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 상좌부 불교이해
불교학과
2003. 2. 28
머리말
현재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남방 상좌부 불교에 쏟는 관심이 학자들의 연구 중심에서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의 신앙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국내 상좌불교는 아직 보급 단계에 머무르고 있으나 동남아에서 비구계를 받거나 위빠사나 수행법을 익히고 돌아온 스님과 불자들이 지난 2~3년 사이에 선원이나 명상센터를 잇달아 개설, 현재 수행기관만 16 곳에 이른다.
가장 널리 정착된 상좌불교 수행법은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법. 법보신문이 최근 보리수선원, 천안 호두마을, 김해 다보선원 등 수행기관 실태를 조사한 결과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정진한 불자나 일반인이 1만 5,000명을 넘은 것으로 집계됐다. 매주 한 차례 이상 수행기관에 들리는 사람만도 1,000여명에 이른다.
대승불교 전통이 압도적인 국내 불교계는 상좌불교의 이런 급성장에 대해 엇갈린 시각을 보이고 있다. 일부 보수파는 소승불교로 폄하하는 반면 화두선과 위빠사나가 공존하면서 상좌불교가 새로운 종단으로 성립해도 좋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점에서도 우리는 남방 상좌부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정보를 접하고 있지 못하여 막연한 동경이나 거부를 나타내기도 한다.
남방 상좌부 불교에 대한 좀더 정확한 정보와 이해를 위해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관련자료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였다.
남방 상좌부불교의 이해는 주로 법보신문의 기사와 불교평론, 호두마을의 위파사나 교육교재, 팔리문헌연구소의 팔리삼장 및 최봉수 교수의 근본불교 서적을 중심으로 편집한 것입니다.
본 자료는 학습자료용으로 편집한 것으로 따로 저자들의 사용허가를 받지 않았습니다. 상업적인 목적의 사용을 하지 마시고, 학습에 있어서도 편집상 완전한 교정을 보지 않은 자료이므로 보조자료로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 차
Ⅰ. 우리나라의 상좌부불교 - 우리나라 상좌부불교 수행의 실태
1. 남방상좌부불교(테라바다) 유입 어디까지 왔나
2. 안국동 위파사나 선원 수행 스케치
3. 위파사나 수행 기관 16곳 수행 실태
Ⅱ. 남방 상좌부불교의 이해
상좌부 불교의 역사와 전통 / 송위지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체계 / 김재성
상좌부 불교의 현황 / 난다라타나
상좌부 불교의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 / 김열권
Ⅲ. 상좌부불교의 소의경전
팔리문헌의 조직(이마성)
삼장(三藏)의 성립과 그 정통성(팔리문헌연구소 편)
삼장(三藏 Tipitaka) - 李摩聖 지음
Ⅳ. 상좌부불교 체험기
가난하지만 청청한 수행불교(스리랑카)
100일 동안 경험한 미얀마 불교
Ⅴ. 상좌부불교의 수행
또 다른 선, 위파사나의 이해
부록 - 위파사나 입문(호두마을 수련교재)
Ⅰ. 우리나라의 상좌부불교
우리나라 상좌부불교 수행의 실태
[출처 : 법보신문 <2003. 1. 29 / 691호> ]
1. 남방상좌부불교(테라바다) 유입 어디까지 왔나
'테라바다(남방상좌부불교)가 한국에 급속히 정착하고 있다.' 꼭 6년여만의 일이다. 한국의 스님이나 불자들이 남방상좌불교의 본고장인 미얀마를 비롯한 태국, 스리랑카 등지로 직접 건너가 남방상좌불교 수행법에 따라 정진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지난 2∼3년 사이 각기 선원이나 명상센터, 사찰을 개설해 이 땅에 남방상좌불교 수행법을 뿌리내리게 한 것이다.
남방상좌불교 수행법을 대표하는 미얀마의 위파사나나 태국의 아나파나사티(수식관), 두팅(숲 속에서의 명상) 등은 이젠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대중화됐다. 남방상좌불교 수행법을 지도하는 재가 법사나 스님들은 대략 1만여명 안팎이 일상 생활 속에서 늘 정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지가 위파사나 수행기관 중 1세대 선원으로 꼽히는 서울 보리수선원을 비롯한 천안 호두마을, 김해 다보선원, 인터넷 위파사나 선원 '간다' 등 남방상좌불교 수행법을 지도하는 16개 기관의 수행 실태를 파악한 결과 매주 한 차례 이상 선원에 들러 수행하는 불자나 스님은 1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 차례 이상 정진한 경험이 있는 대중 수는 대략 1만 5000여명을 웃돌아 위파사나 지도자들의 추정을 뒷받침했다.
한국에 정착한 남방상좌불교 수행법 중 가장 널리 보급된 수행법은 역시 미얀마의 위파사나이다. 위파사나가 대중 폭넓게 파급된 가장 큰 원인은 미얀마의 위파사나 수행 기관이 외국인들에게 폭넓게 개방돼 있을뿐더러 외국인을 위한 지도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스님이나 재가 불자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늘 수행을 할 수 있는 미얀마의 위파사나 수행 기관은 참메를 비롯한 마하시, 빤띠따라마, 싸땀마란시, 우바킹국제명상센터, 세우민또야 등 모두 6곳이다. 한국의 사부대중이 이 곳에서 본격적으로 수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96년 말부터이다. 수행 초기만 하더라도 한국의 대중 수는 5∼6명 안팎이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수는 6∼7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미얀마 선원에서 4안거를 성만한 후 귀국해 인터넷 위파사나 선원 '간다'를 개원한 성찬 스님에 따르면 2001년 12월 미얀마 6개 기관에서 수행한 한국인 대중 수는 스님(15명)과 재가 불자(40여명)를 더해 60여명 안팎인 것으로 파악됐다. 스님들은 대다수가 조계종 소속 승려였다.
한국 불교계에서 위파사나의 급성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한국 전통의 수행법인 '간화선'과 공존하면서 위파사나 수행을 따르는 대중을 중심으로 한 종단으로 성장해도 좋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동국대 김용표 교수는 '경전에도 나와 있는 기초수행법인 위파사나는 이젠 한국 불교계에서도 대단히 일반화됐다'면서 '테라바다를 따르는 대중을 주축으로 한 종파의 태동에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2. 안국동 위파사나 선원 수행 스케치
수행자들이 말하는 '왜 위파사나에 몰리나'
수행의 방법이 구체적이다.
수행중의 궁금증-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수행의 진전을 확인할 수 있다.
경전을 통해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지속 가능하다.
재가불자-일반에게 열려있다.
'좌선을 할 때 무엇이 가장 힘드십니까.'
'잠이 옵니다.'
'경행을 하면서 걷고 있는 발을 자세히 관찰하세요.'
'동작을 관찰합니까, 아니면 느낌을 관찰합니까'
'발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과 그 사이사이 어떤 느낌이 느껴지는가를 있는 그대로 관찰합니다.'
낮부터 내리던 눈이 제법 쌓여가던 평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종로구 안국동 위파사나 선원에서는 자유로운 질문과 대답이 오간다. '좌선할 때 잠이 온다'는 50대의 직장인 남성, '일상 생활 속에서는 관찰이 안 된다'는 30대 직장인, '잡생각이 끊이질 않아 도통 관찰이 되질 않는다'는 20대의 여성 등 한 눈에 보기에도 함께 자리를 하고 있는 8명의 사람들은 면면이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지고 있다.
30분에 걸쳐 '위파사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 정립이 이뤄졌다. 지도를 맡고 있는 임승택 지도법사는 수련생들과 질문-대답을 반복하면서 위파사나에 대한 개념을 이해시키는데 주력했다. 또한 강의를 통해 '오늘 무엇을 수련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가 제시된다. 오늘의 '학습목표'는 경행하며 발의 움직임, 좌선하며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경행이 시작되자 수련생들은 3~4미터의 거리를 천천히 오가며 각자 자신의 발을 관찰했다. '걸을 때는 발의 움직임이 가장 크므로 발을 관찰한다'는 지도법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30여분 가량의 경행은 바로 좌선으로 이어진다. 경행에서 좌선으로 옮겨가며 관찰의 대상은 발에서 배로 옮겨진다. 경행과 좌선이 30분씩 번갈아 진행되는 2시간 동안 지도법사는 수련생들이 발과 배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의 끈을 놓지 않도록 수시로 지도한다.
2시간여의 수행 실습이 끝난 후 수련생들은 둥그렇게 모여 앉아 다시 한번 질문과 대답의 시간을 가졌다.
'배의 움직임에 집중이 되질 않습니다.'
'배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잡념이 떠오르면 잡념이 떠올랐음을 관찰하고 다시 배로 돌아가야 합니다. '계속 배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그 마음도 관찰의 대상입니다.'
8명의 수련생들이 2시간의 실습을 함께 했지만 그 결과는 각양각색이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느낌과 어려움을 겪었으며 지도법사는 이들 하나하나에게 '처방'하듯 대처 방법을 제시했다.
임승택 법사는 '위파사나의 가장 큰 특징은 체계화된 수행법을 통해 재가불자들과 일반인들도 수행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3. 위파사나 수행 기관 16곳 수행 실태
테라바다(남방상좌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위파사나를 지도하고 있는 선원이나 명상센터, 사이버 법당은 2003년 1월 현재 16곳에 달한다. 이 중 2곳이 인터넷 선원이며 한 곳이 위파사나를 고리로 결성한 사이버 동호회이다.
본지가 오프라인 위파사나 기관들의 수행 실태를 자체 조사한 결과 매일 수행 인원은 한 곳당 적게는 15∼6명에서 많게는 50여명 안팎으로, 전체 기관의 수행자를 합하면 1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도하는 스님들은 대부분이 미얀마의 위파사나 선원에서 직접 수행을 받고 돌아온 스님이나 재가 법사들로, 이들 지도자들은 비정기적으로 미얀마 선원에서 해마다 수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불자들이 수행 중 궁금증이 일거나 정진에 진전이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한 인터뷰는 매일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대일 인터뷰 시간은 짧게는 20여분에서 많게는 한 시간이 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위파사나 기관을 찾는 불자들은 초보자도 언제나 입문해 수행할 수 있고 수행의 진척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해 주는 것이 위파사나 수행의 제일 장점으로 꼽았다.
위파사나 수행 기관의 특징 중 하나는 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수행 프로그램은 80%가량의 기관이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간을 정해 놓고 하는 집중 수행 역시 실비(하루 1만5000원) 정도면 숙식을 해결하며 위파사나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
위파사나 선원 및 연락처
Ⅱ. 남방 상좌부불교의 이해
상좌부 불교의 역사와 전통 / 송위지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체계 / 김재성
상좌부 불교의 현황 / 난다라타나
상좌부 불교의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 / 김열권
상좌부 불교의 역사와 전통 (출처 : 불교평론 13호)
송위지(songwc@hanmir.com)
::::: 목 차 :::::
1. 용어의 정리
2. 남방 상좌부 불교의 성립과 역사
3. 남방 상좌부 불교의 기복 의식, 피릿
4. 나오는 말
1. 용어의 정리
한국 불교 1600년의 역사에서 상좌부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지극히 일천하다 할 수 있다.
상좌부 불교와 관련이 있는 언어인 파알리어에 대한 연구와 또 차자(借字)를 통하여 파알리 발음으로 기록된 경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최근이라 할 수 있다.
논자는 작금의 한국 불교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몇몇 테마들에 관한 연구물들을 접할 때 그 테마들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들에서 심한 혼돈을 느낀다. 각자 나름대로 충분히 연구 검토하고 스스로 타당하다는 확신을 가진 후에 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면이 있어 ‘불교’라는 말로 끝나는 복합어들 중에 혼돈을 줄 수 있는 몇몇 용어들에 대해 일차적으로 간단히 정리를 하고자 한다.
한국어에서 복합어의 생성 과정을 보면 서술 방법의 특징 중의 하나는 a b의 형태가 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a b의 형태란 우리(a) 나라(b), 백두(a) 산(b), 고등(a) 학교(b)처럼 수식어가 앞으로 가고 수식을 당하는 말이 뒤로 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근거로 할 때 ‘불교’라는 말로 끝나는 복합어들 중에 혼돈을 주는 단어들로는 ‘원시 불교’ ‘근본 불교’ ‘초기 불교’ ‘상좌부 불교’ ‘대승 불교’ ‘소승 불교’ 등을 들 수 있다. 중국 불교, 한국 불교처럼 각국의 이름이나 지명이 앞으로 가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앞의 경우처럼 심각한 문제를 수반하지는 않는다.
1) 원시 불교와 근본 불교
일반적으로 원시 불교란 초기 인도 불교를 가리킨다. 시기적으로는 석가모니 붓다가 정각을 득하고 전도생활을 하다가 열반에 든 후부터 처음으로 부파가 분열한 때까지의 약 200년 내지 300년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붓다의 시기부터 아쇼카 왕의 시절까지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우이 하쿠쥬(宇井伯壽)는 석가모니 붓다에게 직접 출가하였던 스님들의 시절까지를 포함하여 이를 근본 불교라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원시 불교이건 근본 불교이건 그 시절을 바로 알려줄 수 있는 원천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원시 불교가 지녔을 내용을 가능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시 불교 시대 이후에 전개된 각 부파들의 공통된 내용들을 가지고 원시 불교 시대의 가르침을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내용에 있어 엄밀함을 요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초기 불교를 포함하여, 원시 불교와 근본 불교에 대해 크게 차이를 둘 필요는 없다.
2) 상좌부 불교,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
상좌부 불교(Therav a Buddhism)는 장로(長老) 또는 상좌(上座)들의 불교라는 뜻이기 때문에 장로 불교라고도 한다. 상좌부 불교는 불교의 온전한 한 부파(部派)로 스리랑카를 위시한 몇몇 국가에서 수행하고 있는 불교라 할 수 있으나,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는 지역적으로 어느 특정 국가에서 수행하고 있는 불교라 할 수 없으며 나아가 불교의 한 부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상좌부 불교의 경우처럼 불교의 한 부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부파의 승단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조문(條文)인 바라제목차(P timokkha)가 있어야 하지만, 소승 불교나 대승 불교는 별도의 특정한 바라제목차를 갖추고 있지 않다. 이는 소승 불교나 대승 불교라는 용어가 어떤 불교적 흐름을 나타내는 어휘로는 사용될 수 있으나 특정 부파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특히 소승, 즉 작은 수레(Small Vahicle)을 나타내는 어휘인 히나야나(H nay na)나 대승, 즉 큰 수레(Great Vehicle)을 나타내는 어휘인 마하야나(Mah y na)는 상좌부 불교의 파알리 문헌은 물론 그 주석서 또는 《도사(島史, D pava sa)》나 《대사(大史, Mah y na)》 같은 불교 역사서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단어들이다. 이는 대승이나 소승이란 말이 적어도 파알리 불전 이후에 시작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며, 소승 불교와 상좌부 불교를 혼용하는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어의 복합어 생성 과정에서 볼 때 소승 불교라는 말이 소승(a) 불교(b)라는 형태, 즉 어떠한 경우에라도 불교의 한 부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동안 소승 불교를 폄하한 이들에게는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그 동안 비수행자적인 행동을 마구 일삼았던 일부 대승 지상주의자들은 승속을 막론하고 비법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대승이므로 괜찮다는 식으로 합리화하였다.
그리고 소승 불교가 확실히 불교의 한 부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행위에 동조해 주지 않는 것을 소승이라는 말로 폄하하고 홀대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즉 소승 불교가 지극히 잘못된 것처럼 비논리적 방법으로 해석한 흔적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의 이러한 몰이해는 대승 불교만이 진정한 불교이며 소승 불교는 불교가 아닌 것처럼 인식하게 하였다.
소승 불교 역시 붓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불교임에도 불구하고 소승 불교를 폄하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했던 것이 사실이며, 나아가서 이것이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모독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별 저항 없이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설사 소승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궁극적인 뜻에서 나쁘게 표현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2. 남방 상좌부 불교의 성립과 역사
1)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
붓다 입멸 이후 인도에서는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되풀이했다. 기원전 4세기 중엽에는 마가다 왕국이 가장 강력했고, 하란캬·싸이슈나가·난다의 뒤를 이어 나타난 마우리야 왕조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해 나갔다. 기원전 4세기경 페르시아를 멸하고 인도에 침입해 펀잡 지방을 점령했던 알렉산더가 죽자 인도에서는 이민족의 침입과 정복에 자극 받아 국민의 자주 의식이 높아져 있었다. 이때 찬드라굽타는 그리스 군대를 내몰고 펀잡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
마우리야 왕조의 시조 찬드라굽타 마우리야(B.C.324∼297)는 난다 왕조의 계보에 속했었으나 그의 어머니 무라 데위의 이름에서 공작(孔雀)이라는 뜻을 지닌 마우리야(Mauriya)를 국호로 택했다. 찬드라굽타는 난다 왕국도 정복했으며 기원전 322년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했다. 찬드라굽타는 인도의 마키야벨리라는 신하 까우띨리야의 보필에 힘입어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마우리야 왕조가 인도 대륙을 통일한 것은 아리안의 도래 이후 선주민이었던 드라비다인들과 아리안들의 갈등에서 아리안들의 완전한 승리와 외세에 대한 인도인의 독립을 뜻하고, 이를 계기로 아리안들이 완전히 인도 대륙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쇼카 왕(B.C.273∼232)은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아쇼카 왕은 남부 타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북쪽으로는 카시미르·네팔, 동쪽으로는 칼링가까지 정복하는 등 마우리야 왕조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아쇼카 왕은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주변의 국가들을 병합하기 위한 전쟁을 했다. 기원전 261년 칼링가 국을 무력으로 정벌하면서 전쟁의 잔인함을 직접 경험하게 되어 정복전쟁 포기 선언을 했다. 이로서 아쇼카 왕은 이민족이나 다른 국가를 공격할 만한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롭게 지낼 것을 자발적으로 선언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었다.
집권 초기에 자이나교 신자였던 왕은 불교에 귀의해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으며 인도 역사상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최초의 왕이 되었다. 왕은 자신이 신앙하는 진리를 국민들이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 법칙을 발표해 암벽이나 석주에 새겨 놓았다.
법칙의 내용은 깊은 사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살생 금지, 수렵 폐지 같은 국민에 대한 도덕적 훈계들이었으며, 특히 법대관(法大官)을 설치해 종교적으로 평등정책을 펼쳐서 불교뿐만 아니라 브라만교·자이나교·아지비카 등 다른 종교들도 동시에 보호하였다.
아쇼카 왕의 불교와 관련한 중요한 치적으로는 불전의 제3차 결집과 전도사의 파견을 들 수 있다. 제3차 결집의 내용에 대해서는 파알리어로 기록된 남전의 자료들과 한문으로 기록된 북전의 자료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남전으로 전하는 불전의 제3차 결집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쇼카 왕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승가에 6만의 외도가 들어와 7년씩이나 포살을 하지 않는 등 불교 교단이 크게 타락하자, 아쇼카 왕이 이런 혼란을 막고자 아호강가에서 목갈리풋타티사를 초청해 분별설 이외의 비정통들을 모두 교단에서 추방하고 천 명의 아라한을 모아 《논사(論事, Kath vatthu)》를 지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북전에는 근본분열을 대천(大天, Mahadeva)과 관련된 승가의 논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쇼카 왕의 불교와 관련된 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 세계화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된 전도사의 파견이다. 아쇼카 왕은 외국으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작업을 한 최초의 왕이었다.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은 남방 상좌부 불교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해당 지역의 전설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역사적 기록에 의한 것이든 남방 상좌부 불교가 성립되는 최초의 사건들은 이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과 관련이 있다. 전도사의 파견은 아홉 차례에 걸쳐 있었다. 여덟번째는 미얀마, 아홉번째는 스리랑카와 관련이 있다.
여덟번째로 파견된 소나 스님은 웃따라 스님과 함께 ‘황금의 땅’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저지 미얀마인 수완나부미에 갔다. 당시 미얀마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궁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기만 하면 바다에 있는 공포의 여신이 죽였다. 그들이 저지 미얀마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저들은 공포의 여신의 친구들 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을 죽이기 위해 무장을 하고 왔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그 여신의 친구가 아니고 불법을 열심히 수행하는 수행자입니다.” 소나 스님과 웃따라 스님이 함께 말했다. 그때 바다에서 공포의 여신이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을 본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스님은 그 여신과 부하들의 두 배가 되는 수의 신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 나라는 필시 이 사람들의 소유구나.’라고 생각하고는 하늘로 날라 갔다. 스님들은 그 자리에 성을 만들고 《범망경(梵網經, Brahmaj la sutta)》을 설했다. 많은 사람들이 귀의하고 오계를 수지하였다. 육만 명이 불법을 믿기 시작했고 삼천오백 명에 달하는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야의 아들과 천오백 명의 딸들이 출가하였다.
2) 스리랑카 상좌부 불교의 역사
아쇼카 왕이 아홉 번째로 전도사를 파견한 곳이 스리랑카이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주로 전설에 기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접근하는 것이다. 전설에 기초하는 스리랑카의 불교는 그 섬의 주인으로서 싱할라(Sinhala, 사자의 후예라는 뜻)족들이 가지고 있는 불교 지향적인 생각이다. 이에 대한 내용이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나, 《소사(小史)》나 《대사(大史)》 같은 역사서들에서 전하는 스리랑카의 개국설화에 잘 나타나 있다.
탐바파니(Tambapa i, 銅常島라 번역되며 항상 보물이 있다는 뜻)라고 불리던 곳에 싱할라들이 나라를 세운 것은 기원전 543년이다. 이 기원전 543년이 전설이든 역사적 사실이든 그 연도를 남방 불교국가에서 주장하는 석가모니 붓다의 입멸 연대와 같은 해로 함으로써 싱할라 자신들이 붓다의 후예라는 사실을 내외적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즉 스리랑카의 조상이라고 여기고 있는 스리위자야가 일단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인도로부터 스리랑카 섬으로 건너감으로써 시작되는 스리랑카의 역사가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한 해와 일치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스리랑카 인들에게 아주 강하게 각인되어 정신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정체성을 찾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불교와 관련된 또 다른 전설은 석가모니 붓다가 재세시 스리랑카를 세 번 방문했다는 것이다. 그 지역은 마히앙가나·켈레니아·스리파다라고 하지만, 석가모니 붓다의 일생을 볼 때 스리랑카를 방문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하지만 이 주장을 통하여 싱할라들은 석가모니 붓다가 특별히 자신들에 대해 친근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음은 역사서에 입각한 정통 불교 교리 발달 및 불교 전래의 입장이다. 아쇼카 왕이 스리랑카에 파송한 전도사는 마힌다 장로이다. 그는 아쇼카 왕의 아들로서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스님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4명의 비구·우바새와 함께 스리랑카의 최초의 수도이고 2600년 고도인 아누라다푸라에서 약 13Km 떨어진 산정상의 조그만 석굴에서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후에 마힌다 장로를 받아들인 곳이라는 의미의 미힌탈레(Mihintale)라고 이름지어졌다.
당시 축제기를 맞이해 그곳으로 사냥을 나왔던 스리랑카의 왕 데와남피야 티싸는 숲속에서 수행하는 이들을 보고는 사냥을 포기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게 되니, 이 날이 포손 포야(Poson Poya)인 양력 유월의 만월일(滿月日), 즉 음력 5월 15일이다. 마힌다 장로 일행을 맞아들인 데와남피야 티싸는 아누라다푸라에 마하위하라(Mah vihara, 大寺)를 지어 수행 장소로 제공하고 포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으며 동시에 많은 이들을 귀의시키니, 이것이 스리랑카 불교의 시작이다.
이듬해 마힌다 장로의 누이인 상가미타 비구니가 인도의 붓다가야에서 보리수 나무를 가지고 와서 아누라다푸라에 심으니 그 보리수 나무는 살아있는 붓다로서 지금까지도 스리랑카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마힌다 스님의 도래에서 비구 승단이 시작되었으며 상가미타 비구니의 도래에서 비구니 승단이 시작되니 명실공히 제 모습을 갖춘 승단의 활동이 스리랑카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순조롭게 시작된 스리랑카 불교는 토착화에도 성공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1세기에 건립된 아바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ara, 無畏山寺)의 스님들이 왕이 자신들을 총애하는 것을 기회로 그 동안의 스리랑카 불교를 이끌어 왔던 대사파(大寺派)와 다른 방법의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정법이 아닌 비법적인 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하게 되었다.
이렇듯 별도의 부파가 발생하자 이런 상황을 염려했던 대사파의 스님들이 기원전 1세기에 구전되던 불전의 문자화를 통하여 교의의 왜곡을 방지하고자 스리랑카 중부에 있는 알루위하라(Aluvih ra, 새 절이라는 뜻)에서 종려나무 잎에 파알리 경·율·논 삼장을 문자로 새겼다. 이것이 현존 상좌부 불교의 소의 경전인 파알리 삼장의 완성이다. 이는 당시의 왕이었던 왓타가마니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승단의 의지와 일부 재가자들의 보시의 힘으로 이룩된 것이다.
이 시기에 인도로부터 넘어온 독자부(犢子部) 계통의 담마루치 장로는 무외산사에서 불법을 폈으며 이들에 대해 대사파는 상좌부의 분별설부(分別說部)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스리랑카 불교의 정통 맥을 이어왔다. 서기 3세기 인도에서 건너온 또 다른 계파인 대승계통의 방광파(方廣派)의 스님들이 다시 무외산으로 들어와서 머물다가 일부가 그곳을 떠나 다른 파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기타림사파라고 한다. 기타림사파가 완성된 것은 4세기 초이며, 이로써 스리랑카의 불교는 대사파·무외산사파·기타림사파의 세 개의 파로 나뉘어진다.
그 후 지속적으로 대사파와 무외산사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8세기 전반 인도로부터 대승 불교 특히 밀교가 전래되기도 하였으나 그 세력은 미약하였다. 굽타 왕조가 쇠퇴하면서 다시 세력을 구축한 드라비다인의 촐라 왕조는 지속적으로 스리랑카를 침입하였고, 이 침입으로 고도 아누라다푸라는 폐허가 되고 수도를 폴론나루와로 옮겼다. 이때는 스리랑카 내부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해 불교의 발전 역시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이런 혼란 때문에 승단 역시 쇠퇴하였다.
하지만 남인도의 촐라인들을 격퇴한 위자야바후 1세(1059∼1113)는 11세기 말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스님을 초빙하여 스리랑카의 승단을 부흥시켰다. 12세기 중엽(1153∼1186)에 쁘락크라마바후 1세는 대사파·무외산사파·기타림사파의 타락한 스님들을 강제로 환속시키고 대사파를 정통으로 삼았으며 승단이 대사파의 계율을 따르게 했다. 이로 인해 무외산사파와 기타림사파는 부정되고 그 세력을 잃었으며, 10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던 계파간의 갈등은 완전히 끝이 나고 현재의 정통 상좌부 불교로의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말하고 있는 상좌부 불교는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에 의해 전해졌던 모습 그대로라고 하기에는 다소간의 무리가 있다. 중간에 무외산사파나 기타림사파 스님들에 의해 비법이 자행된 경우가 많으며 그런 것들을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방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12세기 중엽(1153∼1186)에 쁘락크라마바후 1세에 의해 대사파 중심으로 정리된 스리랑카의 승단은 정통 상좌부 불교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노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3)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역사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 역사도 그렇지만 미얀마에 불교가 전래된 것 역시 실증적인 면과 전설에 의지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9세기에 석가모니 붓다의 종족인 석가족의 아비라자가 석가족의 근거지였던 카필라바스투에서 미얀마로 건너와 미얀마 최초의 국가인 타가웅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 후 고타마 싯다르타가 득도하여 석가모니 붓다가 된 후 미얀마의 레가인, 슈세트, 프롬 등의 지역을 돌며 설법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석가모니 붓다가 재세시에 인도 이외의 나라를 방문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전설은 스리랑카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얀마인들에게도 석가모니 붓다의 후예라는 자긍심을 심어 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불교가 전승되어 올 수 있는 것은 물론, 인도에서 굽타 왕조 이후 힌두교의 부흥으로 인하여 불교와 사원이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아주 긴 기간 동안 미얀마의 왕실이 인도에 있는 사원과 승단을 위하여 각종 물질적인 것들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는 버마족의 영웅 아노라타 왕(1044∼1077)이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우면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의 미얀마는 스리랑카와 유사하게 대승 불교는 물론 밀교까지 들어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아노라타 왕은 통일을 이룬 후 불교 혁신 운동을 펼쳤다. 1057년 아노라타 왕은 몬의 수도 타톤을 공격하는 데 타톤을 공격한 이유 중 하나는 바른 승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타톤을 정복하여 몬의 왕이었던 마누하까지 포로로 삼았던 아노라타 왕은 몬의 고승이자 아라한과를 증득했던 싱의 협력을 받아 파알리어 삼장은 물론 주석서들을 파간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아라한 싱을 따르던 500여 스님들도 파간으로 받아들여 파알리어 삼장을 중심으로 불교를 연구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파간 왕조 시대에 뿌리를 내린 미얀마 상좌부 불교는 그 주변 특히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와 빈번한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힌두 중심의 촐라인들을 내몰고 불교를 부흥시켜 상좌부 불교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위자야바후 1세(1059∼1113)의 스리랑카와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때 미얀마에서는 파알리 삼장은 물론 흰 코끼리 1마리를 기증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스리랑카로부터 붓다의 전골사리(全骨舍利)를 받았다. 1180년 웃다라지와 스님은 직접 스리랑카로 가서 정통 상좌부를 수학하고 미얀마로 돌아왔으며 그는 파간 북부 냐옹유에 스리랑카 양식의 사원을 건립하고 새로운 승단을 설립하였다.
1287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파간 왕조가 멸망한 후 약 2세기 가량 군웅할거 시대가 지속되었다. 이 군웅할거의 시대는 산 족이 중심이 되어 페구와 아바를 각기 수도로 하는 두 개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이때 페구를 수도로 하였던 라만야데사의 담마체띠 왕(1472∼1492)은 출가 경력을 지닌 왕으로 ‘붓다라자(Buddharaja, 불교왕)’라 불리웠다. 1475년 담마체띠 왕은 차트라두타와 라마두타 2인의 정부 각료와 목갈라하나, 마하시발리 등 22명의 장로로 구성된 대규모의 파견단을 스리랑카로 파견하였다.
이 당시의 파견단은 불치(佛齒)에 공양할 선물과 미얀마의 왕이 스리랑카의 장로들에게 올리는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 이들은 스리랑카의 켈레니야 강의 선상에서 스리랑카의 망갈라 장로를 전계사로 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며, 스리랑카에서 제공하는 불치의 모조품, 보리수 나무의 가지·잎·종자, 스리랑카 불교 정화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 스리랑카 장로들의 편지, 게송 등 많은 선물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특히 쁘락크라마바후 1세에 의해 대사파 중심으로 정리된 스리랑카의 승단의 율법을 가져왔다.
이들이 귀국하자 담마체띠 왕은 도성의 근교에 여법한 도량을 갖추고 미얀마 내의 많은 젊은이들을 득도시켰다. 이 도량의 이름을 ‘켈레니야 도량’이라 하였고, 그 수계작법을 라마냐데사 수계작법이라 하였는데 그 수계작법을 이용하였던 파를 ‘라마냐파(Rama a Nik ya)’라 하였다. 라마냐파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한 종파로서 지금까지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의 스리랑카에도 라마냐파가 존속하고 있다.
4) 타이 상좌부 불교의 역사
그 기원이 뚜렷치는 않으나 타이의 역사는 수코타이 왕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대승 불교와 힌두교 등 여러 종류의 종교가 혼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스코타이 왕조는 미얀마의 아노라타 왕이 채택했던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여 상좌부 불교 중심의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지만, 상좌부 불교가 타이에서 뿌리내린 것은 14세기 후반 라마디파티 1세를 시조로 하여 기존의 수코타이 왕조를 병합한 아유타야 왕조 시절이라 할 수 있다.
미얀마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기까지 4백여 년을 유지했던 아유타야 왕조의 시리스리야반살마 왕은 1361년 스리랑카로 사신을 파견해 스리랑카 대사파의 가르침을 이어 받았다. 이때 스리랑카로부터 장로가 될 만한 스님은 물론 파알리어 불전과 스리랑카 불교의 각종 의식 및 예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국교로 삼았다. 이것이 타이의 상좌부 불교의 진정한 효시라 할 수 있다.
특히 1750년 스리랑카에서 내부적으로는 왕권의 비불교화로 인한 승단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과 외부적으로는 스리랑카의 일부를 지배했던 네덜란드와 가톨릭 세력에 의한 탄압으로 승단의 법맥이 끊기자 타이의 상좌부 불교 교단의 스님들이 스리랑카로 가서 스리랑카의 법맥을 부활시켰는데, 그 승단의 이름이 당시 타이의 국명이었던 씨얌파(Siyam Nik ya)이었으며 현재 스리랑카 최대의 승단이다.
3. 남방 상좌부 불교의 기복 의식, 피릿
최근 기복 불교를 논하는 과정에서 일부 논자들은 스리랑카를 위시한 남방 상좌부의 불교는 기복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기복적이라 함은 어느 절대적인 것에 의해 신행이 좌우되지 않으며 또 그 신행의 결과 또한 철저히 자주적이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기복(祈福)은 ‘복을 빔’ 또는 ‘복을 내려 주기를 기원하는 일’이며 기복과 상대가 되는 말이라 할 수 있는 작복(作福)은 ‘스스로 복을 만든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면 상좌부 불교에는 기복적인 요소가 없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남방 상좌부 불교에도 분명 기복적인 요소와 의식이 있다. 일부의 주장대로 상좌부 불교가 기복적이지 않다고 한다면 상좌부 불교를 수행하는 이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이미 붓다의 경지를 증득했거나, 그 경지에 가까이 가 있는 이들이 되어 있거나,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법이나 윤리 도덕이 필요없는 지역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일부에서는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남방 상좌부 불교권의 국가에도 살인과 도둑질, 간음 등 도덕적 해이는 있으며 여느 일반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사회 일반적인 요소 말고 파알리 경전 내부에도 역시 기복적인 요소가 설해지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피릿(pirit) 의식이다. 피릿은 ‘보호’ ‘안전’ ‘수호’ ‘주문’ ‘부적’ ‘호주(護呪)’ ‘호경(護經)’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파알리어 파릿따(paritt )나 싼스크리트어 파리뜨라(paritra) 또는 파리뜨라아나(paritr na)가 변한 말이다. 이 의식은 브라만교의 락샤나 만트라(Raksha a Mantra)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하나 파알리 경전에서 유일하게 타력적인 방법을 통하여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석가모니 붓다가 인정한 의식으로 붓다 역시 이 의식을 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붓다 생존시 인도의 리차비(Licchavi) 족이 살고 있던 베살리 지방에서 질병과 기근이 성하고 많은 사람들이 악령에 시달리고 있을 때, 붓다가 이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피릿 의식의 경전들을 암송하여 이 지역의 사람들을 재난으로부터 보호하였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미얀마나 스리랑카에 비하여 덜 성행하는 의식이지만 스리랑카에서는 제사 대신으로 이 의식을 시행하기도 하고 각종 사업을 시작할 때나 먼 여행을 할 때에도 이 의식을 행하고 있다.
피릿에 대한 경전적인 근거는 파알리 불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으나 다른 의식들에 비해 많이 소개되는 편은 아니다. 그 이유는 상좌부 불교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자력을 통한 궁극적인 삶에 도달하는 것이 우선이어서 이 의식에 관해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과,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경우 설사 재가 신도라 하더라도 구과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열심히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피릿 의식은 파알리 율장(律藏, Vinaya Pi aka) 《소품(小品, Culla Vagga)》에 ‘개인적인 보호(personal protection)’라는 구절과 율장 《경분별(經分別, Suttavibha a)》에 ‘만일 수행자가 보호를 위한 주문을 배운다면’이라는 구절로 소개되어 있다. 경장(經藏, Sutta Pi aka)에서는 《앙굿따라 니까아야(Anguttara Nik ya)》에 ‘보호하는 주문’과 ‘쌓임, 즉 온(蘊, Khandha)을 보호하는 주문’, 즉 ‘온호주(蘊護呪)’라는 뜻의 ‘칸드하파릿따(khandhaparitta)’가 나오며 《쿠타카 니까아야(Khuttaka Nik ya)》의 《자타카》에는 ‘주문에 의한 보호’와 ‘벽지불을 통하여 그들을 보호하게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파알리어로 쓰여졌으면서도 5부(五部) 니까아야에는 속하지 않는 《밀린다팡하(Milinda-panha)》에 의하면 ‘사마(死魔)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피릿 의식이 필요하다고 설해져 있다.
이외에도 피릿에 관한 기록은 《위수디막가(Vissudhimagga)》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4. 나오는 말
지금까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의 남방 상좌부 불교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불교 전통은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에서 기원한다. 그만큼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스리랑카를 포함한 남방 상좌부 불교가 부처님 당시의 불교와 다르지 않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 또한 수많은 역사적 질곡을 거쳐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때로는 그들 국가나 불교의 내적인 문제 때문에, 때로는 이슬람이나 서구 제국의 침입같은 외적인 원인 때문에 그 원형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고, 그 원형의 복구를 위해서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남방 상좌부 불교 또한 변형과 왜곡 그리고 전통의 재건을 위한 노력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남방 상좌부 불교가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을 기원해서 성립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강점이다. 한자문화권의 북방 대승 불교보다는 훨씬 부처님 시대의 원형에 가까운 불교를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처음 수용한 원형의 보존을 위해서 꾸준히 노력해왔다. 이러한 점에서 북방 대승 불교보다 훨씬 더 부처님 시대의 원형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은 인정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남방 상좌부 불교에 기복은 없고 작복만이 있다는 식의 현실을 도외시한 일부 연구자들의 일방적인 옹호론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동시에 단순히 대승 불교가 아니기 때문에 소승이라는 식으로 폄하했던 일방적인 단견도 수정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진정한 대승적 관점을 통해서만이 현대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불교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송위지
한국 외국어 대학교 경영학과 및 스리랑카 국립 케레니야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현재 서울 보건대 교수. 논문으로 <팔리 사티파타나 숫타와 한문 염처경에 대한 비교 연구><존재의 분석으로서의 염처>등이 있다.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체계 (출처 : 불교평론 13호)
김재성(metta@sutra.re.kr)
::::: 목 차 :::::
1. 머리말
2. 현대 스리랑카의 수행 전통
3. 태국불교의 수행 전통
4. 미얀마 불교의 수행 전통
5. 맺는 말
1. 머리말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명상 수행법들을 다양한 목적으로 행하고 있다. 요가, 아봐타, 마음수행법, 단전호흡 등이 자주 들리는 명상법이다.
그리고 불교 수행법으로 대표적인 것은 고려시대에 정착된,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간화선 수행법과 간화선에서 파생되어 나온 염불선 그리고 10여 년 전부터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법으로 전해진 위빠사나 수행법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명상법 가운데에서 본 고에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위빠사나 수행법을 중심으로 현재 남방 불교에서 행해지는 수행법에 대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를 중심으로 한 대표적인 상좌부 불교권의 수행 전통에 대해서 1997년도에 열린 ‘열린 세계에 있어서 세계승가공동체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학술회의를 통해서 정리 발표된 적이 있다. 당시 스리랑카에서 유학 중이던 일중 스님이 스리랑카 불교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필자는 태국과 미얀마불교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두 논문을 바탕으로 하여 상좌부 불교의 수행 전통에 대하여 정리해보며, 특히 현재 수행 전통이 가장 활발하게 전해지고 있는 미얀마의 수행 전통을 자세히 고찰해본다.
2. 현대 스리랑카의 수행 전통
스리랑카는 20세기가 되면서 승가와 재가 사이에서 승가 개혁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48년에 오랜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을 하고, 2500년 붓다 자얀티 기념 행사(1956)를 전후로 하여 싱할리 민족은 전통 문화와 불교 부흥에 대한 관심이 최고로 고조되었다. 이때 스리랑카 불교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숲속 수행 전통(아란냐와시) 부흥 운동과 위빠사나 명상 운동이 미얀마 불교의 영향으로 승가와 재가 속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숲속 수행 전통 부흥 운동은 마을 거주(가마와시) 승려들에 대한 반대 입장을 띠고, 승가를 초기 불교의 이념에 맞도록 개혁하고자 했으며, 숲속에 거주하면서 수행에 전념, 수행 전통을 부흥하자고 했던 운동이다. 이 운동의 주요 인물들은 빤냐난다(Pa nda), 지나왕사(Jinavamsa), 냐나난다(N nanda), 냐나라마( nar ma), 따빠사 히미(T pasa Himi) 등의 여러 스님들인데, 일부는 재가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승가 조직을 재구성했으나 오래 지속시키지 못하고 실패했으며, 일부는 초기 불교의 근본 정신에 입각한 체계적인 승가를 구성하여 재가인들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서 새로운 아란냐와시 수행 전통을 만들어 가고 있다.
위빠사나 운동은 1950년대 재가 불자 지식층이 중심이 되어 시작했다. 처음으로 ‘랑카 위빠사나 수행회’라는 모임을 조직하여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에게 수행 지도자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 우 수자타(U Suj ta) 스님 외 3명이 파견되었고, 이어서 콜롬보에 수행 센터가 설립되었다. 이 위빠사나 수행의 근거는 초기경전인 《대념처경》에 두고 있었다.
1950년대 전후로 일어났던 스리랑카 승단의 승가 개혁(아란냐와시 부흥 운동) 운동과 위빠사나 수행 운동의 결과로 새로운 숲속 수행처(아란냐)와 명상 센터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몇 개의 아란냐 지파들이 형성되었다. 아란냐와시 부흥 운동을 추진하여 성공했던 승려들의 수행법을 살펴본다.
스리랑카 승가의 수행법
스리랑카 승단에서는 그들 나름대로 수행 방법들을 모색하여 실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대략 네 가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 경전과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에 의거한 수행 방법
둘째, 전적으로 경전에만 의거한 수행 방법
셋째, 미얀마의 마하시 수행 전통을 따르는 방법
넷째, 위의 세 가지를 적절하게 수용하는 방법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법은 크게 사마타(Samatha; 止)와 위빠사나(Vipassan 觀)의 두 가지로 대표된다. 사마타(Samatha)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키는 수행이다. 사마타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준비이며, 전제 조건이다. 《청정도론(Visuddhimg-ga)》에서는 사마타 수행 주제(Kamma h na)로 40가지가 열거되어 있으며, 수행자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수행 주제들이 제시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장부 22경인 《대념처경》에 설해져 있는 수행법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경전에서는 네 가지의 마음챙김, 즉 사념처를 제시하고 있으며, 마음챙김(sati)의 대상으로 몸·느낌·마음·법(身受心法) 네 가지를 반복해서 관찰하는 방법을 설하고 있다. 사념처 수행을 바탕으로 해서 위빠사나 수행이 행해지므로 사념처 수행자체가 위빠사나 수행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사마타와 위빠사나(止觀)에 의거하여 스리랑카에서 실천되고 있는 수행 방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상좌부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수행법이자 가장 보편적인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빠나사띠( n p nasati; 入出息念)와 사띠빳타나(Satipa tth na; 四念處) 수행법, 그리고 붓다누싸띠(Buddh ussati; 佛隨念), 맷따 바와나(Metta Bh an 慈觀), 아수바 바와나(Asubha bh an 不淨觀), 마라나사티(Mara asati; 死隨念) 등을 수행하고, 드물긴 하지만 둥근 원판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법인 카시나 바와나(Kasi a bh an 遍觀)도 실천하고 있다. 이 방법들은 수행승 개개인의 근기에 따라서, 또는 장소와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바꾸면서 실천하고 있다.
아란냐 수행승들이 수행의 근거로 하고 있는 소의경전은 위에서 언급했던 장부의 《대념처경(大念處經, Mah atipa h a Sutta)》, 중부의 《염처경(念處經, Satipa h a Sutta)》, 《입출식념경(入出息念經, nasati Sutta)》가 있고, 그 밖에도 초기경전에 산재해 있는 수행과 관련된 경전들이 있다. 또한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과 위에 열거했던 경전들의 주석서들, 그리고 미얀마의 유명한 선지식 가운데 한 분이셨던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과 태국의 아잔 차 스님의 가르침도 수행의 지침서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수행의 전통이 부활되어 스리랑카에서도 전통적인 수행법이 행해지고 있지만, 미얀마나 태국의 수행 전통과 비교해보면 수행 전통이 약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잭 콘필드가 저술한 12명의 상좌부 불교 수행지도자의 가르침을 소개한 책(Living Dharma) 가운데 스리랑카 출신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이 이 사실을 반증하는 자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두 차례 직접 스리랑카의 아랸야 수행처를 조사하고 느낀 것도, 소수의 승려들이 숲속에서 수행하고 있고, 몇몇 수행처에서 마하시 전통의 위빠사나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태국이나 미얀마에 비하면 그 규모가 작고 일반 신자들이 수행처에서 수행하는 경우도 그다지 많지 았았다. 하지만, 초기경전을 바탕으로 한 수행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은 스리랑카 불교의 하나의 원동력이 되고 있음도 사실일 것이다.
3. 태국불교의 수행 전통
1) 지역별 수행 전통
태국은 크게 네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동북부 지역·북부 지역·남부 지역·방콕을 포함한 중부 지역의 네 지역이다. 각 지역에 따라서 수행의 전통에도 각각의 특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Weir도 지역별로 수행 도량을 분류하고 있고 태국에서는 위의 네 지역을 중심으로 수행 전통을 살펴본다.
(1) 동부 지역
태국의 동부 지역은 아찬 먼(Ajahn Mun, 1870∼1949)8)에 의해서 부활된 숲속의 수행 전통(Forest Practice Tradition, dhuta a)이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는 지역이다. 동북부 지역에서는 아찬 차(1918∼1992)의 주요 활동 지역이었던 동북 지역의 중심 도시인 우본 라차타니를 중심으로 조사했다.
미얀마의 수행 전통인 마하시 수행법을 가르치는 수행 도량을 제외한 태국의 다른 대부분의 수행 도량과 같이, 아찬 차의 가르침이 전해지는 동북부 지역의 대부분의 사원에서는 정해진 수행 기간이나 수행 시간이 따로 없으며, 따라서 수행만을 위한 전문 수행 센터라기보다는 승원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승려 생활을 익히면서 수행을 하는 수행 도량이라 할 수 있다. 수행은 개인의 문제로 자유로이 수행의 방법이나 수행 시간을 자신이 정해서 수행한다. 보통은 하루 8시간의 수행을 하며, 좌선이 4시간 행선(行禪, 걷는 수행)이 4시간 정도이다. 수행법은 주로 호흡을 관찰하는 입출식념이 행해진다.
(2) 북부 지역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태국 북부 지역은 동북부 지역과는 달리,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법(修行法)을 위시한 미얀마의 수행법이 많은 사원과 수행 센터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수행처로는 왓 람 펑 북부 위빠사나 수행 센터(Wat Ram Poeng Northern Vipassana Meditation Center)를 들 수 있다. 왓 우 몽(Wat U Mong)과 같이 태국 남부의 수안 목(Suan Mokkh)의 아찬 붓다다사(Ajahn Buddhad a)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하는 사원도 있다.
(3) 남부 지역
태국 남부 지역에는 수행 센터가 그리 많지 않다. Weir의 책(1991)에도 세 곳만이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태국 남부에서의 대표적인 사원이며 수행 센터로서는 아찬 붓다다사(Ajahn Buddhada?a, 1906∼1993)가 창설한 수안 목(Suan Mokkh)이 유명하다.
아찬 붓다다사는 《입출식념경(入出息念經)》(中部 118經 MN III, pp.78∼88)에 따라 수행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입출식념경(入出息念經)》에는 호흡에 대한 마음 챙김(出入息念)에서 네 가지 마음 챙김(四念處)으로 수행이 향상되며, 다시 네 가지 마음 챙김 수행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로 이어지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에 의해서 지혜(明, vijja)에 의한 자유(解脫)를 이루게 된다는 구체적인 수행의 단계가 조리 있게 설해져 있다. 아찬 붓다다사는 수행의 단계를 16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이 경전이야말로 실제적인 수행법이 제시된 유일한 경전이라고 한다. 입출식념에 근거한 수행법은 여러 수행의 전통에서 볼 수 있지만 아찬 붓다다사의 설명처럼 구체적인 수행의 단계가 제시되지는 않는다.
(4) 방콕 및 중부 지역
방콕에서는 두 곳의 사원을 방문하였고, 중부 지역에서는 네 곳의 수행 도량을 방문하였다.
방콕 시내에 있는 왓 마하 타트는 18세기에 창설된 이래, 태국불교의 중요한 센터로서 기능해 온 사원이다. 이 사원에서 수행을 지도하고 있는 곳은 Section 5이다. 이곳에서 지도하는 수행법은 미얀마의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이다.
방콕 교외에 위치한 왓 팍 남(Wat Pak Nam)에서는 이 곳의 원장이었던 프라 몽콜 텦무니(Phra Mongkol Thepmuni, 1884∼1959)가 창안한 이른바 담마카야 수행법이 행해진다. 담마카야 수행법은 수정을 사용한 광명편(光明遍, loka-kasina)을 수행하면서 ‘삼마 아라한(Samma Arahan)’을 마음 속으로 염하는 불수념(佛隨念, Buddh nussati) 수행을 보조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수행법이다. 광명편으로는 무색 투명한 수정을 정신 집중의 대상(nimitta)으로 사용하는 것에 특색이 있다. 이 수행법은 담마카야 사원(Dhammaka?a Foundation)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태국에서 마하시 위빠사나가 본격적으로 지도된 곳은 위웨크 아좀 위빠사나 수행 센터(Wiwek Asom Vipassana Meditation Center)이다. 방콕에서 남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촌부리(Chonburi)라는 도시에 위치한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 센터의 태국 지부의 하나이다. 원장인 아찬 아사바(Ajahn Asabha)는 미얀마 스님으로 1953년, 태국 정부가 미얀마 정부에 공식적으로 위빠사나를 지도할 스승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파견된 마하시 사야도의 직제자이다.
왓 사이 감은 방콕에서 북서 방면으로 110km 떨어진 논으로 둘러 쌓여 있는 수행 센터이다. 1970년대에 현재의 원장 아찬 담마다로(Ajahn Dhammadharo, 1914∼ )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아찬 담마다로의 수행법은 위빠사나이지만 그의 수행법은 손바닥을 편 채로 손을 상하로 움직이면서 손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관찰하는 점에 특색이 있다. 1954년 이래 아찬 담마다로는 자신이 결과를 얻은 수행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찬 담마다로의 수행법은 《대념처경(大念處經)》의 신념처에 설해져 있는 정지(正知, sampajan??)11)를 중시한다고 한다. 특히 (팔·다리를) 구부리는 동작과 펴는 동작을 할 때 분명한 앎(正知)을 지닌다는 구절에서 아찬 담마다로의 수행법의 경전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의 경험에 의한 수행법이라도 경전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 수행법은 상좌부 불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이곳의 수행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 수행 전통의 분류
태국불교의 수행 전통을 분류하면, 동북부 지역의 아찬 먼에 의한 부활된 숲속의 수행 전통과 남부 지역의 아찬 붓다다사에 의해 제시되는 수행법이 기본적으로 입출식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마하시 수행법에 의한 위빠사나와 왓 사이 감의 아찬 담마다로의 정지(正知)에 중점을 둔 위빠사나 수행법이 《대념처경》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으며, 선정 수행을 전제로 하지 않는 순수 위빠사나라고 하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태국의 수행법 가운데 가장 독특한 수행법은 담마카야 수행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응용된 광명편(光明遍, loka-kasina) 수행과 사념처 수행 등이 어울려져 새롭게 창안된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재 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수행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입출식념에 기초를 둔 수행법으로 동북 지역의 숲속의 수행 전통과 아찬 붓다다사의 수행법이 여기에 분류될 수 있다.
② 사념처에 바탕을 둔 순수 위빠사나 수행 전통으로 마하시 수행법과 아찬 담마다로의 수행법이 여기에 분류된다.
③ 담마카야 수행법으로 기본적으로 선정과 지혜를 닦는 과정을 거치지만, 수정을 사용한 광명편 수행과 18 단계의 신체설 등은 다른 수행법에서는 예를 볼 수 없는 독특한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4. 미얀마 불교의 수행 전통
1) 두 가지 수행 전통
현재 남방 상좌부 불교국에서 승려는 물론 일반 재가자에게 수행의 전통이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나라는 미얀마이다. 미얀마의 전국 각지의 수많은 수행 센터에서 다양한 수행법이 사부대중(四部大衆)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 위빠사나로 통칭되는 수행 전통이 대중화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시작되었고, 활발하게 일반인들이 수행을 접하게 된 것은 불과 50여 년 전부터이다.
미얀마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수행법은 크게 나누어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 전통과 마하시 사야도 계통의 수행 전통의 두 갈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1)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 전통
먼저 마하시 수행법의 연원과 수행법에 대해서 정리를 해본다.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의 스승은 밍군 제타완 우 나라다(Mingun Jetavan U Narada, 1868∼1954) 사야도(이하 밍군 사야도)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하시 수행법의 창시자는 마하시 사야도의 스승인 밍군 사야도이지만, 이 수행법을 미얀마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분이 마하시 사야도이기 때문에 마하시 수행법 또는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20대 후반에 교학만으로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부족하다고 느낀 후, 스스로 수행의 지침을 삼을 경전으로서 《대념처경(大念處經)》을 자세히 연구하면서 실제 수행을 지도할 스승을 찾는다.
그러던 중에 과정(果定)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티 론 사야도(Thee Lon Sayadaw, U Sandimar)의 수행법을 계승하고 있는 밍군 사야도가 《대념처경》에 의거해서 개인적으로 위빠사나를 지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4개월간 용맹 정진을 한다(1932년, 28세). 이후 다시 자신의 본사로 돌아온 마하시 사야도는 위빠사나 수행보다는 교학을 지도하기 시작한다. 마하시 사야도가 위빠사나를 본격적으로 지도하기 시작한 때는 1938년 고향인 세익쿤(Seikkhun)으로 돌아와서 부터이다. 위빠사나를 지도하면서 1941년에 실시된 법사 과정 시험을 통과하여 교학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44년에 858쪽에 이르는 위빠사나 수행법에 대한 책을 미얀마어로 저술한다. 1949년 우 누 수상과 붓다 사사나 눅가하 협회의 요청에 의해서 양곤의 마하시 수행 센터에 오게 되면서 마하시 수행법은 미얀마 국내는 물론 아시아의 다른 상좌부 국가를 포함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현재 위빠사나 수행하면 미얀마의 마하시 수행법을 연상하게 될 정도로 위빠사나 수행법의 대명사가 되었다.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의 특징은 첫째, 좌선할 때에 호흡에 동반되어 생겨나는 복부의 움직임을 일차적인 마음챙김(念)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에는 스리랑카에서 이 수행법은 경전에 근거한 전통적인 수행법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마하시 수행법은 《대념처경(大念處經)》과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 제시된 수행법 가운데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요소인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요소를 분명하게 관찰하는 사계차별(四界差別, catudh uvavatth a)에 중점을 둔 수행법이라고 하면서 결코 경전의 가르침이나 《청정도론》에 어긋나지 않는 수행법임을 밝힌다.
마하시 수행법의 두 번째의 특징은 좌선과 행선(行禪)에 동일한 비중을 두고 있는 점이다. 행선은 걷는 동작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을 말하나, 넓게 보면 여기에는 몸의 모든 동작이 포함되고 있다. 즉 좌선이 중요시되는 만큼 좌선 이외의 모든 몸의 동작에 대한 관찰도 강조되는 점이 마하시 수행법의 특징의 하나이다. 마치 중병에 걸린 환자처럼 천천히 몸을 움직이면서 몸의 모든 동작을 알아차리라는 수행법은 다른 수행법에서는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 점이다.
좌선 시간이 1시간이면 행선 시간도 같은 1시간으로 배정해서 몸의 동작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집중력을 높이게 한다. 4∼6시간의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깨어 있는 시간 전체가 수행 시간이라고 함은 일상 생활에서의 동작에 대한 관찰이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의 특징으로는 지도법에 있다. 수행자의 매일 매일의 수행의 상태를 지도 법사에게 정확하게 보고하여 수행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점검받는 것이 마하시 수행법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지도법은 수행자에게 강한 수행의 동기를 제공하는데 때로는 수행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늘 보고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도법에 의한 집중적인 수행은 결과적으로 수행자 자신의 빠른 수행의 진전을 가져오게 하기 위한 것으로 효과를 보고 있다. 수행의 체험을 매일 보고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수행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마하시 수행법에서 기본적인 소의경론(所依經論)으로 삼고 있는 경론은 장부(長部) 경전의 《대념처경(大念處經, Mah atipat.t.h a-sutta)》과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 그리고 《무애해도(無碍解道, Pati-sambhidamagga)》 등이다.
