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육바라밀 - 법륜스님

수선님 2021. 3. 14. 12:07

이번 호 지상법문은 ‘즉문즉설’로 널리 알려진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의 저서 「행복하기 행복전하기」에 실린 ‘보시와 마음공부의 상관관계’의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스님은 “누구로부터 사랑 받기 위해 사랑을 하고, 더 큰복을 얻기 위해 보시하면 그 욕심 때문에 괴로움의 과보가 따르게 된다”며 무주상보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인생 문제를 내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서 해결하려면 누군가 힘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합니다. 부탁하려면 맨입으로 안되니까 무엇을 갖다 바쳐야 되고, 또 빌어야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언가 갖다 바치는 것을 보시라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이 내 안의 어리석음을 깨쳐서 내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굳이 누구에게 부탁할 필요도 없고, 또 부탁할 일이 없다면 갖다 바칠 일도 없으니 보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수행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남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리석음을 깨쳐서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수행은 무엇을 갖다 바치거나 비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육바라밀 중 첫 번째가 보시바라밀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시가 수행이 되는 가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얻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을 얻으면 처음에는 기쁘지만 한 번 얻고, 두 번 얻고 계속 얻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주는 사람이 설령 부모라 하더라도 그 사람 앞에만 서면 마음이 위축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에게 무언가 주는 사람이 좋아서 만나지만 자꾸 얻게 되면, 되도록 그 사람을 안 보려고 합니다. 나에게 무언가 자꾸 달라는 사람을 보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주는 사람을 보는 것도 사실은 불편합니다.

얻는 것도 행복이 아닙니다. 마치 마약하고 똑같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아주 효과가 좋지만 다음에 같은 양을 투약해도 똑같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중독이 되면 마치 마약이 건강을 해치듯이 행복을 해치고, 자립심과 창조성을 해칩니다. 결국 의지하는 인간, 종속되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받는 것에 길들여져 습관이 되면 자식도 부모의 도움을 받는 것에서 못 벗어나고, 부모도 자식을 욕하면서도 주는 버릇을 못 버립니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그게 나쁜 줄 알면서 못 끊는 것과 같습니다. 즉 나도 힘들고 자식에게도 아무 도움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중독성에서 벗어나 건강해지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바라는 마음 없이 사랑하고 베풀면 됩니다. 사람은 베풀 때 기쁨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열 때 기쁨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바다를 보고 좋아하면 내가 좋은 것이지 바다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산을 보고 좋아하면 내가 좋고, 꽃을 보고 좋아해도 내가 좋고, 달을 보고 좋아해도 내가 좋은 것입니다. 산을 좋아하고 들을 좋아하고 꽃을 좋아하는 것은 아무 부작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받으려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 스스로가 기쁩니다. 짝사랑은 스스로에게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사랑이 불행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사랑을 받으려는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섭섭함이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고통이 따릅니다.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재물을 보시하는 것은 재보시(財布施)라고 하고,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좋은 법문을 베푸는 것은 법보시(法布施)라고 합니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주고, 보호할 사람이 없는 이를 보호해주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의 의지처가 되어 주는 등 여러 가지 정신적인 보살핌을 주는 것은 무외시(無畏施)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으로 보시하면 좋을까요?

내가 그 어떤 것을 베풀든지 주는 마음만 내면 나에게 기쁨이 생기지만 대가를 바라고 도움을 얻으려는 마음을 내면 즉시 미움과 괴로움이 생깁니다. 사랑받기 위해 사랑을 하고, 더 큰복을 얻기 위해 보시하면 그 욕심 때문에 괴로움의 과보가 따릅니다.

그러나 사랑받으려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기쁨만 있지 괴로움은 없습니다. ‘다만 사랑할 뿐이고, 다만 베풀 뿐이다’라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됩니다. 이것을 보시바라밀이라고 말합니다. 바라밀이란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주고 큰 것을 얻으려는 보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닙니다. 설령 그렇게 해서 큰 것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권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데서 기쁨을 얻는 것은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수행자에게 보시는 그 자체가 기쁨이고 베푸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농장을 만들고, 여러분이 농장에 와서 일을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돈을 내고 하면 주말놀이가 되고, 돈을 받고 하면 주말부업이 됩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베푸는 행위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얻으려고 하는 것은 노동이 돼 버린다는 것입니다.

정토회에서는 모두 돈을 받지 않고 일합니다. 오히려 자기 돈을 내면서 일하므로 이것은 자기실현입니다. 이런 원리를 잘 따져 보면 베푸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재물이든, 노력이든, 자꾸 보시를 하라고 수행자에게 권유하는 것입니다.

정토회에서는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는 수행과 보시, 봉사를 수행방법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재물로 베푸는 것은 보시라고 하고, 몸으로 보시하면 봉사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보시, 봉사로 나눠 말하지만 크게 보면 다 보시에 속합니다. 법을 설하든, 재물을 베풀든,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을 이롭게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다 보시가 됩니다.

여러분이 보시하면 집착을 끊게 됩니다. 보시를 함으로써 자기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복 받기 위해서 보시를 한다면 언제 복이 올까하고 기다려야 하지만 받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설법하고 있는 것이 복이고 설법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복이고, 법당에서 청소할 수 있는 것이 복이고, 사람들에게 한끼 식사 대접하는 것이 복입니다.

내가 음식을 잘하면 음식 만드는 일로 봉사하고, 음식 만드는 재료비가 필요하다면 돈으로 보시하고, 식사할 공간이 있으면 공간을 제공하면 되고, 또 맛있게 만든 음식을 먹어 줄 사람이 필요하면 먹어줌으로써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함으로써 남편을 기쁘게 하고, 남편은 아내가 필요한 것을 제공함으로써 아내를 기쁘게 하면 서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부부들은 그것을 모르고 아내는 아내대로 손익을 따지고, 또 남편은 남편대로 손익을 따지는 인간관계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 손익을 따져보고 필요에 의해서, 또는 얼마간의 이익에 매여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부부관계는 이렇게 이익을 중심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지간에 행복이 없고, 따라서 가정에 행복이 없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돈을 받겠다는 도둑의 마음입니다.

오늘날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심리 중에 이런 도둑의 마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는 아무것도 해 놓지 않았으면서 내놓으라고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부중생의 마음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가 일을 하고 돈을 받으려는 소위 노동자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현명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세 번째는 얻으려는 마음 없이 다만 베풀기만 하는 성인의 마음, 보살의 마음입니다.

보시가 수행이 되려면 보살의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베푸는 즉시 행복해지고,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내는 즉시 이미 행복해져 있습니다. 이것이 과보를 받는 것이고,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의 관점에서 본 인과응보입니다.



법륜 스님은



스님은 지난 1998년 설립한 정토회(www.jungto.org) 에서 정토수행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있으며, 2000년에는 만해상 포교상을, 2002년에는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실천적 불교사상’․‘인간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금강경 이야기’․‘반야심경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정리=이병철 기자

 

 

 

 

 

 

 

 

 

 

 

[출처] 법륜스님|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