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이야기

화엄경 법성게 - 설우스님

수선님 2021. 6. 20. 11:08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밤 세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꽃 피는 것을 누가 알겠나? 생명세계는 전부 하나다. 우리는 모두 한 생명이요 하나의 몸 짓이다. 너와 나의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법의 세계다.

性은 마음 세계다. 우주 전체의 현상세계는 法性이고 법성의 원리를 마음으로 끌어들이면 自性이 된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의 本性은 물들 수도 죽을 수도 더럽힐 수도 끊어 없앨 수 없다. 또한 움직이고 동요된다 해서 어디 달아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참마음의 세계는 이렇다. 참 마음의 이런 이치를 잘 아는 자리가 自性이다.

 

우주 전체도 인과법에 따라 꽃도 피고 새도 울고 짐승도 사람도 각각 모양과 생김새가 다른 데 이런 일은 법성이 하고 있는 일이다. 우주는 천만 가지 생명들이 영원히 피고 지지만 生하고 滅하는 원리와 법칙성은 변하지 않는 법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현상도 인과법에 의해서 상호관계를 가지고 생하고 멸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自性은 본래 생하고 멸하는 것이 없지만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면 이 자성 자리에서 파도 바람 독한 가스가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의 속성을 잘 아는 사람은 경계에 속지 않는다.  

                

현대사회는 층간소음으로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自性을 잘 아는 사람은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면 하나의 경계로 보고 그 경계에 속지 않는다. 그러면 칼을 들고 좇아가다가 멈춘다.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나 살인자가 된다. 그러나 본래 그런 생각은 있던 것이 아니다. 본래 없기 때문에 살인을 하고 나면 후회하는 것이다. 내가 미쳤지 하고 본 정신이 돌아온 것은 청정한 자성 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인하고 뉘우쳐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세상엔 법이 있어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법성과 자성을 잘 알아야 한다.  

 

法性의 세계를 잘 알고 自性의 세계를 잘 알아 마음의 경계에 속지 않는 것을 法性圓融이라 한다.

 

법의 인과법칙과 마음의 인과법칙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마음을 복덕과 공덕의 마음을 쓴다. 복덕과 공덕은 널뛰기와 똑같다. 상대를 높이 올리고 싶으면 아무 조건 없이 격려하고 용서하고 포용하고 애쓰는 마음을 써야 한다. 학문적으로는 相生이지만 수양산 그늘에 강동 80리라고 자손에게도 공덕이 미친다. 나무도 거름을 준 나무와 안 준 나무의 열매는 다르다.

 

이처럼 생명은 관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명은 하나다. 너와 나는 한 몸이다. 우리는 전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相生의 음덕을 쌓는 일이 無二相 두 가지 모양이 없는 일이다. 미움 사랑 싫어하고 좋아하고 죽이고 살리는 두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一心엔 모양이 없다. 음덕은 표가 안 난다는 뜻이다. 반면 중생은 항상 2가지 상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다 미워하고 좋아하다 싫어한다. 우리 자성엔 본래 2마음이 없다는 것만 잘 알아도 90%는 공부가 다 된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 실천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法性圓融無二相만 잘 알아도 대단한 心地法門을 하나 아는 것이다. 밖의 현상과 자기 내면의 정신세계는 둘이 아니고 하나다. 이런 세계의 이치를 아는 것이 원융이다. 圓融은 포용 융화 조화를 잘 이룬다는 뜻이다.

 

법성게는 부처님이 가장 먼저 설한 大方廣佛華嚴經을 압축한 게송이다. 화엄경은 내용이 너무 방대해 강의를 하려면 몇 년이 걸린다. 무비스님은 지금도 화엄경만 몇 년째 강의하고 계신다. 大는 크다 작다는 양변을 벗어나 대자유에서 나오는 절대적 대를 말한다. 사람이 미울 때는 자기의 온 마음을 다 써가며 밉게 본다. 반대로 곱게 보면 온 몸을 다 던져 곱게 본다. 미우면 며느리 발 뒤꿈치만 봐도 미운 것이 중생의 생각이다. 법문을 많이 들으면 마음 그릇이 깊고 커져 이런 중생심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다.  

 

부부는 같이 살지만 모두 자기 입장에서 보는 틀이 있다. 마음은 모양도 색도 없지만 쓸 때는 틀을 만들어 놓고 상대가 자기 틀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상대가 틀 안에 안 들어오면 서운하고 밉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잘못 보고 속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만든 틀이 바로 고정관념이다. 사람은 부모 태를 빌려 나와서 그 동안 자기가 익힌 정서와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누나가 많으면 성격이 여성화된다.

세상의 인성교육은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소견이 확 열린 사람은 그 동안 익힌 성격에 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불교로 말하면 혜안이다. 혜안이 열리면 성격이 바뀐다. 그러면 큰 복을 성취한다. 그래서 俗家에서는 소견이 복이라 하는 것이다. 자기 틀 만들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 많다. 완전히 틀을 벗어나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겠지만 그런 줄 알고 마음을 넓게 쓰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행생활이요 수행이다.     

 

마음이 많이 넓어지면 부부간 친구간 동료 간에도 이해심이 많아지고 여유로워진다. 자기 입장만 말하는 사람은 이해심을 절대 넓게 쓰지 못한다. 이해심은 포용에서 나온다. 그러려면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배려해야 한다. 여기서 쓰는 큰 大자는 크고 작은 데 매이지 않고 쓰는 자유로운 大 자다. 화엄경은 격문만 가지고 말하면 굉장히 어렵다. 우리 마음은 본래 커서 성인도 대인도 될 수 있지만 그런 마음에 너무 매이면 세상 사는 데 어려움이 많고 어울리지 못한다. 이런 마음의 원리를 알면서 세세하게 배려하고 마음 써주는 것이 方이다.

 

光佛은 세밀하고 넓게 쓰는 부처님을 말한다. 중생의 마음 속에도 自性佛이 있다. 부처님은 나는 특별한 존재로 부처 되려고 했는데 부처가 되고 보니 전부 다 부처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如來出現品에 보면 부처가 출현하는 순간 일체 중생이 다 성불했다고 나오는 것이다. 세상은 바뀔 수 없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안 바뀐다. 세상이 아름답고 부처로 보이는 것은 내 마음이 바뀌어 세상이 바뀌어 보이는 것이다. 마음은 한 순간에 지혜로 바뀐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의 부처가 세상을 보는 것이다.

 

중생의 욕심 차별심 이기심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지혜의 눈이 열려 세상을 보니 전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성불하니 일체 중생이 다 성불했다고 하시는 것이다. 스님을 보니 돼지 같이 보입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저는 부처님으로 보입니다. 진담입니다 라고 말한다. 華嚴의 華는 빛날 華 꽃 華 꽃으로 장엄된 세상이다. 꽃은 아름답고 향기롭다 누구도 싫어하지 않는다. 지혜의 눈이 열리면 어제까지 스트레스 받던 괴로움 아픔 고통으로 보이던 중생심도 모두 꽃으로 보인다.  

 

부처님은 미물부터 천상의 신들에게도 설한다. 미물도 들으면 마음이 열린다. 비록 미물 축생이지만 한 번 들은 공덕 인연이 있으면 다음 몸을 바꿀 때는 마음이 열린다. 49제 지내면 心地法門 다 해주고 마지막에 법성게를 치면서 영가를 보낸다. 화엄경은 39품 81권으로 되어 있다.

2회. 설우스님. 화엄경 법성게 중에서

 

 

 

 

 

 

 

 

[출처] 886.화엄경 법성게2|작성자 Inkf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