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비구니 교단에 대한 여성주의적 고찰* / 조은수
어찌 불법(佛法)에 비구 비구니가 있으며 세간과 출세간이 있겠는가 어찌하여 북(北)이 있고, 남(南)이 있으며 어찌 너와 내가 있을 수 있으리오
― 비구니 본공(本空) 스님(1907~1965)의 1935년 게송1)
1. 들어가는 말
1970년대 한국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 밑에서 비구니로 출가하여 수행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프랑스에서 각종 참선 그룹을 지도하고 있는 재가 지도자 마르틴 배철러에 따르면 세계의 비구니들을 비교해 볼 때 대만 비구니의 지위가 가장 높고 그 다음으로 한국 비구니의 지위가 높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서 승려 생활 당시 만났던 비구니 선경 스님(1903-1994)을 인터뷰하여 그분의 전기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에서의 비구니의 삶과 수행에 대해 기술한 책에서, 한국 비구니들이 그 삶과 수행의 독특한 전통과 문화, 그리고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는 것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였다.2)
한국은 현재 세계적으로 비구니 교단과 그 수행 전통이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비구니 구족계를 받는 비구니 승단이 존재하는 곳은 대만, 한국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만 불교는 1960년대 이후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므로, 1,600년이 넘도록 유사한 이념, 의식, 수행의 전통을 지속해 온 한국의 비구니 승가는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비구니 승가는 최근 30년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현재 조계종 출가승의 절반이 비구니이다.
비구니 승가는 승단으로서의 형식과 규범을 갖추어 정식 출가와 수계의 절차를 지키고, 수행자로서뿐만 아니라 포교, 교육, 사찰 운영 등의 제 영역에서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그들은 강원과 선방에서 조직적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법맥과 사자상승을 통해 자기 존재의 전통과 역사성에 대한 의식을 유지하고, 유사한 정체성을 가진 다른 수행자들과 사원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체 내의 독립성과 오랜 수행의 전통을 가졌다 하더라도, 비구니의 ‘사회적 위상’, 특히 교계 내에서 비구니의 지위에는 아직도 많은 불평등의 요소가 있다. 불교가 현대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요구와 기대에 비해 불교계 내의 양성 평등 의식은 답보 상태에 있다. 근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향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여성의 사회적 참여의 정도는 국제적 기준에서 볼 때 하위에 속한다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것은 비구니 승단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 사회 또는 한국불교계의 문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본 글은 한국 비구니 교단의 역사적 의의와 그 연구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즉 비구니 교단이 갖고 있는 응집력 및 자주성과 승가 내에서의 사회적 지위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우선 현대 한국 비구니 승단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고, 특히 최근 30년간 비구니들의 괄목할 만한 자주 의식과 자활적 활동이 가능하게 된 원인을 불교계 내의 사정과의 관련 속에서 설명한 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비구니 승단이 가지는 의의에 대해 고찰하겠다.
2. 한국불교의 여성 수행 전통
한국에 비구니 교단이 성립한 것은 4세기경에 불교 전래와 더불어 비구 전통이 생겼을 때 거의 동시대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를 통해 신라에 불교가 전해져서 처음 신도 내지 후원자가 되었던 모례의 여동생 사씨(史氏)를 최초의 여승으로 볼 수 있겠다.
한편 백제의 경우는, 577년 여승을 포함한 일군의 승려들을 일본에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사기》에 나타나고, 655년 범명이라는 비구니가 쓰시마 섬으로 건너가 어떤 대신에게 《유마경》을 독송하여 병을 고쳐주었다고 하는 등, 일본에 불교가 전파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이중 몇몇 일본 여성들은 백제로 와서 비구니계를 받고 돌아갔다는 기록도 있다.3)
이것은 불교와 여성, 또는 여성사를 소개하는 자료에는 흔히 언급되는 사실이다.
한국 고대사에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자료는 극미하나 이것은 한국고대사 연구의 일반적 어려움일 뿐이다. 《삼국유사》에는 많은 여성과 불교의 가르침을 드러내 보이는 여러 설화들이 등장하는데 신앙이 깊은 비구니나 불교 여성이 수행과 깨달음의 결과로 나타내 보인 이적(異蹟)에 관한 자료라 역사적 사실로 취급하기는 어렵지만 그 당시 여성이 불교 수행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기록들 곳곳에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통해 많은 비구니들이 존재했고 그들의 지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국교로서 숭상됨으로써 그들의 신행 활동은 그러한 외호 속에서 권장되고 칭송되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 유교적 이념을 사회의 근간으로 삼으면서 불교 신앙은 여러 점에서 많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여성의 경우는 더구나 유교적 여성 통제에 의해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에서 여성들의 사찰 출입은, “부녀가 중과 같이 절에 올라가면 실절(失節)한 것으로 논죄한다.”는 등의 여러 다양한 사회적 법률적 기제에 의해 통제되거나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불교는 생활의 한 부분이자 정신적인 안식처로서 여성들과 늘 함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불교 여성에 관한 기록의 내용은, 남녀가 섞이는 것을 금지하고 부녀의 사찰 출입을 금한 나라의 원칙을 어긴 것이 문제가 되어 문초를 받는다든가, 출가하려는 여성이나 비구니들을 비난하거나 사원 혁파를 주장하는 대신들의 제청, 그리고 정업원 등의 궁궐 내 불당에서의 불교 행사를 비판하는 상소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실록에 나타나는 불교 여성에 대한 부정적 기록들은 당시 사회의 불교관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의 여성관을 알려주는 증거이며, 조선조 내내 이런 사건 기록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불교 수행의 전통이 계속 존재하였다는 것을 강력히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생들 스스로가 불평하듯이 이들 여성들은 “금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여 꺼림이 없었고”4) 그들의 불교 신앙은 지속되었다.
