과하면서 여러 가지 공론(空論)이 분분하며 혹은 내 말이 옳고 남의 주장은 그르고, 또는 내 학설이 옳고 남의 학설은 그르다고 하는 것들이 오래되어 드디어 쟁론이 강과 바다를 이루었다.
한 부처님이 한 입으로 말씀한 교설이 중국을 거쳐서 오는 동안에 여러 가지 異說을 파생했고 그 이설들이 서로 자기 학설만이 진실을 고집하며 갈라져서 논쟁하는 분열상(分裂相)을 원효는 직시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이론(異論)·이설(異說)들을 하나의 ‘불음(佛音)’으로 원융하기 위하여 ‘화쟁론(和諍論)’을 썼다.
원효의 저서치고 가치 없는 것이 아닌 것이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 등은 대표작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논전들을 통해 원효는 어떤 원리에 의하여 화쟁하였는가를 논구해 보자.
그는 “다만 어둠이 아닌 지혜광명으로 법계를 두루 비치니 평등하여 무이(無二)로다”라고 둘이 아니고 하나로 화합하여 원음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또 “둘을 융합했으나 하나가 아니고 진(眞)과 속(俗)의 성(性)은 서지 않은 바가 없으며 염(染)과 정(淨)의 상(相)이 갖추지 아니함이 없도다. 갓(邊)을 여의었으나 중간이 아니므로 유무의 법이 이뤄지지 않는 바 없고, 시비의 뜻이 미치지 않는 바 없다. 그러므로 파(破)함이 없으되 파하지 않음이 없으며, 입(立)함이 없으되 입하지 않음이 없다. 가히 이치도 아닌 지극한 이치이며, 당연한 것도 아닌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고 ‘입파(立破)’의 논리를 통해서 진과 속, 염과 정의 대립을 그의 ‘화쟁론’으로 포용했다.
또 「금강삼매경론」 중에서는
여러 가지 이견(異見)이 있어 논쟁이 생겼을 때, 유견(有見)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공견(空見)과 다른 것이요, 또 공견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유집(有執)과 다른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같다(同)와 다르다(異)는 논쟁만 더욱 야기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두 가지를 다 같다고 한다면 그 내면에서 상쟁하게 될 것이고 만약 이 두 가지가 다르다고 한다면, 또 쟁론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것도 아니요(非同) 다른 것도 아니다(非異)라고 설한다. 비동(非同)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불허(不許)하는 것이요, 비이(非異)란 그 뜻을 따라 허(許)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비이(非異)이기 때문에 그 정(情)에 어그러지지 않고 비동(非同)이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정(情)에 있어서나 이(理)에 있어서나 서로 어긋남이 없게 되는 것이다.
라고 화쟁의 방법은 ‘허(許)’와 ‘불허(不許)’의 논리로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원효는 「화엄경종요」 ․ 「법화경종요」 등을 비롯하여 이미 알려진 것만도 무려 17종의 종요를 기술하였다. ‘종요(宗要)’의 ‘종(宗)’이라 함은 ‘다(多)’로 전개함이요, ‘요(要)’라 함은 ‘일(一)’로 통합함이니 종요가 곧 개합(開合) 이외의 것은 아니다. 이 한 마음은 ‘다(多)’로써 그 무한한 불타의 정신을 나타낼 수 있고, 또 그것은 ‘일(一)’로써 모아질 수 있으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론(異論)도 그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해주면서 단지 거기에 편집하는 것을 깨우쳐 ‘일승불교(一乘佛敎)’로 원융시키는 ‘개합’의 논리로 화쟁 시키는 문증을 들면 아래와 같다.
불교의 뭇 경전의 부분들을 통합하면 만 가지 설들이 하나의 의미로 돌아가니, 이 불타의 지극한 뜻에 의거하여 백가(百家)의 이쟁(異諍)을 화회(和會)할 수 있다.
원효는 ‘일미(一味)’와 ‘절언(絶言)’의 선적(禪的) 논리로 화쟁과 회통에 일관하고 있는 문증을 들면 다음과 같다.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처음 성도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설하신 모든 가르침은 일체지(一切智)로 이끌지 않는 것이 없다. 이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일승교(一乘敎)이다.
방편품에서 설하기를 모든 부처님들 또한 무량무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로 중생을 위해서 여러 가지 법을 설하였지만 이 법은 모두가 일불승이다. …… 일언(一言)과 일구(一句)가 다 불승(佛乘)이며, 일상(一相), 일미(一味)가 깊고 깊기 때문에 일승교라 한다.
또 원효는 「십문화쟁론」에서도 ‘일미’의 논리로 중생과 불성도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것이어서 일체 중생도 평등하게 불성을 같이 가지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일분(一分)이라도 불성이 없다면 대승평등법성(大乘平等法性)에 어긋남이니 동체대비(同体大悲)는 如海一未라고 한다.
이런 문증은 백가(百家)의 담화가 일심을 떠나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백가지의 쟁론이나 유무의 상대도 결국은 그것을 인정해주면서 일미의 화회로 귀일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효는 다시금 형식 논리의 분별지(分別知)에 구애하는 자가 제기함직한 질문을 가상하여 화쟁의 논리의 진의가 ‘절언지법(絶言之法)’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손가락에 의하여 손가락을 떠난 달을 가리킴과 같다. 그런데 이제 질문자가 곧장 말 그대로 뜻을 취하여 말로 하는 비유를 인용한다면 언법을 떠나기 힘들 것이요, 단지 손가락 끝만 보고 그것이 달이 아님을 책하는 것인 만큼 난(難)을 책함이 더욱 정밀할수록 더욱 멀리 이치를 잃어버릴 것이다.
