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1. 유부의 극미실재론
1) 극미실재론의 논리적 불가능성
2) 극미실재론의 인식론적 불가능성
1. 유부의 명구문신실재론
2. 명구문신실유성에 대한 유식의 비판
3. 제6 의식의 소연경으로서의 관념
1) 사유 대상으로서의 법경
2) 개념적 허망분별
3) 비유적 언어관
1. 식전변의 사분설
1) 능연과 소연의 견분과 상분
2) 능변의 자증분과 증자증분
1) 분별 주체로서의 의식
2) 욕망 주체로서의 말나식
3) 초월 주체로서의 아뢰야식
3. 식전변의 두 차원
1. 연기적 관계
2. 식과 경의 순환성
1) 종자생현행과 현행훈종자의 순환
2) 변현(인연법)과 분별(분별변)의 순환
3. 식의 실성
1) 식의 삼성과 전의
2) 순환 속의 해탈의 길
3) 진여와 일진법계
존재와 인식, 있는 것과 아는 것, 그 각각은 무엇을 의미하고 그 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물음은 무척이나 오래도록 나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있는 것은 나의 신체를 포함한 물리적 세계를 의심하고 아는 것은 인생과 우주 전반에 관해 사유하는 정신 활동을 의미하므로, 아는 것보다 있는 것을 일차적으로 보면 실재론 또는 유물론이 되고, 있는 것보다 아는 것을 일차적으로 보면 관념론 또는 유심론이 될 것이다.
나는 관념론자이다. 나는 현미경으로 세계를 관찰하기보다는 눈을 감고서 사색에 잠기기를 더 좋아한다. 나는 왜 관념론자일까? 있는 것에 의해 아는 것이 완전 규정될 때의 수동적 삶이 서럽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사랑이 인간 존재를 변모시키듯이 정신이 세상을 변모시키는 그런 마술과도 같은 정신력을 기대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계를 자아 아래, 자연을 정신 아래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일까?
있는 것과 아는 것, 세계와 나,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그런‘하나’에의 예감이 나를 관념론자가 되게 하였다. 인식과 존재, 정신과 물질, 나와 네가 대립되고 분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것, 영혼의 깊이와 세계의 깊이에서 우리 모두는 뗄 수 없는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것, 그 예감이 나를 관념론자가 되게 한 것이다.
유식 불교가 내세우는“오로지 식만 있고 경은 없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은 결코 세계 존재를 부정하는 명제가 아니다. 아는 것과 있는 것, 식과 경을 완전히 분리된 둘로 간주하는 이원론, 정신과 무관한 물질 세계 자체를 주장하는 유물론을 비판할 뿐이다. 유식무경이 의미하는 바 식을 벗어난 경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식과 경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자아와 세계, 주관과 객관은 의식 표층의 분별일 뿐 그 심층에서는 일체가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깨달음이 자리잡고 있다.
불교가 그 근원적 하나를 ‘일심一心’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감격은 잊을 수가 없다. 신神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에너지나 기氣도 아니고, 바로 마음, 한 마음이라니! 그것은 곧 정신과 물질, 자아와 세계의 하나됨을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자각하고 깨달아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때문에 나는 불교를 좋아한다. 특히 자신 안에서 그 일심의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심층으로 분석해 들어가는 유식 불교의 진지함을 좋아한다.
그래서 불교를, 그 중에서도 특히 유식을 공부하게 되었으며, 유식에서는 주로‘유식무경’의 구호 아래 식과 경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공부하였다. 이 책은 그 공부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본래는 몇 년간 대구에서 서울로 통학하면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수학한 후 박사학위논문으로 씌어진 것을 단행본의 형태로 손질한 것이다.
대장경 안에 담긴 진리의 바다에 비하면 작은 모래 하나와도 같고, 그나마도 책상머리에 앉아 문자적 알음알이만 추구했을 뿐 참선의 실천수행은 결했기에 여러모로 부족한 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단계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이 과정을 거쳐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다짐의 표현이다.
비록 부끄럽고 보잘것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입었다. 불교 공부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 학위논문이 완성되기까지 힘이 되어 주었던 사람들, 단행본 출간을 맡아 준 사람들, 그리고 이 책을 손에 들고 읽어 볼 사람들, 인연으로 맺어진 이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00년 12월 대구에서
한자경 씀
일반적으로 말해 식識이란 일체의 주관적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식이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또는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상관없이 일체의 심리 현상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경境이란 그와 같은 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의 객관적 존재를 의미한다. 감각에 대한‘감각 대상’,사유에 대한‘사유 대상’,욕망에 대한‘욕망 대상’등 일체의 대상이 모두 경으로 칭해질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주관적인 심리 상태가 발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객관 대상이 일단 그자체로 존재하고, 그것이 부수적으로 우리 마음을 자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은 그 자체로 실재하고, 식은 그 경을 반영하면서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이차적현상이라고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실재한다고 생각된 경도 어디까지나 식안에 드러나는 경이 아닌가? 식을 떠난 경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식의 존재가 일차적이고 경은 오히려 식을 통해 드러나는 이차적 산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놓고 보면 식과 경의 문제는, 인식되는 객관 세계를 독립적 실체로 상정해 놓고 인식 주관의 심리적 발생 과정만을 설명하는‘인식적’또는‘심리적’차원의 논의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문제는 식과 경, 곧 우리의 마음과 그 마음이 인식하는 대상 세계 중 과연 어느 것이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유식唯識의 입장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즉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식일 뿐이고, 식을 떠난 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유식에 있어서의 식과 경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며 또 그들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 유식의 대표적 이론서인『성유식론成唯識論』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갈 것이다.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식과 경에 관한 논의의 배경 및 그 윤곽을 대략적으로 그려 보기로 한다.
유식은 인도에서 전개ㆍ완성된 대승 불교 중의 하나인데, 인도에서 유식이 전개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석가 멸도滅度후 약 100년이 지나자 그 동안의 시대 및 사회ㆍ정치ㆍ경제적 상황의 변동에 따라 경經의 해석이나 율律의 수용에 있어 의견 차이가 발생하였으며, 그로 인해 불교 교단은 보수적 상좌부와 급진적 대중부로 근본 분열을 겪게 되었다. 이후 거듭되는 분열을 거치면서 교단에는 약 20개의 부파가 형성되는데, 각 부파에서는 석가의 기본 가르침인 법法(dharma)에 대한(abhi)논論을 전개하여 나름대로 경經ㆍ율律ㆍ논論 삼장三藏을 갖춘 교학을 전개하였다. 교단의 근본 분열 이전 시기를 원시 근본 불교 시기라 하고 분열 이후 각 부파마다 나름의 교학을 전개해 나간 시기를 부파 불교 시기라고 하는데, 부파 불교는 그 이후의 대승에 의해 평가절하적 의미에서 소승이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대승 불교는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그 동안 각 부파가 지나치게 복잡한 이론 체계와 출세간적 수양론 아래 오직 출가자 개인의 깨달음만을 강조함으로써 일반 대중과 재가 신자들의 구원을 소홀히 한 데 대한 반성과 비판 의식에서 출발한 사상 운동이다. 소수의 사람이 아닌 대중 전체를 반야에 실어 나를 수 있는 큰 수레라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칭하였으니, 이타利他와 자비慈悲를 통해‘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불교의 근본 정신을 되살리려 한 것이다. 그러한 대승 사상은 곧 불설佛說로 졍전화되었는데, 처음 등장한 대승 경전은 당시 가장 세력있던 부파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법실체론法實體論을 비판하면서 일체 존재의 공성空性을 강조한 반야계 경전이다. 그 안에 담겨진 사상이 곧 공종空宗으로 불리는 중관中觀 사상이며, 대표적 논사는 『중론中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등을 지은 용수龍樹(Nagarjuna,150~250)이다. 그 다음 등장한 대승 경전은 유식계 경전인데, 유식은 중관의 공 사상을 계승하여 아공我空ㆍ법공法空을 인정하면서도 공으로서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가假의 현상 세계를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일체가 공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대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가假의 현상 세계를 형성해 내는 마음의 활동성을 철학적 분석과 논의의 중심 과제로 삼은 것이다. 이 점에서 유식은 유부의 실재론과 중관의 공론空論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식이 인도에서 본격적 학파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4~6세기의 일로서 『해심밀경解深密經』,『입능가경入楞伽經』등 유식계 대승 경전을 그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삼는다. 그 외 유식학파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작품들은 주로 논서인데, 미륵彌勒(Maitreya,270~350?) 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ㆍ『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ㆍ『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ㆍ무착無着(Asangga,310~400)의『섭대승론攝大乘論』ㆍ『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ㆍ세친世親(Vasubandu,320~400)의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ㆍ『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등이 그에 속한다. 미륵보살과 같은 이름 아래 미륵이 그 역사성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신격화되어 그려지고 있는 데 반해, 무착과 세친은 형제 사이로서 정신 편력이 어느 정도 밝혀져 있다. 형인 무착은 아우 세친보다 먼저 대승 사상에 심취하여 중요 논서들을 저술하였으며, 세친은 처음에는 경량부經量部적 경향의 유부에 소속되어 있다가 후에 형 무착의 권고로 대승 유식에 입문한 뒤 유식 사상을 더욱 철저하게 체계화하여 완성하였다. 세친의 『유식삼십송』은 유식의 기본 정신을 간단명료하게 게송으로 읊은 것으로, 이에 대한 세친 자신의 해설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후 세친의 유식을 계승 발전시킨 10대 논사들이 『유식삼십송』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서로간의 입장 차이가 생겨나게 되고, 이로 인해 인도의 유식학파는 전기 유식과 후기 유식, 다시 말해 무상유식無相唯識과 유상유식有相唯識으로 나뉘게 된다.
무상유식학파: 덕혜德慧(Gunamati,420~500)에서 안혜安慧(Sthirati,470~550)로 이어지는데, 형 상形相의 허망성을 강조하여 상相이 없는 진여眞如에 이르고자 하므로 무상유식이 라 한다.
유상유식학파: 진나陳那(Dignaga,400~480)에서 무성無性(Asvabhava,450~530),
호법護法(Dharmapala,530~561)으로 이어지는데,식識이 가지는 형상을 가假로 인정하여 식의 실상 파악에 치중하므로 유상유식이라 한다.
무상유식학파든 유상유식학파든 둘은 모두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세계가 식을 넘어 따로 객관 실유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식이 산출하는 가假일 뿐임을 인정한다. 둘의 차이는 단지 가假로서의 경과 관계하여 식의 실성을 무엇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데 있다.
무상유식에 따르면 식識은 분별하는 것(能取)이며, 경境은 그 식에 의해 분별된 것(所取)이다. 그러므로 경은 식 없이도 존재하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무일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존재하는 듯이 아我와 법法으로서 시설된 것이기에 가假라고 한다. 그리고 그처럼 소취된 경이 무이기 때문에 그렇게 능취하는 식 역시 무이다. 인연에 따라 전변하여 능과 소, 주와 객으로 이분되는 식의 전변 자체가 허망분별인 것이다. 분별소취된 경이 허망하듯이 분별능취하는 식 역시 허망한 것이므로, 그 이중의 허망성인 경과 식이 모두 사라질 때 진실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무상유식의 구호는 경과 식이 함께 무너지는 ‘경식구민境識俱泯’이다.
그러나 분별이라 함은 무엇(x)을 무엇(y)으로서 분별하는 것이다. 14)
따라서 경境을 실아와 실법으로 분별할 경우에도 분별 대상이 되는 어떤 것(x)과 그에 대한 분별 결과로서의 아와 법(y)은 구분되어야 한다. 즉 실아ㆍ실법으로 집착되는‘시설된 것’(y)과 그러한 시설의 의지처(x)가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식의 분석에 따르면 시설의 의지처는 아뢰야식에 의해 전변된 식소변으로서의 견분과 상분이며, 시설된 것은 그것이 식소변인 줄 모르로 독립적 경으로서 실체화된 아와 법이다. 한마디로 분별이란 아뢰야식 식소변인 견분과 상분(x)을 식을 떠난 실유實有적 아와법(y)으로 계탁분별하는 것이다.
.............x를 ...............................y로서 ........................분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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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소변인 견분과 상분 ...........실체적 아와 법...................................