유교적 가족 질서 속에 머물지 않고 유교적 질서와 규범에서 일탈한 자로서 비구니란 존재는 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실록의 상소에 보면 “국조(國朝) 이래로 승니의 도성 출입을 금단한 것은 음란하고 간특함을 징계하여 민속을 바로잡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부녀로서 지아비를 배반하고 주인을 배반한 자와 일찍 과부가 되어 실행(失行)한 무리가 앞을 다투어 밀려들어 모이는 장소가 되었는데, 거기서 이들은 간음을 행하며 간사한 짓을 하는 등 현혹시켜 어지럽히는 정상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5)라고 하여 배반, 실행, 간음, 간사 등의 어휘로 비구니를 연관시키고 있다.
여성에 대한 혐오가 이단으로서의 불교를 믿는 여성으로서 비구니의 경우에 그 절정에 달해 있음을 알 수 있다.6)
불교는 특히 왕실의 여인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신행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조선 중기까지 왕실의 궁인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불교가 신행되고 있었다. 이들 궁인들은 스스로 불상을 모시고 남은 여생을 불교에 귀의하여 비구니 승려가 되기도 하였으니 궁궐에는 자연히 불당이 이루어졌다. 어떤 점에서 국왕들도 암묵적으로 이러한 신행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경우도 나타난다.
신도 층이 여성에 주로 한정되고 또 사대부 집안 부인과 왕실의 여성들 중 많은 후원자들이 있었지만 그 후원자들 남편의 성향이 어떠냐, 또 남편과 관련된 정치 상황이 어떠냐에 따라 비구니 절의 운명이 많이 결정되었다. 어느 유명한 유학자의 부인이 남편이 죽자 출가를 해서 비구니가 되었는데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그 절이 문 닫아 버렸다는 등등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연산군은 자기 아버지의 후궁들이 비구니가 되었다고 아예 그 절의 모든 비구니를 노비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경제적 사회적 곤란에서도 또한 끊임없는 유학자들의 사상적 공격 속에서도, 불교 수행과 수행의 근거지인 사찰들은 계속 지탱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사적 공간에서의 불교 신앙은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은퇴한 남성들이 승려들과 교류하거나, 사찰을 순례하고 참배한 기록들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한 예로 금강산의 유점사는 그 당시 식자들의 대안적 종교적 귀의처라고 볼 수 있다. 사대부 집 아들인 율곡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유점사에 가서 일시적으로 출가를 했다는 것도 좋은 예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 신행의 패턴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 유교 국가 이데올로기가 경직화되면서 불교에 대한 박해가 가일층 심해짐에 따라 급격히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하여간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던 중 들은 이야기를 서사시로 옮겨 썼다는 〈도강고가부사(道康톲家婦詞)〉에 보면, 강진 지방의 어떤 여자 아이가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강압과 중매쟁이에게 속아 늙은 포악한 남성에게 시집가 남편의 매질과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가 남편의 고발로 관가에 끌려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시 조선시대 후기 18세기 무렵에도 사찰이란 여성에게 일종의 은신처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사회 이념으로서의 유학과 개인의 사적 영역에서의 신앙으로서의 불교는 서로를 배제하는 점도 있지만 보족하는 점도 있었다. 돌아간 부모와 가족이 내세에서 극락에 나기를 발원하는 목적으로 여염집 부녀자들이 지장보살도나 시왕도 등의 불화와 불상 조성과 또 관련 경전 유포를 위해 시주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효라는 유교적 도덕 이념과 불교적 신앙이 결합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사회 분위기에서 종교 간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나타난 새로운 신앙 형태라 생각된다.
3. 근대 이후 한국의 비구니
500년의 긴 조선조를 지내고 나서도 한국의 비구니들은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조 말에 비구니 또는 여승들이 어떤 형태로 생활을 유지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있다. 아마 당시 불교계가 전반적으로 그랬듯이 제도나 수행의 형태, 이념 등에서 많은 변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게 하는 여러 정황들이 있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비구니들의 수행 행적의 기록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 이후 나타난 최초의 기록들을 찾아본다면, 한국 비구니들은 투철한 수행과 삶의 역사를 유지하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왔다는 것을 앞에서 본 본공 스님의 게송 등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마르틴 배철러의 책의 주인공인 선경 스님(1903~1994)의 일생을 잠깐 살펴보자.7)
그분은 1903년 농사짓는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9세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형제 많은 집안에 가난에 찌든 인생이 힘겨워 자살을 생각하였다. 그때 하늘에서 너와 부처님의 인연이 남다르다는 말이 들려 이 말을 곧 여승이 되라는 말로 알아듣고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18세 되던 해 1921년에 마곡사 근처 영운암을 찾아갔다. 키가 작고 못났다고 안 받아준다는 것을 그 절의 주지인 인우 스님이 나와 보시고 작지만 괜찮아 보인다고 받아주셨다. 그 절의 율사는 명덕 스님이었는데 그분은 당시 마곡사를 비롯한 인근 사찰의 큰 후원 집안 출신으로 한학에 능한 분이었다. 특히 여기서 명덕 스님에 대한 기록을 보면 상당한 수준의 전통 교육을 받은 규수로서 자발적으로 출가하신 분으로 여겨지는데, 마곡사를 후원하는 집안이었다는 것으로 보아서도 지방 유지들이 승가를 후원하는 종교적 습속이 당시에도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선경 스님은 그 후 수행에 정진하여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고 선방에서 참선 수행을 하였다. 본공 스님과 더불어 1900년대 중반에 이름을 날리던 여성 선사 만성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만공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책 중에 나오는, 이십 대의 선경 스님이 도반인 본공 스님과 함께 선지식을 만나 가르침을 받겠다고 둘이서 눈이 뒤덮인 산을 넘어 가는 대목은 아주 감동적이다. 이들 여성은 어떤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이러한 출가승의 길을 택하게 되었을까. 한국 근대 시기의 비구니들의 삶과 그들의 수행의 궤적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상술하도록 하겠다.
