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47호(2016.06) pp. 109∼134
초기불교의 호흡 명상법에 대한 고찰
-호흡명상의 다양한 위상을 중심으로-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4S1A5B6A02049047)
이필원/동국대학교(경주) 파라미타칼리지 조교수
I. 들어가는 말
II. 초기경전 속에 나타난 호흡명상법
III. 결론
[요약문]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명상법은 대단히 다양하다. 그 가운데 무엇이 더 좋은가는 개인적 기질이나 성향에 달린 문제이기에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많은 명상법 가운데 누구나 접근하기 쉽고, 종교적 성향에 관계없이 할 수 있는 명상법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호흡명상일 것이다.
호흡명상에 대한 기존의 선행연구는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불교전통의 호흡명상, 둘째는 뇌 호흡명상, 셋째는 요가의 호흡수행, 넷째는 도가적 전통의 호흡명상(복식호흡)이다. 이 가운데 국내에서 이루어진 불교 전통의 호흡명상 관련 선행연구는 크게 3가지 관점에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호흡명상에 대한 문헌연구, 둘째는 호흡명상의 의학적 효과 검증, 셋째는 심리학적 효과성 검증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국내 연구의 배경 속에서 어찌 보면, 가장 대중적인 연구주제 가운데 하나인 초기불교의 호흡명상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해 초기경전 니까야 속에서 호흡명상과 관련된 가능한 자료를 모두 찾아 이들 내용을 분류했다. 호흡명상의 유래부터 시작해서 구체적인 방법과 수행론적 특징, 그리고 호흡명상을 통해 얻게 되는 이익과 심리치료적 효과에 대한 내용을 포괄해서 기술하고자 했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호흡명상법이 지닌 다양한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불교 호흡명상이 다른 호흡전통과 구별되는 점은 호흡에 대한 사띠, 즉 알아차림에 있다.
2. 호흡명상은 부정관과는 관련없이 붓다가 정각 이전부터 수행해 온 명상법이다.
3. 호흡명상은 초보자부터 아라한, 심지어 붓다도 즐겨했던 명상법이다.
4. 호흡명상은 삼매를 획득하는데 유용한 방법이다.
5. 호흡명상은 단순하게는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혀 수행에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끄는 방법이지만, 다른 한편 지혜를 계발하여 번뇌를 제거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어져 성인의 과위를 성취하게 하는데 효과적인 명상법이기도 하다.
I. 들어가는 말
오늘날 명상의 붐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사회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정신의 고양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삶에 지친 나머지 찾게 된 치유의 측면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말하자면 시대적 상황이 명상을 대중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정신의 고양이 명상의 본령이라면, 이에 반해 치유의 방법은 명상을 통해 얻게 되는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치유의 방법에 초점을 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며, 이것을 통해 정신의 고양을 추구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이러한 방법을 먼저 권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명상법은 대단히 다양하다. 그 가운데 무엇이 더 좋은가는 개인적 기질이나 성향에 달린 문제이기에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많은 명상법 가운데 누구나 접근하기 쉽고, 종교적 성향에 관계없이 할 수 있는 명상법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호흡명상 혹은 호흡수행1)일 것이다. 왜냐하면 호흡명상은 명상의 대상을 호흡에 두고 있다는 것 외에는 불교적이거나 다른 종교적 의례나 요소가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1) 호흡명상 혹은 호흡수행의 원어는 ānāpānasati-bhāvanā이다.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명상 혹은 수행 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본 고에서는 호흡명상으로 통일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이유는 불교의 호흡은 호흡 자체에 대한 어떤 통제나 수련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논평자인 임승택 교수 의 제언을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다. 이후 논의에서 논평자인
임승택, 정준영 교수의 지적과 제언을 받아들여 일정부분 수정하였음을 밝히고, 두 분
논평자께 감사드린다.
한편 불교사회연구소에서 전국 불교신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2013년에 진행하였는데,2) 여기에 따르면 많은 명상법 가운데 호흡명상은 염불과 더불어서 21.3%로 가장 선호하는 명상방법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학계에서 실질적으로 호흡을 주제로 한 연구는 그다지 활발하지는 않다. 논문 검색시스템을 통해 키워드 검색을 해 보아도, 30여 편 남짓의 연구물이 검색될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불교의 호흡명상만을 추려본다면 더욱 줄어든다.
2)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소장 법안스님), ‘2013년 한국의 사회 ․ 정치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 조사 보고서’ 불교신문. 2013년 9월 12일.
본 연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선행연구의 내용을 간략히 개괄해 보면, 본 연구의 특징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호흡명상과 관련된 선행연구는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불교 전통의 호흡명상, 둘째는 뇌 호흡명상, 셋째는 요가의 호흡수행, 넷째는 도가적 전통의 호흡명상(복식호흡)이다.