이처럼 분별 대상(x)과 분별 결과(x)를 구분하고 나면 다시 식의 분별 과정 자체도 세분된다. x가 산출되는 과정으로서의 식의 분별 과정(분별 X)과 그렇게 산출된 x를 y로 잘못 해석해 내는 식의 분별 과정(분별 Y)이 서로 구분되는 것이다. 결국 분별 X는 견분과 상분으로 이분되는 식전변이고, 분별 Y는 다시 그것을 실체화시키는 허망분별이다. 다시 말해 아뢰야식의 식전변(분별 X)결과 산출되는 식의 견분과 상분(x)이 의식과 말나식의 허망분별(분별 Y) 에 의해 아와 법(y)으로서 집착되는 것이다. 전자의 식전변은 식의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속하고, 후자의 허망분별은 식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속한다.
.....식전변의 ...........x를 ..................y로서 ...........분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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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 X ........견분과 상분 ..........아와 법 ..........분별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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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타 기 성 ...................... .....변 계 소 집 성..........
이상과 같은 논리에 따라 유상유식에서는 가설의 의지처인 견분과 상분은 아뢰야식 의타기의 식전변 결과 즉 식소변으로서‘있는 것’이고, 독립적 실체로서 허망분별된 실아와 실법은 변계소집으로서‘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따라서 유상유식의 구호는 의타기의 식과 변계소집의 경을 구분하여 인연 따라 생하는 내식內識은 인정하고 망정妄情따라 시설된 외경外境은 부정하는‘유식무경’이 된다. 물론 유상유식에 있어서도 의타기의 식 역시 자기 자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의타기 즉 인연 화합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궁극적 실유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상유식에 있어 전의 또는 해탈은 의타기의 식전변 활동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기보다는 우리가 변계소집하는 아와 법의 의타기적 의존성을 깨우치는 유식성의 자각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타기의 진실한 부분인 정분 의타기는 원성실성으로 간주되어 부정되지 않는다. 15)
무상유식과 유상유식이 인도 내에서 분화된 유식의 두 학파라면, 그러한 인도의 유식이 중국에 수용될 때는 누가 쓰고 누가 번역한 글을 종지로 삼았는가에 따라 다시 지론종地論宗, 섭론종攝論宗, 법상종法相宗의 셋으로 분류된다. 16)
1. 지론종: 세친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을 소의경으로 하는데, 어느 번역자를 따르는가에 따라 다 시 남도파와 북도파로 구분된다.
①북도파北道派:보리유지菩提流支(Bodharuci)역을따름.망식설妄識說로서후 에 섭론화되고 법상法相에 접근
②남도파南道派:륵나마제勒那摩提(Ratnamati)역을따름.정식설淨識說로서후 에 화엄華嚴에 접근
2. 섭론종: 무착 저, 진제眞諦(Paramartha)역의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소의경으로 하는 데, 이는 인도의 덕혜, 안혜의 무상유식을 이은 것이다.
3. 법상종: 호법 등 저, 현장玄裝 역의 『성유식론』을 소의경으로 하는데, 이는 인도의 진 나, 호법의 유상유식을 이은 것이다. 계현戒賢(Silabhadra, 529~645)에게서 배 운 현장의 제자 규기窺基(632~682)가 세웠다.
이 책에서 기본 텍스트로 삼은 『성유식론成唯識論』은 세친의 『유식삼십송』에 대한 해설서인데, 이는 호법 등의 논사가 저술한 것으로서 인도유식에서 보면 후기 유식인 유상유식학파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중국 유식에서 『성유식론』을 소의경으로 한 유식학파는 법상종인데,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지론이나 섭론에 비해 법상종이 가히 유식을 대표할 만한 학파로서 연구되고 전파되었다. 신라의 유식학자인 원측이나 태현, 원효나 의상 등이 모두 법상종 계열의 유식을 공부하였으며, 선방에서 “구사 7년, 유식 3년”이라고 할 때의 유식 공부를 위한 기본 논서도 바로 『성유식론』이다.
‘유식무경’의 모토 아래 전개되는 유식 철학에서의 식과 경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있어 이 책은 주로 『성유식론』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그 외 필요에 따라 『해심밀경解深密經』, 미륵의『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무착의『섭대승론攝大乘論』, 세친의『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등 유식의 기본 경론들을 참고할 것이다.『성유식론』은 호법의 학설을 중심으로 『유식삼십송』을 주석한 책이지만 부분적으로 다른 논사들의 견해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 책의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티베트어 역도 발견 되지 않았으며, 중국에서 현장이 번역한 한역漢譯만이 잔존할 뿐이다. 이『성유식론』의 대표적 해설서로는 규기의『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와『성유식론추요成唯識論樞要』, 지주智周의『성유식론연비成唯識論演秘 』,혜소慧沼의『성유식론요의등成唯識論了義燈』등이 있으며, 그 외에 신라 학자 원측圓測의『성유식론측소成唯識論測疏』, 태현의『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 』등이 있다.
불교 사상 중에서 유식은 아마도 가장 치밀한 논리성을 갖고 존재와 인식을 논한 철학 체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식에 대한 연구는 국내외에서 많이 행해진 편이다. 그러나 논의의 대부분은 유식에서의 아뢰야식 연구, 종자 연구, 제6 의식의 연구, 삼성설 연구, 유식 5위의 실천론 연구 등 유식 사상의 특정 주제에 관한 논의들이거나 무착, 세친, 원측, 태현 등의 특정 인물에 관한 논의들이다.17) 아직까지 필자는 이 책에서 의도한 것처럼 유식에서의 식과 경의 관계를‘유식무경’의 논리에 따라‘내적 초월주의’의 형태로 분석한 예는 찾아보지 못했다. 18) 이제 본론에 들어가서는, 우선 제1장과 2장에서 경이 식 없이도 존재하는 객관 실재가 아님을 밝힌 다음, 제3장에서 그러한 경을 산출하는 식의 심층 구조를 살펴보고, 다시 제4장에서 본격적으로 식과 경의 관계를 해명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제 1장 색의 실유성 비판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유식에서의 식識과 경境의 관계를‘유식무경’의 관점에서 해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이 식을 떠나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객관적 실유가 아니라는‘식외무경識外無境’이 밝혀져야 한다. 이를 위해 이 장에서는 개체적 물질 존재인 색色의 실유성에 대한 유식의 비판을 살펴볼 것인데, 먼저 색의 궁극 요소인‘극미極微’의 실유성을 주장한 유부의 관점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유식의 비판을 검토할 것아다. 이 과정을 통해 유식에 있어서의 색이란 전오식前五識의 경으로서 식을 떠난 실재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질 것이다.
1) 극미실유의 의미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우리는 언제 어디에 있든지 주위의 수많은 개체들과 더불어 있다. 그것은 돌멩이나 컴퓨터와 같은 사물일 수도 있고 나무나 꽃과 같은 식물일 수도 있으며, 개나 소와 같은 동물이거나 친구나 애인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무생물이든 생명체이든, 정지해 있는 것이든 움직이는 것이든, 개체인 이상 그것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 자기 자리를 점하고 있는 구체적인 것이다. 그것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만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또 그 자리에서는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만을 보거나 만질 수 있다. 이러한 직접적 감각 경험은 불교 인식론에 따르면 현재적 인식이란 의미에서 현량現量에 속한다. 1) 현량의 감각 대상은 바로 시공간 상의 구체적 대상인 개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체는 우리의 오감에 주어지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사람이든 소든 꽃이든 시공간을 점한 구체적 개체라는 점에서는 돌멩이와 다를 바 없으며, 그 점에서 그것은 돌멩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이다. 이러한 물질을 불교에서는 색色이라고 한다.
현량 대상인 시공간 안에 위치한 구체적 개체들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색온色蘊이다. 그러나 이처럼 개체적 물질이 우리 오감에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러한 물질이 실재하며 객관적 실유성을 가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지금 내 눈앞에 종이가 있고 책이 있고 그 아래 책상이 있다는 것, 그것들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큼 확실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어떠한 물질적 개체도 그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래가 쌓여 모래성을 이루고 있다면, 그것을 색으로 고찰할 경우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는 과연 무엇인가? 쌓여 이루어진 모래성인가, 아니면 그 성을 이루는 모래인가? 모래성은 모래를 쌓아 놓으면 있지만 모래가 바람에 날려 흩어지면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쌓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요소로 다시 분석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 없어질 수 없는 것, 한마디로 말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물질(색)의 궁극적 미립자를 불교에서는 극미極微라고 한다
.2) 2)
極微는 불교에서뿐만 아니라 인도 철학 또는 그리스 철학에 있어서도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실재의 궁극 요소로서 논의되어 온 것이다. 범어의 anu 또는 paramanu가 그것인데, 이는‘미세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의 원자(atom)와 상응하는 개념이다. 인도에서 극미론은 자이나교가 최초로 전개하였으며, 이후 바이세시카(승론)와 니야야 학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불교의 원자설은 『아함』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아비달마 논서 중에서도 중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 점에서 승론이나 자이나교의 극미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대해서는 上山春平ㆍ櫻部建,『아비달마의 哲學』(정호영 옮김, 민족사), 81쪽 이하 참조, 방인은 “승론의 극미설이 영원한 실체의 개념에 근거하고 있는 반면에 , 다르마슈리의 극미설은 諸行無常이라는 불교의 근본 교설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두 관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방인,「불교의 극미론」(대한철학회 편,『철학연구」 제 65집, 1998, 53쪽 이하)참조, 불교의 물질론 전반에 관해서는 오형근,『佛敎의 物質과 時間論』(유가사상사, 1994)참조
색의 최소를 하나의 극미極微라고 한다. 3)
현장 역, 『阿毘達磨大毘婆沙論』, 제136권(『大正藏經』27, 701上), “色之最少, 謂一極微”
사물을 분석分析하면 하나의 극미極微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극미가 색의 최소이다.4)
물질을 분석하여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색의 최소로서의 극미에 도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의미는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최소 단위로서의 극미의 존재를 부정할 경우와 대비시켜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는 어떤 개체가 요소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발견했을 때 그 요소를 개체를 이루는 궁극적 실재라고 간주한다. 그러다가 그 요소가 더 작은 요소로 분석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면 다시 그 분석된 결과를 궁극적 실재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런 분석이 무한히 계속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작은 미립자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그보다 더 작은 미립자로 분석될 수 밖에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곧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궁극적 미립자(極微)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개체적 물질을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그 안에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궁극적 요소, 즉 개체를 형성하는 궁극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색은 그 자체 내에 자기의 존재 근거나 존재 기반을 가진 것이 아니게 된다. 나아가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체 존재의 궁극 요소가 존재하지 않기에, 결국에는 그런 것들이 쌓여 이루어진 개체마저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물질의 궁극 요소로서의 극미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런 극미로 이루어진개체적 사물들 역시 실재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말이다. 물질적 개체가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이루는 궁극 요소로서의 극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체인 제소유색諸所有色의 실유성을 주장하는 유부有部에서는 적극적으로 색의 궁극적 단위인 극미의 실유성을 주장하게 된다.
2) 극미의 성질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사물을 분석하여 최후로 극미에 이른다는 것은 극미를 사물의 양적 최소 단위로 간주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다양한 성질들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궁극 요소인 극미의 성질의 다름에서 기인하는가, 아니면 동일 성질의 극미가 지닌 배합 질서나 양의 차이에서 비롯되는가? 사물의 질적 최소 단위는 과연 무엇인가?