원효가 화쟁을 각론의 타당성을 인정하여 주면서 궁극적인 진리에로 도약시키는 역할을 ① 개합의 논리, ② 입파(立破)의 논리, ③ 허(許)·불허(不許)의 논리, ④ 일미와 절언의 논리로 논증하였음을 우리는 인지할 수 있다. 또한 원효가 상쟁을 화쟁으로 이끌려는 주된 과제는 삼승과 일승, 공(空)과 유(有), 성(性)과 상(相), 진(眞)과 속(俗),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등의 문제와 더불어 열반, 불성 불신 등의 서로 달리하는 주장에 초점이 맞춰졌음을 알 수 있다. 화쟁이 지향하는 바 극치는 무쟁(無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온갖 모순과 피아의 대립시비의 쟁론이 다 끊어진 절대 ․ 조화의 세계가 무쟁이라면, 피아의 대립과 모순시비의 쟁론이 있는 이 현실에서 그 모든 대립 ․ 모순 ․ 쟁론을 조화 ․ 회통 ․ 초극하여 하나의 세계로 지향하려는 것이 원효의 화쟁논리이다.
원효는 화쟁논리를 통하여 뭇 종파가 일관된 의미를 가지게 되고, 그 속에서 분파(分派)의 의미가 다시 살아나니, 교(敎)와 선(禪)의 상극성(相剋性)을 극복하여 공존케 함으로써 더욱 부처님의 진리를 발현할 논거를 마련해 주었다. 원효는 당시 신라 사회의 지배층 ․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올바른 진로를 가르쳐 보여주었고,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실상(實相)의 의미를 깨닫도록 깊은 인생관, 세계관을 제시해 준 사람이었다. 원효는 일심(一心)으로 화쟁의 논리를 인식하여 어떤 사상이나 주의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는 심지어 불교교단의 계율(戒律)에서도 벗어난 무애(無碍)의 실천행을 했다.
Ⅱ-2-2. 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
지눌(1158∼1210) 생존 당시 불교계에는 부처님의 교설에 의지하여 최고의 지혜를 얻으려는 교종과 부처님의 마음(뜻)을 신비적 직관에 의하여 오득(悟得)하려는 선종사이에는 서로 돈점(頓漸)과 우열을 놓고 논쟁이 심했다. 그래서 고려의 지눌은 선교의 대립을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세존이 입으로 말한 것은 교(敎)이며,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선(禪)이다. 부처의 입과 조사의 마음은 필연코 서로 어긋남이 없거늘, 어째서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각기 제가 익힌 것에 안주하여 망령되이 논쟁을 일삼으며 헛되이 세월을 보낼 것인가.
지눌 역시 교(敎)는 부처의 말씀이고 선(禪)은 조사의 마음(뜻)이란 전통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선과 교의 길이 궁극적으로는 한 부처에 도달할 터인데, 선과 교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 자성불(自性佛)을 찾아내는 데에 전념하고 정진할 뿐 선과 교의 우열과 돈점을 논쟁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허망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교에 치우친 문자법사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 만일 말로 인해 도를 깨닫고 교로 인해 종지를 넓히며 법을 선택하는 눈을 갖춘 사람은, 비록 많이 들어도 명목과 상에 집착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그러나, 만일 말을 따라 소견을 내고 글을 다라 앎을 지으며, 교를 쫓고 마음이 미(迷)하여 손가락과 달을 분별하지 못하고 법을 설하는 사람을 제도하려는 것은 달팽이가 스스로도 더럽히고 남도 더럽히는 것과 같다. 그는 세간의 문자법사이니……
손가락은 어디까지나 달을 가리키는 지월(指月)의 구실만을 할 뿐이지 달은 아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손가락을 달로 착각하여 달을 잃어버리고 손가락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손가락은 달(月)의 방향을 정확히 가리키는 지혜는 갖추어야 한다. 달의 방향을 잘못 가리킨 손가락은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한다. 오득(悟得)의 방향이 아니고 혼미(昏迷)의 방향이다. 그래서 정확히 가리키는 손가락(指月)과 달(月)은 지월(指月)이 지시하는 방향선상에서 달(月)과 일치할 수 있다. 지눌까지 포함하여 역대 선사들은 지월(指月)과 달의 관계에서 敎와 禪의 일치를 설명해 왔다. 「定慧結社文」은 불교인으로서 그의 불교관 및 그가 앞으로 취해 나아갈 태도를 밝히는 것으로,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을 것을 강조하면서 선학자의 병폐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말법시대의 사람들은 다분히 건혜(乾慧)뿐이어서 괴로움의 굴레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마음을 내면 곧 허망하고 거짓된 것에 의탁하며, 말을 하면 곧 분수에 지나쳐 지견이 편고(偏枯)하고 행(行)과 혜(慧)가 같지 못하다. 요즘 선문(禪門)에서 배우는 모든 사람들이 흔히 이런 병에 들어 있다. 그래서 ‘자심(自心)이 본래 깨끗하여 유(有)에도 무(無)에도 속해 있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몸을 수고스럽게 해가며 억지로 수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말한다. 무애자재한 행을 본뜰 뿐 진정한 수행을 놓아버리니 오직 몸과 입만 단정치 못할 뿐이 아니라 또한 마음까지 구부러져 도무지 깨닫지를 못한다.
