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나타난 無사상 고찰
- 선종의 無사상에 이르기까지 -
서 종 순*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인도철학에서 '無'
Ⅲ. 중국 철학에서의 '無'
Ⅳ. 불교에서의 無
Ⅴ. 中國佛敎에서의 '無'
Ⅵ. 禪宗의 '無'
Ⅶ. 나오는 말
<국문요약>
선종의 無는 도가와 융합되기 시작되는 중도종의 부정의 3단계로부터 발전되었다. 이것은 존재론적 인식론적 의미가 통합된 자각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베다의 종교의식의 내면화로부터 계속되어 온 베다 내의 우파니샤드의 전통과 베다 밖의 두 전통, 불교와 자이나교의 전통을 일으킨 인도의 종교적 전통이 중국의 전통을 거치면서 종합되고 발전 된 본질 자체의 지시어가 되었다. 불교경전이 무수한 세월을 통해 전파되면서 더욱 방대하게 발전된 데 비해 선종의 無사상은 언어의 최소화를 나타낸다. 선종의 無사상은 인도 종교적 전통과 중국 전통의 최고의 'meeting point'이다. 이리하여 선종의 無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가치론적 의미가 합일 된 최후의 목표로서 불교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 인도 종교의 'Aum'처럼 상징어가 되었다. 이와같은 과정은 가르침의 세 방법에 침묵의 가르침, 긍정적 언표의 가르침, 부정적 언표의 가르침에서 침묵의 고도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선종은 불교가 도가의 영향을 받아서 발달된 것이며 이는 인도 철학과 중국 철학이 합일되고 발전 된 것으로 선종의 無 사상은 바로 이러한 양국의 철학이 종합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주제어 : 無名, 無慾, 無我, 無常, 無
Ⅰ. 들어가는 말
불교에서도 진리의 대명사로서 無가 자주 쓰여 왔다. 空은 중론에서 변증법적 논법의 극치를 보였다면 無는 중국의 선종의 언어도단의 지각의 대상의 절정이었다. 그래서 空이 고도의 철학이면 無는 고도의 수행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선종은 불교가 도가의 영향을 받아서 발달된 것이며 이는 인도철학과 중국철학이 합일되고 발전된 것으로 선종의 無사상은 바로 이러한 양국의 철학이 종합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인도철학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입장, 중국철학의 도가의 無, 중국불교의 無 그리고 선종의 無字화두까지의 성숙과정을 살펴보면서 불교 無사상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Ⅱ. 인도철학에서 '無'
無는 산스크리트로 'asat'와 'abh va'를 대표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asat는 형용사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 아닌, 비진리의, 그릇된'의 의미로,명사로는 비존재, 비실재, 비실체, 거짓, 잘못의 의미로 쓰인다. 철학에서는 주로 존재론적 의미에서 sat- 有, 존재 에 대한 asat-無, 비존재의 의미로 리그 베다, 아타르바 베다, 우빠니샤드, 꾸마라 삼바와에서 나타난다. 리그베다의 '태초에 존재 sat, 비존재 asat도 없었다.'(10-129)나 브리뜨라신화에서 인드라는 존재 sat를 브리뜨라는 비존재 asat를 상징하고 있다. 후에 우빠니샤드와 바가와드 기타에서는 sat는 절대자나 신의 진리를 asat는 마야의 세계를 나타내는 의미로도 쓰였다.
'abh va는 비존재(non-existence), 공허(nihil), 부재(absence), 비실체(non-entity), 부정(negation)'의 사전적 의미가 있다. 인도철학에서는 형이상학적, 인식론적인 면에서 두 가지로 쓰였다. 니야야(The Ny ya), 바이셰시카(The Vai e ika), 미맘사(The M m msakas), 아두바이타 베단타(The Advaita Ved nta) 철학은 모두 abh va를 존재론적 실재로 인식하지만 인식론에서는 서로 다른 차이를 나타낸다. 니야야와 바이셰시카 철학은 abh va를 감각적 인식의 근원으로 지각된다고 말하고 미맘사 (Bha a학파)와 아두와이타 베단타는 독립된 인식의 근원을 말하고 Bha a는 이를 Anupalabdhi(non-apprehension)라고 말한다.
까나다(Ka da)의 바이셰시까(Vai e ika)철학에서 일곱 번째 범주(pad rtha, category)로 언급된다. 다른 여섯 번째 범주는 긍정적인 범주이고 이 일곱 번째 abh va만 부정적인 범주이다. 이 철학에 의하면 abh va는 네 종류가 있다. 창조전 비존재(Pr gabh va), 파괴후 비존재(Dhva s bh va, 상호 비존재(Anyony bh va), 절대 비존재(Atyant h va)이다.