다양한 현상을 가능한 한 최소한의 원리로 종합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철학적 사유 방식에 따라 불교는 사물의 다양한 성질을 궁극적으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의 네 가지 기본 요소로 환원한다. 그리고 이 4요소를, 색을 형성하는 질적인 기본 단위로서 그 작용의 결과가 막대하게 크다는 의미에서 ‘대大’자를 붙여 사대四大라고 칭한다.5
) 四大는 大種이라고도 하는데, 모이고 흩어짐을 통해 소조색인 만물을 증감 생멸케 한다는 의미에서 種이라고 하고, 그 작용의 결과가 막대하게 크므로 大라고 한다.『大毘婆沙論』, 제127권(『大正藏經』27, 663上), “能減能增能損能益體有起盡. 是爲種義體相形量遍諸方域成大事業. 是爲大義” 이 사대의 막대한 작용력은 사대의 조성 결과(果)로서의 일체 물질 세계에 대한 5종의 因으로 분석되는데, 生因, 依因, 立因, 持因, 養因이 그것이다. 더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오형근,『佛敎의 物質과 時間論 』(유가사상사, 1994), 59쪽 이하 참조, 인도 철학이나 불교뿐만 아니라 동양의 儒家 철학이나 서양의 그리스 철학에서도 일체의 자연 물질의 궁극 요소를 유사한 네다섯 가지 기본 물질로 환원시켜 설명하고 있다. 인도 철학이나 불교에서 물질의 근본 요소를 地水火風으로 보았듯이, 플라톤도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우주세간을 형성하기 위해 취하는 근본 물질을 지수화풍 네 가지로 들었다. 유가의 기본 물질은 五行으로서 木火土金水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水와 火는 냉기와 온기, 습과 건, 하향과 상향의 기본 물질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색이란 곧 사대 자체 또는 사대가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사대를 인因으로 하고 사대를 연緣으로 한 것을 색음色陰(色蘊)이라고 한다. 6)
색色은 무엇을 말하는가? 색을 가진 모든 것(사물)은 일체의‘사대’또는‘사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뜻한다. 7)
그러나 사대는 어디까지나 사물의 성질을 설명하는 질적인 기본 단위이므로, 지ㆍ수ㆍ화ㆍ풍 이라고 불린다고 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 사물로서의 지ㆍ수ㆍ화ㆍ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각각이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의 성질을 뜻할 뿐이다. 즉 사대란 본래 사대의 성性을 뜻하는 것이다. 8) 이 점은 유부에서 비로소 주장된 것이 아니라 근본 불교에서부터 애초에 그러하였다.『雜阿含經』에서도 이미 四大는 땅(地)이나 물(水)처럼 眼識 대상으로서의 색경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身識 대상의 觸境에 속한다고 이해하였다. 사물은 가시적이지만 堅濕煖動의 성은 촉감으로만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대를 시각 대상이 아닌 촉각 대상으로 분류하는 것은 『雜阿含經』, 제13권, 322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견습난동의 性을 왜 地水火風이라는 색경에 속하는 사물을 들어 四大라고 한 것일까? 『俱舍論』에서는 이에 대해 사대가 무엇인지 쉽게 보여 주기 위해 “세간상에 따라 가립하여 칭한 것일 뿐”(隨世間想假立此名)이라고 설명한다. (『俱舍論』, 제1권; 『 大正藏經』29, 3中)
그러면 보이지 않는 이 성性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그것은 지持ㆍ섭攝ㆍ숙熟ㆍ장長이라는 그 사대의 업業을 통해 밝혀진다. 9)
이제 문제는 사물의 기본적 성질로서의 사대와 사물의 양적 최소 단위로서의 극미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곧‘사물의 성질’과‘사물 자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물과 사물의 성질을 구분하며, 사물을 성질만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런 성질을 가지는 사물 자체는 성질로만은 환원되지 않는‘어떤 것’이라고 가정한다. 견고함이나 습함과 독립적으로 어떤 것이 따로 존재하고, 그것이 견고해지거나 습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질은 존재하는 무엇인가에 속하는 성질 즉‘속성’이고, 그런 속성을 가지는 것 즉‘속성의 담지자’로서의 실체인 사물 자체는 성질과 구분되는 차원의 것으로 존재한다고 여기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성질을 이루는 사대와 그런 성질을 지니는 사물 자체를 형성하는 극미는 서로 무관한 별개의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교는 사물의 성질을 떠난 사물 자체를 따로 설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물 자체를 사물의 성질인 사대로 이루어진 것, 즉 사대소조四大所造로만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성질과 그 성질을 가지는 사물이 두 차원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성질이나 작용을 떠나 사물 자체로서 남겨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10) 10)
이는 속성들 너머에 속성의 담지자로서의 실체를 사물 자체로서 설정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관한 문제로서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철학적 문제 중의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2장 3절에서 상세히 논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물 자체 또는 사물을 이루는 극미 자체는 사대의 성질을 떠난 것이 아니라 사대의 성질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사대의 성性과 극미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우선 사대와 극미의 관계에 있어 다음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하나의 극미는 오직 하나의 성질만으로 존재하든가, 하나의 극미에 사대의 성질이 두루 다 갖추어져 있든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부는 후자의 관점을 취한다. 사물의 최소 단위로서의 하나의 극미안에 이미 지수화풍 사대의 성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대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대종四大種은 일체 시時에 있어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11)
이것은 어느 사물에서든 네 가지 성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결론이다. 말하자면 견고한 사물이라고해서 오로지 견성堅性의 지地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칼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딱딱한 금은 견성堅性
만 가진 듯하지만 거기에도 동성動性이 들어 있기에 용광로에 넣으면 흘러내리고, 미약해 보이는 작은 물방울은 습성濕性만 가진 듯하지만 거기에도 견성堅性이 들어 있기에 그 물방울들이 모여 강물이 되었을 때 배를 띄울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대는 그 소조색을 이룰 때 네 가지가 언제나 함께한다. 이 사대종의 성질이 함께하여 이루는 소조색의 최소 단위가 바로 극미이다. 다시 말해 극미란 지ㆍ수ㆍ화ㆍ풍으로 대변 되는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의 네 성질의 화합물, 또는 지持ㆍ섭攝ㆍ숙熟ㆍ장長이라는 작용을 일으키는 힘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사대가 극미를 형성하는 기본 성질이기는 하지만 그 네 성질은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사물의 최소 단위는 바로 극미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극미는 물질적 사물의 분석 결과 도달된 최소 단위이므로 그보다 더 작은 부분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분석될 수 없다. 분석 가능한 사물을 분석하여 얻어진 사물의 궁극적 최소 단위로서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극미는 일반적으로 개체적인 물질적 사물이 가지는 특징과는 상반된 특징을 가진다. 말하자면 극미는 가시적 사물을 이루는 양적 기본 단위임에도 불구하고 직접보거나 듣거나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극미 자체는 경험 가능한 감각 대상이 아니다.
(극미는) 미세한 부분을 가지지 않으므로 분석될 수 없다. 볼 수도 없으며 들을 수도 없다. 냄새 맡고 맛볼 수도 없으며 만져 느낄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극미를 가장 미세한 색이라고 설한다. 12)
따라서 이제 문제는 이처럼 부분을 가지지 않고 분석할 수 없으며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감각 불가능한 극미가 어떻게 여럿이 함께함으로써 보거나 만질 수 있는 물질적 사물을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3) 극미의 집적과 개체 존재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극미가 쌓여서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질적 사물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지점에선가 질적인 전환이 발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만져지지 않던 것이 만져지게 되는 그런 전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전환은 어느 지점에서 발생하는가?
유부에 따르면 사대의 성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함께하여 일극미를 이루게 되는데, 그런성질의 극미 또한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7개가 모여 함께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함께 모인 7개 극미의 합을 미진微塵이라 하는데, 비가시적인 극미가 7개 모여 일미진이 되면 이 미진은 일극미와는 달리 시각적으로 경험 가능해진다. 13)
일곱 개의 극미가 하나의 미진微塵을 이루는데, 이것이 곧 눈이 안식眼識으로 취할 수 있는 색色 중에서 가장 미세한 것이다.14)
다시 미진이 7개 모여 동진銅塵이 되고, 또 그것이 7개 모여 수진水塵이 되고, 이렇게 계속 토모진兎毛塵, 양모진羊毛塵 등으로 나아가서 결국 일체 사물을 이룬다.15) 이와 같이 극미로부터 일체 사물을 설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논쟁거리로 제기된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극미가 모여 일미진을 이룰 때 그것들은 어떤 방식으로 모이는가, 즉 극미들은 서로 접촉하는가 접촉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구유부舊有部(本有部)와 신유부新有部는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16) 구유부에서는“극미들은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17)고 보지만, 18) 신유부의 관점에 따르면 극미들은 모이면서 서로 접촉한다. 구유부의 주장처럼 극미들이 상호접촉 없이 간격을 갖고 모이는 방식을 화합和合(samyoga)이라 하고, 신유부의 주장처럼 극미들이 접촉하여 상호결합함으로써 하나의 단일체를 이루는 방식을 화집和集(samghata)이라 한다.
사물을 극미의 화합으로 보는 것과 극미의 화집으로 보는 것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인식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각기 다른 답을 제시한다. 즉 사물을 극미의 화합으로 볼 경우 우리의 인식 대상은 개별적인 다수의 극미 자체인 데 반해, 사물을 극미의 화집으로 볼 경우 우리의 인식 대상은 이미 결합된 사물이다. 구유부는 극미가 접촉함이 없이 간격을 갖고 모여 있다고 봄으로써 화합물에 있어서의 인식대상도 그 곳에 단순히 모여 있는 개별적 극미라고 본 것이다. 이에 반해 신유부에 따르면 전오식이 인식하는 인식대상은 극미가 접촉하고 결합하여 이루어진 사물 자체의 모습, 즉 실재하는 화집상和集相이 된다. 이 신유부의 관점은 『성유식론成唯識論』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색 등 각각의 극미는 화집하지 않았을 때는 오식五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함께 화집할 경우 전전 하여 거친 상相이 생하는데, 그것이 오식의 대상이 된다. 그 상은 실유實有이며, 식識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19)
이와 같이 구유부든 신유부든 화합이나 화집 이전의 각각의 극미는 인식 대상이 되지 않고 그들이 함께해야만 비로소 인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그 집적된 결과에 있어서 정확히 무엇이 인식 대상이 되는가 하는 점에서는 서로 관점이 달랐다. 구유부는 화합 이후에도 개별적인 다수의 극미 자체가 인식된다고 보았으나, 신유부는 화집된 사물 자체가 인식 대상이 된다고 보았다.20) 그렇지만 집적된 요소로서의 극미이든 집적결과로서의 화집상이든 색법이 그 자체로 실재하며 그것을 전오식으로 볼 수 있다고 간주한 점에서는 일치한다. 즉 색법은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의 식을 떠나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2. 극미실유성에 대한 유식의 비판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심왕心王이나 심소心所 이외의 색법을 식과 무관한 독립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유식唯識에서는 그와 같은 색법의 비실유성을‘색법을 구성하는 극미 자체가 실유가 아님’에 근거하여 논증한다.
대상이 되는 색色은 분명히 실유實有가 아니다. 그것을 이루는 극미極微가 실유가 아니기 때문이다.21)
이와 같이 색법의 실유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유식에서는 우선 그 궁극요소로서의 극미의 실유성을 부정한다. 유식이 극미를 부정하는 방식은 크게 둘로 구분될수 있는데, 하나는 실유로서 상정되는 극비 자체의 모순성을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극미가 인식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실유가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우선 극미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은 무슨 의미인가?
1) 극미실재론의 논리적 불가능성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유부有部는 색을 분석하여 최후로 도달되는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최소의 것을 극미라고 칭하면서 그 실유성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유식은 무슨 근거에서 극미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일체 존재에 대해 배중률은 지켜져야 할 원리이다. 그러므로 극미에 대해서도 극미는 방분方分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방분이라는 말은 방향적인 부분, 즉 공간적인 부분을 말한다. 따라서 극미가 방분을 가진다는 말은 극미가 각각의 부분으로 분할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부에 따르면 극미는 방분을 가지지 않으며, 경량부經量部에 따르면 극미는 방분을 가진다. 그런데 유식은 그 두 경우를 다 검토해 보고는 두 경우가 모두 성립하지 않으므로 극미라는 것 자체는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만일 극미가 방분을 가진다고 해 보자. 그 경우 극미는 그 안에 포함된 방분으로 분할이 가능할 것이다. 즉 극미의 본래 의미가‘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최소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방분을 갖는다고 하면 그 방분에 따라 분석이 가능하게 되므로 결국 그것은 극미일 수 없다.
