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가르침과 그 해석
Chinese gamas &
P li Nik ayas
인터넷 불교교육원
불 교 학 과
2002. 12. 30
해 제
요즈음 들어 우리 불교계에서는 아함경과 초기불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그간 불교를 붓다의 인간적인 삶과 초기교단 수행자들의 구체적인 생활속에서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쉽고 가깝게 이해하지 못하고, 관념화된 고준한 사상체계만으로 접근하려 했던 불교의 자기 병폐에 대한 반성의 몸짓이라 할 것이다.
아함경과 초기불교에 대한 연구를 통해 붓다와 붓다의 가장 원초적 교설을 불교의 중심지표로 설정해 내는 일은, 경전과 종파마다 각기 달라진 언어의 방향성과 한 종교로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섞일 수 없게 된 신행과 의례의 차이점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데 주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리고 불교라는 사상의 동일성을 불교의 상이한 역사적 변모 속에서 확인하는데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불교사상의 서로 달라진 범주들의 뿌리가 초기불교임을 승인해야 하며, 불교가 제시하는 모든 실천이 지혜와 자비를 한 몸에 실현해 낸 붓다의 구체적인 삶을 원형으로 한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3000년 가까이 지역마다 서로 달리 흘러온 불교의 다양한 발전형태 속에서 불교사상의 통일적 지표를 확인할 수 없을 것이며, 지금시대의 대중의 각기 다른 요구 앞에 불교적인 문제해결의 길을 제시해 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데도 몇 가지 측면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아함경과 초기불교의 연구가 교조화되면 자칫 불교철학의 속류화와 연기론의 단순 소박화에로 돌아갈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연기론은 브라마니즘의 신아론(神我論)과 적취설(積娶設)의 요소설(要素說)을 함께 부정하고 나온 세계관이다. 그런데 붓다 열반 후 부파의 여러 논사들이 연기론을 실재론적으로 해석하고 존재를 어떤 요소들의 모임으로 설명하려 할 때, 중관불교는 공(空)이라는 언어로 연기를 새롭게 해석하고 다시 공(空)이 없음과 같은 것으로 비쳐지거나 신비한 어떤 것으로 이해될 때 유식불교는 식(識)이라는 언어로 연기를 해명한다.
그러므로 중관. 유식. 여래장 그리고 중국에서 천태. 화엄 등의 여러 교설은 초기불교의 단순하고 간명한 사상적 범주들을 그 시대 대중의 요구에 따라 발전된 시대논리로 해석한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초기불교의 동일성에 서서 후대불교의 상이한 언어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할뿐더러, 후대불교의 상이하고 다양한 범주들로써 초기불교의 단순한 범주를 다시 해석해 낼 수 있어야 불교사상의 흐름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못하고 초기불교와 아함경 연구를 단지 초기불교의 자기 완결적인 틀로 연구하고 해석하려 한다면, 불교철학은 나의 소박한 철학적 견해에 갇혀 속류화되거나 천박화되어 버릴 것이다.
둘째, 초기불교의 연구를 오늘의 삶의 문제를 풀어 가는 실천적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고, 단지 원시불교를 회고하고 초기교단의 생활상에 복고하려는 학풍이 갖는 위험성이다. 붓다의 연기론과 불교의 모든 이론은 인간해탈에 복무하며 지금 구체적으로 주어진 삶의 문제 해결에 기여한다 초기불교와 초기교단에 대한 연구는 붓다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보다 분명하게 밝혀 오늘의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함이다. 용수의 대승운동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를 들고 붓다의 세계관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부정하고 붓다의 뜻을 올바로 시대 대중앞에 제시함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용수의 중론송은 붓다의 초기교설과 다른 새로운 논서라기보다는 붓다가 가르친 연기. 업. 인과. 사제 등 기본 범주에 대한 잘못된 관점들을 부정하고 불교사상의 바른 실천적 방향을 시대 속에 밝히고 있다.
이처럼 용수는 붓다의 근본교설에 다시 되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용수는 파사현정의 논리로 원시불교에 단순히 복고해 가는 것이 아니라 불교사상의 왜곡된 이해를 표출되고 있는 시대 대중의 허위의식을 깨뜨려 붓다가 제시한 반야의 힘으로 현실역사를 해탈의 역사로 바꾸어가려 하였다. 그래서 용수 등 대승불교 운동가들은 단순히 초기불교나 원시교단에 돌아가도록 가르치지 않고 출가중심적인 사문(沙門)에 대신하여 자기해탈과 대중의 해탈을 함께 추구하는 대승보살을 실천의 주체로 내세우며 육바라밀이라는 적극적 실천행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사상과 나의 삶을 둘로 보지 않는 기본 시각에 굳건히 서서 사상을 늘 새롭게 해석해냄으로써 시대의 고민을 풀어가는 실천적 관심이 없이 아함경과 초기불교에 대한 복귀를 만능약 처럼 떠드는 입장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태도라 할 것이다.
셋째, 초기불교의 연구가 이미 다변화되고 다양화된 대승불교와 중국 종파불교의 사상과 신행체계를 살리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선(禪)을 말하더라도 천태는 교관일치(敎觀一致)를 표방하고 달마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외치는데, 이것들은 이미 특수한 깨달음의 방안으로 정착되어 있으며, 선의 자각과 정토의 타력 왕생염불도 각기 전문화된 수행방법으로 굳어져 있다. 그리고 계. 정. 혜가 원래 근본교설에서 하나의 통일물을 이루지만, 중국 종파불교에서 율종(律宗)은 계학(戒學)을 중심으로 삼학을 망라하고, 선종은 정학(定學)을 중심으로 삼학을 망라하며, 화엄은 혜학(慧學)을 중심으로 삼학을 망라한다면, 천태는 천태선. 천태교. 천태율을 모두 말함으로써 삼학을 모두 치우침 없이 거두어들이려 한다. 이러한 가풍들은 이미 전문화되고 정형화된 실천방안으로 자리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역사적 성과물과 사상의 축적물을 조화하여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단일한 기반으로 묶어내는데 기여해야지 전통과 사상의 축적물을 부정하는데 동원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 본 "붓다의 가르침과 그 해석"은 한 학기 동안 "붓다 가르침의 핵심"이란 주제로 진행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신수대장경의 한문본 잡아함경과 대응되는 PTS 영문본을 강독하고 각각 주제에 대하여 요약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신수대장경 한문본. 번역은 한글대장경을 참고하고, PTS 영문본. 번역은 전재성의 팔리대장경 번역본을 참고하고 아직 한글 번역본이 없는 것은 직접 번역한 것을 넣었다. 전체 흐름은 초기불교의 근본교리를 경전을 통해 확인하고 정리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팔리어 표기나 내용은 완전히 교정되지 않은 것으로 학습용으로만 이용하기 바란다.
목 차
1장 아함부 해제 .................................................................................................................... 7
원시불교기행(4 아함과 팔리 5 니까야)
2장 붓다 교설의 특징 .......................................................................................................... 23
제1188 존중경(尊重經)
S. 6-1-2. Holding in Reverence [G ravo]
제36 십육비구경(十六比丘經)
S. 22-43. An island to self [Attadip]
[개념정리] 정법(正法) 중심주의
3장 십이입처(十二入處) .................................................................................................... 35
제319 일체경(一切經)
제279 조복경(調伏經)
S. 35-94. Including(the sixfold sense-sphere) [Sa g (1)]
[개념정리] 십이입처(十二入處)
4장 12입처(入處)의 멸(滅) ................................................................................................. 45
제239 결경(結經)
S. 35-109 Fetter [Sa yojana]
제240 취경(取經)
제241 소연법경
제242 지경(知經)
제243 미경(味經)
제244 마구경(魔鉤經)
S. 35-115 Mara's Power [M rap sa (1-2]
[개념정리] 12입처(入處)의 멸(滅)
5장 18계(界) .......................................................................................................................... 55
제238 인연경(因緣經)
S. 35-141-144
제304 육육경(六六經)
M 148 DISCOURSE ON THE SIX SIXES(Chachakka sutta)
제321 일체경(一切經)
제453 촉경(觸經) ②
[개념정리] 18계(界)
6장 오온(五蘊) ....................................................................................................................... 74
제55 음경(陰經)
S. 22-48 [Khandh ]
제63 분별경(分別經) ③
제46 삼세음세경(三世陰世經)
제61 분별경(分別經) ①
[개념정리] 오온(五蘊)
7장 삼법인(三法印) ............................................................................................................... 94
제8 과거무상경(過去無常經)
S. 22-9-11 [Alit n gatapaccupanna (1~2)]
제188 이희탐경(離喜貪經)
S. 35-155-156 [Nandikkhaya. (1~2]
제189 이욕탐경(離欲貪經)
S. 35-157-158
8장 연기(緣起)의 진리(眞理) ........................................................................................... 108
제296 인연법경(因緣法經)
S. 12-20 Paccaya
제288 노경(蘆經)
S. 12-67 Nalakal piya
[개념정리] 삼법인(三法印)
9장 연기(緣起)의 중도실상(中道實相)과 치우침 없는 삶의 길1. ....................... 128
제301 가전연경(迦 延經)
S. 12-15 Kacc yanagotta
제254 이십억이경(二十億耳經)
A. VI-55. Sona
[개념정리] 연기(緣起)의 중도실상(中道實相)과 치우침 없는 삶의 길1.
10장 연기(緣起)의 중도실상(中道實相)과 치우침 없는 삶의 길2. ..................... 148
제254 이십억이경(二十億耳經)
제297 대공법경(大空法經)
[개념정리] 연기(緣起)의 중도실상(中道實相)과 치우침 없는 삶의 길2.
11장 업(業)과 윤회(輪廻) ............................................................................................... 152
제1039 순타경(純陀經)
A. X-176 Cunda
제1044 비뉴다라경( 紐多羅經)
S. 55-7 [Veludv reyy ]
[개념정리] 업(業)과 윤회(輪廻)
12장 사성제(四聖諦) ......................................................................................................... 173
제379 전법륜경(轉法輪經)
S. 56-11~12 Tntl gatena Vutt (1~2)
[개념정리] 사성제(四聖諦)
13장 팔정도(八正道) ........................................................................................................... 197
제785 광설팔성도경(廣說八聖道經)
M. 117 Cutt risaka
[개념정리] 팔정도(八正道)
14장 우리가 가야할 삶의 길 .......................................................................................... 213
제929 일체사경(一切事經)
A. Ⅷ-25 Mah n ma
[개념정리] 우리가 가야할 삶의 길
15장 초기불교 .................................................................................................................. 220
다시 쓰는 원시(초기) 불교 ............................................................................................ 249
참고문헌
1장 아함경(阿含經) 해제
(원시불교기행·최봉수)
Ⅰ. 팔리오니카야와 한역 사아함
원시불교의 대표적인 원전인 巴梨五尼柯耶(p li-pa ca-Nik ya)의 전체 구성을 먼저 간단히 살핀다.
1) 長尼柯耶(Digha-nik ya) : 철학ㆍ신학ㆍ역사적 문제 분류로 당시의 사상을 포섭함. 3부(vagga), 34경(sutta). P.T.S. 3권, N.D.P. 3권
2) 中尼柯耶(Majjhima-nik ya) : 앞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이 베풀어짐. 비교적 자세한 설명이 동반되는 형식임. 3모음(集) 152경. P.T.S. 3권, N.D.P. 3권.
3) 相應尼柯耶(Sa yutta-nik ya) : 문제의 답변이 매우 상징적이고 원초적인 형태로 설해짐. 5부 56상응 2941경. P.T.S. 5권, N.D.P. 4권.
4) 增支尼柯耶(A guttara-nik ya) : 이상의 답변들을 法의 數적 특성에 입각해 정돈함. 11集(Nip ta), 2308경. P.T.S. 5권, N.D.P. 7권.
5) 小尼柯耶(Khuddaka-nik ya) : 이하 15편으로 되었거니와 자료적 가치가 심히 크다. N.D.P. 7권.
① 小誦經(Khuddaka-p tha) : 항상 염송할 만한 좌우명의 경들을 실음. N.D.P. 1권에 실림.
② 法句經(Dhammapada) : 문학적 향기가 높은 423개의 시로 되어 있음. N.D.P. 1권에 실림.
③ 自說經(Ud na) : 고타마 붓다가 깊이 감명하셨던 이야기를 집록함. 80개의 경으로 구성됨. N.D.P. 1권에 실림.
④ 如是語經(Iti-vuttaka) : 비교적 교리적인 색채가 짙은 짧은 경을 모음. N.D.P. 1권에 실림.
⑤ 經集(Sutta-nip ta) : 교리적인 면조차 가미된 아름다운 경구들의 모음. 시로 되어 있음. N.D.P. 1권에 실림.
⑥ 天宮事(Vim na-vatthu) : 착한 업에 의해 天界에 태어나는 이야기들(詩). N.D.P. 2.
⑦ 餓鬼事(Peta-vatthu) : 나쁜 업에 의해 惡趣에 태어나는 이야기들(詩). N.D.P. 2.
⑧ 長老偈(Thera-g th ) : 덕높은 장로 비구의 신앙 표백이 시로 실림. N.D.P. 2.
⑨ 長老尼偈(Theri-g th ) : 덕높은 장로 비구니의 신앙 표백이 시로 실림. N.D.P. 2.
⑩ 本生經(J taka) : 고타마 붓다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시로 실림. N.D.P. 3권에 실림. N.D.P. 3권은 1부ㆍ2부로 나뉨.
⑪ 義釋(Niddesa) : 경집의 마지막 두 品에 대한 주석 등을 싣고 있다. 대의석(Mah -niddesa)은 N.D.P. 4권 1부. 소의석(Cla-niddesa)은 N.D.P. 4권 2부에 실림.
⑫ 無碍解道(Patisambhid -magga) : 경장의 교리에 대한 일종의 백과사전 N.D.P. 5권.
⑬ 比喩經(Apad na) : 고타마 붓다의 벽지불 및 여러 아라한 제자들의 일종의 자서전(詩). N.D.P. 6∼7권에 걸쳐 실림.
⑭ 佛種姓經(Buddha-va sa) : 고타마 붓다가 전생에 만났던 과거 붓다들의 이야기(詩). N.D.P. 7권에 실림.
⑮ 所行藏(Cariy -pitaka) : 10바라밀(paramit ) 성취를 중심으로 한 고타마 붓다의 수행 이야기(詩). N.D.P. 7권에 실림.
원전성에 있어서 팔리니카야에 뒤지지만, 팔리니카야의 원전성이 전제된 상태에서 살필 때 한역 아함의 중요성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양적으로 훨씬 풍부한 자료를 한역 아함과 그 別行經 및 異譯經들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주자료인 한역 아함을 간단히 살펴보면, ① 法藏部 소속인 長阿含(Dirgha-Agama)은 22卷 4分 30經으로 되어 있다. ② 有部 계통의 소속으로 추측되는 中阿含(M dhyamika-Agama)은 60卷 5誦 19品 222經으로 되어 있다. ③ 역시 有部係로 추측되는 雜阿含(Sa yukta-Agama)은 50卷 1362經으로 구성된다. ④ 大衆部 소속으로 알려져 온 增一阿含(Ekottarika-Agama)은 51卷 471經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 다음 항목부터 장니카야의 간략한 개설을 시작하고자 한다.
장니카야
1. 제1권…철학적 주제
앞서 소개한 대로 장니카야에는 모두 34개의 긴 길이의 경들이 실려 있다. 이들은 세 권에 나뉘어져 있는데 제1권에 실린 경들(모두 13개 경)의 특징을 보면 '철학적 문제점'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 제1 범신그물 경(BrahmaJ la-S.)은 외도의 철학적 주장이 62가지로 정리되어 나오고, 제2 수행자결과 경(S ma aphala-S.)은 이른바 六師外道의 주장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제3 암밧타(Ambattha) 경 제4 소나단다(Sonadanda) 경 제5 쿠타단타(Ktadanta) 경 제13세 베다(Tevijja) 경에서는 전통의 바라문교를 다룬다. 곧 '세 베다 경'에서는 우선 철학적 원리로서의 梵神(brahman)을 소개하고, 이어 '쿠타단타 경'에서는 범신의 창조라는 원리에 입각한 실천 방법인 희생 또는 제사에 대해 다룬다. 또한 '암밧타 경'에서는 범신의 존재에 입각한 사회 구조인 四姓 계급을 소개하고 '소나단다 경'에서는 특히 바라문 계급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제6 마할리 경(Mah li-S.)과 제7 잘리야 경(J liya-S.)에는 열 가지 無記說이 주제로 나타난다. 주지하는 바대로 십무기설은 우주의 시간적 유한ㆍ무한, 공간적 유한ㆍ무한, 인간 존재의 정신과 육체의 같고ㆍ다름, 끝으로 사후 존재의 있고ㆍ없음 등의 형이상학 핵심 문제들에 대한 붓다의 입장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어 제8 큰 사자 울음 경(Mah sihan da-S.)에서는 당시 수행자들의 주요 실천 방법이었던 고행이 73가지로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제9 폿타파타(Potthap da) 경은 自我( tman)의 규명이 주요 주제로 등장하며, 제11 케밧타(kevatta) 경에서는 당시의 논쟁 거리로 보이는 신통과 기적이 그 주제이며, 제12 로힛차(Lohicca) 경은 교육철학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처럼 장니카야 제1권은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경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2. 제2권…신학적 주제
제2권의 경들은 모두 10개인데 주로 신학적인 주제를 언급한다. 제1 큰 이야기 경(Mah pad na-S.)은 비파씨(Vipassi) 부처님부터 고타마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과거 일곱 부처님의 탄생ㆍ출가ㆍ성도ㆍ전법 등 열 가지 부분을 조목조목 설하고 있다. 이에 제2 큰 원인 경(Mah nid na-S.)은 傳法의 내용으로써 12연기 무아설 七識住 八解脫등을 제시하고 있으며, 제3 큰 반열반 경(Mah parinibh na-S.)은 열반에 즈음한 기사들을 기록하고 있다. 요약컨데 부처님에 대한 언급이다. 물론 부처님은 신이 아니다. 하지만 인도의 전통적인 천신들이 원시불교 내에서는 절대타자의 창조신이 아니라 선한 업의 과보로서의 신으로 포섭되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신학적 존재로서 부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신학적 존재란 대위력과 神力이 있는 이상적 존재 정도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어 제4 마하수다싸나(Mah sudassan) 경에는 전륜성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의 수준이 四禪 四無量心을 닦은 자임을 알려 준다. 그리고 제5 자나바사바(Janava sabha) 경에는 사천왕천 삼십삼천 제석천신 범신 등이 등장하는데 이 중 범신은 사신족 사념처 팔정도 預流果 一來果등에 대해 설법한다. 또 제6 마하고빈다(Mah govinda) 경에는 제석천신과 범신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범신은 사무량심 중 悲무량심에 대해 설하고 범신의 세계에는 찾아볼 수 없는 번뇌를 설한다.
그리고 제7 큰 모임 경(Mahsamaya-S.)에는 사천왕이 그의 권속들과 함께 모이는 사건을 보여 주며, 제8 삭카 질문 경(Sakka-pa ha-S.)에는 제석천신이 나타나는데 그는 부처님 전에서 당당히 예류과에 들었노라고 自記하고 있다. 이처럼 제2권은 신학적 존재들의 등장과 그들의 설법으로 구성되어 있어 결국 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3. 제3권…역사적 주제
제3권은 모두 11개의 경전들을 싣고 있는데 역사적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우선 제1 파티카 경(P thika-S.)은 고행과 神變(기적)이 간단히 소개된 뒤 우주의 시간적 전개 과정이 태초에 대한 앎(大初智 P .agga ; sk.agra-j )이라는 이름 아래 설해지고 있다.
제3 바퀴 굴림 경(Cakka vatti-S.)에서는 전륜왕을 중심으로 한 중생의 역사가 소개되고 제4 태초 경(Agga a-S.)에서는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포함한 세간의 역사가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그리고 제5청정경(Sampas daniya-S.)과 제10 합송경(Sa giti-S.)과 제11 십상경(Dasuttara-S.)은 설법하는 자가 모두 사리불(S riputta)로 되어 있다. 사리불은 부처님의 제1 제자로서 부처님의 後事를 맡은 인물이었다. 그러한 사리불의 설법이 실린 이 세가지 경우 결국 우리에게 불법의 역사적 전개라는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6 믿음경(P s dika-S.)은 여래 사후의 승단의 자세에 대해서 설하고 있는 경이다. 이상의 4개 경을 통하여 불법 전개의 역사성이 강조된다고 본다. 이처럼 제3권은 주로 역사적 주제의 경들이 실려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4. '큰 반열반 경'의 한 귀절
장니카야 34개 경을 다른 니카야보다 긴 길이의 경전들이 실려 있다. 이 경들 중 가장 긴 것이 '큰 반열반 경'(제2권 제3경)이다. 그 중 제9장 '벨루바가마카에서 우안거에 드심'을 보면, 부처님은 설할 수 있는 법을 남김없이 모두 설하셨음을 공언한다. 곧, "아난다야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게 법을 설하였다. 아난다야, 여러 법에 있어 여래에게는 스승으로서의 인색함이란 없었다." (desito, nanda, may dhammo anantara ab hira karitv . natth' nanda, Tath gatassa dhammesu cariyamutthi)라고 공언하신다.
경전은 붓다의 진정한 유산이다. 그 유산을 남김에 있어 부처님은 아까워함이 없으셨다. 그에 보답하는 길은 경전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번역과 보급과 그를 통한 깨달음일 것이다.
중아함과 중니카야
Ⅰ. 머리말
장아함 장니카야가 문제의 제시에 초점이 두어진다면 中阿含과 中尼柯耶는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의 형식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비교적 자세하다라는 표현은 다음에 다룰 상응니카야와 중지니카야에 비해 자세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설명의 형식으로'라는 표현은 전문적인 述語로는 '廣說' 또는 '分別'이라고 하는데, 주요한 주제에 대해서 이처럼 광설하고 분별하는 경우가 중아함 중니카야에는 많이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짧은 글 속에서는 그 설명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단지 그 전체적인 면모를 전하는데 힘쓸 뿐이다. 그러면 먼저 중아함의 구성과 그 내용을 간단히 언급해 보고 이어 중니카야의 소개에 들어가겠다.
Ⅱ. 중아함
東晋의 瞿曇僧伽提婆가 AD 397년에서 398년에 걸쳐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중아함은 사아함 중에서 그 양이 가장 방대하니 전체의 ⅓인 60권 분량이다. 이것은 총 222개 경을 합장하고 있는데, 152개 경을 담고 있는 대응하는 남전의 중니카야보다도 훨씬 풍부한 상황이다. 중아함은 이처럼 양적으로 풍부할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지극히 중요한 측면을 많이 지니고 있고 또한 극적인 흥미를 일으키는 경들도 많이 지니고 있다.
이러한 중아함의 전체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는 데는 品별로 소개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모두 222개 경을 내용, 형식 또는 주제에 있어 일로 10개 내지 14개 정도의 경들로 나누어 한 품으로 묶은 뒤 모두 18개 품으로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아울러 현존 중아함은 각 경이 끝나거나 각 품이 끝날 때 몇字가 씌여졌는가를 세어서 기록해 놓고 있다.
이것은 번역에 대단한 권위를 부여하는 조처로서 일단 완성된 번역문으로부터 한 자라도 더하거나 빼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총 451,783字 정도로 세어진다.
사실 18개 품 중에서 大品이 둘 나온다. 제11품도, 제16품도 모두 대품의 이름을 지니는 것이다. 물론 그 내용은 전자의 대품의 경우 주제별로 경들이 배열되고 후자의 경우 등장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경들이 배열되어 있다. 하지만 어쨌던 두 품의 이름이 같은 것은 양적으로 제11품은 가장 크고(총 50,364字) 제16품은 세 번째 이어서(총39,912字) 그 크기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제7 長壽王品의 44,947字인데 이곳은 長壽王의 이름이 品名으로 더 적합하여 大品으로 하지 않았고, 따라서 세번째로 큰 제 16品이 大品의 이름을 받은 것으로 보임)
이처럼 품의 이름이 같은 것이 한짝 있듯이 경의 이름이 같은 것도 13짝에 이른다. 이중 (29)대구치라경과 (211)대구치다경을 제외하면 모두 같은 품 속에서 앞뒤로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내용도 비슷하여 큰 혼동은 없을 것이다. 어쨌던 이상의 특성으로 중아함은 그 형식이나 내용상에서 품의 배열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각 품과 그 품의 첫째와 마지막 경을 소개하고 간혹 설명을 덧붙이겠다.
1. 七法品 (1)善法經∼(10)漏盡經
2. 業相應品 (11)鹽喩經∼(20)坡羅密經
3. 舍利子相應品 (21)等心經∼(31)分別聖諦經
4. 未曾有法品 (32)未曾有經∼(41)手長者經
5. 習相應品 (42)何義經∼(57)卽爲此丘說經
6. 王相應品 (58)七寶經∼(71) 肆經
7. 長壽王品 (72)長壽王本起經∼(86)說處經
8. 穢品 (87)穢經∼(96)無經
9. 因品 (97)大因經∼(106)想經
10. 林品 (107)林經∼(116)瞿曇彌經
11. 大品 (117)柔軟經∼(141)喩經
12. 梵志品 (142)雨勢經∼(161)梵摩經
13. 根本分別品 : 이 품에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분별이 이루어져 주목된다. 곧 (162)分別
六界經 (163)分別六處經 (164)分別觀法經 (171)分別大業經.등
14. 心品 (172)心經∼(181)多界經
15. 雙品 (182)馬邑經∼(191)大空經
16. 大品 (192)加樓鳥陀夷經∼(201) 帝經
17. 哺利多品 : (202)指齊經으로 시작하는 이품에는 (210)法樂比丘尼經과 (211)大拘 羅
經과 같은 중요한 敎理問答의 경들이 나온다.
18. 例品 (212)一切智經∼(222)例經
Ⅲ. 중니카야
한역의 중아함에 비해 중니카야는 152개 경의 배열에 어떤 특별한 분류 기준을 세우지 않은 듯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152개 경의 경명과 그 경의 주제를 순서대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 근본 법문 경 : 범부와 성인의 차이
(2) 일체역류함 경 : 번뇌를 없애는 다섯가지 방법
(3) 법상속 경 : 붓다의 유산
(4) 공포 경 : 자신있는 수행 생활
(5) 허물 없음 경 : 네종류의 사람
(6) 소망 경 : 수행자의 소망 17가지
(7) 옷 경 : 진정한 우정도 해탈의 방법이 됨
(8) 내핍 고행 경 : 觀法과 선정 수행의 결과
(9) 바른견해 경 : 붓다 가르침의 네 단계
(10) 기억확립 경 : 네가지 일으켜야 할 기억…몸ㆍ느낌ㆍ마음ㆍ법
(11) 사자 울음 경 ① : 궁극적인 것의 모습
(12) 사자 울음 경 ② : 붓다의 십력과 四無所畏
(13) 괴로움 근간 경 ① : 애욕의 정화
(14) 괴로움 근간 경 ② : 애욕과 성자
(15) 유추 경 : 말을 잘하기 위한 요건
(16) 마음 황폐 경 : 황폐한 마음과 속박된 마음
(17) 밀림 경 : 수행자의 소망 다섯가지
(18) 꿀 덩어리 경 : 붓다는 세상과 다투지 않으심
(19) 두종류 사색 경 : 버려야 할 사색과 지킬 사색
(20) 사색위상 경 : 바른 사색의 방법론
(21) 톱 비유 경 : 수행자의 자세와 올바른 언어 생활
(22) 뱀 비유 경 : 붓다 설법의 목적
(23) 개미탑 경 : 버려야 할 번뇌
(24) 차인도 경 : 청정한 수행의 목적
(25) 미귀 경 : 네종류의 수행자와 죽음을 벗어나는 자
(26) 파사라시 경 : 붓다의 보살일 때의 수행과정
(27) 코끼리 발 비유경 ① : 붓다의 경지
(28) 코끼리 발 비유경 ② : 五取蘊과 四聖諦
(29) 고갱이 비유경 ① : 수행의 목적…非時解脫
(30) 고갱이 비유경 ② : 수행의 목적…不動心解脫
(31) 고심가 경 ① : 교단의 화합
(32) 고심가 경 ② : 이상적인 수행자의 모습
(33) 목동 경 ① : 수행자는 목동에 비유됨
(34) 목동 경 ② : 붓다와 다섯 성자
(35) 삿차카 경 ① : 붓다의 경계
(36) 삿차카 경 ② : 붓다의 보살일 때의 수행…苦行
(37) 갈애 소멸 경 ① : 갈애의 소멸에 의한 해탈
(38) 갈애 소멸 경 ② : 식별을 연기한 것
(39) 아싸푸라 경 ① : 수행자의 요건
(40) 아싸푸라 경 ② : 수행자의 바른 길
(41) 살레야카 경 ① : 善因善果 惡因惡果
(42) 베란자 경 ① : 위와 같음
(43) 교리문답 경 ① : 대구치라와 사리불의 法談
(44) 교리문답 경 ② : 법락비구니와 비사카의 법담
(45) 법 받음 경 ① : 네가지 삶의 양식
(46) 법 받음 경 ② : 또 다른 네가지 삶의 양식
(47) 사량경 : 붓다에 대한 건전한 조사와 참된 신앙
(48) 코삼비야 경 : 正見者의 일곱가지 앎
(49) 범신 초청 경 : 바카 범신의 邪見
(50) 마신 퇴치 경 : 악인을 대하는 태도
(51) 칸다라카 경 : 네 종류의 고행
(52) 앗타카나가라 경 : 해탈의 한 방법
(53) 배움 경 : 배움의 길
(54) 포탈리야 경 : 시급히 버려야 할 8가지
(55) 생활 경 : 올바른 생활과 공양
(56) 우팔리 경 : 정신적인 것의 중요성과 우팔리의 교화
(57) 개 행동 경 : 개로 태어나는 자와 네 종류의 업
(58) 아바야 왕 동자 경 : 이익이 있을 때 사실을 말할 것
(59) 많은 느낌 경 : 느낌의 종류와 가장 고상한 즐거움
(60) 절대 경 : 바른 견해의 중요성
(61) 암발랏티카 라훌라 교계 경 : 악업의 정화
(62) 마하타훌라 교계 경 : 수행의 효과
(63) 말루캬 ① : 형이상학에 대한 붓다의 입장
(64) 말루캬 ② : 대표적인 다섯가지 결박
(65) 밧달리 경: 깨달음에 있어서 스승의 중요성
(66) 메추라기 비유경 : 경계해야 할 즐거움
(67) 넷 경 : 수행자가 두려워해야 할 네가지
(68) 날라카파나 경 : 죽은 제자의 내생을 말씀하시는 이유
(69) 골리야니 경 : 대중생활의 규범
(70) 키타기리 경 : 佛法은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것
(71) 데빗자밧차 경 : 궁극적인 경지
(72) 악기밧차곳타 경 : 붓다의 경지
(73) 마하밧차곳타 경 : 악업의 뿌리
(74) 긴 손톱 경 : 슬기로운 자
(75) 마간디야 경 : 하늘의 즐거움
(76) 산다카 경 : 아라한의 경지
(77) 사쿨루다이 경 ① : 붓다를 존경하게 되는 참된 이유
(78) 까까머리 수행자 경 : 絶對善을 이루게 하는 열가지
(79) 사쿨루다이 경 ② : 즐거움만 존재하는 곳에 이르는 길
(80) 베카나사 경 : 빨리 깨닫는 자
(81) 병 제작자 경 : 믿음은 수행의 시작
(82) 국왕 경 : 출가의 이유
(83) 마카데바 경 : 梵天의 세계를 넘어서는 수행
(84) 꿀 경 : 마하캇차나 장로의 설법
(85) 보리 왕자 경 : 붓다가 보살일 때의 고행과 禪定
(86) 앙굴라마라 경 : 앙굴라마라의 깨달음
(87) 기쁨 일어남 경 : 자신에 대한 집착
(88) 외투 경 : 붓다의 경지
(89) 교법 사당 경 : 깨달음과 유추
(90) 칸나캇탈라 경 : 바른 정진의 결과
(91) 범신 수명 경 : 붓다이신 이유
(92) 셀라 경 : 평등
(93) 앗살라야나 경 : 행위는 계급에 앞선다
(94) 고타푸카 경 : 귀의의 대상
(95) 창키 경 : 진리의 보호
(96) 에수카리 경 : 선업과 수행이 인간을 고귀하게 만든다
(97) 다난자니 경 : 지옥에 가는 자
(98) 바셋타 경 : 평등과 고귀함의 근거
(99) 수바 경 : 바라문과 붓다의 차이
(100) 상가라바 경 : 여러 수준의 종교인들
(101) 데바다하 경 : 자이니즘과 그에 대한 비판
(102) 다섯 경 : 죽은 뒤에 대한 갖가지 견해
(103) 킨티 경 : 언어 생활과 열반
(104) 사마가마 경 : 是非의 위험성과 그 근거
(105) 수낙캇타 경 : 해탈과 교만
(106) 부동 적절 경 : 不動의 경지에 이르는 道
(107) 산수 목련 경 : 차례에 맞추어 불법은 가르쳐 짐
(108) 목동 목련 경 : 正法至上主義
(109) 푼나마 경 ① : 無我說과 業의 輪廻
(110) 푼나마 경 ② : 바르지 못한 자
(111) 지속 경 : 사리불의 수행
(112) 찹비소다나 경 : 해탈해야 할 대상
(113) 바른사람 경 : 갈애를 소멸하고 선정을 갖추고 겸손한 자
(114) 실천 경 : 바람직한 마음가짐과 견해
(115) 많은 계층 경 : 여러 계층과 포섭처, 그리고 緣起
(116) 이시길리 경 : 하나를 원만히 깨달은 붓다의 모습
(117) 근사십 경 : 두 종류의 바른 길
(118) 호흡 기억 경 : 수행의 시작으로서의 호흡법 安般念
(119) 몸 기억 경 : 몸의 부정함을 관찰하는 수행 身至念
(120) 결합발생 경 : 善趣에 나는 방법
(121) 빈것 경 ① : 공의 의미
(122) 빈것 경 ② : 불제자의 자격
(123) 희유 경 : 붓다에게 존재하는 희유한 일들
(124) 바쿨라 경 : 열반하는 날 열반을 알린 바쿨라 장로
(125) 단타부이 경 : 몸·느낌 ·마음 ·법의 네가지에 대한 기억
(126) 부미자 경 : 팔정도의 공덕
(127) 아누룻다 경 : 다양한 빛의 세계
(128) 때 경 : 마음의 때와 삼매
(129) 우자·현자 경 : 지옥과 인간 세상의 차이
(130) 천신 심부름 경 : 저승에서 온 사자
(131) (132) 현성 일야 경 ①② : 성인의 법
(133) (134) 현성 일야 경 ③④ : 五取蘊에 대한 이해는 수행의 시작
(135) 업분별 경 ① : 중생은 업의 상속자
(136) 업분별 경 ② : 업과 과보의 상속
(137) 여섯 포섭처 분별 경 : 바람직한 근심과 부러워 함
(138) 요약 분별 경 : 차원이 다른 다섯가지 맛(味)
(139) 무해 분별 경 : 가운데 길 中道
(140) 계층 분별 경 : 지혜 ·진실 ·버림 · 고요함에는 머물만 함
(141) 사실 분별 경 : 預流果와 四諦의 分別
(142) 보시 분별 경 : 보시의 대상
(143) 급고독 장자 하교 경 : 출가자의 교법
(144) 찬나 하교 경 : 괴로움의 끝 …열반
(145) 푼나 하교 경 : 부루나존자의 수행
(146) 난다카 하교 경 : 수행과 해탈
(147) 라훌라 하교 경 : 완전한 해탈에 이르게 하는 길
(148) 여섯 여섯 경 : 六六法은 훌륭한 가르침
(149) 큰 여섯 포섭처 경 : 六六法과 해탈
(150) 나가라 빈데야 경 : 존경 받는 종교인
(151) 걸식청정 경 : 세상을 다닐 때의 수행자의 자세
(152) 감관수행 경 : 감관을 닦는 방법
Ⅳ.맺는말
끝으로 “붓다의 유산은 法이다. Dham-m day da”라는 말을 새기면서 중아함 중니카야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맺고자 한다.
상응니카야-남방의 잡아함
팔리 삼장 중의 경장에 속하고 경장 중에서도 세번째가 相應尼柯耶이다. 상응니카야(Sayutta-nik ya)는 경장의 다른 니카야에 비해 더욱 교리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모든 니카야들이 붓다의 말씀과 행적을 중심으로 하여 기록하고 있고, 그 말씀과 행적은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상세하고도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또한 그러한 전달은 결국 교리이다. 따라서 어떤 니카야이든 교리적이지 않은 것이 없겠으나 이 상응니카야는 분명 그점에서 독특한 면이 있다. 벌써 그 편찬 방식에서부터 교리적임을 알 수 있다. 표면상 장니카야가 각 권의 이름을 계율 근간 품(Slakkhandha vagga), 큰 품(Mah vagga), 파티카 품(Pathika vagga)으로 나누거니와 이는 형식적인 특성에서 그 이름이 명명되고 있다.
특히 파티카 품은 장니카야 제3권의 첫째 경의 이름을 딴 것에 불과하다. 중니카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근본 50경 모음(M lapannasaka), 가운데 50경 모음(Majjhimapannasaka), 50경 이상 모음(Upa-ripannasake)이라는 각 권의 이름은 지극히 물량적인 것이다. 그리고 증지니카야도 교법의 수에 입각해 1법 2법 3법부(Ekakaduka-tika nip t ), 4법 5법부(Catuka-Pa caka nip t ), 6법 7법 8법부(Chaka-sa aka-atthaka nip t ), 9법 10법 11법부(Navaka-dasaka-ek dasaka nip t )로 각 권의 이름을 주고 있다. 이에 비해 상응니카야는 제1권 게송을 지닌 품(Sag tha vagga)과 큰 품(Mah vagga)을 제외하고는 연기 품(Nid na vagga), 근간 품(Khandha vagga), 여섯 포섭처 품(Sal yatana vagga)등과 같이 교설의 이름이 바로 전제된다.
장니카야가 주로 철학, 신학 및 역사적인 문제의 정돈과 제시에 초점을 두고, 다른 니카야는 그에 비해 붓다의 답변과 해결을 제시하는 관계를 지닌다. 특히 상응니카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짤막한 길이의 각 경전들은 가장 원초적인 붓다의 음성을 쉬이 느낄 수 있으며, 붓다의 교법에 대한 사유와 수행의 길로 매진케 하는 힘이 된다. 삼장 중 붓다의 교법(Dhamma)은 경장에 들어 있고 경장 중에서도 상응니카야에서 두드러지는 것이다.
상응니카야는 5품 56상응 2941개 경으로 구성된 방대한 경전군이다. 따라서 장ㆍ중니카야처럼 全經을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고 아쉽지만 '상응'을 중심으로 개설할 수 밖에 없다.
상응니카야는 총 56상응에 이르므로 그것만해도 장니카야의 경 수(34경)를 압도한다. 그리고 相應이라는 말 자체가 교리적으로 상응하는 경들을 모았다는 의미이므로 각 상응을 빠뜨리지 않고 슬기롭게 음미해본다면 상응니카야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첫째, 게송을 지닌 품(有偈品)은 일반인 및 초보자 등을 위한 포교적인 성격이 짙어서 다분히 윤리적이고 소박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교리적인 내용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외에 네 품은 교리적인 내용을 충분히 전하고 있다. 특히 제2 연기품, 제3 조간품, 제4 여섯 포섭처 품은 이론(解. pari eyya-dhamma)적인 교리를 설하고, 제5 큰품은 실천(行. bh van )의 교리를 설하고 있어 불교공부를 꾀하는 이에게 참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정보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Ⅱ
상응니카야는 그 체계성으로 말미암아 56개 상응의 명목만을 살펴도 전체 흐름을 다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과 함께 간단한 설명을 붙이며 전체를 소개하고자 한다.
1. 게송을 지닌 품
1) 천신 상응…천신(deva)과 부처님의 대화
2) 천자 상응…천신의 아들들과 부처님의 대화
3) 코살라 상응…코살라 국왕에 대한 일화들
4) 마신 상응…악마(M ra p pimant)에 대한 꾸짖음
5) 비구니 상응…비구니들의 수행을 찬탄하는 내용
6) 범신 상응…범신(Brahman)과의 대화
7) 사제 상응…바라문교도들과의 관계에 얽힌 이야기
8) 방기사 상응…대 시인 방기사의 시 모음집
9) 숲 상응…숲에 살며 방일하는 자의 이야기 등
10) 악신 상응…야차(Yakkha)들을 계도하는 내용
11) 제석 상응…제석(Sakka dev na Inda)의 선행
2. 연기품
12) 연기 상응…十二緣起등의 교설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
13) 이해 상응…진리의 現觀(abhisamaya)에 관한 내용
14) 계층 상응…十八界와 지ㆍ수ㆍ화ㆍ풍 四界의 가르침
15) 無始 상응…윤회의 無始無終에 대한 가르침
16) 카싸파 상응…가섭존자에 관한 이야기
17) 이익 존경 상응…세속의 이익에 무관심하라는 가르침
18) 라훌라 상응…라훌라 존자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19) 락카나 상응…전생의 악업에 대한 현생의 苦果를 설하는 상응
20) 비유 상응…대표적인 비유를 모아 둔 것
21) 비구 상응…사리불ㆍ목련등 비구제자들의 일화 소개
3. 조간품
22) 조간 상응…五蘊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
23) 라다 상응…오온설의 응용
24) 견해 상응…견해의 기원에 관한 가르침
25) 나타남 상응…六六法, 六界, 五蘊의 나타남에 대하여
26) 일어남 상응…육육법등의 일어남에 대하여
27) 번뇌 상응…육육법 내지 오온 등과 번뇌
28) 사리풋타 상응…사리불 존자와 禪定에 대하여
29) 용 상응…용(N ga)에 관하여
30) 금시조 상응…용을 잡는 금시조에 관하여
31) 건달바 상응…건달바(Gandharva)와 여러 향기와의 관계
32) 구름 상응…구름 천신(雲天)의 종류
33) 선정 상응…선정을 완수하기 위한 요건에 대해 설함
4. 여섯 포섭처품
34) 여섯 포섭처 상응…六根, 六境, 六識, 六觸, 六受, 六愛등 六六法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
35) 느낌 상응…樂 苦 不苦不樂의 느낌 등에 대하여
36) 여인 상응…여인의 선행과 德目
37) 잠부카디카 상응…열반을 얻기 위한 조건들
38) 사만다카 상응…위와 같음
39) 목갈라나 상응…목련존자의 수행에 대하여
40) 칫타 상응…칫타 거사의 심오한 질문
41) 촌장 상응…여러 직업의 촌락主에 대한 설법
42) 無爲 상응…무위법을 얻기 위한 수행
43) 無記 상응…열가지 결정적인 답을 회피한 것들에 대하여
5. 큰품
44) 길 상응…八正道에 대하여
45) 깨달음 인자 상응…七覺支에 대하여
46) 기억확립 상응…四念處에 대하여
47) 감관 상응…五根에 대하여
48) 바른노력 상응…四正勤에 대하여
49) 힘 상응…五力에 대하여
50) 하늘 발 상응…四禪足에 대하여
51) 아누룻다 상응…아나율 존자의 수행에 대하여
52) 선정 상응…色界四禪에 대하여
53) 호흡 상응…安 念 三昧에 대하여
54) 흐름이름 상응…四預流支에 대하여
55) 진리 상응…四聖諦에 대한 교설
Ⅲ
최후의 「56) 진리상응 제11 전법륜경」의 經說로써, 상응니카야에 대한 소개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출가자는 두 가지에 빠지면 안된다. 탐착에 빠지는 것과 고행에 빠지는 것이다. 이 양 끝에 가지 않는 가운데의 길이 如來에 의해 깨달아졌으니 열반을 향해 전개된다. 그 길은 곧 여덟가지 거룩한 길 '八正道'이다. 괴로움(苦), 집기(集), 멸함(滅), 길(道)에 대하여 세번씩 돌아 12가지 특질(三傳十二行相)을 파악함으로써(나=붓다) 천신ㆍ범신ㆍ마신을 포함한 세간과 모든 중생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깨달음을 얻으셨다."
증지니카야-남방의 증일아함
增支라는 이름은 이 니카야의 취급방식이 교설들의 수적인 특성을 살려 차례대로 묶고 있는 방식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취급방식의 정신과 내용은 經藏중의 다른 책들과 비교할 때 대단한 것이다. 이 니카야는 2308개의 經들을 먼저 品으로 묶고 그 품들을 모아 部를 형성하거니와 그러한 부가 11부에 이른다. 따라서 이 니카야의 개설을 위해 우리는 경 하나하나에 초점을 둘 수는 없을 듯하다. 그보다는 200개를 조금 넘는 품에 초점을 두어 차례대로 살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증지라는 이름은 아함에 있어서는 增一이거니와 이는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데 『밀린다 질문 경Milindapa ha』과 같은 유명한 책도 자신을 증일(Ekottara)이라고 부르고 있듯이, 이 증지라는 이름은 때와 집단에 관계없이 유행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교설을 숫적인 특징으로 분류 정리하는 것은 오직 이 니카야만의 특징은 아니다. 물론 이 니카야가 그러한 방식의 전체적이고도 종합적인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똑같은 방식이 앞의 니카야들 중 어떤 부분들에도 적용되었다. 장니카야의 합송 경(Sa gt Sutta)과 십상 경(Dasuttara Sutta)이 있고, 소니카야 소송경의 동자 질문 경(Kum rapa ha Sutta), 장로게(Therag th ), 장로니게(Therg gh ), 여시어 경(Itivuttaka) 및 기타 경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증지니카야의 약 2천 3백여개의 경은 漢譯阿含 등에 불과 400개 정도만이 대응 경전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부파간의 이견차가 가장 심한 것이 증지니카야 및 증일 아함 쪽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증지니카야에는 숫적 특징에 의한 편집이라는 측면 외에는 그 내용 이해에 별다른 기준을 발견할 수 없다. 있다면 人施設(puggala-pa atti)에 관련된 가르침이 많다는 정도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현재의 증지니카야의 편찬 순서에 맞추어서 주요하고 음미할 만한 가르침을 소개하는 것으로 개설을 대신하고자 한다.
여인의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 잡아 머문다. (1법부, 제1색품)
마음은 가장 가볍게 회전한다. 마음은 찬란한 것이다. 바깥에서 온 때에 의해 더럽혀질 뿐이다. 그 바깥의 때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을 닦는다. 한순간 우정의 마음[慈心]을 실천해도 이는 공허하지 않은 선정을 닦으며 지낸 것이다. (1법부 제6순간 품)
붓다의 견해를 완성한 자는 결합[行]을 영원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즐거움으로 보지 않는다. 자아로 보지 않는다. 부모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 아라한 성자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 사악한 마음으로 붓다의 몸에서 피를 흘리게 하지 않는다. 승단을 파괴하지 않는다. 다른 스승을 모시지 않는다. (1법부 제15경우아니 품)
두 법이 밝힘[明]에 이바지한다. 멈춤[止]과 관찰[觀]이다. 멈춤을 수행하면 마음의 닦임을 그 이득으로 경험하게 된다. 마음이 닦이면 탐착이 버려짐을 그 이득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관찰을 수행하면 지혜의 닦임을 그 이득으로 경험하게 된다. 지혜가 닦이면 밝힘아닌 것[無明]이 버려짐을 그 이득으로 경험하게 된다. 탐착의 때가 덮힌 마음은 해탈하지 못하며 밝힘 아닌 것의 때가 덮힌 지혜는 닦이지 못한다. (2법부 제3어리석음 품)
바른 사람이란 은혜를 알고 느끼는 자이다. 바르지 못한 사람이란 은혜를 알고 느끼지 않는 자이다. (2 법부 제4 고른 마음 품)
애욕의 즐거움보다 애욕을 떠남에서 생기는 즐거움이 뛰어나다. 재물의 즐거움보다 재물을 초월한 즐거움이 더 뛰어나다. 재가의 즐거움보다 출가의 즐거움이 더 뛰어나다. 몸에 속한 즐거움보다 마음에 속한 즐거움이 더 뛰어나다. 유쾌함에서 생긴 즐거움보다 당당히 바라보는 경지에서 생긴 즐거움이 더 뛰어나다. 삼매가 없는 즐거움보다 삼매를 갖춘 즐거움이 더 뛰어나다. 색의 즐거움보다 색 없는 즐거움이 더 뛰어나다. (2법부 제7즐거움 품)
수행 중인 제자를 퇴전하게 하는 것이 있다. 분노와 증오, 위선과 심술, 시기와 인색, 기만적임과 교활함, 부끄러워하지 않음과 미안해 하지 않음이 그것이다. (2법부 제16분노 품)
계율이 정해진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뛰어난 승단을 이루기 위해, 편안한 승단을 이루기 위해, 마음이 나쁜 사람을 억제하기 위해, 상냥한 제자를 편히 지내도록 하기 위해, 믿지 못한 자의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 바른 법의 유지를 위해 계율이 제정된 것이다. (2법부 제17목적 품)
업이 일어나는 근거는 탐욕과 진에와 치암이다. 탐욕과 진에와 치암에 의해 업이 지어진 곳에 자아와 같은 것이 존재하면 그곳에서 그 업이 익게 된다. 업이 익는 곳에서 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 현재이든 미래이든 반드시 받게 된다. (3법부 제4천신심부름 품)
아침에 인색한 마음 점심 때는 시기하는 마음 저녁에는 애욕과 탐착의 마음을 가지고 지내는 여인들은 죽어서 지옥에 태어난다. (3법부 제13쿠시나라 품)
사랑스러워서 언제나 원하지만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네가지가 있다. 곧 재산과 영예와 장수와 죽은 뒤 하늘에 나는 것이다. 이 네가지를 얻기 위해선 바른 믿음, 바른 계율, 바른 보시, 바른 지혜의 넷을 갖추어야 한다. 바른 믿음이란 붓다의 깨달음을 믿는 것이다. 바른 계율이란 살생ㆍ도둑질ㆍ사음ㆍ거짓말ㆍ음주를 멀리하는 것이다. 바른 보시란, 인색함 없이 보시하면서 기뻐할 줄 아는 것이다. 바른 지혜란 다섯 덮개가 지혜를 가리는 장애이니, 이것을 마음의 때라고 여겨 제거해 버리면 된다. (4법부 제7팟타캄마 품)
첫째 선정에 들어서 그곳에 맛들여 오래 즐기다 죽은 자는 梵衆天에 태어난다. 이곳의 수명은 1겁이다. 둘째, 선정에 들어서 그곳에 맛들여 오래 즐기다 죽은 자는 光音天에 태어난다. 이곳의 수명은 2겁이다. 셋째, 선정에 들어서 그곳에 맛들여 오래 즐기다 죽은 자는 遍淨天에 태어난다. 이곳의 수명은 4겁이다. 넷째, 선정에 들어서 그곳에 맛들여 오래 즐기다 죽은 자는 廣果天에 태어난다. 이곳의 수명은 5겁이다. 그런데 범부는 이들 하늘 세상에 태어나 오랫동안 살다가 수명이 다하여 죽게 되면 세가지 나쁜 곳에 나기도 한다. 그러나 붓다의 제자들은 모두 그곳에서 반열반한다. (4법부 제13공포 품)
4아승지 겁이란 첫째, 우주가 전개되는 동안의 겁이 제1 아승지 겁이다. 둘째, 전개된 우주가 그 모습으로 머무는 동안의 겁이 제2 아승지 겁이다. 셋째, 우주가 소멸되어 가는 동안의 겁이 제3 아승지 겁이다. 넷째, 소멸된 우주가 그 모습으로 머무는 동안의 겁이 제4 아승지 겁이다. (4법부 제16감관 품)
만나기 어려운 다섯 사람이 있다. 붓다를 만나기는 어렵다. 붓다의 교법을 설하는 자를 만나기도 어렵다. 붓다의 교법을 아는 자를 만나기도 어렵다. 붓다의 교법을 그대로 실천하는 자를 만나기도 어렵다. (15법부 제15티칸다키 품)
아직 해탈을 완벽하게 이루지 못한 제자는 다섯가지에 의해서 해탈에서 물러서게 된다. 일을 즐기고 말을 즐기고 잠을 즐기고 집단을 즐기고 해탈한대로 마음을 살피지 않는 것이 그 다섯이다. (위와 같음)
말이 많으면 다섯 가지 허물이 생겨 꾸짖음을 받게 된다. 말을 많이 하게 되면 그 가운데 거짓말을 하게 된다. 또 거친말을 하게 된다. 또 험담을 하게 된다. 또 실없는 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죽어서 악취에 가게 된다. 말을 많이 하면 이러한 다섯 허물이 생기므로 꾸짖음을 받게 된다. (5법부 제22꾸짖음 품)
악행을 하게 되면 다섯가지 환난이 있게 된다. 첫째, 스스로가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둘째, 슬기로운 자들이 알고서 꾸짖는다. 셋째, 악명이 일어난다. 넷째, 죽을 때 우둔하게 죽게 된다. 다섯째, 죽은 뒤 악취에 떨어진다. (5법부 제25악행 품)
여섯가지를 버리지 않고서는 몸에서 몸을 보며 지낼 수 없고, 느낌에서 느낌을, 마음에서 마음을, 법에서 법을 보며 지낼 수 없다. 그것은 일을 즐기는 것, 말을 즐기는 것, 잠을 즐기는 것, 모임을 즐기는 것, 감관을 지키지 못하는 것, 먹는 데서 양을 모르는 것이다. (6법부 수행자 품)
일곱가지 결박을 버리고 끊기 위해 청정한 수행이 제시된다. 나쁜 버릇ㆍㆍ걸림ㆍ견해ㆍ의혹ㆍ교만ㆍ존재에의 탐착ㆍ밝힘 아닌 것 등이 일곱 결박이다. 아울러 시기함과 인색함도 결박이다. (7법부 제1활 품)
살생자는 단명하게 된다. 도둑질을 한 자는 재산 손실을 겪게 된다. 음행자는 적의 두려움을 겪게 된다. 거짓말을 한 자는 있지도 않은 일을 듣게 된다. 험담을 한 자는 자기 친구와의 관계가 부서진다. 거친 말을 한 자는 듣기 싫은 소리를 듣게 된다. 쓸데없는 말을 한 자는 받아 들일 수 없는 말을 듣게 된다. 음주자는 정신을 잃게 된다. 이상의 업을 지은 자는 이상의 과보가 최소한의 것이다. (8법부 제4보시 품)
아라한의 결과를 똑똑히 보기 위해서는 탐착ㆍ진에ㆍ치암ㆍ화냄ㆍ증오ㆍ위선ㆍ심술ㆍ시기ㆍ인색함의 아홉을 버려야 한다. (9법부 제6안온함 품)
승단을 파괴한 자는 劫에 걸치는 과실을 범한 것이니, 그 겁 동안을 지옥에서 보낸다. 승단을 화합시킨 자는 겁에 걸치는 범신의 복을 쌓은 것이니, 그 겁 동안에 하늘의 즐거움을 누리며 보낸다. (10법부 제4우팔리 품)
청정한 수행자 또는 성자를 욕하고 비난한 자에게는 다음 열한가지가 예상된다. 얻지 못한 것은 결국 얻지 못한다. 이미 얻은 것은 잃어버린다. 바른 법 속에서 정화 받지 못한다. 바른 법에 대해 거만하게 된다. 청정한 수행을 싫어하게 된다. 또 다른 때묻은 죄를 저지른다. 계율을 파괴하고 속퇴 한다. 무거운 병을 얻게 된다. 미치거나 마음의 호단을 얻게 된다. 우둔하게 죽는다. 죽어서 지옥에 간다. (11법부 제1의지 품)
이상과 같이 法數에 맞추어서 비교적 쉽거나 좀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들을 간단히 소개해 보았다. 이것으로도 증지니카야의 전체 흐름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자위하며 글을 맺도록 한다.
최봉수님은 철학박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 졸업.
현재 불교문화연구원 상임연구원으로 재직중
저서로는 「원시불교원전의 이해」
「원시불교자료론」등 다수가 있다.
아함(阿含)의 한문. 한글, 팔리어. 영문. 한글 본 비교표
2 장 붓다 敎說의 특징 : 正法中心主義
제1188 존중경(尊重經)
(一一八八)如是我聞.一時.佛住鬱毘羅聚落尼連禪河側菩提樹下.成佛未久.爾時.世尊獨靜思惟.作是念.不恭敬者.則爲大苦.無有次序.無他自在可畏懼者.則於大義有所退減.有所恭敬.有次序.有他自在者.得安樂住.有所恭敬.有次序.有他自在.大義滿足.頗有諸天·魔·梵·沙門·婆羅門·天神·世人中.能於我所具足戒勝·三昧勝·智慧勝·解脫勝·解脫知見勝.令我恭敬宗重.奉事供養.依彼而住.復作是念.無有諸天·魔·梵·沙門·婆羅門·天神·世人能於我所戒具足勝·三昧勝·智慧勝·解脫勝·解脫知見勝.令我恭敬宗重.奉事供養.依彼而住者.唯有正法令我自覺.成三 三佛陀者.我當於彼恭敬宗重.奉事供養.依彼而住.所以者何.過去如來·應·等正覺亦於正法恭敬宗重.奉事供養.依彼而住.諸當來世如來·應·等正覺亦於正法恭敬宗重.奉事供養.依彼而住.爾時.娑婆世界主梵天王知世尊心念已.如力士屈伸臂頃.從梵天沒.住於佛前.歎言.善哉.如是.世尊.如是.善逝.懈怠不恭敬者.甚爲大苦.廣說乃至大義滿足.其實無有諸天·魔·梵·沙門·婆羅門·天神·世人於世尊所戒具足勝·三昧勝·智慧勝·解脫勝·解脫知見勝.令世尊恭敬宗重.奉事供養.依彼而住者.唯有正法.如來自悟成等正覺.則是如來所應恭敬宗重.奉事供養.依彼而住者.所以者何.過去諸如來·應·等正覺亦於正法恭敬宗重.奉事供養.依彼而住.諸未來如來·應·等正覺亦當於正法恭敬宗重.奉事供養.依彼而住.世尊亦當於彼正法恭敬宗重.奉事供養.依彼而住.時.梵天王復說偈言
過去等正覺 及未來諸佛
現在佛世尊 能除衆生憂
一切恭敬法 依正法而住
如是恭敬者 是則諸佛法
時.梵天王聞佛所說.歡喜隨喜.稽首佛足.卽沒不現
제1188 존중경(尊重經)
신수장경 : 2-321c(잡 44.11)
한글장경 :
남전장경 : S.6-1-2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우루벨라아촌 나이란자나아강 곁에 있는 보리나무 밑에 계셨는데, 부처 되신 지 오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혼자 고요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생각하였다.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큰 고통이다. 차례가 없고 남의 뜻을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큰 의리에서 타락하게 된다. 공경할 것이 있어 차례가 있고 그것에 순종하면 그는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 공경할 것이 있어서 차례가 있고 남에게 순종하면 큰 의리가 만족해진다. 혹 어떤 하늘이나 악마·범·사문·바라문·하늘신이나 세상 사람 중에서 내가 두루 갖춘 계율보다 낫고 삼매보다 나으며, 지혜보다 낫고 해탈보다 나으며, 해탈지견보다 나아서, 나로 하여금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게 할 것이 있으면 나는 그를 의지해 살리라'고.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떤 하늘이나 악마·범·사문·바라문·하늘신이나 세상 사람에서도 내가 두루 갖춘 계율보다 낫고 삼매나 지혜나 해탈이나 해탈지견보다 나아서, 나로 하여금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게 하여, 그것을 의지해 살 만한 것이 없다. 오직 바른 법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삼약삼붓다를 이루게 하였다. 나는 그것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가리라. 왜냐 하면 과거의 여래, <다 옳게 깨달은 이>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 것이기 때문이다'고.
그 때에 사바세계의 주인 범천왕은 세존의 생각을 알고, 마치 역사가 팔을 굽혔다 펼 만한 동안에 범천에서 사라져 부처님 앞에 나타나 찬탄하면서 말하였다.
"장하시나이다!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그러하나이다! <잘 간 이>시여, 게을러 공경하지 않는 이는 참으로 큰 고통입니다. (널리 말하고...)
큰 의리가 만족해집니다. 진실로 어떤 하늘이나 악마·범·사문·바라문·하늘신이나 세상 사람으로서도 세존께서 갖추신 계율보다 낫거나 삼매나 지혜나 해탈이나 해탈지견보다 나아서, 세존으로 하여금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갈 것이 없나이다. 오직 바른 법이 있어, 세존께서 스스로 깨달아 다 옳은 깨달음을 성취하였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께서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할 만한 것으로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 가셔야 할 것이옵니다.
왜냐 하오면, 과거의 모든 여래.<다 옳게 깨달은 이>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았고, 미래의 모든 여래, <다 옳게 깨달은 이>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도 그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가셔야 할 것이옵니다."
때에 범천왕은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과거의 <다 옳게 깨달은 이>나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나
현재의 부처, 세존께서는
중생들의 근심을 없애 주셨네.
그 분들 모두 법을 공경해
바른 법을 의지해 살았으니
그와 같이 바른 법 공경하는 일
그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 법이시네.
때에 범천왕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이내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잡아함경 제44-1188경; <2-321c>
별역잡아함경 제5-101경; <2-410a>
S. 6-1-2. Holding in Reverence
Thus have I heard : - The Exalted One was once staying at Uruvel on the banks of the river Neranjar , beneath the Geatherd's Banyan, just after he had become full enlightened.
And to the Exalted One, as he meditated in privacy, the thought arose in his mind : 'It is ill to live paying no one the honour and obedience due to a superior. What recluse or brahmin is there under whom I could live paying him honour and respect?
Then the Exalted One thought : 'For the perfecting of the moral code [if] imperfectly carried out, I should live under another recluse or a brahmin, paying him honour and respect. But I see not anywhere in the worlds of gods - Maras, Brahmas- not among recluses and brahmin, not among the whole race, human or divine, any other recluse, or any brahmin more accomplished in moral conduct than myself, and under whom I might live, paying him honour and respect.
So, too, for the perfecting of concentrative studies, for the perfecting of studies in insight, for the perfecting of study in emancipation, for the perfecting of study in emancipation, for the perfecting in contemplation of the knowledge of [my] emancipation, [if] imperfectly achieved, I should live under another recluse or a brahmin, paying him honour and respect. But I see not anywhere in the world of gods-Maras, Brahmas-nor among recluses and brahmins, not among the whole race, human or divine, any other recluse or brahmin more accomplished in any of these branches than myself, and under whom [for that reason] I should live, paying him honour and respect.
This Norm then, wherein I am supremely enlightened - what if I were to live under It, paying It honour and respect !
There upon Brahma Sahampati, becoming a ware in thought of the thoughts of the Exalted One, even like a strong man stretching his bent arm out, or drawing together his out stretched arm, vanish from the Brahma world and appear before the Exalted One. and Brahma Sahampati, draping his outer robe over one shoulder, raised his joined hands towards the Exalted One and said :
'Even so, Exalted One! Even so, Blessed One! They, lord, who in time past were Arahants, Buddhas Supreme, those Exalted Ones did also Live only under the Norm, honouring and respecting it. They also, lord, who in time to come will be Arahants, Buddhas supreme, they will live only under the Norm, honouring and respecting it. Let the Exalted One also, lord, who now is Arahant Buddha Supreme live only under the Norm, honouring and respecting it.
Thus spake Brahma Sahampati, and thereafter he spake thus :
They who were Buddhas in the days of yore,
And they who will be Buddhas yet to come,
And he who Buddha is in this our day,
Slayer of griefs for many multitudes:
All these have ever lived or now do live
Holding in reverence the holy Norm,
Ay, in the days to come so will they live.
wherefore let whoso fain is for his good,
Aspiring to be numbered 'mong the great,
Hold ever holy Norm in reverence,
Remembering the buddhas' ordinance.
S. 6-1-2. 존경[Garavo]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우루벨라의 네란자라 강 언덕에 아자빠라라는 니그로다 나무에서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홀로 명상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셨다. '공경하고 존중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괴롭다. 참으로 어떠한 수행자나 또는 성직자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을까?'
그때 세존께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 원만히 성취되지 않은 계행의 요소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수행자나 또는 성직자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해보자. 그러나 나는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와 하늘사람과 인간들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계행을 성취해서 내가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지 못했다.
아직 원만히 성취되지 않은 삼매의 요소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수행자나 또는 성직자를 공경하고 의지해보자. 그러나 나는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계행을 성취해서 내가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지 못했다.
아직 원만히 성취되지 않은 지혜의 요소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수행자나 또는 성직자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해보자. 그러나 나는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와 하늘사람들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계행을 성취해서 내가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지 못했다.
아직 원만히 성취되지 않은 해탈의 요소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수행자나 또는 성직자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해보자. 그러나 나는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와 하늘사람과 사람들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계행을 성취해서 내가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지 못했다.
아직 원만히 성취되지 않은 해탈지견의 요소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수행자나 또는 성직자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해보자. 그러나 나는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와 하늘사람과 사람들의 세계에서 나보다 더 계행을 성취해서 내가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를 보지 못했다.
나는 내가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거기에 의지하는 것이 어떨까?
그때 범천 싸함빠띠가 세존께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신는 바를 알아차리고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 범천의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존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범천 싸함빠띠는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은 채 세존께서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고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싸함빠띠] "세상에 존경받는 님이시여, 그렇습니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시여,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과거의 거룩하신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으신 님이셨던 세존들도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그것에 의지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미래의 거룩하신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으신 님이 되실 세존들도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그것에 의지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현재의 거룩하신님, 올바로 깨달으신 님인 세존들도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그것에 의지합니다."
이와 같이 범천 싸함빠띠는 말했다. 말하고 나서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싸함빠띠]
"과거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미래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현재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수많은 사람의 슬픔을 없애주네.
모두 올바른 진리를 공경하며
살았고 살고 있으며
또한 살아갈 것이니
이것이 깨달은 님의 가르침이네.
자신에게 유익함을 바라고
위대한 것을 소망하는 자는
깨달은 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올바른 진리를 존중해야 하리."
제36 십육비구경(十六比丘經)
(一六)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有異比丘來詣佛所.所問如上.差別者.隨使使·隨使死者.則增諸數.若不隨使使·不隨使死者.則不增諸數.佛告比丘.汝云何於我略說法中.廣解其義時.彼比丘白佛言.世尊.若色隨使使·隨使死.隨使使·隨使死者.則增諸數.如是受·想·行·識.隨使使·隨使死.隨使使·隨使死者.則增諸數.世尊.若色不隨使使·不隨使死.不隨使使·不隨使死者.則不增諸數.如是受·想·行·識.不隨使使·不隨使死.不隨使使·不隨使死者.則不增諸.如是.世尊.我於略說法中.廣解其義.如是.乃至得阿羅漢.心得解脫
36. 십륙비구경(十六比丘經)
신수장경 : 2-8a
한글장경 : 잡-1-30
남전장경 : S. 22-43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마투라국의 발제하 곁에 있는 일산 같은 암라나무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비구들이여, 자기를 피난처로 삼고, 자기를 의지해 머무르며, 법을 피난처로 삼고, 법을 의지해 머물러서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거나 다른 것을 의지해 머무르지 말라. 비구들이여, 마땅히 바르게 관찰하여 자기를 피난처로 삼고, 자기를 의지해 머무르며, 법을 피난처로 삼고, 법을 의지해 머물러서,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거나 다른 것을 의지해 머무르지 말라. 무엇이 원인이 되어 걱정·슬픔·번민·괴로움이 생기며, 어떻게 이 넷이 있으며, 또 어떻게 스스로 아직 생기지 않은 걱정·슬픔·번민·괴로움은 생기고, 이미 생긴 걱정·슬픔·번민·괴로움은 더욱 자라고 더해 간다고 관찰하는가."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뿌리이시고, 법의 눈이시며, 법의 의지하는 곳입니다. 원하옵건데 말씀하여 주시면 저희들은 듣잡고 그 말씀과 같이 받들어 행하겠나이다."
"비구들이여,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나는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리라. 비구들이여, 물질이 있어 물질을 인하고, 물질에 얽매이기 때문에 아직 생기지 않은 걱정·슬픔·번민·괴로움은 생기고, 이미 생긴 그것들은 더욱 자라고 커간다고 관찰하라. 느낌·생각·지어감·의식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 비구들이여, 혹 물질로써 항상 있어서 변하거나 바뀌지 않고 바르게 머무르는 것이 있더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착하고, 착하다! 비구들이여, 물질은 덧없는 것이다. 만일 착한 남자가 물질은 덧없는 것으로서 이미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면, 그는 욕심을 떠나고 욕심을 멸해 모든 번뇌가 없어질 것이다. 본래부터 모든 물질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인 줄을 안 뒤에는 혹 물질을 인연하여 걱정·슬픔·번민·괴로움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끊고, 그것을 끊은 뒤에는 집착할 것이 없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안온한 즐거움에 머무르고, 안온한 즐거움에 머무르게 되면 그것을 열반이라 하나니, 느낌·생각·지어감·의식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16비구는 모든 번뇌가 생기지 않아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리고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대나무 동산과 바이샤알리와
청정과 바른 관찰과
덧없음과 괴로움과 <나>가 아님과
5와 3과 16이니라.'
S. 22-43 An island to self [Attadipo]
At S vatth . . . Then (the Exalted One) said: -
'Do ye abide, brethren, islands unto yourselves, refuges unto yourselves: taking refuge in none other; islanded by the Norm, taking refuge in the Norm, seeking refuge in none other.
By them who are islands unto themselves, brethren, who are a refuge unto themselves, who take refuge in none other, who are islanded by the Norm, take refuge in the Norm, seek refuge in none other-by them the very source of things is to be searched for: thus-"What is the source of sorrow and grief, of woe, lamentation and despair ? What is their origin ?"
What then, brethren, is the source, the origin of these ?
Herein, brethren, the untaught many-folk, who discern not those that are Ariyans, who are unskilled in the Ariyan doctrine, untrained in the Ariyan doctrine, who discern not those who are worthy ones, who are unskilled in the worthy doctrine, untrained in the worthy doctrine,-these regard the body as the self . . . (as at §7 above). But [the well-taught Ariyan disciple] beholding, brethren, the impermanence of body, its instability, its coming to an end, its ceasing, says: "Formerly also, as well as now, all bodies were impermanent and suffering, unstable in nature." Thus seeing it as it really is, by perfect insight, he puts away from him all sorrow and grief, woe, lamentation and despair; nor is he troubled at their putting away, but untroubled lives at ease, and so living at ease that brother is called "one who is rid of all that."
Beholding, brethren, the impermanence of feeling, its instability, its coming to an end, its ceasing, he says: "Formerly also, as well as now, all feeling was impermanent and suffering, unstable in its nature." Thus seeing it as it really is, by perfect insight, he puts away from him all sorrow and grief, woe, lamentation and despair: nor is he troubled at their putting away, but untroubled lives at ease, and so living at ease this brother is called: "One who is rid of at that."
So also with regard to perception, the activities and consciousness.'
S. 22-43. 자신을 섬으로(Attadip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으며,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는 자는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라고 이치에 맞게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이 나이고 나의 것이 물질이고 나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감수가 나이고 나의 것이 감수이고 나 가운데 감수가 있고 감수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감수는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감수가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이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지각이 나이고 나의 것이 지각이고 나 가운데 지각이 있고 지각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지각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지각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이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형성이 나이고 나의 것이 형성이고 나 가운데 형성이 있고 형성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형성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형성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이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의식이 나이고 나의 것이 의식이고 나 가운데 의식이 있고 의식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의식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의식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물질이나 현재의 물질이나 모든 물질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 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감수는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감수이나 현재의 감수이나 모든 감수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 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지각이나 현재의 지각이나 모든 지각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 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형성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형성이나 현재의 형성이나 모든 형성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 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의식이나 현재의 의식이나 모든 의식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 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라고 불린다.
[개념정리] - 정법(正法)중심주의
Ⅰ. 서(序)
있는 그대로의 고찰에 대한 대상은 곧 법(法, Dharma)이다. 결국 원시불교의 근본 입각지는 법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 수행하는 것이었고, 석존이 석존다운 이유도 법을 증오(證悟)하여 실현하는데 있었다.
Ⅱ. 본론(本論)
지금 이 법은 나에 의해 증오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바로 이 법이야말로 존중하고 공경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 곳이 아닌가! (S 1. p.139)
"아난아, 그러므로 스스로를 빛으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말라. 법(法)을 빛으로 삼고 법(法)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말라."(『잡아함경』 권2 「유행경」)
위 경전에서 인용된 바와 같이 석존은 정법의 체험과 실행과 전파를 그 사명으로 삼았던 것이 붓다의 45년간의 교화내용이다.
법(法)이라는 말 자체를 분석해 보면, 이것은 dhr 즉 '유지하다'는 어근으로부터 유래하는 말이다. 이로부터 변함 없이 유지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되고, 마침내 질서. 법칙. 특질 등의 의미를 지니는 말로 바뀌게 된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후대의 아비달마 학자들이 법(法)을 정의하길 '自性을 任持하는 것(savlak sa nadharyatva)이라고 했던 것은 개괄적인 의미로 보면 적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諸賢아 世尊도 亦如是說하시니 若見緣起하면 便見法하고 若見法하면 便見緣起니라.(『중아함』 제7 象跡喩經)
연기(緣起)는 곧 법(法)이라고 함. 석가세존의 신봉 대상인 정법(正法)은 바로 연기법(緣起法)이다.
Ⅲ. 결론(結論)
불교에서의 法은 2종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자연에 구비된 理法 또는 법칙으로서의 법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인식하여 우리들의 목적에 응용하는 것인 가르침으로서의 법이다. 즉 法性(dhammata)으로서의 법과 敎法으로서의 법(pariyatti)이다.