지눌은 당시 불교계의 병폐를 지적하고, 이런 부류의 수선인을 ‘어리석게 침묵만 지키는 치선자’로, 교학자를 다만 문자만 찾는 광혜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만일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다면 어찌 ‘수묵의 치선자’나 ‘심문의 광혜자’에 비교할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구하기 위하여 정혜를 쌍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눌을 주장하였다. 이 같은 지눌의 정혜쌍수의 사상은 의천의 교관겸수와 그 의미가 통하는 것으로, 그 당시 불교계에 일대 혁명적 선언이었으며, 그 후 조선시대의 불교계에까지도 이 학풍이 계승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오는 근본정신이 되었다. 그러나 의천의 교관겸수는 선을 교에 포섭하려는 의도임에 반해, 지눌의 쌍수는 선을 중심으로 교를 선에 포섭하고자 했음이 차이점이라 하겠다.
그런데 한편 수행은 불퇴전의 정신적 긴장이 따르지 않으면, 혼미의 세계로 와해될 위험이 있다. 혼미하고 불투명한 정신적 상황은 자아를 상실하고 공간적 의식과 함께 시간의식마저 혼미해 간다. 그리하여 역사의식을 망각할 위험이 있다. 지눌은 혼미에 빠지기 쉬운 선을 향하여 사회구제(중생제도)라는 사명의식을 고취하며 각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혼미에서 깨어나게 하는 길은 투명한 논리밖에 없다. 체계적 교리의 추구에서 얻어지는 지혜의 빛만이 혼미의 구름을 제거할 수 있다. 그래서 지눌은 선정과 지혜를 동시에 수행할 것, 즉 정혜쌍수(定慧雙修)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선정은 내 마음의 본체요, 지혜는 내 마음의 작용이다. 선정은 바로 지혜이기 때문에 본체가 작용을 떠나지 않는다. 지혜가 곧 선정이므로 이 본체를 떠나지 않는다. 두 가지가 다 없어지고, 두 가지가 서로 마주 비치면 두 가지가 다 존재한다. 두 가지 다 수행의 요지이며, 불교의 대지(大旨)다.
이처럼 지눌은 선과 교를 같은 차원의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선을 통해서 최고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보았다.
Ⅱ-2-3. 서산의 선교겸수(禪敎兼修)
조선조 시대에 이르러 억불숭유(抑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됨과 더불어 주자학(朱子學)이 고려말까지 국교의 지위를 유지하여 온 불교를 대신하여 시대사조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정세와 사회정세를 예의 간파한 서산은 밖으로는 유신(儒臣)들의 당쟁 및 무조건 억불하고 이단시하는 지배층의 풍조와 편견을 시정(是正)하고, 안으로는 해이한 교계의 기강과 타락한 승려의 도행(道行)을 바로잡고, 외전(外典)을 숭상하고 내전(內典)을 소홀히 하는 스님들의 그릇된 수행적 태도에 반성을 촉구하였다.
서산 대사 이전까지는 선교양종이 크게 대립하고 있었으니, 이를 세분하면 좌선(선종), 진언다라니(밀교), 염불(정토), 간경(화엄 ․ 법화) 등의 네 파가 있어 각기 수행법이 별립(別立)되어 있었다. 오랜 전통적 인습에 사로잡혀 선교간의 종파적 갈등이 여전히 심했다. 이에 서산은 禪敎不二의 불교관을 표방하며, 선과 교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판석하고 있다.
석가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三處傳心)이 禪旨가 되고, 세존께서 일대(一代, 성불후 입멸에 이르기까지)에 걸쳐 설법한 것은 누구든지 말을 잃어버리면 부처님이 꽃을 드신 것이나 가섭이 빙긋이 웃는 일도 모두 교(敎)의 자취만 될 것이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敎外別傳) 선지(禪旨)가 될 것이다. …… 교문에는 오직 일심법(一心法)만 전하고, 선문(禪門)에는 견성법(見性法)만 전한다.
서산의 불교관은 선사상이라 할 만치 선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였고, 선을 설명함에 있어서 반드시 교를 상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선사상을 별도로 이해하지 않고 선교관(禪敎觀)이라 하여 함께 고찰한 것이다. 그는 지눌의 선교일치(禪敎一致)의 맥락을 그대로 계승 선가다운 호방성이 그의 모든 사유에 자유롭게 흐르고 있다. 그의 사유방식은 실천적인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원효 ․ 지눌의 위대한 원융 ․ 회통사상을 본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숭유억불(崇儒抑佛)로 표현되는 조선조의 고승들은 교리나 교설의 깊은 뜻을 풀어서 불교를 변증하기 보다는 당시 권력층이 숭상하던 유교와 불교가 ‘근원은 동일’하므로 서로 융합할 수 있다는 유불융합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신앙이나 신조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박해의 쓰라린 고통에 견디기 보다는 유불융합론을 주장함으로써 권력층과의 적당한 타협을 모색했던 것 같다. 서산의 저서 ?삼가귀감(三家龜鑑)?은 불교와 유교와 도교까지 포함하여 삼교의 공통점을 찾으려 했던 훌륭한 표본이다.
