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28호(2014년 9월 26일자) 아함경 강의
無明이 소멸하면 行이 소멸하고, 識…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가 소멸한다. 이와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첫째, “괴로움은 자기가 만드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붓다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왜냐하면 괴로움을 만드는 자가 자기라고 하면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상견에 빠지기 때문이다. 붓다는 자아라고 부를 만한 어떤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상견론자들은 오온을 벗어나 항상하고 있는 자아가 있다고 전제하고, 이 질문을 했기 때문에 붓다는 이 질문 자체가 옳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둘째, “괴로움은 남이 만드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붓다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이것은 상견론자들과는 반대로 괴로움을 만드는 자가 타자라고 하면 단멸론자들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셋째, “괴로움은 자기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붓다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왜냐하면 괴로움은 자기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한다면 일부영속론자들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넷째, “괴로움은 자기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기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붓다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이것은 우연발생론자들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러한 네 가지 질문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괴로움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치 두 개의 갈대 다발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노경(蘆經)
[원문]
(二八八) 如是我聞: 一時, 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 爾時, 尊者舍利弗․尊者摩訶拘絺羅在耆闍崛山. 爾時, 尊者舍利弗晡時從禪覺, 詣尊者摩訶拘絺羅, 共相問訊慶慰已, 於一面坐. 語尊者摩訶拘絺羅: …… “云何? 老死自作耶? 為他作耶? 為自他作耶? 為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 “尊者舍利弗! 老死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亦非非自他作無因作, 然彼生緣故有老死.” “如是生․有․取․愛․受․觸․六入․名色, 為自作․為他作․為自他作․為非自他無因作?” 答言: “尊者舍利弗! 名色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非非自他作無因作, 然彼名色緣識生.” 復問: “彼識為自作․為他作․為自他作․為非自非他無因作?” 答言: “尊者舍利弗! 彼識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非非自他作無因作, 然彼識增名色生.” 尊者舍利弗復問: “尊者摩訶拘絺羅! 先言名色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非非自他作無因作, 然彼名色緣識生, 而今復言名色緣識, 此義云何?” 尊者摩訶拘絺羅答言: “今當說譬, 如智者因譬得解. 譬如三蘆立於空地, 展轉相依, 而得豎立, 若去其一, 二亦不立, 若去其二, 一亦不立, 展轉相依, 而得豎立, 識緣名色亦復如是. 展轉相依, 而得生長.” 尊者舍利弗言: “善哉! 善哉! 尊者摩訶拘絺羅! 世尊聲聞中, 智慧明達, 善調無畏, 見甘露法, 以甘露法具足身作證者, 謂尊者摩訶拘絺羅, 乃有如是甚深義辯, 種種難問, 皆悉能答, 如無價寶珠, 世所頂戴, 我今頂戴尊者摩訶拘絺羅亦復如是. 我今於汝所, 快得善利, 諸餘梵行數詣其所, 亦得善利, 以彼尊者善說法故. 我今以此尊者摩訶拘絺羅所說法故, 當以三十種讚歎稱揚隨喜.” 尊者摩訶拘絺羅說: 老死厭患․離欲․滅盡, 是名法師; 說生․有․取․愛․受․觸․六入處․名色․識, 厭患․離欲․滅盡, 是名法師; 若比丘於老死厭患․離欲․滅盡向, 是名法師; …… 識厭患․離欲․滅盡, 不起諸漏, 心善解脫, 是名法師. 尊者摩訶拘絺羅語尊者舍利弗言: “善哉! 善哉! 於世尊聲聞中, 智慧明達, 善調無畏, 見甘露法, 以甘露法具足身作證者, 謂尊者舍利弗, 能作如是種種甚深正智之問, 猶如世間無價寶珠, 人皆頂戴, 汝今如是, 普為一切諸梵行者之所頂戴․恭敬․奉事. 我於今日快得善利, 得與尊者共論妙義.” 時, 二正士更相隨喜, 各還所住.
[역문]
이와 같이 내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가란다죽원에 계셨다.