만일 극미가 부분(方分)이 있다고 하면 그 극미는 분석될 수 있어야 하며, 따라서 (분석 불가능한 궁극적 존재로서의)실유가 아니다.22)
그렇다면 극미는 방분을 가지지 않는다고 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경우에도 역시 문제가 발생한다. 즉 극미가 방분을 가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극미가 모여 일반적인 색법의 사물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극미에) 방분이 없다고 하면 색법이 아닌 것처럼 된다. 어떻게 그런 것(방분이 없는 것)들이 모여 빛을 받아 (빛이 가지 않는 부분에) 그림자를 만들겠는가?……빛을 받아 그림자를 만드는 것 은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것이다.(따라서) 집착된 극미는 반드시 (다른 장소가 성립하게끔) 부분 이 있어야 한다. 23)
일반 사물은 모두 방분을 가진다. 방향적 차별이 있기에 한쪽에서 빛이 비쳐 올 경우 그 반대 방향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 사물을 이루는 궁극 요소로서의 극미가 방향성을 지니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극미가 모여 방향성을 지닌 사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분이 있는 색법의 궁극 요소인 극미 또한 부분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이처럼 극미에 부분이 있다고 하면 앞서 논한 것처럼 극미는 부분으로 분할 가능하게 되어 더 이상 극미일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만일 극미가 존재한다면 방분이 있거나 없는 것으로서 존재해야 하는데, 그 두 경우 모두 성립하지 않으므로 결국 극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2) 극미실재론의 인식론적 불가능성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극미의 실유성에 관한 유식의 둘째 방식의 비판은 극미에 대한 인식의 문제와 연관해서이다. 유부는 극미 또는 색이 우리 전오식의 인식 대상이라는 것에 근거해서 극미의 실유성을 주장한다. 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 근根과 경境이 각각 실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식의 대상으로서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그것이 실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유부는 적극적으로 극미 또는 극미소조의 색이 오식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극미의 실유성을 증명하려 한다.
반면 극미의 실유성을 부정하는 유식은 극미가 정말 유부의 주장대로 오식의 대상이겠는가 반문한다. 색을 분할해서 얻게 된다고 하는 그 궁극적 요소로서의 극미를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있는가? 정말로 극미가 안식의 대상인가? 유식은 유부의 입장을 검토하여 극미가 오식의 대상일 수 없음을 논한다. 우선 유식은 극미가 오식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유부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여러 극미가 함께 화합할 경우 오식五識에 대해 그 각각의 대상이 된다. 24)
이와 같이 정리된 유부의 관점은『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 나타난 구유부의 관점이다. 이에 따르면 극미가 화합하기 이전에는 그 낱낱의 극미가 인식되지 않지만, 극미들이 화합할 경우에는 전오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아주 가는 실은 한 가닥만으로는 너무 가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러 가닥이 합해 있으면 눈에 보일 수 있다. 극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로 화합함으로써 전오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유식은 극미의 화합물에서는 전오식이 극미를 인식할 수 있다는 유부의 관점을 비판한다. 보이지 않던 가는 실이 여럿 모이면 보인다고 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이 정말로 앞서 보이지 않던 가는 실 그 자체이겠는가? 원자가 모여 사물이 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원자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화합물인 사물은 보인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우리가 사물을 볼 때 과연 그것을 이루는 원자를 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원자란 현미경 따위를 통해서 관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객관 실재물이 아니라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모델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유식은 극미란 하나로서든 여럿이 모여서든 결코 우리의 감각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오식에 있어 극미의 양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극미가 함께 화합한다고 해서 오식五識에 대해 그 각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식에 있어 극미의 양상이 없기 때문이다. 25)
즉 화합하지 않은 상태에서 극미가 전오식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화합했다고 해서 전오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화합한 경우와 화합하지 않은 경우 제 극미의 체상體相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화합한 경우나 화합하지 않은 경우나 색 등 극미가 오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26)
이와 같이 해서 유식에서는, 극미 자체는 인식되지 않지만 극미 7개가 모여 미진이 될 때 그 화합상에서는 극미가 인식된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낱낱의 극미가 비가시적이라면 그런 비가시적인 것이 화합한다고 한들 어떻게 보일 수 있겠는가? 화합을 하든 하지 않든 극미의 체와 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합함으로써 극미가 지각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유부는 구유부와 달리 극미들이 단지 근접하여 모이는 화합 대신 결합하여 새로운 하나를 이루는 화집을 주장하였다. 극미들이 모여서 전전하여 구체적인 새 모습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상은 화집된 극미의 상으로서, 결국 극미가 인식 대상이 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신유부의 관점을 유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색 등 각각의 극미는 화집하지 않았을 때는 오식五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함께 화집할 경우 전전하여 거친 상相이 생하는데, 그것이 오식의 대상이 된다. 그 상은 실유實有이며, 식識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27)
다시 말해 화합의 경우는 화합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화합 이후라고하여 보일 수는 없다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화합 아닌 화집을 이룰 경우에는 전전하여 구체적인 새 모습을 이룸으로써 전오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화집하기 이전에 극미가 가지고 있던 상을 유부는 세상細相 또는 미세한 원상圓相이라고 본다. 유부에서는 이러한 극미들이 화집할 때는 그 각각의 원圓의 모양을 버리고 전오식이 인식할 만한 구체적인 사물의 상을 형성한다고 하여, 28) 극미들이 집적된 화집상은 감각 대상이며 실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식에 따르면 화집 전의 극미를 실유로 보면서 동시에 그러한 개별 극미의 상을 버리고 형성되는 화집상 또한 실유라고 보는 것은 모순이다. 왜 그런가? 극미가 화집하여 병이나 사발(?)등이 될 때 그 극미 자체의 원상을 버리고 사물에 따라 각기 구별되는 화집상을 이루는 것이라면, 화집상이 인식 대상으로 될 경우 극미는 더 이상 인식 대상이 아니게 되므로 인식 대상으로서의 실유성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친 상相에 대한 식識은 미세한 상의 대상을 반연하는 것이 아니다. 29)
이처럼 유식은, 극미가 낱낱으로는 직접 지각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화합 또는 화집한 경우 전오식의 대상이 된다는 구유부와 신유부의 주장을 각기 비판한다. 화합하든 화집하든 극미가 전오식의 대상이 될수는 없으므로 그것이 실유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유식론』에서 극미의 실유성에 대한 유식의 비판은 유부에 이어 경량부로 나아가는데, 경량부는 극미실재론을 주장하기는 하였지만 극미가 화합했을 때의 존재 방식이나 극미에 대한 인식 가능성에 있어서 유부와 관점을 달리한다. 즉 경량부에서는 극미가 비록 공간적으로는 분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방분을 가진다고 본다. 그리하여 극미의 집적 시에는 상호접촉이 없이, 그러면서도 간격 없이 모인다고 주장한다. 사물이 그처럼 극미의 집적으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실제로 인식하는 것은 결코 실유의 극미가 아니라 단지 극미들의 화합상일 뿐이며, 따라서 극미 자체는 결코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이 일관성 있게 주장된 경량부의 관점이다. 극미 상호간에 간격을 두지 않고 화합함으로써 단일한 극미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나의 조대粗大한 형상이 형성되는데, 우리가 인식 하는 것은 그 화합상일 뿐 실유의 극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안眼 등 오식五識이 색色 등을 인식할 때에는, 그와 유사하게 화합된 상을 인식할 뿐이다. 30)
이처럼 경량부에 따르면 극미는 개별적으로도 집합적으로도 결코 직접 지각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식의 상을 통해 그 존재가 간접적으로 추론될 수 있다. 물론 집합적 극미가 의식에 부여한 지각상과 실제 극미의 형상 사이에는 단지 추론된 유사성만 존재할 뿐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식의 관점에 따르면 이처럼 인식된 화합상과 인식될 수 없는 실유로서의 극미 자체의 형상을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할 경우, 그와 같이 인식된 화합상은 더 이상 실유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유식은 경량부의 지각된 화합상에 대해 그것이 비실유적인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 화합상은 이미 실유가 아니다. 31)
나아가 화합상이 실유가 아니므로 그 화합상을 근거로 해서 그것의 원인으로서의 극미의 실유를 주장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식은 경량부가 주장하는 극미에 대해서도 그것이 실유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극미가 실유가 아니라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극미소조로서의 물질적 색법의 실유성을 부정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유부와 경량부의 극미론에 대한 유식 비판의 결론을 극미란 실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식에서의 극미란 과연 무엇인가?
거친 색법에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사람을 위해 부처가 극미를 설하여 그 집착을 분석하여 없애 려 한 것이지, 모든 색법에 실제로 극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모든 유가사瑜伽師 들이 가상假想의 지혜로써 거친 색법의 상을 점차적으로 분석 제거하여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것 에 이르러 극미를 가설假說한 것이다.……따라서 극미를 색의 극한 개념이라고 설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대상이 되는 색은 모두 식이 변현한 것이지 극미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32)
여기서는 극미라는 것은 가시적인 색법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적 개념이되, 그 색법의 실유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색법에 실체가 있다는 집착을 없애기 위해 시설된 개념임이 강조되고 있다. 가시적이고 분석 가능한 색법을 분석하여 그 궁극적 요소로서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극미에 이르렀다고 할 때, 그렇게 상정된 극미가 실유일 수 없음을 밝힘으로써 극미소조의 색 역시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즉 우리의 감각 대상인 개체적 존재를 물질적 미립자인 극미가 화합하여 이루어진 색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개체의 존재 기반은 극미가 아니다. 그렇다면 유식은 개체의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3. 전오식의 소연경으로서의 개체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개체적 사물인 색법은 왜 실유가 아닌가? 감각은 사유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 발생하는 직접적 인식, 즉 현량現量이 아닌가? 현량의 대상 세계는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식 이외에 경이 없다는‘유식무경’은 바로 이러한 현량으로서의 감각 세계를 부정하는 것인가? 현량 대상으로서의 감각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유식무경을 말할수 있는가?
그러나 유식에서 색법은 실유가 아니라고 강조할 때, 그 말은 색법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색법은 식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객관 실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색법으로 분류되는 개체적 사물의 존재 자체는 부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존재하는 그 개체적 색법이 식으로부터 떨어져 따로 성립할 수 있는가 아닌가이다. 『성유식론』의 다음 구절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문〕오식의 소의所依와 소연所緣인 색법이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가?
〔답〕비록 색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식이 전변된 것일 뿐이다. 즉 식이 생겨날 때 내적 인연 세력에 따라 전변하여 안眼(所依根)과 색色(所依境)등의 상相으로 현현하는데, (오식은) 그러한 상을 소의와 소연으로 삼는 것이다. 33)
다시 말해 색법으로 분류되는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 오근五根과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오경五境은 독립적인 궁극적 물질로서의 극미가 화합 또는 화집하여 형성된 실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극미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식 자체가 전변해서 식의 소의所依와 소연所緣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34) 그러므로 유식이 적극적으로 극미의 실유성을 부정하고 그런 극미로 이루어진 색법의 실유성도 부정한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써 색법이란 것은 식 바깥의 극미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식의 변현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그리하여 식을 떠나 존재하는 물질적인 객관적 실체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 한마디로‘식외무경識外無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는 결국 오식 즉 감각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사고를 바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감각 대상 세계 즉 감각의 소연경所緣境과 그런 감각을 행하는 우리의 신체 즉 감각의 소의근所依根이 우리의 인식에 선행하는 인식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그것이 식의 변현 즉 식의 결과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식은 식의 소의근과 소연경은 식의 변현일 뿐 객관 실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에서 식의 소연경인 감각 대상 세계와 그 식의 소의근인 신체의 감각 기관이 객관 실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일단 식의 소연경에 대한 유식의 관점을 설명한 후 다시 식의 소의근의 문제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1) 오경의 비실유성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현량으로 주어지는 감각 대상으로서의 소연경 즉 색법은 그 자체로서 식과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닌가? 유식무경을 반박하는 이러한 반론에 대한 유식의 대답이 『성유식론』제7권에 실려 있다.
〔문〕색色등 외부 대상은 분명히 현량現量으로 증득된다. 현량으로 얻어지는 것인데 어째서 부정 하여 없다고 하는가?