수행을 위한 기초적인 경전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며, 기본적인 수행법에 따라 수행을 해나가면서 매일 매일의 법문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수행법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실천적인 이해가 만나게 되도록 지도를 한다.
대부분의 마하시 수행 센터에서는 정해진 수행 기간 없이 일년 내내 수행을 지도하고 있으며, 최소한 1개월에서 6개월 정도의 집중적인 수행이 권장되고 있다.
수행의 목적은 다른 모든 수행의 전통과 같이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성취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으며, 지금 이 생에서 열반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마하시 수행법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데에는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마하시 수행 센터에는 통역을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서 외국인들도 언어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준 점은 마하시 수행법의 국제화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레디 사야도의 수행 전통
미얀마의 수행의 체계를 크게 마하시 사야도 계통의 수행법과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법의 두 부류로 분류하여 보았을 때, 마하시 계통의 수행법은 스승에 따라서 지도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마하시 사야도의 직제자들에 의해서 현재 지도되고 있으므로 동일한 수행법으로 볼 수 있으나,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법은 직접적으로 레디 사야도의 지도를 받은 제자에 의해서 계승되었다기보다는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 레디 사야도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에 살펴볼 수행체계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레디 사야도(Ledi Sayadaw, 1846∼1923)는 수행보다는 교학의 측면에 더 공헌한 근·현대의 미얀마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에 살펴볼 수행의 전통들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레디 사야도의 가르침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특히 우 바 킨과 그 제자인 고엔카의 수행법은 레디 사야도의 가르침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레디 사야도 전통의 수행법의 기본적인 특징은 호흡에 대한 관찰을 근거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아나빠나 사띠(入出息念)를 근거로 한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
① 순룬 사야도:그 가운데 순룬 사야도(Sunlun Sayadaw, 1878∼1952)의 수행법은 강한 호흡으로 유명하며, 이러한 독특한 호흡법 때문에 전신에서 강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측면은 마치 고행주의를 연상하게도 되는데, 순룬 사야도가 이렇게 빠른 호흡을 하게 된 것은 잡념과 졸음을 막고 호흡에의 관찰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순룬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이 위주가 되어 있으며, 좌선 시간 이외에 특별히 행선을 하지는 않는다. 좌선은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며, 처음의 40분간은 코로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코 끝의 감각을 관찰한 후(출입식념), 이어지는 50분 동안은 거친 호흡을 멈추고 전신의 감각을 관찰한다(위빠사나). 이처럼 한번의 좌선에 출입식념과 위빠사나를 같이 하는 것이 순룬 수행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행법은 순룬 사야도가 출가하기 전에 출입식념이라는 수행법이 있음을 듣고 난 후, 혼자서 수행을 시작하여 창안한 수행법이다. 출입식념을 중심으로 하여 위빠사나 수행으로 진행되는 점에서 넓게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법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레디 사야도의 가르침을 듣거나 수행의 지도를 받은 점이 없기 때문에 미얀마의 수행 전통 가운데 순룬 사야도의 수행법은 가장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우 바 킨 수행 전통:레디 사야도의 수행 전통을 잇는 우 바 킨(U Ba Khin, 1899∼1971)은 재가자이며, 고엔카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우 바 킨이 지도했던 수행법은 입출식념(入出息念)을 기초로 한 위빠사나이다. 우 바 킨은 재가자들에게 적당한 수행 기간으로 10일간의 코스를 개설해서 수행을 지도했다. 10일간의 기간 중에 3일은 입출식념(定)을 나머지 7일간은 위빠사나(慧)를 닦는다. 호흡은 자연스럽게 하며,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여 마음을 안정시킨 후에 전신의 감각을 관찰하는 위빠사나를 닦는 것이다.
수행은 하루 8시간의 좌선 시간 위주로 진행되며, 초보자는 1시간의 좌선과 30분의 휴식 시간이 있으며, 경험이 많은 수행자는 2∼3시간 좌선을 한다. 우 바 킨의 수행법은 그의 제자인 고엔카에 의해 널리 알려졌으며,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과 함께 현재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유명하다.
③ 모곡 사야도의 수행 전통:레디 사야도의 전통을 잇는 또 한 가지 수행법은 모곡 사야도(Mogok Sayadaw, 1899∼1962)에 의해 전해졌다. 모곡 사야도는 북부 미얀마의 아마라푸라(Amarapura)에서 활동하다가 그곳에서 입적했다. 모곡 사야도는 레디 사야도의 가르침의 전통을 이어받아, 특히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중심으로 한 아비달마적인 교리 해석에 힘을 쏟았다. 수행법은 출입식념과 위빠사나 수행을 위주로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십이연기를 중심으로 한 아비달마적인 교리가 중요시되어, 수행을 하는 데 어느 정도의 교리적인 이해가 전제 조건으로 요구된다는 점이다.
좌선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모곡 사야도의 아비달마적인 교리에 대한 설법을 1시간 정도 듣는 것도 특징이다. 모곡 사야도의 수행법은 출입식념(身念處)을 기본으로 하여,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의 순서로 사념처를 바탕으로 하여 심신(名色)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이다. 수행의 이론적인 근거는 12연기설이다.
2) 수행체계의 분류
미얀마 불교의 수행체계를 마하시 수행 계통과 레디 사야도 수행 계통의 두 계통으로 나누어, 마하시 계통의 수행 센터 네 곳과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 센터 다섯 곳을 방문하여 조사한 결과를 정리해 보았다.
마하시 계통의 수행 센터는 동일한 방식으로 사념처(四念處)를 바탕으로 한 순수 위빠사나를 지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 센터들은 기본적으로는 출입식념을 행하며, 출입식념에 의해서 마음의 집중을 얻은 후에는 위빠사나 수행을 닦는다는 공통점이 확인되었고, 아울러 순룬 사야도의 독특한 호흡법과 모곡 사야도의 아비달마에 대한 이해의 강조 등에서는 수행법들간의 개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수행체계를 분류해 보면, 마하시 수행법은 선정 수행을 전제 조건으로 하지 않는 순수 위빠사나 수행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법은 사마타(선정)를 먼저 닦은 후에 위빠사나(지혜)를 닦는 수행으로 분류할 수 있다.
5. 맺는 말
이상에서 개략적으로나마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 전통을 살펴보았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현재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 실천되고 있는 수행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초기경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청정도론》을 위시로 한 초기경전에 대한 주석 문헌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리고 어떠한 수행법이라도 수행의 목적은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획득에 있다는 점에서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가장 보수적으로 전하고 있는 상좌부 불교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김재성
서울대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동양철학 전공).일본 동경대학 인문사회계 인도철학 불교학 석-박사 과정 수료. 현재 고려대장경 연구소 상임연구원. 사단법인 위빠사나 수행처 호두마을 지도법사. 논문으로 <일본의 초기불교 및 남방 상좌부 불교 연구의 역사와 현황><청정도론의 찰나정 근행정>역서로 <지금 이 순간 누가 깨어 있는가-우빤디다 스님의 가르침><위빠사나 수행>등이 있다.
상좌부 불교의 현황 (출처 : 불교평론 13호)
난다라타나(nadara65@hanmail.net)
::::: 목 차 :::::
남방 상좌부 불교의 배경
비구의 생활과 교육과정
재가자의 종교 생활
사찰과 사회
불교 행사
맺는 말
1. 남방 상좌부 불교의 배경
상좌부 불교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 등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남방에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상좌부 불교의 대표적인 나라로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를 손꼽을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상좌부 불교라도 각 나라의 전통과 생활방식, 사고의 차이에 따라 수행방식에 있어서 그 각각의 특징과 차별성이 있다. 예를 들면 스리랑카는 승려의 교육(敎育), 태국은 지계(持戒), 미얀마는 수행(修行) 등이 각각 두드러지며 그것이 그 나라 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초기 불교의 근본사상인 계정혜(戒定慧, s沖la·sama?hi·prajn??라는 삼학(三學, thri-s쳃ks.a?의 세 주춧돌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들 세 나라의 역사적 배경을 간단하게 알아봄으로써 각각의 분야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좌부 불교의 현황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스리랑카
스리랑카(Sri Lanka)의 면적은 62,337㎢이고, 인구는 약 1천 9백만 명 가량이다. 종족 분포도로 볼 때 싱할라(Sinhalese) 74%, 타밀(Tamil) 18.1%, 무슬림(Muslim) 7.1%, 기타 0.8% 이며, 종교 분포도로 볼 때는 불교가 69.3%, 힌두교 15.5%, 이슬람교 7.5%, 기독교와 천주교 7.5%, 기타 0.1% 이다.
현재 스리랑카에는 ‘교육중심주의(학문생활, ga?a-va?沖n)’와 ‘수행중심주의(수행생활, a?an.ya-va?沖n/vana-va?沖n)’의 커다란 두 흐름에 따라 수행하는 비구들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전통의 역사는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불교의 근본이 학문인가, 수행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벌어진 논쟁의 결과, ‘교육중심주의’와 ‘수행중심주의’라는 비구들의 두 가지 생활방식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계속 각각 다른 두 가지 수행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이 두 가지 비구들의 생활형태는 현재의 스리랑카 불교의 현황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상좌부 불교의 기본이었던 ‘자기 중심적인 수행주의’ 뿐만 아니라 포교가 곧 자기 수행이라는 교화적 불교(他利利他)가 민중화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일반 재가 학생들이 학습하는 교재나 승려들의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국어·시·문화·문헌 등은 모두 그 두 계통의 장로들이 남겼던 다양한 문헌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 교육 과정에도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1) 수행중심주의
현재 스리랑카에는 수행생활만 하는 비구의 거주지가 여러 곳에 있는데 대다수가 동굴이며, 숲속의 거주지는 대부분 현대에 들어와서 생긴 것이다.
수행자들이 머무는 토지의 관리와 운영은 재가 신자들로 구성된 후원 단체가 맡아서 하는데 이 신자들로 구성된 후원 단체 또한 비구들과 함께 수행하는 단체들이다. 먼 곳 어디에도 다니지 않는 이 비구들은 경제적인 일에는 관계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에 탁발 나가 얻은 음식에서 얼마 정도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나머지는 함께 수행하는 비구들과 식당에서 같이 식사하기도 하고 각자 자기 동굴 속에서 식사하기도 한다.
오전에는 수행도 하고 가사 빨래나 목욕을 하는데 빨래나 목욕은 오전에만 한다. 주된 수행은 자기 동굴이나 나무 밑에서 하는 좌선명상(vipassana?bha?ana?이며, 심신이 많이 지쳐 있을 때는 조용히 걸으면서 하는 경행(can?amana)을 하는데 경행을 위한 장소도 있다. 오전 10시경에는 마을에 내려가 탁발을 한다. 오후에는 명상을 하는데 ‘오후 불식(不食)’이므로 탁발은 하지 않는다.
현재는 인근지역의 신도들이 음식을 준비해서 승려들의 수행지로 가져오면 승려들은 시간을 맞추어 자기 거주지에서 바루를 가지고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나서 승려들은 신자들에게 오계를 전수하고 보시 공덕에 관한 법회(bhukta?umodana?를 하고 다시 자기 수행지로 되돌아간다.
(2) 교육중심주의
이 사찰들은 대부분 마을의 중심에, 혹은 도시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현재에는 비구들이 탁발 나가는 일은 거의 볼 수 없고 대신 마을 신도들이 하루에 두 차례 걸쳐서 아침과 점심공양을 순서대로 사찰로 가지고 온다. 승려들의 하루 일과는 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아울러 중생을 교화하고 포교와 관련하여 사회 여러 문제에 부딪치며 중생들과 함께 살아간다.
‘교육중심주의’ 비구들의 교단에는 크게 세 개의 종파가 있다. 이 종파가 생긴 것은 지난 450여 년 동안 서양 열강의 지배를 받은 이후에 불교가 피폐해진 부산물이다. 포르투갈 인들의 침략(1505∼1658)에 이어 홀랜드(1658∼1796) 그리고 영국(1796∼1948)이 차례로 스리랑카를 식민지화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 하에서 불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와의 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들은 불탑과 가람을 파괴하고 사원 소유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불교인들에게 강제로 개종을 요구하는 등 여러 가지 박해를 가했다. 이때에 박해를 당한 종파는 대부분 도시나 마을의 중심에 있던 학문중심주의 승가와 사찰 그리고 불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절멸된 비구 교단을 재건하기 위해 미얀마와 태국에서 불교의 법통을 이어와 부활을 꾀했다. 스리랑카 불교와 이들 나라의 상좌부 불교와는 친선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자연스런 일이기도 했다.
현재 스리랑카 불교의 법통을 잇고 있는 씨얌파(siyam-nika?a)·아마라푸라파(amarapura-nika?a)·라마냐파(ra?an??-nika?a)는 이전까지는 출가자와 일반 사회 계급과의 사이에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었지만 이후로부터 출가자와 사회 계급과 밀접한 관계가 생기게 된 것이 한 특징이기도 하다.
이 세 종파 가운데 스리랑카 비구들의 주요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종파는 씨얌파이며, 1753년 태국의 우팔리(Upali) 장로가 비구 25명과 스리랑카에 와서 구족계(upasampada?를 전해주면서 시작되었다. 아마라푸라파는 씨얌파가 창종된 지 55년 후인 1808년에, 라마냐파는 그 후 56년 뒤인 1864년에 일단의 스리랑카에 스님들이 미얀마에 가서 구족계를 받아 돌아와서 창종한 종파이다. 스리랑카 행정부의 불교부(Ministry of Buddhasa?ana) 2001년 10월 통계에 의하면 3개 종파에 속하는 사찰의 총 숫자는 8,204개이고, 비구들의 총 숫자는 29,877명이며, 그 숫자의 절반 정도는 사미승려들이다.
큰 세력을 가진 시얌파는 캔디(Kandy)의 아스기리야(Asgiriya) 사(寺)와 말왓타(Malwatta) 사(寺)로 구성되어 두 명의 종정(宗正)이 존재하며, 토지와 재산을 소유한 대사원 또는 불치사(佛齒寺, Dalada?ma?iga?a)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해 가고 있다. 이 종파의 승려는 대부분 사회의 상류계층 출신자들로 이러한 점이 출가 불교로서의 비구의 순수성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것은 승가 집단이 자연스럽게 상류계층과 자족적인 유대 속에서 번영을 누렸기 때문이다.
라마냐파와 아마라푸라파의 출현은 이러한 경향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아마라푸라파는 하층 계급 출신자를 많이 받아들이는 서민적 성향의 승가집단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3파는 그 근본이 모두 스리랑카에서 다른 나라로 전파되었다가 다시 법통을 이어온 것이며, 교의상으로는 서로 크게 다른 점은 없다.
2) 태국
태국 불교 또한 종파가 있기는 하나 기본 교의를 달리 하지는 않는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똑같은 경전을 암송하고 같은 계율을 지키며, 같은 교의를 숭상하고 똑같은 황의(黃衣)를 걸친 승려들이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태국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는 ‘마하니카이(Maha?ikai)’파와 ‘담마유트(Dharmayut)’파이다. 마하니카이파가 다수파이고 소수파인 담마유트파가 특히 계율의 엄수를 강조할 뿐 교의상의 차이는 전혀 없다. 굳이 차이를 논한다면 가사의 착용법이나 독경의 억양과 발음법 정도이다.
오늘의 담마유트파를 있게 한 이는 몽쿠트(Mongkut, 1804∼1868) 왕이다. 그는 즉위하기 전 27년간 승려로서 지내면서 복고적인 불교 부흥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결과가 담마유트파이다. 그래서 담마유트파는 소수파이지만 왕실의 지원을 받고 있다.
태국 불교의 한 특질은 승려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이다. 출가란 본래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르는 것으로 아무런 외부적 제약을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는 출가나 환속이 어느 정도 엄격한 편이다.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는 상가에 들어가려면 상가의 일원으로서 오래도록 사원에 머물며 수행에 전념할 것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그만큼의 각오와 자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태국에서는 그런 각오와 자각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가에 오랫동안 머물며 수행하는 것도 애초부터 그다지 기대하고 있지 않다. 자기의 자유의사로 상가로 들어가는 것처럼 세속생활로 돌아가는 일도 자유이다.
또한 태국 불교의 특징은 승려가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국은 ‘상가통치법’에 의해 승단이 관리되는데, 이 법에 승려가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다. 스리랑카와 미얀마에서는 승려들이 정치적인 일에 깊이 관여하고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점에서는 태국과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태국 왕실이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왕실이 불교의 열렬한 신봉자라는 관계는 유지하고 있다.
태국 불교의 현황을 살펴보면 인구의 95%가 상좌부 불교도인이며 3만에 가까운 사원에서 비구와 사미승려를 합쳐 40만 명에 이르는 승려 구성원이 있다. 1994년 태국 정부의 교육부 통계에 의하면 종교 인구율, 사원의 수, 종파별 비구 및 사미승려, 출가 여성의 수는 다음과 같다.
종교 분포도로 볼 때는 불교가 94.8%, 이슬람교 4.05%, 기독교 0.55%, 힌두교 0.01%, 기타 종교 0.12%, 무종교 0.47%의 비율이다. 사원의 숫자는 마하니카이파의 사원이 56,694개이며 담마유트파의 사원이 2,902개에 이른다. 비구와 사미승려들의 수행자는 전체 합계가 378,260명이며, 출가 여성들은 전체 16,033명에 이른다.
승려들의 전통적인 교육기관으로는 ‘팔리학교’와 ‘교리학교’가 있다. 팔리학교는 비구와 사미승려만을 위한 교육기관이며, 교리학교는 비구와 사미승려들의 불교교리시험을 위한 학교이다. 팔리학교와 교리학교가 국가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교육기관이라고 한다면, 스리랑카와 마찬가지로 일반인들을 위한 일요일 불교학교(Sunday School-Dhamma School)가 있다. 그 외에 두 개의 불교대학이 있다. 마하니카이파의 ‘마하출라 롱콘’ 불교대학교와 담마유트파의 ‘마하마쿠트’ 불교대학이다. 이 두 대학을 방콕 시내에 설립하고 비구의 양성에 주력하고 있고 불교학 외에 일반대학의 교과목도 채택해서 비구의 교양과 자질향상에 주력하고 있다.
대다수의 태국 승려들은 거의 새벽에 절을 나와 탁발을 한다. 탁발 나온 승려들에게 공양 보시를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것은 큰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수행자의 탁발은 재가자가 공덕을 쌓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승려를 집으로 초청해 점심식사를 공양하기도 한다. 이 공양보시는 상좌부 불교 나라들이 거의 비슷하다. 식사뿐만 아니라 옷을 물들이는 물감, 수건, 비누, 보온병, 칫솔, 치약 등 승려들의 일용품도 공양한다. 또 책이나 기타의 생활용품도 공양한다.
3) 미얀마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교의는 스리랑카의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크게 다른 점은 없다. 그러나 행사 의식과 출가자의 일상생활 등 세부적인 것에는 미얀마의 독자적 특색이 나타나며 문화의 차이가 있다.
미얀마의 종교 인구의 분포를 보면 인구의 89.4%가 상좌부 불교도이며, 이슬람교가 3.9%, 힌두교도가 0.5%, 기독교도가 4.9%, 나트(Nat) 신앙이 1.2%, 기타가 0.1%가 된다. 미얀마에는 전체의 약 87%를 차지하는 수담마파를 포함해서 9개의 공인된 종파가 있다. 사미승려를 포함한 전체 비구승려는 총 396,760명이다. 여성 출가자의 수는 3만 정도에 이른다.
1980년에 미얀마 전 종파 합동회의가 개최되어 종교적·정치적·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미얀마의 9종파를 통괄하는 조직의 설치, 종교적 분규의 해결, 출가 등록제와 신분의 규정의 확립이라는 세 가지 사항을 입법화하였다.
미얀마 불교의 교학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팔리 경전 시험이 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팔리 국가 시험과 사설 시험이다. 팔리 사설 시험은 승려와 재가자가 중심이 된 감독 단체가 진행을 감독한다. 미얀마의 승려 교육 기관은 크게 사설 교육 기관인 전문 강원(Mahagandayong)과 국립 불교대학(State Pariyatti Sa?ana University)으로 대표된다. 사설 전문 강원이 전국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고, 국립 불교대학은 양곤(Yangon)과 만달레이(Mandalai)의 두 도시에 설치되어 있다.
미얀마에서는 ‘불사리탑’ 숭배가 널리 펴져 있다. 가정에서 생기는 모든 일들은 부처님을 대신하는 불사리탑 앞에 가서 고한다. 이 사리탑과 사찰의 관리는 재가 신자들이 맡고 있다. 현재 상좌부 불교국에서 승려는 물론 일반 재가자에게까지 수행의 전통이 가장 널리 보급된 나라는 미얀마이다. 전국 각지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명상 수행 센터(Meditation Center)가 있고, 이곳에서 다양한 수행법이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상좌부 불교국보다 두드러진 현상이며, 미얀마 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얀마는 ‘수행중심주의 불교’라 할 수 있다.
4) 단기출가
태국 승가의 출입은 비교적 자유롭다. 그러나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는 그것이 약간 다르다. 환속하는 것보다는 상가에 오래 머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만큼 환속하는 것은 타락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상좌부 불교인들은 자신이 출가한 공덕이 부모를 비롯한 이미 별세한 조상들에게까지 영향을 준다고 믿는다. 임시출가 제도가 정착되어 의무는 아니더라도 남자들은 일생에 한 번은 단기 승려 생활을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국가 공무원인 경우 3개월을 단기출가를 위한 유급휴가를 준다. 임시출가를 했다는 것 자체가 결혼하기 위한 자격이 되기도 한다.
태국·미얀마의 경우, 임시출가를 해서 승원 생활을 하는 것을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며, 인격형성에 유익하고, 그 기간을 거쳐 사회인으로서의 생활하는 것이 남자의 의무라고 여긴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경우는 다르다. 스리랑카에는 단기출가라는 개념조차 없다. 출가해서 환속한 사람을 보고 스리랑카 사람들은 아라한의 경지를 약속 받은 영광스럽고 고귀한 승복을 벗고 중생들의 천박한 세상으로 되돌아온 어리석은 이라고 한다.
2. 비구의 생활과 교육과정
출가의 과정이나 출가자의 교육과정은 상좌부 불교가 행해지고 있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 등 나라에 따라 약간의 문화 차이는 있지만 거의 비슷하다. 이하에서는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 출가 행사
출가하고자 하는 자는 이미 ‘일요 불법학교’에서 승려의 생활이 어떠한지를 알기 때문에 출가에 대해 자신이 명확한 입장을 밝힐 수가 있다. 출가자들은 대부분 어린이들인데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부모와 가족들의 의사도 매우 중요하다. 아이가 8∼9세가 되면, 또는 총명한 이에게 출가자가 되면 얻게 되는 공덕 등을 자세히 알려주며 부모가 출가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 본인의 동의에 의해, 부모가 원하는 사원의 주지 스님의 허락을 받아 사원으로 데리고 가 주지 스님에게 맡긴다.
약 1년 동안은 주지 스님과 사원의 다른 스님들의 인도를 받으며 수행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간단한 기본 교리를 배운다. 그리고 나서 적당한 날을 택해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사미계를 받아 출가하게 되는데, 이 날은 그 사원의 큰 축제가 되며 아이에게 입힐 가사와 그 행사에 모이는 스님들의 공양, 보시 등 모든 경제적 부담은 그의 부모와 사찰 신도들이 모여서 해결한다. 10살이 되지 않아도 출가하면 비구 대접을 받게 되며 이 비구에게는 자기 부모 등 가족 친지들이 모두 큰절을 한다. 출가자는 절을 하는 이들에게 합장을 하지 않으며 ‘소원을 이루라’ ‘건강하라’ 등의 내용을 포함한 팔리어 게송을 들려준다.
2) 출가자의 교육과정
출가한 스님은 승려 전문교육기관인 승가학교(pirivena)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는다. 사미 스님은 동참 스님들과 승가학교에 거주하며 특별한 일이 없으면 4월, 8월, 12월 방학 때만 자신이 출가한 사찰에 다녀올 수 있다. 새벽 5시에 일어나고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게 되며, 아침에는 각자 공부하고 점심 공양 후 오후 1시에 학교가 시작되어 오후 5시 30분에 끝난다.
일반 학생들과는 다르게 경전은 물론이고 팔리어와 범어를 배우며 국어, 영어, 수학 등 일반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도 학습한다. 그 외에는 승가학교에서 매일 불교언어와 경전을 외우는 것이 특별한 과정이다. 또는 ‘위빠사나’ 수행법도 배우고 설법하는 능력도 키우며 독경하는 것도 학습한다.
이와 같은 교육을 5년 이수하여 승가학교 기본 교육과정을 마치고 ‘승가학교 기본 교육시험(mu?ika piriven avasa?a)’이라는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그 다음 고등 승가학교에 올라가 2년마다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시험을 3번 보면 6년간의 ‘판디타(Pand.it)’를 획득하여 졸업하게 되고, 이로써 출가자의 승가학교의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게 된다.
3) 구족계 행사
출가자가 20세가 되면 구족계를 받게 된다. 구족계단은 종단별로 각 종정 스님을 비롯한 ‘종단의 행정승(ka?aka sam.gha-sabha?’으로 구성되어 설치되어 있다. 구족계는 5월부터 6월 보름 사이에만 받을 수 있다. 그 한 달 사이에 적당한 날을 택해 구족계를 받는다. 행사 당일 구족계 받는 일을 축하하기 위해 수계자의 부모, 친척과 이웃 사람들 그리고 출가한 사원 주변 사람들이 구족계단으로 모인다.
아침에는 종정 스님과 종단의 스님들이 계시는 여러 사원들을 은사 스님과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다니며 보시하고 인사를 드린다. 아침 10시쯤에는 수계법당(uposata?gha?a)에 모인 종정 스님, 부종정 스님 등이 묻는 불교 언어와 경전에 관한 질문에 직접 대답하여 합격해야만 구족계를 받을 수 있다. 이 구두 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모여 있던 부모, 친척들이 ‘사두(sa?hu)’라고 3번을 외친다. 그 말은 ‘좋다, 좋다, 좋아’라는 뜻이다. 모인 스님들에게 공양을 보시하고 모인 사람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계를 받는다. 이때 계를 받기 바로 직전에 인생의 마지막 기회로 속인처럼 옷을 입고 각종 보물로 장식한 왕관도 쓰고 목걸이를 걸거나 반지도 끼는 왕의 복장을 한다.
계를 받은 다음에는 비구가 되었음을 축하하는 전통 음악과 춤을 공연하며, 다시 출가한 사원으로 돌아와서 오후에는 구족계를 받은 승려에게 첫 설법(mam.gala-dharma-des.ana?을 듣는 것으로 구족계 행사가 끝이 난다.
3. 재가자의 종교 생활 : 포살(pohoya, 布薩)을 중심으로
보름은 달이 꽉 찬 날이다. 이 날은 ‘포허야(布薩)’ 날이라 하는데 상좌부 불교에 있어서는 가장 성스러운 중요한 날이다. 이 날은 불교 역사 속에서 훌륭하고 성스러운 일을 기념하여 불자들이 그 의미를 생각하며 선한 일을 하고 수행을 하기 위해 사찰에서 하루를 보낸다. 모든 상좌부 불교국가는 보름날이 국가에서 정한 휴일이기 때문에 모두 한가히 선행을 하며 공덕을 쌓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보름날은 술집조차 문을 열지 않아 술을 마신다거나 노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보름에는 이른 아침부터 온 마을 신도들이, 노인들은 물론 손자 손녀들까지 데리고, 성스러움과 깨끗함을 상징하는 하얀 옷을 입고 절을 찾아 모여든다. 절에 모인 신도들이 스님을 모시고 6시쯤에 불당에 들어와 부처님께 아침 공양을 올리고 나서 스님으로부터 8계(as.t.ha-s沖la) 혹은 10계(das첺-s沖la)를 받아 하루종일 계를 지키며, 마음을 밝혀 삼매에 들어가 지혜를 얻는 수행의 일정을 지낸다. 이러한 수행 행위는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의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에 근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침 공양을 끝내고 나서 법당, 불당, 수행장, 경행토(經行土), 동굴 등 어디서든지 조용히 수행에 든다. 아침 9시가 되면 모두 법당에 모여 스님을 모시고 설법을 듣는다. 스님은 1시간 또는 1시간 30분 동안 설법하며 각각의 보름날에 연관된 불교 역사 가운데 있던 성스러운 이야기를 해주고 위빠사나 수행법과 수행할 때 일어나는 형상 등에 대해 설명해 주기도 한다.
법회가 끝날 때가 되면 점심 시간이 되므로 계를 받아 수행하는 신도들의 자녀들이 점심 공양을 가지고 모인다. 그들과 함께 불당에 스님을 모시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다음 절에 계시는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고 나서 자신의 부모에게 공양을 올린다. 이것은 보통 집에서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를 떠나 수행자, 즉 우바새(upa?aka) 우바이(upa?ika?라는 생각으로 행하는 것이다. 대신 공양을 받은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공양보시에 관하여 좋은 말을 해준다.
오후 2시쯤 스님을 모시고 좌선수행에 든다. 법회를 열어 스님의 권고를 받아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시간이며, 오후 5시쯤에는 스님을 모시고 《본생경(Ja?aka)》을 암송하는 시간이다. 이때는 스님이 《본생경》 중 한 가지 이야기를 선택하여 억양을 맞추어 암송한다. 신도들은 합장한 채로 듣는다. 《본생경》은 팔리(pa?i)어가 아니라 각 나라마다 그 나라말로 암송한다.
오후 6시쯤에는 모두 다시 불당에 모여 부처님께 차, 꽃, 향 등 공양을 올리고 나서 차 한잔으로 저녁 공양을 하며 밤새도록 스님들 모시고 소위 호주(護呪) 혹은 파릿타(paritta)라고 하는 염송 기도에 들어간다. 만약 호주를 진행하지 않게 되면 각자 경전을 암송하며 밤을 새운다.
보름날, 정해진 행사 이외의 시간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념처경(四念處經, Catta?o-satipat.t.ha?a-sutta)》을 암송하며 시간을 보낸다. 불자들은 누구나 《사념처경》 한 권씩은 다 가지고 있으며, 아침에 절에 올 때 가지고 오는 것을 잊지 않는다.
4. 사찰과 사회
대부분의 사원은 각 마을 또는 동네나 시내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어서 자기 동네의 사원이 가족 사원이 된다. 가정의 일상사는 물론 모든 종교적 행위가 사찰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진다. 예를 들면 결혼식이 있으면 그 전날 스님으로부터 경전을 듣고 보호를 받고, 임신을 하면 임신했다고 부처님께 고하고 스님으로부터 《앙굴마라경(央堀摩羅經, An?ulima?a-sutta)》을 듣고 보호를 받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났음을 고하고,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 말을 시작한다고, 글씨를 배울 때가 되면 글씨를 배운다고 부처님께 고하고 큰스님에게 첫 글을 배운다. 이처럼 모든 일들이 사찰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1) 불법학교(Daham-pa?ala)
사찰마다 교리학교가 있다. 일요일만 교리를 배우는 학교라 ‘일요 불법학교’22)라고도 한다. 일요일이면 온 마을의 학생들이 흰색 전통 의상을 입고 꽃을 따서 바구니에 담고 불교 교리를 배우기 위해 사원으로 모인다. 불당 앞에서 스님으로부터 오계를 받아 부처님께 꽃 공양을 올리고 나서 불법공부를 시작한다.
불법학교에 참석하는 아이들을 1학년부터 10학년으로 나누어 수준에 맞추어 행정부의 불교부(佛敎部, Ministry of Buddha-sa?ana)에서 만들어진 교재를 가지고 불교를 배운다. 이 교재는 저명한 스님들과 불교학자에 의해 불교부에서 편찬된 것이라 그 내용도 재가 학생들이 공부하기에 적절하도록 짜여져 있다.
절마다 학생들이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몇 천 명에 이르는데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그 사찰의 스님들 또는 그 마을의 교사들이다.
교사들은 그 학생들의 학교나 마을 선배들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교육은 후배들을 위한 사회복지 차원의 자원봉사이기도 하다. 교사로서의 월급 등과 같은 어떤 보상도 받지 않는다. 불교 공통의식은 스님의 지도하에 모든 학생들이 따라하며 같이 하고 배우지만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교리 공부는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가르친다. 불교교리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위한 효도법, 이웃들과 함께 사는 것, 사회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의 극복 방법들도 가르치기 때문에 현실생활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불법학교의 졸업장은 취직할 때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므로 사회 생활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다. 매년 지방마다 학생들의 실력을 알 수 있게 지방 불법학교 시험을 본다. 우수한 성적의 합격자들은 전국적인 불법학교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국가로부터 장학금 및 증명서를 받는다. 이러한 일들은 전적으로 불교부에서 전담한다. 또한 일반학교에도 스님들이 최소한 한 명씩 교사로 있기 때문에 불교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으며, 대학교에도 불교학과가 있어서 불교과정인 수능시험을 보아서 불교를 계속 배울 수 있다.
2) 대각회(大覺會, Maha?odhi society)
450년 동안에 식민지화되어 흥망과 성쇠를 되풀이 한 스리랑카 불교를 되살리기 위한 운동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은 법난 극복의 경험을 살려 인도 불교의 부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지금의 인도 불교를 다시 회생시킨 일등 공신은 스리랑카 출신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ika Dharmapa?a)이다. 그가 1890년도에 창립한 대각회(大覺會, Maha?odhi society)는 지금도 스리랑카 스님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고 있다.
3) 불교청년회(YMBA)
올코트(Olcott) 대령이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불교 신문과 잡지도 발행하기도 하여 1880년에는 〈YMBA〉라는 월간지도 발행했다. 그 다음 불교를 되살리기 위해 세워진 단체도 또한 불교청년회이다. 바론 자야틸라카(Baron Jayatilaka)는 1898년도에 스리랑카 수도인 콜롬보(Colombo)를 비롯한 각 지역마다 불교청년회를 창립하여 1944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46년간 봉직을 하며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불교청년회의 본사는 콜롬보(Colombo)에 있지만 각 지역마다 지부가 있어 불교운동에 앞장서서 불교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본사에서는 불교학교를 유지하고 졸업증서(diploma)를 발행하며, 포살 법회는 물론 자주 국내와 국제 불교학자들을 초빙하여 토론을 마련하기도 한다.
4) 비구니 교단의 재설립
11세기 초엽 남인도의 촐라(Chola) 인들이 스리랑카를 침입함으로써 사찰은 폐허가 되었다. 이때 비구니 교단은 절멸되고 만다. 그리고는 그 이후로 스리랑카에서는 비구니 교단을 계속해서 복구하지 못했다.
비구 교단이 절멸될 때는 이웃 상좌부 불교국에서 이어 받아 교단을 다시 세웠지만 절멸 이후 비구니 교단이 없는 것은 태국·미얀마·캄보디아 등 다른 남방 불교국도 상황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교단이 단절될 무렵 다른 상좌부 불교국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 비구니 교단의 맥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비구니 교단의 맥을 다시 잇는 것에 관하여 스리랑카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가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96년도에 대각회의 노력에 의해 인도에서 비구니 교단을 다시 세웠다. 이는 스리랑카 불교에 있어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996년 12월 8일, 당시 대각회의 회장이었던 스리랑카의 위풀라사라(M. Vipulasa?a) 스님의 노력 끝에 인도 사라나트(Sa?a?a?h) 사원에서 비구니의 구족계를 줄 수 있게 되었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해외 여러 많은 비구들 가운데 선택한 사미니(dasa s沖la ma?ha?들 11명은 한국 비구니들과 상좌부 비구들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스리랑카의 비구니 교단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그 비구니들은 1998년 3월 12일, 1년 2개월만에 스리랑카에서 또 달리 선택된 23명의 사미니들에게 구족계를 내렸다. 그 일은 스리랑카의 불교 역사 가운데 980년 만에 일어난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5. 불교 행사(pu?a?
1) 호주(Maha Paritta)
상좌부 불교에서도 타력신앙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호주(護呪) 또는 호경(護經)이라고 하는 피릿(paritta)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정토종에서 말하는 타력신앙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이 있다.
염송 기도의 일종으로 특별한 경전을 암송하는 피릿 의식은 해탈하고자 하는 이유보다는 각종 위험이나 재난, 질병과 횡액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3개월 후의 제사, 1년 후의 제사 또는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도 진행되는 피릿 의식은 12명 이상의 스님들을 각 집으로 모시고 전날 밤 9시경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 6시쯤에 끝난다.
피릿 의식을 행하는 집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나뭇잎 등을 이용하여 집안에 의식을 진행할 새로운 장소를 만든다. 의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초대받아 온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이 참석한다. 암송하는 의식을 진행할 때 스님과 재가자들은 함께 긴 실을 잡고 있는데 의식이 끝난 후에 스님들이 그 실을 잘라서 목이나 오른팔에 매어 준다. 이 실은 삼보를 상징하여 세 줄로 되어 있는데 몸에 감고 있으면 육신을 보호하여 건강해지며 아울러 하고자 하는 일도 잘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태국, 미얀마 등 상좌부 불교국에서도 같은 의미로 피릿 의식을 행한다.
2) 보리수 신앙(Bodhi-pu?a?
타력신앙적인 의식 가운데 또 한 가지는 보리수 신앙이다. 보리수를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이루실 때 앉아 있던 성스러운 사물로 여기기 때문이다.27)
보리수 행사는 정해진 날이 없이 개개인이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의식인데 보름날에는 모든 곳에서 보리수 신앙을 행한다. 이러한 보리수 행사도 각종 위험이나 재난 질병과 액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 또는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축하하기 위해서도 보리수에 물을 붓는 의식을 행한다.
보리수로 부처님을 대신하기 때문에 보리수 앞에 차, 과일, 꽃, 향, 초 등 공양을 올리고 스님을 모시고 스님이 읽어주는 게송과 시 등을 따라하면서 1시간 또는 1시간 반 동안 기도를 올린다.
스님을 모시지 않고도 개개인이 시간 나는 대로 보리수에 와서 물을 부으며 게송을 읽는데 자녀들의 시험, 승진 등 일상에서의 여러 소원들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보리수 주변에 신도들이 없는 시간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3) 패라해라(Perahera)
이 ‘패라해라’라는 행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중심으로 하여 수백 년전부터 시작하여 내려오는 행사이기도 하고 문화재이기도 하다. 백 마리가 넘는 코끼리들에게 옷을 입혀 코끼리 등에 사리를 모시고 많은 악단과 전통 무용수들이 사람들과 함께 시내를 도는 것이다.
현재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안치되어 있는 불치사(佛齒寺)가 중부 지방 한가운데 캔디(Kandy) 시내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매년 7월 초에 시작하여 7월 보름날까지 15일에 걸쳐 행사가 진행되는데 이 행사는 가장 큰 국가적인 축제이기도 하다.
매일 밤 8시쯤에 시작하여 시내에 정해 놓은 길들을 다니며 밤 12시경에 되돌아와 끝나게 되는데 종교의 차별이 없이 온 국민들이 즐기는 한 달 동안의 국가문화재의 행사이다. 마지막 날 밤은 대통령도 나와 구경을 하는데 불치사의 사찰 관리를 맡고 있는 관료들과 지방장관, 시청장들이 그 다음날 캔디의 대통령 관저로 찾아가 이번 해에도 패라해라 축제가 잘 끝났노라고 신고해야 한다. 이것은 옛 왕조 때부터의 전통이다.
패라해라 행사를 진행했던 이유는 부처님을 존경하는 데에도 있지만, 스리랑카는 열대 지방이고 농경사회이므로 ‘비를 내려 달라’는 염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먼 옛날부터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의식(패라해라)을 행하면 비를 내려준다는 믿음과 국가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는 믿음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불교 예술은 불치사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되어 왔는데 전통 불교 음악, 춤 등 불교 예술을 살리는 행사로서도 큰 의미가 있다. 불치사의 패라해라의 형식을 빌어 수도인 콜롬보의 캘라니야(Kalaniya) 사원에서는 불교 역사상 여러 이야기를 기념하기 위해서 1월 보름에 패라해라를 연다. 또한 2월 보름에 비구 승가사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콜롬보(Colombo, Ganga?a?a) 시내에서, 삼장 사경 결집을 기념하기 위해 9월 보름에 알루위하라(Aluvihara) 사찰에서 열리는 패라해라들이 유명하다.
4) 가치나(迦?那, Kat.hina-pu?a?
7월 보름날에 비구들은 모두 우안거(雨安居: vassa)에 들어간다. 이 날 낮에 비구들이 모두 포살당(布薩堂: uposatha?a?a)에 모여 포살의 의례를 행한다.
저녁에는 마을 신도들이 사찰에 모여 앞으로 3개월 동안 우안거에 들어감을 청하기 위해 가사를 만들 옷감을 보시하며 초대한다. 초대받은 비구들 중 한 명이 법회를 열어 안거에 대해서 설법하며 정진을 다짐하는 약속을 한다.
이 기간 동안에 신도들 중에는 계를 받고 같이 수행을 하기도 한다. 또한 아침·점심으로 스님들에게 공양을 가져다 주며 저녁에는 차 공양을 한다. 안거 3개월 동안에는 비구들은 외국은 물론 타지역을 방문할 수 없다.
10월 보름이면 안거가 끝나는데 10월 보름부터 11월 보름까지 안거에 든 스님들에게 특별한 ‘가치나(kat.hina)’라는 가사를 보시하도록 한다. 이 한 달 동안의 기간을 ‘가치나 치와라 마사(kat.hina-c沖vara-ma?a)’라 한다.
이 특별한 가사는 사찰 주변 지역의 모든 신도들이 돈을 조금씩 거두어 모으고 마을의 모든 사람이 한 땀씩 바느질을 해서 단 한 벌의 가사를 만들어 단 한 명의 스님에게 보시하므로 그 의미가 깊다. 적당한 날을 선택하여 15명 정도의 외부 스님들도 초대하여 이 가사를 보시하는 의식을 진행하게 된다. 이 날 신도들이 가사를 모시고 새벽 4시부터 마을 안의 모든 길을 빠짐없이 다니면서 전통 불교 음악을 연주한다. 그때에 신도들은 자신의 집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보시를 하기도 한다. 이 가사를 마을에 돌리면 마을의 나쁜 질병들이 사라지고 큰 공덕을 얻는다고 믿는다.
가사를 마을에 돌리고 나서 사찰 안으로 모시고는 스님들에게 점심 공양을 보시하고 ‘가치나’ 가사와 여러 가지 보시물들을 스님들께 올린다. 신도들로부터 보시 받은 ‘가치나’ 가사는 주지 스님과 큰스님들이 안거에 임했던 한 스님을 선택하여 주는데 가장 입을 것이 없거나 모자라는 스님에게 돌아가게 된다. 가사를 받은 스님은 그 가사를 3개월 동안 입고 있거나 항상 함께 해야 한다. 가티나 가사와 떨어져 생활하면 안 되기 때문에 잠잘 때도 머리 옆에 두고 잔다. 그것은 온 동네 사람들의 정성으로 직접 만들어 준 깊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5) 웨사크와 포선
웨사크(Vesak)는 5월 보름을 말하고 포선(Poson)은 6월 보름을 말한다. 상좌부 불교에 있어서 5월 보름은 부처님의 탄신·성도·열반을 기념하는 날이며, 스리랑카 불교에 있어서 6월 보름은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As쳂oka) 왕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스님이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 그 두 보름날 사이의 한 달 동안에 스리랑카 곳곳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웨사크 날이 되면 전국 각 절들은 스리랑카 최대의 명절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한다. 한 달이나 진행되는 행사에는 법회는 물론 길가는 행인을 위한 보시의 집, 불교 연극이나 찬불가 공연을 한다. 또는 부처님의 《본생경》 등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회화나 전구로 등을 장식하여 아치형의 문(thoran.a)을 만들기도 한다. 가정에서도 가족의 소원이 담긴 등을 직접 만들어 걸기도 한다. 친구, 친척, 부모에게 웨사크를 축하하는 ‘웨사크 카드(Vesak Card)’를 만들어 서로 보내기도 한다.
광장에서는 큰 등을 만들어 등 경연대회도 벌이는데 이러한 행사는 각 지역의 청년불교협회에서 주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구경을 하면서 축제를 즐긴다. 그래서 ‘웨사크를 구경간다’고 말한다. 아울러 이 한 달 동안에는 헌혈을 하기도 하고 축제의 제물로 쓰여질 소를 사서 방생하는 의식도 있다.
6. 맺는 말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하여 태국, 미얀마 등 상좌부 불교 나라들의 현황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본문에서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한 것도 스리랑카에 행하고 있는 정통 불교 의식 중 몇가지만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세 나라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대다수 국민들은 상좌부 불교를 신앙하며 항상 사찰과 연관하여 살아간다. 스리랑카 불교의 특성은 교학 전통, 학문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고, 태국 불교의 특성은 계율중심주의라는 점이며, 미얀마 불교의 특징은 수행중심주의가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상좌부 불교의 수행법은 모두 팔리 삼장과 그 주석서들이라는 전통의 교학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팔리어 경전, 위빠사나 수행 방법, 보시와 공덕, 호주경, 포살, 가티나 행사, 웨사크 기념 행사 등은 상좌부 불교의 전통과 아울러 공통점을 보여준다. 북방의 불교학자들이나 또 다른 국제적인 학자들이 남방 상좌부 불교를 ‘지구상에 살아 있는 불교’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상좌부 불교에서 승단이라는 교단의 강한 힘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난다라타나
스리랑카 씨얌종파(Siam Nikaya)승려. 스리랑카 승가불교대학교 졸업.현재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상좌부 불교의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 (출처 : 불교평론 13호)
김열권(vipasana@hanmail.net )
::::: 목 차 :::::
1. 들어가는 말
2. 태국 불교의 수행처와 스승들
3. 스리랑카 불교의 수행처와 스승들
4. 미얀마 불교의 수행처와 스승들
5.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지 1600여 년이 되지만 부처님의 깨달음과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한국불교는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왔고 지금도 선방 수행 체계의 주류나 강원의 교과 과정이 중국 영향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 교통의 발달과 국제 교류가 불교 쪽에서도 이루어지면서 동남아, 티베트 등으로 유학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 불교의 정체성과 장·단점을 재조명하여 부처님 당시의 근본 불교 쪽으로 수행과 교학을 실천,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흔히 불교를 소승불교, 대승불교 혹은 남방, 북방 불교로 분류하고 있으나, 불교 역사상 소승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승불교의 일방적인 폄하에서 비롯된 오류였다. 필자 역시 남방에서 승려 생활을 해 보았으나 남방에서는 북방 불교가 힌두교화되었다고 하면서 북방 불교 승려들의 신분조차도 승려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직접 보았다. 양쪽 다 편견 속에서 자신들의 입장만 고수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음은 부처님의 정확한 가르침과 수행법을 이해하고 실천할 때 가능하다. 필자 역시 교학 공부의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화두 수행을 10년 정도 하고 부처님 당시 불교의 원형에 비교적 가깝다고 여겨지는 수행법을 찾고자 1989년 미얀마로 출가했다. 그 후 계속 위빠사나 수행을 해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것은 남방, 북방 불교의 차이점은 팔리어 경전인 니까야와 산스끄리트인 아함경, 대승 경전을 보는 아비달마 논서에 있는 것이다. 남·북방 불교의 상호간의 오해를 불식하고 좀더 깊이 이해하여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여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아비달마 교학의 비교 연구와 근본 경전인 니끼야와 아함경에 바탕을 둔 수행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깨달은 아라한들의 체험에서는 남·북방이 없고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만 편견에 사로잡힌 일방적인 시작과 중간 단계의 수행 체험에서 오는 섣부른 결론은 근본 불법에서 멀어져 집단적 편견과 집착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수행법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방 불교를 보다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남방의 주요 불교 국가인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불교의 알려진 수행처와 그 수행처의 스승들 및 가르침과 수행의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참고로 남방 불교의 자료는 가산불교재단에서 발간된 《남방 상좌 불교 승가공동체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 중 일중 스님과 정원 스님의 논문, 스리랑카에서 교학과 수행을 수년간 공부한 아눌라 스님의 자료와 필자가 번역한 《위빠사나 열두 선사》에서 주로 발췌했다.
2. 태국 불교의 수행처와 스승들
필자가 태국에서 수행한 것은 1989년과 1990년 사이 촌부리에서였다. 처음 태국에 갔을 때 통역을 해준, 태국에서 수년 동안 머문 구로담모라는 인도 승려가 계율의 중요성을 얘기해 주었다. “미국에서 온 흑인 한 명이 태국에서 비구가 되었는데 어느 날 옛날 여자 친구가 찾아왔다.
그 여자 친구와 파타야 해변을 거닐고 있었는데 그때 태국 시민 한 분이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일간 신문에 공개했다. 과연 스님이 이렇게 행동을 해도 되는가? 결국 그 흑인 스님은 비구 옷을 벗고 일반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스님이 정오가 넘어서 시내에서 식사를 하면 일반인이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이 그 스님을 절로 돌려보낸다. 계율을 파하려면 일반인으로 돌아가서 파하고 승복을 입고 있는 한 부처님의 계율과 수행을 엄수해야 한다는 것이 태국 승려들과 시민들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남방 불교의 모든 수행은 팔리어 경전, 아비달마, 《청정도론》이 중심이다. 주로 호흡 관찰법인 아나파아나 삿띠를 중심으로 하면서 이를 응용한 수행과 사마타 수행이 가미된 수행법으로 나눌 수 있다. 이를 지역 별로 살펴보겠다.
왓 파 반타트(Wat Pah Ban Thad)
태국어로 왓은 사원이라는 뜻이다. 아짠문(1870∼1950)의 제자인 아짠 마하부와(1914∼ )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아짠문은 두타행이라고 할 수 있는 숲속 수행을 부활한 전설적인 20세기 최고의 선사이다.
그는 숲속 수행을 통하여 아라한과를 성취하여 숙명통과 천안통까지 겸하여 인간 세계는 물론 천인들까지 제도하였다. 그의 수행의 특징은 아나파아나 삿띠를 중심으로 수행하는 것인데 초보자가 삼매에 들기 어려울 때는 “붓도(Buddaho)”라는 염불을 겸해서 관찰하도록 한다. 이것은 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수행법 중 하나이다. 향후 우리 나라 염불선에 이 수행법이 도입되면 많은 재가 신도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본다.
아짠 마하부와는 염불식 아나파아나 삿띠와 염불식 경행(Walking meditation) 외에 부정관, 시체관도 예비 수행으로 다루고 있다. 계·정·혜를 강조하고, 지혜 수행은 전통적인 오온에 대한 관찰을 중심으로 한다. 아짠 마하부와는 사마타 선정과 위빠사나 수행에 정통하고 있으며 그의 가풍은 엄격하고 맹렬하다. 현재는 연세가 많아 외국인도 친견하기가 어렵다.
왓 농파퐁 (Wat Nong Pah Pong)
1954년 아짠 차에 의해 숲속에 설립된 사원이다. 30개 이상의 말사가 있다. 아짠 차는 태국의 여러 선지식과 아짠문의 지도를 받았으며 1992년 입멸하였다. 그는 자연스러운 수행을 강조하며 1일 1식을 공양하게 했다. 망상이 있으면 ‘붓도’, ‘담모’, ‘상고’나 혹은 ‘붓도’를 염송하면서 관찰하게 한다.
일단 심신이 고요해지면 호흡, 몸, 마음의 흐름을 관찰하게 한다. 매일 매일 수행 점검은 하지 않고 법문을 통하여 수행을 지시하고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지 상담에 응한다. 특별한 테크닉은 강조하지 않고 “모든 수행은 단지 마음의 균형과 무집착 그리고 비이기성을 계발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보통 때 20∼30명 정도가 수행하며 우안거 중에는 100여 명 정도의 승려가 수행한다.
왓 파나나차(Wat Pah Nanacha, International Forest Monastery)
아짠 차에 의해 1975년 설립된 외국인을 위한 선원이다. 비구 6명, 사미 6명, 10여명 정도의 재가 신도가 머문다. 아짠 차의 가르침 중심으로 아나파아나 삿띠(호흡 관찰법)를 수행한다. 하루에 일식만 공양하고 매일 아침 태국어로 1시간 정도 설법한다.
왓 람펑(Wat Ram Poeng, Northern Vipassana Center)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을 실천한다. 아짠 통(1924∼)에 의해 1975년에 설립되었다. 말사가 20여 개 된다. 그는 마하시로부터 직접 2년간 지도를 받았다. 매일 매일 수행자들은 몇몇 지도 법사들에게 점검을 받는다. 처음에 온 수행자는 26일간 기본 코스를 거쳐야 한다. 마지막 3일은 주야로 용맹 정진한다. 우안거 때는 150명 정도의 승려가 있으며 보통 때는 승려 70명, 외국인 20명, 여성 출가 수행자(매치) 20∼30명 정도이다.
수완 목(Suan Mokkh)
이 사원은 1932년 아짠 붓다다사(1906∼1993)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박학다식한 위대한 학자였다. 그는 의식 중심의 태국 불교를 교리와 수행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는 수많은 달마에 관한 저술과 훌륭하면서도 소박한 법문을 통하여, 태국의 불교 수준을 단순한 의식(儀式) 수준에서 어떻게 평화가 무집착으로부터 오는가 하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
아짠 붓다다사는 자연스러운 선정과 지혜의 길을 강조한다. 그는 “자연스러운 선정과 지혜의 길을 요약하면, 아무것도 가질 만하고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진리를 매일 그리고 온종일 생활 가운데서 실증해 나감으로써 열반과 자유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자유를 체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정화하고 모범적인 인격을 계발하기 위해 분투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정화로부터 그 자신 내부의 정신적 기쁨을 일하면서 여가를 즐기는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내관으로부터 참으로 가질 만한 것은 없고 될 만한 것은 없다는 지혜가 일어나고, 마음은 지금까지 붙잡아 왔고 매달려 왔던 대상에 대한 모든 욕망을 버린다. 이미 어디에도 머무를 곳이 없어 고통은 줄어들고 고통을 제거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이것이 그 보답이다. 그것은 우리들 중 누구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 있다. 집착을 초월하고 어떠한 경험이나 대상을 ‘나’ 혹은 ‘나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초월한 내적 평화가 최고의 청정심이고, 이것이 진정한 붓다의 자유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호흡 출입관인 아나파아나 삿띠의 교재(현재에 필자에 의해 편역 중임)은 이 분야의 책 중 가장 상세하고 광범위하게 다루어져 있다. 특히 그는 남방 불교의 교과서격인 《청정도론》도 비판적으로 보고 삼세양중인과의 12연기설도 아트만 사상이 깔린 것으로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다.
수완 목에서 1.5Km 떨어진 국제 수행림(International Dhamma Hermi-Tage)이 있는데 이곳에는 10일간의 집중 코스가 있다. 수행법은 아나파아나 삿띠가 중심이다. 평소에는 50여 명의 승려, 10여 명의 외국인 수행자들이 있다. 수안 목의 말사격인 왓 우몽(Wat U Mong)에서는 아짠 붓다다사의 아나파아나 삿띠를 기본으로 수행하지만 마하시 방법의 위빠사나나 다른 수행법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왓 마하타트(Wat Maha That)
방콕 시내에 있는 이 사원은 18세기에 창설된 사원으로 불교의 중요한 센터로서 기능해 온 사원이다. 수행법은 마하시 위빠사나 방법으로 위빠사나 지혜의 16단계에 대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곳에 한 달 머물면서 수행할 수도 있고 출퇴근하면서 지도받을 수도 있다.
왓 팍남(Wat Pak Nam)
이곳에는 200여 명의 승려가 거주하고 외국인도 10여 명 살면서 팔리어를 공부하기도 한다. 이곳의 수행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결합된 것이다. 프라 몽콜 剃무니(1884∼1959) 원장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삼마 아라한(Samma Arahan)’이라는 만트라를 마음속으로 염하면서 ①수정을 사용한 광명편(Aloka-kasina)을 집중 대상으로 사용한다. ②그 다음은 북부 중심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③다음에는 18단계의 법신관이다. 이 수행법이 사념처와 결합되어 수행이 향상됨에 따라 법신으로 형상화된다는 독특한 수행법이다. 광명편이 몸 중심에서 둥근 빛이 폭발하듯이 생겨나면 비로소 담마카야 본 수행에 들어선다. 이것이 1단계이고 1단계가 사라진 후 몸의 중심에서 18단계의 신체가 순서대로 나타난다. 18단계의 신체를 관찰하면서 아라한이 된다.
위潽아좀(Viwea Asom Vipassana Metitation Center)
방콕에서 60Km 떨어진 촌부리라는 작은 도시에 위치한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 센터의 태국 지부이다. 필자는 이곳에서 7개월간 원장인 아짠아삽하(AjahanAsabha, 1910∼ )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1953년 미얀마 정부에 태국 정부의 요청으로 파견된 두 사람의 마하시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이곳에서 40여 년간 10만 명의 수행자를 지도했다. 한국 승려들도 이 곳에서 몇 분 수행하였다. 치앙마이의 아짠 통, 왓 마하타트의 아짠타르싯디무디도 그의 수행지도를 받았다. 특히 아짠 아삽하는 마하시의 수행법을 원형 그대로 전수한다. 다른 마하시 제자들은 조금씩 변형해서 가르친다고 지적했다. 이곳에는 3∼4명의 지도 법사가 상주하고 승려는 보통 60여 명, 재가자는 100명 정도, 외국인은 10∼20명 정도 수행하고 있다.
