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불교

티벳불교의 수행 - 람림 수행

수선님 2021. 5. 9. 11:23

티벳불교의 수행 - 람림 수행

 

 

 

모든 수행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붓다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지혜와 자비심이라는 두 날개를 갖춰야 한다. 

계율을 잘 지켜야 보살의 서원을 이룰 수 있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상을 해야 한다.” 등이 람림의 기본적인 가르침들이다.

 

  람림 수행에서 가르치는 주제들은

 

  ① 스승에게 완전히 의지하는 것,
  ② 불법(佛法)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것이 소중하다는 것,
  ③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며, 세상의 모든 것이 항상 변한다는 것,
  ④ 육도윤회 가운데 삼악도에 태어나는 것이 위험한 이유,
  ⑤ 윤회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삼보에 귀의하는 것,
  ⑥ 업(業)의 원리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⑦ 모든 중생에 대해서 평등심을 기르고 내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
  ⑧ 이기심이 가져오는 피해를 생각하며 남을 나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훈련하는 것,
  ⑨ 남들의 고통을 내가 떠맡고 내 행복을 남들에게 나눠준다는 생각에 익숙해지도록 훈련하는 것,
  ⑩ 내가 모든 중생들을 도와서 해탈시키기 위해서 붓다의 경지에 오르고 싶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
  ⑪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훈련을 하는 것,
  ⑫ 모든 것의 공성을 통찰하는 훈련을 하는 것 등이다.

 

초급 수행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업(業, karma)에 관한 것이다.

‘카르마’는 행동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에서 온 말이지만, 의지가 포함된 행동을 의미하는 불교용어로 바뀌었다.  ‘업’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미움 등의 번뇌에 오염된 중생들이 의지를 갖고 한 행동들이다.  행동은 몸과 생각과 말로써 나타날 수 있다.  행동에 담긴 의도는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수행자가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는다면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업에는 우리 자신의 의도가 섞여 있기 때문에 업을 선택하는 권한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저지른 업의 결과를 피할 수는 없다.  업과 업보는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불교를 숙명론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업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변화시킬 수 있다.

 


업보를 피할 수 없다고 해서 업이 숙명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업과 업보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의도가 담긴 행동을 하고 나면, 그 의도가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재력으로 남게 된다.  나중에 그 잠재력이 발휘될 기회가 생기면 업보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 속에 감춰진 의도는 잠재력으로 의식 속에 남기 쉽기 때문에 계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계율은 부도덕한 행동을 하려는 의도를 막아주는 방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좋은 업을 쌓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재가자의 계율보다는 비구의 구족계가 부도덕을 방지하는 더 철저한 방벽이다.

 


이미 저지른 업이 심어 놓은 잠재력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은 해탈과 성불 뿐이다.  모든 중생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보통 사람들은 명성과 획득을 원하고, 상실과 두려움을 싫어하고, 이기심을 기르다가 결국 패하고 만다. 어떤 이들은 조금 더 장기적인 이익을 구하기 때문에 업에 대해서 배우고 더 장기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만으로는 영원한 이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윤회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구한다. 
 

육도에 윤회하는 중생 가운데 신(神)들은 즐거움에 빠져 있고, 반신(半神, asura)들은 신들에 대한 질투로 가득 차서 수행할 여유가 없다.  짐승들은 수행할 정신적 능력이 없고, 생존만을 생각하며 산다.  귀신들은 고통과 질투에 짓눌려서 자신들이 가진 것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깨끗한 물을 보면 고름과 피라고 생각하고, 엄청난 식욕을 채우려고 하지만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지옥 중생들은 미움과 탐욕으로 저지른 행동의 결과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수행할 여유가 없다.