국내에서 이루어진 불교 전통의 호흡명상 관련 선행연구는 크게 3가지 관점에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호흡명상에 대한 문헌연구, 둘째는 호흡명상의 의학적 효과 검증, 셋째는 심리학적 효과성 검증이다. 첫 번째 관점은 주로 Ānāpāṇasatisutta나 Mahāsatipaṭṭhānasutta와 같은 빨리 경전, 혹은 安般守意經 등과 같은 한역의 초기경전이나 부파시대의 논서(Visuddhimagga, Abhidharmakośabhaṣya 등)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호흡명상은 마음의 산란함을 다스리는데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초기경전을 면밀히 고찰해 보면 그 이상의 효과성을 찾아 볼 수 있고, 나아가 초보자부터 수행의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적합한 명상법임을 알게 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관점은 주로 명상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불교전통의 호흡법을 원용하거나, 다소 응용한 호흡법을 사용한다. 대부분의 의학이나 심리학 관련 논문에서 호흡명상의 효과성을 검증한 논문이 최근에 발표되는데,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이때 주된 호흡명상은 적용하기 쉬운 ‘수식관’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집단연구에서 호흡명상이 갖는 구조적 원리에 대한 깊은 이해나 체험 없이 단편적인 이해를 갖고 참여자에게 호흡명상을 실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수식관의 경우 호흡을 헤아리는데 얼마나 헤아려야 하는지, 호흡의 카운팅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와 같은 매우 기초적인 사항이 간과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된다. 또한 실험연구에서 엄격하게 통제되고 훈련된 상태에서 실시된 논문들도 많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실험을 실시하는 주체자가 실험의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명상을 이해한 뒤에 실험 설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명상 경험자의 설계를 따르거나 선행연구의 이론적 내용에 근거하여 실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실제 호흡명상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교육되고 통제되어야 하는 많은 중요한 요소들이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도교계열의 호흡법에 대한 연구도 눈에 띈다. 이때는 호흡법을 양생법의 일환에서 접근한다. 불교의 호흡명상과 비교해 보면 아이디어의 발단 자체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도교계열에서는 특정한 호흡법을 통해 기의 순환과 축기(縮氣)와 같은 방식으로 이른바 초인(超人, 仙人)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불교에서는 인위적인 호흡 조작없이 그저 호흡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불건전한 감정과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에 이 둘의 호흡법은 전연 다른 체계와 목적을 갖는다고 하겠다.
본 논문은 이러한 국내 연구의 배경 속에서 어찌 보면, 가장 대중적인 연구주제 가운데 하나인 초기불교의 호흡명상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기존의 선행연구는 입출식념경, 즉 Ānāpānasatisutta를 중심으로 고찰하거나, 아니면 초기불교의 호흡명상과 오늘날 응용명상프로그램인 MBSR, MBCT 등과 같은 프로그램과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가 중심인 것 같다.3)
3) 대표적으로 언급하자면, 안병희(일중), 「호흡관 수행과 심신치유 적용」, 불교학연구
제32호, 2012 ; 김재성, 「불교명상의 심리치료에의 응용에 대한 연구」, 불교연구 제37집,
2012 ; 김형록 (인경), 「호흡수행의 심리 치유적 효과」, 한국불교학 제75집, 2015 등이
있다. 그리고 홍원사편, 입출식념의 수행이론과 실제(근본불교 수행도량 홍원사 출판부,
2005)가 있다. 이 책에는 6편의 관련 논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이은주, 「사념처 수행과
호흡에 대한 사띠 수행의 관계」, 인도연 구 제16집, 2011도 있다. 이 정도가 호흡 명상
혹은 수행을 직접적인 연구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가 싶다. 그 외 위빠사나나 대념처경
등과 같은 경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단편적으로 호 흡과 관련된 내용이 기술된
논문은 다수 있다. 4) MN. III
본 논문은 이들 연구와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가능한 차별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초기경전 니까야 속에서 호흡명상과 관련된 가능한 자료를 모두 찾아 이들 내용을 분류해 보고자 한다. 호흡명상의 유래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구체적인 방법과 수행론적 특징, 그리고 호흡명상을 통해 얻게 되는 이익과 심리치료적 효과에 대한 내용을 포괄해서 기술하고자 한다.
내용이 다소 산만해질 수 있지만, 니까야에서 다양하게 시설되어 있는 호흡관련 내용을 정리한다는 측면에서는 일정정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다.
II. 초기경전 속에 나타난 호흡명상법
1. 호흡명상의 유래
불교는, 아니 정확하게 고따마 붓다는 언제부터 호흡명상을 스스로 했고, 또 지도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붓다는 다양한 수행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는데, 경전에서는 14가지의 수행법이 언급된다.4) 경전의 목록을 보면 사선정(catunnaṃ jhānāṃ)이 언급되지 않고 있지 않지만, 다양한 수행법이 언급되고 있다. 그 가운데 14번째로 ‘ānāpānasati’가 언급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호흡명상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호흡명상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 유래와 관련된 내용은 SN. Vesālisutta에 전한다.
4) MN. III, Ānāpanasutta, pp.81-82. 경전에 제시된 수행법은 다음과 같다. 편의상
숫자를 붙인다.
“① catunnaṃ satipaṭṭhanāṃ(사념처) bhāvanānuyogaṃ
② catunnaṃ sammappadhānānaṃ(사정근) bhāvanānuyogaṃ
③ catunnaṃ iddhipādānaṃ(사신족) bhāvanānuyogaṃ
④ pañcannaṃ indriyānaṃ(오근) bhāvanānuyogaṃ ⑤ pañcannaṃ balānaṃ(오력) bhāvanānuyogaṃ
⑥ sattānaṃ bojjhaṅgānaṃ(칠각 지) bhāvanānuyogaṃ
⑦ ariyassa aṭṭhaṅgikassa maggassa(팔정도) bhāvanānuyogaṃ ⑧ mettā (자) bhāvanānuyogaṃ
⑨ karuṇā(비)bhavanānuyogaṃ ⑩ muditā(희) bhāvanānuyogaṃ ⑪ upekhā (사) bhāvanānuyogaṃ
⑫ asubha(부정)bhāvanānuyogaṃ ⑬ aniccasaññā(무상에 대한 지각) bhāvanānuyogaṃ
⑭ ānāpānasati(호흡에 대한 알아차림)bhāvanānuyogaṃ.”
여기서 bhāvanānuyogaṃ은 수행(bhāvanā) 의 실천(anuyoga)을 의미한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부정에 관한 주제를 말씀하시고 부정을 찬탄하시고 부정에 대한 수행을 찬탄하셨습니다. 그 비구들은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부정에 관한 주제를 말씀하시고 부정을 찬탄하시고 부정에 대한 수행을 찬탄하셨다.’라고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지닌 부정에 대한 수행을 닦으며 지냈습니다. 그들은 이 몸을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혐오스러워 하여 자결하려 했습니다. 하루에 열 명의 비구들이 자결하고 하루에 스무 명의 비구가 자결하고 하루에 서른 명의 비구들이 자결했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 궁극적인 앎을 얻도록 다른 방편을 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5)
5) SN. V. p.320.
