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속박된 윤회의 감옥

수선님 2021. 6. 20. 11:42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속박된 윤회의 감옥

 

 

 

불안정한 행동으로

 

불안정한 행동은 사고로 이어진다. 아끼던 머그잔이 깨진 것도 불안정한 행동에 기인한 것이었다. 한번에 하나씩 해야 될 것을 동시에 하려다 보니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 머그잔을 떨어뜨렸다. 손잡이 부분이 떨어져 나간 머그잔을 보니 더 이상 애지중지하던 머그잔이 아니었다. 아깝기도 하고 실수한 것에 대하여 탓하는 마음이 생겨 났다.

 

머그잔은 유후인에서 산 것이었다. 일본 규슈에 있는 유명한 온천광광지를 말한다. 2012년에 샀으니 3년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함께 하였다. 주로 커피를 타 마셨다. 흰색의 세라믹으로 되어 있고 꽃문양의 디지인도 좋았다. 무엇보다 내부에 별도의 세라믹 필터가 있어서 티벡을 활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원두커피를 타 마시는 용도로도 활용하였다. 세라믹 필터위에 종이필터를 올려 놓고 분쇄된 원두를 넣고 물을 붓는 식이다. 이런 방식에 대하여 블로그에 글로 올린 바 있다.

 

도공의 손을 떠난 도자기는

 

손잡이가 나간 머그잔을 미련 없이 버렸다. 그 동안 애지중지 하던 것이라 하여 골동품처럼 모셔 놓을 수 없었다. 도공의 손을 떠난 도자기는 언젠가는 깨지게 되어 있다. 사람의 목숨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이를 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 사람의 목숨 또한 그렇습니다.”(stn577) 라 하였다. 그런 도자기도 사람의 목숨도 언제 깨질지 모른다. 그래서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습니다.” (stn574) 라 하였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질그릇이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듯이 사람 역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이는 사람의 목숨이 정해져 있지 않음을 말한다. 또 사람의 목숨을 누군가 기대수명대로 살도록 보장해 주지 않음을 말한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속박되어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육도윤회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각자 지은 업대로 태어나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한다면 각자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착하고 건전한 생활을 하면 선처에 나고,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면 악처에 태어난다고 본다. 이렇게 선처와 악처를 돌고 도는 것이 윤회이다. 그렇다면 왜 돌고 도는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이 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주의 시작이나 윤회의 시작은 알려 질 수 없고 무시 이래로 윤회하고 있는다는 내용이다. 각 경마다 이런 정형구로 시작 된다.

 

 

Anamataggoyaṃ bhikkhave, saṃsāro, pubbā koṭi na paññāyati avijjānīvaraṇānaṃ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sandhāvataṃ saṃsarataṃ.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힌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S15.1, 전재성님역)

 

 

핵심이 되는 구절은 “무명에 덮힌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avijjānīvaraṇānaṃ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이다. ‘무명에 덮힌’이라는 말은 avijjānīvaraṇānaṃ라는 복합로서, 이는  Avijjā(ignorance)+nīvaraṇāna(hindrances)’의 형태이다. 그리고 ‘갈애에 속박되어’라는 말은 ‘taṇhāsaṃyojanānaṃ’으로서, 이는 taṇhā(craving) +saṃyojanāna(fetters)’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무명에 대해서는 덮인 것으로, 갈애에 대해서는 묶인 것으로 설명된다.

 

경에 따르면 모든 존재들은 무지와 갈망 때문에 윤회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윤회의 원인에 대하여 잘 설명해 준다. 과거의 무명으로 인해 여기에 있게 되었고, 현재의 갈망으로 인하여 미래에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유전과 윤회

 

경을 보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라 하였다. 이는 “sandhāvataṃ saṃsarataṃ”이다. 여기서 sandhāvataṃ은 sandhāvati의 형태로서 ‘runs through; transmigrates. ‘의 의미이다. 그리고 saṃsarataṃ은 saṃsāra의 형태로서 'round of rebirth’의 의미이다. 그래서 sandhāvati에 대하여 유전(迴轉,流轉)으로, saṃsāra에 대하여 윤회로 번역한 것이다.

 

문장에서 “무명에 덮힌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avijjānīvaraṇānaṃ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sandhāvataṃ saṃsarataṃ)”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무명은 유전에, 갈애는 윤회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이 구절에 대하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 치달리고 윤회하는”이라 번역하였다. runs through의 의미가 있는 sandhāvati에 대하여 ‘치달리고’라고 번역한 것이다.

 

빅쿠보디는 “roaming and wandering on hindered by ignorance and fettered by craving.”이라 번역하였다. 여기서 ‘sandhāvataṃ saṃsarataṃ’에 대하여 ‘roaming and wandering’라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윤회를 뜻하는 saṃsara라는 말이 있음에도 ‘wandering’이라 한 것이 독특하다.