〔답〕현량으로 증득할 때에는 외적인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이후의 의意가 분별하여 망령되 게 외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35)
중요한 것은 위의 대답에서 볼 수 있듯이 유식에서는 현량 대상으로서의 감각 세계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이 현량 대상으로서의 감각 세계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듯 우리의 인식 밖의 외적 존재인가, 아니면 안팎의 분별을 떠난, 분별 이전의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현량으로 인식된 감각 대상, 예를 들어 감각된 빨간색, 감각된 모양, 감각된 향기, 감각된 부드러움, 이런 것들은 감각을 떠나 그 자체로서 감각 너머의 외적인 것으로 실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유식은 감각적 인식 상태인 현량에서는 그 대상이 인식 내적인 것인가 인식 외적인 것인가 하는 분별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량적 인식은 무분별적 인식이다. 36) 현량의 대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그것이 우리의 식 외부에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인식 내부와 인식 외부의 분별, 의식 내적 표상과 의식 외적 사물의 분별은 현량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전오식의 대상으로서의 경은 그 대상을 반연하는 전오식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소위 말하는 안식眼識등은 ……그 자신을 떠난 색色 등을 친히 반연하지 않는다.……식에 의해 친 히 반연된 것은 그것(반연하는 식)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37)
이 말은 각 식이 대상으로 삼는 경을 식과 무관한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연하는 식識이 있기에 반연되는 경境이 있다. 경이란 그것을 반연하는 식 안에서 그 식에 의해 반연된 것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는 안식을 통해 보여진 색깔 이외에 그러한 봄(視)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색깔, 색경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지는 신식身識을 통해 느껴지는 부드러움이나 딱딱함 이외에 그런 촉감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부드러움 자체, 딱딱함 자체 등의 촉경觸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감각된 빨간색은 그 빨간색의 감각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빨간색 자체가 빨간색의 감각을 떠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된 세계, 즉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오경은 그에 대한 감각 활동, 즉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오식을 떠나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세계로 객관화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반연된 경은 그것을 반연하는 식과 분리될 수 없다는 유식의 주장이다.
사실 감각 대상(境)과 감각 활동(識)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것인가, 아니면 근원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통합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서양 인식론에서도 곧잘 제기되는 기본적 물음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감각된 것 즉 감각 내용을 감각적 인식과 구분되는 외부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할 것인가, 아니면 감각하는 자 자신의 인식 내용으로 간주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의 복잡성을 담고 있는 서양 철학적 개념이 바로‘감각 자료(sense data)’이다. 감각 자료를 물질적 외부 세계로부터 우리의 감각 기관에 주어지는 순수 객관적 자료로 해석하는 사람은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분리된 외부 세계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실재론자가 되지만, 반대로 감각하는 자의 주관적 의식 구조를 떠나 감각 자료를 객관화 또는 실체화시킬 수 없다고 보는 사람은 감각 너머에 다시 대상 세계를 설정하지 않는 관념론자가 된다. 38)
이와 동일한 물음은 이미 유식 이전의 불교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감각된 인식 내용인 형상(akara)을 객관 사물에 속하는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식에 속하는 것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 객관적 물질 세계인 색법을 마음 너머의 독립적 실재로 인정하는 유부에서는 우리가 어떤 형상(사물의 속성, 예를 들어 장미의 빨간색 또는 향기)을 인식할 때 그 알려진 내용인 형상은 인식 대상인 사물 자체의 형상이지 그것을 아는 인식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대상이 형상을 가지는 것이지‘인식이 형상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에서‘무형상인식론無形相認識論’이라고 칭한다.39) 반면 유부의 색법에 관한 삼세실유三世實有적 실체론을 비판하는 경량부에서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아는 형상은 바로 우리의 인식에 포함된 형상일 뿐 그러한 인식 너머의 객관적 사물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를 가리켜‘유형상인식론有形相認識論’이라고 한다. 경량부에 따르면 외부 세계는 직접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인식의 근거로서 추론될 뿐이다. 40)
형상이 인식 밖의 사물에 속하는 것인가 인식 자체에 속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유식은 경량부와 마찬가지로‘유형상인식론’의 관점을 취하지만, 41) 그러면서도 경량부와 달리 인식된 형상을 떠나서 사물 자체를 상정하는 것은 비판한다. 경량부의 주장대로 사물 자체가 직접적인 현량 대상이 아니라 단지 추론된 것, 사유된 것일 뿐이라면 사물 자체란 그야말로 사유의 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재하는 것으로 느끼는 직접적 현량 대상으로서의 사물은 감각된 이러저러한 형상과 분리 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량의 대상, 감각의 대상 세계는 그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유식에 따르면 감각된 빨간색은 그 빨간색의 감각과 분리될 수 없다. 누군가 빨간 사물을 제시하면서‘바로 이것이 객관적인 빨강 자체가 아닌가!’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러나 이 때의 빨강 역시 그에 의해서 감각된 빨강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각자에 의해 감각된 빨강을 넘어 빨강 자체를 객관화하고 고정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식 기관 또는 인식을 종합하는 두뇌의 구조가 서로 다르기에 각 생물 간의 인식 내용 역시 서로 다를 것이라고 상상하는 우리는, 따라서 우리가 보는 빨간 장미꽃은 우리에 대해서만 빨간색이지 개나 물고기 또는 지렁이에 대해서도 역시 빨간색일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이처럼 빨간색이란 빨간색을 인식하는 그 감각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감각 대상인 경은 그것을 감각하는 식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감각 대상으로서의 물질적 색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42)
2) 오근의 비실유성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이상이 색법 중 오경의 식 의존성을 말한 것이라면, 이제 오근五根에 대해서 그것이 식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을까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오식의 소연경은 식을 떠나 있다 하더라도, 그런 오식을 가능하게 하는 소의근으로서의 오근은 식을 떠나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경境이 그것을 반연하는 식識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인식 내용이 인식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식이 바로 그 인식을 산출하는 인식 기관 즉 근根에 의해 결정됨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인식된 감각 내용은 감각에 의거하지만 그 감각은 감각 기관에 의존하기에, 결국 감각적 인식의 최종 근거는 감각 기관이지 않은가? 결국 인식은 물질적 인식 기관인 감각 기관이나 두뇌 신경 조직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인식은 물질적 신체에 의거한 심리적 부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런 인식을 산출하는 인식 기관 즉 근은 물질적 색으로서 식을 떠난 독립적 실재이지 않은가?
경을 식으로 환원하려는 유식적 관점에 대해 현대 유물론적 관점에서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은, 바로 이와 같이 그 식을 다시 근 즉 우리의 신체로 환원하려는 심리철학 내지 신경생리학적 반론일 것이다. 인식된 세계가 인식자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인식자의 인식 기관, 곧 그 신경 세포와 신경 조직, 두뇌 구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식의 차이를 근의 차이로부터 설명하게 되면 그 근 자체는 식을 산출하는 독립적 실체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면 유식은 무슨 근거에서 오식의 소연경과 마찬가지로 오식의 소의근 역시 인식 너머에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으로 객관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안眼 등의 근根은 현량現量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능히 식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추리하여(比量으 로) 그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공능功能일 뿐이지 외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안 등의 식을 일으키는 것을 안 등의 근이라고 이름한 것이다.43)
감각 기관으로서의 근根이 현량의 직접적 대상이 아니라는 것, 즉 근은 오히려 현량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 또는 능력으로서 논리적으로 설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유식의 관점이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우리의 인식을 인식 기관인 근이 산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인식 기관을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물질적 기반으로 간주하고, 인식을 그것에 의거한 부수 현상으로 간주한다. 정확하게는 두뇌 또는 두뇌 신경을 일체의 식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기반으로 간주하며, 우리의 식은 모두 두뇌의 부수현상일 뿐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우리가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 우리가 일차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 즉 우리 현량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의 식이지 그 식을 산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식 기관이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빨간색이 감각되었을 때 직접적으로 감각되는 것은 빨간색(境) 또는 빨간색에 대한 감각(識)이지 감각 기관으로서의 눈이나 신경 또는 두뇌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현향 대상이 아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신경생리학자가 인간 두뇌를 분석하여 인간이 빨간색의 감각을 느낄 때마다 두뇌 특정 부분의 신경x가 얼마만큼의 파장을 그리며 진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빨간색의 감각 즉 우리의 인식이 두뇌 즉 물질에 근거한 것이라고, 그리고 그 두뇌라는 물질이 인식 너머의 객관적 실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두뇌라는 것이 시ㆍ공간적 물질로서의 두뇌를 의미하는 이상 그것은 이미 우리에 의해 ‘인식된’두뇌 즉 인식 대상(境)으로서의 두뇌이지 더 이상 인식 근거(根)로서의 두뇌가 아니기 때문이다. 44) 빨간색을 직접적으로 인식 하는 자, 또 그러한 빨간색에 대한 인식을 두뇌의 파장과 객관적으로 동일시하는 신경학자, 그 둘 다가 인식을 떠나서 그 인식을 낳는 근으로서의 두뇌 자체에 접근한 것이 아니다. 빨간색을 인식한 자의 인식에 있어서는 그 빨간색의 인식이 일차적인 것이고 그것과 동일시되는 두뇌의 진동은 아예 인식되지 않았다. 반면 신경학자에 있어서는 두뇌의 진동이 일차적으로 인식 대상이지만, 그가 본 두뇌는 실험대 위에 오른 다른 사람의 두뇌이지 그 자신의 두뇌가 아니다. 결국 신경학자가 인식한 두뇌는 그의 감각 대상 즉 경으로서의 물질이지 결코 인식 기관 즉 근으로서의 물질이 아니다. 이처럼 근으로서의 두뇌는 감각자나 신경학자 그 누구에게도 직접적으로 인식되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근根이란 인식을 야기시키는 능력으로 설정된 일종의 가설이지, 객관적 물질 존재 즉 색법色法으로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능히 식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시설된 것이지 그 존재가 객관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현량 대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식을 산출하는 가능 근거 또는 잠재적 능력이란 의미로 근을 시설한 것이다. 따라서『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에서는 오근을 종자種子로 규정하고『관소연론觀所緣論 』에서는 오근을 공능功能이라고 규정한다. 이를 이어『성유식론』에서는, 오근을 종자나 공능으로 설명하는 것은 모두 오근이 식을 떠나 실재하는 색이라는 생각을 논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종자種子와 공능功能을 오근五根으로 명한다고 설한 것은, 식識을 떠나 실제로 색근色根이 존재함 을(존재한다는 생각을) 논파하기 위한 것이다. 45)
다시 말해 외적인 시각 내지 촉각 대상으로서의 감각 세계와 그런 감각을 일으킨다고 생각되는 안ㆍ이ㆍ비ㆍ설ㆍ신 등의 감각 기관으로서의 신체는 모두 감각이라는 단일한 현상인 인식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 그 인식을 떠나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감각의 근과 경에 대해 유식무경이 성립한다. 46)
현량으로서의 감각에 머물러 있는 한 어쩌면 우리는 유식무경의 자각속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량으로서의 전오식의 차원에서는 유식의 말대로 누구나 식을 일으키는 근이 식 밖에 따로 존재한다는 비량적比量的 분별, 또는 식의 대상으로서의 경이 식 너머에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망령된 분별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굳이 자신의 신체를 마음과 분리된 물질로 여기지도 않고, 또 감각 너머에 감각을 야기 시키는 물질적 세계 자체가 실재한다는 방식으로 감각된 세계와 그 근거로서의 세계 자체를 이원화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물질과 정신의 분리, 근과 경의 실체화, 주관과 객관으로의 이원화 등, 이와 같은 망령된 분별은 어디에서 왜 발생하는 것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각을 넘어서는 우리의 분별적 사유 영역을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한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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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명의 실유성 비판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유식무경’의 무경無境이 완전히 밝혀지기 위해서는 앞 장에서 논의된 감각 대상으로 서의 물질적 대상뿐 아니라 사유 대상에 해당하는 정신적ㆍ관념적 대상 역시 식을 떠난 객관적 실유가 아니라는 사실이 논의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ㆍ관념적 대상을 유식에서는 색色과 대비하여 명名이라 칭하는데, 이 장에서는 그 보편적 관념 존재인 명의 실유성에 대한 유식의 비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앞 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먼저 보편적 의미체로서의 명구문신名句文身이 독립적으로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유부의 관점을 살펴본 후, 그에 관한 유식의 비판을 논할 것이다.
