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법담법화

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 <7>

수선님 2021. 3. 14. 11:49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면
오온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 일으키고 탐욕 떠나 해탈하게 돼
색(色)은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는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그 모든 색은 나도 아니요, 나와 다른 것도 아니며,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고 알아야 하나니, 이것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如實知]이라 하느니라.

수(受)·상(想)·행(行)도 마찬가지이며, ‘식(識)은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는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그 모든 식은 나도 아니요, 나와 다른 것도 아니며,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고 알아야 하나니, 이것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라 하느니라
 
[원문]
(三○) 如是我聞 : 一時, 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 爾時, 尊者舍利弗在耆도굴山中. 時, 有長者子名輸屢那. 日日遊行, 到耆도굴山, 詣尊者舍利弗, 問訊起居已, 각坐一面, 語舍利弗言.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가란타죽원에 계셨다.
그때 존자 사리불은 기사굴산에 있었다.
이때 수루나(輸屢那)라는 장자의 아들은 여러 날을 걸어 기사굴산에 도착하여 존자 사리불에게 나아가 안부를 묻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존자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제1권 제30경(<대정장> 2, p.6a-c)이다. ‘수루나(輸屢那)’라는 경명은 소나(Sona)라는 장자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경은 사리불 존자가 기사굴산(耆사굴山)에 머물고 있을 때 수루나라는 장자의 아들에게 설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SN 22:49-50 Sona)에서는 붓다께서 라자가하의 벨루와나에 있는 깔란다까니와빠(迦蘭陀竹園)에 계실 때 장자의 아들 소나(Sona)에게 직접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왜 이처럼 아가마와 니까야의 전승이 다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위 원문의 ‘예(詣)’는 삼가 뵘[拜見], 삼가 찾아뵘[拜訪]이라는 뜻이다. 원문의 ‘문신기거(問訊起居)’는 찾아뵙고 안부를 여쭘이라는 뜻이다. 사리불(舍利弗)은 사리뿟따(Sariputta)의 음역이다. 그는 원래 외도(外道)였던 산자야 벨라띠뿟따(Sanjaya Belatthiputta )의 제자였는데, 붓다께서 성도 후 라자가하를 방문했을 때 친구였던 목갈라나(Moggallana, 目건連)와 함께 붓다께 귀의했다. 후일 두 사람은 붓다의 수제자가 되어 불교교단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원문]
“若諸沙門·婆羅門於無常色·變易·不安隱色言: 我勝·我等·我劣. 何故沙門·婆羅門作如是想, 而不見眞實? 若沙門·婆羅門於無常·變易·不安隱受·想·行·識而言: 我勝·我等·我劣. 何故沙門·婆羅門作如是想, 而不見眞實?” “若沙門·婆羅門於無常色·不安隱色·變易言: 我勝·我等·我劣. 何所計而不見眞實? 於無常·變易·不安隱受·想·行·識言: 我勝·我等·我劣. 何所計而不見眞實.”

[역문]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건 만일 무상한 색, 변하고 바뀌며 안온하지 않은 색에 대해 ‘나는 너보다 낫다. 나는 너와 같다. 나는 너보다 못하다’고 말한다면, 사문이나 바라문이 이런 생각을 한다면 왜 진실을 보지 못합니까? 또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이 무상하고 변하고 바뀌며 안온하지 않은 수·상·행·식에 대해 ‘나는 너보다 낫다. 나는 너와 같다. 나는 너보다 못하다’고 말한다면, 사문이나 바라문이 이런 생각을 한다면 왜 진실을 보지 못합니까?”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이 무상한 색, 안온하지 않은 색, 변하고 바뀌는 색에 대해서 ‘나는 너보다 낫다, 나는 너와 같다, 나는 너보다 못하다’고 말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자는 누구이건 진실을 보지 못한다. 또 무상하고 변하고 바뀌며 안온하지 않은 수·상·행·식에 대해서 ‘나는 너보다 낫다, 나는 너와 같다, 나는 너보다 못하다’고 말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자는 누구이건 진실을 보지 못한다.”
 
[해석]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은 인도의 종교·사상가를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다. 이른바 수행자와 성직자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사문(沙門, samana)은 ‘수행자’라는 뜻이고, 바라문(婆羅門, brahmana)은 ‘성직자’ 혹은 ‘사제자(司祭者)’라는 뜻이다. 붓다시대의 자유사상가를 통칭하여 사문이라고 불렀다. 붓다도 많은 사문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반면 바라문은 베다의 전통을 계승한 인도의 전통 사상가를 말한다. 또한 인도의 사성계급 제도에서 최상위의 계급을 말하기도 한다.

위 원문의 ‘불안은(不安隱)’은 ‘불안온(不安穩)’과 같은 말이다. 은(隱)은 곧 온(穩)을 의미한다. 원문의 ‘아승(我勝)·아등(我等)·아열(我劣)’은 ‘나는 우월하다, 나는 동등하다, 나는 열등하다.’(seyyo ham asmiti, sadiso ham asmiti, hino ham asmiti)라는 뜻이다. 원문의 ‘하소계(何所計)’는 의식의 작용으로써 여러 가지 사물을 사량분별(思量分別)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소계란 ‘어떻게 사량(思量)하여 아느냐’라는 뜻이다. 한편 이 부분에 해당하는 니까야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소나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두고 나는 우월하다, 나는 동등하다, 나는 열등하다고 여긴다면 누구든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닌가?”(SN Ⅲ, p.48)

“소나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두고 나는 우월하다, 나는 동등하다, 나는 열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있는 그대로를 보는 자가 아닌가?”(SN Ⅲ, pp.48-49)
이와 같이 한역과 니까야의 핵심 내용은 동일하다. 이른바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오온에 대해 ‘나는 우월하다거나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고 여기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 가지 형태의 마노(mano, 自慢)이기 때문이다.

