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디지털 문명 시대와 불교
1. 로댕의 〈생각하는 사나이〉와 신라의 〈미륵반가사유상〉
지성의 시대에서 자성(自性)의 시대로, 신(神)의 시대에서 부처(佛)의 시대로, 휴머니즘의 시대에서 자연주의의 시대로, 소유의 시대에서 존재의 시대로, 타동사적 권력의지 시대에서 자동사적 힘의 유출 시대로 인류사가 개벽을 일으키는 그런 장엄한 변화가 도래하는 시기에 우리가 들어섰다. 한마디로 인류사는 그간 지성과 의지의 확장을 촉구하는 그런 발달과 발전의 시대를 맞았고, 그것을 위해 인류는 모든 능력을 개발하여 왔다.
지성과 의지의 발전은 로댕(Rodin)의 조각작품인 〈생각하는 사나이(le penseur)〉가 전체적으로 그것을 표상하는 모양을 보인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나이〉가 지성의 시대를 표상한다면, 신라의 〈미륵반가사유상〉은 자성의 시대를 아우르는 그런 예술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나이〉는 심각한 얼굴로 온몸에 울퉁불퉁 근육질을 내뿜으면서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 얼굴은 결코 명랑하지 않고 우울해 보이고 어둡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한 얼굴의 인상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듯한 그런 분위기다. 로댕의 그 사나이는 세상을 온통 확 바꾸려는 그런 생각을 머금고 있다. 로댕은 사회주의자였다.
그 작품은 지옥문 위에서 하계인 지옥을 내려다보면서 지옥 같은 세상을 혁명하겠다는 그런 의지를 표현한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보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모든 근육을 다 동원해서 용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뿐만 아니다. 지옥을 천국으로 개조해 보겠다는 것은 지성의 운동이 아니면 안 된다. 왜냐하면 지나간 인류사의 이야기가 무지성의 작업은 곧 바보들의 유치한 이야기라고 규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바보들은 무의지이고 동시에 무지성의 행동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 로댕은 자본주의로 멍든 지옥 같은 세상을 사회주의의 이념으로 무장하여 불굴의 지성과 의지로 혁명하겠다는 것을 반영한다 하겠다. 그의 몸의 근육은 자본주의를 뜯어고치겠다는 의지의 표상이고, 그의 심각한 얼굴 표정은 자본주의가 낳는 현실적 고뇌의 부산물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신라의 〈미륵반가사유상〉은 로댕의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그 얼굴은 심각하지도 않고 오히려 빙그레 웃고 있고, 얼굴과 몸에 긴장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이상스럽게도 근육의 흔적이 전혀 없다. 근육의 몸매가 아니라는 것은 곧 대상을 향하여 돌진하려는 그런 준비 자세가 아니라는 것과 같다. 몸만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돌 지난 아기가 그냥 앉아 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얼굴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어린 아기의 모습이 아니다. 이미 어른의 용채(容彩)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얼굴은 고요한 기쁨의 미소를 머금고 있고 눈을 감으면서 무엇을 응시하지 않으므로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에 오히려 더 가깝다. 봐서 느끼는 주관적 감정을 갖고 그 대상을 다시 생각하지 않고, 안에서 향처럼 피어오르는 사유의 음률에 고요히 잠겨 생각한다.
〈미륵반가사유상〉은 바깥의 대상을 알기 위하여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하여 나를 무장시키는 그런 작업의 인간이 아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인간은 의식적인 인간이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모습의 인간이라면, 신라의 〈미륵반가사유상〉은 생각하기 위하여 의식하는 그런 인간의 자태가 아니다. 그 사유상은 생각하기 위하여 밖으로 향하는 그런 모양이 아니고, 단지 자기 안에서 피어오르는 사유의 향불을 조용히 눈을 감고 음미하는 모습이다. 생각한다기보다 오히려 사유하는 마음을 보여주려고 하는 그런 자세를 지니고 있다. 생각하는 의식과 사유하는 마음은 좀 다르다. 생각하는 의식은 생각하는 자아의 정립이 강하게 따라다닌다. 자아의 존재가 정립이 안 되면, 생각하는 주체가 없어지는 꼴이 되므로 생각의 성립이 불가능하다.
로댕의 사나이는 강력한 자아의 형상을 굵은 근육질로서 드러낸다.