이런 회통사상은 각 종교가 어떻게 서로 다른가 하는 ‘차이’보다는 어떻게 서로 같은가 하는 ‘동일’의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이 같은 경향은 학식이 높은 중국 불교 당송(唐宋)시대의 고승들 가운데서 일찍부터 싹터 흘러왔다. 그런데 모든 현상에서 차이보다는 동일을 추구하려는 것은 흔히 부르는 동양종교 즉 불교 ․ 유교 ․ 도교 등 각 종교의 공통된 경향이 아닌가 한다. 불교 ․ 유교 ․ 도교 등 삼교의 회통사상이 주로 선종계의 고승들에 의하여 주장되어 왔다. 우리는 Ⅱ장 1절에서 차이보다는 동일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인도의 고대 성전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하나의 진리를 말하는 여러 성인들 가운데는 유교의 교조 공자(孔子)님도 있을 수 있고, 도교의 교조 노자(老子)님이나 장자(莊子)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 성인들의 말씀에서 불교의 교조 부처님의 말씀에서와 함께 공통된 ‘하나’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불교 ․ 유교 ․ 도교의 삼교에서 공통된 사상을 찾아 삼교 회통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마련되었다. 그러한 경향이 조선조의 불교에 이르러 농후하게 나타난 이면에는 당시 지배층의 종교가 유교였다는 정치 상황이 다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럼 「삼가귀감」까지 저술하여 불 ․ 유 ․ 도의 삼교 회통론을 전개한 서산의 사상을 살펴보자.
서산은 선지(禪旨)를 설명하는 「선가귀감(禪家龜鑑)」의 첫머리에서 “여기 ‘일물(一物)’이 있다.”고 전지한 다음 “삼교성인종차구출(三敎聖人從此句出)”이라 했다. 삼교의 이름은 각각 다르나 그 근원은 동일하다는 이론이다. 그에 의하면 삼교가 교리상의 차이는 다소 있으나, 본래 심리의 계발과 인간의 수련을 위한다는 점에서는 상통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그 “일물”을,
소소영영 부증생부증감 명부득상부득(昭昭靈靈 不贈生不曾減 名不得狀不得)이라 하며, 고불(古佛)이 출생하기 이전에 일물은 벌써 원만상으로 있었고 부처님도 어떻게 전할 바를 몰랐는데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태초 이전에 이미 구원적 일물이 있었음을 말했다. 불교의 교조인 부처님도 어떻게 전할 바를 몰랐다는 ‘일물’이라면 일물은 부처님보다 훨씬 높은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다른 현자들과 함께 그 ‘일물’의 일부분을 말씀한 현자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태초 이전에 일물이 원만상으로 있었다는 것은 주(註) 8에서 말한 ?리그웨다(Ṛg-veda)?의 ‘하나의 진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 일물을 부처님이나 공자님, 노자님 같은 성인들이 각자 여러 가지로 다르게 말한 것이다. 즉 삼가(三家)의 사상은 이 일물에서 나왔다. 그래서 서산은 삼교의 성인들도 이 일물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인 예증까지 들었다.
선종이 말하는 ‘유심(唯心)’의 덕 밖에 도덕 ․ 인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묘심(妙心)의 덕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요순(堯舜)의 심법을 전하는 길이라고 서산은 회통하여 해석하였다. 불교의 ‘심법(心法)’으로 유교의 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상의 설명을 살펴 볼 때, 서산의 불교관은 분명히 ‘선심교천(禪深敎淺)’적 사상이며 교리를 해석하여 말한다면 ‘사교입선(捨敎入禪)’이 스님의 태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산은 무조건 ‘교’를 반대하는 궁극적 선종위주만이 아니라 충분히 ‘교’를 살리고 나서 그 위에 ‘선’을 올린 ‘회교귀선(會敎歸禪)’적 입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먼저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으로써 불변과 수연(隨緣)의 두 뜻이 곧 자기 마음의 성품과 형상이며 몰록 깨치는 것과 점차로 닦는 두 문(門)이 자기 수행의 처음과 끝임을 상세히 분별한 연후에 교의(敎義)를 내버리고 다만 자기 마음의 현전일념(現前一念)으로써 선지(禪旨)를 자세히 참구한다면 반드시 얻은 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몸이 빠져 나오는 살 길이다.
이러한 서산의 선교겸수관(禪敎兼修觀)은 지눌에게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고 그것을 조선조에 와서 서산이 다시 중흥시킨 것이다.
Ⅲ. 원융사상 통섭으로서 청담스님의 마음철학
Ⅲ-1. 청담스님의 마음철학 형성
청담스님(1902∼1971)에게 있어서 ‘마음’은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난 청담스님의 사상이란 없다. 청담스님의 궁극적 실재인 ‘마음’은 청담스님의 상징어이다. 청담스님은 유심사상(唯心思想, citta-mātratā)을 실천한 20세기의 보살이었다. 그러면 청담스님의 마음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한다.
청담스님은 20세기 초반에 진주 호국사에서 박포명(朴圃明) 스님으로부터 ‘마음’이란 법문을 듣고 ‘마음’을 찾는 출가를 25세(1926년)에 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아래와 같이 술회했다.
목이 타 근처에 있는 호국사를 찾아가 물을 얻어 마셨다. 한참 꿀꺽꿀꺽 마시고 있는데 한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왜 사람은 물을 마셔야 하느냐?” 나는 미처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이 물을 마시고 싶다고 요구하기 때문이지….”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우리가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차다는 관념을 털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저 돌멩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듯이 우리를 주관하고 있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인 것이야. … 마음에서 나를 발견할 때 우리는 생사를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부처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오욕을 벗어버리고 마음을 찾는 일인 것이야.”