그때 존자 사리불(舍利弗)과 존자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는 기사굴산(耆闍崛山)에 있었다.
그때 존자 사리불이 해질 무렵에 선정에서 깨어나 존자 마하구치라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서로 문안인사를 나누고 위로한 뒤에 한쪽에 앉아, 존자 마하구치라에게 말하였다. ……
“어떻습니까? 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와 다른 사람이 함께 지은 것입니까? 혹은 자기도 아니요 남도 아니며 인(因)이 없이 지어진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존자 사리불이여, 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며, 자기와 다른 사람이 같이 지은 것도 아니요, 또한 자기와 다른 사람이 같이 지은 것이 아닌 인이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태어남을 인연하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태어남․존재․취함․애욕․느낌․접촉․육입처도 마찬가지이며, 명색(名色)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와 다른 사람이 같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도 남도 아니요 인이 없이 지어진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존자 사리불이여, 명색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며, 자기와 다른 사람이 같이 지은 것도 아니요, 자기나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닌 인이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 명색은 식(識)을 인연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 식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와 다른 사람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도 아니요 남도 아닌 인이 없이 지어진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존자 사리불이여, 그 식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며, 자기와 다른 사람이 같이 지은 것도 아니요, 자기나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닌 인이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 식은 명색을 인연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존자 사리불이 다시 물었다.
“존자 마하구치라여, 조금 전 ‘명색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며, 자기와 다른 사람이 같이 지은 것도 아니요, 자기와 다른 사람이 같이 지은 것이 아닌 인이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다. 그 명색은 식을 인연하여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이제는 또 ‘명색을 인연하여 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이치입니까?”
존자 마하구치라가 대답하였다.
“지금 비유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어 말하면 잘 이해하게 됩니다. 비유하면 세 개의 갈대를 빈 땅에 세울 때 서로서로 의지해야 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일 그 하나를 빼버리면 둘도 서지 못하고, 만일 둘을 다 빼버리면 하나도 또한 서지 못하게 되니, 서로서로 의지해야 서게 되는 것입니다. 식이 명색을 인연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서로서로 의지해야 나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존자 사리불이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존자 마하구치라여, 세존의 성문(聲聞)들 중에 지혜(智慧)가 밝게 통달하고, 잘 다루어 두려움이 없으며, 감로법(甘露法)을 보고 감로법을 두루 갖추어 몸으로 증득한 사람은 바로 존자 마하구치라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이와 같이 매우 심오한 이치의 변론이 있어서 갖가지 어려운 질문에 모두 대답할 수 있으시니, 세상이 정수리에 떠받들어 공경해야할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 구슬과 같으신 분입니다. 저도 이제 존자 마하구치라를 정수리로 떠받들어 존경하는 이유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에게서 유쾌하게 좋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다른 모든 범행자(梵行者)들도 자주 당신께 찾아온다면 그들 또한 좋은 이익을 얻을 것이니, 존자께서 설법을 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존자 마하구치라께서 말씀하신 법을 마땅히 서른 가지로 찬탄하여 높이 드날리고 따라 기뻐하겠습니다. 존자 마하구치라께서는 늙음과 죽음을 싫어하고 근심하며 탐욕을 여의어서 완전하게 소멸하라고 말씀하시니, 바로 이런 분을 법의 스승[法師]이라고 합니다. 태어남․존재․취함․애욕․느낌․접촉․육입처․명색․식을 싫어하고 근심하며 탐욕을 여의고 완전하게 소멸하라고 말씀하시니, 바로 이런 분을 법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만일 비구가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 싫어하고 근심하며 탐욕을 여의고 완전하게 소멸하는 방향으로 향한다면, 이런 자를 법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 식에 대해서 싫어하고 근심하며 탐욕을 여의고 완전하게 소멸해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잘 해탈하면, 이런 자를 법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존자 마하구치라가 존자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합니다. 세존의 성문들 중에서 지혜가 밝게 통달하고, 잘 다루어 두려움이 없으며, 감로법을 보고 감로법을 두루 갖추어 몸으로 증득한 사람은 바로 존자 사리불이십니다. 