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32호(2015년 1월 16일자) 아함경 강의
‘모든 것은 있다’는 유견(有見) ‘모든 것은 없다’는 무견(無見)
혹은 상견(常見) 단견(斷見)은 삿된 견해임을 ‘십이연기’로 논파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지혜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괴로움이 생기면 생겼다고 보고, 괴로움이 소멸하면 소멸했다고 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말한 ‘바른 견해(正見)’라는 것이다
[원문]
(三○一) 如是我聞: 一時, 佛住那梨聚落深林中待賓舍. 爾時, 尊者[跳-兆+散]陀迦?延詣佛所, 稽首佛足, 退住一面, 白佛言: “世尊! 如世尊說正見, 云何正見? 云何世尊施設正見?” 佛告[跳-兆+散]陀迦?延: “世間有二種依, 若有·若無, ?取所觸; 取所觸故, 或依有·或依無. 若無此取者, 心境繫著使, 不取·不住·不計. 我苦生而生, 苦滅而滅, 於彼不疑·不惑, 不由於他而自知, 是名正見, 是名如來所施設正見. 所以者何? 世間集如實正知見, 若世間無者不有, 世間滅如實正知見, 若世間有者無有, 是名離於二邊說於中道, 所謂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謂緣無明行, 乃至純大苦聚集, 無明滅故行滅, 乃至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 尊者[跳-兆+散]陀迦?延, 聞佛所說, 不起諸漏, 心得解脫, 成阿羅漢.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나리(那梨) 마을의 깊은 숲 속에 있는 대빈사(待賓舍)에 계셨다.
그때 존자 산타가전연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바른 견해[正見]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것을 바른 견해라고 하며, 어떤 것을 세존께서 베풀어 설하신 바른 견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산타가전연에게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나니, 유(有)이거나 무(無)이다. 취함[取]에 부딪히고, 취함에 부딪히기 때문에 유(有)에 의지하거나 무(無)에 의지한다. 만일 이 취함이 없다면 마음이 경계에 얽매이는 번뇌를 취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며, 헤아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괴로움이 생기면 생겼다고 보고, 괴로움이 소멸하면 소멸했다고 보아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을 바른 견해라고 한다. 이것이 여래가 베풀어 설한 바른 견해이니라.
왜냐하면 세간의 발생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세간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알고 본다면 세간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을 두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즉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이 소멸하고 ……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존자 산타가전연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권12 제301경 <가전연경(迦?延經)>(T2, pp.85c-86a)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12:15 Kacc?yanagotta-sutta(SN Ⅱ, pp.16-17)이다. 아가마와 니까야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지만 일부 내용의 순서는 다르다.
이 경에 나오는 가전연은 깟짜나곳따(Kacc?nagotta) 혹은 깟짜야나곳따(Kacc?yanagotta)를 음사한 것이다. 이 경의 주인공인 산타가전연은 붓다의 수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하깟짜나(Maha-Kacc?na) 혹은 마하깟짜야나(Maha-Kacc?yana, 大迦?延)가 아니다. 이 깟짜야나곳따와 마하깟짜야나 존자를 구별하기 위해 ‘깟짜야나곳따’로 표기한 것 같다. 깟짜야나곳따는 당시 유명한 바라문 가문의 ‘깟짜나 족성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바라문 출신의 산타가전연이라는 제자가 붓다께 “어떤 것을 세존께서 베풀어 설하신 바른 견해(正見, samm?-di??hi)라고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붓다는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나니, 유(有)이거나 무(無)이다. 취함[取]에 부딪히고, 취함에 부딪히기 때문에 유(有)에 의지하거나 무(無)에 의지한다.”(T2, p.85c)고 답했다.
니까야에서는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음과 없음이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SN Ⅱ, p.17)고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있음(有)과 없음(無)’이란 붓다시대의 유견(有見, atthit?-di??hi)과 무견(無見, natthika-di??hi)을 뜻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상견(常見, sassata-di??hi)과 단견(斷見, uccheda-di??hi)이라고 부른다.
니까야에서 말한 ‘세상의 일어남(lokasamudaya)’이란 형성된 세상(sa?kh?ra-loka)의 생겨남(nibbatti)을 뜻한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지혜로 보는 자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형성된 세상에 대해서 법들이 생겨나는 것을 지혜로 보게 되면 없다는 단견(斷見, uccheda-di??hi)이 일어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세상의 소멸(loka-nirodha)’이란 형성된 것들의 부서짐(bha?ga)를 뜻한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형성된 세상에 대해서 법들이 부서지는 것을 지혜로 보게 되면 있다는 상견(常見, sassata-di??hi)이 일어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붓다는 가전연에게 “만일 이 취함이 없다면 마음이 경계에 얽매이는 번뇌를 취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며, 헤아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괴로움이 생기면 생겼다고 보고, 괴로움이 소멸하면 소멸했다고 보아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을 바른 견해라고 한다. 이것이 여래가 시설한 바른 견해이다.”(T2, p.85c)고 설했다.