 

덮여 있다고 하는데

 

경에 따르면 무명은 덮인 상태라 하였다. 무언가에 덥혀 있다는 것이다. 무엇에 덥혀 있을까?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친절하게도 ‘덮여있다’라는 의미의 nīvaraṇāna에 대하여 ‘5 qualities which are obstacles to the mind and blind our mental vision. In the presence of them we cannot reach neighbourhood-concentration’라 하였다.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가 있음을 말한다. 그 다섯 가지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1. sensuous desire (kāmacchanda),

2. ill-will (byāpāda),

3. sloth and torpor (thīna-middha),

4. restlessness and scruples (uddhacca-kukkucca), and

5. skeptical doubt (vicikicchā ; q.v.).

 

 

라 하였다. 이는 오장애 또는 오개를 말한다.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회의적 의심을 말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가 있으면 선정에 들 수 없다. 이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가 극복 되어야 마음의 의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

 

무지에 대하여

 

‘덮혔다’는 것은 마음의 장애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무지로 설명되기도 한다. 어떤 무지인가? 사성제을 알지 못하는 무지를 말한다. 무지한 자들은 사성제가 있는 것 조차 모른다. 탐욕과 성냄 등 마음의 장애로 덮인 무지한 자들이 사성제를 알지 못하니 무지에 무지가 된다. 이와 같은 무지에 대한 무지는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이다. 이런 무지를 ‘중층무지’라 한다. 그래서 중층적 구조의 무지에 대하여 ‘무명(無明: avijjā)’이라 한다.

 

무명이라 하였을 때 빠알리어로 아윗자(avijjā)라 한다. 이는 밝음을 뜻하는 윗자(vijjā)와 반대 되는 말이다. 영어로 vijjā는 ‘higher knowledge’로 설명된다. 윗자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세 가지 명지(tevijjā)’로 설명된다. 이를  삼명이라고 한다. 이는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의 지혜를 말한다. 모두 전생과 윤회와 관련이 있다.

 

전생을 기억하는 숙명통의 지혜는 윤회하는 중생의 삶을 깨닫는 조건이 된다. 업보에 따라 다양한 타자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천안통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따른 인과응보의 깨달음을 알게 해 준다. 이와 같이 윤회하는 중생의 삶에 대하여 아는 지혜가 생겼다면 윤회로부터 벗어 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윤회의 원인이 되는 번뇌를 남김 없이 소멸하여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증득하여 깨닫게 되는데 이것이 누진통의 지혜이다. 이렇게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의 세 가지 밝은 지혜에 대하여 떼윗자, 삼명이라 한다.

 

아윗자는 어둠에 쌓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몰라서 어두운 상태이다. 어리석기 때문에 무명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현명한 자가 된다.”(Dhp63) 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 (Dhp63)라 하였다.  이런 인식론적 무명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발견되어서는 안 될 신체적 악행 등이 발견되므로 무명이고,

2) 발견되어야 할 신체적 선행 등은 발견되지 않으므로 무명이고,

3) 사물의 전도되지 않은 본성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무명이고,

4) 끊임 없는 윤회속에서 존재 등에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5)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 속으로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6)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 속으로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7) 앎의 반대이기 때문에 무명이다.

(UdA.41)

 

 

이는 무명의 부정적 요소에 대한 것이다. 덮여 있는 상태가 무명이라 하였듯이 마치 깜깜한 방에 있는 것과 같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이는 길을 모르는 것과 같다. 무지한 것에 무지가 더 해져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돌고 돈다’라 하여 무명에 대하여 유전 (sandhāvati: runs through, transmigrates)이라 하였을 것이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족쇄

 

경에 따르면 윤회에 대하여 ‘갈애에 묶여 있는 것(taṇhāsaṃyojanānaṃ)’으로 표현 되어 있다. 여기서 ‘묶는 것’에 대하여 삼요자나(saṃyojanāna)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족쇄로 설명된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족쇄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족쇄일까? PCED194에 따르면 saṃyojanāna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10가지로 설명한다.

 

 

(1) personality-belief (sakkāya-ditthi)

(2) sceptical doubt (vicikicchā)

(3) clinging to mere rules and ritual (sīlabbata-parāmāsa; s. upādāna)

(4) sensuous craving (kāma-rāga)

(5) ill-will (vyāpāda)

(6) craving for fine-material existence (rūpa-rāga)

(7) craving for immaterial existence (arūpa-rāga)

(8) conceit (māna)

(9) restlessness (uddhacca)

(10) ignorance (avijjā)

 

 

fetters

 

 

열 가지 항목에 대하여 차례로,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금취견, 감각적 욕망, 악의, 미세한 존재에 대한 갈망, 비물질적 존재에 대한 갈망, 자만, 불안, 무지라 한다. 이것이 존재를 윤회하는 요소이다. 이에 대하여 족쇄(fetters)라는 표현을 한다. 마치 죄수들이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도록 발에 족쇄를 채워 놓는 것을 연상케 한다.

