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식 - 말나식(末那識, 산스크리트어 manas-vijnana)이란
인간의 육신은 수만 년을 거쳐 진화해왔다. 마찬가지로 인간의식도 육신의 진화에 따라 진화해왔다. 그리하여 초기불교에서는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던 것이 유식학(唯識學)의 발전에 따라 ‘식(識)’이라는 인간의 마음은 여덟 가지(8識)로 구성돼 있다고 보게 됐다.
8식(識) 중에서 제일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다섯 개의 감각기관(五根)과 연결된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인데, 이것이 가장 바깥에 나타난 거친 식이며, 맨 앞에 나와 있다고 해서 전5식(前五識)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식(識)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즉,
제1식은 눈으로 봐서 생기는 식이라 해 안식(眼識)이라 하고,
제2식은 귀로 들어 생기는 식이라 해 이식(耳識)이라 하고,
제3식은 코로 맡아 생기는 식이라 해 비식(鼻識)이라 하고,
제4식은 혀로 맛봐 생기는 식이라 해 설식(舌識)이라 하고,
제5식은 몸으로 느껴 생기는 식이라 해 신식(身識)이라 한다.
이 5근(오관/五官)에 의지해서 생기는 식을 전5식(前五識)이라 부르는데, 이 전5식은 매우 현재적이어서 당장 느끼는 대로 생겨나는 식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의식(意識)이다. 이 제6식인 의식이 전5식을 총괄한다. 이와 같이 눈, 귀, 코, 혀, 몸, 마음(意)의 여섯 기관이 외부세계와 직접접촉하면서 일어나는 인식이 6식인데, 그 중 제6식인 의식(意識)은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의 전5식(前五識)과는 좀 다른 높은 차원의 식이어서 우리 대뇌의 언어활동은 대체로 제6식인 의식(mano-vijnana)에 속하며, 이 제6식까지를 보통 표층의식이라 한다.
그러데 유식학에서는 제6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자아의식(自我意識)에 해당하는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manas-vijnana)이며,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라고 해서 제7식부터는 심층의식이라 한다.
그리고 제1식부터 제6식까지의 표면의식(표층심리)은 인간의 본심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표층심리를 벗어나 심층의식으로 들어가는 제7 말나식이 나의 실체인 영혼을 일컫는다.
제7식 말나식을 마나스식(Manas識)이라 음역하기도 하고, 칠감(七感), 전식(轉識), 사량식(思量識)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숨어있는 잠재의식이 제8식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이다. 이 제1식부터 제8식까지를 통틀어 생각 혹은 마음이라 한다.
인도에서 무착(無着)과 세친(世親) 두 형제에 의해 유식학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이 대략 AD 300~400년경인데, 인도에서 유식학도들이 인간심리를 관찰해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세운 것이 바로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발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말나식은 삼식(三識)의 하나로서 모든 감각이나 의식을 통괄해 ‘자기’라는 의식을 낳게 하는 마음작용으로서 ‘내가 있다’, ‘이것이 나다’라는 아상(我相)을 가진, 이기심(egoism)이 있는 아주 깊은 무명(無明)의 뿌리이다. 이 말나식(末那識)은 6식을 통해 들어오는 것들을 자기 것으로 집착하는 이기적인 자기중심의 의식으로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 삼식(三識)---유식(唯識)이란 ‘마음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하신 부처님 사상을 토대로 마음과 마음을 설명하고, 정신과 물질의 불가분의 관계를 규명해낸 학설이다. 그리하여 마음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심(心) ? 의(意) ? 식(識)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 셋을 3식이라 한다. 심(心)은 아뢰야식을 말하고, 의(意)는 말나식을 말하며, 식(識)은 의식 또는 육식을 일컫는다.
1) 제7식은 제6식보다 심층심리이다.