석존에 의하면, 일체의 현상은 모두가 무상하고 변천하지만 이 변천을 관통하는 理法이 있다. 이것을 이름하여 因緣(hetu, 또는 paccaya)이라 하는데, 그 理法은 萬古不變이다. 결국 千差萬別의 현상도 이 理法이 다양하게 작용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일체의 현상을 바로 '一切法(sabbe dhamma,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은 일체의 현상이 이 인연이라는 理法에 의해서 지배되기 때문이다.
이상에 관한 法性이란 위의 사실적 法性을 명확히 함으로써 거꾸로 이것을 이용하여 사실세계를 정복하고 해탈하는 법칙을 발견해 낸 것이 그것이다. "처음에 法性(因緣)에 관한 지혜가 있고 나중에 열반에 관한 지혜가 있다"고 한 것은 곧 석존이 수미사에게 한 말인데, 석존의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사실에 관한 법칙의 지혜가 이상계에 관한 법칙의 인식으로 이끄는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 참고문헌
원시불교사상론 79.p ~ 95.p, 木村泰賢 저, 朴京俊 역, 경서원 간
인도불교의 역사 상, 히라카와 아키라, 이 호근 옮김 66.p ~ 72.p
불교의 이해와 실천 1, 대원정사 간 250.p
3장 십이입처(十二入處)
제319 一切經
(三一九) 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時.有生聞婆羅門往詣佛所.共相問訊.問訊已.退坐一面.白佛言.瞿曇.所謂一切者.云何名一切.佛告婆羅門.一切者.謂十二入處.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是名一切.若復說言此非一切.沙門瞿曇所說一切.我今捨.別立餘一切者.彼但有言說.問已不知.增其疑惑.所以者何.非其境界故時.生聞婆羅門聞佛所說.歡喜隨喜奉行
제319 일체경(一切經)
신수장경 :
한글장경 :
남전장경 :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생문바라문이 부처님계신 곳에 나아가 서로 묻고, 물은 뒤에 한쪽에 물러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고타마시여, 소위 일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소위 일체란 12입처(入處)이니 눈과 빛깔,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부딪쳐짐, 뜻과 법이다. 이것을 일체(一切)라고 한다.
만일 다른 어떤 사람이 이것은 일체가 아니다. 나는 이제 사문 고타마가 말하는 일체를 버리고 따로 다른 일체를 세우겠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만 있을 뿐이니 물어보면 알지 못하여 그 의혹만 더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참으로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때에 생문 바라문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제279 調伏經
(二七九) 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於此六根不調伏·不關閉·不守護·不執持·不修習.於未來世必受苦報.何等爲六根.眼根不調伏·不關閉·不守護·不修習·不執持.於未來世必受苦報.耳·鼻·舌·身·意根亦復如是.愚癡無聞凡夫眼根見色.執受相.執受隨形好.任彼眼根趣向.不律儀執受.住世間貪·愛·惡不善法.以漏其心.此等不能執持律儀.防護眼根.耳·鼻·舌·身·意根.亦復如是.如是於六根不調伏·不關閉·不守護·不執持·不修習.於未來世必受苦報.云何六根善調伏·善關閉·善守護·善執持·善修習.於未來世必受樂報.多聞聖弟子眼見色.不取色相.不取隨形好.任其眼根之所趣向.常住律儀.世間貪·愛·惡不善法不漏其心.能生律儀.善護眼根.耳·鼻·舌·身·意根.亦復如是.如是六根善調伏·善關閉·善守護·善執持·善修習.於未來世必受樂報.卽說偈言
於六觸入處 住於不律儀
是等諸比丘 長夜受大苦
斯等於律儀 常當勤修習
正信心不二 諸漏不漏心
眼見於彼色 可意不可意
可意不生欲 不可不憎惡
耳聞彼諸聲 亦有念不念
於念不樂着 不念不起惡
鼻根之所[口*鼻] 若香若臭物
等心於香臭 無欲亦無違
所食於衆味 彼亦有美惡
美味不起貪 惡味亦不擇
樂觸以觸身 不生於放逸
爲苦觸所觸 不生過惡想
平等捨苦樂 不滅者令滅
心意所觀察 彼種彼種相
虛僞而分別 欲貪轉增廣
覺悟彼諸惡 安住離欲心
善攝此六根 六境觸不動
伏衆魔怨 度生死彼岸
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제279. 조복경(調伏經)
신수장경 : 2-76a
한글장경 : 잡-1-309
남전장경 : S. 35-94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이 여섯 감관을 항복받지 않고 굳게 닫지 않으며, 지켜 보호하지 않고 잡아 가지지 않으며, 닦아 익히지 않으면, 미래 세상에서 반드시 괴로움의 갚음을 받을 것이다. 어떤 것을 여섯 감관이라 하는가. 눈뿌리를 항복받지 않고 굳게 닫지 않으며, 지켜 보호하지 않고 닦아 익히지 않으면 미래 세상에서 반드시 괴로움의 갚음을 받을 것이니, 귀·코·혀·몸·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는 눈뿌리로 색깔을 보면, 그 모양을 잡아 받고 그 좋은 현상을 잡아 받으며, 그 눈뿌리의 가는 대로 맡겨서, 율의 아닌 것을 잡아 받아 세상의 탐욕과 사랑의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에 머물러 그 마음을 새게 한다. 그들은 그로써 율의를 잡아 가지지 못해 눈뿌리를 막아 보호하지 못하나니, 귀·코·혀·몸·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다. 이와 같이 여섯 감관을 항복받지 않고 굳게 닫지 않으며, 지켜 보호하지 못하고 잡아 가지지 않으며, 닦아 익히지 않으면 미래 세상에서 반드시 괴로움의 갚음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여섯 가지 감관을 잘 항복받고 잘 굳게 닫으며, 잘 지켜 보호하고 잘 잡아 가지며, 잘 닦아 익히면 미래 세상에서 반드시 즐거움의 갚음을 받는가.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눈으로 색깔을 보아도 빛깔 모양을 취하지 않고 좋은 형상을 취하지 않으며, 눈뿌리의 가는 대로 맡기되 언제나 율의에 머물러, 세간의 탐욕과 사랑의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그 마음에서 새지 않는다. 그래서 능히 율의를 내고 눈뿌리를 잘 보호하나니, 귀·코·혀·몸·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다. 이와 같이 잘 여섯 감관을 항복받고 잘 굳게 닫으며, 잘 지켜 보호하고 잘 잡아 가지며, 잘 닦아 익히면 미래 세상에서 반드시 즐거움의 갚음을 받을 것이다.
곧 게송으로 말씀하시었다.
여섯 가지 감각 기관에서
율의 아닌 것에 머무르면
이들 모든 비구는
긴 밤 동안에 큰 고통 받으리.
이 모든 율의에서
언제나 부지런히 닦아 익히고
바른 믿음으로 마음이 하나 되어
모든 누가 마음에서 새어나지 않게 하라
눈으로써 저 빛깔을 보면
마음에 맞고 맞지 않는 것 있네.
마음에 맞아도 욕심을 내지 말고
마음에 안 맞는다 미워하지도 말라.
귀로써 저 모든 소리 들으면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을 것 있네.
생각할 만한 것도 즐겨해 집착말고
생각할 것 못된다 미워하지도 말라.
코로써 저 냄새맡아 보는 것
혹은 향기롭거나 더럽네.
향기로움과 더러움에 마음을 고르게 하여
욕심 내지 말고 언짢아도 하지 말라.
먹는 바 여러 가지 음식에서도
또한 맛난 것 있고 나쁜 것 있네.
아름다운 맛에도 탐욕을 내지 말고
나쁜 맛이라 또한 가리지 말라.
즐거운 감촉이 몸에 부딪치어도
거기에 빠져서 헤매지 말고
괴로운 감촉이 부딪치어도
너무 밉다 생각을 내지도 말라.
평등하게 괴로움과 즐거움을 버리어
멸하지 않는 것을 멸하게 하라.
내 마음으로써 관찰하는 바
이것이나 저것의 온갖 모양을
참답지 않게 거짓으로 분별하면
욕탐은 갈수록 더욱 더하리.
저 모든 나쁜 것 깨달아 알고
욕심을 멀리 떠나 편히 머물라.
이 여섯 감관을 잘 거두어 잡아
6경(境)이 부딪쳐도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악마의 원수 무찔러 항복받고
나고 죽는 저 언덕에 건너가리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S. 35-94. Including (the sixfold sense-sphere) [Sa gayha. 1]
There are these six spheres of contact, brethren, which are untamed, unguarded, unwatched, unrestrained, bringers of Ill. What six?
The eye, brethren ... the tongue ... the mind, and the rest are untamed ... bringers of Ill.
There are these six spheres of contact, brethren, which are well tamed, well guarded, well watched, well restrained, bringers of happiness. What six?
The eye ... the tongue ... the mind and the rest. ...
Thus spake the Exalted One. ... Then the Master added this further:-
He meets with Ill, brethren, who hath not tamed
The sixfold impact of the sphere of sense.
They who have learned the mastery of these,
With faith for comrade, -they dwell free from lust.
Beholding with the eye delightful things
Or things unlovely, let him restrain his bent
To lust for loveliness, and let him not
Corrupt his heart with thoughts of "O" tis dear."
And when, again, sounds sweet or harsh he hears,
Not led astray by sweetness, let him check
The error of his senses. Let him not
Corrupt his heart with thoughts of 'O' tis sweet.'
If some delightful fragrance meet the mose,
And them again some foul malodorous stench,
Let him restrain repugnance for that stench,
Nor yet be led by lust for what is sweet.
Should he taste savours that are sweet and choice,
And then again what's bitter to the tongue,
He should not greedily devour the sweet,
Nor yet show loathing for the bitter taste.
By pleasures' impact not inebriate,
Nor yet distracted by the touch of pain,
To pain and pleasure both indifferent
Let him be free from likings and dislikes.
Obsessed (by lusts) are others: so obsessed
They know and so they fare. But he dispels
All the world's vulgar fashionings of mind,
And treads the path renunciation-bound.
By contact of these six, if mind be trained,
The heart is never shaken any more.
O'ercome these two, O brethren, - lust and hate.
Pass ye beyond the bounds of birth and death.
S. 35-94 제어[Samgayh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들 여섯 접촉의 감역들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여섯가지는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청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후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미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촉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정신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섯 접촉의 감역이 있는데 그것들을 길들이지 않고 수호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은 괴로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이들 여섯 접촉의 감역들을 잘 길들이고 잘 수호하고 잘 보호하고 잘 제어하면 그것들은 즐거움을 실어 나른다. 여섯가지는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잘 길들이고 잘 수호하고 잘 보호하고 잘 제어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청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잘 길들이고 잘 수호하고 잘 보호하고 잘 제어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후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잘 길들이고 잘 수호하고 잘 보호하고 잘 제어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미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잘 길들이고 잘 수호하고 잘 보호하고 잘 제어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촉각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잘 길들이고 잘 수호하고 잘 보호하고 잘 제어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정신은 접촉의 감역인데 그것을 잘 길들이고 잘 수호하고 잘 보호하고 잘 제어하면 그것은 즐거움을 실어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섯 접촉의 감역이 있는데 그것들을 잘 길들이고 잘 수호하고 잘 보호하고 잘 제어하면 그것들은 즐거움을 실어 나른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시고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이와 같이 시로써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여섯 접촉영역을
잘 제어하지 못하면 괴로움을 겪는다.
그것들을 제어함을 배운 자들은
믿음을 벗으로 삼아 번뇌 없이 지내리.
사랑스런 형상을 보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형상을 보고 나서
사랑에 대한 탐욕의 길을 자제하라
나의 사랑으로 정신을 오염시키지 말라.
또한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않은 소리를 듣고
사랑스런 소리에 미혹되지 말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에 성냄을 자제하라
나의 사랑으로 정신을 오염시키지 말라.
향기롭고 매력적인 냄새를 맡으면
더럽고 불쾌한 것을 냄새맡으면
불쾌한 것에는 분노를 자제하고
매력적인 것의 욕망에 이끌리지 말라.
미식가가 감미로운 맛을 즐기거나
한때에 감미롭지 않은 것을 즐기면
감미로운 것을 탐욕스럽게 맛보지 말고
감미롭지 않은 것에 혐오를 보이지 말라.
즐거운 것에 접촉해도 취하지 않고
괴로운 것에 접촉해도 흔들리지 않으면
두가지 즐겁고 괴로운 접촉에 초연하니
어떠한 좋고 싫음도 떠났네.
생각에 묶인 이러저러한 사람들은
미망을 향해가지만 그것을 지각하면
정신이 만든 속가에 의존하는 모든 사물을 버리고
출리에 의존하는 것을 향해 간다네.
이처럼 정신이 여섯 감역에 잘 수련되면
접촉하더라도 어디서든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리
수행승들이여, 그들 탐욕과 성냄을 극복하여
생사의 피안에 도달한 자가 되라.
[개념정리] - 십이입처(十二入處)
Ⅰ. 서론
십이처설(十二處說)은 불교가 세계(世界)를, 일체(一切)를, 현실(現實)을, 존재(存在)를 인식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불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일체만유에 대한 일종의 분류법으로 연기설의 기초가 닦여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Ⅱ. 본론
所謂一切者.云何名一切.佛告婆羅門.一切者.謂十二入處.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是名一切.若復說言此非一切.沙門瞿曇所說一切.我今捨.別立餘一切者.彼但有言說.問已不知.增其疑惑.所以者何.非其境界故時.
“비구들이여, 일체(一切)란 무엇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마음과 거기에 상응하는 정신현상(法)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소위 일체니라. 누군가 ‘이것들을 제외하고 〈다른 일체一切〉를 세우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한낱 실없는 소리일 뿐이다.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면 그는 자신의 허풍을 드러내고, 궁지에 빠진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비구들이여, ‘우리네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SN 4. 15. sabba-sutta, 잡아함 제319 一切經)
십이처(十二處)는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으로 구성되어 있다. 눈·귀·코 ·혀 ·몸의 다섯 감관의 기능인 오근(五根)과 이 오근을 통솔하는 기능을 의근(意根)이라 하고 이를 합쳐서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육근(六根)이 인식할 수 있는 대상 경계 즉,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라고 하는 인식대상을 육경(六境)이라 한다.
이 십이처설(十二處說)에서 나타나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첫째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기본적 입장을 천명,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認識)을 중심으로 보고 있다.
둘째로, 인식의 주체인 육근(六根)이 인간존재를 나타내고 인식의 객체인 육경(六境)은 인간의 자연환경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므로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일체라고 표현되는 모든 것이란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우주 전체가 따지고 보면 열두 가지에서 나왔으며, 그 원인을 규명하면 그 열두 가지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열두 가지를 십이처(十二處)라고도 하고 십이입(十二入)이라고도 한다.
처(處)나 입(入)의 의미는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문’ 또는 ‘도달의 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십이처설(十二處說)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우주의 모든 존재에 대한 일종의 분류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십이처(十二處)는 각기 인식기관과 인식대상이 하나씩 짝을 이루고 있다. 눈, 코, 혀, 귀, 몸, 마음이라는 인식기관과 이들에게 각각 상응하는 대상 즉 색, 냄새, 맛, 소리, 촉감, 법이 있다. 눈이 있으므로 세상에는 색깔이 있음을 알 수 있고, 귀가 있음으로 세상에 소리가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코가 있음으로 세상에 향기나 냄새가 있음을 알 수 있고, 혀가 있음으로 세상에 맛을 지닌 것이 있음을 알 수 있고, 몸이 있어 촉감으로 사물의 존재를 파악 할 수 있으며, 마음이 있음으로 이 세상의 법칙이나 진리, 진실 등을 알 수 있다.
또 색이나 소리 등의 세계는 인간의 눈이나 귀가 없으면 그것이 실제로는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파악하고, 객체적 대상의 특질을 법으로 파악하고 있다. 육근(六根) 중 맨 끝을 마음이라고 하는데, 이것에는 의지라는 뜻이 강하게 들어 있다. 의지라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능동적인 힘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 의지의 대상인 현상세계의 법은 필연성을 지닌 것으로 이를 자연법칙이라고 보기도 하고 진리 또는 진실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종교가 신의 세계에 그 중심을 두고 있음에 반하여 인간을 세계에 중심에 두려는 것이며, 인간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 세계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육근(六根)은 주관에 속하므로 육내처(六內處)라 하고, 육경(六境)은 지각되는 대상으로 객관에 속하므로 육외처(六外處)라고 부른다. 이 열두 가지로 모든 존재, 즉 일체를 포괄할 수 있기에 십이처(十二處)를 곧 일체라고 한다.
Ⅲ. 결론
십이처설(十二處說)은 철저히 인간을 중심으로 이 세계의 모든 존재 방식을 설명한 것이다.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업이 되고 그 업인(業因)으로 과보(果報)를 받게 된다. 우주의 생성과 전개를 연기(緣起)에서 찾고, 인간의 완성을 깨달음으로 이룩하려는 교리와 일치하는 생각이다.
참고문헌
불교의 이해와 실천 1. 198 ~ 267. p
제4장 12입처(入處)의 멸(滅)
제239. 結經
(二三九)如是我聞.一時.佛住毘舍離 池側重閣講堂.爾時.世尊告諸比丘.我今當說結所繫法及結法.云何結所繫法.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是名結所繫法.云何結法.謂欲貪.是名結法.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제239. 결경
신수장경 : 2-58c
한글장경 : 잡-1-236
남전장경 : S. 35-109, 122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베샤알리의 잔나비못 곁에 있는 중각강당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이제 맺음의 매이는 법과 맺음 법을 말하리라. 어떤 것이 맺음의 매이는 법인가. 눈과 빛깔·귀와 소리·코와 냄새·혀와 맛·몸과 부딪침·뜻과 법이니 이것을 맺음의 매이는 법이라 한다. 어떤 것이 맺음 법인가. 이른바 욕탐이니 이것을 맺음 법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S. 35-109 Fetter [Sa gayha]
I will teach you, brethren, the things that make for bondage and the fetter. Do ye listen to it.
And what, brethren, are the things that make for bondage and what is the fetter?
The eye, brethren, is a thing that makes for bondage. The desire and lust that are therein, -that is the fetter of the eye.
The tongue ... the mind are things that make for bondage.
The desire and lust that are therein, -they are the fetter.
These, brethren, are called 'the things that make for bondage,' and this is the fetter.
S. 35-109. 결박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빈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결박되는 것과 결박하는 것에 관하여 설하겠다. 잘 들어라.
수행승들이여, 결박되는 것과 결박하는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결박되는 것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은 결박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청각은 결박되는 것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은 결박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후각은 결박되는 것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은 결박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미각은 결박되는 것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은 결박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촉각은 결박되는 것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은 결박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정신은 결박되는 것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은 결박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결박되는 것과 결박하는 것이란 이러한 것을 말한다."
제240. 取經
(二四 )如是我聞.一時.佛住毘舍離 池側重閣講堂.爾時.世尊告諸比丘.我今當說所取法及取法.云何所取法.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是名所取法.云何取法.謂欲貪.是名取法.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제240. 취경(取經)
신수경전 : 2-58a
한글경전 : 잡-1-236
남전경전 : S. 35.110, 123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베샤알리의 잔나비못 곁에 있는 중각강당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이제 잡아지는 법과 잡는 법을 말하리라. 어떤 것이 잡아지는 법인가. 눈과 빛깔·귀와 소리·코와 냄새·혀와 맛·몸과 부딪침·뜻과 법이니 이것을 잡아지는 법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잡는 법인가. 이른바 욕심이니 이것을 잡는 법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S. 35-110 Grasping [Up d nam]
I will teach you, brethren, the things that make for grasping and the fetter. Do ye listen to it. . . (Hte same as before.)
S. 35-110. 집착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쩨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집착되는 것과 집착하는 것에 관하여 설하겠다. 잘 들어라.
수행승들이여, 집착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집착되는 것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은 집착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청각은 집착되는 것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은 집착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후각은 집착되는 것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은 집착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미각은 집착되는 것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은 집착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촉각은 집착되는 것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은 집착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정신은 집착되는 것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이 생겨나면 그것은 집착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집착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이란 이러한 것을 말한다."
제241 소연법경
(二四一)如是我聞.一時.佛住毘舍離 池側重閣講堂.爾時.世尊告諸比丘.愚癡無聞
凡夫.比丘.寧以火燒熱銅籌.以燒其目.令其熾然.不以眼識取於色相.取隨形好.所以者何.取於色相.取隨形好故.墮惡趣中.如沈鐵丸.愚癡無聞凡夫寧燒鐵錐.以鑽其耳.不以耳識取其聲相.取隨聲好.所以者何.耳識取聲相.取隨聲好者.身壞命終.墮惡趣中.如沈鐵丸.愚癡無聞凡夫寧以利刀斷截其鼻.不以鼻識取於香相.取隨香好.所以者何.以取香相.取隨香好故.身壞命終.墮惡趣中.如沈鐵丸.愚癡無聞凡夫寧以利刀斷截其舌.不以舌識取於味相.取隨味好.所以者何.以取味相.隨味好故.身壞命終.墮惡趣中.如沈鐵丸.愚癡無聞凡夫寧以剛鐵利槍以刺其身.不以身識取於觸相及隨觸好.所以者何.以取觸相及隨觸好故.身壞命終.墮惡趣中.如沈鐵丸.諸比丘.睡眠者是愚癡活·是癡命.無利·無福.然諸比丘寧當睡眠.不於彼色而起覺想.若起覺想者.必生纏縛諍訟.能令多衆起於非義.不能饒益安樂天人.彼多聞聖弟子作如是學.我今寧以熾然鐵槍以貫其目.不以眼識取於色相.墮三惡趣.長夜受苦.我從今日當正思惟.觀眼無常·有爲·心緣生法.若色·眼識·眼觸·眼觸因緣生受.內覺若苦·若樂·不苦不樂.彼亦無常·有爲·心緣生法.耳·鼻·舌·身入處當如是學.寧以鐵槍貫其身體.不以身識取於觸相及隨觸好故.墮三惡道.我從今日當正思惟.觀身無常·有爲·心緣生法.若觸·身識·身觸·身觸因緣生受.內覺若苦·若樂·不苦不樂.彼亦無常·有爲·心緣生法.多聞聖弟子作如是學.睡眠者是愚癡活·癡命.無果·無利·無福.我當不眠.亦不起覺想.起想者生於纏縛諍訟.令多人非義饒益.不得安樂.多聞聖弟子如是觀者.於眼生厭.若色·眼識·眼觸·眼觸因緣生受.內覺若苦·若樂·不苦不樂.彼亦生厭.厭故不樂.不樂故解脫.解脫知見.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耳·鼻·舌·身·意亦復如是.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241. 소연법경
신수자경 : 2-58a
한글자경 : 잡-1-236
남전장경 : S.35-194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베샤알리의 잔나비못 곁에 있는 중각강당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 비구들이여, 차라리 불에 달군 구리쇠 산대로써 그 눈을 태워 불붙게 할 지언정, 눈의 <의식>으로써 빛깔 모양을 잡아서 아름다운 형상을 취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빛깔 모양을 취하거나 아름다운 형상 취함으로써 나쁜 세계에 떨어지는 것은 잠기는 쇠탄자와 같겠기 때문이니라.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이여, 차라리 쇠 송곳을 불에 달구어 그 귀를 찌를 지언정 귀의 식으로써 소리 모양을 취해 아름다운 소리를 취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귀의 식이 소리 모양을 취해 아름다운 소리를 취함으로써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나쁜 세계에 떨어지는 것은 잠기는 쇠탄자와 같겠기 때문이니라.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이여, 차라리 날카로운 칼로 그 코를 벨 지언정 코의 식으로써 냄새 모양을 취해 아름다운 냄새를 취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냄새 모양을 취해 아름다운 냄새를 취함으로써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나쁜 세계에 떨어지는 것은 잠기는 쇠탄자와 같겠기 때문이니라.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이여, 차라리 날카로운 칼로 그 혀를 끊을 지언정 혀의 식으로써 맛의 모양을 취해 아름다운 맛을 취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맛의 모양을 취해 아름다운 맛을 취함으로써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나쁜 세계에 떨어지는 것은 잠기는 쇠탄자와 같겠기 때문이니라.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이여, 차라리 강철로 된 날카로운 창으로 그 몸을 찌를 지언정 몸의 식으로써 부딪치는 모양이나 아름다운 부딪침을 취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부딪치는 모양이나 아름다운 부딪침을 취함으로써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나쁜 세계에 떨어지는 것은 잠기는 쇠탄자와 같겠기 때문이니라.
모든 비구들이여, 잠이란 어리석은 삶이다. 이 어리석은 삶은 이익도 없고 복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비구들이여, 차라리 잠 잘 지언정 저 빛깔에 대해서 깨닫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 만일 깨닫는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얽맴과 다툼이 생겨,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옳지 않은 일을 저지르게 하고, 하늘과 사람을 이익되게 하거나 안락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이와 같이 공부한다. 즉 '나는 이제 차라리 불에 달군 쇠창으로 내 눈을 찌를 지언정, 눈의 식으로써 빛깔 모양을 취해, 세 가지 나쁜 세계(三惡取)에 떨어져 긴 밤 동안 괴로움을 받지 않으리라.
나는 오늘부터 바르게 생각하여, 눈은 덧없고 하염이 있으며, 마음의 인연으로 생긴 법이라고 관찰하자. 혹은 빛깔과 눈의 식과 눈의 부딪침과 눈의 부딪치는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안의 감정, 그것도 또한, 덧없고 하염이 있으며 마음의 인연으로 생긴 법이라고 관찰하자. 귀·코·혀·몸의 들이는 곳에 대해서도 마땅히 그렇게 배워야 한다. 차라리 쇠창으로 내 몸을 꿸 지언정, 몸의 식으로써 부딪치는 모양이나 아름다운 부딪침을 취함으로써 세 가지 나쁜 세계에 떨어지지 않으리라. 나는 오늘부터 바르게 생각하여, 몸은 덧없고 하염이 있으며, 마음의 인연으로 생긴 법이라고 관찰하자 혹은 부딪침과 몸의 식과 몸의 부딪침과 몸의 부딪치는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은 안의 감정, 그것도 또한 덧없고 하염 있으며 마음의 인연으로 생긴 법이 箚 관찰하자'고.
또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이렇게 공부한다. 즉 '잠이란 어리석은 삶이다. 이 어리석은 삶은 결과도 없고 이익도 없으며 복도 없는 것이다. 나는 마땅히 자지 않을 것이며 또한 깨닫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생각을 일으키면 얽맴과 다툼이 생겨,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치로써 이익되지 않게 하고 안락을 얻지 못하게 할 것이다.'라고.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이 이렇게 관찰하면, 눈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혹은 빛깔과 눈의 식과 눈의 부딪침과 눈의 부딪치는 인연으로 생기는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안의 감정 그것에 대해서도 또한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 싫어하므로 바라지 않고, 바라지 않으므로 해탈하며 또 해탈한 줄을 안다. 그래서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안다. 귀·코·혀·몸·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제242. 지경(知經)
(二四二)如是我聞.一時.佛住毘舍離 池側重閣講堂.爾時.世尊告諸比丘.若眼不知·不識·不斷·不離欲.不堪能正盡苦.於眼若知·若識·若斷·若離欲.堪能正盡苦.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如眼四經.如是乃至意二十四經.如上說
242. 지경(地境)
신수장경 : 2-58b
한글장경 : 잡-1-238
남전장경 : S. 35.111~112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베샤알리의 잔나비못 곁에 있는 중각강당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만일 눈을 알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며, 끊지 못하고 욕심을 떠나지 못하면 그는 능히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눈에 대해서 혹은 알고 혹은 분별하며, 혹은 끊고 혹은 욕심을 떠나면, 그는 능히 바르게 괴로움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눈에 대한 4경과 같이, 내지 뜻에 대한 24경도 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제243 미경(味經)
(二四三)如是我聞.一時.佛住毘舍離 池側重閣講堂.爾時.世尊告諸比丘.若諸比丘於眼味者.當知是沙門·婆羅門不得自在脫於魔手.魔縛所縛.入於魔繫.耳·鼻·舌·身·意亦復如是.若沙門·婆羅門於眼不味者.當知是沙門·婆羅門不隨於魔.脫於魔手.不入魔繫.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如味.如是歡喜·讚歎·染着·堅住·愛樂·憎嫉.亦如是說.如內入處七經·外入處七經.亦如是說
제243. 미경(味經)
신수장경 : 2-58b
한글장경 : 잡-1-239
남전장경 : S. 35.15~18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베샤알리의 잔나비못 곁에 있는 중각강당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비구들이여, 만일 눈에 대해서 맛들이면 마땅히 알라. 그 사문이나 바라문은 자재로이 악마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악마의 결박에 묶이어 악마의 얽맴에 들어갈 것이다. 귀·코·혀·몸·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눈에 대해서 맛들이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그 사문이나 바라문은 악마를 따르지 않고 악마의 손을 벗어나서 악마의 얽맴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맛들임과 같이, 기뻐하고 찬탄하며 물들어 집착하고 굳게 머무르며 사랑하고 즐겨하며 미워하고 질투하는 것에 대해서도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시었다.
안의 들이는 곳의 7경과 같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의 7경도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시었다.'
제244. 마구경(魔鉤經)
(二四四)如是我聞.一時.佛住毘舍離 池側重閣講堂.爾時.世尊告諸比丘.有六魔鉤.云何爲六.眼味着色.是則魔鉤.耳味着聲.是則魔鉤.鼻味着香.是則魔鉤.舌味着味.是則魔鉤.身味着觸.是則魔鉤.意味着法.是則魔鉤.若沙門·婆羅門眼味着色者.當知是沙門·婆羅門魔鉤鉤其咽.於魔不得自在.穢說淨說.廣說如上
제244. 마구경(魔鉤經)
신수장경 : 2-58c
한글장경 : 잡-1-239
남전장경 : S. 35.114~115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베샤알리의 잔나비못 곁에 있는 중각강당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여섯 가지 악마의 갈구리가 있다. 어떤 것이 여섯인가. 눈으로 빛깔에 맛붙이는 것이니 이것이 곧 악마의 갈구리다. 귀로 소리에 맛붙이는 것이니 이것이 곧 악마의 갈구리다. 코로 냄새에 맛붙이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갈구리다. 혀로 맛에 맛붙이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갈구리다. 몸으로 부딪침에 맛붙이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갈구리다. 뜻으로 법에 맛붙이는 것이니 이것이 악마의 갈구리이니라.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눈으로 빛깔에 맛붙이면, 마땅히 알라. 그 사문이나 바라문은 악마의 갈구리에 그 목이 걸려 악마에게서 자재하지 못하게 되느니라."
'더러움을 말하고 깨끗함을 말하여, 널리 말씀하신 것은 위와 같다.'
[개념정리] - 12入處의 멸(滅)
Ⅰ. 서론
중생들은 '몸 안에는 자아(自我)가 있고, 몸 밖에는 세계(世界)가 있다'는 생각을 고집하고 있는데, 이 같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십이처(十二處)인 것이다. 즉 육내입처(六內入處)가 모여서 몸 안에 자아가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육외입처(六外入處)가 모여서 몸 밖에 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허망한 분별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십이입처(十二入處)를 멸(滅)하라고 한다.
Ⅱ. 본론
우리가 십이입처(十二入處)를 없애기 위해서는 십이입처의 근본을 알아야 한다. 십이입처는 허망한 생각이 집기(集起)해 있는 현상이고 왜 이런 허망한 생각이 집기(集起)하게 되었는가는 부처님께서는 잡아함 239경에서 이렇게 설하고 계신다.
世尊告諸比丘.我今當說結所繫法及結法.云何結所繫法.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是名結所繫法.云何結法.謂欲貪.是名結法.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번뇌에 묶여있는 것과, 묶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리라. 어떤 것이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인가? 안색(眼色). 이성(耳聲). 비향(鼻香). 설미(舌味). 신족(身足). 의법(意法), 이것을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이라고 부른다. 어떤 것이 묶고 있는 것인가? 욕탐(欲貪), 이것을 묶고 있는 것이라고 부른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십이입처가 없어지지 않고 모여있도록 묶고 있는 것을 욕탐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욕탐에 의해 모여 있는 십이입처를 취하여 자아와 세계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잡아함 240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世尊告諸比丘.我今當說所取法及取法.云何所取法.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是名所取法.云何取法.謂欲貪.是名取法.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취해지는 법과 취하는 법을 이야기하리라. 어떤 것이 취해지는 법인가? 안색. 이성. 비향. 설비. 신촉. 의법, 이것을 취해지는 법이라고 부른다. 어떤 것이 취하는 법인가? 욕탐(欲貪), 이것이 취하는 법이다."
욕탐은 이렇게 허망한 의식을 흩어지지 않게 모아놓고서 자아와 세계를 제멋대로 꾸미는 마음이다.
이렇게 십이처를 집기하게 하고 이것을 취하여 세계와 자아를 꾸며내는 것은 우리의 욕탐이므로 욕탐을 없애면 십이입처는 사라질 것이다. 부처님이 욕탐을 멸하라고 당부하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Ⅲ. 결론
본론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부처님은 십이입처가 세계의 근원이고 십이입처는 우리의 허망한 마음이 욕탐에 의해 집기해 있는 현상이라 하고 이같은 사실을 알아서 욕탐을 멸하는 것이 곧 생사해탈의 바른 길이다.
참고문헌
불교의 이해와 실천 1. 220.p ~ 226.p
제5장 18계(界)
제238 因緣經
(二三八)如是我聞.一時.佛住毘舍離 池側重閣講堂.時.有異比丘往詣佛所.稽首佛足.退坐一面.白佛言.世尊.何因何緣眼識生.何因何緣耳·鼻·舌·身·意識生.佛告比丘.眼因緣色.眼識生.所以者何.若眼識生.一切眼色因緣故.耳聲因緣·鼻香因緣·舌味因緣·意法因緣意識生.所以者何.諸所有意識.彼一切皆意法因緣生故.是名比丘眼識因緣生.乃至意識因緣生.時.彼比丘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
제238. 인연경
신수장경 : 2-58c
한글장경 : 잡-1-235
남전장경 : S. 35-141~144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베샤알리의 잔나비못 곁에 있는 중각강당에 계시었다. 때에 어떤 비구는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나 한 쪽에 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슨 인과 무슨 연으로써 눈의 식이 생기며, 무슨 인과 무슨 연으로써 귀·코·혀·몸·뜻의식이 생기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시었다.
"눈이 빛깔을 인연하여 눈의 식이 생기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일 눈의 식이 생기면 그 일체는 눈과 빛깔이 인연이 되기 때문이니라. 귀와 소리의 인연, 코와 냄새의 인연, 혀와 맛의 인연, 몸과 부딪침의 인연, 뜻과 법의 인연으로써 뜻의 식이 생기나니 무슨 까닭인가. 모든 뜻의 식의 그 일체는 다 뜻과 법의 인연으로써 생기기 때문이니라. 이것을 비구여, 눈의 식은 인연으로 생기고··· 내지 뜻의 식도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라 하느니라."
때에 그 비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제304 六六經
(三 四)如是我聞.一時.佛住拘留搜調牛聚落.爾時.世尊告諸比丘.我今當爲汝等說法.初·中·後善.善義善味.純一滿淨.梵行淸白.諦聽.善思.有六六法.何等爲六六法.謂六內入處·六外入處·六識身·六觸身·六受身·六愛身.何等爲六內入處.謂眼入處·耳入處·鼻入處·舌入處·身入處·意入處.何等爲六外入處.色入處·聲入處·香入處·味入處·觸入處·法入處.云何六識身.謂眼識身·耳識身·鼻識身·舌識身·身識身·意識身.云何六觸身.謂眼觸·耳觸·鼻觸·舌觸·身觸·意觸.云何六受身.謂眼觸生受·耳觸生受·鼻觸生受·舌觸生受·身觸生受·意觸生受.云何六愛身.謂眼觸生愛·耳觸生愛·鼻觸生愛·舌觸生愛·身觸生愛·意觸生愛.若有說言眼是我.是則不然.所以者何.眼生滅故.若眼是我者.我應受生死.是故說眼是我者.是則不然.如是若色·若眼識·眼觸·眼觸生受若是我者.是則不然.所以者何.眼觸生受是生滅法.若眼觸生受是我者.我復應受生死.是故說眼觸生受是我者.是則不然.是故眼觸生受非我.如是耳·鼻·舌·身·意觸生受非我.所以者何.意觸生受是生滅法.若是我者.我復應受生死.是故意觸生受是我者.是則不然.是故意觸生受非我.如是.比丘.當如實知眼所作·智所作·寂滅所作.開發神通.正向涅槃.云何如實知見眼所作.乃至正向涅槃.如是.比丘.眼非我.若色·眼識·眼觸·眼觸因緣生受.內覺若苦·若樂·不苦不樂.彼亦觀察非我.耳·鼻·舌·身·意亦如是說.是名如實知見眼所作.乃至正向涅槃.是名六六法經.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제304. 육륙경(六六經)
신수장경 : 2-86c
한글장경 : 잡-1-355
남전장경 : M. 148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쿠루수의 조우 부락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설법하리라. 그것은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으며, 좋은 뜻과 좋은 맛으로써 순수하여 하나같으며, 원만하고 깨끗하여 범행이 맑고 깨끗한 것이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66법이 있다. 어떤 것을 66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안의 여섯 가지 감각 기관(六入處)·밖의 여섯 가지 대경(六外入處)·여섯 가지 의식몸·여섯 가지 닿임몸·여섯 가지 느낌몸·여섯 가지 욕망 몸이니라. 어떤 것을 안의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라 하는가. 이른바 눈의 감관과 귀·코·혀·몸·뜻의 감각 기관이니라. 어떤 것의 밖의 여섯 가지 대경이라 하는가. 빛깔의 대경·소리·냄새·맛·닿임·법의 대경이니라. 어떤 것을 여섯 가지 의식몸이라 하는가. 이른바 눈의 의식몸과 귀·코·혀·몸·뜻의 의식몸이니라. 어떤 것을 여섯 가지 닿임몸이라 하는가. 이른바 눈의 닿임과 귀·코·혀·몸·뜻의 닿임이니라. 어떤 것을 여섯 가지 느낌 몸이라 하는가. 이른바 눈의 닿임으로 생기는 느낌과 귀·코·혀·몸·뜻의 닿임으로 생기는 느낌이니라. 어떤 것을 여섯 가지 욕망 몸이라 하는가. 이른바 눈의 닿임으로 생기는 욕망과 귀·코·혀·몸·뜻의 닿임으로 생기는 욕망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눈은 곧 <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눈은 나고 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눈이 곧 <나>라면 나는 응당 남과 죽음을 받아야 할 것이니 그러므로 '눈은 곧 <나>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이 혹은 물질이나 혹은 눈의 식·눈의 닿임·눈의 부딪침으로 생긴 느낌을 만일 '이것은 <나>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눈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느낌은 곧 나고 멸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만일 눈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느낌이 곧 <나>라면 나는 응당 남과 죽음을 받을 것이니 그러므로 눈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느낌을 '이것은 <나>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눈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느낌은 <나>가 아니다. 이와 같이 귀·코·혀·몸·뜻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느낌은 <나>가 아니니라.
무슨 까닭인가. 뜻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느낌은 나고 멸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곧 <나>라면 나는 응당 남과 죽음을 받을 것이니 그러므로 뜻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느낌을 이것은 <나>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뜻의 부딪침으로 생기는 느낌은 <나>가 아니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눈의 하는 일·지혜의 하는 일·적멸의 하는 일을 참다이 알아 신통을 나타내고 바르게 <열반>으로 향하여야 하느니라. 어떻게 눈의 하는 일을 참다이 알고 보아···내지 바르게 <열반>으로 향하는가.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눈은 <나>가 아니다. 혹은 물질이나 눈의 의식·눈의 닿임·눈의 닿임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혹은 괴로우며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안의 깨달음 그것도 또한 <나>가 아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귀·코·혀·몸·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다고 말한다. 이것을 눈의 하는 일을 참다이 알고 보아···내지 바르게 <열반>으로 향하는 것이라 하며 이것을 <66법경>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M. 148. DISCOURSE ON THE SIX SIXES (Chachakka sutta)
Thus have I heard : At one time the Lord was staying near Savatthi in the Jeta Grove in Anathapindika's monastery. While he was there the Lord addressed the monks, saying : "Monks." "Revered One," these monks answered the Lord in assent. The Lord spoke thus :
" I will teach you dhamma, monks, lovely in the beginning, lovely in the middle, lovely at the ending. With the spirit and the letter I will proclaim to you the Brahma-faring, utterly complete, quite purified, that is to say the Six Sixes. Listen to it, atttend carefully and I will speak."
"Yes, revered sir," these monks answered the Lord in assent. The Lord spoke thus :
"Six internal sense-fields are to be understood, six external sense-fields are to be understood, six classes of consciousness are to be understood, six classes of sensory impingement are to be understood, six classes of feeling are to be understood, six classes of craving are to be understood.
What it is said, 'Six internal sense-fields are to be understood' in reference to what is it said? It is in reference to the sense-field of eye, the sense-field of ear, the sense-field of nose, the sense-field of tongue, the sense-field of body, the sense-field of mind. When it is said, 'Six internal sense-field are to be understood,' it is said in reference to this. This is the first Six.
[281] What it is said, 'Six external sense-fields are to be understood' in reference to what is it said? It is in reference to the sense-field of material shapes, the sense-field of sounds, the sense-field of smells, the sense-field of tastes, the sense-field of touches, the sense-field of mental states. When it is said, 'Six external sense-field are to be understood,' it is said in reference to this. This is the first Six.
When it is said, 'Six classes of consciousness are to be understood,' in reference to what is what is it said? It is in reference to the visual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eye and material shapes; the auditory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ear and sounds; the olfactory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nose and smells; the gustatory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tongue and tastes; the bodily consciousness that arise because of body and touches; the mental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mind and mental states. When it is said, 'Six classes of consciousness are to be understood' it is said in reference to this. This is the third Six.
When it is said, 'Six classes of (sense-)impingement are to be understood,' in reference to what is what is it said? It is in reference to the visual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eye and material shapes -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 the auditory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ear and sounds -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 the olfactory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nose and smells -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 the gustatory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tongue and tastes -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 the bodily consciousness that arise because of body and touches -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 the mental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mind and mental states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When it is said, 'Six classes of consciousness are to be understood' it is said in reference to this. This is the fourth Six.
When it is said, 'Six classes of feeling are to be understood,' in reference to what is what is it said? It is in reference to the visual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eye and material shapes -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 conditioned by sensory impingement is feeling ; the auditory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ear and sounds . . . the olfactory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nose and smells . . . the gustatory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tongue and tastes . . . the bodily consciousness that arise because of body and touches . . . the mental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mind and mental states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 conditioned by sensory impingement is feeling. When it is said, 'Six classes of feeling are to be understood,' it is [282] said in reference to this. This is the fifth Six.
When it is said, 'Six classes of craving are to be understood,' in reference to what is what is it said? It is in reference to the visual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eye and material shapes -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conditioned by sensory impingement is feeling, conditioned by feeling is craving ; the auditory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ear and sounds the olfactory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nose and smells . . . the gustatory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tongue and tastes . . . the bodily consciousness that arise because of body and touches . . . the mental consciousness that arises because of mind and mental states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conditioned by sensory impingement is feeling, conditioned by feeling is craving. When it is said, 'Six classes of craving are to be understood,' it is said in reference to this. This is the sixth Six.
If anyone should say, 'Eye is self,' that is not Fitting. For the arising of the eye is to been seen and its decaying. Since its arising and decaying are to be seen one would thus be brought to the stage of saying : 'self arises in me and passes away.' Therefore if anyone should say, 'Eye is self,' that is not fitting; in this way eye is not-self.
If anyone should say, 'Material shapes are self' . . . 'Visual consciousness is self' . . . 'Impact on the eye is self' . . . 'Feeling is self' [283] . . . therefore if anyone should say, 'Feeling is self,' that is not fitting; in this way eye is not-self, impact on the eye is not-self, feeling is not-self. Of anyone should say, 'Craving is self' that is not fitting.
For the arising of craving is to be seen and its decaying. Since its arising and decaying are to be seen one would thus be brought to the stage of saying : 'Self arises in me and passes away.' Therefore if anyone should say, 'Craving is self,' that is not fitting; in this way eye is not-self, material shapes are not-self, visual consciousness is not-self. Of anyone should say, 'Ear is self' . . Nose is self . . 'Tongue is self' . . "Body is self' . . 'Mind is self' . . Mental states are self' . . Mental consciousness is self' . . 'Impact of the mind is self,' that is not fitting . . in this way mind is not-self mental states are not-self, mental consciousness is not-self, impact on the mind is not-self. If anyone should say, Feeling is self that is not fitting. For the arising of feeling is to be seen and the decaying. Since [284] its arising and decaying are to be seen one would thus be brought to the stage of saying : 'Self arises in me and passes away.' Therefore if anyone should say, 'Feeling is self that is not fitting; in this way mind is not-self, mental states are not self, mental consciousness is not-self, impact on the mind is not-self, feeling is not-self. If anyone should say, 'Craving is self," that is not fitting. For the arising of craving is to be seen and . . . Therefore if anyone should say, 'Craving is self,' that is not fitting; in this way mind is not-self, mental states are not-self, mental consciousness is not-self, impact on the mind is not-self, feeling is not-self, craving is not-self.
But this, monks, is the course leading to the arising of 'own body': one says with regard to eye . . . material shapes . . . visual consciousness . . . impact on the eye . . . feeling . . . craving . . . ear . . . nose . . . tongue . . . body . . . mind . . . mental states . . . mental consciousness . . . impact on the mind . . . feeling . . . craving that 'This is mine, this am I, this is my self.'
And this, monks, is the course leading to the stopping of 'own body' : one says with regard to eye . . . material shapes . . . visual consciousness . . . impact on the eye . . . feeling . . . craving . . . ear . . . nose . . . tongue . . . body . . . mind . . . mental states . . . mental consciousness . . . impact on the mind . . . feeling [285] . . . craving that 'This is not mine, this am I not, this is not my self'.
Monks, visual consciousness arises because of eye and material shapes,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 an experience arises conditioned by sensory impingement that is pleasant or painful or neither painful nor pleasant. He, being impinged on by a pleasant feeling, delights, rejoices and persists in cleaving to it; a tendency to attachment is latent in him. Being impinged on by a painful feeling, he grieves, mourns, laments, beats his breast and falls into disillusion; a tendency to repugnance is latent in him.
Being impinged on by a feeling that is neither painful nor pleasant, he does not comprehend the origin nor the going down nor the satisfaction nor the peril of that feeling nor the escape from it as it really is; a tendency to ignorance is latent in him. That he, monks, not getting rid of the tendency to attachment to a pleasant feeling, not driving out the tendency to repugnance for a painful feeling, not rooting out the tendency to ignorance concerning a feeling that is neither painful nor pleasant, not getting rid of ignorance, not making knowledge arise, should here and now be an end-maker of anguish-this situation does not exist.
Monks, auditory consciousness arises because of ear and sounds . . . mental consciousness arises because of mind and mental states,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 an experience arises . . . (as above) . . . not getting rid of ignorance, not making knowledge arise, should here and now be an end - maker of anguish - this situation does not exist.
[286] Monks, visual consciousness arises because of eye and material shapes . . . auditory consciousness arises because of ear and sounds . . . olfactory consciousness arises because of nose and smells . . . gustatory consciousness arises because of tongue and tastes . . . bodily consciousness arises because of body and touches . . . mental consciousness arises because of mind and mental state; the meeting of the three is sensory impingement; an experience arises conditioned by sensory impingement that is pleasant or painful or neither pleasant nor painful. He, being impinged on by a pleasant feeling, does not delight, rejoice or persist in cleaving to it; a tendency to attachment is not latent in him. Being impinged on by a painful feeling, he does not grieve, mourn, lament, beat his breast or fall into disillusion; a tendency to repugnance is not latent in him. Being impinged on by a feeling that is neither painful nor pleasant, he comprehends the origin and the going down and the satisfaction and the peril of that feeling and the escape as it really is, a tendency to ignorance is not latent in him. That he, monks, by getting rid of any tendency to attachment to a pleasant feeling, by driving out any tendency to repugnance for a painful feeling, by rooting out any tendency to ignorance concerning a feeling that is neither painful nor pleasant, by getting rid of ignorance, by making knowledge arise, should here and now be an end-maker of anguish-this situation exists.
Seeing this thus, monks, the instructed disciple of the ariyans turns away from eye, turns away from material shapes, turns away from visual consciousness, turns away from impact on the eye, turns away from feeling, turns away from craving. He turns away from ear, he turns away from sounds . . . He turns away from tongue, he turns away from tastes . . . He turns away from body, he turns away from touches . . . He turns away from mind, he turns away from mental states, he turns away from mental consciousness, he turns away from impact on the mind, he turns away from feeling, he turns away from craving. Turning away [287] he is dispassionate; by dispassion he is freed; in freedom is the knowledge that he is freed, and he comprehends : Destroyed is birth, brought to a close the Brahma-faring, done is what was to be done, there is no more of being such or so."
Thus spoke the Lord. Delighted, these monks rejoiced in what the Lord had said. And while this exposition was being given the minds of as many as sixty monks were freed from the cankers without grasping.
M. 148 육육법설(六六法說)의 가르침(중니카야 3권 p. 280 ~ 287 P.T.S.)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붓다는 사바티시이 제타숲에 위치한 아나타핀디카 장자가 바친 승원에서 지내셨다. 그곳에서 붓다는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붓다시여,
[완전무결한 범행의 법을 설하심] 비구들아, 너희들을 위해 처음도 좋고 가운데도 좋고 끝도 좋으며 의미와 문구를 갖추었으며 온통 충만하고 순결한 범행의 법을 밝히고 설하겠으니 그것은 곧 육육법(六六法)이다. 그것을 듣고 잘 생각해 보아라. 이제 설하겠다.
예, 붓다시여.
[육육법의 골자] 육내입처(六內入處)가 있으니 밝혀야 한다. 또한 육외입처(六外入處)가 있으니 밝혀야 한다. 또한 육식신(六識身)이 있으니 밝혀야 한다. 또한 육촉신(六觸身)이 있으니 밝혀야 한다. 또한 육수신(六受身)이 있으니 밝혀야 한다. 또한 육애신(六愛身)이 있으니 밝혀야 한다.
[육내입처] 육내입처(六內入處)가 있으니 밝혀야 한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눈의 포섭처. 귀의 포섭처. 코의 포섭처. 혀의 포섭처. 몸의 포섭처. 뜻의 포섭처가 있다. 이를 두고 육내입처가 있으니 밝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육법(六法)이다.
[육외입처] 육외입처(六外入處)가 있으니 밝혀야 한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색의 포섭처. 소리의 포섭처. 냄새의 포섭처. 맛의 포섭처. 촉감의 포섭처. 법의 포섭처가 있다. 이를 두고 육외입처가 있으니 밝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육법이다.
[육식신] 육식신(六識身)이 있으니 밝혀야 한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눈과 여러 색에 기대어 안식(眼識)이 발생하고, 귀와 여러 소리에 기대어 이식(耳識)이 발생하고, 코와 여러 냄새에 기대어 비식(鼻識)이 발생하고, 혀와 여러 맛에 기대어 설식(舌識)이 발생하고, 몸과 여러 촉감에 기대어 신식(身識)이 발생하고, 뜻과 여러 법에 기대어 의식(意識)이 발생한다. 이를 두고 육신식이 있으니 밝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육법이다.
[육촉신] 육촉신(六觸身)이 있으니 밝혀야 한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눈과 여러 색에 기대어 안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안촉(眼觸)이다. 또한 귀와 여러 소리에 기대어 이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이촉(耳觸)이다. 또한 코와 여러 냄새에 기대어 비식이 발생하고 섯이 합친 것이 비촉(鼻觸)이다. 또한 혀와 여러 맛에 기대어 설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설촉(舌觸)이다. 또한 몸과 여러 촉감에 기대어 신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신촉(身觸)이다. 또한 뜻과 여러 법에 기대어 의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의촉(意觸)이다. 이를 두고 육촉신이 있으니 밝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네 번째 육법이다.
[육수신] 육수신(六受身)이 있으니 밝혀야 한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눈과 여러 색에 기대어 안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안촉이고 안촉에 기대어 안수가 있다. 또한 귀와 여러 소리에 기대어 이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이촉이고 이촉에 기대어 이수가 있다. 또한 코와 여러 냄새에 기대어 비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비촉이고 비촉에 기대어 비수가 있다. 또한 혀와 여러 맛에 기대어 설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설촉이고 설촉에 기대어 설수가 있다. 또한 몸과 여러 촉감에 기대어 신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신촉이고 신촉에 기대어 신수가 있다. 또한 뜻과 여러 법에 기대어 의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의촉이고 의촉에 기대어 의수가 있다. 이를 두고 육수신이 있으니 밝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다섯째 육법이다.
[육애신] 육애신(六愛身)이 있으니 밝혀야 한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눈과 여러 색에 기대어 안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안촉이고 안촉에 기대어 안수가 있고 안수에 기대어 갈애가 있다. 또한 내지 이촉에 기대어 이수가 있고 이수에 기대어 갈애가 있다. 또한 내지 비촉에 기대어 비수가 있고 비수에 기대어 갈애가 있다. 또한 내지 설촉에 기대어 설수가 있고 설수에 기대어 갈애가 있다. 또한 내지 신촉에 기대어 신수가 있고 신수에 기대어 갈애가 있다. 또한 뜻과 여러 법에 기대어 의식이 발생하고 셋이 합친 것이 의촉이고 의촉에 기대어 의수가 있고 의수에 기대어 갈애가 있다. 이를 두고 육애신이 있으니 밝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여섯째 육법이다.
[눈은 무아임] 누군가 눈이 자아이다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면 눈에는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는 것을 두고 자아라고 한다면, 나의 자아가 발생하고 소멸한다라고 말해야 하는 모순상황에 빠진다. 그러므로 눈이 자아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눈은 무아인 것이다.
[색도 무아임] 또한 누군가 여러 색이 자아이다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여러 색에도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는 것을 두고 자아라고 한다면, 나의 자아가 발생하고 소멸한다라고 말해야 하는 모순상황에 빠진다. 그러므로 색이 자아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러 색도 무아인 것이다.
[안식도 무아임] 또한 누군가 안식이 자아이다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안식에도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지 따라서 안식도 무아인 것이다.
[안촉도 무아임] 또한 누군가 안촉이 자아이다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안촉에도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지 따라서 안촉도 무아인 것이다.
[안수도 무아임] 또한 누군가 안수가 자아이다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안수에도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지 따라서 안수도 무아인 것이다.
[갈애도 무아임] 또한 누군가 안수가 자아이다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갈애(渴愛)에도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지 따라서 갈애도 무아인 것이다.
또한 누군가 귀가 자아이다. 내지 여러 소리. 이식. 이촉. 이수. 갈애가 자아이다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귀. 여러 소리. 이식. 이촉. 이수. 갈애에도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지 따라서 귀. 여러 소리. 이식. 이촉. 이수 . 갈애도 무아(無我)인 것이다.
또한 누군가 코가 자아이다. 내지 여러 냄새. 비식. 비촉. 비수. 갈애가 자아이다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코. 여러 냄새. 비식. 비촉. 비수. 갈애에도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지 따라서 코. 여러 냄새. 비식. 비촉. 비수. 갈애도 무아인 것이다.
또한 누군가 혀가 자아이다. 내지 여러 맛. 설식. 설촉. 설수. 갈애가 자아이다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혀. 여러 맛. 설식. 설촉. 설수. 갈애에도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지 따라서 혀. 여러 맛 . 설식. 설촉. 설수. 갈애도 무아인 것이다.
또한 누군가 몸이 자아이다. 내지 여러 촉감. 신식. 신촉. 신수. 갈애가 자아이다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몸. 여러 촉감. 신식. 신촉. 신수. 갈애에도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지 따라서 몸. 여러 촉감. 신식. 신촉. 신수. 갈애도 무아인 것이다.
또한 누군가 뜻이 자아이다. 내지 여러 법. 의식. 의촉. 의수. 갈애가 자아이다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면 뜻. 여러 법. 의식. 의촉. 의수. 갈애에도 발생과 소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발생과 소멸이 나타타는 것을 두고 자아라고 한다면, 나의 자아가 발생하고 소멸하다라고 말해야하는 모순상황에 빠진다. 그러므로 뜻. 여러 법. 의식. 의촉. 의수. 갈애가 자아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뜻. 여러 법. 의식. 의촉. 의수. 갈애도 무아인 것이다.
[유신의 집기] 그리고 비구들아, 여기에 유신(有身)의 집기(集起)에 이르는 과정이 있다. 눈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집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리고 여러색. 안식. 안촉. 안수. 갈애 등의 각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집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한 귀를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집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리고 여러 소리. 이식. 이촉. 이수. 갈애 등의 각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집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한 코를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집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리고 여러 냄새. 비식. 이촉. 비수. 갈애 등의 각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집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한 혀를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집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리고 여러 맛. 설식. 설촉. 설수. 갈애 등의 각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집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한 몸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집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리고 여러 촉감. 신식. 신촉. 신수. 갈애 등의 각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집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한 뜻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집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리고 여러 법. 의식. 의촉. 의수. 갈애 등의 각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집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유신의 소멸] 그리고 비구들아, 여기에 유신의 소멸에 이르는 과정이 있다. 눈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소멸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리고 여러 색. 안식. 안촉. 안수. 갈애 등의 각각을 두고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소멸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한 귀. 여러 소리. 이식. 이촉. 이수. 갈애 등의 각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소멸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한 코. 여러 냄새. 비식. 비촉. 비수. 갈애 등의 각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소멸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한 혀. 여러 맛. 설식. 설촉. 설수. 갈애 등의 각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소멸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한 몸. 여러 촉감. 신식. 신촉. 신수. 갈애 등의 각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소멸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한 뜻. 여러 법. 의식. 의촉. 의수. 갈애 등의 각각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면 그것이 유신의 소멸에 이르는 과정이다.
[탐욕과 분노와 우둔함의 성립] 비구들아, 눈과 여러 색에 기대어 안식이 발생한다. 이 세법이 함께 간 것이 부딪침이다. 이 부딪침에 기대어 즐거움 또는 괴로움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이 발생한다. 그런데 누군가 즐거운 느낌에 부딪혀 있을 때 그는 기뻐하고 인사하고 집착하여 머문다. 그러면 그에게는 탐착이 잠재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괴로운 느낌에 부딪혀 있을 때 그는 슬퍼하고 피곤해 하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비통해 하고 우둔함에 빠진다. 그러면 그에게는 진에가 잠재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에 부딪혀 있으면서 그 느낌의 집기와 사라짐과 맛과 환란(患亂)과 출리(出離)를 여실히 알아 내지 못한다. 그러면 그에게는 무명(無明)이 잠재하게 된다.
[무명을 제거하지 못하면 괴로움을 끝내지 못함] 실로 비구들아, 즐거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잠재된 탐착을 제거하지 않고, 또한 괴로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잠재된 진에를 극복하지 않고, 또한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으로 말미암아 잠재된 무명을 뿌리뽑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무명을 제거하지 못하고 명(明)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살아있는 몸으로 괴로움을 끝낸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또한 비구들아, 귀와 여러 소리에 기대어 이식이 발생한다. 이 세 법이 함께 간 것이 부딪침이다. 이 부딪침에 기대어 즐거움 또는 괴로움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이 발생한다. 또한 비구들아, 코와 여러 냄새에 기대어 비식이 발생한다. 이 세 법이 함께 간 것이 부딪침이다. 이 부딪침에 기대어 즐거움 또는 괴로움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이 발생한다. 또한 비구들아, 혀와 여러 맛에 기대어 설식이 발생한다. 이 세 법이 함께 간 것이 부딪침이다. 이 부딪침에 기대어 즐거움 또는 괴로움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이 발생한다. 또한 비구들아, 몸과 여러 촉감에 기대어 신식이 발생한다. 이 세 법이 함께 간 것이 부딪침이다. 이 부딪침에 기대어 즐거움 또는 괴로움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이 발생한다. 이들의 느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비구들아, 뜻과 여러 법에 기대어 의식이 발생한다. 이 세 법이 함께 간 것이 부딪침이다. 이 부딪침에 기대어 즐거움 또는 괴로움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이 발생한다. 그런데 누군가 즐거운 느낌에 부딪혀 있을 때 그는 기뻐하고 인사하고 집착하여 머문다. 그러면 그에게는 탐착이 잠재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괴로운 느낌에 부딪혀 있을 때 그는 슬퍼하고 피곤해하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비통해 하고 우둔함에 빠진다. 그러면 그에게는 진에가 잠재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에 부딪혀 있으면서 그 느낌의 집기와 사라짐과 맛과 환란과 출리를 여실히 알아 내지 못한다. 그러면 그에게는 무명이 잠재하게 된다.
실로 비구들아, 즐거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잠재된 탐착을 제거하지 않고, 또한 괴로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잠재된 무명을 뿌리뽑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무명을 제거하지 못하고 명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살아있는 몸으로 괴로움을 끝낸다는 일을 있을 수 없다.
[괴로움의 소멸과정] 다시 비구들아, 눈과 여러 색에 기대어 안식이 발생한다. 이 세 법이 함께 간 것이 부딪침이다. 이 부딪침에 기대어 즐거움 또는 괴로움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이 발생한다. 그런데 누군가 즐거운 느낌에 부딪혀 있을 때도 그는 기뻐하지 않고 인사하지 않고 집착하여 머물지 않는다. 그러면 그에게는 탐착이 잠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괴로운 느낌에 부딪혀 있을 때 그는 슬퍼하지 않고 피곤해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 않고 가슴을 치며 비통해 하지 않고 우둔함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에게는 진에가 잠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에 부딪혀 있으면서 그 느낌의 집기와 사라짐과 맛과 환난과 출리를 여실히 알아낸다. 그러면 그에게는 무명이 잠재하지 않는다.
실로 비구들아, 즐거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잠재하는 탐착을 제거하고, 또한 괴로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잠재된 진에를 극복하고, 또한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으로 말미암아 잠재된 무명을 뿌리뽑는다면, 그리하여 무명을 제거하고 명을 일으킨다면, 살아있는 몸으로 괴로움을 끝내게 된다.
또한 비구들아, 귀와 여러 소리에 기대어 이식이 발생한다. 내지 몸과 여러 촉감에 기대어 신식이 발생한다. 이 세 법이 함께 간 것이 부딪침이다. 이 부딪침에 기대어 즐거움 또는 괴로움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이 발생한다. 이들의 느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비구들아, 뜻과 여러 법에 기대어 의식이 발생한다. 이 세 법이 함께 간 것이 부딪침이다. 이 부딪침에 기대어 즐거움 또는 괴로움 또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이 발생한다. 이들의 느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누군가 즐거운 느낌에 부딪혀 있을 때도 그는 기뻐하지 않고 인사하지 않고 집착하여 머물지 않는다. 그러면 그에게는 탐착이 잠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괴로운 느낌에 부딪혀 있을 때 그는 슬퍼하지 않고 피곤해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 않고 가슴을 치며 비통해 하지 않고 우둔함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에게는 진에가 잠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에 부딪혀 있으면서 그 느낌의 집기와 사라짐과 맛과 환난과 출리를 여실히 알아낸다. 그러면 그에게는 무명이 잠재하지 않는다.
[무명의 제거, 괴로움의 끝] 실로 비구들아, 즐거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잠재하는 탐착을 제거하고, 또한 괴로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잠재된 진에를 극복하고, 또한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느낌으로 말미암아 잠재된 무명을 뿌리뽑는다면, 그리하여 무명을 제거하고 명을 일으킨다면, 살아있는 몸으로 괴로움을 끝내게 된다.
[육육법에서 해탈함] 비구들아, 가르침을 들은 거룩한 제자들은 이와 같이 보므로 눈. 여러 색. 안식. 안촉. 안수. 갈애를 싫어하고, 귀. 여러 소리. 이식. 이촉. 이수. 갈애를 싫어하고, 코. 여러 냄새. 비식. 비촉. 비수. 갈애를 싫어하고, 혀. 여러 맛. 설식. 설촉. 설수. 갈애를 싫어하고, 뜻. 여러 법. 의식. 의촉. 의수. 갈애를 싫어한다. 싫어하므로 탐착을 제거하고 탐착을 제거하므로 해탈한다. 그리고 해탈하였을 때 해탈했다라고 알게 된다. 곧 나의 생을 다하였고 범행은 완성되었고, 할 바를 완수하였으니 다시 이 곳으로의 재생은 없다라고 알아낸다.
붓다는 이렇게 설하셨다. 이에 비구들은 듯을 잡았으며 매우 기뻐하였다. 실로 이 가르침이 베풀어 질 때 60명 가량의 비구들이 취착함이 없이 역류하는 번뇌[漏]로부터 심해탈(心解脫)하였다.
제321. 일체경(一切經)
(三二一)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時.有生聞婆羅門往詣佛所.共相問訊已.退坐一面.白佛言.沙門瞿曇.所謂一切法.云何爲一切法.佛告婆羅門.眼及色·眼識·眼觸·眼觸因緣生受.若苦·若樂·不苦不樂.耳·鼻·舌·身·意法·意識·意觸·意觸因緣生受.若苦·若樂·不苦不樂.是名爲一切法.若復有言此非一切法.沙門瞿曇所說一切法.我今捨.更立一切法者.此但有言.數問已不知.增其癡惑.所以者何.非其境界故.佛說此經已.生聞婆羅門聞佛說已.歡喜隨喜.從坐起去如生聞婆羅門所問三經.有異比丘所問三經·尊者阿難所問三經·世尊法眼法根法依三經.亦如上說
제321. 일체경(一切經)
신수장경 : 2-91b
한글장경 : 잡-1-374
남전장경 :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었다. 때에 어떤 생문 바라문은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서로 인사한 뒤에 한 쪽에 물러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사문 고오타마시여, 이른바 일체 법이란 어떤 것을 일체 법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바라문에게 말씀하시었다.
"눈과 색깔·눈의 의식·눈의 닿임·눈의 닿임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과 귀·코·혀·몸·뜻과 법·뜻의 의식·뜻의 닿임·뜻의 닿임으로 생기는 느낌 즉, 혹은 괴롭고 혹은 즐거우며 혹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이름하여 일체 법이라 하느니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것은 일체 법이 아니다. 나는 이제 사문 고오타마의 말하는 일체 법을 버리고 다시 일체 법을 세운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만 있을 뿐으로써, 자꾸 물어도 알지 못하여 그 어리석음과 의혹만을 더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생문 바라문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생문 바라문의 물은 세 경과 같이 어떤 비구의 물은 세 경, 존자 아난다가 물은 세 경, 세존의 법의 눈·법의 근본·법의 의지의 세 경도 또한 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제453. 촉경(觸經) ②
(四五三)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緣種種界生種種觸.緣種種觸生種種受.緣種種受生種種愛.云何種種界.謂十八界.眼界·色界·眼識界.乃至意界·法界·意識界.是名種種界.云何緣種種界生種種觸.緣種種觸生種種受.緣種種受生種種愛.謂緣眼界生眼觸.非緣眼觸生眼界.但緣眼界生眼觸.緣眼觸生眼受.非緣眼受生眼觸.但緣眼觸生眼受.緣眼受生眼愛.非緣眼愛生眼受.但緣眼受生眼愛.如是耳·鼻·舌·身·意界緣生意觸.非緣意觸生意界.但緣意界生意觸.緣意觸生意受.非緣意受生意觸.但緣意觸生意受.緣意受生意愛.非緣意愛生意受.但緣意受生意愛.是故.比丘.非緣種種愛生種種受.非緣種種受生種種觸.非緣種種觸生種種界.但緣種種界生種種觸.緣種種觸生種種受.緣種種受生種種愛.是名比丘當善分別種種界.佛說是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제453. 촉경(觸經) ②
신수장경 : 2-116a
한글장경 :
남전장경 : S. 14.2~6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국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갖가지 경계를 인연하여 갖가지 부딪침이 생기고, 갖가지 부딪침을 인연하여 갖가지 느낌이 생기며, 갖가지 느낌을 인연하여 갖가지 욕망이 생긴다. 어떤 것이 갖가지 경계인가. 이른바 18경계이니 눈의 경계. 빛깔의 경계. 눈의 식의 경계 . . . 내지, 뜻의 경계. 법의 경계. 뜻의 식의 경계이니, 이것을 갖가지 경계라 한다. 어떻게 갖가지 경계를 인연하여 갖가지 부딪침이 생기고, 갖가지 부딪침을 인연하여 갖가지 느낌이 생기며, 갖가지 느낌을 인연하여 갖가지 욕망이 생기는가. 이른바 눈의 경계를 인연하여 눈의 부딪침이 생기며, 눈의 부딪침을 인연하여 눈의 경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눈의 경계를 인연하여 눈의 부딪침이 생기는 것이다. 눈의 부딪침을 인연하여 눈의 느낌이 생기고 눈의 느낌을 인연하여 눈의 부딪침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눈의 부딪침을 인연하여 눈의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눈의 느낌을 인연하여 눈의 욕망이 생기고, 눈의 욕망을 인연하여 눈의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눈의 느낌을 인연하여 눈의 욕망이 생기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 뜻의 경계를 인연하여 뜻의 부딪침이 생기고, 뜻의 부딪침을 인연하여 듯의 경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뜻의 경계를 인연하여 뜻의 부딪침이 생기는 것이다. 뜻의 부딪침을 인연하여 뜻의 느낌이 생기고 뜻의 느낌을 인연하여 뜻의 부딪침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뜻의 부딪침을 인연하여 뜻의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뜻의 느낌을 인연하여 뜻의 욕망이 생기고, 뜻의 욕망을 인연하여 뜻의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뜻의 욕망을 인연하여 뜻의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갖가지 욕망을 인연하여 갖가지 느낌이 생기는 것이 아니요, 갖가지 느낌을 인연하여 갖가지 부딪침이 생기는 것이 아니며, 갖가지 부딪침을 인연하여 갖가지 경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갖가지 경계를 인연하여 갖가지 부딪침이 생기고, 갖가지 부딪침을 인연하여 갖가지 느낌이 생기며, 갖가지 느낌을 인연하여 갖가지 욕망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비구들이여, 마땅히 갖가지 경계를 잘 분별하라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해 마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S. 2~6 Samphassa (16. With Verses)
At Savattthi. "bhikkhus, it is by way of elements that beings come together and unite : those of an inferior disposition. In the past they did so, in the future they will do so, and now at present they do so too.
"Just as excrement comes together and unites with excrement, urine with urine, spittle with spittle, pus with pus, and blood with blood, so too, bhikkhus, it is by way of elements that beings come together and unite : those of an inferior disposition come together and unite with those of an inferior disposition. In the past they did so, in the future they will do so, and now at present they do so too. [158]
"Bhikkhus, it is by way of elements that beings come together and unite : those of a good disposition come together and unite with those of a good disposition. In the past they did so, in the future they will do so, and now at present they do so too.
"Just as milk comes together and unites with honey, and molasses with molasses, so too, bhikkhus, it is by way of elements that beings come together and unite : those of a good disposition come together and unite with those of a good disposition. In the past they did so, in the future they will do so, and now at present they do so too."
This is what the Blessed One said. Having said this, the Fortunate One, the Teacher, further said this :
"From association the woods of lust is born,
By non association the woods is cut.
Just as one who has mounted a wooden plank
Would sink upon the mighty sea,
So one of virtuous living sinks
By consorting with a lethargic person.
"Thus one should avoid such a person -
One lethargic, devoid of energy.
Keep company with the wise,
With resolute meditators,
With the noble ones who dwell secluded,
their energy constantly aroused."[159]
S. 14.2 시와 함께 [Sagath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다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과거세에도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렸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미래세에도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릴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현세에서도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리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똥은 똥과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오줌은 오줌과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침은 침과 관계를 맺고 그곳과 어울린다. 고름은 고름과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피는 피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과거세에도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렸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렸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미래세에도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렸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릴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현세에서도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렸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리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과거세에도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렸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미래세에도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릴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현세에서도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리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우유는 우유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기름은 기름과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버터는 버터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꿀은 꿀과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당밀은 당밀과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세계와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과거세에도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렸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미래세에도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릴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현세에서도 뭇삶들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것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리고 있다.
[개념정리] - 18계(界)
Ⅰ. 서론
계(界)의 원어인 'dhatu'는 층(層, layer), 구성요소(component part), 기본요소(element)등의 의미가 있는데 '계(界)'는 'layer'의 의미를 취한 한역이다.
십팔계(十八界)는 십이입처(十二入處)에서 육식(六識)이 발생한 마음이다. 십이입처는 욕탐(欲貪)에 의해 모여 있는 자아와 세계로 취해진 허망한 마음이다.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는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가운데 일어난 생각들이 사라지지 않고 욕탐에 묶여서 모여 있는 상태이다. 아직 자아와 세계로 취해진 것은 아니다. 십이입처를 취해서 자아와 세계를 만드는 것이 중생인데 이 십이입처를 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이 분별되어야 한다. 식은 바로 이 같은 십이입처를 분별하는 마음이다. 십이입처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우리 마음에 육식이라는 분별심이 생기면 십이입처와 육식은 이 분별심에 의해서 각기 다른 것으로 분별된다. 분별심이 십이입처와 새로 발생한 육식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 십팔종류로 구분한다. 이렇게 육식의 발생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십팔계역(十八界域)으로 구분된 상태가 십팔계(十八界)이다.