왓 사이감(Wat Sai Ngam)
방콕에서 북서 방면으로 떨어진 수행 센터로 1970년대 아짠 담마다로(1914∼ )에 의해 창설되었다.
아짠 담마다로는 그의 명상에서 감각(혹은 감정)에 대한 마음집중을 강조한다. 변화하고 있는 감각에 대해 끊임없이 마음집중함으로써 우리들의 모든 체험이 순간순간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형상(色)과 감각은 모든 오온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아짠 담마다로는 몸과 느낌에 심지어는 내적 진리를 체험하는 직접적인 수단으로서 미묘한 마음의 변화에서 인식되어지는 감각에 대한 순간순간의 알아차림을 유지하도록 한다.
명상의 계발을 설명하는 데 있어 그는 감각에 대한 마음집중이 어떻게 해서 심장 근저에 있는 모든 감각을 바로 경험하게끔 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모든 경험 심지어 마음까지도, 심장 근저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감각으로서 명백하게 인식될 때, 우리들은 무상·고·무아를 본다. 이것으로 해서 우리들은 가장 심오한 진리, 고의 멸, 열반의 체험에 도달한다3)고 아짠 담마다로는 가르친다.
아짠 담마다로가 가르치는 수행법은 다음과 같다.
손바닥 중앙에 마음을 집중하여 움직이면서 가슴으로 관찰한다. 경행도 역시 발바닥의 느낌을 가슴으로 관찰한다. 남방에서는 마음이 가슴속에 머문다고 보고 있으므로 모든 6근, 6식의 느낌을 가슴의 마음과 동시에 관찰한다. 특히 손바닥, 발바닥을 관찰할 때에는 온몸에 기(氣)가 돌아가므로 기 수련을 많이 하는 우리 나라에 이 수행법이 각광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아짠 담마다로의 제자 15명이 이 수행 센터에서 지도하고 있으며 승려가 120명, 여성출가자인 매치가 120명, 일반 신도가 50명 정도 수행하고 있다.
왓 스라케트
아짠 나에브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방콕에 위치하고 있다. 그녀는 35세 때 출가하여 불교 심리학과 위빠사나를 수행한 후 12년 후에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아짠 나에브는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행동에서 고통의 원인과 결과를 보게 하는 단순한 접근법을 사용한다. 특히 자세의 움직임, 몸의 동작에서 고통의 원인을 보게 한다. 모든 움직이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부터 관찰하게 한다. 이 과정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고통을 종식시키고 붓다의 행복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아짠 나에브는 달마에 관한 중요한 사항들을 체계적으로 언급하였는데, 수행하기 전에 올바른 개념적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그녀는 지혜 명상과 선정 명상의 구분을 강조한다. 선정과 특별한 수행에 대한 어떠한 집착이라도 지혜 계발에 방해가 되고, 지혜는 현재 순간의 마음과 몸을 직시함으로써 온다고 가르친다. 지혜 수련에 있어서 지혜가 일어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직시하는 것을 통해서만 일어난다고 그녀는 강조한다.아짠 나에브가 설명하는 위빠사나는 《청정도론》의 16단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왓 수콩타와즈
아짠 줌니엔이 원장이다. 그는 6세 때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갖가지 여러 수행법들을 편력했다. 특히 사람들의 개성에 따라 다르게 수행법을 지도하여 결국엔 무상·고·무아의 삼법인을 보게 하여 해탈로 나아가게 한다. 아짠 줌니엔은 많은 수행법을 근기에 맞추어 가르치는 완전히 개방적인 스승이다.
그는 여러 다양한 수행법을 익혔으며, 한 방법만 고수하기보다는 제자들의 필요성이나 개성 혹은 특별히 선호하는 것에 따라 다양한 수행법을 제시한다는 것이 그의 지도의 특징이다. 그러나 어떤 테크닉을 계발하더라도, 결국은 제자들에게 몸과 마음의 본성을 무상·고·무아로 보게 하는 지혜 수련으로 귀일하도록 이끈다.
“수행자가 법에 향상하고 못하고는 자신에 책임이 있다. 우리들은 비록 특별한 명상 테크닉을 당분간 이용하지만 수행은 우리들 모두에게 전 인생의 과정이며, 수행은 모든 고통을 종식시키고 궁극의 평화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아짠 줌니엔은 자비관을 예비 수행으로 하면서 무집착을 강조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아짠 담마다로의 수행법을 이용한다. 보통 100∼200명 정도의 승려와 10여 명 정도의 서구인들이 있다.
이상에서 태국의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태국에서의 불교 수행은 ① 아짠 붓다다사와 같은 아나파아나 삿띠 중심의 전통 수행법과 ② 아짠 문의 염불식 위빠사나, 담마카야 수행의 광명편, 아짠 담마다로의 기 수행과 관련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결합된 수행 ③ 미얀마에서 들어온 마하시 위빠사나 등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3. 스리랑카 불교의 수행처와 스승들
스리랑카는 필자가 가보지 않아 일중 스님의 연구서와 아눌라 비구니 스님의 자료에 의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스리랑카 불교가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경위와 수행처의 구분 등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한 다음 수행처와 스승들에 대해서 소개하기로 한다.
1) 스리랑카 불교에서의 수행의 일반 양상
수행 부흥 운동
2,300여 년의 불교사를 가진 스리랑카에서 면면히 내려오는 수행 전통의 맥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원래 선교(禪敎) 일치였으나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교학 전통 위주로 내려왔다. 마지막 아라한으로 전해오는 말리야데와 스님은 기원전 2세기경 사람이다. 그 이후 대석학이라고 불리우는 학승들은 역사 속에 여러 번 등장하지만 아라한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학이 삼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수행은 계·정·혜 삼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스리랑카 승가는 400여 년 동안 서양의 식민지 세력 아래에서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위빠사나 운동은 1950년에 불자 지식층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랑카 위빠사나 수행회’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마하시 사야도에게 지도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 4명이 콜롬보에 파견되면서 현대적인 수행 체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법이 소개되면서 초기 경전에 근거를 둔, 전통을 주장하는 신전통주의자와 개혁주의자들의 두 그룹으로 갈라졌다.
개혁주의자의 5가지 견해는 ①현 시대에도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다. ②일반 신도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 ③교학에 대한 이론을 공부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다. ④아라한이 되기 위해 반드시 승려가 될 필요는 없다. ⑤사마타 수행을 무시하고 위빠사나만 강조하면서 코끝이 아닌 배의 일어남, 사라짐의 현상을 관찰하라는 마하시 수행법은 대승이나 탄트라 수행법이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아니다.
그러나 이 수행법으로도 궁극의 목표에 도달할 수는 있다(마얀마에서의 마하시 방법이 전통이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마하시 선사는 직접 경전에 근거하여 책까지 저술하여 논박하였다). 개혁주의자와 신전통주의자 간의 논쟁 결과로 스리랑카에는 새로운 아란냐와 명상 센터가 생겨났다.
승가의 수행법
승가에서는 수행 방법의 근거를 다음 네 가지에 두고 있다
① 경전과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에 의한 방법
② 전적으로 경전에만 의존한 방법
③ 미얀마의 마하시 전통을 따르는 방법
④ 위의 세 가지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방법
숲속에 거주하는 아란냐 수행승들은 근본 불교의 가장 전통적인 아나파아나 삿띠(호흡관)와 삿띠파타나(사념처), 붓다의 공덕을 기리는 염불 수행법인 붓다누삿띠, 자비관, 부정관, 시체관, 카시나관 등을 실천 수행한다.
아란냐 (숲속 수행처)와 수행 센터
아란냐 수행승들은 숲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수행으로 보낸다. 계율에 철저하며 하루 한끼만 먹고 돈을 만지거나 소유하지 않는다. 일상 생활에도 침대, 방석, 가사, 바루, 물주전자, 책 몇 권이 전부이며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산다. 수행의 기준은 경·율·논에 두고 있다.
아란냐 명상 센터는 30여 군데 있다. 사원이 8천여 개가 되는데 그 중 170여 곳이 아란냐이다. 3만여 명의 승려 중 1000여 명이 아란냐 수행승이다.
2)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
삼스타아란냐(Sri Kalyani Yogasrama Samsthava)
지나왕사 스님이 1950년에 설립했다. 18세 이상 소년들에 한하여 승려가 되며 1년 동안 흰색을 입고 수행한 후 희망자에 한하여 아란냐 수행승으로 적격자라고 판단될 때 계를 수여한다. 지부가 96개가 된다. 그 중 니말라와 아란냐는 남부 해안에 바위 동굴이나 바위에 의지하여 꾸띠를 갖추고 있다.
16개의 꾸띠(원두막같은 방)가 있으며 외국 승려가 이 곳에 머물고자 한다면 일정 기간 테스트를 받은 후 가능하다. 또한 무문관과 같은 미트리갈라 아란냐도 있다. 이곳은 ‘열반 아니면 죽음’만 있을 뿐, 한 번 이곳에 들어오면 죽기 전까지 수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한 번 이 아란냐에 들어오면 과위를 성취하기 전에는 아란냐를 떠나지 않는다.
② 재가든 승려든 아란냐 밖의 사람들과 말하지 않는다.
③ 불교의 제반 문제에 대해 기사나 편지를 쓰지 않는다.
④ 숨이 다할 때까지 수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⑤ 해탈을 하기 전에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아일랜드 헐미티지(Island Hermitage)
고요한 호수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15개의 꾸띠가 있다. 1911년 유명한 독일 비구승 나먀띨로까 스님이 설립했다. 그의 제자 냐냐몰리, 냐냐뽀니까 스님이 여기에서 공부했다. 이들은 팔리어 경전을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하여 세계 불교 포교에 커다란 위업을 남겼다. 이 수행 센터에서 수행하려면 법랍이 10년 이상 되거나 스승 밑에서 5년 이상 수행 지도를 받은 비구승이어야 한다.
와 투 루윌라 아란냐(Waturuyila Aranna)
1954년 와투루왈라라 스리 냐나난다 스님이 창건했다. 현재 50여 명의 스님이 수행하고 있으며 여러 개의 분원을 가지고 있다. 그 분원 중 살갈타 아란냐는 하루 일종식하며 자유롭게 수행한다.
칸두보다 명상 센터(Kanduboda Meditation Center)
1956년 마히사 사야도의 제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12개의 분원이 있다. 20여 명의 승려들과 사부 대중이 함께 수행한다. 60∼70명 정도가 상주한다.
닐람베 명상 센터(Nillambe Meditation Center)
1979년 재가 불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대승불교의 참선, 요가, 힌두 수행법도 근기에 따라 실천하도록 인정하고 있다. 외국인 수행승들이 보통 35명 정도 머물고 있으며 수행 시간과 수행법이 자유로운 것이 특징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국내에서 스리랑카 하면 교학만 발달된 불교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수행도 많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끝으로 현재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두 분의 스님을 소개하면서 개략적이나마 글을 맺고저 한다.
비구 보리 스님
1944년 뉴욕에서 태어나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72년 스리랑카에 와서 비구가 되었다. 테라바다 불교책의 저자이며 경과 주석서를 포함한 많은 책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1984년 이래로 BPS(Buddhist Publication Society)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수행법은 경전에 근거한 정통 위빠사나를 수행하고 있으며 어떤 수행법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수행의 목적을 선정과 탐 진 치를 제거하는 데 두고 있다.
냐나난다 스님
스리랑카의 페타데니하 대학에서 빨리어를 가르치는 아주 명망 높은 교수였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아란냐로 돌아가 15년 이상 세상을 멀리하고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마음의 마술쇼(The magic of the mind)》 《초기 불교사상의 개념과 실제》 등이 있다.
하루 일종식을 하며 동굴에서 머물렀다. 그의 수행법에서는 자비관, 죽음관, 부정관, 염불관(Buddahanussati)을 먼저 한 후에 위빠사나 본 수행에 들어간다. 위빠사나 수행은 마하시의 수행법처럼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두 번 정도 알아차리고는 1차 명상 주제인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오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4. 미얀마 불교의 수행처와 스승들
필자가 미얀마에 간 것은 1989년 4월이었다. 도착 후 비구계를 받고 탁발을 나갔는데 3살 정도밖에 안 되는 아이들이 스님이 지나가면 합장을 한다. 그리고 부모님들과 함께 매일 아침 공양을 스님께 올린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자비 교육이 실시되고 방학이면 초등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머리를 깎고 사미가 되어 절에서 경전을 공부하고 수행을 시작한다. 승복을 입고 밖에 나가면 신도들이 땅바닥에 엎드려 그대로 삼배를 올린다. 스님들은 매일 아침 비구계 250계를 외우면서 일과를 시작하는 분도 있고 사소한 계율을 파하면 선배 스님에게 참회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들은 삶 자체가 하나의 불교 수행이다.
미얀마에는 다양한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수행법이 있다. 수행법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겠다. 미얀마의 대표적인 수행 체계는 데이리 사야도의 수행법,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법 그리고 기타 수행 선원의 그것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마하시 위빠사나 선원(Mahasi Vipassana Yeiktha Meditation Center)
마하시 사야도는 1904년에 태어나 6세 때부터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비구가 된 후에는 교학에 한계점을 느껴 밍군 사야도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28세 때(1932년) 4개월간 용맹 정진을 했다. 1941년에는 법사과정 시험을 통과한 후 1949년 우누 수상의 부탁을 받고 지금의 마하시 선원으로 오게 되었다. 현재는 마하시 분원만 해도 미얀마에는 400개가 넘으며 이곳을 거쳐간 수행자만 해도 백만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의 방법은 전통적인 아나파아나 삿띠(호흡관)가 코끝을 관찰하는데 반해 좌선시에는 배의 움직임을 주로 관찰하고 걷는 수행인 경행을 병행한다는 특징이 있다.
기타 일반 생활 속에서 행동과 동작 속에서 지, 수, 화, 풍의 4대를 관찰하는 것을 위주로 수행한다. 특히 1주일에 한 번씩 큰스님이 설법하시고 매일 1∼2일에 한 번씩 수행 상태를 점검하는 면담은 단 시일내에 빠른 효과를 나타낸다. 필자도 그곳에서 통역도 해보고 수행을 해보았지만 한국에서 혼자서 수행할 때보다 휠씬 효과가 좋았다. 그곳에서 수년동안 통역을 한 분들의 공통적인 결론은 혼자서 10년 수행하는 것보다 이곳에서 지도를 받으면서 수행하는 1년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하시 선원에서는 노스님들이 어린 사미나 젊은 비구들을 직접 지도하고 1년에 한번씩 각 분원의 지도 스님들이 모여서 효과적인 가르침과 수행에 도움이 되는 방법들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 그 결과 본인이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그곳의 지도를 받는 대로 수행하는 한 매일 매일 수행의 진전을 확인할 수 있다.
《대념처경》에 의한 4념처를 대상으로 한 위빠사나로 하루 16시간 동안 좌선과 경행을 번갈아 하며 계속 수련한다. 마음집중에 대한 마하시의 접근법은 어느 한 가지 대상에만 몰두하는 사마타 계발은 없고 처음부터 지혜 수련인 위빠사나로 시작하여 심도있게 계발한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의 순간순간 변화의 특성을 알아차리게 한다. 순간순간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단순히 보다 깊게 보다 명확하게, 있는 그대로 관찰하였을 때 수행은 깊어지고 지혜는 가장 깊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계발된다. 제일 먼저 마음을 배에 집중하여 배의 수축과 팽창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배가 팽창될 때 움직임이 일어남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배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으로 생긴 육체적 감각을 자각하는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현재에 머물지 않고 과거, 미래를 왔다갔다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관찰해야 하며, 그럴 때 무상·고·무아의 진실을 보게 되며 정신과 육체의 자연적인 과정을 수행자 스스로 체험하도록 이끄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날마다 법문과 점검(인터뷰)을 통해 개인 개인의 수행력을 바르게 잡아 주는 것도 큰 특징이다.
여름 방학 때는 초등하교 학생들이 1,000여 명 이상씩 이곳에 와서 사미계를 받고 수행과 이론 공부를 배운다. 보통 때도 미얀마 승려가 150명 이상, 재가 신자가 250명, 외국인 수행자가 30여 명 정도이다. 이 선원은 3,000여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
철저히 오후 불식을 지키며, 하루에 3∼5시간의 수면 이외에는 하루 종일 수행만 해야 하고, 대화를 하다가 몇 번 지적당하면 퇴출당한다. 양곤에도 마하시 선사의 제자인 우판디타 선사의 판디타라마, 우자나카 선사의 참매이 선원, 쿤달라비왐사의 삿담마란시 수행 센터 등이 있다.
한 분의 위대한 선사가 출현함으로써 그 영향이 미얀마 전역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에 얼마나 거대하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를 마하시 선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쉐우민 위빠사나 센터(Shwe Oomin Dhamma Sukha Tawya)
양곤에 위치한 이 센터는 마음 관찰 위주로 수행한다. 마하시 제자라고도 전해지는 쉐우민은 연세가 93세나 된다.
모든 행동과 좌선할 때에도 가슴에서 느끼는 마음의 상태를 주로 관찰하므로 향후 우리 나라의 ‘이뭣고’ 화두와 상호 보완한다면 훌륭한 수행법이 되리라 본다. 특히 무엇을 하든 평등심을 유지하면서 욕망과 성냄을 제거하게 한다. 지금 현재 한국인 수행자가 30여 명이 넘고 지도는 쉐우민 사야도의 제자인 중국인 지도 스님이 맡고 있다. 새로운 건물을 증축하여 많은 사람들이 수행하고 있다. 한국의 청현 비구니 스님이 통역하므로 쉽게 수행할 수 있는 곳이다.
순룬 불교 수행 센터(Sunlungu Buddhist Meditation Center)
순룬 사야도(1878∼1952)는 미얀마 밍양 근처에 있는 순룬 마을의 동굴 사원 출신이다. 나이 30에 직장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업에 종사하다가 재산이 갑자기 증식되었다. 미얀마에는 갑자기 재산이 늘어나면 죽게 된다는 전설이 있어 그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던 중 한 스님을 만나 아나파아나 삿띠(호흡관)를 배워 농사를 지으면서 아나함과를 성취했다. 1920년 중반 그의 부인을 설득하여 스님이 되어 1개월 만에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모두 4개월 만에 아라한과를 실현한 것이다.
특히 그의 제자 냥룬 사야도는 7일 만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불교 이론에는 무지하지만 그가 얻은 체험은 어떠한 불교학자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게 했다. 랭군에 4곳, 전국에 100개 이상의 지부가 있다. 특히 수행 전에 1시간 정도 격렬한 ‘들’, ‘토’ 호흡을 한 후에 3시간 이상 움직이지 않고 좌선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좌선 시에는 주로 감각을 관찰하는데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계속 몸의 고통이나 호흡의 감각을 관찰한다.
순룬 사야도의 명상 지도자들은 다른 수련법들도 가능하다고 인정은 하지만 그들의 방법이 가장 명쾌하고 단도직입적인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들은 아짠 차와 아짠 붓다다사의 자연스러운 방법은 너무 느리고 간접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하시 사야도와 타웅푸루 사야도와 같은 기법은 직접적인 지혜 계발이 아닌 개념을 통한 집중 계발이라고 비판한다.
순룬 수련의 열쇠는 감각을 직시하는 데에 집중하는 강렬한 노력에 있다. 고통과 산만함을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전심전력하는 것이 순룬 사야도의 방법이다. 강한 호흡에 대한 집중력과 감각은 수행자들을 산만하게 하는 많은 장애들을 쉽게 극복하게 한다. 순룬 수행법은 혼침의 상태에 있는 마음을 맑게 깨우고 수행자를 맑고 집중된 상태로 이끌어 준다는 특징이 있다.
현재 중부 미양잔의 순룬 센터에는 순룬 사야도의 시신이 아무런 화학적 처리도 하지 않은 채 50여 년 동안 안치되어 있다. 이것은 아라한 과위와 관계없이 독특한 호흡법에 있다고 한다. 필자도 회원들에게 이 호흡을 수련한 후에 위빠사나를 수행하게 하니까 쉽게 망상과 졸음이 극복되어 집중이 잘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 따라 위빠사나도 사마타의 예비 수행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우바킨 국제 수행 센터(International Meditation Center)
우바킨(1899∼1971)은 정부관직에 있던 40세에 수행을 시작하였다. 이곳은 재가자를 위한 수행 센터로 승려들은 이곳에서 수행을 할 수 없고 재가자만 수행한다. 그의 스승 역시 재가자인 사야 테토지(Saya Thet Gyi) 밑에서 피나는 수련을 하였다. 이론보다는 직접적인 체험을 강조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몸 전체의 감각 위주로 관찰한다. 처음에는 아나파아나 삿띠를 통해 호흡으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 다음에는 몸 전체의 감각 변화를 관찰하고 나중에는 몸의 미립자인 까라파를 관찰하여 몸과 마음에서 무상·고·무아를 느끼게 하는 수행법이다. 하루에 8시간 좌선을 기준으로 한 번의 좌선 시간은 초보자는 1시간, 고참자는 2∼3시간씩 수행한다. 10일 코스가 기본이다.
마얀마에는 지부가 없고 영국을 중심으로 15개의 지부가 있다. 인도에 있는 유명한 고엔카가 우바킨의 제자이다. 고엔카(1924∼ )는 1955년 우바킨을 만난 후 14년간 수행하였으며 1969년 인도 봄베이에서 위빠사나 센터를 설립하여 세계 각지에 많은 지부를 두고 있으며 지도자만 해도 250명에 이르고 있다.
모곡 수행 센터(Mogok Meditation Center)
모곡(1899∼1962)은 레디 사야도의 제자로 아미달마 교수로서 30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자신이 가축을 돌보지만 가축들이 만드는 우유는 맛볼 수 없는 목동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교수직을 버리고 수행에 맹렬히 몰두했다. 그가 주장하는 수행법의 특징은 우선 12연기와 오온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하게 한 다음 수행으로 그 과정을 체험하게 하는 데 있다.
모곡 수행 센터는 모곡 사야도가 입적한 후에 그의 제자에 의해 설립되었고 7명의 재가 신자에 의해 운영된다. 양곤에 10개, 전국에 228개의 지부가 있다. 정기적인 10일 코스가 있으며 매 코스에 100명 정도가 참석한다. 5시간의 법문과 8시간의 수행 시간으로 짜여져 있다.
기타 수행 센터
지면 관계상 수행 내용 위주로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타웅푸르 사야도 명상 센터는 부정관을 중심으로 몸의 32부분을 관찰한다. 몸에 대한 마음 챙김을 맛보지 못한 수행자는 죽음을 초월하지 못한다고 강조하면서 몸의 32개 부분을 6그룹으로 나누어 165일 코스를 수련한다.
짜우신 명상 센터(Kyauk Sin Tawya Forest Monastery)에서는 두타행을 수련한다. 탁발시에 여자 신도 손을 슬쩍 스치기만 해도 6일간 94가지 벌칙을 받으면서 제일 나쁜 곳에 있어야 한다. 외부 챵 센터에서는 하루종일 호흡만 관찰하게 한다. 파욱 명상 센터는 필자의 《보면 사라진다》에 소개한 수행법이다. 40여 가지의 사마타 수행이 있고 4선정 중심으로 몸에서 까라파를 관찰하여 16단계를 거치게 하는 수행법이다. 현재 서구인들이 많이 찾아간다. 이상 개략적으로 살펴 본 바와 같이 미얀마에는 전통적인 수행법인 테이디 사야도에 의한 아나파아나 삿띠와 마하시 사야도의 동작 관찰로 대별될 수 있다. 기타 파욱 사야도 등 다양한 수행법이 있다.
5. 맺는 말
“중생의 정화(淨化, 心淸淨)를 위한 근심과 슬픔(苦)을 극복하기 위한, 진리의 길을 건너기 위한,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념처(위빠사나)이니라.”라고 붓다는 《대념처경》에서 설파하고 있다.
경전상의 해석은 지역에 따라, 종파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수행법만큼은 남방이든 북방이든, 한결같이 사념처 위빠사나가 붓다가 발견한 유일한 수행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실제로 분별과 집착 없이 수행해 보면 똑같은 체험과 경지에 도달한다. 문제는 끝까지 도달하지 않고 중간 단계의 과정에 집착해 있는 것이라고 본다. 고해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에겐 뗏목과 나침반이 필요하다.
도달한 후의 일은 미래의 일이다. 교리의 논쟁이나 추론에 앞서 가장 절실한 것은 체험에서 얻은 해탈 지혜이다. 달마(達磨)도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법을 총섭한다고 했다. 우리가 정확한 수행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전심전력으로 실천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탐·진·치의 화살을 뽑고, 마음을 정화하고, 모든 정신적 갈등과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철견할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열반을 증득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원고에서 남방 불교 3개국의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을 소개하였는데, 각 수행처에서 실천되고 스승들이 가르친 방법은 서로 다르게 보이거나 심지어는 상반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탐·진·치의 삼독을 제거하고 그대로 여실히 몸과 마음을 철견하는 것으로 이끈다는 점이다.
김열권
고려대 경영대학원 졸업. 1990년 미얀마 마하시 명상 수도원으로 출가, 한국인 최초로 미얀마에서 비구계 받음. 태국, 미얀마, 말레이시아의 수도원에서 위빠사나 수행. 현재 위빠사나 선원,불교방송국 등에서 위빠사나 지도.편저로 <위빠사나 1,2>역저로 <고요한 숲속의 연못><위빠사나 열두선사>등이 있다.
Ⅲ. 상좌부불교의 소의경전
팔리문헌의 조직(이마성)
삼장(三藏)의 성립과 그 정통성(팔리문헌연구소 편)
삼장(三藏 Tipitaka) - 李摩聖 지음
팔리문헌의 조직(이마성 지음)
한자문화권에서 팔리어를 표기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팔리어를 원음 그대로 음사(音寫)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팔리어를 한자로 의역(意譯)하는 방법이다. 두 표기 방법 모두 각양각색이다. 여기에서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처음 나오는 팔리어 고유명사는 두 가지 표기 방법을 병행했다. 즉 한글 음사와 동시 로마자와 한자를 병기(倂記)하는 방법이다. 단 단어가 너무 길거나 한번 이상 나온 단어일 경우에는 이러한 절차를 생략하였다.
팔리문헌의 한문 명칭은 일본의 <望月佛敎大辭典>에 주로 의존했으며, 경전의 제목은 <南傳大藏經>을 기준으로 삼았다. 단 위의 두 문헌에서도 한자가 아닌 일본어로 음사한 것은 팔리어 원음을 한글로 표기했다.
팔리문헌(巴利文獻 Pali Literature)이란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팔리어(Pali 巴利語)로 씌어진 문헌 전체를 의미한다. 즉 불교 정전(正典, Canon)인 띠삐따까(Tipitaka 三藏)와 앗타까타(Atthakatha 註) 및 띠까(Tika 疏)는 물론 후대의 작품인 역사서와 문법서 등을 포함한 것이다. 이러한 팔리문헌을 고대의 상좌부 전통에서는 팔리(Pali, 聖典)와 앗타까타(Atthakatha 註釋) 둘로 구분하였다. 원래의 팔리란 삼장(三藏)을 가리킨다. '팔리'에는 성전이라는 의미와 팔리어(Palibhasa)라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이분법(二分法)은 정전(正典)과 비정전(非正典)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말라라세케라(G.P. Malalasekera)는 팔리문헌을 세 가지 항목으로 분류했다. 그는 앗타까타(註)와 띠까(疏)를 구별하지 않았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띠까도 앗타까타에 포함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삼장에 대한 주석서들과 관련되었을 때에만 '앗타까타'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앗타까타와 띠까를 구분하는 것이 팔리문헌의 전체적인 체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별도의 항목으로 다룰 것이다. 즉 팔리문헌은 아래와 같이 네 가지 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삼장은 팔리 정전 형태인 불교 성전이다. 삼장은 세 가지(Ti) 광주리(pitaka)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위나야-삐따까(Vinaya-pitaka 律藏), 숫따-삐따까(Sutta-pitaka 經藏), 아비담마-삐따까(Abhidhamma-pitaka 論藏)로 구성되어 있다. 율장은 삼장의 첫 번째 분류로서, 비구와 비구니 승단을 통제하는 계율의 규정과 관계가 있다. 이것은 숫따비방가(Suttavibhanga 經分別), 칸다까(Khandaka 度), 빠리와라(Parivara 附隨)의 세 가지 부분[三部]로 나누어져 있다. 경장은 삼장의 두 번째 분류로서, 다섯 가지 법문의 묶음[五部 Panca nikaya]으로 나누어져 있다. 즉 디가-니까야(Digha-nikaya 長部), 맛지마-니까야(Majjhima-nikaya 中部), 쌍윳따-니까야(Samyutta-nikaya 相應部), 앙굿따라-니까야(Anguttara-nikaya 增支部), 쿳다까-니까야(Khuddaka-nikaya 小部)이다. 논장은 삼장의 세 번째 분류로서, 경장에서 진술된 법에 대한 철학적 논법인 것이다. 논장은 담마상가니(Dhammasangani 法聚論=法集論), 비방가(Vibhanga 分別論), 다뚜까타( Dhatukatha 界說論), 뿍갈라빤邵띠(Puggalapannatti 人施設論), 까타왓투(Kathavatthu 論事論), 야마까(Yamaka 雙對論)·빳타나(Patthana 發趣論) 등의 칠론(七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상의 칠론 외에 특수한 세 가지 논서(이것을 '장외(藏外)'라고 부른다)가 있다. 즉 ①Nettippakarana(指導論), ②Petakopadesa(藏釋論), ③Milindapanha(彌蘭陀問經) 등이다. 이 세 가지 논서는 논장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내용상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이 세 가지 논서를 모두 경장 중의 '소부(小部)'에 포함시키고 있다.
둘째, 앗타까타(Atthakatha 註釋)는 삼장의 해석상의 설명들이다. 비록 주석서가 보다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삼장보다 모든 문학 작품이 포함되었을 때인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 시대(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0세기까지) 기간에 만들어진 모든 주석적 문헌과 관련된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삼장에 대한 주석서들과 관련되었을 때에만 사용된다.
앗타까타는 팔리정전의 각기 다른 성전에 관한 해석적 논문인데, 각 성전은 자기 고유의 주석서를 가지고 있다. 주석서의 주된 목적은 붓다의 교설을 해석하는데 있는데, 이것은 문법적 및 어휘적으로 어려운 단어들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붓다 교의(敎義)의 설명과 해석을 담고 있다. 주석가들은 종종 자신들의 설명을 진행하는 동안 본래의 주제를 벗어나기도 하였고, 다양한 설화와 에피소드에 기초를 둔 그들의 방식은 풍부한 자료를 갖춘 주석서가 되었는데, 종교의 역사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와 세일론의 세속적 역사를 위한 것들도 있다. 오늘날 현존하는 주석서들은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와 다른 주석가들의 작품들이다. 그들은 당시 싱할리어(고대 스리랑카어) 주석서들을 팔리어로 번역하였는데, 당시의 싱할리어 주석서들도 또한 원래의 팔리어에서 번역된 것이었다.
물라(M?la-) 혹은 마하-앗타까타(Maha-Atthakattha), 마하-빳짜리(Maha-Paccari) 및 꾸룬디(Kurundi)는 싱할리어로 씌어진 세 가지 중요한 주석서였다. 그런데 이 주석서들에는 삼장의 중요한 성전 대부분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이밖에 또 그 보다는 중요성이 적은 주로 싱할리어로 씌어진 여러 가지 주석적 작품들이 있었다. 삼장에 관한 이러한 주석서들은 가장 초기의 문학 작품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삼장의 주석서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즉 주석서는 크게 Vinaya-atthakatha 律註釋, Sutta-atthakatha 經註釋, Abhidhamma-atthakatha 論註釋으로 나뉘어진다. 첫째의 Vinaya-atthakatha 律註釋은 다시 Vinaya Pitaka 律藏에 관한 주석인 Samantapasadika-atthakatha 一切善見律註와 Patimokkha 戒本에 관한 주석인 Kankhavitarani-atthakatha 波羅提木叉註로 나뉘어져 있다. 두 번째의 Sutta-atthakatha 經註釋은 Sutta-pitaka 經藏에 관한 각각의 주석들이 있다. 세 번째의 Abhidhamma-atthakatha 論註釋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즉 Dhammasangani 法聚論에 관한 註釋인 Atthasalini 義卓越論, Vibhanga 分別論에 관한 註釋인 Sammohavinodani 除癡論, 그리고 Kathavatthu 論事, Puggalapannatti 人施設, Dhatukatha 界說, Yamaka 雙對, Patthana 發趣에 관한 註釋인 Pancappakasanatthakatha 五論註解가 현존한다.
셋째, 띠까(Tika 疏)는 삼장의 주석서에 관해 씌어진 주석의 주석이다. 이러한 삼장보다 다른 성전에 관해 저술된 주석서도 또한 띠까로 불린다. 월폴라 라훌라에 의하면, '띠까(tika)'라는 술어는 산스크리트의 영향으로 서기 10세기 혹은 11세기경 폴로나루워(Polonnaruva) 시기 중에 유행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아난다(Ananda)의 물라띠까(Mulatika 大疏)가 최초의 띠까였다. 이것은 서기 10-11세기에 씌어졌다. 아난다는 팔리 문법서 루빠싯디(Rupasiddhi)의 저자 붓다삐야(Buddhappiya)의 스승이었다. 서기 약 12세기 중엽에 씌어진 목갈라야나(Moggallayana)의 저자는 붓다삐야의 루빠싯디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아난다를 서기 10세기 혹은 11세기 어딘가에 놓더라도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띠까 문헌의 시작은 대략적으로 10세기에서 11세기 사이의 시기로 한계를 정할 수 있다. 이 시기 이전의 삼장이 아닌 모든 작품들은 포괄적인 술어 앗타까타의 밑에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핫사밧투-앗타까타(Sahassavatthu-Atthakatha)라는 문헌에 대한 기술은 이것이 최소한 서기 9세기보다 이전 시기의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띠까 문헌은 삼장-주석서와 비정전(非正典)의 저술 모두에 관해 씌어진 주석서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대부분은 아직까지 싱할라 문자로 기록된 패엽의 형태로 남아 있다. 몇몇 정전의 띠까들은 비록 12세기에 속한 것이지만 오늘날 손에 넣을 수 없는 초기의 자료에서 발췌한 매우 가치 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 그것은 비숫디막가(Visuddhimagga 淸淨道論)에 관한 것을 포함하여 모두 11개의 띠까로 이루어져 있다.
비정전의 띠까들은 목록으로 만들기에는 수량이 너무나 많다. 그것들 중 몇몇은 Moggallanavyakarana에 관한 Sangharakkhita 스님이 지은 Susaddasiddhi와 Saratthasalini, Vinayavinicchaya에 관한 Vacissara 스님이 지은 Yogavinicchaya, 그리고 Padasadhana에 관한 Rahula Vacissara 스님이 지은 Buddhippasadani 등이 있다. 이러한 비정전의 띠까에 관해 지적하는 또 다른 견해는 이것들은 주석서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고 원전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띠까(Tika 疏)가 아니고 앗타까타(Atthakatha 註)들이라는 것이다.
넷째, 세속적 주제에 관한 역사적 문법적 그리고 다른 작품들과 약 5세기부터 현재까지 수세기 동안 학자들에 의해 저술되어 온 역사와 문법 그리고 관련된 주제에 관한 기본적인 텍스트에 대한 주석서들이다. 디빠방사(Dipavamsa 島史), 마하방사(Mahavamsa 大史), 밀린다빵하(Milindapanha 彌蘭陀問經), 비숫디막가(Visuddhimagga 淸淨道論) 등이 있다.
팔리문헌의 조직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Ⅰ. Tipitaka 三藏
1. Vinaya-pitaka 律藏
1) Sutta-vibhanga 經分別
(1) Maha-vibhanga 大分別
(2) Bhikkhuni-vibhanga 比丘尼分別
2) Khandhaka 度
(1) Mahavagga 大品
(2) Cullavagga 小品
3) Parivara 附隨
2. Sutta-pitaka 經藏
1) Digha-nikaya 長部
2) Majjhima-nikaya 中部
3) Samyutta-nikaya 相應部
4) Anguttara-nikaya 增支部
5) Khuddaka-nikaya 小部
(1) Khuddaka-patha 小誦經
(2) Dhammapada 法句經
(3) Udana 自說經
(4) Itivuttaka 如是語經
(5) Sutta-nipata 經集
(6) Vimanavatthu 天宮事經
(7) Petavatthu 餓鬼事經
(8) Theragatha 長老偈經
(9) Therigatha 長老尼偈經
(10) Jataka 本生經
(11) Niddesa 義釋
① Maha-Niddesa 大義釋
② Culla-Niddesa 小義釋
(12) Patisambhida-magga 無碍解道
(13) Apadana 譬喩經
(14) Buddhavamsa 佛種姓經
(15) Cariya-pitaka 所行藏經
3. Abhidhamma-pitaka 論藏
1) Dhammasangani 法聚論=法集論
2) Vibhanga 分別論
3) Dhatukatha 界說論
4) Puggalapannati 人施設論
5) Kathavatthu 論事論
6) Yamaka 雙對論
7) Patthana 發趣論
* 藏外(論的 傍系書)
1) Nettipakarana 指導論
2) Petakopadesa 藏釋論
3) Milindapanha 彌蘭陀問經(밀린다의 질문)
Ⅱ. Atthakatha 註釋
1. Vinaya-atthakatha 律註釋
1) Vinaya Pitaka … Samantapasadika-atthakatha 一切善見律註 혹은 善見律毘婆沙疏
2) Patimokkha … Kankhavitarani-atthakatha 波羅提木叉註 혹은 疑心解除
2. Sutta-atthakatha 經註釋
1) Digha Nikaya … Sumangalavilasini 長部註=妙吉祥疏=吉祥悅意
2) Majjhima Nikaya … Papancasudani 中部註=滅戱論疏=波斥猶豫
3) Samyutta Nikaya … Saratthappakasini 相應部註=顯示調御疏=顯揚眞義
4) Anguttara Nikaya … Manorathapurani 增支部註=如意成就疏=滿足希求
5) Khuddaka-nikaya 小部
① Khuddakapatha…Khuddakapatha'tthakatha 小誦註 or Paramatthajotika第一義燈明疏
② Dhammapada … Dhammapadatthakatha 法句註
③ Udana … Paramatthadipani 自說註
④ Itivuttaka … Paramatthadipani 如是語註
⑤ Suttanipata … Paramatthajotika 第一義燈明疏
⑥ Vimanavatthu … Paramatthadipani 天宮事註
⑦ Petavatthu … Paramatthadipani 餓鬼事註
⑧ Theragatha … Paramatthadipani 長老偈註
⑨ Therigatha … Paramatthadipani 長老尼偈註
⑩ Jataka … Jatakatthakatha 本生註
⑪ Niddesa … Sadhammapajjotika 義釋註
⑫ Patisambhidamagga … Saddhammmappakasini 無碍解道註
⑬ Apadana … Visuddhajanavilasini 譬喩註
⑭ Buddhavamsa … Madhuratthavilasini 佛陀系譜註
⑮ Cariyapitaka … Cariyapitakatha 行藏註 or Paramatthadipani
3. Abhidhamma-atthakatha 論註釋
1) Dhammasangani … Atthasalini 義卓越論=勝義論疏(法聚論에 대한 註釋)
2) Vibhanga … Sammohavinodani 除癡論=除遣迷妄疏(分別論에 대한 註釋)
3) Kathavatthu, Puggalapannati, Dhatukatha, Yamaka, Patthana …Pancappakasanatthakatha 五論註解=五論義疏(界說·雙對·發趣·施設·論事에 대한 註釋)
Ⅲ. Tika 疏(註釋의 註釋)
1. Vinaya-tika 律疏
1) Vajirabuddhi-tika … by Vajirabuddhi … Samantapasadika
2) Saratthadipani … by Sariputta … Samantapasadika
3) Vimativinodani … by Mahakassapa of Cola … Samantapasadika
4) Vinayatthamanjusa … by Buddhanaga … Kankhavitarani
2. Sutta-tika 經疏
5) Dighanikaya-tika … by Dhammapala … Sumangalavilasini
6) Majjhimanikaya-tika … by Dhammapala … Papancasudani
7) Samyuttanikaya-tika … by Dhammapala … Saratthappakasini
8) Saratthamanjusa … by Sariputta … Manorathapurani (Atthakatha of Anguttara Nikaya)
3. Abhidhamma-tika 論疏
9) Linatthapada-vannana …by Ananda Vanaratanatissa … Atthasalini
10) Linatthavanna … by Culla Dhammapala … Linatthapada-vannana
11) Paramatthamanjusa … by Dhammapala … Visuddhimagga
Ⅳ. 史傳其他
1. Dipavamsa 島史(島王統史)
2. Mahavamsa 大史(大王統史)
3. Milindaphanha 彌蘭陀王問經(那先比丘經)
4. Visuddhimagga 淸淨道論
5. Kaccayana's Pali-vyakaranam 巴利文典
6. Abhidhanappadipika 名稱語集(=名義明燈)
7. Sarasangaha 名義에 관한 것.
8. Abhidhammatthasangaha 攝阿毘達磨義論
9. Gandhavamsa 巴利文聖書史
10. Culavamsa 小王統史
11. Sasanavamsa 敎史 by Pannasamin
12. Abhidhammatthasangaha 攝阿毘達磨義論 by Anuruddha
참고 문헌
Abeynayake, Oliver. A Textual and Historical Analysis of the Khuddaka Nikaya. Dehiwala, Sri Lanka: 1984.
Aung, Shwe Zan. "Abhidhamma Literature of Burma" Journal of the Pali Text Society, 1910-1912, pp.112-132.
Banerji, S.C. An Introduction to Pali Literature. Calcutta, 1964, pp.73-85.
Bode, Mabel H. The Pali Literature of Burma. London: 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909, 1966.
Forchhammer, Emil. Report on the Pali Literature of Burma. Calcutta: Government of India, 1879.
Geiger, Wilhelm. Pali Literature and Language. Translated by Batakrishna Ghosh. 2nd edition. Delhi: Oriental Books Reprint Corp., 1943.
Goonesekere, L.R. Buddhist Commentarial Literature. Kandy: BPS, 1967.
Jayawardhana, Somapala. Handbook of Pali Literature. Colombo: Karunaratne and Sons LTd, 1994.
Lanman, Charles R. Pali Book-Titles and their brief designations. (Proceedings of 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Vol. XLIX, No.24, Boston, 1909.
Law, B.C. A History of Pali Literature. 2 volumes. London: 1933; Varanasi: 1974.
Law, B.C. Non-Canonical Pali Literature. Off-print from Annals of the Bhandarkar Oriental Research Institute, Poona, Vol.XIII, Part II, 1930-1.
Law, B.C. The Life and Work of Buddhaghosa. Calcutta, 1923; Bambay, 1946.
Malalasekera, G.P. The Pali Literature of Ceylon. London: Royal Asiatic Society, 1928; Reprinted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94.
Morris, R. Report on Pali Literature 1875-80. London: Transactions of the Philological Society, 1881.
Saddhatissa, Hammalawa. Pali Literature of South-East Asia. Singapore: Singapore Buddhist Meditation Centre, 1993.
U Ko Lay. ed. Guide to Tipitaka. Delhi: Sri Satguru Publication, 1990.
Webb, Russell. ed. An Analysis of the Pali Canon.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75.
Winternitz, M. History of Indian Literature. Vol.Ⅱ, Calcutta, 1933; New Delhi, 1972.
Bond, George. The Word of the Buddha: The Tipitaka and its Interpretation in Theravada Buddhism. Colombo: M.D. Gunasena & Co., Ltd., 1982.
Holt, John. The Canonical Buddhism of the Vinayapitaka. Delhi: Motilal Banarsidass, 1981.
Jayawickrama, N.A. (tr.) Inception to Discipline: Historical Introduction to Buddhaghosa's Samantapasadika. London: Luzac, for the Pali Text Society, 1962.
Barua, Dipak Kumar. An Analytical Study of Four Nikayas. Calcutta: Rabindra Bharati University, 1971.
Nyanaponika Thera. Abhidhamma Studies: Researches in Buddhist Psychology. Island Hermitage Publication Number 2. Colombo: Freewin, 1949.
Nyanatiloka Thera. Guide to the Abhidhamma Pitaka. 3rd edition.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71.
前田惠學. <原始佛敎聖典의 成立史硏究>. 山喜房, 1964.
삼장(三藏)의 성립과 그 정통성
(팔리문헌연구소 편)
팔리삼장의 유래
팔리삼장의 유래에 관해서 巴利文律藏注(samantapasadika)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第一結集 때에 摩訶迦葉 등이 三藏을 결집하였고, 다시 阿育王(Asoka) 때에 이르러, 目建連子帝須(Moggaliputta-tissa)는 붓다의 正系인 分別說部(vibhajjavadin)의 所傳에 의거하여 正法을 淨化하였고, 布薩을 행하였으며, 迦他跋偸(kathavatthu, 論事)를 편찬하고, 이러한 법과 율을 결집한 것을 마힌다(Mahinda)가 錫蘭(Ceylon)에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大史(Mahavamsa, XXXiii.)에는 서력 기원전 1세기 초에 재위했던 세일론의 Vattagamani王의 시대에 시작하여 같은 나라의 비구 등은 종래 師資口傳 되어 온 本文(pitakattayapali)은 물론 注釋(atthakatha)을 筆錄한 것을 서책으로 기재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삼장으로 전해져 오는 分別說部(上座部)의 所傳인 것이다. 이것은 律藏 中에도 역시 스스로 분별설부에 속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第一結集은 물론 第二結集에서 암송되었던 팔리삼장은 아라한 마힌다(Mahinda)에 의해서 스리랑카로 가져왔다고 팔리주석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마힌다가 가지고 온 분별설부(상좌부)의 팔리삼장은 기원전 1세기 세일론에서 싱할라 문자로 기록되었다. 이 팔리문헌이 다시 미얀마(버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팔리어는 고유의 문자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각기 자국의 문자로 기록하여 보존했다. 현존하는 팔리삼장은 싱할라판, 씨암판(태국), 버마판(미얀마판), 캄보디아판, 로마자판, 데바나가리 문자판(인도) 등이 있다.
초기 팔리성전의 성립은 다음과 같다. 현재까지의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巴利文獻(Pali Literature)의 발전 단계는 대체적으로 4期로 구분된다고 한다. ① 聖典 중의 偈頌[韻文]은 B.C. 3세기傾까지이며, ② 聖典 중의 散文은 B.C. 1세기경까지이고, ③ 聖典의 註釋書類는 A.D. 5-6세기를 중심으로 전후 수백 년간이며, ④ 후세의 諸文獻은 A.D. 10세기부터 현재까지이다.
巴利三藏(Ti-pitaka)은 처음부터 완전히 구비된 것은 아니었다. 최초에는 法(Dhamma)과 律(Vinaya) 뿐이었다. 論(Abhidhamma)은 佛滅後 3백년경의 제3차 結集 때 이루어졌다.
제1차 결집은 불멸 후 3-4개월이 경과했을 때 王舍城(Rajagaha)에서 이루어졌는데, 아난다(Ananda, 阿難)가 經을, 우빨리(Upali, 優波離)가 律을 誦出했다. 이 때 아난다는 한때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난다여, 나는 이미 法을 설했고, 律 또한 施設해 마쳤다."
巴利三藏(Tipitaka, Sk. Tripitaka)은 크게 律藏(Vinaya-pitaka), 經藏(Sutta-pitaka), 論藏(Abhidamma-pitaka)로 나누어져 있다. 巴利三藏은 스스로 分別說部(Vibhajjavadin)이라고 부르는 上座部(Theravada)의 문헌들이다. 본질적으로 믿을 만한 전통에 따르면 그 경전의 편집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직후인 B.C.483년 왕사성(Rajagaha)의 結集에서였다. 그리고 백년 뒤의 베살리(Vesali)의 결집에서 더욱 보완되었다. 그 후 아쇼까왕(Asoka, B.C. 264-227) 아래 세 번째 결집에서 주요한 경전이 형식적으로 완료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특히 그 결집에서 장로 띳사 목갈리 뿟따(Tissa Moggaliputta)가 전승에 따라 論事(Kathavatthuppakarana)를 강의함으로써 논장의 형성이 이루어졌다. 이 책은 252가지의 사견에 대한 반박이 실려 있으며 논장 속에 편입되어 있다. 이 세 번째 결집은 불교를 이웃 나라에 전파하려고 포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전승은 흥미롭게도 비문의 발굴로 증명되었다. 아쇼까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 Sk. mahendra)가 붓다 가르침의 포교사로 실론에 파견되었다. 그는 실론에 상좌부가 만든 경전을 전하였다.
삼장의 성립
경전이 점차적으로 성립하자, 각각의 사원마다 가르침과 대화를 발굴하는 대로 될 수 있는 한 모두 결집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경전의 서문에는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Evam me suttam)'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결집과 같은 커다란 모임에서 개개의 경전이 승인되거나 검증되었다. 이렇게 해서 경전의 자료는 점점 증가하게 되고 일정한 모음집의 형태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경전의 형성 유래로부터 우리는 처음부터 학파나 부파의 존재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가 있다. 두 번째 결집을 기회로 해서 이러한 경향은 노골화되어 교파의 갈등, 즉 상좌부(Theravadin)와 대중부(Mahasanghika)의 분열로 나타났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200년 안에 경전의 대부분이 편집되었으리라 보여진다. B.C. 3세기경의 비문에 발견되는 명칭인 담마까티카(Dhammakathika), 뻬따낀(petakin), 수딴띠까(suttantika), 빤짜네까이까(pancanekayika) 등은 당시에 벌써 경전이 후세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분류형태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쇼까왕이 바브라(Bhabra) 비문에서 추천한 일곱 가지의 교재 가운데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의 책은 상당히 분명하게 팔리 경전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불교도들이 매우 흠모해 마지않았던 아쇼까왕이 실제 팔리 경전에는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것은 팔리경전이 아쇼까왕 때는 내용적으로 이미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믿을만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다고 보여지는 大史(Mahavamsa)와 島史(Dipavamsa)에 따르면, 스리랑카에서는 기원전 수십 년 전에 왕 밧따가마니(Vattagamani) 아래서 三藏과 그에 속한 註釋書(Atthakatha)들이 문자로 수록되었다고 한다.
경전의 형식
400여 년간에 걸친 팔리 경전의 성립과 구전에 의한 전승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팔리 경전의 특징을 알아 볼 수 있다. 개개의 경전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모순을 지녔다는 프랑케(R. O. Franke)의 주장은 이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더 이상 모순으로 남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경전이 지니고 있는 그 구성과 되돌아오는 반복성을 이해할 수 있다. 구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사태와 상황은 동일한 단어로 구성된 판에 박은 문장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경전에서 항상 등장하는 많은 것들은 곧 수행승이 지녀야 할 필수 불가결한 지식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이거(W. Geiger)는 항상 반복적인 동의어적인 표현형태, 마치 승가고시를 실시하는 듯한 질문과 응답을 통한 설명형식, 그리고 신화와 비유 또는 격언도 포함시킨다. 특히 이 성스러운 경전은 처음부터 설법을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승려들이 잘 알고 있는 이러한 경전이 언제까지나 전승에 간섭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특히 두드려지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지만 동일한 모음집에 두개 이상의 경전이 동일한 내용에다 동일한 단어로 이어지면서 인물과 장소만이 달리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틀림없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전승의 차이가 놓여 있다. 경전들을 순서대로 읽다 보면 어느 경전이 정통성을 갖고 있는가를 결정하지 않고, 동일한 경전의 여러 이본들이 단순한 차례로 나열된 것을 발견한다. 이 경전의 결집과 문자화에 있어서 순수한 문헌학적인 활동이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활동은 자료를 가능하면 완벽하게 보존하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완벽하게 구성된 하나의 모음집에서 한 경전이 다른 모음집으로 편입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그만한 동기가 있을 때 발생한다. 경전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각각의 경우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자유롭게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경전의 정통성
이제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경전의 전통성이 어떠한 의미에서 규정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팔리 경전에 실려 있는 모든 것이 부처님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틀림없이 팔리 경전은 제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부처님의 가르침과 언행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다. 특히 대반열반경(Mahaparinibbana sutta)과 같은 경우 독자들은 부처님의 마지막 최후의 생애에 대한 실제적인 묘사가 전제되어 있다는 인상이 없이는 그것을 읽을 수 없다. 다른 경전들은 적어도 부처님이 스스로 완성시킨 이미 존재하는 정신적 틀에 따라 모방하여 성립시킨 것들일 것이다. 다른 어떤 것은 순전히 승려들의 창작이다. 예를 들어 율장의 모든 계율이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근거는 특정한 틀에 맞추어서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그렇다고 해서 팔리 경전에 대한 의혹을 너무 증폭시켜서도 안된다. 경전의 대부분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200년 안에 성립된 것으로, 당시만 해도 부처님에 대한 생동하는 기억이 맥박 칠 때이다. 또한 성실한 제자들의 경전편집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희랍과 인도의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차이를 고려한다면 팔리 경전에서 붓다에 대한 이미지는 크세노폰(Xenophon)과 플라톤(Plato)의 문헌에서 소크라테스의 영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장(三藏 Tipitaka) - 李摩聖 지음
팔리정전(巴利正典) 혹은 삼장(三藏)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삼장(Tipitaka, Sk. tripitaka)이란 세 가지(ti) 광주리(pitaka)라는 의미이다.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A) 율장(律藏 Vinaya Pitaka) : 승단(Sangha)을 위한 계율 규정.
(B) 경장(經藏 Sutta Pitaka) : 교법(법).
(C)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 : 경장에 설해진 법의 철학적 논의.
A. 율장(律藏 Vinaya Pitaka)
-- 승단(Sangha)을 위한 계율 규정 --
삼장의 세 가지 주된 분류 가운데 첫 번째는 비구와 비구니 승단을 통제하는 계율의 규정과 관계가 있다. 율장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첫 번째 부분은 비구를 위한 계율과 비구니를 위한 계율로 다시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두 번째 부분은 대품(大品)과 소품(小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번째 부분(후대의 補遺篇)은 부록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전체 율장의 개요다.
1. 경분별(經分別 Suttavibhanga).
2. 건도( 度 Khandhaka).
(1) 대품(大品 Mahavagga).
(2) 소품(小品 Cullavagga.
3. 부수(附隨 Parivara).
1. 경분별(經分別 Suttavibhanga)
위반의 여덟 가지 등급을 다룬 비구를 위한 227가지 계율이다. 즉 범하면 승단에서 추방되는 네 가지 계율(四波羅夷法 parajika)이다. 이것은 성교(性交), 절도(竊盜), 살생(殺人) 및 자살하도록 다른 사람을 부추기는 것, 비범한 학식[깨달음]을 얻었다고 거짓으로 자랑하는 것이다.
승단의 처음과 그 다음의 모임이 수반되는 열세가지 계율(十三僧殘法 Sanghadisesa).
두 가지 정해지지 않은 계율(二不定法 aniyata).
실권(失權)과 함께 참회가 수반되는 서른가지 계율(三十捨墮法 nissaggiya pacittiya).
참회가 수반되는 구십 두 가지 계율(九十二波逸提 pacittiya).
참회가 요구되는 네 가지 계율(四提舍尼法 patidesaniya).
훈련의 칠십 다섯 가지 계율(七十五衆學法 sekhiya).
법률상 소송절차의 결정을 위한 일곱 가지 계율(七滅諍法 adhikaranasamatha).
이 부분은 비구니를 위한 유사한 지침인 비구니분별(比丘尼分別 Bhikkhuni-vibhanga)이 이어져 있다.
2. 건도( 度 Khandhaka)
건도는 다시 대품(大品 Mahavagga)과 소품(小品 Cullavagga)으로 나뉘어져 있다.
(a) 대품(大品 Mahavagga)
1. 승단 입단을 위한 규정(受戒篇).
2. 포살의 모임과 계본(戒本 Patimokkha)의 암송(布薩篇).
3. 우기(雨期) 동안의 체재(安居篇).
4. 안거를 끝내는 의식(自恣篇).
5. 의류와 가구를 위한 규정(皮革篇).
6. 의약과 음식(藥劑篇).
7. 한 해 한번씩의 가사 분배(迦?那衣篇).
8. 병든 비구. 수면 및 가사 재료를 위한 규정(法衣篇).
9. 승단에 의해서 집행한 소송절차의 방법(瞻波篇).
10. 분열의 경우 소송절차.(拘?彌篇).
(b) 소품(小品 Cullavagga)
1. 승단에 보고된 계율 위반을 다루기 위한 규정(厘磨篇).