아난다 존자의 이러한 청에 대해 응답한 내용이 바로 호흡명상이다. 따라서 이 경전의 내용만을 본다면 호흡명상은 부정관 수행이 지닌 부정적 측면을 보완하고자 설한 가르침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붓다는 그 이전에 제자들에게 호흡명상을 지도하지 않은 것일까? 아난다 존자가 시자로 있을 때라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붓다 성도 후20년이 지난 시점이 된다.6) 호흡명상의 시점을 찾기에는 이는 너무 늦은 시기이다. 그리고 Mahasatipaṭṭhānasutta와 같이 이미 호흡명상에 대한 체계적인 경전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아울러 MN의 Mahārāhulovādasutta의 내용을 보면, 라훌라 존자가 수행할 때 사리뿟따 존자가 호흡명상을 권유하고, 이에 대해 붓다의 자세한 설법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호흡명상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아난다 존자가 시자가 되기 이전에 널리 수행되었던 방법이라고 생각된다.7)
6) Theg. 1043Gab에 보면, “Paṇṇavīsativassāni, bhagavantaṃ upaṭṭhahiṃ”, 즉 “25년 동안
나는 세존을 모 셨다.”라는 기술이 아난다 존자의 게송으로 전해진다. 岩井 昌悟는 “아난이
석존의 시자가 된 것은 「25년간」 설에 따르면 석존 성도 후 제 21년이 되고, 「20여년간」에
따르면 늦어도 석존 성도 후 제 26년에는 시자가 되었다 라는 것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岩井 昌悟, 「阿難以前の侍者伝承と雨安居 地伝承」, 原始仏教聖典資料による釈尊伝の研究
【11】, 2006, p.118.)
7) Pps III, p.130에서는 이 경전이 라훌라 존자가 18살이 되었을 때 설해진 경전이라고 한다.
일반적 으로 라훌라 존자는 6살 때, 붓다가 정각 후 처음으로 모국 까삘라국을 방문했을 때
출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면 이 경전은 붓다 성도 후 18년 경에 설해지게 된다. 여하튼
아난다 존자가 시자 가 되기 이전의 시점이 된다.
그럼, 호흡명상이 언제 시작되었던 것일까. 구체적인 시점을 경전의 내용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주석서의 내용을 토대로 본다면, 아마도 붓다의 정각 이전에 호흡명상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Mahasaccakasutta에 대한 주석을 담고 있는 Papñcasudani를 보면 사문 고따마는 태자시절잠부나무 아래에서 초선을 경험하는데, 이 때 초선에 도달한 방법이 바로 호흡명상이었다고 한
다.8) 주석서의 내용을 신뢰한다면, 호흡명상은 불교수행의 원천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또한 SN. V, Dīpasutta에 보면 붓다가 정각을 성취하기 이전, 수행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호흡명상의 이익을 설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경전의 내용을 Papñcasudani의 주석과 같이 고려한다면, 불교전통의 호흡명상은 붓다 정각 이전부터 이미 붓다에 의해 수행되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 Pps II, p.291. 안병희(일중), 「호흡관 수행과 심신치유 적용」, 불교학연구 제 32호,
2012, p.621-622.
이상의 경전 기술 내용과 저간의 정황, 그리고 주석서의 내용을 토대로 본다면 호흡명상은 사문 고따마가 정각을 이루는데 중요한 가교로서의 역할을 했던 수행법이자, 붓다가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수행법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2. 호흡명상의 방법
붓다의 호흡명상은 다른 호흡명상과는 다르다. 그 일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전이 있다. MN. 100번경 Saṅgāravasutta에 보면, 수행자 상가라와 바라드와자에게 말씀한 내용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바라드와자여, 그러한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숨을 멈추는 선정을 닦아보면 어떨까?’ 바라드와자여, 그래서 나는 나의 입과 코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습니다. 바라드와자여, 내가 입과 코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에 커다란 바람소리가 귓구멍을 통해 나왔습니다. 마치 풀무소리가 요란한 것처럼, 내가 입과 코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에 커다란 바람소리가 귓구멍을 통해 나왔습니다. … 중략 …
바라드와자여, 그러한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숨을 멈추는 선정을 더욱 닦아보면 어떨까?’ 바라드와자여, 그래서 나는 나의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습니다. 바라드와자여, 내가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에 커다란 바람소리가 머리를 혼란시켰습니다. 마치 힘센 사람이 날카로운 칼끝으로 머리를 쪼개듯, 내가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에 커다란 바람소리가 머리를 혼란시켰습니다. … 중략 …
바라드와자여, 그러한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숨을 멈추는 선정을 더욱 닦아보면 어떨까?’ 바라드와자여, 그래서 나는 나의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습니다. 바라드와자여, 내가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에 머리에 커다란 고통이 생겨났습니다. 마치 힘센 사람이 단단한 가죽끈으로 머리주의를 조이듯, 내가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에 머리에 커다란 고통이 생겨났습니다. … 중략 …
바라드와자여, 그러한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숨을 멈추는 선정을 더욱 닦아보면 어떨까?’ 바라드와자여, 그래서 나는 나의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습니다. 바라드와자여, 내가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에 커다란 바람이 나의
창자를 찔러댔습니다. 마치 숙련된 도살자나 도살자의 제자가 날카로운 도살용 칼로 황소의 창자를 잘라대듯,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에 커다란 바람이 나의 창자를 찔러댔습니다. … 중략 …
바라드와자여, 그러한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숨을 멈추는 선정을 더욱 닦아보면 어떨까?’ 바라드와자여, 그래서 나는 나의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습니다. 바라드와자여, 내가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에 몸에 격렬한 불길이 생겨났습니다. 마치 두 힘센 장정이 약한 사람을 두 팔로 붙잡아 뜨거운 석탄 화로에 넣어 굽듯, 내가 입과 코와 귀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에 몸에 격렬한 불길이 생겨났습니다. … 중략 …9)
9) MN. II, p.212. 번역은 전재성 역주, 맛지마니까야(서울: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9),
pp.1135-1136 의 내용이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당시 호흡 수행은 호흡을 멈추는 이른바 지식(止息)수행10)이 주된 방법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고행의 한 종류이다. 왜냐하면 경전의 내용은 지식수행을 했을 때 다양한 종류의 고통이 엄습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호흡의 차원이라기 보다는 고행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11)
10) 안병희(일중), 앞의 논문, p.620참조
11) Natha Katz는 불교에서 말하는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과 힌두의 prānāyāma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 는 불교의 경우 호흡 자체가 명상의 대상이 아니라,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이
핵심이라고 지적한 다. 그러면서 요가와 힌두의 전통에서 말하는 호흡은 호흡 자체에
대한 기법을 강조한다고 말한 다. 그러나 후대에 가면 이들도 역시 불교수행법을 받아
들이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Natha Katz, Buddhist Images of human perfect(Delhi :
Motilal Banarsidass, 1982), p.65) 이를 토대로 본다면 위 경 문에서 말하는 호흡은
당시 요기들이나 바라문 전통에서 중시되던 호흡의 방식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의 호흡명상은 이러한 신체적인 고통을 야기하는 방식의 지식수행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내용을 Ānāpānasatisutta와 같은 다양한 경전에서 기술하고 있다. 많은 경전 가운데 흥미를 끄는 경전이 있다. 그것은 SN. 54번경인 Ariṭṭhasutta이다. 이 경전에서는 아릿타 존자가 알고 있는 호흡명상의 방법에 붓다가 구체적이면서 상세하게 내용을 보충하며 설명한다.