① 창조전 비존재(Pr gabh va)
이것은 시작은 없지만 끝이 있는 비존재를 나타낸다. 어떤 사물이 창조 이전의 비존재가 있었으나 일단 창조되면 그것의 비존재는 사라지게 된다. 이런 종류의 비존재는 시작은 알 수 없지만 사물의 창조로 비존재가 사라짐으로 이 시작은 모르고 끝을 아는 경우의 비존재이다.
② 파괴 후 비존재(Dhva s bh va)
일단 만들어진 사물이 파괴될 때 존재하는 비존재이다. 진흙으로 만든 도가지가 깨어지면 도자기의 비존재가 있게 된다. 이런 경우는 비존재의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경우이다.
③ 상호 비존재(Anyony bh va)
이는 두 사물 관계에서 동일성의 부정을 나타내는 차별성으로서의 비존재이다. 예를 들어 '나는 네가 아니다.'에서 이 문장은 나와 너의 차이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비존재는 두 사물 관계의 연관성의 비존재인 경우이다.
④ 절대 비존재(Atyant h va)
절대적인 비존재는 짧은 기간이라도 비존재가 존속하지 못하는 경우로서 과거, 현재, 미래 언제나 비존재인 경우다. 예를 들어 '공기의 색'은 언제나 비존재이다. 왜냐하면 공기는 언제나 무색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 전 비존재(Pr gabh va)는 창조 이전에, 파괴 후 비존재(dvam ah bh va)는 파괴 후에 있는 비존재이고, 절대 비존재(atyant bh va)는 항상 있는 비존재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비존재는 시작과 끝이 없는 비존재이다.
이와같이 인도철학에서는 '無'의 의미인 'asat'와 'abh va'가 존재론과 인식론에서 둘 다 쓰였음을 말한다.
Ⅲ. 중국 철학에서의 '無'
無는 문법적인 의미로서는 '1.없다. 2.∼이 아니다. 3.∼하지 않는다. 4.∼을 막론하고 5.∼하여서는 안 된다'로서 사용된다. 중국철학에서는 노 장자의 도가사상에서 無의 철학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1) 도가
노장자의 無는 無名을 일컬으며 이는 사물을 有名이라 한데 대해 쓰인 말이다. 無名이란 형상을 초월함을 말한다. 그리하여 노자는
무명은 천지의 시초요(無名 天地 始初)
무명은 만물의 모태다.(有名 萬物 母胎)
道는 숨어서 이름이 없다.(道隱無名)
道는 항상 이름이 없다. 통나무와 같다(道常無名, 樸...)
장자도 無名의 無를 말한다.
태초에 無만 있었으며 有도 없었고 名도 없었는데,
하나가 거기서 나왔다. 하나가 있기는 했으나
아직 형체가 없었다. 만물이 [그 무엇(즉석의)]을
얻음으로써 생겨났는데 (우리는) 이것을 德이라 한다.
2) 신도가
위진시대(3-4세기)의 합리주의 경향의 신도가들은 공자를 재해석하였다. 고환(願歡, 433)의 주에서 無慾의 無를 나타낸다.
대체로 無慾하려는 욕심이 없는 것은 성인의 변함없는 모습이다.
(夫無欲於無欲者, 聖人之常也),
그리고 무욕하려고 욕심을 가지는 것은 현자의 모습으로 구별된다.
(有欲於無欲者, 聖人之分也,)
두 가지 욕심이 동시에 없기 때문에
온전히(全) 텅 비었다(空)는 사실로 성인이라 일컫는다.
(二欲同無, 故全空, 二目聖,)
그리고 욕심{慾心, 이 하나는 있고 하나는 없기 때문에
비일(虛) 때마다 현인이라 일컫는다.
(一有一無, 故每虛以稱賢.)
현인은 有의 관점에서 보면 욕심(心)을 가지려는데 (有慾)에 대한 욕심이 없고,
無의 관점에서 보면, 욕심을 가지지 않으려(無慾)는 욕심이 있다.
(賢人目有觀之, 則無於欲, 自無觀之.)
비기는 비었지만(虛) 욕심을 아직 죄다 없애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가끔(屢)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則有欲於無欲, 虛而未盡, 非屢如何.)
-皇侃;論語義疏-
3) 신유가
이 당시 두 번째 노 장자의 사상의 재해석이 향수와 곽상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기에 無는 無名이었는데 향수와 곽상에 의해 道란 문자 그대로 無라는 주장이 생겨났다.
道는 있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있지 않는 곳이 없으니 있는 곳은 無다. (言道無所不在也... 無所無在而 所在皆無也)
무엇이 또 사물에 앞서 있겠는가? 음양이 사물보다 앞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음양이란 것은 그 자체가 사물이다. 그러면 음양보다 앞선 것은 무엇인가? 자연이 앞섰다고 여길 것이다. 자연은 단지 사물 그 자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道가 사물에 앞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道는 無이다. 이미 道가 無라면 어떻게 道가 사물에 앞섰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사물에 앞선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도 사물은 오히려 끊임없이 생겨난다. 이것을 보면 곧 사물은 자연히 된 것(有)임을 알 수 있다. 사물은 조물주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즉 사물의 창조주는 없다.