청담스님은 박표명 스님으로부터 ‘마음’이란 법문을 들은 뒤부터 ‘가아(假我, jivātman)'의 망견(mithyādṛṣṭi)에서 ‘진아(眞我, paramātman)'를 발견하는 정견(正見, samyagdṛṣti)의 구도에 몰두했다
.
청담스님은 진여(眞如, tathatā, suchness)를 찾기 위하여 걸망을 짊어지고 오늘은 이 하늘에서 내일은 저 골짜기로 바람처럼 떠돌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당시의 석학 박한영 스님이 계시는 안암동 개운사강원(開雲寺講院)이었다고 한다. 그 곳에서 청담스님은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박한영 스님으로부터 배워 마음의 눈이 열린다. 스님은 많은 경전 중에서도 ?능엄경(楞嚴經)?을 가장 깊이 탐구하였고, 오나 가나 그것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담스님은 ?능엄경?을 왜 수지독송 하였을까?
청담스님은 ?능엄경?이 ‘진아(眞我)를 찾는 납자로서 반드시 한 번은 찾아오는 유혹의 망심(妄心, prajnapti)을 퇴치하는 가장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경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능엄경?은 다른 경론에서 보다 마장(魔障)의 경계를 상세히 밝히고 있는 경전이다. 마장은 오음(五陰, panca-khandha)의 갖가지 망상 때문에 생긴 것이다. 수행자는 오음의 마장에서 해방될 때 자유인, 해탈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지는 각고의 수행과 명석한 깨달음이 있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청담스님은 ?능엄경?사상의 영향으로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은 다만 중생의 꿈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고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이 마음은 영원불멸의 실재이며, 절대자유의 생명이며, 우주의 핵심이며, 온 누리의 진리이며, 천지조화의 본체이며, 신의 섭리이며,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인생도, 인류 문화 창조도 모두 이 마음의 환각으로 이루어진 꿈속의 꿈에 불과한 것이다. 이 엄청난 꿈 가운데서 정말로 꿈이 아닌 것은 오직 이 마음인 ‘나(眞我)’ 뿐이다.
청담스님은 ?능엄경?의 수지독송으로 자기 자심(自心)의 환각으로 환생환멸하는 꿈에서 깨어나 우주의 생명이요, 만물의 생명인 ‘마음’의 눈을 뜰 수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청담스님은 25세(1926년)에 당시 불교학 최고 강원인 개운사(開雲寺)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대강백 박한영 스님의 지도아래 경 ․ 율 ․ 론 3장(藏)을 두루 섭렵하고 대교과를 1930년 5월에 졸업하였다. 스님은 그곳이 일생을 입지(立志)하는 데 크게 도움을 받은 곳이라고 술회했다.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주(註) 71)에서 서산대사가 설한 바와 같이 인간이 꼭 해야 할 일과 꼭 가야 할 길을 마음을 깨닫는 마음 찾는 공부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자기 마음을 깨치는 일이다. 이 마음을 깨쳤을 때가 곧 부처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마음을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바로 이끌어주고, 복 받게 해주고 잘 실릴 수 있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며, 우주를 다 내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다.
청담스님은 덕숭산 정혜사 만공(滿空)스님의 지도로 32세에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위하여 세수하는 일, 변소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참선하는 자리를 떠난 일이 없이 정진에 몰두했다고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문 앞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목이 마르고 괴로움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이윽고 그 괴로움과 불편이 사라져갔다. 점점 무(無)의 경지로 들어갔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앉아 있어도 앉는 것 같지 않고, 오줌을 싸도 싼 것 같지 않았다. 하나의 정좌(定座)는 밥이고 정좌이면서 곧 무(無)였다.
이런 위법망구(爲法忘軀) 3년간 정진수행의 공덕으로 청담스님은 견성(見性)의 게송(偈頌)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예부터 모든 불조(佛祖)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길가에 고탑(古塔)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
이렇게 청담스님(1902∼1971)은 근대 석학 박한영 스님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만공스님에게 선가(禪家)의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도리를 체득한 후 그의 유심사상(唯心思想, citta-mātratā)을 형성하여 20세기 한국의 보살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청담스님의 마음철학은 한국 전통의 선교겸수(禪敎兼修)를 통하여 형성된 것이다. 스님은 견성한 후 묘향산 설영(雪嶺), 설악산 봉정(峰頂), 문경 봉암사(鳳巖寺), 경남 고성 청량산 문수암(淸凉山 文殊庵) 등에서 수선결사하며 용맹정진으로 보림(保任)하며 선기(禪機)를 다듬었다.
Ⅲ-2. 청담스님 마음철학의 내용
Ⅲ-2-1. 인간주체로서의 마음
청담스님의 ‘마음’은 그의 인생관이요, 우주관이다. 청담스님은 인간의 주체를 마음이라고 파악했다. 마음이 주체라는 것은 생각과 행동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은 생각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청담스님의 마음은 청담스님의 궁극적 실재의 개념이다. 불교에서 궁극적 실재를 사용할 경우 그것은 존재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궁극적인 깨달음의 체험이나 궁극적 가치를 여러 성인들이 자기의 해석대로 나타낸 것이다. 원효(617∼686)스님은 일심(一心), 지눌(1158∼1210)스님은 진심(眞心), 서산은 ‘일물(一物)’이라고 표현했다. 불교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이해는 머리로 헤아려 아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바로 깨달아 아는(yathābhūtārtha-darśana) 체험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스님께서는 마음을 육체의 주인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근원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의 주체가 곧 나(我)라는 소리다. …그러므로 나라고 하는 주체는 육체가 아니다.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주체가 나라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이 곧 마음이다.
