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2

나말려초 선사들의 선교양종 인식과 세계관

수선님 2021. 5. 9. 11:35

나말려초 선사들의 선교양종 인식과 세계관

 

추 만 호*

 

Ⅰ. 머 리 말

Ⅱ. 수용기 선종에 대한 화엄종의 대응

1. 화엄 3대사찰의 선종 수용 2

. 수용 의도와 초기 선의 이해

Ⅲ. 선사들의 선교양종 인식과 세계관

1. 정착기 선종의 교종관계 실제

2. 선사들의 선교양종 인식과 세계관

Ⅳ. 교외별전의 문제점과 형성 시기

1. 자료의 문제점

2. 형성 과정과 선종 이해에 미친 영향

Ⅴ. 맺 는 말

 

Ⅰ. 머 리 말

선종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평자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노동관의 도 입, 종교실천성의 회복, 개인주의적이고 분파주의적인 성향, 직관강조의 접근 가능한 단 순성 등이 선종의 특성으로 대개 일컬어 온다.1) 이전의 교종단계와는 다르거나 진보한 모습을 선종이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종의 사회적 성격의 진보성은 논 리적인 면에서의 주관적인 무논리의 논리체계가 뒷받침하고 있다. 이 체계는 원시불교 이래의 반야(지혜)와 선정 사이의 갈등과,2) 대승불교 논리 속의 반야와 신앙 사이의 상호환원되는 기준의 모호함과,3) 인도와 중국의 사회구조의 이질성

* 우리불교문화연구소장. 1) 忽滑谷快天, 《朝鮮禪敎史》(春秋社, 1930 ; 정호경 역, 보련각, 1978). 권상로, 〈조선의 선종은 어떠한 역사를 갖엇는가〉(《선원》 1·2, 1931·1932). 김영수, 〈조선선종에 취하야〉(《진단학보》 9, 1938). 김동화, 〈신라시대의 불교사상(완)〉(《아세아연구》7―1, 1964 ; 《삼국시대의 불교사상》, 민족 문화사, 1987). 최병헌, 〈신라하대 선종 9 산파의 성립〉(《한국사연구》 7, 1972). ______, 〈나말려초 선종의 사회적 성격〉(《사학연구》 25, 1975). 고익진, 〈신라하대의 선전래〉(《한국선사상연구》, 불교문화연구소 편, 1984). 2) 田上太秀, 《禪の思想》(東書選書 51, 1980 ; 최현각 옮김, 〈원시불교의 선정설〉《인도의 선·중국 의 선》, 민족사, 1990) pp.46∼48. 3) 平川彰, 〈大乘佛敎の特質〉(《講座 大乘佛敎》 1, 春秋社, 1981) pp.47∼48.

國史館論叢 第52輯190

이 빚는 성속체제의 마찰을 변증법적으로 통일한 결과물이다.4) 물론 이것은 선승 개개인의 주관에 모든 문제의 해결을 떠맡긴 논리체계이다. 객관적 논리체계로서 설명과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에 교종이 직면했을 때, 선종의 이러한 주관 적 무논리의 체계가 代案으로서 제시되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이와 같은 선종의 주관적 이해가 전제된 사회적 성격의 진보성은 이를 맞이한 여러 신분집단들에게 각각의 이해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주의를 환기시키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서로 다른 해석이 이렇게 열려져 있기 때문에, 나말려초 사상사 이해에서, 초기 남종 선이 중세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암묵적으로나마 수행했는가의 문제에 집중할 때 이런저런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즉 고대적인 교종의 논리에 비해 남종선은 중세의 논 리라는 것이 권위있게 굳혀온 한 견해로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교종과 선종의 상호 대 립이 현실적으로도 보이지 않으며 선종의 정착에 오히려 교종 쪽이 협조했다는 정착과 정이 밝혀지고, 사회세력과의 제관계에서도 선종이 일정 세력집단과의 연계라는 특정한 사회적 고리를 거부하고 세력균형의 미묘한 선상에서 활동하다가 농민반란기를 고비로 권력으로의 기울기가 나타나며, 불교의 논리 그 자체도 이미 중세적이라는 점 때문에 이 견해는 비판받고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에 의해, 초기 선종의 역할에 대한 규정은 고대 에서 중세 사회구성체로의 전환보다는 중세의 공고화 과정을 수행했다는 쪽으로 점차 결론이 내려지고 있다.5)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연구들이 제시한, 선종을 고대에서 중세사회로의 사상전환에 결 정적 논리를 제공했다고 평가되었던 선종의 표방, 즉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에 대한 검토 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했는가하는 문제를 풀기에 앞서, 선종 과 교종의 관계에 얽힌 그물망이 선종의 논리나 집단적 실체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선종이 전체역사 속에서 보편적으로 가꾸어 온 사 유구조와 선사들이 일정한 시대를 살며 특수하게 드러낸 인식체계와의 구분을 뚜렷하게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의 정립이 앞서야 하며, 충분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만큼의 가름을 시도하겠다. 첫장에서는 선종이 전래하여 수용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미 신라사회에 뿌리를 깊숙히 내린 화엄종단의 대응이 어떠했는가를, 화엄 3대사찰의 선종 수용 실태를 통해 거기에 담긴 의도와 초기 선에 대한 화엄 쪽의 이해 정도를 추적한다. 다음 장에서는 선종이 9 산 선문으로 정착하면서 맺은 교종과의 실질적 관계는 어떠했으며, 그러한 관계를 유지 하게 한 선사들의 인식체계인 불립문자의 세계관은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마지막 장에서 는 교외별전의 세계관으로 이용되는 자료들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러한 사고체계

4) 柳田聖山, 《禪の歷史―中國》(筑摩書房, 1974 ; 안영길·추만호 역, 〈선종의 형성〉《선의 사상과 역사》, 민족사, 1989) pp.215∼218. 5) 추만호, 《나말려초 선종사상사 연구》(이론과 실천사, 1992).

- 191

가 언제부터 형성되어 갔는지를 정리하면서,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 쳤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Ⅱ. 수용기 선종에 대한 화엄종의 대응

외부에서 온 어떤 사상이나 종파든지 전래·수용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착해 간다. 전해 주는 입장을 반영한 것이 傳來라면, 받아들이는 입장이 강조된 것이 受用이라고 할 수도 있다.6) 나말려초의 선종 역시 이와 같은 과정을 겪는다. 여기에서는 본격적으로 선종이 정착되기 이전 시기의 선종에 대한 화엄종의 대응 실태와 그 의미를 다루고자 한다. 대 응실태라 해도 주제의 성격상 선종과 직접 관련된 것에 한정할 것이며, 전래를 다루자 않는 것은 法朗으로 전래자만 알려져 있을 뿐, 전래된 선종의 내용에 대해서 알려져 있 지 않기 때문이다. 선종의 수용시기는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참작하여, 경남 산청 단속 사에서 북종선을 편 神行이 활동한 중대말 부터 9산선문이 개창되기 시작한 9세기 중반 인 950년 이전기로 일단 잡았다. 선종 최초의 전래자 법랑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대(632∼647)에 당나라에 갔다가 돌 아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활동은 제자인 신행(704〜779)의 새김글에서 그 편린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신행은 30대에 출가하여 5년 뒤 법랑의 죽음을 맞이한다. 스승이 죽 을 때의 신행의 나이를 35세 쯤으로 낮추어 잡아도 739년이므로, 법랑은 100세 이상 장 수한 인물이라 하겠다.7) 신행은 중국 선종의 4조 쌍봉도신을 이은 법랑의 선맥8) 이외에 도, 神秀―普寂―志空의 북종선을 계승하여,9) 늦어도 60세 이후(746?∼779)에는 신라에 서 활동했지만 제자 대에 가서야 비로소 빛을 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제자인 三 輪禪師가 스승의 부도를 조성했을 때 (810년 무렵 )에,

크게 밝은 조정에 숨은 어진 이들과 마음을 도의 지경에 깃든 선비들과 생각을 빈비 사라 왕비에 꾀한 귀인들과 자취를 원적한 곳에 따른 무리들이 서로 돌아보며 맹서하기 를…절을 크게 지었다.…(시구로 읊기를) 서울의 귀족들과 황실의 친황들/두루 법의 비 같은 가르침에 젖고 함께 부처의 빛을 만났다(신행△△)10)

6) 최광식, 〈신라의 불교 전래, 수용 및 공인〉(《제23회 신라문화제 학술발표회 발표요지》, 1990〉 pp.15〜19. 7) “年方壯室 趣於非家 奉事運精律師 五綴一納 練苦二年 更聞法朗禪師在䠒距山傳智慧燈 則詣其所…動 求三歲 禪白登眞”(〈단속사 신행선사비〉《조선금석총람》 상, p.114). 8) “合于法胤 唐四祖爲五世父 東漸于海 通流數之 雙峰子法朗 孫愼行 曾孫遵範 玄孫慧隱 末孫大師也”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위의 책 p.90). 9) “遂就於志空和尙 和尙印大祖禪師之入室”(위의 책 p.115). 10) “大隱明朝之賢 栖心道境之士 策念韋堤之貴 亞迹圓寂之徒 相顧誓言… 作棟梁乎大廈…(其詞曰) 金

國史館論叢 第52輯192

라 하여, 신료·도사·황실·숭려들이 서원을 일으켜 단속사를 증축하는 것에서 이를 알게 된다. 그러나 金憲昌의 난(882년) 여파로 더 이상의 선법의 확대전파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선맥의 계보를 전혀 알 수 없는 9세기 초의 선종에 관한 산발적인 기록이 남 아있다. 애장왕 5년(804)에 禪林院의 鐘이 이루어졌고,11) 헌덕왕 9년(817)에 경주 興輪寺 에서 永秀禪師가 이차돈의 무덤에 예불할 香徒를 결성했다고 한다.12)

1. 화엄 3대사찰의 선종 수용

선종에 관해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위의 자료를 배경으로, 화엄종 사찰들이 초기선종의 수용에 대해 어떠한 대응 실태를 보이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즉 9세기 전반기 의 해인사, 부석사, 화엄사 등의 대표적인 화엄 3대사찰들은 어떠했는지를 알아본다. 804년 선종사찰인 선림원의 수석화상으로 생각되는 上和尙으로도 자리했던, 합천 해인 사의 창건주 順應은 牛頭禪을 익혀 당대 교종의 대표적인 사찰이 된 해인사에서 우두선 이 행해지게 되었으며,13) 이는 해인사의 학풍이 의상계를 이으면서도 교선일치적 경향에 서있었음을 추정케 하는 근거로도 작용하였다.14) 그리고 순응의 뒤를 이은 해인사의 利 貞은 禪伯이라 불리웠다. 17세(847년)에 해인사로 출가한 利觀은 圓鑑玄昱을 만나기 이 전에 선 수행을 하며 떠도는 것으로 보아 해인사에서 선법을 익힌 것으로 추측된다.

① 17세에 마침내 머리 깍고 승려가 되어 세속을 버렸다. 이에 해인사에 가서 여러 선 지식을 뵙고 훌륭한 가르침을 얻고자 참문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하였다. 뜻이 끝없고 말 솜씨가 우뚝하니 나이든 승려들이 모두 다 “후배가 두렵구나”라고 칭찬하였다. 뒤에 신 령한 산들에 노닐면서 두루 선림을 찾아 다니다가 우연히 높은 봉우리에 머물렀다. 문 득 푸른 산에 깃들고자 하니, 샘물과 구름의 형태가 기이하고도 이상했다. 세속과의 인 연을 끊고 고요히 머물러 가르치니, 소식을 들은 이들이 멀고 가까움 없이 구름처럼 모 여 들었다(홍각리관)15)

城鼎族 紫府親皇 齊沾法雨 同遇佛光”(위의 책 p.117). 11) 〈禪林院宗〉(《韓國金石全文》) pp.155∼156. 804년 종의 주조와 애장왕대의 불교정책으로 미루 어, 8세기 말에 이미 선종계인 선림원이 지어졌으리라 생각한다. 12) 《삼국유사》 3, 原宗興法 厭髑滅身 조. 13) 김상현, 〈신라 화엄학승의 계보와 그 활동〉(《신라문화》 1, 1984) pp.66∼67. 14) 최원식, 〈신라 하대의 해인사와 화엄종〉(《한국사연구》 49, 1985) pp.8∼9. 15) “年十七 遂削髮 披緇捐俗 往海印寺 訪諸善知 求其勝者 參聞如流 義海無涯 詞峯極岐 耆宿咸贊曰 後生可*畏* 後遊靈嶽 遍詣禪林 偶次凌岫 便欲△翠 泉雲奇而復異 絶昏埃之態 幽而敎廳者 無遠邇 湊若雲屯 及振△△△△年後 於靈巖寺”(《한국금석전문》 고대편, P.203: *은 추정). 박영돈,〈홍각선사비명 병서에 대하여〉(《한국고문서 동우회보》 창간호, 1984) pp.25〜27. 참조.

- 193

이관이 17세 때인 847년 해인사에서 여러 선지식을 만났다는 것은 순응과 이정으로부 터 내려오던 해인사의 교선일치적 성향을 증명하고 있다. ‘선지’를 ‘선지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 구절이 4구 형식의 문체를 구사하기 위해 뺀 것으로 여겨져서이다. 그리고 그 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그 뒤의 문맥과 전혀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두루 선림을 돌아다녔다’는 구절은 경문왕 즉위년 무렵(861년)으로 추측되는 시기에 ‘靈巖寺에 서 선정을 여러 달 동안 다시 닦는다’는 이어진 뒷 구절과 함께 결합시킬 때, 다른 금석 문의 예에서 나타나듯, 선 수련 뒤에 의례적으로 실시하는 심인의 확인과정이라고 단정 할 수 있어서이다. 태백산 부석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桐裏山門을 연 惠徹과 曦陽山門을 연 道憲도 부석 사에서 선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혜철은 15세인 799년에 출가하여 부석산사에서 8년간 화엄을 배우고 22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806년 뒤에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이미 율과 선에서 승려들 의 모범이 되었다’16)라고 한 평가와 이것을 방증하는 새김글 뒷 부분의 시구에서, 그가 부석사에서 선법을 익혔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시구는 앞의 행적을 요약하는 법인데, 읊어진 시간 대의 배열이 구족계를 받고나서의 상황과 일치한다.

② 15세에 출가하여 부석산에 머물렀다. 화엄을 배움에 단번에 다섯 줄을 읽는 총명함 이 있었고, 소승을 망라하여 틈이 날 적마다 부지런히 배우니, 어찌 화엄의 도리를 궁구 함에 깊은 뜻을 끄집어내고 은밀한 이치를 찾는 것에만 힘썼겠는가? 어찌 우리의 능력 으로 여러 길 되는 성인의 담장을 엿볼 수 있겠는가만,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글을 엮고 뜻을 짜서 여러 책을 이루니, 전 시대의 불치병을 고치고 여러 배우는 이들 의 몽매함을 없앴다. 동료들이 말하기를, “지난 번에는 부지런히 수련하던 벗이 이제는 우리를 이끌어가는 스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우리 불문의 안회로다”라 하였다. …우리의 깨달으신 분 여러 몸 나투셔/성품이사 본디 고요하되 쓰임 날로 새로와/이미 계율과 선 정에서 남과 나 차별 없애셨고/높은 산 우러르듯 더불을 이 없었다네(적인혜철).17)

도헌이 스승인 혜은선사에게 선법을 배운 곳도 부석사로 추정된다. 9세인 832년 출가 하여 구족계를 받은 17세 840년 때까지는 물론이고,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계람산 수석사에서 가르침을 펴기 이전에는 도헌이 부석사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16) “旣律且禪 緇流之龜鏡也”(〈태안사 적인국사 조륜청정탑비〉《한국금석전문》, p.188). 17) “年當志學出家 止于浮石山 聽華嚴有五行之聰 罔有半字三餘之學 何究本經以爲鉤深索隱 豈吾所能墻 仞所窺 不可不說 於是編文織意 積成卷軸 決曩代之膏盲 袪群學之蒙昧 同輩謂曰 昨爲切磋之友 今作 誘進之師 眞釋門之顏子也…唯我大覺兮 現多身 性本空寂兮 用日新 旣律且禪兮 無我人 高山仰止兮 莫與隣”(위의 책 pp.183〜190).

國史館論叢 第52輯194

③ 17세가 되서야 비로소 구족계를 받으러 수계단에 나아갔는데, 소매 속에 빛이 선명 한 것을 깨달아 이를 더듬어 구슬 하나를 얻었다. 어찌 마음을 그런데 두어 찾으려 한 것이겠는가? …하안거를 마치고 장차 다른 곳으로 가려 하는데, 밤중의 꿈속에서 변길 보살이 이마를 쓰다듬고 귀를 당기면서 말하기를, “고행을 실천하기는 어려우나 행하면 반드시 이를 이룰 것이다”, 라 하였다. …뒤에 산길을 오를 적에 어떤 나무꾼이 앞길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먼저 깨달은 이가 뒷사람을 깨닫게 하는 법이거늘, 어찌 덧없는 몸 을 추스리려 하시는가?”라 하였다. 그에게 나아가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움 을 깨달아 찾아와 얻고자 하는 이들을 막지 않았으니, 계람산 수석사에 대나무와 갈대 가 숲을 이루듯 사람들이 빽빽히 들어찼다(지중도헌).18)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이후 보현보살의 감응으로 고행을 닦는 이 일련의 과정 속에 서 스승인 혜은선사에게 선법을 배웠다고 추정하는 일은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 이전에는 물론이거니와 이 이후에도 다른 누구에게 배운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 히려 남들을 가르치는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인 혜은선사는 신행의 제자인 삼륜과 같은 항렬에 해당하는 준범의 제자인 데, 어떻게 교종사찰의 대부격인 부석사에 의존하여 선법을 폈던 것일까가 다시 의문으 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여러 추측이 가능하다. 아마도 초기 선종의 맥을 어 렵사리 일으켜 가던, 삼륜이 중창한 단속사가 김헌창의 난으로 타격을 받자 부석사에 의 탁해 선법을 전한 것일 수 있다. 거꾸로 말하여 이 시기의 부석사는 선종승려를 수용하 여 선법을 펼 수 있게 도와 주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지리산 화엄사 역시 선법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5세 되는 849년에 출가 한 開淸은 화엄사의 正行法師에게 선법을 닦는다.