2. 승단에 보고된 계율 위반을 다루기 위한 규정(別住篇).
3. 비구의 복권(罪集篇).
4. 분쟁을 다루기 위한 규정(滅諍篇).
5. 목욕, 의복 등을 위한 잡다한 규정(小事篇).
6. 주거, 가구, 숙박 등(坐臥處篇).
7. 분열(破僧篇).
8. 비구의 등급, 스승과 사미의 의무(法篇).
9. 계본으로부터 배제(遮篇).
10. 비구니의 구족계와 교육(比丘尼篇).
11.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에서의 제일결집에 대한 기술(五百人結集篇).
12. 베살리(Vesali 毘舍離)에서의 제이결집에 대한 기술(七百人結集篇).
3. 부수(附隨 Parivara)
교육과 시험을 목적으로 교리 문답의 방식으로 마련된 율장의 계율의 개요와 분류이다.
B. 경장(經藏 Sutta Pitaka)
-- 교법(法 Dhamma) --
삼장의 두 번째 주된 분류인 경장(經藏)은 다섯 부분 혹은 법문의 다섯 묶음(Nikayas)으로 나뉘어져 있다.
1. 장부(長部 Digha Nikaya)
2. 중부(中部 Majjhima Nikaya)
3. 상응부(相應部 Samyutta Nikaya)
4. 증지부(增支部 Anguttara Nikaya)
5. 소부(小部 Khuddaka Nikaya)
1. 장부(長部 Digha Nikaya)
긴 법문의 묶음은 세 가지 부분 혹은 품(品 vagga)으로 정리되어 있다.
계온품(戒蘊品 Silakkhandha-vagga): 13경(經).
대품(大品 Maha-vagga): 10경(經)
당학품(當學品 Patika-vagga): 11경(經)
1. 계온품(戒蘊品 Silakkhandha-Vagga)
1. 범망경(梵網經 Brahmajala Sutta).(1) '범천의 그물' 혹은 당시 다른 스승들에 의해 가르쳐진 세계와 自我에 관한 62가지 이교도의 견해를 모두 포획하고 있는 완전한 그물이다.
2. 사문과경(沙門果經 Samannaphala Sutta).(2) '출가 생활의 결과'이다. 붓다께서 아자따삿뚜(Ajatasattu) 왕에게 세상을 버리고 출가하여 불교 승단에 합류하는 이익을 설명한 것이다.
3. 아마주경(阿摩晝經 Ambattha Sutta).(3) 출생의 긍지와 그 타락. 카스트(caste) 제도에 관한 암밧타(Ambattha)와의 대화이다. 석가족의 전통적인 창설자인 옥까까(Okkaka) 왕의 전설과 관련된 것을 담고 있다.
4. 종덕경(種德經 Sonadanda Sutta).(4) 진실한 바라문의 특징에 관한 소나단다(Sonadanda) 바라문과의 대화이다.
5. 구라단두경(究羅檀頭經 Kutadanta Sutta).(5) 동물의 희생을 비난하는 것으로 바라문 꾸따단따(Kutadanta)와의 대화이다.
6. 마하리경(摩訶梨經 Mahali Sutta).(6) 시각, 청각 및 완전한 깨달음의 완성과 같은 신(神)에 대한 마하리(Mahali)와의 대화이다.
7. 사리경(寐利經 Jaliya Sutta).(7) 신체와 비교해서 삶의 본질에 관한 원리.
8. 가섭사자후경(迦葉師子吼經 Kassapasihanada Sutta).(8) 자기-고행에 반대하여 나체 수행자 깟싸빠(Kassapa)와의 대화이다.
9. 포타파루경(布?婆樓經 Potthapada Sutta).(9) 영혼의 본성에 관해 ?타빠다(Potthapada)와 나눈 토론인데, 붓다는 이것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고 부적절한 질문이라고 진술한다.
10. 수파경(須婆經 Subha Sutta).(10) 지계·선정·지혜가 가져다주는 결과에 대해 아난다(Ananda)에게 해준 설법이다.
11. 견고경(堅固經 Kevaddha Sutta).(11) 붓다는 기적을 행하는 것을 비구들에게 허락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에게 질문하기 위해 신(神)을 방문했던 스님의 이야기이다.
12. 노차경(露遮經 Lohicca Sutta).(12) 가르침의 윤리학에 관해 바라문 로힛짜(Lohicca)와 나눈 대화이다.
13. 삼명경(三明經 Tevijja Sutta).(13) 범천과의 교제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베다 지식의 무익함에 관한 것이다.
2. 대품(大品 Maha-Vagga)
14. 대본경(大本經 Mahapadana Sutta).(14) 고따마 붓다와 여섯 전임자의 장엄한 설화이며, 또한 비빳씨(Vipassi 毘婆尸佛)붓다의 도솔천 하강과 그의 전도 개시에 관한 법문이다.
15. 대연경(大緣經 Mahanidana Sutta).(15) 인과 관계의 연쇄(緣起說)와 영혼론에 관한 것이다.
16.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parinibbana Sutta).(16) 여래께서 열반에 들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대법문이다.
17. 대선견왕경(大善見王經 Maha Sudassana Sutta).(17) 영광의 대왕이다. 붓다 이전에 존재했던 수닷싸나(Sudassana) 왕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죽음의 자리에 관해 붓다께서 말한 것이다.
18. 사니사경(寐尼沙經 Janavasabha Sutta).(18) 붓다께서 나디까(Nadika) 사람들에게 악마 자나와사바(Janavasabha) 야차의 이야기를 설한 것이다.
19. 대전존경(大典尊經 Maha Govinda Sutta).(19) 하늘의 힘으로 음악에 뛰어난 사람인 빤짜시카(Pancasikha)가 마하고빈다(Maha Govinda)의 설화를 그가 스스로 '마하 고빈다'였다고 진술한 붓다와 관련시킨다.
20. 대회경(大會經 Mahasamaya Sutta).(20) 순수한 거주의 신들과 그들의 전개.
21. 제석소문경(帝釋所問經 Sakkapanha Sutta).(21) 신들의 주인인 삭까(Sakka)가 붓다를 방문하여 모든 것은 시작과 함께 소멸되어 간다 것을 붓다로부터 배운다.
22. 대념처경(大念處經 Mahasatipatthana Sutta).(22) 네 가지 거대한 명상에 관한 법문, 즉 몸(身)·느낌(受)·마음(心)·대상(法)이다. 네 가지 진리에 관한 주석과 함께 다루고 있다.
23. 폐숙경(幣宿經 Payasi Sutta).(23) 꾸마라깟싸빠(Kumarakassapa)가 내생이나 행위의 과보가 없다고 하는 이교도 빠야시(Payasi)를 개종시킨다.
3. 당학품(當學品 Patika-Vagga)
24. 파리경(波梨經 Patika Sutta).(24) 붓다는 기적을 행하지 않고, 사물의 기원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스승들을 따른다는 제자들의 이야기다.
25. 우담파라사자후경(優曇婆羅師子吼經 Udumbarikasihanada Sutta).(25) 붓다께서 고행자 니그로다(Nigrodha)와 함께 고행주의를 논의하고 있다.
26. 전륜성왕사자후경(轉輪聖王師子吼經 Cakkavattisihanada Sutta).(26) 전륜성왕의 이야기, 도덕적 타락과 그들의 회복 및 멧떼야(Metteya 彌勒) 붓다가 미래에 온다는 내용이다.
27.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Agganna Sutta).(27) 카스트 제도에 관한 논의인데, 사물의 기원(No. 24에 있는 것과 같이)에 관한 설명을 통해 네 가지 계급 제도의 기원을 밝히고 있다.
28. 자환희경(自歡喜經 Sampasadaniya Sutta).(28) 붓다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붓다께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었던 사리뿟따와 붓다와의 대화이다.
29. 청정경(淸淨經 Pasadika Sutta).(29) 즐거운 법문이다. 완전함과 불완전한 가르침에 관한 붓다의 설법이다.
30. 삼십이상경(三十二相經 Lakkhana Sutta).(30) 위대한 사람의 32가지 특징에 관한 가르침이다.
31. 교수시가라월경(敎授尸迦羅越經 Sigalovada Sutta).(31) 여섯 가지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재가자의 의무에 관해 시갈라(Sigala)에게 해 준 훈계다.
32. 아타낭지경(阿?囊?經 Atanatiya Sutta).(32) 사대왕과 악에 반대하여 보호하기 위한 그들의 마력에 관한 것이다.
33. 등송경(等誦經 Sangiti Sutta).(33) 사리뿟따(Sariputta)가 열이란 숫자에서 가르침의 원리를 개설(槪說)한다.
34. 십상경(十上經 Dasuttara Sutta).(34) 사리뿟따가 열 가지 시리즈에서 교설을 개설한다.
2. 중부(中部 Majjhima Nikaya)
이 부분은 15품으로 배열한 중간 길이의 152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개략적으로 주제에 따라서 분류된 것이다.
1. 근본법문품(根本法門品 Mulapariyaya-Vagga)
1. 근본법문경(根本法門經 Mulapariyaya Sutta).(35) 의식의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다루고 있다.
2. 일체루경(一切漏經 Sabbasava Sutta).(36) 번뇌의 제거에 관한 것이다.
3. 법사경(法嗣經 Dhammadayada Sutta).(37) 법의 중요성과 자신의 육체적 바램의 비중요성을 실현하도록 비구들을 훈계한 것이다.
4. 포해경(怖駭經 Bhayabherava Sutta).(38) 숲속의 두려움과 공포에 용감히 맞서는 것에 관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깨달음에 관한 붓다의 기술(記述)를 담고 있다.
5. 무예경(無穢經 Anangana Sutta).(39) 타락에서 벗어나는 것에 관한 사리뿟따(Sariputta)와 목갈라나(Moggallana)간의 대화이다.
6. 원경(願經 Akankheyya Sutta).(40) 비구가 원해야 하는 것들에 관한 가르침이다.
7. 포유경(布喩經 Vatthupama Sutta).(41) 더럽혀진 옷과 부정한 마음의 비유담이다.
8. 삭감경(削減經 Sallekha Sutta).(42) 자아와 잘못된 견해의 제거에 관한 것이다.
9. 정견경(正見經 Sammaditthi Sutta).(43) 사리뿟따가 설한 올바른 견해에 관한 것이다.
10. 염처경(念處經 Satipatthana Sutta).(44) 장부의 No. 22와 같은 것이지만, 네 가지 진리에 관한 설명이 없다.
2. 사자후품(師子吼品 Sihanada-Vagga)
11. 사자후소경(師子吼小經 Culasihanada Sutta).(45). 짧은 힐책의 경전이다. 고행 실천의 어리석음에 관한 것이다.
12. 사자후대경(師子吼大經 Mahasihanada Sutta).(46) 긴 힐책의 경전이다. 고행 실천의 어리석음에 관한 것이다.
13. 고온대경(苦蘊大經 Mahadukkhakkhandha Sutta).(47). 괴로움의 긴 이야기이다.
14. 고온소경(苦蘊小經 Culadukkhakkhandha Sutta).(48) 괴로움의 짧은 이야기이다.
15. 사량경(思量經 Anumana Sutta).(49) 목갈라나(Moggallana)에 의해 설해진 자기 반성의 가치에 관한 것이다.(시종일관 붓다와 관계된 것은 없다).
16. 심황야경(心荒野經 Cetokhila Sutta).(50) 다섯 가지 정신적인 속박에 관한 것이다.
17. 임수경(林藪經 Vanapattha Sutta).(51) 숲속 생활의 이익과 불이익에 관한 것이다.
18. 밀환경(蜜丸經 Madhupindika Sutta).(52) 붓다께서 자신의 가르침을 간략하게 개요를 설한 것인데, 깟차나(Kacchana)가 부연 설명한 것이다.
19. 쌍고경(雙考經 Dvedhavitakka Sutta).(53) 관능의 유혹에 대한 비유담. (38)에 있는 것으로서 깨달음의 반복에 관한 것이다.
20. 고상식지경(考想息止經 Vitakkasanthana Sutta).(54) 바람직하지 못한 사고(思考)를 쫓기 위한 명상의 방법에 대해 설하고 있다.
3. 비유법품(譬喩法品 Tatiya-Vagga)
21. 거유경(鋸喩經 Kakacupama Sutta).(55) 속담의 비유. 가장 격심한 분노에서의 느낌과 마음의 자제에 관한 것이다.
22. 사유경(蛇喩經 Alagaddupama Sutta).(56) 물뱀의 비유. 법에 대한 잘못된 집착은 꼬리에 의해 뱀에 붙잡힌 것과 같다.
23. 의질경(蟻?經 Vammika Sutta).(57) 인간의 몸으로서 개미집의 연기 피움의 비유.
24. 전차경(傳車經 Rathavinita Sutta).(58) 뿐냐(Punna)가 성스러운 삶의 목적을 사리뿟따(Sariputta)에게 설명한다.
25. 철이경(撤餌經 Nivapa Sutta).(59) 씨 뿌리는 사람 혹은 사슴을 위해 미끼로 꾀어들이는 사냥꾼 마라(Mara)의 비유.
26. 성구경(聖求經 Ariyapariyesana Sutta).(60) 성스러움의 탐구. 붓다의 출가, 수행 및 깨달음의 성취에 관한 것이다.
27. 상적유소경(象跡喩小經 Culahatthipadopama Sutta).(61) 코끼리 발자국의 짧은 비유.
28. 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 Mahahatthipadopama Sutta).(62) 코끼리 발자국의 긴 비유.
29. 심재유대경(心材喩大經 Mahasaropama Sutta).(63) 명예와 명성의 획득의 위험에 관한 가르침이다. 데바닷따(Devadatta)가 승단을 떠났을 때 설해진 것이다.
30. 심재유소경(心材喩小經 Culasaropama Sutta).(64) 앞의 경전이 발전한 것으로 법의 본질 획득에 관한 것이다.
4. 쌍대품(雙大品 Mahayamaka-Vagga)
31. 우각림소경(牛角林小經 Culagosinga Sutta).(65) 자신들의 성취와 관계된 세 명의 비구와 함께 나눈 붓다 의 대화.
32. 우각림대경(牛角林大經 Mahagosinga Sutta).(66) 숲속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논의했던 여섯 명의 비구와 나눈 붓다의 대화이다.
33. 목우자대경(牧牛者大經 Mahagopalaka Sutta).(67) 목자(牧者)의 열 한 가지 악과 선의 특질에 관한 것이다.
34. 목우자소경(牧牛者小經 Culagopalaka Sutta).(68) 강을 건너는 어리석은 목자와 지혜로운 목자의 비유이다.
35. 살차가소경(薩遮迦小經 Cula Saccaka Sutta).(69) 오온(五蘊)의 본성에 관한 붓다와 자이나교 삿짜까(Saccaka) 사이의 논의이다.
36. 살차가대경(薩遮迦大經 Maha Saccaka Sutta).(70) 올바른 명상에 관한 가르침과 함께 붓다의 고행과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37. 애진소경(愛盡小經 Culatanhasankhaya Sutta).(71) 삭까(Sakka)가 붓다께 갈애로부터의 해탈에 대하여 묻자, 붓다는 목갈라나(Moggallana)에게 만족스럽게 되풀이하였다.
38. 애진대경(愛盡大經 Mahatanhasankhaya Sutta).(72) 윤회하는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비구의 이단을 논박한 것이다.
39. 마읍대경(馬邑大經 Maha Assapura Sutta).(73) 고행의 의무에 관해 앗사뿌라(Assapura)에서 설한 큰 법문이다.
40. 마읍소경(馬邑小經 Cula Assapura Sutta).(74) 고행의 의무에 관해 앗사뿌라(Assapura)에서 설한 작은 법문이다.
5. 쌍소품(雙小品 Culayamaka-Vagga)
41. 살라촌바라문경(薩羅村婆羅門經 Saleyyaka Sutta).(75) 어떤 존재는 하늘에 가고 어떤 존재는 지옥에 가는지 그 이유에 ? 바라문 살라(Sala)에게 설한 법문이다.
42. 비란야촌바라문경(?蘭若村婆羅門經 Veranjaka Sutta).(76) 베란자(Veranja)의 가장(家長)들에게 되풀이 한 같은 내용의 법문이다.
43. 유명대경(有明大經 Mahavedalla Sutta).(77) 사리뿟따(Sariputta)가 마하꼿티따(Mahakotthita)에게 설한 심리학적인 논의이다.
44. 유명소경(有明小經 Culavedalla Sutta).(78) 비구니 담마딘나(Dhammadinna)가 재가 신자인 비사카(Visakha)에게 설한 심리학적인 논의이다.
45. 득법소경(得法小經 Culadhammasamadana Sutta).(79) 쾌락의 즐김과 미래의 고통에 관한 짧은 법문이다.
46. 득법대경(得法大經 Mahadhammasamadana Sutta).(80) 쾌락의 즐김과 미래의 고통에 관한 긴 법문이다.
47. 사찰경(思察經 Vimamsaka Sutta).(81) 조사의 올바른 방법에 관한 것이다.
48. 교상미경(?賞彌經 Kosambiya Sutta).(82) 싸움의 악에 관히 꼬삼비(Kosambi)의 비구들에게 설한 법문이다.
49. 범천청경(梵天請經 Brahmanimantanika Sutta).(83) 붓다께서 영원론의 이교도로부터 범천의 세계에서 바까(Baka)를 개종시킨다.
50. 마하책경(摩訶責經 Maratajjaniya Sutta).(84) 목갈라나(Moggallana)가 마라(Mara 惡魔)를 훈계한다.
6. 거사품(居士品 Gahapati-Vagga)
51. 깐다라까경(깐다라까經 Kandaraka Sutta).(85) 네 가지 종류의 인물에 관한 법문이다.
52. 앗타까성인경(앗타까城人經 Atthakanagara Sutta).(86) 열반에 이르는 길에 관해 아난다(Ananda)가 설한 법문이다.
53. 유학경(有學經 Sekha Sutta).(87) 붓다께서 까삘라밧투(Kapilavatthu)에서 방금 강당을 개설하고, 아난다가 제자들의 훈련에 관해 설한 법문이다.
54. 포다리경(哺多利經 Potaliya Sutta).(88) 붓다께서 속된 마음의 포기의 참된 의미를 뽀딸리야(Potaliya)에게 설명한다.
55. 지바까경(지바까經 Jivaka Sutta).(89) 붓다께서 육식의 윤리에 대해 설명한다.
56. 우파리경(優波離經 Upali Sutta).(90) 자이나교도 우빨리(Upali)의 개종에 관한 법문이다.
57. 구행자경(狗行者經 Kukkuravatika Sutta).(91) 붓다와 두 고행자간의 업(業 Kamma)에 관한 대화이다.
58. 무외왕자경(無畏王子經 Abhayarajakumara Sutta).(92) 자이나교도 나따뿟따(Nataputta)가 신성의 모독에 관해 붓다께 질문하도록 아바야(Abhaya) 왕자를 보낸다.
59. 다수경(多受經 Bahuvedaniya Sutta).(93) 느낌[감각]의 분류에 관한 것이다.
60. 무희론경(無戱論經 Apannaka Sutta).(94) 다양한 이교에 반대되는 '확실한 교법'에 관한 것이다.
7. 비구품(比丘品 Bhikkhu-Vagga)
61. 교계라후라암바약림경(敎誡羅?羅菴婆藥林經 Ambalatthika-Rahulovada Sutta). (95) 붓다께서 잘못에 관해 설한 법문이다.
62. 교계라후라대경(敎誡羅?羅大經 Maha-Rahulovada Sutta).(96) 출입식(出入息)훈련과 함께 명상에 관해 라훌라에게 해준 충고이다.
63. 마라가소경(摩羅迦小經 Cula-Malunkya Sutta).(97) 미정의 질문 [無記]에 관한 것이다. (106번을 참조하라.)
64. 마라가대경(摩羅迦大經 Maha-Malunkya Sutta).(98) 다섯 가지 낮은 족쇄[五下分結]에 관한 것이다.
65. 발다리경(跋陀利經 Bhaddali Sutta).(99) 밧달리(Bhaddali)의 참회와 붓다의 충고이다.
66. 순유경(?喩經 Latukikopama Sutta).(100) 세상의 출가에 관한 충고이다.
67. 차두취락경(車頭聚落經 Catuma Sutta).(101) 짜뚜마(Catuma)에서 싸움을 좋아하는 비구들에게 해준 충고이다.
68. 나라가파령촌경(那羅伽波寧村經 Nalakapana Sutta).(102) 붓다께서 아누룻다(Anuruddha)에게 법의 확실한 초점에 관하여 질문한다.
69. 구니사경(瞿尼師經 Gulissani Sutta).(103) 굴릿사니(Gulissani)와 같이 숲속에서 사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한 규정이다.
70. 지타산읍경(枳?山邑經 Kitagiri Sutta).(104) 다양한 분류의 비구들에 의해 자행되는 행위이다.
8. 보행자품(普行者品 Paribbajaka-Vagga)
71. 파차구다삼명경(婆蹉衢多三明經 Tevijja-Vacchagotta Sutta).(105) 붓다께서 고행자 밧차곳따(Vacchagotta)를 방문하고, 자신은 과거생에 대한 회상, 비범한 투시력 및 번뇌(asavas 漏)를 제거하는 방법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Tevijja(三明, 세가지 종류의 지혜를 갖춤)라고 부른다고 주장한다.
72. 파차구다화경(婆蹉衢多火經 Aggi-Vacchagotta Sutta).(106) 세계에 대한 이론 세움의 위험 등이다.
73. 파차구다대경(婆蹉衢多大經 Maha Vacchagotta Sutta).(107) 재가자와 비구의 행위에 관해 밧차곳따에게 해준 그 이상의 설명이다.
74. 장조경(長爪經 Dighanakha Sutta).(108) 붓다께서 고행자 디가나카(Dighanakha)를 논박한다. 사리뿟따(Sariputta)는 아라한과를 증득한다.
75. 마건제경(摩健提經 Magandiya Sutta).(109) 붓다께서 자신의 감각적 삶의 포기를 말하고, 감각적 욕망의 포기에 관해 부연한다.
76. 산다까경(Sandaka Sutta).(110) 아난다가 고행자 산다까(Sandaka)의 이단을 논박한다.
77. 선생우다이대경(善生優陀夷大經 Mahasakuludayi Sutta).(111) 왜 붓다가 명예로운 분인가라는 다섯 가지 이유에 관한 것이다.
78. 사문문기자경(沙門文祁子經 Samanamandika Sutta).(112) 완전한 덕의 특질에 관한 것이다.
79. 선생우다이소경(善生優陀夷小經 Culasakuludayi Sutta).(113) 자이나교의 교주 나따뿟따(Nataputta)와 진실한 행복에 이르는 길에 관한 것이다.
80. 비마나수경(비摩那修經 Vekhanassa Sutta).(114) 다섯 가지 감각에 대한 추가적인 사건과 함께 앞의 경전 일부의 반복이다.
9. 왕품(王品 Raja-Vagga)
81. 도사경(陶師經 Ghatikara Sutta).(115) 붓다께서 조띠빨라(Jotipala 護明童子)로서 자신의 이전 경험을 아난다에게 말한다.
82. 뢰타파라경(賴타파羅經 Ratthapala Sutta).(116) 랏타빨라(Ratthapala)와 그가 승단에 들어가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해 헛된 시도를 행했던 자기 부모의 이야기이다.
83. 대천나림경(大天나林經 Makhadeva Sutta).(117) 마카데와(Makhadeva) 왕으로서 붓다의 전생 이야기이다.
84. 마투라경(摩偸羅經 Madhura Sutta).(118) 붓다의 질병 이후, 깟짜나(Kaccana)가 카스트의 진실한 의미에 관해 아반띠뿟따(Avantiputta) 왕에게 설한 법문이다.
85. 보리왕자경(菩提王子經 Bodhirajakumara Sutta).(119)No.60 및 70과 마찬가지로 붓다께서 자신의 출가와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를 설한다.
86. 앙굴마경(鴦掘摩經 Angulimala Sutta).(120) 살인마 앙굴리말라(Angulimala)의 개종 이야기이다.
87. 애생경(愛生經 Piyajatika Sutta).(121) 외아들을 잃은 한 남자에 대한 붓다의 충고와 그 위에 빠세나디 왕과 왕비간의 논쟁이다.
88. 비하제경(비訶提經 Bahitika Sutta).(122) 아난다가 외국의 옷감으로 자신에게 선물해 준 빠세나디 왕이 남김 행위에 관한 물음에 답한다.
89. 법장엄경(法莊嚴經 Dhammacetiya Sutta).(123) 빠세나디 왕이 붓다를 방문하고, 성스러운 삶을 격찬한다.
90. 보극자림경(普棘刺林經 Kannakatthalaka Sutta).(124) 신들과 카스트 및 범천에 관해 붓다와 빠세나디 왕간의 대화이다.
10. 바라문품(婆羅門品 Brahmana-Vagga)
91. 범마경(梵摩經 Brahmayu Sutta).(125) 32가지 위대한 인물의 특징[三十二相]과 바라문 브라흐마유(Brahmayu)의 개종에 관한 것이다.
92. 시라경(施羅經 Sela Sutta).(126) 바라문 셀라(Sela)가 붓다의 32가지 특징을 보고 개종했다. (같은 이야기가 經集 Sutta Nipata III, 7에 실려 있다.)
93. 아섭화경(阿攝화經 Assalayana Sutta).(127) 바라문 아쌀라야나(Assalayana)가 붓다와 함께 카스트를 논의한다. 이 경은 카스트에 관한 붓다 교설의 중요한 선물이다.
94. 구다모가경(瞿多牟伽經 Ghotamukha Sutta).(128) 고따무카(Ghotamukha)가 승단을 위해 강당을 건축한다. 이 낙성식에서 우데나(Udena)가 법문한다.
95. 상가경(商伽經 Canki Sutta).(129) 바라문교의 교리에 관한 법문이다.
96. 울유가라경(鬱庾歌邏經 Esukari Sutta).(130) 카스트와 그 기능에 관한 법문이다.
97. 다연경(陀然經 Dhananjani Sutta).(131) 사리뿟따가 가족의 의무는 나쁜 행위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바라문 다난자니(Dhananjani)에게 말한다.
98. 파사타경(婆私타經 Vasettha Sutta).(132) 진실한 바라문의 본질에 관해 대부분 詩로 설한 법문이다. (이것은 經集 Sutta Nipata III, 9에서 되풀이 된다.)
99. 수파경(須婆經 Subha Sutta).(133) 어떤 사람이 재가자로 남아 있는 것인지 또는 출가하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100. 상가라경(傷歌邏經 Sangarava Sutta).(134) 성스러운 생활에 관해 교법을 받아들였던 바라문 여인에게 설한 법문이다. 또한 No. 60, 70의 일부에서 반복된다.
11. 천비품(天臂品 Devadaha-Vagga)
101. 천비경(天臂經 Devadaha Sutta).(135) 현재의 삶에 의한 열반 증득에 관한 붓다의 법문이다.
102. 오삼경(五三經 Pancattaya Sutta).(136) 영혼의 다섯 가지 이론에 관한 것과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涅槃]은 그것들 중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103. 여하경(如何經 Kinti Sutta).(137) 법에 대하여 논박하고 계율을 범한 비구들을 위한 규정들이다.
104. 합미촌경(合彌村經 Samagama Sutta).(138) 나따뿟따(Nataputta)의 죽음 이후, 분쟁과 조화에 관한 붓다의 법문이다. (또한 No.29에도 있다.)
105. 선성경(善星經 Sunakkhatta Sutta).(139) 갈애의 화살을 뽑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106. 부동이익경(不動利益經 Ananjasappaya Sutta).(140) 평온과 성취, 그리고 진실한 제거에 관한 명상이다.
107. 산수가목건련경(算數家目健連經 Ganaka-Moggallana Sutta).(141) 제자의 훈련에 관해 가나까-목갈라나(Ganaka-Moggallana)에게 교육한 것이다.
108. 구묵목건련경(瞿默目健連經 Gopaka-Moggallana Sutta).(142) 붓다의 질병 이후, 아난다가 밧싸까라(Vassakara)에게 법은 오직 안내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109. 만월대경(滿月大經 Maha Punnama Sutta).(143) 붓다께서 蘊(khandha)에 관하여 한 비구의 질문에 대답한다.
110. 만월소경(滿月小經 Cula Punnama Sutta).(144)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에 관한 법문이다.
12. 부단품(不斷品 Anupada-Vagga)
111. 부단경(不斷經 Anupada Sutta).(145) 붓다께서 사리뿟따의 마음의 분석에 대하여 그를 칭찬한다.
112. 육정경(六淨經 Chabbisodhana Sutta).(146) 아라한과를 획득했다고 선언하는 비구를 시험하는 질문에 관한 것이다.
113. 선사경(善士經 Sappurisa Sutta).(147) 어떤 비구의 좋고 나쁜 특성에 관한 것이다.
114. 응습불응습경(應習不應習經 Sevitabbasevitabba Sutta).(148) 사리뿟따가 성스러운 삶을 살도록 하는 올바른 방법을 설명한다.
115. 다계경(多界經 Bahudhatuka Sutta).(149) 붓다와 아난다간의 대화에서 마련된 요소의 순서와 원리에 관한 것이다.
116. 선탄경(仙呑經 Isigili Sutta).(150) 빳쩨까-붓다(Pacceka-Buddha 抗支佛)에 관한 붓다의 설명이다.
117. 대사십경(大四十經 Mahacattarisaka Sutta).(151) 고귀한 여덟 가지 길[八正道]에 관한 해설이다.
118. 입출식념경(入出息念經 Anapanasati Sutta).(152) 호흡법 연습에 관한 것이다.
119. 신행념경(身行念經 Kayagatasati Sutta).(153) 몸[身]에 관한 명상이다.
120. 행생경(行生經 Sankharuppatti Sutta).(154) 어떤 비구가 자신의 재생의 조건을 결정하기 위한 가능성으로서 다섯 가지 行(sankhara)의 계발에 관한 것이다.
13. 공품(空品 Sunnata-Vagga)
121. 공소경(空小經 Culasunnata Sutta).(155) 空에 관한 명상이다.
122. 공대경(空大經 Mahasunnata Sutta).(156) 空에 대한 명상 수련에 관해서 아난다에게 교육한 것이다.
123. 희유미증유법경(希有未曾有法經 Acchariyabbhutadhamma Sutta).(157) 보살(bodhisatta)의 훌륭한 삶에 관한 것이다. No.14의 일부에서 반복되었지만 붓다 자신에게 적용한 것이다.
124. 박구라경(薄拘羅經 Bakkula Sutta).(158) 박꿀라(Bakkula)가 그의 친구 아뵉라-깟싸빠(Acela-Kassapa)를 개종시킨다.
125. 조어지경(調御地經 Dantabhumi Sutta).(159) 코끼리 훈련의 비유에 의해서 붓다는 어떤 사람이 법에서 다른 사람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126. 부미경(浮彌經 Bhumija Sutta).(160) 부미자(Bhumija)가 자야세나(Jayasena) 왕자의 질문에 대답한다.
127. 아나율경(阿那律經 Anuruddha Sutta).(161) 아누루다(Anuruddha)가 재가자 빤짜깐가(Pancakanga)에게 마음의 해탈에 관해 설명한다.
128. 수번뇌경(隨煩惱經 Upakkilesa Sutta).(162) 붓다께서 꼬삼비 비구들의 다툼을 진정시키고, 올바른 명상에 관해 법문한다.
129. 현우경(賢愚經 Balapandita Sutta).(163) 사후(死後)의 보답과 형벌에 관한 것이다.
130. 천사경(天使經 Devaduta Sutta).(164) 죽음의 使者를 무시한 자들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14. 분별품(分別品 Vibhanga-Vagga)
131. 일야현자경(一夜賢者經 Bhaddekaratta Sutta).(165) 노력에 관한 주석과 함께 네 가지 게송의 詩이다.
132. 아난일야현자경(阿難一夜賢者經 Anandabhaddekaratta Sutta).(166) 같은 내용의 시에 대한 아난다의 해설이다.
133. 대가전연일야현자경(大迦전延一夜賢者經 Mahakaccanabhaddekaratta Sutta).(167) 같은 내용의 시에 대한 마하깟짜나(Mahakaccana)의 해설이다.
134. 노이강기일야현자경(盧夷强耆一夜賢者經 Lomasakangiyabhaddekaratta Sutta).(168) 붓다께서 같은 내용의 시를 로마싸깡기야(Lomasakangiya)에게 설명한다.
135. 소업분별경(小業分別經 Culakammavibhanga Sutta).(169) 붓다께서 업에 의한 여러 가지 육체적·정신적 특질에 대해 설명한다.
136. 대업분별경(大業分別經 Mahakammavibhanga Sutta).(170) 붓다께서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한 고행자의 논의를 반박한다.
137. 육처분별경(六處分別經 Salayatanavibhanga Sutta).(171) 여섯 가지 감각의 분석이다.
138. 총설분별경(總說分別經 Uddesavibhanga Sutta).(172) 마하깟짜나(Mahakaccana 大迦?延)가 의식의 양상에 관해 자세히 설명한다.
139. 무쟁분별경(無諍分別經 Aranavibhanga Sutta).(173) 두 극단 사이의 中道에 관한 것이다.
140. 계분별경(界分別經 Dhatuvibhanga Sutta).(174) 붓다의 가르침에 의해 스승임을 깨달았던 뿍꾸사띠(Pukkusati)의 이야기이다. 요소[界]의 분석이다.
141. 제분별경(諦分別經 Saccavibhanga Sutta).(175)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진술이다. 사리뿟따에 의해 그 이상의 주석이 가해진다.
142. 시분별경(施分別經 Dakkhinavibhanga Sutta).(176) 보시와 보시자에 관한 것이다.
15. 육처품(六處品 Salayatana-Vagga)
143. 교급고독경(敎給孤獨經 Anathapindikovada Sutta).(177)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 給孤獨)의 죽음, 그리고 뚜시따(Tusita 兜率天)에 다시 태어남과 그의 출현을 붓다께 알린다.
144. 교천타경(敎闡陀經 Channovada Sutta).(178) 병이 들었을 때 사리뿟따가 가르쳤고, 최종적으로 자살을 저질렀던 찬나(Channa) 장로의 이야기이다.
145. 교부루나경(敎富樓那經 Punnovada Sutta).(179) 즐거움과 고통의 견딤에 관해 뿐냐(Punna 富樓那)에게 설한 것이다.
146. 교난타가경(敎難陀迦經 Nandakovada Sutta).(180) 난다까(Nandaka)가 無常에 관해 마하빠자빠띠(Mahapajapati)와 500명의 비구니에게 문답으로 가르친다.
147. 교계라후라소경(敎誡羅후羅小經 Cula Rahulovada Sutta).(181) 붓다께서 라훌라를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무상에 관해 그에게 질문한다. 그 법문을 듣기 위해 신들이 온다.
148. 육육경(六六經 Chachakka Sutta).(182) 감각의 六六法에 관한 것이다.
149. 대육처경(大六處經 Mahasalayatanika Sutta).(183) 올바른 감각의 지혜에 관한 것이다.
150. 빈두성경(頻頭城經 Nagaravindeyya Sutta).(184) 고행자의 종류와 명예로운 바라문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이다.
151. 걸식청정경(乞食淸淨經 Pindapataparisuddhi Sutta).(185) 제자들의 훈련에 관해 사리뿟따에게 가르친 것이다.
152. 근수습경(根修習經 Indriyabhavana Sutta).(186) 붓다는 감각의 정복을 위한 바라문 빠라사리야(Parasariya)의 방법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설명한다.
3. 상응부(相應部 Samyutta Nikaya)
특정한 교리를 다루거나 특별한 성격이 주어진 경전들의 '묶음' 혹은 '일관된' 시리즈이다. 56상응은 5품으로 나누어지며 총 2,889經을 담고 있다.
1. 유게품(有偈品 Sagatha-Vagga) (11개의 相應을 담고 있다.)
1. 제천상응(諸天相應 Devata-samyutta).(187) 신들[諸天]의 질문이다.
2. 천자상응(天子相應 Devaputta).(188) 신의 아들들의 질문이다.
3. 구살라상응(拘薩羅相應 Kosala).(189) 꼬살라(Kosala) 국왕 빠세나디(Pasenadi)의 일화들이다.
4. 악마상응(惡魔相應 Mara).(190) 붓다와 제자들에 대한 악마의 적대적인 행동이다.
5. 비구니상응(比丘尼相應 Bhikkhuni).(191) 악마의 실패한 비구니 유혹과 악마의 논의이다.
6. 범천상응(梵天相應 Brahma).(192) 사함빠띠(Sahampati) 범천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법을 가르치도록 붓다께 요청한다.
7. 바라문상응(婆羅門相應 Brahmana).(193) 바라드바자(Bharadvaja) 바라문과 붓다와의 만남 및 그의 귀의에 관한 내용이다.
8. 바기사장로상응(婆耆沙長老相應 Vangisa).(194) 방기사(Vangisa)의 욕정 제거에 관한 내용이다.
9. 삼상응(森相應 Vana).(195) 숲속 신들이 진전이 없는 비구들에게 올바른 길로 향하게 한다.
10. 야차상응(夜叉相應 Yakkha).(196) 야차와 붓다, 그리고 야차와 비구니와의 대론(對論)이다.
11. 제석상응(帝釋相應 Sakka).(197) 붓다께서 신들의 왕인 삭카(Sakka, 帝釋)의 특성을 열거한다.
2. 인연품(因緣品 Nidana-Vagga) (10개의 상응을 담고 있다.)
1. 인연상응(因緣相應 Nidana-Samyutta).(198) 연기설(緣起說, 의존적 발생의 교리)에 관한 설명이다.
2. 현관상응(現觀相應 Abhisamaya).(199)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도록 격려한다.
3. 계상응(界相應 Dhatu).(200) 요소의 육체적, 정신적 및 이론적인 서술이다.
4. 무시상응(無始相應 Anamatagga).(201) 무수한 윤회(Samsara)의 시작에 관한 것이다.
5. 가섭상응(迦葉相應 Kassapa).(202) 깟싸빠(Kassapa 迦葉)의 간곡한 권고이다.
6. 이득·공양상응(利得·供養相應 Labhasakkara).(203) "이득, 호의 및 경의"이다.
7. 라후라상응(羅?羅相應 Rahula).(204) 라훌라의 교육이다.
8. 늑차나(勒叉那相應 Lakkhana).(205) 락카나(Lakkhana)의 질문이다.
9. 비유상응(譬喩相應 Opamma).(206)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행위들이다.
10. 비구상응(比丘相應 Bhikkhu).(207) 비구들에게 해준 붓다와 목갈라나(Moggallana)의 훈계이다.
3. 건도품(건度品 Khandha-Vagga) (13개의 상응을 담고 있다.)
1. 온상응(蘊相應 Khandha-Samyutta).(208) 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집합이다.
2. 나다상응(羅陀相應 Radha).(209) 라다(Radha)의 질문이다.
3. 견상응(見相應 Ditthi).(210) 오온의 집착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견해들이다.
4. 입상응(入相應 Okkantika).(211) 믿음(saddha)을 통해 도(道)에 들어감이다.
5. 생상응(生相應 Uppada).(212) 집합의 일어남은 괴로움으로 이끈다.
6. 번뇌상응(煩惱相應 Kilesa).(213) 육근(六根)과 육식(六識)에서 번뇌가 일어난다.
7. 사리불상응(舍利弗相應 Sariputta).(214) 감정의 평온에 관한 아난다의 질문에 대한 사리뿟다의 답변이다.
8. 용상응(龍相應 Naga).(215) 네 가지 종류의 나가(naga 龍) 목록이다.
9. 금시조상응(金翅鳥相應 Supanna).(216) 네 가지 종류의 가루다(garuda)의 목록이다.
10. 건달바상응(乾達婆相應 Gandhabbakaya).(217) 간다바(gandhabba) 신들의 기술(記述)이다.
11. 운상응(雲相應 Valahaka).(218) 영혼의 구름에 관한 기술이다.
12. 파차종상응(婆蹉種相應 Vacchagotta).(219) 밧차곳따(Vacchagotta)의 형이상학적 질문들이다.
13. 선정상응(禪定相應 Samadhi).(220) 네 가지 형태의 쟈나(jhana 禪定) 수행을 열거하고 있다.
4. 육처품(六處品 Salayatana-Vagga) (10개의 상응을 담고 있다.)
1. 육처상응(六處相應 Salayatana-Samyutta).(221) 육처(六處)와 그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 관한 것이다.
2. 수상응(受相應 Vedana).(222) 세 가지 종류의 느낌[감각]과 그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 관한 것이다.
3. 여인상응(女人相應 Matugama).(223) 자신들의 자질에 의한 여인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4. 염부차상응(閻浮車相應 Jambukhadaka).(224) 사리뿟따에게 붉은 사과를 먹는 사람인 유행자의 질문이다.
5. 사문출가상응(沙門出家相應 Samandaka).(225) 사리뿟따에게 사만다까(Samandaka) 유행자의 질문이다.
6. 목건련상응(目?連相應 Moggallana).(226) 목갈라나(Moggallana)가 비구들에게 선정(禪定 jhana)를 설명한다.
7. 질다상응(質多相應 Citta).(227) 감각과 감각의 대상은 본질적으로 악이 아니다. 다만 감각의 접촉을 통해 일어나는 불건전한 욕망일 뿐이다.
8. 취락주상응(聚落主相應 Gamani).(228) '성냄'과 '친절'의 정의(定義)에 관한 것이다.
9. 무위상응(無爲相應 Asankhata).(229) 무위(無爲 Nibbana)에 관한 것이다.
10. 무기설상응(無記說相應 Avyakata).(230) 빠세나디(Pasenadi)가 케마(khema), 아누루다(Anuruddha), 사리뿟따(Sariputta) 및 목갈라나(Moggallana)에게 제기한 사변적 질문들이다.
5. 대품(大品 Maha-Vagga) (12개의 상응을 담고 있다.)
1. 도품상응(道品相應 Magga-Samyutta).(231) 팔정도(八正道)에 관한 것이다.
2. 각지상응(覺支相應 Bojjhanga).(232)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들[七覺支]에 관한 것이다.
3. 염처상응(念處相應 Satipatthana).(233) 마음집중의 네 가지 근본[四念處]dp 관한 것이다.
4. 근상응(根相應 Indriya).(234) 다섯 가지 기능[五根] 즉 신근(信根), 정진근(精進根), 염근(念根), 정근(定根), 혜근(慧根)]에 관한 것이다.
5. 정근상응(正勤相應 Sammappadhana).(235) 네 가지 올바른 노력[四正勤]에 관한 것이다.
6. 력상응(力相應 Bala).(236) 다섯 가지 힘[五力] (앞의 五根에 관한 한은)에 관한 것이다.
7. 신족상응(神足相應 Iddhipada).(237) 네 가지 심령의 힘[四神足]에 관한 것이다.
8. 아나율상응(阿那律相應 Anuruddha).(238) 마음집중을 통해 아누룻다(Anuruddha)가 성취했던 초월적 능력에 관한 것이다.
9. 정처상응(靜處相應 Jhana).(239) 사선(四禪)에 관한 것이다.
10. 입출식상응(入出息相應 Anapana).(240) 호흡법의 마음집중에 관한 것이다.
11. 예류상응(預流相應 Sotapatti).(241) 예류과(預流果)를 획득한 자에 관한 기술이다.
12. 제상응(諦相應 Sacca).(242)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관한 것이다.
4. 증지부(增支部 Anguttara Nikaya)
증지부에서의 구분은 순수하게 숫자상 하나이다. 증지부는 열 한 개로 분류된 그룹(部集 nipata)이 있는데, 단 하나의 항목인 첫 번째 주제에 이어 두 번째 그룹 등이 뒤따르고, 열 한 개의 마지막 그룹까지 있다. 각 부집은 품(品 vagga)으로 나누어지고, 각 품은 10개 또는 그 이상의 경전들을 담고 있다. 총 2,308經이다.
1. 일집(一集 Ekaka-Nipata).(243) 집중된 마음/집중되지 않은 마음, 훈련된/훈련되지 않은, 수양된/수양되지 않은; 노력, 근면, 붓다, 사리뿟따, 목갈라나, 마하깟싸빠; 견해들-올바른/잘못된; 집중-올바른/잘못된.
2. 이집(二集 Duka).(244) 두 가지 종류의 업보(業報 kamma-vipaka, 현세에서 받는 결과이거나 재생으로 이끄는 업의 결과), 선과 악의 발단 원인, 희망과 바램, 이익과 장수, 두 가지 종류의 보시(물질적인 선물과 정신적인 선물[財施와 法施]), 두 가지 모임의 비구 즉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깨달은 비구들과 깨닫지 못한 비구들, 화목으로 지내는 비구와 화목으로 지내지 못하는 비구들이다.
3. 삼집(三集 Tika).(245) 몸과 입과 뜻의 세 가지 범죄가 있다. 세 가지 칭찬할만한 행위, 즉 관대, 포기, 양친의 부양이 있다. 일어나지 않은 나쁜 상태들의 성장을 저지하도록 노력하고, 일어나지 않은 좋은 상태들을 계발하도록 노력하며, 일어난 나뿐 상태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즐거움과 괴로움,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경험들은 이전의 행위 때문이며, 그러한 경험들은 신의 뜻에 의한 것이며, 그러한 경험들은 이유 없는 것이라는 이단적 견해들이다.
4. 사집(四集 Catukka).(246) 수행이 부족한 사람들은 행위, 집중, 통찰력, 벗어남이 모자란다. 도덕적으로 가치 없는 칭찬, 가치 있는 것의 비난, 기뻐하지 않았을 때의 기쁨, 기뻐했을 때 기쁘지 않음의 칭찬에 의한 무지에서 증가된 과실이다. 지혜도 경건함도 없는 사람, 지혜는 있으나 경건하지 않은 사람, 지혜는 없으나 경건한 사람, 지혜와 경건함 둘 모두 갖춘 사람 등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비구들은 가사의, 걸식, 머무는 장소, 의약 등에 만족하여 살아가야 한다. 네 가지 종류의 행복, 즉 적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 훌륭한 사람과 교제하는 것, 스스로 깨닫는 것, 과거의 선업(善業 kusalakamma)을 쌓아 가는 것 등이다. 네 가지 숭고한 상태(梵住 혹은 四無量心), 즉 박애(博愛), 연민(憐愍), 수희(隨喜), 평정(平靜) 등이다. 타락에 대비하여 비구를 지키는 네 가지 특질, 즉 계율의 지킴, 감각의 문을 제어함, 적당한 식사, 끊임없는 정신 집중 등이다. 자기-집중의 네 가지 방법, 즉 현세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 지혜와 통찰력을 위해, 마음 집중과 평온을 위해, 번뇌의 절멸을 위한 것이다. 증오, 위선, 법과 관련이 있는 것보다 이익과 정직을 증장하는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다. 네 가지 잘못된 견해들, 즉 덧없음을 영원함으로,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자아가 없음을 자아로, 부정을 청정으로 여긴다. 고행자들과 바라문들의 네 가지 결점, 즉 음주 권장, 감각적 쾌락에 탐닉, 돈을 받음, 비윤리적 수단에 의해 자신들의 생계를 얻음 등이다. 행복의 공덕을 가져오는 네 가지 분야, 즉 붓다는 모든 것을 아는 자로, 법은 잘 설해진 것으로, 상가는 잘 설립된 것으로, 계율은 부도덕한 행위로부터 자유가 있는 것으로 올바르게 믿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네 가지 방법들, 즉 어둠에서 어둠으로, 어둠에서 밝음으로, 밝음에서 어둠으로, 밝음에서 밝음으로 등이다. 공양을 남에게 베풀면 장수, 아름다움, 행복, 육체적 건강을 얻는다. 세속의 번영을 위한 네 가지 조건들, 즉 끊임없는 노력, 자신의 수입들을 보호하는 것, 좋은 친구, 균형 잡힌 생활 등이다. 정신적 번영을 위한 네 가지 조건들, 즉 믿음, 지계, 자비, 지혜 등이다. 어떤 사람이 자비(metta)를 연장해야만 하는 네 개의 가족들이 있다. 네 가지 올바른 노력[四正勤]. 네 가지 상상할 수 없는 것들, 즉 붓다의 영역, 선정, 업보, 세계의 기원을 넘어선 사변 등이다. 네 가지 성지, 즉 붓다의 탄생지, 깨달음을 이룬 곳, 첫 설법 장소, 입멸한 곳 등이다. 네 가지 종류의 유익한 말과 유익하지 않은 말이 있다. 즉 진실과 거짓말, 험담하지 않는 것과 험담, 온화한 말과 거친 말, 사려 깊은 말과 천박한 말 등이다. 네 가지 본질적인 특질, 즉 도덕성, 집중력, 지혜 및 해탈 등이다. 네 가지 능력, 즉 신심, 정열, 주의 깊음 및 집중 등이다. 네 가지 요소들. 가장 존경해야 할 네 종류의 사람, 즉 붓다, 벽지불(抗支佛), 아라한, 전륜성왕 등이다. 비구는 색욕, 악의, 질투 혹은 상식의 결핍이 있을 때는 숲속을 떠나서는 안된다.
5. 오집(五集 Pancaka).(247) 제자의 다섯 가지 후륭한 특질, 즉 존경, 겸손, 불건전한 행동을 삼감, 열정 및 지혜 등이다. 다섯 가지 정신적 장애[五蓋 혹은 五障], 즉 감각적 욕망, 악의, 나태, 들뜸과 근심, 회의적인 의심 등이다. 명상의 다섯 가지 주제, 즉 부정, 무아, 죽음, 음식의 불유쾌함, 세상에서 기쁨을 찾을 수 없음 등이다. 다섯 가지 죄악의 특질, 즉 격정, 증오, 미혹, 위선 및 악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다섯 가지 훌륭한 행위, 즉 자비, 몸의 행동, 말과 뜻, 계율의 지킴 및 올바른 견해를 지님 등이다.
6. 육집(六集 Chakka).(248) 비구의 여섯 가지 종류의 의무, 즉 업을 낳는 행동, 논의, 잠과 교제를 삼감, 겸손과 현자와의 교제 등이다.
7. 칠집(七集 Sattaka).(249) 일곱 가지 종류의 복지, 즉 경의, 선행, 겸손, 불건전한 행위를 삼감, 배움, 포기, 지혜 등이다. 일곱 가지 종류의 집착, 즉 호의, 증오, 오해, 신뢰, 의심, 자만, 세속적인 생활, 무지 등을 요청하는 것이다.
8. 팔집(八集 Atthaka).(250) 마음 집중, 보시, 지진의 여덟 가지 원인.
9. 구집(九集 Navaka).(251) 아홉 가지 응시, 즉 부정, 죽음, 음식의 불유쾌함, 세상에 대한 무관심, 덧없음, 괴로움, 덧없음의 결과, 괴로움의 비실재성, 포기, 평정 등이다. 아홉 가지 종류의 사람, 즉 속인과 함께 열반으로 가는 네 가지 길을 밟았던 사람과 그 결과를 경험한 사람 등이다.
10. 십집(十集 Dasaka).(252) 열 가지 응시, 즉 무상, 무아, 죽음, 다른 세계에서의 음식의 불유쾌함, 뼈, 시체 부식의 네 단계 - 벌레들의 침투, 부식과 함께 검정 반점, 부식을 통해 찢어짐, 시체가 썩은 것 등이다. 열 가지 종류의 청정, 즉 올바른 지혜에 의하여, 올바른 해탈에 의해서, 그리고 고귀한 여덟 가지 길[八正道]의 여덟 단계에 의해서 가능하다.
11. 십일집(十一集 Ekadasaka).(253) 열 한가지 종류의 행복, 열반에 이르는 열 한 가지 방법, 소치는 사람과 비구의 선악의 특질 열 한 가지가 있다.
5. 소부(小部 Khuddaka Nikaya)
이것은 경장의 보다 짧은 경들의 부분이다. 붓다고사는 소부를 '짧은 경전들의 부분'이라고 불렀다. 이 니까야(Nikaya)는 오래된 니까야가 완료된 뒤 점차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 후대에 정전(正典)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소부는 15개의 경전으로 나뉘어진다.
1. 소송경(小誦經 Khuddakapatha).(254) '작은 사건의 텍스트'이다. 다음의 경전들을 담고 있다.
⑴ 삼귀문(三歸文 Saranattaya).(255) 불교신자와 비구들을 위한 '삼귀문'이 세 번 반복되었다.
⑵ 십계문(十戒文 Dasasikkhapada).(256) 사마네라(samanera 沙彌)에게 의무적인 열 가지 계율에 관한 것이다.
⑶ 삼십이신분(三十二身分 Dvattimsakara).(257)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32가지 목록에 관한 것이다.
⑷ 문사미문(問沙彌文 kumarapanha).(258) 사미를 위한 열 가지 질문에 대한 교리문답서이다.
⑸ 길상경(吉祥經 Mangala Sutta).(259) '최상의 축복(吉祥)'에 관한 시(詩)이다.
⑹ 삼보경(三寶經 Ratana Sutta).(260) 불·법·승 삼보에 관한 시이다.
⑺ 호외경(戶外經 Tirokudda Sutta).(261) 죽은 친척의 유령에게 제물을 올리는 것에 관한 시이다.
⑻ 복장경(伏藏經 Nidhikanda Sutta).(262) 진실한 보물의 저장에 관한 시이다.
⑼ 자비경(慈悲經 Metta Sutta).(263) 자비에 관한 시이다.
2. 법구경(法句經 Dhammapada).(264) 이 경의 많은 부분은 불교도들의 암송에 의해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 경은 26품 423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3. 자설경(自說經 Udana).(265) 붓다의 '엄숙한 발언'들의 모음집이다. 8품, 80우다나(udana)로 구성되어 있다. 이 경은 대부분 시로 되어 있으나 각각의 시들은 상황 때문에 산문을 수반하기도 한다.
⑴ 보리품(菩提品 Bodhi-Vagga).(266) 붓다의 깨달음에 수반되는 어떤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바히야(Bahiya)에게 현재 순간의 삶을 역설한 유명한 법문도 포함되어 있다.
⑵ 목진린타품(目眞隣陀品 Mucalinda).(267) 이 품은 코브라의 머리로 붓다를 보호했던 뱀의 왕 이후에 붙어진 이름이다.
⑶ 난타품(難陀品 Nanda).(268) 붓다께서 세속 생활에 빠져있던 사촌 동생 난다(Nanda)를 개종시킨다. 또한 상가에 대한 훈계도 실려 있다.
⑷ 미혜품(彌醯品 Meghiya).(269) 붓다의 충고를 무시하고, 메기야(Meghiya)는 명상을 실행하기 위해 망고 동산으로 물러났으나, 그의 마음은 곧바로 불건전한 사고로 괴로움을 받았다. 그가 붓다께 되돌아 왔을 때, 붓다께서는 미발전된 마음을 지닌 사람이 계발해야만 하는 다섯 가지 요소는 훌륭한 우정, 도덕성, 유익한 대화, 결단력 및 통찰력이라고 말했다. 또한 순다리(Sundari)의 이야기 및 사리뿟따에 대한 야차의 급습도 담고 있다.
⑸ 소나장로품(蘇那長老品 Sonathera).(270) 빠세나디(Pasenadi) 왕의 붓다 방문을 담고 있으며, 교법의 여덟 가지 특성과 소나(Sona)의 승려 생활 첫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⑹ 생맹품(生盲品 Jaccandha).(271) 붓다의 반열반(般涅槃 parinibbana)에 대한 암시와 빠세나디 왕과의 대화가 실려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코끼리를 묘사한다는 이야기는 진리의 부분적 깨달음의 실례(實例)인 것이다.
⑺ 소품(小品 Cula).(272) 대부분은 비구들의 개인에 관한 작은 에피소드가 실려있다.
⑻ 파타리촌인품(波?離村人品 Patalingama).(273) 태어나지 않음, 되지 않음, 만들어지지 않음,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인 열반(Nibbana)의 유명한 정의가 실려 있으며, 붓다의 마지막 식사와 아난다와 쭌다(Cunda)를 위한 훈계, 그리고 붓다께서 청정한 삶에 이르는 다섯 가지 이익과 그렇게 하지 않는 다섯 가지 불이익을 선언했던 빠딸리가마(Pataligama)의 방문에 관한 것이 담겨 있다.
4. 여시어경(如是語經 Itivuttaka).(274) 네 가지 부집(部集 Nipata)의 각 부집에 시가 곁들어진 112개의 짧은 경전들의 모음집이다. 이 모음집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각 시의 배열에 도입된 iti vuccati "이와 같이 말했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이 경전은 붓다의 윤리적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⑴ 일집(一集 Ekaka-Nipata).(275) 세 가지 품으로 되어 있다. 탐욕, 악의, 미혹, 격노, 원한, 자만, 무지, 갈애, 분열, 거짓말, 인색 등을 비난되었고, 주의 집중, 현자와의 교제, 조화, 정신적 평화, 행복, 근면, 관대 및 자비 등은 찬양되었다.