유식에 따르면 의미는 말을 통해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보편자가 따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개념적 분별은 모두 허망분별이 되며, 언어의 의미는 그에 상응하는 지시체가 실재하지 않기에 일차적으로 비유적일 뿐이다. 이와 같은 관념적 존재인 명에 대한 유식의 관점을 살펴봄으로써 물질적 대상뿐만 아니라 관념적 대상 역시 식 바깥의 객관 실재가 아님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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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부의 명구문신실재론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우리의 일상적 관점에 따르면 개체적 존재는 물질적 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개체를 칭하는 이름은 일반 명사로 되어 있다. 현존하는 것들은 모두 개체적이고 구체적인 것들로서, 여기 또는 저기에 이것 또는 저것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지금 여기 눈앞의 이 소(牛)든지, 아니면 저기의 저 소든지. 그에 반해 우리가 그 개별자들을 인식하고 판단할 때, 또는 이렇게 저렇게 칭하거나 서술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몇몇 고유 명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일 뿐이다. 예를 들어 구체적 개체를 지시하면서 ‘이것은 소이다’또는‘이 소는 황색이다’라고 판단할 때, 그 명제에 사용된‘소’또는‘황색’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구체적이고 개체적이지 않은 일반 개념이다. 이 개념은 모든 소 일반, 또는 모든 황색 일반에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 명사로서의 언어에 상응하는 보편이 과연 실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여러 개체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보편이 개체적 사물의 보편적 본질로서 과연 존재하는가? 예를 들어‘이것은 소이다’또는‘저것은 소이다’를 말할 때, 이것과 저것을‘소’라는 하나의 단어로 칭할 수 있게 해 주는 소의 본질 즉 우성牛性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1) ‘이 소는 황색이다’라는 명제가 참이 되는 것은 그 소 안에 황색이라는 일반적 특징이 그 소의 속성으로서 들어 있기 때문인가? 우리의 개념은 그에 상응하는 보편적 실재를 지시하고 있는가?
만일 보편이 실재한다면 우리의 개념적인 분별적 인식은 단순한 허망 분별이 아닌 참된 인식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나 만일 개념에 상응하는 보편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개념적 분별은 객관적 기준을 결한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분별이 되며, 그러한 보편적 개념으로 표현되는 인식은 모두 허망성을 벗어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이 일반 명사를 명名이라 하고, 개념들 간의 연관에서 성립하는 명제를 구句라고 한다. 이렇게해서 불교에서는 우리의 언어적 표현에 상응하는 보편적 관념이 과연 실재 하는가 아닌가에 관한 논의를 명구문신名句文身 논의라 칭하는데,『구사론俱舍論』에서는 명구문名句文 각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명名은 상想을 일으킴을 말한다. 예를 들어 색ㆍ성ㆍ향ㆍ미 등의 상이다. 구句는 문장(章)을 말하 며, 그 뜻을 나타냄(能詮)이 완전하게 된다. 예를 들어‘제행무상諸行無常’등의 문장이다.……문 文은 낱자(字)을 말한다. 2)
명名은 이름을 뜻하며, 이름은 우리에게 그 지칭된 것에 대한 심상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색깔’,‘소리’등의 이름이 그것이다. 일반 명사 또는 개념이 이에 해당한다. 구句는 하나의 명사가 아니라 명사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문장을 말한다.‘일체 존재는 무상하다’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개념이 결합되어 문장을 이룸으로써 말하는 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그 뜻이 완전하게 규정된다. 그냥 하나의 개념만으로는 무엇을 뜻하는 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문文은 명이나 구를 이루는 낱자를 의미한다. 표음 문자인 산스크리트어의 경우 각각의 음절(자음+모음)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명구문을 총괄하여 명이라는 한 마디로 일컫기도 하는데, 이 경우의 명은 물질로서의 색色에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관념적인 것 일반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리나 문자로서의 말(語)에 있어서 그 말이 나타내는 의미(義) 또는 관념이 과연 말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실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말이 지시하는 보편적 관념이 실재한다고 보면 말이란 단지 이미 실재하고 있는 관념의 의미를 전달해 주는 매개적 역할만을 할 뿐이다. 이 경우 의미는 말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지 말에 의해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말이 지시하는 관념 또는 의미가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나 문자로서의 말에 의해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라면, 말의 역할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의미를 창출해 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보편이 실재하는가 아닌가의 형이상학적 문제는 말의 기능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미론적 문제와 연결된다.
인도에서는 불교 이전에 이미 정통 철학에서 이상과 같은 두 가지 언어관이 논의되고 있었다. 의미는 그 자체로서 영원한 독립적 실체이며 단지 말에 의해 드러날 뿐이라는 전자의 관점은 의미현현론意味顯現論이라고 불리고, 의미는 무상한 말에 의해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라는 후자의 관점은 의미생기론意味生起論이라고 불린다. 3) 이 둘을 『구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명名이 어떻게 해서 말(語)에 의해 표현될 수 있는가? 말에 의해서 현현되는 것이거나, 말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다. 4)
명구문에 관해서는 경량부적 관점에서 유부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씌어진 『구사론』에 따르면, 유부에서는 말(語)과 명名을 서로 구분하고 있으며 명은 말을 통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독립적 실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는 말을 형성하는 소리와 무관하게 이미 독립적 의미체가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의미현현론적 입장이다. 물질적 색과는 다른 차원의 관념적 보편을 객관적 실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의 말은 단지 그러한 보편적 의미를 드러내고 전달해 줄 뿐이다.
말은 소리이다. (그런데) 단지 소리가 의미(義)를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미를 이해시키는 것인가? 말이 이름(名)을 표현하고 이름이 능히 의미를 현현하므로 그 의미를 이해시킬 수 있다. 5)
그렇다면 이 보편 또는 의미로서의 명名은 말을 통해 과연 어떤 방식으로 현현되는 것인가? 말 자체와 구분하여 말이 현현하는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 유부는 이를‘소리’와 소리가 담고 있는‘음운굴곡音韻屈曲’의 구분을 통해 설명한다. 우리가 색법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말은 단순한 소리이다. 반면 그 소리로서의 말을 매개로 해서 현현된다고 생각되는 보편으로서의 의미체는 그 소리 안에 드러나는 음운굴곡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피아노의 소리와 그 피아노 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월광곡 기본 악장의 화음을 구분할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화음이 피아노 소리로도 바이올린 소리로도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은 화음 자체와 그것을 전달하는 소리는 구분된다는 말이다. 말의 의미를 담고 있는 하나의 동일한 음운굴곡이 여자 목소리로도 남자 목소리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말소리와 음운굴곡 자체는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런 근거에서 유부는 입에서 나오는 말소리와 그 소리에 의미를 실어 주는 음운굴곡을 구분한다.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말소리는 가시적 현상일 뿐이지만, 그 매개체를 통해 현현되는 의미 자체는 보편적 실재로서 말소리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6)
소리상의 음운굴곡이 곧 명구문名句文이며, 이는 소리와 달리 실유實有이다. 7)
이처럼 소리나 문자로서의 말과 구분하여 그 말의 의미체인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보편적 명名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의미 자체 또는 보편은 말이 가지는 글자나 소리의 영역, 즉 안식眼識이나 이식耳識의 대상인 색경色境이나 성경聲境으로서의 색법色法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명이 말하는 자 개인 또는 공공의 심리적 영역, 즉 심법心法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색에도 심에도 속하지 않은 채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법法을 유부에서는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으로 분류한다. 명구문은 바로 불상응행법에 속하는 것이다. 이처럼 유부는 하나의 이름 아래 불릴 수 있는 다수의 개체적인 물질적ㆍ심리적 현상과는 구분하여 그 이름 자체가 나타내는 의미를 일종의 보편적 실재로 간주하며, 그 실유성을 인정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그러한 의미체에 입각함으로써 우리가 내는 소리가 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이 물리적 실재도 심리적 실재도 아니면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이런 실재를 우리는 논리적 실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논리적 실재로서의 보편 또는 의미란 현상 사물들이 따라야 하는 보편적 질서를 뜻한다. 다시 말해 물리적 요소들인 극미들이 화합 또는 화집하여 개별 사물이 되고 그 사물들이 서로 관계하여 현상 전체를 구성하게 될 때, 보편 또는 의미는 그 요소들 상호간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형식적 질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8) 명구문신은 바로 그러한 형식적 질서를 가장 일반적 방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 중 명신名身이 개별적 현상 사물에 부여되는‘이름’에 상응하는 개념적 실재라고 한다면, 구신句身은 그러한 현상 사물들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문장’에 상응하는 명제적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유부는 이런 명신이나 구신이 그 이름이나 문장을 인식하는 우리의 식을 떠나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본 것이다.
2. 명구문신실유성에 대한 유식의 비판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유부有部는 보편적 실재로서의 명구문신이 색이나 심을 떠나 독립적으로 실재한다고 보았다. 즉 성경聲境으로서의 색법에 속하는 소리와 그 소리를 통해 나타나는 음운굴곡을 구분하여, 말소리에 담긴 음운굴곡은 곧 의미를 드러내는 명구문으로서 현상적 소리와는 다른 차원의 실유라고 본 것이다. 이는 소리의 음운굴곡이 나타내는 보편적 의미는 말과 독립적으로 실재하며 말은 단지 그 의미를 드러낼 뿐이라는 의미현현론의 입장이다.
이에 반해 유식唯識에서는 말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의미를 전달해 주는 매개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에 의해 비로소 의미가 생성된다는 의미생기론의 관점을 취한다. 한마디로 말해 객관적 실유로서의 보편 또는 보편적 의미체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에 따르면 말소리와 그 말을 통해 생겨난 의미를 담고 있는 음운굴곡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소리의 음운굴곡이 곧 뜻을 나타내는 것(能詮)이되, 그 뜻은 소리를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말이 비로소 의미를 생성시키는 것이기에, 말을 떠난 독립적 의미체 또는 보편 실체로서의 명을 따로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리가 능히 명구문名句文을 생겨나게 한다. 소리에는 반드시 음운의 굴곡이 있으며 이 음운굴곡이 능히 의미를 전달하기에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명名 등이 따로 존재한다고 하겠는가? 9)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소리상의 음운굴곡이 이미 존재하는 명구문신의 의미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비로소 생기게 하는 것이라면, 모든 음운굴곡이 의미체를 생기게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즉 악기 소리도 별도의 의미를 생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일상적으로 인간의 말은 고유한 의미를 가지지만 악기 소리가 그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악기 소리가 마음에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말과 같이 일정한 의미를 전달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악기 소리는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인간 말소리만이 의미를 전달한다는 것은, 결국 소리 자체가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는 이미 그 자체로 존재하고 단지 말소리와 같은 특정한 소리만이 그 의미를 전달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즉 의미를 나타내는 능전의 역할을 하는 것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소리와 구분되는 명구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말소리와 음악 소리가 다르다는 사실로부터 유식은 유부와는 정반대의 다른 결론을 이끌어 낸다. 만일 말소리에 의해 의미가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말소리가 단지 전달하는 것일 뿐이라면, 왜 말소리 또는 그 말소리의 음운굴곡만이 그런 의미를 전달하고 그 이외의 소리 즉 악기 소리나 바람 소리 등은 그것을 전달하지 못하겠는가? 만일 유부가 주장하듯 말소리 자체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면 말소리 자체는 악기소리나 바람 소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악기 소리 또는 바람 소리가 전하지 못하는 의미를 말소리인들 어떻게 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말소리는 악기 소리나 바람 소리와는 달리 의미를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소리상의 음운굴곡 자체가 곧 의미를 나타내는 능전能詮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말소리는 악기 소리나 바람 소리와 달리 그 음운굴곡을 통해 의미나 보편으로서의 명 자체를 생성시키기 때문이다.
만일 소리의 음운굴곡이 현악기나 관악기의 소리처럼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면, 전자도 후자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명名 등을 생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10)
이처럼 유식은 오직 말소리만이 악기나 바람 소리와 달리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말소리 자체가 음운굴곡을 통해 명을 생성시킨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말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말 자체가 뜻을 나타내는 능전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이에 대해 유식은 그것은 천하의 누구나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증명이 필요 없는 상식이라고 말한다. 말소리가 악기 소리나 바람 소리와는 달리 일정한 의미를 전해 주는 소리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이미 말소리 또는 그 말소리에 담긴 음운굴곡이 바로 그러한 의미를 생성시키고 그 생성된 의미를 전달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문〕능전能詮이 곧 언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실하게 아는가?
〔답〕반대로 언어와 별도로 능전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언어가 능전과 다를 바 없다는 것 은 사람도 하늘도 공히 알고 있다. 능전이 언어와는 구분된다는 집착은 어리석은 자나 가지 는 것이다. 11)
의미를 전해 주는 것은 오직 말소리뿐이다. 말소리는 그 말소리 너머에 따로 존재하는 보편적 의미체로서의 명구문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소리의 음운굴곡을 통해 명구문신의 의미를 비로소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구문신은 말소리 너머에 논리적 으미 또는 보편자로서 따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말소리에 의해 명구문신이 생성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말이 나타내는 의미 또는 보편은 실유가 아니라 말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며, 그런 이유에서 가유假有라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 또는 보편이 실유가 아니기에 그것을 뜻하는 우리의 언어 즉 명은 가명假名이지 실명實名이 아니다.