한국의 비구니 교단이 그 조직적 수행, 교육의 체계를 갖추고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은 최근 삼십 년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발전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교 내부와 외부의 정황을 다 점검하는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의 기독교와 비교해 본다면 기독교 교회가 해방 후 왜 그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국제적 관심이 쏠려 해외에서만도 수십 편의 박사학위 논문이 나와 있다. 또한 대만 불교계에서 여성과 비구니가 왜 그렇게 중요한 종교 세력으로서 그리고 지도적 지위에 오르게 되었느냐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8)
이 시기에 어떤 요인이 작동하였는지를 밝혀낸다면 당시 비구니계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계 내부에도 어떤 변화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알려 줄 것이다. 이 일은 한 사람의 역량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이 같이 나서야 할 과제라 본다. 이것은 필자의 전문 영역은 아니나 그동안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것을 아래와 같이 여섯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보았다.
첫째, 집단적인 응집력이 비구니계의 성장의 큰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정화운동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친 승가 개혁 과정에서 비구니들이 보여 준 응집력은 한국 승가에서의 비구니들의 역량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비구니들은 상대적으로 좁은 환경에서 큰 집단을 형성하고 살아왔다.
비구니 강원이나 선원은 언제나 시설에 비해 정원이 넘치는 형편이었고 일반적인 생활 시설도 모자라고 열악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엄격한 규율하에서 생활했는데 그것은 엄격한 계율 탓도 있지만 열악한 집단적 환경 속에서 나타난 삶의 방식이었다. 집단적 생활은 개인적인 성장과 특기를 진작하는 데에는 부적절한 환경이었지만 공동의 목표를 담지하고 공동의 사회 활동에 참여케 하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둘째, 경제적인 환경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1970년대 이후 경제 발전에 따라 한국 승가의 경제력도 빠른 속도로 개선되어 왔다. 비구니들이 거주하는 사찰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따라 상당한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비구니들은 특유의 근검한 생활 태도로 이러한 경제적인 기회를 비구 사찰에 비해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능력의 확보는 내적으로는 비구니들에게 수행인으로서 그리고 포교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왔고, 외적으로는 수행과 대사회적 활동의 깊이와 폭을 넓히게 되어 외적 신뢰의 기반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최근 한국불교의 수행의 이상에 대한 이념이 상당히 바뀌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근대 한국 승가는 일로향상(一路向上)의 최상승(最上乘) 선 수행만을 지향하는 일종의 수행 제일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선 수행을 기준으로 이판과 사판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사판은 이판을 위해 존재하는 보조적인 불가피한 필요악 정도로 간주하는 최상승 수행 제일주의가 승가 내외를 지배하면서 1980년대까지 비구 선승들의 목소리는 승가 내외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수행승들이 종단 행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통적으로 사판에 속하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인 것 같다. 특히 현대 한국 사회가 전통 사회와 결별하면서 사원이란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존재하는 곳이고 이것을 잘 경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점차 인식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이판과 사판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졌고, 때에 따라서는 사판의 중요성이 이판을 능가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후 최상승 수선주의(修禪主義)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가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화두선 이외의 다양한 수행법에 대한 관심이 승가 내외에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간화선 이외에는 이단으로까지 배척되어 왔던 염불이나 기도, 두타, 이타 등의 수행법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수행 환경의 변화는 엄격한 계율과 단정한 수행 태도 자체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이러한 계기를 통해 비구들이 주도하던 승단이 오랫동안 보여 온 부패와 권력투쟁에 대비되어 비구니들의 수행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부각될 수 있었다.
넷째로, 한국 사회의 변화에 따라 승가에 대한 기대에도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종교 집단의 이타행, 대사회적 역할과 같은 문제들은 근대 한국 승가의 수행 제일주의하에서는 거의 무시되어 오던 것들이었다. 산속에 위치한 전통사찰들은 외부 사회의 변화에 크게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경제적 기반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고, 이들 전통사찰이 최상승 수행 제일주의의 근대 승가를 형성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가 다변화하고 거대화되면서 승가의 규모도 대규모 조직체로 확장되기 시작함에 따라 승가의 대사회적인 역할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전통사찰의 규모를 넘어서는 새로운 현대식 사찰들이 등장하고, 안으로는 전법과 대중 교화의 중요성, 밖으로는 종교의 대사회적인 역할 등의 문제들이 새로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다섯째로, 근대 한국에서 여성의 역할과 지위가 급격히 제고됨에 따라 이런 변화가 비구니의 위상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그에 따른 저항도 크고, 양성 평등의 사회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 실제와는 큰 격차가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만, 종교가 사회를 리드하거나 적어도 발맞춤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일반인들이 불교를 구식이고 봉건적이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의식은 권위적이라고 보는 시각을 교정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불교계도 이러한 경향에 참여하려고 모색하게 되었다. 몇 년 전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으로 비구니 스님이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처음 나왔을 때 교계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는 것은 사회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며 진보적이고 유연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섯째로, 전통적으로 대가족 사회를 지향하던 한국이 핵가족적 가족 사회로 변화하면서 가족 중심주의적 이념과 가치관이 전통적 효도의 개념을 대체해 가는 추세이며, 또 육아,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할 수 있다. 이런 추세 속에서 가정과 개인 간의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갈등에 대해 보다 더 잘 공감하고 그러한 문제의 미세함을 읽을 줄 아는 여성 성직자들이 신도들과 제자들과의 의사소통에 보다 성공적이고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4. 역사 속의 비구니들은 어디에?
그러면 현대에 들어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한국의 비구니들은 과거의 기록 속에서는 어디에 있는가. 20세기 후반 서구 신학계에는 남성으로서의 신의 이미지와 가부장적인 신관에 반항하여 여성신학이 하나의 학문분과로 등장하였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후 종교학자들과 진보신학자들에 의해 여성의 영성의 본질과 그 사회적 실현, 또한 과거의 기록에 숨겨진 여성 수행의 역사를 재발굴하고 조명하는 연구를 끊임없이 수행하고 있다. 무명으로 신앙을 담지해 온 무수한 여성들,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을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존 조르겐센 교수가 지적하듯이, 한국불교전서 전권을 통해 여성의 저술은 하나도 없다. 비구인 승려들은 자신들의 저술 속에서 어머니에 대해서 썼을지언정 비구니에 대해 글을 쓰지는 않았다. 효성 깊은 여성이나 비구니들을 논하는 경우는 대부분 중국 여성을 예로 들었지 한국 여성들은 아니었다.9) 한국 역사를 통틀어 여성의 종교 체험을 자신의 이름으로 서술한 기록은 없다.