이와 같은 매우 깊은 바른 지혜의 갖가지 질문을 하실 수 있으시니, 마치 사람들이 정수리로 떠받들어 공경할 만한 세간에서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 구슬과 같으신 분입니다. 당신도 이제 그와 같아서, 두루 일체 범행자들이 정수리에 떠받들고 공경하며 예(禮)로써 섬깁니다. 나는 오늘 통쾌하게 좋은 이익을 얻었고, 존자와 더불어 묘한 이치를 함께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두 정사(正士)는 다시 서로 기뻐하며 제각기 머물던 곳으로 돌아갔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권12 제288경(?대정장? 2, p.81a-b)이다. 이에 대응하는 니까야는 SN12:67 Naḷakalāpiya-sutta(SN Ⅱ, pp.112-115)이다. 이 경의 이름인 ‘노경’은 ‘갈대의 경’이라는 뜻이다. 이 경은 ‘갈대묶음’에 비유하여 연기법을 설했기 때문이다. 이 경은 붓다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니고, 사리불 존자와 마하구치라 존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아가마와 니까야애서 말하는 주제는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아가마에서는 대화의 장소가 왕사성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머물고 있을 때로 되어 있고, 니까야에서는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미가다야(Migadāya, 녹야원)에 머물고 있을 때로 되어 있다. 또한 아가마에서는 사리불 존자가 해질 무렵에 마하구치라 존자를 찾아가 질문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니까야에서는 마하꼿티따(Mahākoṭṭhita) 존자가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를 찾아가 질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질문자와 답변자가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것은 한역의 번역 고장에서 생긴 착오인 것 같다. 니까야의 기록대로 마하꼿티따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를 찾아가 질문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마하꼿티따 존자보다 사리뿟따 존자가 더 뛰어난 붓다의 상수제자이기 때문이다.
마하꼿티따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질문한 내용은 “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지은 것인가?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인가? 자기와 다른 사람이 함께 지은 것인가? 혹은 자기도 아니요 남도 아니며 인(因)이 없이 지어진 것인가?(老死自作耶? 為他作耶? 為自他作耶? 為非自非他無因作耶?)”라는 것이다.
니까야에서는 “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만드는 것인가? 늙음과 죽음은 남이 만드는 것인가? 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만들거나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우연히 생기는 것인가?”라고 되어 있다.
이 네 가지 질문은 나체고행자 깟사빠(Acelakassapa)가 붓다께 질문했던 내용과 동일하다.(SN12:17) 이것은 당시 상견론자(sassata-vāda), 단멸론자(uccheda-vāda), 일부영속론자(ekacca-sassatīka), 우연발생론자(adhicca-samuppannika)들의 주장이다.
첫째, “괴로움은 자기가 만드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붓다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왜냐하면 괴로움을 만드는 자가 자기라고 하면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상견에 빠지기 때문이다. 붓다는 자아라고 부를 만한 어떤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상견론자들은 오온을 벗어나 항상하고 있는 자아가 있다고 전제하고, 이 질문을 했기 때문에 붓다는 이 질문 자체가 옳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둘째, “괴로움은 남이 만드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붓다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이것은 상견론자들과는 반대로 괴로움을 만드는 자가 타자라고 하면 단멸론자들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셋째, “괴로움은 자기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붓다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왜냐하면 괴로움은 자기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한다면 일부영속론자들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넷째, “괴로움은 자기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기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붓다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이것은 우연발생론자들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러한 네 가지 질문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괴로움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치 두 개의 갈대 다발이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노사(老死)는 생(生)을 조건으로, 생(生)은 유(有)를 조건으로, … 취(取) … 애(愛) … 수(受) … 촉(觸) … 육입(六入) … 명색(名色) … 식(識) … 행(行) …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생긴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그 반대로 무명(無明)이 소멸하면 행(行)이 소멸하고,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노사(老死)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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