④ 이윽고 여행 보따리를 짊어지고 번뇌를 가리우는 머리를 깍았다. 스승을 찾아 화엄 산사에 가서 정행법사에게 도를 물었다. 법사가 이러한 귀의심을 알아 머물 것을 허락 하니, 스승을 섬기는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다하여 화엄을 공부하며 깨달음의 경지에 깃들려고 힘썼다. 덕 높은 스승을 우러러서는 영취산의 이심전심의 가르침을 더 듬으려 했고, 바다와 같은 스승의 배움에 머물러서는 선후지 정사에서 세존이 말한 가 르침을 열심히 읽었다. 대중 말기에 구족계를 강주 엄천사 관단에서 받았다. …이때 멀 리 봉도 가운데에 금산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배를 타고 물결을 건너서 지팡이를 날 려 절을 찾아갔다. 참선을 닦던 즈음에 우연히 대장경을 읽다가 책장을 넘기던 한 소리 에 금강삼매를 터득했다. 100일 동안 단식하며 우선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닦았고, 세 해 동안 소나무를 씹으며 깨달음의 과보를 증득하기를 바랬다.

18) “至十七 受具始就壇 覺袖中光褶褶然 探之得一珠 豈有心而求…坐雨竟將他適 夜夢遍吉菩薩撫頂提耳 曰 苦行難行 行之必成…後山行 有樵嫂隘前路曰 先覺覺後覺 何須拾空殼 就之則無見焉 爰婢且悟 不 阻來求 森竹韋于鷄藍山水石寺”(최영성, 《주해 사산비명》, 1987, p.186).

- 195

부지런히 마음을 참구하던 어느 때인가 어떤 늙은이가 갑자기 나타나, 쳐다보는 사이 에 참선하는 승려로 탈바꿈하여, 찬란한 구슬 빛을 흩뿌리고 서리가 내려앉듯 흰 빛으 로 가득했다. 스님에게 말을 건네기를, “당신이 마땅히 빨리 궁극의 길에 의지하려 한다 면 먼저 굴령을 찾아가야 할 것이오. 거기에는 시대를 제대로 타고난 대사이자 속세를 뛰어넘은 신과 다름없는 분이 있어, 능가종의 핵심을 깨달아 인도 뭇 천신의 성품을 알 고 계시니”라 하였다(낭원개청).19)

선후지 정사의 가르침(猴池之旨)은 교종의 가르침을, 영취산의 이심 전심의 가르침(鷲 嶺之宗)은 선종의 전수를 의미하므로, 그의 스승 정행은 교관겸수를 했던 화엄승으로 보 인다. 10년 만인 859년 구족계를 받고나서는 남해의 蓬島 錦山寺에서 수행 하다가 金剛 三昧를 얻고 3년간 용맹정진을 한다. 정진의 과정에서 부지런히 마음을 참구(勤參) 했다 는 것도 선 수련의 전형적 표현이거니와, 능가종의 대가인 사굴산의 범일을 찾아가라는 꿈속의 지적에서, 보다 빠른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이란 전제를 내건 것으로 보아서도, 개청이 일정한 선 수행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지리산 화엄사에서도 교선 일치적 성향이 자리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선종의 정착기 이전인 9세기 전반기에 해인사, 부석사, 화엄사 같은 대표적 화엄 3대사찰이 교선일치의 성향에 입각하여 선 수련을 일정 부분 수용하는 대웅실태를 살펴 보았다. 다시 말해 浮石嫡孫으로 불린 神琳의 제자 순응과 순응의 계승자 이정이 주지한 9세기 최대의 화엄사찰 해인사는 물론이요, 의상조사의 창건 이래 화엄의 종주 사찰이던 부석사도 화엄과 나란히 선을 받아들였으며, 緣起祖師의 설화가 어리고 차를 공양하는 탑이 정취있게 뒤안에 자리잡은 전통어린 화엄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 수용 의도와 초기 선의 이해

대표적 3대 화엄사찰이 이 시기에 교선일치의 성향에 입각하여 선 수련을 일정 부분 수용하게 된 데에는 일정한 자기 의도가 깔려있으며, 그 의도 속에는 초기 선에 대한 나 름대로의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화엄사찰의 이러한 성향은 이 시기에 맞닥뜨린 형식화한 의상계 화엄교학에 대한 자 성의 일환으로, 의상의 실천적 화엄과 비슷한 선종에서 실제적인 배움을 구하고자 한데

19) “是以即爲負笈 兼以擔書 旣持浮海之囊 遂落掩泥之髮 尋師於華嚴山寺 問道於正行法師 法師知此歸 心 許令駐足 其於師事 俻盡素誠 志翫雜華 求栖祇樹 高山仰止 備探鷲嶺之宗 學海栖遲 勤覽猴池之 旨 大中末年 受具足戒於康州嚴川寺官壇…此時遠間 蓬島中有錦山 乘盃而欻涉鼇波 飛錫而尋投鹿菀 栖禪之際 偶覽藏經 披玉軸一音 得金剛三昧 十句絶粒 先修正覺之心 三歲食松 冀證菩提之果 勤參之 際 忽有老人 瞻仰之中 翻爲禪客 粲然發玉 晧爾垂霜 謂大師曰 師宜亟傍窮途 先尋崛嶺 彼有乘時大 士出世 神人悟楞伽寶月之心 知印度諸天之性”(〈지장선원 낭원대사 오진탑비〉《한국금석전문》, p.304).

國史館論叢 第52輯196

서 온 것이며,20) 남종선과 북종선을 5교판 속의 제 4의 頓敎로 설정하여 화엄속에 포용 하고자 한 澄親 교학의 반영으로 추측하기도 한다.21) 또한 신라 하대에 의상계 화엄승들 이 850년대 이후 원효의 화엄경 뿐 아니라 기타의 경론을 종합한 폭넓은 학습 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의상 이래의 실천적 전수행위에 기초한 전통적 논리기반 내에 커다란 파 탄이 일어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22) 그러한 연구 성과 위에서 이제까지 정리한 것을 되 돌아 보면, 보다 정확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해인사에서 이관이 배운 순응 이래의 교선일치적 성향, 부석사에서 혜철이 화엄과 함 께 익힌 선법, 도헌이 화엄사찰 부석사에서 혜은선사에게 받은 북종선, 화엄사에서 개청 이 정행법사에게 화엄과 함께 선법을 익혔음을 보아왔다. 여기에서 화엄 3대사찰의 교선 일치적 성향과 부석사에서 선종 주류의 하나인 북종선을 자체 내에 수용한 두가지 사실 이 이끌어진다. 이에 기초하여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선종 대응에 대한 순차적 대응이 3 대 화엄사찰에서 읽혀진다는 것이다. 시간 면에서 해인사―부석사―화엄사의 순서로 선 종을 수용하고 있는 것은 중국에서의 선종 풍미가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9세기 초 힘차게 새로 선 해인사는 창건주 순응 자신이 중국유학에서 경험한 선종의 극성을 화엄 내에 수용하고자 앞장 선 것이며, 일정 지분의 기득권을 누리던 보수화된 부석사와 화엄사는 해인사의 순발력보다는 뒤지지만, 중국 불교계에 일방적일 정도로 선 종이 풍미하는 불교계의 현실이 신라에도 밀어닥칠 것을 대비하여 선종을 수용한 것이 라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새로운 불교인 선종에 대한 나름대로의 방호책을 미래지향적 전망 속에서 불가피하게 세운 것이라 하겠다. 8세기 후반기까지 선종에 대한 대응준비를 갖추지 않은 다른 화엄사찰들은 선종의 유행에 휘말려 가는 것이 그 좋은 반증이다. 無 量壽寺, 夫仁山寺의 예가 그렇다. 869년 무량수사의 住宗法師에게 의탁한 여엄은 880년에 구족계를 받고나서부터 선종 으로 기울게 되고, 878년 부인사에서 출가한 경보는 어느날 밤의 꿈에 나타난 부처의 계 시로 선종에 귀의한다.

① 곧 승려가 되고자 무량수사에 가서 주종법사에게 몸을 맡겼다. 처음에는 화엄경을 읽었고, 여러번 절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그 능력이 반년 동안 무수한 게송을 외우 고 하루의 진도가 보통사람 30명을 합친 정도였다. 광명 원년에 비로소 구족계를 받고 는 하안거를 맞아 부처의 제자인 초계비구와 같이 계율을 잘 지켜 깨뜨리지 않았다. 그 러나 깨달음이야말로 참이 아니란 것을 점점 교종에서 알게되어, 깊은 경지를 찾는 보

20) 김복순, 〈신라 하대 화엄종의 계파〉(《신라화엄종연구》, 민족사, 1990) pp.101∼102. 21) 김복순, 위의 책 pp.139∼141. 22) 허홍식, 〈화엄종의 계승과 소속사원〉(《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p.184. 시간 상의 이해가 이 견해에서는 문제가 된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8세기 후반인 신라 하대부 터 있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9세기 초에 출가한 선사들의 수학 내용이 이를 잘 증명한다.

- 197

배로운 진실의 숲에 마음이 기울고 눈이 쏠렸다(대경여엄).23) ② 곧 바로 부인산사로 가서 머리를 깍고 절에 머물러 배웠다. 아직 산같은 선을 즐기 지는 않았으나, 민첩하게 공에 머물면서 부처에 기우린 마음은 오히려 더하였다. 어느날 밤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이마와 귀를 어루만지며 가사를 주고는 말하기를, “너는 이 옷을 입어 몸을 보호하면서 떠나거라. 이곳은 마음 공부를 하는 이가 머물만한 곳이 아 니니, 빨리 가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느냐?”라 하였다. 스님이 꿈에서 깨어나 스스 로 경계하기를, “도를 행하려 함에 알맞은 때를 놓칠 수 없다”라고 생각하여, 날이 새기 전부터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행장을 꾸려 새처럼 떠나갔다(통진경보).24)

3대 화엄사찰에서 보인 교선일치의 성향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無 染과 折中의 경우는 그 이해를 돕는 좋은 예이다. 설산 五色石寺에서 法性禪師에게 능가 선을 익힌 무염은 821년 무렵 화엄에 대해 배우고자 부석사 釋澄大德에게 들른다. 무염 은 중국화엄의 2조 智儼을 상징하는 화엄사찰 至相寺에 들러 화엄을 더 배우고자 중국 유학 길에 나선다.

③ 얼마되지 않아서 오색석사를 떠나 화엄경을 부석산 석징대덕에게 물었다. 보통사람 30명의 능력이 있어 스승보다 나으니, 장자의 수용할 수 없는 그릇에 대한 비유를 되새 기고는, “동쪽에 얼굴을 두어 바라보다가는 서쪽의 담을 보지 못하니, 저 언덕이 멀지 않은데 어찌 반드시 이 땅에만 연연하리요”라고 결심했다. …대흥성 남산의 지상사에 이르러 화엄에 대하여 말하는 이를 만나니 부석사에 있던 때와 같았다. 검은 얼굴의 한 노인이 말을 이끌어 내기를, “멀리 다른 이에게서 취하려 하는 것이 네게 있는 부처를 알아내는 것과 어느 것이 나을까?”라 하니, 스님은 답변이 궁색해지면서 크게 깨쳤다. 이로부터 글 공부는 치워두고 유력하다가 불광사에서 여만에게 도를 물었다. 여만은 마 조의 제자로 향산 백락천 상서의 불문 친구이다. …확실한 도로써 참 부처된/우리 해 동 김상인 …화엄은 붕새의 길 이끌고/배 타고 서해바다 뜨셨네(낭혜무염).25)

무염은 선법을 배우고자 중국에 간 것이 아니라 화엄을 배우고자 간 것이다. 이 점은

23) “便令削染 往無量壽寺 投住宗法師 初讀雜華 屢經槐柳所貴 半年誦百千偈 一日敵三十夫 廣明元年 始具大戒 其於守夏 草繫如囚 然而漸認敎宗 覺非眞實 頃心玄境 寓目寶林”(〈보리사 대경대사 현기 탑비〉《한국금석전문》 p.292). 24) “直往夫仁山寺落采 因栖學藪 未樂禪山 迅足空留 它心尙住 魂交之夕 金僊摩頂提耳 迺授之方袍曰 汝其衣之 所以衛身而行乎 且此地 非心學者栖遲之所 亟去之不亦宜乎 大師即以形開 因而警戒 以爲 道之將行 時不可失 昧爽坐以待旦 挈山裝鳥逝”(〈옥룡사 통진대사 보운탑비〉 위의 책 p.369). 25) “尋遂去 問驃詞健拏 于浮石山釋澄大德 日敵三十夫 藍茜沮本色 顧坳盃之譬曰 東面而望 不見西墻 彼岸不遙 何必懷土…行至大興城南山至相寺 遇說雜花者猶在浮石時 有一䃜顏耆年 言提之曰 遠欲取 者物 孰興認而佛 大師舌底大悟 自是置輪墨遊歷 佛光寺問道如滿 滿佩江西印 爲香山白尙書樂天空門 友者…道常得佛眞 海東金上人…雜花引鵬路 窾木浮鯨津”(〈성주사 대랑혜화상 백월보광탑비〉《주 해 사산비명》pp.47∼93).

國史館論叢 第52輯198

“화엄은 붕새같은 인물인 스님을 중국으로 가게끔 이끌었다”(雜花引鵬路)는 시구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상식적으로도 그렇지만, 무염의 예를 보더라도 화엄종 사찰에서는, 역 사 화엄론 위주의 대장경 학습에 치중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곱살 때 五冠山 寺로 출가한 절중도 15세 때부터 19세까지의 다섯해(839∼843)동안 부석사에서 수학한 다. 이 때 그는 화엄 강의를 들으면서 불경의 참 뜻을 더듬고 화엄 十玄의 미묘한 뜻을 구한다.26) 따라서 3대 화엄사찰에서 보인 교선일치의 성향은 화엄종의 교관겸수라는 수학자세에 서 나온 선에 대한 능동적 대응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수학 면에서의 질적이나 양적인 대등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때의 교선일치란 가치 지향의 면에서 교종과 선종을 대 등하게 다룬다는 의미로 풀어야 한다. 화엄종 사찰에서는 화엄론 위주의 대장경 학습에 치중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 초기 선에 대한 화엄종 쪽의 이해는 어떠했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교선일치를 지향한 화엄종단 쪽에서 초기 선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치 판단이 전제되지 않고는 대웅자체가 불가능하며, 이것은 선종 정착 이전의 선교 양종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선종사찰 斷俗寺는 신행이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곳이다. 이 절을 그가 창 건하지는 않았으며, 창건에 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선림원 종의 조성기록 부분에 는 선사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으나, 우두선을 익힌 해인사 창건주 순응화상이 수석화상 (上和尙)으로서 관여했다. 영수선사가 예불향도를 결성한 흥륜사는 법흥왕 14년(527)에 창건한 왕실의 원찰이다. 즉 선종 독자의 사원은 어느 하나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단속사와 화엄종 사찰을 단 순하게 비교하기는 어려우나, 해인사와 부석사 역시 화엄사찰이다. 그렇다면 초기의 선 사들은 교종계 사원에 의탁하여 선법을 전수한 것이라 정리할 수 있다. 이는 추측건대, 교종승들이 불교의 새로운 조류인 선사상에 대해 관심을 피력하여 선사들을 받아들였거 나, 아니면 스스로 익히기 위해 수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이때의 선종을 고려시 대나 오늘날 인식되는 선종의 개념으로써 규정하기는 매우 곤란함을 알 수 있다. 9세기 초두의 선종에 관한 산발적인 이 기록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정리할 수 었다. 선종이 도입된 초기에 선사들은 교종사찰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고, 9세기초 이 래 선종사찰이 하나 둘 생기면서 독자적인 선종사찰이나, 선교양립 또는 선교겸학의 사 찰과 함께 교종사찰이 나란히 경영되지만, 아직까지는 교종사찰이 양적인 면에서 압도적 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가 어떤 방식으로 어우러져있든 간에 부석사에서 도헌이 혜은선사에게 북종선을 전수받은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러한 인식에 설 때 주목되는 것이 〈斷俗寺 神行禪師碑〉이다. 새김글의 지은이 金

26) “年十有五 直詣浮石 因聽雜華 尋方廣之眞詮 求十玄之妙義”(〈흥령사 징효대사 보인탑비〉《조선 금석총람》 상, p.158).

- 199

憲貞은 신행의 행적을 기술하면서 겸손하게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목도 집어 넣 었다.