노자와 장자는 비인격적인 道가 만물 생성의 구원이지만 향수와 곽상은 사물은 그 자체 스스로 생성되면 이를 獨化(Self-transformation)라고 하고 道는 그 자체 無라고 말한다.
道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道에서 그 무엇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얻은 것을 밝히려고 한 까닭이다. 스스로 얻은 것이지 道가 그것으로 하여금 얻게 할 수는 없다.
오직 無가 변화하여 有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有로 또한 변화하여 無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有는 천태만상으로 변화하지만 하나도 有자체가 無로 변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도 無가 될 수 없으므로 有가 아닌 때가 옛부터 잠시도 없었으며 언제나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중국철학에서는 도가에서는 無名의 無는 존재론적 의미로 신도가의 無慾의 無는 가치론적 의미로, 신유가의 道는 無란 의미는 부정적인 존재론의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보여준다. 이제 불교에서의 無의 쓰임을 알아보자.
Ⅳ. 불교에서의 無
불교에서의 無는 1)諸法無常 2)諸法無我 3)緣起法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諸法無常
이는 모든 사물이 영원하지 않으므로 의미로 만물이 변화해서 생기는 모든 고통을 불교에서는 入苦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무상함을 알려주는 유명한 게송은,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巳, 寂滅法樂
'모든 것은 무상하니 바로 생멸법이다.
나는 생과 죽음의 분별을 다 쉬어버리면
일체 존재가 적멸한 가운데 법열이 나온다.'
석지명 스님은 의역하여 말씀하시기를,
'꽃은 피면 반드시 지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피는 꽃과 떨어지는 낙화를 동시에 같이 묵고
삶과 죽음을 함께 묻으면
고요한 가운데 은근한 즐거움이 있다.
無常은 모든 사물의 양상으로 항상 있지 아니 함을 말한다. 생겨나고 성장하고 없어져 가는 과정을 겪는다. 우리 개개인의 인생에는 이러한 변화가 인간적 관계 일에서 나타난다. 문제는 우리가 일시적인 모든 사물을 영원처럼 여기려는 우리의 의식이 고통으로 여겨지는데 있다. 이는 대표적인 변화의 양태에서 생기는 고통의 여덟 가지를 入苦라고 한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生死病死).........四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 四苦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하는 고통(怨憎會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未不得苦)............
5온, 다섯 가지 불균형(五陰盛苦)................... 入苦
2) 諸法無我
'모든 사건과 물건에는 자아가 없다.' 諸法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란 의미로 우리의 감각으로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를 말한다. 이런 경험 세계 모두에 '나'가 없다는 의미이다.
(1) 諸法의 의미
'우리가 경험하는 존재의 총체'로서 감각기관과 감각 대상의 접촉으로 생기는 일체의 현상이다. 불교에서는 諸法의 내용이 '5온' 12처 18계를 말한다.
5온은 색 수 상 행 식으로 모든 사물은 물질과 정신을 말한다.
① 5온의 색(色)은 물질과 육체를 말한다. 흙, 물, 불, 바람의 地, 水, 火, 風의 4대 요소 또는 이 4대 요소는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이 4대 요소를 인식하는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을 말한다. 이 色은 공간을 차지하며 변화를 수반한다.
② 수(受)는 감각기관을 통한 인식작용으로 기분이 좋고 나쁘고 괴롭고 기쁘고를 수반하는 작용이다.
③ 상(想)은 인식작용을 통해 오관으로 얻은 느낌의 개념과 마음에 인식된 관념과 생각이다.
④ 행(行)은 상의 결과에 선악과 의지작용들, 정신통일, 지적, 의지적 작용의 정신이 경험하는 활동을 말한다.
⑤ 식(識)은 분별 판단 인식의 (오성)의 작용이다.
12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감각대상인 안, 이, 비, 설, 신, 의와 색, 성, 향, 미, 촉, 법이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6근이나 6적이라 부르기도 하고 여섯 가지 대상은 6경 또는 6진이라고 한다. 18계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 여섯 가지 감각대상, 여섯 가지 기관에 다른 인식으로 6근 6경 6식의 18가지이다.
이는 모든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하는 존재의 총체를 자세히 분류한 것이고 이런 분류의 의한 세계 인식은 감각기관의 인식 작용의 힘이라는 뜻이 있다.
(2) 我의 의미
일반적인 의미의 '나'는 5온 12처 18계를 경험하는 주체로서의 '나'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하고 맛보고 접촉하고 느끼는 그리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판단하는 모든 이치와 경험적 활동의 주체이다. 이런 활동은 어떨 때는 자신의 요구에 맞아서 기분 좋고 어떨 때는 나의 요구에 반대해서 기분 나쁘게 경험되어 사는 고락의 합성으로 경험된다. 경험적인 주체로 '5온'의 주체는 '우리의 소박한 삶의' 주체와 마찬가지이다. 경험적인 주체와 달리 '영혼불멸성'을 믿는 종교 철학에서는 '영원의 실체'를 말한다. '영원불멸의 실체'로서 我이다. 경험세계의 변화에 조명된 '我'를 말한다.