필자가 본 바로는 조선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불교 가사들 중에서 어떤 오도송들은 여성들이 작가이거나 아니면 그들을 대신해서 쓰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한 이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앞에서 말한 선경 스님의 기록은 외국인 승려가 인터뷰를 통해서 얻은 기록을 해외에서 출판하였기 때문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다행히 문도들에 의해 여성 큰스님들의 문집이 출판되는 일이 있어, 화원사 선원장을 지낸 월주지명 스님의 《달빛은 우주를 비추네》라는 문집이 1996년에 출판되어, 지난 백 년여의 불교 여성 역사의 편린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전국의 산중 곳곳에 존재하는 비구니 강원과 선방의 생활은 현재까지도 외부와 거의 차단되어 있다. 조선시대를 통해 비구니가 불교 박해와 남존여비 사상의 이중의 희생물이 된 경험으로 인해 비구니는 은둔성 그것을 자신의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생활 태도 규범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앞에서 비구니들의 집단적 응집력을 거론했는데, 자신의 전통을 보존하겠다는 일념은 강하지만 외부에 자신을 노출시키거나 개인적 개성과 능력을 나타내기를 꺼리는 습관 때문이라 하겠다.
여성 자신이 불교 신앙에 대해 쓴 글이 많지 않다는 것은 다른 중국이나 일본 등의 경우와 비교해서 큰 제약점이다. 고전 사료도 없을뿐더러 최근세사의 경우에도 과거의 큰 비구니 스님들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찾기 어렵고 지금도 계속 없어지고 있다. 지금이라도 사찰에 깊숙이 묻혀 있는 사지(寺誌)나 다른 자료도 뒤져야 할 것이고 연로하신 비구니 스님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인터뷰도 하고 기록 자료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한 과거의 비구니의 삶과 그들의 수행에 대한 역사적 연구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공동생활의 조직과 교단의 제도에 대한 연구도 아울러 중요하다고 본다. 근대 비구니 승가의 형성 과정과 그 성격, 그리고 그들이 어떤 종류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는지도 밝혀내야 한다. 또한 앞에서 정약용의 시에서 본 것처럼 문학에서 등장하는 비구니, 또는 미술사적으로 본 여성 신앙의 패턴 등에 관한 연구도 기대된다. 또한 근현대 여성 선지식들이 전통적 가르침을 어떻게 달리 해석하였는지도 연구되어야 할 주제이다.
그런데 전통적 비구니 사회가 가지는 소극적 은둔적 분위기 때문에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형태의 오해와 왜곡이 만들어질 소지도 높다. 즉 현존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과거의 행적을 재현해야 하는 한계 속에서 현재의 계파적 환경과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규정하는 대로, 현존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견해가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정보를 제약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구니들에 대한 대외적인 편견을 불평하는 비구니들도 많다.
하지만 비구니 자신들이 가진 편견들의 정체도 다양하다. 특히 현존 비구니들 간에 존재하는 계파적인 속성은 치명적일 수 있다. 편견에 대한 편견, 이중 삼중의 편견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앞으로의 비구니에 대한 연구는, 연구의 목적과 방향에 대해 연구자들 간에 철저한 토론을 통해 새로운 이론과 인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또 다른 편견 속을 헤매게 될 가능성이 높으며 또 다른 왜곡과 불필요한 논쟁을 만들어 낼 가능성도 있다.
5. 비구니의 위상 ―팔경계(八敬戒)와 관련하여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고 현재 한국의 비구니 승가는 수적으로 비구와 거의 동수에 가까운 세력을 지니면서 한국 불교계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고 있다. 그러나 비구니의 승단 내에서의 현실적 지위는 그 숫자만큼이나 높은 것인가. 이 문제를 팔경계에 대한 교단 내의 해석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자.
불교 교리 일반을 들어 불교의 여성관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경우에 부닥치는 몇 가지 난점 중의 가장 어려운 것이 부처님이 비구니 출가를 허락하면서 조건으로 지킬 것을 요구했다는 팔경계법이다. 팔경계의 내용과 그 해석에 대해서는 그동안 무수한 논문들이 발표되었고 불교와 여성에 관한 학술 모임에서는 여지없이 등장하는 문제라서 새삼 말을 시작하기도 진부한 느낌이 들지만, 한편 이것만큼 불교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고민거리를 가져다주는 문제도 없다.
붓다는 당시 그의 계모이자 이모인 마하프라자파티가 여인 오백명을 데리고 와서 출가하여 수행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을 요청하자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아난다의 간청에 의해 마지못해 받아들이면서 비구니들이 팔경계(八敬戒 또는 8중계라고도 함)를 지킬 것을 말씀하셨다고 한다. 현재까지 이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그것은 부처님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보수적인 제자들(의 사상)에 의해 후대에 만들어진 계율이라는 것, 둘째는 부처님이 말했을 수도 있고 당신의 제자들이 만든 것일 수 있지만, 당시 출가를 원하는 여성들 가족의 반발과 사회적 반감을 감안하여 하신 방편적 발언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예를 들어 보겠다. 2004년 대만에서 열린 세계여성불자대회에서 대만의 비구니 스님들이 팔경계 문제를 놓고 패널 토론을 하는 자리였는데, 어떤 비구니 스님 발표자가 책상을 치면서, 우리는 그런 것 따르지 않는다라고 공개적으로 외치는 것을 보았다. 이어 당시 대만대학교 철학과의 불교철학 교수이던 흥칭 스님이 나와,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하였다.