Ⅱ. 본론
계(界)에는 중생들이 화합(和合)하고 함께 한다는 세계라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선심(善心)을 가진 사람은 선심에 상응하게 외입처(外入處)를 규정하고 의미를 구성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나타난 세계는 즐거운 세계가 될 것이다. 따라서 계는 외부에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각기 다르게 구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십팔계도 그 구조는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할지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각기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불타는 이렇게 십팔계가 성립하면 이때 6촉이 발생한다고 한다. 아함에는 십팔계를 연하여 촉이 발생한다고 하기도 하고, 三事(眼, 色, 眼識)의 화합이 觸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삼사의 화합, 또는 십팔계를 연하여 발생한다고 하는 촉은 십팔계를 연하여 우리의 의식 속에 생긴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느낌'이라 할 수 있다. 촉은 이미 성립한 인식이 반복될 때 생기는 의식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에게 생기는 인식은 어느 것이나 일회적이다. 내가 보고 있는 책상은 조금 전에 보았던 책상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동일한 책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각으로 분별할 수 없지만 주변의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다. 단지 우리가 동일하다고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법(法)인 것이며, 이와 같이 법의 세계(法界)를 존재의 세계로 잘못 느끼는 것이 촉(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동일한 내용이 아닌 인식을 동일한 인식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욕탐 때문이다. 십이처를 욕탐으로 취착(取着)하고 결박(結縛)하여 자아와 세계라고 생가한 가운데 인식을 성립시키기 때문에 그 같은 착각이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법계(法界)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욕탐의 멸진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불타가 육입처의 집이 곧 촉집(觸集)이며 이와 같이 하면 결국 괴로운 세계가 집(集)하므로 육입처의 집(集), 멸(滅) 등과 그것을 떠나는 길을 여실하게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Ⅲ. 결론
십이처를 연(緣)으로 육식이 발생하면 십팔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십팔계는 존재의 세계는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같은 종류끼리 계역(界域)을 형성하고 있다가 새로운 인식이 성립하면 그것을 분별하는 역할을 한다. 새로운 인식의 내용이 어디에 속하는 내용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불교의 이해와 실천 1. 268.p ~ 305.p
아함의 중도체계 연구, 이중표
제6장 오온(五蘊)
제55 陰經
(五五)如是我聞.一時.佛在波羅奈國仙人住處鹿野苑中.爾時.世尊告諸比丘.我今當說陰及受陰.云何爲陰.若所有諸色.若過去·若未來·若現在.若內.若外.若 ·若細.若好·若醜.若遠·若近.彼一切總說色陰.隨諸所有受·想·行·識亦復如是.彼一切總說受·想·行·識陰.是名爲陰.云何爲受陰.若色是有漏·是取.若彼色過去·未來·現在.生貪欲·瞋 ·愚癡及餘種種上煩惱心法.受·想·行·識亦復如是.是名受陰.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제55. 음경(陰經)
신수장경 : 2-13b
한글장경 : 잡-1-52
남전장경 : S. 22-48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바라나시국의 선인이 사는 사슴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이제 오온(五蘊)과 오수온(五受蘊)을 말하리라. 어떤 것을 오온(五蘊)이라 하는가. 모든 물질로써 과거거나 미래거나 현재거나, 안이거나 밖이거나 굵거나 가늘거나 좋거나 더럽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그 일체는 모두 색온(色蘊)이라 한다. 따라서 모든 느낌(受)·생각(想) ·지어감(行)·의식(識)도 또한 그와 같아서 그 일체는 모두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의 온(蘊)이라 하나니 이것들을 모두 오온(五蘊)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오수온(五受蘊)이라 하는가. 만일 색(色)이 번뇌가 있으면 그것을 집착한다. 만일 그 색(色)이 과거나 미래나 현재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및 그 밖의 여러 가지 번뇌의 마음의 법을 내고 느낌·생각·지어감·의식도 또한 그러하면 이것을 오수온(五受蘊)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S. 22-48 (6). The Factors. [Khandh ]
At Savatthi. . . . Then (the Exalted One) said : -
'I will teach you, brethren, the five factors and the five factors that have to do with grasping. Do ye listen to it.
And what, brethren, are the five factors ?
All body, brethren, be it past, future or present, inward or outward, gross or subtle, low or lofty, far or near, -that is called "the body-factor." Every feeling, every perception, all the activities . . . every consciousness, be it past, future or present, inward or outward, etc. . . . that is called the "consciousness-factor."
These five, brethren, are called the five factors.
And what, brethren, are the five factors that have to do with grasping ? Every body, brethren, be it past, future or present . . . be it far or near, is a co-asava, and has to do with grasping. That is called the five factors that have to do with grasping.
Every feeling, brethren . . . that is called the factor of feeling that has to do with grasping. . . .
Every perception . . . that is called the perception factor, that has to do with grasping.
All the activities. . . Whatsoever consciousness, be it past, future or present . . . be it far or near, is a co-asava, and has to do with grasping. These are called the fivefold mass of factors that have to do with grasping.'
S. 22-48. 존재의 다발[khandh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과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에 관해 설하겠다. 잘 들어라.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물질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감수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감수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지각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지각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형성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형성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의식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무엇이든지 이와 같은 것을 의식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것들을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이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를 속성으로 하고 집착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집착된 물질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감수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를 속성으로 하고 집착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집착된 감수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지각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를 속성으로 하고 집착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집착된 지각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형성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를 속성으로 하고 집착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집착된 형성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의식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를 속성으로 하고 집착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집착된 의식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것을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이라고 부른다."
제63 분별경(分別經)
(六三)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有五受陰.謂色受陰.受·想·行·識受陰.比丘.若沙門·婆羅門計有我.一切皆於此五受陰計有我.何等爲五.諸沙門·婆羅門於色見是我·異我·相在.如是受·想·行·識.見是我·異我·相在.如是愚癡無聞凡夫.計我·無明·分別如是觀.不離我所.不離我所者.入於諸根.入於諸根已.而生於觸.六觸入所觸.愚癡無聞凡夫生苦樂.從是生此等及餘.謂六觸身.云何爲六.謂眼觸入處.耳·鼻·舌·身·意觸入處.比丘.有意界·法界·無明界.無明觸所觸.愚癡無聞凡夫言有·言無·言有無·言非有非無·言我最勝·言我相似.我知·我見.復次.比丘.多聞聖弟子住六觸入處.而能厭離無明.能生於明.彼於無明離欲而生於明.不有·不無·非有無·非不有無·非有我勝·非有我劣·非有我相似.我知·我見.作如是知·如是見已.所起前無明觸滅.後明觸集起佛說是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63. 분별경(分別經) 3
신수장경 : 2-16b
한글장경 : 잡-1-64
남전장경 : S. 22-47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다섯 가지 쌓임이 있으니 이른바 물질의 쌓임과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의 쌓임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나>가 있다고 헤아리면 그것은 다 이 다섯 가지 쌓임에 <나>가 있다고 헤아리는 것이다. 어떤 것이 다섯인가. 모든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물질은 <나>다. 나와 다르다. 둘의 합한 것이다'라 보고, 이와 같이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은 <나>다. 나와 다르다. 둘의 합한 것이다.'라고 본다. 이와 같이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나>를 헤아려 무명으로써 분별하고 이렇게 관찰하여 <내 것>이라는 생각을 떠나지 못한다. <내 것>이라는 생각을 떠나지 못하면 모든 근에 들어가고 모든 근에 들어간 뒤에는 닿임이 생겨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부딪치느니라.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런 마음과 또 다른 마음을 내나니, 이른바 여섯 가지 부딪치는 감각기관과 귀·코·혀·몸·뜻이 부딪치는 감각기관이니라.
비구들이여, 뜻의 경계와 법의 경계와 무명의 경계가 있다. 무명의 <닿임>에 부딪쳐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나>가 있다고 말하고, 없다고 말하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가장 훌륭하다고 말하고, 나는 저와 같다고 말하며, 나는 알고 나는 본다고 말하느니라.
다시 비구들이여,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여섯 가지 부딪치는 감각기관에 머무르면서도 능히 무명을 싫어해 떠나 밝음을 낼 수 있다. 그는 무명과 욕심을 떠나 밝음을 내기 때문에 '<나>는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도 아니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훌륭한 것도 아니요, 내가 못한 것도 아니며, 내가 저와 같은 것도 아니며, 내가 아는 것도 아니요, 내가 보는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본 뒤에는, 앞에 일어난 무명의 닿임은 멸하고 뒤의 밝음의 닿임은 모이어 일어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S. 22-47 (5). View
At Savatthi. . . Then (the Exalted One) said : -
'Those recluses and brahmins, brethren, who regard the self in divers ways, regard it as the body-mass of five factors based on grasping, or as some one of these. What five ?
Herein, brethren, the untaught many-folk who discern not those that are Ariyans . . . regard body as the self, self as possessed of body, body as being in the self, self as being in body . . . so also as to feeling, perception, and the other factors. . . . Thus this is the view : -it has come to him (to think) "I am." Now when it has come to anyone to think "I am," there comes to pass a descent of the five feeling-faculties of seeing, hearing, smelling, tasting and touching.
Mind is the result, mind-states are the result, the ignorance-element is the result. Touched by the feeling born of contact with ignorance, there come to the untaught many-folk (the view), "I am" ; there comes (the view), "this same I am"; there comes (the view), "things will be" ; there comes the view, "things will have body" ; the view, "things will be bodyless" ; there comes the view, "things will be conscious" ; the view, "things will be unconscious " ; the view, "things will be neither conscious nor unconscious."
It is just therein, brethren, that the five feelling-faculties persist. But herein for the well-taught Ariyan disciple ignorance is put away and knowledge arises. Along with the fading away of ignorance and the arising of knowledge there cones to him no view that "I am," that "this same I am," that "things will be, things will not be : things will have body, will not have body: things will be conscious, will be unconscious, will be neither conscious nor unconscious."'
S. 22-47. 여김 [Samanupassan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나 다양하게 시설된 것을 자아로 여기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그들은 모두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들이나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자아로 여긴다.
무엇이 다섯가지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이 나이고 나의 것이 물질이고 나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고 감수가 나이고 나의 것이 감수이고 나 가운데 감수가 있고 감수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고, 지각 이 나이고 나의 것이 지각이고 나 가운데 지각이 있고 지각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고, 형성이 나이고 나의 것이 형성이고 나 가운데 형성이 있고 형성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고, 의식이 나이고 나의 것이 의식이고 나 가운데 의식이 있고 의식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이 '나는 있다'라는 생각이 그를 떠나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나는 있다'라는 생각을 떠나지 못하면, 거기에 시각능력, 청각능력, 후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의 다섯가지 감각능력이 임하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정신이 있고 사물이 있고 무명의 세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무명에 촉발된 정신에 의해서 '나는 있다'라고 생각하며, '이것이 나이다'라고 생각한다.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것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비물질적인 것일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지각을 지닌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지각을 지니지 않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지각하거나 지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 다섯가지 감각능력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에게 무명은 사라지고 지혜가 생겨나서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생겨나면, 그는 '나는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이것이 나이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있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며,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물질적인 것일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며, '비물질적인 것일 것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지각을 지닌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며, '지각을 지니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며, '지각하거나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제46. 삼세음세경(三世陰世經)
(四六)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有五受陰.云何爲五.色·受·想·行·識受陰.若沙門·婆羅門以宿命智自識種種宿命.已識·當識·今識.皆於此五受陰.已識·當識·今識.我過去所經.如是色·如是受·如是想·如是行·如是識.若可 可分.是名色受陰.指所 .若手·若石·若杖·若刀·若冷·若暖·若渴·若飢·若蚊· ·諸毒 ·風·雨觸.是名觸 .是故 是色受陰.復以此色受陰無常·苦·變易.諸覺相是受受陰.何所覺.覺苦·覺樂·覺不苦不樂.是故名覺相是受受陰.復以此受受陰是無常·苦·變易.諸想是想受陰.何所想.少想·多想·無量想.都無所有.作無所有想.是故名想受陰.復以此想受陰是無常·苦·變易法.爲作相是行受陰.何所爲作.於色爲作.於受·想·行·識爲作.是故爲作相是行受陰.復以此行受陰是無常·苦·變易法.別知相是識受陰.何所識.識色.識聲·香·味·觸·法.是故名識受陰.復以此識受陰是無常·苦·變易法.諸比丘.彼多聞聖弟子於此色受陰作如是學.我今爲現在色所食.過去世已曾爲彼色所食.如今現在.復作是念.我今爲現在色所食.我若復樂着未來色者.當復爲彼色所食.如今現在.作如是知已.不顧過去色.不樂着未來色.於現在色生厭·離欲·滅患·向滅.多聞聖弟子於此受·想·行·識受陰學.我今現在爲現在識所食.於過去世已曾爲識所食.如今現在.我今已爲現在識所食.若復樂着未來識者.亦當復爲彼識所食.如今現在.如是知已.不顧過去識.不樂未來識.於現在識生厭·離欲·滅患·向滅.滅而不增.退而不進.滅而不起.捨而不取.於何滅而不增.色滅而不增.受·想·行·識滅而不增.於何退而不進.色退而不進.受·想·行·識退而不進.於何滅而不起.色滅而不起.受·想·行·識滅而不起.於何捨而不取.色捨而不取.受·想·行·識捨而不取.滅而不增.寂滅而住.退而不進.寂退而住.滅而不起.寂滅而住.捨而不取.不生繫着.不繫着已.自覺涅槃.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佛說此經時.衆多比丘不起諸漏.心得解脫.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我卑下·種子 封滯·五轉·七
二繫着及覺 三世陰世食
제46. 삼세음세경(三世陰世經)
신수장경 : 2-11b
한글장경 : 잡-1-44
남전장경 : S. 22-79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다섯 가지 쌓임이 있다. 어떤 것이 다섯인가. 물질의 받는 <쌓임>과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의 쌓임이니라. 만일 모든 사문이나 바라문들로서 숙명을 아는 지혜로써 여러 가지 숙명을 알아 이미 알았고 장차 알 것이며 현재에서 안다면, 그것은 다 이 다섯 가지 쌓임에서 이미 알았고 장차 알 것이며 현재에 아는 것이니라. 곧 '나는 과거에 이러한 물질이었고 이러한 느낌이었으며, 이러한 생각이었고 이러한 지어감이었으며, 이러한 의식이었다'고 아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걸리고 나뉠 수 있는 것이라면 이것을 물질의 쌓임이라 하느니라. 또 걸리는 것으로서 손·돌·막대기·칼·추위·더위·목마름·굶주림이나 혹은 모기나 등에의 모든 독한 벌레·바람·비에 부딪치는 것을 가리켜 그것을 부딪치는 걸림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걸리는 것은 다 물질의 쌓임이요, 다시 그것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기 때문에 물질의 쌓임이라 하느니라.
모든 깨닫는 모양은 다 느낌의 쌓임이니, 무엇을 깨닫는가. 괴로움을 깨닫고, 즐거움을 깨달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깨닫나니, 그러므로 깨닫는 모양은 다 느낌의 쌓임이요, 다시 그것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기 때문에 느낌의 쌓임이니라. 모든 생각(想)은 다 생각의 쌓임이니, 무엇을 생각하는가. 적은 생각·많은 생각·한량이 없는 생각·전혀 가진 것이 없을 때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생각이니, 그러므로 생각의 쌓임이라 하고, 다시 그것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기 때문에 생각의 쌓임이니라. 지어가는 모양은 지어감의 쌓임이니, 무엇을 지어가는가. 물질에 대해서 짓고, 느낌·생각·지어감·의식에 대해서 짓나니, 그러므로 지어가는 모양은 지어감의 쌓임이요, 다시 그것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기 때문에 지어감의 쌓임이니라. 분별해 아는 모양은 의식의 쌓임이니 무엇을 아는가. <빛깔>을 알고, 소리·냄새·맛·부딪침·법을 아나니, 그러므로 이것을 의식의 쌓임이라 하며, 다시 그것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기 때문에 의식의 쌓임이니라.
비구들이여, 저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물질의 쌓임에 대해서 이렇게 배운다. 곧 '나는 현재에 물질에게 먹히고 있다. 과거 세상에서도 이미 현재와 같이 저 물질에게 먹히고 있었다'고 그는 다시 '나는 현재에 물질에게 먹히고 있다. 내가 만일 다시 미래의 물질을 즐겨해 집착하면 다시 현재와 같이 그 물질에게 먹히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 뒤에는 과거의 물질은 돌아보지 않고, 미래의 물질은 즐겨해 집착하지 않으며, 현재의 물질에 대해서는 싫증을 내고, 근심을 멸하고자 하여 멸하는 길로 향하느니라.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이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의 쌓임에 대해서도 이렇게 배운다. 곧 '나는 현재에 현재의 <그것들>에게 먹히고 있다. 과거 세상에서도 이미 현재와 같이 <그것들>에게 먹히고 있었다. 내가 이미 현재의 <그것들>에게 먹히고 있으면서 만일 다시 미래의 <그것들>을 즐겨해 집착하면 반드시 장래에도 현재와 같이 <그것들>에게 먹히게 될 것이다'라고. 이렇게 안 뒤에는 과거의 그것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미래의 그것들은 즐겨해 집착하지 않으며, 현재의 그것들에 대해서는 싫증을 내고, 근심을 멸하고자 하여 멸하는 길로 그래서 멸하고서 더하지 않고, 물러나고서 나아가지 않으며, 멸하고서 일으키지 않고, 버리고서 잡음하지 않나니, 무엇을 멸하고서 더하지 않는가. 물질을 멸하고서 더하지 않고,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을 멸하고서 더하지 않는다. 무엇에서 물러나고서 나아가지 않는가. 물질에서 물러나고서 나아가지 않으며 느낌·생각·지어감·의식에서 물러나고서 나아가지 않는다. 무엇을 멸하고서 일으키지 않는가. 물질을 멸하고서 일으키지 않고,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을 멸하고서 일으키지 않는다. 무엇을 버리고서 잡음하지 않는가. 물질을 버리고서 취하지 않으며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을 버리고서 잡음하지 않느니라. 멸하고서 더하지 않나니 고요하고 멸하여 머무르고, 물러나고서 나아가지 않나니 고요하고 물러나 머무르며, 멸하고서 일으키지 않나니 고요하고 멸하여 머무르고, 버리고서 잡음하지 않나니 얽매이고 집착하지 않는다. 얽매이고 집착하지 않으면 스스로 <열반>을 깨달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생의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많은 비구들은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리고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나와 천함과 종자와
집착과 다섯 가지 쌓임과 일곱 곳과
두 얽매임과 감각과
삼세의 쌓임이니라.'
S. 22-79 (7) Being Devoured
At Savatthi. "Bhikkhus, those ascetics and brahmins who recollect their manifold past abodes all recollect the five aggregates subject to clinging or a certain one among them. What five?
"When recollection thus, bhikkhus : 'I had such form in the past, 'it is just form that one recollects. When recollecting : 'I had such a feeling in the past,' it is just feeling that one recollects.
When recollecting : 'I had such a perception in the past,' it is just perception that one recollects. When recollection ; 'I had such volitional formations in the past, ' it is just volitional formations that one recollects. When recollecting : 'I had such consciousness in the past,' it is just consciousness that one recollects.
"And why, bhikkhus, do you call it form? 'It is deformed,' bhikkhus, therefore it is called form. Deformed by what? Deformed by cold, deformed by heat, deformed by hunger, deformed by thirst, deformed by contact with flies, mosquitoes, wind, sun, and serpents. 'It is deformed,'bhikkhus, therefore it is called form.
"And why, bhikkhus, do you call it feeling? 'It feels, 'bhikkhus, therefore it is called feeling. And what does it feel? It feels pleasure, it feels pain, it feels neither-pain-nor-pleasure. 'It feels,' bhikkhus, therefore it is called feeling.
"And why, bhikkhus, do you call it perception? 'It perceives,' bhikkhus, therefore it is called perception. And what does it perceive? It perceives blue, it perceives yellow, it perceives red, it perceives white. 'It perceives,' bhikkhus, therefore it is called perception.
"And why, bhikkhus, do you call them volitional formations? 'They construct the conditioned,' bhikkhus, therefore they are called volitional formations. And what is the conditioned that they construct? They construct conditioned form as form; they construct conditioned feeling as feeling; they construct conditioned perception as perception; they construct conditioned volitional formations as volitional formations; they construct conditioned consciousness as consciousness. 'They construct the conditioned,' bhikkhus, therefore they are called volitional formations.
"And why, bhikkhus, do you call it consciousness? 'It cognozes,' bhikkhus, therefore it is called consciousness. And what does it cognize? It cognizes sour, it cognizes bitter, it cognizes pungent, it cognizes sweet, it cognizes sharp, it cognizes mild, it cognizes salty, it cognizes bland. 'It cognizes,' bhikkhus, therefore it is called consciousness.
"Therein, bhikkhus, the instructed noble disciple reflects thus : 'I am now being devoured by form. In the past too I was devoured by form in the very same way that I am now being devoured by present form. If I were to seek delight in future form, then in the future too I shall be devoured by form in the very same way that I am now being devoured by present form.'
Having reflected thus, he becomes indifferent towards past form, he does not seek delight in future form, and he is practising for revulsion towards present form, for its fading away and cessation.
"[He reflects thus:] 'I am now being devoured by feeling.' ... 'I am now being devoured by perception.' ... 'I am now being devoured by present consciousness. In the past too I was devoured by consciousness in the very same way that I am now being devoured by present consciousness. If I were to seek delight in future consciousness. If I ware to seek delight in future consciousness, them in the future too I shall be devoured by consciousness in the very same way that I am now being devoured by present consciousness.' Having reflected thus, he becomes indifferent towards past consciousness, he does not seek delight in future consciousness, and he is practising for revulsion towards present consciousness, for its fading away and cessation.
"What do you think, bhikkhus, is form permanent or impermanent? ... Is feeling ... perception ... volitional formations ... consciousness permanent or impermanent?" - "Impermanent, venerable sir," - "Is what is impermanent suffering or happiness?" - "Suffering, venerable sir." - "Is what is impermanent, suffering, and subject to change fit to be regarded thus : 'This is mine, this I am, this is my self'?" - "No, venerable sir."
"Therefore, bhikkhus, any kind of form whatsoever ... Any kind of feeling whatsoever ... Any kind of perception whatsoever ... Any kind of volitional formations whatsoever ... Any kind of consciousness whatsoever, whether past, future, or present, internal or external, gross or subtle, inferior or superior, far or near, all consciousness should be seen as it really is with correct wisdom thus: 'This is not mine, this I am not, this is not my self.'
"This is called, bhikkhus, a noble disciple who dismantles and does not build up; who abandons and does not cling; who scatters and does not amass; who extinguishes and does not kindle.
"And what is it that he dismantles and does not build up? He dismantles form and does not build it up. He dismantles feeling ... perception ... volitional formations ... consciousness and does not build it up.
"And what is it that he abandons and does not cling to? He abandons form and does not cling to it. He abandons feeling ... perception ... volitional formations ... consciousness and does not cling to it.
"And what is it that he scatters and does not amass? He scatters form and does not amass it. He scatters feeling ... perception ... volitional formations ... consciousness and does not amass it.
"And what is it that he extinguishes and does not kindle? He extinguishes form and does not kindle it He extinguishes feeling ... perception .... volitional formations ... consciousness and does not kindle it.
"Seeing thus, bhikkhus, the instructed noble disciple experiences revulsion towards form, revulsion towards feeling, revulsion towards perception, revulsion towards volitional formations, revulsion towards consciousness. Experiencing revulsion, he becomes dispassionate. Through dispassion [his mind] is liberated.
When it is liberated there comes the knowledge; 'It's liberated.'
He understands: "Destroyed is birth, the holy life has been lived, what had to be done has been done, there is no more for this state of being.'
"This called, bhikkhus, a noble disciple who neither builds up nor dismantles, but who abides having dismantled; who neither abandons nor clings, but who abides having abandoned; who neither scatters nor amasses, but who abides having scattered; who neither extinguishes nor kindles, but who abides having extinguished.
"And what is it, bhikkhus, that he neither builds up nor dismantles, but abides having dismantled? He neither builds up nor dismantles form, but abides having dismantled it. He neither builds up nor dismantles feeling ... perception ...volitional formations ... consciousness, but abides having dismantled it.
"And what is it, bhikkhus, that he neither abandons nor clings to, but abides having abandoned? He neither abandons nor clings to form, but abides having abandons it. He neither abandons nor clings to feeling ... perception ... volitional formations ... consciousness, but abides having abandoned it.
"And what is it that he neither scatters nor amasses, but abides having scattered? He neither scatters nor amasses form, but abides having scattered it. He neither scatters nor amasses feeling ... perception ... volitional formations ... consciousness, but abides having scattered it.
"And what is it that he neither extinguishes nor kindles, but abides having extinguished? He neither extinguishes nor kindles form, but abides having extinguished it. He neither extinguishes nor kindles feeling ... perception ... volitional formations ... consciousness, but abides having exiting extinguished it.
"When, bhikkhus, a bhikkhu is thus liberated in mind, the devas together with Indra, Brahma, and Pajapati pay homage to him from afar:
"Homage to you, O thoroughbred man!
Homage to you, O highest among men!
We ourselves do not directly know
Dependent upon what you meditate.'"
S. 22-79. 희생물 [Khajjani]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가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라도 많은 종류의 전생의 삶을 되새겨 기억한다하면, 그들은 모든 다섯가지의 집착된 존재의 다발이나 그들 가운데 어떤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에 이와 같이 물질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기억한다면 그는 바로 물질을 기억하는 것이다. 과거세에 이와 같은 감수를 지니고 '있었다'라고 기억한다면 그는 바로 감수를 기억하는 것이다. 과거세에 이와 같은 지각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기억한다면 그는 바로 지각을 기억하는 것이다. 과거세에 이와 같은 형성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기억한다면 그는 바로 형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과거세에 이와 같은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기억한다면 그는 바로 의식을 기억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왜 물질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장애가 되기 때문에 물질이라고 한다. 무엇이 장애가 되는가? 추위로서 장애가 되고 열기로서 장애가 되고 굶주림으로 장애가 되고 등에, 모기, 바람, 더위, 뱀과 만나 장애가 된다. 수행자들이여, 장애가 되므로 물질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왜 감수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느껴지기 때문에 감수이라고 한다. 어떻게 느껴지는가? 즐겁게도 느껴지고 괴롭게도 느껴지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게 느껴진다. 수행승들이여, 느껴지기 때문에 감수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왜 지각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인식하기 때문에 지각이라고 한다. 어떻게 인식하는가? 푸른색을 인식하고 노란색을 인식하고 붉은 색을 인식하고 흰색을 인식한다. 수행승들이여, 인식하기 때문에 지각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왜 형성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조건적으로 조작하기 때문에 형성이라고 한다. 어떻게 조건적으로 조작하는가? 물질을 물질적으로 조작하고 감수를 감수적으로 조작하고 지각을 지각적으로 조작하고 형성을 형성적으로 조작하고 의식을 의식적으로 조작한다. 수행승들이여, 조건적으로 조작하기 때문에 형성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왜 의식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식별하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한다. 무엇을 식별하는가? 신맛도 식별하고 떫은맛도 식별하고 떫지 않은 맛도 식별하고 짠맛도 식별하고 싱거운 맛도 식별한다. 수행승들이여, 식별하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들은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나는 물질에 의해 희생된다. 현세에서 내가 물질에 의해 희생되듯이 과거세에도 나는 물질에 의해 희생되었다. 현세에서 내가 물질에 의해 희생되듯이 미래세에도 나는 물질에 의해 희생될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하며 과거세의 물질을 돌아보지 않고 미래세의 물질을 향락하지 않는다. 현재의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킨다.
이 세상에서 나는 감수에 의해 희생된다.
이 세상에서 나는 감수에 의해 희생된다. 현세에서 내가 감수에 의해 희생되듯이 과거세에도 나는 감수에 의해 희생되었다. 현세에서 내가 감수에 의해 희생되듯이 미래세에도 나는 감수에 의해 희생될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하며 과거세의 감수를 돌아보지 않고 미래세의 감수를 향락하지 않는다. 현재의 감수를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킨다.
이 세상에서 나는 지각에 의해 희생된다. 현세에서 내가 지각에 의해 희생되듯이 과거세에도 나는 지각에 의해 희생되었다. 현세에서 내가 지각에 의해 희생되듯이 미래세에도 나는 지각에 의해 희생될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하며 과거세의 지각을 돌아보지 않고 미래세의 지각을 향락하지 않는다. 현재의 지각을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킨다.
이 세상에서 나는 형성에 의해 희생된다. 현세에서 내가 형성에 의해 희생되듯이 과거세에도 나는 형성에 의해 희생되었다. 현세에서 내가 형성에 의해 희생되듯이 미래세에도 나는 형성에 의해 희생될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하며 과거세의 형성을 돌아보지 않고 미래세의 형성을 향락하지 않는다. 현재의 형성을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킨다.
이 세상에서 나는 의식에 의해 희생된다. 현세에서 내가 의식에 의해 희생되듯이 과거세에도 나는 의식에 의해 희생되었다. 현세에서 내가 의식에 의해 희생되듯이 미래세에도 나는 의식에 의해 희생될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생각하며 과거세의 의식을 돌아보지 않고 미래세의 의식을 향락하지 않는다. 현재의 의식을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감수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형성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물질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감수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감수는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지각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지각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형성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형성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의식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의식은는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것을 두고 줄여나가므로 쌓아나가지 않고 포기하므로 집착하지 않고 해체하므로 묶지 않고 불을 끄므로 연기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무엇을 줄여나가므로 쌓아나가지 않는가? 그는 물질을 줄여나가므로 쌓아나가지 않으며, 감수를 줄여나가므로 쌓아나가지 않으며, 지각을 줄여나가므로 쌓아나가지 않으며, 형성을 줄여나가므로 쌓아나가지 않으며, 의식을 줄여나가므로 쌓아나가지 않는다.
무엇을 포기하므로 집착하지 않는가? 그는 물질을 포기하므로 집착하지 않으며, 감수를 포기하므로 집착하지 않으며, 지각을 포기하므로 집착하지 않으며, 형성을 포기하므로 집착하지 않으며, 의식을 포기하므로 집착하지 않는다.
무엇을 해체하므로 묶지 않는가? 그는 물질을 해체하므로 묶지 않으며, 감수를 해체하므로 묶지 않으며, 지각을 해체하므로 묶지 않으며, 형성을 해체하므로 묶지 않으며, 의식을 해체하므로 묶지 않는다.
무엇을 불을 끄므로 연기를 내지 않는가? 그는 물질의 불을 끄므로 연기를 내지 않으며, 감수의 불을 끄므로 연기를 내지 않으며, 지각의 불을 끄므로 연기를 내지 않으며, 형성의 불을 끄므로 연기를 내지 않으며, 의식의 불을 끄므로 연기를 내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고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감수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서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것을 두고 쌓아 나가지 않고 줄여나가지 않고 이미 줄여나갔으므로 포기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이미 포기했으므로 해체하지도 않고 묶지도 않고, 이미 해체했으므로 불을 끄지도 않고 연기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불을 끈 상태에서 무엇을 쌓지 않고 줄이지 않는가? 이미 줄인 상태에서 물질을 쌓지 않고 줄이지 않으며, 이미 줄인 상태에서 감수를 쌓지 않고 줄이지 않으며, 이미 줄인 상태에서 지각을 쌓지 않고 줄이지 않으며, 이미 줄인 상태에서 형성을 쌓지 않고 줄이지 않으며, 이미 줄인 상태에서 의식을 쌓지 않고 줄이지 않는다.
이미 줄인 상태에서 무엇을 포기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가?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물질을 포기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감수를 포기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지각을 포기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형성을 포기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의식을 포기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무엇을 해체하지도 않고 묶지도 않는가? 이미 해체한 상태에서 물질을 해체하지도 않고 묶지도 않으며, 이미 해체한 상태에서 감수를 해체하지도 않고 묶지도 않으며, 이미 해체한 상태에서 지각을 해체하지도 않고 묶지도 않으며, 이미 해체한 상태에서 형성을 해체하지도 않고 묶지도 않으며, 이미 해체한 상태에서 의식을 해체하지도 않고 묶지도 않는다.
이미 해체한 상태에서 어떻게 불을 끄지도 않고 연기도 내지 않는가? 이미 불꺼진 상태에서 물질의 불을 끄지도 않고 연기 내지도 않으며, 이미 불거진 상태에서 감수의 불을 끄지도 않고 연기 내지도 않으며, 이미 불꺼진 상태에서 감수의 불을 끄지도 않고 연기 내지도 않으며, 이미 불꺼진 상태에서 형성의 불을 끄지도 않고 연기 내지도 않으며, 이미 불꺼진 상태에서 의식의 불을 끄지도 않고 연기 내지도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이미 불을 끈 상태가 되어 이처럼 마음의 해탈을 이룬 수행승에게 제석천, 범천, 생주천들이 멀리서 귀의한다."
[수행승들] "인간 가운데 준마시여, 귀의하오니
인간의 최승자시여, 님에게 귀의하오니
님께서 거기에 관해 사유한 것을
저희가 심히 알기 어렵사옵니다."
제61경 분별경(分別經)
(六一) 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有五受陰.何等爲五.謂色受陰.受·想·行·識受陰.云何色受陰.所有色.彼一切四大.及四大所造色.是名爲色受陰.復次.彼色是無常·苦·變易之法.若彼色受陰.永斷無餘.究竟捨離·滅盡·離欲·寂沒.餘色受陰更不相續·不起·不出.是名爲妙.是名寂靜.是名捨離.一切有餘愛盡·無欲·滅盡·涅槃.云何受受陰.謂六受身.何等爲六.謂眼觸生受.耳·鼻·舌·身·意觸生受.是名受受陰.復次.彼受受陰無常·苦·變易之法.乃至滅盡·涅槃.云何想受陰.謂六想身.何等爲六.謂眼觸生想.乃至意觸生想.是名想受陰.復次.彼想受陰無常·苦·變易之法.乃至滅盡·涅槃.云何行受陰.謂六思身.何等爲六.謂眼觸生思.乃至意觸生思.是名行受陰.復次.彼行受陰無常·苦·變易之法.乃至滅盡·涅槃.云何識受陰.謂六識身.何等爲六.謂眼識身.乃至意識身.是名識受陰.復次.彼識受陰是無常·苦·變易之法.乃至滅盡·涅槃.比丘.若於此法以智慧思惟·觀察·分別·忍.是名隨信行.超昇離生.越凡夫地.未得須陀洹果.中間不死.必得須陀洹果.比丘.若於此法增上智慧思惟·觀察·忍.是名隨法行.超昇離生.越凡夫地.未得須陀洹果.中間不死.必得須陀洹果.比丘.於此法如實正慧等見.三結盡斷知.謂身見·戒取·疑.比丘.是名須陀洹果.不墮惡道.必定正趣三菩提.七有天人往生.然後究竟苦邊.比丘.若於此法如實正慧等見.不起心漏.名阿羅漢.諸漏已盡.所作已作.捨離重擔.逮得己利.盡諸有結.正智心得解脫.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제61. 분별경(1)
신수장경 : 2-15C
한글장경 : 잡-1-61
남전장경 :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다섯 가지 쌓임이 있다. 어떤 것이 다섯인가. 이른바 물질의 쌓임과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의 쌓임이니라. 어떤 것이 물질의 쌓임인가. 모든 물질로써 그 일체는 네 가지 요소와 그 네 가지 요소로 된 물질이니, 이것을 물질의 쌓임이라 하느니라. 다시 그 물질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니, 만일 그 물질의 쌓임을 영원히 끊어 남음이 없고 끝까지 버리어 떠나고 멸해 다하며, 욕심을 떠나 완전히 고요해지면 다른 물질의 쌓임은 다시 계속하지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않고 나지도 않나니, 이것을 <묘함>이라 하고, <고요함>이라 하며, <버려 여읨>이라 한다. 그래서 일체의 남음이 있는 애정이 다하고 욕심이 없어지고 번뇌가 다 멸하여 열반을 얻느니라.
어떤 것이 느낌의 쌓임인가. 이른바 여섯 가지 받는 몸이니 어떤 것이 여섯인가. 곧 눈이 부딪쳐 느낌이 생기고 귀·코·혀·몸·뜻이 부딪쳐 느낌이 생기나니 이것을 느낌의 쌓임이라 한다. 다시 그 느낌의 쌓임은 다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니···내지 번뇌가 멸해 열반을 얻는다. 어떤 것이 생각의 쌓임인가. 이른바 여섯 가지 생각하는 몸이니 어떤 것이 여섯인가. 곧 눈이 부딪쳐 생각이 생기고 귀·코·혀·몸·뜻이 부딪쳐 생각이 생기나니 이것을 생각의 쌓임이라 한다. 다시 그 생각의 쌓임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니···번뇌가 다 멸해 열반을 얻는다.
어떤 것이 지어감의 쌓임인가. 이른바 여섯 가지 생각하는 몸이니 어떤 것이 여섯인가. 곧 눈이 부딪쳐 생각이 생기고···내지 뜻이 부딪쳐 생각이 생기니, 이것을 지어감의 쌓임이라 한다. 다시 그 지어감의 쌓임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니···내지 번뇌를 다 멸해 열반을 얻는다. 어떤 것이 의식의 쌓임인가. 이른바 여섯 가지 아는 몸이니, 어떤 것이 여섯인가. 곧 눈으로 아는 몸이요···내지 뜻으로 아는 몸이니 이것을 의식의 쌓임이라 한다. 다시 그 의식의 쌓임은 덧없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니···번뇌를 다 멸하고 열반을 얻느니라.
비구들이여, 만일 이 법을 지혜로써 깊이 생각하고 관찰하며 분별하여 인정하면 그는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뛰어올라 남을 떠나고 범부 자리를 뛰어넘어 아직 수다원과는 얻지 못했으나 중간에서 죽지 않고 반드시 수다원과를 얻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법을 기운이 왕성한 지혜로써 깊이 생각하고 관찰하여 인정하면 그는 법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다. 그는 뛰어올라 생을 떠나고 범부자리를 뛰어넘어 아직 수다원과는 얻지 못했으나 중간에서 죽지 않고 반드시 수다원과를 얻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법을 참다운 바른 슬기로써 평등하게 보면 내 몸이 있다는 소견과 삿된 계와 법에 대한 의심과 이 세 가지 <맺음>이 다 끊어진 줄을 알 것이니 비구들이여, 이것을 수다원과라 한다. 그는 나쁜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결정코 바른 깨달음으로 바로 나아가 일곱 번 천상과 인간에 태어난 뒤에는 완전히 괴로움을 벗어날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법을 참다운 바른 슬기로써 평등하게 보아 마음에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면 그는 아라한이다. 그는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고 할 일은 이미 마치고 무거운 짐을 버리고 자기의 이익을 완전히 얻고 모든 맺음을 다 끊고 바른 지혜로써 마음의 해탈을 얻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개념정리] - 오온(五蘊)
Ⅰ. 서론
중생들은 자신이 육체(肉體)와 감정(感情)과 이성(理性)과 의지(意志)와 의식(意識)을 소유하고있다고 생각한다. 육체로 행위(行爲)하고, 감정으로 느끼고, 이성으로 사유(思惟)하고, 의지로 행위를 선택하고, 의식으로 사물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중생들이 자신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불타는 오온(五蘊)이라고 표현한다.
Ⅱ. 본론
온(蘊)의 원어는 'skandha', 팔리어로는 'khandha' 인데 덩어리, 모임, 구성요소의 의미가 있다. 한자로 온(蘊)이라고 번역한 것은 덩어리의 의미를 취한 것이다. 이것을 음(陰)으로 한역하여 오온(五蘊)을 오음(五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타가 세간(世間)이며 세간법이라고 했던 오온은 중생들이 무명(無明)의 상태에서 십이처를 욕탐으로 취착(取着)하여 계도(計度)함으로써 허구적으로 조작된 존재이다.
잡아함 61경 에서는 오온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색(色) : 所有色 ; 사대(四大)와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모든 色(四大所造色)
수(受) : 六受身 ; 六觸에서 생긴 受
상(想) : 六想身 : 六觸에서 생긴 想
행(行) : 六思身 ; 六觸에서 생긴 思
식(識) ; 六識身 ; 眼識身 乃至 意識身.
이들을 五受陰(五取蘊)이라 名한다.
여기에서 오온은 육계(六界)와 사대(四大)와, 촉(觸)에서 생긴 수(受), 상(想), 사(思) 그리고 십팔계의 육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이 오온(五蘊)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공(空)하고 무아(無我)임을 잡아함 8경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구들에게 이르시되 과거, 미래의 색(色)은 무상(無常)하다. 그런데 하물며 현재의 색(色)이 무상하지 않겠는냐. 성제자가 이와 같이 견(見)하면 과거의 색을 고념(顧念)치 않고, 미래의 색을 바라지 않으며, 현재의 색을 염리(厭離)하여 바르게 멸진(滅盡)하고저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 미래의 수(受), 상(想), 행(行), 식(識)도 무상하거늘 하물며 현재의 수, 상, 행, 식이 무상하지 않겠느냐... 고(苦)이고 공(空)하고 비아(非我)임도 무상함과 마찬가지이니라.
오온(五蘊)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만지면서(色), 苦樂을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행동하고(行), 인식하는(識) 가운데 인식의 폭이 넓어지고 새롭게 增長하면서 새롭게 보고 듣고 .... 만지면서, 새롭게 느끼고,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행동하고, 새롭게 인식하는 중생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다.
Ⅲ. 결론
부처님은 우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십팔계를 인연으로 해서 생긴 촉(觸)에서 발생한 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고문헌
불교의 이해와 실천 1. 308.p ~ 399.p
아함의 중도체계 연구, 이중표 142.p ~ 168.p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고익진 84.p ~ 92.p
제7장 삼법인(三法印)
제8 過去無常經
(八)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過去·未來色無常. 現在色.聖弟子.如是觀者.不顧過去色.不欲未來色.於現在色厭·離欲·正向滅盡.如是.過去·未來受·想·行·識無常. 現在識.聖弟子.如是觀者.不顧過去識.不欣未來識.於現在識厭·離欲·正向滅盡.如無常.苦·空·非我亦復如是.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제8. 과거무상경(過去無常經)
신수장경 : 2-1C
한글장경 : 잡-1-5
남전장경 : S. 22-9~11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과거와 미래의 물질도 항상됨이 없거늘 하물며 현재의 물질이겠느냐. 거룩한 제자로서 이렇게 관찰하는 사람은 과거의 물질은 돌아보지 않고, 미래의 물질은 바라지 않으며, 현재의 물질은 싫어하고 여의어 바로 멸해 다함으로 향하려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과거와 미래의 느낌·생각·지어감·의식도 항상됨이 없거늘 하물며 현재의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이겠느냐. 거룩한 제자로서 이렇게 관찰하는 사람은 과거의 그것들은 돌아보지 않고, 미래의 그것들은 바라지 않으며, 현재의 그것들은 싫어하고 여의어 바로 멸해 다함으로 향하려고 하느니라. 이렇게 3세(世)의 모든 법은 항상됨이 없고 괴로움이요, 공이요, <나>가 아니라고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
때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S. 22-9. (9) Past, future and present (1)
At Savatthi. ... The Exalted One thus addressed the brethren: -
'Body, brethren, is impermanent, both in the past and in the future, not to speak of the present. So seeing, brethren, the well-taught Ariyan disciple cares not for a body that is past, is not in love with a body to be, and for the present body seeks to be repelled by it, seeks dispassion for it, seeks the ceasing of it. So also with feeling, and perception.
The activities are impermanent, both in the past and in the future, not to speak of the present. So seeing, brethren, the well-taught Ariyan disciple cares not for activities that are past, is not in love with activities to be, and for present activities, seeks to be repelled by them, seeks dispassion for them, seeks the ceasing of them.
Consciousness is impermanent, both in the past and in the future, not to speak of the present. So seeing, brethren, the well-taught Ariyan disciple cares not for consciousness that is past, is not in love with consciousness to bo, and for present consciousness seeks to be repelled by it, seeks dispassion for it, seeks the ceasing of it.'
S. 22-10 (10) Past, future and present (2)
At Savatthi. ... Then the Exalted One thus addressed the brethren : -
'Body, brethren, is an ill, both in the past and in the future, not to speak of the present. So seeing, brethren, the well-taught Ariyan disciple cares not for a body that is past, is not in love with a body to be, and for the present body seeks to be repelled by it, seeks dispassion for it, seeks the ceasing of it. So also with regard to feeling, perception, and activities. ... Again, consciousness is an ill, both in the past and in the future, not to speak of the present. So seeing, brethren, the well-taught Ariyan disciple cares not for consciousness that is past, is not in love with consciousness to be, and for present consciousness seeks to be repelled by it, seeks dispassion for it, seeks the ceasing of it.
S. 22-11 (11) Past, future and present (3)
At Savatthi. ... Then (the Exalted One) said : 'Body, brethren, is without the self both in the past and in the future, not to speak of the present. So seeing, brethren, the well-taught Ariyan disciple cares not for a body that is past, is not in love with a body to be, and for the present body seeks to be repelled by it, seeks dispassion for it, seeks the ceasing of it.
So also with regard to feeling, perception, and activities. ...
Consciousness is without the self, both in the past and in the future, not to speak of the present. ... So seeing, the well-taught Ariyan disciple ...seeks the ceasing of consciousness.
S. 22-11. 과거. 미래. 현재[Atitanagatapacuppann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물질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물질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물질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물질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감수가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감수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감수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감수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감수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지각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지각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지각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지각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지각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형성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형성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형성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형성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형성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의식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의식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의식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의식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의식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S. 22-12. 과거. 미래. 현재[Atitanagatapacuppanna] (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물질이 괴로운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물질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물질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물질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감수가 괴로운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감수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감수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감수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감수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지각이 괴로운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지각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지각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지각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지각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형성이 괴로운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형성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형성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형성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형성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의식이 괴로운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의식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의식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의식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의식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S. 22-13. 과거. 미래. 현재[Atitanagatapacuppanna] (3)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물질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물질이 실체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물질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물질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물질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감수가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감수는 실체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감수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감수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감수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감수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지각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지각은 실체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지각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지각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지각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지각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형성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형성은 실체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형성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형성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형성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형성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의식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의식은 실체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의식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며 과거의 의식에 기대하지 않고 미래의 의식에 환희하지 않으며 현재의 의식에서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도록 수행한다."
제188 離喜貪經
(一八八)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當正觀察眼無常.如是觀者.是名正見.正觀故生厭.生厭故離喜·離貪.離喜·貪故.我說心正解脫.如是耳·鼻·舌·身·意.離喜·離貪.離喜·貪故.比丘.我說心正解脫.心正解脫者.能自記說.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如無常.如是苦·空·非我.亦如是說
제188. 이희탐경(離喜貪經)
신수장경 : 2-49b
한글장경 : 잡-1-199
남전장경 : S. 35-155~156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마땅히 눈은 덧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라. 이와 같이 관찰하면 이것을 바른 관찰이라 부르느니라. 바르게 관찰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기쁨과 탐욕을 떠나며, 기쁨과 탐욕을 떠나기 때문에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였다고 나는 말하느니라. 이와 같이 귀·코·혀·몸·뜻에 대해서 기쁨과 탐욕을 떠나면 기쁨과 탐욕을 떠나기 때문에 비구들이여,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였다고 나는 말하느니라. 마음이 바르게 해탈한 사람은 능히 스스로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생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스스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덧없음과 같이, 괴로움·빔·<나>가 아님에 대해서도 또한 이와 같이 말씀하시었다.'
제189 離欲貪經
(一八九)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於眼當正思惟·觀察無常.所以者何.於眼正思惟·觀察無常故.於眼欲貪斷.欲貪斷故.我說心正解脫.耳·鼻·舌·身·意.正思惟·觀察故.欲貪斷.欲貪斷者.我說心正解脫.如是.比丘.心正解脫者.能自記說.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189. 이욕탐경(離欲貪經)
신수장경 : 2-49b
한글장경 : 잡-1-199
남전장경 : S. 35-157~158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었다.
"눈에 대해서 바르게 생각하고 덧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라. 무슨 까닭인가. 눈에 대해서 바르게 생각하고 덧없는 것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눈에 대해서 욕탐이 끊어지고, 욕탐이 끊어지기 때문에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였다고 나는 말하느니라. 귀·코·혀·몸·뜻에 대해서 바르게 생각하고 덧없는 것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욕탐이 끊어지고, 욕탐이 끊어진 사람은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였다고 나는 말하느니라.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마음이 바르게 해탈한 사람은 능히 스스로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새의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스스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S. 35-155. (1) The destruction of the lure
Brethren, when a brother sees that the eye is impermanent, he, rightly perceiving 'this is the right view,' is repelled thereby. By the destruction of the lure of lust comes the destruction of lust. By the destruction of lust comes the destruction of the lure. By this destruction of the lure the heart is set free, and it is called 'well-freed.' And so for the other sense-organs.
S. 35-156. (2) The destruction of the lure
(The same for objects, sounds and the rest.)
S. 35-155. 환락의 소멸 [Nandikkhaya]
한때 세존께서는 싸끼야의 데바다하라는 싸끼야족의 마을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시각을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로 관찰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청각을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로 관찰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후각을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로 관찰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미각을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로 관찰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촉각을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로 관찰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정신을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로 관찰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S. 35-156. 환락의 소멸 [Nandikkhaya] SN.Ⅳ 142 : 잡아함경 8권 1(대정 2. 49b, 집188)의 참조
한때 세존께서는 싸끼야의 데바다하라는 싸끼야족의 마을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형상을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로 관찰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소리를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로 관찰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냄새를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로 관찰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맛을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로 관찰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감촉을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로 관찰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사물을 무상하다고 본다면 그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올바로 관찰해서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S. 35-157. (3) The destruction of the lure
Do ye apply your minds thoroughly, brethren, to the eye, and regard its true nature as impermanent. He who so applies his mind thoroughly to the eye, and so regards it, feels repelled by the eye. By the destruction of the lure of the eye comes the destruction of the lure ... and so for the other sense-organs.
S. 35-158. (4) The destruction of the lure
(The same for objects, sounds and the rest.)
S. 35-157. 환락의 소멸 [Nandikkhaya] SN.Ⅳ 142 : 잡아함경 8권 1(대정 2. 49b, 집189)의 참조
한때 세존께서는 싸끼야의 데바다하라는 싸끼야족의 마을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시각을 철저하게 숙고하여 시각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수행승들이여, 시각을 여실하게 관찰하면 시각을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청각을 철저하게 숙고하여 청각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수행승들이여, 청각을 여실하게 관찰하면 청각을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후각을 철저하게 숙고하여 후각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수행승들이여, 후각을 여실하게 관찰하면 후각을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미각을 철저하게 숙고하여 미각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수행승들이여, 미각을 여실하게 관찰하면 미각을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촉각을 철저하게 숙고하여 촉각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수행승들이여, 촉각을 여실하게 관찰하면 촉각을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정신을 철저하게 숙고하여 정신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수행승들이여, 정신을 여실하게 관찰하면 정신을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S. 35-158. 환락의 소멸 [Nandikkhaya] SN.Ⅳ 142 : 잡아함경 8권 1(대정 2. 49b, 집189)의 참조
한때 세존께서는 싸끼야의 데바다하라는 싸끼야족의 마을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형상을 철저하게 숙고하여 형상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수행승들이여, 형상을 여실하게 관찰하면 형상을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청각을 철저하게 숙고하여 청각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수행승들이여, 청각을 여실하게 관찰하면 청각을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냄새를 철저하게 숙고하여 냄새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수행승들이여, 냄새를 여실하게 관찰하면 냄새를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맛을 철저하게 숙고하여 맛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수행승들이여, 맛을 여실하게 관찰하면 맛을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감촉을 철저하게 숙고하여 감촉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수행승들이여, 감촉을 여실하게 관찰하면 감촉을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사물을 철저하게 숙고하여 사물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수행승들이여, 사물을 여실하게 관찰하면 사물을 싫어하여 떠나고 환락을 부순 뒤에 탐욕을 부수고 탐욕을 부순 뒤에 환락을 부순다. 환락과 탐욕을 부수면 마음이 잘 해탈되어 있다고 말한다."
[개념정리] - 삼법인(三法印)
Ⅰ. 서론
연기법은 붓다 성도의 내용이고 삼법인설(三法印說)은 이 연기법에 근거한 석존사상의 대외적 3대 강령이라 할 수 있다. 후세 발달불교에서는, "佛說三法印 謂一切有爲法無常印 一切法無我印 涅般寂靜印" (대지도론 32권)이라 하여 이 삼법인(三法印)이 없는 것은 불법(佛法)이 아니고 불설(佛說)이 아니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Ⅱ. 본론
원시경전에서는 이 삼법인(三法印)이 결정적인 법인(法印)으로 나오는 것이 거의 없고 나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법인과 섞여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삼상(三相)으로 나오기도 하고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공(空)" 사상으로 나오기도 하며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사법본(四法本)등으로 나오고 있다.
잡아함경 10권 262경에 의하면 붓다께서 입멸하신지 얼마 안되어 장로 난타가 곳곳에 유행하면서 비구들에게 묻기를 "그대들은 마땅히 나를 위하여 교수하고 나를 위해 법을 설명해 다오" 하니 여러 비구가 "色無常, 受想行識無常 一切行無常 一切法無我 涅槃寂滅"이라 말하니 그 말을 듣고 난타는 불법을 알고 보았다고 한다.
이렇게 삼법인에 대한 설명이 불제자간에 오고 가면서도 4 아함이나 5부니카야에는 아무데도 이 법인(法印)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유부 비나야(毘奈耶) 권9에 의하면 "세존이 곧 삼자(三字)의 법을 설했으니 모든 행은 모두 무상하다. 모든 법은 다 내가 없다. 고요하여 곧 열반한다. 이것이 삼법인이다."하였다. 이것이 경전상의 최초의 삼법인이다.
법인(法印: dharma mudra)이란 '법의 표지'(標識)라는 말이다. 3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형식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무상과 무아의 개념 속에 논리적으로 고(苦)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형식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행(諸行: sarva samskara)에서, 제(諸, sarva)는 '일체' 또는 '모든'의 뜻이다. 그리고 행(行) 즉 samskara는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sam과 '하다,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 KR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서, '만들어 진 것'[爲作]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이란 '일체의 만들어진 것', 다시 말하면,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현대적인 표현으로는 '모든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무상은 anitya를 번역한 말로서, nitya 즉, '항상'(恒常)의 반대 의미이다. 무상이란 글자 그대로 "항상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함이 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2.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제법(諸法: sarva dharma)이란 제행(諸行)과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때로는 '제법'과 '제행'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 2개의 말은 다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제행'에서 '행'은 'samskara'이고 '제법' 에서 '법'은 'dharma'이다. 제법은 제행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아(無我:anatman)라는 말은 "아(我)가 없다." 또는 "아(我)가 아니다."[非我]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我,atman)란 생멸변화를 벗어난 영원하고 불멸적인 존재인 실체(實體) 또는 본체(本體)를 말한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는 고정불변 하는 실체적인 아(我)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역시 그것은 "실체적인 아[實體的我]가 아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다.
3.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열반'과 '적정(寂靜; santi)'은 동의어로서, 열반의 의미가 바로 '적정'이다. 열반이란 'nirvana'의 음역으로서 글자 그대로는 소멸(消滅)을 의미한다. 그것은 '불어서 끄다'[吹消]라는 뜻을 가진 어근 'va'에다 부정접두사 'nir'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말로서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한다. 즉 "불타고 있는 것과 같은 괴로움[苦]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초기 경전에서는 열반을 "탐욕의 사라짐[貪慾滅盡], 분노의 사라짐[瞋 滅盡], 어리석음의 사라짐[愚痴滅盡], 이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생에서 괴로움을 일으키는 요소들인 탐욕심, 분노심, 어리석음[3毒]이 모두 소멸되었을 때 인생은 더 이상 괴로운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열반의 상태는 '고요하고, 괴로움이 없이 편안[無苦安穩] 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santi' , 즉 '적정(寂靜)'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열반의 이와 같은 상태를 한 경에서는 비유해서 "마치 마른 나뭇단을 많이 넣고 매우 뜨겁게 달군 큰 가마에서 불타고 있던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거기에서 벗어나 시원한 장소로 도망쳐 나왔을 때, 그가 느끼는 최상의 안락과 같은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열반이란 말을 멸(滅), 적(寂), 불사(不死), 최상의 안락(安樂)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하면 "최고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고(苦), 번뇌가 소멸된 상태는 바로 행복이기 때문이다. 열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이자 최고의 이상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이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적정인은 불교의 이상관(理想觀)이라고 할 수 있다..
Ⅲ. 결론
3법인은 각 법인(法印)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연결된 하나의 실천이론으로 볼 수도 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면 제법(諸法)이 '무아(無我)' 하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고 제법(諸法)이 무아(無我)하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면 우리는 욕망과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모든 욕망과 번뇌를 떠날 때 우리는 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불교교리발달사, 김동화, 25.p ~ 29.p
초기.부파불교의 역사, 민족사 간, 82.p ~ 88.p
제8장 연기(緣起)의 진리(眞理)
제296 因緣經
(二九六)如是我聞.一時.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爾時.世尊告諸比丘.我今當說因緣法及緣生法.云何爲因緣法.謂此有故彼有.謂緣無明行.緣行識.乃至如是如是純大苦聚集.云何緣生法.謂無明·行.若佛出世.若未出世.此法常住.法住法界.彼如來自所覺知.成等正覺.爲人演說.開示顯發.謂緣無明有行.乃至緣生有老死.若佛出世.若未出世.此法常住.法住法界.彼如來自覺知.成等正覺.爲人演說.開示顯發.謂緣生故.有老·病·死·憂·悲·惱苦.此等諸法.法住·法空·法如·法爾.法不離如.法不異如.審諦眞實·不顚倒.如是隨順緣起.是名緣生法.謂無明·行·識·名色·六入處·觸·受·愛·取·有·生·老·病·死·憂·悲·惱苦.是名緣生法.多聞聖弟子於此因緣法·緣生法正知善見.不求前際.言.我過去
世若有·若無.我過去世何等類.我過去世何如.不求後際.我於當來世爲有·爲無.云何類.何如.內不猶豫.此是何等.云何有此爲前.誰終當云何之.此衆生從何來.於此沒當何之.若沙門·婆羅門起凡俗見所繫.謂說我見所繫·說衆生見所繫·說壽命見所繫·忌諱吉慶見所繫.爾時悉斷·悉知.斷其根本.如截多羅樹頭.於未來世.成不生法.是名多聞聖弟子於因緣法·緣生法如實正知.善見·善覺·善修·善入.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제296. 인연경
신수장경 : 2-84b
한글장경 : 잡-1-344
남전장경 : S. 12-20
이와 같이 내가 물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의 가란타 대나무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이제 인연법(因緣法)과 연생법(緣生法)을 말하리라. 어떤 것을 인연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다'는 것이니 이른바 무명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行)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으며···내지, 이와 같이 이렇게 하여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이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연생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무명(無明) 행(行)은 혹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거나 혹은 세상에 나오시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러, 법의 머무름이요 법의 세계로서 이것을 여래가 스스로 깨닫고 알아 다 옳은 깨달음을 이루어,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시어, 열어 보이시고 나타내어 드날리신 것이니라. 이른바 '무명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내지, 생(生)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혹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거나 혹은 세상에 나오시지 않으시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러, 법의 머무름이요 법의 세계로서 저 여래는 스스로 깨닫고 알아 다 옳은 깨달음을 이루어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시어, 열어 보이시고 나타내어 드날리시는 것이니, 이른바 '생(生)을 인연하기 때문에 노(老)·병(病)·사(死)과 근심·슬픔·번민·괴움(憂悲苦惱)이 있다'는 것이니라.
이러한 모든 법은 법주(法住, 法性의 다른 이름으로 불변으로 존재하는 이치)·법공(法空, 개인존재의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실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법여(法如, 진여)·법이(法爾, 원래 법으로서 그 자체)이니라. 법은 진여(眞如, 모든 사상의 본성)를 떠나지 않고 법은 진여(眞如, 모든 사상의 본성)와 다르지 않으며 분명하고 진실하여 뒤바뀌지 않아서 연기를 그대로 따르나니 이것을 연생법이라 한다.
이른바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처(六入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노병사(生老病死)우비고뇌(憂悲苦惱) 이것을 연생법이라 하느니라.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이 인연법과 연생법을 바르게 알고 잘 보아 과거를 구하여 '내 과거 세상은 있었던가 혹은 없었던가. 내 과거 세상은 어떤 종류였던가. 내 과거 세상은 어떠하였던가.'고 말하지 않고, 미래를 구하여 '내 미래 세상은 있을 것인가. 혹은 없을 것인가. 어떤 종류일까. 어떠할까.'고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며, '자신은 어떤 종류인가. 어떻게 이것이 있는가. 장래를 위해 누가 마침내 자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중생들은 어디서 왔는가. 여기서 사라지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고 마음으로 망설이지도 않느니라.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범속한 소견을 일으키고 거기에 매이어 이른바 <나>라는 소견에 매임을 말하고 중생이라는 소견에 매임을 말하며 수명이라는 소견에 매이어 꺼리고 싫어하며 길(吉)하고 경(慶)하다는 소견에 매임을 말하면, 그 때에 거룩한 제자는 그것을 다 끊고 다 알아 그 근본을 끊기를 다라나무 줄기를 끊는 것과 같이 미래 세상에 있어서 나지 않는 법을 이루나니 이것을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의 인연법과 연생법에 대하여 참다이 바르게 알아, 잘 보고 잘 깨닫고 잘 닦고 잘 들어가는 것>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S. 12-20. Paccayo
Staying near Savatthi the Exalted One said : -
I will teach you, brethren, both causal happening and things as having causally happened. Hear ye this, give your mind thoroughly, I will speak.
Even so, lord, those brethren made response to the Exalted One. He said:-
What, brethren, is causal happening ?
"Conditioned by rebirth is decay and death' : -whether, brethren, there be an arising fo Tathagatas, or whether there be no such arising, this nature of things just stands, this causal status, this causal orderliness, the relatedness of this to that.
Concerning that the Tathagata is fully enlightened, that he fully understands. Fully enlightened, fully understanding he declares it, teaches it, reveals it, sets it forth, manifests, explains, makes it plain, saying "behold ! Conditioned by rebirth is decay and death.'
'Conditioned by becoming is rebirth . . .
conditioned by grasping is becoming . . .
conditioned by craving is grasping . . .
conditioned by feeling is craving . . .
conditioned by contact is feeling . . .
conditioned by sense is contact . . .
conditioned by sense is contact . . .
conditioned by name and shape is sense . . .
conditioned by consciousness is name and shape . . .
conditioned by activities is consciousness . . .
conditioned by ignorance are activities' -
Whether, brethren, there be an arising of Tathagatas, or whether there be no such arising, in each this nature of things just stands, this causal status, this causal orderliness, the relatedness of this to that. Concerning that the Tathagata is fully enlightened, that he fully understands. Fully enlightened, fully understanding he declares it, teaches it, reveals it, sets it forth, manifests, explains, makes it plain, saying : 'Behold ! conditioned by this, that comes to be.'
Thus, brethren, that which here is such wise, not elsewise, not otherwise, the relatedness of this to that : -this, brethren, is called causal happening.
And what, brethren, are things as having causally happened ?
Decay-and-death is impermanent, conditioned, arisen causally, is by nature withering away, passing away, fading away, coming to an end.
So too is by birth, becoming, grasping, grasping, craving, feeling, contact, sense, name-and-shape, consciousness, activities, ignorance. These also are impermanent, conditioned, arisen causally, are by nature withering away, passing away, fading away, coming to an end. These, brethren, are called things as having causally happened.
Now inasmuch, brethren, as the Ariyan disciple has by right insight well seen even as they really are both this causal happening and things as having causally happened, never doth tit arise, verily, that such as he will run back to the past, thinking, 'Did I live in times gone by? Or did I not?
What was I in times gone by? How was I then? Or from being what did I become what?'
Or that he will run towards the times to come, thinking, 'Shall I be reborn in a future time, or shall I not? What shall I become in the future? How shall I become in the future ? Or, being what, shall I in the future become what?'
Or that he will now become perplexed within himself as to the present day, thinking : "Am I indeed? Or am I not indeed? What indeed am I? How indeed am I? This person that is I, whence came he, whither will he go?'
Why doth this never arise? In that the Ariyan disciple, brethren, has by right insight well seen even as they really are both this causal happening and things as having causally happened.
S. 12-20. 조건(Paccayo)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와 연생의 법을 설하겠다. 그것을 잘 듣고 숙고해라. 내가 설명하겠다."
'세존이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수행승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나는 것은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도리가 정해져 있으며 법으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법으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것을 잘 깨닫고 이해했으며 깨닫고 이해하고 나서 이야기하고 가르치고 알게 하고 앞에 두고 열어보이고 분별하고 명확히 한다. 그러므로 '그대들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는 것은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도리가 정해져 있으며 법으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법으로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것을 잘 깨닫고 이해하며 깨닫고 이해하고 나서 이야기하고 가르치고 알게 하고 앞에 두고 열어 보이고 분별하고 명확히 한다. 그러므로 '그대들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수행승들이여, 여기서 여실한 것, 허망하지 않은 것, 다른 것이 아닌 것,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연기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연생의 법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늙고 죽음은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은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수행승들이여, 존재는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수행승들이여, 취착은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수행승들이여, 갈애는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수행승들이여, 감수는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수행승들이여, 접촉은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수행승들이여, 여섯 감역은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수행승들이여, 명색은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수행승들이여, 형성은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수행승들이여, 무명은 덧없는 것이고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지어진 것이고 쇠망하는 현상이며 사라지는 현상이며 소멸하는 현상으로 연생이다.
수행승들이여, 거룩한 제자들은 이 연기와 연생의 법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잘 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전생에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없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어떻게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었는지' 숙세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나는 내세에 있을지, 나는 내세에 없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을지, 나는 내세에 어떻게 있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될 것인지' 내세로 달려가거나
'나는 현세에 있는지, 나는 현세에 없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는지, 나는 현세에 어떻게 있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는지' 현세에 의혹을 갖게 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거룩한 제자는 여실하게 이 연기와 연생의 법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잘 관찰하기 때문이다."
제288 蘆經
(二八八)如是我聞.一時.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爾時.尊者舍利弗·尊者摩訶拘 羅在耆 山.爾時.尊者舍利弗 時從禪覺.詣尊者摩訶拘 羅.共相問訊慶慰已.於一面坐.語尊者摩訶拘 羅.欲有所問.寧有閑暇見答與不.尊者摩訶拘 羅語尊者舍利弗言.仁者且問.知者當答.尊者舍利弗問尊者摩訶拘 羅.云何.尊者摩訶拘 羅.有老不.答言.有.尊者舍利弗復問.有死不.答言.有.復問.云何.老死自作耶.爲他作耶.爲自他作耶.爲非自非他無因作耶.答言.尊者舍利弗.老死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亦非非自他作無因作.然彼生緣故有老死.如是生·有·取·愛·受·觸·六入處·名色.爲自作·爲他作·爲自他作·爲非自他無因作.答言.尊者舍利弗.名色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非非自他作無因作.然彼名色緣
識生.復問.彼識爲自作·爲他作·爲自他作·爲非自非他無因作.答言.尊者舍利弗.彼識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非非自他作無因作.然彼識增名色生.尊者舍利弗復問.尊者摩訶拘 羅.先言名色非自作·非他作·非自他作·非非自他作無因作.然彼名色緣識生.而今復言名色緣識.此義云何.尊者摩訶拘 羅答言.今當說譬.如智者因譬得解.譬如三蘆立於空地.展轉相依.而得 立.若去其一.二亦不立.若去其二.一亦不立.展轉相依.而得 立.識緣名色亦復如是.展轉相依.而得生長尊者舍利弗言.善哉.善哉.尊者摩訶拘 羅.世尊聲聞中.智慧明達.善調無畏.見甘露法.以甘露法具足身作證者.謂尊者摩訶拘 羅.乃有如是甚深義辯.種種難問.皆悉能答.如無價寶珠.世所頂戴.我今頂戴尊者摩訶拘 羅亦復如是.我今於汝所.快得善利.諸餘梵行數詣其所.亦得善利.以彼尊者善說法故.我今以此尊者摩訶拘 羅所說法故.當以三十種讚歎稱揚隨喜尊者摩訶拘 羅說老死厭患·離欲·滅盡.是名法師.說生·有·取·愛·受·觸·六入處·名色·識.厭患·離欲·滅盡.是名法師.若比丘於老死厭患·離欲·滅盡向.是名法師.乃至識厭患·離欲·滅盡向.是名法師.若比丘於老死厭患·離欲·滅盡.不起諸漏.心善解脫.是名法師.乃至識厭患·離欲·滅盡.不起諸漏.心善解脫.是名法師.尊者摩訶拘 羅語尊者舍利弗言.善哉.善哉.於世尊聲聞中.智慧明達.善調無畏.見甘露法.以甘露法具足身作證者.謂尊者舍利弗.能作如是種種甚深正智之問.猶如世間無價寶珠.人皆頂戴.汝今如是.普爲一切諸梵行者之所頂戴·恭敬·奉事.我於今日快得善利.得與尊者共論妙義.時.二正士更相隨喜.各還所住
제288. 노경(蘆經)
신수장경 : 2-81a
한글장경 : 잡-1-329
남전장경 : S. 12-67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의 가란다 대나무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에 존자 사리불과 존자 마하 코티카는 기사굴산에 있었다. 그 때에 존자 사리불은 해질녘에 선정에서 깨어나 존자 마하 코티카가 있는 곳으로 가서 서로 인사하고 위로한 뒤에 한 쪽에 앉아, 존자 마하 코티카에게 말하였다.
"물을 일이 있는데 혹 틈이 있으면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존자 마하 코티카는 존자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우선 물으시오. 아는 대로 대답하리다."
존자 사리불은 존자 마하 코티카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존자 마하 코티카여, 늙음이 있습니까."
존자 코티카는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존자 사리불이여."
"죽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남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와 남이 지은 것입니까. 혹은 자기도 아니요 남도 아니며 인(因)이 없이 지어진 것입니까."
존자 코티카는 대답하였다.
"존자 사리불이여, 늙음과 죽음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요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자기와 남이 지은 것도 아니요 또한 자기와 남이 지은 것도 아니지마는 인이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생(生)을 인연하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다면, 생(生). 유(有). 취(取). 애(愛). 수(受). 촉(觸). 육입처(六入處). 명색(名色)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남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와 남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도 남도 아니요 인이 없이 지어진 것입니까."
"존자 사리불이여, 정신과 물질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요,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자기와 남이 지은 것도 아니요, 자기와 남이 지은 것도 아니지마는 인이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신과 물질을 인연하여 식(識)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식(識)은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남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와 남이 지은 것입니까. 자기도 아니요 남도 아니며, 인이 없이 지어진 것입니까."
"존자 사리불이여, 그 식(識)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요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자기와 남이 지은 것도 아니요, 자기와 남이 지은 것도 아니지마는 인이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식(識)은 정신과 물질을 인연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존자 사리불은 다시 물었다.
"존자 마하 코티카여, 아까는 말하기를 '정신과 물질은 자기가 지은 것도 아니요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자기와 남이 지은 것도 아니요, 자기와 남이 지은 것도 아니지마는 인이 없이 지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정신과 물질은 식(識)을 인연하여 생기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다시 정신과 물질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이치는 어떠합니까."
존자 마하 코티카는 대답하였다.
'이제 비유를 말하리다.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로 말미암아 해득(解得)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비유하면 세 개의 갈대가 빈 땅에 서려고 할 때에는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서게 되는 것과 같나니, 만일 그 하나를 버려도 둘은 서지 못하고 만일 둘을 버려도 하나는 또한 서지 못하여,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서게 되는 것입니다. 식(識)이 정신과 물질을 인연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나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존자 사리불은 말하였다.
"좋고 좋습니다! 존자 마하 코티카여, 세존의 성문 가운데서 지혜가 밝고 통달하고, 잘 다루어 두려움이 없으며 감로법을 보고 감로법을 두루 갖추어 몸으로 증득한 사람은 곧 존자 마하 코티카입니다. 이에 이와 같은 매우 깊은 이치의 변론이 있어서 갖가지 어려운 물음을 다 능히 대답하시니 값할 수 없는 보배 구슬과 같아서 세상이 떠받드는 바입니다. 나도 이제 떠받드나니 존자 마하 코티카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나도 이제 당신에게서 유쾌하게 좋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다른 모든 범행자들도 자주 당신에게 나아오면 그 또한 좋은 이익을 얻을 것이니 존자는 설법을 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이 존자 마하 코티카의 말씀하신 법을 마련하여 마땅히 33종으로써 찬탄하고 높이 일컫고 따라서 기뻐하겠습니다. 존자 마하 코티카는 늙음과 죽음을 싫어하고 근심하며 욕심을 떠나고 멸해 다할 것을 말씀하였으니 이것을 법사(法師)라고 합니다. 생(生). 유(有). 취(取). 애(愛). 수(受). 촉(觸). 육입처(六入處). 명색(名色). 식(識)을 싫어하고 근심하며 욕심을 떠나고 멸해 다할 것을 말씀하였으니 이것을 법사라고 합니다. 만일 비구로서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 싫어하고 근심하며 욕심을 떠나고 멸해 다하는 대로 향하면 이것을 법사라고 합니다···내지 식(識)에 대해서 싫어하고 근심하며 욕심을 떠나고 멸해 다하는 대로 향하면 이것을 법사라고 합니다. 만일 비구로서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 싫어하고 근심하며 욕심을 떠나고 멸해 다하여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잘 해탈하면 이것을 법사라고 합니다···내지 식(識)에 대해서 싫어하고 근심하며 욕심을 떠나고 멸해 다하여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잘 해탈하면 이것을 법사라고 합니다."
존자 마하 코티카는 존자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좋고 좋습니다! 세존의 성문 가운데서 지혜가 밝고 통달하고 잘 다루어 두려움이 없으며 감로법을 보고 감로법을 두루 갖추어 몸으로 증득한 사람은 곧 존자 사리불입니다. 능히 그와 같이 갖가지 매우 깊은 바른 지혜의 물음을 물었습니다. 마치 세간의 값할 수 없는 보배 구슬을 사람들이 다 떠받드는 것과 같이, 당신도 이제 그와 같아서, 두루 일체 범행자들의 떠받들고 공경하며 예로써 섬기는 바가 될 것입니다. 나는 오늘 유쾌하게 좋은 이익을 얻었고 존자와 더불어 묘한 이치를 함께 논의하였습니다."
