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는 끊는 것이 아니라 끊어지는 것, 이유미교수의 중도세미나를 듣고
종편에서 ‘자연인’을 즐겨보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산에 들어가 홀로 사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 한사람은 ‘슬프다’고 했습니다. 산에 들어와 계절이 바뀔 때, 특히 단풍이 아름답게 들 때 슬프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슬프다’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슬퍼집니다. 몸이 따라 주지 않았을 때 슬픔을 느낍니다. 젊어서는 몸을 부렸으나 나이들수록 몸을 모시고 살 정도가 되었을 때 슬픔을 느낍니다. 자연인이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슬픔을 느낀다고 했으나 65세가 된 자신의 모습에서 슬픔을 본 것이라 생각됩니다.
초기경전에서 ‘슬픔’이라는 말은 자주나옵니다. 빠알리어 ‘소까(soka)’로 표현됩니다. 이 말은 십이연기에서도 보입니다. 십이연기 유전문 마지막에 빠알리어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soka+parideva+dukkha+domanassa+ūpāyāsā’의 형태로 되어 있는 병렬복합어입니다. 전재성님은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으로 번역했습니다. 빠알리 소까(soka)에 대하여 슬픔과 근심으로 번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슬픔(soka)에 대하여
사람이 나이 들면 인생이 무상함을 느낍니다. 어떤 이는 억울하다고 합니다. 젊었을 적 시절을 회상하며 훌쩍 나이 든 것에 대하여 세월을 원망합니다. 이것이 병렬복합어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소까(soka)일 것입니다. 빠알리어 사전에 따르면 ‘soka’는 영어로 ‘grief; sorrow’의 뜻입니다. 우리말로 ‘슬픔, 비탄, 애도, 상심, 재난’의 뜻입니다. 자연인이 계절이 변하는 것을 보고 슬프다라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늙어 가는 모습을 보고 슬프다라고 한 것이라 봅니다.
비탄(parideva)에 대하여
나이가 들면 몸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았을 때 늙었음을 알게 됩니다. 젊었을 적에는 몸을 부리고 살았지만 늙어서는 몸에 끄달려 살게 되었을 때 비탄에 빠질 것입니다. 병렬복합어에서 ‘빠리데바(parideva)’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빠알리어 사전에 따르면 ‘parideva’는 영어로 ‘wailing; lamentation’의 뜻입니다. 우리말로 ‘통곡, 애가, 비탄’의 뜻입니다. 자신의 늙음을 한탄 하는 것이 parideva라 볼 수 있습니다.
고통(dukkha)에 대하여
나이가 들면 몸이 저항력이 약해집니다. 계절이 바뀌면 감기 들기 쉽습니다. 감기가 들어 낫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 뼈도 약해져서 넘어지면 쉽게 골절상을 입습니다. 늙어서 병들어 누워 있을 때 육체적 고통이 극심할 것입니다. 이것이 빠알리어 둑카(dukkha)일 것입니다. 빠알리어 사전에 따르면 ‘dukkha’는 ‘pain, painful feeling, Suffering, ill’의 뜻으로 주로 육체적 고통과 관련있습니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육체적 고통’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근심(domanassa)에 대하여
몸이 아프면 마음까지 아픈 법입니다. 범부들은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에까지 전이 되어 제2의 화살을 맞게 됩니다. 병렬복합어 도마낫사(domanassa)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빠알리어 사전에 따르면 ‘domanassa’는 ‘sad-mindedness, grief’의 뜻입니다. 전재성님은 ‘근심’이라 번역했고, 초불연에서는 ‘정신적 고통’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어원상으로 보았을 때 정신적 괴로움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병렬복합어에서는 둑카 다음에 오므로 육체적 괴로움에 뒤이은 정신적 괴로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절망(ūpāyāsā)에 대하여
병렬복합어 마지막 단어는 우빠사야(ūpāyāsā)입니다. 빠알리어 사전에 따르면 ‘ūpāyāsā’는 ‘tribulation; grief’의 뜻입니다. 우리말로 ‘시련, 고난, 재난’의 뜻입니다. 그러나 두 번역서에는 공통적으로 ‘절망’으로 번역했습니다. 왜 절망으로 번역했을까요? 아마도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성된 것은 모두 소멸되듯이, 태어남으로 인한 인생 역시 죽음으로 귀결 됩니다. 죽음 앞에 장사 없다고 늙어 병들어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침상에 누었을 때
십이연기는 ‘무명’으로 시작하여 ‘노사’로 끝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한문에서나볼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를 한문식으로 표현 하면,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순입니다. 단지 순서만 나열해 놓은 듯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십이연기는 노사 다음입니다. 노사다음에 이어지는 문구가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S12.2) 라 되어 있습니다. 무명으로 인하여 촉발된 연기의 유전문은 결국 ‘절망’으로 귀결됩니다.