한국에서 유학 온 어떤 비구 대학원생이 학기말 보고서에 대해 비평을 가하는 자신에게, 비구니가 비구를 나무란다고 비구니 팔경계를 운운하면서 소리를 지르더라는 에피소드를 좌중에 들려주는 것이었다. 대만 비구니의 기개와 어떤 한국 비구의 어처구니없는 반여성주의적 태도가 선명한 이미지로 대비되어 청중에게 비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들의 의견과 태도가 모든 대만 비구니나 한국 비구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일단은 짐작하게 한다. 후에 한국의 비구니에게 무작위적으로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팔경계 중에서 사람들의 눈썹을 치켜 올리게 하는 대표적 조목인, 100살 먹은 비구니라도 갓 출가한 비구를 만나면 절을 해야 한다는 조목에 대해 실제로 스님들이 그것을 지키는가 물어보았을 때, 대부분의 비구니 스님들은 비구와 만났을 때 서로 맞절을 한다고 대답하였다.
팔경계에 대해서는 그것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그리 중요치 않은 문제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는 편이라는 대답이 많았다. 그러나 이것을 비구 스님들에게 물었을 때 비슷한 대답을 들은 적도 있지만 어떤 비구 스님은 자신은 비구니에게 절을 안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몇 년 전 중앙종회에서 비구니들의 참정권― 이 문제는 나아가 비구니가 총무원장이 될 수 있는가 등의 문제와도 관련이 된다 ―에 관해 논란이 벌어졌을 때 당장 팔경계를 들어 비구니들을 공박하는 원로 비구 스님이 있었다. 그 외 불경에 나오는 여성을 불결하고 유혹하는 존재로 폄하하는 내용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화경》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여성은 남성으로 성을 바꾸어서 성불한다고 하는 등의 소위 변성성불설의 존재 등은 불교를 여성평등적 종교로 일방적으로 단정하지 못하게 하는 난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인류 역사에서 아직도 해명되지 않은 것으로 세계 종교사의 의문이기도 하다. 즉 왜 모든 신은 남자고 모든 성인도 남자인데, 그들을 받들고 봉행하고 후원하는 사람은 여자인가 하는 것이다. 양성 불평등의 문제는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불교의 특수성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고착화된 불평등한 구조 및 관념을 뛰어넘고자 인간의 (절대적) 평등을 주장한 그 가르침이 곧 불교의 근본 정신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세계 고등 종교를 통틀어 남성 성직자와 함께 여성 성직자의 교단이 나란히 존재하는 종교는 불교가 유일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가톨릭의 사제인 신부는 남자만 될 수 있고, 개신교파의 대다수는 현재까지도 여성 목사의 안수를 불허하고 있다. 반면에 붓다는 재세시에 여성 승단을 인정하였고, 교단 역시 여성과 남성 출가 성직자로 구성되며 그리고 여성과 남성 신자의 사부대중으로 이루어진다고 성문화하였다는 점에서 불교는 기본적으로 양성 평등적 종교이다.
또한 붓다 이후의 전개에서도 시대와 지역에 차이가 있지만 그 양성 평등과 민주성은 불교의 사회 정치적 이념적 지표가 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기본 정신은 유지되고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를 수용한 서양인들은 기독교의 신 중심적 사고가 가부장적 종교 전통을 강화하는 데 반해 불교는 양성 평등사상을 고취하는 종교로 이해했다. 1960년대의 미국에 불교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불교를 자유와 해방이라는 이념과 등치시킨 데 그 힘이 있었다.
특히 여성들은 불교를 기독교보다 훨씬 더 페미니스트적인 종교로 여겼고, 실제로 불교가 미국에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이들 페미니스트들의 기여가 컸다는 것은 미국불교 50년 역사가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불교가 갖고 있는 민주성과 평등성의 정신을 한국불교에서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채, 여전히 팔경계를 주장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세계 종교의 거대한 흐름에 한국불교의 진정한 의미의 참여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팔경계를 놓고 시시비비하기보다 불교계 내에서의 여성 참정권이나 불교 교단의 양성 평등적 전개 등과 같은 근본적이면서 실질적인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6. 남방불교 비구니 교단 재건과 관련된 논란
남방불교 각국에서 비구니 승단 재건을 둘러싸고 불교계 내에 많은 진통이 일고 있다. 초기불교에서 존재하였던 비구니 승단은 이후 남성 중심의 역사 속에서 곳곳에서 사라지게 되어,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이나 스리랑카에 전해진 테라바다 불교에서는 비구니 승단의 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스리랑카의 경우 11세기경에 이미 비구니 승단은 소멸하였다고 한다. 그 후 수계를 줄 수 있는 비구니가 없기 때문에 적법한 비구니가 나올 수 없다는 아이로니컬한 역사가 최근까지 계속되었다. 동남아시아의 경우 출가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수행자는 있으나 비구니 수계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비구니라 할 수 없다 하여 태국의 경우 이들을 매치라 부르며 그들의 사회적 지위도 무척 낮다.
그러나 최근 지식인 중에 매치가 된 여성들 중에서 매치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항의하고 비구니 교단의 재건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996년 용감한 스리랑카 여성 열 명이 인도 사르나트에 와서 인도의 마하보리소사이어티 소속 한국 스님들에게서 비구니계를 받고 돌아가 스스로 비구니 교단을 세운 일도 있다. 대만의 큰 사찰인 불광사 등도 스폰서가 되어 수계식을 열어 주고 있다.
태국의 담마난다 비구니(Dhammananda Bhikkhuni, 예전 이름 Chatsumarn Kabilsingh)는 교수 출신으로 그의 어머니의 뒤를 이어 비구니 승가 재건 운동을 하고 있으며 출판, 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환기하고 있다. 그는 2003년 스리랑카에서 비구니계를 받았다.
최근 국제 불교계에서 큰 논란거리가 일어났다. 호주의 퍼스(Perth)에 있는 보디냐나(Bodhinyana) 절의 주지 아잔 브람 스님(서양 사람으로 태국 아잔차 스님 문하로 출가한 사람)이 네 명의 여성에게 비구니 계를 준 것이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아잔 브람이 속한 태국의 본사(本寺) 왓 파퐁에서는 당장 그 다음날로 그를 소환해 심문한 후 앞으로 이런 일을 또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라고 요구했는데 그는 이를 거절하였고, 즉석에서 파문되었다.