때에 두 정사(正士)는 함께 기뻐하며 제각기 머무르는 곳으로 돌아갔다.
S. 12-67. The sheaf of reeds. [Nalakal piya]
The venerable Sariputta and the venerable Maha-Kotthita were once staying at Benares, in Isipatana, in Antelope Wood.
Now the venerable Maha-Kotthita arose at eventide from meditation and came into the presence of the venerable Sariputta. Exchanging friendly greetings with him and the compliments of courtesy, he sat down at one side. So seated he said to the venerable Sariputta : -
What now, friend Sariputta, old age-and-death, is it wrought in one and the same person, in a different person, in one who is both same and different, or in one who is neither the same nor d different person - is it [a state] that arises by chance ?
Not any one of these, friend Kotthita, is [the case with] old age-and-death; but old age-and-death is conditioned by birth.
What now, friend Sariputta, is birth wrought in one and the same person, in a different person, in one who is both same and different, or in one who is neither - is it a state that arises by chance ?
Not any one of these, friend Kotthita, is birth, but birth is conditioned by becoming.
And in reply to similar questions, Sariputta told Maha-Kotthita that becoming was conditioned by grasping, grasping by craving, craving by feeling, feeling by contact, contact by sense, sense by name-and-shape.
What now, friend Sariputta, is name-and-shape wrought in one and the same person, in a different person, in one who is both same and different, or in one who is neither - is it a state that arises by chance ?
Not any one of these, friend Kotthita, is name-and-shape, but it is conditioned by consciousness.
What now, friend Sariputta, is consciousness wrought in one sand the same person, in a different person, in a different person, in one who is both same and different, or in one who is neither - is it [a state] that has arisen by chance ?
Not any one of these, friend Kotthita, is consciousness, but it is conditioned by name-and-shape.
Lo ! now we understand the venerable Sariputta's words thus : - neither name-and-shape, nor consciousness is any one of these four : wrought in one and the same person, wrought in a different person, wrought by one who is both, wrought by one who is neither but arisen by chance; moreover name-and-shape is conditioned by consciousness, consciousness is conditioned by name-and-shape. How friend Sariputta, is the meaning of what you have said to be regarded ?
Well, friend, I will make you a simile, for through a simile some intelligent men admit the meaning of what has been said.
It is just as if, friend, there steed two sheaves of reeds leaning one against the other.
Even so, friend, name-and-shape comes to pass conditioned by consciousness, consciousness conditioned by name-and-shape, sense conditioned by name-and-shape, and so on-even such is the uprising of this entire mass of ill.
If, friend, I were to pull towards me one of those sheaves of reeds, the other would fall; if I were to pull towards me the other, the former would fall.
Even so, friend, from the ceasing of name-and-shape, consciousness ceases; from the ceasing of consciousness, name-and-shape ceases; from the ceasing of name-and-shape sense ceases, and similarly is there ceasing of contact, feeling . . . and of this entire mass of ill
Wonderful, friend Sariputta ! marvellous, friend Sariputta ! how well is this uttered by the venerable Sariputta, and for this that has been uttered by him with these thirty-six bases we thank him.
If, friend, a brother teaches a doctrine of revulsion from decay-and-death, of its fading away and ceasing, this is enough for him to be called Norm-teaching Brother. If. friend, a brother have practised himself in revulsion from decay-and-death, in [making it] fade away and cease, this is enough for him to be called Brother versed in that which is conformity with the Norm. If, friend, a brother because of revulsion from decay-and-death, because of its fading away and ceasing be freed from grasping, this is enough for him to be called Brother who has won Nibbana in this life.
S. 12-67. 갈대묶음[Nalakalapiyam] - SN. Ⅱ. 112 : 잡아함 12권 6(대정. 2. 80b, 잡288)
한때 존자 싸리뿟따와 존자 마하꼿티따가 바라나씨의 이씨 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 있었다.
그때 존자 마하꼿티따는 저녁 무렵 홀로 선정에서 일어나 존자 싸리뿟따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존자 싸리 뿟따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나눈 뒤에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은 존자 마하꼿티따는 존자 싸라뿟따에게 말했다.
[꼿티따] "존자 싸리뿟다여, 늙고 죽음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까? 늙고 죽음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늙고 죽음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혹은 늙고 죽음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따여, 늙고 죽음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늙고 죽음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며, 늙고 죽음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늙고 죽음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
[꼿티따] "존자 싸리뿟다여, 태어남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까? 태어남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태어남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혹은 태어남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따여, 태어남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태어남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며, 태어남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태어남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난다."
[꼿티따] "존자 싸리뿟다여, 존재는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까? 존재는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존재는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혹은 존재는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따여, 존재는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존재는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며, 존재는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존재는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난다."
[꼿티따] "존자 싸리뿟다여, 취착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까? 취착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취착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혹은 취착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따여, 취착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취착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며, 취착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취착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난다."
[꼿티따] "존자 싸리뿟다여, 갈애는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까? 갈애는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갈애는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혹은 갈애는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따여, 갈애는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갈애는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며, 갈애는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갈애는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꼿티따] "존자 싸리뿟다여, 감수는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까? 감수는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감수는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혹은 감수는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따여, 감수는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감수는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며, 감수는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감수는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난다."
[꼿티따] "존자 싸리뿟다여, 접촉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까? 접촉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접촉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혹은 접촉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따여, 접촉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접촉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며, 접촉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접촉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난다."
[꼿티따] "존자 싸리뿟다여, 여섯 감역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까? 여섯 감역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여섯 감역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혹은 여섯 감역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따여, 여섯 감역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여섯 감역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며, 여섯 감역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여섯 감역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난다."
[꼿티따] "존자 싸리뿟다여, 명색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까? 명색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명색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혹은 명색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따여, 명색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명색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며, 명색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명색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꼿티따] "존자 싸리뿟다여, 의식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까? 의식은 남이 만드는 것입니까? 의식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혹은 의식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꼿티따여, 의식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의식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며, 의식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의식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
[꼿티따] "이제 우리는 존자 싸리붓따가 말한 바를 이와 같이 이해합니다. '벗이여, 꼿티따여, 명색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명색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며, 명색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명색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이제 우리는 존자 싸리뿟따가 말한 바를 이와 같이 이해합니다. '벗이여, 꼿티따여, 의식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의식은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니며, 의식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의식은 스스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드는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그런데 그대가 말한 그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싸리뿟따] "벗이여, 그렇다면 비유를 들겠다. 아는 자는 비유로 말하는 그 뜻을 알 것이다.
벗이여, 예를 들어 두 갈대묶음이 서로 의존하여 서 있는 것처럼 벗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명색을 의존하여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의존하여 명색이 생겨나며, 명색을 의존하여 여섯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감역을 의존하여 접촉이 생겨나며, 접촉을 의존하여 감수가 생겨나고, 감수를 의존하여 갈애가 생겨나며, 갈애를 의존하여 취착이 생겨나고, 취착을 의존하여 존재가 생겨나며, 존재를 의존하여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의존하여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벗이여, 만약 그 갈대묶음 가운데 하나를 떼어내면 다른 하나도 쓰러질 것이다. 또한 다른 하나를 떼어내면 본래의 하나도 쓰러질 것이다. 이와 같이 벗이여, 명색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며,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고,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며,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고,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며,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며,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름,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꼿티따] "벗이여, 싸리뿟따여,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벗이여, 싸리붓따여,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참으로 존자 싸리뿟따는 잘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자 싸리뿟따가 말한 것을 이와 같이 36가지의 명제로 정리해서 함께 기뻐합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늙고 죽음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설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늙고 죽음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실천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늙고 죽음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집착이 없이 해탈했다면 '그 수행승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태어남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설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태어남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실천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태어남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집착이 없이 해탈했다면 '그 수행승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존재를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설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존재를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실천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존재를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집착이 없이 해탈했다면 '그 수행승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취착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설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취착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실천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취착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집착이 없이 해탈했다면 '그 수행승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갈애를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설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갈애를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실천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갈애를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집착이 없이 해탈했다면 '그 수행승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감수를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설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감수를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실천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감수를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집착이 없이 해탈했다면 '그 수행승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접촉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설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접촉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실천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접촉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집착이 없이 해탈했다면 '그 수행승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여섯 감역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설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여섯 감역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실천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여섯 감역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집착이 없이 해탈했다면 '그 수행승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명색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설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명색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실천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명색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집착이 없이 해탈했다면 '그 수행승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의식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설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의식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실천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의식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집착이 없이 해탈했다면 '그 수행승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형성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설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형성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실천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형성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집착이 없이 해탈했다면 '그 수행승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무명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설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설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무명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실천한다면 '그 수행승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벗이여, 수행승이여, 한 수행승이 무명을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집착이 없이 해탈했다면 '그 수행승은 현세에서 열반에 도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념정리] - 연기(緣起)의 진리
Ⅰ. 서론
연기설은 보편성 타당성이 있는 객관적 진리라고 하여, 이것을 법(dhamma)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하였으며, 다시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불타를 본다'고도 하였던 것이다. 진리로서 연기설을 올바르게 보면 불교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Ⅱ. 본론
1. 연기의 의미
연기(緣起)는 범어 pratitya-samutpada의 번역이다. 모든 존재(有爲法)는 각종의 조건에 의해 잠정적으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성립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므로(無常), 독립적인 존재성을 가질 수 없고(無我) 서로 의존한다. 이러한 인연에 의해 성립되어 있는 존재를 연생(緣生). 연생법(緣生法). 연기생(緣起生). 연기생법(緣起生法)이라 한다. 말하자면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의 인(hetu)과 연(pratyaya)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된다. 즉 독립. 자존적인 존재는 없으며, 조건과 원인이 없으면 결과(phala)도 없다는 설이다. 중아함부 경전 권47에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이 없다.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하면 그것이 멸한다.'고 표현된다. 이처럼 중생이 生死. 流轉의 고통을 받는 경우의 연기는 유전(流轉)연기, 수행해서 해탈로 향하는 연기를 환멸(還滅)연기라 한다.
2. 연기(緣起)의 의의(意義)
佛陀가 깨달은 것은 상주하는 法界와 이 法界가 유지되는 법칙, 즉 '緣起法' 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法이란 '緣起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緣起하는 有爲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法의 세계 곧 '法界'인 것이다.
緣起法이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저 如來가 세상에 나오시든 나오시지 않든 法界는 常住한다. 如來는 스스로 이 法을 깨달아 等正覺을 이루웠나니, 모든 衆生을 위하여 分別하여 演說하고 開發 顯示하노라. 이는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에 저것이 일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無明을 緣하여 行이 있고 이에 내지 純大苦聚가 집기하며, 無明이 멸함으로써 行도 멸하고 내지 純大苦聚가 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계가 常住한다는 말은, 일정한 조건 아래서 일정하게 작용하는 법칙의 세계가 상주한다는 의미이다. 故로 그 법을 자각했다는 것은 이 같은 法界가 유지되는 법칙인 '緣起法'임을 자각했다는 뜻이다. 불타는 緣起를 객관적이고 필연적이며 불변하는 것으로, 조건 아래 작용하는 법칙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緣起法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을 法이라 부르고, 그 법의 구조를 法界라고 한다. 따라서 一切法은 緣起하고 있으며, 이렇게 緣起하는 구조는 常住한다는 것이 '法界 常住'의 의미이다. 그리고 緣起하는 法界를 중생들에게 개현하기 위하여,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설한 것이 '十二緣起說'이다.
하지만 객관적 필연성으로 불변하는 '緣起의 법칙'이라는 말은 어떤 조건 아래서의 상호 관계일 뿐, 事物에 내재하는 독립적인 법칙은 아니다. 만일 사물이 실재로 존재하고, 그 존재에 고유한 속성으로서의 내재된 법칙(自性)이 있다면, 그 존재는 어떤 조건에서든지 그 법칙으로만 작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존재이든 조건이 형성되어지는 바에 따라 변화한다. 이는 원래 고정된 自性이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無自性이므로 '空'이고, 이에 空을 바탕으로 하여 緣起法이 성립한다. 이것이 바로 緣起法의 심심 난해한 意味이며, 因果律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떤 因果의 決定論에도 떨어지지 않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오온(五蘊)과 연기설의 관계
네가지 자양분이 있어서 중생이 되도록 돕고, 세간에 머물면서 자라게 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 자양분인가? 첫째는 단식(團食)이고, 둘째는 촉식(觸食)이며, 셋째는 의사식(意思食)이고, 넷째는 식식(識食)이다. 만약 비구가 이 자양분을 좋아하고 탐내는 마음을 갖게 되면 식(識)이 머물면서 커 간다. 식이 머물면서 커가기 때문에 명색에 들어간다. 명색(名色)에 들어가기 때문에 모든 행이 커 가고, 행(行)이 커 가기 때문에 다음 세상의 나의 존재가 커 간다. 다음 세상의 나의 존재가 커 가기 때문에 생. 노. 병. 사와 같은 괴로움이 모인다.
십이입처에서 오온이 성립되고 12연기와 연결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欲貪 --- 12 入處 緣起 ---> 6 識 發生
↓
18 界 形成
↓ ← 6 觸 發生 -(無明觸에 의하여)
18界라는 의식의 세계가 6界라는 존재의 세계로 전환
(외부의 사물로 느껴지는 色. 聲. 香. 味. 觸과 이를 지각하는 '나'라고 느껴지는 眼. 耳. 鼻. 舌. 身을 四大(地水火風)로 된 존재로 생각함으로써 四大가 성립하고, 이 사물이 공간에 존재한다고 생각함으로써 空이 성립하고 그것을 느끼는 識이 몸 안에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6界가 성립함.)
↓
受(苦樂의 감정적인 느낌). 想(비교 분석 판단 등의 이성적 사유). 思(의지적인 의도)가 발생
이 가운데 四大(地水火風) : 團食
'무엇인가 있다는 느낌 : 觸食
受. 想. 思 : 意思食
6界 중의 識 : 識食
↓
중생들이 이 네가지 자양분을 취하여 자기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를 조작해 냄
(이와 같이 有爲의 존재를 조작해 내는 것 : 行)
(조작된 有爲 : 중생들이 자기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五蘊)
↓
중생들이 欲貪으로 말미암아 觸에서 생긴 無常한 의식들을 동일성을 지닌 존재로 착각하여 허망한 의식처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비유로 설명하여 네 가지 자양분이라고 한 것.
※ 識의 증장 → 名色에 들어감 → 行이 증장 → 새로움 五蘊 성립 : 새로운 자아(미래의 존재)로 취착 → 새로운 五蘊에 의한 삶을 통해 새로운 識 증장 → 다시 새로운 五蘊 성립 : 輪廻
▶識이 증장 → 名色에 들어감 ; 識이 새로운 名色을 인식하면 중생은 識이 인식한 名色이 외부에 실재한다고 생각
▶名色에 들어감 → 行이 증장 ; 識의 증장을 통해서 외부에 새로운 존재가 있다고 인식되면 이 새로운 존재에 대하여 다시 새로운 욕구, 즉 行이 생겨서 새로운 有爲를 조작한다는 뜻.
▷과거의 識에 의해 성립된 오온 : 前生의 중생의 존재 ↓식이 증장을 통해 끝없이 새로운 오온
▷현재의 識에 의해 성립된 오온 : 현재의 중생의 존재 ↓을 구성하여 윤회하며 생사의 괴로움
▷미래의 識에 의해 성립된 오온 : 미래의 중생의 존재 ↓을 느끼는 것을 보여주는 것 : 12 緣起
因緣은 五蘊의 발생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말이고, 緣起는 오온의 증장을 설명하는 말이다.
識은 12입처를 인연으로 하여 생긴 것이나 色. 受. 想. 行에 머물면서 증장하므로 色. 受. 想. 行에 의존하여 연기하는 것이다.
受. 想. 行은 발생의 측면에서 보면 觸을 인연으로 해서 생기지만 증장의 측면에서 보면 受는 觸에서 존재로 느껴진 色에서 연기하고, 想은 受에서 연기하며, 行은 想에서 연기한다. 이와 같이 오온은 인연에 의하여 발생하고, 발생한 오온은 무명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 오온에 의지하여 새로운 오온이 연기한다.
Ⅲ. 결론
이와 같이 오온의 연기 구조를 정리하면 色에서 受가 연기하고, 受에서 想이 연기하며, 想에서 行이 연기하여 이들을 有爲로 조작한다. 이렇게 有爲를 조작하면 識은 이것을 이름으로 분별한다. 이렇게 이름 붙여진 有爲가 명색이다. 그러면 識은 이 名色을 의존하여 머물면서 증장한다. 識이 증장하면 새로운 色이 연기하고, 受. 想. 行이 차례로 연기하여 새롭게 有爲를 조작하면 識은 다시 새로운 이름으로 이것을 인식하고, 이것에 머물면서 증장한다. 그러니까 오온의 연기 구조를 보다 간단히 정리하면 識에서 名色이 연기하고, 名色에서 증장한 識이 연기하고, 증장한 識이 의존하여 새로운 名色이 연기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식과 명색의 순환적인 연기를 통해서 중생의 생사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연기설이다.
참고문헌
원시불교, 水野弘元 著(김현 역), 98.p ~ 108.p
불교의 이해와 실천 2, 이중표 著. 17.p ~ 37.p
불교교리발달사, 김동화 著, 21.p ~ 25.p
제9장 緣起의 中道實相과 치우침 없는 삶의 길1
제301 가전연경(迦 延經)
(三 一)如是我聞.一時.佛住那梨聚落深林中待賓舍.爾時.尊者[跳-兆+散]陀迦 延詣佛所.稽首佛足.退住一面.白佛言.世尊.如世尊說正見.云何正見.云何世尊施設正見.佛告[跳-兆+散]陀迦 延.世間有二種依.若有·若無.爲取所觸.取所觸故.或依有·或依無.若無此取者.心境繫着使不取·不住·不計我苦生而生.苦滅而滅.於彼不疑·不惑.不由於他而自知.是名正見.是名如來所施設正見.所以者何.世間集如實正知見.若世間無者不有.世間滅如實正知見.若世間有者無有.是名離於二邊說於中道.所謂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謂緣無明行.乃至純大苦聚集.無明滅故行滅.乃至純大苦聚滅.佛說此經已.尊者[跳-兆+散]陀迦 延聞佛所說.不起諸漏.心得解脫.成阿羅漢
301. 가전연경(迦 延經)
신수장경 : 2-85c
한글장경 : 잡-1-349
남전장경 : S. 12-15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나알리 부락같은 숲속의 대빈사에 계시었다. 그 때에 존자 산다카챠나는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 쪽에 둘러 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바른 소견이란 어떤 것이 바른 소견입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바른 소견을 벌여 놓으시나이까."
부처님께서 산다카챠나에게 말씀하시었다.
"세간에는 두 가지 의지가 있으니 혹은 유(有)요 혹은 무(無)다. <잡음(取)>때문에 부딪쳐지고, <잡음>에 부딪쳐지기 때문에 혹은 유에 의지하고 혹은 무에 의지한다. 만일 이 <잡음>이 없으면 마음이 경계에 매이더라도 취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며 헤아리지 않게 하여, 내게 괴로움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두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하는 대로 두어, 그것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나니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하며 이것을 여래가 벌여 놓는 바른 소견이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세간의 모임을 참다이 바르게 알고 보면, 혹은 세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을 것이요. 세간의 멸함을 참다이 알고 보면, 혹은 세간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두 극단을 떠나 중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나니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무명을 인연하여 지어감이 있고···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지어감이 멸하고···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존자 산다카챠나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S. 12-15. The Kacc yana
While the Exalted One was at S vatth the venerable Kacc yana of that clan came to visit him, and saluting him sat down at one side. So seated he asked the Exalted One, saving : -Lord, we hear the phrase 'right view, right view.'
This World, Kacc yana, 'usually bases [its view] on two things : on existence and on non-existence.
Now he, who with right insight sees the uprising of the world as it really is, does not hold with the non-existence of the world. But he, with right insight sees the passing away of the world as it really is, does not hold with the existence of the world.
Grasping after systems, imprisoned by dogmas is this world, Kacc yana, for the most part. And the man who does not go after that system-grasping, that mental standpoint, that dogmatic bias, who does not grasp at it, does not take up his stand upon it [does not think]: - 'It is my soul !' - who thinks : - 'that which arises is just Ill, that which passes away is Ill' - this man is not in doubt, is not perplexed. Knowledge herein is his that is not merely another's. Thus far, Kacc yana, he has right view.
Everything exists : - this is one extreme. Nothing exists: - this is the other extreme. Not approaching either extreme the Tath gata teaches you a doctrine by the middle [why]:-Conditioned by ignorance activities come to pass, conditioned by activities come to pass, conditioned by activities consciousness; thus conditioned [arises] name-and-shape; and sense arises, contact, feeling, craving, grasping, becoming, birth, decay-and-death, grief, suffering, . . . even such is the uprising of this enrire mass of ill. But from the utter fading away and ceasing of ignorance [arises] seasing of activities, and thus comes ceasing of this entire mass of ill.
S. 12-15. 깟짜야나곳따[Kacc yanagotto]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존자 깟짜야나곳따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은 존자 깟짜야나곳따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깟짜야나] "올바른 견해, 올바른 견해 하는데 세존이시여, 올바른 견해란 어떤 것입니까?"
[세존]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냐 비존재의 두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취착, 주착을 통해 얽매여 있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접근하고 취착하고 마음으로 욕구하여 유입되고 잠재되는 것에 다다르지 않고 붙잡지 않고 주착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면 일어난다. 괴로움이 사라지면 사라진다'고 의심하지 않고 혼란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에게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지식이 생겨난다. 깟짜야나여,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가 생겨난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좆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제254 이십억이경(二十億耳經)
(二五四)如是我聞.一時.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爾時.尊者二十億耳住耆 山.常精勤修習菩提分法.時.尊者二十億耳獨靜禪思.而作是念.於世尊弟子精勤聲聞中.我在其數.然我今日未盡諸漏.我是名族姓子.多饒財寶.我今寧可還受五欲.廣行施作福.爾時.世尊知二十億耳心之所念.告一比丘.汝等今往二十億耳所.告言.世尊呼汝.是一比丘受佛敎已.往詣二
十億耳所.語言.世尊呼汝.二十億耳聞彼比丘稱大師命.卽詣世尊所.稽首禮足.退住一面.爾時.世尊告二十億耳.汝實獨靜思作是念.世尊精勤修學聲聞中.我在其數.而今未得漏盡解脫.我是名族姓子.又多錢財.我寧可還俗.受五欲樂.廣施作福耶.時.二十億耳作是念.世尊已知我心.驚怖毛 .白佛言.實爾.世尊.佛告二十億耳.我今問汝.隨意答我.二十億耳.汝在俗時.善彈琴不.答言.如是.世尊.復問.於意云何.汝彈琴時.若急其絃.得作微妙和雅音不.答言.不也.世尊.復問.云何.若緩其絃.寧發微妙和雅音不.答言.不也.世尊.復問.云何善調琴絃.不緩不急.然後發妙和雅音不.答言.如是.世尊.佛告二十億耳.精進太急.增其掉悔.精進太緩.令人懈怠.是故汝當平等修習攝受.莫着·莫放逸·莫取相時.尊者二十億耳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時.尊者二十億耳常念世尊說彈琴譬.獨靜禪思.如上所說.乃至漏盡心得解脫.成阿羅漢.爾時.尊者二十億耳得阿羅漢.內覺解脫喜樂.作是念.我今應往問訊世尊.爾時.尊者二十億耳往詣佛所.稽首禮足.退坐一面.白佛言.世尊.於世尊法中得阿羅漢.盡諸有漏.所作已作.捨離重擔.逮得己利.盡諸有結.正智心解脫.當於爾時解脫六處.云何爲六.離欲解脫·離 解脫·遠離解脫·愛盡解脫·諸取解脫·心不忘念解脫.世尊.若有依少信心而言離欲解脫.此非所應.貪· ·癡盡.是名眞實離欲解脫.若復有人依少持戒而言我得離 解脫.此亦不應.貪· ·癡盡.是名眞實解脫.若復有人依於修習利養遠離而言遠離解脫.是亦不應.貪· ·癡盡.是眞實遠離解脫.貪· ·癡盡.亦名離愛.亦名離取.亦名離忘念解脫.如是.世尊.若諸比丘未得羅漢.未盡諸漏.於此六處不得解脫.若復比丘在於學地.未得增上樂涅槃.習向心住.爾時成就學戒.成就學根.後時當得漏盡·無漏心解脫.乃至自知不受後有.當於爾時得無學戒.得無學諸根.譬如 童愚小仰臥.爾時成就童子諸根.彼於後時漸漸增長.諸根成就.當於爾時成就長者諸根.在學地者亦復如是.未得增上安樂.乃至成就無學戒·無學諸根.若眼常識色.終不能妨心解脫·慧解脫.意堅住故.內修無量善解脫.觀察生滅.乃至無常.耳識聲·鼻識香·舌識味·身識觸·意識法.不能妨心解脫·慧解脫.意堅住故.內修無量善解脫.觀察生滅.譬如村邑近大石山.不斷·不壞·不穿.一向厚密.假使四方風吹.不能動搖·不能穿過.彼無學者亦復如是.眼常識色.乃至意常識法.不能妨心解脫·慧解脫.意堅住故.內修無量善解脫.觀察生滅.爾時.二十億耳重說偈言
離欲心解脫 無 脫亦然
遠離心解脫 貪愛永無餘
諸取心解脫 及意不忘念
曉了入處生 於彼心解脫
彼心解脫者 比丘意止息
諸所作已作 更不作所作
猶如大石山 四風不能動
色聲香味觸 及法之好惡
六入處常對 不能動其心
心常住堅固 諦觀法生滅
尊者二十億耳說是法時.大師心悅.諸多聞梵行者聞尊者二十億耳所說.皆大歡喜.爾時.尊者二十億耳聞佛說法.歡喜隨喜.作禮而去爾時.世尊知二十億耳去不久.告諸比丘.善心解脫者.應如是記說.如二十億耳以智記說.亦不自擧.亦不下他.正說其義.非如增上慢者.不得其義.而自稱歎得過人法.自取損減
254. 이십억이경
신수장경 : 2-62b
한글장경 : 잡-1-255
남전장경 : A. 6-55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의 칼란다 대나무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에 존자 이십억귀 비구는 기사굴산에서 항상 부지런히 보리분법을 닦아 익히고 있었다. 때에 이십억귀는 혼자 고요히 선사(禪思)하다가 이렇게 생각하였다. '세존의 제자로서 정근하는 성문 가운데 나도 그 수에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아직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하였다.
나는 유명한 족성의 아들로서 재물과 보배가 넉넉히 있다. 나는 차라리 집에 돌아가 다섯 가지 즐거움을 누리면서 널리 보시를 행하여 복을 짓자'고. 그 때에 세존께서는 이십억귀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 한 비구에게 말씀하시었다.
"너는 이십억귀에게 가서 '세존께서 너를 부르신다'고 알려라."
그 비구는 부처님 분부를 받고 이십억귀에게 가서 말하였다.
"세존께서 너를 부르신다."
이십억귀는 그 비구가 스승님의 명령이라는 말을 듣고 곧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물러나 한 쪽에 서 있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이십억귀에게 말씀하시었다.
"너는 진실로 혼자 선사하다가 이렇게 생각하였느냐. 즉 '부지런히 공부하는 세존의 성문 가운데 나도 그 수에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지금, 아직 번뇌가 다해 해탈을 얻지 못하였다. 나는 유명한 족성의 아들이요 또 많은 재산이 있다. 나는 차라리 속세로 돌아가 다섯 가지 즐거움을 누리면서 널리 보시하여 복을 짓자'고 하였는가."
때에 이십억귀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세존께서는 이미 내 마음을 아신다'고. 그래서 놀라고 두려워해 털이 일어섰다. 그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진실로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이십억귀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이제 너에게 물으리니 너는 마음대로 내게 대답하여라. 이십억귀여, 너는 속세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는가."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너의 생각에는 어떠하냐. 네가 거문고를 탈 때에 만일 그 줄을 너무 조이면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내게 할 수 있던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줄을 어떻게 늦추면 과연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내던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줄을 잘 고루어 너무 늦추지도 않고 조르지도 않으면, 미묘하고 화하고 맑은 소리를 내던가."
"그러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이십억귀에게 말씀하시었다.
"정진이 너무 급하면 그 들뜸을 더하고, 정진이 너무 느리면 사람을 게으르게 한다. 그러므로 너는 마땅히 평등하게 닦아 익히고 거두어 받아,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며 모양을 취하지도 말라."
이십억귀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때에 존자 이십억귀는 항상 세존께서 말씀하신 거문고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혼자 고요히 선사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하였다. 그래서 번뇌가 다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그 때에 존자 이십억귀는 아라한이 되어 마음으로 해탈한 기쁨과 즐거움을 깨닫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이제 세존께 가서 문안 드리리라'고.
그 때에 존자 이십억귀는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물러나 한 쪽에 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 법 안에서 아라한이 되었나이다. 모든 유의 번뇌는 다하고 할 일은 이미 마쳤으며, 무거운 짐을 버리고 자기의 이익을 얻었으며, 모든 유의 맺음을 다하고 바른 지혜로 마음이 해탈하였나이다. 그 때에 <여섯 곳>에서 해탈하였으니 어떤 것이 여섯인가. 즉 욕심을 떠난 해탈·성냄을 떠난 해탈·멀리 떠난 해탈·애욕이 다한 해탈·모든 취에서의 해탈·늘 생각하여 잊지 않는 해탈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조그마한 신심을 의지하여 욕심을 떠나 해탈하였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진실한 욕심을 떠난 해탈이라고 하나이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조금 계율 가짐을 의지하여 '나는 성냄에서 해탈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또한 적당하지 않나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진실한 해탈이라고 하나이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양을 멀리 떠나기를 닦아 익힘을 의지하여 멀리 떠난 해탈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또한 적당하지 않나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진실한 멀리 떠난 해탈이라 하나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애욕을 떠난 것이라 하며 또한 취를 떠난 것이라 하며 또한 생각의 잊음을 떠난 해탈이라 하나이다.
이와 같이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비구들이 아라한이 되지 못하여 모든 번뇌가 다하지 못하고 이 여섯 곳에서 해탈을 얻지 못하고, 또 만일 어떤 비구가 배우는 지위에 있어서 아직 왕성한 즐거움의 <열반>을 얻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향(向) 익히는 마음에 머무르면, 그 때에는 배우는 계를 성취하고 배우는 근을 성취하여, 뒀날에는 반드시 번뇌가 없어 마음이 해탈하여···내지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배움이 없는 계>를 얻고 배움이 없는 모든 근을 얻을 것입니다. 비유하면 어리석고 작은 어린아이가 반듯이 누워 있을 그 때에는 어린아이의 모든 근을 성취하고, 그가 뒀날에 점점 자라나 모든 근이 성취되면 그 때에는 어른의 모든 근을 성취하는 것과 같이, 배우는 지위에 있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아서, 아직 왕성한 안락은 얻지 못하였다가 내지 배움이 없는 계와 배움이 없는 모든 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 눈으로 항상 빛깔을 보더라도 마침내 마음의 해탈과 슬기의 해탈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은 뜻이 굳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니, 안으로 한량이 없는 좋은 해탈을 닦아, 나고 멸함과 내지 덧없음을 관찰하나이다. 귀는 소리를 분별하고 코는 냄새를 분별하며, 혀는 맛을 분별하고 몸은 부딪침을 분별하며, 뜻은 법을 분별하더라도 마음의 해탈과 슬기의 해탈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은 뜻이 굳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니, 안으로 한량이 없는 좋은 해탈을 닦아 나고 멸함을 관찰하나이다. 비유하면 마을 가까이 큰 돌산이 있는데, 끊기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고 뚫리지도 않아 한결같이 두텁고 짜여 있으면 비록 사방에서 바람이 불더라도 움직여 흔들지 못하고 뚫고 지나가지 못하는 것과 같이, 저 배움이 없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나이다. 눈으로 항상 빛깔을 분별하고···내지 뜻으로 항상 법을 분별하더라도 마음의 해탈과 슬기의 해탈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은 뜻이 굳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니, 안으로 한량이 없는 좋은 해탈을 닦아 나고 멸함을 관찰하나이다."
그 때에 이십억귀 비구는 거듭 게송으로 말하였다.
욕심을 떠나 마음이 해탈하고
성냄이 없는 해탈 또한 그렇고
멀리 떠나 마음이 해탈하고
탐욕과 사랑도 아주 다 없어졌네.
모든 집착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또 생각을 잊지 않고
느낌이 생기는 곳 환히 알면
그것에 대해 마음이 해탈하네.
그 마음이 해탈한 사람
그 비구는 뜻이 쉬고 그치고
모든 할 일은 이미 마치어
다시는 할 일을 만들지 않네.
마치 저 큰 돌산은
네 가지 바람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빛깔·소리·냄새·맛·부딪침과
또 법의 좋고 나쁜 것
여섯 감관이 항상 그것에 대해도
그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나니
마음은 언제나 굳게 머물러
법의 나고 멸함을 환히 관찰하네.
존자 이십억귀가 이 법을 말하였을 때에 스승의 마음은 기뻐하시었고, 여러 많이 아는 범행자들은 존자 이십억귀의 말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그 때에 존자 이십억귀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물러갔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존자 이십억귀가 하직을 사뢴지 오래지 않아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마음이 잘 해탈한 사람은 마땅히 저와 같이 말해야 하느니라. 이십억귀와 같은 사람은 지혜로써 말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추키지도 않고, 또한 남을 낮추지도 않고, 바로 그 이치를 말하였다. 그것은 저 왕성한 거만을 가진 자가 그 이치도 얻지 못했으면서 스스로 사람에서 뛰어난 법을 얻었다고 자랑하여, 스스로 손해 보는 것과 같지 않는 것이니라."
A. 6-55. So a
Thus have I heard : Once, when the Exalted One was dwelling near Rajagaha, on Mount Vulture Peak, the venerable So a dwelt in Cool Wood near R jagaha.
Now the venerable So a, in solitude apart, communed thus in his heart: 'The Exalted One's disciples live in active energy and I am one of them; yet my heart is not detached and free of the cankers. My family is rich and I can enjoy riches and do good; what if I were to forsake the training and turn to low things, enjoy riches and do good !'
And the Exalted One, Knowing in his own heart the venerable So a's thoughts - as a strong man might stretch his bent arm or bend his stretched arm - left Mount Vulture Peak and appeared in Cool Wood before the venerable So a. And when his seat was ready, the Exalted One sat down; and the venerable so a, after saluting, also sat down - at one side.
And the Exalted One said to him, so seated:
'So a, did you not thus commune in your heart: "The Exalted One's disciples live in active energy and I am one of them; yet my heart is not detached and free of the cankers . . . what if I were to forsake the training and turn to low things . . . ? '''
'Yes, lord.'
'Bethink you, so a, were you not, in the old days at home, clever at the lute's stringed nusic ?'
'Yes, lord.'
'And bethink you, so a, when your lute's strings were overstrung, was your lute then tuneful and playable ?'
'No, indeed, lord.'
'And bethink you, so a, when your lute's strings were over-lax, was your lute then tuneful and playable ?'
'No, indeed, lord.'
'But when, So a, you lute's strings were neither overstrung nor over-lax, but keyed to the middle pitch, was your lute then tuneful and playable ?'
'Surely, lord.'
'Even so, So a, energy, when overstrung, ends in flurry, when over-lax, in idleness. Wherefore, So a, stand fast in the mean of energy; pierce the mean (in the use) of the faculties; and therein grasp the real worth.'
'Yes, lord.'
And the Exalted One, after charging the venerable So a with this counsel - as a strong man might bend his arm to and fro - left Cool Wood and appeared on Mount Vulture Peak.
And presently the venerable So a stood fast in the mean of energy; pierced the mean in the faculties; and grasped therein the mark : and living alone, secluded, earnest, ardent, resolute, entered and abode, not long after, here amid things seen, by his own power, in the realization of that end above all of the godly life, for the sake of which clansmen rightly go forth from the home to the homeless life;. and he knew: 'Birth is ended, the godly life lived, done is what was to be done, there is no more of this.'
And the venerable So a was numbered among the arahants.
Then, having won to arahantship, the venerable So a thought : 'Suppose I visit the Exalted One and declare gnosis near him !' And he went to the Exalted One, saluted him., and sat down at one side; and so seated, he said:
'Lord, the arahant monk who has destroyed the cankers, lived the life, done what was to be done, set down the burden, won self-weal, shattered life's fetter and is freed by perfect gnosis, has applied himself to six things: to dispassion, detachment, harmlessness, destroying craving, destroying grasping and to non-delusion.
Perhaps, lord, some venerable person may think: "Could it be that this venerable man has applied himself to dispassion relying on mere faith alone ?" Let him hot think so. Lord, the canker-freed monk, who has lived the life, done what was to be done, who sees naught in himself to be done, naught to be added to what has been done, - by the fact of being passionless, has applied himself to dispassion by destroying passion; by the fact of being without hatred, has applied himself to dispassion by destroying hatred; by the fact of being without delusion, has applied himself to dispassion by destroying delusion.
Or he may think: "Could it be that this venerable man has applied himself to detachment while hankering after gains, favours and flattery . . . ; to harmlessness while backsliding from the true, holding rule and rite (as sufficient) . . . ; to destroying craving . . .; to destroying grasping . . . ;to non-delusion, holding rule and rite as sufficient ?" Let him not think so. Lord, the canker-freed monk . . ., by the fact of being without passion, hatred, delusion, has applied himself to detachment, harmlessness, destroying craving, destroying grasping, non-delusion, by destroying passion, hatred and delusion.
Lord, if objects cognizable by the eye come very strongly into the range of vision of a monk, wholly freed in mind, they obsess not his mind and his mind is untroubled, firm, having won to composure; and he marks their set. So, too, sounds cognizable by the ear . . . smells by the nose . . . tastes by the tongue . . . , contacts by the touch . . . , and ideas by the mind . . ., he marks their set.
Imagine, lord, a mountain crag, cleftless, chasmless, massive ; and a squall to come very strongly from the east : it would not shake, nor rock, nor stir that crag. Or were a squall to come from the west . . . from the north . . . from the south, it would not shake, nor rock, nor stir it. Even so, lord, if objects cognizable by the eye come very strongly into the range of a monk's vision - one wholly freed in mind - they obsess not his mind and his mind is untroubled, firm, having won to composure; and he marks their set : som, too, of sounds, smells, tastes, touches and ideas. . . .
Dispassion, mind's detachment, harmlessness,
Grasping's and craving's end, mind undeluded:
Who hath applied himself to these, hath seen
Sensations' rise - his mind is wholly freed;
And in that mink, calmed, wholly freed, naught need
Be added to what's done, naught due is found.
As massive crag by wind is never moved,
so sights, tastes, sounds, smells, touches, yea, the things
Longed for and loathed, stir not a man like that;
His mind stands firm, released; he marks their set.'
A. 6-55. So a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라자가하 근처 대머리산 꼭대기에 계실 때 존자 소나는 라자가하 근처 시원한 나무에 계시었다. 그 때에 존자 소나는 그의 마음 안에 이렇게 생각하였다. '세존의 제자로서 정근하는 성문 가운데 나도 그 수에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아직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하였다.
나의 가족은 부자이고 그리고 그 부를 즐기고, 보시하기 ; 수행자의 생활을 버리고 속세로 돌아가, 그 부를 즐기면서 보시나 행할까!
그 때에 세존께서는 존자 소나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 - 힘센 사람이 팔을 굽혔다가 펼 동안 - 대머리산 꼭대기를 떠나 존자 소나가 있는 시원한 나무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자리가 준비되자 부처님은 자리에 앉으시고 서로 인사를 한 뒤 존자 소나는 한쪽에 물러앉았다.
소나여, 너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느냐. '나는 열심히 수행하는 부처님의 제자들 중의 하나이고 나는 아직 고통으로부터 해탈을 얻지 못했다.....만약 내가 수행자의 생활을 버리고 속세로 돌아가면 어떨까?'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너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네가 집에 있을 때 거문고를 잘 연주하였느냐?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여, 잘 생각해 보아라. 네가 거문고 현을 만일 그 줄을 너무 조이면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내게 할 수 있던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줄을 어떻게 늦추면 과연 미묘하고 부드럽고 맑은 소리를 내던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줄을 잘 고루어 너무 늦추지도 않고 조르지도 않으면, 미묘하고 화하고 맑은 소리를 내던가."
"그러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그와 같이 소나야, 수행은 너무 급하면 혼란해지고, 수행이 너무 느리면 사람을 게으르게 한다. 그러므로 소나야 수행의 중도를 흔들리지 않게, 우리의 능력에 맞게 하여 그 가운데 가치있는 것을 취하라.
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리고 부처님은 존자 소나와 상담을 한 후에 - 힘센 사람이 팔을 굽혔다가 펼 동안 - 시원한 나무를 떠나 대머리산 꼭대기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수행의 의미를 통찰하고, 기능의 의미를 알고, 그런 표준을 취해 홀로 생활하면서 은둔해 열심히 수행하여 오래지 않아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윤회를 마치고 성스런 생활을 하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소나는 아라한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소나는 아라한이 되고나서 나는 부처님을 방문하여 상담하리라 생각하고, 부처님에게 가서 인사하고, 한쪽으로 앉은 다음 이야기 했다.
부처님이시여, 아라한은 모든 번뇌는 다하고 할 일은 이미 마쳤으며, 무거운 짐을 버리고 얻었으며, 모든 유의 맺음을 다하고 바른 지혜로 마음이 해탈하여 여섯 해탈하였으니 어떤 것이 여섯인가. 즉 욕심을 떠난 해탈·성냄을 떠난 해탈·멀리 떠난 해탈·애욕이 다한 해탈·모든 취에서의 해탈·늘 생각하여 잊지 않는 해탈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조그마한 신심을 의지하여 욕심을 떠나 해탈하였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진실한 욕심을 떠난 해탈이라고 하나이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조금 계율 가짐을 의지하여 '나는 성냄에서 해탈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또한 적당하지 않나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진실한 해탈이라고 하나이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양을 멀리 떠나기를 닦아 익힘을 의지하여 멀리 떠난 해탈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또한 적당하지 않나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진실한 멀리 떠난 해탈이라 하나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애욕을 떠난 것이라 하며 또한 취를 떠난 것이라 하며 또한 생각의 잊음을 떠난 해탈이라 하나이다.
이와 같이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비구들이 아라한이 되지 못하여 모든 번뇌가 다하지 못하고 이 여섯 곳에서 해탈을 얻지 못하고, 또 만일 어떤 비구가 배우는 지위에 있어서 아직 왕성한 즐거움의 <열반>을 얻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향(向) 익히는 마음에 머무르면, 그 때에는 배우는 계를 성취하고 배우는 근을 성취하여, 뒷날에는 반드시 번뇌가 없어 마음이 해탈하여···내지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배움이 없는 계>를 얻고 배움이 없는 모든 근을 얻을 것입니다. 비유하면 어리석고 작은 어린아이가 반듯이 누워 있을 그 때에는 어린아이의 모든 근을 성취하고, 그가 뒷날에 점점 자라나 모든 근이 성취되면 그 때에는 어른의 모든 근을 성취하는 것과 같이, 배우는 지위에 있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아서, 아직 왕성한 안락은 얻지 못하였다가 내지 배움이 없는 계와 배움이 없는 모든 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 눈으로 항상 빛깔을 보더라도 마침내 마음의 해탈과 슬기의 해탈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은 뜻이 굳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니, 안으로 한량이 없는 좋은 해탈을 닦아, 나고 멸함과 내지 덧없음을 관찰하나이다. 귀는 소리를 분별하고 코는 냄새를 분별하며, 혀는 맛을 분별하고 몸은 부딪침을 분별하며, 뜻은 법을 분별하더라도 마음의 해탈과 슬기의 해탈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은 뜻이 굳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니, 안으로 한량이 없는 좋은 해탈을 닦아 나고 멸함을 관찰하나이다. 비유하면 마을 가까이 큰 돌산이 있는데, 끊기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고 뚫리지도 않아 한결같이 두텁고 짜여 있으면 비록 사방에서 바람이 불더라도 움직여 흔들지 못하고 뚫고 지나가지 못하는 것과 같이, 저 배움이 없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나이다. 눈으로 항상 빛깔을 분별하고···내지 뜻으로 항상 법을 분별하더라도 마음의 해탈과 슬기의 해탈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은 뜻이 굳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니, 안으로 한량이 없는 좋은 해탈을 닦아 나고 멸함을 관찰하나이다."
그 때에 소나 비구는 거듭 게송으로 말하였다.
욕심을 떠나 마음이 해탈하고
성냄이 없는 해탈 또한 그렇고
멀리 떠나 마음이 해탈하고
탐욕과 사랑도 아주 다 없어졌네.
모든 집착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또 생각을 잊지 않고
느낌이 생기는 곳 환히 알면
그것에 대해 마음이 해탈하네.
그 마음이 해탈한 사람
그 비구는 뜻이 쉬고 그치고
모든 할 일은 이미 마치어
다시는 할 일을 만들지 않네.
마치 저 큰 돌산은
네 가지 바람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빛깔·소리·냄새·맛·부딪침과
또 법의 좋고 나쁜 것
여섯 감관이 항상 그것에 대해도
그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나니
마음은 언제나 굳게 머물러
법의 나고 멸함을 환히 관찰하네.
[개념정리] - 緣起의 中道實相과 치우침 없는 삶의 길 1
Ⅰ. 서론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연기법(緣起法)이라는 사실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연기법은 십이연기(十二緣起)로 이야기된다. 따라서 십이연기의 올바른 이해는 연기법의 올바른 이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십이연기를 이해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다.
여기서는 십이연기의 다양한 해석들을 살펴보고 어떻게 보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가에 대하여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연기설 해석의 변천
초기 불교에서 노사(老死)는 태어나는 것에 의해 일어나며, 또한 괴로움은 사랑의 번뇌에 의해 생기거나 인간의 근원적인 무지(無知; 無明)에 의해 생기며, 반대로 번뇌가 없어지면 고통도 없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계열화하여 무명에서부터 노사에 이르는 합계 12항(項)을 세는 연기설(緣起說)이 확립되었다(十二緣起·十二支 또는 十二因緣). 그것이 각 항〔支〕을 생략해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라고도 한다. 다만, 초기의 여러 경전에는 그 밖의 잡다한 연기설도 혼재해 있다.
부파불교(部派佛敎, B.C. 3세기 - 1세기 경) 가운데 가장 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업(業)이라는 설(說)이 추가되었고, 이 십이지를 우리들의 과거·현재·미래의 3세(世)에 걸친 것으로 각기 나누어 시간적인 생기(生起)를 중심으로 연기설을 풀이하여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을 확립하였다. 그밖에 육인(六因)·사연(四緣)·오과(五果)를 헤아리고 인과 연의 결합에서 과(果)가 생기하는 현상을 자세히 고찰한다.
부파의 여러 설에 이론(異論)을 제기하여 대승불교운동(大乘佛敎運動)이 일어났고, 특히 그 최초에 등장한 《반야경(般若經)》 군(群)의 일체개공설(一切皆空說)이 유명하다. 이 설은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2∼3세기의 사람)에 의하여 연기설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심화·확대되었는데, 연기(緣起) 무자성(無自性) 공(空)으로서 확립되었다. 즉 모든 것은 각기 다른 것과 인연을 가지고 우리들 앞에 현상(現象)하고 있으며, 각각 서로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상의관계(相依關係)에도 상호긍정적·상호부정적(모순적) 등이 있으나, 어떤 사물도 자성(自性)을 가지는 존재(실체)가 아니며, 바꾸어 말하면 공(空)이고, 더구나 그 상태도 일단 거짓된 것으로 인정할 뿐이라고 하고, 그러한 사실 자체를 깨닫는 것을 중도(中道)라고 한다. 그 뒤에 중기대승불교 중의 하나로서 모든 현상은 우리들 마음의 작용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는 유식설(唯識說)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러한 마음을 통한 인식과 마음 그 자체를 자세히 분석하는 과정에서 연기설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외계(外界)와 연기라는 관계에서 활동하는 마음에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식(六識)을 들고 그것을 통괄하는 자아의식을 말나식(末那識)이라고 하고, 다시 그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받아들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설정한다. 한편, 이 식(識)에서 연기 관계를 통하여 어떻게 하면 일체가 현상화(現象化)하는가, 그리고 깨달음으로 인도되는가가 자세히 검토되고 있다. 중기대승불교의 다른 하나는 우리들 속에 깨달음을 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 여래장(如來藏) 또는 불성(佛性)을 설정하고, 그것은 원래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에 바탕을 둔다고 본다. 이것을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고 하며 법성(法性)·진여(眞如) 등의 학설을 전개하였다. 중국 불교에서는 나가르주나의 설을 발전시켜서 체계화한 삼론(三論)의 진속이제(眞俗二諦)의 연기설, 천태(天台)의 공(空) 가(假) 중(中) 삼제(三諦)에 기초한 연기설, 일체의 모든 것이 상호 교착하고 유입해서 일즉다(一卽多)·다즉일(多卽一)인 현상면(現象面)을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하고, 이것을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하는 화엄(華嚴)의 설 등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밀교(密敎)에서는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의 육대(六大)와 연관되어 일체가 전개된다고 하는 육대연기설(六大緣起說)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2.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
십이연기는 法界의 實相에 無知한 중생들이 어떻게 법계에 참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연기설이다.
無明은 진리에 무지한 상태에서 연기한 의식들을 종합하여 抽象하고 總括하는 의식활동, 즉 想을 의미한다. 그리고 行은 이 같은 想의 결과를 가지고 有爲를 조작하는 의식 활동이다. 즉 추상하여 총괄된 내용으로 개념을 구성하는 의식작용인 것이다. 그리고 識은 개념화된 내용을 분별하는 의식 활동이다. 즉 개념에 명명하는 의식 활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識에 의해 이름이 주어질 때 연기한 현상은 그 유형에 따라 이름이 주어진다. 이것이 名色이다. 중생은 이렇게 법계와 心에서 연기한 의식내용을 종합하고 추상하며, 총괄하고 命名하는 가운데 존재의 세계를 허구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 존재의 세계에서 그 세계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한다. 이것이 六入이다. 이같이 자아를 計度하여 그것과 상대하고 있는 존재화된 대상세계를 인식하는 가운데 생기는 느낌, 이것이 觸이다. 그리고 이같이 객관적인 세계가 실재한다는 생각에서 그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이 受이다. 이 같은 대상에 대한 느낌은 다시 그 대상에 대한 사유를 일으키고, 그 대상에 대한 행위를 결정케 한다. 즉 想과 思는 觸에서 受와 함께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십이연기설에서의 受는 想과 思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연기한 의식현상이 존재로 느껴지는 가운데 우리는 이 같은 인식 내용에 대하여 애착하며, 애착에 의해 다시 개념으로 취착한다. 그 결과 새로운 내용의 존재가 구성되는 것이며, 이렇게 구성된 존재에 기초하여 미래의 生老死라는 모순적이고 허구적인 인식이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십이연기의 구조는 우리가 진리에 무지한 상태에서 세계와 자아를 어떻게 보여준다고 할 수가 있다. 십이연기설은 妄識이 무엇에 근거하여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생사는 이 같은 망식의 소산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①무명(無名, avijj ) : 무명(無明)은 무지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그 대상을 필요로 한다. 무엇에 대한 무지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잡아함 298경에서는 그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중생들은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무한하게 존재한다고 알고 있다.(前後際에 대한 無知),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주관과 객관세계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며(內外에 대한 無知), 自我가 있어 業을 짓고 그 報를 받는다고 생각하면서(業報에 대한 無知), 生死輪廻한다. 불타는 이 같은 중생의 생사윤회가 무명에서 비롯된 착각임을 자각했다. 시간과 존재가 모두 무명에서 비롯된 허구적인 것(有爲法)이며, 이들의 實相은 연기하는 법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생사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귀의한 사람들에게 불타는 四聖諦(苦, 集, 滅, 道)를 통해 生死의 因과 그 因으로부터 일어나는 法(因, 因所起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서 善惡, 罪無罪, 익혀야 할 것과 익혀서는 안 될 것(習, 不習), 훌륭한 行과 못난 行(劣等), 도덕적으로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染汚, 淸淨), 즉 실현해야 할 價値있는 行과 없애야 할 무가치한 行을 분별하여 설했으며, 이것은 한 마디로 연기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이 있고, 그 부처님이 깨달아 현시한 진리가 있으며, 그 진리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 가르침에 따라 善, 不善 등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분별하여 수행하면 마침내 연기의 진리를 自證하여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으나,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생사의 원인인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이란 법계를 존재의 세계로 착각한 상태에서 존재의 세계를 벗어나는 길을 모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가 있다.
②행(行, sansk ra) : 行은 전술한 바와 같이 有爲를 造作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것을 잡아함경 298경에서는 身, 口, 意 三行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잡아함 568경에서는 身行은 出息入息이고, 口行은 有覺有觀이며, 意行은 想思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三行이란 자아를 취착하여(身行), 개념화된 언어로 세계를 이행하면서(口行), 새롭게 체험을 종합하여 추상하고 총괄하는(意行) 삶의 태도, 즉 유위를 조작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앞에 인용한 잡아함 374경에서 십이연기의 六入에서 取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六觸緣起의 전 과정을 行이라 할 수가 있다.
③식(識, vi na) : 識은 잡아함 298경에서 六識身이라 하고 있다. 즉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사유함으로써 발생한 意識의 집단인 것이다. 이 의식들은 十二處를 因緣으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십이연기의 체계에서는 이 같은 순수한 의미의 識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연기한 현상을 존재로 대상화하여 이를 분별하면서 자신까지 존재로 대상화하여 인식하는 의식을 문제삼고 있다. 무명에 의해 이 識은 명색을 벗어나지 못하는 의식, 즉 對象을 志向하고 있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④명색(名色, n mar pa) : 名色은 五蘊으로 설명된다. 즉 色은 四大로 조작한 色이고, 明은 受, 想, 行, 識이라는 것이다. 名色은 識이 四食에 住하여 增長함으로서 생긴 것이라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意識이 法을 대상으로 구성한 결과 나타난 법의 존재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識이 行에 의해 조작된 有爲法을 대상으로 취할 때 그 식에 의해 인식되는 모습과 그 모습에 命名하므로써 생기는 개념이 명색인 것이다. 명색은 오온으로 설명하는 것은 名色이 중생의 삶의 태도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대상세계가 외부에 실재한다는 생각에서 그 대상을 보고(色), 그 대상으로부터 느끼고(受), 그 대상에 대하여 사유하고(想), 그 대상에 대하여 행위하려는 의지(行)에서, 그것들을 규정하여 분별한다(識). 이러한 삶의 태도에서 감각과 감각의 대상, 감정과 감정의 대상, 사유와 사유의 대상, 행위와 행위의 대상, 의식과 의식의 대상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오온은 이렇게 세계를 존재로 착각하고 그 존재를 대상으로 인식할 때 우리에게 인식되는 다섯 종류의 존재이다. 따라서 식은 항상 이 다섯 종류의 존재에 대하여 개념적으로 인식하게 되며, 이렇게 식에 의해 존재로 인식된 모든 法이 名色이다.
⑤육입처(六入處, salayatana) : 六入은 일반적으로 六根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이것은 결코 감각기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하는 방법이며, 인식을 구성하는 인식의 바탕이다. 십이연기의 체계에서 名色을 緣하여 六入이 있다는 것은 중생이 관계하는 세계가 허구적으로 조작된 허구적인 존재의 세계임을 의미한다. 즉 존재의 세계임을 의미한다. 즉 존재의 세계에 바탕을 두고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하여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⑥촉(燭, phassa) : 觸은 六入이라는 인식태도에서 생기는 대사에 대한 느낌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우리의 인식은 십이처를 인연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렇게 인식이 구성되었을 때, 이 인식의 내용을 존재로 느끼는 의식이 촉이다. 중생들은 명색을 六入으로 인식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六入을 통해 이 같은 느낌을 일으키는 것이다.
⑦수(受, vedan ) : 觸에 의해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이다. 외부의 대상이 어떤 것은 우리에게 苦를 주고, 어떤 것은 樂을 준다고 느끼는 감정이 受인 것이다.
⑧애(愛, tanh ) : 愛는 갈망이다. 세계와 自我를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중생들은 대상으로부터 생기는 고락의 감정에 기초하여 즐거운 대상은 자기 것으로 하려고 갈망하고, 괴로운 대상은 피하려고 갈망한다. 일반적으로 愛에는 欲愛, 色愛, 無色愛의 三愛가 있다고 설명되는데, 그것은 渴愛의 대상이 三種임을 뜻한다.
渴愛의 대상이 三種이라는 것은 중생들이 존재로 생각하는 대상이 삼종임을 의미한다. 불타는 중생계를 欲界, 色界, 無色界의 三界로 규정하고 있는데, 三界는 중생들이 참된 존재와 자아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구별된다. 欲界는 모든 존재가 중생들의 欲貪에 의해 규정된 세계이다. 이렇게 세계를 欲貪에 상응하는 도구로 인식하고 있는 중생계가 欲界이다. 따라서 자아는 欲貪을 지닌 존재이고, 세계는 그 欲貪에 의해 도구화된 세계이다.
色界는 이 같은 欲界의 허구성을 벗어나 모든 대상이 의의 대상으로 평등하게 느껴지는 세계이다. 예를 들면 欲界에서 책상, 의자, 책장 등이 欲貪에 의해 분별되었다면, 色界에서는 이들이 평등한 나무로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色界에서의 자아는 대상을 인식하는 존재 즉 意이고, 세계는 인식의 대상이 되는 色이라 할 수 있다.
無色界는 이같은 대상세계가 한낱 의식에 의해 구성된 관념이라는 자각에 의해 색상이 滅盡한 세계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의 자아는 사유하는 자아이고 세계는 사유된 세계이다. 이와 같이 三界는 중생들이 각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欲愛, 色愛, 無色愛는 중생들이 각기 존재로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渴愛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⑨취(取, up d na) : 取는 觸에서 발생한 五蘊 가운데서 渴愛의 대상을 取著하는 의식이다. 치는 欲取, 見取, 戒取, 我取의 四取로 설명되는데, 欲取는 觸에서 생긴 오온을 欲貪에 따라 取著함을 의미하고, 見取는 오온이 실상을 알지 못하고 오온에서 轉變說이나 積聚說과 같은 갖가지 사견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 같은 사견에서 올바른 윤리적 행위가 아닌 것을 계율로 취착하는 것이 戒取이다. 그리고 오온을 자아로 취착하는 것이 我取이다. 예를 들어 우파니샤드에서 아트만을 자아라고 하는 것이나 유물론에서 四大의 결합이 자아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我取라고 할 수 있다.
⑩유(有, bhava) : 有는 取에서 取著된 것들을 존재로 대상화하는 의식이다. 의식의 내용을 존재로 전화시키는 의식활동이 有인 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이 무엇을 존재로 대상화하느냐에 따라 欲有, 色有, 無色有가 있게 된다.
⑪생(生, j ti) : 自我 세계를 존재로 대상화함으로써 발생하는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意識이 生이다.
⑫노사(老死, jar marana) : '나는 늙어 죽는다'는 意識이 老死이다.
1. 無明 -+
| 과거의 오온에 의한 삶
2. 行 -+
↓ 識의 증장
3. 識 -+
| ↕새로운 오온 형성 : 현재의 五蘊
4. 名色 -+
↓새로운 識과 名色에 근거하여 듣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의식 발생
5. 六入處
↓
6. 觸 -+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느낌
7. 受 | 외부의 사물에 대하여 느낀 것 가운데 좋아하는 것을 취하여 미래의 五蘊을 구 | 성 : 有를 조작하는 五蘊의 行을 의미.
8. 愛 |
9. 取 -+
↓
10. 有 識의 증장을 통해 미래의 자기 존재로 인식 : 미래의 五蘊
↓
11. 生 → 老 → 病 → 死의 憂悲苦惱의 괴로움이 끝없이 이어짐.
Ⅲ. 결론
이와 같이 십이연기의 각 支는 모두 무명에서 일어나는 의식상태라 할 수 있다. 진리에 무지한 상태에서 우리의 의식은 존재를 허구적으로 구성하여 그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능성을 추구하면서 자아라는 허구적 존재의 생사를 끊임없이 인식한다는 것을 各支는 십이연기의 구조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원시불교, 水野弘元 著(김현 역), 109.p ~ 126.p
불교의 이해와 실천 2, 이중표 著. 40.p ~ 107.p
불교교리발달사, 김동화 著, 21.p ~ 25.p
아함의 중도체계, 이중표, 169.p ~ 222.p
제10장 緣起의 中道實相과 치우침 없는 삶의 길2
제254 이십억이경(二十億耳經)
제297 大空法經
(二九七)如是我聞.一時.佛住拘留搜調牛聚落爾時.世尊告諸比丘.我當爲汝等說法.初·中·後善.善義善味.純一淸淨.梵行淸白.所謂大空法經.諦聽.善思.當爲汝說.云何爲大空法經.所謂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謂緣無明行.緣行識.乃至純大苦聚集.緣生老死者.若有問言.彼誰老死.老死屬誰.彼則答言.我卽老死.今老死屬我.老死是我.所言.命卽是身.或言.命異身異.此則一義.而說有種種.若見言.命卽是身.彼梵行者所無有.若復見言.命異身異.梵行者所無有.於此二邊.心所不隨.正向中道.賢聖出世.如實不顚倒正見.謂緣生老死.如是生·有·取·愛受·觸·六入處·名色·識·行.緣無明故有行.若復問言.誰是行.行屬誰.彼則答言.行則是我.行是我所.彼如是.命卽是身.或言.命異身異.彼見命卽是身者.梵行者無有.或言命異身異者.梵行者亦有.離此二邊.正向中道.賢聖出世.如實不顚倒正見所知.所謂緣無明行.諸比丘.若無明離欲而生明.彼誰老死.老死屬誰者.老死則斷.則知斷其根本.如截多羅樹頭.於未來世成不生法.若比丘無明離欲而生明.彼誰生.生屬誰.乃至誰是行.行屬誰者.行則斷.則知斷其根本.如截多羅樹頭.於未來世成不生法.若比丘無明離欲而生明.彼無明滅則行滅.乃至純大苦聚滅.是名大空法經.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제297. 대공법경(大空法經)
신수장경 : 2-84c
한글장경 : 잡-1-345
남전장경 :
이와 같이 내가 물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구류사의 조우부락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설법하리라.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고, 좋은 뜻과 좋은 맛으로 순일하고 청정하며 범행이 맑고 깨끗하나니 이른바 대공법경이니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들을 위하여 설명하리라.
어떤 것을 대공법경이라 하는가.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즉,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行)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으며···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이느니라.
생(生)을 인연하여 생(生)과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하면 혹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 누가 늙고 죽으며, 늙고 죽음은 누구에게 붙어 있는가.'고 하면 그는 곧 대답하리라. '내가 곧 늙고 죽으며 늙고 죽음은 지금 내게 붙어 있다. 늙고 죽음은 곧 나다. 말하는 바 명(命)은 이 몸이다'고. 혹은 '명(命)은 다르고 몸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곧 한 뜻으로써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이다. 만일 '명(命)은 곧 몸이다'고 말한다면 저 범행자는 있을 수 없을 것이요, 만일 다시 '명(命)은 다르고 몸은 다르다'고 말한다면 범행자는 또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두 극단에 대해서 마음이 따르지 않는 것이 바르게 중도(中道)로 향하는 것이다.
현인과 성인은 세상에 나와 참다워서 뒤바뀌지 않고 바르게 보나니 이른바 '생(生)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고 이와 같이, 생(生)·유(有)·취(取)·애(愛)·수(受)·촉(觸)·육입처(六入處)·명색(名色)·식(識)·행(行)은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다'고. 만일 누가 묻기를 '무엇이 곧 행(行)이며 행(行)은 무엇에게 붙어 있는가'고 하면 그는 곧 대답하리라. 행(行)은 곧 나요 행(行)은 곧 내 것이다'고. 그는 이와 같이 '명(命)은 다르고 몸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명(命)은 곧 몸이다'고 본다면 범행자는 있을 수 없을 것이요, 혹은 '명(命)은 다르고 몸은 다르다'고 말한다면 범행자는 또한 있을 수 없을 것이니 이 두 극단을 떠나면 바르게 중도로 향할 것이다. 현인과 성인은 세상에 나와 참다워서 뒤바뀌지 않고 바르게 보나니 이른바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다고 하시느니라.
모든 비구들이여, 만일 무명에서 욕심을 떠나 명(明)이 생기면 그 누가 늙고 죽을 것이며 늙고 죽음은 누구에게 붙일 것인가. 늙고 죽음이 곧 끊어지면 그 근본을 끊을 줄을 알아 타알라나무 줄기를 끊는 것 같아서 미래 세상에 있어서 나지 않는 법을 얻을 것이다. 만일 비구들이여, 무명에서 욕심을 떠나 명(明)이 생기면 그 누가 생(生)할 것이며, 생(生)은 누구에게 붙일 것인가···내지, 누가 행할 것이며 행(行)은 누구에게 붙일 것인가. 행(行)이 곧 끊어지면 그 근본을 끊을 줄 알아 타알라나무 줄거리를 끊은 것과 같아서, 미래 세상에 있어서 나지 않는 법을 얻을 것이다. 만일 비구들이여, 무명에서 욕심을 떠나 명(明)이 생기어 그 무명이 멸하면 곧 행(行)이 멸하고···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하나니 이것을 대공법경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개념정리] - 緣起의 中道實相과 치우침 없는 삶의 길 2
Ⅰ. 서론
부처님이 깨달아 우리에게 보여 준 세계는 중생들의 생사의 세계인 삼계(三界)와 삼계(三界)의 실상이 연기하는 법계(法界)임을 깨달아 성취하게 되는 생사가 없는 열반의 세계라고 한다.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은 삼계의 실상을 이야기한 것이고, 환멸문(還滅門)은 열반의 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Ⅱ. 본론
십이연기의 유전문은 무명(無明)이 있을 때 노사(老死)가 나타난다는 십이지 연기를 의미하고, 환멸문은 팔정도이다. 그리고 십이연기는 단상(斷常), 일이(一異), 유무(有無) 중도와 같은 이론적 중도의 내용이고, 팔정도는 고락(苦樂) 중도라고 하는 실천적 중도의 내용이다.
1. 단상중도(斷常中道)
잡아함 300, 961경에서 유아(有我)라고 한다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무아(無我)라고 한다면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여래는 양극단을 떠나 중도(中道)의 원리상에 불상불단(不常不斷)의 아설(我說)을 주장한다. 왜인가? 제법(諸法)은 인연소생(因緣所生)이므로 변화하고 파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상(不常)이다. 그러나 변화 파괴되더라도 또 인연에 의하여 다시 생(生)하여 상속하게 되므로 그것은 불단(不斷)이다.
이와 같이 제법도 불상불단(不常不斷)하는 형태로 무한하게 연기한다. 이것이 중도(中道)의 의의이다.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은 실무(實無). 실유(實有)가 아니라 생멸(生滅)하는 것이며, 단멸(斷滅). 상주(常住)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게 진화하는 것이다.
2. 일이중도(一異中道)
잡아함 297경에서 부처님은 영혼과 육신이 같다고 해도 해탈을 위한 수행이 있을 수 없고, 다르다고 해도 수행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자는 마음을 중도로 향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3. 유무중도(有無中道)
잡아함경 297경에서 당시의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서 나의 몸과 목숨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몸과 목숨이 같다는 일견가(一見家)와 다르다는 이견가(異見家)가 있었는데, 이 둘은 모두 모순이고 중도의 이치를 모르는 고집일 뿐이라고 한다.
4. 고락중도(苦樂中道)
석존께서 오비구(五比丘)에게 고행(苦行)을 버리게 하고, 또 반대인 안락행(安樂行)도 도법(道法)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수행법인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행(中道行)을 역설한 것이 팔정도(八正道)이다.
이것은 결코 고락(苦樂)의 중간이나 중용(中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당시 인도사회의 이대(二大)사상(思想)인 일반 사문들의 수행인 고행(積娶設)과 정통 바라문의 수행법인 수정주의(修定主義)을 버리고 특유의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행(中道行) 즉 팔정도(八正道)를 설한 것을 말한다.
잡아함경 287경에서는 실천적인 중도인 고락중도는 바로 팔정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12연기의 환멸문의 역관을 통해 발견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Ⅲ. 결론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한마디로 중도(中道)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중도의 입장에서 십이연기라는 중생의 삶을 통해 삼계(三界)라고 하는 생사의 세계가 나타나고 있음을 깨달았고, 팔정도라고 하는 중도의 실천을 통해 생사가 사라진 열반을 증득하였다.
참고문헌
불교의 이해와 실천 1, 이중표 著. 158.p ~ 197.p
불교의 이해와 실천 2, 이중표 著. 112.p ~ 113.p
제11장 업(業)과 윤회(輪廻)
제1039 순타경(純陀經)
(一 三九)如是我聞.一時.佛住王舍城金師精舍.時.有淳陀長者來詣佛所.稽首佛足.退坐一面.爾時.世尊問淳陀長者.汝今愛樂何等沙門·婆羅門淨行.淳陀白佛.有沙門·婆羅門.奉事於水.事毘濕波天.執杖 罐.常淨其手.如是正士能善說法言.善男子.月十五日.以胡麻屑·菴摩羅屑以 其髮.修行齋法.被着新淨長髮白[疊*毛].牛糞塗地而臥其上.善男子.晨朝早起.以手觸地.作如是言.此地淸淨.我如是淨手.執牛糞團幷把生草.口說是言.此是淸淨.我如是淨.若如是者.見爲淸淨.不如是者.永不淸淨.世尊.如是像類沙門·婆羅門.若爲淸淨.我所宗仰.佛告淳陀.有 法· 報.不淨·不淨果.負重向下.成就如此諸惡法者.雖復晨朝早起.以手觸地.唱言淸淨.猶是不淨.正復不觸.亦不淸淨.執牛糞團.幷及生草.唱言淸淨.亦復不淨.正復不觸.亦不淸淨.淳陀.何等爲 · 報.不淨·不淨果.負重向下.乃至觸以不觸.悉皆不淨.淳陀.謂殺生惡業.手常血腥.心常思惟 殺害.無 無愧. 貪吝惜.於一切衆生乃至昆蟲.不離於殺.於他財物·聚落·空地.皆不離盜.行諸邪 .若父母·兄弟· 妹·夫主·親族.乃至授花 者.如是等護.以力强干.不離邪 .不實妄語.或於王家·眞實言家·多衆聚集.求當言處.作不實說.不見言見.見言不見.不聞言聞.聞言不聞.知言不知.不知言知.因自因他.或因財利.知而妄語.而不捨離.是名妄語.兩舌乖離.傳此向彼.傳彼向此.遍相破壞.令和合者離.離者歡喜.是名兩舌.不離惡口罵.若人軟語說.悅耳心喜.方正易知.樂聞無依說.多人愛念.適意·隨順三昧捨.如是等而作剛强.多人所惡.不愛·不適意·不順三昧說.如是等言.不離 .是名惡心.綺飾壞語.不時言·不實言·無義言·非法言·不思言.如是等.名壞語.不捨離貪.於他財物而起貪欲.言.此物我有者.好不捨.瞋 弊惡.心思惟言.彼衆生應縛·應鞭·應伏·應殺.欲爲生難.不捨邪見顚倒.如是見·如是說.無施·無報·無福.無善行惡行·無善惡業果報.無此世·無他世.無父母·無衆生生世間.無世阿羅漢等趣等向此世他世自知作證.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淳陀.是名·報.不淨·不淨果.乃至觸以不觸.皆悉不淨.淳陀.有白·白報.淨有·淨果.輕仙上昇.成就已.晨朝觸地.此淨我淨者.亦得淸淨.若不觸者.亦得淸淨.把牛糞團.手執生草.淨因淨果者.執與不執.亦得淸淨.淳陀.何等爲白·白報.乃至執以不執.亦得淸淨.謂有人不殺生.離殺生.捨刀杖. 愧.悲念一切衆生.不偸盜.遠離偸盜.與者取.不與不取.淨心不貪.離於邪 .若父母護.乃至授一花 者.悉不强干起於邪 .離於妄語.審諦實說.遠離兩舌.不傳此向彼.傳彼向此.共相破壞.離者令和.和者隨喜.遠離惡口.不剛强.多人樂其所說.離於壞語.諦說·時說·實說·義說·法說·見說.離於貪欲.不於他財·他衆具作己有想.而生貪着.離於瞋 .不作是念. 打縛殺.爲作衆難.正見成就.不顚倒見.有施·有說報·有福.有善惡行果報.有此世.有父母·有衆生生.有世阿羅漢於此世他世現法自知作證.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淳陀.是名白·白報.乃至觸與不觸.皆悉淸淨.爾時.淳陀長者聞佛所說.歡喜隨喜.作禮而去
제1039. 순타경(純陀經)
신수장경 : 2-271b
한글장경 : 잡-3-85
남전장경 : A. 10-176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 금사정사에 계셨다. 때에 순타 장자는 부처님께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한 쪽에 물러앉았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순타 장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지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의 깨끗한 행(行)을 좋아하는가?"