④ 마음의 지경이 맑지 않으면서 어떻게 3학의 마루에 오를 수 있겠는가마는, 바라는 것은 나의 반딧불 같은 반짝임으로 선사의 밝디 밝은 햇빛같은 광휘를 나름대로 돕겠다 는 것이다. 선지식들께서 남보다 앞서 헤아리신다지만, 손가락을 꺾어놓고 달을 찾으라 고 하거나, 달갈을 깨뜨리고나서 새벽을 알리게끔 울으라고 하는 듯한 일을 시키실 리 가 있겠는가?(〈신행△△〉)27)

이 대목에서 지은이의 의도와 관계없이 三學이란 어휘를 구사한 것이 주목된다. 김헌 정이 비를 지을 때의 선종에 대한 불교계, 즉 교종계의 인식을 반영하여 사용한 어구가 3학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불법을 깨닫는 요점이자 분류이기도 한 戒定慧 3학을 일컬 음으로써 선종에 대한 규정을 내렸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28) 이는 부석사 수학기의 혜 철이 화엄(慧)뿐만 아니라 계율(戒)과 선(定)에서도 승려들의 귀감이 되었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사실 계율 쪽은 이미 자장율사가 官壇(정부에서 인정하는 수계마당)을 설치한 이래 계 속적으로 율사를 배출하였다. 지혜에 속하는 교종은 사, 법사, 대덕, 대사, 화상 등의 존 재를 내어놓았다. 그러나 선정에 속하는 승려들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던 터이다. 이런 점에서 해인사 2대 주지인 이정에게 선의 거장을 뜻하는 禪伯이라 일컫는 것은, 그가 선 에 주력한 경력을 참조한 의미있는 경칭임이 확실하다. 이렇게 이해할 때, 이 밖에도 크게는 교종계와 작게는 화엄계 사찰에서 선사를 포용한 흔적이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의미를 바로 읽을 수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교종의 범 주 안의 한 분류인 계정혜 3학의 균형잡힌 조화를 꾀하고자 선정의 전문가를 환영했다 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교종과 대비되는 사유체계를 함유한 선종의 등장을 제 대로 이해하지 못한 한계 또한 드러냈다는 말이 된다. 예컨대, 이내 뒤이은 도의를 본격적인 선의 전래자로 인식하고 있지만 설악산 진전사 로 은둔하였고, 홍척이 홍덕왕 때 귀국하여 지리산 지실사에서 왕과 선강태자의 귀의를 받았으나 왕실 종친 몇몇과의 교류에 그쳤으며, 梵唄로 이름난 쌍계사의 혜소는 그 맥이 사자상승되지 못했다.29) 이러한 현상은 선종의 공간을 제대로 확보할 수 없었던 9세기 전반의 사회와 불교계의 제한된 이해와 영역에서의 활동상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는 것

27) “未淨一心之地 詎升三學之堂 冀將瑩火之爝 竊助明景之暉 前識早計 焉可以攦指求月 剖卵責晨也 哉”(〈단속사 신행선사비〉 위의 책 pp.115∼116). 28) 삼학은 계에서부터 정을 거쳐 혜로 이르는 단계적 상승으로 파악하거나, 계정혜 각각의 동등한 수준으로 파악되는 두 이해 방법이 있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경우로 생각되는 것이다. 29) 이때의 맥이 끊어졌다는 말은 걸출한 후예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다른 선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國史館論叢 第52輯200

절 시 기 승 려 내 용 전 거 비 고

단속사 764(?)〜779 신행선사

북종선 최초 전파

《금석전문》p.159/《삼국유 사》 8, 피은, 신충괘관조

이준 748년 중창 신충 763년 창건

해인사 9세기 초 이정선백 우두선 익힘

최치원,《해인사선안주원벽 기》

해인사 2대 주지

부석사 799〜814 혜철선사

계율과 선에서 모범

《금석전문》p.188 화엄 수학

선림원 804 순응화상

종의 조성, 우두선

위의 책 pp.155〜156 해인사 창건

오색석사 812〜821 법성선사 능가선 전수

《주해 사산비명》 pp.46〜47

무염의 화엄 수학

단속사 813년 앞뒤 삼륜선사

신행의 북종선 계승

위의 책 p.160 왕실 교류

흥륜사 817 영수선사 예불향도 결성

《삼국유사》 3, 원종흥법 염촉멸신

527년 창건

진전사 812년 뒤 도의국사

남종선 최초 전파

《금석전문》pp.199〜200 억성사 염거계승

지실사 826년 뒤 흥척국사 남종선 전수 위의 책 p.248 왕실 교류

쌍계사 830〜850 혜소선사 범패에 뛰어남 위의 책 p.208 법맥 단절

부석사 840년 앞뒤 도헌왕사

혜은의 북종선 전수

위의 책 p.250 화엄 3대 사찰

해인사 847년 뒤 홍각선사

여러 선지식 만남

위의 책 p.160 화엄 3대 사찰

화엄사 849년 뒤 개청선사

정행의 선법 전수

위의 책 p.304 화엄 3대 사찰

이다.〈표 Ⅰ〉.30)

〈표 1〉 9세기 전반의 교종사찰과 선승관계

이상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9세기 전반 화엄종의 대표적 3대 사찰인 부석사, 해인사, 화엄사에는 교선일치적 성향이 자리한다. 이는 중국 불교계의 선종 풍미 현상에 자극받

30) 본문과 표의 내용 가운데 고증과 논리적 추정이 필요한 부분이 적지않다. 지증도헌의 희양산문이 진감혜소의 법맥을 잇지 않았다는 주장을 따라, 혜소의 법맥은 단절되었다고 보았다(김영태, 〈희 양산선파의 성립과 그 법계에 대하여〉《한국불교학》 4, 1979 ; 불교학회 편, 《한국불교선문의 형성사적 연구》, 민족사, 1986, pp.179∼182). 그라나 희양산문의 개창을 정진긍양이 하였고, 정진 긍양과 지증도헌이 상관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는 주장은 수용하지 않았다.

- 201

아 선종에 대응하는 태세를 갖춘 것이며, 가치 지향의 면에서 선종을 대등하게 다룬다는 관점이 담겨 있지만, 자신들의 논리에 대비되는 사유체계를 함유한 선종의 새로운 등장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계정혜 3학체계 속의 선정으로 선을 이해하는 한계 또한 같이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초기의 선종이 교종사찰에 의탁한 것은 현실적 안정기반 구축의 여건이 미처 마련되지 못한데서 온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후의 교종이 선종과 큰 마찰없이 불교계를 동행하는 길을 닦아놓은 순기능도 있었으나, 교종과 대비되는 진 정한 의미에서의 선종전파가 아직까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역기능도 수행했다.

Ⅲ. 선사들의 선교양종 인식과 세계관

9세기 전반기의 해인사, 부석사, 화엄사 같은 대표적 화엄 3대사찰이 초기선종의 수용 에 대해 교선일치의 성향에 입각하여 선종전파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것을 보았다. 선 종은 교종 쪽의 이런 대응에 대해 정착기에 어떤 반응을 보이면서 그들 상호관계를 정 립시켜 나갔는가를 이제부터 추적하기로 한다. 먼저 정착기의 모습을 잠깐 살핀 다음, 이 부분에서는 이 시기의 선종이 교종과 어떠한 실제 관계를 맺었는가와, 선사들의 교종 에 대한 인식내용과 그 곳에 담긴 세계관을 읽고자 한다. 선종이 정착되기까지의 모습을 먼저 살펴본다. 선종 수용기에 남종선은 821년(헌덕왕 13)에 道義(생몰년 미상)가 처음으로 받아 들였고, 이 보다 한 세기 앞서 수용된 북종선 은 삼륜 이후 남종선의 유행에 밀려서 힘을 떨치지 못했던 것 같다. 더욱이 당 무종이 회창년간(841〜846)에 폐불사건을 일으켜 祠部牒이 없는 외국승들을 본국으로 귀환케 하 는 조치를 내리기 전후하여 남종선을 수학한 승려들이 돌아온다. 850년 대 무렵 전후부 터는 군주는 물론이요, 그 이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선종이 교종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불교라는 인식이 은연 중 자리하게 되었다.

뭇 신하들이 함께 기뼈하고 거리 사람들이 서로 즐거워하면서 말하기를, “구슬이 떠난 당시에는 산과 골짜기에 사람이 없는 성 싶더니, 오늘날 구슬이 돌아오니 내와 언덕이 보배를 얻었다”라 하였다. 부처의 미묘한 뜻과 달마의 원융한 가르침이 여기에서 다함 이 있게 되니, 공자가 위나라에서 고국인 노나라에 돌아온 것과 비유될 만하다(적인혜 철)31)

혜철(785〜861)이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839)에는 기사가 과장되었지만, 당대 일반인들

31) “群臣同喜 里閑相賀曰 當時璧去 山谷無人 今日珠還 川原得寶 能仁妙旨 達摩圓宗 盡在此矣 譬諸夫 子 自衛反魯也”(〈태안사 적인국사 조륜청정 탑비〉《한국금석총람》 상, p.118).

國史館論叢 第52輯202

에게 이미 선종(達摩圓宗)이 교종(能仁妙旨)과 함께 어울리는 존재로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체징의 새김글에서도 귀국(840)한 뒤에 많은 승려들이 선에 기울어져 있었다는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즈음의 사정을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 즉 850년대 이후에 가서는 일반 사회에서도 널리 인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치원은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에서 이들 귀국승려 중 12명을 손꼽았다. 이 들과 그 후예에 의해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전까지는 그 중심을 이루는 9개의 산문(九山禪門)이 지방에 세워지면서 경주 중심의 교종에 비해 힘의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32)

1. 정착기 선종의 교종관계 실제

이제부터는 9산선문으로 정착하던 시기의 선종이 교종과의 관계를 실제로 어떻게 맺 고 있었는가를 시간 순서대로 그 사례를 정리하기로 한다. 慧徹이 자신의 경지를 확인하기 위해 입당을 결행한 것은 30세(814)의 일이다. 중국에 서 그에게 심인을 전수한 이는 서당지장이다. 혜철이 스승 지장의 심인을 전수하고 얼마 뒤 입멸하자, 중국의 명산승경을 순례하다가 3년 간 서주 浮沙寺에서 대장경을 열람한 다. 혜철의 구도 이력을 정리하면, 신라 부석사에서 16년의 수련이 화엄에서 시작하여 선으로 귀결되었던 것과는 거꾸로, 중국에서 의 26년 간의 수행은 선의 인정에서 출발하 여 대장경(특히 화엄경을 중시)을 통한 검증과정을 그 끝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① 서주 부사사에 이르러 대장경을 열람함에, 어느 때 할 것 없이 열심히 노력하여 잠 시라도 쉬지 않고, 눕거나 앉지도 않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어떠한 오묘한 글이라도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떠한 은밀한 이치라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어, 때때로 묵 묵히 문장만 생각하더라도 역력하게 가슴 속에 나타났다(적인혜철).33)

秀澈은 스승 洪陟의 선법을 전수하고 나서 흥덕왕(826〜835) 때 이후 운수납자의 생활 을 할 때 선 수행과 함께 화엄을 공부한다. 이후 스승이 머물던 실상산문인 知異山 知實 寺(오늘날의 실상사)에 나아가 절을 확장하고 대장경을 열람하여 자신이 다른 경지에 대 한 점검을 빠짐없이 한다.

② 평소 참선하는 뜰에서 맑게 수행의 꽃술을 휘날리고 화엄의 아름다운 향기를 잘

32) 가장 늦게 세워진 것은 932년(태조 15) 황해 해주 수미산의 廣照寺에 자리한 眞澈利嚴(870∼936) 의 須彌山門이다. 이 중 북종선 계열의 曦陽山門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종선 계열이다. 그리고 이 곳에서 말하는 힘의 우위란 당대 사상계의 대표성을 선종이 차지했다는 말이지, 경제력의 우열이 나 사찰수와 신도와 승려수의 다과를 뜻하는 말은 아니다. 33) “到西州浮沙寺 披尋大藏經 日夕專精 晷刻無廢 不枕不席 至于三年 文無奧而未窮 理無隱而不達 或 默思章句 歷歷在心焉”(〈태안사 적인국사 조륜청정탑비〉《한국금석전문》 上, pp.188∼189).

- 203

모았다. 마침내 곧 바로 지리산에 나아가 지실사를 나름대로 쌓고 불경의 온갖 장소를 보아 하나도 빠뜨림이 없게 하였다. 이야말로 나면서부터 아는 능력을 타고나 나날이 부처님께서 드러내신 가르침의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그 힘이란 중생을 교화하는 데로 되돌린데 있었고, 그 이로움(이란) 시끄러운 세상에서 해매는 무리들을 고요한 지경으로 이끌어 준데 있었다. 따로이 선전한 바가 없지만 저절로 알려져서, 정법대덕 △△와 △ 주 승정 순△와 종자선사 △△ 같은 저 불문의 뛰어난 젊은이들이 제자가 되어, 이후로 스님의 문하에서 마음을 닦는 자리에 들게 되었다(수철△△).34)

도헌은 과거 대아찬 金巍勳이 승려가 될 수 있게 度牒을 준 은혜를 갚고자 좋은 곳으 로 천도케 하는 명복을 빈다는 명분 위에 864년과 867년 사이 어느 때인가 주지하던 賢 溪山 安樂寺에서 장육불을 주조하여 봉안한다.

③ 어느 날 문인들에게 알리기를, “돌아가신 한찬 김외훈 공은 나에게 도첩을 주어 승 려가 되게 하였으니, 공에게 부처님의 공덕으로써 보답해야겠다”라 하였다. 이에 1장 6 척되는 불상을 주조하고 금을 덧칠하여, 절에 봉안하고 저승길을 인도하였다. 은혜를 준 이로 하여금 날로 그 뜻을 도타웁게 하고 은해를 갚는 이로 하여금 본받게 하니, 은혜 를 갚을 줄 아는 올바름이 그 두 번째의 것이다(지증도헌).35)

大通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성주산문에 머물다 月嶽山 月光寺로 자리잡은 것은 경문왕 7년(867)이며, 사형 慈忍禪師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서다. 그때 보낸 편지에는 神僧 道證 이 창건한 유서깊은 이 절에는 불경이 잘 갖추어져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④ 다음 해 봄에 그 산문을 나와 ×××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여름나절 꿈 속에서 월악 산 산신령이 나타나 그 곳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또한 새벽녘에 자인선사가 편지를 보 내와 권하기를, “월광사라는 절은 신과 같은 스님이던 도증이 창건한 곳일쎄. 과거 우리 태종대왕께서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을 가슴 아파하고, 괴로움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 들을 가엽게 여겨, 우리 삼한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온 나라를 통일한 때에, 부처와 보살 들의 가호에 힘입어 길이 삼계의 재앙을 물리치셨다고 하여 특별히 이 산을 봉해주었으 니, 일찍이 《금강경》에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선기》에도 그 이름이 전해오네. 맑고 시원한 개울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안개라든가, 사방에 즐비하게 서린 빼어난 신 령한 기운 속에 불전 또한 갖추어져 있으니, 자네는 그곳에 머무시게나”라 하였다(원랑

34) “雅於禪苑揚蕤 集以雜花騰馥 遂△復直往 私築于知異山知實寺 覽諸章疏 無有孑遺 是生之知義日昇 覺者之闡宗 其力(也)還化衆生歟 其利佛也 導衆以寂 無言成蹊有若釋門之英 正法大德△△ 有△州僧 正順△ 宗子禪師△△ 而降 悉坐酒天”(추만호, 〈심원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의 금석학적 분 석〉《역사민속학》 1, p.279). 35) “他日告門人曰 故韓粲金公巍勳 度我爲僧 報公以佛 乃鑄丈六玄金像 傳之以銑爰用鎭仁宇導冥路 使 行恩者日篤 重義者風從 知報之是二焉”(〈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주해 사산비명》, p.187).

國史館論叢 第52輯204

대통).36)

兢讓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836) 직후 태조 왕건과 만난다. 중국에서 구해온 대장경 완본과 그 사본을 개경과 서경 두 서울에다 나누어 두고 싶어 한 왕건의 소망에 대해, 그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부처의 뜻을 펴는 훌륭한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권 장한다. 정종 즉위년 (945)에 정종의 초대에 응해 서울갔다 돌아올 적에는, 정종이 늘 그 가 불경을 열람하는 것을 감안해 새로이 필사한 義熙本 화엄경을 여덟질이나 기증한다. 광종 7년(956) 여름 입적할 때에는 평생 후학을 지도한 두길로 선적인 방법과 함께 불경 흥포를 내세우고 있다.

⑤ 태조가 이에 조용히 일컫기를,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장안으로 돌아와 불경을 번역 해 마음의 보물곳간에 쌓은 진리의 보배로써 비밀히 중생의 고통을 구제함이 있었는데, 당태종 이후 새로운 경론들이 차츰 많아졌기 때문에 최근 민구를 사신으로 보내 대장경 완본을 구해다가 항상 옮겨 적어 널리 퍼뜨리게 했습니다. 이제 다행히 전쟁이 그쳐 불 교의 기풍을 떨칠 수 있게 되었으니, 다시 한 책을 베껴 개경과 서경에 나누어 두고 싶 은데, 스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라 하면서 조용히 의논해 왔다. 스님은 “그것은 참 으로 함이 있는 공덕으로 위 없는 깨달음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을 널리 잘 펴는 일은 부처를 믿는 마음으로 우러르는 것과 같으니, 부처의 은혜가 왕의 교화와 함께 하 늘만큼 높고 땅만큼 오래가도록, 복덕과 이익이 끝이 없고 공덕과 명예가 이즈러지지 않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정종은 이에 새로 만든 마납가사 한벌을 기증했고, 또한 산 으로 돌아갈 적에는 새로 베껴둔 의회본 《화엄경》 여덟질을 보내드렸다. 이는 대체로 스님께서 색과 공에 다름이 없고 말하거나 않거나 간에 오히려 똑같아서, 매양 항상 불 경을 열어 보셨기 때문이다. …현덕 3년 가을 8월 19일에 갑자기 제자들에게 알리기를, “내가 중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가 30년이 넘었다. 새가 산을 가려 깃들듯 머물러 너희들을 이끌 때, 푸른 산과 흰구름을 빌려 미혹의 나루에서 길 잃어 헤매는 이들을 이끌었고, 매양 혹간 불경을 열어보아 복된 인연을 나라가 힘입게 했다. 이제 바람 앞의 등볼과 같고 물거품과 같은 삶이 오래갈 수 없어 일어서기가 어려울 성싶다. 내 어찌 떠나고 싶겠는가만, 너희들은 각자 마음을 잘 잡아 부처님의 훈계를 힘써 따르도록 하 라”고 하였다(정진긍양).37)

36) “來年春出山寓止△△△△ 夏夜△月嶽神官來請 及曉慈忍禪師致書云 月光寺者 神僧道證所剏也 昔我 太宗大王 痛黔黎之塗△ △△海之△△ △戈三韓之年 垂衣 一統之日 被△△△之△ 永除△△之災 別 封此山 表元勳也 曾授錄於金剛 又傳名於仙記 淸冷泉㵎 靉▼(雲+逮)煙霞 廣孕殊靈 備存△傳 師其 居焉”(〈월광사 원랑선사 대보선광탑비〉《한국금석전문》, pp.225∼226). 37) “乃從容相謂曰 自玄奬法師 往遊西域 復歸咸京 譯出金言 秘在寶藏 降及貞元已來 新本經論▼(穴/ 㴆)多故近歲遺使閩歐 贖大藏眞本 常令轉讀弘宣 今幸兵火已熸 釋風可振 欲令更寫一本 分置兩都 於 意如何 大師對曰 此實有爲功德 不妨無上菩提 雅弘經傳 能諱佛心 其佛恩與王化 可地久以天高 福利 無邊 功名不朽矣…乃以新製磨衲曆裟 一領寄之 及乎歸山 又以新寫義熙本華嚴經 八秩送之 盖爲大師