그러나 신라의 반가사유상은 자의식을 가진 젊은 혁명가의 투쟁적 영혼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할 것이 없는 무사유(無思惟)의 마음을 그린 것이다. 무사유의 마음은 무자의식(無自意識)의 순간과 같다. 생각하는 사유는 우리의 오감이 외부의 대상에 의하여 촉발되었을 때에 일어난다. 생각하는 사유는 촉발된 감각의 흔들림을 반추하는 일과 같다. 그러므로 반가사유상은 감각의 촉발이 보이지 않으므로 오감의 주체인 자아가 깨어나 바깥의 객체로 지향하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형상학에서 이미 의식의 본질은 지향하는 행위라고 언명했다. 촉발된 감각이 의식을 통하여 다시 자아를 촉발시킨 대상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의식은 자의식의 행위이다. 자의식이 빠진 의식은 성립 불가능하다. 그러나 마음은 의식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마음의 자기 운동일 뿐이다. 마음이 이미 의식행위가 되면 그것은 곧 자의식으로 돌변하기 때문에, 마음은 의식의 현상인 지향성 즉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가능케 해주는 의식하지 못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의식은 오직 인간의 마음이 대상으로 향하는 상부구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마음이 오로지 대상을 의식할 때에만, 그래서 마음이 자의식을 일으킬 때에만 마음이 의식으로 변화한다. 마음과 의식은 매우 유사하다. 우리는 인간만이 의식적인 줄 잘 모른다. 그러나 의식적이기 위하여 자의식적인 것이 동반해야 한다. 자의식적인 현상이 부정된다면, 그것은 마음의 상태지 의식의 수준은 아니겠다. 어떤 동물에게는 자의식이 인간처럼 가능한지 확실히 모른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에게는 죽음의 자의식이 평소에 없다고 한다. 단지 죽는 순간에 죽음을 의식한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처럼 평소에도 죽음을 예감하고 사는 것과 다르다. 죽음을 예감하고 사는 것과 달라서 죽음과 자기의 자의식이 결부되어 있지 않기에 일반적으로 동물은 자의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의 학문적 추정이지 단정적인 결론은 아니다.
그러나 동물과 식물은 다 인간처럼 자기 생명체의 운영에서 호오(好惡)의 감정을 갖고 산다.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호오의 감정을 지닌다고 한다. 자기 생명의 활동에 이로운 것은 좋아하고 해로운 것은 싫어하는 일반적이고 무의식적 성향을 다 갖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에게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자연세계의 동식물도 인간처럼 호오의 느낌이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이 호오의 느낌이 바로 욕망이고, 이 욕망은 바로 마음이라고 여겨진다.
마음은 의식보다 더 깊고 넓은 의미로서 무의식적 차원의 호오 성향을 말한다. 하이데거(Heidegger)가 그의 스승 후설(Husserl)의 현상학을 초탈하기 위하여 그의 젊은 날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을 기술하였다. 그가 이 책을 그의 스승인 후설에게 바쳤으나, 이 책은 현상학의 저술은 아니다. 우리는 후설 현상학의 강력한 시대적 경향으로 하이데거의 저 책은 현상학의 한 저술인 양 착각하고 해설했지만, 그러나 저 책은 현상학을 해설한 것이 아니다. 현상학은 의식학인데, 하이데거의 저 책은 인간의 의식을 기술하지 않았다. 그는 의식(Bewuβtsein) 대신에 인간을 지칭하는 다른 명칭인 현존재(Dasein)를 썼고, 또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 대신에 현존재의 관심(Sorge)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 관심이라는 용어를 보통 ‘염려’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잘못 옮긴 것이다. 염려는 근심하고 걱정하는 마음인데, 그런 마음이 마음의 근본적 형태라고 읽기가 어렵다. 좌우간에 저 모든 설명은 미구에 하이데거가 인간학적(의식적) 존재론 대신에 자연적(마음적) 존재론을 그의 철학의 대명제로 삼을 것을 예고하는 것이겠다.
2. 욕계(欲界)의 두 가지 욕망
의식은 인간만의 것이나, 마음은 오로지 인간의 것이라고 단정되지 않는다. 마음은 대자연의 욕망처럼 광범위하다. 동식물도 욕망을 지니고 있고, 인간의 것과 같이 욕망은 타자 연관적이다. 그래서 욕망은 의식의 뚜렷한 타자 지향성이 아니라, 마음이 부지불식간의 타자 연관성처럼 그렇게 타자와 얽혀 있다. 이 우주는 욕망의 그물망이다. 한국불교는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유교의 길고 긴 탄압 때문인지 욕망을 너무도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욕계라고 보았던 이유를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욕계의 본질은 곧 욕망이다. 욕망이 없으면, 이 우주가 설명되지 않는다. 욕망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바깥의 것을 소유하고 점령하려는 타동사적인 욕망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의 것을 실현하려는 자동사적인 욕망이 있다. 전자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지려는 소유론적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에게 본디 속하는 힘을 실현하려는 존재론적 욕망이다. 존재론적 욕망이라는 말은 세상 만물의 존재가 본디 욕망이므로 그 존재가 자기의 것을 실현하려는 것이 자기 존재의 힘을 발양하려는 것과 같은 뜻이므로 생긴 의미이다.