아릿타여, 그대는 어떻게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는가?
세존이시여, 모든 과거의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 대해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가 저에 의해서 포기되어졌고, 모든 미래의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 대해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가 저에 의해서 소멸되어졌고, 안팎으로 모든 법에 대한 장애의 상념이 저에 의해서 잘 극복되어졌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저는 알아차림이 확립되어 숨을 들이쉬고, 알아차림이 확립되어 숨을 내쉽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습니다.
이랏타여, 그와 같은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으며, 그것이 없다고 나는 설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릿타여, 어떻게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상세하고 완전하게 성취하는지 잘 듣고 기억하도록 하라. 내가 설하겠다.
… 중략 …
아릿타여, 여기에 한 비구는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빈 집으로 가서 가부좌를 한 채 몸을 곧게 세우고 면전에 알아차림을 확립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길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숨을 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짧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숨을 내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호흡의 전체를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호흡의 전체를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호흡의 전체를 고요히 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호흡의 전체를 고요히 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행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마음의 형성(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마음의 형성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마음의 형성을 그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마음의 형성을 그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마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무상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무상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소멸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소멸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완전히 버림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완전히 버림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아릿타여, 이와 같이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이 상세하고 완전하게 성취된다.12)
12) SN. V, pp.314-315.
위 인용에서 아리따 존자가 이해한 호흡명상의 내용과 붓다의 호흡명상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붓다는 아리따 존자의 이해에 보충설명을 해 주고 있다. 우선 아리따 존자가 이해한 호흡명상의 내용에 대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모든 과거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의 포기 알아차림을
② 모든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구의 소멸 → 확립하고
③ 안팎으로 모든 법에 대한 장애의 상념에 대한 극복 들숨과 날숨을 함
말하자면, 과거에 생겨났던 모든 감각적 욕망을 포기하고, 미래에 생겨날 감각적 욕망 또한 생겨나지 않도록 하고, 안팎으로 모든 가르침에 대해 [분노와 같은] 장애를 일으킬 상념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13) 그러면 이 내용은 선정의 기본적 의미와 관련지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초선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13) Sārattha-ppakaāsinī, pp.263-264에 따르면, ‘감각적 욕망(Kāmacchanda)’이란
‘다섯 가지 종류의 욕 구에 속하는 갈애(pañcakāmaguṇikarāgo)’이고, ‘안팎의 모든
법에 대해서’란 ‘안팎의 12처의 법에 대해서(ajjhattikabāhiresu dvādasasu
āyatanadhammesu)’이고, ‘장애의 상념이 잘 극복되었다’란 ‘장 애와 관련된 상념이
잘 극복되었고, 근절되었다라는 의미(paṭigha-sampayutta-saññā suṭṭhu paṭivinītā
samucchinnā ti attho)’라고 설명되고 있다. 여기서 장애는 paṭigha의 번역인데, PTSD.
sv, paṭigha에 보면, “(ethically) repulsion, repugnance, anger”나 “(psychologically)
sensory reaction”로 설 명되고 있다. 주석서에서는 paṭighasaññā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지 않는데, 일반적으로 분노를 나 타내는 kupita, dosa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에,
분노와 같은 상념을 극복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맥 락상 자연스러울 것 같다.
모든 욕망의 대상과 선한지 못한 현상들로부터 떠난 뒤에....14)
14) “vivicc’ 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 MN.I, p.21 ; SN.II, p.201 ;
SN. IV, p.263등 사선정 을 언급하는 경전에서는 기본적으로 이 정형구를 볼 수 있다.
모든 과거와 미래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포기 및 소멸은 ‘모든 욕망의 대상들로부터의 떠남’으로 이해할 수 있고, 안팎으로 모든 법에 대한 장애의 상념에 대한 극복은 ‘모든 선한지 못한 현상들로부터의 떠남’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아리따 존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선정의 기본 조건에 대한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그와 같은 호흡의 알아차림이 있다.”라고 말하고서, 하지만 그것은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의 상세한 방법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16단계로 이루어진 호흡법을 설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과정 가운데 처음의 부분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한적한 곳에 가서 앉는다. ② 면전에 알아차림15)을 확립한다. ③ 호흡의 길이에 대한 알아차림 ④ 호흡의 전체16)에 대한 알아차림
15) 필자는 sati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sampajañña는 ‘바른 앎’으로 번역한다.