이후 뉴스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아잔 브람 스님은 이중(二重) 수계의 규칙을 지켰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세계 여러 곳에서 10명의 비구니들이 날아와서 수계를 여법하게 치루었다고 답변하였고, 호주의 승가와도 사전에 의논하였음을 밝혔다.
세계의 불교계는 이것을 둘러싸고 남방불교 여성의 수계와 비구니 교단의 부활이라는 이슈를 놓고 다시 뜨거운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놓고 한 블로그에서 왓 파퐁의 결정을 찬성하는 스님들과 반발하는 서구 여성들 간에 공방이 치열하게 등장했는데, 그 찬반론의 입장의 논지를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었다.
우선, 전통이란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함부로 바꾸면 안 되는 것이라는 ‘전통불가침주의’ 논변, 수행이나 깨달음이란 초월적인 것이므로 현상적으로 여자냐 남자냐 또는 비구 비구니 옷을 입었는가 하는 외면적인 것은 중요치 않다며 왜 그렇게 여자들은 비구니가 되고 싶어 하느냐는 식으로 문제를 돌려 버리는 ‘본질주의’ 내지 회피론, 그리고 부처님이 여성도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지만 여성이 출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실상 주저했던 것처럼, 실질적으로 비구니가 되지 않고도 수행하는 태국의 매치 중에도 아라한과를 얻고 잘 수행하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는 ‘내실론’, 그리고 전통이란 하루아침에 바꾸어질 수 없고 비구니 전통이 소멸해 버리는 데 천 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듯이 이것을 다시 복원하는 데에 그만큼 신중히 차근히 접근해야 한다는 중도실용론 등이다.
특히 비구니가 아니어도 아라한과를 이룬 사람들도 많다는 답변에 대해서는 많은 논객들이 분노하여, 그렇다면, 남성들도 비구로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수행하면 될 것 아니냐는 말로 받아쳤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반응들은, 이미 불교사의 역사와 문헌 속에서 여성의 수행과 여성의 성불과 여성의 수계에 대한 나타났던 보수주의 주장의 논리 근거로서 사용되었던 각종 논변과 그 내용이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각종 불교 문헌과 역사 속 인물들이 여성 수계를 반대하는 데 썼던 그 같은 논리로 현재 21세기의 불교도들이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건에 대한 세계적인 파문을 놓고 벌써 어떤 서양의 종교학자는 이 문제가 내셔널리즘, 트랜스내셔널리즘, 젠더 등의 여러 문제를 담고 있다고 보고, 이 문제가 태국과 호주의 불교계를 넘어서 세계 불교계에 어떤 생생한 토론을 불러일으킬지 주목된다고 흥분하는 메시지를 불교학자들의 리스트 그룹에 보내왔다.
앞으로의 추이가 주목되지만, 승단의 수계법과 그 의식은 이천육백 년 불교 역사를 통해 내려온 가장 비밀스럽고 폐쇄된 영역 중의 하나로, 일반인들이 여성의 수계 권리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 어떤 효과를 당장 가져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번 호주의 경우를 보아 이런 일을 시작한 것이 서양 출신 승려임을 감안해 보면 역시 변화는 외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7. 불교의 여성주의적 해석
이왕 서양 이야기가 나온 만큼 서양의 불교학계에 나타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연구 성과들의 대략을 소개해 보겠다. 초기불교 경전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여성 출가 수행자들의 수행 기록, 특히 장로 비구니 들의 종교적 게송 모음인 《테리가타》에 드러나는 그들의 깨달음의 세계와 영웅적 수행의 모습에 많은 연구자들은 주목하였다. 새로운 연구 주제의 등장과 더불어 인도 티베트 불교에 초점을 맞추어 인도에서의 초기 비구니 승가의 성립, 스리랑카 등의 상좌부불교 전통에서 비구니 승가의 발전과 소멸에 대한 역사적, 종교학적, 여성학적 연구가 나타났다.
동아시아의 전통에 대해서는 미리암 레버링 등에 의한 중국 선종사 속에서 등장했던 여성 조사들에 대한 연구가 있다. 그는 송대의 선사 대혜종고의 비구니 제자인 묘도(妙道) 선사와 묘총(妙總) 선사에 대한 연구에서 대혜종고는 간화선법에 대해 그의 비구니 제자들의 수행 과정과 결과를 보고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주장한다.10) 한편 한국 비구니에 대한 전통 문헌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중국불교와 일본불교에서의 비구니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한국의 비구니에 대한 이해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 송대의 엘리트 비구니들에 대한 기록은 우리의 고려시대 불교의 신행 형태를 가늠하게 하고, 길잡이 역할을 한다.
전통 사회의 불교 여성 또는 비구니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최근 일반 교양서로서 현대의 불교 여성 지도자들의 자서전들이 다수 출판되었으며11) 중국, 대만, 일본 등의 현대의 여성과 불교에 대한 전문 학술연구서들도 다수 출간되었다.12) 대만의 비구니 승단에 관한 연구는 대만의 역사가 50년에 불과한 만큼 그 특성상, 근현대사와 관련한 사회학적 연구의 성격을 띤다.
대만은 불교 국가라 할 수 있으며, 특히 비구니들의 왕성한 활동, 승려의 90퍼센트 이상이 비구니이고 교단 내에서의 지위뿐만 아니라 사회에서의 존경은 다른 어느 국가에 비할 수 없이 높다. 대만의 비구니 승가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 대한 연구가 서구 학계에 등장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여성의 조직력, 종교성 등 여러 측면의 연구가 최근 십여 년 사이에 자국 내에서 그리고 서구사회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근 대만 청화대학의 줄리아황 교수가 출판한 대만의 자제공덕회 설립자인 비구니 증엄 대사에 대한 연구서는 학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13)
이러한 비구니에 대한 관심은 서구사회 전 분야에서 일어난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연구에서 자극받아 나타난 것은 물론이다. 특히 여성학의 발전에 따라 기독교 신학에서는 여성신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자리 잡게 된 데 대한 불교의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성신학에서는 가부장적인 신의 이미지와 권위적인 교회의 위계질서를 비판하면서, 인류 역사를 통하여 소위 세계 종교라고 불리는 고등 종교들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켜 왔는지 밝히고, 또 지구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현대사회의 대립과 모순을 교정하기 위한 대안적 사고를 찾기 위해 여성의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연구를 전개시킨다.