[원문]
輸屢那! 於汝意云何? 色爲常·爲無常耶?” 答言: “無常.” “輸屢那! 若無常, 爲是苦耶?” 答言: “是苦.” “輸屢那! 若無常·苦, 是變易法, 於意云何? 聖弟子於中見色是我·異我·相在不?” 答言: “不也.” “輸屢那! 於意云何? 受·想·行·識爲常·爲無常?” 答言: “無常.” “若無常, 是苦耶?” 答言: “是苦.” “輸屢那! 識若無常·苦, 是變易法, 於意云何? 聖弟子於中見識是我·異我·相在不?” 答言: “不也.”

[역문]
“수루나여, 너의 생각에는 어떠하냐? 색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수루나여, 만일 무상하다면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수루나여, 만일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너의 생각에는 어떠하냐? 거룩한 제자들이 그런 색에 대해서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와 다르다. 이것은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수루나여, 너의 생각에는 어떠하냐? 수·상·행·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만일 무상하다면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수루나여, 만일 수·상·행·식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너의 생각에는 어떠하냐? 거룩한 제자들이 수·상·행·식에 대해서 ‘이것은 나다. 나와 다르다.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해석]
이 부분은 존자 사리불 존자가 수루나에게 오온(五蘊)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설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이해하지 못하면, 앞에서 질문한 세 가지 형태의 마노(mano)가 잘못된 것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문]
“輸屢那! 當知色, 若過去·若未來·若現在, 若內·若外, 若추(粗)·若細, 若好·若醜, 若遠·若近, 彼一切色不是我·不異我·不相在, 是名如實知. 如是受·想·行·識, 若過去·若未來·若現在, 若內·若外, 若추(粗)·若細, 若好·若醜, 若遠·若近, 彼一切識不是我·不異我·不相在, 是名如實知. 輸屢那! 如是於色·受·想·行·識生厭·離欲·解脫, 解脫知見: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時, 舍利弗說是經已, 長者子輸屢那遠塵離垢, 得法眼淨. 時, 長者子輸屢那見法得法, 由於他, 於正法中, 得無所畏. 從坐起, 偏袒右肩, 胡궤合掌, 白舍利弗言: “我今已度, 我從今日歸依佛·歸依法·歸依僧, 爲優婆塞. 我從今日已, 盡壽命, 淸淨歸依三寶.” 時, 長者子輸屢那聞舍利弗所說, 歡喜踊躍, 作禮而去.

[역문]
“그러므로 수루나여, 너는 마땅히 ‘색(色)은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는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그 모든 색은 나도 아니요, 나와 다른 것도 아니며,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고 알아야 하나니, 이것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如實知]이라 하느니라.

수(受)·상(想)·행(行)도 마찬가지이며, ‘식(識)은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는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그 모든 식은 나도 아니요, 나와 다른 것도 아니며,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고 알아야 하나니, 이것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라 하느니라.

수루나여, 이와 같이 색·수·상·행·식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떠나 해탈하면, 해탈지견(解脫知見)이 생겨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그때 사리불이 이 경을 설명해 마치자, 장자의 아들 수루나는 티끌과 때를 멀리 떠나 법안(法眼)이 깨끗해졌다. 장자의 아들 수루나는 법을 보고 법을 얻어서 남을 의지하지 않고 바른 법 안에서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꿇어앉아 합장하고 사리불에게 아뢰었다.

“저는 이제 제도되었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하여 우바새가 되겠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목숨을 마칠 때까지 깨끗하게 삼보에 귀의하겠습니다.”
그때 장자의 아들 수루나는 사리불의 설법을 듣고 기뻐 뛰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해석]
이 경 역시 다른 오온 관련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결론은 동일하다. 이른바 오온은 무상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며 ‘나(我)’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 이와 같이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면, 오온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떠나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 즉 해탈지견(解脫知見)이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그는 분명히 안다고 한다.

이러한 사리불 존자의 설법을 듣고, 장자의 아들 수루나는 티끌과 때를 멀리 떠나 법안(法眼)이 깨끗해졌다. 장자의 아들 수루나는 법을 보고 법을 얻어서 남을 의지하지 않고 바른 법 안에서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삼보에 귀의하여 재가신자가 되었다. 이 경에 의하면 그는 사리불 존자를 만나기 전에는 재가신자가 아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사리불 존자가 설한 이 경의 말씀을 듣고, 법안(法眼)을 얻었던 것이다. 참으로 희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수루나처럼 티끌과 때를 여읜 법안을 얻기를 간절히 바란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 <7> - 한국불교신문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면 오온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 일으키고 탐욕 떠나 해탈하게 돼색(色)은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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