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29호(2014년 10월 24일자) 아함경 강의
무명을 제거하여 明智가 생기면 그는 공덕이 되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 않고 공덕이 되지않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않고 흔들림 없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 않는다
의도적 행위를 짓지 않고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취착하지 않는다. 취착하지 않으면 갈증 내지 않는다. 갈증 내지 않으면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든다. 그는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왜냐하면 많이 들이 아는 거룩한 제가가 무명(無明)을 즐거워하지 않아서 밝음을 일으킨다면 무명이 소멸되고 행(行)이 소멸된다. 행이 소멸되면 식(識)이 소멸되며, 이와 같이 결국에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과 근심․슬픔․번민․괴로움까지 다 소멸된다. 이렇게 하여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사량경(思量經)
[원문]
(二九二) 如是我聞: 一時, 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云何思量觀察正盡苦, 究竟苦邊? 時, 思量眾生所有眾苦, 種種差別, 此諸苦何因․何集․何生․何觸? 思量取因․取集․取生․取觸. 若彼取滅無餘, 眾苦則滅, 彼所乘苦滅道跡如實知, 修行彼向次法, 是名比丘向正盡苦, 究竟苦邊, 所謂取滅.
復次, 比丘思量觀察正盡苦, 究竟苦邊. 時, 思量彼取何因․何集․何生․何觸? 思量彼取愛因․愛集․愛生․愛觸. 彼愛永滅無餘, 取亦隨滅, 彼所乘取滅道跡如實知, 修習彼向次法, 是名比丘向正盡苦, 究竟苦邊, 所謂愛滅. ……
復次, 比丘思量觀察正盡苦, 究竟苦邊. 時, 思量彼行何因․何集․何生․何觸? 知彼行無明因․無明集․無明生․無明觸. 彼福行無明緣, 非福行亦無明緣, 非福不福行亦無明緣. 是故當知, 彼行無明因․無明集․無明生․無明觸. 彼無明永滅無餘, 則行滅, 彼所乘無明滅道跡如實知, 修習彼向次法, 是名比丘向正盡苦, 究竟苦邊, 所謂無明滅.”
佛告比丘: “於意云何? 若不樂無明而生明, 復緣彼無明作福行․非福行․無所有行不?” 比丘白佛: “不也, 世尊!” “所以者何? 多聞聖弟子不樂無明而生明, 無明滅則行滅, 行滅則識滅, 如是乃至生․老․病․死․憂․悲․惱․苦滅, 如是如是純大苦聚滅.”
佛言: “善哉! 善哉! 比丘! 我亦如是說, 汝亦知此. 於彼彼法起彼彼法, 生彼彼法, 滅彼彼法, 滅․止․清涼․息․沒. 若多聞聖弟子無明離欲而生明, 身分齊受所覺, 身分齊受所覺時如實知; 若壽分齊受所覺, 壽分齊受所覺時如實知; 身壞時壽命欲盡, 於此諸受一切所覺滅盡無餘. 譬如力士取新熟瓦器, 乘熱置地, 須臾散壞, 熱勢悉滅. 如是, 比丘無明離欲而生明, 身分齊受所覺如實知, 壽分齊受所覺如實知, 身壞命終, 一切受所覺悉滅無餘.”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다죽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해 헤아리고 관찰해야 바르게 괴로움과 맨 마지막 괴로움의 끝까지를 다 없게 할 수 있을까? 이때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갖가지로 차별되는 온갖 괴로움에 대하여 그 모든 괴로움은 무엇이 인(因)이 되고, 무엇이 발생이 되며, 무엇이 생겨남이 되고, 무엇이 접촉이 되는가?’ 하고 생각하고 헤아려라. 그리고 ‘그것은 취함[取]이 인이 되고, 취함의 발생이 되며, 취함의 생겨남이 되고, 취함의 접촉이 된다’라고 생각하고 헤아려라. 만일 그 취함이 남김없이 소멸되면 모든 괴로움은 곧 다 소멸될 것이다. 그가 올라타야 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사실 그대로 알아 그리로 향하고 법을 따라 수행하면, 이것을 비구가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고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나는 방향으로 향한 것이라고 하나니, 이른바 취함의 소멸이니라.