위 경문을 분석해 보면, ‘취함에 부딪히고, 취함에 부딪히기 때문에(?取所觸 取所觸故)’ 유(有)에 의지하거나 무(無)에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집착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니까야에서는 ‘나의 자아다(att? me)’라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만일 [자아에 대한] 취함이 없다면 마음이 경계에 얽매이는 번뇌를 취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며, 헤아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바른 견해라는 것이다.
한편 니까야에서는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갈애와 사견으로 인해] 집착과 취착과 천착에 묶여 있다. 그러나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이 머무는 곳이요 천착하는 곳이요 잠재하는 곳인 그러한 집착과 취착을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고수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라는 데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SN Ⅱ, p.17)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유견과 무견에 빠지게 된다. 이를테면 “이 모든 세상은 있고 항상 존재한다는 삿된 견해에 빠진 자가 집착하는 견해가 ‘있다는 관념’이다. 반면 이 모든 세상은 없고 단멸한다는 삿된 견해에 빠진 자가 집착하는 견해가 ‘없다는 관념’이다.”(SA?.ii.32)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지혜로 사물의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괴로움이 생기면 생겼다고 보고, 괴로움이 소멸하면 소멸했다고 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말한 ‘바른 견해(正見)’라는 것이다.
이어서 붓다는 가전연에게 “왜냐하면 세간의 발생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세간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알고 본다면 세간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을 두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T2, p.85c)고 설했다.
니까야에서는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SN Ⅱ, p.17)고 되어 있다.
이처럼 붓다는 당시의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주장했던 유견과 무견 혹은 상견과 단견은 삿된 견해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붓다는 언제나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법을 설한다고 강조했다. 붓다가 말한 중도란 연기법(緣起法) 혹은 십이연기(十二緣起)이다. 이 경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자.
붓다는 가전연에게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즉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이 소멸하고 ……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느니라.”(T2, p.85c)고 설했다.
니까야에서는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이 소멸하고, ……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SN Ⅱ, p.17)고 설해져 있다.
그런데 아가마에서는 연기의 공식인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는 대목이 언급되어 있지만, 니까야에서는 생략되었다. 그러나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다. 두 전승 모두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중도(中道)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의 핵심은 연기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의 유견과 무견은 잘못된 견해로써 바른 견해(正見)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경에서 붓다는 ‘모든 것은 있다’는 유견(有見)과 ‘모든 것은 없다’는 무견(無見) 혹은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은 삿된 견해임을 십이연기로 논파하고 있다. 연기법에 따르면, ‘세상의 일어남’은 십이연기의 순관(順觀), 즉 유전문(流轉門)이고, ‘세상의 소멸’은 십이연기의 역관(逆觀), 즉 환멸문(還滅門)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건이라는 세상의 의지처를 보는 자는 조건들이란 단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일어난 것은 단멸하지 않음을 본다. 그래서 그에게는 없다는 단견이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조건들의 소멸을 보는 자는 조건들이란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일어난 것의 소멸을 본다. 그래서 그에게는 있다는 상견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뜻이다.”(SA?.ii.32-33)
초기불교의 중도사상은 두 가지 측면, 즉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교리가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팔정도로서의 실천행이고, 다른 하나는 십이연기로 대변되는 사상적 이론으로서의 중도설이다.
여기서 살펴본 ?가전연경?을 비롯한 ??상윳따 니까야(相應部)??에서 ‘유무중도(有無中道)’(SN II, p.17) 혹은 ‘단상중도(斷常中道)’(SN II, p.38)를 설하고 있지만, 이것은 당시의 유견(有見, atthit?-di??hi)과 무견(無見, natthika-di??hi), 혹은 상견(常見, sassata-di??hi)과 단견(斷見, uccheda-di??hi)을 극복하기 위해 연기의 이치를 설한 것이다. 그리고 ?전법륜경?에서 ‘고락중도(苦樂中道)’(Vin I, p.10)를 설한 것은 팔정도라는 실천행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팔정도로서의 실천행보다는 두 극단적인 견해를 극복하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하는 연기중도(緣起中道)로 치우쳐 버렸다. 이것은 팔정도를 방법론이 아닌 목적론으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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