노자는 《도덕경》 47장에서 존재론적 욕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논설하였다.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들창으로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를 본다(不出戶 知天下 不窺牖 見天道).” 집 밖이라는 것은 바깥세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기의 마음이 아닌 세상을 일컫는 것을 말한다. 바깥세상이 궁금해서 창문 틈으로 바깥을 응시하는 것은 바깥세상의 문제 때문에 궁금히 여기는 노예로 신경을 끄지 못하는 주체를 일컫는다. 내 마음이 바깥세상의 것에 신경이 쓰여서 거기에 집착되면, 내 마음은 의식이 되어 바깥세상의 것을 그대로 방임하지 않고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자의식을 갖게 된다.
소유론적 욕망은 의식으로 세상을 명증하게 장악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다. 플라톤 이후 서양의 철학이 진리의 기준을 명증성(evidence)으로 삼은 까닭은 대상을 명석하고 판명하게(clear & distinct) 지배하기 위함이다. 세상을 그렇게 지배하기 위하여 의식은 두 가지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 두 가지가 곧 지성과 의지이다. 과학기술과 도덕윤리가 지성과 의지의 대상이다.
인류는 그동안 이 지성과 의지를 가장 위대한 축복의 대상인 양 높이 평가하여 왔고, 모든 교육의 목적이 바로 이 지성과 의지를 굳건히 키우는 것으로 압축하여 왔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문화는 각각 예외 없이 지성과 의지를 올바로 키우는 과정으로 삼았다. 과학기술이 찬연히 빛나고, 선의지의 힘이 강력해서 악의 세력을 분쇄할 정도로 격파하는 도덕의 일이 인류가 나아가야 할 교육의 방향인 양 구축하는 것을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를 과학기술의 발전사라고 불러도 틀림이 없다. 인류의 일상생활이 과학과 기술의 혁혁한 발달로 엄청난 문명의 혜택을 입었다. 교통기술의 발달, 생활기술의 발전, 의학기술의 개선 등은 우리의 수명을 연장시켰으며, 우리가 흔히 빠질 수 있는 질병의 함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었다. 많은 환자들이 의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생명의 빛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병이 의술의 발전으로 많이 정복된 것은 확실히 사실이다. 그러나 의술의 발전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질병의 극복을 초래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상대적인 의미에서 질병의 공포가 감소된 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수명이 과거에 비하여 현저히 연장되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의학기술에 의한 잘병 극복의 가능성은 명증한 것 같으나, 새 의학기술이 세균의 진화 가능성을 낳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증폭은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궁금해진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의 새로운 진화의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사태를 통찰하면, 과학기술이 오로지 일방적으로 질병의 정복을 아름답게 보장해주는지 묻고 싶다.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병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있는데, 예컨대 장티푸스 같은 것이 그 실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과학기술의 발전이 부분적으로 새로운 질벙의 발생을 촉구한 것이 있지만, 대체로 지성의 과학기술이 질병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경향을 노정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 큰 실례가 인간 수명의 연장이고 유아사망률의 현격한 감소라 할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획기적이라는 것을 의학기술의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교통기술도 또 다른 실례에 해당하리라. 오늘날의 세계 여행은 별로 큰일이 아니다. 옛날 같으면 아찔한 일로 여겨지던 서양 여행은 이제 좀 먼 거리의 여행으로 여겨질 뿐이다. 머지않아 행성 간의 여행도 지구 내의 여행처럼 여겨질 때가 올 것이다. 과학기술의 목표가 어딘지 그 끝을 측량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발전하고 발달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지성의 정복과 발전은 분명히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지성의 소유학이고, 인류가 이 우주에 남기는 가장 자랑스러운 영광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도덕윤리도 저런 과학기술의 진보만큼 확실한 것인지는 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즉 자연과학의 진보는 어김없는 사실로 규정되는데, 사회과학의 차원에서 저런 자연과학적 진보를 논의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자연과학에서 진리의 애매모호성이 진리의 명증성보다 더 사실로서 합당한 것인지 미지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여 보기로 하자. 사회과학적인 의미에서 세상의 사실은 이중적으로 엮여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선악은 서로 대칭적인 것으로 여겨져 상반된 대립성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은 생각해 왔다. 