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선문답(禪問答)이란?

수선님 2021. 6. 20. 11:59

선문답(禪問答)이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 혹은 선종(禪宗)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승들끼리 이루어지는 독특한 대화이다.

 즉문즉답(卽問卽答)으로 이루어지며,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사량 분별심이나 알음알이 지식에서 나온 대답이므로

 

응축된 선어(禪語)라 할 수 없다.

선문답은 기본적으로 1문1답으로, 두세 번에서 그치며, 여러 차례 진행되지 않는다.

고도의 선(禪)지식이 있는 스님과 제자가 맞상대를 할 때

가끔 의중을 엿보기 위해 선문답으로 말을 걸기도 한다. 그래서 화두(話頭)라고도 한다.

화두란 불가의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구(參究)하는 문제를 뜻하는 말이다.

수행자끼리 혹은 스승과 제자 사이 주고받는 문답형식의 대화.

다른 말로는 법거량(法擧量) 혹은 법담(法談)이라고도 한다.

논리나 상식, 지식을 초월한 직관적이고도 역설적인 대화로서,

이런 방식을 통해 선리(禪理)를 드러내고, 지고(至高)의 깨달음에 이른다.

 

예로부터 선사들의 한 마디 언행은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되게 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살아있는 법문이었다.

 

선문답은 옛 선사들이 수행자를 깨닫게 하는 언행(말, 고함치기, 몽둥이질 등)일 뿐만 아니라

그 언행 자체에 깊은 진리와 지혜가 응결돼 있어서

말끝에 단박 깨달으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할 것이요,

깨닫지 못한다면 화두(話頭)가 되는 것이다.

선문답은 탈 상식, 초 논리의 대화이다.

상식적인 대화로는 관념의 벽을 무너뜨릴 수 없다.

역설적 비약적인 방법이라야 백년, 천년 묵은 관념의 벽이 무너진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이나 지식, 논리를 초월한 것일 뿐,

선문답에도 나름대로 고유한 논리와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은 공(空), 중도(中道), 불이(不二), 일여(一如), 무심(無心), 무집착(無執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등으로, 여기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잡담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들으면 비약이 심해 뭐가 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선문답의 유래는 붓다가 영산설법(靈山說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이 그 뜻을 알았다[염화시중(拈花示衆)=염화미소(拈華微笑)]

하는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말을 통하지 않고 통하는 진리 또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문자를 세울 수 없는 진리를 종지(宗旨)로 삼는 선종(禪宗)에서는

화두(話頭)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선문답을 중시하는 선종의 태도 기저에는 언어기호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담겨있다.

 

해탈의 경지는 도저히 언어를 통해서 밝힐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적인 언어의 소통관계를 해체하고 전복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유형으로

선문답이 태생하게 된 것이다.

 

 

 

※영산설법(靈山說法)---영산(靈山)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불교의 대표적인 성지이다.

고대 중인도에 있던 마가다국(摩竭陀國, magadha國)의 도읍지인

라자그리하(왕사성/王舍城, 현재의 비하르주 라지기르)에서 동북쪽 약 3㎞ 지점에 있는 산.

정상에 있는 검은 바위의 모양이 마치 독수리 같으므로 축 혹은 취(鷲)라 한다.

붓다가 살아 계실 때 영축산에서 최후 십여 년 동안 법을 설했다고 한다.

붓다 일생 중 법력을 가장 활발하게 널리 펴실 무렵이었다.

 

그리고 선문답의 유래에 대해 또 달리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즉, 중국 당대 승려 협산 선회(夾山善會, 805~881)의 일화에서 유래했다는 의견이다.

협산선사는 하남성 한광(漢廣) 현정(峴亭) 출신으로 속성은 요(廖)씨이며, 법명은 선회(善會)이다.

말 재주가 있고 총명하며 매우 진중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도성(都城) 근처에서 법을 전하다가 나중에 노승 도오 종지(道吾宗智)의 지시로

화정(花亭)선사의 문하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어

그의 법을 잇고 협산에 들어가 밭을 일구며 수행하다가 77세의 나이로 입적한 고승이다.

그런 협산에게 한 승려가 물었다.


 

“큰스님, 어떤 것이 협산의 경계(境界)입니까?” 그러자, 협산이 대답했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푸른 산 뒤로 돌아가고,

새는 푸른 바위 앞으로 꽃을 물고 온다(猿抱兒歸靑?後, 鳥啣花落碧巖前).”

보통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 질문도 난해하고, 대답도 엉뚱하게 보인다.

그런데 두 사람은 ‘협산의 경계(境界)’라는 의미를 각기 달리 새겼다.

그리고 그런 물음과 대답이 나온 배경은 다음과 같다.

당시 협산은 영천선원(속칭 협산사)에 불법을 펴고 있었다.

승려가 협산의 경계를 물은 것은 협산이라는 산의 경치가 어떠한가 하는 풍경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고,

협산 선회가 얻은 깨달음의 경지가 어느 정도이냐 하는 것을 물은 것이다.

헌데 협산은 이에 대해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히려 협산의 경치를 이야기하며,

 산의 아름다운 풍경처럼 자연과 하나가 돼 살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동문서답인가? 그렇지는 않다. “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푸른 산 뒤로 돌아가고 새는 푸른 바위 앞에서 꽃을 물고 온다.”

​고 하는 이 대답은

​겉으로는 평범하게 협산의 경치를 말한 듯하지만, 숨어 있는 뜻은

 ‘나는 산의 아름다운 풍경처럼 자연과 하나가 돼 살고 있다.’는 말을 암시한다.