또 비구들이여,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고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 헤아리고 관찰하라. 이때 ‘그 취함은 무엇이 인이 되고, 무엇이 발생이 되며, 무엇이 생겨남이 되고, 무엇이 접촉이 되는가?’ 하고 생각하고 헤아려라. 그리고 ‘그 취함은 애욕[愛]이 인이 되고, 애욕이 발생이 되며, 애욕이 생겨남이 되고, 애욕의 접촉이 된다’고 생각하고 헤아려라. 만일 그 애욕이 남김없이 소멸되면 취함도 따라서 소멸될 것이다. 그가 올라타야 할 취함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사실 그대로 알아 그리로 향하고 법을 따라 수행하면, 이것을 비구가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고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나는 방향으로 향한 것이라고 하나니, 이른바 애욕의 소멸이니라. ……
또 비구들이여,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고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 헤아리고 관찰하라. 이때 ‘그 행은 무엇이 인이 되고, 무엇이 발생이 되며, 무엇이 생겨남이 되고, 무엇이 접촉이 되는가?’ 하고 생각하고 헤아려라. 그리고 ‘그 행은 무명(無明)이 인이 되고, 무명이 발생이 되며, 무명이 생겨남이 되고, 무명이 접촉이 된다’라고 알아야 한다. 그 복된 행도 무명이 연(緣)이 되고, 복되지 않은 행도 또한 무명이 연이 되며, 복되기도 하고 복되지 않기도 한 행도 또한 무명이 연이 된다. 그러므로 ‘그 행은 무명이 인이 되고, 무명이 발생이 되며, 무명이 생겨남이 되고, 무명이 접촉이 된다’고 알라. 그 무명이 남김없이 영원히 소멸되면 행도 따라서 소멸될 것이다. 그가 올라타야 할 무명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사실 그대로 알아 그리로 향하고 법을 따라 수행하면, 이것을 비구가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고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나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하나니, 이른바 무명의 소멸이니라.”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무명(無明)을 좋아하지 않아서 밝음[明]을 일으킨다면, 다시 그 무명을 인연하여 복된 행이나 복되지 않은 행이나 아무 것도 아닌 행을 짓겠느냐?”
비구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가 무명을 즐거워하지 않아서 밝음을 일으킨다면, 무명이 소멸되고 행(行)이 소멸됩니다. 행이 소멸되면 식(識)이 소멸되며, 이와 같이 결국에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과 근심․슬픔․번민․괴로움까지 다 소멸됩니다. 이렇게 하여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그와 같이 말하였고 너희들도 또한 그것을 알았다. 이러저러한 법에서 이러저러한 법을 일으키면 이러저러한 법이 생기고, 이러저러한 법을 소멸하면 이러저러한 법이 소멸해 그치고, 맑고 시원해지며, 쉬고 사라진다. 만일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가 무명에 대해서 탐욕을 여의고 밝음[明]을 일으켜 몸의 범주에서 감각을 느낀다면, 몸의 범주에서 감각을 느낄 때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만일 수명의 범주에서 감각을 느낀다면 수명의 범주에서 감각을 느낄 때 그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그래서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려 할 때에는 이 모든 느낌에서 감각된 모든 것을 남김없이 소멸하느니라.
비유하면 역사(力士)가 갓 구워낸 오지그릇을 가져다 열을 식히기 위해 땅 위에 놓아두면, 잠깐 사이에 뜨거운 기운은 다 흩어지고 무너져 소멸하는 것과 같나니,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무명에서 탐욕을 여의고 밝음[明]을 일으켜 몸의 범주에서 느끼는 감각을 사실 그대로 알고, 수명의 범주에서 느끼는 감각을 사실 그대로 알면,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날 때 감각된 모든 느낌은 남김없이 다 소멸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권12 제292경(?대정장? 2, pp.82c-83b)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12:51 Parivīmaṁsana-sutta(SN Ⅱ, pp.80-84)이다. 니까야의 경명(經名)인 빠리위망사 나(parivīmaṁsana)는 심려(審慮: 깊이 생각함), 사량(思量: 생각하여 헤아림), 숙고(熟考: 깊이 고려함)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이 경에서 붓다는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며, 괴로움이 어떻게 소멸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고 설했다.