- 205

혜철과 수철은 대장경 열람을 통해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검증하고, 대통이 주석처를 월광사로 정한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그곳에 불경이 갖춰져 있던 점이며, 긍양은 평생 후학을 지도한 두 길로 선적인 방법과 함께 불경 흥포를 내세우고, 도헌은 주지하던 안 락사에 장육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 밖에도 신라 말 성전사원의 기능을 갖춘 교종사찰에 선종사찰이 편입되는 것을 허용한 일, 선사들의 제자들이 돌아가신 스승의 새김글을(교 종 승려들이) 쓰거나 새김돌에 새겨줄 것을 왕에게 요청한 일, 왕과 선사와의 중개역을 교종 승려들이 맡을 수 있었던 일, 김언경이 회사한 비로자나불상을 확장시킨 범우에 體 澄이 안치시킨 일, 태안사 중창시에 철조약사여래와 비로자나불 탱화를 석가여래불 탱화 와 함께 允多가 배치한 일38) 등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상의 내용을 교종사찰, 교종승 려, 불상과 불경과의 관계로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와 ㉯는 지방에서 번창하는 선종세력을 회유하기 위하여 선종사원을 중앙의 교종 사원에 종속된 편제로서 통제하려 한 시도로 짐작된다.39) 특히 신라 중고기부터 관사적 기능을 지니고 있던 흥륜사와 성전사원인 황룡사에 소속되었다는 것은40) 승정체제의 운 영에서도 선종과 교종의 밀월관계를 알려주는 뚜렷한 예라 할 수 있다. ㉰에서 ㉳까지의 교종승려와의 관계 또한 이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 이하는 선사 자신들이 교종의 상징물인 불상이나 교종의 교과서인 불경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사례들이다. 시간상으로도 고려 초에 활동한 긍양과 윤다를 제외하면 주로 신라말인 9세기 후반의 활동 모습들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 시기의 선종이 현실적인 면에서 교종과 대립하여 투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정한 동반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교종사찰〉 ㉮ 838년 혜소의 화개곡 당우를 대황룡사에 편입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령탑비〉 ㉯ 847년 낭혜무염의 성주사를 대흥륜사에 편입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령탑비〉 〈교종승〉 ㉰ 도헌의 비에 글을 쓰고 새긴 분황사 혜강 〈봉암사 지증대사 대적보광탑비〉 ㉱ 체징의 비에 글을 새긴 흥륜사 현창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 ㉲ 이 관의 비에 글을 새긴 보덕사 오강 〈사림사 흥각선사비〉 ㉳ 왕과 선사들의 중개역할을 한 교종승려들(〈표 2〉 참조)

色空無異 語默猶同 每矕金言 常披玉軸故也…至顯德三年秋 八月十九日 忽告衆曰 吾西學東歸 將踰 三紀 擇山而住 誘引後來 借以靑山白雲 導彼迷津失路 每或披尋玉偈 資國福緣 今風燭水泡 未能以久 難將作矣 吾欲焉往 各執尒心 勉遵佛訓”(〈봉림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위의 책 pp.383〜387). 38) 〈高魔 太祖二十有五年項 廣慈禪師 重創當時 佛像間閣〉(《泰安寺誌》, 아세아 문화사, 1977) pp.113〜118. 39) 허홍식, 〈고려초 선종 구산파설의 의문점〉(앞의 책, 1986) p.146. 40) 이영호, 〈신라중대 왕실사원의 궁사적 기능〉(《한국사연구》 43, 1983) pp.82〜83, 106〜108. 채상식, 〈신라통일기의 성전사원의 구조와 기능〉(《부산사학》 8, 1984) pp.26〜39.

國史館論叢 第52輯206

선사 시 기 이 유 중 개 역 근거(《한국금석전문》)

체징 헌안왕 請 移居 迦智山寺 영암군 승정 연훈법사 〈보조선사비〉 p.200

대통 경문왕 月光寺 永令禪師住持 관영법사 〈원랑선사비〉 p.226

수철 ? ? 혜위대법사·천△법대덕 〈수철화상비〉 p.231

도헌 헌강왕

喜捨 정법대통 현량

〈지증대사비〉 p.251

別墅生場 標劃 남천군 승통 훈필

鳳巖寺 疆域 標定 전 안륜사 승통 준공 〈지증대사비〉 p.252

〈불상과 불경〉 ㉴ 김언경이 희사한 비로자나불상을 확장시킨 범우에 안치한 체징41) ㉵ 스승인 서당지장의 임종 뒤에 3년 간 대장경을 열람한 혜철 ㉶ 스승 홍척국사가 있던 지실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한 수철 ㉷ 고인인 김외훈에게 은혜를 갚고자 주석하던 절에 장육불을 봉안한 도헌 ㉸ 주석처를 월광사로 정한 이유의 하나로 불경이 갖춰져 있음을 들은 자인과 대통 ㉹ 평생 후학을 지도한 두 길로 선적인 방법과 함께 불경 흥포를 내세운 긍양 ㉺ 태안사 중창시에 약사여래, 비로자나불, 석가여래를 봉안한 윤다

〈표 2〉왕과 선사들을 중개한 교종승

2. 선사들의 선교양종 인식과 세계관

일정한 방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선은 자체의 논리체계가 구축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승인되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논리체계를 사상이라고 규정한다면, 이 점에선 선에는 사상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억지로 틀을 잡으려 할 경우, 주관적인 무논리의 논리를 선사상이라고 굳이 규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나름대로의 방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여기에 서 다룰 4구표방이다. 그런데 자첫 문제의 소지가 여기에서 발생할 수 있다. 교종을 적 대시하거나 교종과 대결할 수 있는 개념어로 해석하는 실수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러

41) “宣帝十四年仲春 副守金彥卿 夙陳弟子之禮 嘗爲入室之賓 減淸俸出私財 市鐵二千五百斤 鑄盧舍那 佛一軀 以莊禪師所居梵宇 …咸通辛巳歲 以十方施資 廣其禪宇 慶畢功日 禪師莅焉”(〈보람사 보조 선사 창성탑비〉《조선금석총람》 상, p.63). 성주사와 실상사 등에서도 비로자나 불상이 봉안되었던 것으로 짐작한다(문명대,《한국조각사》, 1980, pp.234〜238).

- 207

나 그것은 교외별전의 시기가 되어서야 가능해진다. 불립문자 시기에는 교종에 대한 비 판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며, 이것은 이 시기의 선종이 어쩔 수 없이 교종에 근거할 수밖 에 없는 논리기반의 미구축에서도 연유한다. 이 때문에 고려중기의 화엄승 義天과 선승 知訥이 천명하는 논리 뒤에 숨어있는, 상대 를 상대로서 의식하는 것과 같은 언급을 이때의 선사들에게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불교현실도 이미 보아온 것처럼 9세기 전반에는 화엄종의 교선일치적 성향 추구라는 대 응 태세 속에서 초기 선종이 싹을 키워왔다. 9세기 후반에는 9산선문의 정착에 매진한 선사들이 교종과 대립하여 투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교종 측과 일정한 동반관계를 맺 고 있었다. 이제 정착기의 선종이 교종과 맺은 실질적 관계의 검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교 양종의 관계에 대해 선사들이 판단 내려온 구체적 내용물인 교상판석은 무엇이며, 그 배 후에 자리한 선사들이 보편적으로 가꾸어 온 세계관인 불립 문자는 무엇인가에 논의의 초점을 두기로 한다.

9세기의 중엽을 넘어서면서 9산선문이 집중적으로 세워지자, 교종에 대비되는 선종의 정체에 질문이 시작된다. 경문왕(861∼874)이 팔각당에서 수철에게 선과 교의 같고 다른 점을 물은 점은 그 대표적 경우이다.

① 함통 △년 태사로 시호를 받은 경문대왕이 ××× ×××. 계신 산에 특별히 부르니 아 름다운 거동을 옮겨 급히 뜻을 쫓았다. 어느날 八角堂에서 교종과 선종의 같고 다름에 대해 듣기를 청하자, “사시는 깊은 궁은 절로 천가락의 미로로 되어있어 ××× ×××가 끝 내 없군요.”라 대답하였다. 이에 (교종과) 선종의 가르침을 단계별로 (펼칠시기를) 그림 과 같이 보여주니 왕은 진심으로 기뼈하고 깨달았다(수철△△).42)

수철이 선교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이 부분(865년과 869년 사이)은 탈락한 글 자가 많아 정확한 해석을 하기 어렵지만, 선 수행에 힘쓰면서도 불경에 열중한 그의 행 적이라든가 이 부분의 문맥으로 보아 선교양종에 대한 차별적 관점을 경문왕에게 제시 한 것 같지 않다. 나말려초 시기에 활동한 수철 이외의 다른 선사들은 자신들의 선과 불교계에 벌써부 터 자리해있던 교와의 상호관계에 대한 이런 물음에 어떻게 답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 펴보기로 한다. 시간대가 분명한 그들의 언행부터 자세하게 살피고, 새김글 첫머리 부분 의 추상적 논의는 간단히 이에 덧붙인다.

42) “咸通△年 贈太師景文大王 ××× ××× 以在山別赴 降趺急從 一日八角堂 請敎禪同異 對曰 深宮自有 千迷道 △△終無 迺張△禪 階△如畵 王心悅悟爾”(추만호, 〈심원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의 금 석학적 분석〉《역사민속학》 1, p.279).

國史館論叢 第52輯208

行寂이 중국 유학의 길에 오른 것은 福泉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문성왕 17년(855) 이후 의 일이다.

② 그 뒤 오대산에 이르러 화엄사에 머물며 문수보살의 감응을 얻으려고 우선 중대로 오르던 중 갑자기 신인을 만났는데, 귀밑머리와 눈썹이 온통 희였다. 머리를 땅에 대는 인사를 받고는 무릎 꿇고 손을 들어 땅에 엎드리는 인사로 은혜를 빌자 스님에게 말하 기를, “멀리서 오기가 쉽지 않은데, 훌륭하구나, 그대는, 이곳에 머무르지 말고 멀리 남 쪽으로 가 다섯 가지 빛깔의 서리를 알면 반드시 깨달음의 비에 목욕하니라”라 하였다. 스님은 슬픔을 머금고 이마를 조아려 헤어진 다음 차츰 남쪽으로 갔다. …석상경제 화 상이 여래의 집을 열고 가섭의 뜻을 베풀어서 도가 깃든 나무 그늘로 선하는 무리들이 모인다는 소문을 들었다. 스님은 은근하게 이마를 조아려 화상의 발 앞에 절을 올리고 철저하게 정성을 바쳤으며, 있는 그대로의 방편을 베푸는 문 아래에 노닐어 마침내 깨 달음의 마니주를 얻었다(낭공행적)43)

五臺山 花嚴寺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으러 가던 그에게 中臺에서 나타난 神人이 선 종 쪽으로 전환하도록 이끌었다는 것과 그의 스승 石霜慶諸에 대한 소문의 내용은 중국 불교계의 선종 풍미 현상을 반영한 사실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풍미 현상을 요약한 여래와 가섭의 동렬화에 있다. 이는 교와 선을 동렬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도 된 다. 이러한 일반적 인식은 우리나라에서도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요동에서 유랑하다 13세(878) 무렵 동리산 태안사에 이르른 광자윤다가 그의 스승인 上方△如와의 첫 대면에서 베푼 △여선사의 가르침은 눈여겨 볼 만하다. 그가 깨달은 때 는 운수행각을 하던 대략 30세(894) 전후의 일로 추측되는데, 당시의 상황을 요약한 새 김글의 내용도 그의 사상적 근거를 알려주는 좋은 재료가 된다. 후삼국 통일 이후의 어 느 때 (936에서 943년 사이) 고려 태조 왕건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대궐에서의 선문답도 그러하다.

③ 옛말에도 마음으로 오로지 하면 돌을 뚫고 뜻을 절실히 하면 물이 솟는다 했으니, 도는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부처는 곧 마음에 있다. 전생부터 인연이 있는 이는 잠깐 사이에도 깨달으나 어두운 이는 오랜 세월토록 막혀 있으니, 부처님께서 설법과 비유를 하실 때 정기가 무딘이를 위해서는 거듭 말씀하시고 근기가 날카로운 이를 위해 서는 줄여 말씀하셨다. 너는 스스로 잘 살피거라. (그러나 마음이란) 내가 말한 데에 있 지 않다. …더 배울 것이 없는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끝내 기야에 힘 입었고, 더 스승

43) “以後至五臺山 投花嚴寺 求感於文殊大聖 先上中臺 忽遇神人 鬢眉結爾 叩頭作禮 膜拜祈恩 謂大師 曰 不易遠來 善哉佛子 莫淹此地 速向南方 認其五色之霜 必沐暴摩之雨 大師含悲頂別 漸次南行 … 企聞石霜慶諸和尙 啓如來之室 演迦葉之宗 道樹之陰 禪流所聚 大師殷勤禮足 曲盡虔誠 仍栖方便之 門 果得摩尼之寶”(〈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한국금석전문》, p.359).

- 209

삼을 것이 없는 경지를 스승삼는 것은 반드시 수다에 근거하였다. 드디어 마음이 흔들 리는 자들로 하여금 크게 한 소리를 믿게 만들고, 9종의 번뇌에 결박된 자들로 하여금 점차 9종의 깨달음에 돌려 보내게 하여, 이런저런 방편으로 이끌고 날랜 위력으로 부수 었다. …예전 조사들께서 심즉불이라 하셨는데, 이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만일 열반 에 다다른 이라면, 부처의 마음이니 하는 것에 걸리지 않습니다. /부처가 무슨 허물이 있기 때문에, 곧 반드시 이런 것을 얻습니까? /부처가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도 스스로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광자윤다).44)

첫 대목은 스승 △여가 윤다에서 법을 이어받을 능력이 있는가를 시험하는 부분으로, 부처의 설법과 비유를 주된 근거로 하여 전개하고 있다. 둘째 대목에서의 기야(Geya)는 불전에서 산문의 끝에 다시 그 뜻을 요약하여 실은 운문이며, 수다(Sutra)는 수다라의 약어로 불경을 의미한다. 기야와 수다를 배움과 스승의 길잡이로 간주한 것은 스승 △여 와 그의 사상이 교종에 철저한 기초를 내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셋째 대목의 왕건과의 선문답은 계속적인 부정의 연속으로 일상적 인식의 오류를 벗겨내어 마음자리를 획득케 하는 것인데, 그 주된 내용의 형식들은 부처와 마음을 대등하게 다루되 그것마저 벗어버 리는 데 두었다. 다시 말해 교와 선을 동렬화 한 것은 당시의 신라에서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무염의 손제자 玄暈는 靈覺山寺로 출가해 무염의 직계인 深光에게 선법을 물려받고, 898년 가야산사에서 구족계를 받는다.

④ 건령 5년 가야산사에서 구족계를 받고나서는 계율의 구슬이 더욱 맑아 수행의 뜻 이 더욱 굳세워졌다. 부처의 선법을 닦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문수의 지혜에 들어맞 아 경계에 휩싸이지 않으며, 삼장의 글을 읽어 이해와 행위가 조화되고, 사분율을 천명 하여 부지런함과 닦음이 어울리게 되었다(법경현휘).45)

현휘의 수계 직후의 상황을 요약한 이 부분은 특별히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대장 경(三藏)을 읽고 계율(四分律)을 밝게 드러냈다는 표현도 그렇거니와, 부처의 선법을 닦 아 마음이 혼들리지 않았다(修善逝之禪 靈臺不動)는 구절(善逝는 부처의 명호 중 하나 임) 이야말로 당시의 선종이 선에 대한 정통성의 근거를 부처에다, 다른 말로 하면 교종 에다 두었다는 매우 확실한 결정적인 지적이라 할 수 있어서이다. 현휘의 선은 심광에게

44) “古語 心專石可穿 志切泉俄湧 道非身外 即佛在心 宿習者覺於刹那 蒙昧者滯在萬劫 如來說諭 爲精 純則再語 爲根利則略言 汝自*好看 不*在吾說… …學無學之宗 終資紙夜 師無師之旨 必藉修多 遂使 弄一心者 大信一音 纏九結者 漸歸*九業 多多方便而引導 輕輕威力而折摧… …上問曰 古師云心即佛 是心如何 大師答曰 若到涅槃者 不留於佛心 問 佛有何過 即得必此 答曰 佛有非過 心自無過”(〈태 안사 광자대사비〉 위의 책 pp.353∼354, *은 수정). 45) “乾寧五年 受具於伽耶山寺 旣而戒珠更淨 油盈彌堅 修善逝之禪 靈臺不動 契文殊之慧 照境無爲 演 三莊之文 解行相應 闡四分之律 勤修兩存”(〈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위의 책 p.321).

國史館論叢 第52輯210

서, 심광의 선법은 무염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므로, 무염이 계승한 선은 부처로부터 이어 져 온 것이라는 현휘의 정통성에 대한 자기 언급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교의 기반 위에다 선을 세운 당대 선종의 선교 동렬화의 입장이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긍양이 924년 五臺山에 참배하러 가 赤瘡을 앓아 觀音寺 涅盤堂에서 기도드릴 때 오 대산 산신령이 나타나 적창을 치유한 일에서도 그런 점이 잘 나타난다.