선악은 사람들이 그토록 생각해 왔듯이 그렇게 대립적인가? 동양철학에서 특히 유학의 영역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여 왔다. 유학의 영역에서와같이 서양철학의 영역에서 예컨대 신학의 언저리에서 사람들이 그런 이원론적 사고를 강력히 주장해 왔다. 신학과 기독교의 언저리에서 사람들이 그런 이원론을 자랑스럽게 주장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 유행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으로 서양철학도 불교적 사고방식을 익히기 시작했다. 이 불교적 사고방식이 다름 아닌 이중적 사고방식의 익힘이다. 예컨대 과거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선은 선이고 악은 악으로 규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런 이원론을 부정하였다. 사실적으로 과연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인가? 선은 악의 대립자이므로 선의 마음은 악을 아주 극도로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악을 미워하는 선의 마음은 그 자체 선인가, 악인가? 그것은 악을 미워하므로 선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한국사회에 득실거리는 사기꾼을 아주 미워한다. 그 사기꾼이 우리나라의 격을 아주 떨어뜨리기 때문에 국민적 공적으로 사기꾼이 밉고 싫다. 사기꾼이 눈에 보이면 나는 정말 주먹으로 한 대 때려주고 싶다. 그 정도로 나는 사기꾼이 밉다. 나는 사기꾼이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정의의 이름으로 악을 징벌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면 나는 정의의 사도인가? 악을 미워하는 선의 사도가 악과 완전히 무관한, 즉 순수히 명증한 선의 편인가? 나는 선의 편을 들면서도 명증하게 선만을 옹립하는, 그래서 악만을 타작하려 하는 그런 선의 도덕적 사도가 아니지 않은가? 선을 옹립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한 발자국 들어가 있는 그런 애매모호한 입장이 아닌가? 이처럼 선의 도덕학이 명증하게 악을 몰아내기는커녕 이미 악과 손을 잡고 선을 내세우는 그런 묘한 입장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불교의 선악관같이 선악의 대립각을 현저히 내세우는 그런 태도보다는 오히려 선악이 오히려 애매모호하게 뒤섞이는 그런 묘한 이중성의 사유가 더 실상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정의에 관한 한 평범한 미국 철학교수의 책이 백오십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미국 안의 판매량보다 더 많이 팔렸다는 것이다. 그 미국인 교수 자신도 놀랐고, 전 세계에서 한국인이 가장 정의에 목말랐다는 이야기를 펼쳤다고 한다. 한국인이 가장 정의에 목말라했다는 것은 가장 정의를 갈구했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또한 동시에 한국인이 가장 정의사회를 갈구한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인이 가장 정의의 실현을 학수고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지인 중의 한 사람이 그 책을 읽기 위해 샀다고 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그 책에 정의에 대한 답이 나오면 그 저자는 사기꾼이고, 정의의 정답이 없으면 그 책은 철학책으로서 어느 정도 가치를 지닌다고 말해주었다.
역사적으로 세상이 정의에 목말라하고 갈구했을 때에, 왜 부처님은 정의에 대하여 묵묵부답이었을까? 예수님은 정의를 여러 차례 외쳤고, 공자님도 정의의 중요성을 암시했는데, 왜 부처님은 그 정의를 무시했는가? 여기에 나는 불교의 중요성이 있다고 여긴다. 그 까닭은 정의는 세상의 실상이 아니고 인간의 환상에 불과하고, 정의라는 것은 인간의 망상이 낳은 허구적 요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정의를 외쳐대는 것은 결국 인간의 망상적 허구라는 것이다. 정의는 실존하지 않는다. 불교의 사유는 실상이 아닌 것을 아무리 고함을 쳐 외친다고 해도, 그것은 꿈속의 일처럼 허깨비에 불과해서 현실적 사실로서 실존할 리 없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수없이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정의를 부르짖은 일 등은 무엇을 말함인가? 역사적으로 모든 종류의 정의는 다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할 요량으로 자기 것을 옳다고 여기는 이기심의 발로에 불과하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정의가 세상의 사실이 아니라, 이익이 된다는 것이 세상의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부처님이 여러 번 강조한 일이다. 이기적인 사실이 세상의 법이라고 본다면, 기독교처럼 세상의 정의를 위하여 희생하라는 말을 불교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불교는 기독교나 유교처럼 도덕주의적 사상이 아니므로, 세상의 정의를 위하여 희생하라는 그런 엄청난 말을 할 수 없다. 여기에 불교의 매력이 있다. 불교는 도덕주의적인 발언을 하지 않는다. 불교는 늘 사실주의적 생각만을 언명한다. 그래서 당위적인 언명이 불교와 노장사상에는 없다. 당위적인 언명은 기독교와 유교에는 참으로 많다. 선한 주장이므로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기독교와 유교에는 넘쳐난다. 불교는 그런 식의 의미를 발설하지 않는다. 유교와 기독교의 세계 안에 살면 당위적 주장 때문에 사람들이 피곤해진다.
3. 당위와 정의에 젖지 않는 불교
당위에 젖어 사람들이 지쳐 산다. 세상이 당위의 요구로 편안해지는 것도 아니다. 정의의 요구로 선악의 긴장된 그 대결에서 세상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더 강하게 준다. 그런 스트레스를 더 강하게 받은 사람들은 그만큼 더 진하게 마음의 트로마(Trauma)를 받아 괴로움에 빠진다.