말소리의 분위차별에 의해 가假로서 명구문名句文을 건립한다. 12)
말이 나타내는 의미는 그 말을 사용하는 자들이 함께 그 의미의 범위를 한정함으로써 규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동적 설립(共立)의 결과로서 그 의미가 정해지는 것이므로 말의 의미는 그 말을 떠나 객관적으로 실재 하는 것이 아니다. 말에 의해 시설된 것이기에 실實이 아니라 가假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미의 경계 설정 또는 개념 규정, 한마디로 말해 보편의 의미 설정은 어떤 방식으로 행해지는 것인가? 이 문제는 보편을 인식하는 식 자체의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밝혀 나가기로 한다.
1) 사유 대상으로서의 법경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보편적 의미 또는 보편적 명제를 인식하는 식은 어떤 식인가? 보편 아닌 개체, 관념 아닌 물질로서의 색을 인식하는 것은 감각이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은 오감의 감각으로써만 완성되지는 않는다. 감각이란 눈앞에 한송이 장미꽃이 있을 때 단순히 그 색깔이나 향기, 촉감 등을 느끼는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빨간색의 감각이란 그저 빨간색을 느끼는 상태일 뿐이다. 감각된 그 빨간색이 내 마음의 빨간색인지 내 눈의 빨간색인지 눈앞에 있는 장미의 빨간색인지 분별되지 않은 상태이다. 향기의 감각 역시 그저 향기를 느끼는 상태일 뿐 그 감각된 향기가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 나의 향기인지 공기의 향기인지 꽃의 향기인지 분별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무엇인가를 인식한다고 할 때, 우리는 단지 그런 무분별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장미를 보는 순간 이미 감각된 빨간색을 장미의 빨간색으로 의식하고 감각된 향기를 장미의 향기로 안다. 장미의 꽃잎을 만지며 느껴지는 부드러움을 곧바로 장미 꽃잎의 부드러움으로 인식하지 자기 심성의 부드러움으로 착각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식이 주객무분별 감각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주객 또는 안팎의 분별에 따라 대상에 대한 인식으로 성립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감각과 더불어 식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前五識)이후의 의意가 분별하여 망령되게 외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13)
이와 같이 감각과 구분되는 분별적 인식을 불교에서는 다섯 가지 감각적 인식 다음의 식이라는 의미에서 제6식 또는 의식意識이라고 부른다. 안식眼識이 안근眼根에 의거하여 행해지는 인식이라는 의미에서 그 근을 따라 안식이라 불리듯이, 의식이라는 명칭은 그 인식의 소의근所依根으로 생각되는 의의를 따라 붙여진 것이다.
오직 의意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의식意識이라 이름한다. 14)
즉 인간의 심성, 의지, 뜻 등을 의미하는 의意 15)에 의거해서 분별적 의식 작용이 행해진다고 본 것이다. 이 의식의 작용이 곧 분별分別이다. 그렇다면 무분별적 감각과 분별적 의식은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는가? 빨간색의 감각이 먼저 있고 나서 분별 의식이 있는가? 아니면 감각 자체가 발생할 때 동시에 의식의 분별이 행해지는가? 유식에서는 의식이 전오식의 대상과 동일한 대상을 인식할 경우 전오식과 의식이 동시에 발생한다고 본다.
전오식의 대상과 동일한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을 말 그대로 동연의식同緣意識이라 부르는데, 이는 전오식과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의식 즉 오구의식五俱意識으로 분류된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빨간색의 감각이 발생하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그 빨간색을 내 밖의 사물의 빨간색으로 의식한다는 뜻이다. 즉 주객미분의 감각과 주객분별의 의식이 논리적으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실제 인식 과정에 있어서는 우리의 감각 자체가 이미 분별적 의식의 틀에 의해 규정되고 그 틀에 따라 행해진다는 말이다. 감각된 빨간색은 분별적으로 의식된 빨간색과 하나이다. 그러므로 오구동연의식五俱同緣意識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오식의 대상과 의식의 대상은 항상 동일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실은 전오식에서 감각되지 않은 대상, 즉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은 대상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의식의 고유한 분별 작용의 의미가 드러난다. 16) 전오식의 대상이 아닌 다른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을 부동연의식不同緣意識이라 한다. 그렇다면 의식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어떤 것을 과연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무슨 별난 것을 생각해 내는 특별한 인식이 아니다. 한 예로 빨간 장미꽃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장미를 볼 때 우리는 단지 무수한 감각을 잡다하게 의식하는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근에 따라 주어진 감각 내용들, 예를 들어 눈에 보여진 색깔, 코에 맡아진 향기, 손에 느껴진 부드러움 등은 우리의 의식 안에 각각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한 송이 장미꽃에 속하는 것으로, 즉 그 장미의 속성들로 인식된다. 각각의 감각 내용들이 서로 무관하게 분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대상의 속성들로서 종합되는 것이다. 감각된 빨간색은 그 장미의 빨간색으로, 감각된 향기는 그 장미의 향기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그 각각의 감각 내용들이 종합되어‘어떤 것’에 속하는 것으로 의식될 때, 그‘어떤 것’이라는 사물 자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감각이 우리에게 있는가? 그것은 특정 감각 기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가?
잡다한 감각 내용들을 그 자신의 속성으로 가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물 자체는 오감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오경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 자체는 색깔도 향기도 부드러움도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은 그런 것들을 성질로서 가지는 것, 즉 색깔과 향기와 부드러움을 가지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감각 내용으로 주어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감각할 때마다 동시적으로 인식된다. 즉 우리는 빨간색을 어떤 것의 빨간색으로 인식하지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빨간색 자체로 인식하는 일이 없다. 이처럼 전오식과 동시에 일어나면서도 전오식의 대상이 아닌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을 오구부동연의식五俱不同緣意識이라고 한다. 17)
감각되지 않은 채 의식의 대상이 되는 어떤 것, 즉 전오식의 소연경所緣境과 구분되는 의식의 소연경을 불교에서는 법경法境이라 부른다. 18)
법경은 색법에 속하는 색ㆍ성ㆍ향ㆍ미ㆍ촉 이외의, 인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대상인 법경은 곧 물질적 색色과 구분되는 관념적 존재로서의 명名이다. 그것은 감각 내용들을 그 어떤 것에 속하는 것으로서 종합하는 것이지만, 그 자체는 감각 대상이 아니라 의식 대상이며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사유 대상 즉 관념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관념적 법경은 의식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실재 하는 실유인가, 아니면 의식을 떠나서는 객관적 실재성을 갖지 않는 가假일 뿐인가? 앞서 살펴본 대로 유식은 개체적인 물질적 색법뿐 아니라 보편적 관념인 명구문신의 객관적 실유성도 부정하였다. 이는 곧 의식의 대상인 법경의 객관적 실유성을 부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법경은 그것을 인식하는 의식을 떠나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분별을 통해 시설된 것일 뿐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의식 대상인 법경의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法은 ……가假로서 건립된 것이지 실유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19)
이처럼 사유 대상인 법경이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식의 분별 작용에 의해 시설된 가假이므로, 그러한 법경을 헤아리는 사유 즉 의식의 분별은 허망분별일 수밖에 없다.
2) 개념적 허망분별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전오식의 대상인‘감각 대상’과 제6 의식의 대상인‘사유대상’, 즉 색과 명은 정확히 어떻게 구분되는가?
감각에 주어지는 사물의 속성은 감각의 순간에 개별적으로 포착되는 표상이다. 그처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표상을 그 각각의 자체 상이라는 의미에서 자상自相(svalaksana)이라고 한다. 직접적인 인식인 현량의 대상이 곧 자상이다. 반면 자상들을 비교 분석하고 추상화하여 개념으로 얻게 되는 표상은 더 이상 자상이 아니다.
현량으로 감각된 빨간색은 자상이지만, 빨간 장미와 빨간 노트와 빨간 옷을 보고서 그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추출해 낸 빨간색은 비교와 추상의 사유 과정을 통해 얻어 낸 일반적 표상 또는 개념이다. 개념으로서의 빨간색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단지 그렇게 비교하고 추상하는 우리의 사유 속에, 우리의 분별적 의식 속에 존재할 뿐이다. 이런저런 속성들을 가지는 속성 담지자로서의 사물 역시 그에 상응하는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잡다한 감각을 종합하여 인식하는 우리의 사유 내지 분별적 의식 속에 있다. 즉 전오식을 통해 얻어지는 현량의 감각 내용들이 의식을 통해 안팎으로 분리되면서 의식 자체가 갖춘 개념에 따라 사물의 이런저런 현상으로, 실체의 이런저런 속성으로 종합되고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성 담지자로서의 실체, 의식 대상으로서의 법은 의식의 분별 구조에 따른 개념적 구성물일 뿐이다. 이 개념적 구성물은 추상적이므로 일반성을 지닌다. 이와 같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상을 공상共相(samanyalaksana)이라고 한다. 20)
부동연의식에서의 의식 대상인 실체란 바로 이처럼 개념적으로 구성된 사유의 산물이다. 현량에서 자상으로 주어지지 않고 의식 내에서 일반화하여 떠올리는 추상적 표상은 모두 개념적 가상물이다. 감각 대상의 자상이 아니라 개념적 산물인 공상인 것이다. 이러한 추상화, 일반화, 개념화를 유식에서는 분별(vikkalpa)이라고 한다. 21)
의식 안에서 행해지는‘분별’은 과연 무엇에 따른 분별인가? 어떤 방식으로 실체가 상정되는 것인가? 빨간색과 둥근 꽃잎 모양과 향기와 부드러움이 느껴지면 그런 속성들을 장미의 속성으로 의식하게 되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존재를 인식하는 우리의 의식 자체가 실체와 속성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 구조는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의 구조, 곧 언어 구조에 의해 규정된다. 속성을 가지는 실체, 즉‘어떤 것’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면 우리는 빨간색을 어떤 것의 빨간색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라면 그것을 꽃으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며,‘장미꽃’이라는 개념이 없는 자는 그 꽃을 장미꽃으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은 우리가 실재라고 생각하는 사물 자체, 의식의 차원에서 분별된 사물 자체라는 것이 사실은 바로 의식 자신의 분별에 의해 설정 된 것, 정확히 말해 언어적 개념에 의해 시설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몀구문신名句文身이다. 현량으로 아는 것이 자상이라면 명名으로써 아는 것은 자상이 아닌 추상화된 공상이다.
제법의 자상自相은 명名 등으로써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현량現量으로써 증득證得할 수 있을 뿐이다. 명은 오직 공상共相만을 알려준다. 22)
개별 속성들을 종합적으로 통합하는 개념이나 이름이 명名에 해당한다면, 그와 같은 개념화를 구조짓는 형식은 바로 언어 체계를 담고 있는 문장으로서의 구句에 해당한다. 바로 이와 같은 개념 및 문장 구조의 언어 체계에 따라 우리의 대상 인식이 완성되는 것이다. 23)
속성들의 담지자로서의 사물 자체, 즉 실체라는 것이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 의식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 의식의 분별 결과일 뿐인가 하는 것은 서양 인식론에서도 중요한 논란 중의 하나였다. 실체라는 것이 객관적 실재라고 단정할 수 있을 만큼의 순수 현량 대상으로서의 감각 내용을 찾을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근세의 서양 철학자들은 전통 형이상학에서 현상 설명의 근거로 삼아 온 소위 실체라는 것이 실제로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인식 주관이 허구적으로 설정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곧 객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주관적 허구로 상대화하는 회의주의로의 전환이다. 이러한 회의주의를 거침으로써 비로소 경험 세계란 인간의 보편적인 개념들에 의해 구조지워진 현상일 뿐이라 것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24)
외부 세계에 실재하는 자기동일적 실체로 간주되는 것들이 사실은 객관적 사물 자체가 아니라 의식의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불교 내부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강조되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유식 이전에 이를 가장 철저하게 논증한 학파는 바로 경량부이다.
