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비구경(十六比丘經)
[원문]
(三六) 如是我聞 : 一時, 佛住摩偷羅國跋提河側傘蓋菴羅樹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 “住於自洲, 住於自依 ; 住於法洲, 住於法依 ; 不異洲不異依. 比丘! 當正觀察, 住自洲自依, 法洲法依, 不異洲不異依. 何因生憂悲惱苦? 云何有四(因)? 何故何繫著? 云何自觀察未生憂悲惱苦而生, 已生憂悲惱苦生長增廣?” 諸比丘白佛 : “世尊法根 ․ 法眼 ․ 法依, 唯願為說! 諸比丘聞已, 當如說奉行.” 佛告比丘 : “諦聽! 善思! 當為汝說. 比丘! 有色, 因色繫著色, 自觀察未生憂悲惱苦而生, 已生而復增長廣大 ; 受 ․ 想 ․ 行 ․ 識亦復如是. 比丘! 頗有色常恒 ․ 不變易 ․ 正住耶? 答言 : “不也, 世尊!” 佛告比丘 : “善哉! 善哉! 比丘! 色是無常. 若善男子知色是無常已(苦) ․ 變易, 離欲 ․ 滅 ․ 寂靜 ․ 沒. 從本以來, 一切色無常 ․ 苦 ․ 變易法知已, 若色因緣生憂悲惱苦斷, 彼斷已無所著, 不著故安隱樂住, 安隱樂住已, 名為涅槃 ; 受 ․ 想 ․ 行 ․ 識亦復如是.” 佛說此經時, 十六比丘不生諸漏, 心得解脫.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마투라국(摩偸羅國)의 발제하(跋提河)가에 있는 일산(日傘) 같은 암라수원(菴羅樹園)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자기라는 섬[自洲]에 머무르고 자기라는 귀의처[自依]에 머무르며, 법이라는 섬[法洲]에 머무르고 법이라는 귀의처[法依]에 머무르며, 다른 섬이나 다른 귀의처에 머무르지 말라.
비구들이여, 마땅히 바르게 관찰하여 자기라는 섬과 자기라는 귀의처에 머무르고, 법이라는 섬과 법이라는 귀의처에 머무르며, 다른 섬에 머무르거나 다른 귀의처에 머무르지 말라. 무엇이 원인이 되어 근심 ․ 슬픔 ․ 번민 ․ 괴로움이 생기는가? 어떻게 이 네 가지가 있게 되는가? 무엇 때문에 또 어떻게 얽매이게 되고, 아직 생기지 않은 근심 ․ 슬픔 ․ 번민 ․ 괴로움이 생기고 이미 생긴 근심 ․ 슬픔 ․ 번민 ․ 괴로움이 더욱 자라는 것을 어떻게 스스로 관찰하는가?”
비구들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요, 법의 눈이며, 법의 의지처이십니다. 원하옵건대 말씀하여 주시면 저희들은 듣고 나서 말씀대로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자세히 듣고 잘 사유하라. 내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리라. 비구들이여, 색이 있어 색을 인연하고, 색에 얽매이기 때문에 ‘아직 생기지 않은 근심 ․ 슬픔 ․ 번민 ․ 괴로움이 생기고, 이미 생긴 것들은 더욱 자라고 커진다’고 관찰하라. 수 ․ 상 ․ 행 ․ 식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비구들이여, 혹 항상하고 변하거나 바뀌지 않으며 바르게 머무르는 색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비구들이여, 색은 무상하다. 만일 선남자가 ‘색은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것으로서 탐욕을 떠나고, 없애며, 고요하게 하고, 사라지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안다면, 본래부터 모든 색은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인 줄 안 뒤에는 혹 색을 인연하여 근심 ․ 슬픔 ․ 번민 ․ 괴로움이 생겼더라도 그것은 끊어지고, 그것이 끊어진 뒤에는 집착할 것이 없게 되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안온한 즐거움에 머무르고, 안온한 즐거움에 머무르게 되면 그것을 열반이라 하나니, 수 ․ 상 ․ 행 ․ 식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셨을 때, 십육비구는 모든 번뇌[漏]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였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권2 제36경 「십육비구경(十六比丘經)」(T2, p.8a-b)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22:43 Attadīpa-sutta(SN Ⅲ, pp.42-43)이다. 이 경의 핵심은 자기에게 귀의하고[自歸依], 법에 귀의하며[法歸依], 자기의 섬[自洲]에 귀의하고, 법의 섬[法洲]에 귀의하라는 가르침이다.
특히 이 경에 나오는‘자귀의 법귀의’ 혹은 ‘자주(自洲) 법주(法洲)’는 매우 유명한 정형구이다. 이 정형구는 불교가 자력주의 종교임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된다. 그러면 부처님은 왜 자기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고 설했는가? 그것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쌓임, 즉 오온(五蘊)은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십육비구경>에 대응하는 ≪상윳따 니까야≫의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비구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비구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 자들은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은 무엇으로부터 생기고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라고 그 근원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이와 같이 빨리 경전의 내용은 한역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이른바 자기 자신과 법에 귀의하고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온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오온에 대한 집착은 모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온에 대해 집착하지 않으면 안온한 즐거움인 열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지 않으면, ‘근심 ․ 슬픔 ․ 번민 ․ 괴로움’이 생기게 된다. 이 ‘근심 ․ 슬픔 ․ 번민 ․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이 ‘나[我]’이고 ‘나의 것[我所]’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오온이 집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어리석은 범부들은 오온(五蘊)의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서 온갖 ‘근심 ․ 슬픔 ․ 번민 ․ 괴로움’이 생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안온한 즐거움, 즉 열반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하면서 명료한 붓다의 가르침이다.