(3) 無我의 의미
'無我'는 我의 두 번째 '영원불멸의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이다. 영원불멸의 실체를 믿는 종교의 주장에 대한 부정적인 동시에 또 일반인들은 '무상'을 모르고 '변화의 경험적인 나'를 영원의 나로 착각하는 경우이다. 이 두 경우 모두의 부정이 無我이다. '영원불멸의 실체'가 없고 오직 변화하는 만상이 있다면 이 만상은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답변이 '연기법'이다.
3) 緣起法
(1) 연기법의 상대성
연기법은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써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은 없어진다.' (아함경)이다. 이는 모든 것이 상호의존 관계있는 것으로 상대적이고 절대적임이 아님을 말한다. 이 연기법은 다음과 같은 상대성을 나타낸다.
① 공간의 상대적 관계
이는 한 공간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상호의존성을 말한다. 예를 들면, 파도의 물과 바람의 상호 관계에서 생긴다. 물이 없거나 바람이 없으면 파도는 일지 않는다.
② 시간적 상대관계
이는 生과 死가 있고 만남이 있으며 이별이 있도다. 시간의 시작과 끝은 서로 상대적인 의존관계이다.
③ 주관과 객관의 상대관계
인식작용과 인식대상은 서로 상호 의존한다. 인식작용이 없는 인식대상은 무의미하고 인식대상 없는 인식은 공허하다. 보는 자는 보는 대상을 보는 대상은 보는 자는 서로 필요로 한다.
④ 우주의 상대적 관계
고와 저, 사랑과 미움, 선과 악, 부자와 빈자, 우월감과 열등감, 좋음과 싫음은 서로 대립되면서 상호의존적이다.
(2) 연기법의 인과성
이는 연기법의 변화의 원리로서 상대적인 경우이고 또는 연기법은 인과법으로 원인과 결과의 상호성을 말한다.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다.(因果) 좋은 원인이 있으면 좋은 결과가 있다.(善人善果) 나쁜 원인이 있으면 나쁜 결과가 있다.(惡人惡果) 이 세상은 하루아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여러 기존의 조건이 합성된 결과이다. 한 개인의 탄생과 인생은 이러한 무수한 원인의 결과가 누적된 결과다.
(3) 12연기와 무명
광의적으로 연기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이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12연기이고 4성제는 연기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12연기는 무명이 시작하여 死까지의 연결고리로서 어떻게 고통이 시작되고 죽음이 초래되는지 보여준다.
무명은 무지, avidya의 역어로서 첫째 존재의 본성을 이해 못하고 대신 그릇된 편견을 갖는다는 뜻이 있으며 둘째는 '고'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떻게 제거되는 지를 모른다는 의미이다. 셋째는 '연기의 원리'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교리에서는 諸法無常, 諸法無我, 緣起法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자아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변화하는 과정에 불과한 '我'를 독립성과 영구성을 지닌 실체로 여기고 '자아의 영원'의 망상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 상대적 의존 관계에서 변화하는 것을 영원으로 생각하고 소유하고 연연하여 드디어 苦가 발생된다. 그러므로 '我'는 자아의 空이나 無를 모르는 無如, 苦의 조건과 소멸을 모르는 無知이다. 12연기에는 바로 이런 無知에서 어떻게 苦가 악순환 하는가를 보여준다. 12연기는 또는 諸法無常의 원리를 토대로 하여 '불교'의 변화의 원리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공부한 諸法無常, 諸法無我는 오직 '연기'를 말한다. 또한 연기는 無自性, 空, 無란 의미를 지닌다. 영원한 我도 없고 그런 것에 대해 無, 空이고 있는 것은 오직 '12연기'이다. 이는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 영원함의 부정하는 'eternal flux'의 다양한 표현이다.
Ⅴ. 中國佛敎에서의 '無'
불교는 중국에서 기원 1세기 반경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기원후 100년-200년간에 불교를 음양가와 도교의 비술과 유사하게 여겼고 기원전 2세기 경에는 부처가 노자의 제자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3세기에서 4세기에는 불교 경전들이 번역되었고 5세기에 Kumar Jiva가 번역 할 때는 有 無, 有爲, 無爲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중국불교는 중국사상과의 접촉을 가진 불교 사상이므로 중국의 철학적 전통과 함께 발전하였다. 불교의 중도종은 도가사상이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도가와의 상호접촉으로 인하여 선종이 탄생되었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선종은 중국의 사상으로서 중국의 문화, 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無'가 불교에 사용된 것은 도교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1) 중도종의 無
이 종파는 두 가지 진리, 일상 세계의 진리, 세제와 고차원 세계의 진리, 진제로 구분하고 여러 단계의 진리를 말하였다. 이 종파의 거두인 길장(549-623)에 의하면,
1. 세제: 모든 사물이 有이다.