불교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시도의 최초로 1993년에 출판된 리타 그로스(Rita Gross)의 Buddhism After Patriarchy를 들 수 있다.14)
불교와 페미니즘과의 연결을 시도한 최초의 본격적 저술로 이 분야의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해 서구의 페미니즘 연구 성과를 수렴하여 불교에 적용할 뿐만 아니라, 역으로 불교의 교리와 수행관에서 페미니즘에 시사를 줄 수 있는 이론을 추출해 내려는 야심적인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의 기성 종교에 대한 페미니즘의 입장에서의 비판적 시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소위 고등 종교에서는 남성 중심의 교단과 남성적 가치의 사상이 주류를 이룬다. 따라서 중요한 종교적 의례나 교단 조직에서 여성은 배제되고 주변화되고 사소화된다. 설교와 의례는 남성이 주관하고 여성은 청취자이고 들러리일 뿐이다. 종교의 주요 인물들 즉 매스터들은 거의 남성이며, 아예 여성은 고려 대상도 되지 않는다.
설사 소수의 탁월한 여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을 드러내려는 노력이 없었으며, 따라서 여성은 역사 속에 파묻혀 존재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그럼에도 종교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의 70~80% 이상이 여성이었다. 그리고 여성은 종교 교단과 남성 성직자의 후원을 위한 경제적 자원의 주요 근원이었다. 또한 여성은 남성 성직자들에게 부정적인 존재로 취급되고 교리적으로도 이를 뒷받침하여 여성은 악의 존재로 취급하는 사상이 나타난다.
이런 가부장적 구도, 즉 남성이 설정해 놓은 진리 인식과 수련 방식을 전제로 하는 종교 조직과 문화 속에서는 여성 매스터들이 나올 수 없었으며 실제로 탁월한 선각자가 있다 해도 그들의 논리는 남성에게 이해되기 힘들거나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이 쉽게 인정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질문은 그럼 왜 여성은 남성 지도자에게서 배우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성 성직자의 교단 내에서의 지위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여성이 남성과 분리되어 교육, 신행, 포교의 공간을 가지는 종교 단체일수록 여성 교단의 발전의 정도가 높다고 한다. 여성은 남성 스승들에 의해 훈련받고 보호받고 어떤 경우 스승을 통해 그 지위를 확고하게도 한다. 그러나 남성 조사들의 보호의 입장은 오히려 제약으로 작용하는 점도 있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근세 한국의 최고의 여성 조사의 하나이며, 일제강점기 이후 견성암 비구니 수행 도량을 시작하는 등 근대 비구니 승가 성립의 제1세대 지도자로서 괄목할 만한 노력을 보인 묘리법희 스님의 스승 만공 스님은 법희 스님에게 전법계를 주면서, 요즘 시절이 숭숭하니 대중 앞에 나가서 법문하지 말아라 했다고 한다. 이에 법희 스님은 선사로서 많은 제자들을 키웠지만, 그 스승의 말을 그대로 따라 평생 법상 위에 올라가 설법을 하지 않았다 한다.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은 동시대의 만성 스님의 경우이다.
그분은 선 수행으로도 유명하지만, 당시 부산 일대에서 법문 잘하시는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한다. 또한 그분이 당대의 선객들과 법거량을 하곤 했는데, 춘성 스님과 만나 “이 다리가 내 다리요, 당신 다리요” 했다는 담대한 일화는 선방 수좌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두 가지 대조적인 삶의 방식에서 법희 스님의 경우는, 종교 교단에서 남성 선도자와 여성 제자 간의 역학 관계는 여성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제어하는 기능도 내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비구니들에 대한 연구에 적용해 본다면 비구 승단, 비구 큰스님들과의 관계를 무시하고는 비구니에 대한 연구가 독자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어려움도 내포한다. 비구 큰 스님들의 영향력과 외호 아래서 성장하고 존립하였던 비구니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종속하였던 삶에서 비구니들의 독립성을 이념적으로 추출해 낸다는 자체가 실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최근 필자는 베트남의 여러 사찰을 두루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남방 상좌부 계통의 불교와 대승불교 특히 선불교를 모두 받아들여 각 사찰에서 신행되는 불교의 형태가 큰 차이가 있다. 전통적으로 비구니 교단이 존재했다고 하나 근대 이후 그 존재는 애매하였다. 최근 2009년 세계여성불자대회를 주최하게 된 것을 계기로 비구니 교단을 부활하였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으나 그 수계의 전통이 확립되는 데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관측된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베트남에서 방문한 여승들 사찰의 많은 곳에서 대웅전 본전과 별개로 마하프라자파티를 주불로 모시는 독립된 불전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불전에는 또한 자신들을 가르친 그 사찰의 큰스님들의 사진을 모시고 있었다. 여성 조사가 여성 제자를 가르치고, 여자 조사들을 모시고 보존하는 불전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 즉 여성 조사전이 있다는 자체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에게도 승가대학이 있어 그곳에서 젊은 여자 승려들은 남자 여자 승려 교수들에게 배우지만, 사찰에 설치된 강원이나 선원의 경우 여승은 모두 여승이 지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8. 비구니는 페미니스트여야 하는가
돌이켜 보건대, 비구니에 대한 연구에는 대개 ‘비구니는 여성’이라는 선입견에 압도되는 경우들이 많다. ‘비구니는 본질적으로 페미니스트’여야 한다거나, 적어도 페미니스트들과 유사한 출발점이나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는 따위의 막연한 기대를 전제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대해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중국불교 전공자 춘팡 유 교수의 다음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대만 향광 비구니 승가의 오인 스님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인 대사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만의 여성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오인 대사도 초기 페미니즘이 그랬듯이 마치 남성에 대해 공격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최근의 경향인 성적인 자유라든지 아니면 동성애의 권리 등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오인 대사도 어려서부터 여성에 대한 사회의 고식적인 태도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15)
적어도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볼 때 자신이 여성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하는 비구니란 없다. 이 말은 거꾸로 생리학적으로 남성인 비구들이 남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출가의 시점에서 보자면 비구니들의 승려로서의 출발점은 비구들의 출발점과 동일하다.