⑵ 이집(二集 Duka).(276) 두 가지 품으로 되어 있다. 감각 기관의 억제와 음식의 절제, 건전한 행위, 건전한 습관, 올바른 견해, 평온, 은둔, 부끄러움, 두려움, 그리고 두 가지 종류의 열반 및 활기에 찬 금욕생활을 보내는 장점 등을 밝히고 있다.
⑶ 삼집(三集 Tika).(277) 다섯 가지 품으로 되어 있다. 삼종의 요소를 분류한다. 즉 악의 근본, 구성 요소, 감각, 갈애 괴로움 등이다. 그리고 비구의 이상적인 삶을 선언한다.
⑷ 사집(四集 Catukka).(278) 네 가지 종류의 요소를 분류한다. 즉 비구의 필수품, 사성제(四聖諦) 등이다. 그리고 비구를 위한 마음의 청정을 강조한다.
5. 경집(經集 Sutta-Nipata).(279) "경전들의 모음집"이다. 경집은 총 71경(經)을 담고 있는 다섯 가지 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⑴ 사품(蛇品 Uragavagga).(280)
① 사경(蛇經 Uraga Sutta).(281) 모든 인간들의 격정, 즉 성냄, 증오, 갈애 등을 포기한 비구는 미혹과 공포로부터 벗어난 자이며, 허물을 벗은 뱀에 비유된다.
② 다니야경(陀尼耶經 Dhaniya Sutta).(282) 세상에서 '보호'에 대한 자기 만족은 붓다의 진짜 보호와 대비된다.
③ 서각경(犀角經 Khaggavisana Sutta).(283) 비구의 유행 생활이 찬양되었다. 선우(善友 kalyanamitta)를 제외한 가정과 사회에 얽매이는 것은 윤회의 원인이 되므로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④ 경전바라타도경(耕田婆羅墮寐經 Kasibharadvaja Sutta).(284) 사회적으로 유익하거나 평범한 노동은 열반을 얻으려고 애쓰는 붓다의 정진과 대비된다.
⑤ 순타경(淳陀經 Cunda Sutta).(285) 붓다께서 네 가지 종류의 사문(沙門 samana), 즉 붓다, 아라한, 성실한 비구 및 부정한 비구 등을 열거하고 있다.
⑥ 패망경(敗亡經 Parabhava Sutta).(286) 도덕적·정신적 영역에서 '패망의 원인'이 열거되었다.
⑦ 천민경(賤民經 Vasala or Aggika Bharadvaja Sutta).(287) '천한 사람'을 비난하는논박에서 붓다는 그것은 행위에 의한 것이지 혈통이 아니며, 누구나 천한 사람 혹은 바라문이 된다고 설명한다.
⑧ 자경(慈經 Metta Sutta).(288)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의 실천으로 구성되어 있다.
⑨ 설산경(雪山經 Hemavata Sutta).(289) 붓다에 의해 변화된 두 야차는 고귀한 붓다께 자신들의 의무를 가지고 있다. 붓다께서는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고 있다.
⑩ 광야경(曠野經 A?avaka Sutta).(290) 행복, 이해, 열반의 길에 관한 알라바까(A?avaka) 야차의 질문에 대해 붓다께서 대답한다.
⑪ 정승경(征勝經 Vijaya Sutta).(291) 부정으로 가득찬 신체를 분석하고, 신체의 진실한 본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열반을 획득한 비구를 언급하고 있다.
⑫ 모니경(牟尼經 Muni Sutta).(292) 격정에서 벗어난 외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무니(muni) 혹은 성자의 이상적인 개념에 관한 것이다.
⑵ 소품(小品 Culavagga).(293)
① 보경(寶經 Ratana Sutta).(294) 불·법·승 삼보에 대한 찬가(讚歌)이다.
② 취예경(臭穢經 Amagandha Sutta).(295) 깟싸빠(Kassapa) 붓다께서 육식(肉食)을 통해 더럽혀진 바라문의 견해를 논박하고 있으며, 이것은 악한 마음과 그에 대응하는 행위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진술한다.
③ 점경(漸經 Hiri Sutta).(296) 진실한 우정에 관한 논의이다.
④ 대길상경(大吉祥經 Mahamangala Sutta).(297) 38가지로 나열된 축복은 청정한 삶으로 이끈다. 기본적인 윤리적 금지 사항에서 시작하여 열반 실현이라는 궁극에 도달하는 것이다.
⑤ 침모경(針毛經 Suciloma Sutta).(298) 수찌로마(suciloma) 야차의 위협적인 태도에 대한 답변에서 붓다는 격정, 증오, 의심 등은 신체, 욕망, 자아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⑥ 법행경(法行經 Dhammacariya Sutta).(299) 비구는 올바르고 청정한 삶으로 이끌어야 하며,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성질이 있는 사람들과 욕망의 노예가 된 자들을 회피해야만 한다.
⑦ 바라문법경(婆羅門法經 Brahmanadhammika Sutta).(300) 붓다께서 약간 늙고 부유한 바라문에게 옛 바라문들의 높은 도덕적 기준과 그들이 어떻게 왕의 재물에 대한 탐욕을 거절했는가를 설명한다. 그들이 재산을 획득하기 위해 왕에게 동물의 희생 공양[供犧]를 권유한 결과로서, 그들은 그와 같이 법의 지혜를 잃어 버렸다.
⑧ 선경(船經 Nava Sutta).(301) 스승의 자질에 관해 주의를 기울임인데, 누구나 법에 대한 완전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학식이 높고 지적인 사람을 찾아가야만 한다.
⑨ 하계경(何戒經 Ki?sila Sutta).(302) 성실한 재가 제자의 길이다. 법은 자기 자신의 처음과 마지막 이해관계가 있다.
⑩ 기립경(起立經 Utthana Sutta).(303) 괴로움의 화살에 의해 구멍이 뚫린 게으름과 나태에 관한 비난이다. 누구든지 모든 욕망이 남아있지 않도록 제거해야만 한다.
⑪ 라후라경(羅?羅經 Rahula Sutta).(304) 붓다께서 자신의 아들 라훌라에게 지혜로운 사람들을 존경하고, 그들과 교제하며, 그리고 사문의 규칙에 따라 살아가도록 충고한다.
⑫ 붕기사경(鵬耆舍經 Vangisa Sutta).(305) 붓다께서 방기사(Vangisa)에게 자신의 마지막 스승인 니그로다갑빠(Nigrodhakappa)가 열반에 도달했다고 안심시킨다.
⑬ 정보행경(正普行經 Sammaparibbajaniya Sutta).(306) 성실한 출가 제자의 길이다. 즉 무집착, 격정의 소멸, 윤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 등이다.
⑭ 담미가경(曇彌迦經 Dhammika Sutta).(307) 붓다께서 담미까(Dhammika)에게 비구와 재가자 각자의 의무에 대해 설명한다. 후반부에서는 오계를 지키고 포살일 준수를 기대한 것이 실려 있다.
⑶ 대품(大品 Mahavagga).(308)
① 출가경(出家經 Pabbajja Sutta).(309)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Bimbisara)가 자신의 물질적 자산으로 붓다를 유혹하고, 그리고 나서 그의 혈통에 대해서 물었다. 붓다는 꼬살라(Kosala)의 삭카(Sakya) 종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그는 감각적 쾌락의 덧없음을 보았다는 사실을 진술한다.
② 정근경(精勤經 Padhana Sutta).(310) 붓다의 깨달음 직전에 있었던 악마의 유혹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다.
③ 선설경(善說經 Subhasita Sutta).(311) 비구들의 언어는 기분 좋고 바르게 그리고 진실하게 잘 설해져야만 한다.
④ 손타리가파라타도경(孫陀利迦婆羅陀寐經 Sundarikabharadvaja Sutta).(312) 붓다께서 순다리까(Sundarika) 바라문에게 어떻게 공양을 받을 만한 가치와 명예로운 사람이 되는가를 설명한다.
⑤ 마가경(摩伽經 Magha Sutta).(313) 붓다께서 재가자 마가(Magha)에게 위 경전의 내용을 tjfaudgk고, 공양에 의한 다양한 종류의 축복을 밝히고 있다.
⑥ 살비야경(薩毘耶經 Sabhiya Sutta).(314) 유행하는 고행자 사비야(Sabhiya)는 당시 유명한 여섯 스승[六師外道]으로부터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붓다께 다가가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변을 얻고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⑦ 시라경(施羅經 Sela Sutta).(315) 셀라(Sela) 바라문이 붓다와 대화를 나누고, 300명의 자기 제자와 함께 붓다께 귀의했다.
⑧ 전경(箭經 Salla Sutta).(316) 목숨이 짧고 긴 것은 죽음에 대한 주제이지만, 삶의 본질을 이해한 현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⑨ 파사타경(婆私?經 Vasettha Sutta).(317) 바라드바자(Bharadvaja)와 바셋타(Vasettha)라는 두 젊은이가 바라문에 대한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다. 전자는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된다라고 주장했고, 후자는 오직 행위를 통해 바라문이 된다고 했다. 그 후에 붓다는 후자의 견해가 올바른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⑩ 구가리야경(拘迦利耶經 Kokaliya Sutta).(318) 고깔리야(Kokaliya)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악을 갈망한다고 거짓으로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심한 고통을 받다가 죽어서 한 지옥에 태어났다. 붓다는 여러 가지 종류의 지옥을 나열하고, 중상 모략과 험담에 대한 형벌에 대해 묘사한다.
⑪ 나라가경(那羅迦經 Nalaka Sutta).(319) 미래의 고따마 붓다에 관한 아시따(Asita) 성자의 예언이다. 그의 조카 나라까(Nalaka)는 붓다에 의해 설해진 지혜의 최고 상태에 이르게 된다.
⑫ 이종수관경(二種隨觀經 Dvayatanupassana Sutta).(320) 괴로움(Dukkha)은 실체, 무지, 오온(五蘊), 욕망, 집착, 작용, 음식 등에서 일어난다.
⑷ 의품(義品 Atthakavagga).(321)
① 욕경(欲經 Kama Sutta).(332) 불유쾌한 결과를 얻지 않기 위해서는 감각적 쾌락을 피해야만 한다.
② 굴팔게경(窟八偈經 Guhatthaka Sutta).(323) 위의 경전에 추가하여 만일 어떤 사람이 윤회로부터 해탈에 도달한 것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육체적 실체에 붙들려서는 안된다.
③ 진노팔게경(瞋怒八偈經 Dutthatthaka Sutta).(324) 자신의 덕망을 찬양하거나 독단적인 견해에 묶여 있는 사람은 제한된 생활을 영위한다. 하지만 성자는 자기를 내세우지도 않고, 철학적 가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머문다.
④ 정팔게경(淨八偈經 Suddhatthaka Sutta).(325) 철학적 가설에 대한 지식은 사람을 정화(淨化)할 수 없으며, 거기에는 절단과 변화의 경향은 있지만 결코 내적 평화에 이를 수 없다. 하지만 현자는 격정에 의해 잘못 인도되지 않으며 어떠한 윤회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⑤ 제일팔게경(第一八偈經 Paramatthaka Sutta).(326) 누구든지 철학적 논쟁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진실한 바라문은 열반에 이른다.
⑥ 노경(老經 Jara Sutta).(327) 이기주의에서 탐욕과 후회가 온다. '집 없는 사람'이라는 비구의 이상은 벗어남이며, 다른 것을 통해 청정함을 구하지 않는다.
⑦ 제수미륵경(帝須彌勒經 Tissa-metteyya Sutta).(328) 붓다께서 감각적 접촉에서 수반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의 종류를 밝히고 있다.
⑧ 파수라경(波須羅經 Pasura Sutta).(329) 상호간에 모욕이나 조소를 가져다주는 논쟁의 어리석음에 관한 것이다. 만일 논쟁에서 패배하면 불만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⑨ 마건지야경(摩健地耶經 Magandiya Sutta).(330) 붓다는 다시 철학을 통한 정화를 믿는 마간디야(Magandiya)에게 다만 내적 평화로부터 청정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⑩ 사전경(死前經 Purabheda Sutta).(331) 진실한 성자의 행위와 특성은 갈애, 성냄, 탐욕, 격정, 집착으로부터의 자유, 적정(寂靜), 사려 깊음, 정신적인 평형 등이다.
⑪ 투쟁경(鬪諍經 Kalahavivada Sutta).(332) 절실히 느껴지는 대상 등에서 제기된 논의와 논박에 관한 것이다.
⑫ 소집적경(小集積經 Cu?aviyuha Sutta).(333) 진리는 하나라는 깨달음 없이 서로 모순인 모든 다른 철학 학파에 대한 기술(記述)이다.
⑬ 대집적경(大集積經 Mahaviyuha Sutta).(334) 자기 자신만 찬양하는 철학자들은 다른 이들을 비난한다. 하지만 진실한 바라문은 그와 같은 수상쩍은 지적 완성에 개의치 않고 고요함과 평온함으로 머문다.
⑭ 신속경(迅速經 Tuvataka Sutta).(335) 비구는 악의 뿌리와 갈애를 단절해야 하며, 법을 배워야 하고, 평온과 사색적이어야 하며, 말 많음과 게으름 등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단연코 규정된 자기 의무를 따라야 한다.
⑮ 집장경(執杖經 Attadanda Sutta).(336) 성자는 정직과 맑은 정신이어야 하며, 탐욕과 중상으로부터 벗어나고, 명예를 위한 탐욕 없이 열정적이어야 한다.
①⑥ 사리불경(舍利弗經 Sariputta Sutta).(337) 사리뿟따의 질문에 대한 답변 시간에 다시 붓다는 비구의 생활을 다스리는 원리를 세운다.
⑸ 피안도품(彼岸道品 Parayanavagga).(338)
이 부분은 붓다와 바라문·비구간의 간의 열 여섯 가지 대화(puccha)로 이루어져 있다. 즉 아지따(Ajita), 띳사 멧떼야(Tissa Metteyya), 뿐나까(Punnaka), 멧따구(Mettagu), 도따까(Dhotaka), 우빠시와(Upasiva), 난다(Nanda), 헤마까(Hemaka), 또데야(Todeyya), 깝빠(Kappa), 자뚜깐니(Jatukanni), 바드라부다(Bhadravudha), 우다야(Udaya), 보살라(Posala), 모가라자(Mogharaja) 및 삔기야(Pingiya) 등이다.
그들은 모두 욕망, 탐욕, 집착, 철학적 견해들, 감각적 쾌락,, 게으름, 근절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열반 획득을 위해서는 무관심, 남에게 의존하지 않음, 적정, 주의 깊음, 법에 흔들림 없이 머물기를 권한다.
6. 천궁사경(天宮事經 Vimanavatthu).(339) '천국의 궁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곱 가지 품에 80수의 시(詩)가 실려 있으며, 하늘 나라에서의 공덕과 재생에 관한 것이다.
7. 아귀사경(餓鬼事經 Petavatthu).(340) 이것은 네 가지 품과 51수의 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불건전한 행동을 통해 배회하는 유령[餓鬼 peta]로서의 재생에 관한 것이다.
8. 장로게경(長老偈經 Theragatha).(341) '장로의 게송'이다. 107명의 장로들의 시 1279수가 실려있다.
9. 장로니게경(長老尼偈經 Therigatha).(342) '장로니의 게송'이다. 73명의 장로니들의 시 522수가 실려있다.
10. 본생경(本生經 Jataka).(343) 자따까(Jataka) 혹은 탄생 설화는 고따마 붓다의 전생에 대한 547가지 이야기 모음집이다. '혈통의 이야기' 혹은 니다니-까타(Nidana-Katha)라고 주석서에 소개되어 있으며, 사왓띠(Savatthi)에서 祇園精舍(Jetavana monastery)를 준공할 때까지의 붓다 생애는 물론 과거불 아래에서의 전생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11. 의석(義釋 Niddesa).(344) 경집(經集)의 의품(義品)에 관한 주석서인 ⑴ 대의석(Mahaniddesa)과 경집의 피안도품(彼岸道品)과 서각경(犀角經)에 관한 주석서인 ⑵ 소의석(Culaniddesa)으로 나뉘어진다. 의석은 우빠세나(Upasena)의 Saddharmmapajjotika라는 자체의 주석서가 있는데, 거기에서는 사리뿟다의 작품이라고 되어있다.
12. 무애해도(無애解道 Patisambhidamagga).(345) 이미 율장과 장부, 상응부 및 증지부에서 언급된 개념과 실천의 분석인 '논장'이다. 무애해도는 대품, 구존품, 혜품의 세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품은 열 가지 주제를 담고 있다.
⑴ 대품(大品 Maha-vagga).(346) 무상(無常)에 대한 지혜와 만들어진 것에 대한 괴로움,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연기설(緣起說), 존재의 네 가지 단계, 잘못된 견해[邪見], 오근(五根), 열반의 세 가지 양상, 업보(業報), 열반으로 가는 네 가지 길 등이다.
⑵ 구존품(俱存品 Yuganaddha-vagga).(347)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 네 가지 주의 집중의 기초[四念處],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네 가지 힘[四神力], 팔정도(八正道), 승려 생활의 네 가지 결과[四沙門果], 열반, 68가지 잠재력 등이다.
⑶ 혜품(慧品 Panna-vagga).(348) 여덟 가지 종류의 행위, 즉 몸가짐(걷기, 앉기, 서기, 눕기), 감각 기관, 주의 깊음, 집중[禪定],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열반으로 가는 네 가지 길, 승려 생활의 네 가지 결과[四沙門果], 로깟타(lokattha; 세계의 복지 촉진을 위한 것) 등이다.
13. 비유경(譬喩經 Apadana).(349) 550명의 비구와 40명의 비구니 전생을 시로 표현한 비유담이다.
14. 불종성경(佛種姓經 Buddhavamsa).(350) '붓다의 역사'이다. 붓다께서 자신이 붓다가 되기로 결심한 과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붓다 이전의 24명의 붓다의 역사도 기술하고 있다.
15. 소행장경(所行藏經 Cariyapitaka).(351) 십바라밀(十波羅密)에서 나온 일곱 가지 실례를 시로 표현한 자따까(Jataka)에서 빌어온 35가지 설화이다. 십바라밀은 관대, 지계, 포기, 지혜, 정열, 인욕, 정직, 결단력, 자비 및 평정이다.
C.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 -- 경장에 설해진 법의 철학적 논의 --
논장은 삼장의 세 번째 부분이다. 논장은 일곱 가지 논서[七論]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경장에서 발견되는 전체 경전의 체계적인 해석이다. 논서는 특히 자연 현상의 존재에 대한 심리학적인 분석을 다르고 있다.
1. 법취론(法聚論 Dhammasangani). 담마(dhamma) 혹은 존재의 요소들의 목록이다.
2. 분별론(分別論 Vibhanga). '구별 혹은 판단'이다. 앞서 말한 것의 계속적인 분석이다.
3. 계설론(界說論 Dhatukatha). '요소의 논의'이다. 정신적인 요소와 다른 부문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4. 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pannatti). 증지부로부터 편집된 것으로서 개체에 대한 서술적 묘사이다.
5. 논사(論事 Kathavatthu). 초기 소승 부파와 상좌부 관점의 방어 사이의 논쟁의 초점에 대한 논의이다. 기원전 3세기 중반 아쇼까 황제에 의해 빠뜨나(Patna)에서 소집되었던 제3결집의 의장이었던 목갈리뿟따(Moggaliputta)의 작품이라고 한다.
6. 쌍대론(雙對論 Yamaka). '한 쌍의 책'이다. 심리학적인 주제에 관한 논리적인 논설이다.
7. 발취론(發趣論 Patthana). '관계의 책'이다. 인과 관계 및 현상계의 상호 관계가 검토되었다.
Ⅳ. 상좌부불교 체험기
가난하지만 청청한 수행불교 (출처 : 불교평론 2호)
송 위 지
- 목 차 -
1. 스리랑카와의 첫 만남
2. 첫번째 놀라움 학생 법회
3. 가정은 불성 계발을 위한 곳
4. 아무나 스님이 되나요?
5. 히랄루워
6. 보시:적선 그리고 공덕
7. 상좌부 불교 속의 타력, 피릿
8. 포야(Poya) 축제
9. 비파사나
10. 종단은 셋, 배는 하나
11. 스리랑카의 내전, 그리고 불교가 하는 일
1. 스리랑카와의 첫 만남
80년대 중반 5공 정권이 종착역을 향해 질주하고 있던 봄날, 나는 마치 이 땅이 싫은 사람처럼 서울을 빠져나가 그 시절의 전철 성북역보다 더 초라한(당시의 성북역은 지금의 어느 시골의 기차역과 다름이 없었다.) 카투나야케 국제공항에 내렸다.
현지 시간으로 새벽 1시, 도쿄로부터 9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스리랑카.
새벽1시라 해도 열대는 열대이다. 후덥지근한 열대 바람과 함께 나의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다. 인도양 위에 인도아(印度亞) 대륙의 엉덩이 부분에 마치 감자 덩어리처럼 널부러져 있는 섬나라인 스리랑카에 대해서는 우리 역사서에도 충분한 자료가 있다.
《삼국유사》에 완하국(琓夏國)·용성국(龍城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를 미루어보아 적어도 삼국 시대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동고승전》에도 두 지역간의 교류에 관한 많은 양의 자료가 있는데 특히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능가도(楞伽島) 또는 석란도(錫蘭島), 동상도(銅常島)로 잘 알려져 있다.
가무 잡잡한 피부를 가진 운전기사가 모는 택시를 타고 공항에서 묵기로 약속된 숙소를 향해 가고 있는데, 얼마쯤 달렸을까? 공항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큰 길 한 모퉁이에서 발견되는 우람한 모습의 불상. 그리고 한밤중인데도 그 불상을 비추고 있는 조명이 스리랑카의 특징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었다.
뭇 중생들이 무명을 깨치고 광명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듯이, 언제 걷힐지 모르는 어둠을 뚫고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말씀에 대해 수학할 ‘스리 나가 비하라야(聖龍寺)’에 도착하니, 스님들이 나와 반갑게 맞아 주며 목욕하고 휴식을 취하라 한다. 집에 두고 온 식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그들이 베풀어주는 친절로 대신하며 나는 랑카에서의 첫 밤을 맞았다.
2. 첫번째 놀라움 학생 법회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스님인 스리 나가 비하라야의 마두루와웨 소비타 스님은 스리랑카에서도 몇 안 되는 훌륭한 설법가이다. 소비타 스님은 법문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법문 대상이 누구인지를 가리지 않는다. 스리랑카에 온 지 한 3일 정도 지났을까. 스님께서 차에 타라고 하신다.
스님과 나는 울창한 열대의 숲을 지나 두 시간 정도의 여행 끝에 시골의 조그만 사찰에 도착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낡은 건물들이 오래된 사찰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는 했으나 규모가 큰 절은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러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까?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사방이 탁 트이고 규모가 비교적 큰 강당에서 그 전 해의 어린이 학생 법회 이것을 스리랑카 말로 다함 빠살라(眞理의 학교, 法의 학교, 佛法의 학교의 뜻)라고 한다. 의 성적 우수자를 표창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참석한 어린이와 학생이 줄잡아 500명은 넘어 보였다. 아니, 이런 시골 마을에 있는 절의 다함 빠살라 참석 인원이 이리 많다니! 한국에 있을 때 기껏 70∼80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법회를 하면서 알량한 자부심을 가졌던 나로서는 부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다함 빠살라는 사원의 신도에 대한 평생 보장 시스템의 기초가 되는 제도이다. 뭐 거창하게 사원의 신도에 대한 평생 보장 시스템이라고 이야기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스리랑카 인들은 진정 부처님의 가피에서 태어나 부처님의 가피를 입으며 생을 마감한다.
우리가 흔히 스리랑카를 불교 국가라고 지칭하는 것은 스리랑카에 종교가 불교만 있기 때문이 아니다. 스리랑카 인 중 불교 신자는 70%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힌두교·회교·개신교·천주교 등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헌법으로도 다른 모든 종교의 활발한 포교 활동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태국의 경우 헌법에 불교 국가로 못박아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전세계에 인식되기는 스리랑카가 불교, 그것도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m)를 신행하는 대표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그 이유는 스리랑카가 상좌부 불교의 종주국이어서가 아니라 불교가 개개인의 평생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잉태부터 사망까지 아니 윤회까지 불교가 관여하지 않는 부분이 없다. 임신을 하면 임신을 했다고 부처님께 고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났다고 고하며,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 말을 시작한다고, 글씨를 배우면 또 그렇다고 고하는 이런 일들이 생활화되어 있는 나라가 스리랑카다. 스리랑카 인은 대개 5세 때부터 불교를 교리적으로 접한다. 일요일이 되면 대부분의 절은 하얀 꽃이 넘실거리는 강으로 변한다.
다함 빠살라에 참석하기 위해 깨끗하게 세탁한 하얀색 전통 의상을 입고 꽃을 따서 바구니에 담고 절로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란 상상만 해도 눈이 부시다. 절에서는 참석하는 아이들을 1학년부터 10학년으로 나누어 수준에 맞추어 만들어진 《붓다》라는 교재를 가지고 불교를 가르치고 수행한다. 이 교재는 저명한 스님들과 불교학자에 의해 편찬되며 지속적으로 보완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척 알차다.
어린이 법회를 등한시해서 마땅한 교재 찾기도 쉽지 않은 우리의 입장으로 볼 때 한편으로는 부러움이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어린이나 학생은 미래를 책임질 바로 그 당사자가 아닌가. 절마다 학생들이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니 걱정거리가 있을 법도 하다. 물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 문제 역시 자급 자족이 가능하다.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고 있다. 삼귀의나 오계, 발원문 같은 공통의식은 스님의 인도하에 모든 학생들이 같이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교리 공부는 선배들이 주축이 되어 가르친다. 어려서부터 다함 빠살라에서 배우고 수행했기 때문에 완벽하지는 않으나 후배를 가르칠 충분한 소양을 이미 갖추고 있다.
불교 교리 뿐만 아니라 참선이나 부모님을 위한 효도법회 등을 자신들의 수행과 곁들여서 십수 년 공부하므로 불교에 대한 맛을 보며 확신 속에 살 수 있게 된다. 1990년대 초에 내가 머물렀던 절은 당시로서는 조그만 절에 불과했다. 주변 역시 이교도가 많았고 특히 영국 교회를 등에 엎고 엄청난 물량 공세를 퍼붓던 교회도 있었다.
그 절에서 몇 달 머무르는 동안 가끔 일요일마다 보이던 아이들이 서너 명씩 안 보이곤 했다. 스님에게 그 아이들이 어디 아프냐고 여쭈어 보았다. 스님은 아픈 것은 아니고 근처의 교회로 갔다고 했다. 걱정이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물론 그 아이는 돌아왔다. 진리에 토대를 둔 경우에는 금전이나 학용품으로 마음을 살 수 없음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이었다.
3. 가정은 불성 계발을 위한 곳
가정에서의 신앙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우리 한국불교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열심히 절에 와서 자식의 합격을 기원하는 보살님도 막상 자식들이 출가를 하겠노라 하면 대경실색을 한다.
스님들에게는 도덕적으로 맑은 생활을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자신의 복을 위해서 스님들에게 분에 넘치는 보시를 하려 한다. 스님들이 신도들을 바로 가르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한국불교를 황폐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집집마다 불상을 모셔 놓고 예불을 한다.
어느 스님의 말씀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집안에 불상을 모셔 놓으면 큰일 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부처님과 같이 지내는 것이다. 물론 모셔 놓고 여법하게 예불을 하지 않으면 안 모시는 것보다 못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무당만도 못한 생각을 가진 이들의 혹세무민에 불교인들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경전의 어디에도 집안에 불상을 모셔 놓으면 일이 잘 안 된다는 구절은 없다. 다함 빠살라 등에서 불교를 온전하게 접한 이들은 출근길에 부처님께 간단하나마 예불하고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예불을 한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보리수 나무를 향해 예를 올리는 운전 기사나 자리에서 일어나 보리수 나무나 길가에 조성된 불상을 향해 예를 올리는 이들을 너무 많이 그리고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가정에서부터 몸에 배서 생활화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태국처럼 남자는 일생에 한 번 승려가 되어야 하는 것을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 아닌데도 스리랑카의 불교가 의연한 것은 바로 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수행 때문이다.
4. 아무나 스님이 되나요?
스리랑카의 불교가 궁핍함 속에서도 여유롭게 부처님의 정법을 유지할 수 있는 요인 중의 하나는 ‘맑은 승단’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상의 승단 중 맑지 않은 승단이 어디 있겠는가만은 지금껏 폭력으로 얼룩지거나 아니면 취처를 하거나 은처를 하는 등 승려답지 못한 승려가 목청을 돋우면서 마치 자신들이 정법을 호지(護持)하고 있는 듯이 떠드는 스님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한국불교 속에서 살아온 나에게 스리랑카의 승단은 신선함을 넘어 충격이었다.
한국의 출가와 스리랑카의 출가를 비교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은 물론 도저히 뭐가 뭔지 모르게 되는 마음을 가눌 길 없게 된다. 구족계단이 설치되면 스님이 되려는 자식을 만류하려는 부모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 한국과 철저하게 가족의 축하를 전제로 하는 스리랑카에서의 출가는 시작부터 다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출가를 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의 의사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아들이 8, 9세가 되었을 때 그것도 비교적 총명한 아들에게 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사항과 수행자가 되었을 때의 공덕을 소상히 일러주면서 아버지나 어머니는 출가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본다.
아들은 이미 다함 빠살라를 통해 불교를 접하고 승려의 생활이 어떠한지를 알기 때문에 출가 여부에 대해 자신의 명확한 의사를 표명한다. 가정의 합의와 본인의 동의에 의해 출가가 결정되면 소년의 부모는 원하는 사원의 스님을 찾아가 자식의 출가 문제를 상의하고 허락을 받아낸다. 스님의 허락이 없으면 출가할 수 없다.
출가를 허락받은 소년은 적당한 날을 택해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사미계를 받는다. 그 동안 길렀던 머리를 깎아주고 하얀 고깔을 씌우는 절차를 거친 후 승복을 입힌다. 물론 처음의 승복은 부모나 은사 스님이 보시한다. 눈물겨운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출가 수행자가 되는 아들을 위해 부모가 승복을 보시하다니. 그리고 부모는 아들에게 큰절을 한다.
이제 예토의 속인과 정토로 나아가는 수행자가 구별되는 것이다. 비록 10여 살밖에는 안 되었지만 출가한 스님에게 사회는 수행자로서의 대접을 다해 준다. 사미 스님은 ‘피리웨나’라고 하는 승려 전문 교육기관에서 팔리 어 등 불교 언어와 경전은 물론 영어 그리고 경제 등 내외전의 학습을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편으로는 속해 있는 절에서 행해지는 신도들을 위한 각종 의식에도 참석하며 스님으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간다.
이런 과정을 거쳐 스무 살이 되면 구족계를 받게 된다. 구족계단은 종단별로 전국의 큰 사찰 몇 군데를 정해 설치된다.
구족계를 받는 스님들의 출신 마을에서는 스님이 구족계를 받는 것을 경사로 여기고 부모는 물론 친척, 마을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기 위해서 구족계단이 설치된 절로 구름같이 몰려든다. 구족계를 받는 스님은 마지막 계를 받기 직전에 왕의 복장을 한다. 속인으로서 마지막 치장을 해보는 것이다.
스님이 되면 찰 수 없는 시계도 차고 각종 보물로 치장을 한다. 구족계를 받은 스님의 법명에는 그 스님의 출신 마을 이름이 붙는다. 위에서 소개했던 마두루와웨 소비타 스님의 경우 마두루와웨는 출신 마을의 이름이고 소비타는 법명이다. 출신지인 마두루와웨 마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제도는 중복되는 법명으로 인하여 스님에 대한 혼돈에 빠질 염려가 없어 더욱 좋다.
여기서 소년의 경우만 소개하는 이유는 스리랑카에 여승이 없어서가 아니다. 스리랑카의 여승은 비구 승단에서 구족계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근래까지만 해도 사미니만 있었다. 최근에 비구니계를 받고자 하는 여승들이 늘어나면서 네팔 등 외국에서 한국이나 일본 등 외국 스님을 모셔 놓고 비구니계를 받은 적이 있다.
여승의 사회적 역할 역시 비구 승단의 사회적 역할 못지 않게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스리랑카 사회에서 가장 큰 이슈의 하나인 종족 갈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평화 대행진이나 빈곤 퇴치 운동, 노약자 보호 운동 등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이들이 바로 여승들이다.
5. 히랄루워
스리랑카 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단어 가운데 ‘히랄루워(Hiralluwa)’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는 아주 상스러운 욕보다 더 치욕적인 말로 인식되고 있다.
히랄루워란 승복(僧服)의 스리랑카 말인 ‘씨우라(siura)를 버린 이’라는 말로 ‘아라한의 경지를 약속받은 영광스럽고 고귀한 승복을 벗고 중생들의 천박한 세상으로 되돌아온 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소개했듯이 구족계를 받을 때 온마을이 떠들썩하게 잔치를 베풀어 주지만 막상 여법하게 수행을 하지 못하고 환속하게 되면 당분간은 자신이 태어나고 살던 마을에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먼 지역으로 가서 살아야만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환속한 이들을 천박하고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특수한 경우에는 은사 스님이 제자를 결혼시키면서 환속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환속하더라도 불교계에 몸담으면서 사원과 불교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저명한 몇몇 불교 학자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살아있는 부처님, 보리수 나무 스리랑카 불교인들에게 보리수 나무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다. 보리수 나무가 스리랑카에 처음 소개된 것은 불교가 처음 소개된 다음 해 아쇼카 황제의 딸이자 마힌다 장로의 누이인 비구니 상가미타에 의해서이다.
이후 보리수 나무는 스리랑카 인들에게 법당, 탑과 더불어 중요한 신앙대상이 되었다. 사찰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보리수 나무는 일반인들의 예배 대상이다. 아침에 집에서 예불을 마치고 출근하더라도 길에서 보리수 나무를 보면 다시 예배를 한다.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마하보디나 갈루따라의 보리수 나무는 전국적인 참배객들로 유명한데, 이 보리수를 참배하면서 신도들이 함에 넣은 돈을 관리하는 별도의 기금이 있을 정도이다. 사찰에서는 보리수 나무를 중심으로 ‘보디푸자’라는 공양 의식을 한다. 보디푸자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있는 제단에 꽃과 향, 등을 밝히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는 주로 해가 질 무렵에 시작하여 약 12시간 정도 진행된다.
6. 보시:적선 그리고 공덕
다나(da-na)는 불자들에게는 보편화되어 있는 의식으로 보시(布施)를 뜻하며, 스리랑카에서는 스님들에게 음식물과 필수품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준다는 의미만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사업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나는 주고 또 공덕을 받고 그리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좋은 제도이다. 태국이나 미얀마에서는 스님들이 재가자들에게 가서 탁발을 해오나 스리랑카에서는 신도들이 음식을 마련하여 사원으로 가져가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집으로 스님들을 모셔와서 공양 즉 식사를 대접한다.
신도들은 관혼 상제는 물론 생일, 출산, 입학, 사업의 시작 등 일이 있을 때마다 스님들에게 집에서건 사찰로 찾아가서건 공양을 대접한다. 공양물로는 밥과 카레가 주를 이루며 육류도 포함되어 있다. 스님들은 음식의 내용으로 신도의 신심을 평가하지 않는다. 음식물 이외의 공양물은 스님들이 평소에 사용해야 하는 필수품들이다.
승단이 출산에서 사망까지의 인생을 책임져 준다면 재가자들은 스님들이 출가해서 입적할 때까지 여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보좌해 준다. 출가하여 스님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면 승복·책·우산은 물론 교통비·의약품 등 출가자에게도 필요한 것이 많다. 이 모든 것을 검소한 범위 내에서 신도들이 책임져 준다.
그러므로 초상을 치루면서 스님에게 얼마를 드려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일이나 불사를 추진하면서 불미스러운 소문이 떠도는 일은 스리랑카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스님을 보좌한다는 것 이외에 보시의 또 다른 기능은 스님의 수행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계율을 어기고 수행을 게을리하는 스님이 있는 사찰은 보시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식생활에 곤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느 사찰은 다나가 많이 들어와 다른 절 스님을 모셔가기까지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찰은 실로 난감해지는 것이다. 바른 스님에 바른 신도이다. 그러므로 다나는 재가자가 승단의 청정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제도이기도 하다.
7. 상좌부 불교 속의 타력, 피릿
자력으로 아라한의 경지에 오르도록 노력한다는 상좌부 불교권에도 타력적인 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위 호주(護呪)라고 하는 피릿(pirit) 의식이 그것이다.
피릿 의식은 파릿타(paritta)라고도 하는 염송 기도의 일종으로 특별한 경전을 암송함으로써 각종 위험이나 재난 질병 또는 액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고 믿는 의식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도 행한다. 피릿 의식 때는 《라타나》 《망갈라》 《카르니야 멧타》 등의 경전을 암송한다.
특히 12명의 스님이 참석하는 마하 피릿은 저녁 9시경에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에 끝난다. 이를 위해 ‘피릿 만다파야’라는 건물을 세워 의식에 이용하는데 이 건물의 재료로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나뭇잎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경비나 낭비의 문제가 별로 없다.
피릿 의식에 참여하는 모든 재가자들은 피릿 눌이라는 실(絲)을 잡고 의식에 참여했다가 의식이 끝난 후 짧게 잘라서 왼팔에 감고 다니는데 그러면 몸도 보호가 되고 하고자 하는 일도 잘된다고 한다.
8. 포야(Poya) 축제
포야는 달이 꽉 찬 날(滿月日) 즉 보름을 의미한다. 평소에는 양력을 사용하면서도 유독 불교적인 의식에서는 음력을 기준으로 한다. 달은 매월 한 번씩 꽈악 차서 보름달이 되고 보름달이 주는 풍만함은 스리랑카 인들에게 사랑으로 넘치는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스리랑카 인들에게 보름 즉 포야는 부처님이고 삶이고 생활이다. 포야는 일 년에 열두 번 윤달이 끼면 열세 번 있다. 그 중 중요한 포야는 웨삭(양력 5월), 뽀송(6월), 에살라(7월)를 들 수 있다. 특히 웨삭 포야는 부처님의 탄신, 성도, 열반일을 의미한다.
4월 초파일, 납월 팔일, 음력 2월의 팔일과 보름을 여래 4성일로 지내는 우리와는 날짜에 있어 차이가 있다. 웨삭 포야가 되면 전국 각지의 절들은 최대의 명절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한다. 법회는 물론 길 가는 행인을 위한 보시의 집 운영, 연극이나 찬불가 공연 등 각종 문화행사로 전국이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각 가정에서도 가족의 서원이 담긴 등을 직접 만드어 건다. 또한 포야가 되면 일반음식점은 물론 특급호텔에서조차 술을 팔지 않는다. 수년 전 어느 포야 때의 일이다. 찬드리까 구마라뚱가 대통령이 국정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콜롬보 시내에 있는 특급 호텔을 찾았다.
피로를 풀기 위해 대통령은 호텔의 웨이터에게 맥주를 주문하였다. 하지만 웨이터는 포야이기 때문에 맥주를 줄 수 없다고 했다. 대통령은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러느냐고 이야기했고 그 웨이터는 포야 때 술을 마시는 것은 불손하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믿기지 않겠지만 결국 대통령은 그 호텔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9. 비파사나
굳이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를 말한다면 자기를 돌아보는 수행법이 얼마나 발전해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수행법이 없는 종교가 있겠는가만은 불교의 선(禪)수행 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 선수행 중에 스리랑카·미얀마·태국 등 상좌부 불교국가들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수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마타(samatha, 止)이고 다른 하나는 비파사나(vipassana-, 觀)이다. 특히 비파사나는 팔리 어 경전 맛지마 니카야의 《사티파타나숫타》나 디가 니카야의 《마하 사티파타나숫타나 숫타》(이 경에 상응하는 한문 경전은 아함부 중아함의 《念處經》이 있다.)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방법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실 때 직접 수행했던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비파사나는 바른 관찰을 통해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하며 이 인식을 통해 집착할 것과 집착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방법으로, 이 깨달음은 스스로를 최고의 평온 상태로 이끈다. 이 경에는 “존재의 정화를 위해,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고통을 없애며 올바른 도를 얻기 위해, 그리고 열반의 깨달음을 위한 한 길(eka-yano maggo : the only way)이 있다. 그것을 사념처(四念處)라 한다.”고 되어 있다.
염처 즉 사티(sati)란 ‘있는 그대로 보는 것 (bare attention)’을 의미하며 몸·느낌·마음·법의 염처 네 가지가 있다. 사념처를 포함한 모든 수행의 단계를 37조도품(助道品)이라 하여 37가지로 나타낸다. 이에는 사념처·사정근(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가 있다. 이 수행을 하는 스님들은 마을의 사찰이 아닌 숲속의 사찰에서 별도로 수행을 한다.
이들은 새벽 4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거의 대부분을 수행으로 보낸다. 이들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을 지니기 때문에 재산이라곤 4자구(資具) 즉 의복·음식·침구·의약품과 물주전자, 약간의 책 등 만을 지니고 있으며 무소유의 승단 정신을 실천하여 시중의 스님들처럼 피릿이나 공양 등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스리랑카 남부의 ‘섬의 암자 (The Island Hermitage)’나 중부 불치사(佛齒寺)가 있는 옛 도시인 켄디 주변의 ‘숲속의 암자 (Forest Hermitage)’와 ‘간두보다 선센터’ 등이 유명하나 웬만한 사원은 거의 대부분 비파사나를 수행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필자는 스리랑카 남부 엘피디에 마을 근처의 사원에서 수행했는데 이 사원은 마을에서 수 킬로 떨어진 정글 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원은 1958년 수행하던 스님이 표범에 물려 죽는 사고가 났을 정도로 정글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도 하루 한끼만 공양하는 일종식을 철저히 지킨다. 더욱 특기할 만한 것은 신도들이 준비한 공양을 가지고 스님들의 수행처까지 오는 것이 아니라 일주문 옆의 공양소가 따로 있는 것이었다.
하루에 한 번 하는 공양이지만 공양 때가 되어서 신도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왼손에 발우를 받쳐들고 오는 스님들의 행렬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스님들은 법랍순으로 수행처에서 내려와 공양소로 걸어오는데 그 순간 무시무시한 정글은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바뀌고 마치 아라한들이 천상을 거니는 것 같다.
10. 종단은 셋, 배는 하나
스리랑카 승단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과거 끊겼던 법맥을 태국으로부터 다시 이어와 현재 스리랑카의 최대 종단이 된 씨암종, 미얀마에서 받아들인 아마라푸라종과 라만야종이 그들이다.
이들 종단은 출가를 허용할 때의 신분의 문제나 승복의 착의법, 구족계단의 설립 등 소소한 몇 가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별 차이가 없다. 출가할 때의 신분의 문제는 카스트와 관련이 깊은데 씨암종의 경우는 아직도 고위가마라는 농부 이상의 카스트에 속한 이들만 승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고 스리랑카에 카스트가 만연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리랑카에도 인도 문화의 특성의 하나인 카스트가 있었지만 평등을 내세운 불교가 전래되면서 아주 오래 전부터 카스트는 무너졌으며 지금은 교통의 발달과 도시화의 진행 등으로 거의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 세 종단으로 이루어진 스리랑카 불교의 특징은 화합이다. 팔리 경전을 소의 경전으로 하고 수행법이나 다비식 등 각종 의식이 같아서 스리랑카에서 의식을 하고자 하는 신도들은 아무런 혼돈 없이 동일한 내용의 의식을 치룰 수 있다.
승려들 사이에서도 종단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씨암종의 승려가 아마라푸라나 또 다른 종단의 사찰에 기거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으며 다른 종단의 승려들 또한 마찬 가지이다. 이 또한 종단간의 위의의 문제로 보이지 않는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스리랑카 종단에는 총무원이라는 상설기구가 없다. 교구에서도 그렇고 지역별로도 그렇다. 평소에는 진정한 정신적인 지주이신 종정 스님만 계시다가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중진 스님들이 모여서 상의를 하고 필요한 경비는 각 사원에서 갹출하여 행사를 치른다. 본인이 기억하는 중진 스님들의 회의로는 1988년 당시 스리랑카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JVP라는 반정부 단체의 문제였던 것 같다.
이후에도 정부 정책에 대해 조언을 할 필요가 있을 때 이런 회의가 열린다. 이를 보고 비효율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어느 나라의 불교는 효율성 찾다가 수행도 제대로 못하고 4년에 한 번씩 큰 싸움을 하느냐고 반문하면 우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스리랑카의 승단을 보면 화합할 수 없는 승단은 출발점에서부터 승단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11. 스리랑카의 내전, 그리고 불교가 하는 일
스리랑카 내전은 종족 분쟁인가 아니면 종교 분쟁인가?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우리 나라의 한 일간 신문은 다른 신문들과는 달리 유독 스리랑카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스리랑카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무척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보이고 있는 깊은 관심은 스리랑카를 불교국가로 몰아세우면서 불교도들 역시 그들이 신앙하는 종교처럼 잔인한 전쟁을 일삼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들의 기사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어처구니없게도 불교도들이 행하는 선행은 쏙 빼고 그 지역의 안 좋은 부분을 강조하면서 불교도들 역시 전쟁을 좋아하는 것처럼 편집해서 기사로 내보낸다.
인류 역사에서 불교를 믿는 정치 집단이 공격적인 전쟁을 한 적은 결코 없다. 많은 이들은 지금의 스리랑카의 내전을 불교도와 힌두교도의 싸움으로 몰고 가려 한다. 스리랑카의 주요 종족인 싱할라 족과 분리 독립을 원하는 타밀 족의 대부분이 믿고 있는 종교가 불교와 힌두교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 같다.
하기는 여기에 힘을 보태주려는 듯 과거 김영삼 대통령 시절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정권의 종교 편향을 꾸짖고 공정한 정책 수행을 촉구하면서 신문에 게재한 광고에서조차 스리랑카의 내전을 종교 분쟁으로 서술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교인들 스스로 누워서 침뱉는 일을 한 것이다. 스리랑카의 내전은 종교 분쟁이 아니라 종족 분쟁이다.
산업혁명을 통해 막강한 힘을 구축한 영국인들의 탐욕은 스리랑카라는 조그만 섬나라를 온전하게 버려둘 수 없었다. 무력으로 스리랑카를 지배하던 영국에게 스리랑카는 단지 원료 공급국이자 자신들의 생산품 소비 시장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은 스리랑카의 정신인 불교를 우습게 보았다.
스리랑카 인들이 스리랑카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영국의 식민 정권에 대해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자 영국인들은 그때부터 인도 남부의 타밀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와서 대체 노동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강제 이주를 당했던 타밀 인들의 후손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신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의 자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종족 갈등의 뿌리이다.
이런 뿌리를 단지 스리랑카에서 싸운다고 불교와 힌두교의 종교 갈등으로 보다니? 이런 종족 갈등의 와중에 스님들이 보여주는 행위는 보살행 그 자체이다. 수시로 타밀 분리주의자와 정부군의 대표를 만나 평화를 호소하는 스님, 전장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부상 군인이나 전쟁터와 가까워 폐허가 된 마을의 주민들을 위로하는 스님, 마을의 어린이를 위하여 각종 사업을 전개하는 스님 등 이들은 모두 목숨을 내맡긴 채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들 스님들의 공통된 의견은 마치 간디가 인도가 나뉘는 것을 반대했던 것처럼 나라가 나뉘게 되면 평화는 영원히 요원하다는 것이다. 전쟁과 테러,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수행자로서의 길을 가고 있는 그곳 스님들을 보면서 진정으로 숙연해진다. 아무것도 없는 듯하나 필요한 것을 다 갖추고 있는 나라 스리랑카에는 무엇이 있는가? 불교를 공부하러 온 이들 중에 어떤 이는 배울 것이 없는 나라라고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할 것이 많은 나라라고 이야기 하니 참으로 종잡기 어려운 나라인데, 내가 보기에도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것 같은 나라임은 틀림없다. 지저분해 보이기도 하고 또 느려서 화끈(?)하지도 못하고.
일반 사회뿐 아니라 불교조차도 그러하다. 일반 기업이나 학교에 서류 하나 제출하면 그 결과를 받는 데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심지어는 한국에서는 하루면 될 일을 해결하는 데 6개월이 걸린 적도 있다. 그런데 후일 생각해 보니 그 과정이 나에게는 수행이었다. 일체유심조라고나 할까. 서둘러 결과를 보려 하고 또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른 일을 도모하는 데 이력이 나 있던 나에게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수행이었다.
스리랑카! 벅찬 이름은 벅찬 상태로 남아 있어야 더욱 가슴이 뿌듯한 것이리라. 그곳에서의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의 체험에서 비록 그곳이 혼돈의 와중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곳의 생활이 나에게는 삼세(三世)를 확인하는 도량이었다.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가난하고 더러운 곳이라 하더라도 부처로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곳, 스리랑카에서 태어나 여법하게 수행하고 아라한이 되었으면 하는 자그만 바람을 심연에 새겨본다.
송 위 지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과 및 스리랑카 국립 케레니야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교육 연구소 진(眞) 소장. 논문으로 〈팔리 사티파타나 숫타와 한문 염처경에 대한 비교 연구〉 〈장아함 세기경과 팔리경전 비교 연구〉 〈존재의 분석으로서의 염처〉 등이 있다.
100일 동안 경험한 미얀마 불교 (출처 : 불교평론 3호)
찬매 예이타 명상 센터 단기출가기
강은애
- 목 차 -
1. 이슬람에서 불교학으로
2. 미얀마에 옷깃을 스치게 된 경위
3. 미얀마 인의 불교 체험, 신퓨(shinpyu)
4. 단기출가 감행
5. 우안거 중 에피소드들
6. 수행의 나날들
7. 앙곤 시내 불교 유적지
8. 미얀마의 불교 유적지
9. 만달레이에서의 추억들
1. 이슬람에서 불교학으로
미얀마라는 미지의 나라와 인연을 맺게 되어 이렇게 미얀마 불교 체험기까지 쓰게 될 줄은, 그리고 논문으로까지 관심이 넓혀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던 일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줄곧 한국에서 자란 나에게 불교는 익숙한 문화체계로 나의 생활에 스며들어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불교에 대해 공부를 한 적도 없었고, 절과 인연이 깊었던 것도 아니었다.
석사 논문으로 수피즘(Sufism:이슬람 신비주의)에 대해 쓴 나는 박사 과정에 입학해서야 비로소 불교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 관심 주제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에서 내적인 수행의 경향이 강한 수피즘이 나의 호기심을 끌었듯, 지금 역시 불교 수행론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이슬람이 인도나 중국으로 전파될 때 정통 신학(순니파)보다는 수피즘이 그 관용적인 성향으로 인해 현지인들에게 더욱 환영을 받고, 이슬람 선교의 전도사 역할을 하였는데, 이 와중에 수피즘 역시 불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양자가 내세우는 교리나 사상(세계관, 우주관)은 다를지라도 궁극적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상에 드러나는 인간의 내적인 체험이나 수행의 방법은 서로 유사하거나 또는 서로 유용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상호간의 교류가 용이하였던 것 같다. 이 주제는 좀 더 심도 있게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라 생각된다.
2. 미얀마에 옷깃을 스치게 된 경위
95년 박사과정에 입학한 나는 두 달 정도 학교를 다니다 결국 휴학을 하고 정처없는 여행(방황?)을 떠나게 되었다. 학문과 수행을 현실 속에서 병행하고 싶었던 나는 그 당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나 자신의 문제가 더 컸음을 지금은 인정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외부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던 터라, 환경을 바꿔서라도 나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현 상황이 보다 더 만족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변화의 주체가 나임을 자각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여행 일정에 처음부터 미얀마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얀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떠남 자체가 어떤 계획하에 진행되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계획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미얀마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단기출가후 미얀마 재가 여신도(오른쪽)와 함께. 여신도가 입고 있는 복장은 여신도들이 수행할때 입는 틸라신복이다.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삶에서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보다 근원적으로는 이 세상에 툭 던져진 것만 같은 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자서 진통을 앓고 있을 때였다. 여행중 우연히 알게 된 한국인으로부터 미얀마의 명상 프로그램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어떻게 미얀마로 들어갈 수 있으며, 어디를 찾아가야 하는지에 관해 정신없이 들었다. 무슨 계시라도 받은 듯 조금은 흥분하며 인도로 향하려던 계획을 바꿔 미얀마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한국인으로부터 얻은 정보에 의존하여 양곤으로 향하였다. 일러준 대로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찬매 예이타 명상센터(Chanmyay Yeiktha Meditation center)로 갔다.
미얀마 상황에 대해 전무한 상태였으므로 무조건 기사 아저씨에게 맡겨 놓는 수밖에 없었다. 운좋게도 무사히 센터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는 이미 몇 분의 한국인 수행자들이 있었다. 도착한 그때가 마침 우안거(雨安居:waso, 미얀마력 3월, 양력 6∼7월) 기간이라 센터의 원장격인 우 자나카비왐사 사야도(U Janakabhivamsa Sayadaw)4)께서 센터에 상주하고 계셨다.
우안거(雨安居)가 아닌 때는 주로 외국으로 설법 여행(Dhamma tour)를 떠나신다고 하였다. 센터에 도착한 지 몇 일이 지나자 한국에서 몇 사람이 더 우안거(雨安居)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 우안거의 첫째날에는 정성스레 공양물을 준비한 많은 사람들이 센터로 모여들고 아침부터 성대한 행사가 펼쳐진다.
그리고 우안거가 끝나는 날에는 신에게 올리는 등불로 온 마을을 밝히는데 이것은 붓다가 천상에 다시 태어나 그의 어머니에게 아비달마를 설하고 지상에 강림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파고다나 불상 앞에 등불이 켜지고 가정집에서도 불단에 양촛불에서부터 비싼 종류의 등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불을 밝히며, 곳곳에서 폭죽이 터지고 관공서 건물을 화려한 등불로 장식하기도 한다. 특히 이 축제를 전후해서 부모님이나 주위의 연장자, 그리고 스승에게 과일이나 케이크, 롱지(longyi)5) 등을 선물하며 경배한다.
3. 미얀마 인의 불교 체험, 신퓨(shinpyu)
미얀마 풍습에 따르면 남자 아이들은 9∼13세에 신퓨(Shinpyu) 의식을 치르게 된다.
신퓨는 며칠 또는 몇 주간 사원에서 수련을 쌓으며 승려생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아이는 왕자처럼 비단옷을 입고 포좌(砲座)에 실려 사원으로 간다. 머리를 깎고 나면 머리카락은 흰보자기에 싸서 인근 파고다 아래에 묻는다.
고승이 건네는 바리를 받는 것으로 의식은 끝이 나고 아이는 승려생활에 들어간다. 여자 아이들은 이 시기에 귀를 뚫는 ‘나트윈(Nathwin)’을 치르고 아이의 단계를 벗어나게 된다. 신퓨 의식을 치른 이후에도 미얀마인들은 머리를 깎고 승려생활을 반복함으로써 불자로서의 자세와 예절을 익힌다.
이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승려가 되어 살기도 한다. 이 의식을 거치고 승원 생활을 한 후에야 비로소 독립된 젊은이로 인정되어 결혼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하는 것에서 신퓨 의식이 원래 성년식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미얀마 불교도의 대다수가 승려가 되어 승원에서 일정 기간 생활을 하는데 이는 신퓨라는 일종의 성인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 행사의 정점에 가서 두발 같은 온갖 장식품이 벗겨지고 가사가 입혀진다. 붓다가 한 것처럼 모든 세속적 욕망과 쾌락적 삶을 포기하고 열반의 경지를 구득(求得)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모가 기증한 8가지 승원생활의 필수품 하의 가사(thinbain)·상의 가사(eikathi)·망토 가사(dugou)·탁발 그릇(dhabei)·면도칼(thindounda)·바느질 도구(a)·허리끈(gabangjou)·물여과기(jeisi) 을 받아 가지고 승원에 들어간다. 승원에서 수련승으로서 10계를 준수할 것을 서약하면 모든 식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승원에 머무는 동안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승려로서 탁발 구걸의 생활을 해야 한다. 미얀마의 남성들은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승원 생활을 하기를 희망하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실행하고 있다. 이 시기에 불교의 교리나 세계관을 배우는 것 이상으로 계율에 따라 불교도로서의 행동 양식을 몸에 익힌다. 이것은 환속 후의 생활에 있어서도 그들의 행동을 규율하는 배경이 된다.
4. 단기출가 감행
처음 며칠은 다른 미얀마 여자 수행자들처럼 밤색 롱지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어깨에는 밤색의 스카프 모양의 천을 두르고 생활하였다.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단기 출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왕 할 것이면 제대로 형식도 갖추어 수행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가사(袈裟)나 수녀(정녀)복을 입고 지나가는 성직자들을 보면 웬지 모르게 한참을 쳐다보곤 하던 그 미분화된 감정의 덩어리, 항상 마음 한편에 있던 출가에 대한 동경 또는 미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단기 출가를 감행하게 하였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너무나 해보고 싶었던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기조차 하였다.
