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대도가 맑고 깊어 허공 경계를 어찌 사랑하겠는가? - 설우스님

수선님 2021. 6. 20. 11:04

올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말하면 삿된 법이 다 바른 법이 되지만 삿된 자가 바른 법을 이야기하면 바른 법도 모두 다 삿된 법이라 강북에서 탱자 모습 강남에선 귤이 되니 봄이 옴에 모두 함께 화사한 꽃 피우노라. 왜냐하면 현자와 성인은 모두 無爲法으로 여러 가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털끝만치 차이라도 있게 된다면 하늘과 땅 사이만큼 벌어지나니

 

正法의 안목을 갖춘 사람은 저자거리에서 콩나물을 팔아도 바른 도리를 드러내는 수행이 된다. 무엇보다 원력이 중요하다. 動 가운데 靜을 정 가운데 동을 받아들이는 일은 정법의 안목을 갖출 때 가능하다.

강북의 탱자 강남의 귤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제나라 안영이란 사람이 초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초나라 왕과 대화 중 마침 제나라 도둑이 잡혔다. 제나라 사람은 도적질을 잘 하는가? 왕께서는 강남의 귤나무를 옮겨다 강북 땅에 심으면 귤이 안 되고 탱자가 되는 이치를 모르십니까? 꽃잎 하나하나 따며 분석해서 여기 봄이 있구나 하고 봄을 규정할 수 있나? 그냥 봄은 봄이다. 본래 우리는 그냥 성불되어 있고 그냥 문수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依法出生分 부처님과 깨달음이 모두 이 경에서 나왔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를 7가지 보배로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장로 수보리가 말하였다. 참으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성품이 아니니 이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끔하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이나 이 가르침 속에 있는 4구절의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 뜻을 일러준다면 그 복덕은 삼천대천세계를 6가지 보배로 가득 채워 보시한 복덕보다도 더 뛰어날 것이다.

 

만들어 이룬 有漏福이기 때문에 많다 한 것이다. 보시 선행은 탐진치를 비우는 空의 세계를 말하는 金剛經의 4구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 말하니 중생은 또 욕심에 눈이 멀어 자기 소견대로 4구게에 집착한다. 그래서 正見을 먼저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물질적 만족은 분명히 있다. 여기서 말하는 4구게는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정신적으로 안정이 안 되면 마음 문제가 아니냐는 뜻이다. 물질적인 복도 크지만 한계가 있다. 한계가 없는 세계로 들어가려면 정신세계도 같이 따라가야 한다. 양족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을 兩足尊이라 하는 것이다.

 

金剛經의 뜻이 원만하게 잘 구족되어 있는 구절이 4구게다. 4구게 가운데서도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은 양족을 가장 잘 갖춘 구절이다. 受持讀誦은 5온이 空하니 無我임을 알고 無住를 일상에서 자기화시켜 쓰는 것이다. 금강경의 본래 뜻은 無求無相 밖으로 구하지도 않고 형상에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다. 自業自得 自作自受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다.   

 

부처님의 일은 무심에서 이루어진다.

물질적 복덕이 마음의 복덕은 아니다. 마음의 복덕성은 문수지혜를 말하며 보현행원이 복덕성이다. 문수와 보현은 하나다. 보시는 복덕은 많으나 나의 本性과는 다르다. 물질이 완전히 나의 행복이 되려면 문수지혜의 도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세간복은 有漏福이지만 출세간복은 無漏福이다. 그래서 6신통 중에도 漏盡通이 먼저 열려야 한다. 자유자재로 번뇌를 끊어버리는 누진통이 열리지 않은 5신통은 모두 邪法이다. 無心 無住 無我 無念 諸法을 非相으로 보는 것이 누진통이다. 우리 이대로 완전한 부처라는 사실을 항상 觀照하고 확신하면서 금강경도 다독하는 것이다. 고정관념의 我相을 갖고 금강경 읽으면 천 년 만 년을 읽어도 소용이 없다.

 

삼천세계 가득 채운 보배로써 보시해도 받는 복은 인간 하늘 그 자리서 멈추리니 복덕 본디 그 성품이 없다는 걸 알았다면 본지풍광 사는 데 돈을 쓰지 않으리라.

조작이 없는 문수지혜와 중생을 연민하는 관음의 자비와 보현의 광대한 원력의 6바라밀 수행은 本性을 드러내는 일이다. 無相 無我 無住를 성찰하면서 기도 염불 화두 좌선하는 일이 다 本地風光의 일이다. 줄 없는 거문고다. 衆生心으로 타는 거문고가 아니다. 줄 없는 거문고는 그림자 없는 無影樹다. 기도 염불 참선이 다 태평가 부르는 소리다. 겁 밖의 소식이다.