사띠에는 인지적 요소 가 현저히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삼빠잔나에는 인지적 요소가
현저히 발현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띠는 기본적으로 삼빠잔나를 불러
일으키는 기능이 있기에, 사띠만 단독으로 쓰인 경우에도 어떤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과
그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사띠와
삼빠잔나에 대한 내용은 본고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기에, 추후의 논문에서 다루고자
한다.
16) 호흡의 전체는 sabbakāya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보통 ‘온몸’으로 번역되는데, ‘온몸’
이란 말 자체가 모호하다. ‘호흡의 전체’라고 번역한 것은 파욱사야도의 지도를 받은 스티븐
스나이더 등의 번역을 차용 한 것이다.(스티븐 스나이더, 티나 라무쎈 지음, 몰입이 시작이다,
정준영 옮김(서울: 불광출판사, 2015), pp.38-39.) 스티븐 스나이더는 입출식 지점에서
호흡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을 요체로 본다. 따 라서 호흡의 전체를 경험한다는 것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입출식 지점을 통과할 때’를 온전히 알아차 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는 Visudhimagga를 근거로 하는 것 같다. Vism에서는 들숨과
날숨의 sabbakāya에 대해서“ sakalassa assāsakāyassa ādimajjhapariyosānaṃ viditaṃ
karonto pākaṭaṃ karonto assasissāmīti sikkhati”(220)라고 설명하고 있다. 번역하면 “모든
날숨의 몸의 처음, 중간, 끝을 알 면서, 분명히 알면서 ‘나는 숨을 내쉴 것이다’라고 그는
배운다.”가 된다. 여기서 kāya는 확실히 ‘전체’로 이해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일본의 하시모토 테츠오는 ‘까야’의 다양한 의미 의 용례를 밝히는데, 그것을
정리하여 ‘모임(집합)’과 ‘몸’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橋 本 哲夫, 「最初期
ガータにおける身体について(2)」, 印度學佛敎學硏究 , 第40卷, 第1號 1991, p.419.
위의 4가지가 호흡명상을 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4가지가 잘 갖추어지게 되면 이후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면서, 마음의 여러 현상을 경험하거나 관찰하면서 호흡 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SN. 54:10 Kimbilasutta에는 호흡명상의 요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여기에서 붓다는 아난다존자에게 “알아차림을 놓아버리고(muṭṭhassatissa) 분명한 앎을 갖지 못하는 자에게(asampajānassa)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의 수행을 나는 설하지 않는다.”17)라고 말함으로써, 호흡명상의 요체는 ‘알아차림’에 있음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17) SN. V, p.324.
이상의 두 경전, 즉 Ariṭṭhasutta와 Kimbilasutta를 통해 호흡명상의 방법과 요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러면, 호흡명상이 지닌 수행론적 특징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3. 호흡명상의 수행론적 특징
불교에서 호흡명상이 갖는 수행론적 특징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번뇌의 제거에서 찾을 수 있다.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번뇌를 통제하거나 제어하는 것에서 수행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본 절에서는 경전속에서 호흡명상이 어떠한 번뇌를 대치하는데 효과적인지 기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SN. 54:17(Saṃyojanasutta)와 54:18(Anusayasutta)에서는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이 족쇄(saṃyojana)와 잠재적 경향(anusaya)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족쇄는 일반적으로 십결(dasa saṃyojjanāni, 十結)이라고 하는 용어를 통해 알 수 있다. 십결이란 有身見(sakkāyadiṭṭhi), 의심(vicikicchā), 戒禁取(sīlabbataparāmāso), 欲貪(kāmacchando), 瞋恚(vyāpādo), 色貪(rūparāgo), 無色貪(arūparāgo), 慢(māno), 掉擧(uddhaccaṃ), 無明(avijjā)의 10가지 족색, 즉 번뇌를 말하는 용어이다. 이것을 다시 구분하여 오하분결(pañcimāni orambhāgiyāni saṃyojāni, 五下分結)과 오상분결(pañcimāni uddhambhāgiyāni saṃyojāni, 五上分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18) 이 개념은 불교의 성인론인 사과(四果)와 관련이 있다. 10가지 족쇄가 끊어지는 정도에 따라,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를 성취하게 된다.
18) AN. V, Saṃyojanasutta, p.17. 한편 족쇄와 관련된 다양한 용례에 대해서는 Anālayo,
Satipaṭṭhāna- 깨달음에 이르는 알아차림 명상 수행(서울 : 명상상담연구원, 2014),
pp.240-241의 설명을 참조하 라. 특히 note 11에서 경전의 다양한 용례를 소개하고 있다.
한편 잠재적 경향으로 번역한 아누사야의 경우는 보통 탐진치와 관련되어 설명된다. MN의 Chachakasutta에서는 6근과 6경이 만나 6식을 형성할 때, 탐욕의 잠재적 경향(rāgānusayo), 분노의 잠재적 경향(paṭighānusayo), 무명의 잠재적 경향(avijjānusayo)이 잠재된다(anujseti)19)고 설명하고 있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느낌과 관련해서 설명된다.
벗 위사까여,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의 잠재된 경향이 따르고, 괴로운 느낌에는 분노의 잠재된 경향이 따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명의 잠재된 경향이 따릅니다.20)
20) MN. I, Cūḷavedallasutta, p.302
그런데 다른 경전에서는 감각적 욕망, 성냄, 사견, 의심, 자만, 존재에 대한 갈애와 무지의 일곱가지를 언급하기도 한다.21)
21) AN. IV, Anusayasutta, p.9. “Kāmarāgānusayo, paṭighānusayo, diṭṭhānusayo,
vicikicchānusayo, mānānusayo, bhavarāgānusayo, avijjānusayo”
삼요자나는 saṃ-√yuj에서 파생된 단어로, ‘함께 묶이다’를 기본적 의미로 갖는다. 말하자면 한역 족쇄와 같이 결박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누사야는 동사 아누세띠(anuseti)를 통해 그 의미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Anālayo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함께 있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anuseti는 잠재적 성향이 마음속에 중단된 상태로 있지만, 지각 과정에서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중단된 단계에서의 잠재적인 성향은 신생아에게도 이미 존재한다.22)
22) Anālayo, 앞의 책, p.244.