이 경에서는 ‘자기의 섬[自洲]에 귀의하고, 법의 섬[法洲]에 귀의하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한역 경전에서는 이 대목을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빨리어 ‘디빠(dīpa)’라는 단어가 ‘등불(lamp)’과 ‘섬(island)’이라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긴 혼란이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이때의 디빠(dīpa)는 ‘섬’으로 번역해야 한다.[이수창(마성), <自燈明 法燈明의 번역에 대한고찰>, ≪불교학연구≫ 제6호(2003), pp.157-184] 여기서 말하는 ‘자기의 섬[自洲]’는 거센 폭류에 휩쓸리지 않고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피난처’ 혹은 ‘의지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 부부는 영어로 번역한 <전륜성왕사자후경>의 각주(脚註)에서 “Dīpa는 등불 혹은 섬을 뜻하는데, 대양 가운데의 섬은 그 자체가 굳은 땅[육지]가 됨으로 붓다고사는 여기서 섬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한다.”[T. W. & C. A. F. Rhys Davids, tr. Dialogues of the Buddha, (London: PTS, 1921), Part Ⅲ, p.59 no.3]고 해석했다.
그러면 붓다는 본래 ‘attadīpa’와 ‘dhammadīpa’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을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경전이 ≪상윳따 니까야≫(SN42:7)에 나오는 ‘들판 비유 경(Khettupama- sutta)’이다. 이 경에서 붓다는 “이와 같이 가마니야, 저 밭들 중 최고의 밭은 바로 나(=세존)의 비구 비구니들이다. 그들에게 나는 법을 설하니 처음도 좋고 가운데도 좋고 끝도 좋으며, 의미와 문장을 갖춘 온통 충족되고 순결한 범행(梵行)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가마니야, 실로 이들은 나를 섬(洲)으로 삼고, 나를 동굴(洞窟)로, 나를 피난처(避難處)로, 나를 귀의처(歸依處)로 삼아 머물게[住]하기 때문이다.”[SN Ⅳ, p.315]고 설했다.
이와 같이 붓다는 dīpa(洲) ․ leṇa(洞窟) ․ tāṇa(避難處) ․ saraṇa(歸依處)를 동의어(同義語)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동의어들은 모두 어떤 구체적인 장소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추상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등불(lamp)의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붓다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이 세상에서 의지할 만한 대상은 본래 없다고 설했다. 나(我)라고 주장하는 것도 분석해 보면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허구에 불과하며, 모든 현상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해 가고 있다.
따라서 절대 불변의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붓다는 “자기 자신을 섬이나 피난처 ․ 구호소 ․ 귀의처로 삼아야 하며, 법을 섬이나 피난처 ․ 구호소 ․ 귀의처로 삼아야지 별도의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설했던 것이다.
그러면 자기 자신과 법을 섬이나 피난처 ․ 구호소 ․ 귀의처로 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붓다는 ≪상윳따 니까야≫의 <자주경(自洲經)>에서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놓았다. 그것이 바로 ‘사념처관(四念處觀)’이다. 사념처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네 가지 염처(念處) 혹은 마음챙김을 말한다. 즉 ⑴ 신념처(身念處)는 몸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것이고, ⑵ 수념처(受念處)는 느낌이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것이다. ⑶ 심념처(心念處)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것이고, ⑷ 법염처(法念處)는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身) ․ 수(受) ․ 심(心) ․ 법(法)의 수행을 통해 스스로 아라한과 혹은 열반을 증득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귀의 법귀의’의 가르침에는 붓다(Buddha) ․ 담마(Dhamma) ․ 상가(Saṅgha) 외에는 그 어디에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담겨있다. 사실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 불 ․ 법 ․ 승 삼보뿐이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기복신앙이 발붙일 틈이 없다.
그런데 한역에서는 이 경을 붓다가 마투라국(摩偸羅國)의 발제하(跋提河)가에 있는 일산(日傘) 같은 암라수원(菴羅樹園)에 계실 때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투라국(摩偸羅國)은 마두라(Madhurā)를 음사한 것이다. 마두라는 야무나(Yamunā)에 위치한 수라세나(Surasena)의 수도였다. 그러나 니까야에서는 사왓티(Savatthi)의 제따와나(Jetavana)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실 때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불교고유명사사전>에서는“붓다가 마두라를 방문하였으나 그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없다.”[DPPN Ⅱ, p.438]고 되어 있다. 니까야에서 마두라에서 설한 경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쪽의 내용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이 경에 나오는 ‘십육비구’는 나중에 ‘십육 아라한’으로 신앙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 한국불교신문(http://www.kbulgy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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