 

인간의 세계도 탐욕과 분노로 가득 차 있거나 질병에 시달리는 일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불법을 만나서 수행할 기회를 만든다.  그런 경우를 가리켜 ‘귀중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수행할 조건이 갖춰진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귀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 닥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업의 인과법을 생각하며 인간의 수명을 귀하게 여기며 수행에 힘쓴다.  이상의 것들이 초급 수행에서 생각하는 주제들이다.  초급의 수행에 충분히 익숙해진 후에는 중급의 수행으로 들어간다.

 

중급 수행에서는 개인의 해탈을 구한다.  해탈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소멸과 고통을 소멸시키는 방법 등을 가르치는 사성제(四聖諦)에 관해 명상한다.

 

육도윤회에서 헤매는 동안은 업(業)을 피할 길이 없다.  신들의 세계에 태어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다른 세계로 태어나야 한다.  신의 세계에서는 즐거움에 취해 선행을 닦지 않기 때문에 공덕을 쌓지 못해서 다른 낮은 세계로 태어나게 된다. 심지어는 지옥에 태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중급 단계에서는 육도의 윤회 속에 있는 동안은 고통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명상한다. 
 

윤회 속에는 세 종류의 고통이 있다.

 

① 고통스러운 고통,

② 변하는 고통,

③ 보편적인 고통 등이다.

 

'고통스러운 고통'은 죽음과 병과 전쟁 등과 같이 명백하고 직접적인 고통을 말한다.

 

‘변하는 고통’은 변화에서 생기는 고통을 말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잠시 동안은 행복하지만 곧 다른 욕구가 생기면 이미 얻었던 것에 대해서 싫증을 내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일시적인 행복이 나중에는 고통으로 변하는 것을 ‘변하는 고통’이라고 말한다.

 

‘보편적인 고통’은 윤회 속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고통을 말한다.  모든 것이 무상한데도 영원을 찾아 헤매며, 변치 않는 ‘나’란 것은 없는데도 ‘나’를 찾으려 하며, 영원한 ‘내 것’이라는 것이 없는데도 ‘내 것’을 찾아다니는 중생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보편적인 고통’이라고 부른다.  그런 종류의 고통이 윤회 속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고통이라는 뜻이다.  깨달은 수행자들이 “모든 것이 고통이다.”라고 말할 때는 세번째의 ‘보편적인 고통’을 의미한다. 

윤회 속에 있는 것은 이상의 세 가지의 고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윤회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시도는 헛되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해탈을 구하는 중급의 수행자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음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

 

초급과 중급 다음에는 상급의 단계가 있다. 대승과 소승의 차이는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에 있다. 지혜에 대해서만 명상한다면 대승불교도들도 아라한의 길로 빠지게 된다.  보리심을 수반한 지혜만이 전지(全知)와 해탈을 막는 장애를 제거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상급의 수행은 자기 자신만의 해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의 해탈을 구한다.  과거 언젠가의 전생에 나와 친밀했던 중생들이 지금은 지옥에 떨어지거나, 짐승으로 태어나거나, 현생의 나의 적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그 중생들을 해탈시키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나 붓다의 지혜만이 중생들의 기질에 맞게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붓다의 경지에 올라 중생들을 돕고 싶다는 서원을 세운다. 그런 마음이 보리심이다.

‘붓다는 중생들을 해탈시키고, 보리심은 붓다를 만든다’고 한다. 중생들을 해탈하도록 돕겠다는 보리심 때문에 성불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성불의 원인은 보리심인 것이다.  보살은 중생들을 돕겠다는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수행해서 지혜와 공덕을 쌓은 결과로 붓다의 힘과 특성들을 갖게 되는 것이다.  보리심이 없이 밀교 수행을 하면 기껏해야 신통력을 가진 악마로 태어난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에서는 보리심이 동기가 되어 수행을 하는지를 점검하라고 강조한다. 보시·인욕·지계·정진·선정·지혜 등의 육바라밀은 상급의 수행에서 완성된다.


출처 - 불교평론
저자 - 주민황

 

 

 

 

 

 

 

 

티벳불교의 수행 - 람림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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