진제: 모든 사물이 無이다.
2. 세제: 모든 사물이 有라고 말하는 것과 모든 사물이 無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제: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에서 사물이 有로 無도 아니다.
3. 세제: 사물은 有도 無도 아니다.
여기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제: 사물은 有도 無도 아니다. 또 사물은 非有도 非無도 아니다.
그리고 중도는 한 편에 치우친 것도 아니고 한 편에 안 치우친 것도 아니다.
3단계는 불교 해탈과 정각의 忘의 경지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경지이다.
2) 승조의 無
승조는 Kumar Jiva(344-413)의 제자로 그의 不眞空論 논문에 無사상이 나온다.
그런데 만일 만물이 無라고 한다면 어떤 것도 생겨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것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결코 無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 어떤 것을 有라고 확인하고 싶지만 이 有가 정말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은 無라고 확인하고 싶지만 그 어떤 것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形象을 가지고 있는 것은 無와 같지 않으면, 또 참으로 有가 아닌 것도 有와 똑같지는 않다……. 이러므로 不眞空의 뜻도 분명하다.
또 그의 논문 [物不遷論]에는,
만물이 매 순간마다 변화한다는 사실로부터 보면 변화만이 있을 뿐 불변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만물이 매 순간마다 그 순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로부터 판단하면 고요함만이 있고 움직임은 없다.
이는 중도종의 제 2차 수준에서 언급된 것으로 사물이 有이며 고요하다고 말하던지, 아니면 사물이 무이며 움직인다고 하던지 모두 세제이다. 사물이 유도 무도 아니요, 고요함도 움직임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진제이다.
승조의 [般若無知論]에서 3차원의 수준에서 말한다. 이 無는 형상을 초월한 무성질이고 이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無를 안다는 것은 無와 一致하는 것으로 이를 열반이라고 한다. 반야는 상식적으로 앎이 아니라 不知의 知를 말한다. 이는 제 3차원의 경계에서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수밖에 없다.
3) 도생의 無
도생은 九馬摩羅件의 제자이며 승조와 동숙한 자이다. 도생의 [善不愛報]가 어렴풋하게 혜원의 논문(明報應論)에 나타난다.
無爲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 행위이며 이러한 무위를 행할 대 나타내는 마음이 無心이다.
도가의 無爲와 無心을 불교의 형이상학에 적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도생의 [頓悟成佛]이론이 謝靈運의 辯宗論에 나오는 것을 보면, 다음처럼 그 요지를 말할 수 있다.
성불한다는 것은 無와 一致 또는 佛性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無란 形象을 超越한 것으로 그 자체는 결코 어떤 물건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부분으로 나누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하나(oneness)를 모든 그 一部를 얻고 나머지 부분을 내일 얻고,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온전히 아니란 그 자체의 全 를 포함한 하나를 뜻한다. 이것보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온전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도가의 無사상이 불교와 융합되기 시작하면서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無는 佛心이란 철학적 결론에 이르고 있다.
Ⅵ. 禪宗의 '無'
선종은 모든 형식을 최소화하고 직접 마음을 깨닫고자 함이며 이런 태도는 교외별전(敎外別傳), 불입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문자를 세우지 않고 그 문자 밖에서 가르치는 진리, 마음만을 전한다.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키고 자신의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로 표현된다. 이는 경전, 교리, 계율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곧 바로 알아서 본래의 성품을 보고 성불한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런 '교외별전' '불입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더 압축된 표현은 '無'이다. 조주의 '無'자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선사들의 최고의 화두이어 왔으며 선종의 최고의 통과의례가 되었다. 이런 '無'자 화두는 선종의 최고의 禪의 표현이면서 중국의 철학 속에 도교의 영향을 받은 불교의 성숙된 모습이다.
1) 부처님의 '이심전심'
선의 수행은 부처님의 '이심전심'으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심전심은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 알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이심전심의 대표적인 예는 세 가지이다.
1) 다자탑 앞에서 마하가섭과 방석을 같이 앉은 경우
2) 영산에서 꽃을 들어보다.
3) 관 밖으로 부처님 발이 나오다.
마하가섭이 부처님과 방석을 나눠 앉은 것은 계급 사회에서의 평등성을 나타내는 똑같이 부처이다라는 뜻이 있고 두 번 째는 부처님 연꽃을 들고 마하가섭이 미소 지은 것은 "침묵이 진리이다"라는 것을 나타낸다. 세 번째는 부처님 열반 시 마하가섭이 관 주위를 돌고 부처님 발치에서 절할 때 관 밖으로 부처님의 발이 나왔다. 이것은 생전과 같이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가르침이다. 이 세 가지는 문자와 말을 쓰지 않고 가르친 가르침이다. '선'이 문자에 매이지 않고 직접 마음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려 함은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있었음을 말한다.