 

세 가지 족쇄를 끊어 버리면

 

열가지 윤회의 족쇄가 채워져 있다면 감옥에서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문제는 족쇄가 채워진 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이는 감옥이 좋아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윤회의 감옥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족쇄를 칼로 끊어 버려야 할 것이다. 어떻게 끊어 버릴 것인가? 단계가 있다. 열 가지 윤회의 족쇄를 단계적으로 끊는 것이다. 가장 먼저 유신견(sakkāya-ditthi)과 회의적 의심(vicikicchā)과 계금취견 (sīlabbata-parāmāsa)이라는 족쇄를 끊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족쇄를 끊으면 성자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수다원이 되면 아무리 둔한 자라도 일곱 생 이내에 완전히 족쇄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열반이 보장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ato ca1 ariyasaccāni

sammappaññāya passati:
Dukkhaṃ dukkhasamuppādaṃ

dukkhassa ca atikkamaṃ,
Ariyañcaṭṭhaṅgikaṃ maggaṃ

dukkhūpasamagāminaṃ.


Na sattakkhattu paramaṃ

sandhāvitvāna puggalo,
dukkhassantakaro hoti

sabbasaññojanakkhayā'ti

 

“올바른 지혜로써

거룩한 진리 즉, 괴로움,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초월,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고귀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본다면,

 

그 사람은 최상으로

일곱 번 유전하다가

일체의 결박이 부서지는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It.17, S15.10, 전재성님역)

 

 

성자의 흐름에 들면 최대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결박을 풀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결박이라는 말이 saññojana(= saṃyojana)이다. 존재를 윤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족쇄를 말한다.

 

열 가지 족쇄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이는 유신견에서부터 악의까지 이렇게 다섯 가지에 대하여 낮은 단계(orambhāgiyāni)라 한다. 이는 낮은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욕계를 말한다. 다음으로 그러나 미세한 존재에 대한 갈망에서부터 무지까지 다섯 가지에 대해서는 높은 단계의 결박 uddhambhāgiyāni 이라 한다. 이는 색계와 뮤색계에 대한 결박을 말한다. 이와 같은 구분은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앙굿따라니까야 결박의 경(A10.13)에 상세하게 표현 되어 있다. 또 맛지마니까에서 망룽끼야뿟따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설하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기억합니다.” (M64)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자식과 아내에 대한 애착

 

사람들은 윤회의 감옥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윤회의 감옥을 보면 모두 족쇄가 단단히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족쇄로 인하여 유전하고 윤회 하는 것이다. 탐욕과 성냄이라는 족쇄가 채워진 자들은 욕망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욕계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미세한 번뇌는 남아 있다. 그 번뇌로 인하여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지만 감옥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각자 자신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알고 보면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감옥이라 볼 수 있다.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족쇄를 끊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윤회의 감옥에서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단단한 족쇄로 채워져 있다. 어떤 족쇄인가?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Na taṃ daḷhaṃ bandhanam-āhu dhīrā,    

Yad-āyasaṃ dārujaṃ babbajañ-ca,       
Sārattarattā maṇikuṇḍalesu            
Puttesu dāresu ca yā apekhā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고리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 (Dhp345, 전재성님역)

 

 

쇠로 만든 족쇄가 있다. 손이나 발을 묶어 놓아 도망 가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을 말한다.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채워지는 족쇄는 도망도 가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행동반경도 제한된다.

 

그런데 법구경 게송에 따르면 쇠로 만든 것이든 나무로 만든 것이든 어떤 사람을 묶어 놓는 족쇄는 그다지 강력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쇠붙이로 만든 족쇄는 언제든지 칼 등으로 끊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족쇄가 있다. 그것은  “탐착”과 “애착”이라는 족쇄이다.

 

보석이나 귀거리나 보석으로 이루어진 장식물은 탐착의 대상이다.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런 탐착은 쇠붙이로 만들어진 족쇄보다 더 강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더 강력한 것은 “자식과 아내에 대한 애착”이라는 것이다.  자식과 아내에 대한 애착은 보석등의 탐착보다 더 강하고 쇠붙이로 만든 족쇄와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족쇄이다. 쇠붙이로 된 족쇄는 끊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자식과 아내와의 인연에 따른 족쇄는 끊을래야 여간해서 끊을 수 없다. 그래서 윤회의 감옥에 갇혀 산다.

 

 

2015-09-3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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