죽음의 침상에 누었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한 영웅호걸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침상에 누었을 때는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기력조차 없습니다. 영웅이 출현하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영웅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두려워할지 모릅니다. 천하를 거머쥐었던 영웅도 죽음 앞에서는 어찌 할 수 없습니다. 남는 것은 죽음이라는 절망 밖에 없을 것입니다.
병렬복합어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결국 죽음으로 귀결됩니다. 그럼에도 지금 젊다고 하여 이 젊음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아 젊음을 향유만 한다면 ‘젊음의 교만’이 됩니다. 지금 건강하다고 하여 이 건강이 영원히 보장될 것이라 착각하여 즐기는 삶만 살아 간다면 ‘건강의 교만’이 될 것입니다.
세월은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죽음이라는 인생열차의 종착지를 향해 달려 갑니다. 그 과정에서 머리가 백발이 되고 몸의 기능이 예전과 같지 않을 때 슬픔을 느낍니다. 그런 슬픔은 절망에 이르기 위한 전주곡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십이연기에서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老死)”이라 했는데, 이 노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라는 긴 병렬복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병렬복합어 소까빠리데바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는 초전법륜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 라 했습니다. 고성제에서도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라는 병렬복합어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괴로움에 대하여 한글자로 짧게 요약하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 즉 ‘오취온(pañcupādānakkhandhā: 五取溫)’이라 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자아와 동일시 했을 때
오취온은 몸, 느낌, 지각, 형식, 의식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몸과 마음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유아견(有我見)’입니다. 무아를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아견은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유신견(sakāyadiṭṭhi: 有身見)타파를 들고 있습니다.
유신견은 몸과 마음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산속의 자연인이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슬프다고 했을 때 그것은 ‘느낌’에 대한 것입니다. 느낌을 자아와 동일시 하여 ‘내가 슬프다’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취온적 관점으로 볼 때는 느낌은 집착된 것입니다. 오온이 내것이 아니라 조건지어진 집합다발로 본다면 슬픈 느낌이 발생된 것은 조건에 따른 것입니다. 조건지어진 것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집니다. 아이가 울었다고 웃었다가 하는 것도 조건의 변화에 따른 것입니다.
번뇌와 무명의 관계는?
나이가 들어 늙어 갈 때 슬퍼지기도 하고 분하기도 한 것은 몸이 내것이라는 유신견에 집착되어 읶기 때문입니다. 오온이 내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번뇌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번뇌는 무명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올바른 견해의 경(M9)’에서 사리뿟따존자가 “번뇌가 생겨나므로 무명이 생겨나고 번뇌가 소멸하므로 무명이 소멸합니다.”(MN.I.54) 라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는 무명에서 시작됩니다. 무명에서 시작된 십이연기의 종착역은 절망입니다. 오온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동안 육체직, 언어적, 정신적으로 지은 의도적 행위에 따라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망에 이르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십이연기로 보았을 때는 무명이 시작입니다.
무명에 대하여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 합니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S12.2) 라 한 것에서 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견경(M9)에서는 무명의 원인에 대하여 번뇌라 하고 있습니다. 번뇌가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고, 번뇌가 결국 절망에 이르게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고요한소리 창립 30주년 중도세미나
번뇌에 대하여 이유미교수는 빠알리 원어 그대로 ‘아사와(āsava)’로 쓰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빠알리어 아사와가 번뇌 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가 있어서 번역하기 힘든 단어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자신의 논문 ‘니까야를 바탕으로 한 중도의 이해와 실천’에서 밝혔습니다.
