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
아지라경(阿支羅經)
[원문]
(三○二) 如是我聞: 一時, 佛住王舍城耆闍崛山. 爾時, 世尊晨朝著衣持缽, 出耆闍崛山, 入王舍城乞食. 時, 有阿支羅迦葉為營小事, 出王舍城, 向耆闍崛山, 遙見世尊. 見已, 詣佛所, 白佛言:“瞿曇! 欲有所問, 寧有閑暇見答與不?” 佛告迦葉: “今非論時, 我今入城乞食, 來還則是其時, 當為汝說.” 第二亦如是說, 第三復問: “瞿曇! 何為我作留難? 瞿曇! 云何有異? 我今欲有所問, 為我解說.” 佛告阿支羅迦葉:“隨汝所問.” 阿支羅迦葉白佛言:“云何? 瞿曇! 苦自作耶?” 佛告迦葉: “苦自作者, 此是無記.” 迦葉復問: “云何? 瞿曇! 苦他作耶?” 佛告迦葉: “苦他作者, 此亦無記.” 迦葉復問: “苦自他作耶?” 佛告迦葉: “苦自他作, 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 瞿曇! 苦非自非他無因作耶?” 佛告迦葉: “苦非自非他, 此亦無記.” 迦葉復問:“云何無因作者? 瞿曇! 所問苦自作耶?” 答言: “無記.” “他作耶? 自他作耶? 非自非他無因作耶?” 答言:“無記.”“今無此苦耶?” 佛告迦葉: “非無此苦,然有此苦.” 迦葉白佛言: “善哉! 瞿曇! 說有此苦, 為我說法, 令我知苦見苦.” 佛告迦葉:“若受即自受者, 我應說苦自作, 若他受他即受者, 是則他作, 若受自受他受,復與苦者. 如是者自他作, 我亦不說, 若不因自他, 無因而生苦者, 我亦不說. 離此諸邊, 說其中道, 如來說法,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謂緣無明行, 乃至純大苦聚集,無明滅則行滅, 乃至純大苦聚滅.” 佛說此經已, 阿支羅迦葉遠塵離垢, 得法眼淨. 時,阿支羅迦葉見法․ 得法․ 知法․ 入法, 度諸狐疑, 不由他知․ 不因他度, 於正法․ 律心得無畏, 合掌白佛言: “世尊! 我今已度, 我從今日, 歸依佛․ 歸依法․ 歸依僧, 盡壽作優塞, 證知我.” 阿支羅迦葉聞佛所說,歡喜隨喜, 作禮而去. [이하 생략]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기사굴산에서 나와 왕사성으로 들어가 걸식하셨다.
이때 아지라가섭(阿支羅迦葉)이 작은 볼 일이 있어 왕사성을 나와 기사굴산으로 향하다가 멀리서 세존을 뵙게 되었다. 세존을 뵙고는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瞿曇)이시여, 여쭐 일이 있는데 혹 한가하다면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나는 지금 걸식하러 성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걸식하고 돌아오면 그때 그대를 위해 설명해 주리라.”
두 번째도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는 세 번째로 다시 물었다.
“구담이시여, 어찌하여 저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을 미루십니까? 구담이시여,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제가 지금 물을 것이 있습니다. 저를 위해 해설하여주소서.”
부처님께서 아지라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대로 물어라.”
아지라가섭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습니까? 구담이시여, 괴로움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괴로움은 자기가 지은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무기(無記)이니라.”
가섭이 또 여쭈었다.
“어떻습니까? 구담이시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하면 그것도 또한 무기이니라.”
가섭이 또 여쭈었다.
“괴로움은 자기와 다른 사람이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괴로움은 자기와 남이 지은 것이라고 하면 그것도 또한 무기이니라.”
가섭은 다시 여쭈었다.
“어떻습니까? 괴로움은 자기도 남도 아닌 인(因)이 없이 지어진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괴로움은 자기도 남도 아닌 인이 없이 지어진 것이라고 하면 그것도 또한 무기이니라.”
가섭이 다시 물었다.
“왜 인이 없이 지어진 것이라고 하십니까? 구담이시여, ‘괴로움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하고 물어도 무기라고 대답하시고, ‘남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와 남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도 남도 아닌 인이 없이 지어진 것입니까?’ 하고 물어도 모두 무기라고 대답하시니, 그러면 저 괴로움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이 괴로움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괴로움은 있는 것이다.”
가섭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훌륭하십니다. 구담이시여, 이 괴로움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위해 설법하시어 저로 하여금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을 보게 하소서.”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느낌이 곧 자기가 느끼는 것이라면‘괴로움은 자기가 짓는 것이다.’라고 나는 당당하게 설명하리라. 만일 남이 느끼고 남이 곧 느끼는 이라면 그것은 곧 남이 짓는 것이다. 만일 그 느낌이 자기도 느끼고 남도 느끼는 것으로서 다시 괴로움을 준다면 이러한 것은 자기와 남이 짓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자기와 남을 인하지 않고 인이 없이 괴로움이 생긴다고도 나는 또한 말하지 않는다. 이 모든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를 설명하나니, 여래는‘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고 설법하느니라. 이른바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아지라가섭은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 법안(法眼)이 깨끗해졌다.