순타는 부처님에게 아뢰었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물을 섬기고 비슈파천을 섬기는데, 지팡이를 짚고 물통을 들고 항상 그 손을 깨끗이 하나이다. 그 정사들은 잘 설법하나이다. 즉 '선남자(善男子)여, 매달 보름날에 호마 가루나 암마라 가루로 머리를 감고 제법(薺法)을 행하고, 새롭고 깨끗한 긴 털로 된 흰 천을 감고, 쇠똥을 땅에 바르고, 그 위에 누워라. 선남자(善男子)여, 새벽에 일찍 일어나 손을 땅에 대고 이렇게 말하라. 이 땅은 청정하다. 나는 이 깨끗한 손으로 쇠똥덩이와 풀을 잡는다'고. 그리고 입으로 이렇게 말하라. '이것은 청정하다. 나도 이렇게 깨끗하다고. 만일 그렇게 하면 생각이 청정하게 되지마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청정해지지 않을 것이다'고. 부처님이시여, 만일 이런 부류의 사문이나 바라문이 청정하다면 나는 그들을 숭앙하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순타 에게 말씀하셨다.
"검은 법에는 검은 보(報)가 있고, 더러움에는 더러운 결과가 있으며, 무거운 것을 지으면 구부러지는 것이다. 그러한 나쁜 법을 익히면 아무리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 손을 땅에 대고 청정하다고 외쳐도 그것은 더러운 것이요, 땅에 대지 않더라도 또한 더러운 것이다. 또 쇠똥덩이나 풀을 잡고 청정하다고 외치더라도 그것 또한 더러운 것이요, 대지 않더라도 더러운 것이다.
순타여, '검은 법에는 검은 보(報)가 있고, 더러움에는 더러운 결과가 있으며, 무거운 것을 지면 구부러지고 내지, 대거나 대지 않거나 다 더럽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순타여, 살생(殺生)하는 나쁜 업(業)이니 손은 언제나 피비린내가 나고, 마음은 항상 때리고 죽이기를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나 남에게도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고, 탐내고 아끼며, 일체 중생 내지, 곤충들에까지도 살생하기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부락이나 한데서 남의 재물을 훔치는 것(偸盜)이다. 온갖 음행(邪 )을 행하는 것이니 부모·형제·자매·남편·주인·친척이 힘으로 보호하는 여자나 내지, 기생까지도 억지로 구해 음행을 행한다. 진실하지 않은 거짓말이니, 왕의 집을 내 집이라 진실인 듯 말하고, 대중이 많이 모인 곳을 찾아 거짓말을 퍼뜨린다.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 하고, 본 것을 보지 않았다 하며, 듣지 않은 것을 들었다 하고, 들은 것을 듣지 않았다 하며, 아는 것을 모른다 하고, 모르는 것을 안다 하며,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혹은 재물을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해 거짓말을 버리지 못한다. 이것을 망어(妄語)이라 한다.
두 가지 말로 이간하는 것이니, 저 사람에게는 이 말을 전하고, 이 사람에게는 저 말을 전하여, 양쪽을 다 헐뜯어 친한 사이를 벌어지게 하고, 벌어지면 기뻐한다. 이것을 양설(兩舌)이라 한다. 악구(惡口)를 버리지 않고 욕을 하며, 만일 사람이 부드러운 말로 말하면 귀에도 즐겁고 마음도 기쁘며, 바르고 떳떳해 알기도 쉬우며, 뽐냄이 없는 말은 듣기도 즐겁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고 그 뜻에 맞아 고요한 마음을 해치지 않는다. 그러하거늘, 만일 거칠고 사나우면 사람들은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며, 그 뜻에도 맞지 않아 고요한 마음을 거슬린다. 이런 말은 거칠고 딱딱함을 떠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을 나쁜 말이라 하느니라.
꾸미어 무너지는 말이니(綺語) 때아닌 말, 진실하지 않은 말, 뜻이 없는 말, 법이 아닌 말, 요령이 없는 말이다. 이것을 무너지는 말이라 한다.
탐욕을 떠나지 못함이니(貪), 남의 재물에 탐욕을 일으켜 이것은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내고 모질기를 좋아해 버리지 않는 것이니(瞋),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저 중생은 결박해야 한다. 때려야 한다. 항복 받고 죽여야 한다'고. 그리하여 사건이 생기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삿 된 소견과 착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니(痴), 이렇게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즉 '보시도 없고 갚음도 없으며, 복도 없고, 착한 행이나 악한 행도 없고, 착하거나 악한 업의 결과와 갚음도 없으며,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으며, 부모도 없고 중생이 세상에 나는 일도 없으며, 세상에는 아라한의 '같은 세계로 같이 향하여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 스스로 증득한 줄을 알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생의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스스로 안다는 것도 없다.'고.
순타여, "검은 법에는 검은 갚음이 있고, 더러움에는 더러운 결과가 있으며 내지, 대거나 대지 않는 것이 다 더러운 것"이란 이런 것을 말하느니라.
순타여, 흰 법에는 흰 보(報)가 있고 깨끗함에는 깨끗한 결과가 있다. 가벼운 신선으로 위로 오르기를 성취한 뒤에는 이른 아침에 땅에 손을 대고 '이것도 깨끗하고 나도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청정할 것이요, 대지 않더라도 청정할 것이다. 쇠똥이나 풀을 잡더라도 인(因)이 깨끗하고 결과가 깨끗하면 잡거나 잡지 않거나 다 청정할 것이다.
순타여, '흰 법에는 흰 보(報)가 있고 내지, 잡거나 잡지 않거나 다 청정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사람이 살생(殺生)하지 않고 살생을 떠나는 것이니, 칼이나 막대기를 버리고 부끄러워할 줄 알며, 일체 중생을 가엾이 생각하는 것이다. 투도(偸盜)하지 않고 도둑질을 떠나는 것이니, 주는 것은 가지고 주지 않는 것은 가지지 않으며, 깨끗한 마음으로 탐하지 않는 것이다. 사음(邪 )을 떠나는 것이니, 부모가 보호하고 내지, 기생까지도 억지로 구해 음행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망어(妄語)를 떠나는 것이니, 자세하고 진실히 말하는 것이다. 양설(兩舌)을 떠나는 것이니, 이 말을 저기에 전하거나 저 말을 여기에 전해 양쪽을 다 헐뜯지 않아, 사이가 벌어진 사람은 친하게 하고 친하면 따라서 기뻐하는 것이다.
악구(惡口)를 떠나 거칠거나 사납지 않은 것이니, 사람들은 그 말을 즐겨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괴어(壞語)를 떠나는 것이니, 자세한 말, 때에 맞는 말, 진실한 말, 뜻 있는 말, 보고하는 말이다. 탐욕(貪欲)을 떠나는 것이니, 남의 재물이나 남의 기구를 보고 자기 소유라는 생각을 내어 탐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성냄(瞋)을 떠나는 것이니, '때리고 결박하고 죽이어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자'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바른 소견을 성취하여 착각하지 않는 것이니, 보시도 있고 주장도 있으며, 갚음도 있고 복(福)도 있으며, 착하고 악한 행의 결과와 보(報)도 있고, 이 세상도 있고 부모도 있고 중생의 남도 있으며, 세상에는 아라한의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현재에서 스스로 증득한 줄을 알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생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스스로 안다' 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순타여, 이것이 '흰 법에는 흰 보(報)가 있고, 내지 대거나 대지 않거나 다 청정하다'는 것이니라."
그 때에 순타 장자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
A. 10-176. Cunda the silversmith.
Once the Exalted One was staying at P v in the mango grove of Cunda, the son of the silversmith.
Now Cunda, son of the silversmith, came to see the Exalted One, and on coming to him saluted him and sat down at one side. So seated the Exalted One said this to him :
'Cunda, in whose purifying rites do you find satisfaction ?'
'Sir, the br himins of the west who carry waterpots and wear lily-garlands, who are purifiers by water, fire-worshippers, enjoin purifying rites. In those I find satisfaction.'
'In what way, Cunda, do those br hmins who carry waterpots . . . enjoin their purifying rites ?'
'Herein, sir, those br hmins who carry waterpots . . . thus instruct a follower : "Come now, good fellow, rise up in good time from your bed and touch the ground. If you do not touch the ground, touch wet cowdung. If you do not do that, thuch green grass; if not that, worship fire; if not that, adore the sun with clasped hands; if not that, descend into water for the third time in the evening." Thus, sir, do the br hmins who carry waterpots . . . who go down into water, enjoin purifying rites. In them do I find satisfaction.'
'Well, Cunda, the purifying rites enjoined by those br hmins are quite different from the purification in the discipline of the Ariyan.'
'In what way, sir, is there purification in the discipline of the Ariyan ? Well for me, sir, if the Exalted One would teach me dhamma about the discipline of the Ariyan.'
'Then, Cunda, do you listen. Pay attention carefully and I will speak.'
'I will, sir,' replied Cunda, the son of the silversmith, to the Exalted One, who said this:
'Threefold, Cunda, is defilement by body; fourfold is defilement by speech; threefold is defilement by thought. And how is defilement by body threefold ?
Herein, Cunda, a certain one takes life, he is a hunter, bloody-handed, given up to killing and slaying, void of compassion for all living creatures. A certain one takes what is not given; he takes with thievish intent things not given to him, the property of another person, situated in jungle or in village. In sexual desires he is a wrong-doer; he has intercourse with girls in ward of mother or father, brother, sister or relatives (or clan); with girls lawfully guarded, already pledged to a husband and protected by the rod, even with girls crowned with the flower-garland (of betrothal). Thus, Cunda, threefold is defilement by body.
Herein again, Cunda, a certain one is a liar. When cited to appear before the council or a company or amid his relatives or guild-men or before the royal family and asked to bear witness with the words: "Come, good fellow! Say what you know," though he knows not, he says, "I know"; though he knows, he says, "I know not"; though he has not seen, he says he saw; though he saw, he denies it. Thus for his own sake or that of others or to get some carnal profit or other he deliberately utters falsehood.
Also he is a slanderer. Hearing something at one place he proclaims it somewhere else to bring about a quarrel between the parties; what he has heard here he repeats there to bring about a quarrel between the parties. Thus he breaks up harmony, foments strife between those discordant, discord is his delight; exulting in and passionately fond of discord, he utters speech that makes for discord.
Also he is of harsh speech. Whatsoever speech is rough, cutting, bitter about others, abusive of others, provoking wrath and conducive to distraction - such speech does he utter. He is given to idle babble, he speaks out of season, speaks unrealities; he speaks things unprofitable, what is not-dhamma and not-discipline; he utters speech not worth treasuring up, speech unreasonable and not worth listening to, undiscriminating and unconcerned with profit.
Thus, Cunda, defilement by speech is fourfold.
And how is defilement by mind threefold ?
Herein, Cunda, a certain one is covetous, he is one who covets the property of another, thinking: O that what is another's were mine ! He is malevolent of heart, the thoughts of his heart are corrupt, thus: Let these beings be slain, come to destruction, be destroyed, not exist at all. Also he has wrong view, he is perverse in outlook, holding: There is no gift, no offering, no sacrifice; there is no fruit or ripening of deeds well done or ill done; this world is not, the world beyond is not: there is no mother, no father, no beings supernaturally born; there are no recluses and br hmins in the world who have gone right, who fare rightly, men who by their own comprehension have realized this world and the world beyond and thus declare.
Thus, Cunda, defilement by mind is threefold.
Cunda, there are those ten ways of wrong action.
One characterized by those ten ways of wrong action may rise up early and at eventide touch the earth, yet is he still impure. Even if he touch not the earth he is equally impure. Though he handle cowdung he is impure. Even if he does not he is equally impure. He may handle green grasses or not, he is equally impure. He may handle green grasses or not, he is impure just the same. He may worship the fire or not . . . he may clasp his hands and bow to the sun or not . . . he may descend in the evening into water for the third time or not, yet is he still impure. What is the cause of that ? Those ten ways of wrong action, "Cunda, are impure and cause impurity. Moreover, as a result of being characterized by those ten ways of wrong action, purgatory is declared, birth in the womb of animals is declared, the realm of ghosts is declared, either that or some other form of ill-bourn.
But, Cunda, threefold is cleansing by cody, fourfold is cleansing by speech, threefold is cleansing by mind. And how is cleansing by body threefold ?
Herein, Cunda, a certain one abandons taking life, abstains therefrom; he has laid aside the rod, has laid aside the knife; he dwells modest, charitable, feeling compassion towards every living creature.
He abandons taking what is not given, abstains therefrom; the property of another, situated in jungle or in village, if not given, he takes not with thievish intent.
In sexual desires he abandons wrong action, abstains therefrom. He has no intercourse with girls in ward of mother or father, of brother, sister or relatives (or clan), with girls lawfully guarded, already plighted to a husband and protected by the rod, even with girls crowned with the flower garlands (of betrothal). Thus, Cunds, threefold is cleansing by body.
Abandoning slanderous speech he abstains therefrom. When he hears something at one place he does not proclaim it elsewhere to bring about a quarrel between the parties; what he has heard here he does not report there to bring about a quarrel between the parties; thus he brings together the discordant, restores harmony, harmony is his delight, he exults in, is passionately fond of harmony; he utters speech that makes for harmony. Also he abandons harsh speech, abstains therefrom. Whatsoever speech is blameless, pleasant to the ear, affectionate, going to the heart, urbane, agreeable to many folk, delightful to many folk, of such speech he is a speaker. Also abandoning idle babble he abstains therefrom; he speaks in season. of facts, of the aim, of dhamma, of discipline; he utters speech worth treasuring up, speech seasonable and worth listening to, discriminating and concerned with the aim.
Thus, Cunda, fourfold is cleansing by speech.
And how is cleansing by mind threefold ?
Herein a certain one is not covetous; he covets not the property of another, thinking: O that what is another's were mine ! He is not malevolent of heart, the thoughts of his heart are not corrupt. He wishes: Let these beings carry about the self in peace, free from enmity, free from sorrow and in happiness.
Also he has right view; he is reasonable in outlook, holding that there are such things as gift, offering, oblation, fruit and ripening of deeds done well or ill; that this world is, that the world beyond is; that mother, father and beings of supernatural birth (in other worlds) do exist; that there are in the world recluses and br hmins who have gone rightly, who fare rightly, men who of their own comprehension have realized this world and the world beyond and thus declare it.
Thus, Cunda, threefold is the cleansing by the mind.
So those are the ten ways of right doing. One characterized by those ten ways may rise up early and at evening touch the earth, yet is he pure. If he touch not the earth, yet is he pure. Whether he handle cowdung or not . . . whether he handle green grasses or not . . . whether he worship the fire or not . . . Whether he clasp his hands and bow down to the sun or not . . . whether he descend in the evening into water for the third time or not, yet is he pure for all that. and why so ?
Because, Cunda, those ten ways of right action are pure and work purity. By being characterized by those ten ways of right action (the state of) devahood is proclaimed, of mankind is proclaimed, or whatsoever other happy bourn there be.'
At these words Cunda, the son of the silversmith, exclaimed to the Exalted One: 'It is excellent, sir ! Let the Exalted One reckon me a follower of his from this day forth as long as life shall last, as one who has so gone to him as resort.'
A. 10-176. 은 세공사 춘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은 세공사의 아들 춘다의 망고 숲의 파바에 계셨다. 은 세공사의 아들 춘다는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부처님에게 인사하고 한 쪽에 물러앉았다.
그렇게 앉은 다음 세존께서는 춘다 에게 이야기 물으셨다.
"춘다여 너는 누구의 정화의식에 만족감을 갖는가?"
네, 세존이시여, 저는 서쪽의 바라문이 물통과 백합의 화환을 지니고, 물로서 깨끗이 하고, 불을 섬기고, 정화의식을 즐기는 그들 속에서 만족감을 갖습니다.
춘다여 그들 바라문은 물통을 지니고 .... 그들의 정화의식을 즐기는 것은 어떤 길인가.?
세존이시여, 그들 바라문은 물통을 지니고 ... 이렇게 수행자들을 가르칩니다 ; "지금 오라. 좋은 수행이 있다. 너의 잠자리에서 좋은 시간에 일어나 땅을 짚어라. 만약 너희가 땅을 짚지 않는다면 젖은 소똥을 만져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푸른 풀을 만져라. 그렇지 않으면 불을 섬겨라. 그렇지 않으면 손을 모으고 태양에 기도하라. 그렇지 않으면 저녁시간에 3번 물에 들어가라." 이와 같이 브라만들은 물통을 지니고 ... 물에 들어가 정화의식을 즐깁니다. 나는 그들의 정화의식에서 만족을 찾습니다.
춘다여. 그들 브라만의 정화의식은 다문성제자(多聞聖弟子)의 정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세존이시여. 다문성제자의 정화는 어떤 식으로 하는 것입니까? 나를 위해 다문성제자의 정화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춘다여 들어라. 나는 설할 것이다. 주의 깊게 들어라.
세공사의 아들 춘다는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몸(身)에 의한 3가지 악업(惡業)이 있고, 말(口)에 의한 4가지 악업이 있고, 생각(意)에 의한 3가지 악업이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이 몸에 의한 3가지 악업인가?
살생(殺生)하는 것이니, 그는 사냥꾼이고, 손에서는 피비린내가 나고, 살해하는 것과 죽이는 것에 몸을 맡기고,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에 대한 자비심이 없는 것이다.
남이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이니(偸盜), 마을이나 정글에 있는 다른 사람의 재산을 훔치는 것이다.
성적욕구에 의해 그릇된 행위를 하는 것이니(邪 ), 그는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가족의 보호를 받는 여자, 이미 남편에게 서약한 여자, 장대에 의해 보호받는 여자(건드리면 막대기로 처벌받는 여자), 기녀(꽃 화관을 쓴) 와 성교를 한다. 춘다여, 이것이 몸에 의한 3가지 악업이다.
어떤 것이 말에 의한 4가지 악업(惡業)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니(妄語) 회의나 모임, 그와 관계가 있는 여러 곳에 가서 말로서 증언한다. 아는 것을 모른다하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고,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하고,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그의 자신을 위하거나 다른 것을 목적으로 또는 육체적인 이익을 위해서나 다른 것을 위해 그는 계획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또한 그는 비방을 한다(兩舌). 어떤 장소에서 들은 모임들의 싸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모임 사이의 싸움에 대하여 퍼트린다. 그렇게 그는 조화를 깨트리고, 그들 싸우는 자들 사이에서 싸움을 조장한다, 불화는 그의 기쁨이고, 크게 기뻐하고 불화를 좋아하여, 불화를 조장하기 위해 말을 만들어 퍼트린다.
또한 그는 거친 말을 한다(惡口). 누구에게나 거칠고, 날카롭고, 다른 사람에게 모질고, 다른 사람을 매도하고, 분노하여 짜증내고, 산만하게 하는 그런 말을 한다. 그는 쓸데없는 말과 때 아닌 때 말하고(綺語), 비현실적인 말을 하는데, 그는 허튼 소리를 하고, 법답지 않고 훈련되지 않은 말을 한다. 그의 말은 가치가 없고, 비합리적이고 들을 수 없고, 이익이 없다.
이런 것이 말에 의하여 오염되는 4가지 악업(惡業)이다.
어떤 것이 마음에 의해 더럽혀 지는 3가지 악업(惡業)인가?
이렇게 탐내는 것이니(貪), 생각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것을 나의 것이라고 한다. 그는 마음이 악의가 있어(瞋) 그의 마음은 부정한 생각을 하는데, 죽이는 것, 파멸이 오는 것, 파괴하는 것, 모든 존재를 없애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사악한 예측을 가지고 있다. 보시하지 않고, 봉헌하지 않고 그들은 잘한 행위나 악행에 의한 과(果)가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초자연적인 태어남도 없고, 속세를 떠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은둔자나 브라만의 세계에서 진리도 없고 정의나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 실현되는 것도 없다고 말한다.
춘다여, 이것이 마음에 의해 더럽혀지는 3가지 악업(惡業)이다.
춘다여. 10악업(惡業)이 있다. 10악업의 특성은 일찍 일어나 저녁 무렵에 땅을 짚더라도 깨끗하지 않다. 만약 땅을 짚지 않더라도 깨끗하지 않다. 그의 손에 소똥을 만지더라도 깨끗하지 않다. 만약 그의 손에 소똥을 만지지 않더라고 깨끗하지 않다. 그는 푸른 풀을 손에 잡거나 잡지 않거나, 그는 깨끗하지 않다. 그는 불을 섬기거나 섬기지 않거나 .... 그는 저녁 무렵에 3번 물속에 들어가 들어가지 않거나, 그는 아직 깨끗하지 않다. 이것은 어떤 경우인가? 10악업은 깨끗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경우이다. 이런 10악업에 의해 시작한 것들의 결과는 고통의 세계이고, 동물의 자궁안에 태어나고, 유령의 계(界)에 태어난다.
그러나 춘다여 몸에 의한 3가지 선업(善業), 말에 의한 4가지 선업, 마음에 의한 3가지 선업이 있다. 어떤 것이 몸에 의한 3가지 선업인가?
지금부터 살생하기를 단념하고, 삼가라. 그는 부처님의 곁에 눕고, 칼의 곁에서 누워 겸손하게 살고, 자비롭게 살고, 모든 생물을 자비롭게 대하라.
남이 주지 않는 것을 취하거나 마을이나 정글에 있는 다른 사람의 재산을 훔치지 말라.
성적욕구에 의해 그릇된 행위를 버리고 그것들로부터 삼가라. 그는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가족의 보호를 받는 여자, 이미 남편에게 서약한 여자, 장대에 의해 보호받고 여자(건드리면 막대기로 처벌받는 여자), 기녀(꽃 화관을 쓴) 와 성교를 삼가하라. 춘다여, 이것이 몸에 의한 3가지 선업이다.
이후로는 비방하는 말을 하지 말라. 어떤 장소에서 들은 모임들의 싸움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말라. 그는 모임사이의 싸움에 대하여 퍼트리지 말다. 그렇게 그는 화해시키고, 그들 싸우는 자들 사이에서 화합을 조장하고, 화합은 그의 기쁨이고, 크게 기뻐하고 화합을 좋아하여, 화합시키기 위해 말을 하라.
또한 다음부터는 거친 말을 버려라. 누구에게나 결백하고, 귀를 기쁘게 하고, 다정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많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그런 말을 하라.
그리고 또한 쓸데없는 말을 버려라. 때에 말하고 사실을 말하라. 성스런 제자의 말은 가치가 있고, 적당하고 듣기 좋고, 식별이 있고 걱정하는 말을 하라.
이것이 말에 의한 3가지 선업이다.
어떤 것이 마음에 의한 3가지 선업인가?
이렇게 탐내는 것을 버려라, 생각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냄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것을 나의 것이다. 그는 마음에 악의를 없애고 그의 마음은 부정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증오로부터 자유롭고, 슬픔으로부터 자유롭고, 행복하다.
또한 그는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예측을 가지고 있다. 보시하고, 봉헌하고 그들은 잘한 행위나 악행에 의한 과(果)가 있고,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고,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초자연적인 태어남도 있고, 속세의 떠남도 있고 그리고 은둔자나 브라만의 세계에서 진리도 있고 정의나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 실현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마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3가지 선업이다.
이것들이 10선업이다. 10선업의 특성은 일찍 일어나 저녁 무렵에 땅을 짚더라도 깨끗하고, 땅을 짚지 않더라고 깨끗하다. 그는 소똥을 만지거나 만지지 않거나 ..... 푸른 풀을 만지거나 만지지 않거나... 불을 섬기거나 섬기지 않거나 저녁 무렵에 3번 물속에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않거나 모두 깨끗하다. 왜 그런가?
10선업을 깨끗하고 깨끗한 일이기 때문이다. 10선업에 의해서 천계(天界)를 선언하고, 인류를 선언하고, 다른 행복한 세상에 태어난다.
은 세공자의 아들 춘다는 부처님께 외쳤다. 부처님의 설법을 수승하다. 앞으로 마지막 생까지 부처님의 무리로 받아주시면 승가에 의지할 것입니다.
제1044 비뉴다라경( 紐多羅經)
(一 四四)如是我聞.一時.佛住在拘薩羅人間遊行.至 紐多羅聚落北身恕林中住. 紐多羅聚落婆羅門長者聞世尊住聚落北身恕林中.聞已.共相招引.往詣身恕林.至世尊所.面相慰勞已.退坐一面.爾時.世尊告婆羅門長者.我當爲說自通之法.諦聽.善思.何等自通之法.謂聖弟子作如是學.我作是念.若有欲殺我者.我不喜.我若所不喜.他亦如是.云何殺彼.作是覺已.受不殺生.不樂殺生.如上說.我若不喜人盜於我.他亦不喜.我云何盜他.是故持不盜戒.不樂於盜.如上說.我旣不喜人侵我妻.他亦不喜.我今云何侵人妻婦.是故受持不他 戒.如上說.我尙不喜爲人所欺.他亦如是.云何欺他.是故受持不妄語戒.如上說.我尙不喜他人離我親友.他亦如是.我今云何離他親友.是故不行兩舌.我尙不喜人加 言.他亦如是.云何於他而起罵辱.是故於他不行惡口.如上說.我尙不喜人作綺語.他亦如是.云何於他而作綺語.是故於他不行綺飾.如上說.如是七種.名爲聖戒.又復於佛不壞淨成就.於法·僧不壞淨成就.是名聖弟子四不壞淨成就.自現前觀察.能自記說.我地獄盡.畜生·餓鬼盡.一切惡趣盡.得須陀洹.不墮惡趣法.決定正向三菩提.七有天人往生.究竟苦邊.時. 紐聚落婆羅門長者聞佛所說.歡喜隨喜.從坐起而去
1044. 비뉴다라경( 紐多羅經)
신수장경 : 2-273b
한글장경 : 잡-3-92
남전장경 : S. 55-7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코살라국 세간에 노니시다가 벨루드바레야 촌 북쪽에 있는 심사파 숲에 와 계셨다. 때에 벨루드바레야 촌의 바라문 장자들은 세존께서 그 촌락 북쪽에 있는 심사파 숲속에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서로 불러 심사파 숲으로 가서 세존께 나아가 문안한 뒤 한 쪽에 물러나 앉았다. 그 때 세존께서는 바라문 장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스스로 통하는 법(法)을 설명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어떤 것이 스스로 통하는 법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이렇게 공부하여야 한다. 즉 '나는 생각한다. 만일 누가 나를 죽이려 하면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면 남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죽이겠는가'고. 이렇게 생각하고는 살생하지 않는 계율을 받고 살생을 즐겨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내가 만일 남이 내 물건 훔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남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남의 물건을 훔치겠는가'고. 그러므로 훔치지 않는 계율을 받고 훔치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내가 만일 남이 내 아내 침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남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남의 아내를 침범하겠는가'고. 그러므로 음행하지 않는 계율을 받아 가지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나도 남에게 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속이겠는가'고. 그러므로 거짓말하지 않는 계율을 받아 가지는 것이다. 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나도 남이 내 친우를 갈라지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내 어떻게 남의 친우를 갈라지게 하겠는가'고. 그러므로 두 가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도 남이 내게 나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도 그런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에게 욕지거리를 하겠는가'고. 그러므로 나에게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나도 남이 내게 꾸밈말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에게 꾸밈말을 쓰겠는가'고. 그러므로 남에게 꾸밈말을 쓰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이러한 일곱 가지를 거룩한 계율이라 하느니라.
다시 부처님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성취하고, 법과 승가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성취하면, 이것이 성인 제자의 네 가지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의 성취이니라.
만일 이러한 것들을 현실로 관찰할 수 있으면 능히 스스로 '내 지옥은 끝나고, 축생과 아귀가 끝나고, 일체의 나쁜 세계가 없어지고 수다원을 얻어 나쁜 세계의 법에 떨어지지 않고 결정코 삼보리로 바로 향해 일곱번 천상 인간에 태어났다가 마침내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나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니라."
때에 벨루드바레야 촌의 바라문 장자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개념정리] - 업(業)과 윤회(輪廻)
Ⅰ. 서론
업(業)은 범어 karman의 번역으로 갈마라 음역한다. 조작[造作]. 행위. 소작[所作]. 의지에 의한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항상 자신을 업론자(業論者), 행위론자(行爲論者), 정진론자(精進論者)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불교의 기본목적인 인간고의 궁극적 해결에 업설이 상당한 몫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Ⅱ. 본론
1. 업(業)의 분류
일반적으로 업은 신업(身業). 의업(意業). 구업(口業)으로 구분한다. 유부의 해석에 따르면 어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의업[意業]이고, 그 의지를 신체적 행동과 언어적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라 한다.
또한 업을 의지의 활동인 사업(思業)과 사업이 끝나고서 행하는 사이업(思已業)으로 구분한다. 이 경우 사업은 의업(意業)이고, 사이업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다. 삼업(三業)의 작용의 본체(業體. 業性)에 대해 유부 등에선 의업은 사(思. 의지), 신 .구업은 색법(色法: 물질적인 것)이라 한다. 경량부나 대승에선 모두 사(思. 의지)라 한다. 유부에선 물질적인 것을 본체로 삼는 색업(色業: 身業, 口業)으로서 표업(表業: 作과 敎)과 무표업(無表業: 無作,無敎)이 있다고 한다. 표업은 외부로 표현되어 타인이 불 수 있는 것이며, 무표업은 타인이 볼 수 없는 것이다. 무표업은 무표색(無表色)이라 부르는 일종의 색법을 본체로 삼고, 강한 선악법에 의해 일어나는데 신표업. 구표업. 정(定)이 여기에 속한다.
선악의 업을 지으며 이것이 업인(業因)이 되어 업과(業果)가 생긴다. 선도 악도 아닌 무기업은 과보를 이끄는 힘이 없다. 이 업인과 업과의 관계를 유부에선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 표현한다.
그리고 착한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악한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선과 악 어느 것도 아닌 무기심에 의해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을 삼성업(三性業)이라 한다. 업은 과보를 받는 시기에 따라 순현업(順現業). 순생업(順生業). 순후업(順後業)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
또한 중생이 고락의 과보를 받도록 인도하는 것을 업도(業道)라 하는데 여기에 십선업도(十善業道)와 십악업도(十惡業道)가 있다.
2. 인도의 윤회와 업
윤회사상은 인도인들의 독특한 발상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현실에서의 육신이 사라진 후에도 영원한 삶이 있길 희구한 것은 인도인만이 아닌 인류의 공통된 심정이다. 따지고 보면 영원한 삶에 대한 희구가 종교를 탄생시켰다. 어느 종교나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제시한다. 그 사후의 세계는 크게 두 종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온통 행복으로 가득찬 낙원이고, 다른 하나는 지독한 고통만이 계속되는 연옥이다. 따라서 사후에 낙원에 태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종교가 요구하는 바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하여 현실사회에서의 인간행위와 사후세계의 여러 양상을 연결시킴으로써 인간의 행위를 자발적으로 규율코자 한 것이 인도에서 발전된 업과 윤회의 사상이다. 그래서 인간은 현실세계의 행위에 따라 사후에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아 다양한 모습의 생명체로서 다양한 세계에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사후에 다시 지상에 태어날 수도 있고 달이나 태양을 포함한 천상에 태어날 수도 있다. 또는 조상들의 세계나, 신들의 세계에 태어날 수도 있다. 또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은 식물일 수도 있고 가축일 수도 있으며,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그 신분 역시 이전의 세상과는 다르다. 어떤 사후세계는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의 행위에 따라 또 그 다음 세상으로 계속 연결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輪廻)라고 한다. 인간은 이러저러한 세상을 수레바퀴가 돌아가듯이 계속 맴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윤회의 원어인 삼사라(SamSara)라는 말은 '흐르다' '움직이다'는 뜻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흘러 맴돈다'는 뜻으로서 유전(流轉)이라고도 번역된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윤회의 세계는 번뇌로 더럽혀진 인간의 생존이기 때문에, 윤회를 생사(生死)라고도 표현한다.
다른 종교의 내세관과 윤회라고 불리는 인도의 내세관이 크게 다른 점은 내세가 일회적이냐 연속적이냐 하는 점에 있다. 그 발상은 동일하지만, 기독교의 예로써 알 수 있듯이 일반 종교의 내세관은 인간의 영혼이 사후에 천국이나 연옥의 어느 한 곳에서 더 이상 다른 세계로 나아가지 않지만, 인도의 내세관은 그 영혼이 다양한 모습을 취하면서 영원히 다양한 세계를 전전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의 내세관은 종말론이지만, 인도의 내세관은 순환론이다. 현실의 세계보다 더 좋은 세계를 전전하기 위해서는 그때 그때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인도의 전통적 신앙에 의하면 인간의 사후 세계는 신들이 결정한다. 그리고 그 판단기준은 당연히 인간의 행위이다. 좋은 세계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신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그들에게 잘 보이도록 행동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을 업이라 하였던 것이다. 신들의 비위를 맞추어 좋은 사후세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최선의 행위는 조상과 신들의 은혜를 기원하고 감사하는 제사였다. 그래서 업의 원어인 까르마(karma)라는 말도 애초에는 제사를 의미하는 말로서 쓰였다. 제사와 업은 동일한 의미였다는 것인데, 이러한 영향은 불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불교에서는 의식(儀式)의 작법을 갈마( 磨)라고 하는데, 여기서 갈마란 까르마라는 말의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성립하기 이전 인간의 인지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업의 의미도 확대되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해 보다 합리적인 탐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보통 행위라든가 행동이라 할 때는 신체적으로 나타나는 동작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인도의 사상가들은 행위는 신체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도 나타나고, 더 나아가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의식이나 마음도 행위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소위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이 이것이다. 이는 매우 합당하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이었다. 행위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함으로써 업을 단순한 운명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의지의 자유라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후세계는 신들의 의지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다는 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도사상가들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이러저러한 세계를 전전하면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영혼을 구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최선의 방법은 그런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생사의 세계인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하였다. 업과 윤회에 대한 이런 고차원적 사고방식은 불교에서도 그대로 계승된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은 인도의 유신론적 차원을 탈피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었다. 인도의 기존 종교에서는 실제 윤회와 업을 받아들이는 입장이 숙명론적 차원을 크게 탈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윤회를 완전히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천상의 낙원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불교가 성립할 당시에도 일반 신앙인의 지배적인 관념이었다 따라서 부처님은 소위 생천론(生天論)이라는 기존의 관념을 채택하였다. 이를 채택함에는 보다 깊은 뜻이 있었다. 그 깊은 뜻이란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운명을 극복하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무한한 능력과 의지의 자유에 눈뜨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신앙형태에서 불교인은 업과 윤회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숙명론적 입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3. 불교적 수용
불교가 업(業)과 윤회(輪廻)의 사고방식을 채택함에 있어서는 불교의 근본교리와 배치되는 모순에 부닥치게 된다. 윤회는 영혼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는데, 불교의 무아설은 영혼과 같은 절대적 실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매우 상세한 연구로써 업을 이론화하여 업설을 정립하게 된다. 불교의 업설이 체계화되기 이전에 기존의 업설은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을 지니고 있다. 첫째, 선하거나 악한 행위는 원인이 되어 행복이나 재앙이라는 결과를 야기한다는 인과율(因果律)이다. 둘째, 행위의 세력이 그 과보를 받을 때까지는 행위자 속에 어떠한 형태로 존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째, 행위자와 그 보답을 받는 자가 동일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을 반드시 사실이라고 인식할 수는 없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의 전제이다. 자신의 행위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유한한 인간존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업이니 윤회니 하는 것은 현상으로부터 유추한 하나의 가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업설은 하나의 행위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는 것이고, 이 가정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신념과 사회적 필요성에 달려 있다. 이 업이 또 윤회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전개되어야 한다
① 행위와 결과에는 시간차가 있으므로, 과거의 행위와 곧 다가올 결과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연계가 있어야 한다.
② 죽음이 결과의 발생을 막지 못한다.
② 영혼은 업에 의해 구속된다.
④ 업의 보이지 않은 힘에 의해 영혼은 자기의 원에 어긋나더라도 하나의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이동한다.
⑤ 영혼의 자유는 과거의 업의 결과가 머물러 있는 한 저지된다.
이상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윤회와 업이 불멸의 진리로서 성립하기 위해선 어떤 행위의 영향력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불멸하는 어떤 존재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되고, 영혼의 존재 여부는 당시 사상가들의 주요 쟁점이었다. 불교는 본래부터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는 점에 교리상의 문제점이 대두되었고, 이 문제는 아직까지 근본적으로 불식되지 않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불교 내부 내부에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려 왔다. 우선 대비바사론에서는 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가장 넓은 의미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작용과 활동을 가리킨다. 따라서 업은 정신적일 수도 있고 물질적일 수도 있으나, 의지적일 수도 있고 비의지적일 수도 있다. 반드시 도덕적이기나 종교적인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다. 둘째, 단순한 일상의 행위가 아니라 규정되어 의식화된 동작이다. 업의 본래의 의미로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위로서의 업과 구별하기 위해 한역에서는 갈마라고 한다. 세째, 일반적인 의미로서 결과를 야기하는 선하거나 악한 동작이다. 즉, 윤리적 종교적 가치나 반 가치를 지니는 행위 전반이다.
구사론에서는 이러한 업의 성질과 종류를 면밀히 분석하고서, 업의 영향에 의한 연기의 법칙을 사용하였다. 이를 업감연기설이라 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공업의 존재를 주장한 점이다. 앞에서 소개하였듯이 원래 업설은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는 반드시 자기에게 돌아옴을 전제로 하나. 이 때문에 업을 더욱 숙명론적이거나 이기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좀더 냉철히 파악해 들어가면 자신의 행위는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타인의 행위 또한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으로써 알 수 있다 공업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즉, 공업은 사회 공동의 연대책임을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소속한 사회내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자신만이 아니라 연대사회가 받으며, 마찬가지로 그 사회내의 타인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 법칙이 성립하므로 개인은 자기발전을 통해 사회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며, 또 타인의 구제와 사회발전을 통해 자신의 구제와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업을 의지의 자유로서 또는 적극적으로 능동적 행위로서 이해해야 함은 이 때문이다.
영혼을 부정함으로써 야기된 윤회의 주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알라야식연기설이 대두된다. 윤회의 주체는 바로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이다. 알라야식이 행위의 모든 세력을 담고 있다가 외부로 노출되어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고 본다, 다시 여래장연기설 또는 법계연기설이 대두된다. 윤회의 주체는 결국 진여 또는 법계라고 표현되는 현상세계의 진상 자체이며, 더 이상 그 연유는 묻지 말아야 한다 고 주장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행위의 인과관계라는 법칙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을 결정하는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찌기 부처님이 비현실적인 관념적 논쟁은 무의미함을 천명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서의 가치를 불교는 업설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런 업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존재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자기창조, 또는 자기변혁의 가능성을 업설은 천명하는 것이며, 이를 확고한 신념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편으로서 불교는 윤회설을 채용한 것이다. 소위 육도 또는 육취 윤회를 제시한다. 평범한 인간들은 현세에서의 행위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계라는 여섯 세계를 맴돈다. 그러나 가능하면 이런 세계로부터 탈피하여 완전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윤회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윤회는 근본적으로 인간 의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변혁을 통해 고통의 세계인 현실이 곧바로 열반이라는 이상세계로 개조될 수 있음을 불교는 확신하고 있다. 불교의 윤회설이 인도의 다른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윤회를 인간의 내부에서 파악하였다는 점이다. 인도철학의 각 학파들은 윤회를 외적인 현상이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역시 형상체인 인간의 육체를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육체적 고행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불교는 윤회를 생명의 무한성을 상징하는 것이라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불교는 윤회를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의식 속에서 파악했던 것이다 불교에 의하면 마음은 찰나적일 것이고 가장 쉽게 움직이는 것이다. 윤회 역시 생명의 움직임인 한, 움직임을 본질로 하는 마음의 차원, 즉 의식의 차원에서 윤회는 파악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한다. 앞서 말한 대로 윤회의 주체의 문제도 인간의 의식으로써 해결되는 것이다.
Ⅲ. 결론
아직까지 엄존하고 하는 신앙형태로서, 많은 불교신자들이 업과 윤회를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숙명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윤회를 이적인 현상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의 세계이고, 따라서 어떤 좋은 보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도 인간의 의지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행위인 의업(意業)이 중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업은 적극적, 능동적 실천행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해탈이든 열반이든 불국토든 불교의 이상은 업을 억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업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생사윤회를 고통과 동일시하고, 이 윤회의 원인이 업이라 하여, 업을 목적달성이 장애가 된다고 간주함으로서 일상행위의 적극성이 악화되어 왔다. 그러나 현실을 극복하는 노력 없이는 그 이상도 달성될 수 없다. 업이란 그러한 노력이다. 그 과정을 겪어 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결과에 입각하여 일체 행위의 무의미함을 지적함으로써 업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초래하고 있다. 더욱이 교리상으로도 궁극의 목적에 도달하면 업의 나쁜 영향은 더 이상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업의 영향은 나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개조와 발전을 위해서라면 주저 없는 노력, 즉 업이 필요하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무능을 전생의 업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나의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릴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회향사상은 공업으로써 그 논리성이 해명될 수 있으며, 중생구제의 서원을 위해 자신해서 고난을 감수한다고 하는 보살의 이타적 사상도 공업의 논리를 통해 성립된다. 불교의 업설중 공업(共業)이 지닌 사회성이 대승의 회향사상이나 보살도를 유인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업설이 그 효용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복을 개인적으로 한정하지 말고 사회적 복지로 확대하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100문 100답 불교강좌 편, 324.p ~ 331.p
원시불교, 水野弘元 著. 43.p ~ 66.p
아함의 업설 연구, 권용갑, 석사학위 청구논문
※ 개념정리
1. 업설(業說)의 중요성
증지부 473경 - 불타는 업론자(業論者), 업과론자(業果論者). 정진론자(精進論者)이다.
잡아함경 비건타경 - 차제설법(次第說法)을 하면서 시론(施論), 계론(戒論), 생천론(生天論)을 설한 연후에 사제법(四諦法)을 설함.
2. 업(業)의 어의(語義) - 카르마(Karman)의 역어, 카르마는 본래 "행위'라는 뜻.
대비바사론 권113(대정27, p.587 중)
① 작용(作用) : 의도적. 무의식적. 정신적. 물질적인 모든 작용과 활동
② 갈마( 磨) : 불교계율에서 행하는 의식작법
③ 업(業) : 업설에서 말하는 업, "과(果)를 분별한다."
3. 업설(業說)의 기원(起源)
① 우파니샤드 시대에 성립 - 이도오화설(二道五火說)
② 윤회(Sa s ra)
③ 업설의 성립조건
善因善果 惡因惡果 : 因果說
因果의 관계를 연결하는 어떤 세력
因과 果 사이에 인격적 동일성
④ 6사외도중 자이나교만 業을 긍정하고 나머지는 業을 부정함.
4. 아함경의 업설 내용
業說의 이론적 기초 : 十二處說(意와 法이 작용과 반응의 인과관계)
중아함업상응품 사경 제5 15경
若有故作業.我說彼必受其報.或現世受.或後世受若不故作業.我說此不必受報.於中.身故作三業.不善與苦果受於苦報.口有四業.意有三業.不善與苦果受於苦報.
잡아함 307경 : 諸業愛無明 因積他世陰
잡아함 335경 : 有業報而無作者.此陰滅已.異陰相續.
(一五)中阿含業相應品思經第五(初一日誦)
我聞如是.一時.佛遊舍衛國.在勝林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若有故作業.我說彼必受其報.或現世受.或後世受若不故作業.我說此不必受報.於中.身故作三業.不善與苦果受於苦報.口有四業.意有三業.不善與苦果受於苦報.云何身故作三業.不善與苦果受於苦報.一曰殺生.極惡飮血.其欲傷害.不慈衆生.乃至昆蟲.二曰不與取.著他財物以偸意取.三曰邪 .彼或有父所護.或母所護.或父母所護.或姐妹所護.或兄弟所護.或婦父母所護.或親親所護.或同姓所護.或爲他婦女.有鞭罰恐怖.及有名假賃至華 .親犯如此女.是謂身故作三業.不善與苦果受於苦報.云何口故作四業.不善與苦果受於苦報.一曰妄言.彼或在衆.或在眷屬.或在王家.若呼彼問.汝知便說.彼不知言知.知言不知.不見言見.見言不見.爲己爲他.或爲財物.知已妄言.二曰兩舌.欲離別他.聞此語彼.欲破壞此.聞彼語此.欲破壞彼.合者欲離.離者復離.而作群黨.樂於群黨.稱說群黨.三曰 言.彼若有言.辭氣 .惡聲逆耳.衆所不喜.衆所不愛.使他苦惱.令不得定.說如是言.四曰綺語.彼非時說.不眞實說.無義說.非法說.不止息說.又復稱歎不止息事.違背於時而不善敎.亦不善訶.是謂口故作四業.不善與苦果受於苦報.云何意故作三業.不善與苦果受於苦報.曰貪伺.見他財物諸生活具.常伺求望.欲令我得.二曰嫉 .意懷憎嫉而作是念.彼衆生者.應殺·應縛·應收·應免·應逐 出.其欲令彼受無量苦.三曰邪見.所見顚倒.如是見·如是說.無施·無齋·無有 說.無善惡業.無善惡業報.無此世彼世.無父無母.世無眞人往至善處·善去·善向.此世彼世.自知·自覺·自作證成就遊.是謂意故作三業.不善與苦果受於苦報.多聞聖弟子捨身不善業.修身善業.捨口·意不善業.修口·意善業.彼多聞聖弟子如是具足精進戒德.成就身淨業.成就口·意淨業.離 離諍.除去睡眠.無調·貢高.斷疑·度慢.正念正智.無有愚癡.彼心與慈俱.遍滿一方成就遊.如是二三四方.四維上下.普周一切.心與慈俱.無結無怨.無 無諍.極廣甚大.無量善修.遍滿一切世間成就遊.彼作是念.我本此心少不善修.我今此心無量善修.多聞聖弟子其心如是無量善修.若本因惡知識.爲放逸行.作不善業.彼不能將去.不能穢 .不復相隨.若有幼少童男·童女.生便能行慈心解脫者.而於後時.彼身·口·意寧可復作不善業耶.比丘答曰.不也.世尊.所以者何.自不作惡業.惡業何由生.是以男女在家·出家.常當勤修慈心解脫.若彼男女在家·出家修慈心解脫者.不持此身往至彼世.但隨心去此.比丘應作是念.我本放逸.作不善業.是一切今可受報.終不後世.若有如是行慈心解脫無量善與者.必得阿那含.或復上得.如是.悲·喜心與捨俱.無結無怨.無 無諍.極廣甚大.無量善修.遍滿一切世間成就遊.彼作是念.我本此心少不善修.我今此心無量善修.多聞聖弟子其心如是無量善修.若本因惡知識.爲放逸行.作不善業.彼不能將去.不能穢 .不復相隨.若有幼少童男·童女.生便能行捨心解脫者.而於後時.彼身·口·意寧可復作不善業耶.比丘答曰.不也.世尊.所以者何.自不作惡業.惡業何由生.是以男女在家·出家.常當勤修捨心解脫.若彼男女在家·出家修捨心解脫者.不持此身往至彼世.但隨心去此.比丘應作是念.我本放逸.作不善業.是一切今可受報.終不後世.若有如是行捨心解脫無量善修者.必得阿那含.或復上得.佛說如是.彼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思經第五竟(一千七十四字)
一五, 사경(思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스티이에 노닐으시면서 승림 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반드시 그 갚음을 받되 현세에서 받거나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는 반드시 그 갚음을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 중에는 몸으로 일부러 짓는 三업이 있다.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한다. 입에서 四업이 있고, 뜻에는 三업이 있다.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한다.
어떤 것이 몸으로 일부러 짓는 三업으로서,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하는 것인가. 一은 산 목숨을 죽이는 것이니, 지극히 악해 피를 마시고 그것을 해치고자 하며 중생과 내지 곤충까지도 사랑하지 않는다. 二는 남이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이니, 남의 재물에 집착하여 도둑질할 뜻으로 그것을 취하는 것이다. 三은 사음이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보호하는 바 있고, 혹은 어머니의 보호하는 바 잇고, 혹은 부모의 보호하는 바 있으며, 혹은 자매의 보호하는 바 있고, 혹은 형제의 보호하는 바 있으며, 혹은 아내의 부모의 보호하는 바 있고, 혹은 친이 보호하는 바 있으며, 혹은 같은 성의 보호하는 바 있고, 혹은 남의 부녀로서 채찍의 법을 받는 두려움이 있으며, 명가임지화만의 친이 있으니, 이러한 여자를 범하는 것이다. 이것을 몸으로 일부러 짓는 三업이라 하고,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입으로 일부러 짓는 四업으로서,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하는 것인가. 一은 거짓말이다. 그는 대중 가운데 있거나 권속들 가운데 있거나 혹은 왕가에 있어, 만일 그를 불러 '너는 알거든 곧 말하라'고 물으면, 그는 모르면서 안다 하고 알면서 모른다 하며,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 하고 본 것을 보지 않았다 하며, 자기를 위하고 남을 위하고 혹은 재물을 위해,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二는 이간하는 말이니, 남을 갈리게 하고자 한다. 여기서 듣고 저기에 말해 이것을 부수고자 하고, 저기서 듣고 여기에 말해 저것을 부수고자 한다. 모인 자는 떠나고자 하고 떠나나 자는 다시 떠나, 그러면서 당파를 만들고 당파를 즐기며 당파를 칭찬해 말한다. 三은 추한 말이다. 그는 만일 말을 내면, 말 기운은 추악하고 악한 소리는 귀에 거슬러, 여럿이 기뻐하지 않고 여럿이 사랑하지 않으며, 남을 괴롭게 하여 안정을 얻지 못하게 한다. 그는 이러한 말을 한다. 四는 꾸며대는 말이다. 그는 때가 아닌데 말하고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며, 뜻이 없는 것을 말하고 법이 아닌 것을 말하며, 지식하지 않고 말한다. 또다시 지식 아닌 일을 칭찬하고, 때를 어기어 잘 가르치지 않으며, 또한 잘 꾸짖지도 않는다. 이것을 입으로 일부러 짓는 四업이라 하고,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뜻이 일부러 짓는 三업으로서,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하는 것인가. 一은 탐이다. 남의 재물과 모든 생활의 기구를 엿보고 항상 엿보고, 구하고 바래어 나의 소득으로 만들고자 한다. 二는 미워하고 성내는 것이다. 뜻에 미움을 품어 이런 생각을 가진다. '저 중생은 죽여야 하고 묶어야 하며, 재물을 거두어야 하고 파면시켜야 하며, 배척해 쫓아내야 한다'고. 그래서 그로 하여금 한량없는 괴로움을 받도록 한다. 三은 사특한 소견이다. 그의 소견은 거꾸로 되어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보시도 없고 재도 없으며, 주설도 없다. 선과 악의 업도 없고 선악의 업의 갚음도 없으며,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 세상에서는 진인이 사는 좋은 곳에 가고, 이 세상 저 세상에 잘가고 잘 향하며,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으며, 스스로 중득하고 성취하여 노니는 것도 없다'고. 이것을 뜻으로 일부러 짓는 三업이라 하고, 그것은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결과를 주고 괴로움의 갚음을 받게 하는 것이니라.
많이들은 거룩한 제자는 몸의 선하지 않은 업을 버리어 몸의 선한 업을 닦고, 입과 뜻의 선하지 않은 업을 벼리어 입과 뜻의 선한 업을 닦는다. 저 많이들은 거룩한 제자는 이와 같이 정진의 계덕을 갖추어 몸의 깨끗한 업을 성취하고, 입과 뜻의 깨끗한 업을 성취한다. 그는 성냄을 떠나고 다툼을 여의며 잠을 없앤다. 날뛰는 마음이 없고 의심을 끊으며, 거만을 버리어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써 어리석음이 없다. 그의 마음은 사랑과 함께 하여 一방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닌다. 이와 같이 二, 三, 四방과 四유와 상하의 일체에 두루 한다. 그 마음은 사랑을 함께 하므로 맺음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다. 극히 넓고 매우 크며, 한량이 없이 잘 닦아 일체세간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본래는 이 마음이 적고 잘 닦지 않았었다. 이제 나는 이 마음은 한량이 없고 잘 닦는다'고.
많이들은 거룩한 제자는 그 마음을 이와 같이 한량이 없이 잘 닦는다. 만일 처음부터 악한 스승으로 인하여 방일한 행동을 행하고 선하지 않은 업을 지으면, 그는 능히 데리고 갈 수가 없고 능히 더럽힐 수가 없으며, 다시 서로 따를 수 없다. 만일 어린 동남, 동녀가 있어, 세상에 나자 곧 능히 사랑하는 마음의 해탈을 행했다면, 그래도 그는 뒷날에 있어서 그 몸과 입과 뜻으로 다시 선하지 않은 업을 짓겠느냐."
비구들은 사뢰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이여. 왜냐 하오면 스스로 악한 업을 짓지 않으므로 악한 업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나 여자는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나거나, 항상 마땅히 사랑하는 마음의 해탈을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만일 저 남자나 여자는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나거나, 사랑하는 마음의 해탈을 닦으면, 이 몸을 가지고 저 세상에 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마음을 따라 이 곳을 떠나는 것이다. 비구는 마땅히 이렇게 생각하라. '나는 본래 방일하여 선하지 않은 업을 지었다. 이 일체는 지금에 있어서 그 갚음을 받아야 하는 것이요, 마침내 뒤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만일 이와 같이 사랑하는 마음의 해탈을 행하기를 한량이 없이 하여 잘 닦는 자가 있으면, 그는 반드시 아나함을 얻고, 혹은 다시 그 위를 얻을 것이다. 이와 같이 슬퍼하는 마음과 기뻐하는 마음과 평등한 마음을 함께 하면, 맺음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어, 지극히 넓고 매우 크며 한량이 없이 잘 닦아 일체 세상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닌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본래는 이 마음이 적고 잘 닦지 않았었다. 이제 나는 이 마음을 한량이 없이 잘 닦는다'라고. 많이들은 거룩한 제자는 그 마음을 이와 같이 한량이 없이 잘 닦느니라. 만일 본래부터 악한 스승으로 인하여 방일한 행동을 행하고 선하지 않은 법을 짓는다면, 그는 능히 데리고 갈 수가 없고 능히 더럽힐 수 없으며, 다시 서로 따를 수 없다. 만일 어린 동남, 동녀가 세상에 나자 곧 능히 <버리는 마음>의 해탈을 행했다면, 그래도 그는 뒷날에 그 몸과 입과 뜻으로 선하지 않은 법을 짓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스스로 악한 업을 짓지 않았는데, 악한 업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겠나이까."
"그러므로, 남자나 여자는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나거나, 항상 마땅히 <버리는 마음>의 해탈을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만일 그 남자나 여자가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나거나, 버리는 마음의 해탈을 닦으면 이 몸을 가지고 저 세상에 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마음을 따라 이곳을 떠나는 것이다. 비구는 마땅히 이렇게 생각할. '나는 원래 방일하여 선하지 않은 업을 지었다. 이 일체는 지금에 있어서 그 갚음을 받을 것이요, 그것은 마침내 뒤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만일 이와 같이 버리는 마음의 해탈을 행하기를 한량없이 하여 잘 닦는 자가 있으면, 그는 반드시 아나함을 얻고 혹은 다시 그 위를 얻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제12장 사성제(四聖諦)
제379 전법륜경(轉法輪經)
(三七九)如是我聞.一時.佛住波羅奈鹿野苑中仙人住處.爾時.世尊告五比丘.此苦聖諦.本所未曾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苦集·此苦滅·此苦滅道跡聖諦.本所未曾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復次.苦聖諦智當復知.本所未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苦集聖諦已知當斷.本所未曾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復次.苦集滅.此苦滅聖諦已知當知作證.本所未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復以此苦滅道跡聖諦已知當修.本所未曾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復次.比丘.此苦聖諦已知.知已出.所未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復次.此苦集聖諦已知.已斷出.所未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復次.苦滅聖諦已知·已作證出.所未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復次.苦滅道跡聖諦已知·已修出.所未曾聞法.當正思惟.時.生眼·智·明·覺.諸比丘.我於此四聖諦三轉十二行不生眼·智·明·覺者.我終不得於諸天·魔·梵·沙門·婆羅門聞法衆中.爲解脫·爲出·爲離.亦不自證得阿 多羅三 三菩提.我已於四聖諦三轉十二行生眼·智·明·覺.故於諸天·魔·梵·沙門·婆羅門聞法衆中.得出·得脫.自證得成阿 多羅三 三菩提.爾時.世尊說是法時.尊者 陳如及八萬諸天遠塵離垢.得法眼淨.爾時.世尊告尊者 陳如.知法未. 陳如白佛.已知.世尊.復告尊者 陳如.知法未.拘 白佛.已知.善逝.尊者拘 已知法故.是故名阿若拘 .尊者阿若拘 知法已.地神擧聲唱言.諸仁者.世尊於波羅奈國仙人住處鹿野苑中三轉十二行法輪.諸沙門·婆羅門·諸天·魔·梵所未曾轉.多所饒益.多所安樂.哀愍世間.以義饒益.利安天人.增益諸天衆.減損阿修羅衆地神唱已.聞虛空神天·四天王天·三十三天·炎魔天·兜率陀天·化樂天·他化自在天展轉傳唱.須臾之間.聞于梵天身.梵天乘聲唱言.諸仁者.世尊於波羅奈國仙人住處鹿野苑中三轉十二行法輪.諸沙門·婆羅門·諸天·魔·梵.及世間聞法未所曾轉.多所饒益.多所安樂.以義饒益諸天世人.增益諸天衆.減損阿修羅衆.世尊於波羅奈國仙人住處鹿野苑中轉法輪.是故此經名轉法輪經.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379. 전법륜경(轉法輪經)
신수장경 : 2-103c
한글장경 : 잡-1-427
남전장경 : S. 56-11~12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바라나시의 선인 살던 사슴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이것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다. 본래부터 일찍 듣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 때에는 안목·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모임·괴로움의 멸함·괴로움을 멸하는 길의 자취의 진리다. 본래부터 일찍 듣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 때에는 안목·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다음에는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지혜도 다시 본래부터 일찍 듣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 때에는 안목·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괴로움의 모임의 진리를 이미 알았으면 마땅히 끊어야 한다. 이것도 본래부터 일찍 듣지 못한 법이니 바르게 생각하라. 그 때에는 안목·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다음에는 괴로움의 모임을 멸하는 것이니, 이 괴로움을 멸하는 진리를 이미 알았으면 마땅히 증득(證得)할 줄을 알아야 한다. 이것도 본래부터 듣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 때에는 안목·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다시 이 괴로움을 멸하는 길의 진리를 이미 알았으면 마땅히 닦아야 한다. 이것도 본래부터 일찍 듣지 못한 법이니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 때에는 안목·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다음에는 비구들이여, 이 괴로움의 진리를 이미 알고 이미 알았으면, 나와서 아직 듣지 못한 법을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라. 그 때에는 안목·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다시 이 괴로움의 모임의 진리를 이미 알고 이미 끊었으면, 나와서 아직 듣지 못한 법을 바르게 생각하라. 그 때에는 안목·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다시 괴로움의 멸한 진리를 이미 알고 이미 증득(證得)하였으면 아직 듣지 못한 법을 바르게 생각하라. 그 때에는 안목·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다시 괴로움의 멸하는 길의 진리를 이미 알고 이미 닦았으면 일찍 듣지 못 한 법을 바르게 생각하라. 그 때에는 안목·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 네 가지 진리의 3전(轉) 12행(行)에 대하여, 안목·지혜·밝음·깨달음이 생기지 않았으면 나는 끝내 모든 하늘·악마·범·사문·바라문들의 법을 듣는 대중 가운데서 해탈하고 나오고 떠나지 못하였을 것이요, 또한 스스로 아뇩다라삼약삼보리(阿 多羅三 三菩提)를 증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네 가지 진리의 3전 12행에 대하여 눈·지혜·밝음·깨달음이 생겼기 때문에 모든 하늘·악마·범·사문·바라문들의 법을 듣는 대중 가운데서 나오게 되고 벗어나게 되었으며, 스스로 아뇩다라삼약삼보리(阿 多羅三 三菩提)를 이루게 되었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는 이 법을 말씀하시자, 존자 콘단냐와 8만 모든 하늘들은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떠나 법의 눈이 깨끗하게 되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존자 콘단냐에게 말씀하시었다.
"법(法)을 알았느냐."
콘단냐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미 알아나이다. 세존이시여."
다시 콘단냐에게 물으시었다.
"법을 알았느냐."
콘단냐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미 알았나이다. 선서시여."
존자 콘단냐는 이미 법(法)을 알았기 때문에 이름을 안나타 콘단냐라고 부르시었다. 존자 안나타 콘단냐가 법(法)을 알자 지신들은 소리를 높여 외쳤다.
'여러분,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의 선인이 살던 사슴 동산에서 12행의 법 바퀴를 세 번 굴리시었다. 이것은 모든 사문·바라문이나 하늘·악마·범들이 일찍 굴리지 못한 것이다. 많이 이익되게 하고 많이 안락하게 할 것이다. 세간을 가엾이 여기시어 이치로써 이롭게 하시고 하늘 사람들을 이롭고 편안하게 하여, 하늘 무리들은 더욱 늘어나게 하고 아수라 무리들은 줄어들게 하시었다'고 외치었다.
지신이 외쳐 마치자 허공신천·4천왕천·33천·야마천·도솔타천·화락천·타화자재천에까지 들리어, 서로 이어 외처 잠깐 동안에 범천까지 들리었다. 범천도 그 소리를 받아 '여러분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의 선인이 살던 사슴동산에서 12행의 법 바퀴를 세 번 굴리시었다. 이것은 모든 사문 바라문이나 모든 하늘·악마·범들이 일찍 굴리지 못한 것이다. 많이 이익 되게 하고 많이 안락하게 할 것이다. 세간을 가엾이 여기시어 이치로써 이롭게 하시고 하늘 사람들을 이롭고 편안하게 하여, 하늘 무리들은 더욱 붇게 하고 아수라 무리들은 줄게 하시었다.'고 외치었다.
세존께서 바라나시의 선인이 살던 사슴 동산에서 법 바퀴를 굴리셨기 때문에 그래서 이 경을 <전법륜경>이라고 부른다.
부처님께서 이 경(經)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行)하였다.
S. 56-11
Samyutta Nikaya LVI.11
Dhammacakkapavattana Sutta
Setting the Wheel of Dhamma in Motion
Translated from the Pali by Thanissaro Bhikkhu.
For free distribution 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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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heard that on one occasion the Blessed One was staying at Varanasi in the Game Refuge at Isipatana. There he addressed the group of five monks:
"There are these two extremes that are not to be indulged in by one who has gone forth. Which two? That which is devoted to sensual pleasure with reference to sensual objects: base, vulgar, common, ignoble, unprofitable; and that which is devoted to self-affliction: painful, ignoble, unprofitable. Avoiding both of these extremes, the middle way realized by the Tathagata -- producing vision, producing knowledge -- leads to calm, to direct knowledge, to self-awakening, to Unbinding.
"And what is the middle way realized by the Tathagata that -- producing vision, producing knowledge -- leads to calm, to direct knowledge, to self-awakening, to Unbinding? Precisely this Noble Eightfold Path: right view, right resolve,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right concentration. This is the middle way realized by the Tathagata that -- producing vision, producing knowledge -- leads to calm, to direct knowledge, to self-awakening, to Unbinding.
"Now this, monks, is the noble truth of stress:[1] Birth is stressful, aging is stressful, death is stressful; sorrow, lamentation, pain, distress, & despair are stressful; association with the unbeloved is stressful, separation from the loved is stressful, not getting what is wanted is stressful. In short, the five clinging-aggregates are stressful.
"And this, monks, is the noble truth of the origination of stress: the craving that makes for further becoming -- accompanied by passion & delight, relishing now here & now there -- i.e., craving for sensual pleasure, craving for becoming, craving for non-becoming.
"And this, monks, is the noble truth of the cessation of stress: the remainderless fading & cessation, renunciation, relinquishment, release, & letting go of that very craving.
"And this, monks, is the noble truth of the way of practice leading to the cessation of stress: precisely this Noble Eightfold Path -- right view, right resolve,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right concentration.
"Vision arose, insight arose, discernment arose, knowledge arose, illumination arose within me with regard to things never heard before: 'This is the noble truth of stress'... 'This noble truth of stress is to be comprehended'... 'This noble truth of stress has been comprehended.'
"Vision arose, insight arose, discernment arose, knowledge arose, illumination arose within me with regard to things never heard before: 'This is the noble truth of the origination of stress'... 'This noble truth of the origination of stress is to be abandoned' [2] ... 'This noble truth of the origination of stress has been abandoned.'
"Vision arose, insight arose, discernment arose, knowledge arose, illumination arose within me with regard to things never heard before: 'This is the noble truth of the cessation of stress'... 'This noble truth of the cessation of stress is to be directly experienced'... 'This noble truth of the cessation of stress has been directly experienced.'
"Vision arose, insight arose, discernment arose, knowledge arose, illumination arose within me with regard to things never heard before: 'This is the noble truth of the way of practice leading to the cessation of stress'... 'This noble truth of the way of practice leading to the cessation of stress is to be developed'... 'This noble truth of the way of practice leading to the cessation of stress has been developed.' [3]
"And, monks, as long as this knowledge & vision of mine -- with its three rounds & twelve permutations concerning these four noble truths as they actually are present -- was not pure, I did not claim to have directly awakened to the right self-awakening unexcelled in the cosmos with its deities, Maras, & Brahmas, with its contemplatives & priests, its royalty & commonfolk. But as soon as this knowledge & vision of mine -- with its three rounds & twelve permutations concerning these four noble truths as they actually are present -- was truly pure, then I did claim to have directly awakened to the right self-awakening unexcelled in the cosmos with its deities, Maras & Brahmas, with its contemplatives & priests, its royalty & commonfolk. Knowledge & vision arose in me: 'Unprovoked is my release. This is the last birth. There is now no further becoming.'"
That is what the Blessed One said. Gratified, the group of five monks delighted at his words. And while this explanation was being given, there arose to Ven. Kondanna the dustless, stainless Dhamma eye: Whatever is subject to origination is all subject to cessation.
And when the Blessed One had set the Wheel of Dhamma in motion, the earth deities cried out: "At Varanasi, in the Game Refuge at Isipatana, the Blessed One has set in motion the unexcelled Wheel of Dhamma that cannot be stopped by priest or contemplative, deity, Mara or God or anyone in the cosmos." On hearing the earth deities' cry, the deities of the Four Kings' Heaven took up the cry... the deities of the Thirty-three... the Yama deities... the Tusita deities... the Nimmanarati deities... the Paranimmita-vasavatti deities... the deities of Brahma's retinue took up the cry: "At Varanasi, in the Game Refuge at Isipatana, the Blessed One has set in motion the unexcelled Wheel of Dhamma that cannot be stopped by priest or contemplative, deity, Mara, or God or anyone at all in the cosmos."
So in that moment, that instant, the cry shot right up to the Brahma worlds. And this ten-thousand fold cosmos shivered & quivered & quaked, while a great, measureless radiance appeared in the cosmos, surpassing the effulgence of the deities.
Then the Blessed One exclaimed: "So you really know, Kondanna? So you really know?" And that is how Ven. Kondanna acquired the name Anna-Kondanna -- Kondanna who knows.
Notes
1. The Pali phrases for the four noble truths are grammatical anomalies. From these anomalies, some scholars have argued that the expression "noble truth" is a later addition to the texts. Others have argued even further that the content of the four truths is also a later addition. Both of these arguments are based on the unproven assumption that the language the Buddha spoke was grammatically regular, and that any irregularities were later corruptions of the language. This assumption forgets that the languages of the Buddha's time were oral dialects, and that the nature of such dialects is to contain many grammatical irregularities. Languages tend to become regular only when being used to govern a large nation state or to produce a large body of literature: events that happened in India only after the Buddha's time. (A European example: Italian was a group of irregular oral dialects until Dante fashioned it into a regular language for the sake of his poetry.) Thus the irregularity of the Pali here is no proof either for the earliness or lateness of this particular teaching.
2. Another argument for the lateness of the expression "noble truth" is that a truth -- meaning an accurate statement about a body of facts -- is not something that should be abandoned. In this case, only the craving is to be abandoned, not the truth about craving. However, in Vedic Sanskrit -- as in modern English -- a "truth" can mean both a fact and an accurate statement about a fact. Thus in this case, the "truth" is the fact, not the statement about the fact, and the argument for the lateness of the expression does not hold.
3. The discussion in the four paragraphs beginning with the phrase, "Vision arose...", takes two sets of variables -- the four noble truths and the three levels of knowledge appropriate to each -- and lists their twelve permutations. In ancient Indian philosophical and legal traditions, this sort of discussion is called a wheel. Thus, this passage is the Wheel of Dhamma from which the discourse takes its name.
S. 56-11 여래의 말씀(Tath gatena vutt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에 세존께서는 바라나씨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다섯명의 수행승들에게 말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가지의 극단을 섬기지 않는다. 두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감각적 쾌락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천하고 범부의 소행으로 고귀하지 못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롭고 고귀하지 못하고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러한 두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바로 깨달아 눈을 생겨나게 하고 앎을 생겨나게 하여 멈추고 잘 알고 올바로 깨닫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을 준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러한 중도를 바로 깨달아 눈을 생겨나게 하고 앎을 생겨나게 하여 멈추고 잘 알고 올바로 깨닫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된다. 그 중도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8가지 성스러운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思惟),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精進),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러한 중도를 바로 깨달아 눈이 생겨나게 하고 앎을 생겨나게 하여 멈추고 잘 알고 올바로 깨닫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을 준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은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자면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 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渴愛)인데 그것은 곧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8가지 성스러운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精進),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고 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바로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고 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나고 지식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고 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나고 지식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이다고 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나고 지식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바로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나고 지식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가 제거되었다고 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나고 지식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이다고 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나고 지식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바로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나고 지식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가 깨달아졌다고 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나고 지식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고 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나고 지식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그런데 바로 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져야 한다고 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나고 지식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닦여졌다고 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나고 지식이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고 명지가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났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에 관해 이와 같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로써 있는 그대로 알고 또한 보아서 이미 아주 청정해진 까닭으로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와 하늘사람과 인간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깨달았다. 또한 나는 '이것이 최후의 삶이며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라고 흔들림 없이 마음의 해탈을 이루어 앎과 봄을 성취했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다섯명의 수행승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또한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법안이 생겨났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법륜을 굴리실 때에 땅위의 신들은 이와 같이 '세존께서 바라나씨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범천이나 또는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퇴전시킬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신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땅위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사천왕의 하늘나라에 사는 신들도 이와 같이 '세존께서 바라나씨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범천이나 또는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퇴전시킬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신다.' 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사천왕의 하늘나라에 사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도리천의 신들도 이와 같이 '세존께서 바라나씨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범천이나 또는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퇴전시킬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신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도리천의 하늘나라에 사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야마천의 신들도 이와 같이 '세존께서 바라나씨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범천이나 또는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퇴전시킬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신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야마천의 하늘나라에 사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도솔천의 신들도 이와 같이 '세존께서 바라나씨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범천이나 또는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퇴전시킬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신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도솔천의 하늘 나라에 사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화락천의 신들도 이와 같이 '세존께서 바라나씨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범천이나 또는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퇴전시킬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신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화락천이나 하늘나라에 사는 신들이 소리를 듣고 타화자재천의 신들도 이와 같이 '세존께서 바라나씨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범천이나 또는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퇴전시킬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신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타화자재천의 하늘나라에 사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범천계의 신들도 이와 같이 '세존께서 바라나씨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범천이나 또는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퇴전시킬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신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범천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
이 때에 세존께서는 감흥 어린 말로 이와 같이 '꼰당냐는 완전히 알았다. 꼰당냐는 완전히 알았다.'라고 읊으셨다. 그래서 존자 꼰당냐는 앙냐따 곤땅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개념정리] - 사성제(四聖諦)
Ⅰ. 서론
사성제(四聖諦)는 연기(緣起)의 도리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강구되어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사제설은 석존이 깨달음을 열어 불타가 되고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한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 설하여진 것이다.
Ⅱ. 본론
제(諦:satya)는 진리 ·진실의 의미이며, 그 진리가 신성(arya)한 것이라 하여 사성제(四聖諦, Citvasy- rya-saty ni) ·사진제(四眞諦)라고도 한다. 미혹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의 인(因) ·과(果)를 설명하는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 조직으로 고제(苦諦:dubkha) ·집제(集諦:samudaya) ·멸제(滅諦:nirodha) ·도제(道諦:mrga)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1. 고성제(苦聖諦) - 오온(五蘊) : 존재의 현실(實存)
모든 존재는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관념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 이것이 오온(五蘊)이고, 이러한 오온이 있으면 생사의 괴로움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오온을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 8苦 : 生, 老, 病, 死, 怨憎會苦, 愛別離苦, 求不得苦, 五陰盛苦
* 五陰盛苦 - 五陰이라는 인간존재는 항상 욕구를 가지고 오음을 取하여 미래의 자기 존재 가능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러한 존재방식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으로 "인간 실존의 괴로움이다"라는 뜻이다.