말나식은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서 설명하고 있는 6식(六識)사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체(體)이다. 다시 말하면 6식 가운데 의식(意識)이 광범위한 활동을 하므로 평상시의 의식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나 상식을 초월한 정신계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만약 사고로 인해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거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말미암아 정신작용이 일시 정지하거나 정신착란이 일어난다면 그 때 제6식의 뿌리인 의근을 어디에서 구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대승 유식학(唯識學)에서 제6식의 뿌리로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manas-vijnana)을 상정함으로써 해결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각도에서 이런 경우도 있다. 즉, 평상시의 의식에 나타나는 선(善)의 생각과 악(惡)의 생각 그리고 선의 행동과 악의 행동 가운데 특히 선의 행동만을 지속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과 또 종교에 귀의해 누구보다도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맹세하고 사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선행을 낙으로 알고 생활한다고 볼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존경 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뜻밖에 나쁜 행동을 해서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와 같이 평소의 의식생활에 나타나지 않던 나쁜 마음이 어느 곳에 숨어 있다가 다시 의식을 통해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마음을 관찰 탐구하는 유식학도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식학도들은 선정을 닦거나 기타 여러 수행을 통해 마음이 정화해 갈 때, 일부 번뇌는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됐다. 다시 말하면 그 정도면 마음이 완전히 정화돼 견성(見性)과 오도(悟道)의 경지에 충분히 도달했다고 할 만큼 수행의 위치에 올랐는데도 심층심리에서 미량의 번뇌가 아직도 남아있어서 지혜의 활동에 방해를 부리고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AD 4~5세기 인도유식학파 사람들은 내심(內心)을 관찰하는 내관(內觀)을 많이 하면서 부사의(不思義)한 정신계를 깊숙이 관찰하며 선정을 닦았다. 그런데 그들이 그 선정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는 이미 정화됐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수행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더욱 깊이 있는 심체에서 근원적인 번뇌가 있어서 그 경지를 해탈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시 말하면 제6의식이 평소의 의식생활을 이끌고 있는데, 이러한 평상시의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心體)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심체에서 나타나는 번뇌까지도 정화해야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제6식인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를 제7 말나식과 제8 아뢰야식이라고 명명했다. 이와 같은 말나식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심의식(心意識) 사상을 대승적으로 해석했다. 즉,
심(心)을 아뢰야식으로 해석하고,
의(意)를 말나식으로 해석했으며,
식(識)을 안. 이. 비. 설. 신. 의 등 6식(六識)으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범어 말나(manas)에 해당하는 의(意)를 육식 이외의 심체로 간주하고 아뢰야식과 더불어 별체로 선포했으며, 범부들의 심체는 8식(八識)으로 분류돼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은 종래의 의식과는 또 다른 심체로서 특히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고 있는 심식(心識)으로 단정했다. 그리고 제6식이 바로 이 제7식인 의(意)를 소의(所依)로 하고 있는 식이므로 그 이름을 의식(意識)이라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6식 외에 전5식조차도 오염시키는 게 제7 말나식이다. 결국 제7 말나식은 6식 모두를 오염시키므로 6식에 대한 염오의(染汚依)가 되는 셈이다.
2) 제7식은 자아의식(自我意識)이다.
그리고 유식학의 입장에서 보면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일수록 제7식의 작용이 활발하다고 했다. 인간의 자기존재성을 자아(自我)라 하며, 자아를 인식하는 정신작용이 자아의식(自我意識)이고, 이 자아의식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제7식인 말나식이다. ‘나’라고 하는 강력한 아집(我執)의 본원인 것이다. 그래서 제7식 말나식을 자아의식이라 한다.
제6식이 분별한 좋다거나 싫다거나, 아니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는 것에 대해 제7식이 받아들이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고 무관심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그러한 심리작용은 자기 자신의 자의식에 집착해서 생기는 것이기에 아집(我執)이라 한다.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은 바로 이 제7식의 자의식으로 인한 것이다. ‘내가 있다’, ‘이것이 나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깊은 무명(無明)의 뿌리이다. 자기의 존재에 집착하는 인간은 ‘나’라는 사람, 내가 여기 있다, 나는 고귀한 존재로서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잘 났다고 생각하는 등 자기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 제7식 말나식은 미세한 생각, 비언어적 생각을 할 수 있는 의식이며, 모든 집착과 어리석음은 바로 이 제7식의 ‘나’라고 하는 자아집착의식(自我執着意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말나식은 집착으로 오염된 자아의식이다. 따라서 중생의 온갖 못된 생각은 모두 말나식이다.
그리고 자기의 존재에 집착하는 인간은 자기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고정적이고 실재적인 자아의 존재를 부정한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이러한 이기적 사고를 최소화하며, 궁극적으로 멸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고, 이를 최고의 수행 목표로 한다.