생각은 ‘가아(假我)’이고, 생각을 내는 ‘나’ 이것은 ‘진아(眞我)’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음은 의식(생각)하도록 하는 그 실체이지 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주체는 마음이며 생명이라는 것이다. 청담스님의 ‘마음’은 가아(假我, jivātman)의 ‘마음’이 아니라 ‘진아(眞我, paramātman)'의 마음으로 생명이라고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우리말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생명이 있는 것’을 마음이라 한다. 한문 경전에도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마음이 곧 부처’라 했다. 선종도 그러하고, 팔만대장경도 주요 골자가 ‘심즉시불’을 말한다. 마음은 모든 것이 주체이다. 이 마음은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다. 하느님에게도 구속되어 있지 않고, 부처님이나 진리에도 걸려있지 않기 때문이 이 놈이 자유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천지의 근본이 마음이고, 만사의 주체가 이 마음이다.
청담스님이 말하는 ‘마음’은 ‘심성’, ‘불성’이란 뜻으로 나타낸 것으로 우주를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라는 부처님의 유심사상을 청담스님의 해석학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청담스님이 마음을 정의한 것은 서산대사가 궁극적 실재를 ‘일물’로 나타낸 것과 유사하다. 그것은 불생불멸의 영원한 생명적 특징을 가질 뿐 아니라 생명 그 자체라고 보았다.
나아가서 스님은 ‘나’란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고, 마음은 자유라는 것이다. 마음은 자유로운 것임에 비해 물질은 자유롭지 못하여 ‘내’가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물질은 전부가 생명이 없다. 서로가 서로의 힘으로 피동할 뿐이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자유행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말로 생명을 마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인간주체로서의 마음은 육체의 주인이요, 생명 그 자체로써 어떤 힘(또는 신)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Ⅲ-2-2. 진리로서 마음
청담스님은 불교가 여러 가지 표현방법을 동원해 보리, 열반, 중도, 원각 또는 불성, 생명, 영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곧 ‘마음’을 가리는 것으로 가장 쉬운 것이 불교라고 역설했다. 청담스님은 마음공부를 위하여 50년 가까이 화두를 들고 정진하셨다. 스님께서는 ‘마음이 부처이다’라고 ?신심명?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석하셨다.
… 우리의 마음도 번뇌에 물들지 않고 생사열반에 섞이지 않습니다. 지금 완전히 부처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공연히 이 육체를 ‘나’라고 하여 이해타산을 하기 때문에 온갖 번뇌망상을 내어 이 번뇌가 나를 지배하고 이 때문에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죽이고 때로는 좋아하고 하는 것이지만, 이 마음자리가 더러워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음자리는 본래 부처이고, 화를 낼 때나 웃을 때나 본연의 자세 그대로입니다.
청담스님께서 설하시는 ‘마음’은 ?아함경?에서 “심(心)은 법(法)의 근본이다” 또 “마음(心)이 더럽기 때문에 중생이 더럽고, 마음(心)이 깨끗하기 때문에 중생이 깨끗하다.” ?화엄경?의 「십지품」에 “삼계(三界)는 허망하며 단지 일심(一心)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12연기분(緣起分)은 모두 마음에 의거한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고 설하는 것과 동일한 ‘마음’이라고 생각된다. 청담스님은 우빠니샤드의 철학자 야갸왈꺄(Yajnāvalkya)가 아뜨만론을 관념론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이 부처가 마음 밖에 멀리 별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그 자체가 부처임을 ‘내재적 불타관’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진리가 즉 마음이요, 마음이 부처요, 불이 즉 신이요, 신이 즉 마음이요, 마음이 우주요, 우주가 곧 심이요, 심이 즉 진리로 돌고 돌아가는 것이다. 나를 찾자! 나를 알자! 내가 살자!
여기서 진리가 마음이고 마음이 부처라고 정의하였으니, 마음과 부처와 진리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연기를 본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본 자는 연기를 본다”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연상케 한다. 이처럼 청담스님은 마음이 부처일 뿐만 아니라 진리(法) 또한 마음이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이 마음은 곧 전 우주의 핵심적인 진리이며, 대자연의 성립이며, 천지개벽과 음양 조화의 원동력인 것이다.. 이렇듯 영원한 실재인 이 생명, 이 마음을 떠나서 어느 곳에 인생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 그러므로 나의 이 생명은 곧 진리이며 신이며 불타(佛陀)이다.
Ⅲ-3. 청담스님 마음철학의 실천
청담스님은 인욕보살로서 ?금강경?의 「대승정종분」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불을 한 생 미루더라도 중생제도를 위하여 원(願)을 세우는 것을 당위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함께 세상에 태어났다는 인연 때문에 사해대중들을 깨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것이 아니다. 차라리 불교는 사해대중의 구제에 더 큰 뜻이 있을지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득도를 한 다음 우루베라 촌에서 내려왔고, 의상(義湘, 625-702)스님도 고국 신라로 돌아왔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그들이 왜 내려왔고 돌아왔는가’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누구에게로 돌아왔는가? 그의 나라로, 그의 형제들의 곁으로 온 것이다. 우리가 이곳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어떤 사실 앞에도 우선하는 일이다.