만약에 한국사회에서 정의의 요구가 가장 강력하게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만큼 한국사회에 미움의 심리가 강하게 솟고 있다는 것과 같다. 세상에 정의의 실상이 없기 때문에 정의의 허상은 사실상 자기의 이기심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원한의 구실을 정당화하는 일만 키운다. 그러기 위하여 원한의 심리학은 정의의 복수심을 맹렬하게 부추긴다. 정의의 복수심을 더욱 세차게 하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고 울음을 억압한다. 울음은 억압을 당할수록 세차게 터져나오는 힘을 더 얻는다. 마치 끓는 주전자의 뚜껑을 더 세게 누르면서 폭발력을 키우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감정의 회오리가 점점 더 격렬하게 흐르면서 격정이 정의의 증오심을 치솟게 한다. 정의의 주장은 격정의 감정을 진정시키지 못한다. 정의는 격정을 통하여 실현되려 한다.
한국인이 정의의 감정을 더 많이 요구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인이 격정의 정의를 진하게 요구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격정적으로 정의의 심판을 요구한다는 것은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될 가망이 안 보인다는 것과 같은 소리다. 유교와 기독교가 하도 정의를 많이 외쳐댔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의의 감정이 곧 실현되리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불행히도 정의의 빈도수는 이기심의 빈도수만큼 내면적으로 자기의 이기심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찾게 한다. 한국은 유교적 명분을 미친 듯이 찾는 그런 문화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조선조 500년간 이 명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구실만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분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경우가 절대로 없다. 조선조의 사색당쟁을 주도했던 유림들이 늘 입으로는 요순정치를 들먹이면서 속으로는 자기의 족벌과 문벌의 이기심을 철저히 따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조가 왕의 나라가 아니고 선비들의 나라라고 부르짖었던 것도 한갓 겉으로 내세운 명분의 당위법에 불과했다. 왕족이 왕족들의 이기심을 위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한 일은 역설적으로 선비들이 왕권의 강화를 결단코 반대하고 오로지 선비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려고 한 욕심과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수양대군이 양녕대군의 도움을 받아 왕권의 강화를 부르짖은 것은 조선조 말기 노론 당권이 노론의 장기집권을 기획한 선비론과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전부 다 자기들의 이기심을 정당화하는 기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기심은 한 번도 표면에 등장하지 않고 전부 위국대도(爲國大道)를 명분으로 내걸었다.
이제 한국사회는 유교적 허상이 아직도 남아 주장하는 정의라는 명분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해야 한다. 부처님의 사유를 우리가 다시 정리하면, 사실적으로 정의는 없다. 모든 주장은 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는 마음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도덕은 무엇일까? 부처님의 주장은 간단하다. 이익이 이 세상의 살상인데, 그 이익이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중생들이 다 원하는 이기적인 이익이고, 그 이익은 필연적으로 배타적인 성향을 몰고 온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부처님이 원하는 자리적(自利的) 이익인데, 그 성향은 결과적으로 이타적인 결과를 잉태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이기배타적인 이익과 자리이타적인 이익으로 구분될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의를 구현한다고 당위적으로 힘을 쏟지 말고 스스로에 이익이 되게끔 이익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바꾸라는 것이다. 자기 존재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처신을 바꾸는 일은 타동사적으로 이익을 바깥에서 추구하는 일과 구분된다. 이것은 자동사적으로 이익을 스스로 모색해 나가는 방향이다. 모든 생물학적 진화의 방향은 다 자동사적으로 이익을 스스로 모색해 나가는 길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불교의 사고방식을 깊이 음미해 봐야 한다. 서양의 철학과 종교는 진리를 인간의 작위로 발견해야 하고, 선의 당위법은 선을 세상에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 양 생각해 왔다. 그래서 인간의 지성적 작위로 진리를 정립하기 위하여 철학이란 학문을 만들어 논리화해야 했고, 인간 의지의 당위법으로 선을 세상에 착근시키기 위하여 윤리학이란 학문을 설정해서 어떻게 선을 실현시킬 것인가 하고 노심초사해야 했다. 그래서 세상의 허위와 싸우는 진리의 명증성을 규명하고, 세상의 악과 투쟁하는 선의 의지력을 과시해야 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다 아날로그적인 사고방식으로서 불교가 본디 안고 있었던 디지털적인 사고방식과 다르다 하겠다. 그래서 진리와 선의 절대적 동반자인 신을 설정해서 신의 보호 아래 진리와 선의 실현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끔 기원했다. 진리와 선의 실현은 인간적 지성과 의지의 작품으로 가능하다. 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해석은 인간 지성과 의지를 보조해주는 역할을 의미한다. 신은 절대적 지성이고 절대적 의지이다.