무의식 속에 항상 억압되어 있던 무언가가 해소되어지는 느낌조차 들었다. 먼저 미얀마 여자 출가승6)들이 입는 분홍색 비구니 옷을 마련하기 위해 미얀마 시장에 나가 옷감을 끊고, 센터 안에서 신을 하얀색 슬리퍼, 그리고 간단한 생활 필수품 등을 사서 센터로 돌아왔다. 남자(현지인이든 외국인이든)가 출가 할 때는 후원자가 정해져 그 사람이 수행하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준다.
이때 잠시 느낀 나의 단상은 수행의 세계에서조차 여성은 늘 소외되고 있는 존재이구나 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수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고, 그 순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림이 수행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항변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미얀마 여자 출가승인 틸라신 투담마사리와 미얀마에서 이미 몇 년의 수행 경력이 있는 한국 여자 출가승의 도움으로, 다른 한 명의 한국인 여자 수행자와 함께 우 자나카비왐사 사야도(U Janakabhivamsa Sayadaw)로부터 수계를 받아 출가하게 되었다. 몇 년 간 길렀던 긴 머리를 자르고 삭발한 머리를 감으려던 순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물컹하게 감촉되는 두피의 느낌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난생 처음 삭발한 민둥 머리를 느껴 보았던 것이다. 그와 함께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고등 학교 때부터 시작된 나의 긴 편력, 이렇게 먼 이국에까지 와서 삭발하며 내가 찾으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내몰고 있는 것일까? 순화되지 않은 채 날뛰는 그 원초적 에너지. 이렇게 떠돌 수밖에 없는 알 수 없는 답답함, 풀리지 않는 내적 갈증, 나를 옭아매어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무서운 그 무엇. 미얀마에서 3개월간의 위파사나 명상은 나를 깊이 만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고, 혼돈스러웠던 많은 것이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명상 중에 있었던 구체적 체험이나 느낌은 이제 아련한 추억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 기억의 단편인 노트조차 나의 수중을 떠난 지 오래이다. 또한 명상 기간 중에는 일체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어차피 지금의 나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생생한 체험을 전하지 못해 미안하고 아쉽기만 하다.
5. 우안거 중 에피소드들
우안거 결제 후 한 열흘 정도 지나 센터에 큰 행사가 있었다. 우 자나타 사야도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여 재가 신도들이 푸짐한 선물을 마련한 것이다. 이 보시품들을 2층 법당에 진열해 놓고 제비 뽑기를 하여 비구 스님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대부분 가사나 양산, 생활 용품 등이었지만 그 중에는 꽤 비싼 물건이나 전기 제품도 있었다. 근처의 다른 절 스님들도 아침 일찍 찬매 예이타로 오셨다. 아침 공양을 드신 후 이 행사가 치루어졌는데, 센터 내 모든 사람들이 모여 스님들이 어떤 물건을 뽑는지 지켜보며 즐거워하였다. 늘 정적과 고요함 속에 쌓여 있던 센터가 한바탕 잔치 분위기로 바뀌었다. 다소 긴장되고 힘겨운 수행 기간 중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삭발과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진땀나는 일이었다. 처음 삭발한 후 일주일에 한 번씩 틸라신 투담마사리의 도움으로 삭발을 하곤 하였다. 계속 신세를 지는 것이 미안하여 하루는 마음을 먹고 점심 공양 후 방에서 혼자 삭발을 시도하였다. 조금은 떨리고 할 수 있을까 두려움조차 들었다. 어설픈 손놀림, 면도기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라 한참을 쩔쩔매다 겨우 방향감을 잡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삭발해 나갔다.
머리를 반 정도는 밀었는데, 반 남은 머리가 멀고도 멀게만 느껴졌다. 이대로 나갈 수도 없고, 어슬프게 반만 삭발한 머리를 상상해 보라!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양인지. 그렇게 긴장되고 지루한 시간이 흘러 거의 마무리 될 무렵 ‘휴’ 이제 끝났다고 안심을 하려던 순간, ‘앗’ 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머리를 살짝 베이고 말았다. 이렇게 애숭이 중이 제 머리 깎으며 피를 보게 된 것이다.
이후 다른 스님들의 머리에 난 영광의 상처들이 새삼 눈에 띄여 피식 웃곤 하였다. 며칠 후 여행 비자를 명상 비자로 만드는 데 필요한 사진을 찍기 위해 미얀마 스님의 안내로 다른 외국 수행자들과 함께 센터 근처에 있는 사진관으로 갔다. 나무로 된 계단을 올라간 그곳은 우리 나라 60∼70년대 이발관 같은 음산한 분위기에 사진기 한 대만이 덜렁 놓여 있었다.
일단 안거에 들어가면 외부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나 특별히 사야도의 허락을 받아 사진을 찍으러 잠시 나갈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제서야 겨우 미얀마 거리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랑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였다. 질퍽한 도로를 걸으며 센터로 돌아오는 길에 스치듯 외로움의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 장면을 회상하는 지금까지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리고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 걱정을 잠시 하였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온 50대 정도의 여자 수행자와 방을 같이 사용하였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센터에 와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백발에 아주 맑은 분위기였다. 네달란드에 있는 수행 센터에서 이미 위파사나 명상을 수행한 경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기간에 단기 출가를 하였는데, 수행 기간 동안 나의 좋은 도반이 되었다.
그 당시 센터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많은 외국인 수행자들이 있었다. 호주·캐나다·미국·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네덜란드·베트남 등에서 온 사람들과 미얀마 남녀 재가 신도들이 참으로 열심히 수행에 정진 하였다. 그때 일상생활 속에서도 실천 가능한 위파사나 수행이 한국의 일반 대중들을 위한 수행 프로그램으로 활용되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였는데, 현재 많이 대중화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좌선(Sitting Meditation)·경행(Walking Meditation)·일상 생활 관찰하기(Daily Life Meditation)가 주된 명상법으로, 그 중에서 일상 생활 관찰하기는 바쁜 사회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아주 유용한 수행 방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활 속에서 완벽하게 관(觀)할 수는 없겠지만,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삶과 수행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위파사나 수행법이 한국에 점진적으로 소개되어 수행법에 목말라하는 많은 사람들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갈시켜 주고 있는 것 같아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된다. 대승불교인 선불교의 수행법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한국의 현 시점에서 남방 불교의 수행법을 접할 수 있는 장들이 마련된 것은,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된다.
6. 수행의 나날들
하루 일과는 아침 3시 30분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4시에서 6시에 사이에 경행 및 좌선, 6시부터 7시 사이에 아침 공양을 하는데, 간단한 죽 종류가 마련된다. 7시부터 10시 30분까지 경행 및 좌선 수행을 각자 법당에서 행한다.
10시 30분부터 12사이 점심 공양을 한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상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상이 구분되어 마련되는데, 아주 풍성한 상차림이었다. 이후는 오후불식(午後不食)으로 간단한 음료 이외에 일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12시부터 5시까지 경행 및 좌선을 하고, 5시부터 6시 30분까지 법문 및 음료수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있다. 6시 30분부터 10시까지 경행 및 좌선을 하고, 10시 이후에는 자율 정진을 하게 된다. 점심 식사 후 외국인들이 각자 법당에서 좌선이나 경행 수행을 하는 동안, 미얀마 현지인들은 1층 법당에서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는다. 이때 법당에서 들려오는 팔리 어 삼귀의 독송 소리와 대중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수행의 분위기는 장엄하고도 엄숙하였다.
나모 탓사 바가바토 아라하토 삼마삼붓닷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ambuddhassa:존귀한 분, 공양받을 만한 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우안거 동안 외국인들은 일주일 두 번 사야도로부터 인터뷰를 받는다. 자신이 수행하면서 느꼈던 바를 점검받거나, 의심나는 것을 자유롭게 물을 수 있다.
아침 8시 외국인 비구의 인터뷰가 있고, 오후 6시에 외국인 여자 수행자(nun)의 인터뷰가 있다. 미얀마 신도들이 스님들에게 갖는 존경심은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 같았다. 큰스님을 뵈면 바깥일지라도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미얀마 재가 신도들도 스님들께 정해진 시간에 인터뷰를 받는데, 그 진지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엄숙해 보였다. 부처님 당시 녹야원이나 죽림정사 등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어울려 있는 풍경이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점심 공양 후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물론 이 시간조차도 끊임없이 관하여야 하는데 시종일관 잘 관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주로 2층 법당에 가서 수행하였다.
1층 법당에서 미얀마인들을 위한 법문이 있을 때는, 외국인 여자 수행자들도 남자 수행자들이 주로 수행하는 2층으로 올라가 명상할 수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갈 때도 발걸음의 듬(lifting)과 밈(pushing) 그리고 내림(dropping)을 관하면서 천천히 장소를 이동하여야 한다.
2층 법당은 큰 홀로 되어 있어 경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법당 옆으로 난 발코니에서도 슬로우 모션으로 느릿 느릿 경행하는 수행자가 한두 명 있었다. 그 한가롭고 정적인 분위기, 물론 내면에서는 큰 전쟁이 치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때는 우기(雨期)라 2층 법당에 올라가 좌선을 얼마쯤 하다 보면 거의 같은 시간, 거의 같은 자세로, 거의 같은 부위에 통증을 느끼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장대비가 쏟아 붓는다.
그 청량한 느낌. 몸은 피곤하고, 다리는 아파 자세는 바꾸고 싶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 힘들어 할 때 구세주라도 되는 양 시원하게 쏟아지는 장대비는 나를 각성시켜 주는 신호탄 같았다. 미얀마 명상센터에서 위파사나 명상을 하며 흘린 눈물이 아마도 한 양동이는 될 것 같다. 좌선을 하다보면 슬픔도 아니고, 그렇다고 후회나 비탄의 감정이 이는 것도 아닌데,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뚝뚝 떨어지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하였다.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위파사나 명상을 하면서 고질적인 습관 하나를 지켜볼 수 있었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 폭죽 터지듯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생각의 관성 작용 때문에, 이러다 정신 분열증에 걸리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던 그 습의 뿌리를 발견하여, 뚜렷이 관(觀)함으로써 긴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다시 이 질병이 도지려 함을 본다. 지켜보는 수밖에…….
7. 앙곤 시내 불교 유적지
수행 중에는 묵언이 원칙인데, 센터 내에서 미얀마 현지인들과 몇 마디 주고 받던 중 알게 된 한 미얀마 아주머니께서 나의 후원자가 되고 싶다고 하셨다. 일견 당혹스러워 주저하고 있는데 그분이 나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튼 이렇게 그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여자 수행자(nun)에게는 후원자가 없다.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분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잊을 수가 없다. 절에 오실 때면 언제나 비누나 기타 생활 필수품 한두 가지를 챙겨 주시던 그분의 따뜻한 마음과 딸의 해맑은 모습은 지금도 나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고 내 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거하시던 한 아주머니 역시 새삼 기억에 떠오른다. 슬그머니 바나나 한 다발을 웃으며 건네주시고는 쑥스러운 듯 돌아가신던 그 뒷모습. 센터에서의 3개월은 나에게 결코 짧은 시간만은 아니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던 내가 절의 규율에 맞춰 생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안거 동안의 수행은 많은 것을 투명하게 해주었고, 그후 미얀마를 떠나 17개월 정도 계속된 배낭 여행의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던 것 같다.
3개월의 안거가 끝나고 환계하기 직전 나의 후원자였던 분이 자기 집에 초대해 주셨다. 처음으로 명상 센터 밖의 불교 문화를 접한 날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의사로 그 당시 다른 나라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라고 하였던 것 같다. 생활이 풍족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미얀마 중산층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가구도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우리 나라 뒤주 같은 나무 궤짝에 옷들을 넣어 두었다. 집에는 고승들의 사진이 많이 놓여 있었다.
어떤 스님은 신통한 능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간다고 하였다. 아마 미얀마 인들도 스님들의 신통력이나 이적에 대해 꽤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친정 어머니, 그들 모녀와 함께 인도의 오토 릭샤 같은 자동차를 타고 쉐다곤 파고다로 갔다. 미얀마를 흔히 탑의 나라라고 하는데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가 그 중 가장 유명하다.
미얀마의 상징으로 높이 99m의 황금 첨탑의 위용을 갖춘 화려한 쉐다곤 파고다는 양곤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데, 2,500년 전에 조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상인 형제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머리카락을 받아 이곳에 모신 것이라고 한다. 이 탑에 사용된 금만도 60톤에 달하며, 수많은 다이아몬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파고다로 올라가는 길도 어마어마하고 파고다 자체의 화려함과 웅대함에 그저 놀라기만 하였다. 무엇보다 파고다 이곳 저곳에 자리잡고 앉아 명상이나 기도에 전념하거나, 향이나 초를 피우고 참배하는 미얀마 인들의 모습에서 이곳은 불교가 바로 이들의 삶이며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고다 입구에 늘어선 가게에서 미얀마 염주를 몇 개 샀다. 3개월 간의 안거를 무사히 마치고, 미얀마 승복을 입은 채, 미얀마 인들 속에서 쉐다곤 파고다를 참배하는 기분이 묘하였다. 낯설면서도 포근한 느낌이었다. 인종이나 국적을 초월하여 불교 아니, 인간의 원초적 종교 심성이 우리를 하나로 이어준 것 같다.
8. 미얀마의 불교유적지
안거가 끝나고, 한국인 몇 분과 함께 미얀마 현지인의 안내로 양곤 시내에 있는 박물관, 기념품상, 술레 파고다 등을 돌아 보았다.
술레 파고다(Sule Pagoda) 역시 시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파고다들과 마찬가지로 2,0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여러 차례 보수, 증축되었다고 한다. 현재 주위는 상가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안에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잠시 참배하고 나왔다.
우자나카 스님의 배려로 외국인 수행자들은 양곤 근처의 불교 유적지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때 나는 이미 환계(還戒)를 한 뒤라 분홍색 수행자(Nun) 옷을 벗고 일반 재가 여신도들이 입는 밤색 롱지로 갈아 입었다. 양곤에서 약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고는 남부 미얀마의 수도이자 거대한 도시로 몬 왕조 시대인 573년에 건설되었다. 칼야니시마(Kalyani Sima) 근처에 위치한 셰터랴융(Shwethalyaung)의 불상은 길이가 55m, 높이 16m나 되는 거대한 와불(臥佛)이다.
994년에 조성되어 여러 번의 수난과 이에 따른 보수 과정을 겪었으며, 125년 동안 가려져 있다가 1881년 영국인들이 양곤-바고 간 철도 건설 사업을 하는 도중에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바고로 불교 유적지를 보러 가던 중 길가에 여러 신들을 모셔 놓은 사당 같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아마 민간 신앙인 ‘낫(nat)’을 섬기는 곳인 것 같다. 현지인의 점심 공양이 있어 우리 일행은 그 집으로 향하였다. 길가에 늘어선 목재 건물들은 아주 낡아 있었고, 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하수 오물은 그대로 하천과 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이 물을 그대로 식수로 사용하여 말라리아·설사·이질·결핵·간염이 만연하다고 한다. 농촌 지역의 가옥은 주로 대나무집으로 바닥, 벽, 지붕 할 것 없이 모두 대나무가 주재료이다. 대나무 집은 대체로 두 칸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하나는 부엌이나 저장 창고로 쓰이고, 나머지 다른 공간은 침실과 거실로 사용하고 있다. 집안에 변변한 가구가 없는 것이 특징일 정도로 미얀마 인들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처음으로 미얀마 스님들이 신도 집에서 공양받는 모습을 보았는데, 먼저 발을 씻을 물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가족들이 스님들께 예를 올린 후 공양을 올렸다. 우리 일행도 정성껏 마련해 주신 음식물을 대접받고 다시 유적지 여행에 올랐다. 바고에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차이 푼(Kyaik Pun)은 신소푸 여왕에 의해 왕으로 지명된 담마제디 왕이 1476년에 건립한 것이다.
사각의 거대한 돌 기둥에 사방으로 불상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데 높이가 30m나 되었다. 서쪽 방향에 있는 불상은 1930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파손되어 있었다. 하루 일정의 여정을 마치고 센터로 돌아왔다. 며칠 센터에 머물면서 인도 비자도 발급받고, 파간과 만달레이 여행 계획을 세웠다. 미얀마에서 외국인이 개별적으로 여행을 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과 애로 상황이 있었다.
우선 정부가 지정한 숙박 시설에 머물러야 하며, 또한 그 비용을 태환권이나 달러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기차 비용은 현지인의 몇 배가 되는 것 같았다. 결국 버스로 여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양곤 교외의 허름한 버스 터미널에서 겨우 표를 구해 파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정확하게 몇 시간 걸렸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거의 하루가 걸려서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다. 광활한 미얀마 대륙을 터덜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달렸다. 때때로 물소들이 늪 속에서 허느적 거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중간 휴게소 같은 곳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저녁 무렵 파간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당혹스러웠던 일은 잠시 휴식 및 볼일을 볼 수 있게 버스가 서자, 미얀마 사람들은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제히 버스 주변에서 일을 보는 것이었다. 모두 롱지를 입고 있으니 그대로 앉기만 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다. 바지를 입고 있던 나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인도에서나 자연스러운 일인 줄 알았는데 미얀마의 화장실 문화도 역시 아주 간편하였다. 아주 늦은 시간에 파간에 도착하여 어렵게 지정된 숙소를 찾아 방을 구하였다. 다음 날 자전거를 빌려 타고 파간의 파고다 순례에 나섰다. 수많은 탑의 숲, 그 속에 조각된 어마어마한 불상들, 그리고 파고다 위에 올라가 내려다 본 파간의 전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파고다 사이의 넓게 뚫힌 길을 자전거로 달리며 바라본 파간의 저녁 노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를 가슴에 안겨주었다. 지금도 때때로 그 하늘, 그 노을을 상상하며 마음 속 여행을 떠난다.
9. 만달레이에서의 추억들
파간에서 만달레이로 향하였다. 만달레이는 좀더 상업 도시의 냄새가 풍기며 번화해 보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주인이 근처에 축제가 있다고 알려주어 그곳으로 가보았다.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통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설 무대 위에서 아마츄어 가수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사원 주변으로는 여러 가지 불교 용품과 불교 의례에 필요한 울긋 불긋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큰 모조 지폐로 부채 모양을 만들어 진열하고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음날 만달레이 시장에서 이것 저것 장 구경을 하다가 양곤의 명상 센터에서 나의 머리를 삭발해 주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던 틸라신 투담마사리를 우연히 만났다. 양곤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만달레이 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니 너무나 반가웠다. 그녀는 만달레이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중이라고 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보고 있던 투담마사리는 나에게 그녀의 친척집에 함께 가자고 하였다.
친척집은 상업을 하시는 집 같았는데 미얀마에서는 꽤 부유한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식사 대접을 융숭히 받았다. 온 식구들이 신기한듯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안주인 되는 분이 자신의 딸이 입던 미얀마 전통 의상을 내어 주며 입어 보라고 권하셨다. 여자 가족들이 아주 신나 하면서 옷 입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리고는 멋지게 사진을 찍으라며 포즈까지 잡아주는 것이었다. 이방인에게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풀어준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분들의 마음에 항상 평화와 안정이 깃들고,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투담마사리와 남자 친척분이 마하무니 파고다로 안내해 주셨다. 만달레이 공항에서 북서쪽으로 1.5km 지점에 마하무니 파고다가 있었다. 이곳은 원래 1784년에 보도파야 왕에 의해 설립되어 왕국에서 이곳의 동쪽 문 입구까지 벽돌로 포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84년 화재로 파괴되고, 현재의 파고다는 비교적 최근에 완성된 것이다. 이 파고다는 라카잉(방글라데시와의 접경지역)에 있는 묘하웅(Myahaung)에서 만달레이로 가져온 마하무니(Maha?uni:Great Sage)상(像)으로 특히 유명한데, 마하무니 파고다는 이 오래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11세기 파간 왕조의 아노라타 왕도 이를 파간에 가져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보도파야 왕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라카잉에 들어가 옮겨 온 것이라 한다.
3.8m 높이의 이 불상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나, 오랜 시간에 걸쳐 무수한 불교 신자들에 의해 지금은 15cm 두께 이상의 금으로 완전히 씌워져 있다. 그러나 여성은 이 법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금을 기증하고 싶으면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매일 아침마다 불상의 얼굴이 의례적으로 씻겨지며, 매년 2월 초에는 이곳에서 마하무니 파고다 축제가 열려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든다고 한다. 다음날 자전거를 빌려 타고 만달레이 언덕으로 향하였다.
미얀마의 건조 지대에 자리잡은 만달레이는 1856년 민돈 왕이 건설한 도시로 1860∼85년 콩바웅 왕조의 최후 도시가 되었다. 영국이 미얀마를 점령하기 전까지만 해도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수도였으므로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만달레이 시(市)의 북동쪽에 높이 236m의 만달레이 언덕과 기슭에 위치한 쉐 난도(Shwe Nandaw)승원, 쿠토도 파고다(Kuthodaw Pagoda), 마하무니 파고다 등에서 콩바웅 왕조 예술의 순수성을 볼 수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영국의 용병인 구루카 인과 일본 저항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만달레이 언덕에는 곳곳에 불교 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곳의 불교 유적들은 주로 은둔 승려였던 우 칸티(U Khanti)에 의해 조성된 것들이라 한다. 이곳 정상에 오르면 만달레이 시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정상 부근에 거대한 불상(Shweyattaw)이 왕궁을 향해 선채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붓다가 제자 아난다와 같이 이곳에 왔을 때 지금의 왕궁을 가리키며 지금으로부터 2,400년이 되는 해에 이곳에 위대한 도시가 건설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민돈 왕이 1857년에 아마라푸라(Amarapura)에서 만달레이로 수도를 옮기고 바로 그곳에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며칠 간의 파간과 만달레이 여행을 마치고 양곤으로 돌아온 후, 미얀마를 떠나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우연한 기회에 미얀마에 100여 일 머무르면서 깊이 있는 위파사나 수행은 하지 못하였으나, 미얀마 불교의 살아 있는 모습을 조금이나마 스케치하듯 맛볼 수 있었다.
인도에서나 자연스러운 일인 줄 알았는데 미얀마의 화장실 문화도 역시 아주 간편하였다. 아주 늦은 시간에 파간에 도착하여 어렵게 지정된 숙소를 찾아 방을 구하였다. 다음 날 자전거를 빌려 타고 파간의 파고다 순례에 나섰다. 수많은 탑의 숲, 그 속에 조각된 어마어마한 불상들, 그리고 파고다 위에 올라가 내려다 본 파간의 전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파고다 사이의 넓게 뚫힌 길을 자전거로 달리며 바라본 파간의 저녁 노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를 가슴에 안겨주었다. 지금도 때때로 그 하늘, 그 노을을 상상하며 마음 속 여행을 떠난다.
Ⅴ. 상좌부불교의 수행
또 다른 선, 위파사나의 이해 (출처 : 불교평론 2호)
김 열 권
- 목 차 -
1. 들어가는 말
2. 부처님은 어떻게 깨달음을 발견했는가
3. 남방·북방의 위파사나
4. 중국에서의 위파사나
5. 한국에서의 위파사나
6.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인간은 유한한 시간 속에 살면서 무한한 행복을 추구하는 고유의 본성이 있다. 많은 철학자, 사상가, 종교가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고갔다.
유한한 시간은 생로병사를 뛰어넘지 못한다. 생로병사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어떠한 부귀영화, 행복, 학문의 세계도 시간이 지나간 후에 되돌아보면 한갓 꿈과 다름없다.
부처님 역시 왕궁의 부귀를 누리지만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이상 그 부귀영화도 꿈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직감하고 생사를 뛰어넘는 무한한 세계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부처님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부처님을 능가하는 사상가, 철학자, 종교가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생사윤회에 있어 부처님만큼 명쾌하고 구체적인 길을 제시한 수행자는 역사상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부처님이 발견한 깨달음의 세계와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법은 시대와 문화, 환경을 달리하면서 그 원리는 같지만 방법이나 표현 면에서 다르게 변천되어 왔다.
그리하여 부처님이 깨달은 핵심 내용과 구체적인 실천법의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면 자칫 본래의 불법의 길에서 멀어질 수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부처님 이전의 수행법, 부처님 수행법의 핵심, 그 이후 부파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현재 우리 나라 수행자가 직면한 문제와 향후 방향에 대해서 위파사나(vipa쳒yana?)를 중심으로 필자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2. 부처님은 어떻게 깨달음을 발견했는가
인간의 의식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대상을 갖는 의식으로 불교에서는 오온(五蘊)이라 불린다.
오온의 흐름이 12연기이다. 다른 하나는 오온을 꿰뚫어보는 반야관(般若觀)이다. 전자의 수행은 오온 내에서 대상에 정신을 통일하는 사마타(s첺matha : 선정) 수행법이고 후자는 모든 대상을 가진 오온의 현상 이전을 반야관으로 꿰뚫어 본질에 계합하는 위파사나 수행이다.
사마타 수행은 불법 이외에 요가, 선도(仙道), 타종교 등에도 발견되지만 위파사나 수행은 불교 내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사마타 수행은 시간의 흐름의 반복인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위파사나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영원한 평화를 실현한다.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이해하면 불법과 타종교 수행과의 차이, 정(正)과 사(邪)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다음에서 부처님 이전의 수행과 그 이후를 살펴봄으로써 불법의 정수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을 터득하여 우리 자신이 영원한 해탈로 가는 불법을 지금, 여기에서 구현할 수 있다.
1) 부처님 이전의 수행법
부처님 이전의 수행은 흔히 요가로 불린다. 기원전 2500년경 모헨조다로의 출토 등에도 요가의 좌선 자세가 있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2세기에서 9세기 무렵 사이에 편찬된 《리그베다》의 문헌 중에도 요가라는 말이 등장하지만 구체적인 수행법의 설명은 없다.
그후 요가가 수행법으로 사용된 것은 《카타카 우파니샤드》 이후라는 것이 통설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위파사나 이외는 모두 사마타 수행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수행은 대상을 갖는 오온에 의지하여 오온의 흐름인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출가하여 그 당시 내려오는 모든 수행법을 통달했지만 생사해탈은 하지 못했다. 부처님은 자신이 발견한 위파사나에 의해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즉 부처님 이전의 수행법에서는 불법의 핵심인 중도(中道)·연기(緣起)가 발견되지 않는다.
중도·연기를 현상과 본질에서 반야관으로 볼 때 탐·진·치를 완전히 제거하고 생사 없는 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사마타 수행은 불교의 무의식 세계인 8식 아뢰야식(오온의 識에 해당)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1) 고대 베다의 수행과 우파니샤드
고대인들의 종교 발상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초자연적인 현상 즉 천둥 같은 천재지변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신(神)을 설정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근원적인 실상을 찾는 것인데, 그것을 신에서 찾는 경우와 인간 내부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인도의 종교 발달 역시 처음에는 신에서 궁극적인 실상을 찾다가 차츰 인간 중심으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다.
① 《리그베다》의 수행
《우파니샤드》 이전의 수행이다. 《리그베다》는 전편에 걸쳐 신에 대한 찬미와 기도, 기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심 내용은 명상적 측면, 관조적 측면, 정화의 측면으로 볼 수 있다.
② 《우파니샤드》의 수행
《베다》의 경전 최후기(B.C.600∼A.D.300)에 형성된 《우파니샤드》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넘어가는 종교철학으로서, 그 핵심 내용은 범아일여(梵我一如)로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생명은 업(業, karma)에 따라 윤회의 길을 반복하는데 인간은 선정(禪定), 고행에 의해 범아일여에 도달함으로써 윤회에서 해탈하여 상주불멸의 범계(梵界, Brahmaloka)를 실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현상계를 허망한 것으로 보고 브라만을 유일의 실재로 보는 관념론, 범아에 의하여 물심 양면을 대표시켜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려는 발생론적 실재론, 또 최고 브라만에 의한 유신론적 체계 등으로 형성되었고, 그후 후기 《우파니샤드》를 거쳐 여러 갈래의 인도철학을 낳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간단하게 브라만, 아트만의 개념을 파악하고 그 수행상을 살펴보겠다.
고대 인도의 명상가들은 브라만을 신성하고 영력(靈力)에 가득찬 《베다》의 언어로 이해했다. 그후로는 《베다》의 언어 속에 가득한 힘 이 세상을 움직이는 신성한 원리, 즉 이 현상의 배후에 있는 불변의 진리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신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을 상주론인 전변설(轉變說)로 본다. 즉 우리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초감각적인 부분과 감각으로 감지되는 내재적인 부분의 두 가지 면이 있다 아트만은 호흡을 뜻하는 말로 자아(自我), 영혼(靈魂), ‘내면 의식’, ‘자각력’을 뜻하는 말이다.
아트만에는 네 가지 특성이 있다. 가장 작으면서 가장 크다. “심장 속에 있는 나 자신이니 쌀알보다도 작고 우주 허공보다도 크니 바로 나 자신이다.”(찬도갸 우파니샤드) 이것은 화엄경의 티끌 속에 우주가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아트만은 이 육체와 우주에 두루 편재해 있다. “아트만은 모든 것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 아트만 속에 포함된다.”(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아트만은 불생불멸적인 존재이다. 아트만은 모든 존재의 내면에 있는 내적인 통제자이다.
아트만은 자각력의 깊이에 따라 네 단계로 구분 짓는다. 첫번째 단계는 잠 깬 상태이다.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감각기관으로 객관적 사물을 지각하는 차원이다. 두번째 단계는 잠 깬 상태에서 사물들을 지각했던 기억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관을 섞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차원이다. 세번째 단계는 깊은 잠의 무의식 세계로 자신의 본성과 하나가 되어 깊이 휴식하는 차원이다. 네번째 단계는 순수의식 상태로 깊은 잠의 상태에서 자신의 본성과 하나가 되어 휴식에 들어간다. 여기에서는 자각력이 깨어 있는 아트만의 절정의 상태이다. 이 순수의식 상태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근원자의 브라만을 보게 된다. 이때가 “아트만은 곧 브라만이다.”(만두카 우파니샤드). 《우파니샤드》 이후 인도철학의 중심 과제는 아트만을 탐구하고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불교에서는 이 아트만의 실체성(불멸성)을 부정해 버렸다. 《숫타니파타》에서는 아트만을 오온의 미세한 현상으로 보고 무아(無我)로 관찰했다. 여기서 비파사나의 반야관을 중심으로 한 불법 고유의 수행이 탄생하였다. 그것이 12연기에 대한 관찰이다. 위파사나 논고에서 이렇게 장황하게 고대인도의 철학을 설명하는 것은 위파사나의 12연기관을 알지 못하면 중국 선종과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내용은 《화엄경》이나 중국 선종의 자성(自性)의 개념과 유사하다. “브라흐만은 공(空)이다.”(찬도갸 우파니샤드) “지혜가 브라만이다.”(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아트만으로부터 모든 세계·호흡·신(神)들·존재들이 나온다.” “모든 것에 존재하는 당신의 아트만이다.”(아란야카 우파니샤드) 이런 것들은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법계연기와 착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는 오온의 길인 무의식 단계로 제8식 아뢰야식의 영역 중 우주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님이 출가한 후에 찾아간 알라라 칼라마와 웃타카 라마풋타의 경지에서도 이러한 단계는 가능하다. 《우파니샤드》의 구체적인 수행은 소리 중심인 만트라, 빛의 응시, 호흡집중, 아트만의 자각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핵심 내용은 대상에만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이다.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③ 사마타 팔선정 수행
부처님 이전에 벌써 사마타 팔선정의 수행이 정립되어 있었다. 초선정에서 4선정까지는 호흡, 소리, 빛 등의 물질적 요소에 집중하는 것이다.(상세한 것은 필자의 졸저, 《위파사나 I》 참조) 5선정에서 8선정까지는 물질의 세계를 벗어나면서 무의식 세계로 나아가는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이다. 간략하게 무색계 4선정만 《청정도론》에 입각하여 살펴보겠다.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색계 4선정에서 벗어나 집중한 대상을 향하여 ‘끝없는 허공, 끝없는 허공’ 하면서 물질을 대상으로 한 수행에서 벗어난다.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무색계 초선정의 고요하지 못함의 허물을 보아 무색계 2선정에 마음을 기울인다. 끝없는 허공에 따른 의식에 마음을 집중한다. 끝없는 허공이라는 선정의 대상을 벗어나서 끝과 한계의 구분이 없는 의식작용이라고 생각하여 ‘끝없는 의식작용’의 선정에서 지낸다.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식무변처정보다 더 고요한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선정이다. 공무변처정의 끝없는 허공을 관하는 인식작용을 생각하지 않고, ‘없음, 없음’이라고 하거나 ‘조용함, 조용함’이라고 거듭거듭 생각한다.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무소유처정에서 더욱더 정묘로운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선정이다. ‘생각은 병이다. 생각은 종기와 같다. 생각은 박혀 있는 가시와 같다. 거친 생각은 없으며, 섬세하고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아니한 무색계 4선정은 조용하고 높다.’ 이렇게 무소유처정에 탐착하던 것을 다하게 하여 ‘조용하구나, 조용하구나’ 하고 거듭거듭 생각하며 마음집중을 한다. 무소유처정의 대상과 영상을 거듭거듭 의지하여 반복하면 사라짐이라는 명칭, 없다는 명칭에 비상비비상처정이 생긴다.
《능엄경》에 의하면 공무변처정은 몸이 장애됨을 깨달아 장애를 소멸하고 공(空)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장애가 소멸하고 장애가 없어졌다는 것까지 멸하면 그 가운데는 오직 아뢰야식과 말라식의 미세한 반분만 남게 되는데 이를 식무변처정이라 한다. 공과 색(色)이 모두 없어지고 식심(識心)까지 멸하여 시방(十方)이 적연하여 훤칠하게 갈 데가 없으면 무소유처정이라 한다.
이는 말라식과 아뢰야식이 잠복된 상태이다. 아뢰야식의 종자인 식성(識性)이 동(動)하지 않는 가운데 다함이 없는 데서 다한다는 성품을 발명하여 있는 듯하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다한 것 같으면서 다한 것이 아닌 상태가 비상비비상처정의 상태이다.
이 역시 제8식 아뢰야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님이 처음 만났던 알라라 칼라마는 무소유처정에 있었고 웃타카 라마풋타는 비상비비상처정의 경지에 있었다. 부처님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참으로 부처님은 진솔하게 “내가 정말 생사를 해탈하였는가. 위없는 깨달음은 얻었는가.”라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보리수 아래로 가서 12연기로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셨던 것이다.
2) 부처님의 수행법:위파사나
부처님은 그 당시 모든 수행의 정상인 8선정까지 통달하고서도 생사해탈이나 궁극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홀로 보리수 밑에서 12연기로 깨치셨다. 이것을 4성제로 정리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는 주로 오온 관찰로 지도하셨다. 부처님 수행을 가장 잘 요약한 것이 《대념처경》이다. 이것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1) 몸의 관찰(身念處)
“몸을 정복하지 못하면, 마음을 정복하지 못한다.”고 부처님은 《중부 경전》 36에서 설하셨다. 몸의 관찰은 호흡과 행·주·좌·와에서 몸의 움직임이 중심이다. 몸은 무명·욕망·업·음식·마음으로 생긴 것이다. 몸을 통해서 본래의 마음 자리를 찾는 것이다.
(2) 감각의 관찰(受念處)
감각의 변화를 통하여 몸과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감각에는 좋은 느낌, 싫은 느낌, 중간의 느낌이 있다. 감각을 조건짓는 것은 무명·욕망·업·접촉이다.
(3) 마음의 관찰(心念處)
탐·진·치가 있는 마음과 없는 마음, 무기력한 마음, 산란한 마음, 선정이 있는 마음, 해탈한 마음 등을 알아차린다.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무명·욕망·업·몸과 마음이다.
(4) 법의 관찰(法念處)
법에 대한 관찰은 현상이 일어나기 전과 이후의 상태를 직관적인 의심을 수반하여 회광반조로 의관(疑觀)한다.
① 다섯 가지 장애인 욕망·성냄·혼침·불안정한 마음·회의 등이 일어나기 이전, 진행, 사라진 상태를 입체적으로 알아차린다.
② 오온에 대한 관찰 :부처님 제자들은 대부분 오온에서 무상·고·무아를 보아 깨친다. 오온의 생·멸을 관찰한다.
③ 여섯 감각 기관(六根六境)의 관찰:《능엄경》의 25원통 중 7개를 제외한 18가지 관찰이 여기에 속한다. 육근·육경·육식에서 탐·진·치를 제거한다.
④ 칠각지(七覺支)의 관찰:마음 챙김, 주시인 염각지(念覺支), 법의 선택(擇法覺支), 정진각지(精進覺支), 희각지(喜覺支), 경안각지(輕安覺支), 정각지(定覺支), 사각지(捨覺支) 등을 관찰한다.
⑤ 사성제에 대한 관찰:고(苦)와 집(集)은 현상이고, 멸(滅)은 열반이며, 팔정도는 고와 집에서 열반으로 가는 길로 불교의 모든 수행은 여기에 포함된다.
이상을 정리하면 첫째, 신·수·심·법 4가지를 관찰할 때 팔리어로 보면 처음부터 반야(pan???)에 의지한다. 처음 몸을 관찰할 때나, 해탈된 마음이나 멸의 마음 상태에서도 반야는 있다. 반야로 시작에서 반야의 완성으로 끝난다. 둘째, 사념처는 현상적인 오온과 반야로 바로 들어가는 칠각지로 크게 구분된다. 남방은 현상에서 무상, 고, 무아를 보아 탐·진·치를 제거하고 북방은 칠각지에서 바로 현상 이전의 반야 흐름으로 들어가는 특징이 있다. 셋째, 사념처는 모두 12연기와 관련되어 있다. 불교의 핵심은 12연기에서 중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 당시 요가 수행과 다른 점이며 중국에서의 도가 수행과도 상이한 유일한 불법의 정수이다.
3) 사마타와 위파사나의 차이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리그베다》의 신을 대상으로 한 수행,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무색계 팔선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8 아뢰야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사마타 수행의 한계이다. 《청정도론》에 의하면 사마타 수행의 정의는 심(心)과 심소(心所)가 통일된 것으로, 즉 주관과 객관으로 이루어진 오온(五蘊)이 일시적으로 통일된 상태이다.
위파사나는 오온의 흐름인 12연기를 반야로 관찰하여, 오온에서 탐진치의 흐름을 저장하는 아뢰야식까지 소멸함으로써 생사해탈과 위없는 깨달음이 가능하다. 불성(佛性)은 불성에 의해 발견된다. 그 불성의 빛인 반야에 의지할 때 불성이 스스로 발견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자성인 아트만은 위파사나로 관찰할 때는 오온의 미세한 흐름이다. 이는 《숫타니파타》나 《테라가타(長老偈)》의 목련 존자의 체험담 등에서 밝혀졌다. 부처님 이전의 모든 유파의 궁극적인 경지인 범아일여 역시 제8 아뢰야식의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제8 아뢰야식의 3가지 기능, 즉 종자의 기억, 몸의 유지, 우주의 창조 중에서 우주의 창조 부분이 범아일여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사마타 수행의 최고 선정인 비상비비상처정의 한계점이다. 이를 알기 쉽게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도표에서 보듯이 사마타는 식의 흐름인 오온에 의지하고 위파사나는 오온을 꿰뚫어보는 반야관에 의지한다. 팔리어로 반야(pan???)에서 파(pa)는 ‘여러 가지(무상·고·무아 즉 연기)를 보다’ ‘이전을 보다(直觀, 內觀)’의 뜻이 있다. 사마타에서는 정신통일의 상태까지밖에 이르지 못한다.
여기서 오온의 흐름을 덩어리로 집중하기 때문에 미세한 8식의 흐름을 뚫지 못하고 그 자체를 브라만이나 상주론으로 보든가 아니면 무기공(無記空)에서는 단멸론(특히 行의 흐름에서)으로 떨어진다. 반면 위파사나는 8식의 미세한 오온의 흐름을 무상·고·무아로 보아 현상 이전까지 꿰뚫어보아 열반인 불성의 세계에 계합하므로 깨달음을 얻어 생사해탈이 가능하다. 이것이 부처님이 발견한 위파사나이다.
오온의 현상을 무상·고·무아로 보지 못하면 불성을 보지 못한다. 특히 8식의 미세한 오온의 흐름을 ‘나’로 착각하는 것이 무명(無明)이고, 이로 인하여 삼세에 걸쳐 업이 형성된 것이 12연기에서의 행(行)이다. 이 행이 무의식으로 작용하는 것이 식(識)이다.
여기까지가 12연기에서 8식의 영역인데 여기에는 미세한 오온의 흐름이 있다. 이 이후의 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로병사가 현상적인 12연기의 흐름이다. 결국 오온을 나로 잘못 보았기 때문이다. 오온을 사마타식으로 보면 무명을 뚫지 못하고 오온이 ‘나’로 착각된다.
위파사나에서는 오온을 무상·고·무아로 보아 열반을 실현한다. 이것이 부처님이 《대념처경》에서 말한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인 위파사나이다. 부처님의 모든 제자들은 오온을 관찰함으로써 열반을 실현했던 것이다.
3. 남방·북방의 위파사나
앞에서는 부처님 이전의 사상이나 수행체계를 부처님 수행법인 위파사나와 비교해 봄으로써 불교의 독특한 핵심과 특성을 알 수 있었다.
그 핵심인 연기·중도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르게 변환되어 갔다. 이것을 정확히 이해해야 현대 한국 불교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불교의 역사는 오온과 12연기를 어떻게 보는가, 그 해석의 발달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입멸 후 100∼200년 사이에 부처님 경전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각 부파가 발생한다.
이것이 남방과 북방이 갈라지게 되는 원인이 되는데 그 핵심은 오온과 12연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다. 사실 지금도 부파불교 시대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지면 관계상 수행 위주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연기에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을 보면 중생이 하는 매 행동에 12연기가 동시에 찰나적으로 생멸한다는 찰나연기설(刹那緣起說), 12연기 각 고리가 인과적으로 구속하며 계기(繼起)한다는 연박연기설(連縛緣起說), 12지가 각각 오온을 갖추고 있으면서 삼세에 나누어져 있다는 분위연기설(分位緣起說), 먼 과거의 무명이나 행에 의해 금생의 의식 등이 초래되고 금생의 존재를 조건으로 먼 미래가 결정된다는 연속연기(連續緣起) 등이 있다.
연기의 특성들을 각기 다른 시각에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연기를 부파불교 당시와 그 후 북방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달라진 각도에서 본 내용을 고찰해 보면 현재 남방의 위파사나와 북방의 위파사나의 구체적인 특성을 알 수 있다.
1) 업감연기(業感緣起)
남방불교의 대표적인 연기관으로 일체 현상이 변화해 가는 모습은 중생의 업인(業因)에 따라 생기(生起)한다는 세계관, 인생관이다. 혹(惑)·업(業)·고(苦)가 전전하며 인과가 상속된다는 것이다. 혹은 마음의 병이고, 업은 몸의 악이며, 고는 생사의 과보다. 예를 들면 사람의 경우 몸·가정·국가·사회·세계가 모두 혹·업·고의 삼도가 전개된 것이며, 이 모두가 업인에 의해 이루어져 나타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성을 내면 혹이 되는데 그것이 심하여 칼을 들고 상대를 살해하게 되면 업이 되고, 이 업은 미래의 고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것을 삼세에 걸쳐 설명한 것이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이다. 이것을 현대 남방에서는 연기의 핵심 내용으로 보고 있다.
또한 삼세에 걸쳐 12연기나 오온의 형성 모양이나 현상은 변하지만 그 요소는 변하지 않는다는 법체항유(法體恒有)를 고수하고 있다. 즉 아공법유(我空法有)로 현상은 변하여 아(我)의 실체가 없지만 그 법의 요소는 삼세에 걸쳐 항상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2) 아뢰야식연기(阿賴耶識緣起)
이 연기설은 북방의 불교로 변천하게 된 계기가 되는 연기설이다. 업감연기에서 우리의 신(身)·구(口)·의(意) 삼업에 의하여 조작된 업이 어디에 보존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현재 남방불교는 설일체유부를 중심으로 하여 경량부 이론이 다소 가미된 남방불교의 아비달마에 근거하고 있다. 남방불교에서도 무의식의 세계인 바방가(bhavanga) 의식을 설명하고 있지만 업의 보존에 대해서는 아뢰야식연기만큼 명확하지 않다. 아뢰야식은 정신의 주체인 6식 이외에 발견된 제8식으로 우리가 행한 모든 업력의 종자는 여기에 보존되며, 몸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우주 자체까지도 아뢰야식의 현현으로 보고 있다.
업감연기에서 말하는 법의 실체나 삼세의 업도 모두가 아뢰야식의 현현이며, 아뢰야식에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공법유(我空法有)가 아공법공(我空法空), 만법유식(萬法唯識), 심외무경(心外無境)으로 발전된 것이다.
3) 진여연기(眞如緣起)
여래장연기라고도 하며 아뢰야식연기 다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뢰야식연기설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일체가 모두 아뢰야식의 변화로 나타났다는 유심론(唯心論)이다. 이는 자기의 8식의 전변(轉變)은 유심(唯心)이 성립되지만 타인의 8식 변화, 제법(諸法)은 성립되지 않으므로 보편적인 유심체를 설정하여 주객의 모든 제법을 전개하는 것이 진여연기설이다.
이 연기설은 《대승기신론》에서 구체적으로 이론을 전개하였다. 즉 진여가 움직여 진(眞)과 망(妄)이 화합한 아뢰야식 중에는 각(覺), 불각(不覺)의 2의(義)가 있으며 일체법을 능생(能生)할 불각(無明)으로부터 우주와 인생이 연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법이 있다. 진여의 체(體), 생멸의 상(相), 인연의 용(用)이다. 진여의 체는 인(因)이 되고 인연의 연은 용(用)이 되며 생멸의 상(相)을 인하여 생멸의 과(果)를 낳는 것이 현행의 아뢰야식이다.
4) 법계연기(法界緣起)
화엄철학의 중심이 되는 이 연기설은 만물이 서로 인연이 되고 상호 의존하는 우주의 조화와 통일을 말한다.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생사와 열반 등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원융무애한 것이며, 한 사물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대로 전우주(一切卽一)라는 뜻에서 연화장(蓮華藏)세계라고도 한다. 이것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우주의 통일성에 관한 철학이라 하겠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업감연기에서는 세계와 인생이 모두 업의 결과이다. 이 업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아뢰야식연기이다. 아뢰야식은 개인의 본성에 의해 결정되며 이 본성은 진여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여연기의 설명이 요청되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상세계와 진리의 세계와의 조화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법계연기가 설해진 것이다.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깨친 12연기를 개인의 중심에서 본 것이 업감연기·아뢰야식연기이며, 이를 그 본성인 여래장(如來藏)의 법신과 결부시켜 진여·우주까지 확대시켜 본 것이 진여연기·법계연기이다. 이것은 12연기를 천안(天眼), 불안(佛眼)으로 볼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체는 공(空)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남방불교의 현상 중심인 업감연기에서 공(空)을 중심으로 한 아뢰야식·진여·법계연기 중심의 수행으로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을 잘 이해해야 현재 남방불교의 위파사나와 북방불교의 위파사나의 특징을 알 수 있다.
4. 중국에서의 위파사나
1) 초기의 선수행
중국에 선경(禪經)이 처음 전래된 것은 후한의 항제(146∼167년) 때 안세고가 호흡관찰법인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선행법상경(禪行法想經)》 등을, 대월지국에서 온 지루가참이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과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을 번역한 것이 시초다. 선정 실수(實修)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이러한 선경이 번역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양고승전》에 의하면 5세기경 아라갈(阿羅竭)이 두타행을 수행했으며 주술로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구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외 많은 선승들이 석실에서 두타행을 닦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7일간씩 있었다는 기록과 신통을 나타낸 기록 등으로 보아 초기에는 부처님의 원형 수행인 안반수의 등에 나타나는 사선정(四禪定) 등을 수행했던 것 같다. 특히 승조(僧稠, 480∼560)는 사념처(四念處:身受心法) 위파사나를 수행하여 많은 제자를 거느렸으며 《지관법》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2) 달마선(達磨禪)과 육조선(六祖禪)
달마 이전의 선수행자들은 사념처 위파사나를 업감연기가 아닌 대승관법(진여연기 등)에 의거하여 수행했는 데 반해 달마 이후로는 《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능가종이라는 말까지 붙게 되었다. 달마는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을 실천했다. 실천 수행법은 《달마혈맥론》 등을 보면 현상적인 마음 이전의 불성 자리를 바로 관해 들어가는 수행이라 할 수 있다.
혜가(慧可)가 찾아 왔을 때도 ‘불편한 마음을 바로 보라.’고 했다. 일어나고 있는 마음을 관(觀)하면 관의 특성상 현상 이전의 마음 자리로 바로 계합해 들어간다. 승찬(僧璨)의 《신심명》에서도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추임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歸根得旨 隨照失宗), 잠깐 사이에 돌이켜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나다(須臾返照 勝脚前空).”고 했다.
이 역시 현상적인 마음 이전을 꿰뚫어보는 사념처 가운데 심관(心觀)에 해당한다. 《능가사자기》에 보면 도신(道信)은 의식의 흐름을 끝까지 관찰한다. 도신은 염불도 수행하고 호흡관찰도 수행하면서 500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한 가지의 수행법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가지 방편법과 마음을 항상 관하는 수일불이(守一不移)의 심관을 같이 수행한 것 같다.
홍인(弘忍)의 선수행은 《수심요론》에서 불성(佛性)을 확인하고 잘 지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도신의 ‘수일불이’의 행법을 더욱 진전시킨 것이다. 도신은 마음을 집중하여 한 물건을 간(看)하게 하고 있지만 홍인은 한 물건에 집중하는 바로 그 마음을 내부의 자심(自心)으로 되돌려 본래의 진심(眞心)을 지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도신과 홍인 모두 《유교경(遺敎經)》에 근거하고 있다.
수행이 깊어지면 저절로 자심을 지키면서 현상의 마음도 동시에 관(觀)하게 된다. 홍인의 제자 육조 혜능(慧能)으로 넘어오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면서 자성(自性)을 관하는 돈오적인 수행으로 체계가 잡혀간다. 《육조단경》 〈좌선품〉에서도 “생각생각 중에 청정한 자성을 보라(念念中 自見淸淨心).”고 하여 의식의 흐름을 관하는 도신의 수행을 계승하는 한편 “반야로 마음을 관조하면 찰나간에 내외명철(內外明徹)한다.”는 돈오적인 수행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달마 이후 육조까지 중국의 독특한 심관(心觀) 위주의 선종가풍이다. 초기에는 《안반수의경》이나 사념처 위파사나 위주였다가 달마에서 육조까지 오면서 대승경전인 《열반경》 《화엄경》 《능엄경》 《기신론》 등에 의거하여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하는 중국선의 가풍을 이루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3) 天台止觀(천태지관)
중국선을 이해하는 데는 반드시 천태의 지관을 이해해야 한다. 천태는 스승 혜사(慧思)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용수의 공(空)·가(假)·중(中)의 삼제(三諦)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천태는 대승경전을 두루 섭렵했지만 소의경전은 《영락본업경》 《법화경》 《화엄경》이 중심이다. 수행의 방법은 삼지·삼관을 원리로 사종삼매(四種三昧)로 정리할 수 있다.
(1) 삼지(三止)
① 계연수경지(繫緣守境止):마음을 코와 배꼽 사이의 중간쯤 되는 곳에 집중하여 마음을 산란하지 않게 하는 집중법이다.
② 제심지(制心止):마음이 일어나는 바에 따라서 이것을 제어하여 달아나지 않게 하는 집중법이다.
③ 체진지(體眞止):마음이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모든 제법(諸法)이 있고, 모두가 다 인연으로 공(空)한 것이며 주체자가 없는 것을 알아 허망한 생각을 그친다.
(2) 삼관(三觀)
① 공관(空觀):모든 현상 이전의 비어 있는 본체를 관하는 것이다.
② 가관(假觀):모든 현상은 일시적 인연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그 실상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③ 중관(中觀):공관과 가관이 하나로 작용하여 본체와 현상이 걸림이 없는, 즉 공관과 가관이 융합된 관이다. 이 삼관은 간화선의 대가인 임제(臨濟)의 본체관인 체중현(體中玄), 현상관인 구중현(句中玄), 현상과 본체가 하나인 현중현(玄中玄)과 통한다.
(3) 사종삼매(四種三昧)
천태의 말년 저술인 《마하지관》에 있는 삼매수행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체계적인 수행법이다.
① 상좌삼매(常坐三昧):《문수설반야경》에 의거하게 90일 간 앉은 채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직 하나의 부처님 이름만 부르는 일행삼매다.
② 상행삼매(常行三昧):《반주삼매경》에 의거하여 90일 간 불상 주위를 돌면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생각(念)하는 것이다.
②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대방등경(大方等經)》 《법화경》 등에 의한 삼매로 방등삼매는 7일 간, 법화삼매는 21일 간 불상 주위를 돌고 동시에 좌선도 한다.
④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수자의(隨自意)삼매라고도 하며 행주좌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항상 닦는 삼매다. 대승경전에 의거하여 용수의 삼제(三諦)를 바탕으로 하는 삼매로 중국에서는 가장 체계적인 교선일치(敎禪一致)라 할 수 있다.
다만 5시교판으로 《화엄경》이나 다른 대승경전을 《아함경》보다 우위에 두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정밀한 12연기관을 소홀히 한 것이 최대의 실수이다. 그러나 달마 계통의 선종은 경전을 무시한 채 교외별전을 주장하여 자칫하면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와 혼돈할 수도 있는 반면 천태지관은 경전을 바탕으로 하므로 중국에서 대승 위파사나를 가장 잘 체계화했다고 볼 수 있다.
(4) 간화선(看話禪)
육조 혜능 이후 선종이 5종가풍으로 나누어지면서 중국에서는 선의 황금시기를 구가한다. 그때의 수행법은 《금강경》 《화엄경》 《열반경》 《원각경》 《능엄경》 《기신론》 등을 바탕으로 한, 마음의 본성(心卽是佛)을 바로 찾는 심관(心觀) 위주의 수행법(본성을 비추어 보는 묵조선도 여기에 포함된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후 송나라에 들어와서는 오조법연·원오극근·대혜종고에 의하여 간화선이 체계화되어 새로운 수행법으로 등장한다. 간화선을 체계화한 대혜의 《서장(書狀)》을 보면 《화엄경》과 《능엄경》의 예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그 수행방법으로 조주의 ‘무(無)’자 화두(話頭)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한다는 방법이 많이 나온다. 화두의 화는 말씀 ‘화’로 생각을 나타내고 ‘두’는 말 이전의 본성을 뜻한다. 즉 현상에서 본체를 바로 뚫고 들어가는 수행법이다. 육조 혜능의 “반야로 마음을 관조하면 바로 내외명철한다.”와 통하고 《능엄경》의 이근원통(耳根圓通)에서 소리 이전의 본성에 계합하는 수행법과 통하고 《아함경》의 12연기 이전을 꿰뚫는 반야관과 통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정견(正見)인 연기관·오온·사성제·중도 등의 올바른 입지가 섰을 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수행과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5. 한국에서의 위파사나
우리 나라에 중국선이 전래된 것은 신라 41대 헌덕왕 때(809∼826)로 마조도일(馬祖道一) 계통의 선이 주류가 되는데, 법랑(法朗)이 선덕왕 때에 당나라에 가서 도신의 법을 전해왔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 이전에 원효에 의하여 《기신론》의 진여연기를 바탕으로 계발된 지관법과 《금강삼매경론》의 무생관(無生觀, 12연기관)과 무상관(無常觀, 대승유식관)이 부처님의 12연기관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고려 때는 밀교(密敎)나, 지관 수행의 흔적도 있으나 고려 말 보조(普照), 보우(普愚) 이후로는 간화선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도 간화선이 주류를 이루고 염불선을 보조적으로 수행하기도 하지만 간화선 이외의 수행자는 극소수다. 현재 남방의 위파사나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1987년 거해 스님의 안내로 미얀마의 우판디타 스님이 그의 스승 마하시 스님이 체계화한 위파사나 수행법을 한국에 소개하면서부터다.
미얀마에는 많은 방법의 위파사나 수행법이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수행하고 있는 것이 마하시 스님이 체계화한 위파사나다. 이상을 결론삼아 남·북방의 위파사나 수행의 특징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6. 맺는 말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부처님의 수행법인 위파사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끝으로 위파사나를 수용하는 데 유의해야 할 점과 현대 한국불교 수행법의 문제점을 간단하게 짚어보면서 졸고를 마칠까 한다.