2) 초기의 선종
전설적 인물 보리달마로부터 신수와 혜능의 보리수나무 논쟁까지 이는 禪의 기초 작업이었다. 신수는 도생의 '불성'을, 혜능은 승조의 '無'를 강조했다. 신수가 '卽心卽佛'이고 혜능은 '無心無佛'이다. 이러한 관계를 대우는 게송으로 표현하고 있다.
몸이 보리수라면
마음은 맑은 거울이네
조심조심
부지런히 거울을 닦아
먼지가 끼지 않게 하니
이에 대해 혜능은
원래 보리는 나무가 아니었으며
맑은 거울 역시 台가 아닌 것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서 먼지가 일어나겠느냐?
禪宗은 선종과 도가의 결합이며 중도종의 표현에서 제3 단계의 경지이다. 道는 언어로 불가능함으로 無라고 하며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그것에 대한 정의를 대리로 결과를 가져오므로 도리어 그것에 제한을 가하는 결과가 된다. 이런 도와 무를 깨닫기 위한 수행방법을 고의적인 노력이니 목적이 없되 자기의 할 일을 다하는데 있다. 이러한 無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그 밖의 모든 것을 버린다. 우리는 다만 일상생활의 평범한 일을 추구하며 그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선사들의 無修之修이다. 황백은 "말과 침묵, 움직임과 고요함, 일체의 소리와 색깔, 이 모두가 다 佛事인데어디에서 佛을 찾으려 하는가? 머리 위에 머리를 두려고 하거나 입 위에 입을 두려 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3) 조주의 無
한국의 禪宗에서 가장 중요한 공안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선종의 거장 조주의 無字공안이다. 공안은 무심과 견성을 목표로 하는 참선수행의 대명제로서 '관청의 공문서'라고 할 만큼이나 참선수행에서의 절대적 준칙이다. 공안은 송대에 이르러 정리되었고 대표적인 공언집은 벽암록의 무문관이다. 무문관에는 조주의 공언이 수록되었으며 기틀을 잡는데 기여한다. 이 조주선사의 무자공안은 {벽암록}과 {대혜어록}에 잘 나타난다.
인도의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은 진제와 속제 진실과 방편이라는 이체(二諦)의 논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체의 논리가 중국 전통의 체용론(體用論)과 만나면서 방향을 수정하게 된다. 인도 불교의 명성이 오래된 과정을 통해 개념적인 구성에 의해 지식을 탈피하게 된 것은 선종에 의해서다. 선종은 지식과 개념의 이해를 벗어버리고 간단한 직접적인 방법으로 본질 자체에 대한 탐구이며 이러한 탐구방법으로서 '공안'과 화두가 중요시되고 無字공안과 無字화두가 핵심을 이룬다.
그러므로 無字화두나 無字공안은 인도 불교의 모든 부정적 논리를 수용한 것으로 현상계 자아의 부정과 화엄적 국한 경계를 모두 부정한다. 한편 이 無字화두나 無字공안은 道가의 체용론을 수용, 이는 본질, 실재에 대한 상징이다. 또한 이 공안은 선의 내용이 아닌 형식으로서 언어 세계의 혼란 그물에서 벗어나기 위한 직관의 도구이다. 조주는 무문관에서 자신의 無에 대한 선의 방법으로서 철저성을 다음처럼 말한다. '참선은 마음의 행동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야 하고 모든 마음의 길목이 끊어져야 한다. 그것을 못하면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와 같이 되어버린다. 삼 백 육십 개의 골절과 팔만 사천 개의 털구멍을 통해 온몸으로 우문을 일으켜 이 無字를 밤낮으로 참구하며 허무하다는 의미에서의 無字를 생각하지 말고 있다 없다의 의미에서 無字를 생각하지도 말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무문관 제 1조] 조주선사의 無를 보기로 한다.
[本則]
조주하상에게 어느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화상이 말했다.
"無"
[평唱]
무문은 말한다.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뚫을 것이요, 현묘한 깨달음은 마음의 길을 궁구하여 끊어야 한다. 참선하여 조사의 관문을 뚫지 못하고 마음의 길이 끊이지 않으면 모두 초목에 붙어사는 도깨비들이요, 그렇다면 말해보라, 무엇이 조사의 관문인가? 오직 이 한 개의 무(無) 자가 종무의 한 관문이니 이름하여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 한다. 이 관문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이는 다만 조주선사를 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역대조사와 손을 맞잡고 가며 눈썹을 겨루어 한 눈으로 같이 보고 한 귀로 같이 듣는 것이니 어찌 경쾌하지 않겠는가? 조사의 관문을 뚫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삼 백 육십 개의 골절과 팔만 사천 털구멍을 가지고 온 몸으로 의단(疑團)을 일으켜서 '無'자를 탐구하여 밤낮으로 잡아 밀어대야 할 것이니 너무도 무도도 알지 말며 마치 뜨거운 쇳덩이를 삼킨 것같이 토해 낼 때도 토할 수 없어서 종전의 나쁜 지각을 모두 없애버리고 오래 닦으면 자연히 안팎으로 한 덩어리를 이루어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꾼 듯 다만 스스로 알뿐이다. 홀연히 깨치게 되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흔들어서 마치 관우장군의 큰 칼을 탈취하여 손에 들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서 생사의 벼랑 끝에서 대자재를 얻어서 육도사생 가운데에서도 유희삼매하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無'자를 잡아서 밀어대야 하는가. 평생의 기력을 다하여 저 '無'자를 참구하되 끊어짐이 없다면 법의 촛불을 한 번 당겨 붙음과 같을 것이다.