⑤ 후량 용덕 4년 봄에 머물던 곳에서 나와 그윽한 곳을 찾았다. 오대산의 성스러운 불교의 자취에 예를 올리고자 멀리 만리나 되는 험한 길을 밟으셨고, 관음사에 이르러 쉴 적에도 불경을 밤낮으로 읽었다. 문득 얼굴에 적창 병이 나서 참례할 기회가 막혔다. 관우의 팔꿈치를 고친 편작같은 훌륭한 의원의 비밀한 처방을 만나지 못해 치료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오래도록 병을 제거하지 못해 점차 위독하게 되었다. 마침내 홀로 열반당에 앉아 보살들의 서원하는 마음을 조용히 갖고 있는데, 잠깐 사이 에 한 늙은 중이 문 안에 들어왔다. “너는 어느 곳에서 온 누구며, 괴로움은 어떠한가?” 라고 물어와, “바다를 건너와서 오랫동안 강남에 있었는데, 이와 같은 독한 종기가 제거 되지를 않는군요”라고 대답했다. “이제부터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 전생의 원독이 그러한 병을 낳은 것이다”라 하고는, 곧 물을 부어 단술 빗듯이 정갈하게 씻기니 문득 나았다. 또한, “나는 이 산의 주인으로 잠시 와서 그대를 위문한 것이니, 오직 부지런히 불법을 호지하여 순례하도록 하라”하는 작별인사를 남기고 나갔다. 환히 꿈에서 깨어나 보니 피부의 손상이나 부스럼 또한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것은 대개 일찍이 스님께서 청량의 화엄법을 몸소 실천하여 묘한 덕을 직접 보셨고, 일찍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끝내 용수보살의 불가사의한 경지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정진긍양).46)

성지화한 중국 오대산의 불적을 순례한다거나 관음사에서 밤낮없이 불경을 읊은 일이 라든지 열반당에서 치유기도를 한 점은 물론이지만, 그 끝의 淸凉澄觀과 부처와 용수보 살의 경지를 한 몸으로 이어받아 실천했다는 지적이야말로 그 백미라 하지 않을 수 없 다. 유학 이전에 남혈원 여해선사와 서혈원 양부선사의 선법을 이미 받았고, 유학한 900 년에서 924년까지 靑原行思계 谷山道緣으로부터 선법을 전수받은 뛰어난 선객이라는 점 을 함께 고려하면, 그가 징관의 화엄과 도연의 선법, 간경과 참선을 통해 교종과 선종의 하나됨을 몸으로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역시 선 수련의 결과를 교를 통해 검증하

46) “以梁龍德四年春 跳出谷山 路指幽代 將禮五毫聖跡 遠履萬里險途 屈於觀音寺 届歇之際 晝夜俄經 忽患面上赤瘡 致阻叅尋之便 未逢肘後秘術 莫資療理之功 久不蠲除 漸至危毒 遂乃獨坐涅槃堂上 暗 持菩薩願心 頃刻之閒 有一老僧 入門問曰 汝從何所 所苦何如 大師對曰 來從海左 久寓江南 若是毒 瘡 弗除而已 久曰 且莫憂苦 宿寃使然 便以注水如醴 洗之頓愈 謂曰 我主此山 暫來問慰 唯勤將護 用事巡遊 辭而出歸 豁如夢覺 皮膚不損 瘕癬亦無者 盖爲大師 躬踐淸凉 親瞻妙德 由早承於龜氏宗旨 果獲遇於龍種聖尊 不可思議 於是乎在”(〈봉림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위의 책 p.380).

- 211

면서 교의 기반 위에다 선을 세운 인물인 것이다. 새김글의 첫머리 부분에 나타나는 추상적 논의들도 시간대가 분명한 선사들의 언행에 서 드러낸 선교 동렬화의 사고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개청(835 ∼930)은 자신이 몸담은 선종이 추구해야 할 목표가 자기 마음의 올바른 주인이 되는 것 이며, 그것이 부처의 자리라고 한다. 형미(864〜917)의 스승 운거도웅은 첫 만남에서 자 신의 선법을 교종과 함께(禪敎之宗) 표현한다. 현휘(879∼941)는 菩提, 涅槃, 法性과 부처 가 가섭에게 비밀히 전한 것 (正法眼藏 즉 선)을 동일선상의 것으로 간주한다. 찬유(869 ∼958)는 깨달은 마음과 불법을 같은 것으로 정의한다.

⑥ 근원을 헤아려 보건대, 영취산 위에서 세존이 가르침을 세우는 종취를 열고 계족산 에서 가섭이 마음을 전하는 종지를 드러냈으니, 스스로가 부처이고 마음의 주인임을 알 아야 한다. 공의 도리가 규명할 수 없는 것임을 살피고 불성의 본래 근원이 청정한 것 임을 보았기 때문에, 서쪽 천축으로부터 동쪽 우리나라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성인은 일 찍부터 참된 가르침을 엮었고 선백은 일찍이 비밀하게 들어맞는 도리를 찾았으니, 여학 에서 구슬을 더듬는 것은 황제가 잃은 진리의 구슬을 전하기 위해서이며, 작계에서 도 장을 줍는 것은 법왕의 도장을 얻으려 히는 것과 같다. 이에 텅빈 것을 따라 참된 것을 잃으면 긴 세월토록 범부 안간의 세계에 머물게 되고, 허망한 것을 버리고 참된 것으로 돌아가게 되면 눈깜짝할 사이라도 문득 부처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낭원개청).47) ⑦ 대개 듣건대, 부처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영취산 꼭대기에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 는 문을 열고, 가섭이 죽을 때에 계족산에서 온전하게 되돌려 보내는 방(열반한 곳)을 닫았다고 한다. ××× ××× 불법의 기운이 점점 스러져 갔으므로 조사들이 발뒤꿈치를 뒤 이어 마음의 법을 서로 전하여, 성인의 경지에 가까운 승려들과 우러를 만한 높은 덕을 지닌 무리들을 배출할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 운거도웅 대사가 말하기를, “자네는 어 서 오게나. 일쩍이 네가 올 줄 알았네. 제자가 되려 한다면 절대의 진리를 가르쳐 주리 라. 기쁜 것은 ××× 우리 계통의 아름다움을 ××× 하고, 선과 교의 가르침을 ××× 하게 전한다는 것이리라”고 하였다(선각형미).48) ⑧ 뿐만 아니라, 비록 목마른 사슴이 더운 곳에 가면서 맑은 연못가에 다다랐다고 착 각하며, 눈 먼 거북이가 못가에 떠다니면서 오히려 의지할만한 나무를 만났다고 여기는 데 있어서랴. 그런 즉 알아라. 본래 법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데, 자신의 견해를 일으키

47) “原夫鷲頭巖上 世雄開立敎之宗 鷄足山中 迦葉表傳心之旨 則知認於三佛 知有心王 觀空而其道希夷 見性而本源淸淨 繇是 西從天竺 東届海隅 至人則早綰眞宗 禪伯則曾尋玄契 驪壑探珠 謂傳黃帝之珠 鵲溪拾印 如得法王之印 於是徇虛失實 遐刼而久滯凡間 捐妄歸眞 利郍而俄登佛位”(〈지장선원 낭원 대사 오진탑비〉 위의 책 p.303). 48) “盖聞佛拖出世 鷲頭開利物之門 迦葉乘時 鷄足闔歸全之 室△△越竺乾去聖身毒懷仁 傷鶴樹之昇遐竢 龍華之△△ 스悵△△△隱 其風漸衰 豈謂祖祖傳心 當具體而微之侶 師師接踵 有高山仰止之流至於圓 覺深仁 … … 大師謂曰 吾子歸矣 早知汝來 尋許昇堂 指其寶藏 所喜者 △△室家之美 △傳禪敎之 宗”(〈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 위의 책 pp.346〜348).

國史館論叢 第52輯212

는 것을 인연으로 하여 번뇌를 보이게 되나, 법칙은 항상 있는 그대로임을. 그러나 맑은 가르침의 단비에 흠뻑 젖으면 곧 심한 번뇌를 가라앉히고, 삼가 무수한 대중을 만나 문 득 미혹에 빠진 무리들을 건져내는 것이다. 보리, 열반, 법성은 늘 존재하는 것이어서, 이로써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들을 성취시 키며, 천신과 사람을 제도하고 보살을 가르치는 것이니, 바야흐로 미묘한 쓰임새를 생각 한 것이 치밀하고 부지런하다 할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부처가 처음 깨달았을 때 이전에 같이 수행하던 다섯 비구를 위해 삼승의 가르침을 설했지만, 세상의 삶이 다할 즈음 이내 거동을 옮겨 돌아가시면서 위 없는 가르침을 비밀히 가섭에게 전하여 말하기 를, “법을 보호하고 부지런히 닦아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여 세상에 널리 펴게 하였 다. 대가섭이 법의 핵심을 아난에게 부탁한 이래 계속 이어져 내려와 전해주는 이나 받 는 이나 함께 보존했다(법경현휘).49) ⑨ 스님은 색과 공을 모두 없애고 선정과 지혜 또한 원만하여, 지극한 도리를 산속에 서 행하고 깊은 공업을 우주 안에 베풀었으니, 부처님의 깨달음이나 신령스러운 화신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목욕을 마치고 방 앞에서 제자들에게 명을 내려 뜰 앞에 모두 모이게 하여 유훈을 내리기를, “모든 현상은 다 공한 것이어서 나 또한 떠나려 한다. 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마음이 나면 법 또한 나고 마음이 사라지 면 법 또한 사라지니, 어진 마음이 부처일뿐 어찌 부처되는 씨앗이 따로이 있겠는가? 여래의 바른 계율로 불법을 보호하고 힘쓸지어다”라 하고는, 말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 조용히 가부좌하여 고달원의 선당에서 돌아가셨다(원종찬유).50)

요컨대, 선과 교의 상호관계에 대한 요점을 새김글 찬자의 취향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선교의 차별성은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동일한 정신세계에 선교가 자리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삼지머 경보(869∼947)는 康僧會와 迦葉摩騰이 부처님(梵仙)의 비밀한 도장(密印)을 차고서 선사(禪伯)들의 비밀한 가르침을 펼쳐 불법을 배운 이(學佛)와 참선을 익힌 이 (習禪)를 배출했다고 까지 한다. 교는 물론이요 선의 전래자로 중국에 불법을 전한, 교종 에 속할 초기 인물들인 승회와 마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9) “而又雖渴鹿趣炎 謂至淸池畔 盲龜遊沼 猶逢浮木之中 則知法本不生 因生起見 見其可取 法則常如 然則浮零法雨之滋 便淸熱惱 虔謁微塵之衆 俄濟迷流 菩提涅槃 法性常住 用比莊嚴佛土 成就衆生 度 天人敎菩薩 方思妙用 可謂周勤 然測昔者 如來爲五比丘 說三乘敎 化緣已畢 尋以遷儀 臨涅槃之時 以無上法寶 密傳迦葉 流布世間曰 護念勤修 無令斷絶 自大迦葉 得其法眼 付屬阿難 祖祖相傳 心心 共保”(〈정토사 법경대사 자등탑비〉 위의 책 p.319). 50) “大師 色空雙泯 定惠俱圓 行至道於山中 施玄功於宇內 則何異佛者覺也 神而化之矣 … 往盥浴訖 房 前命衆 悉至于庭 迺遺訓曰 万法皆空 吾將往矣 一心爲本 汝等勉旃 心生法生 心滅法滅 仁心即佛 寧 有種乎 如來正戒 其護之勗之哉 言畢入房 儼然趺圭 示滅於當院禪堂”(〈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 비〉 위의 책 p.397).

- 213

⑩ 생각해 보건대, 법신이란 깊고도 깊으며 도의 본체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어서, 속세에서는 성인을 뵙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어진 분을 찾고자 하는 생각에 골똘해 있는 것이다. 석존께서 서쪽에서 나셨지만 참된 법은 동쪽으로 흘러와, 승회가 오나라에 서 노닐었고 마등이 한나라에 나아가, 부처님의 비밀한 도장을 차고서 선사들의 비밀한 가르침을 펼쳤다. 마침내 불법을 배운 이로 하여금 사람들을 교화하게 하고, 참선을 익 힌 이로 하여금 세속을 구제하게 하였다. … 교와 선 그윽하고 공하지 않음이 없듯/도 라든가 부처 몸 안에 있네/참된 지혜로서 일찍부터, 자신을/부처로 인정한 이 우리 선공 이로다(통진경보).51)

나말려초 시기에 시간상으로 분명히 확언되는 선사들의 구체적인 언행과 추상적인 새 김글 첫머리 부분을 통해 선교관계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살펴된 결과, 그들은 선교의 차이나 우열을 논하기 보다는 선과 교를 등격으로 병렬화하여 이해하는 일종의 교상판 석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선종의 정착과 함께 대두한 기존 교종과의 상호위치 정립 의 과제를 선교양립으로 정 리했던 것이다.

정착기의 선종이 교종과 맺은 실질적이고도 이념적인 관계 설정의 검토를 거치면서 당대의 선사들이 선교의 상호위상 설정이라는 현안 과제를 선교대립보다 선교양립적 방 법으로 해결한 데에는, 선종의 입론이 불가피하게 교종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자기논리 미구축이라는 불가피한 현실상황이 자리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현실의 바탕 속에 자리 하는 사고를 보통 세계관이라고 규정한다. 이 시기의 세계관을 불교식으로 정리하면 불 립문자이다. 이제 불립문자의 표방에 담긴 세계관과 그 의미를 나말려초 선사들의 사고 에서 추적하기로 한다. 중국 선종은 菩提達摩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와서 선법을 전수함으로써 시작된다. 慧可 僧璨, 道信에게 전해져, 제 5조 弘忍 문하에 이르러 북쪽 玉泉神秀의 漸悟說과 남쪽 大 鑑慧能(638〜713)의 頓悟說로 나뉘고, 뒤에 가서는 남종 돈오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혜능 문하는 南岳懷讓과 靑原行思의 두 갈래로 나뉘어 남악계통은 뒷날 다시 僞仰·臨濟 로, 청원 계통은 曹洞·雲門·法眼의 다섯 갈래로 나누어져 모두 五家로 세상에 알려진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임제·조동의 양파가 널리 성행했으며, 혜능의 제자 神會(684〜758)에서 시작된 荷澤宗도 있다. 흔히 《六祖壇經》으로 익히 알려진 남종선의 교과서라 할 수 있 는 《南宗頓敎最上大乘壇經法》도 신회가 정리했다고 한다. 신회는 단계적으로 밟아가야 한다는 북종선의 점오설을 비판하여 단숨에 깨닫는다는 돈오설이 선종의 정통설이라고 주장한다.

51) “恭惟法身動寂 道體希夷 塵區懸見聖之心 沙界掛求仁之念 大雄西降 眞法東傳 於是僧會遊吳 摩騰赴 漢 佩梵仙之密印 演禪伯之秘宗 遂使學佛化人 習禪濟俗”(〈옥룡사 통진대사 보운탑비〉 위의 책 p.367).

國史館論叢 第52輯214

또한 선사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아(直指人心), 중생이 본래 지 니고 있는 불성에 눈떠(見性成佛), 대립과 부정을 상징하는 문자를 뛰어넘어 초월의 세 계로 지향하여(不立文字), 번쇄한 교리를 일삼은 교종 종파들이 소홀히 다루어 온 부처 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본래 의미를 따로이 전한다(敎外別傳)는 4구의 구절로써 자신들 의 세계관을 정리한다. 이것이 四ロ標榜인데, 4구가 처음부터 함께 나타난 것은 아니었 다. 이심전심 불립문자는 달마설로 불리워진 ‘血脈論’에 드러나는데, 이것은 신수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실체는 神會壇語에서의 것이 처음이라 한다.52) 교외별전은 송대의 《景德傳燈錄》에서도 볼 수 없는 전설이며, 견성성불·직지인심은 석두가 그 의의를 밝 힌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098년 祖庭事苑에 이르러 비로소 4구가 완벽하게 갖추 어졌다.53) 따라서 시간면에서 따져보아 교외별전을 제외한 3구는 나말의 선종에 관한 논 의에 그대로 다루어져도 무방하다 하겠다. 삼구의 표방 가운데 不立文字란 ―원시불교 이래의 모든 불교철학에서 논의를 진행한 ―제행무상을 인식하여 유위법으로의 끊임없는 집착을 끊어 본래 면목을 되찾는 제법무 아적인 자기 초월적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 구체적으로는 세속적 언어형 식(불경이나 뒷날의 화두 따위)에 집착하지 말고 그 승의적 본질을 자각하여 해탈하라 는, 중국적으로 이해된 선의 경구라 할 수 있다.54) 전통적 시야에서는 이것을 교종과의 대립이나 교종의 부정을 말한다고 풀이함으로써, 학계에서도 그러한 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에도 그 풀이 를 둘러싸고 갈등이 있던 흔적이 엿보이는데, 현대적 의미에서의 사전이라 할만한 11세 기 말에 정리한 ‘조정사원’에서도, “불립문자의 뜻을 놓친 사람이 많아 가끔씩 문자를 버 리고 묵묵히 앉아 선만을 하는 이들이 있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 선문에서의 벙어리 양 이라 하겠다”라고 지적하고 있다.55) 즉 문자 위에 서지 않는다는 불립문자의 의미를 한 극단에서 지나치게 밀고 나간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56)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에 대해 대

52) 이종익, 《불교사상대전―불교사상개론》(불교사상사편, 1973) p.322. 일본인 柳田聖山의 4구표방 정리가 문헌비판적 검토에서 다소 앞선 내용이 있지만, 이해면에서 우리의 전통적 이해와 다르지 않다. 53) 김동화, 《선종사상》(보련각, 1985) pp.77∼78. 54) 철학적 정의에 의하면, 불립문자는 일상언어가 지닌 오류의 비판과 해탈 지향적 대화상황에서의 의미와 중국불교화된 특성이라는 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박태원, 〈불교의 언어이해와 불립 문자〉, 고대 석사학위논문, 1984, pp.79∼89). 또한 그 역사적 성격은 인도의 언어·사유·환경·행위 위에 서지 않는다는, 당나라 말기 중국인의 강렬한 자존심의 선언이자 자기확인이라는 데서 찾아진다. 이렇게 정의할 때, 문자를 세우지 않는 다는 불립문자의 개념과는 다른, 문자 위에 서지 않는다는 새로우면서도 보다 역사적인 해석에의 지평이 이끌어질 수 있는 것이다(추만호, 〈나말선사들의 교종관〉《1986년 전국역사학대회발표 요지》, pp.70∼77 및 추만호,〈운문문언〉《선사신론》, 불교문화사 편, 1989, pp.245∼250). 55) 《불교사전》(보련각, 1982) 불립문자조. 56) 김영수는 〈조계선종에 취하야〉(《진단학보》 9, 1938)에서, 9산선문이 처음 개창된 시기에 불립