그 까닭은 출가를 선택한 당사자들은 자신이 속한 환경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출가를 통해 지향하는 최고의 종교적 이상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선불교 전통에서 보자면 그러한 불교적인 이상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에는 성별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여자라고 해서 이상이 바뀔 수도 없고 비구니이기 때문에 수행의 방법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출가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출가 후에도 그러한 이상에 상관없이 속된 생활을 지속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출가 당시의 여성의 조건과 출가 이후의 비구니들이 겪어야 하는 승가 안팎의 조건들이 페미니즘의 관심 주제와 깊은 관련을 가지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비구니라고 해서 여자라고 해서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여성의 현실적 조건하에서 비구니들이 여성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에 중요한 역할들을 해 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베아타 그랜트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17세기 어느 시점 중국에서 비구니 선사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하는 데 대해 당시 어느 유명한 (남성) 불교학자가 쓴 다음과 같은 비판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말법의 시대에, 선문(禪門)은 그 길을 잃고 말았다. 요사스러운 비구니들과 그 마군의 권속들이 법상에 올라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고, 그 어록들을 유포한다. 이는 모두 난잡하게 인가를 해준 사악한 중들과 눈먼 선사들의 잘못이다. 화장을 한 여인네들이 서로 불자(拂子)를 잡겠다고 다투고, 불가촉의 여비(女婢)들이 종사(宗師)의 지위에 올랐다.
이 동일한 기록을 놓고 21세기의 학자 그랜트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독법으로 아래와 같이 다시 읽었다.
(그 비구니들은) 불자(拂子)를 들고 설법을 하기 위해 법상에 오르고, 제자들에게 수계와 인가를 해 주고, 수선(修禪)을 위한 결제(結制)를 지도하고, 더 큰 깨달음을 위해 스승을 찾아 만행을 하고,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후세의 교화를 위해 어록(語錄)을 남겼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 환경을 통해 여성이 선사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들은 전통적인 남자 선사들의 역할을 완벽하게 담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장부(大丈夫)가 된 것이다.16)
베아타 그랜트가 이 글에서 집중하고 있는 비구니 계총행철(繼總行徹)은 남편을 잃고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 비정규적인 수행의 과정을 거쳐 깨달은 비구니로서의 지위를 획득해 간 사람이다. 그가 제도권 내의 수행 체제 속에서 소외당하고 실망한 상태에서, 용맹정진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를 체험했을 때 그는 아직 정상적인 출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우리가 찾아본 한국의 과거 비구니들 중 많은 이들은 이중 삼중의 소외를 극복하고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여 ‘영웅적인 여성’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자신을 ‘영웅적인 여성’으로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가 여성임을 부정하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니면서 그것에 개의치 않고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자 했다. 그들은 기존의 남성 중심의 수행 시스템에 도전했고 그것과 상관없이 수행의 결과를 입증해 보였으며 승속을 넘어 보편적인 수행과를 얻었다 할 수 있다.
9. 맺는 말
이상에서 한국의 비구니 전통의 의의에 대한 몇 가지 문제를 다른 나라의 전통이나 국외의 연구 등과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비구니 승단의 역사와 조직, 수행 전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읽는다는 것은 곧 한국의 과거, 그 수행 전통 및 역사를 정립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한다면, 연구 대상으로서 비구니를 우리가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과 비구니들이 그 자신의 전통을 어떻게 보는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괴리는 어느 한 문화 전통을 연구할 때 바깥에서 보는 연구자의 시선과 그 전통 속에 사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인식하는 것은 다를 수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서구의 학문 경향의 영향하에서 나온 비구니에 ‘대한’ 연구와, 동아시아의 불교 전통 속에서 실제로 수행하고 있는 비구니가 보는 자신의 문제와 자신의 전통은 그 문제를 접근하는 기본 전제, 방법론, 그리고 그 내용에 이르기까지 여러 점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가 결국은 한국 불교사 이해에 새로운 빛을 가져오고 나아가 현재와 미래에 나올 수행인들에게 자신의 존재와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오기를 전망한다.
많은 미래학자들은 21세기의 현대사회는, 분리와 지배의 논리 그리고 힘의 패권주의를 전제로 하는 남성적 방식보다는 체험과 구체적 삶의 참여를 중시하는 여성적 방식이 더욱 효과를 발휘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본다. 분쟁과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힘의 논리가 아닌 조화와 보살핌의 윤리에서 대안을 찾는 것이다.
현대의 종교 사상은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사고보다는 여성과 남성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어울려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동체대비(同體大悲)한 사회의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특히 불교는 그 고유의 평화와 공존의 사상으로 미래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한국불교의 보루는 비구니라는 선언까지 한다. 도덕적으로는 청정한 종교 전통을 회복하고 불교의 대사회적 의미를 새로이 정의하여 기여하려고 하는 주체적 세력으로서 비구니는 불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소중한 존재이다. 청정한 도량 가꾸기에서부터 이익 중생을 향한 사회 구제 사업, 그리고 전법, 수행에 이르기까지 이승(尼僧)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서 한국 불교의 미래를 담보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
조은수 / 서울대 철학과 교수(불교철학).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과정 수료 후 미국 버클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받음. 미국 미시간대학교 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조교수,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제한국학센터 초대소장,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지역 세계기록문화유산위원회 출판소위원회 의장 등 역임. 본지 편집위원. 〈원효에 있어서 진리의 존재론적 지위〉 〈통불교 담론을 통해본 한국불교사 인식〉 등의 논문을 발표하고, John Jorgensen과 함께 《직지심경》을 영역하였음. 한국의 비구니에 대한 연구들을 모아 편집한 책을 Surpassing Gender: The Enduring Vitality of Korean Buddhist Nuns and Laywomen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곧 출간할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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