따라서 서양의 철학과 신학은 세상을 진리와 선이 정합적(整合的)으로 적용되는 곳인가 실험하는 이성의 능동적 기획에 다름 아니다. 세상은 진리와 의지의 활동을 분비하는 이성의 자기 능력을 확인하는 시공에 불과하다. 그 능력을 확인하기 위하여 세상은 진위의 대립 장소이고, 선악의 투쟁 장소여야 했다. 그래야만 이성이 잠자지 않고 활동하는 선택의 입장으로 나타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가능한 답변들의 입장에서 지성이 이성적으로 어느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했다.
지성적 선택은 여러 가지 중에서 내가 이성적으로 하나만을 선택한다는 입장인데, 택일하는 판단의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신이 물으면, 언제 어디에서도 나는 신에게 요구사항을 정당하게 떳떳이 말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선택은 또한 선해야 한다. 나의 지성적 선택이 선하지 않으면, 나의 선택은 또한 악마의 장난일 수도 있다. 나의 지성적 선택이 또한 동시에 아름다운 색과 모양과 소리의 현존이어야 한다. 절대적인 진리와 선을 담보해 주는 존재자인 신에게 눈으로 아름답고 귀에 곱지 않으면 그것은 절대성을 구비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저런 신학적 철학의 길을 가지 않는다. 세상은 이성에 의하여 소유되어야 하는 재판정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자연의 마음으로 거기에는 진위도, 선악도, 미추도 없는 무념무상일 뿐이다. 그런 세상에 진/위나 선/악과 미/추의 선택을 놓으면, 세상은 판단의 대상이 되어 주관적 의식 앞에선 객관이 된다.
중국 선종의 대가인 6조 혜능 조사가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어록을 남겼다. 선을 생각하고 악을 생각하지 말라는 어록을 남겼어야 했는데, 서양식의 도덕주의로는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이다. 유가와 기독교의 도덕사상으로는 쉽게 이해가 잘 안 가는 사고방식이다. 왜 그랬을까? 악은 단독적으로 악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비선(非善)으로서 실존하기에 선의 실천은 비악(非惡)의 생각 없이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선을 사랑하는 마음은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남이 없이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과 증오가 동시적인 일로서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즐겨 이야기하는 사랑과 증오의 이중주가 그런 것이다. 사랑의 심리가 문득 하루아침에 미움의 심리로 돌변한다. 이것은 사랑과 증오가 같은 뿌리임을 알리는 대목이다. 심리적 애증의 이중주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일체사가 다 그런 이중성을 갖추고 있음을 불교는 초반부터 가르쳐 왔다. 지리적인 의미의 고산심곡(高山深谷)과 도장(圖章)의 양각과 음각도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하고, 법과 제도상의 모든 일체도 역시 단일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을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Derrida)는 신학적 말소리 중심주의적(logo-phonocenrisme) 사상에 대결하는 문자학(grammatologie)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하다. 말소리 중심주의는 철학적 현존의 진리를 성스럽게 모시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존은 현재적 존재의 의미를 유난히 강조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적 존재는 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하나의 간격으로서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틈일 뿐이다. 현재가 스스로 적극적 의미를 띠고 자기 존재를 주장할 수 없다. 과거는 직접 경험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는 시간으로서 불확실하다. 과거로서의 시간은 이미 지났으므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간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존재방식을 지시하기에 시간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아예 원천적으로 시간은 소유 불가능 자체다.
그러나 신과 같은 영원한 존재를 시간으로 표상하자면, 현재와 같은 시각으로 표시하는 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신을 과거로 표상할 수 없고, 미래로 상상할 수 없으므로 신을 현재로 나타낼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할 것이다. 그 까닭은 신은 불변적이고, 영원히 살아 있어야 하므로 그래서 서양 신학은 그런 신을 ‘영원한 지금(Nunc stans)’이라고 상상했다. 신은 구애를 받지 않고 영원한 지금처럼 모든 만물에 새겨져 있기에 신은 현존적인 그런 존재양식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존하는 신은 둘로 쪼개져서 나누어져서는 안 되므로 유일한 실체처럼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그런 단독적 존재자와 같다.
신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이고 변함이 있을 수 없고, 그래서 자기동일성을 보지함으로써 불변의 존재를 과시한다. 신은 자기동일성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 자신과 사이에 이중적인 간격이 있을 수 없다. 신에게는 존재론적 자기분열이 없는 존재이므로 신의 존재는 신의 자기 현시와 일치하고, 그래서 구약의 《출애급기》에서 모세에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밝혔듯이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Ego sum qui sum)”가 된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그의 나타난 찬란한 빛과 같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그의 들리는 말씀과 같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신은 말씀이오, 말씀은 곧 신이다.’ 말씀과 신은 분리되지 않는다. 빛과 말씀은 하느님의 자기표현이요 자기 현존의 상징과 다를 바가 없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자기 현존은 분리되지 않고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신은 곧 그의 목소리에 그대로 현존해 계신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입을 통하여 표현했던 바와 같이 목소리에는 그 사람의 영혼이 직접 나타나 있지만, 글자에는 그 사람의 영혼이 직접 살아 있지 않다는 주장을 하게 했다.