니까야와 아가마의 주제는 동일하지만 그 구성과 내용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설법장소도 니까야와 아가마의 기술이 다르다. 아가마에서는 이 경을 세존께서 왕사성의 가란다죽원에 계실 때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니까야에서는 사왓티의 아나타삔디까(祇樹給孤獨園)에 계실 때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왜 이처럼 상좌부와 설일체유부의 전승이 다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 경의 핵심 내용은 괴로움의 원인은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순관(順觀)에 의해 일어나고, 괴로움의 소멸은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역관(逆觀)에 의해 소멸된다는 것이다. 아가마에서는 늙음․병듦․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곧바로 괴로움은 취함[取]이 인이 되고, 취함의 발생이 되며, 취함의 태어남이 되고, 취함의 접촉이 된다고 설해져 있다. 그러나 니까야에서는 보다 자세히 설해져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깊이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진 늙음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이 생겨난다. 그러면 이 괴로움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무엇이 있을 때 늙음과 죽음이 있고 무엇이 없을 때 늙음과 죽음이 없는가?’
그는 깊이 생각하여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이 세상에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진 늙음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 괴로움은 태어남을 근원으로 하고, 태어남을 원인으로 하고, 태어남으로부터 생기며, 태어남으로부터 발생한다. 태어남이 있을 때 늙음과 죽음이 있고 태어남이 없을 때 늙음과 죽음이 없다.’
그는 늙음과 죽음을 꿰뚫어 알고 늙음과 죽음의 원인을 꿰뚫어 알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을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길을 따름으로써 그는 법에 따라서 실천한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를 완전하고 올바른 괴로움, 즉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위해 실천하는 이라고 부른다.”[SN Ⅱ, p.81]
이와 같이 니까야에서는 “그러면 이 괴로움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으로부터 생기며,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idaṃ nu kho dukkhaṃ kiṃnidānaṃ kiṃsamudayaṃ kiṃjātikaṃ kimpabhavaṃ?)”라고 묻고 있다. 그런데 아가마에서는 “그 모든 괴로움은 무엇이 인(因)이 되고, 무엇이 발생이 되며, 무엇이 생겨남이 되고, 무엇이 접촉이 되는가?(此諸苦何因․何集․何生․何觸?)”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에 대해 경에서는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순서에 따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노사(老死)는 생(生)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생은 유(有)로 말미암아 일어나며, 유는 취(取)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취는 애(愛)로 말미암아 일어나며, 애는 수(受)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수는 촉(觸)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며, 촉은 육입(六入)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육입은 명색(名色)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며, 명색은 식(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식은 행(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며, 행은 무명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설해져 있다.
반대로 붓다는 제자들에게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무명(無明)을 좋아하지 않아서 밝음[明]을 일으킨다면, 다시 그 무명을 인연하여 복된 행이나 복되지 않은 행이나 아무 것도 아닌 행을 짓겠느냐?(於意云何? 若不樂無明而生明, 復緣彼無明作福行․非福行․無所有行不?)”라고 묻는다. 여기서 말하는 복행(福行), 비복행(非福行), 무소유행(無所有行)은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에 해당하는 니까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비구가 무명을 제거하여 명지(明智, vijjā)가 생기면 그에게서 무명은 여의고 명지가 생기기 때문에 그는 공덕이 되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 않고 공덕이 되지 않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 않고 흔들림 없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한역에서 말하는 복행(福行)은 ‘공덕이 되는 의도적 행위(puñña saṅkhāra)’를 말하고, 비복행(非福行)은 ‘공덕이 되지 않는 의도적 행위(apuñña saṅkhāra)’를 말하며, 무소유행(無所有行)은 ‘흔들림 없는 의도적 행위(āneñja saṅkhāra)’를 말한다. 이것은 무명을 제거하고 명지가 생기면, 공덕이 되는 의도적 행위도 공덕이 되지 않는 의도적 행위도 흔들림 없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의도적 행위를 짓지 않고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취착하지 않는다. 취착하지 않으면 갈증 내지 않는다. 갈증 내지 않으면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든다. 그는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왜냐하면 많이 들이 아는 거룩한 제자가 무명(無明)을 즐거워하지 않아서 밝음을 일으킨다면 무명이 소멸되고 행(行)이 소멸된다. 행이 소멸되면 식(識)이 소멸되며, 이와 같이 결국에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과 근심․슬픔․번민․괴로움까지 다 소멸된다. 이렇게 하여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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