3) 제7식은 이기심이 있는 의식이다. 즉 말나식은 곧 자기애식이다.
인간은 자아의식 때문에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험적 정보에 의존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이 전부인양 판단한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를 이기심(利己心)이라고 한다. 그래서 유식학에서는 제7 말나식에 항상 상응해서 더럽고 끈질긴 4가지 버릇인 아치, 아견, 아만, 아애의 4번뇌(煩惱)가 일어난다고 본다.
아치(我癡)---아치란 자아에 대한 무지를 말하며, 무명(無明)이라고도 한다. 오온가합(五蘊假合)의 자기라는 것, 그러한 자기의 진상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즉 진정한 자기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견(我見)---아집(我執)이라고도 하는데, 자기의 견식(見識)을 고집하는 일이다.
아만(我慢)---아견에 의해 설정된 자아가 존재한다고 거만하게 우쭐하는 것이다.
아애(我愛)---아탐(我貪)이라고도 하며, 설정되어진 허상의 자아상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또한 생사윤회의 고(苦)에 빠져 있다.
이와 같은 4번뇌(4혹/四惑)와 함께 하므로 말나식을 망식(妄識)이라고도 한다. 즉 말나식은 인간 의식의 뿌리가 돼서 그때그때 나쁜 생각, 좋은 생각, 모든 허튼 생각을 계속하는 것이다. 중생의 제7식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온갖 번뇌를 만들어낸다.
<화엄경> 사구게에 “심여공화사 능화제세간 오온샐종생 무법이부조(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實從生 無法而不造)”란 말이 있다. 풀이하면,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능히 모든 세상일을 다 그려내고, 오온도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무엇도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제7 말나식이란 마음은 온갖 망상을 만들어내므로 수행이란 결국 말나식을 정화하는 것이다.
4) 제7식은 사량(思量)하는 작용을 한다.
식(識)이라는 말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이라는 뜻이 이외에 사량이라는 뜻도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8식에는 모두 사량의 뜻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유독 말나식에만 사량의 뜻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말나식이 여타의 식보다 지속적으로 사량작용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말나(manas)라는 말은 곧 의(意)라는 뜻으로서 이를 의역하면 사량이다. 그래서 말나식은 사량, 즉 헤아려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예컨대 누가 나를 때렸을 때 제5식인 신식(身識)이 촉감의 정보를 제6식으로 전달하면 제6식은 ‘아프다, 기분 나쁘다’라는 분별을 한다. 그러면 바로 제7식이 헤아려 활동을 한다. 누가 내 뒤통수를 갈겼다고 하자, 누가 나를 때렸지? 아니 저 자식이! 좋아 한판 붙어주지. 그리고는 코피가 터져라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을 하게 된다. 아니면 ‘아이고, 센 놈이구나, 도망가자.’ 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이런 결정을 제7식이 사량하는데, 제6식과 제7식의 활동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헌데 6식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가치중립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7식인 말나식이다. 이 식은 사량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6식이 분별해 놓은 정보를 사량하고 판단해 구체적인 행위를 결정한다. 즉 제6식이 분별한 좋다거나 싫다거나, 아니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는 것에 대해 이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 아니면 무관심을 나타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제7식 말나식이다.
5) 말나식은 그릇되게 인식, 사량하는 경우가 있다.