한마디로 목소리는 정신적인 것으로 현존적인 의미구조를 지니고 있으나, 글자는 물질적인 것으로 죽은 흔적만 그려져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지니게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 신학과 철학에서 목소리는 일종의 정신적인 것이 현존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반면에 문자에는 그런 정신적인 것의 현존은 없고, 다만 죽은 물질의 흔적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4. 불교는 말씀학이 아니고 문자학
말하자면 문자학은 저런 신학적 현존의 개념을 파괴하고 없앤다. 단적으로 말하여 불교는 말씀학이 아니고, 문자학의 입장을 오히려 견지하고 있다. 문자학의 입장을 말해 보자. 문자학은 무엇보다도 문자를 연상해서는 안 된다. 문자학은 기호학(sémiologie)의 일종으로서 기호적인 모든 특성을 알려주고 있다. 문자는 따라서 기호이므로 말씀처럼 내면적 표현이 아니라, 외면적 표지로 생각되는 의미에 더 가깝다. 문자는 일종의 표지의 한 기호이기에 무슨 내면적 의미의 표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석기시대의 항아리의 토기에 그려진 빗살무늬이든, 물결무늬이든, 직선 무늬이든 다 문자의 보기에 해당한다. 저 문자의 표지는 무엇을 상징하는 내면적 의미를 지닌다기보다, 무늬의 차이를 통하여 자기 종족의 것을 표지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따라서 글자는 무엇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물론 그 수단의 의미도 모양의 차이를 통하여 실현되기 때문에 글자의 사명이 완성된다. 그래서 글자도 문자(grammè)의 일종이긴 하지만, 문자는 오로지 차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려주기 위한 방편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데리다가 말한 문자(l’écriture)를 영어 번역에서 ‘wri-ting’이라고 기술되어 있기에 얼토당토않게 ‘글쓰기’라고 옮겨 놓았다. 데리다를 잘 이해하지 못한 무식한 처사였다. 그래서 모두 따라 느닷없이 ‘글쓰기’의 어려움이나 ‘글쓰기’의 일 따위의 용어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프랑스 철학의 분야에서 저런 착오가 많이 발생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래서 한국의 번역이 엉뚱하게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철학서의 번역이 너무 틀려 빗나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어의 ‘writing’도 동명사적인 용법으로서 글쓰기의 뜻이 아니라, 쓰인 것 일체를 말하는 명사라고 읽어야 한다. 문자는 차이를 표시하기 위하여 쓰인 모든 흔적을 말한다. 왜냐하면 흔적이 곧 차이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이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이 우주의 사실은 ‘상관적 차이(pertinent difference)’의 그물망이라고 말한다. 흔히 불교에서 말하는 제석천의 인드라망은 곧 상관적 차이의 그물망에 다름 아니다.
세상은 영원한 것을 보존하기 위한 현존의 표현이 아니라, 흔적을 지시하기 위한 문자적 표지에 불과하다. 모든 흔적은 흔적의 흔적이므로 모든 세상은 색의 흔적의 비교에 불과하다. 소리도 차이로 들리고, 눈에 보이는 색의 세상은 차이를 알리는 흔적이고 이 흔적으로 저 흔적과 대비하여 차이를 구성하기에 흔적이 없이 우리는 세상을 말할 수 없다. 흔적의 색은 이 흔적과 저 흔적과의 사이에 있는 공(空)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공의 존재가 없이는 색의 흔적이 성립하지 않는다.
불경의 《반야심경》에서 우리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구절을 본다. 색은 물질을 말한다. 색은 고체처럼 그런 응고된 덩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해면체처럼 허공에 구멍이 듬성듬성 뚫린 그런 모습임을 우리는 안다. 이것은 전자현미경의 렌즈를 통하여 나타난 모습이다. 더 정밀한 현미경으로 보면, 더 허공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색즉시공’은 색이 있는 모든 물질의 존재 방식이 공임을 말한다. 그러나 ‘공즉시색’은 공이 모든 색의 존재 근거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색은 상관적 차이의 흔적이므로 상관적 차이가 유지되기 위하여 허공에서 차이를 알리는 표지적 기호가 성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은 색의 존재방식이고 동시에 색의 존재 근거가 된다는 것은 삼라만상인 색의 존재는 바로 공이라는 놀랄 만한 명제가 도출된다. 이것은 존재가 곧 공이라는 역설과 다를 바가 없다. 공의 의미는 원효 대사가 《금강삼매경론》에서 설파한 바와 같이 비유비무(非有非無)이다. 이 비유비무를 원효 대사는 다시 알기 쉽게 풀이하면서 허공에서 손바닥으로 허공을 잡으면 손바닥 안에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또한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가르친 공과 색의 상호 통섭은 수천 년 내려온 인류의 통상적 개념을 정면으로 붕괴시키는 것이다.