[공]개에게 불성이 없다함이여! 바른 법경을 온전히 드러냈도다. 있고 없음에 걸린다면 몸이 죽고 목숨을 잃으리라!
이처럼 정리된 선은 수많은 논쟁의 인도의 불교와 반야 공관(般若空觀)의 에 대한 중국 선종의 최고의 답변이었다. 이런 직관이 강조된 경험주의적 성격과 유무를 지양하는 최종적인 수행 결과가 무문관의 제 1칙 '無'자 화두이다.
4) 숭산 스님의 禪圓
선종은 '불립문자, 교의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구호아래 마음의 허상을 깨닫고자 함이고 마음의 허상중 대부분이 문자에 의한 것이므로 문자, 사고를 넘어선 직접적인 마음의 자각을 강조했다. 허상을 벗어나는 단계에 따라 숭산 스님의 가르침에 禪圓을 이용해 선수행을 설명한다.
숭산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00에서 900는 집착과 생각의 영역으로 小我의 영역으로 세상의 색과 모양에 집착이 있다. 욕심이 있으므로 분노와 무지가 있고 삶의 苦가 있는 영역이다. 모든 차별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다. 900에서 존재와 비존재 業我(Karma I)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같다고 생각하면서 생각에 집착을 한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원리를 말하지만 그런 생각에 집착한다. 1800 영역에서는 無我(Nothing I)는 모든 실체가 없는 空을 경험하는 상태이다. '나'가 없는 공의 영역이다. 色, 空 모두가 없는 하나의 상태이다. 그러나 空의 집착이 있다. 2700의 영역에서는 女我(Fredom I)이다. 이는 자유의 상태이다. 생각, 형태, 空에서 자유롭지만 자유자체에 집착이 있다. 3600의 영역에서는 大我(The Absolute I)로서 아무 것에도 집착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이다. 나의 모습은 모습이고 그대로의 나이다. 모습은 모습이고 공은 공이다. 無碍의 상태이다. 주체와 대상도 없고 안과 밖이 하나이어서 보는 대상과 하나가 된다. 하늘을 보면 하늘이 땅을 보면 땅이 된다. 바로 3600의 영역이 선종의 '無' 영역이다. 시공을 초월하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 나와 너가 같아지는 영역이다. 다른 사람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이 슬프면 나도 슬프다.
天地地天天地轉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요, 하늘과 땅이 함께 구른다.
水山山水水山空,
물이 산이고, 산이 물이며, 물과 산이 다 비었다.
天天地地何曹轉
하늘은 하늘 땅은 땅, 언제 일찍이 구르는 바가 있었던가
山山水水各琓然
산은 산 물은 물 각기 완연하여 그대로가 진리이다.
이제 제자리에 돌아와 세상의 욕심을 떼고 생각의 착을 떼고 空에 대한 착도 떼고, 자유에 대한 착도 떼고, 모든 것이 그대로 온전하고 좋은 경지다. 바깥의 모양과 내면의 생각에서 자유롭고 오고 감이 없으며 모든 방황을 멈추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여여한 상태이다.
만일 그대가 부처님의 경계를 알려고 하면
그대의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해야 한다.
모든 생각과 욕망을 놓아 버리고
마음 가는 곳에 걸림이 없게 한다.
자, 그러면 이제 그대의 마음을 허공과 같이 했는가?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다음에 하는 말을 잘 보라.
이것이 완전한 깨달음의 성품이다.
위로는 여러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육도 중생에 이르기까지
각각 완전한 존재이며 각자가 일체를 갖고 있다.
낱낱이 티끌이 서로 통하고 일체 사물이 서로 드러내니
마음 닦을 것도 없이 이미 완벽하다. 분명하고도 분명하다.
이제 보이는가?
이제 들리는가?
이미 당신은 분명히 보고 듣고 있다.
보는 자가 여래다.