우리들은 한국인이다. 많은 한국인의 구제가 오늘의 한국불교의 명제이다. … 인간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애국자를 배출한다거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아니며, 또 대중들을 천당으로 인도하는데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죄악과 번뇌와 고통 속에 잠긴 인간을 참인간이게 하는 것 그들로 하여금 죄악과 번뇌를 버리고 진정한 안락을 누리게 하도록 하는 것, 지혜롭게 하는 것, 자비로운 협조자이게 하는 것, 그것이 불교의 참뜻인 것이다. 그것을 원효(元曉, 617-686)는 오직 “자리(自利)와 타리(他利)를 염원하고 보리(菩提), 즉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청담스님의 이상, 보살도, 애국심 등을 읽을 수 있다. 청담스님은 신라의 원효스님과 같이 20세기 한국의 보살로 화현(化現)한 것이다. 청담스님은 동체대비의 보살의 원력으로 한국불교 5백년 왜곡된 현실을 바로 세우는 정통성 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조계가풍(曹溪家風)을 세우는 데(1928∼1962) 전력투구했다. 청담스님에게 있어서 불교정화 운동은 보살도를 실천하는 한 단계였다. 스님이 출가하여 불법을 체득하기 위한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수행은 중생구제의 보살정신이었다. 스님의 중생구제 보살정신은 불교정화로 나타난 것이다. 그의 삶에 있어서 일관된 정화불사(淨化佛事)는 그의 정화이념인 ‘마음철학’으로부터 나왔다.
청담스님의 정화불사는 외적정화(外的淨化)와 내적정화(內的淨化)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외적불사는 교단정화로 청정승가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내적불사는 견성(見性, svayaṃprakāśa) 불사로 정법불교(正法佛敎)를 세우는 일이었다. 이 불사는 종단의 3대사업 즉 도제양성, 역경사업, 포교사업으로 불교교단을 대중화, 현대화하여 불조(佛祖)의 교지(敎旨)를 세우는 일로 발전했다.
청담스님은 우주의 원리인 마음자리를 한국불교에서처럼 이렇게 확실하고 분명하게 설명하는 불교가 현재는 이 지구상에 없다고 하시면서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들어보아도 종파불교(宗派佛敎)가 되어서 각각 설명방법과 수행양식이 달라서 한국불교와 같은 참된 부처님의 정신은 들어볼 수 없다. 동남아 소승불교도 각종(各宗) 각파(各派)마다 그 주장이 다르고 한 조각의 불교밖에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바삐 한국불교를 바로 세워서 도인(道人)이 많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 한국불교의 정신이 온 세계에 널리 퍼졌을 때 인류의 평화는 비로소 올 것이다. 나는 오늘의 세계를 지도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진리의 보고(寶庫)가 한국불교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육체가 내가 아닌 줄 알고, 마음자리가 나인 것을 강조하는 한국불교를 실천하고 전법하자.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의 우수성을 설하면서 한국불교를 바로 세워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도인(道人)을 많이 배출하도록 하는 불사(佛事)가 정화이념 실천의 골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의 찬란한 전통을 되살려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교단이 도인(道人)을 많이 배출하도록 불사하는 것이 당위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혁이 한국불교의 내부에서 일어나야 한다. 불교란 세존(世尊)만을 모시고 개인의 영욕을 취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런 종교였다면 세존은 우루벨라촌의 보리수 아래에서 그의 정각(正覺)을 가짐으로써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그 정각을 가짐으로써 오히려 세속(世俗)으로 내려와 사해대중(四海大衆)들과 만났다. 그의 정각은 세속인을 깨우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데에 뜻이 있었다. 세존이 사해대중과 만났다는 사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존은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그의 정각을 가졌다. 그러므로 오늘의 불교 역시 오늘의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정각(正覺)을 가져야 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청담스님 정화이념의 실천에서 대승불교의 요체인 보살도(菩薩道)의 전형(典型)을 볼 수 있다. 청담스님은 이런 보살도의 정신을 가지고 20세기 한국의 보살 화신으로서 모든 중생들에게 보리심(菩提心)을 발할 것을 권하고, 인연 따라 조그마한 암자, 학생회, 교도소, 군부대 등 가릴 것 없이 그 몸을 안 나타낸 곳 없이(處染常淨)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실천한 인욕보살(忍辱菩薩)이었다. 스님은 “단 한 사람이라도 제도 받지 않은 중생이 있는 한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정법불교(正法佛敎)를 세우는 데 일생을 다 바치셨다.
청담스님과 같이 그 어느 누가 한국불교를 그의 피와 살로 느꼈던가? 한국불교의 이상, 한국불교의 고민, 한국불교의 비극, 한국불교의 위대성이 청담스님의 사상과 생활 속에 나타나 있다. 청담스님은 마치 마하뜨마 간디(1869-1948)가 인도의 독립운동을 하면서 “나는 신(神)을 실현하고자 하는 구도자다. 신(神)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신을 그의 피조물 속에서 보고, 그것과 하나로 되는데 있다. 이는 오직 온 인류에 대한 봉사에 의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온 인류 중에서도 우선 인도국민에 대해서 봉사하기로 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은 남을 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남을 구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먼저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신념과 같이 지장보살의 원력(願力)으로 성불을 한 생 미루는 각오로 청정승가와 정법수호하는 정화불사(淨化佛事)에 한평생을 모두 바쳤다.