원숭이가 새끼와 함께 산으로 돌아갔고, 새는 꽃을 물고 산과 하나가 됐듯이

자신도 아름다운 산과 하나가 됐다는 것이다.

즉, 산(깨달음)과 하나가 된 것이 나의 경지인데,

깨달음이 어떤지 굳이 물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뜻이다.

그런데 뒤에 법안종(法眼宗)을 일으킨 법안 문익(法眼文益, 885 ~ 958)선사조차도

현산선사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20년 동안이나 경계[경치]라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하니 범부 중생이야 그 뜻을 헤아릴 길이 없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협산선사와 한 객승 사이에 이루어진 문답이 선문답의 효시라는 것이다.

선문답이 수행과 동떨어진 동문서답이 아니라,

좌선은 물론 생활 중에도 마음공부가 한결같이 이어지는 일상선(日常禪)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이란 낱말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화(話)를 간(看-살피다)하는 선(禪)’이란 의미이다.

여기서 화(話)란 진리에 관한 스승과 제자의 대화나 이야기를 의미한다.

일상적인 세간적인 의미의 대화가 아니라, 출세간적인 진리에로 나아가는 과정의 일부이다.

이런 대화를 우리는 선문답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문답의 전통은 불교의 초기경전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문명의 발상지, 이를테면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 인도 브라만의 베다(Veda) 혹은 우파니샤드(Upanishad), 중국의 제자백가(諸子百家) 문헌에서도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들이다.

선문답은 현실이나 현상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만법과 만물의 근본바탕에서 묻고 답하는 것이 선문답의 세계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주고받는 문답은 현실이나 현상계에서 보고 배운 바를 문답하지만

선문답은 현실이나 현상을 초월한 세계, 상식을 뛰어넘은 세계,

즉 만법과 만물이 생하기 전인 본래면목의 세계에서 묻고 답하는 것이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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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기에 선지식께서 “자네 어디서 왔는가?” 라고 물으면, ‘충청도 예산에서 왔습니다.’

라고 답한다면 처다 보지도 않는다. 그 건 선문답이 아니다.

내가 온 곳은 충청도 예산이 아니라  

내가 생겨나기 전인 본래면목(本來面目)에 근본을 두고 답해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이러한 선문답은 많은 사람을 일깨워주는 진담(眞談)이요, 고담(高談)이요,

청담(淸談)이라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값진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진담은 거짓이 없는 순수한 양심의 전달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고,

고담은 고차원의 의미를 내함(內含)하고 있기 때문이며,

청담은 잡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의미에서 고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문답은 화두의 제시만으로 매듭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문답이라는 토론과정을 통해 선지(禪志)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지의 천명 없이는 구구한 억측과 자의적인 잡석설(雜釋說)로 인한 혼란을

막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선문답은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수준의 수양을 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문답이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는 양서를 두루 읽어 폭 넓은 교양과 예지가 있고,

둘째는 수행을 통해 자연관이 정립돼 있으며,

셋째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역지사시(易地思之)할 수 있는 도량이 있고,

넷째는 옳은 것에 복종할 줄 아는 겸허함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는 마음을 비울 줄 알고,

여섯째는 자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문답을 즐길 줄 알아야 하며,

일곱째는 남의 말을 폭넓게 알아들을 줄 아는 식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선문답은 범인으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사리통달능력을 바탕으로 해

오묘한 경지에서 마음의 자리를 찾는,

이른바 격외도리(格外道理)의 대화법을 말한다.

격외도리란 언어의 격식이나 관례를 초월한 말이지만 진리를 담고 있음을 말한다.

 

즉, 설정된 언어의 뜻에 구애받지 않고

부정과 긍정 양 날개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언어의 격식을 뛰어넘는 진리를 말한다.

 

 

말이 있으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이 뜨고,

옳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쁘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진다.

 

그래서 틀이 잡히고, 논리가 생기고, 문법이 생기고, 격식이 생겨, 격식을 벗어나면 틀렸다,

그리고 아니다 하는 갈등이 생긴다.

 

때문에 진리는 옳다 혹은 그르다 하는 이분법을 뛰어넘는 곳에 있다는 말이다.

선문답이나 화두의 경우 대개 이에 해당한다.

스승이 제자를 보니 공부가 거의 끝나갈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다.

 

이 때 스승이 제자에게 격외도리(格外道理)를 거량(擧揚)해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준다.

이렇게 돈발된 의심 때문에 무기(無記)에 빠지지 않고 다른 번뇌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 스승이 제자에게 의심을 돈발 시켜주기 위해 거량한 격외도리를 화두라고 한다.

혹은 수행자가 수행을 하다가 무언가에 콱 막힌 듯하고 더 뚫고 나가지 못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격외도리를 거량해 의심을 돈발시켜 주어

미망을 한 순간에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 화두이고,

선문답의 입묘각위(入妙覺位)의 경지라 할 수 있다.

 

 

※무기(無記)---무기란 여러 뜻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참선을 할 때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화두를 분명하게 들고 있어야 하는데,

아주 고요함에 매료돼 화두를 놓치고 멍한 상태를 무기에 빠졌다고 한다.

※입묘각위(入妙覺位)---묘각(妙覺)의 지위에 들어감을 말한다.

묘각은 보살의 최고 수행단계를 말한다.

 

- 작성자 이 덕 호(아미산)

 

 

 

 

 

 

 

[출처] 선문답이란 무엇일까요 ?|작성자 whitech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