이때 아지라가섭은 법을 보고, 법을 얻고, 법을 알고, 법에 들어가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 남을 의지하지 않고 알고, 남을 의지하지 않고 제도되어, 바른 법(法)과 율(律)에서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는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제도되었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우바새가 되겠습니다. 저를 증명하여 알아주소서.”
아지라가섭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이하 생략]
[해석]
이 경은 ≪아지라경(잡아함경)≫ 권12 제302경 <阿支羅經>(T2, p.86a-b)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12:17 Acelakassapa-sutta(SN Ⅱ, pp.18-22)이다. 이 경의 이름인 ‘아지라(阿支羅)’는‘아쩰라 깟사빠(Acela-kassapa, 阿支羅迦葉)’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쩰라(acela)는 옷을 입지 않은 알몸 상태, 즉 나체(裸體)라는 말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이러한 나체수행자를 나형외도(裸形外道)라고 호칭했다. 아쩰라 깟사빠는 ‘깟사빠’라는 바라문 종족 출신의 나체수행자라는 뜻이다. 붓다시대에는 다섯 부류의 고행주의자들이 있었다. 즉 결발외도(結髮外道, jaṭilā), 자이나교도(nigaṇṭha), 나형외도(裸形外道,acelakā), 일의외도(一衣外道, ekasāṭakā), 편력외도(遍歷外道, paribbājakā) 등이다.나형외도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붓다는 이른 아침 걸식을 위해 기사굴산에서 왕사성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나체수행자가 길을 막고 붓다께 질문할 것이 있다고 요청했다. 그러자 붓다는 지금은 때가 아니기 때문에 질문에 답해 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체수행자는 막무가내로 붓다께 질문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대화가 이 경의 내용이다. 그런데 아가마와 니까야를 비교해보면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한역 <아지라경>에서는 붓다께서 왕사성(王舍城, Rājagaha) 기사굴산(耆闍崛山, Gijjhakūṭa, 靈鷲山)에 계시다가 걸식을 위해 왕사성으로 들어올 때, 아지라가섭(阿支羅迦葉)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T2p.86a, “一時, 佛住王舍城耆闍崛山. 爾時, 世尊晨朝着衣持鉢, 出耆闍崛山, 入王舍城乞食.”)그러나 니까야에서는 세존께서 라자가하(Rājagaha)의 웰루와나(Veḷuvana, 竹林)에 있는 깔란다까니와빠(Kalandakanivāpa, 迦蘭陀迦園=竹林精舍)에 계시다가 걸식을 위해 라자가하로 들어왔을 때, 아쩰라 깟사빠(Acela-kassapa)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SN Ⅱ, pp.18-19)
둘째, 한역에서는 아지라가섭이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삼보에 귀의하여 우빠사까(upāsaka, 優婆塞)가 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한역 <아지라경>에서는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제도되었나이다. 저는 오늘부터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승가에 귀의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우빠사까(upāsaka, 優婆塞)가 되겠습니다. 저를 증명하여 알아주소서.”(T2 p.86a,“世尊! 我今已度, 我從今日, 歸依佛․ 歸依法․ 歸依僧, 盡壽作優婆塞, 證知我.”)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니까야에서는 그가 이미 출가한 고행주의자였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아쩰라 깟사빠는 붓다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구족계 받기를 원했다. 그러자 붓다는 이전에 이교도였던 자가 구족계를 받기 위해서는 넉 달간의 견습기간이 필요하지만, 곧바로 구족계를 줄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아쩰라 깟사빠는 넉달간의 견습기간을 마치고 나중에 구족계를 받았다.(SN Ⅱ, p.21) 그 후 그는 붓다가 설한 십이연기의 이치를 터득하여 아라한과를 성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셋째, 한역의 <아지라경>에서는 그가 붓다의 설법을 듣고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아 송아지를 보호하는 암소한테 떠받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역경(譯經)하는 과정에서 착간(錯簡)에 의해 여기에 끼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맛지마 니까야(中部)>>의 <>에 나오는 뿍꾸사띠(Pukkusāti)의 일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모두 생략했다.
나체수행자 깟사빠가 붓다께 질문한 것은 네 가지인데, 이에 대해 붓다는 답변하지 않았다. 이 네 가지 질문은 붓다시대 외도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네 가지 질문은 모두 자아(自我)와 관련된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괴로움은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은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하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괴로움을 상정하여 ‘괴로움은 자기가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상견(常見, sassatavāda)에 떨어지고 만다.
둘째, “괴로움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은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느낌에 압도된 자가 ‘괴로움은 남이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단견(斷見, ucchedavādā)에 떨어지고 만다.
셋째, “괴로움은 자기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은 일부영속론자(ekacca-sassatikā)의 견해이다. 붓다는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라는 설법을 통해 이 일부영속론을 물리쳤다.
넷째, “괴로움은 자기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기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은 우연발생론자(adhicca-samuppannikā)의 견해이다. 붓다는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이 있다’는 것을 통해 이 우연발생론을 물리쳤다.
이와 같이 붓다는 상견과 단견을 떠난 중도(中道)에 의거해 연기법(緣起法), 즉“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고 가르쳤다.
다시 말해서 괴로움은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며,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며, 우연히 생기는 것도 아니다.그것은 오직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한다.
반대로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출처 : 한국불교신문(http://www.kbulgy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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