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

수선님 2021. 6. 20. 12:23

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에 있어도 자신이 주인공이면 자신이 서 있는 곳 전부가 진실이다]

 

참으로 확실한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현재 지금, 여기에, 내 자신이 있다고 하는 것뿐이다.

 

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고 하는 말은『임제록』에 기술되어져 있는 말이다.

 

자신이 몸을 두고 있는 곳, 지금, 이 장소야말로 나에게 있어 수행의 장소이다. 그런 각오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내가 절에서 수행을 막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절에서의 하루의 생활은 아침부터 밤까지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보통생활에 비교하면 너무 부자유스러운 것이었다. 스님이 될 뜻도 확립되지 않고 절에 들어온 나는 빨리 여기에서 나가 자유스럽게 살고 싶다고 하는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절의 풀을 뽑고 있었다. 마당은 넓고 풀은 아무리 뽑아도 다 뽑을 수 없을 정도였다.

 

(참 한심하다. 이런 일 해 봐야 무슨 도움이 될까)

풀을 뽑으면서도 마음은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나의 곁에 선방 스님이 다가와서 이렇게 말한다.

“상현스님, 두 발로 땅을 걸어본 적이 있어요?”

 

무슨 말인지 잘 몰라 멍청하게 있는 나를 뒤로 하고 그 스님은 사라져 버렸다. 그 뒤 수행을 계속하여 여러 날이 지나서야 그 의미를 간신히 알아차렸다.

 

좌선을 하고 있어도, 경전을 읽고 있어도, 공양 준비나 청소, 풀을 뽑는 등 어떠한 일을 하고 있어도 나는 (빨리 끝내버리자)고 하면서 항상 다른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는 몸은 그곳에 있지만 마음은 여기에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부재중,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결국 幽靈과 같다.

 

유령에게는 발이 없다. 따라서“땅을 두 발로 걸은 적이 있어요?”라고 하는 말은“그대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되겠는가”라고, 나의 수행자세, 살아가는 자세에 대하여 의문을 던져 준 말이었던 것이다.

 

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고 하는 말은 어떠한 때라도 어떠한 상황에 있어도 그 자리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자세의 중요함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이것은 결국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여 마음을 다하고 나를 잊는다[忘我, 無我]고 하는 것이다. 그 때, 그 장소와 일체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어떠한가. 지금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여기에 있지 않는 그러한 “유령상태” 일 때가 너무나도 많지 않을까 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잔의 차를 마실 때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는 차 맛을 알 수 없다. 차를 마실 때는 걱정거리가 있어도 마실 수 있다고 하는 그것에 감사한다.

 

‘아! 맛있다’라고 음미한다. 차와 일체가 된다. 그러한 상태가 되는 것이야말로 한 잔의 차를 마시는 시간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간이 되지는 않을까.

 

하여튼 우리들이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다[不在]”고 하는 정신상태에 빠지기 쉬울 때는 곤란한 일을 만났을 때이지 않을까.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피하려고 생각한 나머지“자신이 괴로운 것은 저 사람 때문이다”고 남을 질책하거나,“이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나는 행복하게 될 수 없다”“이렇게 되어 주기만 한다면”이라고 자신의 소원이나 희망사항에 고집을 부려 상대나 환경, 조건 쪽으로 변혁을 구한다.

 

 

그러나 당연 자신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상대방이나 상황이 바라는 대로 변화해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대방이나 상황을 자신이 바라는 대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 괴로워해도 필요 없는 일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思考習慣”이 생기면 더욱더 깊이 빠져들어 괴로움은 한층 더 커진다. 그것은 자신을 불행하게 할 뿐 아니라, 참으로 아까운 시간낭비인 것이다.

 

결국 노여움을 참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때, 그곳이 수행장소이다. 만난 현실에서 도피하지 말고 가만히 음미해 본다.

 

괴로울 때는 철저하게 괴로워하고, 슬플 때는 철저하게 슬퍼한다. 괴로움, 슬픔과 하나가 된다. 그러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보이게 된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의 하나하나를 행동으로 옮긴다. 안달거리지 않고 천천히 한걸음씩 나아간다.

 

그것이 바로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서 정말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재지금, 여기에 내 자신이 있다고 하는 것뿐이다. 그것이외의 것은 텅 비어서 믿을 수 없다.

 

“卽今三世”라고 하여, 지금, 여기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은 과거의 集積이고, 지금의 자신의 결과가 미래가 된다. 결국 땅에 발을 붙이고 지금이라고 하는 시간을 열심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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