제7식 말나식부터의 인간심리 관찰이 불교에서 ‘마음’이란 단어의 분석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보여준다. 우리가 잠을 자며 꿈을 꿀 때의 마음, 대상이 없는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깊이 사유하는 마음, 정신착란이 일어나 제 정신이 아닐 때의 마음 등은 어느 깊이의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
서양의 심리학 개념으로는 무의식, 잠재의식 정도인데, 그것은 표현이 좀 모호하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어느 깊이까지 ‘침투’해 들어갈까? 대개의 경우 바로 이 제7식까지이다. 제7식을 ‘생각하고 헤아려 인식한다’는 사량식(思量識)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모든 판단과 행동은 바로 이 식을 통해 나오고 그 결과가 업이 돼 저장된다. 즉 인간의 거의 모든 판단근거로 삼는 최종적 마음이 제7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대통령이 주요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것도 제7식이고,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 국회에서 입법을 하는 것, 검사가 기소를 하고 판사가 선고를 하는 것, 대기업 CEO가 기업경경을 하는 것, 그리고 작게는 가정주부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고르고 살 것을 결정하는 것 등을 비롯해 사회나 가정의 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판단이나 결정이 대부분 이 제7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요한 제7식이 항상 옳은 결정만 내리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사량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각한다는 뜻이지만 그릇되게 인식하는 것도 포함돼 있다. 즉 어떤 진리를 인식할 때 더러 그릇되게 인식하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국가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판단착오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물론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옳다’, ‘그르다’라는 마음 자체를 일으키는 것을 아주 위험스럽게 여긴다. 어떤 경로나 어떤 이유로든 작위적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확신’하는 것을 번뇌의 주범으로 본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쟌발쟌(Jean Valjean)을 두고 보자, 그가 나쁜 사람인가, 선량한 사람인가, 함부로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또 하나의 예, 가령 집에 도둑이 들어서 물건을 도둑맞았다고 하자. 물건을 훔쳐간 도둑은 내겐 분명 도둑놈이고 나쁜 놈이다. 그런데 그 도둑에게 되레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내게서 훔친 것을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을 해서 그 기증받은 사람에게는 은인이 됐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이 도둑이라는 나의 ‘확신’은 주관적 사건의 결과로 인식된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인식되는 사항은 아니란 말이 된다.
이와 같이 얼핏 보면, 당연하다고 여겨지거나 꽤 수준이 높아 보이는 것 같은 우리의 ‘의식’이 사실은 착오와 번뇌의 주범이라는 것이 유식학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상에서 보듯이 제7식 말나식은 대상을 그릇되게 인식함으로써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는 번뇌식(煩惱識)의 인상을 갖게 하는 부분이 있는 심식(心識)이기도 하다.
이래서 유식학에서는 제7식의 시비분별작용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현상과 때론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조차도 실은 제7식의 분별상(分別相)이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의 수행이란 곧 이 제7식을 제어하려는 데에 그 시작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에고'에 집착하는 인간이 어찌 귀한 '에고'를 죽이고 뿌리 뽑겠는가 하는 것이다. 참으로 간절하고 간절해 스스로를 길바닥의 먼지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정도의 수행이 돼야 미련 없이 제7식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수행을 열심히 해서 제7식이 정화돼 가면 너와 나라는 분별심이 없어지면서 너와 내,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는 것이 삼매 혹은 오매일여(寤寐一如)이고, 제8식 아뢰야식까지 완전히 정화가 되는 것이 곧 해탈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예화 한 토막-------
한 재미교포 집의 두 자매 이야기이다.
여동생이 미국에 온지 2년 정도 됐을 때이다. 미국회사에 일을 하고 밤에 차를 몰고 집으로 오는데 미국청년이 차를 몰고 따라왔다. 정지신호등에서 차를 세우니 그 청년이 옆에 와서 병행으로 정지하고 몸을 번쩍 드는데 보니까 홀딱 벗은 모습이었다. 겁이 난 여동생은 매우 빠른 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다음 신호등에서는 다시 차를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 청년은 옆에 와서 소리를 질렀다. 그런 수모를 당하고 겨우 집에 와서 보니 그 놈은 없어졌다.
놀란 가슴을 달래며 집에 와서 언니에게 겪은 이야기를 했다. 화가 난 언니는 소리를 지르며 그럴 때는 신호등이고 뭐고 막 달려야지 신호등에서 서면 어떻게 하느냐고 화를 냈다. 여동생이 대답하기를 언니는 신호등에서 빨간불에는 반드시 서야한다고 했잖아 라고 했다. 속이 터진 언니는 소리를 질렀다. 야 ~ ~ 멍충아! 목숨이 중하니, 법이 중하니!
교통법규를 어기고 달리다보면 경찰이 보고 따라올 것이고, 경찰이 와야 네가 살 수 있다고 열을 올렸다. 동생은 그제야 위험할 때는 법을 어기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언니 말이 옳은가 틀린 것인가. 반대로 동생의 행동은 어리석었는가, 옳았는가.
동생이 자기 방식대로 하다가 겁탈을 당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언니 말 대로 하다가 교통사고가 났다면 그래서 사람을 다치게 했다면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가.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이 제7식 말나식이다. 여러분의 말나식은 어떻게 작용할까요? 이 판단의 근저엔 제8식 아뢰야식이 작용한다.
성불하십시요 작성자 이 덕호(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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