Ⅳ. 맺음말
청담스님(1902∼1971)의 발자취는 한국 근・현대불교의 역사이다. 청담스님은 한국 근・현대 불교사의 중심에서 대승보살도의 살아있는 실증을 행동으로 보이신 인욕보살이었다. 청담스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해야 할 인생일대사(人生一大事)를 부처님의 정법심인(正法心印)을 체득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자”라는 서원으로 출가하여 선조들의 원융사상과 참선으로 마음철학을 확립하고 이를 전하시다가 일생을 마치셨다.
스님의 마음철학은 1600여년 한국불교 전통의 법등(法燈)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그 시대의 문제까지 회통하는 20세기 보살사상의 전형이다. 20세기 한국불교사에서 청담스님과 같이 누가 한국불교를 그의 피와 살로 느끼면서 보살행을 한 분이 얼마나 될까? 오늘날 한국불교는 청담스님과 같은 구도자를 갈구한다.
약호 및 참고문헌
<약 호 표>
CD : 靑潭大宗師全書(卷數, 페이지數)
Gītā : The Bhagavadgītā
韓佛全 : 韓國佛敎全書(卷數, 페이지數, 段)
大正藏 : 大正新修大藏經(卷數, 페이지數, 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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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潭大宗師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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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요약
청담스님(1902~1971)의 발자취는 한국 근·현대 불교사의 역사이다. 청담스님은 당대(1928~1971)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써, 한국불교의 이상, 한국불교의 고민, 한국불교의 비극, 한국불교의 위대성이 스님의 사상과 생활 속에 구현되어 있다. 청담스님은 마음철학을 통해서 그 시대의 문제를 회통(會通)하면서 1600여 년의 한국불교 전통의 법등(法燈)을 지켜 새로운 정법불교의 좌표를 정립한 칸트(Kant, 1720~1804)적 인욕보살이었다.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사 위치에서 볼 때에 하나의 큰 바다에 비유될 수 있다. 그 이전의 선(禪)과 교(敎)의 가르침이 그에게 흘러들어 갔고, 그 이후의 모든 선교원융의 보살사상이 그로부터 흘러나왔다.
청담스님 마음철학의 내용인 선교원융사상은 인도철학사의 고대철학의 아드와이따(advaita)전통과 한국불교의 전통에서 유래된 원융의 이론이다. 시대마다 사안이 다르므로 ‘원융’이라는 일관된 표현으로 쓰여지지는 않았지만 초기불교는 중도(中道), 중관불교는 공(空), 화엄은 법계(法界), 법화는 일승(一乘), 원효는 일심(一心), 지눌은 진심(眞心), 서산은 일물(一物)이라는 등등의 용어를 빌어서 차별과 대립을 극복하고자 했다. 청담스님이 말하는 ‘마음’은 2천 5백여 년간 각 시대의 궁극적 실재를 회통하여 나타낸 것이다. 청담스님의 마음은 부처님의 유심사상을 청담스님의 해석학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주체로서의 마음은 육체의 주인이요, 생명 그 자체로써 어떤 힘(또는 신)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 자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은 진리이고 부처를 나타낸 상징어이다.
청담스님에게 있어서 ‘마음’은 알파요 오메가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난 청담스님의 사상이란 없다. 청담스님의 궁극적 실재인 ‘마음’은 청담스님의 브랜드어이다. 청담스님은 유심사상(唯心思想, citta-mātratā)을 실천한 20세기의 보살이었다.
청담스님 마음철학의 실천은 청정승가와 정법수호라는 정화불사(淨化佛事)로 나타났다. 마하뜨마 간디(1869~1949)와 같이 청담스님은 20세기 한국의 보살 화신으로서 모든 중생에게 보리심(菩提心)을 발할 것을 권하고, 인연 따라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단 한 사람이라도 제도 받지 않은 중생이 있는 한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정법불교를 세우는 데 보살도를 실천하셨다. 20세기 한국불교사에서 청담스님과 같이 한국불교를 그의 피와 살로 느끼면서 보살행을 한 분이 얼마나 될까? 오늘날 한국불교는 청담스님과 같은 구도자를 갈구한다.
주제어: 청담 대종사, 마음, 궁극적 실재, 20세기의 보살
Abstract
A Position of Venerable Chung-dam
in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Kim, Sun-Keun
Venerable Chung-dam(1902~1971) became a Bhikkhu in order to seek 'Mind' after his eyes were opened by the sermon of 'Mind' and awakened 'Mind' in 1934. Ever since his enlightenment, he preached the sermon of 'Mind' for about 40 years(1928~1971), and became a Forbearance Bodhisattva himself, who saved the way of Bodhisattva in the 20th century Korea. Who else might have felt like him that all koreans are his own flesh and blood? His way of Bodhisattva came from 'the Mind philosophy - his purification thought'. He said 'Mind is the subject of all'. Buddh's spiritualism was construed as venerable chung-dam's 'Mind' on his own words.
He succeeded the integrated spirit found in Unified Buddhism in Shilla Dynasty, Defend-one's-own-country Buddhism of Goryeo, and Save-the-nation Buddhism in Joseon Dynasty. It may be the most appropriate way for us to develop the eternal enlightenment within ourselves, and to practice the life of 'compassion with no enemy(慈悲無敵)‘ by learning from his way of Bodhisattva.
Key words: Venerable Chung-dam, Mind, Ultimate Reality, A Boddhisattva of the 20th century.
[출처] 靑潭스님의 한국불교사에서의 위치|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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