한편 호흡명상은 마음의 산란함을 대치하는 수행법으로도 제시된다.23) 그리고 호흡명상을 통해 삼매가 닦아지고, 많이 행해지면 몸의 흔들림이나 동요가 없고, 마음의 흔들림이나 동요가 없다24)고도 설명된다.
23) AN.III, Dovacassatāsutta, p.448. “cetaso vikkhepassa pahānāya ānāpānassati bhāvetabbā.”
24) SN. IV, Kappinasutta, p.315. “Ānāpānassatisamādhissa, bhikkhave, bhāvitattā bahulīkatattā
neva kāyassa iñjitattaṃ vā hoti phanditattaṃ vā, na cittassa iñjitattaṃ vā hoti phanditattaṃ vā”
또한 호흡명상을 하게 되면 몸이 피로하지 않고, 눈도 피로하지 않는 효과가 있으며 집착없이 마음이 모든 번뇌에서 해탈된다25)는 내용도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AN. Kathāsutta에서는 다섯 가지 법을 갖춘 수행자가 호흡명상을 하게되면 부동을 통달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25) SN. V, Dīpasutta, p.317. “Tassa mayhaṃ bhikkhave iminā vihārena bahulaṃ viharaton'
eva kāyo kilamati na cakkhūni. anupādāya ca me āsavehi cittaṃ vimuccati.”(비구들이여,
그때 내가 이 머무름에 의해 많이 머무를 때 몸이 피로하지 않았으며, 눈도 피로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모든 번 뇌로부터 집착없이 해탈되어졌다.) 여기서 그 때는 붓다가
정각을 성취하기 이전인 보살이었을 때를 말하고, 이 머무름이란 호흡명상의 머무름을 의미한다.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법들에 의해서 구족된 비구가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수행되어지면, 오래지 않아 부동을 통달한다. 다섯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한 비구가 ① 분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적고, 검소하고, 온갖 생필품에 잘 만족한다. ② 적게 먹고 게걸스럽게 먹지 않는다. ③ 혼침이 적고, 깨어있다. ④ [번뇌의] 완전한 소멸과 마음의 순수함에 어울리는 이야기, 말하자면 소욕(小欲)에 대한 이야기, [지족에 대한 이야기, 한거에 대한 이야기,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는 이야기, 불구의 정진에 대한 이야기, 계에 대한 이야기, 삼매에 대한 이야기, 통찰지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이야기], 해탈지견에 대한 이야기, 그와 같은 이야기에 대해서 만족함을 얻는 자가 되고, 쉽게 얻는 자가 되고, 어렵지 않게 얻는 자가 된다. ⑤ 그는 해탈한 그대로 마음을 관조한다.26)
26) AN.III, p.120. “Pañcahi, bhikkhave, dhammehi samannāgato bhikkhu ānāpānassatiṃ bhāvento nacirasseva akuppaṃ paṭivijjhati. Katamehi pañcahi? Idha, bhikkhave, bhikkhu appaṭṭho hoti appakicco subharo susantoso jīvitaparikkhāresu; appāhāro hoti anodarikattaṃ anuyutto; appamiddho hoti jāgariyaṃ anuyutto; yāyaṃ kathā ābhisallekhikā cetovivaraṇasappāyā, seyyathidaṃ-appicchakathā…pe… vimuttiñāṇadassanakathā, evarūpiyā kathāya nikāmalābhī hoti akicchalābhī akasiralābhī; yathāvimuttaṃ cittaṃ paccavekkhati.”
여기서 부동이란 아라한과를 의미한다.27) 말하자면 위 인용경문의 다섯 가지를 갖추고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수행한다면 그리 오래지 않아서 아라한의 과위가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호흡명상이란 수행에 입문한 자가 아닌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한 수행자도 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또다른 경전이 있다.
27) AN.III, p.276.
그 때 세존께서는 그 3개월의 [안거를] 지낸 뒤에 명상을 끝내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만약 외도 유행자들이 이와 같이 묻는다면, ‘벗이여, 사문 고따마는 어떤 수행으로 안거를 대부분 보냈습니까?라고’.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질문 받은 그대들은 그들 외도의 유행자들에게 이와 같이 답해야 한다. ‘벗이여, 세존께서는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에 의한 삼매로 안거를 대부분 보내셨습니다.’라고.”28)
28) SN. V, Icchānaṅgalasutta, p.325.
경문의 내용을 보면, 붓다 역시 호흡명상을 주로 했음을 볼 수 있다. 같은 경전에서, 붓다는 호흡명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에 의한 삼매를 바르게 말한다면, ‘성스러운 머무름’이라든가, ‘청정한 머무름’이라든가, ‘여래의 머무름’이다.29)
29) Ibid, p.326
물론 호흡명상 자체가 성스러운 머무름(ariyavihāro)라든가, 청정한 머무름(brahmavihāro), 여래의 머무름(tathāgatavihāro)은 아니다. 호흡명상을 통해 획득되는 삼매(samādhi)를 성스러운 머무름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삼매의 획득이 바로 호흡명상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호흡명상은 삼매 획득의 구체적인 방법이 된다. 아울러 같은 경전에서는 아라한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된다. 즉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이루고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바르고 완전한 앎(sammadaññā)으로 해탈했어도 호흡명상을 통한 삼매를 닦으면 지금 여기에서(diṭṭheva dhamme) 행복한 삶(sukkhavihāra)과 정념(sati)과 정지(sampajaññā)로 이끌린다30)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30) Ibid, p.326. 이 경문을 인용하면서, Nathan Katz는 “만약 아라한이 진실로 해야 할 바가
행해진 자 (katakaranīyo)라면, 무엇 때문에 어떤 명상을 수행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서,
다음과 같이 스 스로 답한다. “아라한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완성된 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에게 는 행해져야 할 것이 여전히 남아있다.”그러나 그는 Nyāṇaponika
Mahāthera와의 대화를 통해 “jhānā의 고요함과 vipassanā의 명석한 통찰력은 아라한의
심적 상태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 다. 이것이 그들이 이들 명상과 수행에 참여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들 에게는 더 이상 성취해야할 것이 없지만.”