*3苦
苦苦 - 苦緣이 외계로부터 사람에게 핍박하여 올 때 느끼는 괴로움
行苦 - 무상한 현상계를 바라볼 때 느끼는 괴로움
壞苦 - 아끼던 자기 소유물이 파괴 상실될 때 느끼는 괴로움
2. 집성제(集聖諦) - 12緣起의 流轉門으로 五蘊의 集(존재의 實相), 괴로운 인간 실존의 원인과 구조를 밝힌 진리
괴로움의 원인은 無常한 五蘊에 대하여 欲貪을 일으켜 존재 가능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연기하는 法界에서 체험된 의식, 체험하고 있는 의식, 체험하고자 하는 의식을 欲貪으로 취착함으로써 이들 의식을 모아 관념으로 만드는 데 있다. 즉 마음에서 연기한 무상한 법을 欲貪으로 취하여 마음에 모아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3. 멸성제(滅聖諦) - 12緣起의 還滅門으로 五蘊의 滅 : 인생의 목적(實存을 초월한 삶의 방식)
괴로움이 滅하는 길 즉 正見을 가지고 바르게 사유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 항상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4. 도성제(道聖諦) - 팔정도(八正道) :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초월하는 길)
그러므로 사성제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 잡아함 42경
五蘊의 實相을 깨달아 滅하는 것이 四聖諦이며, 四聖諦의 실천은 蘊과 界와 入處를 주의 깊게 사유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十二入處→18界→6觸入處→6界→五蘊(五蘊 성립의 順觀) - 인식의 과정
五蘊→6界→6觸入處→18界→12入處(五蘊 성립의 逆觀) - 체험의 과정
(四二)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有七處善·三種觀義.盡於此法得漏盡.得無漏.心解脫·慧解脫.現法自知身作證具足住.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云何比丘七處善.比丘.如實知色·色集·色滅·色滅道跡·色味·色患·色離如實知.如是受·想·行·識.識集·識滅·識滅道跡·識味·識患·識離如實知.云何色如實知.諸所有色·一切四大及四大造色.是名爲色.如是色如實知.云何色集如實知.愛喜是名色集.如是色集如實知.云何色滅如實知.愛喜滅是名色滅.如是色滅如實知.云何色滅道跡如實知.謂八聖道.正見·正志·正語·正業·正命·正方便·正念·正定.是名色滅道跡.如是色滅道跡如實知.云何色味如實知.謂色因緣生喜樂.是名色味.如是色味如實知.云何色患如實知.若色無常·苦·變易法.是名色患.如是色患如實知.云何色離如實知.謂於色調伏欲貪·斷欲貪·越欲貪.是名色離.如是色離如實知.云何受如實知.謂六受.眼觸生受.耳·鼻·舌·身·意觸生受.是名受.如是受如實知.云何受集如實知.觸集是受集.如是受集如實知.云何受滅如實知.觸滅是受滅.如是受滅如實知.云何受滅道跡如實知.謂八聖道.正見.乃至正定.是名受滅道跡.如是受滅道跡如實知.云何受味如實知.受因緣生喜樂.是名受味.如是受味如實知.云何受患如實知.若無常·苦·變易法.是名受患.如是受患如實知.云何受離如實知.若於受調伏欲貪·斷欲貪·越欲貪.是名受離.如是受離如實知.云何想如實知.謂六想.眼觸生想.耳·鼻·舌·身·意觸生想.是名爲想.如是想如實知.云何想集如實知.觸集是想集.如是想集如實知.云何想滅如實知.觸滅是想滅.如是想滅如實知.云何想滅道跡如實知.謂八聖道.正見.乃至正定.是名想滅道跡.如是想滅道跡如實知.云何想味如實知.想因緣生喜樂.是名想味.如是想味如實知.云何想患如實知.若想無常·苦·變易法.是名想患.如是想患如實知.云何想離如實知.若於想調伏欲貪·斷欲貪·越欲貪.是名想離.如是想離如實知.云何行如實知.謂六思身.眼觸生思.耳·鼻·舌·身·意觸生思.是名爲行.如是行如實知.云何行集如實知.觸集是行集.如是行集如實知.云何行滅如實知.觸滅是行滅.如是行滅如實知.云何行滅道跡如實知.謂八聖道.正見.乃至正定.是名行滅道跡.如是行滅道跡如實知.云何行味如實知.行因緣生喜樂.是名行味.如是行味如實知.云何行患如實知.若行無常·苦·變易法.是名行患.如是行患如實知.云何行離如實知.若於行調伏欲貪·斷欲貪·越欲貪.是名行離.如是行離如實知.云何識如實知.謂六識身.眼識.耳·鼻·舌·身·意識身.是名爲識.如是識如實知.云何識集如實知.名色集是識集.如是識集如實知.云何識滅如實知.名色滅是識滅.如是識滅如實知.云何識滅道跡如實知.謂八聖道.正見.乃至正定.是名識滅道跡.如是識滅道跡如實知.云何識味如實知.識因緣生喜樂.是名識味.如是識味如實知.云何識患如實知.若識無常·苦·變易法.是名識患.如是識患如實知.云何識離如實知.若識調伏欲貪·斷欲貪·越欲貪.是名識離如實知.比丘.是名七處善.云何三種觀義.比丘.若於空閑·樹下·露地.觀察陰·界·入.正方便思惟其義.是名比丘三種觀義.是名比丘七處善·三種觀義.盡於此法得漏盡.得無漏.心解脫·慧解脫.現法自知作證具足住.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 잡아함 382경
(三八二)如是我聞.一時.佛住波羅奈仙人住處鹿野苑中.爾時.世尊告諸比丘.有四聖諦.何等爲四.謂苦聖諦·苦集聖諦·苦滅聖諦·苦滅道跡聖諦.若比丘於苦聖諦當知·當解.於集聖諦當知·當斷.於苦滅聖諦當知·當證.於苦滅道跡聖諦當知·當修.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 잡아함 389경
一者善知病 - 苦聖諦如實知 : 병의 상태를 바로 진단
二者善知病源 - 苦集聖諦如實知 : 병의 원인을 규명
三者善知病對治 - 苦滅聖諦如實知 : 병의 상태와 원인에 따라 적당한 치료법을 써서 치료
四者善知治病已.當來更不動發 - 苦滅道跡聖諦如實知 : 병 치료 후 다시 발동하지 않게 함
(三八九)如是我聞.一時.佛住波羅奈國仙人住處鹿野苑中.爾時.世尊告諸比丘.有四法成就.名曰大醫王者.所應王之具·王之分.何等爲四.一者善知病.二者善知病源.三者善知病對治.四者善知治病已.當來更不動發.云何名良醫善知病.謂良醫善知如是如是種種病.是名良醫善知病.云何良醫善知病源.謂良醫善知此病因風起·癖陰起·涎唾起·衆冷起·因現事起·時節起.是名良醫善知病源.云何良醫善知病對治.謂良醫善知種種病.應塗藥·應吐·應下·應灌鼻·應熏·應取汗.如是比種種對治.是名良醫善知對治.云何良醫善知治病已.於未來世永不動發.謂良醫善治種種病.令究竟除.於未來世永不復起.是名良醫善知治病.更不動發.如來·應·等正覺爲大醫王.成就四德.療衆生病.亦復如是.云何爲四.謂如來知此是苦聖諦如實知·此是苦集聖諦如實知·此是苦滅聖諦如實知·此是苦滅道跡聖諦如實知.諸比丘.彼世間良醫於生根本對治不如實知.老·病·死·憂·悲·惱苦根本對治不如實知.如來·應·等正覺爲大醫王.於生根本知對治如實知.於老·病·死·憂·悲·惱苦根本對治如實知.是故如來·應·等正覺名大醫王.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Ⅲ. 결론
四聖諦와 12緣起, 三法印의 관계
┌─ 苦聖諦 - 一切皆苦 --------- 諸行無常印 -+
│ |
│ 集聖諦 - 12연기의 順觀 ---- 諸法無我印 |
四聖諦 │ |- 三法印
│ 滅聖諦 - 12연기의 逆觀---+ |
│ |-- 涅般寂靜印-+
└─ 道聖諦 - 八正道 --+
[無明界] [十八界] [六界] [三界] (生死輪廻) <苦>
六內入處 - 眼界 - 意界 -++- 六觸入處 -+
六外入處 - 色界 - 法界 || 地水火風界| - 五蘊 - 愛取有生老死
六 識 - 眼 - 意識界 -++- 識界 空界-+
│ │ │ │
無明-行- 識 名色-六入 觸-受(思想) 愛-取-有-生-老死 <集諦>
(流轉門)
<明界> <意界 : 法界> <滅盡定> <苦滅>
正 見 - 正思 - 正語 - 正業 - 正命 - 正精進 - 正念 - 正定 <苦滅道>
│ +----------------+ +---------+ +-------+
無明滅 身口意行滅 識名色滅 六入 - 老死滅 (還滅門)
참고문헌
원시불교, 水野弘元 著. 127.p ~ 141.p
원시불교 사상론, 木村泰賢 著. 223.p ~ 234.p
불교학개론, 김동화, 111.p ~ 125.p
▶ (三一)中阿含舍梨子相應品分別聖諦經第
十一(初一日誦)我聞如是.一時.佛遊舍衛國.在勝林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此是正行說法.謂四聖諦廣攝·廣觀·分別·發露·開仰·施設·顯示·趣向.過去諸如來·無所著·等正覺.彼亦有此正行說法.謂四聖諦廣攝·廣觀·分別·發露·開仰·施設·顯示·趣向.未來諸如來·無所著·等正覺.彼亦有此正行說法.謂四聖諦廣攝·廣觀·分別·發露·開仰·施設·顯示·趣向.我今現如來·無所著·等正覺.亦有此正行說法.謂四聖諦廣攝·廣觀·分別·發露·開仰·施設·顯示·趣向.舍梨子比丘聰慧·速慧·捷慧·利慧·廣慧·深慧·出要慧·明達慧·辯才慧.舍梨子比丘成就實慧.所以者何.謂我略說此四聖諦.舍梨子比丘則能爲他廣敎·廣觀·分別·發露·開仰·施設·顯現·趣向.舍梨子比丘廣敎.廣示此四聖諦.分別·發露·開仰·施設·顯現·趣向時.令無量人而得於觀.舍梨子比丘能以正見爲導御也.目乾連比丘能令立於最上眞際.謂究竟漏盡.舍梨子比丘生諸梵行.猶如生母.目連比丘長養諸梵行.猶如養母.是以諸梵行者.應奉事供養恭敬禮拜舍梨子·目乾連比丘.所以者何.舍梨子·目乾連比丘爲諸梵行者求義及饒益.求安隱快樂.爾時.世尊說如是已.卽從坐起.入室燕坐.於是.尊者舍梨子告諸比丘.諸賢.世尊爲我等出世.謂爲他廣敎.廣示此四聖諦.分別·發露·開仰·施設·顯現·趣向.云何爲四.謂苦聖諦.苦習·苦滅·苦滅道聖諦.諸賢.云何苦聖諦.謂生苦·老苦·病苦·死苦·怨憎會苦·愛別離苦·所求不得苦·略五盛陰苦.諸賢.說生苦者.此說何因.諸賢.生者.謂彼衆生·彼彼衆生種類.生則生.出則出.成則成.興起五陰.已得命根.是名爲生.諸賢.生苦者.謂衆生生時.身受苦受·遍受·覺·遍覺.心受苦受·遍受·覺·遍覺.身心受苦受·遍受.覺·遍覺.身熱受·遍受·覺·遍覺心熱受·遍受·覺·遍覺.身心熱受·遍受·覺·遍覺.身壯熱煩惱憂 受·遍受.覺·遍覺.心壯熱煩惱憂 受·遍受·覺·遍覺.身心壯熱煩惱憂 受·遍受·覺·遍覺.諸賢.說生苦者.因此故說.諸賢.說老苦者.此說何因.諸賢.老者.謂彼衆生·彼彼衆生種類.彼爲老 .頭白齒落.盛壯日衰.身曲脚戾.體重氣上. 杖而行.肌縮皮緩.皺如麻子.諸根毁熟.顔色醜惡.是名爲老.諸賢.老苦者.謂衆生老時.身受苦受·遍受·覺·遍覺.心受苦受·遍受·覺·遍覺.身心受苦受·遍受·覺·遍覺.身熱受·遍受·覺·遍覺.心熱受·遍受·覺·遍覺.身心熱受·遍受·覺·遍覺.身壯熱煩惱憂 受·遍受·覺·遍覺.心壯熱煩惱憂 受·遍受·覺·遍覺.身心壯熱煩惱憂 受·遍受·覺·遍覺.諸賢.說老苦者.因此故說.諸賢.說病苦者.此說何因.諸賢.病者.謂頭痛·眼痛·耳痛·鼻痛·面痛·脣痛·齒痛·舌痛· 痛·咽痛·風喘·咳嗽·喝吐·喉 ·癲癎·癰 ·經溢·赤膽·壯熱·枯槁·痔[病-丙+匿]·下利.若有如是比餘種種病.從更樂觸生.不離心.立在身中.是名爲病.諸賢.病苦者.謂衆生病時.身受苦受·遍受·覺·遍覺.心受苦受·遍受·覺·遍覺.身心受苦受·遍受·覺·遍覺.身熱受·遍受·覺·遍覺.心熱受·遍受·覺·遍覺.身心熱受·遍受·覺·遍覺.身壯熱煩惱憂 受·遍受·覺·遍覺.心壯熱煩惱憂 受·遍受·覺·遍覺.身心壯熱煩惱憂 受·遍受·覺·遍覺.諸賢.說病苦者.因此故說.諸賢.說死苦者.此說何因.諸賢.死者.謂彼衆生·彼彼衆生種類.命終無常.死喪散滅.壽盡破壞.命根閉塞.是名爲死.諸賢.死苦者.謂衆生死時.身受苦受·遍受·覺·遍覺.心受苦受·遍受·覺·遍覺.身心受苦受·遍受·覺·遍覺.身熱受·遍受·覺·遍覺.心熱受·遍受·覺·遍覺.身心熱受·遍受·覺·遍覺.身壯熱煩惱憂 受·遍受·覺·遍覺.心壯熱煩惱憂 受·遍受·覺·遍覺.身心壯熱煩惱憂 受·遍受·覺·遍覺.諸賢.說死苦者.因此故說諸賢.說怨憎會苦者.此說何因.諸賢.怨憎會者.謂衆生實有內六處.不愛眼處.耳·鼻·舌·身·意處.彼同會一.有攝·和·習.共合爲苦.如是外處.更樂·覺·想·思·愛·亦復如是.諸賢.衆生實有六界.不愛地界.水·火·風·空·識界.彼同會一.有攝·和·習.共合爲苦.是名怨憎會.諸賢.怨憎會苦者.謂衆生怨憎會時.身受苦受·遍受·覺·遍覺.心受苦受·遍受·覺·遍覺.身心受苦受·遍受·覺·遍覺.諸賢.說怨憎會苦者.因此故說.諸賢.說愛別離苦者.此說何因.諸賢.愛別離苦者.謂衆生實有內六處.愛眼處.耳·鼻·舌·身·意處.彼異分散.不得相應.別離不會.不攝·不習·不和合爲苦.如是外處.更樂·覺·想·思·愛.亦復如是.諸賢.衆生實有六界.愛地界.水·火·風·空·識界.彼異分散.不得相應.別離不會.不攝·不習·不和合爲苦.是名愛別離.諸賢.愛別離苦者.謂衆生別離時.身受苦受·遍受·覺·遍覺.心受苦受·遍受·覺·遍覺.身心受苦受·遍受·覺·遍覺.諸賢.說愛別離苦者.因此故說.諸賢.說所求不得苦者.此說何因.諸賢.謂衆生生法.不離生法.欲得令我而不生者.此實不可以欲而得.老法·死法·愁憂 法.不離憂 法.欲得令我不憂 者.此亦不可以欲而得.諸賢.衆生實生苦而不可樂·不可愛念.彼作是念.若我生苦而不可樂·不可愛念者.欲得轉是.令可愛念.此亦不可以欲而得.諸賢.衆生實生樂而可愛念.彼作是念.若我生樂可愛念者.欲得令是常恒久住不變易法.此亦不可以欲而得.諸賢.衆生實生思想而不可樂·不可愛念.彼作是念.若我生思想而不可樂·不可愛念者.欲得轉是.令可愛念.此亦不可以欲而得.諸賢.衆生實生思想而可愛念.彼作是念.若我生思想可愛念者.欲得令是常恒久住不變易法.此亦不可以欲而得.諸賢.說所求不得苦者.因此故說.諸賢.說略五盛陰苦者.此說何因.謂色盛陰.覺·想·行·識盛陰.諸賢.說略五盛陰苦者.因此故說.諸賢.過去時是苦聖諦.未來·現在時是苦聖諦.眞諦不虛.不離於如.亦非顚倒.眞諦審實.合如是諦.聖所有.聖所知.聖所見.聖所了.聖所得.聖所等正覺.是故說苦聖諦.諸賢.云何愛習苦習聖諦.謂衆生實有愛內六處.眼處.耳·鼻·舌·身·意處·於中若有愛·有 ·有染·有著者.是名爲習.諸賢.多聞聖弟子知我如是知此法.如是見.如是了.如是視.如是覺.是謂愛習苦習聖諦.如是知之.云何知耶.若有愛妻·子·奴婢·給使·眷屬·田地·屋宅·店肆·出息財物.爲所作業.有愛·有 ·有染·有著者.是名爲習.彼知此愛習.苦習聖諦.如是外處.更樂·覺·想·思·愛.亦復如是.諸賢.衆生實有愛六界.地界.水·火·風·空·識界.於中若有愛·有 ·有染·有著者.是名爲習.諸賢.多聞聖弟子知我如是知此法.如是見.如是了.如是視.如是覺.是謂愛習苦習聖諦.如是知之.云何知耶.若有愛妻·子·奴婢·給使·眷屬·田地·屋宅·店肆·出息財物.爲所作業.有愛·有 ·有染·有著者.是名爲習.彼知是愛習苦習聖諦.諸賢.過去時是愛習苦習聖諦.未來·現在時是愛習苦習聖諦.眞諦不虛.不離於如.亦非顚倒.眞諦審實.合如是諦.聖所有.聖所知.聖所見.聖所了.聖所得.聖所等正覺.是故說愛習苦習聖諦.諸賢.云何愛滅苦滅聖諦.謂衆生實有愛內六處.眼處·耳·鼻·舌·身·意處.彼若解脫.不染不著·斷捨吐盡·無欲·滅·止沒者.是名苦滅.諸賢.多聞聖弟子知我如是知此法.如是見.如是了.如是視.如是覺.是謂愛滅苦滅聖諦.如是知之.云何知耶.若有不愛妻·子·奴婢·給使·眷屬·田地·屋宅·店肆·出息財物.不爲所作業.彼若解脫.不染不著·斷捨吐盡·無欲·滅·止沒者.是名苦滅.彼知是愛滅苦滅聖諦.如是外處.更樂·覺·想·思·愛亦復如是.諸賢.衆生實有愛六界.地界.水·火·風·空·識界.彼若解脫.不染不著·斷捨吐盡·無欲·滅·止沒者.是名苦滅.諸賢.多聞聖弟子知我如是知此法.如是見.如是了.如是視.如是覺.是謂愛滅苦滅聖諦.如是知之.云何知耶.若有不愛妻·子·奴婢·給使·眷屬·田地·屋宅·店肆·出息財物.不爲所作業.彼若解脫.不染不著.斷捨吐盡·無欲·滅·止沒者.是名苦滅.彼知是愛滅苦滅聖諦.諸賢.過去時是愛滅苦滅聖諦.未來·現在時是愛滅苦滅聖諦.眞諦不虛.不離於如.亦非顚倒.眞諦審實.合如是諦.聖所有.聖所知.聖所見.聖所了.聖所得.聖所等正覺.是故說愛滅苦滅聖諦.諸賢.云何苦滅道聖諦.謂正見·正志·正語·正業·正命·正方便·正念·正定.諸賢.云何正見.謂聖弟子念苦是苦時.習是習.滅是滅.念道是道時.或觀本所作.或學念諸行.或見諸行災患.或見涅槃止息.或無著念觀善心解脫時.於中擇·遍擇·次擇.擇法·視·遍視.觀察明達.是名正見.諸賢.云何正志.謂聖弟子念苦是苦時.習是習.滅是滅.念道是道時.或觀本所作.或學念諸行.或見諸行災患.或見涅槃止息.或無著念觀善心解脫時.於中心伺·遍伺·隨順伺.可念則念.可望則望.是名正志.諸賢.云何正語.謂聖弟子念苦是苦時.習是習.滅是滅.念道是道時.或觀本所作.或學念諸行.或見諸行災患.或見涅槃止息.或無著念觀善心解脫時.於中除口四妙行.諸餘口惡行遠離除斷.不行不作.不合不會.是名正語諸賢.云何正業.謂聖弟子念苦是苦時.習是習.滅是滅.念道是道時.或觀本所作.或學念諸行.或見諸行災患.或見涅槃止息.或無著念觀善心解脫時.於中除身三妙行.諸餘身惡行遠離除斷.不行不作.不合不會.是名正業.諸賢.云何正命.謂聖弟子念苦是苦時.習是習.滅是滅.念道是道時.或觀本所作.或學念諸行.或見諸行災患.或見涅槃止息.或無著念觀善心解脫時.於中非無理求.不以多欲無厭足.不爲種種伎術 說邪命活.但以法求衣.不以非法.亦以法求食·床座.不以非法.是名正命.諸賢.云何正方便.謂聖弟子念苦是苦時.習是習.滅是滅.念道是道時.或觀本所作.或學念諸行.或見諸行災患.或見涅槃止息.或無著念觀善心解脫時.於中若有精進方便.一向精勤求.有力趣向.專著不捨.亦不衰退.正伏其心.是名正方便諸賢.云何正念.謂聖弟子念苦是苦時.習是習.滅是滅.念道是道時.或觀本所作.或學念諸行.或見諸行災患.或見涅槃止息.或無著念觀善心解脫時.於中若心順念·背不向念·念遍·念憶·復憶·心心·不忘心之所應.是名正念.諸賢.云何正定.謂聖弟子念苦是苦時.習是習.滅是滅.念道是道時.或觀本所作.或學念諸行.或見諸行災患.或見涅槃止息.或無著念觀善心解脫時.於中若心住·禪住·順住.不亂不散.攝止正定.是名正定.諸賢.過去時是苦滅道聖諦.未來·現在時是苦滅道聖諦.眞諦不虛.不離於如.亦非顚倒.眞諦審實.合如是諦.聖所有.聖所知.聖所見.聖所了.聖所得.聖所等正覺.是故說苦滅道聖諦.於是頌曰
佛明達諸法 見無量善德
苦習滅道諦 善顯現分別
尊者舍梨子所說如是.彼諸比丘聞尊者舍梨子所說.歡喜奉行
分別聖諦經第十一竟(三千四百二十五字)
中阿含經卷第七(一萬一千三百六十九字)
中阿含舍梨子相應品第三竟(二萬七千五百一十二字)
(初一日誦)
三 一, 분별성제경(分別聖蹄經)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스티이에 노닐으시면서 승림 급고독원에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이것은 정행설법이니, 이른바 四성제다. 널리 껴잡고 두루 관찰하며, 분별하고 드러내며, 믿음을 열고 시설하며, 나타내 보이고 나아가게 한다. 과거의 모든 여래, 무소착, 등정각에게도 또한 이정행설법이 있었으니, 이른바 四성제다. 널리 껴잡고 두루 관찰하며, 분별하고 드러내며, 믿음을 내고 시설하며, 나타내 보이고 나아가게 하며, 분별하고 드러내며, 믿음을 열고 시설하며, 나타내 보이고 나아가게 할 것이다. 이제나, 현재의 여래, 무소착, 등적각에게도 또한 이 정행설법이 있으니, 이른바 四성제다. 널리 껴잡고 두루 관찰하며, 분별하고 드러내며, 믿음을 열고 시설하며, 나타내보이고 나아가게 한다.
샤아리푸트라 비구는 총명한 슬기, 속한 슬기,민첩한 슬기, 예리한 슬기,넓은 슬기, 깊은 슬기,도로 나아가는 슬기, 환히 아는 슬기,변재의 슬기가 있다. 샤아리푸트라 비구는 진실한 슬기를 성취했다.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나는 이 四성제를 간략하게 말하면, 그는 남을 위하여 널리 가르치고 두루 관찰하며, 분별하고 드러내며, 믿음을 열고 시설하며, 나타내 보이고 나아가게 한다. 그가 이 四성제를 널리 가르치고 두루 보이며, 분별하고 드러내며, 믿음을 열고 시설하며, 나타내 보이고, 나아가게 할 때에, 한량이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관찰할 수 있게 한다. 샤아리푸트라 비구는 바른 소견으로써 사람을 인도하고, 모옥갈라아나 비구는 사람으로 하여금 최상의 진제에서 서게 하나니, 이른바 누가 완전히 다하는 것이다. 샤아리푸트라 비구는 모든 범행을 나게 하는 것이 마치 생모와 같고, 모옥갈라아나 비구는 모든 범행을 자라게 하는 것이 마치 양모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범행자는 마땅히 샤아리푸트라와 모옥갈라아나 비구를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며, 공경하고 예배해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그 두 비구는 모든 범행자를 위하여 이치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기 때문이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고요히 앉으셨다. 이에 존자 샤아리푸트라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세존은 우리들을 위하여 세상에 나오셨다. 이른바 남을 위하여 이<四성제>를 널리 가르치고 두루 보이시며, 분별하고 드러내며, 믿음을 열고 시설하며, 나타내 보이고 나아가게 하신다. 어떤 것이 四인가. 이른바 고성제, 고집,고멸, 고멸도성제다. 그럼 어떤 것이 고성제인가. 이른바 남은 고통이요 늙음은 고통이며, 병은 고통이요 죽음은 고통이며, 원수와 만남이 고통이요 사랑과 여윔이 고통이며, 구하여 얻지 못함이 고통이요 간략하게 줄여서 五성음은 고통이다. 여러분, 남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남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저 모든 중생의 무리들은 배게되어 배고, 나오게 되면 곧 나와 五음을 일으킨 뒤에는 명근을 얻는다. 이것을 남이라 이름한다. 남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이 날 때에는 몸은 고통을 받으며, 온 몸의 고통을 느낌을 안다. 마음도 고통을 받되 두루 받으며, 두루 느낌을 깨닫는다. 몸이 뜨거워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느낀다. 마음도 뜨거워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몸과 마음도 뜨거워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몸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되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마음도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되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몸과 마음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되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여러분, 남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렇게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늙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늙음이란 또 무엇인가. 이른바 저 모든 중생의 무리들은 늙기 때문에 머리는 희고 이는 빠지며, 젊음은 날로 쇠한다. 허리는 굽고 다리는 휘어지며, 몸은 무겁고 피는 머리를 올라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살은 쭈그러들고 피부는 늘어나 주름살은 얽은 것 같으며, 모든 근은 낡고 얼굴빛은 추악하다. 이것을 늙음이라 한다. 늙음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이 늙을 때에는 몸은 고통을 받되 두루 고통을 받으며, 두루 느낌을 안다. 마음도 고통을 받으며, 두루 느낌을 안다.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받되 두루 고통을 받으며, 두루 느낌을 안다. 몸이 뜨거워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마음도 뜨거워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몸과 마음이 뜨거워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몸이 장렬하고 번뇌하고 우척하되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마음도 장렬하고 번뇌하고 우척하되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몸과 마음이 장렬하고 번뇌하고 두루 고통을 받고, 두루 느낌을 안다. 여러분, 늙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병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병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두통, 눈병, 귓병, 콧병, 낯병, 입술병, 잇병, 혓병, 잇몸병, 목병, 헐떡거림, 기침병, 구토, 후비, 지랄병, 등창, 경일, 피가래, 열병, 영윔병, 치질, 이증 등이다. 만일 이러한 따위와 그 밖의 여러 가지 병이 갱락촉에서 생겨 마음을 떠나지 않고 몸 속에 있으면 이것을 병일 한다. 병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이 앓을 때에는 몸은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몸이 뜨거워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물과 마음이 뜨거워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몸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여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몸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여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여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여러분, 병의 고통을 말함은 이러한 때문인 것이다. 죽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이른바 저 중생의 무리들은 목숨을 마치기 항상됨이 없어 죽으면 흩어져 멸하고, 수가 다하면 부서져 명근이 닫긴다. 이것을 죽이라 한다. 죽음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이 죽을 때에는 몸은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몸이 뜨거워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뜨거워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뜨거워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몸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여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여 벼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뜨겁고 번뇌하고 근심하여 변수를 받고, 변각을 깨닫는다. 죽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원수를 만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원수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에게는 실로 안의 六처가 있으니, 사랑하지 않는 안처와 이, 비, 설, 신, 의처가 그것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 한가 되고 서로 사귀고 가까이 하게 되게 함께 합해 괴로워한다. 이와 같이 의처와 갱락과 각, 상, 사, 의 사랑도 또한 그와 같다. 여러분, 중생에게는 실로 六계가 있으니, 사랑하지 않는 지계와 수, 호, 풍, 공, 식계가 그것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 하나가 되고 서로 사귀고 가까이 하게 되고 함께 합해 괴로와한다. 이것을 원수를 만남이라 한다. 여러분, 원수를 만나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이 원수를 만날 때에는 몸은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원수를 만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사랑을 떠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말하는가. 사랑을 떠나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에게는 실로 안의 六처가 있으니, 사랑하는 안처와 이, 비, 설, 신, 의처가 그것이다. 그들은 서로 달라 흩어져 서로 응하지 못하게 된다. 서로 떠나 모이지 못하고 사귀지 못하고 화합하지 못하여 괴로워 한다. 이와 같이 의처와 갱락, 각, 상, 사의 사랑도 또한 그와 같다. 중생에게는 실로 六계가 있으니, 사랑하는 지계와 수, 호풍, 공, 식계가 그것이다. 그들은 서로 달라 흩어져 서로 응하지 못하게 된다. 서로 떠나 모이지 못하고 사귀지 못하며, 가까이 하지 못하고 화합하지 못하여 괴로워 한다. 이것을 사랑의 떠남이라 한다. 사랑의 떠나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중생이 이별할 때에는 몸은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마음도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받고 변수를 받으며, 변각을 깨닫는다. 사랑을 떠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구하여 어디 못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른바 중생은 나는 것으로서 나는 법을 떠나지 못한다. 나로 하여금 나지 않게 하고자 해도 그것은 실로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늙는 법, 앓는 법, 죽는 법, 시름하는 법도 또한 그러하며, 그것은 걱정하고 슬퍼하는 법으로서 걱정하고 슬퍼하는 법을 떠나지 못한다. 나로 하여금 걱정하고 슬퍼하지 않게 하고자 해도 이 또한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은 실로 괴로운 것으로서 즐거워할 것도 없고 사아할 것도 없다 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내가 괴로운 것으로서 즐거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다면, 이것을 돌려 사랑할 만한 것으로 만들자"고. 그러나, 이 또한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 중생은 실로 즐거운 것으로서 사랑할 만한 것이라 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내가 즐거운 짓으로서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이것을 항상 오래 있게 하여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자"고. 그러나, 이 또한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은 실로 사상으로 즐거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다 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내가 사상으로서 즐거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다면, 이것을 돌려 사랑할 만한 것으로 만들자"고. 그러나, 이 또한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은 실로 사상으로서 사랑할 만한 것이라 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내가 사상으로서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이것을 항상 오래 있게 하여 변하지 않는 법으로 만들자"고. 그러나, 이 또한 그리 될 수 없는 것이다. 구하여 얻지 못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간략하게 줄여 五성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른바 색성음과 각,상, 행, 식성음이 그것이다. 또 五성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이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이것은 고성제였고, 미래와 현재에도 이것은 고성제이다. 참된 진리로서 헛되지 않고 여를 떠나지 않으며, 또한 뒤바뀜도 아니다. 참된 진리로서 분명하고 진실하여, 여시제에 합한다. 성인의 가진 바요 성인의 안 바며, 성인의 본 바요 성인의 깨달은 바며, 성인의 얻은 바요 성인의 바르게 두루 깨친 바이다. 그러므로 고성제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애집고집성제인가. 이른바 중생에게는 실로 사랑하는 안의 六처가 있으니, 안처와 이, 비, 설, 신, 의처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만일 애욕이 있고 느낌이 있으며, 물듦이 있고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집이라 한다. 여러분, 많이 아는 성인의 제자는 내가 이렇게 이 법을 알며, 이렇게 보고 이렇게 환히 알며, 이렇게 자세히 보고 이렇게 깨달은 것을 안다. 이것을 애집고집성제라 한다. 이렇게 안다니 어떻게 아는가. "만일 처자,종들,하인,권속,토지,가옥,점방,이자를 붙이는 재물을 사랑하고, 가지는 직업을 위하여 애정이 있고 더러움이 있으며, 물듦이 있고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집이라 한다"고. 그는 이 애집고집성제를 안다. 이와 같이 외처와 갱락, 각, 상, 사의 애정도 또한 이와 같다. 중생에게는 실로 사랑하는 六계가 있으니, 지계와 수, 화, 풍, 공, 식계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만일 애정이 있고 더러움이있으며, 물듦이 있고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집이라 한다.
여러분, 많이 아는 성인의 제자는 내가 이렇게 이 법을 알며, 이렇게 보고 이렇게 환히 알며, 이렇게 자세히 보고 이렇게 깨달은 것을 안다. 이것을 애집고집성제라 한다. 이렇게 안다니 어떻게 아는가. "만일 처자,종들,하인,권속,토지,가옥,점방,재물을 사랑하여 가지는 직업이 있으면, 애정이 있고 더러움이 있으며 물듦이 있고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집이라 한다"고. 그는 이 애집고집성제를 안다. 과거에도 이것은 애집고집성제였고, 미래와 현재에도 이것은 애집고집성제이다. 참된 진리로서 헛되지 않고 여를 떠나지 않으며, 또한 뒤바뀜도 아니다. 참된 진리로서 분명하고 진실하여 여시제에 합한다. 성인의 가진 바요 성인의 안 바며, 성인의 본 바요 성인의 깨달은 바며, 성인의 얻은 바요 성인의 바르게 두루 깨친 바이다. 그러므로 애집고집성제를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어떤 것이 애멸고멸성제인가. 이른바 중생에게는 실로 사랑하는 안의 六처가 있으니, 안처와 이, 비, 설, 신, 의처가 그것이다. 그가 만일 해탈하여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끊어서 버리고 다 뱉아서 욕을 아주 없애버리면, 이것을 고멸이라 한다. 많이 아는 성인의 제자가 이렇게 이 법을 알며, 이렇게 보고 이렇게 환히 알며, 이렇게 자세히 보고 이렇게 깨달은 것을 안다. 이것을 애멸고멸성제라 한다. 이렇게 안다니 어떻게 아는가. "만일 처자,종들,하인,권속,토지,가옥,점방,이자 붙는 재물을 사랑하지 않아서 가지는 직업이 없고, 그가 만닐 해탈하여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끊어 버리고 다 뱉아서 욕을 아주 없애버리면, 이것을 고멸이라 한다"고. 그는 이 애멸고멸성제를 안다. 이와 같이 외처와 갱락, 각, 상, 사의 사랑도 또한 그와 같다. 중생에게는 실로 사랑하는 六계가 있으니, 지계와 수,화, 풍, 공, 식계가 그것이다. 그가 만일 해탈하여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끊어서 버리고 다 뱉아서 욕을 아주 없애 버리면, 이것을 고멸이라 한다. 많이 아는 성인의 제자는 내가 이렇게 이 법을 알며, 이렇게 보고 이렇게 환히 알며, 이렇게 자세히 보고 이렇게 깨달은 것을 안다. 이것을 애멸고멸성제라 한다. 이렇게 안다니 어떻게 아는가. "만일 처자,종들,하인,권속,토지,가옥,점방,이자 붙이는 재물을 사랑하지 않아서 가지는 직업이 없으며, 그가 만일 해탈하여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끊어서 버리고 다 뱉아서 욕을 아주 없애 버리면, 이것을 고멸이라 한다"고. 그는 이 애멸고멸성제를 안다. 과거에도 이것은 애멸고멸성제였고, 미래와 현제에도이것은 애멸고멸성제이다. 참된 진리로서 헛되지 않아 여를 떠나지 않으며, 또한 뒤바뀜도 아니다. 참된 진리로서 분명하고 진실하여 여시제에 합한다. 성인의 가진 바요 성인의 안 바며, 성인의 본 바요 성인의 깨달은 바며, 성인의 얻은 바요 성인의 바르게 두루 깨친 바이다. 그러므로, 애멸고멸성제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고멸도성제인가. 이른바 바른 소견, 바른 뜻,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방편, 바른 생각, 바른 정이 그것이다. 또 어떤 것이 바른 소견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거나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거나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혹은 집착이 없는 착한 마음의 해탈을 생각하여 관찰할 때, 두루 가리어 가진 법을 결정하며, 두루 보고 관찰하여 환히 안다.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한다.
여러분, 어떤 것이 바른 뜻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거나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거나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혹은 집착이 없는 착한 마음의 해탈을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마음으로 살피고 두루 자세히 살피고 그것을 따라 실피어, 생각할 만한 것이면 생각할 만한 것이면 생각하고 바랄 만한 것이면 바란다. 이것을 바른 뜻이라 한다. 어떤 것이 바른 말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거나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거나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입의 四묘행은 제어하고 다른 모든 입의 악행은 멀리 떠나고 끊어 없애어, 행하지도 않고 짓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고 모으지도 않는다. 이것을 바른 말이라 한다.
어떤 것이 바른 행동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거나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거나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몸의 三묘행은 제하고 다른 모든 몸의 악행은 멀리 떠나고 끊어 없애어, 행하지도 않고 짓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고 모으지도 않는다. 이것을 바른 행동이라 한다.
어떤 것이 바른 생활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혹은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무리하게 구하지 않고 욕심이 많아 만족할 줄 모르지 않으며, 온갖 시굴과 주설의 사된 직업으로써 생활하지 않고 다만 법으로써 옷을 구하여 법이 아닌 것을 쓰지 않으며, 또한 법으로써 음식과 자리를 구하여 법이 아닌 것은 쓰지 않으며, 또한 법으러써 음식과 자리를 구하여 법이 아닌 것은 쓰지 않는다.
이것을 바른 생활이라 한다.
어떤 것이 바른 방편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쉽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만일 정진 방편이 있으면, 한결같이 꾸준히 힘써 구하고 힘차게 나아가 오로지 달라붙어 버리지 않으며, 또한 지쳐 물러나지도 않고 바르게 그 마음을 항복 받는다. 이것을 바른 방편이라 한다.
어떤 것이 바른 생각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만일 따르는 생각은 생각하고 향하지 않는 생각은 등지며, 두루한 생각을 생각하고 되풀이한 마음을 기억하여, 바르게 마음의 응하는 바를 잊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생각이라 한다.
어떤 것이 바른 정인가. 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집을 집, 멸을 멸, 도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본래 지은 바를 관찰하고 혹 모든 행을 생각하기를 배우며, 모든 행의 재환을 보고 열반과 그치어 쉼을 보며, 혹은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그 중에서 만일 마음이 머무르고 선이 머무르고 순함이 머물러, 어지럽지 않고 흩어지지 않아 바른 정을 거두어 잡으면, 이것을 바른 정이라 한다.
과거에도 이것은 고멸도성제요, 미래와 현재에도 이것은 고멸도성제다. 참된 진리로서 헛되지않고 여를 떠나지 않으며, 또한 뒤바뀜도 아니다. 참된 진리로서 분명하고 진실하여 여기제에 합한다. 성인의 가진 바요 성인의 안 바며, 성인의 본 바요 성인의 깨달은 바며, 성인의 얻은 바요 성인의 바르게 두루 깨친 바이다. 그러므로, 고멸도성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게송으로써 말하였다.
부처님은 모든 법을 환히 알아
한량이 없는 선한 덕을 보시고
고,집,멸,도의 四성제를
잡 나타내시고 분별하시네.
존자 샤아리푸트라가 이렇게 말하니, 여러 비구들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제13장 팔정도(八正道)
제785 광설팔성도경(廣說八聖道經)
(七八五)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如上說.差別者.何等爲正見.謂正見有二種.有正見.是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有正見.是聖·出世間.無漏·無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見有漏·有取.向於善趣.若彼見有施·有說.乃至知世間有阿羅漢.不受後有.是名世間正見.世·俗.有漏·有取.向於善趣.何等爲正見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謂聖弟子苦苦思惟.集·滅·道道思惟.無漏思惟相應.於法選擇.分別推求.覺知 慧.開覺觀察.是名正見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志.謂正志二種.有正志世·俗.有漏·有取.向於善趣.有正志.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志有世·俗.有漏·有取.向於善趣.謂正志出要覺·無 覺·不害覺.是名正志世·俗.有漏·有取.向於善趣.何等爲正志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謂聖弟子苦苦思惟.集·滅·道道思惟.無漏思惟相應心法.分別自決意解.計數立意.是名正志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語.正語有二種.有正語.世·俗.有漏·有取.向於善趣.有正語.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語世·俗.有漏·有取.向於善趣.謂正語離妄語·兩舌·惡口·綺語.是名正語世·俗.有漏·有取.向於善趣.何等正語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謂聖弟子苦苦思惟.集·滅·道道思惟.除邪命.念口四惡行·諸餘口惡行.離於彼.無漏·遠離·不着.固守·攝持不犯.不度時節.不越限防.是名正語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業.正業有二種.有正業.世·俗.有漏·有取.向於善趣.有正業.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業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謂離殺·盜· .是名正業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何等爲正業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謂聖弟子苦苦思惟.集·滅·道道思惟.除邪命.念身三惡行·諸餘身惡行數.無漏·心不樂着.固守·執持不犯.不度時節.不越限防.是名正業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命.正命有二種.有正命.是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有正命.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命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謂如法求衣食·臥具·隨病湯藥.非不如法.是名正命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何等爲正命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謂聖弟子苦苦思惟.集·滅·道道思惟.於諸邪命無漏·不樂着.固守·執持不犯.不越時節.不度限防.是名正命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方便.正方便有二種.有正方便.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有正方便.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方便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謂欲·精進·方便超出·堅固建立.堪能造作精進·心法攝受·常不休息.是名正方便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何等爲正方便是聖·出世間.無漏·不取.盡苦.轉向苦邊.謂聖弟子苦苦思惟.集·滅·道道思惟.無漏憶念相應心法.欲·精進·方便·勤踊.超出·建立堅固·堪能造作精進.心法攝受·常不休息.是名正方便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念.正念有二種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有正念.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念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若念·隨念·重念·憶念.不妄·不虛.是名正念世·俗.有漏·有取.正向善趣.何等爲正念是聖·出世間.無漏·不取.轉向苦邊.謂聖弟子苦苦思惟.集·滅·道道思惟.無漏思惟相應.若念·隨念·重念·憶念.不妄·不虛.是名正念是聖·出世間.無漏·不取.轉向苦邊.何等爲正定.正定有二種.有正定.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有正定.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何等爲正定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若心住不亂·不動·攝受·寂止·三昧·一心.是名正定世·俗.有漏·有取.轉向善趣.何等爲正定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謂聖弟子苦苦思惟.集·滅·道道思惟.無漏思惟相應心法住.不亂·不散·攝受·寂止·三昧·一心.是名正定是聖·出世間.無漏·不取.正盡苦.轉向苦邊.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785. 광설팔성도경(廣說八聖道經)
신수장경 : 2-203a
한글장경 : 잡-2-314
남전장경 : M.117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것은 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떤 것이 정견(正見)인가. 정견(正見)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정견(正見)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견(正見)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속의 정견(正見)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가. 만일 그가 보시와 주장이 있음을 보고,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아라한이 있어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 줄을 안다면, 그것이 이른바 세간의 정견(正見)으로서, 세속에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견(正見)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가. 이른바 성인은 고(苦)를 고(苦)라 생각하고, 집(集). 멸(滅). 도(道)를 집(集). 멸(滅). 도(道)라 생각하여, 번뇌가 없는 생각과 서로 알맞아, 법을 가리고 분별하고 구하여 깨달음과 지혜로 깨닫고 관찰한다. 이것이 이른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견(正見)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정지(正志)인가. 정지(正志)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정지(正志)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지(正志)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속의 정지(正志)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가. 그것은 탐욕을 뛰어난 깨달음·성냄이 없는 깨달음·해치지 않는 깨달음이니, 이것이 이른바 세속의 정지(正志)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지(正志)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인가. 이른바 성인은 고(苦)를 고(苦)라 생각하고, 집(集). 멸(滅). 도(道)를 집(集). 멸(滅). 도(道)라 생각하여, 번뇌가 없는 생각과 서로 알맞아, 법을 가리고 분별하고 구하여 스스로 결정하여 뜻으로 알고 헤아리고 세어 뜻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지(正志)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정어(正語)인가. 바른 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정어(正語)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어(正語)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속의 정어(正語)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가. 이른바 그 정어(正語)는 거짓말·두말·나쁜 말·꾸밈말을 떠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세속의 정어(正語)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어(正語)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인가. 이른바 성인은 고(苦)를 고(苦)라 생각하고, 집(集). 멸(滅). 도(道)를 집(集). 멸(滅). 도(道)라 생각하여, 삿된 생활인 입의 네 가지 행과 다른 여러 가지 입의 나쁜 행 즐기기를 버리고, 그것을 멀리 떠나 번뇌가 없이, 굳이 집착해 쓰지 않고 거두어 가져 범하지 않되, 때를 지나지 않고 한계를 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어(正語)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정업(正業)인가. 정업(正業)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정업(正業)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업(正業)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간의 정업(正業)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가. 살생과 도둑질과 사음(邪 )을 떠난 것이니, 이것이 세속의 정업(正業)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업(正業)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가. 이른바 성인은 고(苦)를 고(苦)라 생각하고, 집(集). 멸(滅). 도(道)를 집(集). 멸(滅). 도(道)라 생각하여, 삿 된 생활인 몸의 세 가지 나쁜 행과 다른 여러 가지 몸의 나쁜 행을 즐기기를 버리고, 번뇌가 없어 즐겨 집착하여 굳이 행하지 않으며 잡아가져 범하지 않되, 때를 지나지 않고 한계를 넘지 않다. 이것이 이른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업(正業)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정명(定命)인가. 정명(定命)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정명(定命)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명(定命)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속의 정명(正命)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가. 의복·음식·침구·탕약을 법다이 구하고 법답지 않은 것이 아니니, 이것을 이른바 세속의 정명(正命)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명(正命)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성인은 고(苦)를 고(苦)라 생각하고, 집(集). 멸(滅). 도(道)를 집(集). 멸(滅). 도(道)라 생각하여, 모든 삿된 생활에 대해 번뇌가 없어, 즐겨 집착해 굳이 행하지 않고 잡아가져 범하지 않되, 때를 지나지 않고 한계를 넘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명(正命)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바른 방편인가. 바른 방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바른 방편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바른 방편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속의 바른 방편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가. 정진하고 방편으로 뛰어나기를 바라면서 굳게 서고, 만들고 정진하기를 능히 견디어 마음과 법으로 거두어 잡아 언제나 쉬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세속의 바른 방편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바른 방편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성인은 고(苦)를 고(苦)라 생각하고, 집(集). 멸(滅). 도(道)를 집(集). 멸(滅). 도(道)라 생각하여, 번뇌가 없는 생각과 서로 알맞아, 마음과 법으로 정진하고 방편하여, 부지런하고 뛰어나기를 바라면서, 굳게 서고 만들고 정진하기를 능히 견디어, 마음과 법으로 거두어 잡아 언제나 쉬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바른 방편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정념(正念)인가. 정념(正念)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정념(正念)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념(正念)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속의 정념(正念)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가. 만일 생각을 따르고 생각을 소중히 알며 생각을 기억하되, 망녕되지 않고 헛되지 않으면, 이것이 이른바 세속의 정념(正念)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념(正念)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인가. 성인의 제자는 고(苦)를 고(苦)라 생각하고, 집(集). 멸(滅). 도(道)를 집(集). 멸(滅). 도(道)라 생각하여, 번뇌 없는 생각과 서로 알맞고, 만일 생각을 따르고 생각을 소중히 알며 생각을 기억하되, 망녕되지 않고 헛되지 않으면, 이것이 이른바 세간의 뛰어난 성인의 정념(正念)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정정(正定)인가. 정정(正定)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정정(正定)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요, 하나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정(正定)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속의 정정(正定)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가. 만일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데 머물러 거두어 잡아, 고요히 그치고 삼매에 들어 한 마음이 되면, 이것이 이른바 세속의 정정(正定)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있어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정(正定)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가. 성인의 제자는 고(苦)를 고(苦)라 생각하고, 집(集). 멸(滅). 도(道)를 집(集). 멸(滅). 도(道)라 생각하여, 번뇌가 없는 생각과 서로 알맞아, 마음과 법으로 어지럽거나 흩어지지 않는 데에 머물러, 거두어 잡아 고요히 그치고 삼매에 들어 한 마음이 된다. 이것이 이른바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정정(正定)으로써, 번뇌와 취함이 없고, 바로 괴로움을 없애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M. 117 Discourse pertaining to the great forty(Mah catt sakasutta)
Thus have I heard : At one time the Lord was staying near S vatthi in the Jeta Grove in An thapi ika's monastery. While he was there the Lord addressed the monks, saying : "Monks." "Revered One," these monks answered the Lord in assent. The Lord spoke thus: "I will teach you, monks, the ariyan right concentration with the causal associations, with the accompaniments. Listen to it, attend carefully and I will speak."
"Yes, revered sir," these monks answered the Lord in assent.
The Lord spoke thus :
"And what, monks, is the ariyan right concentration with the causal associations, with the accompaniments ? It is right view, right purpose,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mode of livelihood, right endeavour, right mindfulness. Whatever one-pointedness of mind, monks, is accompanied by these seven components, this, monks, is called the ariyan right concentration with the causal associations and the accompaniments.
As to this, monks, right view comes first. And how, monks, does right view come first ? If one comprehends that wrong view is wrong view and comprehends that right view is right view, that is his right view. And what, monks, is wrong view ? 'There is no (result of)gift, no (result of) offering, no (result of) sacrifice; there is no fruit or ripening of deeds well done or ill done; there is not this world, there is not a world beyond; there is no (benefit from serving) mother or father; there are no beings of spontaneous uprising; there are not in the world recluses and brahmans who are faring rightly, proceeding rightly, and who proclaim this world and the world beyond having realised them by their own super-knowledge.' This, monks, is a wrong view.
And what, monks, is right view ? Now, I, monks, say that right view is twofold. There is, monks, the right view that has cankers, that is on the side of merit, that ripens unto cleaving (to new birth). There is, monks, the right view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And what, monks is the right view that has cankers, that is on the side of merit, that ripens unto cleaving (to new birth) ? 'There is (result of)gift . . . offering . . . sacrifice; there is fruit and ripening of deeds well done or ill done; there is this world, there is a world beyond; there is (benefit from serving) mother and father; there are spontaneously arising beings; there are in the world recluses and brahmans . . . who proclaim this world and the world beyond having realised them by their own super-knowledge.' This, monks, is a right view that has cankers, is on the side of merit, that ripens unto cleaving (to new birth).
And what, monks is the right view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 Whatever, monks, is wisdom, the cardinal faculty of wisdom, the power of wisdom, the component of enlightenment that is investigation into things, the right view that is a component of the Way in one who, by developing the ariyan Way, is of ariyan thought, cankerless thought, conversant with the ariyan Way - this, monks, is a right view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Whoever makes endeavour for the riddance of wrong view, for the attainment of right view, that is his right endeavour. Mindful, he gets rid of wrong view; mindful, entering on right view, he abides in it. This is his right mindfulness. Thus these three things circle round and follow after right view, that is to say: right view, right endeavour, right mindfulness.
As to this, monks, right view comes first. And how, monks, does right view come first ? If one comprehends that wrong purpose is wrong purpose and comprehends that right purpose is right purpose, that is his right view. And what, monks, is wrong purpose ?
Purpose for sense-pleasures, purpose for ill-will, purpose for harming. This, monks, is wrong purpose. And what, monks, is right purpose ? Now I, monks, say that right purpose is twofold. There is, monks, the right purpose that has cankers, is on the side of merit, and ripens unto cleaving (to new birth). There is, monks, the right purpose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factor of the Way. And what, monks, is the right purpose that has cankers, is on the side of merit, and ripens unto cleaving ? Purpose for renunciation, purpose for non-ill-will, purpose for non-harming. This, monks, is right purpose that . . . ripens unto cleaving.
And what, monks, is the right purpose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 Whatever, monks, is reasoning, initial thought, purpose, an activity of speech through the complete focussing and application of the mind in one who, by developing the ariyan Way, is of ariyan thought, of cankerless thought, and is conversant with the ariyan Way-this, monks, is right purpose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Whoever makes endeavour for the riddance of wrong purpose, for the attainment of right purpose, that is his right endeavour. Mindful, he gets rid of wrong purpose; mindful, entering on right purpose he abides in it. That is his right mindfulness. Thus these three things circle round and follow after right purpose, that is to say: right view, right endeavour, right mindfulness.
As to this, monks, right view comes first. And how, monks, does right view come first ? If one comprehends that wrong speech is wrong speech and comprehends that right speech is right speech, that is his right view. And what, monks, is wrong speech ? Lying, slanderous speech, harsh speech, gossiping. This, monks, is wrong speech. And what, monks, is right speech ? Now, I, monks, say that right speech is twofold. There is, monks, the right speech that has cankers, is on the side of merit, that ripens unto cleaving (to new birth). There is, monks, the right speech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And what, monks, is the right speech that . . . ripens unto cleaving (to new birth) ? Abstaining from lying, abstaining from slanderous speech . . . harsh speech . . . gossiping. This, monks, is the right speech that has cankers, is on the side of merit, that ripens unto cleaving (to new birth).
And what, monks, is the right speech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 Whatever, monks, is abstention from, refraining from, avoidance of, restraint from the four ways of bad conduct in speech in one who, by developing the ariyan Way is fo ariyan thought, of cankerless thought, and is conversant with the Way-this, monks, is right speech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Whoever makes endeavour for the riddance of wrong speech, for the attainment of right speech, that is his right endeavour. Mindful, he gets rid of wrong speech; mindful, entering of right speech, he abides in it. That is his right mindfulness. Thus these three things circle round and follow after right speech, that is to say: right view, right endeavour, right mindfulness.
As to this, monks, right view comes first. And how, monks, does right view come first ? If one comprehends that wrong action is wrong action and comprehends that right action is right action, that is his right view. And what, monks, is wrong action ? Onslaught on creatures, taking what has not been given, wrong enjoyment among the sense-pleasures. This, monks, is wrong action. and what, monks, is right action ? Now, I. monks, say that right action is twofold. There is, monks, the right action that has cankers, is on the side of merit, that ripens unto cleaving (to new birth). There is, monks, the right action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And what, monks, is the right action that . . . ripens unto cleaving (to new birth) ? It is, monks, abstaining from onslaught on creatures, abstaining from taking what has not been given, abstaining from wrong enjoyment among what has not been given, abstaining from wrong enjoyment among the sense-pleasures. This, monks, is the right action that has cankers, is on the side of merit, and ripens unto cleaving.
And what, monks, is the right action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 Whatever, monks, is abstention from, refraining from, avoidance of, restraint from the three ways of bad conduct in body in one who, by developing the ariyan Way is of ariyan thought, of cankerless thought, and is conversant with the Way - this, monks, is right action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Whoever makes endeavour for the riddance of wrong action, for the attainment of right action, that is his right endeavour. Mindful, he gets rid of wrong action; mindful, entering on right action, he abides in it. that is his right mindfulness. Thus these three things circle round and follow after right action, that is to say: right view, right endeavour, right mindfulness.
As to this, monks, right view comes first. And how, monks, does right view cone first ? If one comprehends that wrong mode of livelihood is wrong mode of livelihood is wrong mode of livelihood and comprehends that right mode of livelihood is right mode of livelihood, that is his right view. And what, monks, is wrong mode of livelihood ? Trickery, cajolery, insinuation, dissembling, rapacity for gain upon gain. This, monks, is wrong node of livelihood. And what, monks, is right mode of livelihood ? Now, I, monks, say that right mode of livelihood is twofold. There is, monks, the right mode of livelihood that has cankers, is on the side of merit, that ripens unto cleaving (to new birth). There is, monks, the right mode of livelihood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And what, monks, is the right mode of livelihood that . . . ripens unto cleaving (to new birth) ? Herein, monks, an ariyan disciple, by getting rid of wrong mode of livelihood, earns his living by right mode of livelihood. This, monks, is right mode of livelihood that has cankers, is on the side of merit, and ripens unto cleaving.
And what, monks, is the right mode of livelihood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 Whatever, monks, is abstention from, refraining from, avoidance of, restraint from wrong mode of livelihood in one who, by developing the ariyan Way is of ariyan thought, of cankerless thought, and is conversant with the Way-this, monks, is right mode of livelihood that is ariyan, cankerless, supermundane, a component of the Way.
Whoever makes endavour for the riddance of wrong mode of livelihood, for the attainment of right mode of livelihood, that is his right endeavour. Mindful, he gets rid of wrong mode of livelihood; mindful entering on right mode of livelihood, he abides in it. This is his right mindfulness. Thus these three things circle round and follow after right mode of livelihood, that is to say: right view, right endeavour, right mindfulness.
As to this, monks, right view comes first. And how, monk, does right view come first ? Right purpose, monks, proceeds from right view; right speech proceeds from right purpose; right action proceeds from right speech; right mode of livelihood proceeds from right action; right endeavour proceeds from right mode of livelihood: right mindfulness proceeds from right endeavour; right concentration proceeds from right mindfulness; right mindfulnesss proceeds from right endeavour; right concentration proceeds from right mindfulness; right knowledge proceeds from right concentration; right freedom proceeds from right knowledge. In this way, monks, the learner's course is possessed of eight components, the perfected one's of the components.
As to this, monks, right view comes first. And how, monks, does right view come first ? Wrong view, monks, is worn away in one of right view; and those various evil unskilled things that arise conditioned by wrong view are worn away in him; and various skilled things conditioned by right view cone to development and fulfilment. /wrong purpose, monks, is worn away in one of right purpose; and those various evil unskilled things that arise conditioned by wrong purpose are worn away in him; and various skilled things conditioned by right purpose come to development and fulfilment. Wrong speech, monks, is worn away in one of right speech . . .wrong action, monks, is worn away in one of right action . . . Wrong mode of livelihood, monks, is worn away in one of right mode of livelihood . . . . . . Wrong endeavour, monks, is worn away in one of right endeavour . . . Wrong mindfulness, monks, is worn away in one of right mindfulness . . . Wrong concentration, monks, is worn away in one of right concentration . . . Wrong knowledge, monks, is worn away in one of right knowledge . . .Wrong freedom, monks, is worn away in one of right freedom; and those various evil unskilled things that arise conditioned by wrong freedom are worn away in him; and various skilled things conditioned by right freedom come to development and fulfilment. So, monks, there are twenty (components) on the side of skill, twenty on the side of unskill. The disquisition on dhamma pertaining to the Great Forty that has been rolled on is not to be rolled back by a recluse or brahman or a deva or a M ra or a Brahm or by anyone in the world. Monks, whatever recluse or brahman should think that this disquisition on dhamma pertaining to the Great Forty should be censured, should be scorned, ten ways of speaking from the standpoint of dhamma give grounds for censuring him here and now: if the worthy one censures right view then those recluses and brahmans who are of wrong view are the worthies to be honoured, the worthies to be extolled; if the worthy one censures right thought then those recluses and brahmans who are of wrong thought are the worthies to be honoured, to be extolled; if the worthy one censures right speech . . . right action . . . right mode of livelihood . . . right endeavour . . . right mindfulness . . . right concentration . . . right knowledge . . . right freedom, them those recluses and brahmans who are of wrong speech . . . freedom are the worthies to be honoured, to be extolled. Monks, whatever recluse or brahman should think that this disquisition on dhamma pertaining to the Great Forty should be censured, should be scorned, these ten ways of speaking from the standpoint of dhamma give grounds for censuring him here and now. Monks, even those who were the people of Ukkala and the Vassas and Bhannas, deniers of cause, deniers of the effection (by cause), affirmers of 'There is not' - even these would think that the disquisition on dhamma pertaining to the Great Forty should not be censured, should not be scorned. What is the reason for this ? The fear of blame, of attack and reproach."
Thus spoke the Lord. Delighted, these monks rejoiced in what the Lord had said.
Discourse pertaining to the Great Forty :
The Seventh
M. 117 Discourse pertaining to the great forty
(Mah catt sakasutt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부처님은 사바티 근처의 제타 숲속의 아나타핀타카 승원에 머무르고 계셨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관념의 원인과 완벽한 올바른 집중, 그 밖의 것들의 대하여 가르침을 비구들에게 설하겠다. 내가 말하는 것을 잘 들고 주의 깊게 사유하라.
네 부처님. 하고 그들은 대답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관념의 원인과 완벽한 올바른 집중, 그 밖의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정진(正精進),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이다. 이들 일곱가지 구성요소와 동반하는 정정(正定), 이것을 비구들이여 관념의 원인과 완벽한 올바른 집중, 그 밖의 것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정견이 처음에 온다. 왜 정견이 처음에 오는가? 그것은 만약 사견(邪見)이 사견임을 이해하고 정견(正見)이 정견임을 이해해야 정견(正見)이기 때문이다. 사견이란 무엇인가? 보시(의 결과)도 없고, 헌공(의 결과)도 없고, 재물(의 결과)도 없고, 선업이나 악업의 갚음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나 아버지(봉양하는 이익)도 없고, 자연히 일어나는 존재도 없고, 사문이나 브라만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절차나 행동의 세계도 없고, 그들 자신의 자각에 의해 실현되는 이 세계와 저 세상이 있다고 선언하는 것 이것을 사견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정견(正見)이라 하는가? 지금 나는 정견(正見)에 두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세속의 정견(正見)에는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다. 성스런 정견(正見)은 번뇌를 제거하고 세속을 초월하고 정도의 구성요소의 하나이다. 세속의 정견에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시(의 결과)도 있고, . . 헌공(의 결과)도 있고, . . 재물(의 결과)도 있고, 선행이나 악행에 대한 과보와 이숙이 있고, 이 세상이 있고 저 세상이 있다. 부모(봉양하는 이익)도 있고, 세속을 초월한 존재도 있고, 수행자나 브라만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절차나 행동의 세계도 있고, 그들 자신의 자각에 의해 실현되는 이 세계와 저 세상이 있다고 선언하는 것 이것을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는 정견이라 한다.
성스런 정견(正見)은 번뇌를 제거하고 세속을 초월하고 정도(正道) 구성요소의 하나란 무엇인가? 지혜가 있고, 지혜의 으뜸인 능력이 있고, 지혜의 힘이 있고, 사물을 음미하여 계발하는 구성요소이고, 성스런 방법과 함께 하는 밝음, 번뇌가 없는 생각, 성스런 생각으로 성스런 정도의 발전에 의한,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정도의 구성요소이다. 이것은 번뇌가 없고 세속을 초월한 것이고 정도의 구성요소가 있는 정견(正見)이다.
사견(邪見)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정견(正見)을 얻게 되고, 그는 정정진(正精進)을 얻게된다. 주의 깊은 사유로 사견을 제거하고, 주의 깊은 사유로 정견에 들어가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정념(正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정견(正見)을 얻은 후에 정견(正見)과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에 따르고 3가지를 순환한다.
비구들이여 정견이 처음에 온다. 왜 정견이 처음에 오는가? 그것은 만약 나쁜 사유(思惟)를이 나쁜 사유(思惟)로 이해하고 정사유(正思惟)가 정사유(正思惟)임을 이해해야 정견(正見)이기 때문이다. 나쁜 사유(思惟)란 무엇인가? 감각의 즐거움을 위해 사유(思惟)하고, 나쁜 의지를 위해 사유하고, 손상을 주기 위해 사유하는 것으로 이것이 나쁜 사유(思惟)이다.
비구들이여 정사유(正思惟=正志)란 무엇인가? 지금 나는 정사유(正思惟)에 두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세속의 정사유(正思惟)에는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다. 성스런 정사유(正思惟)는 번뇌를 제거하고 세속을 초월하고 정도의 구성요소의 하나이다. 세속의 정사유(正思惟)에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포기를 위한 사유, 고통의 제거를 위한 의지, 손상을 입히지 않기 위한 의지 이것을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는 정사유(正思惟)라 한다.
성스런 정사유(正思惟)는 번뇌를 제거하고 세속을 초월하고 정도(正道) 구성요소의 하나란 무엇인가? 이성적이고, 처음 생각이고, 의도가 있고, 성스런 생각으로 성스런 정도의 발전에 의한,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정도의 구업(口業)이다. 이것은 번뇌가 없고 세속을 초월한 것이고 정도의 구성요소가 있는 정사유(正思惟)이다.
누구나 나쁜 사유(思惟)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정사유(正思惟)를 얻게 되고, 그는 정사유(正思惟)를 이루게 된다. 주의 깊은 사유로 나쁜 사유(思惟)를 제거하고, 주의 깊은 사유로 정사유(正思惟)에 들어가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정사유(正思惟)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정사유(正思惟)을 얻은 후에 정견(正見)과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에 따르고 3가지를 순환한다.
비구들이여 정견이 처음에 온다. 왜 정견이 처음에 오는가? 그것은 만약 사어(邪語)를 사어(邪語)로 이해하고 정어(正語)가 정어(正語)임을 이해해야 정견(正見)이기 때문이다. 사어(邪語)란 무엇인가? 거짓말, 비방하는 말, 거친 말, 수다스러운 말 이것이 사어(邪語)이다.
비구들이여 정어(正語)란 무엇인가? 지금 나는 정어(正語)에 두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세속의 정어(正語)에는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다. 성스런 정어(正語)는 번뇌를 제거하고 세속을 초월하고 정도의 구성요소의 하나이다. 세속의 정어(正語)에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거짓말을 절제하고, 비방을 절제하고, 거친 말을 절제하고, 수다스러운 말을 절제하는 것 이것을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는 세속적 정어(正語)라 한다.
성스런 정어(正語)는 번뇌를 제거하고 세속을 초월하고 정도(正道) 구성요소의 하나란 무엇인가? 성스런 사유에 성스런 길의 계발에 의한 나쁜 말의 4가지를 자제하고, 삼가고, 기피하고, 억제하는 것 이것은 번뇌가 없고 세속을 초월한 것이고 정도의 구성요소가 있는 정어(正語)이다.
누구나 사어(邪語)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정어(正語)를 얻게 되고, 그는 정정진(正精進)을 이루게 된다. 주의 깊은 사유로 사어(邪語)를 제거하고, 주의 깊은 사유로 정어(正語)에 들어가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정념(正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정어(正語)를 얻은 후에 정견(正見)과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에 따르고 3가지를 순환한다.
비구들이여 정견이 처음에 온다. 왜 정견이 처음에 오는가? 그것은 만약 사업(邪業)을 사업(邪業)로 이해하고 정업(正業)이 정업(正業)임을 이해해야 정견(正見)이기 때문이다. 사업(邪業)이란 무엇인가? 생물에 대한 맹공격(살생),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偸盜), 감각적 즐거움 중에서 나쁜 향유(邪 ) 이것이 사업(邪業)이다.
비구들이여 정업(正業)이란 무엇인가? 지금 나는 정업(正業)에 두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세속의 정업(正業)에는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다. 성스런 정업(正業)에는 번뇌를 제거하고 세속을 초월하고 정도의 구성요소의 하나이다. 세속의 정업(正業)에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물에 대한 맹공격을 절제하고(살생을 금하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을 자제하고, 감각적 즐거움 중에서 나쁜 향유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 이것을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는 정업(正業)이라 한다.
성스런 정업(正業)에는 번뇌를 제거하고 세속을 초월하고 정도(正道) 구성요소의 하나란 무엇인가? 성스런 정업(正業)에 성스런 길의 계발에 의한 나쁜 행동의 3가지를 자제하고, 삼가고, 기피하고, 억제하는 것 이것은 번뇌가 없고 세속을 초월한 것이고 정도의 구성요소가 있는 정업(正業)이다.
누구나 사업(邪業)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정업(正業)을 얻게 되고, 그는 정정진(正精進)을 이루게 된다. 주의 깊은 사유로 사업(邪業)을 제거하고, 주의 깊은 사유로 정업(正業)에 들어가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정념(正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정업(正業)을 얻은 후에 정견(正見)과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에 따르고 3가지를 순환한다.
비구들이여 정견이 처음에 온다. 왜 정견이 처음에 오는가? 그것은 만약 사명(邪命)을 사명(邪命)로 이해하고 정명(正命)이 정명(正命)임을 이해해야 정견(正見)이기 때문이다. 사명(邪命)이란 무엇인가? 속임수, 아첨, 교묘한 환심, 진의를 숨김, 끊임없이 얻기 위한 탐욕 이것이 사명(邪命)이다.
비구들이여 정명(正命)이란 무엇인가? 지금 나는 정명(正命)에 두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세속의 정명(正命)에는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다. 성스런 정명(正命)에는 번뇌를 제거하고 세속을 초월하고 정도의 구성요소의 하나이다. 세속의 정명(正命)에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명(邪命)을 제거하고 정명(正命)을 획득하는 것 이것을 번뇌가 있고, 장점의 한 측면이 있고, (새 생에 대한)업보를 받을 때까지 집착이 있는 정명(正命)이라 한다.
성스런 정명(正命)에는 번뇌를 제거하고 세속을 초월하고 정도(正道) 구성요소의 하나란 무엇인가? 성스런 정업(正業)에 성스런 길의 계발에 의한 사명(邪命)을 자제하고, 삼가고, 기피하고, 억제하는 것 이것은 번뇌가 없고 세속을 초월한 것이고 정도의 구성요소가 있는 정명(正命)이다.
누구나 사명(邪命)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정명(正命)을 얻게 되고, 그는 정정진(正精進)을 이루게 된다. 주의 깊은 사유로 사명(邪命)을 제거하고, 주의 깊은 사유로 정명(正命)에 들어가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정념(正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정업(正業)을 얻은 후에 정견(正見)과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에 따르고 3가지를 순환한다.
비구들이여 정견이 처음에 온다. 왜 정견이 처음에 오는가? 정사유(正思惟)는 정견(正見)으로부터의 결과이고, 정어(正語)는 정사유(正思惟)로부터의 결과이고, 정업(正業)은 정어(正語)로 부터의 결과이고, 정명(正命)은 정업(正業)으로부터의 결과이고, 정정진(正精進)은 정명(正命)으로부터의 결과이고, 정념(正念)은 정정진(正精進)으로부터의 결과이고, 정정(正定)은 정념(正念)으로부터의 결과이고, 바른 지혜는 정정(正定)으로부터의 결과이고, 정해탈(正解脫)은 바른 지혜의 결과이다. 배우는 자들은 이와 같이 8정도를 배우고, 10가지의 깨닫는 방법이 있다.
비구들이여 정견(正見)이 처음에 온다. 왜 정견(正見)이 처음에 오는가? 사견은 정견을 항상 가지고 사견에 의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나쁜 미숙한 것들을 그들 안에서 사라지게 되고 그리고 정견은 여러 가지 숙련된 것들을 계발하고 성취하게 한다. 나쁜 의지는 정사유(正思惟)를 항상 가지고 나쁜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나쁜 미숙한 것들을 그들 안에서 사라지게 되고 그리고 정사유(正思惟)는 여러 가지 숙련된 것들을 계발하고 성취하게 한다. 나쁜 말은 정어(正語)를 항상 가지고 나쁜 말에 의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나쁜 미숙한 것들을 그들 안에서 사라지게 되고 . . . 사업(邪業)은 정업(正業)을 항상 가지고 사업(邪業)에 의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나쁜 미숙한 것들을 그들 안에서 사라지게 되고 . . . 사명(邪命)은 정명(正命)을 항상 가지고 사명(邪命)에 의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나쁜 미숙한 것들을 그들 안에서 사라지게 되고 . . . 나쁜 정진(精進)은 정정진(正精進)을 항상 가지고 정정진에 의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나쁜 미숙한 것들을 그들 안에서 사라지게 되고 . . . 사념(邪念)은 정념(正念)을 항상 가지고 사념(邪念)에 의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나쁜 미숙한 것들을 그들 안에서 사라지게 되고 . . . 사정(邪定)은 정정(正定)을 항상 가지고 사정에 의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나쁜 미숙한 것들을 그들 안에서 사라지게 되고 . . . 나쁜 지혜는 올바른 지혜를 항상 가지고 나쁜 지식에 의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나쁜 미숙한 것들을 그들 안에서 사라지게 되고 . . . 나쁜 해탈은 바른 해탈을 항상 가지고 나쁜 해탈에 의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나쁜 미숙한 것들을 그들 안에서 사라지게 되고 그리고 바른 해탈은 여러 가지 숙련된 것들을 계발하고 성취하게 한다. 비구들이여 그들은 훈련된 것 20개와 훈련되지 않는 20개로 구성되어 있다. 법에 속하는 40개를 탐구하는 법륜은 수도자나 바라문이나 천이나 마나 범이나 세간의 사람들에 의해 되돌려 지지는 않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사문이나 바라문이 이 40개의 법에 속하는 것을 탐구하는 것을 비난하고 경멸하여 그를 비난을 위한 법의 견해로부터 말의 10가지를 여기서 지금 하더라도 ; 만약 비난할 가치 그들 수도자나 브라만이 사견으로 명예에 가치가 있고, 칭찬할 가치가 있고 ; 만약 올바른 생각을 그들 사문이나 브라만이 명예를 위하여 칭찬을 위한 나쁜 생각은 가치가 있다. 정어(正語) . . . 정업(正業). . . 정명(正命) . . . 정정진(正精進) . . . 정념(正念) . . . 정정(正定) . . . 비른 지혜 . . 바른 해탈은 수도자나 브라만이 나쁜 말 .... 해탈은 명예를 위한 가치가 있고, 칭찬할 가치가 있다. 구들이여 수행자나 바라문이 이 40개의 법에 속하는 것을 탐구하는 것을 비난하고 경멸하여 그를 비난을 위한 법의 견해로부터 말의 10가지를 여기서 지금 하더라도 가치가 없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그들 욱카라와 바사스나 바아나 사람들은 인(因)을 부정하고 과(果)를 부정하는 그것은 아니라고 단언하더라도 - 법에 속하는 40가지를 비난하지 않고 경멸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비난과 공격과 그리고 비난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주 기뻐하였고 그들 비구들은 부처님이 이야기를 가지고 기뻐하였다.
[개념정리] - 팔정도(八正道)
Ⅰ. 서론
'8정도'는 중도(中道)의 실천법이다. '중도를 실천하라'고 하면 막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덟 가지 구체적인 실천 강령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수행에 있어서나 일상생활에 있어서 모든 영역에서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바르다[正]고 한 것은 이 8정도를 통해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존재론적인 고(苦)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행복의 상태[涅槃]를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Ⅱ. 본론
8정도는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생각[正思惟],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기억[正念], 올바른 정신 집중[正定] 등의 여덟 가지이다.