서양철학과 신학은 이 통상적 개념을 더욱 굳혀 놓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있고 땅에는 무수한 생명들이 있다고 할 때에. 저 ‘있다’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철학에서 큰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저 말 자체는 삼척동자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직관적 말이지만, 만약에 누가 ‘있다’라는 말의 뜻을 물으면 아무도 그 말을 풀이할 수 없게 된다. 개념적 의미로는 ‘있다’라는 말은 ‘없다’라는 말의 반대말일 정도의 설명만이 가능한 유일한 어휘다. 서양의 사고방식에서는 오랫동안 ‘있다’란 것은 ‘없다’라는 것의 반대어로서 특별한 의미가 없는 말로서 적극적 규정을 할 수 없는 용어로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있다’라는 존재는 ‘있는 것(존재자)’으로서의 어떤 명사에 붙어 다니는 부가어인 양 생각되었다. 하이데거(Heidegger)가 잘 지적했듯이, 존재(Sein=Being)와 존재자(Seien-des=beings=entities)가 혼동되어 존재의 사유는 존재자의 사유에 의하여 대체되어 왔다. 그래서 존재의 망각이 시작되었다. 존재의 망각이 시작됨으로써 존재는 사라지고 그 대신 존재자적 사유가 대세를 이루면서 존재 대신에 신, 하느님, 절대자 등이 존재를 대신하는 의미로 굳어졌다. 존재는 존재자의 등장으로 뒤안길에 사라졌다. 존재자는 디지털적인 기호가 아니고. 아날로그적인 개념이 되고 말았다.
불교가 초기부터 존재를 공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것은 탁월한 의미에서 존재론적 사유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 사건이다. 서양학은 존재를 창조된 의미로 읽기 시작함으로써 무(無)는 존재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의미로 등장하게 되었다. 무는 창조주인 신의 권능에 위배되는 일이므로 무는 존재의 적에 해당하는 꼴이 되었다. 그래서 드디어 무는 존재의 악이 되는 의미 규정을 받게 되었다.
무는 허무의 일종으로 읽히게 됨으로써 어떤 에너지를 용납하지 않는 공허로서 읽히는 결과를 낳았다. 존재는 우주의 빈 곳에 충만하게 가득 찬 지유이지무(至有而至無)의 이중성으로서 공의 본질을 띠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한없이 충만하고 한없이 너그러운 그런 이중성을 머금고 있기도 하다.
지유이지무한 존재론은 우주론의 일환이지 결코 인격론의 한 토막으로 여겨질 수 없다. 지유이지무한 우주론으로서 진리는 인간을 그렇게 존재하도록 유도해준다. 즉 그런 우주론적 진리관은 인간을 허허실실하게끔 종용한다. 이런 진리관은 서양적 진리관과 확연히 다르다. 서양적 진리관은 신의 창조적 지성과 의지를 배우고 따르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창조적 지성과 의지는 신의 인격을 우러러 받들도록 유도한다. 인간이 신의 지성과 의지를 배우고 받듦으로써 인간도 신적 창조론에 관여한다. 신의 지성과 의지에 의한 창조는 결국 신의 세상의 실질적 소유론과 같다. 신은 세상의 소유자다.
인간이 신의 창조에 관여하는 그만큼 인간도 세상의 소유자가 된다. 지유이지무의 종용론이 존재론의 일환으로 등장하듯이, 창조론은 소유론과 같다. 종용론은 지성과 의지의 인격적이고 유위적 행위론을 역설하기보다 빈 허공처럼 ‘보내고 따르고(從)’ ‘수용하는(容)’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창조론은 결국 자의식의 주체가 등장하고, 지성과 의지로서 세상을 지배하려는 소유론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서양의 종교와 사상은 소유론적인 의미를 강하게 품고 있다.
불교의 사유는 어떤 소유론을 내세우지 않는다. 세상의 존재를 존재하는 그대로 따르고 보내고 수용하는 탄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불교는 세상의 자연적 법에 순응한다. 자연의 법이 바로 비로자나불로 법신불이 아니던가? 법은 인간의 지성이 발견한 필연성이 아니고,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흐르는 자연의 자기 일이 아닌가? 필연성은 인간의 인격적 지성이 발견한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자연에 본디 놓여 있어 온 자연의 자기 운동을 인간이 붙인 이름일 뿐이다. ■
김형효 / 서강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벨지움 루벵대학교 철학최고연구원 졸업(석^박사).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대학원장 등 역임. 현재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최근 저술로 《하이데거와 화엄적 사유》 《사유하는 도덕경》 《마음혁명》 《원효의 대승철학》 《나그네 3부작》 등이 있음. 열암학술상, 율곡학술상, 사우철학상, 원효학술상 등 수상.
출처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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