첫째, 현재 한국에서 수행하고 있는 위파사나는 1986년에 입적한 미얀마의 마하시 스님이 체계화한 방법이다. 위파사나는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 그 방법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위파사나는 반야와 동의어로 불교의 모든 수행법은 반야의 ‘혜’(慧)가 중심이므로 위파사나라고 할 수 있다.) 미얀마와 태국에는 많은 방법의 위파사나 수행체계가 있다. 특히 태국에는 염불식 위파사나가 있는데 이것이 향후 우리 나라에 수용되면 일반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남방의 위파사나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업감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한계점과 장점을 잘 헤아려서 수용해야 한다. 단 남방은 업감연기 중심이라 보살정신이 없으나 현재 실천면에서는 남방사원에서는 계율·수행·보살도를 실천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 중국에 위파사나가 수용될 때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천태지자의 5시교판이다.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반야경》을 우위에 두고 《아함경》을 소승경전으로 폄하했기 때문에 수행의 정밀성이 희박해져 형이상학적인 공(空) 도리 위주의 수행으로 전개되었다. 5시교판은 원효의 《열반경종요》에서 부처님의 모든 경전은 심오하고 무량한 뜻이 있는데 이것을 5시로 나누어 설명한 것은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격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원효 대사 정도의 안목이 아니면 지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까지 중국과 한국의 스님들은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성철 스님이 원효 이후 최초로 《백일법문》에서 5시교판을 지적했다. 둘째, 대승경전에서는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을 보살 밑에 두어 미세 망념이 제거되지 않은 소승 아라한으로 보아 사성제와 12연기를 경시해왔다. 대승경전의 결집시에 업감연기설에 집착한 일부 소승 아라한을 비판한 것인데 이것을 잘못 오해하여 아라한 자체를 경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대승에서는 12연기나 유식관을 무시하고 공을 바탕으로 한 여래장·법신·보신·화신의 관점에서 바로 자성(自性)만 찾게 되는 수행법이 되었다. 화두선이나 묵조선의 경우 12연기나 유식의 철저한 이해가 없으면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와 구분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간화선의 ‘이것은 무엇인가(是甚큯)’ 화두와 인도의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와 구분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부처님 당시로 되돌아가 《아함경》부터 다시 연구하여 수행의 체계를 복구해야 한다.
특히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기신론》을 바탕으로 육바라밀의 실천이 복구되어야 한다. 부처님의 위파사나는 계정혜가 핵심이다. 철저한 계율 준수와 확고한 정견(正見)을 바탕으로 부처님 경전과 분리되지 않은 교선일치로 나가야 한다. 그렇지 못한 까닭은 중국 당나라 때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선종의 영향 때문이다. 교학이 타락한 그 시대적 상황에서 그렇게 형성되었지만 우리는 부처님의 체험담인 경전과 수행을 일치하여 수행해야 한다.
현재의 간화선 수행법 일변도를 지양하고 근기에 맞는 다양한 수행법 계발을 위해 남방·티베트·중국·일본 등에 많은 유학생을 보내야 한다. 중국에도 현재 방장제도 등 전성기의 선의 가풍이 복구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우물 안 개구리’식으로 내 것이 최고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의 전통선을 살피면서 부처님의 경전 안에서 다른 수행법을 과감히 받아들여 새로운 천년에 대비해야 한다.
부처님은 보리수 밑에서 십이연기를 깨치시고 중도를 선언하셨다. 그리고 이것을 사성제로 체계화하여 위파사나로써 수행을 실천하게 했다. 마지막 제자인 수밧타에게도 팔정도를 강조했고 유언으로도 “모든 조건 지워진 것은 무상하다. 방일하지 말고 해탈을 이룰 때까지 정진하라.”고 하셨다. 이때 조건 지워진 것은 오온·십이연기이고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것은 위파사나이다. 생활 속의 위파사나 실천은 팔정도, 육바라밀로 체계화되었다. 팔정도나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한 우리는 불법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김 열 권
고려대 경영대학원 졸업. 경영학 석사.고승들의 지도하에 10년간 화두선 수행. 1989년 미얀마 마하시 선원으로 출가.1년간 위파사나 수행. 그후 일본,인도,태국,말레이지아의 위파사나 선원에서 수행. 저역서로 <위파사나 1,2> <깨달음으로 가는 오직 한 길><위파사나 12선사><고요한 숲속의 연꽃>
위빠사나
- 이론과 실제 -
2002
호두마을 위빠사나 수련회 자료
일시 : 불기 2546(2002)년 10월 - 12월
장소 : 충남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286-1
김재성 (正圓)
위빠사나
- 이론과 실제 -
<차 례>
귀경게(歸敬偈)
오계(五戒)
자관(慈觀)
약어
0. 머리말
1. 위빠사나의 소개와 전파
2. 위빠사나의 의미
3. 위빠사나 수행의 실제
3.0. 준비단계
3.1.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
3.2. 수행자의 기본적인 마음가짐
3.3. 수행의 초심자와 경험자
3.4. 마음집중, 지혜, 마음챙김
3.5. 마음챙김의 역할
3.6. 마음챙김의 네 가지 대상 (四念處)
3.7. 법에 대한 마음챙김의 중요성
4. {청정도론}에 의한 위빠사나 지혜의 전개
5. 위빠사나 수행의 이익
6. 수행을 통해서 극복해야 할 번뇌
6.1. 다섯 가지 덮개[五蓋]와 대치법
6.2. 마라[魔]의 열 가지 군대
6.3. 열 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十觀隨染]
6.4. 열 가지 족쇄
6.5. 聖人(四道四果)과 10가지 족쇄의 소멸
<부록 1> 三十七 助道品
<부록 2>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참고 서적
<부록 3> {대념처경}
<부록 4> 마음챙김(싸띠팟타나)의 의미
귀경게(歸敬偈)
나모 따싸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싸 (세 번)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 sambuddhassa)
존귀한 분, 공양받을만한 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삼 귀 의
(Tisara a)
붓담 사라남 갓차미
담맘 사라남 갓차미
상감 사라남 갓차미
두띠얌삐 붓담 사라남 갓차미
두띠얌삐 담맘 사라남 갓차미
두띠얌삐 상감 사라남 갓차미
따띠얌삐 붓담 사라남 갓차미
따띠얌삐 담맘 사라남 갓차미
따띠얌삐 상감 사라남 갓차미
Buddha sara a gacch mi
Dhamma sara a gacch mi
Sa ga sara a gacch mi
Dutiya pi Buddha sara a gacch mi
Dutiya pi Dhamma sara a gacch mi
Dutiya pi Sa ga sara a gacch mi
Tatiya pi Buddha sara a gacch mi
Tatiya pi Dhamma sara a gacch mi
Tatiya pi Sa ga sara a gacch mi
저는 부처님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저는 가르침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저는 스님들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두 번째도 저는 부처님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두 번째도 저는 가르침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두 번째도 저는 스님들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세 번째도 저는 부처님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세 번째도 저는 가르침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세 번째도 저는 스님들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다섯 가지 자율적인 생활규범 (五戒; pa ca-sila)
1. 빠나띠빠따 웨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Panatipat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실천법을 지니겠습니다.
I undertake the precept to refrain from destroying living creatures.
2. 아딘나다나 웨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Adinnadan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주지않는 것을 취하지 않겠다는 실천법을 지니겠습니다.
I undertake the precept to refrain from taking that which is not given.
3. 까메수 미차짜라 웨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Kamesu micchacar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잘못된 성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실천법을 지니겠습니다.
I undertake the precept to refrain from sexual misconduct.
4. 무사와다 웨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Musavad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실천법을 지니겠습니다.
I undertake the precept to refrain from incorrect speech.
5. 수라메라야맞자 빠마다타나 웨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Suramerayamajja pamadatthan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마음의 게으름(방일)을 초래하는 곡주 과일주 등의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실천법을
지니겠습니다.
I undertake the precept to refrain from intoxicating drinks and drugs which lead
to carelessness.
慈觀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위한 기원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분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상가와 재가자들 모두가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많은 덕을 갖추신 고귀한 스승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한량없는 덕을 갖추신 부모님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도량에 살고있는 모든 존재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마을에 살고있는 모든 존재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지방에 살고있는 모든 존재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상가의 모든 스님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사사(四事)의 모든 시주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국가의 정부가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도둑, 강도, 거짓말쟁이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한량없는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인간, 천상의 천신, 범천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지옥에서 범천에 이르는 모든 존재들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선행에 의해서,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영원한 행복인 열반을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바른 길을 따르고 잘못된 길을 따르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만일 다시 태어나게 되더라도 위난과 고통과 재난과 적, 그리고 모든 악을 만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지금 발원한,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위한 기원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내가 행한 선행의 공덕이, 우리의 부모와 스승과 친척들과 수호신장과 천신들과 모든 존재들에게 돌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이 공덕에 의해 모든 존재들이 기뻐하기를 기원합니다.
<약 어>
본고에서 사용된 팔리 문헌에 대한 약어는 기본적으로 Critical P li Dictionary(CPD) Vol.1의 Epiloegomena에 따랐다.
주요 팔리 문헌은 다음과 같다.
AN A guttara-Nik ya[增支部], PTS (Morris & Hardy),
Vols. I-VI, 1885-1910.
Dhp Dhammapada[法句經], PTS (O. von Hin ber &
K.R. Norman) 1994.
DN D gha-Nik ya[長部], PTS (T.W. Rhys Davids & J. E.
Carpenter), Vols.I-III, 1890-1911. Reprint, 1966-1976.
MN Majjhima-Nik ya[中部], PTS (V.Trenckner, Chalmers,
C.Rhys Davids), Vols. I-IV, 1888-1925.
Pa is Pa isambhid -magga[無碍解道], PTS (Taylor), Vols. I-II,
1905-1907.Combined Reprint, 1979.
SN Sa yutta-Nik ya[相應部], PTS (M.L. Feer),
Vols. I-VI, 1884-1904. Rerprint, 1960-1976.
Vism Visuddhimagga[淸淨道論], PTS (C. Rhys Davids),
Vols. I-II, 1920-21. Reprinted in one vol., 1975.
-a는 주석서를 의미한다. 예, DN-a는 D gha-Nik ya의 주석서인 Suma gala-vil sin (PTS, Vol.I, T.W. Rhys Davids, J.E. Carpenter, 1886, Vols. II-III, W. Stede, 1931∼1932)를 가리킨다.
<범례>
①<SN V, 2.13-18>는 PTS판 『상응부』 제5권, 2쪽, 13행에서 18행까지를 의미함.
②<Dhp 200> PTS판 『법구경』게송 200.
0. 머리말
마하시 스님께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수행을 하려고 하는 의지와 훌륭한 선지식(스승)이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실제로 길을 가는 것은 길에 대한 이론적인 고찰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길안내자의 도움이 있으면, 굳이 독도법이나 여행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은 그다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다. 위빠사나 뿐만 아니라 다른 정신적인 향상을 위한 길을 가는 데에는 그 길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인 수행에 스승의 지도가 필수적이라면 이론적인 고찰의 필요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론적인 고찰은 자신의 수행과정으로 되돌아보고 정리할 때와 타인에게 수행법을 설명해 줄 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위빠사나 수행의 향상단계는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고, 항상 자신의 마음과 몸의 현상을 관찰하는 이 수행의 속성상 자신의 수행의 단계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장점이면서 이론적인 공부의 효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료집은 실제로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위해 정리하면서도 앞으로 혼자서 수행을 해나가면서 참고 할 수 있는 자료가 되도록 엮어보았다.
최근 10여 년 동안 한국에 소개되어 온 위빠사나 수행법은 한국의 전통 승가와 재가자들 사이에 보급되면서 이제는 낯설지 않은 수행법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위빠사나 수행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는 점도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위빠사나 수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 수도 있는데, 이 글을 통해서 그러한 오해가 풀리고, 위빠사나 수행을 바르게 이해하여 실제 수행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자료를 정리해 본다.
10여 년 전에 3개월간의 여름 결제를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보낸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수행의 진정한 맛을 본 필자는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초기불교 및 남방상좌불교 수행 전통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와 북방의 설일체유부 등의 수행법과 비교연구를 해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태국과 미얀마의 수행처를 조사하여 발표하기도 하였고,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문헌에 입각한 연구 성과를 발표해왔고, 위빠사나 수행을 안내하는 일도 해왔다.
여기에 정리하는 위빠사나 이론은 위빠사나 수행의 소의경전인 {念處經}을 위시로 한 초기경전과 남방상좌불교의 대표적인 논서인 5세기의 {淸淨道論}에 의거하고 있으며, 실제적인 수행법은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법을 중심으로 하여 정리해보았다.
1. 위빠사나의 소개와 전파
한국에 남방상좌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이 전해진 때는 14년 전인 19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88년 여름, 미얀마의 마하시 스님(1904-1982)의 제자이며, 마하시 수행센터의 원장이신 미얀마의 고승 우 빤디따 스님께서 서울 삼각산 승가사에서 30여명의 승려들에게 21일 동안 위빠사나를 지도하신 것을 계기로 위빠사나는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후, 거해스님께서 본격적으로 위빠사나를 소개하였고, 미얀마로 직접 수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거해스님이 1993년도 선우도량 제 5회 수련결사에서 [위빠사나 수행법]을 발표하면서 '위빠사나(vipassana)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관계로 매우 생소함을 느끼게 해준다.'라고 표현할 때만하더라도 위빠사나가 아직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위파사나 또는 비파사나)가 널리 알려진 것은 김열권법사의 저술과 활동에 기인하는 바가 크며, 서울의 여러 곳에서 적극적으로 위빠사나를 접할 기회를 제공한 것도 한 몫을 담당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서울 보리수선원, 경기도 남양주시 봉인사, 경남 김해시 다보선원, 부산 태종대 태종사등을 중심으로 위빠사나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제는 언제라도 위빠사나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전해지고 있는 위빠사나는 대부분 미얀마의 마하시 방식의 위빠사나라고 할 수 있다.
위빠사나의 보급과 더불어 최근의 불교학계에서는 초기 및 상좌불교 전통에서 위빠사나에 대한 의미를 규명하는 학술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서 작년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된 10일 코스에 의한 고엔카 위빠사나 수행은 인도 및 외국의 고엔카 위빠사나 센터에서 수행을 하고 귀국한 수행자들이 모여서 진행하고 있고 그 규모가 점차 커지고 있다.
2. 위빠사나의 의미
팔리어로 vipassan , 산스크리트어로 vipa yan 라는 말은 영어로는 inward vision, insight, intuition, introspection (P li English Dictionary p.627)으로 번역되는 말이며, 가장 일반적으로 insight 또는 insight meditation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의 어원을 보면, 접두사 vi에 '보다'라는 뜻을 지닌 passati라는 말의 명사형인 passan 로 되어 있다. vi라는 접두사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vipassan 에서의 vi는 뛰어나다(visesa)는 의미와 다양성(vividha)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뛰어난 봄, 뛰어난 관찰, 통찰 등이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찰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뛰어난 관찰이라고 할 때는, 일반적인 관찰이 아니라 현상의 본성을 꿰뚫어 본다는 의미이며, 영어의 insight라는 번역이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찰함이라고 할 때의 여러 가지 방식이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관점에서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법구경}(法句經; Dhammapada 277-279)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諸行)은 영원하지 않다(無常)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sabbe sa kh r anicc ti yad pa ya passati
atha nibbindat dukkhe esa maggo visuddhiy
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諸行)은 괴로움(苦)이다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sabbe sa kh r dukkh ti yad pa ya passati
atha nibbindat dukkhe esa maggo visuddhiy
모든 법들은 영원한 자아가 없다(無我)라고 지혜에 의해 볼 때,
그는 괴로움에 대해 싫어하게 된다. 이것이 청정함에 이르는 길이다.
sabbe dhamm anatt ti yad pa ya passati
atha nibbindat dukkhe esa maggo visuddhiy
이 법구경의 말씀은 바로 세 가지 법의 특성(三法印)인 무상, 고, 무아에 대해서 지혜로써 관찰하는 것이 바로 청정(열반) 에 이르는 길임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법구경에서 말하는 지혜로써 관찰한다(passati)는 말이 다름 아닌 위빠사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
위빠사나에 대해서는 어원적으로 그리고 경전의 예로 이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염처계 경전에 설해져 있는 내용을 살펴보겠다. 예로 {대념처경}을 보자.
비구들이여, 이것은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괴로움과 싫어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한, 올바른 길에 이르기 위한, 열반을 깨닫기 위한 하나의 길[ek yano maggo]이다. 바로 그것은 네 가지 마음챙김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1) 몸에 대한 마음챙김 [身念處]
비구들이여, 여기 [이 가르침]에서 어떤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2)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 [受念處]
그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3)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 [心念處]
그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4) 법에 대한 마음챙김 [法念處]
그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이 {대념처경}의 서문에서 사념처를 수행하는 방법을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이 부분의 팔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k ye k y nupass viharati, t p sampaj no satim , vineyya loke abhijjh domanassa .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는 말은 k ye k y nupass 이다. k ya는 우리의 육체이고 이 육체를 거듭 거듭 관찰한다는 말이 anupassi라는 말이다.
'anupassi'라는 말은 '반복하다', '따르다'라는 의미의 'anu'라는 접두사에 '보다'라는 의미의 'passati'에서 파생한 명사 'passi'가 결합한 말입니다.
'열심히'는 정진에 힘을 불어 넣는다는 말이다.
'분명한 앎을 지니고'는 관찰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을 지니고라는 의미이다.
'마음챙김을 지니고'라는 의미의 'satim '라는 말은 다름 아닌 염처(念處)의 염(念)을 지니고 인데, 관찰의 대상을 놓치지 않고 있는 마음 상태, 현재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일어나는 그 순간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라는 말은 지금 관찰하고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 좋아하는 마음이나 싫어하는 마음의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간(loka)이란 다름 아닌 관찰의 대상인 오온(五蘊)을 말한다. 따라서 관찰 대상, 마음챙김의 대상에 대한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관찰을 말한다.
{염처경}에서 사띠빠타나 수행의 방법으로 제시된 구체적인 수행법이 바로 네 가지 관찰 대상을 거듭 거듭 관찰하되, 노력을 하면서, 마음챙김을 지니고, 집착과 싫어하는 마음도 접어두라는 것이다.
마음챙김 수행, 사띠빠타나 수행이 왜 위빠사나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가는 이처럼 실제로 염처계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좀더 살펴보자. {대념처경}에서는 구체적인 수행의 대상을 설명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말이 반복되어 제시어 있다.
이처럼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iti ajjhatta v k ye k y nupass viharati, bahiddh v k ye k y nupass viharati, ajjhattabahiddh v k ye k y nupass viharati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samudayadhamm nupass v k yasmi viharati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vayadhamm nupass v k yasmi viharati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samudayavayadhamm nupass v k yasmi viharati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atthi k yo ti v panassa sati paccupa hit hoti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y vad eva .j .namatt ya patissatimatt 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jci loke up diyati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evam pi bhikkhave bhikkhu k ye k y nupass viharati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한다는 말은 다름 아닌 무상에 대한 관찰이다. 생겨나는 현상을 바로 그 순간 관찰하고 사라지는 현상을 사라지는 그 순간 관찰하라는 말이다. '무상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그 순간 순간에 포착하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이처럼 몸에 대해서 관찰하면, '몸이 있다' '이것이 육체적인 현상이다'라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생겨난다. 끊임없이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이 현상들이 바로 육체적인 현상이라는 마음이 확립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확립된 마음챙김은 바로 다름 아닌 분명한 앎을 위한 것이며, 대상에 대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온갖 현상들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지낸다는 말이다. 그 어떤 현상이라도 생겨난 것은 사라지는 것임을 철저하게 안다면 집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를 지닌 마음은 깨어있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유롭다.
실제로 마하시 방식의 위빠사나 수행은 {염처경}에 설해진대로 진행된다.
따라서 위빠사나와 {염처경}에 설해진 사띠빠타나는 언어는 다르지만 기본적인 수행법은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위빠사나'를 '염처에 바탕을 둔 위빠사나' (Satipa h na vipassan )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위빠사나 수행의 실제
3.0. 준비 단계
본격적인 좌선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경직되어 있는 마음을 부드럽고 민첩하게 해주며, 정진에 힘을 불어넣기 위한 예비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먼저 삼배를 하면서 간절하게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붓담 사라남 갓차미’(부처님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담맘 사라남 갓차미’(가르침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상감 사라남 갓차미’(스님들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는 자관(慈觀)을 한다.
‘나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자관을 마친 후,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관하며[死隨觀], 굳은 결의로 수행에 임할 마음을 일으킨다.
‘이 목숨 언제 끊어질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 단 하나의 현상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리라’
그리고는 자연스러운 호흡을 하면서 호흡에 동반되는 복부의 움직임[風界; 바람의 요소]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여 알아차려 나간다.
3.1.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
신수심법(身受心法)의 네 가지 대상 가운데에서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은 자신의 육체와 그 동작이다. 즉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處]이 마음챙김을 닦는 이들에게 있어서 수행의 첫 걸음이 된다.
육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제반 현상들에 마음을 챙기면서 그 육체적인 현상에 수반되어 생겨나는 느낌을 포착해 가면서 수행은 자연스럽게 네 가지 대상(몸, 느낌, 마음의 상태, 법) 전체로 확산되어 가게 된다.
신념처를 마음챙김의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는 이유는, 육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보다 거칠어서 알아차리기가 쉽고, 변화도 더디기 때문에 마음집중[禪定] 수행의 기초가 없는 초보자들이 마음을 집중하는 데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3.1.1. 수행의 시작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處] 수행에서의 마음챙김의 일차적인 대상과 보고의 내용
좌선의 경우
앉는 자세는 반가부좌나 결가부좌 어느 쪽도 좋음. 여러 가지 앉는 방법을 시도해 보아 가장 편하게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자세를 스스로 찾아 익힌다. 주의해야 할 점은 허리를 바르게 펴 주는 것이다. 좌선을 처음 하거나 오랜만에 하는 이들은 누구나 다리와 등에서 통증을 느낀다. 앉는 자세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다리의 통증은 참아 내기보다는 포기하는 것이 낳다. 자세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자세를 바꾸어도 통증은 여전히 생기므로.
호흡은 자연스럽게 한다. 단전호흡이나 특별한 호흡법은 위빠사나 수행과는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인 호흡은 수행에 방해가 된다.
마음챙김의 순서와 보고 내용
1. 자연스러운 들숨과 날숨에 동반되는 복부(배)의 움직임에 마음을 둘 것.
2. 들숨에 따라 복부가 불러오면, '일어남' 하고 마음속으로 알아차릴 것.
3. 날숨에 따라 복부가 꺼지면, '사라짐' 하고 마음속으로 알아차릴 것.
4. 복부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수반되어 생겨나는 복부의 감각들을 주의 깊게 살필 것.
5. 어떠한 감각들이 있었는가 기록해 두었다가 두드러진 현상들을 간단, 명료하게 보고할 것.
6. 복부의 일어남 사라짐에 마음을 챙기고 알아차리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어떤 생각이나 몸의 느낌들이 생겨나면, 그 순간 파악 할 것. 파악한 후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를 보고할 것.
행선[걷는 수행]의 경우 -
1. 초보자들은 너무 빨리 걷거나 너무 느리게 걷지 말고 천천히 조금 느린 속도로 걷는다.
2. 적당한 거리(10-20미터)를 왕복한다.
3. 마음챙김의 순서 - 처음에 걸으려고 하는 의도에서 시작하여 주요 동작들에 마음을 챙긴다.
2 단계의 알아차림 :
좌선에서 행선으로 바꿀 때, 처음의 5분 정도는 굳어 있는 다리를 풀어 주기 위해서 보통의 걸음으로 걸으며, ‘왼발’,‘오른발’하며 각 걸음을 알아차린다.
3 단계의 알아차림 :
다리의 근육이 풀리면 걷는 속도를 느리게 하여 움직이고 있는 다리 동작의 각 단계를 '들음', '나아감', '놓음'이라는 3단계의 동작으로 나누어 알아차린다.
보다 느린 동작의 알아차림 :
마음챙김이 향상됨에 따라 걷는 동작의 각 단계가 더욱 세분된다. 5 단계 이상으로 세분되면서는 순간 순간의 움직이는 동작에 마음을 집중시켜 알아차린다.
4.이처럼 걸으면서 알아차려야 하는 현상은 발바닥에서 무릎 아랫부분의 다리의 감각들이다.
5.걷는 동작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제반 감각들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어느 순간에 어떤 감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가를 알아차려 보고할 것.
3.1.2. 기타 동작을 할 경우
(1) 일상의 행동에 대한 마음챙김 - ‘분명한 앎[正知]’의 적용
좌선에서 행선으로 또는 행선에서 좌선으로 자세를 바꿀 때에도 마음챙김을 놓아서는 안 된다. 자세를 바꾸려는 의도를 먼저 알아차리고, 천천히 움직이며 주요 동작들을 알아차린다. 식사 세면 목욕 등의 여타의 동작들과 한 동작에서 다른 동작으로 옮겨가는 때의 마음의 상태(의도)와 몸의 움직임도 놓치지 말고 알아차릴 것. 일상적인 행동을 할 때에도 마음챙김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마음챙김은 잠에서 깨어나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끊어짐 없이 이어져야 한다. 일상적인 동작을 할 경우에는 가장 두드러진 동작을 알아차린다. 밥 먹을 때에는 손의 동작에서 음식을 씹는 동작, 삼키는 동작 등으로 순간 순간의 두드러진 동작이 마음챙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수행의 핵심은 끊어짐 없는 마음챙김을 지니는 일. 즉 한 순간의 放心도 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일이다.
(2) 바른 언어생활
집중수행 기간 중에 법문을 듣거나 점검 때를 제외하고는 침묵(고귀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일상적인 언어 활동은 마음을 집중시키는데 장애가 되므로 묵언하면서 오직 자신의 마음과 몸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지 철저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즉, 수행 중에는 법에 대한 언어와 고귀한 침묵이 올바른 언어생활[正語]이다.
(3) 수행의 주대상 -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
타인의 행동이나 말은 일차적인 관찰의 대상이 아니므로 신경쓸 필요가 없다.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에 몰두해야 한다. 귀중한 시간을 틈내서 가지게 된 길지 않은 집중수행이므로 타인의 수행을 방해해서는 안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타인의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위 하여야 한다. 특히 남에게 말을 거는 일은 가장 삼가야 한다.
3.1.3.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의 중요성
가장 근본적인 번뇌인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이 발생하는 것은 느낌에 의해서이므로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은 중요하다. 쉴새없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느낌에 의해서 생기는 번뇌는 마음챙김을 통해서 다스려야 한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좋은 느낌보다는 아프고, 싫은 느낌이 강하게 일어날 것이다. 특히, 좌선할 때에는 다리와 등에서 통증을 느끼게 되고, 더위와 가려움 등의 싫은 느낌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느낌이 일어나면 ‘아픔’,‘아픔’,‘가려움’,‘가려움’하면서 알아차린다. 이렇게 알아차림에 의해서 사라지는 느낌이 있는가 하면, 한 동안 지속되는 느낌들도 있다. 지속되는 느낌들에 대해서는 한 두 번 알아차린 후에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권한다. 여러 가지 느낌들이 동일한 강도로 일어날 때에는 스스로 선택해서 알아차리면 된다. 앉는 자세가 익숙하지 않아 생기는 다리와 등의 통증은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 조금 통증을 느낀다고 자세를 바꾼다면 마음집중이 향상되지 않는다. 너무 통증이 심해져서 마음챙김 자체에 장애가 될 때에는 자세를 바꾸되, 자세를 바꾸는 과정의 모든 동작을 철저히 알아차리면서 바꾼다. 마음챙김은 사소한 동작에도 항상 밀착해서 동반되어야 한다.
3.1.4. 인식과 느낌과 번뇌의 발생 과정
1. 감각기관[六根]과 감각대상[六境]에 의해서 인식[六識]이 발생한다.
2. 위의 세 가지가 어우러진 것이 접촉[六觸]이다.
3. 접촉에 의해서 싫거나[苦], 좋거나[樂], 무덤덤한[不苦不樂] 느낌[受]이 생겨남.
4. 마음챙김이 없을 때, 괴로운 느낌에서는 성냄[진심, 瞋心]이, 좋은 느낌에서는 탐욕[탐심, 貪心]이, 무덤덤한 느낌에서는 어리석음[치심, 癡心)이 생겨난다.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해서 탐진치의 번뇌가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것이 문지기 또는 방패로서의 마음챙김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문지기가 없으면, 탐진치의 번뇌들이 마음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3.2. 수행자의 기본적인 마음가짐
수행에 임하는 수행자는 스스로 자신의 수행의 동기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기본적으로 불 법 승의 삼보(三寶)에 대한 신심과 수행 방법에 대한 신심, 그리고 수행을 하려고 하는 열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심이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지성과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구도의 마음, 자유 - 칼라마경』참조, 서울: 고요한소리), 처음에는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법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의 마음을 지니고 수행을 시작할 수 있으면 된다. 수행이 진전되고 스스로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체험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약하던 신심은 확고한 확신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언제나 제자들이 스스로 확인하도록 길을 제시하셨다. 이 길은 스스로 가야 하는 길이다. 열심히 그 길을 감으로써 얻어지게 되는 확신은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자신의 재산이 될 것이다. 수행을 해보려고 일으킨 마음은 귀한 기회를 만든 것이다. 기회는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현실화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살아나는 것임을 명심하며 부처님이 보증한 수행의 좋은 결실인 최상의 행복을 스스로 거두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것이 수행자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그 어느 누구의 말보다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확인된 진실만이 자신의 참다운 의지처가 될 것이다.
3.2.1. 두 가지 양식의 수행
수행에는 두 가지의 양식이 있다. 일정 기간 동안 일정한 장소에서 진행되는 집중적인 수행과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해 나가는 수행이 그 두 가지이다. 집중적인 수행은 수행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이므로 효과적으로 수행법을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수행의 초보자는 일정 기간 동안의 집중수행을 통해서 수행법을 익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집중수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일 경우에는 일상생활의 일부분을 할애해서 수행을 할 수 있다. 수행의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고, 수행할 열의가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수행은 가능할 것이다. 집중수행을 통해서 얻은 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살려 가면서 활용할 때, 수행의 참된 의미가 살아날 것이다.
3.2.1.1. 일정 기간 동안의 집중적인 수행 - 수련회, 안거.
생활 규범[戒] 마음집중[定] 지혜[慧]의 조화를 이루는 생활을 하면서 집중적으로 마음의 향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수행.
3.2.1.2. 일상 생활에서의 수행. - 가정과 일상의 사회 활동 가운데에서의 수행.
마음챙김을 기본으로 하여 질서 있는 생활을 해 나가며, 시간을 정해서 틈틈이 마음집중 수행을 해 나간다. 세상일에 부딪힐 때, 마음챙김을 놓치지 않으면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힘을 미리 미리 갖추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네 가지 고귀한 마음가짐[四無量心; 慈悲喜捨]을 정해진 시간에 닦는 것은 마음의 평온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자관(慈觀)의 실천을 바탕으로 항상 자기 자신과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갖는다.
집중적인 수행을 위한 7 가지 조건
1. 적절한 거주처 - 주거 환경
2. 가까운 탁발처 - 음식의 조달
3. 바른 언어생활 - 법과 열반의 성취에 도움이 되는 말과 성스러운 침묵.
4. 좋은 벗, 도반, 선지식과 함께 지낼 것. - 잘 다스려진 자기 자신은 좋은 스승.
5. 적절한 음식 - 건강의 유지
6. 적절한 기후
7. 적절한 자세 - 좌선과 행선을 할 때, 자신에게 가장 좋은 자세가 무엇인지 알아낼 것.
좌선의 경우, 중요한 것은 등을 바로 하고 앉는 것. 반가부좌나 결가부좌는 자신의 몸의 조건에 맞게 시도할 것.
3.3. 수행의 초심자와 경험자
초심자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붓다의 말씀을 의지하고, 수행을 잘 지도해 주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법을 지도 받되, 수행은 자신의 힘으로 해 나아가는 것임을 명심하고 부지런히 정진해서, 스스로 마음이 청정해지고 지혜가 계발되는 방법을 자신의 몸으로 익혀야 한다. 수행은 실제적인 '길'이므로,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경험을 디딤돌로 해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경험자의 경우는 이미 배워 익힌 방법을 항상 활용해 가면서 물러남이 없는 정진을 해 나갈 것. 이 생에서 聖人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 노력을 더해 가며, 자신의 체험을 늘 돌아보며, 점검해 나가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의 기반이며, 때로는 위빠사나 수행 그 자체를 의미하는 바른 마음챙김[正念]이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현상 (복부의 움직임, 가려움, 통증, 저림, 뻣뻣함 등)을 있는 그대로, 단순한 주위 집중(bare attention)을 통해서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즉, 현재 분명히 깨어 있는 마음으로 자신의 심신의 모든 현상을 좋거나 나쁘다는 가치판단을 하지 않으면서, 경험되는 그대로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말한다.
마음챙김[正念]은, 파악된 현상에 대한 분명한 앎[正知]과 항상 짝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마음챙김은 단순한 작업이지만 쉽지는 않다. 끊임없는 마음챙김을 지니기 위해서는 강한 열의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특정한 사람들만 마음챙김을 닦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숨을 쉬고 있듯이, (호흡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하나이므로, 마음챙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누구나 마음챙김 수행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수행을 하려는 열의와 노력과 바른 방법이다. 왜 수행을 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이 있고, 수행에의 열의가 있는 사람이 바른 방법으로 쉬지 않고 노력을 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스스로 얻게 될 것이다.
마음챙김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곧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몸은 익숙하지 않은 자세 때문에 여기저기서 통증이 생겨나며, 마음은 쉬지 않고 피어나는 생각들로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 때문에 다리가 아프고, 일상생활에서의 의식의 흐름이 수행을 시작하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몸의 통증은 4-5일 정도 지나면 조금씩 덜어지게 되므로 그리 걱정할 것은 아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들을 끊어 버리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므로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 생각들을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이 마음챙김 수행의 핵심이다. 좋은 생각도 붙들지 말고 나쁜 생각도 없애려 하지 말라. 좋은 생각도 망상도 수행자에게는 마음챙김의 대상일 뿐이다. 생겨나는 현상을 막을 수는 없다. 단지 생겨난 현상을 생겨나는 바로 그 순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라. 그러면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점차 가라앉게 될 것이다. 이렇게 수행은 향상되어 가는 것이다.
마음챙김과 분명한 앎이 예리해지고 정확해지면, 마음집중(三昧)이 이루어지고 마음집중에서 현상들에 대한 올바른 앎(지혜)이 생겨난다.
마음집중과 지혜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마음에서는 번뇌, 갈등, 불안, 우울 등의 부정적인 요소들이 제거되어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 때가 되면 더욱 수행을 가속시켜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며, 수행 자체가 행복과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게 해준다. 이는 깨달음의 7가지 요인(七覺支)이 경험되는 때이다. 하지만 좋은 현상들이 경험되더라도 이러한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쉬지 말며 최종 목표에 이를 때까지 마음챙김을 지녀야 한다.
3.4. 마음집중[禪定, 止, samatha 사마타], 지혜[智慧, 觀, vipassana 위빠사나], 마음챙김[念, sati 싸띠]
마음집중이 없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如實하게] 보는 지혜는 생기지 않는다. 마음챙김은 마음집중과 지혜의 공통되는 기반이다.
마음집중은 번뇌를 일시적으로 억누르고, 지혜는 번뇌를 잘라 내버린다.
수행자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사마타 행자와 위빠사나 행자이다.
사마타 행자(行者)란 사선(四禪) 또는 팔선(八禪)의 마음집중을 먼저 닦아, 완전한 마음집중[安止定]의 힘으로 다섯 가지 덮개를 억누른 후,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이다.
위빠사나 행자는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이나, 40 가지 선정 수행의 주제 가운데 네 가지 요소에 대한 관찰[四界差別]에 의해서 특별한 마음집중 수행이 없이 처음부터 대상을 관찰하는 수행자를 말한다. 위빠사나 행자는 완전한 마음집중이 아니라 순간적인 마음집중[刹那定]에 의해 다섯 가지 덮개를 억누르며, 수행을 해 나간다. 위빠사나 수행의 기반이 되는 마음집중은 따라서 찰나정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찰나정을 바탕으로 한 위빠사나 수행을 해나가면서 초선에서 제사선에 이르는 선지(禪支; 선정의 구성요소)를 체험하게 된다. 즉,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동안 희열(喜), 행복감(樂), 평온(捨)을 순차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찰나정의 성격이 근접정(根接定)의 기능을 하면서, 각 선정의 선지들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순수한 위빠사나 수행에도 이처럼 선정 수행에서 경험되는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수행해 나가면, 수행에 점차 힘이 생기게 되어 더욱 정진하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3.5. 마음챙김의 역할
마음챙김은 일종의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역할을 한다. 이 문지기가 가려내는 적은 탐진치(貪瞋癡)가 근본이며, 이 적들에 대한 각각의 대치법의 근본에는 마음챙김(念; sati)이 항상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독특한 적들을 막아내는 힘이 약하다. 자신이 어떤 적들에 대해서 약한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淸淨道論』에서 말하는 여섯 부류의 인간의 성향은 자신의 성향과 수행의 주제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마음챙김은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놓치지 않고 밀착해서 보는 것이며, 객관적으로 보는 것.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 현상들의 정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 얻어지는 것이 지혜이다. 지혜에 의해 번뇌의 적을 다스린다.
3.6. 마음챙김의 네 가지 대상 (四念處)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경전에는 몸, 느낌, 마음, 법[身受心法]의 네 가지가 설해져 있다. 네 가지 대상은 간단하게 육체적인 현상[色; r pa]과 정신적인 현상[名; n ma]으로 분류된다.
3.6.1. 身念處 - 14 가지 육체적인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
육체와 그 동작(호흡 행 주 좌 와) 및 부정관(不淨觀)을 주제로 한 마음챙김.
(1)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出入息念]
(2)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동작[行住坐臥]에 대한 마음챙김
(3) 분명한 앎[正知]을 지니고 행동;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돌아올 때,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돌아볼 때, (팔 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 (탁발을 하기 위해서) 가사(승복)를 수하고(옷을 입고), 발우를 들 때,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 대소변을 볼 때, 가고, 서고, 앉을 때,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 말하거나, 침묵을 하고 있을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닌다.
(4) 육체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厭逆作意]; 신체의 31(또는 32)가지 부분에 대한 상기(想起).
(5) 네 가지 요소 -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四大; 地水火風]
(6-14)9가지 묘지에서의 관찰. - 현재 이 수행은 시행되지 않고 있음.
3.6.2. 受念處 -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 [정신적인 현상]
고(苦)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세 가지 육체적 정신적인 느낌[感受]에 대한 마음챙김.
3.6.3. 心念處 - 마음의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 [정신적인 현상] 8쌍 16 가지.
(1) 탐욕이 있는 마음[有貪心], 탐욕이 없는 마음[無貪心]
(2) 성내는 마음[有瞋心], 성냄이 없는 마음[無瞋心].
(3) 어리석은 마음[有癡心],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無癡心].
(4) 침체된 마음, 산만한 마음.
(5) (선정 수행으로) 커진 마음[大心], (선정 수행을 닦지 않아) 커지지 않은 마음.
(6) (色界禪과 無色界禪 수행이) 향상된 마음, 향상이 안된 마음.
(7) (선정에 의해) 잘 집중된 마음, 집중이 안된 마음.
(8) (선정 수행에 의해 일시적으로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解脫心],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非解脫心]을 (있는 그대로) 안다.
3.6.4. 法念處 - 5 가지의 육체적 정신적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
(1) 다섯 가지 덮개[五蓋; 욕망, 분노, 혼침과 졸음, 들뜸과 우울, 회의적 의심]
(2) 五蘊[色受想行識]
(3) 十二處[眼耳鼻舌身意와 色聲香味觸法]
(4) 七覺支[念, 擇法, 精進, 喜, 輕安, 定, 捨]
(5) 四聖諦[苦集滅道]
3.7. 법에 대한 마음챙김의 중요성
법에 대한 마음챙김은 법에 대해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즉, 교리적으로 법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수행의 일차적인 주제와 수행 도중에 생기는 장애, 그리고 수행이 향상됨에 따라서 생겨나는 긍정적인 심신의 상태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 등이 제시되어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법에 대한 마음챙김이라 하더라도 일차적인 마음챙김 수행의 대상은 오온(五蘊) 가운데 육체적 물질적인 현상인 색온(色蘊)이다. 육체적 물질적인 현상인 색온(色蘊)은 다름 아닌 신념처(身念處)의 대상이며, 십이처(十二處)의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과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다.
다섯 가지 덮개[五蓋]는 수행을 시작하면서 곧 부딪히는 장애이다. 감각적인 욕망과 분노의 마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생각 속에서 부침하며, 좌선할 때의 혼침과 졸음은 수행자들의 오래된 벗처럼 슬며시 찾아온다. 마음은 들떠서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 과거의 잘못이 마음에 떠오르며 회한에 싸이기도 한다. 수행이 잘 진전되지 않을 때에는 불법승(佛法僧) 삼보와 수행법 또는 지도 법사에 대해서 회의적인 의심이 생기기도 한다. 이러한 장애가 나타나면 즉시 알아차린 후,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마음을 빨리 가져가야 한다. 마음챙김의 힘이 강해지면서, 점차로 장애들은 극복되기 시작한다. 자세한 극복 방법은 다섯 가지 장애를 다스리는 법을 참조.
다섯 가지 덮개를 극복하면서 수행을 계속해 나아가면,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가 경험되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몸과 마음이 안정되며 수행에 대한 확신도 강해진다. 마음챙김[念覺支]이 더욱 예리해지고, 현상에 대한 이해[擇法覺支]가 심화된다. 좋은 현상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더욱 더 정진에 힘을 가하게 된다[精進覺支]. 마음에서 희열을 맛보기도 하며[喜覺支], 마음과 몸은 편안해지고 안정된다[輕安覺支]. 희열을 맛보며 안정된 마음은 더욱 집중을 이루게 되며[定覺支],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서 집착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평온이 유지된다[捨覺支]. 이처럼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가 경험될 때, 이러한 긍정적인 현상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수행의 핵심은 마음챙김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현상들도 마음챙김의 대상일 뿐이다. 경험되면 바로 알아차리고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일로 마음을 돌려야 한다.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들을 일으키는 방법 참조.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가 경험되면서 네 가지 고귀한 진리는 이론적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이해되게 된다.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발생의 고귀한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고귀한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고귀한 진리[苦滅道聖諦]가 체험적으로 파악되면서 성인의 도과(道果)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4. {청정도론}에 의한 위빠사나 지혜의 전개
- 일곱 가지 청정[七淸淨]과 지혜의 향상
현재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에 의한 지혜의 전개는 {빠띠삼비다막가}에 바탕을 두고 있는
{청정도론}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청정도론}의 구조는 전체 칠청정으로 되어 있고, 뒤의 오청정이 지혜의 전개를 말하고 있다.
실제적인 위빠사나 수행은 바로 견청정인 명색구별지(名色區別知; n mar pa-pariccheda-
a)에서 시작되는데 이는 {대념처경}에서 설하고 있는 身受心法(특히 身과 受)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혜라 할 수 있고,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얻는 지혜의 첫 단계이다.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육체적인 현상이 서로 다른 현상이라는 앎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은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서 자신이 경험하고 알게되는 현상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 자기 수행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7 청정 지혜의 향상
(1) 戒淸淨
(2) 心淸淨 - (40 가지 수행의 주제; 四十業處)
(3) 見淸淨 - 1.마음의 현상과 육체의 현상을 구별하는 앎
名色區別知; n ma-r pa-pariccheda- a
(4) 度疑淸淨 - 2.조건을 파악하는 앎
緣把握知; paccaya-pariggaha- a
(5) 道非道智見淸淨 - 3. 현상들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사유에 의한 앎 [思惟知]
sammasana- a
4-1. 발생과 소멸에 대한 앎
生滅隨觀知; udayabbay nupassan a,-초기 단계
(이 단계에서 10 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동반되는 번뇌[十觀隨染]가 생김)
(6) 行道智見淸淨 - 4-2. 발생과 소멸에 대한 앎 [生滅隨觀智] -
본격적인 단계.,
5. 소멸에 대한 앎 壞隨觀智
bha g nupassan - a,
6. 두려움에 대한 앎 怖畏隨觀智
bhayatupa h na- a,
7. 허물에 대한 앎 過患隨觀智
d nav nupassan - a,
8. 싫어해 멀리하는 앎 厭離隨觀智
nibbhed nupassan - a,
9 벗어나고자 하는 앎 脫欲智
muccitukamyat - a,
10. 되돌아 살펴보는 앎 省察隨觀智
pa isa kh nupassan - a
11.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초연한 앎 行捨智
sa kh rupekkh - a
(7) 智見淸淨 12. 種姓(범부에서 성인으로의 변환)에 대한 앎
gotrabh - a
13.-16.네 가지 도(道)에 대한 앎.
<Vism 639-671>
5. 위빠사나 수행의 이익
간단히 말해서 불교 수행의 이익 또는 목적은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인 열반의 성취에 있다. 苦와 苦의 滅만을 설한다고 하신 붓다의 말씀은 인간 존재의 현실적인 모습과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단적인 말씀이며,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위빠사나 수행의 이익은 {대념처경}에 다음의 일곱 가지로 제시되어 있다.
(1) 마음의 청정 - 번뇌의 제거,
(2) 슬픔과 근심의 극복,
(3) 비탄의 극복,
(4) 육체적인 고통의 극복,
(5) 정신적인 고뇌의 극복,
(6) 네 가지의 도(道)와 과(果)의 성취,
(7) 열반의 성취.
따라서 마지막 열반의 성취가 궁극적인 수행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익을 얻는데는 길게는 7년 내지는 짧게는 7일이 걸린다고 경전의 말미에 제시되어 있으며, 번뇌가 남아있으면, 불환(不還)의 깨달음을 번뇌가 없으면, 아라한의 완전한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대념처경}에는 마음챙김 수행을 닦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선정수행에 대한 언급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산란하고, 졸음에 빠지기 쉬운 우리의 일상적인 심리상태에서 곧 바로 관찰과 마음챙김 수행을 닦아 마지막으로 아라한과에 이를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는 이 수행법은 사색계선(四色界禪) 이나 四無色界禪 그리고 滅盡定을 거치지 않는 慧解脫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문적인 선정수행을 닦지 않고서 아라한이 되는 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팔리 주석문헌을 통해서 순관(純觀: suddha-vipassan )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수행을 통해서 극복해야 할 번뇌
위빠사나 수행에서의 번뇌에 대한 대치법은 간단하다. 어떠한 번뇌가 생겨나도 생겨나는 그 순간에 즉각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방패로 모든 번뇌를 대처한다는 의미이다. 끊어짐이 없는 마음챙김만이 번뇌를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번뇌가 생기면 없애려고 하기보다는 알아차림을 지니려 해야 한다. 수행의 초보 단계에서는 번뇌의 힘이 강하고 마음챙김이 약하므로 수행 자체가 쉽사리 진행되지 않는다. 무리하게 번뇌와 정면으로 맞부딪히려 하지 말고 마음챙김을 지니려고 노력해야 한다. 마음챙김이 강해질수록 번뇌의 거센 물결은 점차 가라앉게 될 것이다.
다음에 제시되는 몇 가지 분류의 번뇌들과 그 대치법은 경전과 주석문헌을 참고로 정리해 보았다. 번뇌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조언이라고 생각한다.
6.1.다섯 가지 덮개[五蓋]와 대치법
(1) 감각적인 욕망을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 부정관을 할 것. (不淨相의 획득; asubbha-nimittassa uggaho)
② 부정관에 전념할 것. (부정관 수행에의 노력; asubbha- bh v anuyogo)
③ 감각기관을 잘 제어할 것. (감각기관의 보호; indriyesu guttadv rat )
④ 음식에 대해서 소중한 생각을 지니고 양을 조절할 것.
(식사의 양을 알 것; bhojane matt ut )
⑤ 도심이 굳은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 a-mittat )
⑥ 감각적 욕망에 대한 말을 피하고 욕망을 제어하는 말을 할 것. (적절한 말; sapp yakath )
(2) 분노[惡意]를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 자관(慈觀)을 닦을 것. (慈相의 획득; mett nimittassa uggaho)
② 자관(慈觀)에 전념 할 것. (慈觀 수행에의 노력; mett bh van nuyogo)
③ 업은 자신의 것임을 생각할 것. (자신이 지은 업의 자성을 관찰;
kammassakat paccavekkha )
④ 자관의 좋은 점과 분노의 해로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것. (관찰을 많이 닦을 것;
pa isa kh nabahul kat )
⑤ 분노를 잘 다스리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 a-mittat )
⑥ 자관의 이로움과 분노의 불이익에 대한 말을 할 것. (적절한 말; sapp yakath )
(3) 혼침과 졸음을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 혼침과 졸음의 원인이 과식에 있음을 알 것.
(과식에 대한 相의 획득; atibhojane nimittagg ho)
② 자세를 바꿀 것. (威儀의 전환; iriy patha-samparivattanat )
③ 광명상(光明想)을 닦을 것. (광명상의 사유; lokasa -manasik ro)
④ 지붕이 없는 곳에서 수행할 것. (露地에서 머물 것; abbhok sav so)
⑤ 잠자기를 즐기지 않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 a-mittat )
⑥ 수면의 불이익과 깨어 있음의 이로움에 관한 말을 할 것. (적절한 말; sapp yakath )
(4) 들뜸과 우울(회한)을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배울 것. (多聞할 것; bahussutat )
②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돼는 일을 두루 물을 것. (널리 물을 것; paripucchakat )
③ 계율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 (율에 대한 분명한 앎; vinaye pakata ut )
④ 계를 잘 이해하고 지키는 연장자[長老]와 함께 지낼 것. (老長老를 가까이 모실 것;
vuddhasevit )
⑤ 들뜸과 우울을 잘 다스리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 a- mittat )
⑥ 들뜸과 우울의 해로움과 마음의 고요함의 이로움에 관한 적절한 말을 할 것.(적절한 말; sapp yakath )
(5) 회의적 의심을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배울 것. (多聞할 것; bahussutat )
② 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심이 있으면 질문을 하여 의심을 풀 것. (널리 물을 것;
paripucchakat )
③ 계율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 (율에 대한 분명한 앎; vinaye pakata ut )
④ 삼보의 진실함에 대한 믿음을 기를 것. (신심[勝解]을 많이 닦을 것; adhimokkhabahulat )
⑤ 삼보에 대한 신심이 지극한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 a- mittat )
⑥ 의심의 해로움과 의심을 없애는 일의 이로움에 대한 적적한 말을 할 것. (적절한 말;
sapp yakath )
6.2. 마라[魔]의 열 가지 군대
① 감각적 쾌락; k ma.
② 불쾌[憂愁]; arati.
③ 배고픔과 목마름[飢渴]; khuppip s .
④ 갈망[渴愛]; ta h .
⑤ 혼침(昏沈)과 졸음[睡眠]; th na-middha.
⑥ 공포; bh r .
⑦ 회의적 의심[疑]; vicikicch .
⑧ 자신의 잘못을 감추는 것[僞善]과 고집; makkho, thambho.
⑨ 이익, 칭찬, 존경받음, 잘못 얻은 명성; l bho, siloko, sakk ro, micch laddho yaso.
⑩ 자신에 대한 칭찬과 타인에 대한 비방; att na samukka se pare avaj nati.
6.3. 열 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十觀隨染]
10 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十觀隨染]는 모두 처음 위빠사나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행자에게만 생기는 번뇌이다. (Vism 633-8)
① 마음속에서 강한 빛을 경험하기도 하고[光明 och sa],
② 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듯이 이해되기도 하며[知 a],
③ 몸의 전율을 느끼는 희열이 생기기도 하고[喜 p ti],
④ 몸과 마음은 아주 안정되어 편안해지며[輕安 passaddhi],
⑤ 마음에서 강렬한 즐거운 느낌을 느끼기도 하며[樂 sukha],
⑥ 강한 신심이 생겨나기도 하고[勝解 adhimokkha],
⑦ 더욱더 수행에 전념하여 정진을 하며[努力 paggaho],
⑧ 흔들림 없는 마음챙김이 뚜렷하게 항상 자리잡고 있기도 하고[現起 upa h na],
⑨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서 마음은 더욱더 무덤덤해지며[捨 upekkh ],
⑩ 이러한 제 현상들에 대하에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난다[欲求 nikanti].
光明·知·喜·輕安·樂는 모두 위빠사나 수행을 함으로써 생겨나는 현상이다. 勝解는 강한 믿음이며, 노력은 정진(viriya)을 말한다. 現起는 마음챙김[念, sati]이다. 위빠사나와 관련되어 있는 흔들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생긴다. 捨는 위빠사나의 捨이다. 이 捨가 생기면, 모든 현상[一切行]에 대하여 탐착과 싫어함을 떠난 중간의 입장이 된다(majjhattabh t ).마지막의 욕구는,光明 등에 의해 장엄된 위빠사나에 대해서 집착을 일으켜, 미세하며, 고요한 형태를 지닌 欲求를 말한다.
이렇게 1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가 생길 때,'나는 道를 얻었다. 나는 果를 얻었다.'라고 도가 아닌 것[非道]을 道라고 집착하며, 깨달음이 아닌 것[非果]을 깨달음[果]이라고 집착한다.
따라서 1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에 대해서 견해의 집착[見執, di hig ha], 나라고 하는 집착[慢執, m nag ha], 더욱 갈망하는 집착[愛執, ta h g ha]이 생겨나서 30 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三十觀隨染]가 된다.
이 3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에 대해서, 이것들은 無常하며, 만들어진 것들[有爲]이며,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緣已生]이며, 소멸해 버리는 현상[滅盡法]이며,,사라져 버리는 현상[消滅法]이며, 탐착을 해서는 안될 현상[離貪法]이며, 멸하는 현상[滅法]이다라고지혜에 의해 고찰해서 이러한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에서 벗어나서,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는 非道이며, 바른 길로 이끄는 위빠사나의 앎은 道라고 확실하게 이해한다. 이것이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이다.
견청정(見淸淨)에서 명색구별(名色區別)에 의해 苦諦의 분석을 행하고, 도의청정(度疑淸淨)에서 연파악(緣把渥)에 의해 集諦의 분석을 행하며,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에서 正道의 강조에 의해 道諦의 분석을 행한다. 이 세 가지 청정에 의해서, 세 가지 진리[三諦]에 대한 분석이 행해진다. 즉, 괴로움의 진리[苦諦]·발생의 진리[集諦]·길의 진리[道諦]에 대하여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6.4.열 가지 족쇄
5하분결(五下分結); 욕망의 세계[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번뇌.
pa cannam orambh giy na samyojan nam
① 유신견(有身見) 또는 자신견(自身見) - 오온을 영원한 자아와 관련 지워 보는 견해. sakk yadi hi
② 회의적 의심 - 삼보와 수행법 등에 대한 의심. vicikicch
③ 계율이나 금지 조항에의 집착[戒禁取見]. s labbatapar m so
④ 감각적 욕망[愛慾]. k macchando
⑤ 악의 - 분노. vy p do
5상분결(五上分結); - 미세한 물질의 세계[色界]와 정신의 세계[無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번뇌.
pa cannam uddhambh giy na samyojan nam
⑥ 색계에 대한 욕망. r par go
⑦ 무색계에 대한 욕망. ar par go
⑧ 아만. m no
⑨ 들뜸. uddhacca
⑩ 어리석음[無明]. avijj
6.5. 聖人(四道四果)과 10가지 족쇄의 소멸
聖人 10 가지 족쇄의 소멸
흐름에 들어선 분 - 預流, sot panno (1-3의 소멸)
한 번 오는 분 - 一來 sakad g m (1-3의 소멸, 4-5의 약화)
돌아오지 않는 분 - 不還 an gam (1-5의 소멸)
공양받을만한 분 - 阿羅漢 rahato (1-10의 소멸)
7. 맺는 말
위빠사나의 의미는 간단히 말하면 '통찰'이며, 그 내용은 무상, 고, 무아의 입장에서 몸과 마음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 수행법은 {대념처경}을 위시로 한 염처계 경전을 바탕으로 자세한 수행법이 제시되어 있음도 확인하였다. 또한 {청정도론}에 정리된 지혜의 향상 단계는 위빠사나 수행이 진행되는 과정으로 의미함을 정리해 보았고,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이익은 아라한과와 열반의 성취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수행을 통해 극복해야 되는 번뇌의 범주를 살펴보았고, 이러한 번뇌의 소멸 과정이나, 위빠사나 지혜의 전개 양상을 스스로 점검하면서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의 정도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실제적인 수행의 길을 갈 때, 이론적으로 아는 것으로 따지고 들면 오히려 수행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실제 수행을 하는 이들은 이론적인 지식은 일단 놓아두고 수행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경전이나 이론적인 지식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자신이 지나간 길을 되돌아 볼 때 사용될 수 있으며, 자신의 수행이나 마음 상태를 점검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경험이 많은 분의 지도를 받을 때에는 딱히 이론적인 이해가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이 가는 길을 점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법은 법을 실천하는 사람을 보호한다고 했다. 스스로 확인한 법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 더 나아가 성인의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수행을 지속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엽 불멸 2500년을 기념하는 전후시기에 미얀마와 태국을 중심으로 상좌불교의 새로운 불교 운동처럼 일어나서 이제는 서양은 물론 한자불교권인 동아시아 불교권에 까지 전해진 위빠사나 수행법은 어떤 수행법보다도 초기불교 정신에 가까우면서 남방상좌불교의 보수적인 전통을 잇고 있는 귀중한 정신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록 1 三十七 助道品>
서른 일곱 가지 깨달음을 도와주는 법[三十七助道品]
(bodhipakkhiy dhamm )
(1) 사념처(四念處) catt ro satipa h n , 네 가지 마음챙김
①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處]
②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受念處]
③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心念處]
④ 법에 대한 마음챙김[法念處]
(2) 사정근(四正勤), 사정단(四正斷) catt ro sammappadh n 네 가지 노력.