- 215

립하거나 부정한다는 의식을 함유하는 것으로,57) 불립문자의 본래 의미를 자칫 잘못 파 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경우에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신라 말에 선종을 받아들여 성세를 구가한 9산선문 선사들의 경우에 불립문자라고 딱 들어맞게 언급한 일은 없다. 그렇지만 엿볼만한 실마리를 보여주지 않는 것도 아니다. 法離文字와 本離文字가 그것이다. 진리의 본질을 자각하여 해탈한 사람이 대승보살이며, 규정할래야 규정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를 좌선이라는 형식에 집착하지 않고 다다르는 데에 관건이 걸려있다는 것이 혜소(774∼850)가 정의한 법리문자이다. 중국의 운거도웅 이 경유(871∼921)에게 법을 전할 때 당부한 본리문자의 내용 또한 마찬가지이다. 번뇌 를 털어 내어 마음의 자리를 깨우치는 데에는 (생생한 감동과 현장감이 이미 사라져 버 린) 글월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① 부처의 가르침이나 마음의 법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이름을 지을래야 이름지을 수 없고 말을 할래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달을 얻으라고 한다 하더라도 손가락 에 정신이 매여 멍청하게 좌선만 일삼게 되니, 끝내는 바람을 얽어매려는 것과 같고 그 림자를 좇아 잡으려는 것과 같다. 그러나 멀리 가는 것은 가까운 곳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비유를 한다고 무엇을 다칠 것인가? … 하물며 불법은 글월을 떠나 있는 것이 니 말붙일 여지가 없다. 구차하게 억지로 말하는 것은 수레를 북쪽으로 몰면서 남쪽의 초나라 수도인 영땅에 가려는 꼴이 되기 싶상이다. … 입을 닫은 선이나 마음을 찾는 깨달음/그것을 넓힌건 다름 아닌 근기익은 보살일세(진감헤소)58) ② 우리 선종의 문은 본디 글월을 떠나 매양 마음자리를 생각하여 끝내 속세의 번뇌 를 터는 것인데도, 치우친 견해로 의심하여 도리를 얻으려 헤매인다(법경경유).59)

이와 같이 비록 충분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그러한 의식의 조각들을 찾을 수 있으니, 선사들의 사상을 압축하여 표현한 새김글의 첫머리에서 같은 맥락들이 짚어진다. 혜소보 다 1세기 앞서 활동한 신행(704∼779)은 법의 본체란 그 명제나 겉모습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非名法體와 非相法體로, 혜소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혜철(785〜861)은 부처가 깨

문자의 종지를 선포하여 문자경전을 배척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견해는 9산선문 당시의 선종 사유를 분석하여 내린 결론은 아니다. 서산대사 이래로 경색되고 편협하게 굳혀진, 선종 문중의 것을 받아들인, 일제강점기의 이해정도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57) 비판이라는 어휘를 부정이란 어휘와 구별하여 사용해야 한다. 부정이란 단어 구사는 해석의 문제 만이 아니라 불교 교파 이해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선종이 교종을 부정했다는 것은 선종 이전의 불교 자체를 부정했다는 말과 거의 다르지 않는 것이다. 따 라서 부정은 비판의 어휘에 통일되어야 한다. 58) “至若佛語心法 玄之又玄 名不可名 說無可說 雖云得月 指或坐忘 終類係風 影難行捕 然陟退自邇 取 譬何傷 …況法雜文字 無地措言 苟或言之 北轅適郢… 杜ロ禪那 歸心佛陀 根熟菩薩 弘之摩它”(〈쌍 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주해 사산비명》, pp.101∼123). 59) “此門 本離文子 每思心境 終拂客塵 愍彼偏方 迷於得理”(〈오룡사 법경대사비〉《조선금석총람》 상, p.164).

國史館論叢 第52輯216

달은 지혜란 범부들의 알음알이로서는 알 수가 없다는 不知智慧로, 뒷 시기의 대통(816 ∼883)은 화엄종에서 진리의 세계로 규정한 이사무애법계를 선종화한 말인 理寄忘言으로 표현함으로써 불립문자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표현하였다.

③ 대체로 법의 본체는 이름이나 모습이 아니어서 지혜에 어두운 이는 그 맛을 느낄 수 없다. 마음의 본 성품은 있는 듯 없는 듯 하니, 이치에 막힌 이가 어찌 그 근원을 헤 아릴 수 있겠는가? (신행 △△)60) ④ 공 가운데 있음을 말하고 현상의 세계에서도 공을 알아서, 바야흐로 번뇌에 물든 세속을 맑게하여 저절로 성인의 경지로 뛰어 오르니, 뼈대로 삼은 것은 허공의 큼보다 더욱 커다랗고 양으로 삼은 것은 바다의 깊음보다 훨씬 깊숙하다. 따라서 신통이나 참 다운 지혜는 알음알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적인혜철).61) ⑤ 우리의 삶이 기나긴 꿈과 같다는 것을 알고 뭇 생령이 여래와 똑같다는 것을 알아, 理無碍 법계는 말 잊은 데에 깃들고 事無碍 법계는 세속 밖으로 벗어나는 것과 같은 경 우에 있어서는, 그 오직 우리 스님의 종지일 것이다(원랑대통).62)

이러한 불립문자의 의미에 담긴 세계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를 이제 다루기로 한 다. 무염(800〜888)이 나름대로의 선교에 관한 교판론을 전개한 것에서 그 의미를 이해 하는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

⑥-1. 누군가는 선이 교와 같은 점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러한 가르침을 보지 못했 다. 근본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야 너무나 많지만, 나의 아는 바가 아니다. 대략 나의 뜻 을 밝힌다면 같다는 주장도 허여할 수 없고, 다르다는 주장도 그르다고 할 수 없다.(비 교할 겨를이 있거든 차라리) 좌선하여 번뇌의 기미를 그치게 하는 것이 승려의 차림에 가깝다(낭혜무염).63) ⑥-2. (왕실의 초청에 대해) 산에 사는 중의 몸으로 대궐에 들린 것이 한번이라도 심 하다 하겠습니다. 저를 아는 이는 거처하는 성주사를 무주사라 부를 것이고, 저를 모르 는 이는 제 이름 낭혜무염을 유염이라 일컬을 것입니다(낭혜무염).64)

60) “夫法之體也 非名非相 則盲聾智者 莫能觀其趣 心之性也 若存若亡 則童蒙理者 焉可測其源”(〈단속 사 신행선사비〉 위의 책 p.114). 61) “空中設有 色際知空 方淨六塵 自超十地 所體 大於虛空之大 所量 深於瀚海之深 神通也 不可以識識 智慧也 不可以知知乎”(〈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 위의 책 p.117). 62) “喩人間若大夢 齊衆生猶如來 理寄忘言 事超物外 其惟我禪師之宗乎”(〈월광사 원랑선사 대보선광 탑비〉 위의 책 p.83). 63) “或謂禪敎爲無同 吾未見其宗 語本夥頣 非吾所知大較 同不與 異不非 晏坐息機 斯近縷褐被者歟”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위의 책 p.80). 64) “山僧足及王門 一之謂甚 知我者 謂聖住爲無住 不知我者 謂無染爲有染乎” (위의 책 p.78).

- 217

무염은 선과 교의 차이를 수긍하기는 하나, 전혀 다르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⑥ -1). 오히려 선교판석을 지양한 초월적 입장에 있음을 천명한다. 선과 교가 같으냐 다르 냐 하는 시시비비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 본연의 자세가 제대로 되어 있느냐가 그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선교판석에 대한 그의 입장은 물론이거니와, 동시 에 그 이념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교종과 선종을 함께 인정하되, 그것을 포함하 여 뛰어넘는 자기초월적 세계관임을 잘 알 수 있다. 보다 그의 이념적 입장을 잘 드러낸 것이 경문왕의 초청(876년 봄)에 대한 무염의 답 변이다(⑥-2).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無住와 無染)으로 드러낸다. 중국의 선종 3조 인 승찬은《信心銘》에서 무주에 대하여,

⑦ 크나큰 도리를 넓게 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쉽지도 어렵지도 않은 것이다. 얄 팍한 견해로 여우마냥 의심하여서는 급한 데로 가거나 더딘 데로 구르기 쉽다. 집착하 여 올바른 가닥을 놓치게 되면 반드시 삿된 길로 빠지게 되니, 놓아두어 저절로 맡겨두 면 몸에 드나듬이 없개 된다65)

라 해석하였다. 이것은 진리의 本體에는 드나듬이 없지만 현상의 차별계(用)에는 드나 듬이 뚜렷하니, 현상의 차별계에 집착하지 않아야 된다는 의미이다. 승찬의 해석을 통해 낭혜무염이 표명한 바를 확실하게 되돌아 볼 수 있다. 낭혜무염이 뜻한 것은, 현상의 차 별적 눈으로 볼 때 산승이 왕실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 聖住와 有染이라 할 수 있으나, 차별적 현상계를 포함하면서 뛰어넘는 걸림이 없는 태도야말로 구도승의 본연 자세임을 선언한 것이다. 무염의 이런 표현은 중국 선사들의 어록에 나타나는 상단설법을 방불하게 할 만큼 똑 같은 어조의 논리성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낱낱이 예는 들지 않았지만 선사들의 새김글 첫머리 부분은, 존무(存亡)·有沒·眞假·空實·有非·理事 등에 걸림 없는 서로의 대립과 차 별을 지양하여 초월한 불립문자의 세계로, 신라말의 선사들이 지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다.66) 이러한 의식의 연장선 위에서 선사들은 극단적인 경우 선과의 결연마저도 단절하 고 부정한다. 중국선에서 임제종을 펼친 臨濟禪師의 ‘경을 보지 말며 선도 배우지 말라’ (不看經 不學禪)는 대표적인 예이다.67) 임제선사와 마찬가지로 이관(831〜880)도 선이니

65) “大道體寬 無易無難 小見孤疑 轉急轉遲 執入邪路 敎之自然 體無去住”(이회익 역주, 《선종사부 록》, 보련각, 1972, p.25, 일부 해석은 정정). 66) 중국적으로 이해된 선의 경구라고 앞에서 이야기 한 것이 여기에서 분명해 진다. 원시불교에서의 논의가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로 진행된 것과는 다르게, 대승불교에서의 논의는 흔히 체·상·용으 로 알려진 본체론과 작용론 쪽으로 문제의식이 옮겨온 것이다. 여기에는 도가의 영향이 심대했으 며, 인용된 혜소의 비에 나오는 ‘이름할래야 이름할 수 없는’(名不可名) 것과 같은 표현이 그 확실 한 예이다. 67) 임제는 12분교가 차별없는 참사람을 드러내는 말이지만, 배우는 이가 그 본래의 뜻을 만나지 못 하고 표현된 명구에만 얽매여 해석하니, 껍데기에 붙어 의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서홍 연의,

國史館論叢 第52輯218

교니 따지는 것을 허문다(權毀禪敎).

⑧ 법이 본래 참도 거짓도 아님을 알아야만 禪宗에 다다르는 것이다. 이 때문에 空을 말하지만 참(實)이 그 가운데 있고 참을 논하지만 공이 그 속에 있어서, 멀리 숱한 경전 의 의미를 깨우치고 늘 삼라만상의 실마리를 밝히게 된다. 도의 본체를 품고서 방편의 교화도 더불어 이름은 절로 그러한 것이어서, 없어지거나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더하거나 덜하지도 않는다. 닦으면 바른 깨달음을 깨우치고, 얻으면 그 근원을 파헤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이야말로 법이라 하겠다. …바다같은 덕 높이 우러르고/산악같 은(도리 깊이 흉모하니)/자주(서울로) 오르사/(드높이) 내빈석 자리해/선이니 교니 꺽어 허물어/×××를 깍아 ×××했네(홍각리관).68)

이것은 좌선이라는 형식에 집착하지 말고 진리의 세계에 다다르라고 웅변한 혜소의 주장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것을 가리켜 엄중한 의미에서 교를 부정하고 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다. 결국 교종과의 대립이나 부정을 말한다고 잘못 이해되어 온 불립문자는, 본체와 작용 서로간의 대립이나 부정을 꾀하는 차별적이고 무상한 인식수준을 단숨에 뛰어넘어, 제법 무아적인 자기초월적 세계로 지향한다는 신라말 선사들의 세계관을 집약시킨 警句라 하 겠다. 선사들은 이러한 세계관 위에서 기존의 교종을 자신들의 선종과 상호 대등한 차원 에서 능동적으로 포용하여 함께 양립시킨 것이다.

Ⅳ. 교외별전의 문제점과 형성시기

직지인심·견성성불을 선종 자체의 깨달음에 관한 접근법이라 한다면, 다른 한 구절인 敎外別傳은 앞서 본 불립문자와 함께 교학불교를 부정하거나 교학불교에 대립한다는 의 미의 표방으로 여겨왔다. 대체로 교외별전의 표방은 중국에서도 11세기 말에나 가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도 이 표방이 9세기 신라 말의 선사들의 입장을 나타낸다고 간 주한 것은, 비록 13세기 말에 저술된 책인 《禪門寶藏錄》속에서지만, 신라 말의 선사들 의 입을 빌려 교외별전의 입장이 말해지고 있어서이다. 역사학 쪽에서는 무비판적으로 이를 수용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최근 이에 대한 사상적 비판을 불교학 쪽에서 제기하

《임제집》, 동서문화원, 1974, pp.134∼139). 68) “知法本不眞不假 迺達禪宗 是故 課空而實在其中 論實而空居其內 逈曉千經之表 恒彰萬象之△ 焉壞 道體 兼作化成自然 非滅非生 不增不減 修之則了乎正覺 得之則豈究其源 斯爲法焉 … … 河德緣仰 岳△△△ 頻△△△ 承內座居 權毀禪敎 削△△△”(〈사림사 홍각선사 선감탑비〉《한국금석전문》, pp.203∼204).

- 219

여 신라말 선사들이 수행한 祖師禪 사상에 대한 충실한 접근이 이루어졌다.69) 당대의 저 명한 선사들에 대한 이러한 사상적 접근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문제를 검토하려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사료비판의 불균형과 불충분에서 오는 역사적 시각의 결여 때문 이다. 여기에서는 신라말 선사들의 입을 빌린 교외별전의 자료들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 하고, 그것이 참으로 어떠한 시대부터 출현하기 시작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1. 자료의 문제점

교외별전의 자료로서 자목하는, 《선문보장록》에서 언급한 원적도의와 낭혜무염과 통 효범일의 설 가운데 중요 부분만을 가려내어 적는다.

① 다삿 종류의 가르침 밖에 따로이 조사의 심인법을 전했다. 부처의 형상을 드러낸 까닭은 이해하기 어려운 조사들의 바른 이치의 기틀을 대하는 이를 위해 방편의 몸을 빌려 나룬 것이다(도의와 지원승통과의 대담).70) ② 혀를 놀리는 땅이란 부처의 땅이므로 중생의 근기에 따라 맞추는 통로요, 혀를 놀 리는 일이 없는 땅이란 선이므로 올바른 법을 전하는 통로이다(낭혜무염의 무설토론).71) ③ 석가는 별을 보고 깨달아 과거에 알던 법이 아직 지극한 데에 다다르지 못한 것임 을 알게 되어 여러 달을 돌아다니며 조사들을 찾아 다녔다. 진귀조사가 처음으로 깊고 도 지극한 뜻을 전했으니, 이것이 바로 교외별전이다(범일의 진귀조사설).72)

내용인즉, 선(조사)〓바른 이치의 기틀(正理之機)〓올바로 전한 문(正傳門)〓깊고도 지 극한 뜻(玄極之旨)과, 교(부처)〓방편의 몸(方便身)〓응용한 문(應機門)〓지극함에 이르지 못함(未臻極)으로 나누어 진다. 즉 부처의 경지도 지극하지만 궁극의 도달점은 교외별전 한 조사의 경지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생각하면 교종부정의 태도라고 까지 볼 수도 있겠 지만, 대체로 응용문인 교종에 대해 바른 문인 선종이 정통성과 우위를 갖고 있다는 주 장을 한 것이라 하겠다.73) 문제는 선종의 주장과 우위를 표방한 이 구절이, 표방한 당사

69) 성본, 〈신라선종의 선사상〉(《한국불교문화사상사》 상권, 가산 아지관스님 화갑기념논총 간행 위원회, 1992). 70) “五敎以外 別傳祖師心印法耳 所以現佛形像者 爲對難解祖師正理之機 借現方便身”(천책 찬,《선문보 장록》 중). 71) “有舌土者 即是佛土 是故應機內 無舌土者 即是禪 是故正傳內”(위의 책 상). 72) “因星悟道 旣知是法未臻極 遊行數十日 尋訪祖師 眞歸祖師 始傳得玄極之旨 是乃敎外別傳也”(위의 책 상). 73) 선종과 교종의 상호 정통성 주장에 관한 논의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교종 내부의 원교론이나 돈교론과 같이 역사적이며 논리적인 설득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근대사회에서의 여 러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그러한 논의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결과

國史館論叢 第52輯220

자들의 입장인가, 뒷 날 이것이 실린 책을 펴낸 이의 입장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입장의 시발점은 북종선의 신행과 남종선의 도의가 선종을 전래할 당시에, 이미 정착해 있던 교학불교와 갈등하고 대항했으리라 보는 일반적인 시각에서 출발한다. 이것 은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에서 최치원이 엮은 선종사의 개괄 자료를 일차자료로 믿은 데서 나온다. 사실 신행선사비 직후의 관련된 새김글을 보면 신행과 도의선사에 대 해 지증대사비와는 서로 다른 서술을 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④-1. 부지런히 수련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선의 거장이신 스승께서 돌아가시자 통곡 으로 몸이 가루가 될 정도였으니 그리워하는 정이 얼마나 지극했던가? 마침내 삶은 바 람 앞에 등불과 같은 것이며 죽음은 물위에 이는 거품과 같은 것임을 알아 멀리 큰 바 다를 건너 부처의 지혜 구하기를 오로지 했다. … (감옥을 지키는 이에게 말하기를) “나 는 해동에 태어나 법을 찾고자 이곳에 왔을 뿐이요”라 하였다(신행△△).74) ④-2. 이로운 때가.아니라서 도를 아직 펼칠 수가 없었다. 이에 바다에 뜨니 중국의 천자에게 알려졌다(신행△△).75) ⑤-1. 옛날 도의대사가 서당지장에게 심인을 받았고 우리나라에 돌아온 뒤에 그 선의 이치를 말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으레히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닦아 정신을 가다듬는 법을 숭상하여, 함이 없이 자유로운 가르침에 다다르지 못하고 헛되며 거짓된 것으로 여겨 숭앙하지 않으니, 달마가 양무제를 만나 쓰임을 인정받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안된 것을 알고 산림에 숨어 염거선사에게 법을 잇도록 부탁하고, 설산 억성사에 머물러 조사의 심인과 가르침을 전하여 열었다(원적도의).76) ⑤-2. 처음으로 깊이 들어 맞는 도리를 말하여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을 붙들어서 잘못되게 북쪽으로 치달리는 단점을 감싸주었지만, 메추리가 작은 제 날개를 자랑하여 붕새가 남쪽 바다로 떠나려는 높은 뜻을 비난하는 격으로, 이미 익숙해진 송언에 흠뻑 취해 앞다투어 마구니의 말이라고 비웃었다. 이 때문에 빛을 행랑 아래에 감추고 자취 를 병같이 생긴 별세계에 거두듯, 동해의 동쪽(신라)에 대한 미련을 그쳐서 끝내 북산의 북쪽(설악산)에 감췄다……그리워하는 이들이 개미떼처럼 온산을 메워서 매로 변화하듯 뛰어난 인물이 되어 깊은 골짜기로부터 나오게 되었다(원적도의).77)