※ 잡아함경 권 28(787경, 788경)에서는, 정견(正見)이 다른 일곱 가지 항목을 일으킨다고 하였으며, 또 팔리 증지부 7, 42에서는 정견(正見)에서부터 정념(正念)에 이르는 일곱 가지가 정정(正定)에 도움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팔정도의 정견과 다른 일곱 항목, 정정(正定)과 다른 일곱 항목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올바른 견해[正見]이란 자기와 세계를 보는 바른 가치관을 말한다. 즉 이 세상은 인과 연의 관계에 의해 진행된다는 연기법(緣起法)의 이치를 분명히 아는 것이며, 이 사바세계는 고통스러운 곳[苦諦]이며, 이 고통의 원인[集諦]을 알아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는 수행[道諦]을 통해 절대 행복의 경지[滅諦]를 증득할 수 있다[四聖諦]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배워서 실천하려는 확고한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지 못하면 세상을 옳게 살아갈 수 없다. 아직 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워서 바른 세계관을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올바른 생각[正思惟]은 3업 가운데 의업(意業)으로써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과 나만 편하고 잘살면 그만 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어렵고 불행에 처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아가려는 보살의 마음[慈悲喜捨]을 가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올바른 말[正語]은 3업 가운데 구업(口業)으로써 허망한 말[妄語] 대신 진실한 말을, 입에 발린 말[綺語] 대신 정직한 말을, 이간질하는 말[兩舌] 대신 화합시키는 말을, 험악한 말[惡口] 대신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입은 잘 사용하면 복이 들어오지만 잘못 사용하면 재앙이 들어오는 문임을 명심하자.
올바른 행동[正業]은 3업 가운데 신업(身業)을 말한다. 살생(殺生)하지 않고 방생(放生)하며, 도적질하지 않고 보시(布施)하며, 삿된 음행하지 않고 청정하게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올바른 생활[正命]은 바른 생각을 가지고 건전한 삶의 목적을 위해 일상의 생활을 영위해 가는 것을 말한다.
올바른 노력[正精進]은 우리의 의식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기 때문에 계속 노력하지 많으면 않된다.
올바른 기억[正念]은 '思'와 '念'은 모두 생각한다는 의미이지만 '念'은 과거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思'는 미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염불(念佛)'이라고는 하지만 '사불(思佛)'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념이란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바르게 기억하여 생각한다는 뜻이다.
올바른 정신 집중[正定]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멈추고[止] 삼매(三昧)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Ⅲ. 결론
이와 같이 팔정도는 열반을 성취하는 길인 것이며, 그것은 어떤 다른 세계로 초월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팔정도를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삼을 때 성취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시불교, 水野弘元 著. 134.p ~ 141.p
(七八四) 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有邪·有正.諦聽.善思.當爲汝說.何等爲邪.謂邪見.乃至邪定.何等爲正.謂正見.乃至正定.何等爲正見.謂說有施·有說·有齋.有善行·有惡行.有善惡行果報.有此世·有他世.有父母·有衆生生.有阿羅漢善到·善向.有此世·他世自知作證具足住.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何等爲正志.謂出要志·無 志·不害志.何等爲正語.謂離妄語·離兩舌·離惡口·離綺語.何等爲正業.謂離殺·盜· .何等爲正命.謂如法求衣服·飮食·臥具·湯藥.非不如法.何等爲正方便.謂欲·精進·方便·出離·勤競·堪能常行不退.何等爲正念.謂念隨順.念不妄·不虛.何等爲正定.謂住心不亂·堅固·攝持·寂止·三昧·一心.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784. 사정경(師正經)
신수장경 : 2-203a
한글장경 : 잡-2-313
남전장경 : s.45.21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삿됨과 바름이 있으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리라. 어떤 것이 삿됨인가. 삿된 소견과 나아가서는 삿된 선정이다. 어떤 것이 바름인가. 바른 소견과 나아가서는 바른 선정이니라.
어떤 것이 바른 소견인가. 보시가 있고 주장과 재가 있으며, 선한 행위, 악한 행위와 선하고 악한 행위의 갚음이 있고,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고, 부모와 중생의 남이 있으며, 잘 도착하고 잘 향하는 아라한의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어서, 증득한 줄을 스스로 알고 완전히 이루어 머물러,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생의 몸을 받지 않을 줄 스스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뜻인가. 탐욕을 뛰어난 뜻, 성냄이 없는 뜻, 해치지 않는 뜻이다. 어떤 것이 바른 말인가. 거짓말·두 말·나쁜 말·꾸밈 말을 떠난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행위인가. 살생과 도둑질과 사음을 떠난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생활인가. 의복·음식·침구·탕약을 법다이 구하고 법답지 않게 구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방편인가. 방편으로 꾸준히 힘써 번뇌를 떠나려 하고,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항상 물러나지 않도록 행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생각인가. 생각을 따르고 잊지 않으며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선정인가. 마음을 어지럽지 않은 데 두고 굳게 거두어 가져, 고요한 삼매에 든 한 마음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제14장 우리가 가야할 삶의 길
제929 일체사경(一切事經)
(九二九)如是我聞.一時.佛住迦毘羅衛國尼拘律園中.爾時.釋氏摩訶男來詣佛所.稽首佛足.退坐一面.白佛言.世尊.云何名優婆塞.佛告摩訶男.優婆塞者.在家淸白.乃至盡壽.歸依三寶.爲優婆塞.證知我.摩訶男白佛.世尊.云何爲滿足一切優婆塞事.佛告摩訶男.若優婆塞有信無戒.是則不具.當勤方便.具足淨戒.具足信·戒而不施者.是則不具.以不具故.精勤方便.修習布施.令其具足滿.信·戒·施滿.不能隨時往詣沙門.聽受正法.是則不具.以不具故.精勤方便.隨時往詣塔寺.見諸沙門.不一心聽受正法.是不具足.信·戒·施·聞修習滿足.聞已不持.是不具足.以不具足故.精勤方便.隨時往詣沙門.專心聽法.聞則能持.不能觀察諸法深義.是不具足.不具足故.精勤方便.信·戒·施·聞.聞則能持.持已.觀察甚深妙義.而不隨順知法次法向.是則不具.以不具故.精勤方便.信·戒·施·聞.受持觀察.了達深義.隨順行法次法向.摩訶男.是名滿足一切種優婆塞事.摩訶男白佛.世尊.云何名優婆塞能自安慰.不安慰他.佛告摩訶男.若優婆塞能自立戒.不能令他立於正戒.自持淨戒.不能令他持戒具足.自行布施.不能以施建立於他.自詣塔寺見諸沙門.不能勸他令詣塔寺往見沙門.自專聽法.不能勸人樂聽正法.聞法自持.不能令他受持正法.自能觀察甚深妙義.不能勸人令觀深義.自知深法能隨順行法次法向.不能勸人令隨順行法次法向.摩訶男.如是八法成就者.是名優婆塞能自安慰.不安慰他.摩訶男白佛.世尊.優婆塞成就幾法自安安他.佛告摩訶男.若優婆塞成就十六法者.是名優婆塞自安安他.何等爲十六.摩訶男.若優婆塞具足正信.建立他人.自持淨戒.亦以淨戒建立他人.自行布施.敎人行施.自詣塔寺見諸沙門.亦敎人往見諸沙門.自專聽法.亦敎人聽.自受持法.敎人受持.自觀察義.敎人觀察.自知深義.隨順修行法次法向.亦復敎人解了深義.隨順修行法次法向.摩訶男.如是十六法成就者.是名優婆塞能自安慰.亦安慰他人.摩訶男.若優婆塞成就如是十六法者.彼諸大衆悉詣其所.謂婆羅門衆·刹利衆·長者衆·沙門衆.於諸衆中威德顯曜.譬如日輪.初·中及後.光明顯照.如是.優婆塞十六法成就者.初·中及後.威德顯照.如是.摩訶男.若優婆塞十六法成就者.世間難得.佛說此經已.釋氏摩訶男聞佛所說.歡喜隨喜.卽從坐起.作禮而去
929. 일체사경(一切事經)
신수장경 : 2-236c
한글장경 : 잡-2-440
남전장경 : A. 8-25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카필라바투국 냐그로오다 동산에 계셨다. 그 때에 석씨 마하나마는 부처님께 나아와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앉아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우바새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바새란 집에서 깨끗하게 살면서 내지, '목숨을 마칠 때까지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우바새가 되겠나이다. 나를 증명하여 알아주소서'라고 한 이들이니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우바새의 모든 일을 원만히 하는 것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마하나마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우바새로서 믿음이 있고 계율이 없으면 그것은 갖추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방편으로 꾸준히 힘써 깨끗한 계율을 완전히 가져야 한다. 그러나 믿음과 계율은 완전히 갖추었으나 보시하지 않으면 그것도 또한 완전히 갖추지 못한 것이니, 완전히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방편으로 꾸준히 힘써 보시를 닦아 익혀 완전히 갖추어야 하느니라.
믿음과 계율과 보시는 갖추었으나 때를 따라 사문에게 나아가 바른 법을 듣지 않으면 그것도 또한 완전히 갖추지 못한 것이다.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방편으로 꾸준히 힘써 때를 따라 절에 나아가 여러 사문을 뵈옵지마는, 지극한 마음으로 바른 법을 듣지 않으면, 그것도 완전히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계율·보시·들음을 닦아 익혀 만족하게 한다. 그러나 듣고도 가지지 않으면 그것도 완전히 갖추지 못한 것이다.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방편으로 꾸준히 힘써 때를 따라 사문에게 나아가 알뜰한 마음으로 법을 듣고, 듣고는 잘 가진다.
그러나 그 법의 깊은 뜻을 관찰하지 못하면 그것도 또한 완전히 갖추지 못한 것이다. 완전히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방편으로 꾸준히 힘써, 믿음·계율·보시·들음과, 듣고는 가지고 가지고는 매우 깊고 묘한 뜻을 관찰한다. 그러나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수순할 줄을 알지 못하면 그것도 또한 완전히 갖추지 못한 것이다. 완전히 못하였으므로 방편으로 꾸준히 힘써, 믿음·계율·보시·들음과, 받아 가지고 관찰하여 깊은 뜻을 밝게 알아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수순하여 행한다. 마하나마여, 이것을 우바새의 모든 일을 만족히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마하나마는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우바새의 스스로는 편안하게 하나, 남은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우바새는 스스로는 계율에 서지마는, 남은 바른 계율에 서게 하지 못한다. 스스로는 깨끗한 계율을 가지지마는, 남은 계율을 완전히 갖추게 하지 못한다. 스스로는 보시를 행하지만, 보시로써 남을 세우지는 못한다. 스스로는 절에 나아가 여러 사문을 뵈옵지마는, 남을 권하여 절에 나아가 사문을 뵈옵게 하지는 못한다. 스스로는 알뜰히 법을 듣지마는 남을 권해 바른 법을 즐겨 듣게 하지는 못한다. 스스로는 법을 들어 가지지마는 남은 바른 법을 받아 가지게 하지는 못한다. 스스로는 매우 깊고 묘한 뜻을 관찰하지만 남을 권해 깊은 뜻을 관찰하게 하지는 못한다. 스스로는 깊은 법을 알아,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순수하여 행하지만, 남을 권하여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순수하여 행하게 하지는 못한다. 마하나마여, 이러한 여덟 가지 법만을 성취하면, 이것을 우바새의 스스로는 편안하나 남은 편안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마하나마는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우바새로서 몇 가지 법을 성취하면 스스로도 편안하고 남도 편안하게 하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일 우바새로서 열 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스스로도 편안하고 남도 편안하게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여섯인가. 마하나마여, 어떤 우바새는 바른 믿음을 완전히 갖추어 그것으로써 남도 세운다. 스스로도 깨끗한 계율을 가지고 그것으로써 남도 세운다. 스스로도 보시를 행하고 남도 보시를 행하게 한다. 스스로도 절에 나아가 사문을 뵈옵고 남도 시켜 사문을 뵈옵게 한다. 스스로 알뜰히 법을 듣고 남도 또한 듣게 한다. 스스로도 법을 받아 가지고 남도 받아 가지게 한다. 스스로도 뜻을 관찰하고 남도 관찰하게 한다. 스스로도 깊은 뜻을 알아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수순하여 닦아 행하고, 남도 깊은 뜻을 알아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수순하여 닦아 행하게 한다.
마하나마여, 이런 열 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그것을 우바새의 스스로도 편안하고 남도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마하나마여, 만일 우바새로서 이런 열 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저 대중들, 즉 바라문 대중·크샤트리아 대중·장자 대중·사문 대중들이 다 그에게 모일 것이요, 그 대중 가운데서 위엄과 덕은 환히 빛날 것이다. 마치 태양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에도 그 광명은 밝게 빛나는 것처럼, 우바새로서 열 여섯 가지 법을 성취한 사람도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에도 위엄과 덕은 밝게 빛날 것이다. 마하나마여, 이와 같이 우바새로서 열 여섯 가지 법을 성취한 사람은 얻기 어렵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석씨 마하나마는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하고 떠나갔다.
A. Ⅷ-25. Mah n ma, the Sakyan.
Once the Exalted One dwelt among the Sakyas in Banyan Tree Park, at Kapilavatthu. There Mah n ma, the Sakyan, came and visited him and, after saluting, sat down at one side. There, addressing the Exalted One, he said:
'Lord, how becomes a man a lay-disciple ?'
'When, Mah n ma, he has found refuge in the Buddha found refuge in Dhamma, found refuge in the Order, then he is a lay-disciple.'
'Load, how is a lay-disciple virtuous ?'
'When, Mah n ma, a lay-disciple abstains from taking life; abstains from taking what is not given him; abstains from lustful and evil indulgences; abstains from lying; and abstains from spirituous intoxicants, the cause of indolence-then a lay-disciple is virtuous.'
'Lord, how does a lay-disciple help on his own welfare, but not that of another ?'
'When, Mah n ma, he has achieved faith for self, but strives not to compass faith in another; has achieved virtue for self, but strives not to compass virtue in another; has achieved himself renunciation, but strives not to compass renunciation in another; longs himself to see the monks, but strives not for this sight for another; longs himself to hear Saddhamma, but strives not for this hearing for another; is mindful himself of Dhamma he has heard, but strives not that another should be mindful of it; reflects himself upon the meaning of Dhamma he is mindful of, but strives not for another to reflect thereon; when he knows himself both the letter and the spirit of Dhamma and walks in conformity therewith, but strives not for another so to walk-then a lay-disciple helps on his own welfare, but not that of another.'
'And how, lord, does a lay-disciple help on both his own welfare and the welfare of another ?'
'When indeed, Mah n ma, he has achieved faith himself and strives to compass faith in another; has achieved virtue himself . . . renunciation . . . longs to see the monks . . . to hear Saddhamma . . . is mindful . . . reflects . . . when he knows both the letter and the spirit of Dhamma and walks in conformity therewith and strives to make another so to walk-then, Mah n ma, a lay-disciple helps on his own welfare and the welfare of another.'
A. Ⅷ-25. Mah n ma, the Sakyan.
부처님은 카필라바투에 있는 반얀나무 공원에 석가족 중에 있었다. 그곳에 석가족 마하나마는 부처님에게 다가와서 인사한 후에 한쪽에 물러앉았다. 부처님에게 그는 말했다.
부처님, 어떻게 재가자가 됩니까?
마하나마여, 붓다에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상가에 귀의한 때 재가자라고 한다.
부처님, 어떻게 재가자 덕을 쌓습니까?
마하나마여, 살생을 금하고, 주지않는 것을 취하지 않고, 사음(邪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게으름의 원인이 되는 알콜로 취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을 재가자가 덕을 쌓는다고 한다.
부처님, 어떻게 재가자는 스스로 행복하도록 하나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마하나마여, 스스로의 신(信)은 이루지만 다른 사람의 신(信)을 성취하도록 노력하지 않는 것, 스스로의 덕(德)은 이루지만 다른 사람의 덕(德)을 성취하도록 노력하지 않는 것, 스스로의 계(戒, 극기)는 이루지만 다른 사람이 계(戒)를 성취하도록 노력하지 않는 것, 스스로는 열심히 사문을 보지만(가르침을 받지만) 다른 사람이 열심히 사문을 보도록 노력하지 않는 것, 스스로는 열심히 정법(正法)을 듣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열심히 정법(正法)을 듣도록 노력하지 않는 것, 스스로는 법을 듣고 념(念, 가져 지니는 것)하지만 다른 사람이 법을 듣고 념(念)하도록 노력하지 않는 것, 스스로는 법을 수지(受持)하여 그 의미를 관찰하지만 다른 사람이 법을 수지(受持)하여 그 의미를 관찰하도록 하지 않는 것, 스스로는 법의 정신과 문자 양쪽을 알고 그것과 함께 걷지만(수습),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법의 정신과 문자 양쪽을 알고 그것과 함께 하도록 노력하지 않는 것을 재가자가 스스로 행복하도록 하나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
부처님, 어떻게 재가자는 스스로 행복을 돕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도록 하는 것입니까?
마하나마여, 참으로 재가자가 스스로 신(信)을 성취하고 다른 사람도 신(信)을 성취하도록 노력하는 것, 그 자신은 덕(德)을 성취하고 ... 계를 ... 열심히 출가자를 보고 ... 정법을 듣고 ... 수지(受持)하고 ... 관찰하고 ... 그가 법의 문자와 정신 양쪽을 알고(요달하고), 법과 함께 부합하여 걷는 것(수습하고) 이것을 재가자가 스스로 행복하도록 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도록 하는 것이라 한다.
[개념정리] - 우리가 가야 할 삶의 길
Ⅰ. 서론
재가불자는 세간을 떠나지 않고 가정을 이루어 살되 늘 청정함을 유지하며, 목숨이 다하도록 삼보에 대한 믿음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집에 있되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그 깊은 뜻을 사유하여 실천해가며, 믿음과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의 생활을 무너뜨리지 않고 이웃에 법을 전해 이웃과 함께 법을 향해 나아간다. 재가불자는 늘 출가대중을 보위하며 삼보를 옹호하여 먼 뒷날에까지 삼보의 진리를 전승한다.
Ⅱ. 본론
(九二八)如是我聞.一時.佛住迦毘羅衛國尼拘律園中.爾時.釋氏摩訶男與五百優婆塞來詣佛所.稽首佛足.退坐一面.白佛言.世尊.云何名優婆塞.佛告摩訶男.優婆塞者.在家淨住.乃至盡壽.歸依三寶.爲優婆塞.證知我.摩訶男白佛言.世尊.云何名優婆塞須陀洹.佛告摩訶男.優婆塞須陀洹者.三結已斷已知.謂身見·戒取·疑.摩訶男.是名優婆塞須陀洹.摩訶男白佛言.世尊.云何名優婆塞斯陀含.佛告摩訶男.謂優婆塞三結已斷已知.貪· ·癡薄.摩訶男.是名優婆塞斯陀含.摩訶男白佛言.世尊.云何名優婆塞阿那含.佛告摩訶男.優婆塞阿那含者.五下分結已斷已知.謂身見·戒取·疑·貪欲·瞋 .摩訶男.是名優婆塞阿那含.時.摩訶男釋氏顧視五百優婆塞.而作是言.奇哉.諸優婆塞.在家淸白.乃得如是深妙功德.時.摩訶男優婆塞聞佛所說.歡喜隨喜.從坐起.作禮而去
928. 심묘공덕경(深妙功德經)
신수장경 : 2-236c
한글장경 : 잡-2-442
남전장경 : S.55.49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카필라바투국 냐그로오다 동산에 계셨다. 그 때에 석씨 마하나마는 5백 우바새와 함께 부처님께 나아와, 그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한쪽에 물러앉아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우바새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바새란, 집에서 깨끗하게 살면서 내지, '목숨을 마칠 때까지 세 가지 보배에 귀의하여 우바새가 되겠나이다. 나를 증명하여 알아주소서'라고 한 이들이니라."
"어떤 것을 우바새의 수다원이라 하나이까."
"우바새의 수다원이란, 세 가지 결박을 끊고, 끊은 줄 아는 것이다. 이른바, 몸에 대한 삿된 소견·삿된 계율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의심이다. 마하나마여, 이것을 우바새의 수다원이라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우바새의 사다함이라 하나이까."
"우바새는 세 가지 결박을 끊고 끊은 줄 안다. 즉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엷어진 것이다. 마하아나아마여, 이것을 우바새의 사다함이라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우바새의 아나함이라 하나이까."
"우바새의 아나함이란, 욕심세계의 다섯 가지 결박을 끊고, 끊은 줄 아는 것이다.즉 몸에 대한 삿된 소견·삿된 계율에 대한 집착·의심·탐욕·성냄이다. 마하나마여, 이것을 우바새의 아나함이라 하느니라."
때에 석씨 마하나마는 5백 우바새를 돌아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놀랍구나! 우바새들이여, 집에 있으면서 청정한 것은 이러한 깊고 묘한 공덕을 얻는구나."
때에 마하나마 우바새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하고 떠나갔다.
Ⅲ. 결론
붓다의 상가는 개인의 이기적인 복락을 추구하는 곳이거나 세상과 떨어진 불교 교단만의 집단이 아니다. 상가의 구성원들은 세상이 안겨주는 온갖 욕됨을 참고 그에게 고통을 주는 대중까지도 진리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에게 법을 전하고 세상의 뭇 삶들에게 헌신한다. 세상에 대한 크나큰 자비심, 보시와 전법의 생활이야말로 불사의 뜻을 따르는 상가의 창조적인 삶의 모습인 것이다.
참고문헌
아함경, 조계종 출판사 간, 411.p ~ 424.p
15장 근본불교(根本佛敎)
제1절 붓다가 발견한 진리
1. 근본불교
근본 불교란 붓다가 가르침을 처음으로 펴기 시작한 이후부터 불멸 후 100년경에 있었던 최초의 교단 분열 이전까지의 불교를 말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원시불교, 초기불교, 또는 고대불교라고도 부른다.
이 기간의 불교는 붓다가 직접 가르친 불교이고, 또한 붓다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으로 부터 받은 가르침을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한 불교이다. 아직 교단이 분열되기 전이었으므로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주장 없이 대체로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붓다의 탄생연대를 기원전 566년으로 보면, 붓다가 35세에 도를 이루어 처음으로 가르치기 시작했으므로 불교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531(=566-35)년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붓다가 입멸(入滅)한 것은 기원전 486년이고, 교단의 첫 분열은 그로부터 약 100년 뒤인 386년경에 일어났다. 따라서 근본 불교란 대략 기원전 531년에서 386년까지의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붓다 자신은 아무것도 글로 쓰지는 않았다. 그의 모든 가르침은 '말'로써 베풀어 졌다. 그 직계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한 곳에 모아서 경전의 형태로 정리한 것은 붓다가 입멸한 직후였지만 문자로써 한 것이 아니고 말로써 했다. 붓다가 열반한 바로 그 해 안거(安居)때,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스승에게서 들었던 가르침들을 기억해 내어 서로 확인한 뒤 암송해서 머리 속에 정리했다. 이것이 제1차 결집(結集: samgiti)이다. 이 결집에서 편집된 경전(經典)은 붓다가 행한 45년간의 가르침이 모두 망라된 것은 아니었다. 붓다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서 결집에 참석했던 제자들이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것 만이었고, 또한 출가 수행자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던 내용들이었다. 재가 신도들에게 베풀었던 붓다의 수많은 가르침은 대부분 제외되었다. 이렇게 결집된 붓다의 가르침은 먼저 직계 제자들의 기억 속에 간직되었다가 다시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전달되면서 수 백년간 계승되어 내려왔다.
이 첫 결집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해도 그 때 만들어진 경전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들은 그 첫 결집에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첫 결집이 있은 지 약 100년후 다시 결집이 행해졌는데 이것이 제2차 결집이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의 결집이 더 있었다. 초기의 경전은 모두 제자들의 기억에서 기억으로 전래되었기 때문에 세월과 더불어 잘못 전해지기도 하고, 그 자신들의 해석이 보태지기도 하면서 내용이 변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 잡아 경전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결집이 필요했다.
붓다의 가르침이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세기 후반부터였다. 그러나 문자로 된 최초의 경전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우리에게 전승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경전은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최초의 문자 결집 때 만들어진 경전과 동일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와 같은 사정이므로 현재의 자료로서 붓다가 가르친 내용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근본불교를 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인가. 그렇다고는 할 수없다. 최초에 만들어진 경전과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사이에는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 핵심은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전이 오랜 세월동안 변천하면서 성립되었다고는 해도 현재의 경전은 최초의 경전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 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경전, 특히 아함경(阿含經,Agama) 에서 볼 수 있는 중심교리들은 붓다가 직접 가르쳤던 내용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초기 경전에 나오고 있는 여러 가지 교리들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인 연기법, 그리고 연기법의 응용 내지 실천 이론들인 12연기, 4성제, 오온-무아, 3법인, 윤회와 업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절 붓다가 발견한 진리
1. 연기법(緣起法)
경전에서는 붓다가 발견한 진리를 '법'(法) 이라 하고 있다. "붓다는 법을 깨달았다.", 또는 "바른 법(正法)을 성취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법'이란 산스크리트어 Dharma[達磨]를 번역한 말이다. '다르마'는 "유지(維持)하다, 보전(保全)하다"라는 동사 'DHR'를 어근으로 한 명사로서 규범(規範),의무, 사회질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주원리(宇宙原理), 보편적 진리(普遍的眞理)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붓다는 법(法)을 깨달았다. 정법(正法)을 성취했다."라는 말은 현대적인 표현으로 "붓다는 진리를 발견했다. 진리를 이해했다."라는 말과 같다.
붓다가 발견한 '법'(法)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는 아슈바지트(Asvajit :阿濕毘)비구와 뒷날 붓다의 제일 제자[上首弟子]가 된 사리푸트라(Sariputra:舍利弗) 사이에 있었던 대화이다. 이들 두 사람의 만남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어 붓다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사리푸트라는 라자그리하(Rajagrha:王舍城) 근방에서 산자야(Sanjaya)라는 유명한 스승 밑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탁발하러 나온 아슈바지트 비구(比丘)를 만나게 되었다.아슈바지트는 붓다가 도(道)를 이룬 뒤 처음으로 제자가 된 5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사리푸트라는 그 비구의 수행자다운 모습과 행동에 감동을 받고 가까이 가서, "그대는 누구이며, 스승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진리[法]를 배웠소"라고 물었다. 아슈바지트는 "나는 나이가 어리고 집을 떠난지도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치를 잘 설명할 수 없으니 이제 간략히 요점만을 말하겠소."라고 하면서, 붓다로 부터 받았던 가르침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때 아슈바지트가 사리푸트라에게 설명해준 내용은 짤막한 한 수의 시(詩)로 전해지고 있다.
모든 것은 원인에서 생긴다.(諸法從緣起)
부처님은 그 원인을 설하셨다(如來說是因)
모든 것은 원인에 따라 소멸한다(彼法因緣盡)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是大沙門說)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붓다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정리하면,"모든 존재[諸法]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기게 되고, 그 원인들이 소멸되면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詩)는 일반적으로 '연기법송'(緣起法頌)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연기법(緣起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리푸트라는 아슈바지트로부터 이 가르침을 듣고 크게 깨닫게 되었다.그 때까지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이었다. 그는 곧 그의 친구 마우드갈랴야나(Maudgalyayana:目 連)와 함께 스승 산자야를 떠나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중아함(中阿含)의 상적유경(象跡喩經)에서는 붓다가 깨달아 가르친 진리가 '연기법'(緣起法)이라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것을 사리푸트라가 "여러분, 부처님[世尊]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연기(緣起)를 보면 법(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 라고 비구들에게 가르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본다'라는 것은 '이해한다'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법(法)을 이해하고, 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연기법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붓다 자신이 비구들에게 "(그대들이) 만약 연기를 보면 법을 보는 것이고, 바르게 법을 보면 나[붓다]를 보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연기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연기(緣起)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프라티탸사뭇파다'(pratityasamut
pada)를 번역한 것이다. 이 것은 'pratitya'와 'samutpada'라는 2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pratitya'는 '...때문에[緣]','...에 의해서' 또는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ada'는 '태어남', '형성(形成)', '생김[起]'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연기란 '...때문에 태어나는 것', '...을 말미암아 생기는 것' 이라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 연기의 원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 335)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 彼有),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此起故 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此無故 彼無),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此滅故 彼滅).
여기에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라는 구절로써 존재의 발생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와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구절로서 존재의 소멸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만이,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 만이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연기법이란 존재의 '관계성'(關係性)을 말하는 것이다.
연기법을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상의성'(相依性)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있다. 붓다는 '연(緣)'이라는 경전에서 연기를 설명하면서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그것은 상의성이다. 나는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이해하였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마하코티카(Mahakottika)비구는 이 상의성에 대해 사리푸트라에게 갈대 단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비유하면 3개의 갈대가 아무 것도 없는 땅[空地]위에 서려고 할 때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그 가운데 1개를 제거해 버리면 2 개의 갈대는 서지 못하고, 만일 그 가운데서 2개의 갈대를 제거해 버리면 나머지 1개도 역시 서지 못한다. 그 3개의 갈대는 서로 의지[相依]해야 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부연해서 설명하면 A, B, C라는 3 요소가 모여 어떤 존재를 이루고 있을 경우 이들 3 요소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A가 원인이 될 때는 B와 C는 A의 조건이 되고, B가 원인이 될 때는 A와 C는 B의 조건이 된다. 역시 C가 원인이 될 때는 A와 B는 C의 조건이 된다.
경전에서 들고 있는 비유에서처럼 A, B, C라는 3개의 갈대 가운데서 어느 한 갈대가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다른 2개의 갈대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 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인 것이다. 3개의 갈대 가운데서 1개의 갈대라도 없어지면 다른 2개의 갈대도 서 있을 수 없게 된다. 즉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도 없다"는 것이 된다.
연기법이란 이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관계를 가지므로 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깨어 질 때 존재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연기법을 존재의 '관계성의 법칙(關係性法則)', 또는 '상의성의 법칙(相依性法則)'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바로 존재의 보편적인 법칙이고 그 이법(理法)이다.
연기의 원리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났거나 또는 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존재를 성립시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변하거나 없어질 때 존재 또한 변하거나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서로 관계를 가짐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영원한 것도, 그리고 절대적인 것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연기법을 때로는 인과법칙(因果法則),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처럼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은 '인과법칙'이라고 하기보다는 '상의성의 법칙'으로 보아야 더 정확 할 것이다. 만약 붓다가 발견한 진리가 인과법칙이었다고 한다면 붓다는 인과법칙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불교의 진리가 독창적인 것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과법칙은 붓다 이전에 이미 다른 종교와 사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을 설명할 때 가장 기초가 되고 있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라는 말은,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저것'이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말도, '이것'이 사라지는 결과로서 '저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과(因果)의 법칙에서는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저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꽃과 열매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꽃이 원인이 되고 그 결과로서 열매가 있게 된다. 이것은 동시성(同時性)을 말하고 있는 연기법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인과적(因果的)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역시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에 의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인과성(因果性)은 후기불교에서 많은 발전을 보게 되고, 그것을 설명하는 다양한 교리들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연기법이 '상의성의 법칙'이라기 보다는 '원인결과의 법칙'처럼 이해되어져서, 이 2 가지 개념을 명확하게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연기법은 붓다가 만든 것이 아니다. 역시 붓다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것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붓다와 같은 어느 한 사람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존재한다. 붓다는 단지 이 법칙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뿐이다.
경전에서는 붓다 자신이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제자가 이 문제에 대해 "세존이시여, 이른바 연기법은 세존께서 만드신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붓다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붓다[如來]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진리의 세계[法界]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붓다는 이 법을 자신이 깨닫고, 옳게 깨달음을 이룬 뒤에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즉 붓다는 연기법의 발견자이지 발명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는 존재의 법칙인 이 연기법을 처음으로 발견해서 그것을 자신의 문제를 위해, 그리고 중생들의 문제를 위해 응용, 실천했을 뿐이다.
붓다는 이와 같은 사실을 오래된 길[古道]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광야(曠野)를 여행하다가 옛사람이 다니던 오래된 길을 만났다. 그는 그 길을 따라갔다가 사람이 살지 않는 한 옛성을 발견했다. 그 곳에는 왕궁과 동산과 목욕 못과 깨끗한 숲이 있었다. 그는 이 옛 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모두 그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여행자는 옛 길과 옛 성을 발견했을 뿐이지 그 길과 성을 자신이 개척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붓다도 옛 사람들이 밟았던 길을 따라 수행한 결과 법(法)을 깨달아 붓다가 되었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가르쳐 많은 이익이 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은 붓다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중요한 것은 법(法), 즉 진리이지 사람이 아니다. 붓다로부터 불교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붓다의 존재는 중요하지만, 그러나 법보다는 하위를 차지한다. 붓다 자신도 법에 의해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한 인간에서 붓다로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역시 불교가 목표로 하는 최고의 이상인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붓다라는 한 인격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르친 법(法), 즉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고타마 싯다르타 자신 역시 붓다가 된 뒤에도 그가 발견한 법(法)에 의지하고 법에 따라 살았다는 것이다.
잡아함의 존중경(尊重經)에 의하면, 붓다는 정각(正覺)을 이룬 뒤 앞으로 어떤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정각을 이룬 그가 이 세상에서 스승으로 모시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는 그 자신이 발견한 진리[法]를 의지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붓다는 "오직 바른 법[正法]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정각을 이룩하게 하였다. 나는 그것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리라." 라고 뜻을 정했다는 것이다.
붓다는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들이 의지하고 따라야 할 것은 사물이나 재산이나 사람이 아니라 오직 법(法)이라는 것이었다. 붓다는 임종을 앞에 두고 서도 역시 제자들에게 그의 사후에 그 자신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하는 대신 "법을 너희들의 스승으로 삼으라."[法歸依]고 가르쳤다. 붓다는 그를 대신해서 승단을 이끌어갈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고, 제자들 역시 스승이 돌아가신 후 그들 중의 어떤 한 사람을 승단의 책임자로 정해 붓다의 대신이 되게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붓다가 가르쳐준 법을 그들의 스승으로 삼았고 법을 의지해 살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법'이 중요하다고 해서 법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법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법'조차도 버려야 한다. 이것을 중아함(22경)에서는 뗏목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뗏목에 의지해서 강을 건넌 사람은 그 뗏목을 강변에 버려야 한다. 뗏목이 많은 이익을 주었다고 해서 강을 건넌 후에도 그것에 집착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이처럼 법에도 집착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법이 붓다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었으며, 실제로 붓다는 연기법으로서 무엇을 해결했는가. 그리고 연기법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연기법이 진리라고 해도 붓다 자신의 문제와 관계가 없었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의 문제와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연기법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붓다 자신의 문제를 포함한 우리 인간 모두의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붓다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인생의 고(苦:duhkha)문제였다. 그가 출가한 것도, 6년에 걸쳐 힘든 수행을 한 것도, 그리고 성도(成道)후 45년간 쉬지 않고 모든 노력을 기우려 사람들을 가르친 것도 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붓다의 가르침의 처음과 끝은 '苦와 고에서의 해탈'이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고 있다. 잡아함의 삼법경(三法經)에서 붓다는 "(고의 문제가 없었다면) 모든 붓다 세존께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설사 세상에 나왔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붓다, 여래께서, 깨달으신 법을 사람들을 위해 널리 말씀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나는 단지 고와 고에서의 해탈만을 가르친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붓다가 발견한 연기법과 고(苦) 문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라든지, 또는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라고 하는 이 단순한 원리가 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연기법의 입장에서 보면 고(苦)의 고유성(固有性) 또는 실재성(實在性)은 인정될 수 없다. 고(苦)는 신이나 절대자와 같은 어떤 존재가 우리를 벌주기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따라서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과 조건을 제거해 버린다면 고도 사라지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장아함의 대본경(大本經)에서 붓다는 "고(苦)는 성인(聖人)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역시 인연이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변하는 (성질을 가진 ) 이 고를 지혜를 가진 사람은 끊어 없앤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붓다는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고 문제에 연기법을 응용해서, 연기법의 원리에 따라 해결할 수 있었다. 즉 붓다는 먼저 苦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추구한 뒤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것이 열반이었다. 열반이란 "고의 소멸" 또는 "고에서의 해탈"을 의미한다.
결국 연기법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용해 고(苦)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붓다는 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가르쳤다. 그래서 고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설명과 방법을 고안해 낼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은 지혜의 수준이나 그들의 성향, 또는 처해있는 상황이 모두 달랐으므로 그것에 맞추기 위해 여러 가지 교리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다양한 교리들이 생겨난 된 이유이다. 무아(無我)이론이 그것이고 무상(無常)이론이 그것이다. 사성제(四聖諦), 12연기(緣起), 공(空)의 교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교리의 유일한 목표는 고의 해결, 즉 열반의 성취일 뿐이다. 한 경에서는 이것을 "모든 강물은 바다로 향한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도 한 곳으로 향한다. 즉 고와 고의 소멸로 향한다"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연기법은 불교의 모든 교리들의 사상적, 이론적 근거가 된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그 설명이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모두 연기법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불교의 모든 교리들은 연기의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응용이론들이다. 그것들은 연기(緣起)라는 하나의 샘에서 흘러나온 크고 작은 물줄기와 같은 것이다. 모든 존재는 왜 무아인가, 세계는 왜 무상하며 왜 공(空)인가. 그것은 연기적(緣起的)이기 때문에 무아이고 무상이고 공인 것이다.
2. 12연기(緣起)
초기경전에는 '연기법'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여러 가지 연기의 형식이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모습을 갖춘 연기가 12연기이다. 이것을 때로는 12인연(因緣)이라 부르기도 한다.12연기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12연기로써 때로는 생멸 변화하는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교리의 근본 목적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12연기를 관찰하는 방법에는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다. 순관이란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고, 행(行)을 조건으로 해서 식(識)이 있고,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名色)이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가 있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마지막 항목인 '노사(老死)'는 다른 말로 '고(苦)'라고 할 수 있다. 즉 순관은 고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유전연기(流轉緣起)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 등으로 말미암아 윤회의 세계에서 생사를 되풀이[流轉] 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緣起)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역관이란 고가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노사의 소멸까지를 설명한다.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도 한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을 없앰으로서 생사유전(生死流轉)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돌아가는[還滅]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많은 곳에서 12연기를 말하고 있지만 그 설명은 한결 같지 않다. 자세하지도 않고 일관되어 있지도 않다. 특히 각 항목[支]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는 곳은 없다. 따라서 여러 경전의 설명을 참고해서 12연기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1). 무명(無明: avidya)
무명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智慧)이 없다'는 말이다. 올바른 법[正法],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연기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이다. 고(苦)는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기므로, 무명은 모든 고를 일으키는 근본원인이다.
2). 행(行: samskara)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다. 행이란 행위, 즉 업(業:karman)을 가리킨다. 행에는 몸으로 짓는 신행(身行=身業)과 언어로 짓는 구행(口行=口業)과 마음으로 짓는 의행(意行=意業)등 3행이 있다. 행(行=業)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 때문에 짓게 되고, 그것을 지은 존재의 내부에 반드시 잠재적인 힘[潛在力]의 형태로 남게된다.
3). 식(識: vijnana)
행(行)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 식은 인식작용으로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등 6식이 있다.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 아니라 잠재의식도 포함한다. 꽃을 볼 경우 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꽃을 본 경험이 잠재의식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꽃을 보았다'는 '과거의 경험'은 과거의 행(위)이다. 따라서 과거의 행(行)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 날 수 없다. 그래서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고하는 것이다.
4). 명색(名色: namarupa)
식(識)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 명(名:nama)이란 정신적인 것을, 그리고 색(色:rupa)이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모두 인식의 대상이다.
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명색[對象=境]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라고 하지 않고,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항인 6입(六入)과 함께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5). 6입(六入, 또는 六處: sadayatana)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6입(入)이 있다. 6입이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意)등의 6 가지의 감각기관, 즉 6근(根)이다. 이것은 인식 기관이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6입이 있다."라는 것을 좀 더 풀이해서 말하면 "인식의 대상[境]인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인식의 기관[根]인 육입이 있다."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서 식, 명색, 6입 등 3항목[三支]은, 시간적으로 선후의 관계로 보지말고 동시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인 명색과 그것을 인식 할 수 있는 기관인 6입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식이 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식을 행 다음에 놓은 것이다.
6).촉(觸: sparsa)
6입을 조건으로 해서 촉이 있다. 촉이란 지각(知覺)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心的)인 힘'이다. 촉에도 눈, 귀, 코, 혀, 몸, 마음등 6개의 감각기관에 의한 6촉(六觸)이 있다.
촉은 6입에 의해서 생긴다고 되어 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6입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識), 명색[境], 6입[根]등 3요소가 함께 함으로서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수성유경(手聲喩經)에서는 "(根.境.識등) 3요소가 모여서 촉을 만든다"[三事和合成觸]라고 하는 것이다.
7). 수(受: vedana)
촉을 조건으로 해서 수(受)가 있다. 수란 즐거운 감정[樂受],괴로운 감정[苦受],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不苦不樂受]과 그 감수(感受)작용을 말한다. 감각기관[根]과, 그 대상[境], 그리고 인식작용[識]등 3 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知覺)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觸]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는 촉을 조건으로 해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8). 애(愛: trisna)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가 있다. 애란 갈애(渴愛)로서 욕망을 말한다. 좋아하는 것을 만나거나 싫어하는 것을 만나게 되면 그것에 애착심이나 증오심을 일으키게 된다. 증오심 역시 애(愛)의 일종이다. 고.낙등의 감수작용(感受作用)이 심하면 심할 수록 거기에서 일어나는 애착심과 증오심도 커진다. 그래서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9). 취(取: upadana)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 취는 취착(取着)의 의미로서 올바르지 못한 집착이다. 맹목적인 애증(愛憎)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욕망이 생기면 뒤따라 그것에 집착심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10). 유(有 : bhava)
취를 조건으로 해서 유가 있다. 유(有)란 존재를 말한다. 초기 경전에서는 취를 조건으로 해서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되는 가를 설명해 놓은 곳을 찾기는 어렵다.
업설(業說)에 의하면, 집착[取]때문에 업(業)이 만들어지고, 업은 생(生)을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유'를 '업'이라고 본다면, "취를 조건으로 해서 유가 있다"라는 말은 "집착을 조건으로 해서 업이 있다."라는 것이 된다. 두 번째 항목인 '행'을 무명으로 인해 생기는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유는 '애'와 '취'를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적극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다.
11). 생(生: jati)
유를 조건으로 해서 생이 있다. 유(有), 즉 업(業)은 생을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유에 의해서 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12). 노사(老死: jara-marana)와 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
생을 조건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등 여러가지 고가 있다. 생이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고, 즉 근심(憂),비애(悲), 고통(苦), 번뇌(愁), 번민(惱)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제3절 4성제(四聖諦)
4성제(聖諦)에서 '제'(諦:satya)란 '진리' 또는 '진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4성제란 "4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말이다. 이것은 고성제(苦聖諦),집성제(集聖諦),멸성제(滅聖諦),도성제(道聖諦)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간단하게 '고, 집, 멸, 도'라고도 한다. 4성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고'와 '고의 원인', 그리고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4성제는 불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 붓다가 녹야원(鹿野苑)에서 5명의 제자들[五比丘]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했을 때로부터 시작해서, 쿠시나가라(Kusinagara)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가장 많이 설한 가르침이 바로 이 4성제이다.
중아함의 상적유경(象跡喩經)에서는 4성제의 중요성을 코끼리 발자국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코끼리의 발자국이 넓고 커서 모든 짐승의 발자국 가운데서 제일인 것처럼, 4성제도, '한량없는 좋은 법[善法]'이 모두 그 가운데로 들어오기 때문에, '일체법(一切法) 가운데서 제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4성제의 가르침은 불교의 궁극 목표인 '고(苦)에서의 해탈'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간단한 교리이다. 붓다는 인생의 '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사가 병을 치료할 때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의사가 먼저 병을 진단하듯이 붓다는 인생의 실상인 '고'를 말하고[고성제], 병의 원인을 찾아내듯이 고의 원인을 규명했다[집성제]. 그리고 병 치료후의 건강상태를 말하듯이 고가 소멸된 상태, 즉 열반을 설명했고[멸성제], 마지막으로 병의 치료방법을 말하는 것처럼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도성제].
1. 고성제(苦聖諦)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살아간다는 것은 고(苦)이고, 이 고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를 설명해 놓은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을 붓다는 한 경에서 "나는 단지 고와 고의 소멸[열반]만을 가르칠 뿐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불교의 모든 것이 '고와 고의 소멸'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인생이 고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자가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그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란 무엇인가. 고라는 말인 'duhkha'를 일반적으로 '괴로움','고통', '슬픔'등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신체적, 생리적인 고통, 또는 일상적인 불안이나 고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두흐카'를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이다. 한마디로 해서 그것은 우리의 생존에 따르는 모든 괴로움을 망라한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모든 것은 고다'[一切皆苦]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는 4고 또는 8고를 말한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生老病死]등의 4고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怨憎會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求不得苦], 5온(五蘊)의 집착에서 생기는 고[五取蘊苦; 五陰盛苦]등의 4고를 합쳐서 8고이다.
또한 고를 성질에 따라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등 3종으로 나누기도 한다. 고고란, 추위, 배고픔, 부상을 당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고를 말한다. 이것은 원래부터 괴로움의 조건에서 생기는 고다. 괴고는 애착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파괴되거나 사라져 버릴 때 느끼는 고를 말한다. 부귀와 권력을 누리던 사람이 그것을 잃어버리거나, 또는 애지중지하던 물건이 없어져 버릴 때 느끼는 고통이 여기에 해당된다. 행고란 무상함을 조건으로 해서 느끼게되는 고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老,病,死]앞에서 느끼게 되는 괴로움이다.
2. 집성제(集聖諦)
집(集)이란 'samudaya'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불러모으다'[招集]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집성제(集聖諦)에서는 '고를 일으키는 원인'을 밝힌다.
고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욕망(欲望:trsna)이다. 5관(五官)의 관능적인 욕망은 물론이고, 재산과 권력에 대한 애착이나 사상, 신앙에 대한 집착 등도 욕망이다.
인생의 모든 불행, 싸움, 괴로움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욕망은 고의 뿌리이다. 경(經)에서는 이것을 "고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그것은 욕망이다." "무릇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모두 다 욕망으로 말미암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욕망은 인생을 이끌어 가는 동력(動力)일 뿐 아니라 또한 인생을 지배하는 힘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욕망의 구체화라고 할 수있다. 인간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주인이 노예를 부리듯이 인간을 마음대로 부린다. 인간은 한없이 욕망하고, 욕망 때문에 끝없이 고통을 당한다.
인간은 욕망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채워준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채워주면 채워 줄수록 더 커질 뿐 결코 충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다에 빠진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 수록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사람들은) 비록 히말라야산 만한 순금덩어리를 얻는다 해도 만족할 줄을 모를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욕망을 구체적으로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등 3종으로 나눈다. 욕애란 5욕(五欲), 즉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유애란 존재에 대한 욕망이다. 오래도록 살고 싶다든지 죽은 후에 천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등의 욕망이다. 무유애는 무존재(無存在)로 되고자 하는 욕망, 즉 사후에 허무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3. 멸성제(滅聖諦)
멸(滅)이란 열반(涅槃)을 번역한 말이다. 그리고 열반은 'nirvana'를 음역한 것이다. 열반은 "소멸"(消滅)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고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고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고에서의 완전한 해방'이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涅槃第一樂].
열반은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고 이상(理想)이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교리와 실천은 오로지 열반을 얻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잡아함에서는 "바다는 한 가지 맛, 그것은 짠맛이다. 마찬가지로 붓다의 가르침[法과 律]도 한가지 맛, 그것은 고와 열반[苦滅]의 맛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열반은 현재의 생(生)에서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열반이 아니다. 열반에 도달한 사람은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을 다스릴 수 있으므로 욕망 때문에 발생되는 괴로움, 즉 정신적인 괴로움에서는 벗어나지만 아직 육체가 남아 있기 때문에 병이나 부상을 입었을 때 받게 되는 육체적인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生存根源)이 남아있는 열반' 즉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한다. 여기에서 '생존의 근원'[餘依]이란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유여의열반을 이룬 사람이 죽으면 다시 육체를 받아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는 열반' 즉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 한다. 이 무여의열반은 '완전한 열반'(般涅槃:parinirvana)으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가 모두 소멸된 열반이다.
우리는 열반을 언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머리로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체험의 세계일 뿐이다. 아직 열반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에게 열반을 설명해 주어도 그는 그것을 이해 할 수 없다. 마치 땅위에 올라가서 산책하고 돌아온 거북이가 물고기에게 땅위에서는 헤엄칠 수 없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물고기는 그것을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4. 도성제(道聖諦)
도(道)란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兩極端)을 떠난 중간의 길이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 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의 길"을 말한다.
소나경(Sona經)은 중도를 거문고 줄의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거문고 줄은 지나치게 팽팽해도,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느슨해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 거문고가 가장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도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적인 행을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8정도(八正道)이다.
1) 정견(正見) - 바른 견해이다. 4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즉 고의 발생과 고의 소멸, 그리고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2)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즉 바른 마음가짐이다. 구체적으로는 탐욕스러운 생각, 성내는 생각, 해치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온화한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3) 정어(正語) - 바른 말이다. 거짓말[妄語], 이간시키는 말[兩舌],욕하는 말[惡口], 꾸며대는 말[綺語]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 성실한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4) 정업(正業) - 바른 행위이다. 살생(殺生), 도둑질 [偸盜], 음란한 짓[邪淫]을 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보시(布施)하고,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5) 정명(正命) - 바른 생활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특히 출가수행자의 경우에는 재가신도의 바른 신앙에서 우러나는 보시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다.
6)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이다. 이미 생긴 선(善)은 더욱 자라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고, 이미 생긴 악(惡)은 끊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7) 정념(正念) - 바른 기억이다. 자기 자신이나 그 주변의 것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억해서, 반성하고 바른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8) 정정(正定) - 바른 정신집중 또는 정신 통일이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心一境性]을 말한다. 정(定, samadhi)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 dhyana)이기 때문에 때로는 2가지를 합해서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8정도는 그 순서대로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견을 닦아야 정사가 생기게 되고 정사를 닦아야 정어를 할 수 있게 된다. 나머지 항목[支]들도 마찬가지다. 8정도의 마지막 목표는 정정(正定)이다. 8항목 가운데서 앞의 7항목은 모두 정정에 이르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정정을 닦아 지혜(prajna)를 얻게 되고, 지혜를 가짐으로써 열반을 성취 할 수 있는 것이다.
제4절 오온-무아(五蘊.無我)
5온(五蘊)의 온(蘊:skandha)은 '모임'[集合]이라는 뜻이다. 때로는 '음(陰)'이라고도 번역했다. 5온은 좁은 의미로는 인간존재를 가리킨다. 인간은 물질적인 요소인 색(色=육체)과 정신적인 요소인 수(受),상(想),행(行),식(識)등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5온이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일체존재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색은 물질전체를, 그리고 수. 상. 행. 식은 정신 일반을 말한다.
인간 존재만을 특별히 구별해서 말할 때는 5온이라는 말 대신에 5취온(五取蘊)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5온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를 고정적인 자아[自我: atman]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取: upadana]한다는 의미에서이다.
1. 색온(色蘊 : rupa)
색이란 육체를 가리킨다. 육체는 물질적인 4가지 기본 요소인 4대(四大: mahabhuta)와 이 4대에서 파생된 물질인 4대소조색(四大所造色)으로 이루어져 있다. 4대란 지, 수, 화, 풍으로서, 지(地)는 뼈, 손톱, 머리카락등 육체의 딱딱한 부분이고, 수(水)는 침, 혈액, 오줌등 액체부분이다. 화(火)는 체온이고 풍(風)은 몸속의 기체, 즉 위장 속의 가스 같은 것을 가리킨다. 4대소조색이란 4대로 이루어진 5종의 감각 기관[五根]인 눈(眼),귀(耳).코(鼻), 혀(舌), 몸(身)등이다.
2. 수온(受蘊 : vedana)
수란 감수(感受=감정)와 그 작용이다. 수(受)는 내적인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수에는 성질 상 3종이 있다. 즉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그리고 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이다. 고수란 즐거운 감정이고, 낙수란 괴로운 감정이다. 그리고 불고불낙수란 사수(捨受)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가리킨다.
3. 상온(想蘊 : samjna)
상은 개념(槪念) 또는 표상(表象)과 그 작용을 말한다. 상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상은 대상들을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 이름을 부여한다. 붉은 꽃을 볼 경우 먼저 지각(知覺)에 의해 인식 작용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붉은 꽃'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작용이 일나게 된다. 이때 '붉은', 또는 '꽃'이라는 개념 또는 그 작용이 상(想)이다.
4. 행온(行蘊 : samskara)
행, 즉 samskara란 '형성하는 힘'[形成力]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여기서는 특히 의지작용(意志作用: cetana)을 가리킨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윤리 생활을 할 수 있고 업(業: karma)을 짓게 되는 것은 이 행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서의 행은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과 그 현상이다. 예를 들면 기억, 상상, 추리등이 여기에 속한다.
5. 식온(識 : vijnana)
식은 일반적으로 분별(分別), 인식(認識) 및 그 작용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식(識)의 영역은 대상을 인식하는데 까지 가지 않는다. 그 전 단계인 주의작용(注意作用)일 뿐이다. 예를 들면 붉은 꽃을 볼 때 안식(眼識)이 일어나게 되는데 안식은 눈앞에 '무엇이' 나타난 것만을 알뿐이다. '붉다' '꽃이다'라고 아는 것은 식이 아니고 상(想)의 작용이다. 식 역시 감각기관들과 그 것에 해당되는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긴다
5온이론은, 인간 존재란 색, 수, 상, 행, 식등 5 가지 요소가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마치 여러 가지 목재(材木)를 한데 모아 세상에서 수레라 일컫는 것처럼 모든 온(蘊=要素)이 모인 것을 거짓으로 존재[衆生]라 부른다."라고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수레는 바퀴, 차체(車體), 축(軸)등 여러 요소가 모였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일 뿐, 이 요소들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색, 수, 상, 행, 식등 5 요소가 모일 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도 성립할 수 있게 된다.
5온 이론에 의하면 다른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영혼같은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수, 상, 행, 식과 같은 정신현상은 영혼과 같은 존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기관과 그 기관에 관계되는 대상과의 만남에서 생긴 된다.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마음[意:생각을 맡은 기관]등과 여기에 상응하는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할 수 있는 것[觸], 생각[法]이 서로 만날 때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등의 여러 가지 정신현상이 발생한다. 즉 6 가지 감각기관[六根]과 그것에 관계하는 6가지 대상[六境]이 합칠 때 6가지 식[六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수성유경(手聲喩經)에서는 "비유하면 두 손이 서로 마주쳐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눈[眼]과 물질[色: 對象]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다른 5식도 동일하다)라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만나서 식이 발생하면, 식 이외의 다른 정신 현상들, 즉 수, 상 ,행등도 함께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아함경의 여러 곳에서는 "눈과 물질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3가지[眼.色.識]가 합친 것이 촉(觸=여기서는 접촉)이다. 촉과 함께 수, 상, 행[思]이 생긴다.(이, 비, 설, 신, 의도 동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잡아함 273; 305)
5온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 요소들은 모두 비실체(非實體)적인 것이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 진 인간 존재 역시 비실체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여러 경전에서는 비유를 들어 색(色)은 거품덩어리 같고, 수(受)는 거품 방울 같고, 상(想)은 신기루 같고, 행(行)은 바바나줄기 같고, 식(識)은 허깨비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품덩어리, 거품방울, 신기루, 바바나 줄기, 허깨비들은 어느 것 하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 실체적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 진 존재가 실체적인 것일 수 없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아(無我:anatman)라고 표현한다. 이 '무아(無我)'라는 말에서 '아(我)'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實體的)인 아'(我 ; atman)를 의미한다. 인간 존재에는 그와 같은 '아(我)'는 없다는 것이고, 역시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非我]. 결국 인간은 "무아적 존재"인 것이다.
이 5온 이론, 즉 무아 이론은 초기불교에서 후기불교까지 전 불교사상사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시 불교를 다른 종교 및 사상과 구별짓게 하는 가장 독특한 교리이기도 하다. 경전에서 붓다는 이 무아이론을 수없이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고(苦)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붓다에 의하면 고는 욕망 때문에 생기고 욕망은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고의 근본 원인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제거되지 않는 한 고는 계속해서 발생하게 된다. "마치 뿌리가 다치지 않으면 나무는 설사 (윗 부분이) 잘리더라도 원기 왕성하게 다시 싹이 돋아 나오는 것처럼" 고(苦)도 계속 발생하게 된다고 법구경(法句經)에서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우리 존재 속에 소위 말하는 영혼과 같은 고정불변하고 실체적인 '내'(atman)가 있다고 믿는데서 생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때 그 믿음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 5온-무아(五蘊-無我) 교리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우리 존재가 '무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我]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할 때 우리들은 무엇에 집착할 것이며, 누구에게 분노를 품을 것이며, 무엇에 두려움을 느끼겠는가. 이것은 붓다와 팃사(Tissa)비구 사이에 있었던 문답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붓다는 팃사비구에게 "만일 색(色:육체)에 대해서 탐냄을 떠나고 욕망을 떠나고 생각을 떠났는데도 그 색이 변하거나 달라지면 그때 너는 근심, 슬픔, 번민, 괴로움이 생기겠느냐." 라고 묻는다. 팃사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수, 상, 행, 식등 다른 4온에 대해서도 같은 문답을 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깨트려지면 우리는 우리 존재가 변해도, 외부세계가 변해도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숲속의 나무들을 베어서 가져가도 우리들이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무들은 '아(我)도 아니고 아소(我所:나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함경에서는 무아이론을 불에 비유하고 있다. 불이 모든 초목을 태워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무아이론은 욕망과 고(苦)를 사라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무아이론을 실천하라고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때로 그것을 과격한 표현을 사용해서 나타내기도 한다. 붓다의 가장 큰 제자였던 샤리푸트라(Sariputra)는 야마카(Yamaka)비구에게 오온[인간존재]에 대해서 "그것은 병(病)과 같고 종기(腫氣)와 같으며 가시와 같고 죽음과 같으며 무상하고 괴로우며 공(空)이요 내[我]가 아니며 내것[我所]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그래서 거기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라지게 할 수 있고 그 결과 욕망을 없엘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고(苦)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아이론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해서 상식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나' 또는 '자기'와 같은 존재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한 생을 살다가 죽는 '나'는 인정한다. 단지 이와 같은 존재를 영원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일상적으로 말하는 '나'란 비실체적인 몇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임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가짜 나'(假我)라고 부른다. 이 '가짜 나'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제5절 3법인(三法印)
법인(法印: dharma mudra)이란 '법의 표지'(標識)라는 말이다. 3법인은 불교의 특징을 가장 단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깃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를 다른 종교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해 하나의 기준이 된다. 3법인과 일치하는 사상이면 불교이고 그 반대이면 불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형식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무상과 무아의 개념 속에 논리적으로 고(苦)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형식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행(諸行: sarva samskara)에서, 제(諸, sarva)는 '일체' 또는 '모든'의 뜻이다. 그리고 행(行) 즉 samskara는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사 sam과 '하다, 만들다'라는 의미의 동사 KR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서, '만들어 진 것'[爲作]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이란 '일체의 만들어진 것', 다시 말하면,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현대적인 표현으로는 '모든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무상은 anitya를 번역한 말로서, nitya 즉, '항상'(恒常)의 반대 의미이다. 무상이란 글자 그대로 "항상함이 없다", "변화하고 변천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제행무상'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함이 없이 변화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자연계와 인간계를 볼 때 모든 것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바뀌고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이나 바위 같은 것들은 불변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시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다. 자연도 인간도, 그리고 물질적인 것도, 정신적인 것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쉬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단 한 순간도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
존재란 여러 요소들이 여러가지 조건에 의하여 모여있는 집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와 조건들이 변하거나 사라지면 존재 역시 변하거나 사라진다. 그런데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고정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도 무상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행무상이라는 설명은 현대 과학에서 하고 있는 주장과 같다. 물질은 겉으로 보기에 고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에너지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와 중간자(中間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운동체이다. 이와 같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물질 역시 고정 불변한 것일 수는 없다. 무상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상이라는 말은 "인생은 무상하다." 또는 "세월은 무상한 것이다."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수가 많다. 무상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무상한 것은 고다" 라고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젊은 사람이 늙어가고 건강한 사람이 병들기도 하고, 부귀를 누리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일들은 괴로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갈 수가 있다. 변하기 때문에 아이가 어른이 되고 병든 사람이 건강을 되찾는다.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도 무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악한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되기도 하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부귀를 누릴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제행이 무상하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에 대한 객관적 관찰에 의해서 내려진 결론이다. 이것은 값싼 감상주의나 비관적인 현실관이 아니다. 제행무상인은 불교가 모든 존재를 보는 관점이므로 불교의 존재관(存在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제법(諸法: sarva dharma)이란 제행(諸行)과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때로는 '제법'과 '제행'을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 2개의 말은 다르다. 위에서 본 것처럼 '제행'에서 '행'은 'samskara'이고 '제법' 에서 '법'은 'dharma'이다. 제법은 제행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아(無我:anatman)라는 말은 "아(我)가 없다." 또는 "아(我)가 아니다."[非我]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我,atman)란 생멸변화를 벗어난 영원하고 불멸적인 존재인 실체(實體) 또는 본체(本體)를 말한다. 따라서 '제법무아'는 "모든 존재에는 고정불변 하는 실체적인 아(我)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역시 그것은 "실체적인 아[實體的我]가 아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비교적 쉽게 받아들이지만,"제법이 무아(無我)하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와 반대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쉬워도 존재의 배후에 영혼과 같은 실체적인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붓다 당시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불교 이외의 다른 종파에서는 대부분 불생불멸의 영원한 존재로서의 본체를 인정하고 있다. 그것을 '아'(我: atman)' 또는 '범'(梵: brahman)이라 하기도 하고, '영혼'[生存原理: jiva], 절대자, 신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이것은 개체적인 실체[我]를 가리키기도 하고 우주적인 실체[梵]를 말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실체적인 존재를 인정 할 수가 없다. 모든 존재[諸法]는 비실체적인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존재가 무아적일 것은 물론이고, 역시 그 속에 고정불변한 실체적인 아(我)가 없다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제법무아라고 해서 현상적인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정하고 있는 것은 단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아(我)'일 뿐이다. 제법무아인은 불교의 실체관(實體觀)이라고 할 수있다. '고정불변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다. 제법무아 이론은 불교만이 가르치고 있는 가장 독특한 것이다.
3.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열반'과 '적정(寂靜; santi)'은 동의어로서, 열반의 의미가 바로 '적정'이다. 열반에 대해서는 4성제의 멸성제에서 이미 설명했지만 좀더 부연한다면, 열반이란 'nirvana'의 음역으로서 글자 그대로는 소멸(消滅)을 의미한다. 그것은 '불어서 끄다'[吹消]라는 뜻을 가진 어근 'VA'에다 부정접두사 'nir'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말로서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한다. 즉 "불타고 있는 것과 같은 괴로움[苦]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초기 경전에서는 열반을 "탐욕의 사라짐[貪慾滅盡], 분노의 사라짐[瞋 滅盡], 어리석음의 사라짐[愚痴滅盡], 이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생에서 괴로움을 일으키는 요소들인 탐욕심, 분노심, 어리석음[3毒]이 모두 소멸되었을 때 인생은 더 이상 괴로운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열반의 상태는 '고요하고, 괴로움이 없이 편안[無苦安穩] 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santi' , 즉 '적정(寂靜)'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열반의 이와같은 상태를 한 경에서는 비유해서 "마치 마른 나뭇단을 많이 넣고 매우 뜨겁게 달군 큰 가마에서 불타고 있던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거기에서 벗어나 시원한 장소로 도망쳐 나왔을 때, 그가 느끼는 최상의 안락과 같은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경전에서는 열반이란 말을 멸(滅), 적(寂), 불사(不死), 최상의 안락(安樂)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하면 "최고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 모든 고(苦), 번뇌가 소멸된 상태는 바로 행복이기 때문이다. 열반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이자 최고의 이상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결국 이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적정인은 불교의 이상관(理想觀)이라고 할 수 있다..
3법인은 각 법인(法印)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연결된 하나의 실천이론으로 볼 수도 있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면 제법이 '무아' 하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하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면 우리는 욕망과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된다. 그리고 모든 욕망과 번뇌를 떠날 때 우리는 열반에 이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6절 일체법(一切法) - 5온(蘊).12처(處).18계(界)
일체법이란 '일체의 존재'를 말한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불교가 목표로 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뿐이다. 인간 문제의 해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 고(苦)의 해결이다. 그런데 불교 경전에서는 인간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체법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가르침을 펴고 있다. 이것은 불교가 자연과학이나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가 일체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함으로서 인간의 문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풀기 위해서 이다. 우리는 일체법의 참된 모습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고, 집착함으로서 그것이 변하거나 사라질 때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일체법을 분류하는데는 여러 가지방법이 있다. 대상은 한 가지 이지만 상황에 따라 다른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설명 할 수도 있고 좀 더 자세하게 할 수도 있다. 물질을 위주로 설명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정신을 위주로 할 수도 있다. 일체법을 이해하는 사람의 성향이나 능력, 또는 수준에 따라 다른 설명들이 필요한 것이다.
초기 경전에 나오고 있는 일체법의 분류 방법 가운데서 가장 일반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5온, 12처, 18계이다. 정신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5온을, 그리고 물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12처를, 또 정신과 물질 모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18계를 설해서 물질과 정신이 모두 실체적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1. 5온(五蘊: skhanda )
5온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존재와 관계된 것이 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의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 진 것, 그리고 그것은 실체적인 아(我)가 아니라는 것, 즉 무아(無我)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5온으로서 일체법을 설명할 때는 5온이 개인 존재만이 아니라 일체의 만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체법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5온 가운데서 색온(色蘊)은 물질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 )등 4온은 정신일반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체법은 이와 같은 5개의 요소가 결합해서 항상 변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어디에도 실체적인 것이 없다. 결국 일체법은 무아이고 무실체적이라는 것이다.
5온을 설하는 대상은 물질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서 무상하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정신은 실체적인 것으로서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5온 이론에서는 정신적인 것도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물질 부분보다는 정신부분에 대한 설명을 훨씬 더 상세하게 하고 있다. 5온은 상근기(上根機)에 속하는 사람을 위한 설명이다. 근기란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상근기, 즉 법을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은 5온에 대한 설명만 들어도 일체법이 실체적이 아니라는 것[無我]을 이해 할 수 있다.
2. 12처(十二處, ayatana)
12처의 처(處)는 ayatana에서 번역된 말로서 구역(舊譯)에서는 '입'(入)이라고 했다. 이말은 'ayat'와 'ana'로 이루어져 있는데, 'ayat'는 '들어오는' 의 뜻이고, 'ana'는 '것'과 '곳'이라는 2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ayatana라는 말은 '들어오는 곳'[處] 또는 '들어오는 것'[入]이라는 의미이다.
12처란 눈[眼根], 귀[耳根], 코[鼻根], 혀[舌根], 몸[身根], 마음[意根]등 6개의 감각기관[6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6개의 대상, 즉 빛깔과 형태[色境], 소리[聲境], 냄새[香境], 맛[味境].닿을 수 있는 것[觸境], 생각[法境]등을 합친 것이다.
보는 작용은 눈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듣는 작용은 귀를 통해서, 냄새 맡는 것은 코를 통해서, 맛보는 것은 혀를 통해서, 감촉은 몸(몸의 각 부위에 있는 피부)을 통해서, 생각은 마음[意]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들 눈, 귀, 코, 혀, 몸, 마음[眼耳鼻舌身意]등을 6개의 기관이라는 이라는 의미에서 6근(根)이라 부르고, 6내처(六內處)라고도 한다. 6근의 근은 기관(器官)이라는 의미 이외에, 기관이 가지고 있는 기능까지를 포함한다. 안근이라고 해서 안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볼수 있는 눈의 기능까지 포함한다. 6근에서 제6의 의근(意根)은 기능만 존재하지 실제로 구체적인 기관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식(意識)이 생기므로 일종의 기관임에는 틀림없다.
6근에 상응하는 바깥 세계의 대상, 즉 빛깔과 형태, 소리, 냄새, 맛, 닿을 수 있는 것, 생각[色聲香味觸法]등을 6경(六境)이라 부르고, 6외처(六外處)라고도 한다. 정신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각기관과 거기에 상응하는 대상이 만나야 된다. 즉 눈에는 빛깔, 또는 형태가, 귀에는 소리가, 혀에는 맛이, 몸[피부]에는 첩촉할 수 있는 것이, 마음[意根]에는 생각[法]이 만나야 한다. 여기에서 법을 '생각'이라고 말했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12처 가운데서 '11처(處)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현상' 이다.
12처란, 다시 말해서 6근과 6경, 즉 6내처와 6외처를 합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표시 할 수 있다.
6근 6경
1) 안처(眼處)--- 7) 색처(色處)
2) 이처(耳處)----8) 성처(聲處)
3) 비처(鼻處)----9) 향처(香處)
6내처 4) 설처(舌處)--- 10) 미처(味處) 6외처
5) 신처(身處)----11) 촉처(觸處)
6) 의처(意處)----12) 법처(法處)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존재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것을 요약해서 분류하면 주관계(主觀界)와 객관계(客觀界)로 나눌수 있다. 주관계를 구성하는 요소가 6근[6내처]이고, 또 객관계를 이루고 있는 요소가 6경[6외처]으로서 이것을 합친 것이 12처이다. 이와 같은 분류방법은 일체 존재의 주체인 인간의 인식능력을 중심으로 구분해서 체계화한 것이다.
일체법에서 12처를 논하는 근본 목적은 역시 제법무아의 진리를 밝히는데 있다. 특히 이것은 물질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물질이 실체라고 생각하거나, 물질 가운데 실체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설해진다. 일체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12종의 요소에는 고정 불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12처에 의해서 주관계와 객관계를 모두 포섭하고, 이 모든 것들은 무상이고 무아라고 하는 것이다. 12처는 중근기(中根機), 즉 법을 이해하는 능력에 있어서 중간 수준에 속하는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다.
3. 18계(十八界, dhatu)
18계의 계(界)는 dhatu를 번역한 말로서, 구성요소, 또는 영역, 종류의 뜻이다. 18계란 12처 즉 6근과 6경에 6식(識)을 합친 것이다.
18계의 분류 방법은 '근.경.식(根.境.識)의 3사화합(三事和合)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식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관[根]과 인식의 대상[境]과 인식작용[識]의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눈을 통해서 빛깔이나 형상을 보기 때문에 그것을 식별하는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안식(眼識)이라 한다. 귀로서 소리를 듣기 때문에 이식(耳識)이, 코로서 냄새를 맡기 때문에 비식(鼻識)이, 몸으로 무엇을 접촉하기 때문에 신식(身識)이,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기 때문에 의식(意識)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6식(識)이다.
이것을 아함경에서는[手聲喩經] 손뼉 소리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즉 "비유하면, 두 손이 서로 마주쳐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눈과 빛깔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나머지 5 識도 마찬가지다)" 이 비유에서 한 손은 기관[根]과 같은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대상[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손뼉 소리는 식(識)과 같다.
18계의 상호 관계를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18계
6근 6경 6식
1) 안계(眼界) -7) 색계(色界) = 13) 안식계(眼識界)
2) 이계(耳界) -8) 성계(聲界) = 14) 이식계(耳識界)
3) 비계(鼻界) -9) 향계(香界) = 15) 비식계(鼻識界)
4) 설계(舌界) -10) 미계(味界) = 16) 설식계(舌識界)
5) 신계(身界) -11) 촉계(觸界) = 17) 신식계(身識界)
6) 의계(意界) -12) 법계(法界) = 18) 의식계(意識界)
18계설에서는 일체의 존재를 이와 같은 18계의 요소로 분류했다. 이때는 12처의 경우와는 달리 6근과 6경을 합쳐서 객관계로 보고, 6식을 주관계로 보았다. 18계에서는 일체존재를 12처에서 보다 상세하게 분류한 것이다.
12처를 설명할 때 보았듯이 일체를 구성하고 있는 12가지 요소 모두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요소들이 만나서 생기게 된 식(識) 역시 실체적인 것일 수는 없다. 객관세계의 모든 것, 즉 물질적인 것도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주관세계의 것, 즉 정신적인 것도 실체가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비유에서처럼 손뼉 소리를 낼 수 있는 2 손바닥도 실체(實體)적인 것이 아니지만, 실체적이 아닌 그 2 손바닥이 마주쳐서 일으킨 소리 역시 실체적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결국 18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체법은 물질적인 것에서도, 그리고 정신적인 것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18계를 설할 대상자는 물질과 정신에 모두 어두운 사람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를 실체적이고 영원하다고 믿는 것이다. 18계설은 이와 같은 사람을 위해 물질과 정신의 참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그것에 대한 집착을 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18계설은 하근기(下根機), 즉 법을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낮은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다.
제7절 윤회(輪廻)와 업(業)
1. 윤회(samsara)
'윤회'(輪廻)라는 말은 samsara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sam'과 sara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sam'은 '함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ra'는 '달리다. 빠르게 움직이다. 건너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SR'에서 유래한 말이다. 따라서 samsara를 글자 그대 번역하면 '함께 달리는 것','함께 건너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중국의 번역가들은 이 것을 윤회, 즉 '도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경전에서는 윤회를 중생들이 여러 세계를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그렇게 돌고 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 존재가 죽으면 이 세상이나 다른 세상에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되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으면 다시 그곳이나 다른 세상에 태어난다.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태어난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여러 가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삶과 죽음을 끝없이 되풀이한다. 그래서 이것을 "도는 것", 즉 윤회라고 한 것이다.