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온전치 못한 법은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애쓰고, 정진하고, 마음을 책려(策勵)하고 노력함 [未生惡令不生]
② 이미 생겨난 악하고 온전치 못한 법은 없애려고 의욕을 일으키고, 애쓰고, 정진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함. [已生惡令永斷]
③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한(온전한) 법은 생겨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애쓰고, 정진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함.[未生善令生]
④ 이미 생겨난 선한(온전한) 법은 유지시키고, 잃지 않도록 하며, 증장시키고, 많아지도록 하며, 계발하고, 완성시키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애쓰고, 정진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함. [已生善令增長].
(3) 사신족(四神足) catt ro iddhip d , 네 가지 신통의 기반.
① 욕신족(欲神足) 또는 욕여의족(欲如意足) : (신통을 얻으려고 하는) 의욕에 의해 생겨난 선정(禪定)과 노력의 힘을 갖춘 신통의 기반[足].
② 정진신족(精進神足) : 정진에 의해 생겨난 선정(禪定)과 노력의 힘을 갖춘 신통의 기반.
③ 심신족(心神足) : 마음에 의해 생겨난 선정(禪定)과 노력의 힘을 갖춘 신통의 기반.
④ 사유신족(思惟神足) : 사유[관찰]에 의해 생겨난 선정(禪定)과 노력의 힘을 갖춘 신통의 기반.
(4) 오근(五根) pa ca-indriy ni,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
① 믿음의 기능 [信根, saddh -indriya] :
붓다의 깨달음[tath gatassa bodhi ]에 대한 믿음. 불·법·승 삼보와 계에 대한 네 가지 불괴(不壞)의 정신(淨信)[aveccappas da].
② 노력의 기능 [精進根,viriya-indriya] : 사정근(四正勤)
③ 마음챙김의 기능 [念根 sati-indriya] : 사념처(四念處)
④ 마음집중의 기능 [定根sam dhi-indriya] : 사선(四禪)
⑤ 지혜의 기능 [慧根pa -indriya] :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앎.
성스러운 통찰에 의해 올바르게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생멸하는 현상에 대한 지혜의 성취.
(5) 오력(五力) pa ca bal ni, 다섯 가지 마음의 힘.
① 믿음의 힘 [信力, saddh -bala]
② 정진의 힘 [精進力, viriya-bala]
③ 마음챙김의 힘 [念力, sati-bala]
④ 마음집중의 힘 [定力, sam dhi-bala]
⑤ 지혜의 힘 [慧力, pa -bala]
(6) 칠각지(七覺支) satta bojjha g
①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念覺支; sati-sambojjha ga]
②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 dhamma-vicaya-s ]
③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 viriya-s ]
④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 p ti-s ]
⑤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 passaddhi- s ]
⑥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定覺支; sam dhi-s ]
⑦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捨覺支; upekkh -s ].
(7) 팔지성도(八支聖道), 팔정도(八正道)ariyo a ha giko maggo
① 바른 이해[正見] ---+ 지혜[慧]
② 바른 사유[正思惟] ---+ (pa )
③ 바른 언어[正語] ---+ 윤리[戒]
④ 바른 행위[正業] | (s la)
⑤ 바른 생계[正命] ---+
⑥ 바른 노력[正精進] ---+ 마음집중[定]
⑦ 바른 마음챙김[正念] | (sam dhi)
⑧ 바른 마음집중[正定] ---+
『대념처경』의 팔정도 설명. (DN II, 312-3)
① 바른 이해 - 四聖諦에 대한 앎.
'괴로움'에 대해서 아는 것, '괴로움의 발생'에 대해서 아는 것,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아는 것,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② 바른 사유
감각적인 욕망이 없는 마음가짐[出離], 나쁜 의도[惡意]가 없는 마음가짐, 남을 해치려는 의도가 없는 마음가짐.
③ 바른 언어[正語]
거짓말[妄語], 이간질하는 말[兩舌], 거친 말[惡口], 쓸모 없는 말[綺語]을 삼가함.
④ 바른 행위[正業]
살생을 하지 않음[不殺生],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음[不偸盜], 삿된 성행위를 하지 않음[不邪淫].
⑤ 바른 생계[正命]
잘못된 생계를 버리고 바른 생계에 의해서 생활하는 것.
⑥ 바른 노력[正精進] - 네 가지 노력[四正勤]
⑦ 바른 마음챙김[正念] -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
⑧ 바른 마음집중[正定] - 네 가지 마음집중[四禪]
네 가지 마음집중[四禪]
(1) 초선(初禪)
비구들이여, 비구는 모든 감각적인 욕망을 떨어버리고, 모든 온전하지 못한 법들[不善法]을 떨쳐 버리고 (마음집중의 대상에 대한)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가 있고, (감각적인 욕망 등에서) 멀리 떠남에 의해서 생겨난 희열[喜, p ti]과 행복감[樂, sukha]이 있는 첫 번째 마음집중[初禪]을 성취하여 거기에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벗들이여, 첫 번째 마음집중[初禪]에는 다섯 가지 덮개[五蓋]가 끊어지고,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五禪支]가 갖추어진다.
[오개(五蓋)의 사단(捨斷)]
벗들이여, 여기에 첫 번째 마음집중에 도달한 비구에게는
①감각적 욕망에의 희구[k macchanda]가 끊어진다.
②악의[惡意, by p da]가 끊어진다.
③혼침과 졸음[th na-middha]이 끊어진다.
④들뜨는 마음과 회한에 잠기는 마음[uddhacca-kukkucca]이 끊어진다.
⑤회의적인 의심[vicikicch ]이 끊어진다.
[오선지(五禪支)의 구족(具足)]
첫 번째 마음집중에 도달한 비구에게는
①거친 사유[尋, vitakka], ②미세한 사유[伺, vic ra], ③희열[喜, p ti], ④행복감[樂, sukha], ⑤하나의 대상에 대한 마음의 통일[心一境性, cittekaggat ]이 작용한다.
{中部} 43, {有明大經} MN I, 294.
* 첫 번째 마음집중[初禪]에서 작용하는 다섯 가지 현상을 초선의 다섯 구성요소라고 한다. 그 가운데 거친 사유[尋, vitakka]와 미세한 사유[伺, vic ro]는 마음의 언어적인 작용[vaci-sa kh ra]으로 불린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의식의 이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淸淨道論』에 의하면, 거친 사유[尋, vitakka]는 물병을 잡는 행위에 비유되고, 미세한 사유[伺, vic ro]는 잡은 물병을 닦는 행위에 비유된다. 초선에서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하고 있지만, 수행의 대상에 마음이 완전히 몰입되어 있을 때, 미세한 사유는 산만함이 없어지고 탐색하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 이 두 가지 초선의 요소는 제 2선(第二禪) 이후에는 완전히 없어진다.
(2) 제2선(第二禪)
다시 비구들이여,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가 가라앉고 마음의 정결함[sampas dana]과 전일성(專一性)이 있는, 거친 사유가 없고[無尋] 미세한 사유도 없는[無伺] 마음집중[sam dhi]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감이 있는 제2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제2선을 구성하는 요소는 희열[喜], 행복감[樂] 그리고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分別論』「禪定分別」Vibh 263.
(3) 제3선(第三禪)
다시 비구들이여, 희열을 버리고, 평온[捨,upekkha]에 머문다. 마음챙김[正念]과 분명한 앎[正知]을 지니고,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면서, 성자들이 `평온함과 마음챙김을 지니고 행복감에 머문다'고 한 제3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제3선을 구성하는 요소는 행복감[樂]과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分別論』「禪定分別」Vibh 264.
(4) 제 4선(第四禪)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행복감[樂]을 떠나고 괴로움[苦]도 떠나고,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없애버린, 불고불락(不苦不樂)인, 그리고 평온(捨)에 의한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또는, 평온과 마음챙김이 청정하게된; upekkh -sati-p risuddhi) 제4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제4선을 구성하는 요소는 평온[捨]과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分別論』「禪定分別」Vibh 264.
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마음집중[正定]이라고 한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부록 2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참고 서적>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서적 가운데에서도 마하시 수행 전통을 중심으로 중요한 책들을 소개해 본다. 영어로 출판된 저술이 중심이 되어있다. 우리말 번역이 있는 것은 필자가 아는 한도에서 정리해 보았다. 하지만 우리말 번역본을 읽을 때에는 용어의 번역에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아직 번역용어가 정착되지 않은 것이 현재의 실정에서 역자마다 각기 번역 용어가 다른 점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팔리어나 산스크리트 원어로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체험을 통한 이해일 것이다. 체험을 통해 이해한 법은 다시, 경전을 바탕으로 남에게 해설되어야 한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수행의 지침서들은 '지도'에 불과하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가장 안전하고 정확한 여행을 하는 데는 지도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다. 특히, 초행길이나 여행의 초보자에게는 더욱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독도법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여행을 통해 경험을 쌓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목적지까지 이르는 길에 정통해 있는 '여행안내인'이 있다면, 여행은 보다 안전하고, 빠르며, 정확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인 수행도 여행과 마찬가지이다. 좋은 지침서만으로는 수행 길에 제대로 들어서는 것이 쉽지 않다.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길이나, 장애물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뢰할 수 있으며, 경험이 풍부한 스승의 지도 하에 수행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수행을 완성하는데 있어서 스승[선지식]의 비중을 절반으로 보았던 아난 존자에게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있지 않은가. 수행에서 스승은 거의 전부라고.
(1)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의 가르침
① The Satipa h na Vipassan Meditation; A Basic Buddhist Mindfulness Excercise, English Translation by U Pe Thin, Rangoon: Department of Religious Affairs, 1979.
Reprint as The Wheel Publication No. 370/371 b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1990.
<우리말 번역>
『깨달음으로 이끄는 명상』11-65쪽, 정동하 옮김, 서울: 경서원, 1995.
1951년의 마하시 사야도의 설법을 녹음한 위빠사나 수행의 교과서. 미얀마 인들은 이 법문을 녹음 테이프로 듣고 수행을 해오고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에 따라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는 수행자들의 필독서의 하나이다.
② Practical Insight Meditation; Basic and Progressive Stages, Rangoon : Department of Religious Affairs, 1979.
Reprint b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1980.
<우리말 번역>
『위빠사나 II』253-316쪽, 김열권 편저, 서울: 불광출판사, 1993.
『깨달음으로 이끄는 명상』67-140쪽, 정동하 옮김, 서울: 경서원, 1995.
본서는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 단계에서 향상된 단계에 이르기까지 실제적인 수행법을 설명해 놓은 명저이며, 필독서의 하나이다. 수행에 대한 다른 해설서와 마찬가지로 수행의 경험이 없는 이가 처음 읽고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수행을 해나가면서 늘 가까이 두고 읽으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본서의 서문에서 는 마하시 사야도는 주저(主著)인 {위빠사나 수행법} 2권(Vipassan shu nyi gyan라는 이름으로 미얀마어로 1944년에 완간됨. 총 7장으로 되어 있음) 가운데 제 5장을 영역한 것이다.
미얀마어 {위빠사나 수행법}은 총 858쪽에 달하는 대저로 마하시 사야도의 주저(主著)이다. 본서의 저술경위들에 대한 소개는 마하시 사야도의 전기인 The Venerable Mah si Say daw Biography (Mahasi Biography), Rangoon, Buddha S san Nuggaha Organization, pp.58ff 참조.
③ The Progress of Insight through the Stages of Purification; A modern P li treatise on Buddhist Satipa han Meditation, English Translation with note by Ny naponika Thera,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78.
본서에서는 칠청정(七淸淨)과 18 단계의 위빠사나 지혜의 향상에 대한 해설이 제시되었다. 부록의 청정지론(淸淨智論, Visuddhi- a- kath )에서 마하시 사야도는 팔리어로 본서의 내용을 정리했다.
위빠사나 수행의 향상 단계가 설명되어 있어 수행자가 자신의 수행의 단계를 확인할 수 있는 점이 위빠사나 수행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본서와 유사한 내용으로 잘 정리된 유용한 저술에 다음이 있다.
Matara Sri r ma Mah thera, The Seven Stages of Purification and The Insight Knowledge,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83, 1993.
(2) 우 판디타 사야도(U Pa ita Sayadaw)의 가르침
① In this very Life; The Liberation Teachings of the Buddha, Boston/Kandy: Wisdom/BPS, 1992.
본서는 우 판디타 사야도께서 1984년 미국 메사츄세츠주의 Insight Meditation Society에서 3개월간의 집중수련회(Retreat) 동안에 법문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실제적인 위빠사나 수행의 지침과 인터뷰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은 초보자에게 도움이 되는 법문이며, 오근(五根)을 계발하는 아홉 가지 방법, 열 가지 악마의 군대, 칠각지(七覺支), 위빠사나선(禪) 등의 가르침이 제시되어 있다.
②『지금 이 순간 그대는 깨어있는가』정원 옮김, 서울: 고요한소리, 1992.(초판)
천안: 호두마을 위빠사나 수행처, 2002 개정판, {위빠사나 수행의 길}.
본서는 옮긴이가 1990년 우안거(雨安居) 3개월 동안 미얀마 양곤의 판디타라마 수행센터에서 수행하면서 들은, 우 판디타 사야도의 법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본서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적인 단계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하루하루의 법문을 그날그날 기록한 것이어서 반복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실제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적인 소감인지 몰라도, 필자를 포함하여 당시 함께 이 법문을 들으며 수행하던 수행자들은 스승과 법의 중요성을 깊이 느끼면서 수행에 임했다. 법은 법을 실천하는 이를 보호한다는[장로게(長老偈) 303] 경전의 의미를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면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위와 같은 법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빠사나 수행을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공감되는 바가 많은 법문집이다.
③ On the Path to Freedom; A mind of wise discernment and openness, English Translation by Mya Thaung, Selangor: Buddhist Wisdom Centre, 1995.
본서는 우 판디타 사야도가 양곤 마하시 수행센터의 원장으로 수행을 지도하실 때인 1986년 8월에서 1987년 3월에 거쳐 미얀마어 외국 수행자에게 법문한 내용을 번역, 정리한 것이다.
내용은 47 소항목으로 나뉘어져, 수행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법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문의 특징은 팔리어를 사용하면서 용어들에 대한 아비담마[論書] 및 주석서적인 자세한 해설을 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본서를 읽고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팔리어에 대한 이해가 많은 도움이 된다. 500쪽에 이르는 사전적인 성격의 법문집이므로 필요한 부분을 읽으면서 수행의 지침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3) 우 실라난다 사야도(U S l nanda Sayadaw)의 가르침
① The Venerable Mah si Say daw (Chatta Sangiti Pucchaka Agga Mah Pandita) Biography (Abridged Edition - Part I), Compiled by Ashin S l nand bhivumsa, translated by U Min Swe, Rangoon(Yangon): Mah s Th thana Yeikth , 1982.
본서는 마하시 사야도가 생존해 있었던 1974년에 이르기까지의 마하시 사야도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
현대 미얀마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승이자 학승이었던 마하시 사야도의 생애는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 전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② The Four Foundation of Mindfulness, Boston: Wisdom Publication, 1990.
1979년, Insight Meditation Society의 초빙으로 미국을 처음 방문하여 위빠사나를 지도하신 이래, 당시 동행했던 우 실라난다 스님은 미국에 남아 위빠사나를 지도해 오셨다. 본서는 우 실라난다 스님의 오랜 세월 동안의 법문을 정리한 것이다.
본서는 위빠사나 수행의 근본 경전인 『대념처경』을 팔리어의 주석서와 복주(複注) 그리고 마하시 사야도의 미얀마어 주석을 바탕으로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대념처경』의 이해를 위한 좋은 번역서이자, 해설서이다. 주석서에 충실한 해설은 특히 경전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 우 실라난다 사야도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위빠사나를 지도하고 있다.
(4) 우 자나카 사야도(U Janaka Sayadaw)의 가르침
① Vipassana Meditation; Lectures on Insight Meditation, Yangon: Chanmyay Yeiktha Meditation Centre, 1992, 1995.
<우리말 번역>
『위빠사나 수행 - 통찰 수행에 대한 가르침』正圓(김재성) 옮김, 서울: 경서원, 1998, 초판, 서울: 보리수선원 2002, 재판.
우 자나카 사야도의 영어로 된 대표적인 수행지침서.
영어본으로 142쪽에 달하는 그리 분량이 많지 않은 법문집이지만, 알기 쉽고 요점을 잘 간추린 위빠사나 수행의 지침서로 권할 수 있는 법문집이다. 기초적인 위빠사나 수행법, 사념처에 대한 여러 방면에서의 해설, 일곱 단계의 청정[七淸淨], 오근(五根)을 예리하게 하는 9 방법, 그리고 간략하면서도 요긴한 수행의 지침에서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위빠사나 수행법의 핵심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영어 원문에는 없는 부록의 <자비관(慈悲觀)>은, 현재 우 자나카 스님이 지도하고 계시는 양곤의 찬매 수행센터에서 실제로 암송하고 있는 내용을 옮긴 것이다.
(5) 우 쿤달라 사야도(U Kundala Sayadaw)의 가르침
① The Nine Essential Factors which strengthen the Indriya of a Vipassan Meditating Yogi (Volume 1), Translated and Published by Khin Mya Mya, Singapore/Yangon: Saddhammaransi Meditation Center, 1994.
<우리말 번역>
『위빠사나를 돕는 아홉 요인』혜조 옮김, 서울: 자유아카데미, 2541(1997), 법공양판, 배포처: 직지사 백련암(전화; 0574-436-6060)
본서는 우 쿤달라 사야도께서 1993년 10일간의 집중수행 기간 동안에 법문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내용은 위빠사나 수행자의 오근(五根)을 강화시켜주는 9 가지 요인이다. 위에 소개한 영어본에서는 5 번째 요인까지가 정리되어 있고, 6 번째에서 마지막의 9 번째 요인은 다른 역자에 위해서 번역되었으나, 정식으로 출판되지 않은 채 프린트되어 읽혀지고 있다. 삿담마란시(따담마란디) 수행센터에서 직접 우 쿤달라 사야도의 지도하에 수행을 한 혜조 스님이 법문 전체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우 쿤달라 사야도의 자상하면서도 간절한 수행에의 지도방식을 잘 엿 볼 수 있는 법문집이다. 우 쿤달라 사야도가 지도하시는 삿담마란시(따담마란디) 수행센터에서는 외국인 수행자들에게는 위 법문이 녹음된 테이프를 반복해서 들려준다.
(6) 기타
The Heart of Buddhist Meditation, Nyanaponika Thera, London, Rider, 1962.
<우리말 번역>
『불교 선수행의 핵심』냐나포니카 지음, 송위지 옮김, 서울: 시공사, 1999.
본서는 독일인이면서 남방상좌부 승려로 일생을 보낸 냐나포니카 스님의 저서이다. 사념처(四念處)수행을 중심으로 불교수행을 정리한 유명한 저술로 현재도 판을 거듭하며 읽혀지고 있다.
이외 위빠사나 및 수행관련 연구자 및 저술가(강명희, 김열권, 김준호, 김형준, 미산현광스님, 안승준, 임승택, 조준호 등)의 연구 발표 논문도 위빠사나 수행의 이해에 도움이 되며, 특히, 임승택 박사의 {빠띠삼비사막가 역주} (서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1)는 남방상좌불교의 수행론의 특징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는 수행처에 대한 정보는 위빠사나 카페(http://cafe.daum.net/vipassana)를 참조하기 바람.
<부록 3 {대념처경} >
대념처경(大念處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캄마사담마라고 하는 쿠루 족의 마을에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 하고 말씀하셨다. 비구들은 '세존이시여'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괴로움과 싫어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한, 올바른 길에 이르기 위한, 열반을 깨닫기 위한 하나의 길[ek yano maggo]이다. 바로 그것은 네 가지의 마음챙김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
(1) 몸에 대한 마음챙김 [身念處]
비구들이여, 여기 [이 가르침]에서 어떤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2)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 [受念處]
그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3)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 [心念處]
그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4) 법에 대한 마음챙김 [法念處]
그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1. 몸에 대한 마음챙김 [身念處]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1.1.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出入息念]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비구가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서, 다리는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 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단단히 하여 앉는다. 그리고는 마음을 챙겨서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챙겨서 숨을 내쉰다.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paj n ti), 길게 내쉬면서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숨을 짧게 들이쉬면서는 `숨을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쉬면서는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sikkhati)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한다. `(호흡이라는) 육체의 작용[身行]을 안정시키면서 숨을 들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 `육체의 작용을 안정시키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마치 도자기공이나 그 의 도제가 원반을 돌릴 때, 오랫동안 돌리면서는 '오랫동안 돌린다'라고 알아차리며, 짧게 돌리면서는 '짧게 돌린다'라고 알아차리는 것과 같이, 바로 이처럼 비구들이여,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길게 내쉬면서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숨을 짧게 들이쉬면서는 `숨을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쉬면서는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한다. `(호흡이라는) 육체의 작용[身行]을 안정시키면서 숨을 들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 `육체의 작용을 안정시키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 『대념처경』주석서의 보충설명; '몸이 있다'라는 것은 오직 육체적인 현상만이 있지, 거기에 중생, 인격체, 여자, 남자, 자아는 없다는 의미이다. 즉, 몸에는 자아에 속한 것이나, 자아나, 인격체에 속한 것은 없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出入息念]은 가장 중요한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이 방법은 위빠사나 수행을 닦기 위한 예비 단계나, 네 가지 마음집중[四禪]을 계발하는 방법이나 위빠사나와 선정 의 양쪽을 닦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지금 이 『대념처경』에서의 출입식념은 다음과 같이 전개될 위빠사나 수행을 닦기 위한 예비단계로서의 마음집중과 고요함을 얻기 위해서 제시되었다.
정기적인 출입식념의 수행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마음의 고요와 마음집중(사선 가운데 한 가지의 선정)을 얻은 후, 수행자는 호흡의 시작(origin of breath)을 검토한다. 그는 사대(四大; 地水火風)와 다섯 감각기관과 같이 사대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물질적인 현상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육체[色]에 의해서 호흡이라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인상[觸]으로부터 인식[識]이 생겨나고, 이 인식과 함께 오온(五蘊)의 나머지 세 가지 요소인 느낌[受], 표상작용[想], 의지작용[行]이 생겨난다는 사실도 통찰하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른바 인격체라고 불리는 에고라는 실체 또는 자아는 어디에도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다만 여러 가지 요건에 의해서 조건 지워져 있는 육체와 마음의 흐름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본다. 그런 후, 그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 세 가지 특성을 적용시켜서, 그것들을 전적으로 무상하며, 괴로움이며, 영원한 실체가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中部』118經 『出入息念經』과『淸淨道論』8장을 참고하기 바람.
1.2. 동작[行住坐臥]에 대한 마음챙김
또한 비구들이여, 걸어갈 때는“걸어간다”라고 알아차리고, 서 있을 때에는 “서 있다”라고 알아차리며, 앉아 있을 때에는 “앉아 있다”라고 알아차리며, 누워 있을 때에는 “누워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이외의 다른 몸의 동작이 있을 때, 그러한 동작을 그때그때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1.3. 분명한 앎[正知]
또한 비구들이여, 앞으로 나아갈 때나 뒤로 들아 갈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팔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가사(승복)를 입고, 발우를 들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가고, 서고, 앉을 때에도,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에도, 말하거나, 침묵을 하고 있을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닌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1.4. 육체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厭逆作意]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육신을 아래로는 발바닥에서 위로는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피부로 덮여져 있으며 가지가지의 깨끗하지 못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즉, 이 육신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 발톱, 이,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장, 늑막, 지라, 허파, 내장, 내장의 내용물, 위장, 위장의 내용물, 대변, 담즙, 가래, 고름, 혈액, 땀, 고형지방질, 눈물, 액체지방질, 침, 콧물, 관절액, 소변 등.
비구들이여, 마치 위아래 양쪽에 구멍이 나있는 자루에 여러 가지 곡식 즉, 벼, 보리, 녹두, 콩, 깨, 쌀 등이 들어있는 경우, 이 자루를 눈이 있는 사람이 풀어보고서“이것은 벼, 이것은 보리, 이것은 녹두, 이것은 콩, 이것은 깨, 이것은 쌀이라고 직접 관찰하는 것과 같이, 비구들이여, 수행자는 바로 자신의 육신을 직접 관찰한다. 즉, 이 육신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 발톱, 이,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장, 늑막, 지라, 허파, 내장, 내장의 내용물, 위장, 위장의 내용물, 대변, 담즙, 가래, 고름, 혈액, 땀, 고형지방질, 눈물, 액체지방질, 침, 콧물, 관절액, 소변 등으로.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1.5. 네 가지 요소[四大; 地水火風]에 대한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이 육신을 현재 있는 그대로, 구성되어진 그대로 (네 가지) 요소의 측면에서 관찰한다. 즉, “이 육신에는, 땅의 요소[地界],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가 있다”라고.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백정이나 그의 제자가 소를 도살해서 사거리의 큰길에 부위별로 해체해 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이, 바로 이처럼 비구들이여, 수행자는 바로 자신의 육신을 (네 가지) 요소의 측면에서 관찰한다. 즉, “이 육신에는, 땅의 요소[地界],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가 있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1.6.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관찰 [부정관(不淨觀)]
① 첫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져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된 시체가 부풀어오르고, 검푸러지고, 썩어 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② 두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까마귀, 매, 독수리, 개, 표범, 호랑이, 재칼 등에 의해서 먹혀지고, 갖가지의 벌레에 의해서 파 먹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③ 세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 있고, 살점이 붙어있는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④ 네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 있고, 살점은 없이 핏자국만 얼룩진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⑤ 다섯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만 남아 있고, 살점이나 핏기가 없는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⑥ 여섯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여기에 손뼈, 저기에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 등뼈, 두개골 등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⑦ 일곱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조개껍질의 색처럼 하얗게 변해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⑧ 여덟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일 년도 더되어 한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⑨ 아홉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뼈마저 썩어 가루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1.7.「몸에 대한 마음챙김」의 열 가지 이익
비구들이여,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 k yagat sati]을 거듭 닦고, 향상시키며, 계발하고, 수레(수행법)로 쓰며, 기반으로 하고, 확고하게 하며, 강화시켜, 잘 수행한다면, 다음의 열 가지 이익이 기대될 것이다.
(1)불쾌함과 즐거움을 제어하게 되어 불쾌함이 그를 정복하지 못하게 된다. 불쾌함이 생겨날 때 (즉각 알아차림으로써) 불쾌함을 극복하며 지낸다.
(2)공포와 두려움을 제어하게 되어 공포와 두려움이 그를 정복하지 못하게 된다. 공포와 두려움이 생겨날 때 (즉각 알아차림으로써)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며 지낸다.
(3)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갈증, 등에, 모기, 바람, 햇빛, 기어다니는 벌레등과 접촉할 때 견디어 내게 되며, 험담이나 불쾌한 말, 고통스럽고 통증이 심하며, 살을 애는 듯한 괴로움이나, 뼈를 깍아내는 듯한 괴로움, 의견의 불일치, 고뇌 그리고 생명에의 위협을 견디어 내게 된다.
(4)어려움이나 곤란함 없이 자신의 의지의 따라서 네 가지 마음집중[四禪]을 얻을 수 있다, 사선은 마음이 정화된 높은 경지이며, 사선을 얻으면 바로 여기에서 안락하게 지내게 된다.
(5)여러 가지의 신통력을 얻게 된다. 몸이 하나의 상태에서 여럿이 되기도 하며, 여럿인 상태에서 하나로 되기도 한다.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며, 벽이나 사방이 가로막힌 곳을 가로질러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하기도 하고, 마치 빈 공간을 지나가듯이 산을 뚫고 지나가며, 마치 물 속으로 잠수하듯이 땅 속으로 들어가며, 마치 땅 위를 걷듯이 물위를 빠지지 않고 걸어간다. 가부좌를 한 채로 새처럼 공중을 날아가며, 손으로 달과 태양을 만질 정도로 신통력이 생긴다. 범천의 세계와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그의 신통력이 미치게 된다.[神足通]
(6) 인간의 귀를 뛰어넘는 청정한 천상의 귀(청각기관)로 천상과 인간세계의 소리를 듣는다. 멀리서 나는 소리나 가까이에서 나는 소리나.[天耳通]
(7) 다른 존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마치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이해하게 된다. 그는 (다른 사람의) 탐심에 물든 마음을 탐심에 물들어 있다고 알며, 탐심이 없는 마음을 탐심이 없다고 안다. 성내는 마음을 성내는 마음이라고 알며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음에 덮여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에 덮여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인색한 마음을, 인색한 마음이라고 알며, 인색한 마음이 없어지면 인색한 마음이 없어졌다고 안다.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에 의해) 고양된 마음을 고양된 마음이라고 알며, 고양된 마음이 없으면, 고양된 마음이 없다고 안다. 보다 뛰어난 마음을 뛰어난 마음이라고 알며, 보다 뛰어난 마음이 없으면 보다 뛰어난 마음이 없다고 안다. 집중이 되어 있는 마음을 집중이 되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집중이 안된 마음을 집중이 안된 마음이라고 안다.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며,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他心通]
(8) 자신의 수많은 과거 전생에 대해서 기억한다. 즉, 한 생이나 두 생 .....등등의 과거생의 자신의 이름, 태생, 모습, 생전의 경험 내용,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 등을 기억하게 된다.[宿命通]
(9) 인간의 눈을 뛰어넘는 청정한 천상의 눈(시각 기관)으로 뭇 중생들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본다. 좋은 곳에 태어나는가 나쁜 곳에 태어나는가, 잘 생겼는가 추하게 생겼는가, 행복한가 불행한가를 보게 된다. 이처럼 그는 중생들이 자신의 행위[業].에 따라서 받게 되는 삶의 양태를 알게 된다.[天眼通]
(10) 모든 번뇌를 없애 버려서,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바로 이 생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증득해서 깨달아 완성을 이루어 지낸다.[漏盡通]
비구들이여,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거듭 닦고, 향상시키며, 계발하고, 수레(수행법)로 쓰며, 기반으로 하고, 확고하게 하며, 강화시켜, 잘 수행한다면, 위와 같은 열 가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中部』119, 『身念經』MN III, 97-99.
* 열 가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의 이익 가운데 뒤의 여섯 가지(5에서 10까지)의 이익은 여섯 가지 신통[六神通]을 말한다. 이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 신통은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세간적인 조건들이어서 범부들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의 여섯 번째의 누진통은 (번뇌를 모두 제거한) 출세간적인 신통력으로서 아라한만이 지니는 덕목이다. 네 가지의 마음집중[四禪]을 이룬다면 다섯 가지의 세간적인 신통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통력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 네 가지 신족(神足)이 있다.
2.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受念處]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즐거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괴로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출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출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출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출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세간적인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세간적인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출세간적인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서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출세간적인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느낌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느낌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느낌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느낌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3.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 [心念處]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탐욕이 있는 마음[有貪心]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또는 탐욕이 없는 마음[無貪心]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또는 성냄이 있는 마음[有瞋心]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성냄이 없는 마음[無瞋心]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또는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有癡心]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無癡心]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또는 침체된 마음을 침체된 마음이라고 알며, 산만한 마음을 산만한 마음이라고 안다. (선정 수행으로) 커진 마음[大心]을 커진 마음이라고 알며, (선정 수행을 닦지 않아) 커지지 않은 마음을 커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또는 (색계 선정과 무색계 선정 수행이) 향상된 마음을 향상된 마음이라고 알며, 향상이 안된 마음을 향상이 안된 마음이라고 안다. (선정에 의해) 잘 집중된 마음을 잘 집중된 마음이라고 알며, 집중이 안된 마음을 집중이 안된 마음이라고 안다. (선정 수행에 의해 일시적으로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解脫心]을 자유로워진 마음이라고 알며,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非解脫心]을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 여기에서 사용된 마음(citta)이란 마음 또는 의식의 순간들(moments of consciousness)을 통틀어서 일컫는 집합적인 용어(collective term)이다. 인식작용[識; vi a]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마음 또는 의식이라는 용어를 사고(思考; thought)라고 번역해서는 안된다. 사고(思考)와 생각함(thinking)은 마음의 언어적인 작용, 즉 거친 생각[尋]과 미세한 생각[伺]에 해당하며, 형성작용의 무더기인 행온(行蘊)이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마음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마음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마음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마음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4. 법에 대한 마음챙김 [法念處]
<다섯 가지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
4.1. 다섯 가지 덮개[五蓋]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다섯 가지 덮개[五蓋]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다섯 가지 덮개[五蓋]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또는 내적으로 악의(惡意, 분노)가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악의(惡意)가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악의가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악의가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악의가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악의가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악의가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또는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혼침과 졸음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혼침과 졸음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혼침과 졸음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또는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우울)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회한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들뜸과 회한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들뜸과 회한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또는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있다’라고 안다. 또는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회의적 의심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회의적 의심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회의적 의심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4.2.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가 '이것은 물질적 현상[色]이다', '이것은 물질적 현상의 발생이다', '이것은 물질적 현상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감수 작용[受]이다', '이것은 감수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감수작용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표상 작용[想]이다', '이것은 표상 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표상 작용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형성 작용[行]이다', '이것은 형성 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형성 작용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인식 작용[識]이다', '이것은 인식 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인식 작용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取蘊]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4.3. 여섯 가지 인식 기관과 인식 대상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여섯 가지 내적인 인식 기관과 외적인 인식 대상[六內外處]이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여섯 가지 내적인 인식 기관과 외적인 인식 대상이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여기에 비구가 눈[眼; 시각 기관]을 알아차리고, 색[色; 시각 대상으로서의 모양과 색깔]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結; samyojana]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귀[耳; 청각기관]를 알아차리고, 소리[聲]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코[鼻; 후각기관]를 알아차리고, 냄새[香]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혀[舌; 미각기관]를 알아차리고, 맛[味]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몸[身; 촉각 기관]을 알아차리고, 접촉[觸]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마음[意; 사고 기관]을 알아차리고, 마음의 현상[法]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내적인 인식 기관과 외적인 인식 대상[六內外處]이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4.4.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念覺支; sati-sambojjha 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 dhamma-vicaya -sambojjha 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 viriya-sambojjha 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 p ti-sambojjha 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 passaddhi- sambojjha ga]가 있을 때,‘나에게 내적으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定覺支; sam dhi-sambojjha ga]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捨覺支; upekkh - sambojjha ga]가 있을 때,‘나에게 내적으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또는 내적으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4.5.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마음챙김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네 가지 고귀한 진리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올바르게 [있는 그대로; yath bh ta ]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원인)이다'라고 올바르게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올바르게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올바르게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법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5. 네 가지 마음챙김의 이익 - 마음챙김 수행에 의한 깨달음의 보증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을 이와 같이 7년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不還]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7년은 그만 두어도 좋다 (7년은 걸리지 않아도 좋다).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을 이와 같이 6년간, ... 5년간, ... 4년간, ... 3년간, ... 2년간, ... 1년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1년은 그만 두어도 좋다.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을 이와 같이 7개월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7개월은 그만 두어도 좋다. 이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을 이와 같이 6개월간, ... 5개월간, ... 4개월간, ... 3개월간, ... 2개월간, ... 1개월간, ... 반달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반달은 그만 두어도 좋다. 이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을 이와 같이 7일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괴로움과 마음의 언짢음을 없애기 위한, 올바른 길에 이르기 위한, 열반을 깨닫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바로 그것은 네 가지의 마음챙김이다라고 앞에서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로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존은 설하셨다. (설법을 들은) 그 비구들은 만족해하며, 세존의 설법에 대해 환희에 찼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290-315
<부록 4> 마음챙김(싸띠팟타나)의 의미
(The Meaning of Satipa h na)
사야도 우 판디타 비왐사
Sayadaw U Pandit bhivamsa
정원 옮김
0. 머리말
사야도 우 판디타께서는 자주 마음챙김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는 수행 도중에 생겨나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대상들을 알아차리고 관찰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어원학적인 분석방법(etymology)을 사용한다.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싸띠팟타나'라는 용어에 대한 자세하며 그리고 실제적인 설명은 사야도의 신용이 걸려있는 설명이다. 이 설명은 수행에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공식이며 비결이다. 만일 누구라도 여기에서 제시되는 설명을 자신의 수행에 정확하게 적용시킨다면, 법(dhamma)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in no time; ak liko) 열려질 것이다.
1. 마음챙김의 일곱 가지 이익
마음챙김 수행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의 이익이 있다.
① 마음의 청정 satt na visuddhiy
② 슬픔의 극복
③ 비탄의 극복 soka-pariddav na samatikkam ya
④ 육체적인 고통의 소멸
⑤ 정신적인 고뇌의 소멸 dukkha-domanass na atthagam ya
⑥ 올바른 길[八正道]에 도달함 yassa adhigam ya
⑦ 열반의 성취 nibb nassa sacchikiriy ya
2. 싸띠팟타나의 어원 분석
팔리어의 싸띠팟타나satipa h na는 일반적으로 '마음챙김의 네 가지 기반' (Four foundations of mindfulness)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여러 단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복합어를 분석하고, 분석한 단어들의 의미를 각각 검토함과 동시에 복합어의 의미를 검토해 봄을 통해서 이 말의 전체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satipa h na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말로 구성되어있다.
sati + pa h na 또는 sati + pa + ( ) h na
싸띠 sati라는 말은 '기억하다 (samsarati)' 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어근(語根)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하지만, 마음의 기능의 하나로서의 싸띠는 '과거를 기억하는 기능'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현전(現前, presence of mind), 현재에 대한 주의 집중(attentiveness of the present), 분명한 알아차림(awareness), 충분히 깨어있음(wakefulness), 그리고 주의 깊음 (heedfulness)을 의미한다.
파타나 pa h na라는 말은 '긴밀하고(close), 확고하며(firm), 흔들리지 않는(steadfast) 확립 establishment, 적용 application, 세우는 일 setting up을 의미한다.
이 두 말을 결합해 보면, 복합어의 의미는 '관찰 대상에 대한, 긴밀하고 확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알아차림의 확립'이 된다. 이러한 종류의 알아차림을 '확고 부동하게 잘 정립된 마음챙김'(suppati hita sati; steadfast mindfulness)이라고 한다.
3. 네 가지 마음챙김
네 가지 마음챙김에는 오직 하나의 가장 중요한 본질(a single essence)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마음을 챙기고 관찰하는 것'(mindful contemplation of natural phenomena)이다. 이러한 마음을 챙긴 관찰이 네 가지 대상에 적용될 때,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된다.
(1) 육체적인 현상(k ya),
(2) 느낌 또는 감각 (vedan ),
(3) 마음의 여러 가지 상태(citta),
(4) 마음의 여러 가지 대상(dhamm ).
네 번째 마음의 여러 가지 대상(dhamm )에는, 수행의 장애인 다섯 가지 덮개[五蓋],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인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 色受想行識], 일상적인 행동영역인 여섯 감각기관[六內處; 眼耳鼻舌身意]과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대상[六外處; 色聲香味觸法],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苦集滅道]가 포함되어 있다.
4. 마음챙김 sati
'mindfulness'라는 말이 팔리어의 'sati'라는 용어에 대한 영어 번역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이 말은 불완전한 번역이다. '관찰하는 힘'(Observing power)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번역이다. 마음챙김의 특성, 기능, 나타남, 직접적인 원인 그리고 마음챙김의 특징적인 요소들과 같은 다양한 측면을 검토하면서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의 전체적인 범위를 살펴보려고 한다.
5. 마음챙김의 특성 - 들뜨지 않음
마음챙김의 특성은 흔들리지 않음, 들뜨지 않음이다. 즉, (관찰) 대상으로부터 들떠버리지 않는 것(apil pana-lakkhana)이 마음챙김의 특성이다. 주석서에서는 물 속에 던져져 있는, 마르고 속이 빈 호박을 비유로 하여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물위에 떠있는 코르크나 속이 빈 호박은 수면 위에 떠있지 바닥에 가라앉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챙김을 지니고 대상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마음(noting and observing mind)은 (호박이 물위의 떠있는 것과 같은) 피상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 마음은 관찰 대상 속으로 가라앉거나 잠겨들어야 한다. 마치 물 속에 돌을 던졌을 때, 그 돌이 바닥에 가라앉아 잠겨버리는 것과 같이.
여러분들이 마음챙김 수행의 대상으로 여러분의 복부(의 움직임)를 관찰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여러분은 아주 확고하게 마음챙김의 주요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려고 노력해서 마음이 들뜨지 않도록 해야한다. 그러면, 마음은 복부의 일어남과 사라지는 현상에 깊이 가라앉게 될 것이다. 마음이 이러한 일어남과 사라지는 현상들을 꿰뚫어 보게 될 때, 여러분은 이 현상의 진정한 본질인 긴장(tension), 압박(pressure), 움직임(movement) 등등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6. 마음챙김의 기능 - 대상을 항상 관찰하고 있는 것
마음챙김의 기능은 (알아차려야 할 대상에 대해서) 혼돈이 없는 것 또는 잊지 않고 있는 것(asammosa-rasa)이다. 이 말은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마음이 관찰 대상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빼놓지 않으며, 잊어버리지 않고, 대상이 사라지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측면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마음챙김의 기능이란, 대상을 항상 시야에 넣어 두고 관찰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풋볼 선수가 항상 공을 시야에 넣어 두고 있는 것처럼, 배드민턴 선수가 배드민턴 볼을 항상 놓치지 않고 보고 있는 것처럼, 권투선수가 상대의 움직임을 항상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수행자는 항상 마음챙김의 대상을 시야에서 놓쳐버리면 안된다.
7. 마음챙김의 나타남[顯現] - 대상과 직면하고 있음과 보호함
마음챙김이 나타나는 모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대상과 일대일로 직면하고 있는 것과 보호하는 것이다.
7.1 대상과 일대일로 직면하고 있음 Face-to-face with the object
마음챙김의 주요한 나타남은 대상과 직면하고 있는 상태이다. 즉, 마음챙김은 마음을 직접적으로 관찰대상과 일대일로 직면하게 한다(visay bhimukha-bh va- paccupa h n ).
마음챙김은 마음이 대상이나 대상영역(visaya)에 일대일로 직면하고 있는(abhimukha) 상태(bh va)로 나타난다.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성격의 거울(index of character)이라고 한다. 따라서, 만일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파악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그 사람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판단은 올바를 것이다. 만일 한 쪽 측면이나 뒤에 또는 멀리 떨어져서 서 있으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얼굴의 두드러진 특징을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숨을 들여 마실 때) 복부의 일어나는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을 때, 마음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에 일대일로 직면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복부의 일어나는 현상에서 긴장, 압박, 열, 차가움, 또는 움직임과 같은 여러 가지 감각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7.2 보호함 - Protection
만일,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마음이 상당한 기간에 관찰 대상에 일대일로 직면하고 있다면, 수행자는 (이렇게 관찰하고 있는 동안에는 마음에서) 번뇌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상당히 깨끗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마음의 청정함은 마음챙김의 두 번째의 나타남 즉, 번뇌의 공격으로부터의 막아주거나 보호하는 것( rakkha-paccupa h n )에 기인한 것이다.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을 때, 정신적인 때(번뇌)는 의식의 흐름 속으로 들어올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문지기에 비유된다. 성을 지키는 문지기는 악한 사람과 해를 끼치는 사람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며, 오직 착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만을 통과시킨다. 마음챙김은 온전하지 못한[不善; akusala] 생각들을 막아내고, 온전한[善; kusala] 생각들만을 받아들인다. 온전하지 못한 생각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보호되는 것이다.
8. 마음챙김의 직접적인 원인
- The proximate causes of mindfulness
마음챙김을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은 견고한 생각(thirasa - pada h n )과 몸 등[身受心法]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고하게 하는 것(k y disatipa h na-pada h n )이다.
8.1 견고한 생각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챙기기 위해서는 강하고 견고한(thira) 생각이 필요하다. 생각이 확고하고, 강하고, 흔들림이 없으면 없는 만큼, 마음챙김도 견고하고, 강하고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생각의 두 가지 기능은 형성작용들[行; sankhar ]을, 그것들이 온전하고 온전하지 않은 본성에 관계없이, 기록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생각[想, 表象作用; sa ]은 녹음기나 비디오 카메라의 도움으로 말하는 것을 녹음하는 것에 비유된다. 녹음은 녹음되는 말의 내용이나 특성에 관계없이 진행된다. 고전음악의 연주나 오페라를 CD에 녹음하는 고도의 디지털 방식의 녹음 기술 덕분에, 녹음된 음악을 재생할 때, 분명하고, 강하며, 인상에 남는 듣는 경험(마음챙김)이 가능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챙김 수행에서, 일어나고 있는 관찰대상에 대한 강하고 분명한 생각(알아차림 또는 명칭 붙이기)은 강하고, 분명하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챙김을 지니는 아주 강한 지원자가 된다.
8.2 네 가지 마음챙김
마음챙김을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또 다른 원인의 하나는, 네 가지 마음챙김(k y di-satipa h na-pada h n )이다. 즉, 마음챙김 그 자체가 마음챙김의 원인이라는 말이다. 사실, 마음챙김이 향상되는 것은 끊어짐이 없는 마음챙김의 지속에 의해서이다. 한 순간의 마음챙김이 다음 순간의 마음챙김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교육을 받는 과정에 비유될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하고 숙제도 제대로 해 가는 학생을 가정해보자. 저학년에서 받은 교육은 고학년에서 받는 교육을 위한 바탕이 된다. 초등학교의 교육은 중등학교의 교육의 바탕과 원인이 되며, 중등학교의 교육은 3 단계 교육과정인 대학과정의 교육의 바탕과 원인이 된다.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하면, 마음챙김에 의해서 더욱 크고 더욱 강한 마음챙김이 생겨하는 것이다.
9. 마음챙김은 지금 이곳에서(卽時性) - immediacy
관찰 대상을 알아차릴 때, 즉시성은 아주 중요하다.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대상과 알아차림 그리고 관찰 사이에 그 어느 것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일어나고 있는 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은 시간적으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대상에 대한 관찰은 바로 대상이 일어나는 그 순간, 지체하지 말로 생겨야 한다. 관찰은 대상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적이어야 한다. 관찰 대상이 생겨나는 바로 그 순간, 그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고, 관찰해야 한다.
만일, 알아차림과 관찰이 지체되면, 알아차리려는 마음이 대상으로 향했을 때에는 이미 대상은 지나가 버렸을 것이다.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의 대상이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의 대상은 올바르게 알 수 없다. 주의 집중이 대상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더 이상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더 이상 실재하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10. 동시발생 - concurrence
두 가지 이상의 현상들이 동시에 생겨나는 것을 동시발생 현상이라고 한다. 알아차림과 관찰하는 마음과 관찰하는 대상의 동시발생은 마음챙김의 중요한 측면이다. 예컨대, 하나의 대상이 생겨날 때, 마음은 그 대상의 발생과 동시에 그 대상에 가 있어야 하며, 그 대상과 동시적으로 함께 있어야한다.
11. 비상한 마음챙김 - extraordinary mindfulness
'sati-pa-( ) h na'의 접두사 'pa'라는 말에는, 마음챙김은 비상하거나 두드러진 본질 - 대단한, 강력한, 드리고 지속적인(bhusattha) 본질을 지닌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일반적인 마음챙김은 집중적인 마음챙김 수행에서는 있을 자리가 없다. 이것이 접두사 pa가 지니는 의미의 본질이다. 이 말의 실제적인 측면에 대해서 검토해본다.
11.1 돌진함 - rushing (돌진하면서 작용한다; pakkhanditva pavattati)
'sati-pa-( ) h na'의 접두사 'pa'는 pa-(k)khandana : 돌진함, 뛰어듦, 돌입함으로 해석될 수 있다. 관찰 대상이 생겨나는 순간, 마음은 관찰 대상을 향해서 큰 힘과 용기를 지니고 돌진해야 한다. 주저함, 생각함, 반성함, 분석함, 상상함, 질문함, 숙고함, 의심함 또는 환상함이 없이, 마음은 대상을 공격해야한다. 따라서, '돌진함'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측면이 내포되어 있다.
격렬하고 빠르게 또는 강한 힘과 세력과 활력을 지니고, 갑작스럽고 맹렬하며 빠르고 신속한 움직임.
예) 어떤 사람이 병원으로 달려들어가는 것과 같이.
갑작스런 공격으로 붙잡고, 잡아내고, 체포하는 것. 신속한 공격이나 급습. 돌격하는 것.
예) 갑작스럽게 강한 공격을 가함으로써, 상대방인 적군을 잡아 승리하는 것.
특정한 장소에 가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왕성하게 움직이는 것.
예) 축구 시합이 시작하기 직전에 군중들이 경기장에 몰려가는 것.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서둘러서 긴급하게 움직이는 것.
예)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이 "나는 죽을힘을 다해 매진하고 있다"라고 말할 때. 또는 '쇠가 달구어졌을 때 쳐라'라는 속담처럼, 수행자는 대상이 신선하고 뜨거울 때 알아차려야 한다.
수행자는 가다가 멈추는 방식(stop-and-go manner)으로 대상을 알아차리고 관찰해서는 안된다.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마음은 느슨해지거나, 나태해지거나, 우발적이어서는 안된다. 즉, 꾸물거리거나, 뒤에 처지거나, (알아차리는데) 늦어버리거나, 유심히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알아차리는 마음에는 헤메이는 마음(wandering mind)이 없어야 하고,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올 틈을 제공해서는 안된다. 알아차리는 마음과 관찰하는 마음은 식어버리거나 꾸물거려서는 안된다. 반면에, 체계적이며, 규칙적인 방식으로 대상에 돌진해야 한다.
11.2. 대상을 확고하게 쥐거나 붙잡는 것 (upagganhitva pavattati)
농부가 추수를 하고 있을 때, 베려고 하는 한 다발의 벼를 한 손으로 확고하게 쥐거나 붙잡을 필요가 있다. 오직 이렇게 할 때에만, 낫으로 그 벼 다발을 자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관찰 대상을 확고하게 붙잡아야만 한다. 그러면, 마음은 관찰하는 동안에 대상을 살짝 놓쳐버리거나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마음챙김이 확고부동하게 될 때, 수행자는 거친 대상을 확고하게 붙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보다 더 수행을 하게되면, 주의력은 예민해져서 세세한 대상을 붙잡을 수 있게되고, 때로는 아주 미세한 대상들도 마음으로 확고하게 붙잡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의도나 생각 등과 같은 보다 미세한 형태의 정신적인 대상들을 붙잡으려고 하기 이전에, 우선 (정신적인 대상보다도 거칠고 파악하기 쉬운) 육체적인 대상들을 붙잡으려고 해야 한다.
11.3. 대상을 완전하게 덮어버림 (pattharitva pavattati)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마음은 관찰 대상을 완전하게 덮어버려야 하고, 전체 대상으로 확산되어, 그 대상전체를 덮어 싸야 하며, 대상을 전체적으로 붙잡아야 한다. 대상의 일부만을 관찰해서는 안되며, 대상이 생겨나는 처음 상태에서부터 지속되는 중간 상태를 거쳐, 사라지는 마지막 상태에 이르기까지 대상을 알아차리고 관찰해야만 한다.
11.4 끊어짐이 없는 이어짐 (pavattati)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 측면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지금 생겨나고 있는 관찰대상에 대한 알아차림과 관찰은 연속적이어야 한다. 즉, 한 순간의 마음챙김은 다음 순간의 마음챙김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이렇게 순간 순간 마음챙김은 이어져야 한다. 직전의 마음챙김의 순간은 다음 순간의 마음챙김의 순간으로 이어져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마음챙김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1) 마루 바닥의 수 널빤지 사이에 틈이 있다면, 먼지나 모래가 그 사이로 들어갈 것이다. 만일 마음챙김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마음에는 틈이 생겨서 번뇌가 스며들어 올 것이다.
예2) 옛날에는, 불을 피우기 위해서 두 나뭇조각을 마찰해야만 했다. 만일 끊임없이 나뭇조각을 마찰하지 않고, 도중에 쉬엄쉬엄 나뭇조각을 마찰한다면, 불을 피우지는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챙김이 지속적이지 못하면, 지혜의 불은 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부정적인 방법으로 이 측면을 다시 확인해 본다.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과 관찰함 또는 마음챙김에는 틈이 있어서는 안되고,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즉, 가다가 멈추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된다. 어느 정도 적당히 수행을 하고는 때때로 쉬다가 다시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가 있다. 이들은 어느 정도 마음챙김을 지니고 수행을 하다가는 공상에 잠기어 수행을 멈추어 버린다. 이런 수행자들을 '카멜레온 요기'라고 한다.
11.5 대상을 조작하지 않음 - Non-manipulating
무아(無我)라고 하는 보편적인 특성은 지금 생겨나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인 대상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과정에도 적용될 수 있다.
나타나는 대상을 조작하거나, 컨트롤하거나, 조절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관찰 대상을 바라보려고, 수행자는 아주 조심을 해야 한다. 수행자는 다만 그곳에 지금 있는 대상만을 관찰해야하지, 무엇을 기대하거나, 그곳에 무엇이 있기를 바래서는 안된다.
12. 결론
이제 싸띠팟타나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싸띠팟타나는 관찰된 대상에 대한 마음챙김이며, 대상에 돌진하고 속으로 파고 들어가며, 대상 전체를 덮어버리는 마음챙김이다. 그래서 마음은 대상과 함께 딱 맞붙어서, 확고하게 머문다.
'일어남'하고 알아차릴 때, 마음은 그 알아차려진 대상 즉, 복부의 일어나는 움직임 속으로 들어간다. 마음챙김은 그 대상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며, 그 대상을 덮어버린다. 그래서, 마음은 이 대상 또는 현상에 딱 맞붙어서 확고하게 머물고 있다. '사라짐' 하고 알아차릴 때에도 이 과정은 반복된다. 그리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다른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싸띠 또는 마음챙김은 활발해야 하며, 대상에 직면하고 있어야 한다. 마음챙김은 대상으로 뛰어들어 가야하며, 완전하게 대상을 뒤덮어야 하고, 대상으로 파고들어 가서 그 대상의 (생겨남과 지속함과 소멸하는 과정의) 모든 부분을 한 순간도 놓쳐서는 안된다.
만일 여러분의 마음챙김이 이러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면, 수행에 빠른 진전이 보장될 것이며, 수행의 완성과 더불어 열반을 보게 되는 것이 확실하게 보장될 것이다.
한 눈에 보는 마음챙김(싸띠팟타나)
밀접하고 확고한 확립
들뜨지 않음
항상 대상을 시야에 두고 있음
대상과의 일대일의 대면
번뇌의 공격으로부터 마음을 보호함
강한 생각에 의해 마음챙김이 생겨남
마음챙김이 마음챙김의 원인
돌진함과 파고 들어감
대상을 확고하게 붙잡음
대상을 완전하게 덮어씌움
즉시성
지속성
동시에 일어남
조절하지 않음
<참고 문헌>
1. Buddhaghosa, Acariya.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amoli(tr.), B.P.S., Chapter XIV, pg.141.
2. Sayadaw U Pandita Bhivamsa, Ven. In this very life, Wisdom, 1992.
3. Sayadaw U Pandita Bhivamsa, Ven. Raindrops in hot summer. M.B .C., 1994.
4. Bodhi, Bhikkhu, et. al. Comprehensive manual of abhidhamma. B.P.S.
5. Mahasi Sayadaw, Ven. Vipassana shu nyi gyan. (Burmese)
6. Mahagandayon Sayadaw U Janaka Bhivamsa, Ven.
Sangabhasa-tika. (Burmese). 1990.
7. Sayadaw U Pandita Bhivamsa, Ven. Various dhamma talks.
<양곤, 판디타라마, 1997>
'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기 인도불교에서의 제법무아와 열반 (0) | 2021.08.15 |
---|---|
초기불교에 있어 mettā(慈) 수행의 위치 - 김재성 (0) | 2021.08.01 |
초기불교시대 재가자 신행은 어떠했나 / 조준호 (0) | 2021.07.04 |
번뇌는 끊는 것이 아니라 끊어지는 것, 이유미교수의 중도세미나를 듣고 (0) | 2021.06.20 |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속박된 윤회의 감옥 (0) | 2021.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