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74) “勤求三歲 禪伯登眞 慟哭粉身 戀慕那極 遂以知生風燭 解滅水泡 遠涉大洋 專求佛慧 貧道生緣海東 因求法而至耳”《〈단속사 신행선사비〉《조선금석총람》 상, p.114). 75) “時不利兮 道未亨也 乃浮于海 聞于天”(〈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한국금석잔문》, p.249). 76) “初道儀大師者 受心印於西堂 後歸我國 說其禪理 時人 雅尙經敎與習觀存神之法 未臻其無爲任運之 宗 以爲虛誕 不之崇仰 有若達摩不遇梁武也 由是 知時未臻 隱於山林 付法於廉居禪師 居雪山億聖寺 傳祖心關師敎”(〈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조선금석총람》 상, p.114). 염거선사는 다른 금석문의 호칭 예로 미루어 廉巨和尙(?∼844)과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興法寺廉巨和尙塔誌〉 p.172). 그렇다면 직전제자가 교종사원에 머물렀던 셈인데, 이로 미루어 그의 스승인 도의의 선풍이 교종과 어울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고 보아 괜찮을 것이다. 77) “始語玄契者 縛猿心護奔北之短 矜▼(晏+鳥)翼誚圖南之高 旣醉於誦言 競嗤爲魔語 是用韜光廡下 欽

- 221

신행이 당나라에 간 이유에 대해, 지중대사비 (④-2)는 신행이 도력을 펼칠 수 없어서 라고 설명하지만, 신행선사비(④-1)는 수학하러 찾아간 것이라고 신행 스스로의 입을 통 해 말하고 있다. 당사자의 비를 존중할 때 최치원의 눈으로 재조명된 신라 불교사, 특히 선종사의 기록이 실린 지증대사비의 내용을, 참고의 수준을 벗어나 지나치게 믿는다면 자칫 이해를 흐려놓기 쉽다. 도의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바로 뒤에 활동한 법손인 보조선사의 비 (⑤-1)에는 도의의 은거가 당대인들이 아직 선종을 받아들일수 없었던 데 서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뒷날의 지증대사비 (⑤-2)는 선종을 비웃는 무리의 박해가 그 원인이라고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도의의 새김글이나 저술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것이나 소중하지만,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자료가 그때의 사정을 잘 전한다는 점에 서, 보조선사비의 내용을 지증대사비의 그것보다는 더 따를 수밖에 없다. 도헌에 관한 기록인 지증대사비보다는, 도의의 선사상을 계승한 손제자 체징에 관한 기록인 〈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는 더욱 더 도의의 기본입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선문보장록》의 내용과는 달리 교종과 갈등을 일으키는 선 우위적 사고가 담겨있지 않다.

⑥ 듣건대, 저 깊고 고요한 선의 경지와 도의 본체인 을바른 깨달음은 헤아리거나 알 기가 어려운 것이 허공과 바다 같아서, 용수와 사자존자가 인도에서 벗겨도 실체가 없 는 파초로 비유했고, 홍인과 혜능조사가 중국에서 정제된 우유로써 말했다고 한다. 그것 은 대개 인과의 자취를 쓸고 색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마을을 떠나, 보살이 타는 커다란 소 수레에 올라 자취없는 지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혜의 빛이 멀리까지 비 추고 혜택이 먼 곳까지 흘러 법의 빗물로 어두운 거리를 뿌려주고 자비의 구름을 깨달 음의 길에서 베풀게 되었다. 진리의 본체가 공한 것을 본 이들은 단숨에 번뇌를 쉬어 저 삿된 견해의 높은 산을 뛰어넘고, 함이 있는 것이라고 집착하는 이들은 기나긴 세월 토록 캄캄한 업보의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다. 하물며 말법의 세상에서 불법이 어지러이 휘날려, 참된 가르침에 들어맞는 것이 드물 고 서로 치우친 견해만을 고집하여, 마치 물을 쳐서 물에 비친 달 그림자를 잡으려하고 끈을 꼬아 바람을 얽어매려는 것과 같이, 한낱 감정만 수고롭게 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어떻게 그 지극한 이치를 얻을 수 있겠는가? 중생이 비로자나이고 비로자나가 중생인데 도, 중생은 비로자나가 법계 가운데 종횡으로 업보를 지어나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비 로자나도 중생아 현상계 안에서 말끔하고 늘 고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어찌 미혹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미혹됨을 아는 이는 크게 미혹되지 않은 것이요, 그 미혹됨을 아는 이는 바로 우리 스님이로다. …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선지식을 뵈며 모든

迹壺中 罷思東海東 終遁北山北 … … 蟻慕者彌山 鷹化者幽俗”(〈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한 국금석전문〉, p.248).

國史館論叢 第52輯222

곳을 두루 돌아, 법계의 좋아함과 하고자 함이 같으며 본성이나 모습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 “우리 조사의 말씀에 덧붙일 것이 없으니 무엇하러 멀리 나도는 수고를 할 것인가 ? 뜻이 일어나는 마땅히 그쳐야 할 옳은 자리에서 그칠 뿐이다”라고 했다. … 고요하고 확 트인 비로자나 만물 다 싸서 기르되/꿈틀거리는 중생들 비로자나의 율법을 어기니/이미 둘 다 같은 몸이거늘 다시 그 무엇 부처일꼬/더 더욱 미혹된 것이사 도 깨 쳐야 다 마치리(보조체징).78)

위의 내용을 검토하면, 중국의 조사들이 수행한 선의 경지와 인도의 존자들이 설파한 불타의 을바른 깨달음은 법화경의 대승불교에 대한 비유로써 통합될 수 있는 성질의 것 이다. 화엄의 진리 상징인 비로자나불과 깨달음의 주체인 중생의 관계가 하나로 될 때 부처를 이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의식선상에 서서 바라볼 때 중국에서의 구법행 각도 더 이상의 어떤 매력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며, 종합하는 시구에서 다시 한번 진리 와 중생인 나와의 만남이 부처라는 자각자를 낳는다는 것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체징의 조사인 도의의 선사상 역시 이러한 사고에 바탕을 두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 으며, 도의의 사고 역시 선교대립적 관점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방증하 는 셈이다. 따라서 이렇게 사료비판을 할 때 지증대사비의 선종사 서술 내용을 아무런 가감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첫 잘못하면 신라말기의 선종에 관한 이해의 물꼬를 다른 방향으로 터놓기 쉽기 때문이다. 즉 선종이 정착되기 이전의 기존집단인 교 종측과의 대립하는 모습으로 인식하기 쉬운 것이다. 게다가 앞에서 인용한 天▼(正+頁) 의 《선문보장록》에 나오는 ‘도의와 지원승통과의 대담’이라는 형식으로 꾸며진 설화내 용과 복합적으로 연결시키면, 이들 자료가 선종의 4구표방의 하나인 교외별전의 입장을 나타낸 것으로 잘못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오해는, 100여년도 안되는 선사새김글들의 내용조차 같은 인물에 대한 서 술이 서로 다른 것을 지나쳐버린 데다가, 자료의 빈곤으로 말미암아 신라말기와는 400여 년의 차이가 나는 뒷날의 설화를 쓴 것 뿐만 아니라, 달마조사에게 부회된 선종의 4구표 방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그대로 따른 것에서 비롯한다. 이런 점에서 주목되는 자료가 《祖堂集》 17의 것인데, 그 시차도 100여 년(950년 대) 정도이 며, 새김글과 비교하여 약간 더 꾸민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범일의 자료로서는 당대의 것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78) “聞夫禪境玄寂 正覺希夷 難測難知 如空如海 故龍樹師子之尊者 喩芭蕉西天 弘忍惠能之祖師 譚醍醐 於震旦 蓋掃因果之迹 離色相之鄕 登大牛之車 入罔象之域 是以智光遠照 惠澤遐流 濾法雨於昏衢 布 慈雲於覺路 見空者 一息而越彼邪山 有爲則永劫而滯于墨業 矧乎末法之世 像敎紛紜罕契眞宗 互持扁 見 如擘水求月 若搓繩繫風 徒有勞於六情 豈可得其至理 其於衆生爲舍那 舍那爲衆生 衆生不知 在舍 那法界之中 縱橫造業 舍那亦不知 衆生在苞含之內 湛然常寂 豈非迷耶 知此迷者 大不迷矣 知其迷者 惟我禪師乎 … 路出滄波 西入華夏 參善知識 歷三五州 知其法界 嗜欲共同 性相無異 乃曰 我祖師所 說 無以爲加 何勞遠適止足 …廖廊舍那育萬物 苞育萬物 蠢蠢衆生 違舍那律 二旣同體 復誰是佛 迷 之又迷 道乃斯畢”(〈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 위의 책 pp.198∼201).

- 223

그의 사상을 알 수 없지만, 낭혜무염에 관한 기록은 앞서의 《선문보장록》의 낭혜무염 설화와 관련된 부분이 있어 눈길을 끈다.

⑦ (혀 놀리는 일이 없는 땅 無舌土 문답에서) ―묻기를 : 한 조사 가운데 두 땅을 갖주고 있습니까? ―답하기를 :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앙산혜적은 “두 입은 하나의 혀조차 놀리는 일이 없다”라 하였으니, 그것이 곧 나의 가르침이다. ―묻기를 : 한 조사 가운데 두 땅을 본다는 것은 무슨 뜻 입니까? ―답하기를 : 바른 법을 이어받는 뛰어난 근기의 사람은 법이란 것을 찾지 않는다. 그 러므로 스승 또한 먹일 것이 없으니 이것이 혀 놀리는 일이 없는 땅이다. 또한 참 으로 법을 찾는 이를 맞아서는 짐짓 이름 붙이거나 말로 나타내는 말을 쓰기 때문 에 혀를 놀리는 땅이라 이름 부른 것이다.79)

400년의 시차를 보인《선문보장록》의 내용(②)에서는 부처의 땅으로 표현한 교종을 상대적인 것으로, 선종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실제 행적과 불과 1세기의 시차에서는 선종의 입장 안에서 말있는 경지와 말을 벗어난 경지라는 두 경지를 설정한 것을 가리킨다. 즉 여기에서는 무설토가 앙산혜적이 입적할 때 당부한 말씀이라는 권위 를 빌려다가,80) 선종의 가르침 안에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두가지를 모두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문보장록》에 나타나는 신라 선종 조사들과의 관련 내용은 1290년대 천책이 정리한 선종우위의 특색을 반영한 설화 모음의 한 부분이라 하겠으 며,81) 나말에 교종에 대한 비판이 당연히 있었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선종우위의 특징을 부각한 주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2. 형성 과정과 선종 이해에 미친 영향

선종을 교종과는 다른 논리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교외별전의 자료라고 이해한 것 들이 사실은 고려 중기 이후의 선 우위적 입장을 반영하여 설화형식으로 앞 시대의 저

79) “問曰 一祖師中 具二土耶 答曰 然也 是故 仰山云 兩口一無舌 即是吾宗旨 問曰 一祖師中 見二土 如何 答曰 正傳善根 不我法 故師赤不餉 是爲無舌土也 應實求法之人 用假名言之設 是名有舌土矣” (《조당집》 권17). 80) 무설토란 《앙산어록》과 《벽암록》의 자료에 의하면, 스승과 제자 간에 눈으로 대화가 나누어 질 수 있는 경지, 즉 正法眼藏·불립문자·이심전심의 다른 표현이다(성본, 앞의 논문 pp.519〜520). 81) 중국 선종의 주장은 북종의 대승선에서 남종의 여래선으로, 남종의 여래선에서 마조계 앙산의 조 사선으로 바뀌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에 보조지눌의 제자 진각혜심이 〈선문염송〉에 서 조사선을 강조하였고, 크게 부각시킨 것은 고려 말기의 진정천책의 《선문보장록》이다(한기 두, 〈전통선의 전개〉《선과 무시선의 연구》, 원광대출판국, 1985, pp.71〜72).

國史館論叢 第52輯224

명한 조사에게 붙여져서 권위있게 꾸며진, 비역사적 자료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러한 교외별전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 구체적으로 언제쯤부터 였는가를 살펴보고, 그 것아 오늘날의 선종 이해에 끼친 영향이 어떠했는가를 짚어보기로 한다. 《선문보장록》 다음으로 나말려초 선종의 선 우위적 입장을 반영하는 자료로 흔히 인용되는 것이 〈玉龍寺先覺國師慧燈塔碑〉이다. 15세(841, 문성왕 3년) 이래 화엄사에서 교종을 배우던 도선이 20세 때(846, 문성왕 8년) 에는 교종에 한계를 느껴 선종으로 전 환케 되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① 15세가 되었을 때 재주와 지혜를 일찍부터 이룬데다가 기예마저 아울러 통달하였 다. 드디어 머리를 깎고 월유산 화엄사에 들어가 화엄경을 읽고 익혀서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이미 큰 뜻을 통하였다. 문수보살의 절묘한 지혜와 보현보살의 행원에 남김없이 모두 들어맞으니, 숱한 학도들이 함께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귀신같은 총명이라 여겼다. 스무살 먹은 문성왕 8년에 갑자기 혼자 생각하기를, “사나이라면 마땅히 법을 여의고 스스로 고요해야 할 터인데, 어찌 문자 사이를 지키는데만 힘쓸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선각도선).82)

도선 자신의 행적과 그것을 밝혀준 자료가 상당한 시간의 거리가 있다는 것이 여기에 서도 문제가 된다. 《선문보장록》처럼 400년 정도의 시차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을 만큼인 250여 년의 시차가 있다.83) 다시 말해 고려 중기 선종 측의 선 우위적 사고가 반 영된 것이므로, 교종에서 선종으로의 전환에 대한 도선의 정신 자세를 이 새김글에 표현 된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말려초 선사들의 새김글 에서는 선 우위적 사고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이제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초기에서 조금 벗어나면서부터는 그러한 인식들의 싹이 트고 있었음을 알 려주는 자료가 드문드문 눈에 띄기 시작한다. 〈葛陽寺洪濟尊者寶光塔碑〉의 등장이 그 처음이다. 새김글의 시작에서는 교종과 선종이 병렬하여 양립하는 이전의 새김글과 다르 지 않다가, 갑작스레 깊은 교종에서 참된 선종으로 나간다는 선종 전환으로의 의미심장 한 말씀이 등장하고 있다.

82) “年至十五 穎悟夙成 兼解技藝 遂祝髮隷月 遊山華嚴寺 讀習大經 不閱歲已通大義 文殊之妙智 普賢 之玄門 皆契入無遺 學徒百千 咸所駭眼 以爲神聰 至文聖王八年 年二十矣 忽自念曰 大丈夫 當離法 自靜 安能兀兀 守文字間耶”(〈옥룡사 선각국사 혜등탑비〉《한국금석전문》, p.825). 83) 도선은 흥덕왕 2년(827) 출생하여 효공왕 2년(898) 사망한다. 입적 후 효공왕이 了空 선사라는 시 호와 證聖意燈이라는 탑 이름을 내려주고, 朴仁範에게 명을 내려 비문을 짓게 했지만 끝내 돌에 새기지 못한다. 고려시대에 들어 현종은 대선사를 내리고 숙종은 왕사의 호를 더한다. 인종은 선 각국사로 봉작하고 사신을 보내 옥룡사 영당에 예를 갖추어 아뢰고, 의종이 崔惟淸에게 새김글을 짓게 해 의종 4년(1150)에 글이 이루어진다. 즉 죽은 지 250여 년 만에 이루어졌으며, 그 만큼의 시차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추만호, 〈나말려초 선사들의 태몽과 민중생활〉《한국불교문 화사상사》 상권, 가산 이지관스님 화갑기념논총 간행위원회, 1992, p.651).

- 225

② 대개 듣건대, 석가는 가르침을 열어 五乘의 가르침으로 뭇 생령들을 잘 이끌었고, 달마는 곧 바로 마을을 찾아 미투리 한짝을 남기는 것으로 깊고 깊은 이치를 보여주었 으므로, 그것을 말하는 이는 말없음으로써 말하고 닦는 이는 닦음없음으로써 닦는다고 한다. 활과 그 몸통인 쑥대가 서로 버티어주는 셈이자 등불과 심지가 나란히 전해지는 셈이니, 어쩌면 그렇게도 기이하고 위대한가? 성인과의 거리가 멀어짐에 말씀이 꺼져가 고 법도 따라서 풀어지니,배우는 이들이 공하다거나 있다거나 하는데(空有) 매달려 비밀 한 뜻에 어둡게 되어 참된 바탕을 버리고 갈래 만을 끌어당기게 되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훌로 삿되고 꾸며진 거짓과 잘못을 물리쳐서 바르고 참된 미묘한 가르침을 넓혀, 처음에는 경전에 기대어 깊은 곳까지 나아갔다가 끝내는 글자를 버리고 참된 것을 깨달아, 스스로를 이루고 천하까지 아울러 건져주었으니, 바로 우리 국사로다(홍제혜거)84)

이 새김글의 주인공인 惠居는 효공왕 3년(899) 탄생하여 974년(광종 25) 입적한다. 20 년 뒤인 성종 13년(994)에 왕명으로 崔亮이 새김글을 짓는다.85) 혜거가 젊은 시절에는 아직까지 선교양립적 사고가 지배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사라는 당대 최고의 명예 직에 임명된 시기(광종 13년, 962)부터 이 새김글이 지어질 무렵 사이에, 선 우위적 사고 가 선종 쪽에서 형성되기 시작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것이 지배적이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헤거 이후 선사들 의 사상을 살펴보면 여전히 선교양립의 사고가 더한 것으로 나타난다. 혜거와 같은 시기 에 활동한 석초86)와 한 세대 뒤에 활동한 지종87)이 그러하며, 지종과 같은 시기의 영준 만이 다시 선 우위적 경향을 드러낸다.