Ⅶ. 나오는 말
선종의 無는 도가와 융합되기 시작하는 중도종의 부정의 3단계로부터 발전되었다. 이것은 존재론적 인식론적 의미가 통합된 내면적 자각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베다의 종교의식의 내면화로부터 계속되어온 베다 내의 우파니샤드의 전통과 베다 밖의 두 전통, 불교와 자이나교의 전통을 일으킨 인도의 종교적 전통이 중국의 전통을 거치면서 종합되고 발전된 본질 자체의 지시어가 되었다. 불교경전이 무수한 세월을 통해 전파되면서 더욱 방대하게 발전된 데 비해 선종의 無사상은 언어의 최소화를 나타낸다. 선종의 無사상은 인도종교적 전통과 중국전통의 최고의 'meeting point'이다.
1) 無의 개념
인도철학에서 無는 'asat'와 'abh va'로 표현된다. 'asat'는 존재론적 의미에서 'abh va'는 인식론적 의미에서 쓰였으며 'asat'는 베다의 브리트다(v tra) 신화에서 브리트리가 'asat' 비존재 無가서 존재로서 표상되는 인드라(Indra)보다 근원적임을 말한다. 마치 노자가 無가 有의 근원임을 말하듯이 asat 브리트리가 sat 인드라보다 근원적임을 말한다. 그를 우빠니샤드나 바가바드 기따 그 후 신애 사상의 비슈누 신앙이나 시바 신앙에서는 신들이 갖는 두 성격 sagu a와 nirgu a에서 有와 無의 쓰임이 있다. 'asat'의 의미는 중국 철학의 존재론적 의미의 無名의 無와 존재론적 의미이다.
불교 사상의 無常, 無我에서 無는 시공간의 영원성의 부정으로서 '변화'의 진리 '연기'를 나타난다. 無가 연기이다. 중국 불교는 인도적 개념의 존재론적 의미 'asat'인 도가의 표현의 無로서 불교의 모든 경전과 종교의 형식을 초월하는 내면적 상징으로 축약됨을 보여준다. 중국 불교는 불교와 도가의 無의 징검다리를 놓았다. 도가의 無,, 無爲, 無心을 불심으로 보는 것은 곧 선종의 無는 佛心이다는 주장으로 연결되었다. 조주는 無가 존재론적 인식론 최후의 상태로서 말하였고 숭선에서는 대자유 개념으로서 無를 가치론적 입장에서 표명한다.
2) 선종의 無
이리하여 선종의 無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가치론적 의미가 합일 된 최후의 목표로서 불교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 인도 종교의 'Aum' 처럼 상징어가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은 가르침의 세 방법에 침묵의 가르침, 긍정저 언표의 가르침, 부정적 언표의 가르침에서 침묵의 고도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정의의 유식론은 긍정적인 언표의 가르침에, 중관론은 부정적인 방법의 가르침에 나타낸다.
그러므로 선종의 無는 종국의 철학의 터널을 지나면서 불교의 방대한 경전과 해설의 교리와 조직의 형식적 단계에서 탈피하여 최후의 본질을 한 문자, 無로 불교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 이것은 침묵의 가르침의 웅변적 표현이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
도둑이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나도 무엇을 배웠던가.
無의 지배자는 어두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야꾸사이(Yakasai)-
마음도 없고, 불타도 없고, 존재도 없다.
진공(眞空)의 뼈도 흩어졌다.
황금사자가
왜 여우의 굴을 찾아야 하는가?
-데칸(Tekhan)-
<Abstract>
Conceptual Formation of Nothingness in Zen-Buddhism
Seo, Jong-soon
In Zen-Buddhism has 'Nothingness(無) been used to indicate the reality. While theory of emptiness(sunyavada) in Madhyamika philosophy shows the peak of the dialectical method, Nothingness represents the high object of practice. Nothingness has been the object of realization beyond speech in Chinese philosophy. Zen-Buddhism is a school well-developed under the influence of Taoism, so that it has synthesis and harmony of Indian Philosophy and Chinese philosophy. In Indian philosophy, nothingness can be expressed as 'asat' 'abhava' in Sanskrt. 'Asat' is mentioned in Vrtra Asat as 'non-being' is prior to 'sat' as being. 'Abhava' is discussed as 'non-existence' in Indian logics. In Chinese philosophy, specially Taoism. Nothingness 無 is identified with 'The Nameless' 無名 and regarded as being prior to Being 有 idere also, Nothingness has the origin of being 有. In Buddhism Nothingness could be found in relation to non-eternality and non-substantiality. It is denial of entity in spare-time. Here, Nothingness is th symbol of reality, transcending all the formality of religious ceremony, practice and scriptures. Nothingness was presented in the sense of 'non-action' 無爲 desireless-ness a were thought as the same concept of 'desireless mind' in Buddhism. In historical process, Nothingness of Zen-Buddhism has been shaped to be the final object of metaphysical, epistemological and soterialogical dimensions. Nothingness, passed through tunnel of Chinese philosophy has become the most sublime word referring to reality like aum in Hinduism. It is one syllable '無'. Nothingness indicating the final and total object of Buddhism. It is the eloquent expression of teaching silence in Zen-Buddhism.
Key word : Nothingness, The Nameless, Non-action, Ddesireless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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