이유미교수의 강연을 4월 1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곳에서 들었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청사 지하공연장에서 들은 것입니다. 사단법인 고요한소리에서 창립 30주년을 맞이 하여 중도세미나를 연 것입니다.
중도세미나는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지하공연장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오후에 늦게 참석했습니다. 늦게 들어가니 앉을 자리가 없어서 복도에 임시 자리를 마련하여 앉았습니다. 둘러 보니 중도에 관심 있는 스님들, 학자들, 불자들이 모두 모인 것 같습니다.
이날 강연에 나선 연사는 모두 6명이었습니다. 중도를 주제로 한 강연으로서 양형진 교수가 ‘진화하는 자연의 시공간적 연기구조와 중도’를 강연했고, 홍창성 교수가 ‘화쟁과 정도 그리고 중도’를, 임승택 교수가 ‘긍정적 과잉의 문제와 중도’를, 백도수 교수가 ‘중도의 이해 틀에 관한 고찰’을, 이유미 교수가 ‘니까야를 바탕으로 한 중도의 이해와 실천’을, 마지막으로 김재성 교수가 ‘중도와 초기불교 수행’을 강연 했습니다.
책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강연장에 늦게 도착해서 논문집을 받지 못했습니다. 진행자에게 물어 보니 500권이 다 나갔다고 합니다. 추가로 주문하려면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합니다. 이처럼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마침 옆에 있던 ‘도정스님’이 책을 구해 주셨습니다. 스님은 어디론가 가더니 240여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구해 왔습니다. 아마 이날 참석한 사람들 중에 노보살님들도 많았는데 잘 이야기해서 가져 온 것 같습니다.
스님들과 함께 온 노보살님들은 일찍 왔기 때문에 책을 한권씩 가지고 있지만 모두 다 그 책을 보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책을 가져 가지만 활용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책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총무원장직선제운동을 같이 하고 있는 도정스님은 제주도에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일부로 비행기타고 왔다고 합니다. 어디에서인가 책을 구해와서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유미 교수의 밀도 높은 논문
중도세미나에서 여섯 명의 교수들로부터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수박 겉핱기식입니다. 주어진 시간이 고작 30분에 지나지 않아 진도나가기에 바빴습니다. 자세한 것은 책에 있는 논문을 꼼꼼히 읽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논문집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여섯 명의 강연자 중에 들을만 한 것은 백도수교수와 이유미교수 강연입니다. 강연에 임하는 성실한 태도와 무엇보다 논문이 잘 정리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이유미 교수가 돋보였습니다.
이유미 교수는 ‘니까야를 바탕으로 한 중도의 이해와 실천’에 대하여 강연했습니다. 논문은 무려 35페이지에 달합니다. 번뇌라 알려져 있는 빠알리어 ‘아사와(āsava)’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바른 견해의 경(M9)’과 ‘모든 번뇌의 경(M2)’를 중심으로 하여 논문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논문의 밀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천천히 음미해 가며 읽었습니다.
번뇌가 생겨나므로 무명이 생겨나고
이유미 교수가 생각하는 중도는 아사와의 소진입니다. 아사와를 소진하기 위해서는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함을 말합니다. 바른 견해가 사성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바른 견해입니다. 그것은 연기법으로 대표됩니다. 특히 십이연기에서 무명과 아사와의 관계에 대하여 “번뇌가 생겨나므로 무명이 생겨나고 번뇌가 소멸하므로 무명이 소멸합니다.”(MN.I.54, M9)라 했습니다. 절망으로 이끄는 무명이 번뇌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합니다.