③ 머무름 없는 것이 법이라면 늘하지 않는 것은 우리 몸이요/시방세계의 모든 부처 님이란 다름 아닌 세상의 중생/헛된 생각을 벗어버리면 지극한 참의 세계에 다다라/범 부에서 성인이 되어 크나큰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리(진관석초).88) ④ 근원을 따져보건대, 성스러운 가르침이 세 가지가 있지만 참된 진리는 둘이 아니

84) “蓋聞 ▼(賏/隹)曇開敎 列五乘而詢詢導生 達磨指心 留隻履而玄玄揭理 說之者 以無說而說 修之者 以無修而修 箭蓬相拄 燈炷幷傳 何其偉歟 逮乎聖遠 言堙法隨以弛學者 執空有而昧密旨 抛源根而揖 支流 於是 茅塞悟修之路 蓁蕪敎理之域 而佛祖之 正法眼藏 幾乎息矣 於斯有人焉 獨能斥邪僞之妄替 廓正眞之妙宗 始憑筌罤而詣深 終捨文字而悟眞 得乎已而 兼濟天下者 惟我國師△已”(〈갈양사 홍제 존자 보광탑비〉《한국사연구》 52, p.32). 85) 허홍식, 〈갈양사 혜거국사비〉(《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p.590 연보 참조. 86) 석초(912∼964)는 53세로 세상을 떠나며, 그의 새김글은 경종 6년(981) 王融이 짓는다. 87) 지공(930∼1018)은 89세에 세상을 떠나고 현종 16년(1025) 崔沖이 새김글을 짓는다. 88) “不住者法 不常者身 十方諸佛 三界衆人 了其妄想 達乎至眞 從凡入聖 轉大法輪”(〈진관선사 오공 탑비〉《한국금석전문》, p.428).

國史館論叢 第52輯226

다. 중생들이 망령되이 집착하여 이런저런 법이네 하고 따질 뿐이다. 공의 도리를 깨우 친 이나 불성을 깨달은 이에게는 불경이란 종이 위의 것을 뜻하지 아니하니, 어찌 수고 로이 경전의 글을 찾겠는가? 부차란 것도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 불상의 모습을 꼭 빌 리지는 않는다(적연영준).89) ⑤ 공경히 들어오건대, 한 마음을 깨우친 것이 깊고도 그윽한 부처의 도리이며 모든 현상계를 뛰어넘은 것이 담박하고 조용한 선의 근원이다. … 본성 깨달은 부처와 정 잊 은 선/온갖 경계에 담박하여 저 말들의 끄들림에사 벗어나도다(원공지종).90)

석초와 지종은 부처와 중생, 부처와 선율 같은 수준에서 논의하고 있다. 선교간의 상 호 위상에 대해 이렇게 균형잡힌 사고를 폈기 때문에, 뒷 시기인 숙종 때의 대각국사 의 천도 지종을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닌가 싶다.91) 그런데 영준은 불경과 불상에 대한 미련 을 떨치고 참된 도리를 깨우쳐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글자를 버리고 참된 것을 깨달았다 는 혜거의 추상적 규정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선 우위적 입장을 필친 것이다. 이 입장은 고려후기에 출현한 《선문보장록》의 입장처럼 교종에 대해서 무시할 만큼 적극적인 공세로 돌입한 것은 물론 아니다. 아직까지는 교종을 의식하는 소극적인 것이 다.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자세로의 전환과정에 얽힌 사실적 탐구는 따로이 추구 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에서는 960년 무렵 혜거에서 추상적으로 나타나서 바로 뒷 세대의 1000년 무렵 영준이 구체화해나간 소극적 선 우위의 사유자세가 의종 4년 (1150)에 崔惟淸이 지은 도선의 새김글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이러한 형성과 정이 뒷시대에 정립된 적극적 선 우위의 사고인 교외별전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교외별전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끼친 영향을 살펴본다. 시대가 갑자기 뛰긴 하지 만, 이 표방을 확연하게 자리 매기고 그 영향력을 뒷 세상에 강하게 끼친 이는 조선중기 의 西山休靜이다.

⑥-1. 내가 비록 어리석다 하지만 옛 배움에 뜻을 두어 불경의 신령한 글을 보배로 삼는다. 그러나 불경이 너무 복잡하고 그 경지가 바다만큼이나 넓고도 아득하여, 뒷날에 동지들이 가지를 쳐내면서 잎을 따야하는 수고로움을 벗어나기가 자못 어렵다. 그러므

89) “原夫聖敎有三 眞敎無二 由衆生之妄執 論諸法之差殊 至若達士了空 通人見性 經非紙上 何勞尋葉典 之文 佛在心中 未必假玉毫之容”(〈적연국사 자광탑비〉 위의 책 p.456). 90) “恭聞佛道玄微 了一心而即時 禪源澹寂 與諸法超然 … 悟性爲佛 妄情曰禪 澹乎境界 離彼言詮” (〈원공국사 승묘탑비〉 위의 책 pp.461∼467). 91) 대각국사 의천은 자신이 존경한 이전 시대의 인물들에게 때로는 스스로, 때로는 아랫 사람을 시 켜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올리는 글월 중에는 아버지 문종이나 형 순종과 선종 같은 피붙이라든 가 의상과 원효 같은 고승이 실려있다. 몇 안되는 인물들에 지종도 함께 편집된 것으로 보아 의 천이 숭앙한 인물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의천, 〈제 거돈사 지종국사 문〉《대각국사문집》 16).

- 227

로 글 가운데서 가장 요점이 되면서도 절실한 것 수백 마디를 추려내어 한 장에 적어서 《선가귀감》이라고 이름하니, 글은 간단하지만 뜻은 한결같이 두루하다고 할 만하다. …세존이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이 선지가 되고, 평생동안 말한 것이 교문이 되었다. 따라서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이다’라 말한다. …선과 교의 뿌리를 내린 이는 세존이고, 그 갈래를 나눈 이들은 가섭과 아난이다. 말 없음으로 말 없는 데에 이 르른 것은 선이요, 말 있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이다. 결국 마음이 선이 며 말이 교법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법은 비록 같은 맛이라 할지라도 견 해에 따라 하늘과 땅 만큼 아득히 멀어지게 되니, 이런 점에서 선과 교라는 두 갈래로 가려진다. …이 때문에 만일 누구든지 입을 놀리는 데 떨어지면 꽃을 들거나 빙긋이 웃 는 일마저 교의 자취가 되며, 본래 마옴으로 터득한다면 세상의 온갖 너스레라도 교 밖 에 따로이 전한 선지가 된다(서산휴정).92) ⑥-2. 이 선법은 우리 부처 세존이 진귀조사에게 따로이 전해받은 것으로 옛 부처의 상투적인 말이 아니다(서산휴정).93) ⑦ 가르침 밖에 따로이 전한 참다운 소식 모름지기 옛 장부에게 아름다움 애오라지 돌려 보내리 오백년 뒤 뉘 계승하여 염화 한 줄기 흐름을 떨칠 것인가(사명유정)94)

휴정은 선과 교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면서도, 먼저 깨닫는 점을 강조 하여 선을 우위에 두고 있다. 또한 《禪敎釋》에서는 그 이전에 선문에서 중요하게 여기 던 소의경전을 배격한다. 그 한 예로 《楞嚴經》을 한낱 갈잎 정도에 불과하다고 일소해 버렸다. 즉 선과 교의 비교에서 선 우위의 토대를 굳히고 있는 것이다.95) 이러한 성향은 제자인 四溟惟政에게서도 엿보인다(⑦). 휴정의 선풍은 이후 한국 선사상의 근간을 이룬 것으로, 그의 선교판석은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 원돈문을 경절문의 세계로 지양한 서산휴정의 活句로의 안내는 言語道斷의 세계라 할 수 있지만,96) 그의 선교관이 단순논리에 의한 논리적 비약이 있다

92) “余雖不肖 有志於古之學 以貝葉靈文 爲寶也 然 其文尙繁 藏海汪洋 後之同志者 頗不免摘葉之勞 故 文中撮其要 且功者數百語 書于一紙 名曰禪家龜鑑 可謂文簡而義周也 … 世尊 三處傳心者爲禪旨 一 代所設者爲敎 故曰禪是佛心 敎是佛語 … 禪敎之源者 世尊也 禪敎之派者 迦葉阿難也 以無言至於無 言者 禪也 以有言至於無言者 敎也 乃至 心是禪法也 語是敎法也 則法雖一味 見解則天地懸隔 此辦 禪敎二途 … 是故 若人失之於口 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則世間鹿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 旨”(〈선가귀감〉《한국불교전서》 제 7 책, pp.625〜635). 93) “皆禪之法 吾佛世尊 亦別傳乎眞歸祖師者也 非古佛之陳言也”(〈청허당집〉 선교결,《한국불교전 서〉제 7 책, p.657). 94) “別傳敎外眞消息 專美須還古丈夫 後五百年誰繼皆 枯花一脈嗚嗚乎”(《사명대사집》, 중부휴자). 95) 우정상, 〈서산대사의 선교관에 대해〉(《조명기박사화갑기념 불교사학논총》, 1965) p.503. 박경훈, 〈서산대사집 해설〉(《선가귀감·서산대사집)〉, 대양서적, 1973) pp.23∼26. 96) “只貴圓頓門 以理路義路心路語路 生見聞信解者也 直以本分經截門活句 敎伊自悟自得 方是宗師 爲

國史館論叢 第52輯228

는 약점을 감추기는 어렵다. 교를 부처의 말로, 선을 부처의 마음으로 보는 것은 신라 말 이래 이미 인정되고 있었 다. 부처의 말과 마음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부처의 종지이므로, 우 리 범부의 한계로서는 보거나 알 수 없다고 정의내린다. 즉 말과 마음을 차원이 다른 것 으로 이해하느냐 같은 것으로 이해하느냐에서 휴정과는 다른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⑧ 근원을 살피건대 참된 진리는 고요하고도 고요하지만, 굳이 이름하여 가르침의 문 을 세운 것이며, 말을 일삼아 마음을 전하는 종지라고 한 것이다. 깊고도 깊은 기미와 경계가 그 요점이며,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이 그 종지이므로, 일반적인 이름이나 말로는 처음과 끝을 볼 수 없으며,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법칙을 알 수가 없다(징효절중).97)

휴정도 선교가 근원을 같이 한 것이라는 점(⑥-1)을 인정하고는 있다. 문제는 교를 부 처의 말로, 선을 부처의 마음으로 보되, 마음과 말을 간격지워 그 차이를 천지현격한 것 으로 가른 데 있다. 이는 글머리에서 ‘불경의 신령한 글을 보배로 삼는다’라고 적은 논리 와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치닫는 것이다. 부처의 말 밖에 부처의 마음이 따로이 있다는 파악도 문제가 되지만, 그 둘을 서로 다른 차원의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논리의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한다면, 부처의 말과 마음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 로98) 그와 같이 호쾌한 이분법적 범주로서 구별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라는 것이다.99) 그가 고려말의 《선문보장록》을 근거로 한 이러한 경색된 선교판석은 논리의 정합성을 벗어난 것이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 만큼 폐해 또한 적지 않게 끼쳤다는 점 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100) 그러나 이 경우에도 ‘교외별전’에 대한 휴정의 이해가 잘

人體裁也”(앞의 책). 송천은, 〈휴정의 사상〉(《숭산박길진박사화갑기념 한국불교사상사》, 1975) pp.857∼863. 97) “原夫眞宗寂寂 强名立敎之門 强言傳心之旨 其要也 玄機玄境 其宗也 佛語佛心 名言不見其始終 視 賴莫知其規矩”(〈흥령사 징효대사 보인탑비〉《한국금석전문》, p.337). 98) 普雨는 선교가 얼음과 물의 동체 습성과 같이 뿌리를 같이 한 것이므로, 선교의 심천유무를 논함 은 잘못된 것이라고 질책했다(서윤길, 〈보우대사의 사상〉《숭산 박길진박사화갑기념 한국불교 사상사》, pp.822∼826). 고려 중기에 선의 입장에서 선교일치를 주장한 지눌에게 있어서도, 선과 화엄의 세계는 하등 다 른 것이 아니었다(송천은, 〈지눌의 선사상〉 위의 책 pp.479∼487). 99) 한기두도 이 점에 관하여 바람직한 선의 경지라는 입장에서 비판을 하고 있는데, 문제의 정곡은 짚은 것 같지 않다(한기두, 〈선교의 주봉 휴정〉《한국불교사상연구》, 일지사, 1980, pp.344∼ 350). 100) 한용운의 〈조선불교의 개혁안〉 “선교의 진흥”과 박한영의 〈조선불교현대화론〉“세존이 과연 위정자에게 전법을 부촉했겠는가” (한만종 편, 《한국근대 민중불교의 이념과 전개》, 한길사, 1980, pp.117∼119와 pp.162∼164)와 백룡성의 〈국한문역 선문촬요〉“수심정로”(보 현각 배포, 1960년판, p.207)에서도 이른바 ‘3처전심설’을 수용하고 있다. 휴정에 대하여는 물 론 언급이 없지만, 휴정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 불교사 연구에 근대학문의 첫 문을 연 김영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박한영은 일제강점하의 같은 시기 인물 보다는 ‘3처전심설’에 대한 진보적 이해를 하고 있다. 즉 박한영은 원오극근에 의해 제

- 229

못되었다는 문제보다는 오늘날까지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교종부정 또는 교종대립의 한 표방으로 《선문보장록》 에 나타나는 신라 선종 조사들과의 관련 내용은 1290년대 천책이 정리한 선종우위의 특 색을 반영한 설화 모음의 한 부분이며, 신라말에 교종에 대한 비판이 당연히 있었겠지 만, 그것이 실제로 선종우위의 특징을 부각시킨 주장은 아니었다. 960년 무렵 혜거에서 추상적으로 나타나서 바로 다음 세대의 1000년 무렵 영준이 구체화해 나간 소극적 선 우위의 사유자세는, 의종 4년(1150)에 최유청이 지은 도선의 새김글 내용과 다르지 않고, 이러한 형성과정이 후대에 정립된 적극적 선 우위의 사고인 교외별전의 기초를 마련한 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와 같은 인식은 조선시대의 휴정에 이르러 경색된 상태로 확정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선교양종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 논리적 정합성을 상실케 하는 영 향을 미쳤다.

Ⅴ. 맺 는 말

이러한 정리 위에서 나말의 선종에 관한 이해의 한 부분이 재조명된다. 사실 9세기의 중엽을 넘어서면서 9산선문이 집중적으로 세워지자, 교종에 대비되는 선종의 정체에 질 문이 시작된다. 선종의 극성과 함께 대두한 문제점인 선교의 우열에 관한 판석이 그것이 다. 이 때문에 기존의 이해에서는 교학불교가 지닌 문제의식에서 선사들이 교종에서 선 종으로의 사상적 변신을 꾀했을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 왔다. 이 이해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당시의 선사들은 선교간 상호위치 정립에 있어서는 대 립의 관계보다 양립의 관계를 선택했다. 예컨대 9산선문으로 정착해 가던 9세기 후반의 선종승려들이 교종과 일정한 동반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그렇거니와, 선종이 정착되기 이전의 9세기 전반에는 화엄종의 대표적 3대사찰이 교선일치의 성향에 입각하여 선종을 수용한 것이 그 증거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논의할 성격의 것이 아 니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선종 입론의 근거가 그때까지는 아 직 교종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이제까지 다룬 자료들을 살펴보면,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선의 계보를 정 리할 때 心印의 師資相承 관계만 언급할 뿐, 그 입론의 기초를 교종에 의지하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이 시기 선승들을 대표하는 낭혜무염이 선교의 시시비비를 내치는 구 절도 그렇거니와, 다른 선사들에게서도 보이는 것처럼 선을 교의 상징들과 동격으로 병 렬하면서 그것조차 뛰어넘고자 한 불립문자적 세계관이 바로 그 점을 웅변하고 있다. 이

시된 공안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극력 주장하는 것이다.

國史館論叢 第52輯230

두 측면의 결합, 하나는 선종의 입론이 불가피하게 교종에 근거 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한계성과, 하나는 교종과 조화를 이루되 그것을 포함하여 뛰어넘는 자기초월적 관점에 기초했다는 세계관이, 나말려초에 선사들이 선교의 상호위치 정립이라는 이념적 과제를 선교대립보다는 선교양립적 방법으로 해결하게끔 한 것이다. 반면에 서산이래의 조선조 선사들이 교종을 ‘옛 부처 나부랑이의 상투적인 말’이라고 배척하면서 선 우위적 입장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진귀조사설과 3처전심설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려 중기 천책의 경우도 《선문보장록》의 전거로 선 우위 적 기초를 정리하게 되었다. 이런 자료를 근거로 하여 종전에는 교종을 공격하고 부정했 다는 인식선상 위에 나말려초기 9산선문의 선종을 세워 이해하였던 것이다. 사실 교종부정 또는 교종대립의 한 표방으로 《선문보장록》에 나타나는 신라 선종 조사들과의 관련 내용은 1290년대 천책이 정리한 선종우위의 특색을 반영한 설화 모음 의 한 부분일 뿐이다. 960년 무렵 혜거에서 추상적으로 나타나서 바로 다음 세대의 1000 년 무렵 영준이 구체화해 나간 소극적 선 우위의 사유자세는 후대에 정립된 교외별전이 라는 적극적 선 우위의 사고체계를 이끌어냈다. 뒷날 조선시대의 휴정과 같은 거장에 의 해서 교외별전이 선종의 정통적인 주장으로 확정되기에 이르르고, 그것이 오늘날 나말려 초의 선종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출처] 나말려초 선사들의 선교양종 인식과 세계관|작성자 각원사조계사용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