(Nathan Katz, Ibid., p.66)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것으 로 자신이 던진 질문에는 어느
정도 해답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Ānāpānasatisutta에서는 호흡명상이 사념처(cattāro satipaṭṭhānā)의 완성으로 이끄는 수행법이자, 나아가 명과 해탈(vijjāvimutti)로 이끄는 수행법으로 제시되고 있다.31) 또 다른 경전에서는 이탐과 사라짐, 소멸, 적멸, 곧바로 앎, 완전한 깨달음,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원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이다32)는 내용이 있다.
31) MN.III, p.82. 안병희(일중)은 자신의 논문에서 16단계 호흡수행과 4념처, 7각지와의
관계를 표로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다.(안병희(일중), 앞의 논문, p.626)
32) AN. I, Āṇāpānasatisutta, p.30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보면, 호흡명상은 번뇌를 끊고 해탈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아주 유용한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수행의 입문자에서부터 아라한이나 붓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수행된 방법임도 알 수 있다.
4. 호흡명상을 통해 얻는 이익
경전 가운데에는 호흡명상을 통해 얻는 직접적인 이익을 설하고 있는 경전이 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제시해 보도록 한다.
호흡명상을 통해 얻는 이익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경전으로는 SN.에 나오는 두 개의 Phalasutta이다. 첫 번째 경전(Paṭhamaphalasutta)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수행되고 이와 같이 자주 닦아진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에 의해서 두 가지 과보 가운데 하나의 과보가 기대되어진다. - 지금 여기에서 궁극적 앎[이 얻어지거나] 아니면, 남겨진 것이 있을 때 돌아오지 않는 자[가 된다].33)
33) SN. V, p.313. “Evaṃ bhāvitāya kho, bhikkhave, ānāpānassatiyā evaṃ bahulīkatāya
dvinnaṃ phalānaṃ aññataraṃ phalaṃ pāṭikaṅkhaṃ – diṭṭheva dhamme aññā, sati vā
upādisese anāgāmitā”ti.” 이러한 내용은 Suttanipāta, p.140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Itivuttaka, p.40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Sn와 It의 내용은 호흡명상의 맥락에서
설해진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경전(Dutiyaphalasutta)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7가지의 이익을 제시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되고 이와 같이 자주 닦아진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에 의해 7가지 과보가 [그리고] 7가지 공덕이 기대되어진다. 무엇이 7가지 과보[이고], 7가지 공덕인가? 지금 여기에서 이미 궁극적 앎을 성취한다. 만약 지금 여기에서 이미 궁극적 앎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죽을 때 궁극적 앎을 성취한다. 만약 지금 여기에서 미리 궁극적 앎을 성취하지 못하고, 죽을 때 궁극적 앎을 성취하지 못하면, 오하분결을 끊고서 중반열반자(中般涅槃者)가 된다. … 생반열반자(生般涅槃者)가 된다. …무행반열반자(無行般涅槃者)가 된다. … 유행반열반자(有行般涅槃者)가 된다. …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이르는 상류자(上流者)가 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되고 이와 같이 자주 닦아진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에 의해 이들 7가지 과보가 [그리고] 7가지 공덕이 기대되어진다.
34)
34) SN. V, p.314. “Evaṃ bhāvitāya kho, bhikkhave, ānāpānassatiyā evaṃ bahulīkatāya satta phalā
sattānisaṃsā pāṭikaṅkhā. Katame satta phalā sattānisaṃsā? Diṭṭheva dhamme paṭikacca aññaṃ
ārādheti; no ce diṭṭheva dhamme paṭikacca aññaṃ ārādheti. Atha maraṇakāle aññaṃ ārādheti; no ce
diṭṭheva dhamme paṭikacca aññaṃ ārādheti, no ce maraṇakāle aññaṃ ārādheti. Atha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antarāparinibbāyī hoti… upahaccaparinibbāyī hoti…
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s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uddhaṃsoto hoti akaniṭṭhagāmī – evaṃ
bhāvitāya kho, bhikkhave, ānāpānassatiyā evaṃ bahulīkatāya ime satta phalā sattānisaṃsā
pāṭikaṅkhā”ti.”
오하분결을 끊고 불환 자가 되는 자 가운데, 색구경천에 태어나는 상류를 제외한 4가지 부류의
불환자는 무색계에 화생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藤本 晃, 「四沙門果説の成立と構造」,
印度哲学仏教学 第20号, 2005, p.92)
또 다른 경전에서는 좀 더 현실적인 이익을 말하고 있다.
라훌라여, 이와 같이 수행되고 이와 같이 자주 닦아진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에 의해 [임종시에] 마지막 들숨과 날숨이 알려지고, 알려지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다.35)
35) MN. I, Mahārāhulovādasutta, p.425-426
이상과 같이 호흡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혹은 기대되는 이익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경전에서는 제시되고 있다.36) 내용상으로 본다면, 호흡명상을 통해 획득되는 가장 큰 이익은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불환자가 되는 것이고, 성인의 과위와 상관이 없을 경우에는 임종시에 명확한 인식을 갖고 마지막 호흡을 알아차리며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한편 이 들숨과 날숨이 선정과 관련되어 이해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호흡 명상을 닦으면 사선정에서 들숨과 날숨의 중지를 경험하게 된다37)는 것이다.
36) 더 있을 수도 있지만,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더 이상 발견하지 못했다.