불자들은 사홍서원을 할 때 “모든 번뇌를 끊으오리다.”라 합니다. 그러나 번뇌는 끊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번뇌는 끊어지는 것이라 합니다. 번뇌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번뇌는 버려지는 것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촛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캄캄한 방에 들어 가면 어두워서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촛불을 켜면 일시에 방이 밝아져서 모든 것이 보이게 됩니다. 촛불을 켰을 때 일시에 밝아 지는 것은 ‘명지’에 해당됩니다. 명지를 빠알리어로 ‘윗자(vijja)’ 라 합니다. 영어로는 ‘higher knowledge’라 합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과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명지와 반대되는 말이 ‘무명’입니다. 무명을 빠일리어로 ‘아윗자(avijja)’라 합니다. 빠일리어 vijja에 부정접두어 a가 붙은 것입니다.
무명과 명지는 정반대의 말입니다. 무명이 타파되면 명지가 됩니다. 어두운 방에 촛불을 켜면 일시에 밝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불이 켜지면 모든 것이 일시에 드러납니다. 번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것이라 합니다.
번뇌는 버려지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정견경(M9)에 따르면 무명은 아사와(번뇌)를 원인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번뇌가 생겨나므로 무명이 생겨나고”라 하여 연기법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사실상 번뇌에서 발생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번뇌는 버리는 것도 아니고 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번뇌는 버려지고 끊어지는 것이라 합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을 켜지면 모든 것을 알아 버리듯이 무명이 타파되는 순간 모든 번뇌는 버려질 것이라 합니다. 그것은 바른 견해를 가졌을 때 가능합니다.
번뇌라고 번역되는 아사와는 어떻게 버려지게 될까요? 이와 관하여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서는 일곱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첫 번째로 강조되는 것이 유신견 타파입니다. 이몸과 마음이 내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에서부터 번뇌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팔만사천이나 되는 많은 가르침을 펼치셨지만 연기법의 범주안에 있습니다. 니까야 어느 곳을 펼쳐 보아도 연기의 가르침입니다. 이와 같이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시스터매틱(Systematic)하다고 합니다. 그런 예로 병렬복합어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가 대표적입니다.
병렬복합어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는 십이연기 뿐만 아니라 고성제에서도 등장합니다. 우리말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로 번역되는 이 복합어는 우리의 삶이 절망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오늘도 내일도 달려 가고 있음을 말합니다. 절망이라는 종착지에 이르게 하는 첫 출발지는 무명입니다. 그런데 무명은 번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 번뇌는 오온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aṅ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S56.11) 라 했습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 즉 오취온이 괴로움의 근본원인이자 동시에 절망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번뇌는 가르침을 알면 끊어지게 되고 버려지게 됩니다.
현자와 범부의 차이는?
계절이 바뀌면 계절무상을 느끼고, 늙어지면 인생무상을 생각합니다. 범부나 현자나 세상이 무상하게 흘러 가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러나 범부와 현자간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아견’입니다. 범부들이 인생무상이라 하며 슬퍼할 때 그것은 자신이 늙어 가는 것에 대한 한탄이자 비탄입니다. 그러나 현자는 오온이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아는 ‘무아견’으로 살아 가기 때문에 인생무상에 대하여 슬퍼하거나 비탄에 빠지지 않습니다.
범부는 늙고 병들고 죽어 가는 것에 대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절망하게 되지만, 현자는 오온이 내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슬퍼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범부는 무명으로부터 시작되어 절망에 이르는 연기의 회전으로 살아 가지만, 현자는 무명이 사라져서 절망도 소멸되기 때문에 연기의 환멸로 살아갑니다.
“그대는 오거나 가는
사람의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대는 그 양끝을 통찰해 보지 않고
부질없이 슬피 웁니다.” (stn582)
“미혹한 자가 자기를 해치며,
비탄해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stn582)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더욱 더 괴로움이
생겨나고 몸만 여윌 따름입니다.” (stn582)
“자신을 해치면서 몸은
여위고 추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망자를 수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비탄해 한들 무익한 일입니다.” (stn582)
“사람이 슬픔을 버리지 않으면,
점점 더 고통에 빠져듭니다.
죽은 사람 때문에 울부짖는 자들은
슬픔에 정복당한 것입니다.” (stn582)
2017-04-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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