선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풍류가 없는 곳에 내가 풍류를 더할 것이요 멋이 없는 곳에 내가 멋을 더할 것이다. 세속적인 것이 없는 곳에 無住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참된 속 멋이다. 겉 멋은 별 것 아니다. 속 멋은 살면서 고생하며 두루두루 경험하고 챙기는 것이 속 멋이다.

 

무슨 까닭이겠느냐? 수보리야! 시방세계 부처님과 그분들의 깨달음이 모두 이 가르침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한번 일러 보아라. 이 경은 어디에서 나왔는고? 수미산 정상이요 큰 파도 한 가운데라.

5온이 空한 자리가 수미산 정상이다. 6진경계로 받아들이는 衆生心이 다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면 그것이 수미산 정상이다. 문수지혜 그대로 자기화 인격화시켜 일상의 삶을 사는 것을 큰 파도 한 가운데 일로 비유하고 있다.

 

부처님과 조사스님 자비로써 방편 설해 말씀마다 이 경전에 근거하여 가르치니 이 경전이 나온 곳이 어디인 줄 알겠는가? 문득 허공 가운데로 무쇠배를 타고 가리. 부디 잘못 알지 말지어다.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하는 모든 것이 다 우리의 本性에서 나온다. 그러니 이 經은 어디서 나왔나? 묻는다면 다 우리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중생심이 아니고 5온이 공한 우리의 문수지혜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허공 가운데 무쇠배라. 알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부처님 말씀은 항상 경전에 근거하여 나온다. 부처님 말씀을 나의 衆生心에 맞춰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 하면 자신의 고정관념이 부처가 된다.  제대로 알면 그림자 없는 無影樹라 파도 모양이 천 가지 만 가지인들 모두 허상이고 본 고향은 바닷물인 것을 아는 것이다.

 

5온이 空한 자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런 사람은 執着이 없다. 집착이 없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다. 집착이 없기 때문에 줄 없는 거문고도 탈 수 있고 구멍 없는 피리도 분다. 자기 業識의 틀이 정해져 있으면 줄 있는 거문고가 된다. 그러나 5이 공한 줄 알면 줄 없이도 풍류가 나온다. 대나무 그림자가 뜰을 쓸면 먼지 하나 일지 않고 흔적도 없다. 이것이 無爲法이다. 그래서 금강경은 최상근기가 보는 경이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동산이 물 위를 걸어간다. 부처의 세계를 바로 실현하라고 열어주는 것이 話頭 공안이다. 이걸 모르니 가지고 가 양파껍질을 벗기고 있는 것이다. 본래 우리의 마음이 無住임을 아는 사람은 집착이 없기 때문에 흔적이 없이 쓴다.

 

수보리야! 이른바 부처님의 법이라 집착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법이 아니니라.

 

꿀맛이 나는 과일을 그대의 쓰디 쓴 박나물과 바꾼다.

반은 쓰고 반은 달은 것이 아니다. 쓴 것은 꼭지까지 쓰고 단 것은 꼭지까지 달다. 단 것은 전체가 달고 쓴 것은 전체가 쓰다는 말은 諸相이 非相이고 비상이 제상이라는 말이다. 둘이 아니다. 보현행원 그대로 문수지혜요 문수지혜 그대로 보현행원이다.

諸相과 非相 眞空과 妙有 번뇌와 보리는 둘이 아니다. 바꿔도 상관없다. 衆生心은 바꾸면 손해 가고 이익 보는 일이 있지만 本性자리에서 법을 쓸 때는 보현행원과 문수지혜를 바꾸든 안 바꾸든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5온이 공한 無我이기 때문이다. 이 무위법을 선가에서 本地風光 太平歌 沒踪迹이다 여러 이름으로 부르지만 뜻은 한 가지다.  

 

부처님의 법은 정해진 법이 아니어서 풀어줄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으며 놓아줄 수도 있고 거둘 수도 있으며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느니라. 눈썹 사이 언제나 백호광명 빛나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보살님께 묻는구나.

부처님의 無有定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임제스님은 때로는 사람도 살리고 경계도 살린다고 말씀하셨다. 本性은 그대로 놓고 경계는 空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은 살리고 경계를 빼앗기도 하고 때로는 경계는 살리고 사람을 빼앗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有生有殺 사람도 살리고 경계도 살린다. 모든 것을 다 살려낸다. 그런가 하면 殺活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죽인다. 모두 죽이는 일은 5온이 공한 자리인 無我 無住를 말하며 모두 살리는 일은 보현행원을 말한다. 화엄경은 이것을 理法界 事法界 理事無碍法界 事事無碍法界로 표현한다. 말만 다르지 다 같은 뜻이다.

17회. 설우스님. 대도가 맑고 깊어 허공 경계를 어찌 사랑하겠는가? 중에서

 

 

 

 

 

 

 

[출처] 816.대도가 맑고 깊어 허공 경계를 어찌 사랑하겠는가?|작성자 Inkf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