37) DN. III, p.266. 이것은 선정수행과 호흡과의 관계를 밝히는데 중요한 내용이다. 즉 호흡은
신구의 (身口意) 삼행 가운데 신행에 포함되는 것으로, 호흡명상은 선정 가운데 4선정 이상에서는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청정도론에서는 호흡의 마지막을 ‘존재의
마지막(bhavacarimakā)’, ‘선정의 마지막(jhānacarimakā)’, 그리고 ‘죽음의 마지막(cuticarimakā)’의
세 가 지로 구분한다.(Vism, 291). 이 가운데 본 논문에서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죽음의 마지막’에
방점 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이지적 번뇌와 정서적 번뇌가 모두 끊어진다는 것이고, 불환자가 된다는 것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번뇌[오하분결]은 모두 끊어지지만 나머지 다섯 가지 번뇌[rūparāgo, arūparāgo, māno, uddhaccaṃ, avijjā]는 남는다는 것이고, 마지막의 경우는 죽음의 순간에 마지막 호흡에 대한 명확한 인식없이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
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호흡명상은 고통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지혜를 계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수행의 방법론이자, 현실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음을 수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명상법이라고 할 수 있다.
5. 심리치료적 효과
초기경전에서 호흡명상이 갖는 심리치료적 효과와 관련된 내용을 찾기란 쉽지 않다. 분노나 불안, 질투, 원한 등과 같은 다양한 정신적인 불건전한 상태를 언급하는 경전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을 호흡명상과 직접 연결 짓는 것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우회적으로 이를 연결 지을 수는 있다. 예를 들어 AN.에 나오는 Rāgapeyyāla vagga이다. 이 품은 7각지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성냄과 어리석음과 분노와 원한, 위선, 앙심, 질투, 인색함, 속임, 사기 등을 최상의 지혜로 알기 위해서, 철저히 알기 위해서,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버리기 위해서는 일곱 가지 법, 즉7각지를 수행해야 함을 말한다.38) 그런데 MN. Ānāpānasatisutta에서는 호흡명상을 하게 되면 4념처가 성취되고, 4념처를 닦으면, 7각지가 성취된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39)
39) MN.III, p.81. “Ānāpānassati, bhikkhave, bhāvitā bahulīkatā cattāro satipaṭṭhāne
paripūreti. Cattāro satipaṭṭhānā bhāvitā bahulīkatā satta bojjhaṅge paripūrenti.”
따라서 호흡명상을 통해 우리는 분노와 질투와 같은 심리적 요소들을 극복하거나 제거할 수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편 Anālayo는 “불쾌한 느낌의 경험은 잠재된 분노의 경향을 활성화할 수 있고, 이 불쾌한 느낌을 억누르거나 회피하려는 시도로 이끌고 간다.”40)고 말하고 있다. 느낌은 결국 4념처의 수념처에 해당하기에, 역시 호흡명상을 통해 4념처를 닦게 되면 잠재된 분노의 경향을 제거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는데, 호흡명상은 마음의 산란함(cetaso vikkhepa)을 제거하는데 효과적이다.41) 또한 호흡명상은 족쇄(saṃyojana)와 잠재적 경향(anusaya)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준다.42)
40) Anālayo, 앞의 책, p.187.
41) AN.III, Dovacassatāsutta, p.448.
42) SN.V, p.340.
이상이 초기경전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호흡명상이 갖는 심리치료적 효과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그러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묘사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면 왜 초기경전에서는 불건전한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치유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분명하게 적시하지 않은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접근하는 방식과는 다른, 즉 치유적 관점이 아닌 수행론적 관점에서 호흡명상이 언급되기 때문일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붓다 당시 혹은 초기불교인들에게 있어 호흡명상은 어디까지나 번뇌를 지멸할 수 있는 지혜를 계발하는데 도움이 되는 수행의 측면이 중심이었지, 이를 사용하여 병리적인 차원의 심리,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 자체가 이미 심리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에, 오늘날 심리, 정신적 문제에 적용할 수 있고, 또 적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43)
43) 적용과 관련된 논의는 추후 보다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초기경전에서의 호흡이란 부분에 초점을 둔 관계로 더 이상의 논의는 하지 않도록 한다.
III. 결론
초기불교에서 호흡은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호흡 그 자체에 대한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수행법의 기초적 의미로서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두 측면에서 공통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호흡에 대한 사띠, 즉 알아차림이다. 이를 우리는 SN.의 Kimbilasutta에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바로 이 요소가 호흡명상의 요체로서, 불교의 호흡명상이 다른 호흡전통과 구별되는 지점인 것이다.
이러한 호흡명상은 보통 부정관이 지닌 부작용을 염려하여 새롭게 제시된 수행법이라고 알려졌는데, 검토결과 아주 이른 시기부터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이미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을 확인했다. 말하자면 부정관과는 관련없이 호흡명상은 수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정관을 대신하여 호흡명상을 붓다가 제시했다는 경전의 내용은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이는 맥락상 부정관과 호흡명상이 같이 수행되어 왔는데, 부정관이 갖는 부작용을 고려하여, 특히 초심자들에게는 호흡명상을 주로 추천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호흡명상은 불환과나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도록 지혜를 계발하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수단이자, 나아가 삼매를 획득하게 하는 한 방법으로써, ‘성스러운 머무름’, ‘여래의 머무름’으로 불리는 것임도 확인했다. 이를 통해 호흡명상은 매우 다양한 위상을 갖고 있는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단순하게는 임종시에 마지막 호흡을 인식하는 결과로부터, 족쇄와 잠재적 경향을 제거하여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것과 관련해서 경전에 기술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방법론상에 있어서는 당시 수행자들 가운데에는 선정 성취의 전제 요소를 호흡명상의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는 수행자들도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는데, 붓다는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대목도 확인했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보면, 기존의 Ānapānasatisutta를 중심으로 이해온 호흡명상법 보다 훨씬 다층적이며 다양한 위상을 지닌 호흡명상의 모습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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