윤회의 원리는 간단하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 짓는 모든 업(業 =行爲)은 틀림없이 결과를 낳게 되고, 그 결과가 다음 생(生)을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업의 결과가 남아있는 동안에는 윤회는 계속된다. 그러나 업의 결과가 모두 소비되어서 없어지면 윤회는 끝나게 된다. 이것이 해탈, 또는 열반이다.
윤회는 욕계(欲界),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등 3계(三界: 3개의 세계), 또는 지옥도(地獄途), 아귀도(餓鬼途), 축생도(畜生途),아수라(阿修羅途), 인간도(人間途), 천상도(天上途)등 6도(六途: 6개의 세계)를 통해 전개된다. 3계와 6도는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세계다. 단지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의 차이 때문에 다르게 설명되고 있을 뿐이다.
욕계란 욕망의 생활을 하는 존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그리고 저급한 신들이 사는 세계다. 색계는 욕망을 떠났으나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존재들은 '천상의 존재'(天上存在), 또는 '신'(神)이라 불린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은 아니다. 천상에서 살 수 있는 선업(善業)의 결과가 다하면 다시 다른 세계로 윤회전생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의 육체는 미묘한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무색계는 욕망은 말할 것도 없지만 육체조차도 없는 존재들이 사는 세계다. 이들은 순전히 정신적인 존재들이다.
지옥, 아귀, 축생등 3도는 나쁜 세계이므로 악도(惡途)라 한다. 지옥은 주로 땅밑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사는 중생들은 업이 다 할 때까지 긴 세월동안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아귀도에 사는 중생들은 목구멍이 바늘처럼 가는 반면, 배는 대단히 큰 존재들로서 항상 배고픔과 목마름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 축생도는 모든 종류의 벌레들, 물고기, 새, 짐승들이 사는 곳이다. 아수라도는 항상 신들[諸天]을 상대로 싸움을 하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인간과 천상의 2도(途)는 선업을 지은 존재들이 사는 좋은 세계로 선도(善途)라 한다. 6도 가운데서 인간도는 중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큰 특혜다. 인간도에는 고(苦)도 있지만 그러나 이곳에서만이 수도를 할 수 있고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業)도 인간도에서만 짓게 된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만 윤리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5도에서는 업을 소비할 뿐이다.
'윤회'라는 말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순환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윤회하는 존재는 6개의 세계[六途]를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죽고 태어나면서 순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도에서 목숨을 마치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이나 축생도에 떨어 질 수도 있다. 역시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도에나 지옥도에 태어날 수도 있다.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시작이 없다'[無始]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끝은 알 수 있다. 붓다처럼 법을 깨쳐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되고, 이미 지은 업이 모두 소멸되면 윤회의 바퀴는 멈추게 되는 것이다.
2. 업(業, karman)
업(業)이라는 말은 karman을 번역한 것이다. karman은 '완수하다, 만들다, 하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KR가 그 어원으로, '활동' '일' '행위'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업'이라 하고 있다. 업은 육체로 짓는 행위인 신업(身業), 언어로 짓는 행위인 구업(口業), 마음으로 짓는 행위인 의업(意業)등 3업(三業)으로 구분한다. 3업을 세분하면 10업이 된다.
1) 살생(殺生): 산목숨을 죽이는 것
2) 투도(偸盜): 다른 사람이 주지 않은 물건을 훔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취하는 것.
3) 사음(邪淫): 부모와 형제와 자매로부터 보호되고 있는 여자를 범하는 것.
4) 망어(妄語):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하고 혹은 재물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
5) 양설(兩舌):이간시키는 말로서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당파를 만들게 하는 것.
6) 악구(惡口): 추한 말, 즉 욕을 하는 것.
7) 기어(綺語): 꾸며대는 말, 즉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뜻이 아닌 것을 말하고, 법(法)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
8) 탐(貪): 남의 재물과 모든 생활 기구를 엿보고 구하고 바라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
9) 진(瞋): 미워하고 성내는 것.
10) 사견(邪見): 삿 된 소견, 구체적으로 말하면 업과 그 과보를 믿지 않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
10업 가운데서 살생, 투도, 사음은 신업이고, 망어, 양설, 악구, 기어는 구업에 속하고 탐, 진, 사견은 의업이다.
업을 성질상으로 분류해서 선업(善業), 악업(惡業), 무기업(無記業)으로 나누기도 한다. 선업은 착한 행위로서 좋은 과보를 내게 되고, 악업은 악한 행위로서 나쁜 과보를 내게 된다. 무기업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행위로서 과보를 낼 수 없다.
업이론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라는 "인과(因果)의 법칙"위에 성립되어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라는 "윤리적인 법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업 이론은 인과성과 윤리성의 2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업이론의 인과성은 자연법칙에서와 같은 것이지만, 그 윤리성, 즉 선한 행위에는 좋은 결과가 나오고 악한 행위에는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다.
업을 행할 때 업[행위] 그 자체는 순간적으로 끝나 버린다. 그러나 업은 그것을 행한 존재 속에 반드시 어떤 흔적이나 세력을 남기게 된다. 마치 향(香)을 태울 때 향이 다 타서 사라진 뒤에도 향기가 옷에 배어들어 남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업이 남긴 이 세력을 업력(業力)이라 하는데, 이것은 잠재적인 에너지로 되어서 존재 속에 머물러 있다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업력은 존재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하고,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래를 만드는 에너지로 된다.
업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이 생(生)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생을 통해서 틀림없이 그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래서 업은 존재의 현재의 운명뿐만 아니라 미래의 운명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존재의 모든 것은 업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사람으로 태어날 업을 지었으면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고 짐승이 될 업을 지었으면 짐승으로 태어나게 된다. 한 존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모습, 성격, 환경, 태어난 국토, 수명의 길고 짧음, 육체적인 조건 등은 그 존재가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이다. 역시 현재 짓고 있는 업은 그 존재의 미래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재료가 된다. 이처럼 존재의 모든 것은 업에 의해 결정된다.
업은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도 결정한다. 단체나 사회의 운명은 그 단체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짓는 업에 의해 결정된다. 한 존재는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개인 업, 즉 불공업(不共業)을 짓는 것과 동시에, 역시 그 존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공업(共業)도 짓게 된다. 업은 존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궁극원리(窮極原理)이다.
인간의 행위를 업(業)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모든 행위가 업은 아니다. 업다운 업이 되기 위해서는 과보(果報)를 초래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행위여야 한다. 그렇지 못한 행위는 업이 아니다.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2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의도적인 행위여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행위는 과보를 초래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둘째, 윤리적인 행위여야 한다. 즉 선한 행위이거나 악한 행위여야 한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위, 즉 무기업은 중성적인 업으로서 무정란(無精卵)과 같은 것이다. 이 업은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 무기업은 엄밀한 의미에서 업이라고 할 수 없다.
업은 인간만이 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의도된 행위와 윤리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행동은 본능적인 것일 뿐 의지작용이 밑바탕이 된 행위는 아니다. 역시 동물들은 윤리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6도(六途) 가운데서 인간도에서만 업을 짓고, 나머지 5도에서는 업을 소비할 뿐이다.
3. 과보(果報)
업이 지어지면 틀림없이 그 결과가 타나게 된다. 그것을 과보(果報:phala)라 한다. 업과 과보의 관계는 식물에 비유해서 설명될 수 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가 열린다. 열매의 맛과 성질은 전적으로 그 씨앗을 따른다. 마찬가지로 업을 지으면 그것은 성숙하게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과보를 초래한다. 그리고 과보의 성질은 전적으로 업의 성질에 좌우된다.
예를 들어 같은 밭에 고추 씨앗과 가지 씨앗을 심은 뒤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 고추와 가지를 키우더라도 그 결과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고추 씨앗의 결과는 고추로 나타나게 되고, 가지 씨앗의 결과는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고추와 가지의 모양과 맛은 그것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씨앗 속에 들어 있다. 업과 과보의 원리도 이와 같은 것이다.
업이 일단 결정되고 나면 그 과보는 피 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업을 지은 사람에게 그 결과가 나타나고야 만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법구경(法句經)에서는 이것을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중 동굴에도 사람이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업은 개인의 의지작용(意志作用)에 의해 짓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을 다른 존재에게 이전시킬 수 있다거나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가 대신 받을 수는 없다. 설사 그것이 선업의 과보 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업의 원리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리",즉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원리, 또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업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 성질에 따라 틀림없이 그 과보가 있게 된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산술적(算術的)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2개의 똑같은 업을 지었다 해도 그 결과는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똑 같은 보시를 하더라도 그 보시를 누구에게 하는가에 따라 그 과보는 다르다. 음식물을 짐승에게 주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결과가 더 크고, 범부에게보다는 수행자에게 주는 것이 더욱 큰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 수행자에게 하는 보시보다는 도를 이룬 붓다와 같은 존재에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과보를 받을 수 있다. 짐승을 죽여도 죄가 되지만 사람이나 성인(聖人)을 죽이면 그 죄는 더욱 무겁다.
이와 같은 원리는 붓다가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짓왕에게 한 설명을 보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 "대왕이여 알아야 하오. 마치 저 농부가 땅을 잘 다루고 잡초를 없앤 뒤에 좋은 종자를 좋은 밭에 뿌리면 거기에서 나오는 수확은 한량이 없지마는 그 농부가 땅을 잘 다루지 않고 잡초들을 없애지 않고서 종자를 뿌리면 그 수확은 말할 것도 못되는 것과 같소." 즉 같은 넓이의 밭에 같은 양의 종자를 심는다해도 밭의 상태에 따라 수확의 양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것도 동일하다.
업이 일단 결정된 뒤에는 외부의 영향은 미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러나 업을 지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예상되는 결과를 다소 변화시킬 수 있다. 업을 지은 뒤에 다시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이미 결정된 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보를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거나 완전히 다른 것으로 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소금물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그릇의 물 속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한 잔 속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과 큰그릇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은 동일 하지만 물의 양에 따라 소금물의 농도가 다르게 되므로 마실 수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물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미 결정된 업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 그 결과를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쁜 업을 지었어도 그 뒤에 좋은 업을 많이 지으면 이미 지은 나쁜 업에 대한 과보는 나쁘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원리 때문에 업 이론은 기계론적인 이론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는 업의 성질과 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것은 곡식이 종자에 따라 싹이 나오는 시기가 다른 것과 같다. 또한 동일한 종자라 해도 온도나 습도등 종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싹이 일찍 나오기도 하고 늦게 나오기도 한다.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도 이와 같아서 일정하지가 않다.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를 3 종류로 나눈다. 이 생에서 지어서 이 생에서 그 과보가 나타나 업을 순현업(順現業), 그 과보가 다음 생에 나타나는 업을 순생업(順生業), 차후생 또는 여러 생에 걸쳐 나타나는 업을 순후업(順後業)이라 한다. 그리고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가 정해진 업을 정업(定業)이라하고 그 반대인 것, 즉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업을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한다.
업을 지으면 틀림없이 그 과보를 받게 되지만 그 결과는 항상 동일하지는 않다.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업을 지으면 어떤 과보를 받는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선업을 지은 사람은 천상이나 인간계, 즉 선도(善途)에 태어나고, 악업을 지은 사람은 주로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 즉 악도(惡途)에 태어난다고 말 할 수 있다. 경전에 의하면 악업을 지은 사람은 설사 인간계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 해도 다음과 같은 나쁜 조건 속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살생(殺生) 업을 많이 지으면 건강이 좋지 않거나 일찍 죽게 되고, 투도(偸盜)업을 많이 지으면 가난하게 태어난다. 사음(邪淫) 업을 많이 지으면 가족들이 정숙하지 못하게 되고, 망어(妄語)업을 많이 지으면 말에 신용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멸시를 받게 된다. 양설(兩舌) 업을 많이 지으면 정신이 안정되지 못해서 항상 불안 속에 살게 되고 가정불화가 많을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게 된다. 악구(惡口)업을 많이 짓는 사람은 얼굴이 못생기고 듣기 싫은 목소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항상 미움을 받게 된다.
기어(綺語)업을 많이 지으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친척들이 흩어진다. 탐욕(貪慾)업과 화를 내는 업[瞋 ]을 많이 지으면 다음 생에서도 탐욕심과 화를 많이 내게 된다. 그리고 사견(邪見) 업을 많이 짓는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어지러워 안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문화중심지에 태어날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어서 붓다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다. 심하면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가 되고 선법(善法)과 악법(惡法)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4. 윤회의 주체문제(主體問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윤회를 한다면 바로 이 영혼이 다른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힌두교와 자이나교는 어떤 존재가 죽어 육체가 사라지면 영혼과 같은 존재인 아트만(atman)이나 지바(jiva)가 윤회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무아(anatman)를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없다. 불교에 의하면 인간 존재란 비실체적(非實體的)인 몇 개의 요소들[五蘊]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임시적으로 모여 있는 하나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 고정 불변하는 어떤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존재가 사라질 때 '누가' 또는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이 생(生)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전생(輪廻轉生)하게 되는 것인가.
사실 윤회의 주체(主體)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이 문제는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다.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러 이 문제는 부파간에 하나의 중요한 교리적인 쟁점이 되지만, 초기 경전에서도 이미 이 문제와 관련한 몇 가지 설명이 등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곳은 잡아함(335)의 제일공경(第一空經)이다.
이 경에 의하면 윤회를 위해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이 반드시 옮겨 가야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윤회란 고정불변하는 어떤 주체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아 가는것'[移轉]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변화하면서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붓다는 "업과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존재는 없다. 이 존재(此陰: 죽는 존재)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異陰: 태어나는 존재)가 서로 계속된다"[有業報而 無作者 此陰滅已 異陰相續]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다른 곳에서는 우유의 비유로써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우유로써 4종의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즉 "우유가 낙(酪)이 되고 , 낙이 생소(生 )로 되고, 생소가 숙소(熟 )로 되고, 숙소가 제호(醍 )로 된다." 우유가 낙에서 제호로 될 때 우유에서 제호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유가 변해서 낙이 되고, 낙이 변해서 생소로 된다. 그리고 생소는 변해서 숙소로 되고 숙소가 변해서 제호로 된다. 낙은 더 이상 우유가 아니고 생소 역시 더 이상 낙이 아니다. 우유에서 제호 사이에는 동일성은 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우유 없이는 낙이 있을 수 없고, 낙 없이는 생소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숙소 없이는 제호도 생길 수 없다. 물이나 기름과 같은 다른 물질로서는 아무리 우유에서와 같은 조건을 갖추어 준다해도 낙이나 소나 제호는 얻을 수 없다.
나비의 비유를 들어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나비의 알(卵)은 애벌레로, 그리고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변하고 번데기에서 결국 나비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는 전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고정불변하는 것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알이 변해서 애벌레로 되고, 그리고 애벌레가 변해서 번데기로,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로 되는 것일 뿐이다.
알과 나비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알의 상태에서 나비로 되기까지 변하지 않고 옮겨가는 '어떤 것'은 없지만 알과 나비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나비 알속에는 이미 나비가 될 수 있는 조건이 들어 있다. 그래서 나비는 나비알에서만 나오지, 모기 알에서는 나올 수 없다.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아윤회이론에서도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윤회할 때 고정불변하는 영혼과 같은 실체가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변화해서 다른 존재로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업(karman)이다. 한 존재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업은 잠재적인 에너지, 즉 업력(業力) 상태로 그 존재 속에 축적되어 있다가 존재가 죽으면 그 업력이 작용해서 다음 존재를 만든다는 것이다.
과거에 지은 업은 현재의 존재를 만들었고, 현재 짓는 업은 미래의 존재를 만든다. 업의 성질에 따라 우리는 천상의 존재가 되기도 하고 축생(畜生)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아트만(atman)과 같은 윤회의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성은 없다. 나비의 알이 나비로 되는데 고정불변한 어떤 요소가 없어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현재의 존재에서 다음 존재로 넘어가는 영혼과 같은 것이 없다면 현재의 존재가 지은 업의 결과[果報]는 누가 받게 되는가. 윤회와 업사상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그 결과를 받는다."라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인데, 업을 짓는 존재와 그 과보를 받는 존재가 동일하지 않다면 이 원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유와 나비 알의 비유에서처럼 전자와 후자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원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우유와 제호(醍 )는 같은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우유의 질이 좋지 않을 때는 그 결과인 제호도 질이 좋지 않을 것이다. 나비의 알이 병든 것이라고 한다면 그 알이 변해서 되는 나비 역시 건강한 나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유와 제호, 또는 나비의 알과 나비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우유나 나비 알이 가진 결함에 대한 결과를 제호나 나비가 받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좀 후기 경전이긴 하지만 <밀린다판하>에서는 이것을 망고의 비유로서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남의 망고밭에서 망고를 훔치다가 주인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망고 도둑은 그 나무 주인에게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도둑의 논리는 주인이 심은 망고는 이미 오래전에 땅속에서 썩어 버렸고, 자신이 딴 망고는 주인이 심은 그 망고와는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그럴 듯 하지만 결국 망고나무 주인이 심은 망고가 자라서 망고나무가 되고 그 결과로서 현재의 망고 열매가 열였기 때문에 현재의 망고는 그 나무를 심은 사람의 것임에 틀림없다. 현재의 망고와 과거의 망고는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무아윤회이론에서의 과보 문제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는 다르지만 과거의 존재가 지은 업의 결과는 현재의 존재가 받게 된다. 밀린다판하에서 나가세나 장노는 이것을 간단하게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다시 태어나는 자는 죽은 자와 다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자가 지은 업(의 과보)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다시 쓰는 원시(초기)불교
김선근 교수님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인도철학과 교수로 계십니다.
목 차
제1장. 원시불교(原始佛敎, 初期佛敎)의 범위와 성전 그리고 연구방법
제2장. 초기불교의 중심사상
A. 특 징
B. 내 용
I. 연기(緣起, Patticcasamuppada, Skt, Prati tyasamutpada)의 사상
Ⅰ-1. 연기(緣起)의 의미
Ⅰ-2. 십이연기(Dvadasanga-paticcasamuppada)설
II. 삼법인설(三法印說)
II-1. 제행무상(諸行無常, sabbe sankhara anicca)
II-2. 제법무아(諸法無我, sabbe dhamma anatta)
II-3. 일체개고(一切皆苦, sabbe sankhara dukkha)
Ⅲ. 사성제(四聖諦, cattari-ariya-saccani, Skt, catur-arya-satya)설
Ⅳ. 中道(majjhima patipada)觀
Ⅴ. 禪定(Jhana, dhyana)觀
제 1장. 원시불교(原始佛敎)의 범위와 성전 그리고 연구방법
원시(초기)불교는 통상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도로부터 입멸 후 100년까지의 사이의 불교를 가리킨다. 이것은 인도 불교사의 시대적 구분에서 볼 때, 상좌부와 대중부 두 개의 부파로 분열하기까지의 불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불교가 성립하여 그 초기 교단에 아직 분파가 생겨나지 않은 시대의 불교를 원시불교라고 보는 것이다. 원시불교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는 아함경(阿含經)이다. 아함경은 그 수효가 거의 3천 종에 달하여 여러 형식과 내용으로 된 많은 경전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빨리(pali)어와 한역경전(漢譯經典)으로 된 원전이 있어, 빨리어의 원전은 남전불전(南傳佛典)으로 니까야(Nikaya)라고 하고, 한역경전은 아함경(Agama)이라고 부른다. 원시불교의 교리는 이러한 원시 '경장(經藏, Sutta-pitaka)'과 '율장(律藏, Vinaya-pitaka)'등 에 설해져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구전(口傳)단계를 지나서 빨리어 삼장(三藏)이 문자화되었던 것은 기원전 1세기경 스리랑카의 밧따가미니 아바야(Vattgamini-Abhaya)왕 시대였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원시불교의 성전이 정리된 것으로서 빨리어 삼장(三藏)과 이에 해당하는 한역삼장(漢譯三藏)이 있다.
1. 경장(經藏, Sutta-pitaka).
1) Digha-nikaya(장아함경)
2) Majjhima-nikaya(중아함경)
3) Samyutta-nikaya(잡아함경)
4) Anguttara-nikaya(증일아함경)
5) Khuddaka-nikaya(잡부)
① Khuddaka-patha(小誦)
② Dhammapada(法句經)
③ Udana(感興偈)
④ Itivuttaka(如是語)
⑤ Suttanipata(經集)(義足經 2卷)
⑥ Vimanavatthu(天宮事)
⑦ Petuvatthu(餓鬼事)
⑧ Theragtha (長老偈)
⑨ Therigatha(長老尼偈)
⑩ Jataka(本生經)
⑪ Niddesa(義釋)
⑫ Patisambhidamagga(無碍解道)
⑬ Apadana(譬喩經)
⑭ Buddhavamsa(佛種姓)
⑮ Cariya-pitka(所行藏)
2. 율장(律藏, Vinaya-pitaka)
1) 四分律
2) 五分律 30十誦律
4) 摩訶僧祗律
5) 根本說一切有部律등
3. 논장(論藏, Abhidhamma-pitaka)
1) Dhammasanga(法集論)
2) Vibhanga(分別論)
3) Puggala-pannatti(人施設論)
4) Yamaka(雙論)
5) Dhatu-katha(界論)
6) Kathavattu(論事)
7) Pattana(發趣論)
8) Visuddhimagga(淸淨道論)
빨리어는 서인도의 방언으로, 부처님 입멸 후 초기교단이 서인도로 발전되면서 성전의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불교의 교단이 서인도로 발전했던 이유는 중부 인도의 남방은 북인도와 남인도를 분할하는 빈댜(Vindhya)산맥의 고원에 의해 가로 막혀 있고, 동부는 살인적 더위로 개발되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아반띠(Avanti)국 출신의 논의 제일인 마하까짜나(Mahakaccana, 大迦?延)와 설법 제일인 뿌루나(Purna, 富樓那)가 각각 그들의 고향인 웃자인(ujjain)과 수나빠란따(Suna paranta, 일명Surona-paranta, 현재 봄베이 서북방에 해당함)에서 탁월한 포교를 했기 때문이다. 아쇼카(B.C. 268-232)왕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는 서인도의 중심국가인 아반띠의 수도인 웃자인으로부터 북동쪽으로 가는 길에 베디샤(Vedisa)가 있는데 그 곳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마힌다는 아쇼카왕 시대에 스리랑카(Srilanka)에 서인도의 불교를 전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에서 여장을 갖추고 인도 서해안에서 배를 타고 출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스리랑카 등지의 남방불교는 부파명칭으로는 분별부(vibhasavada)인데, 이 부파의 본거지가 서인도라는 사실은 마하까짜나의 영향이다. 이러한 사실로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하는 남방불교와 서인도와의 인연이 깊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것으로 불교의 초기교단은 중인도에서 서인도로 '남로(南路, Dakkhinapatha)'를 따라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경(經)·율(律)·론(論) 삼장(三藏)의 언어인 빨리어는 초기교단의 변천사와 상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원시불교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아함경』과『율장』이 기본 자료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원시불교 시대의 상태 그대로의 경전은 아니라는 것을 유의하여 여러 이본(異本)을 비교 대조하여 거기서 공통된 사상을 끄집어내기 위한 언어학 고찰, 사상사 고찰, 또는 문화사적 고찰 등 가능한 한 넓은 시각에서 신중하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몇가지 유의해야 할 문제는, 첫째 이러한 경전이 부파불교의 출가교단 내부에서 편집되어 전승되었으므로, 재가신도에 대한 교설은 일부 산실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둘째, 진정한 불교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불교와 그 시대의 문명, 그 중에서도 종교사상과의 관련관계를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아함경』과『율장』에 대해서도 대승적 시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개개의 경설(經說)의 배후에 숨어있는 사상을 관통(貫通)하는 데 필요하다.
오늘날의 남방불교권과 한역경전을 포함하여 남북양전(南北兩傳)의 비교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오늘의 원시불교 연구자는 언어학 고찰을, 사상사 고찰 그리고 문화사 고찰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첨언한다. 그러면 여러 경(經)들을 통하여 공통적으로 거의 동일한 표현으로 강조되고 있는 중심 사상들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제2장. 원시불교의 중심사상
A. 특징
1)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현실적이며, 실천적인 성격을 지닌 ' 여실지견(如實智見, yathabhutanana-dassana)'을 지남하는 것이었다. 부처님 당시의 사상계에서는 초경험적인 것을 논한 것이 10종, 14종 또는 16종의 문제라고 한다.
①세계는 상주(常住)인가, 또는 무상인가 (상주이면서 무상인 것인가, 또는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 것인가).
②세계는 유한한가, 또는 무한한가 (유한하고 무한한 것인가, 또는 유한하지도 않으며 무한하지도 않은가).
③몸과 영혼은 같은 것(一)인가 다른 것(異)인가.
④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또는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부처님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는 관계가 없는 '무기(無記)'라고 하여 희론(戱論)으로 배척하고 대답을 일체 거부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부처님이 취한 독특한 현실적인 태도는『전유경(箭喩經)』에서 상세히 설해지고 있다.『전유경』에서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마치 독화살을 맞은 환자가 빨리 그 독화살을 제거하지 않고, 그 화살이 어떤 것이며, 그 활을 쏜 자가 누구인가를 알려고 애쓰다가 죽어가는 어리석음에 비유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체관(諦觀)' 즉 '여실지견(如實智見)'하라는 것이다. 이 '여실지견'은 '있는 그대로의 보는 체관'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사실과 가치의 두 판단을 포함하는 '사제(四諦)'의 법칙과 같은 패러다임이다. 이는 원시불교 뿐만 아니라 불교 전체에 관통하는 입장이다.
2) 부처님은 기독교와 같은 교권주의(敎權主義)를 배척하고 정법(正法)중심주의를 설하셨다. 부처님이 설하신 교설의 목적은 기독교와 같은 교권주의를 배척하고 법(진리)를 깨달아 스스로 해탈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해탈시키고자 한 것이다. 부처님은 입멸에 즈음하여, "아난아, 나의 멸후에는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를 귀의처로 하라.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법(法, dharma)을 등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고 하셨으며, "연기(緣起)를 보는 사람은 법(法)을 보고, 법(法)을 보는 사람은 나(佛)를 본다.고 설교하셨다. 원시경전이나 후에도 자주 사용되어 불교의 진리관을 나타내는 정형(定型)이 되는 법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생生으로 말미암아(緣) 노사(老死)가 있다. 모든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또는 모든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지 않든 이 상의성(相依性)이라는 도리는 확정된 것이고, 법으로서 확정되고 법으로서 결정된 것이다. 여래는 그것을 한결같이 깨달아 아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러한 진리(법)을 깨달은 사람일뿐이니, 누구든지 법을 깨달으면 부처님과 같이 각자(覺者, Buddha)가 될 수 있다는 진리성에 대한 견해를 잘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진리(法, 緣起)만이 권위가 있고, 그밖에 어떤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근본 입장을『남본열반경(南本涅槃經)』권卷 6에서 설하고 있는 '사의 사불의설(四依 四不依說)'이다. '법法의 사의(四依)'는 첫째, 가르침에 의지하고, 가르침을 설하는 사람에 의지하지 말 것(依法不依人)과 둘째, 가르침의 뜻에 의지하지 말에 의지하지 말 것(依義不依說)과 셋째, 지혜(智慧)에 의지하지, 지식에 의지하지 말것(依智不依識)과 넷째, 완전한 가르침을 나타내는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 것 (依了義經不了義經)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법正法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라는 것이 다. 이러한 법도 대승불교에서는 절대적인 권위를 존중하여 법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니,『금강경』에서 "너희들 비구들아, 나의 설한 법을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는 법도 응당 버려야 할 것이든, 하물며 법 아닌 것에 있어서랴.라고 하셨다. '법마저 버리고 가라'고 하는 것은 경전의 문자, 언어는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달月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되었다. 이것은 교설(敎說)로서의 법에 귀의하지 말고 진리 그 자체인 법에 귀의하라고 하신 것으로서, 교권주의(敎權主義)적인 것은 없다.
3) 부처님은 인간 평등주의를 주창하셨다. 인간은 누구나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각자(覺,Buddha)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의 표명은 부처님 재세시에 유행하던 카스트제도의 철폐로 나타났다. 부처님의 메시지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었다. 바라문의 쇄국주의 정책의 일관으로 특권층에게 한정되었던 종교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부처님에 의해 '모든 사람의 종교'가 되었다. 사성(四姓)에 속하는 어떤 사람이라고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상가(samgha, 僧伽)에 들어오면 누구나 다 일불제자(一佛弟子)로서 석종(釋種)이 된다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온갖 냇물(河川)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본래의 명칭과 형태가 없어져서 바닷물이 되듯이 상가(僧伽)에 입문하는 사람은 앞의 것의 계급이나 성명을 버리고 사문석자(沙門釋者)라고만 부른다.
부처님께서 평등주의를 실천한 것은 그의 십대제자(十代弟子)의 구성에 사성(四姓)이 모두 포함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4) 부처님의 설법이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는 무상대법(無上大法)이므로 평범한 사람이 알아듣기엔 너무 어려워 듣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장소와 환경 등을 고려하여 설하셨다. 부처님의 설법은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해서 설해진 것으므로 중생(衆生)의 교화(敎化)를 위한 방편(方便, upaya)임을 알아야 한다.
B. 내용
Ⅰ. 연기(緣起, Paticcasamuppada, SKt, pratiryasmutppada)의 사상
Ⅰ-1. 연기緣起의 의미.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연기(pratitya-samutpada)의 자각이 그 중심이다. 먼저 불교에 있어서 모든 교설의 근간이 된 연기의 어의(語義)와 정의(定義)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연기(paticcasamuppada)라는 말을 빨리어의 원어에서 볼 때, '말미암아(paticca, skt. pratitya=de-pendent)’라는 말과‘일어나는 것(samuppada, skt. samutpada=orination)’이라는 말이 결합된 단어이며, 어떤 조건에 말미암은 발생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중국의 경전 번역가들은 '연기(緣起)'라고 번역했다. 연기는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미암아(緣) 일어나는 것(起)'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인간과 세계 등 일체는 연기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연기관이라고 한다. 모든 현상은 상호 의존의 관계로 성립한다는 것으로서, 그 관계를 떠나서는 하나의 사물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인연의 작용이 바로 연기(paticcasanuppada)의 법칙인데.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生)하면 저것이 생(生)하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滅)하면 저것이 멸(滅)한다.
생멸(生滅)로써 설해진 이 명제가 논리적으로는 '상의상자(相依相資)'의 논리를 뜻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공간적 동시적 의존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고, '이것이 생(生)하면 저것이 생生한다'고 하는 것은 시간적 이시(異時)적인 의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특질(dhatu)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건 안하건 법으로서 확정되어 있다고 한다.
인간과 세계 등 일체는 동시적, 이시적으로 상호의존하여 성립되는(相依相資) 것이며, 이 상호의존의 관계를 떠난 절대적 존재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어서 이시(異時)적으로 말하면 전행(前行)하는 것을 '인(因)'이라 하고, 後續하는 것을 '과(果)'라 하며, 동시적으로 말하면 주된 관념을 '인(因)'이라 하고, 종속되는 관념을 '과(果)'라 한다. 연기의 관계에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는 공간적·논리적 관계와 함께, 시간적·생기(生起)적 관계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일체법은 무한한 그물(網)을 끌어당겨 서로 의존하여 만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제법인연관(諸法因緣觀)이다. 따라서 연기설에는 인간이나 사회의 모든 현상에 대한 인과관계, 자연현상에 대한 인과관계 모두가 포함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인격적 창조신을 배척했던 이유는 이런 인연관의 결과로서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자각된 연기설이 당시의 인도사상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당시 인도사상계에서 성행했던 사상은 바라문계의 유일의 원리인 브라흐만(Brahman, 梵)으로부터 복잡한 현상세계가 생겨났다고 하는 전변설(轉變說, parinama-vada)과 자유 사상가들이 주장한 많은 독립된 원리와 요소가 어떠한 형태로 결합하여 이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하는 적취설(積聚說, arambha-vada)이다. 종교적인 실천면에서 볼 때, 바라문 계통의 사상은 선정을 닦음으로써 해탈을 얻는다고 주장한데 반해, 자유사상가들의 입장은 고행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문계의 전변설이나 자유사상가들의 적취설에 비해, 연기의 입장은 세계관적인 면에서 양자를 초월한 보다 높은 입장이고, 종교적인 면에서 볼 때 보다 깊은 실천적인 입장이다. 연기는 보편적인 법칙성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철학적 학설로서 논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인생의 고苦에 괴로워하고 있는 인간의 문제로서 설하였다.
Ⅰ-2 십이연기(Dvadasangapaticcasamuppada)설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날 밤 초분(初分)에 숙명지(宿命智, purvanivasa)를, 제이분(第二分)에 천안지(天眼智, divya-caksus)를, 제삼분第三分에 인과관계의 지혜인 누진지(漏盡智, Asaraksaya-jnana)등 삼명(三明, Tisso Vijja)을 얻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누진지로써 인과의 상호연관성을 마음속으로 관찰하여, 인간의 고(苦)의 원인과 그 원인을 없애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12연기설이다. 연기설은 우리의 현실 생활을 직시하여 고(苦)의 원인과 그것을 없애는 길을 보통 십이연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12연기는 열 두 가지 지분(支分, anga)으로 성립되어 있어서 12인연 또는 12지연기(十二支緣起)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형화 되었다.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연하여 육처(六處)가 있고, 육처를 연하여 촉(觸)이 있고, 촉을 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를 연하여 애(愛)가 있고, 애를 연하여 취(取)가 있고, 취를 연하여 유(有)가 있고, 유를 연하여 생(生)이 있고, 생을 연하여 노사(老死)·근심·슬픔·고통·번뇌가 일어난다.
이러한 연기관의 형식은 현실의 苦의 근원을 추구하여 그러한 苦가 일어나게 된 순서를 밝혀가는 관법을 연기의 '순관(順觀)' 또는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한다. 이 순관은 인간의 미혹세계가 어떻게 성립되는가를 설하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깨달았다고 하는 순서는 그 반대로, 無明이 멸함으로써 行이 멸하고, 내지 生이 멸함으로써 老死가 멸한다, 生이 멸함으로써 老死가 멸하고, 有가 멸함으로써 生이 멸하고, 내지 無明이 멸함으로써 行이 멸한다'는 관법을 '역관(逆觀)', 또는 '환멸문(還滅門)'이라고 한다. 이 역관은 우리의 미혹의 세계를 초월하여 어떻게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가를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관과 역관은 동질적인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생사(生死)의 세계가 그대로 열반의 세계라고 하는 대승불교사상으로 이어진다. 연기관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얻으려고 수행하는 모든 사람이 닦아야 하는 관법이다. 우리 중생들이 업력에 의해서 삼세(三世)에 걸쳐 무한히 생사윤회하는 모습을 십이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 십이인연설인데, 그 십이인연의 그 하나하나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① 무명(無明, avijja, avidya)
무명은 올바른 지혜(明)가 없는 것으로 무지를 말하는데, 경전의 설명에 의하면, 사제(四諦)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것이고, 보편적 진리인 연기·무상·무아 등을 모른다는 뜻이며, 일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힘(如實智見〕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적으론 진리에 미혹하여 일체의 도리를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 최초의 한 생각〔一念〕을 말하는 것이다. 이 무명의 한 생각이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로 말미암아 악업(惡業)을 짓고, 악업으로 말미암아 고(苦)를 받으므로, 무명은 일체 번뇌의 근원이요 또한 악업의 원인이다. 범부는 무명을 통해 일체를 본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이미 그 때 꿈은 없어지듯이, 무명이 무명임을 알면 무명은 사라져 버린다.
② 행(行,samkhara, samskara)
행은 '결합하는(sam)작용(kara)'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 일반적으로 무엇을 만들어 가는 '형성력'을 의미한다. 경전에서는 신행(身行, 신체의 형성력)·구행(口行, 말의 형성력)·심행(心行, 마음의 형성력)의 3행을 설하는데, 이들 신·구·의에 따른 행위가 축적된 습관력이 바로 행이다. 이것은 업(業, Karma)이라고 설명된다. 과거의 업이 식(識)을 착색하여, 그것에 영향을 받아 식은 판단이나 활동을 한다. 십이연기설에서는 '행'은 '업'이라는 의미이므로 까르마(Karma)가 인정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③ 식(識, vinnana, vijnana)
식은 식별(識別) 또는 요별(了別)한다는 뜻으로, 인식작용, 즉, 인식판단의 주관을 말하는데, 경전에서는 6식(六識)을 들고 있다. 이것은 여섯 개의 식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하는 장소에 따라 이름지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식은 개인의 중심의식으로서 이러한 통일자로서의 식이 있으므로서 비로소 개체가 성립한다. 식이 없어지면 심신은 죽어 없어진다. 식에 의해서 생명체로서의 심신이 통일되고 있다. 식의 인식을 통해 세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④ 명색(名色, nama-rupa)
명색은 보통 '명(名, nama)'과 '색(色, rupa)'으로 나누어서 관찰하는데, 名은 정신적인 존재, 色은 물질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명색은 일체법을 뜻하는 말이다. 경전에 의하면, 명색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인 오온(五蘊)이라고도 했다. 명색이란, 식(識)이 주관적인 면을 나타내는데 대하여, 색(色)은 그 대상인 객관적인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십이 연기의 계열 가운데에서, 生은 老死의 조건이고, 有는 生의 조건이지만, 생과 노사, 유와 생이 서로 의존한다고는 설하지 않았다. 경전 가운데 십이연기설을 설명함에 있어서, 오직 인식의 주관과 객관적 대상을 나타내는 식과 명색만이 상의相依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연기의 근본적인 의미가 여기에 압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⑤ 육처(六處, salayatana, sad-ayatana)
육처는 육입(六入)이라고도 하고 육근(六根)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말한다.
⑥ 촉(觸, phassa, samsarsa)
촉은 인식에 있어서 주관과 객관이 접촉하는 것으로서, 식(識, 주관)·경(境, 객관)·근(根, 감관)의 삼자가 화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지각을 촉발시키는 심적인 힘이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눈에 의한 접촉(眼觸)·귀에 의한 접촉(耳觸), 코에 의한 접촉(鼻觸)·혀에 의한 접촉(舌觸)·신체의 의한 접촉(身觸)·뜻에 의한 접촉(意觸)이라고 했다.
⑦ 수(受, vedana)
수는 대상의 인상(印象)을 받아들여서 생겨난 감수작용(感受作用)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경전에서는 그 내용으로서 괴로움(苦), 즐거움(樂), 그리고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不苦不樂) 중간 느낌(捨受)의 세 가지 종류를 들고 있다. 수(受)에 촉발(觸發)되어 愛가 생긴다.
⑧ 애(愛, tanha, trsna)
애는 끝없는 갈애(渴愛, thirst)라고도 번역되는데,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듯이 괴로움을 피하고 즐거움을 탐하는 인간의 본능적·맹목적·충동적 욕망을 말한다. 경전에서는 구체적으로 색애(色愛)·성애(聲愛)·향애(香愛)·미애(味愛)·촉애(觸愛)·법애(法愛)라고 하는 인간의 여섯가지 대상에 대한 욕망이라고 설했다. 또 욕애(欲愛)·유애(有愛)·비유애(非有愛)등의 3愛를 설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정의(情意)적인 면에서의 근본적 욕망은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인데, 이것이 '유애(有愛)'이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에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바라는 욕망을 '비유애(非有愛)'라고 한다.
또 이와 같은 근본적 욕망이 외부로 향하여 작용하는 경우에, 인간의 감각대상인 색·성·향·미·촉·법에 대한 욕망을 '욕애(欲愛)'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생존은 정의적이고 근본적 욕망인 '愛'에 의해 조건되어진 것으로, 연기의 계열 중에서 무명과 함께 중요시되어 '무명연기'·'갈애연기'라고 불려지는 것이다. '愛'는 연기의 계열에 있어서 하나의 출발점이다.
⑨ 취(取, upadana)
취는 집착이란 뜻으로, 인간의 미혹의 생존은 집착에 근거한다고 한다. 경전에서는 욕취(欲取, 오욕 등 정욕에 대한 집착)·견취(見取, 그릇된 의견이나 학설에 집착)·계금취(戒禁取, 외도들의 신조를 진실한 것이라고 집착)·아어취(我語取, 아견·아만 등에 의한 자기의 주장을 진실한 것이라고 집착)의 4취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집착이 인간의 행위적 생활, 즉 유(有)의 성질을 규정하게 된다.
⑩ 유(有, bhava)
유란 윤회하는 생존을 말한다. 유가 윤회적 생존이라는 점에서 십이연기설에는 윤회의 사고방식이 포함되어 있다. 경전에는 삼유설(三有說), 즉,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삼계(三界)로 설명되고 있다. 삼계는 생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곳이다. 삼유설은 인간생존을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관념적으로 관찰한 것이다.
⑪ 생(生, jati)
생이란 업의 결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생의 조건이 되는 것은 유이다. 생은 노사(老死)의 무상고(無常苦)의 시발점이다. 생은 무상한 현실 속에서 생존의 시점이다.
⑫ 노사(老死, jaramarana)
노사는 인간의 육체가 노쇠하여 마침내 죽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경전에서는 老死·憂·悲·苦·惱 등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老死'는 단순한 '老死'만을 문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苦 전체를 대표하여 표현된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老死'는 모든 인간생명이 무상변천하는 현실상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의 십이연기설은 연기관으로서는 완비된 체계로서, 본래 인간존재의 모습을 나타내며, 인간 고苦를 해탈하는 길을 연기론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우리는 십이연기의 순관을 통하여 우리 삶의 현실상을 규명할 수 있고, 역관을 통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십이연기설은 미혹의 세계와 깨달음의 이상세계의 존재 이유를 명료하게 설하고 있음으로써, 이것은 원시불교의 인생관이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시대의 인도 사상가들은 이 세계는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무엇에 의존하여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신의론(神意論, issar-nimmana-hetu), 숙명론(宿命論, pubbha-kata-hetu), 그리고 우연론(偶然論, ahetu-apccaya) 3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의론, 숙명론, 그리고 우연론을 거부하는 부처님의 사상은 그의 연기설(pratityasamutpada)에 잘 나타나 있다.
위에서 고찰한 십이항목을 혹(惑)·업(業)·고(苦)의 삼도(三道)와 관련시켜 생각해 보면, ①의 무명과⑧의 애, ⑨의 취는 '惑'이고, ②의 행과⑩의 유는 '業'이며, 그 밖에 나머지 식, 명색, 육입, 촉, 수, 생, 노사는 '苦'이다. 또 삼세三世의 인과관계로 생각해 보면 ①의 무명과②의 행은 과거의 두가지 원인因이고, ③의 식과 ④의 명색, ⑤의 육입,⑥의 촉, ⑦의 수는 현재의 다섯가지 결과(果)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인과관계가 되는데, 이를 과거·현재 이세일중인과(과거·현재=二世一重因果)라고 한다. 그리고 ⑧의 애와 ⑨의 취, ⑩의 유는 현재의 세가지 원인이고, ⑪의 생과 ⑫의 노사는 미래의 두가지 결과이므로, 이것은 현재와 미래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십이인연의 인과관계를 종합해서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한다. 연기관은 후세에 이르러 남전(南傳)이나 북전(北傳)을 보아도 모두 분단(分段)생사의 연기관계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을 삼세에 걸친 양중의 인과관계로 보는 것은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에서나 북방의 有部에서나 모두 같다. 그러나 연기관의 주된 목적은 크게 주창된 삼세양중인과라고 하는 것 같은 분단생사의 규정을 밝히려고 한데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찰라생멸(刹那生滅)의 법칙을 밝히려고 한데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삼세양중인과설을 도표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우리가 연구한 연기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인생의 여러 가지 모양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가 하는 현상계에 대한 시간적 연구였다. 이런 연기관은 그 뒤 부파불교를 거쳐 대승불교 각 파에서도 활발하게 연구되었는데, 이를테면 『구사론(俱舍論)』의 업감연기론(業感緣起論),『유식론(唯識論)』의 아라야식 연기론(阿賴耶識緣起論),『기신론(起信論)』의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 『화엄경(華嚴經)』의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으로 발달했다. 이와 같은 연기론은 불교의 중심된 가르침으로 불교의 역사가 발달함에 따라 그것을 바라보는 비젼(darsana)에 따라 그 이해의 깊이와 내용이 다르게 발달해 왔다. 이러한 연기관의 발달은 우리의 '심관(心觀)'의 발달이요, 심관의 발달은 그대로 연기관의 발달로,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연기관이 우리의 삶에 적용될 때에는 '물심불이(物心不二)'적인 관계를 출발점으로 하여 일심(一心)의 활용으로 귀착된다. 연기법이 일심에 귀착된다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중도적으로 인생의 가치를 보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II. 삼법인설(三法印說)
석가모니 부처님은 연기론의 기초 위에서 인생에 대한 3대 명제를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 sabbe sankhara anicca)', '제법무아(諸法無我, sabbe dhamma anatta)', '일체개고(一切皆苦, sabbe sankhara dukkha)'이다. 이 세 가지를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한다. '법인(法印)'이라고 하는 것은 인증, 표지로 그것을 공사(公私)의 문건에 사용되는 인감에 비유해서 법인이라고 이름지었다. 이것은 인생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세 자기 근본적인 표준이 되었고, 또 불교와 다른 유파(有派, astika)와 구별짓는 학설의 표지가 되었다. 삼법인은 '삼상(三相)'이라고도 하는데, '상(相)'은 특징을 나타내므로, 곧 불교학설의 삼대 특징이 된다. 북전불교에서는 무상, 무아의 속에 논리적으로 '일체개고'가 포함되어 있다고 간주하고 '일체개고'를 빼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더하여 '삼법인'이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삼법인은 대소승불교의 삼대 강령이며 불교 이론의 근본 원칙이다. 이제 삼법인의 교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II-1. 제행무상(諸行無常, sabbe sankhara anicca )
일반적으로 '행(行, sankhara , Skt, samskara)'은 '옮겨다니면서(遷) 흐른다(流)'는 뜻으로, 무엇을 만들어 가는 '형성력'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간의 모든 현상, 자연 물질 인간의 심리활동 등은 모두 항상 변하고, 안주하고 있는 것이 없는데, 이것을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한다. 유위법은 항상 변화하여 멈추지 않는다고 하여 '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행은 계속 변화해 가는 사물과 현상을 뜻한다. 삼법인의 행은 전세계를 형성해 가는 힘으로서, 행의 용법 중 가장 광의적이다. 오온(五蘊) 중에서의 행은 심리적인 형성력을 가리키며, 특히 의지를 말한다. 이것은 행의 용법 중 협의적인 것이다. 십이연기의 행은 식(識)을 착색하는 형성력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것은 업이라고 설명된다. '상(常, nicca)'은 '항상'을 의미한다. '무상(無常)'이라는 말은 '상(常)'을 뜻하는 '니짜(nicca)'에 부정의 접두사 '아(a)'를 붙여서 된 것으로, 영구적인 것, 불변하는 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다. 그래서 무상이란, 물질이든 마음이든 모든 현상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하여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행무상이란 세간의 일체의 현상(존재)은 변화무상해서 영원 상주 불변한 사물이 없다는 말이다. 금강경에 "일체의 유위법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다.
무상(無常, anicca )에는 일기무상(一期無常)과 찰나무상(刹那無常)의 두 종류가 있다. 일기무상이란 일정한 기간 존속하면서 부단히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사람은 생(生) 노(老) 병(病) 사(死), 사물의 생(生) 주(住) 이(異) 멸(滅), 세계(우주)의 성(成) 주(住) 괴(壞) 공(空), 자연은 봄(春) 여름(夏) 가을(秋) 겨울(冬)은 비록 경과하는 시간이 짧거나 긴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어떤 일정한 기간의 현상이다. 찰나무상이란 찰나와 찰나 즉 생각과 생각의 사이에도 멈춤이 없이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는 하루 24시간 동안에도 64억 9만 9천 80찰나의 오온(일체유위법)의 변화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실체가 없으므로 항상 변화 중에 존재한다.
부처님은 무상의 이치로 인생의 고통스러움을 설명 한 것이 상례(常例)이다. 그러나 역으로 우리는 일체가 무상하기 때문에 향상 진보도 기대할 수 있다. 불교의 무상설은 인도의 여러 유파(有派, astika)들의 상견(常見, sassatadit hi, Skt. Savata-drsti)이나 단견(斷見, ucchedavada)을 시정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고, 현실의 삶 실상을 있는 그대로 봐서 인생의 참 가치 실현을 위해서 정진하라는 것이다. 제행무상은 사실 판단인 동시에 가치판단을 나타내는 것이다. 부처님은 당시 인도사상계에서의 사회구조, 즉 카스트 제도에 대한 부정의 투쟁을 간접적으로 무상설로 반영했다. 법구경에서는 무상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라고 지혜에 의해 볼 수 있을 때, 거기에서 곧 고(苦)를 이탈(離脫)한다. 이것이 바로 청정도(淸靜道)이다.
무상설은 대체로 인간이나 세계에 대한 이론적 해명이라고 하기보다도 경험적 실천적 자각이 이루어져 성립되었다고 학자들은 보고있다.
Ⅱ-2. 제법무아(諸法無我, sabbe dhamma anatta)
무아의 진리는 제행무상의 당연한 결과이다. '법(法)'은 사물과 존재를 뜻한다. 그래서 '제법'이란 모든 사물과 여러 가지 존재들이다. 앞에서 말한 '제행(諸行)'은 '유위법(有爲法, samkhatadhamma)'인데 반해, '제법(諸法)'은 '무위법(無爲法, asamkhatadhamma)'을 포괄하여 현상과 초현상, 차안세계와 피안세계를 총칭한 것을 말한다. '무아(無我, anatta , skt. anatman)'라는 말은, '아(我, attan, skt. atman)'에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사 '아(a)'를 붙여서 이루어진 단어다. '아'는 주재와 불변하는 실체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제법무아'란 모든 존재가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나 주재자가 없어서 모든 사물에 주재 작용을 일으키는 '아(我)'나 영혼이 없다고 상응부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색(물질적 존재)은 무상이다. 무상이면 곧 고(苦)다. 고면 곧 무아다. 무아면 곧 이는 아소(我所)가 아니며, 이는 아(我)가 아니며, 이는 아체(我體)가 아니다. 이렇게 올바른 지혜로써 여실히 보아야 한다.
이런 유형화한 표현들은 부처님께서 ① 아소(我所, mama)의 부정, ② 아(我, attan)의 부정, ③ 아체(我體, me atta )의 부정, 이 세 가지로 설하고 있다. 첫째의 '아소(我所, mama)'라는 말은, '나(我)의 것'이라는 뜻이다. 무상(無常)의 존재론에서 보면, '나의 것'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자기 소유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을 부정한 것이며, 나아가서는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뜻이다.
둘째의 것은, 부처님 시대의 사상가 사이에 유포되었던 '자아'에 대한 개념을 부정한 것이다. 바라문의 자아관은 영원불변하고 무한한 희열(ananda)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기나 무상의 존재론적 시각에서 보면, 인간에게는 오온(五蘊)의 화합 이외에 따로 어떤 불변의 자아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항상 변하고 있는 제법(諸法)들의 묶음 자체로서 오로지 현상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아(attan)의 부정'은 우빠니샤드 철학에서 말하는 절대적, 무제약적인 자아의 주장을 부정한 말이었다.
셋째, 아체(me atta)의 부정은 자아의 불변한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부정이다. '체'란 불변의 본체, 본성, 본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아체'는 '아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무상의 존재론에서 보면, 실재(reality)라는 것은 찰라찰라 작용하고 변하는 법(法)들 뿐이다. 인간과 세계는 이런 법들로 구성된 현상들로서 그 배후에 어떤 불변하는 실체나 본질이 없다는 하나의 현상주의적 세계관을 부처님은 설하신 것이다. 결국 무아는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이다.', '이것이 나의 실체이다.'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제법무아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만물을 시간적으로 관찰할 때 무상인 것과 같이, 공간적으로 볼 때는 무아(無我)이다. 이 세상의 존재(法)는 모두가 인연에 따라 생기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이어서 나(我)라고 내세울 만한 실재가 없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무아(無我)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무아(人無我)이고, 다른 하나는 법무아(法無我)이다. '인무아'는 오온 중에 아(我)가 없음을 보는 것을 말하는데, 인류는 자신을 실재하는 존재라고 집착하기 쉬워서 특별히 인무아(人無我)를 강조했다고 한다. 또 모든 사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독립 자존하는 실체가 없으므로 법무아(法無我)라고 한다. 아(我)에 대한 집착을 '아집(我執)' 또는 '아견(我見)'이라고 한다. 아집에는 '인아집(人我執)'과 '법아집(法我執)'의 두 가지로 나뉜다. '인아집'이 '나(我)'라고 주장을 하게 하며, '법집(法執)'이 우리 모두의 것에 '나의 것'이라는 욕심을 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학자들은 인아(人我)와 법아(法我)의 집착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제법 무아의 의미는 모든 방면에 확장되어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이론과 동의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원시불교는 제법무아의 이론을 주장하여 자아실체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원시불교는 중생의 업력을 긍정하고 업보윤회설을 주장함으로써 굉장한 이론적 모순을 낳았다. 후에 부파불교의 경량부(經量部)에서는 '인아(人我)'가 있음을 주장하고 윤회전생에 관계되는 과도적 존재로서 '중유(中有)'를 상정하였다. 경량부의 이런 사상을 발전시킨 대승불교의 유가행파는 '아뢰야식'과 종자(b ja)설을 수립하여 생사유전과 열반적멸의 근거와 입지점을 세웠다. 제법무아의 이론에 의거할 때, 모든 사물에 자성(自性)이 없다면 사람의 사상이나 인식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는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유가행파는 삼자성(三自性), 즉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parikalpita-svabhava),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ava), 원성실성(圓性實性, parinspanna-svabhava) 이론을 내놓았다. 유가행파는 이 이론에 입각하여 유식설을 제창하고 일체는 유식의 변화라고 하였다.
법구경에서는 "제법은 무아라고 지혜의 의해 볼 수 있을 때 거기에서 곧 바로 고(苦)를 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청정도이다."라고 설했다.
II-3. 일체개고(一切皆苦, sabbe sankhara dukkha)
'무상한 것은 고(苦, duhkha)다.'라고 선엄함으로써,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존재론을, 자기가 출가할 때 인생 문제와 연결시켰다. 무상한 존재 속에서 인간은 아무리 원한다 해도, 언제까지나 젊고, 건강하고 그리고 언제까지나 살아있을 수 없다. 인간은 문자 그대로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삶의 고(苦)가 수행의 출발점에서의 현실인식이었다. 불교는 인생의 고(苦)로부터 시작하여 그 고를 보편화하고 이를 인간의 실존적 진실로 간주한다.
고(苦, duhkha)란 '자기가 바라는 그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감각적인 고통과 정신적·심리적인 고통을 포함하고 있다. 부처님은 고(苦)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세상에 태어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것은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愛別離苦), 미운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怨憎會苦), 구하여도 얻지 못하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괴로움(求不得苦), 그리고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여덟가지 괴로움(八苦)이라고 한다. 결국 인간의 괴로움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여도 획득되지 않는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고의 양상을 '고고성(苦苦性, dukkhaduhkhata )', '행고성(行苦性, sankhara-duhkhata)', '괴고성(壞苦性, viparin ama-duhkhata)'의 세 가지 괴로움으로 나뉜다. '고고성'은 괴로운 조건에서 생긴 감각적인 괴로움을 가리킨다. 격심한 추위와 더위는 본래 괴롭고, 기갈의 상태도 원래부터 괴로움에 틀림없다. '행고성'은 일체의 존재가 변화하는 조건으로 하여 생기는 괴로움을 뜻한다. '괴고성'은 즐거움이 파괴됨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귀를 마음껏 누리던 사람이 사양의 비애를 맛보게 되는 것, 난만하게 피어났던 꽃이 이윽고 지고 마는 것도 그것이다. 이 세 가지 괴로움은 五取蘊을 중심으로 해서 괴로움의 종류를 구별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苦의 원인을 무명(無明, avijja )과 애욕(愛欲, tanha )에 있다고 한다. 불교의 고관(苦觀)은 종교적 요구의 발로로서 이에 의하여 무한한 향상이 가능한 것이다. 법구경에서는, "제행(諸行)은 고(苦)라고 지혜에 의해 볼 수 있을 때 거기에서 곧 바로 고(苦)를 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청정도이다."라고 설했다.
이상 제행무상·제법무아·일체개고를 삼법인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부가하여 사법인이라고도 한다. 열반적정이 부가된 것은 '일체개고'가 염세적인 괴로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괴로움을 극복한 열반이라는 정신적 차원이 존재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북전불교에서는 일체개고를 제외하고 열반적정을 삼법인에 포함시킨다.
열반적정은 불교의 궁극적 이상이며, 최고의 경지이다. 대소승의 모든 불전은 열반적정의 이상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의 원어는 빨리어로 '니바나(nibb na)', 산스끄리뜨어로는 '니르와나(nirv a)'라 한다. 중국의 역경가들은 그것을 음사하여 '열반'이라 했고, 또 이를 의역하여 멸도(滅道), 적멸(寂滅), 멸(滅)이라고 했다. 열반은 불과 같이 타오르는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 몸과 마음이 괴로움이 없는 '평안( anti)하다'는 '적정'이라는 말까지 두 말을 합쳐 '열반적정'이라 칭했다. 열반적정의 경지는 마치 타오르는 불(火)이 꺼진 것과 같이 번뇌의 불꽃을 올바른 지혜로써 꺼 버리고 고뇌가 없는 안락하고 평안한 세계를 말한다.
앞에서 고찰한 삼법인의 교설 중에서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두 가지 가르침은 철학적인 이지적 판단에 의하여 현실세계인 현상계(現象界)를 설명한 것인데 대하여, 열반적정은 종교적인 실천이성의 요청에 의하여 이상세계인 본체계(本體界)를 설명한 것이다.
Ⅲ. 사성제(四聖諦, cattari-ariya-saccani, Skt, catur-arya-satya)설
'제(諦)'의 원어는 빨리어로 '사짜(sacca)', 산스끄리뜨어로는 '사땨(satya)'로서 '존재하다'라는 뜻인 동사원형 '아스(√as)'의 현재분사 '사뜨(sat)'에서 유래되었는데, '진리, 사실'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자의 '제(諦)' 역시 진리·진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제(諦)로서 고(苦, duhkha)·집(集, samudaya)·멸(滅, nirodha)·도(道,patipada)의 네 가지를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서 삼은 데에서 사성제(四聖諦, cattari-ariya-saccani)라고 부르게 되었다.『법구경』에서는 "모든 진리 가운데서 사성제가 제일이다."라고 했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대표적인 진리에 '아리아(Ariya)'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당신이 깨달은 진리가 아리아민족(그 당시로서는 아리아는 그대로 세계를 의미했다.)의 진리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제설은 부처님께서 보리수 밑에서 정각을 이루고 나서 창조주 브라흐만(梵天)의 간곡한 권유로 깨달은 내용을 사람들에게 설법할 것을 결심하고, 바라나시 교외 미가디야(Migadaya, 鹿野苑) 현재 사르나트(Sarnath)에서 꼰단냐(Kondanna, skt. kaundinya, 陳如), 밧디야(Bhaddiya, skt. Bhadrika, 跋提伽), 밧빠(Vappa, 婆破), 앗사지(Assaji, skt. Asvajit, 馬勝), 마하나마(Mahanama, 摩訶那摩)라고 하는 다섯 비구에게 설한 최초의 설법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사제는 부처님이 내관(內觀)했던 연기의 교설을 수행자의 실천에 중점을 두고 설한 것이다. 이것은 생사와 열반의 인과에 대한 이론이다. 고(苦)는 무명의 결과이고, 집(集)은 무명의 원인이어서, 이 두 진리는 생사윤회의 인과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십이연기설이다. 멸(滅)은 인생의 해탈을 설명하는 이론이고, 도(道)는 해탈의 경계를 실현하기 위한 수행법이다. 또 멸은 깨달음(覺)의 결과이고, 도는 깨달음의 원인이어서, 이 두 진리는 열반의 인과이다. 교진여 등 다섯 비구는 이 사성제의 법문을 듣고 "모든 집법(集法, samudaya-dhamma)이 곧 멸법(滅法, nirodha-dhamma)이다."라는 법안(法眼)을 얻었다고 한다. 이 사성제는 연기의 진리를 설법의 형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사성제는 당시의 의학의 구성, 즉 병의 양상, 병의 원인, 병의 회복, 치료 방법의 네 가지 구분에 힌트를 받아 고라는 진실(苦諦), 고가 일어나는 원인의 진실(集諦), 고의 소멸의 진실(滅諦), 고의 소멸에 도달하는 방법의 진실(道諦)의 넷으로 정리하여 설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면 이 사제(四諦, cattari-ariya-saccani)가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를 나누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고(苦)의 진리에 대해서 전법륜(轉法輪)을 설한 경전은 여덟 가지 고(八苦)를 든다.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태어나는 것(生)도 고이고, 늙는 것(老)도 고이고, 병드는 것(病)도 고이고, 죽는 것(死)도 고이다. 미운 사람과 만나는 것(怨憎會)도 고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愛別離)도 고이다.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求不得)도 고이다. 그 고(苦)의 근본은 생존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을 오취온고(五取蘊苦), 오음성고(五陰盛苦)라 한다.
고성제(苦聖諦, Dukkha-ariya-sacca)의 의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중생의 생명, 생존이 곧 고(苦)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입장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 존재의 고를 인식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며, 이것이 불교를 다른 철학· 종교와 구별하는 특징의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고제(苦諦)는 사성제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진리이며, 불교인생관의 이론적 기초이다.
둘째, 고(苦)가 어떻게 발생하고 성립되는 그 근본 원인을 밝히는 것이 '집성제(集聖諦)'이다. 이와 같은 생존의 고는 무엇에 의해 일어나는가. 모든 번뇌의 근본인 갈애(渴愛, tanha, skt. trsna)가 그것이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을 때의 강렬한 욕구와 같은 것이다. 갈애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생존이 계속된다. 그것에는 기쁨과 탐욕을 수반하고 무엇에나 집착을 하면서 끝없이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범부는 항상 이 갈애에 의하여 속박되어 타율적이고 자유스럽지 못하여 자주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러면 이 갈애는 무엇에 의하여 발생하는가. 그것은 무명(avijja, skt. avidya)으로서, 십이연기의 순관(順觀)을 요약한 것이 집제다. 그러므로 집제의 근본은 무명이다.
셋째, 멸성제(滅聖諦, nirodha-ariyasacca)는 불교의 이상경으로서 삼법인에서는 열반적정을 의미하는 것이고, 십이연기와 관련시켜 말하자면, 무명이 사라져서 번뇌가 소멸해진 것을 말한다. 이것을 열반(nibbana, nirvana)이라고 하고,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초기불교에 있어서는 아라한(阿羅漢, arhat)이라고 칭했고, 또는 불타(佛陀, Buddha)라고도 칭하였다. 이것은 마음이 갈애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해탈(vimukti, skt. moksa)'이라고도 한다.
넷째, 도성제(道聖諦, patipada-ariyasacca)는 고(苦)를 소멸시키고 열반을 얻기 위한 올바른 길(patipada)이다. 도제의 내용은 팔정도(八正道, ariyo attangiko maggo)이다. 여덟가지 바른 이치의 성불방법을 팔정도라 한다. 그러면 팔정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① 정견(正見, samyak-drsti)은 올바른 견해로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如實智見)이다. 사성제의 도리를 바르게 아는 것이다. 정견은 팔정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② 정사유(正思惟, samyak-samkalpa)는 올바르게 사유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올바른 사량분별(思量分別)로서 사성제의 도리를 사유하는 것이다.
③ 정어(正語, samyak-vac)는 올바른 견해, 올바른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행하는 언어적 행위를 말한다. 거짓말(妄語)이나 악담(惡口), 이간질(兩舌)과 쓸데 없는 말(綺語) 등 일체의 구업(口業)을 짓지 않고 진실되고 바른 말만 필요한 말을 해야할 때 하는 것 등이다.
④ 정업(正業, samyak-karmanta)은 올바른 행동을 말하는 것인데, 신체상의 살생(殺生), 도둑질(偸盜), 사음(邪淫) 등 일체의 악행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 재물을 보시하며, 스스로 인륜·도덕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⑤ 정명(正命, samyak-jiva)은 올바른 생활을 말하는 것인데, 부처님의 법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그 내용으로는 뜻(意)에는 正思(惟)하고 말(口)로는 正語하고, 몸(身)으로는 正業을 행하여 일상생활상에 正見을 실현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⑥ 정정진(正精進, samyak-vyayama)은 올바른 노력을 말한다. 올바른 노력은 올바른 생각,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등을 실천하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번뇌에 의한 망집을 떠나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인데, 그 목적에 유용한 것이 선(善)이고, 장애가 되는 것이 악(惡)이라고 하는데, 이 선과 악에 대한 올바른 노력을 네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四正勤, catvari-samyak-prahanani). 즉 ⓐ 이미 생긴 악을 없애려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已生惡令永斷), ⓑ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未生惡令不生), ⓒ 이미 생긴 선을 더 자라게 하여 완전한 것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已生善令增長), ⓓ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未生善令生) 등이다.
⑦ 정념(正念, samyak-smrti)은 올바른 기억을 말하는데, 사념(邪念)을 버리고, 항상 향상을 위하여 수행하기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⑧ 정정(正定, samyak-samadhi)은 산란한 생각을 여의고, 참으로 마음이 안정된 올바른 선정을 말한다.
이상의 팔정도 중에서는 정견과 정정이 중요하다. 불교 수행법의 요체(要諦)인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yana)의 병수(竝修)라든가, 정(定, samadhi)과 혜(慧, prajna)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正見)과 정정(正定)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팔정도의 실천을 통하여 열반이 실현된다.
Ⅳ. 中道(majjhima patipada)觀
불교가 일어날 당시의 인도의 사상적 풍조에 의하면, 극단에 치우친 생각과 그에 따른 실천이 있었으므로 인생을 그르치는 경향이 있었다. 부처님은 이러한 인간의 현실적 상황을 직시하여 연기법에 의해서 보고 올바르게 살게 하게 하는 것이 중도관(中道觀)이었다.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에는 부처님이 고(苦)와 락(樂) 이변(二邊)의 양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는 교설이 있다. 쾌락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지만, 쾌락에 몸을 내맡기는 것은 타락하므로 정신의 향상이 있을 수 없다. 또 고행의 실천에는 강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은 고귀하지만 육체를 괴롭힌다고 해서 깨달음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행만으로는 이성이 계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양 극단의 중도를 발견해 가는 지혜가 팔정도의 '정(正)'의 의미이다. 그래서 이 고락중도는 팔정도(八正道)라고 한다. 고락중도는 실천적인 입장이지만, 철학적인 것으로서 단견(斷見: 세간과 자기의 단멸을 주장하는 견해)과 상견(常見: 그것들의 常住를 주장하는 견해)의 양극단을 떠난 단상중도 또는 유견(有見: 일체가 존재한다는 견해)과 무견(無見: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의 양극단을 떠난 유무중도 등이 설해져 있다. 중도(中道)는 불교의 실천원리다.
연기(緣起)와 공(空)과 중도(中道)는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연기(緣起)의 진리는 자성(自性)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공(空)이요, 공(空)은 있다(有), 없다(無)하는 유무(有無)의 이변(二邊)을 떠난 것이므로 중도(中道)다. 그러므로 연기(緣起)가 곧 공(空)이요, 그것이 바로 중도(中道)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고(苦)도 아니고 락(樂)도 아닌 중도(中道)적인 생활을 말한다. 삶의 실천에 있어서 어떤 하나를 절대적, 실재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연기·중도적인 실천을 함으로써 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연기, 곧 공의 시각에서 중도적으로 인생의 가치를 비판하고 실천하는 것이 불교의 생활 윤리다. 부처님의 중도사상(中道思想)의 개요를 도표로써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Ⅴ. 禪定(Jhana, dhyana)觀.
석가모니 부처님은 선정을 닦아 깨달음(正覺)을 얻었다고 한다. 선정이 부처님의 성도에 중대한 의의가 있음은 부처님이 사선삼명(四禪三明)을 통해 깨달았다고 하는 설에 나타나 있다. 즉 사선(四禪)의 수행과정에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다. 선(禪, dhyana, jhana)은 명상의 일종으로, 우빠니샤드(Chandogya Upanisad, Ⅶ, 6. 1)이래 쓰이고 있다. 선정(禪定, jhana, dhyana)은 단순히 '선(禪)' 또는 '선나(禪那)'라고도 번역되며, 뜻을 따라서 '정(定)' 또는 '정려(精慮)'라고도 번역된다. 삼매(三昧, sama dhi), 등지(等持)라고 하기도 하는데, 팔정도(八正道) 중 마지막 정정(正定)의 원어는 삼마삼마디(samma-samadhi, 올바른 선정)이다. 팔정도 중에서 첫 번째 올바른 견해(正見)와 마지막 올바른 선정(禪定)이 가장 중요하며, 올바른 견해, 올바른 생활 등은 올바른 선정에 의해 비로소 참된 지혜(samyakjnana)가 된다는 것이다.
원시불교에서는 오로지 정(定, samadhi)이란 말이 사용되며, 定을 실현하기 위한 禪(dhyana, 靜慮)이 설해진다. 따라서 智慧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定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비다르마에서는 定은 '心一境性'이라고 정의되며,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성질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선정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되는 것처럼 모든 악, 불선(不善)을 떠나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모든 수행,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집중의 방법이고, 또 이와 같이 하여 확립된 부동(不動)의 심경(心境)을 가리키는 것이다. 선정은 반드시 좌선(坐禪)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실천되는 것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 ; pallankam abhujati)한다'고 하듯이 수행자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정신통일을 해야 한다. 부처님의 연기의 이 법도 결가부좌에 의한 정려(靜慮)를 통하여 내관(內觀)된 것이지 단순하게 인식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선정은 불교를 믿고 실천하려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선정의 수행이 필요하다고『숫따니빠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정려(靜慮)하라. 방황하지 말라.
후회하지 말고 게으르지 말라.
그리고 조용한 곳에 비구는 머물러야 한다.
잠을 많이 자지 말고 부지런히 자신을 경각시키라.
권태와 위선과 웃고 즐기는 것과 음욕과 사치를 버려라.
이와 같이 원시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정의 의의가 강조되었을 뿐 아니라, 교설 안에서 조직화되어 다른 교설과 관련지어 설해지고 있다. 경전에 의하면 팔정도 가운데 정정(正定)은 바로 사선(四禪)이라고 하였다.
사선이란 선정이 진행되는 단계를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사선(四禪)의 넷으로 나누어 마음의 수양 과정을 밝힌 것이다. 초선은 마음을 한 대상에 집중하는 동안에 신체적인 욕망과 불선(不善)의 마음을 떠남으로써 희열을 느끼나 아직 그러한 대상에 대하여 사유가 있는 것을 말한다(有尋有伺定).
이선(二禪)은 대상에 대한 분별, 사려의 작용이 소멸되고 마음은 오직 한 곳에 집중되어 희락을 느끼는 경지이다(無尋唯伺定). 삼선(三禪)은 이선에서 느낀 희락마저도 버리고, 마음이 완전히 평정되어 정신이 집중된 경지를 말한다(無尋無伺定). 사선(四禪)은 삼선에서 얻은 신체의 편안함과 고락이 초월되어 정신의 평정이 마치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 맑아져서 일체의 대상과 하나가 된 경지를 말한다(捨念法事定).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초선에서 삼선까지는 희락(喜樂)이 있어 육체가 안락한 경지이다. 그러나 사선에 이르면 그 희락도 사라지고 '사념청정(捨念淸淨)'하게 된다고 한다. 사선은 육체를 떠나지 않는 정(定)이지만, 그 위에 육체의 감각을 완전히 떠난 의식만이 있는 定의 경지를 '사무색정(四無色定, catasso-aruppa-samapattiya, skt. catasra- arupya-samapattaya)'이라고 한다. 사무색정(四無色定)은 (1)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2)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3)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4)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말한다. 불전에 의하면 세 번째의 '무소유처정'은 부처님이 수행 중에 알라라 깔라마( alara Kalama)로부터, 네 번째의 '비상비비상처정'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관법을 근거로 하여 불교 내에서 정비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이란 무색계(無色界)의 제1천(天)으로서의 모든 물질 관념을 떠나 오로지 일념으로 무변의 허공의 자재함을 기뻐하며 공이 가없다는 이치를 알고 수행하는 경지를 말한다.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이란 무색계의 제2천으로서 앞의 경지에 대한 공(空)이 무변함을 싫어하여, 마음을 돌려 식(識)을 반연하며, 식과 상응하여 마음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아니하고, 3세(世)의 식이다 정(定)중에 나타나 청정하고 적정(寂靜)한 경지를 말한다.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은 무색계의 제3천으로서 허공도 식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 모두가 없다고 관하는 경지이다. 마지막의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은 무색계의 제4천으로 온전히 형이상학적 존재로 일체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관하여 '공(空)'의 경지까지 이르렀는데, 다시 그 '공'이라는 상(想)마저 소멸하여 상(想)도 없고 무상(無想)도 없어진 경지를 말한다.
이러한 사선(四禪)과 사무색정(四無色定)은, 처음에는 별개의 것으로 설해지다가, 점차 양자를 연관시켜 설하게 되었고, 결국 하나의 계열로서 정비하여 사선(四禪)에서 사무색정(四無色定)으로 나아간다고 보고 불교 선정의 기본이 되었다. 이들 선정에 대한 연구는 부파불교에 이르러 더욱 정비되고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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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김동화, 불교교리 발달사 (서울 : 불교통신교육원)
11. 아함경, 조계종 출판사 간
12. 원시불교, 水野弘元 著
13. 불교학개론, 김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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