석가의 기본 가르침인 사법인四法印중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철저하게 찰나생멸로서 이해한 경량부에 따르면, 찰나생멸적인 현상의 변화를 넘어서서 그들 변화를 관통하여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 사물의 동일성(samtana)이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동일성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의식 안에서 우리의 언어에 따라 설정되는 개념적 동일성일뿐이다. 25)
빨간색 장미 꽃잎이 빨간색으로 피어 있다가 시들어 검게 되었을 때 이전의 빨간 꽃잎과 이후의 시든 검은 꽃잎은 서로 다른 꽃잎이다. 그 둘 사이에 자기동일성은 없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색이 달라지거나 형태가 변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각기 다른 찰나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음 찰나의 것은 앞의 찰나의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타는 촛불에 있어 한 찰나의 불꽃이 다음 찰나의 불꽃과 서로 다른 불꽃인 것과 같고, 같은 이름을 두 번 소리내어 부를 때 앞의 소리가 그 다음의 소리와 다른 소리인 것과 같다. 물론 장미의 경우 또는 불꽃의 경우 다음 찰나의 것이 앞 찰나의 것과 다른 것이라고 해서 서로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다음 찰나의 것은 앞 찰나의 것이 인이 되어 그 과로서 있게 된 것이므로 그 둘은 인과의 관계, 즉 연기緣起관계 속에 있다. 그러나 연기로 연결되고 인과로 관계지워지기 위해서라도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어야 한다.
존재론적으로 그렇게 서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제의 장미와 오늘의 장미를 동일한 하나의 장미로 보고, 한 촛불이 다 타오르도록 그 불꽃을 동일한 하나의 불꽃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자기동일적 무엇인가가 변화하는 현상 배후에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찰나생멸하는 현상의 배후에 상정되는 사물의 자기동일성이란 단지 우리의 언어 구조에 따른 개념적 동일성일 뿐이다.
유식 역시 이와 같은 경량부적 통찰에 따라 의식에 의해 사유되고 집착 되는 사물의 자기동일성은 의식 자체에 의해 분별되고 설정된 개념적 동일성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념적 분별은 실유의 보편이 상응하지 않는 허망분별일 뿐이다. 개념에 상응하는 보편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개념 또한 허망분별의 개념인 것이다. 즉 감각적 현량 안에서 구체적 자상自相으로 주어지는 개별적 존재를 넘어서서 일반화된 개념으로 표현 되는 보편이란, 단지 우리들 식의 허망분별의 결과일 뿐이다. 그 개념에 상응하는 객관 실재라는 것은 개체로서든 보편으로서든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념 또는 보편은 실實이 아니라 가假이다. 명구문신은 자립적 실재가 아니다. 심법과 색법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독립적 불상응행법이 아니다. 보편적 의미 그 자체는 실재하지 않는다. 개념은 존재하는 어떤 것, 즉 논리적 의미체 또는 보편적 실재를 칭하는 것이 아니다.
‘소’라는 이름에 상응하는 소의 보편적 실재,‘황색’이라는 이름에 상응하는 황색의 보편적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소다’또는‘이것은 황색이다’라는 판단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보편자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일반 명사로 구성된 언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언어는 어떠한 방식으로 그 의미를 얻게 되는가? 26)
3) 비유적 언어관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명구문신은 보편적인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단지 사유 분별에 따라 가假로서 시설된 것일 뿐이다. 즉 말소리의 분위차별에 의해 가假로서 건립된 것이다. 따라서 명구문신에 따라 분별되는 일체의 현상 역시 모두 가假로서 시설된 것이다. 그렇기에『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의 첫 게송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가假로서 아我와 법法을 설한다. 27)
여기서 실實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된 가假는 그 어원을 보면‘우파카라(upacara)’로서 비유, 메타포를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유식의 비유적 언어관을 읽어 낼 수 있다. 즉 우리의 언어인 일반 개념에 상응하는 보편 실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런 개념으로 구성된 우리의 언어는 특정 사태를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직설적 표현이 아니라 단지 간적적 방식으로 의미를 드러내는 비유적 표현일 뿐이다. 언어가 표현하는 것은 비유이다. 언어로 표현된 존재 역시 언어를 따라 시설된 것, 비유일 뿐이다. 다시말해 실재와 개념, 존재와 사유 간의 일대일 대응이 부정되므로, 언어는 존재하는 실재 자체를 직접적으로 지시하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뜻에서 모든 언어적 표현은 곧 일종의 비유가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상적으로‘이 사람은 한국인이다’라는 문장과‘이 사람은 소다’라는 문장을 구분해서 이해한다. 전자는 직설적 표현으로서 사실과 무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이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특정성질은 지녔지만 소의 성질은 지니지 않았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식에 따르면 한국인이라는 어떤 특정한 성질이 보편자로서 존재하고 각 개체가 그것을 지니고 있기에 한국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으로 분류된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동일 특징으로 분류할 수 있게끔 하는 공통된 성질, 즉‘한국인’이라는 보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어로써 규정한 것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과 무관하게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적 틀에 따라 이 사람 또는 저 사람을 분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이런저런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불리듯이, 이 사람도 이런저런 사람들과 이런저런 점에서 유사하기에 한국인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는 이 사람이 소라고 불리는 이런저런 존재들과 이러저런 특징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소라고 불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이 사람은 소다’라는 말이‘이 사람은 소라고 불리는 이런저런 존재와 유사하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적 표현이라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말은 그런 의미에서 다 비유적일 수밖에 없다.‘이 사람은 한국인이다’라는 말은‘이 사람은 한국인이라 불리는 이런저런 존재와 유사하다’라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언어적 표현은 곧 비유적 표현이다. 개념에 상응하는 보편이 실재하지 않기에 모든 개념적 서술은 일파적으로 비유적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개념에 상응하는 실재가 없다면, 즉 말과 실재가 일대일 대응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음성 차별에 의한 개념 규정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보편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말이 지시하는 바가 없다면, 그 의미가 어떻게 특정 의미로 제한되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는 불교의 의미 규정 이론이 바로 개념의 아포아(Apoha)론이다. 아포아론에 따르면 한 개념의 의미는 그 자체만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 상응하는 색관적 실재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개념에 상응하는 하나의 객관적 실재가 존재하지 않기에, 한 개념의 의미는 그에 상응하는 하나의 사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개념을 포함한 개념들 관계 안에서, 즉 또 다른 개념들을 통해서만 규정될 수있다. 다시 말해 한 개념의 의미는 오직 그것 아닌 것을 배제함으로써만, 즉 그것의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이는 곧 한 개념의 의미는 오직 다른 개념과의 차별성을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의 의미는 그 개념 자체만으로, 또는 그에 상응하는 하나의 단독적 사태만으로 설명되거나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빨간색이 아닌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서, 즉 노란색과 파란색 등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한 개념의 의미는 다른 개념과의 연관 안에서 그 차별성을 통해 그것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드러날 뿐이지 그 자체로서 긍정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이 개념의 아포아론의 핵심이다. 28)
이러한 아포아론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한 개념의 의미는 그 자체만에 의해 단독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개념 전체의 연관 관계 안에서 규정된다는 것, 즉 전체적 개념의 틀 안에서 세부적으로 특정 의미가 규정된다는 것이다. 한 개념의 의미는 개념 전체와의 연관 안에서 그것 아닌 것의 부정을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이라면 결국 모든 개념의 의미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 개념의 부정을 생각할 수 없는 절대적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삶이 아닌 죽음을 통해서, 낙樂의 의미는 그 반대인 고苦를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개념이 개념으로 이어질 뿐이며, 그 개념이 지칭하는 사태, 또는 개념과 일대일 대응하는 사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일체를 가假로서 설명하는 유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가假는 이미 실實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일체를 가假로써 설명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적이지 않은가? 실재론적 관점의 승론勝論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반론을 제기한다. 승론에 따르면 가假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實이 전제되어야 한다. 가假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승론이 제시하는 것을 유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만약 식識을 떠나서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이 없다면 가假도 역시 없어야 한다. 가假는 반드시 실물 (眞事)과 가假의 것(似事)과 공통의 속성(共法)에 의지하여 건립되기 때문이다.29)
승론이 제시하는 가假의 성립 조건은 진사眞事와 사사似事와 공법共法이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불과 같다’라는 비유적 표현은‘진짜 불’과‘불같은 사람’과‘맹렬함이나 붉음 등의 속성’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성립한다. 이 불이나 저 불 등의 진짜 불이 진사이고, 그 불에 비유된 불같은 사람이 사사이다. 그리고 맹렬함이나 붉음은‘진짜 불’과‘비유된 사람’사이에 공통적으로 속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공법共法이다. 실유를 주장하는 승론의 관점에서 보면 단순히 가假로서 시설된 비유적인 사사에 앞서 실제적인 진사의 존재가 먼저 확립되어야 한다. 가假 자체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라도 진짜 존재하는 불 즉 진사와 그 불이 간직한 불의 속성 즉 공법共法이 가假 아닌 실實로서 우선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가假가 반드시 진사眞事에 의거하여 건립된다는 것은 바른 논리가 아니다. 진사는 자상自相을 말하 는데, 그것은 개념적 인식(假智)과 개념적 표현(假詮)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지假智와 가전假詮은 자상을 얻지 못하며, 오직 제법의 공상共相에 따라서만 일어날 뿐이다.30)
여기서는 일단 이 불이나 저 불 등의 진사眞事가 감각 대상으로서의 자상自相인 데 비해 가지假智와 가전假詮 등의 가假는 개념적 인식으로서 공상共相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 그리고 공상이 자상에 의거해서 건립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공상을 따르는 가지와 가전은 자상으로서의 진眞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곧 앞서 논의한 대로 의식 차원의 개념적 분별이 전오식의 현량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개념적 사유에 상응하는 별도의 현량적 직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추상적 관념을 자상으로 인식하는 것도 아니다.
가지假智와 가전假詮을 떠나 자상自相을 시설할 수 있는 별도의 방편이 있어 가假의 소의로 삼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31)
결국 공상共相을 나타내는 가假는 그 어떤 자상自相도 의지처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개념적 인식이나 개념을 떠나서 존재하는, 개념에 상응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념은 무엇에 의거하여 설정되는 것인가? 32)
개념에 상응하는 실체가 없이 개념들이 형성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는 말의 소리를 통해 그 개념들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소리의 차별성 즉 소리의 음운굴곡을 따라 차별적 개념들의 의미가 규정되는 것이지, 그 말소리를 떠나 개념 자체의 의미를 성립시키는 실체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진眞또는 실實이 따로 없이 오직 소리를 통해 가假에서 가假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왜 굳이 가假 또는 사似라는 말을 하는 것인가?
실아實我ㆍ실법實法의 허망된 집착을 없애고 단지 식의 전변에 의거할 뿐임을 알게 하기 위해 가假 와 사似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33)
가假는 실재하는 실實과 대립적으로 사용된 개념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 의해 잘못 집착된 실과 대립적으로 사용된 개념일 뿐이다. 즉 가假 너머에 실實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34) 이와 같이 유식에 있어서는 개체이든 보편이든 색이든 명이든 모두 그것을 인식하는 식 너머에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유가 아니다. 실유적 존재가 아니기에 가假라고 한다. 식의 경으로서의 명과 색이 식을 떠나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 곧‘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명과 색을 인식하는 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제 3장 식의 심층 구조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앞에서는 두 장에 걸쳐 명색의 경이 식을 떠난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단지 식의 경일 뿐이라는 것을 밝혀 보았다. 이제 이 장에서는 그러한 경을 대상으로 삼는 식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경과의 관계에서 식은 두 가지 의미로 구분될 수 있는데, 하나는 객관적 경에 대한 주관으로서의 식이며 다른 하나는 현상적인 주객 구분에 앞서 객관적 경 자체를 산출해 내는 식이다. 전자를 소연경에 대한 능연식能緣識이라 한다면 후자는 경 자체를 산출해 내는 능변식能變識이라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사분설四分說을 통해 그와 같은 식의 구조를 밝히고, 유식에서의 세 가지 능변식을 의식 표층에서부터 심층으로 분석해 볼 것이다. 세 능변식은 곧 전오식과 제6 의식의‘육식六識’,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인데, 이 각 식의 전변 결과인 견분見分(行相)과 상분相分(所緣)이 무엇인지 밝힌 다음,‘아뢰야식의 변현’과 ‘의식ㆍ말나식의 분별’로 나타나는 식전변의 두 가지 양상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1) 능연과 소연의 견분과 상분
물질로서의 색色에 대한 인식에서든 관념으로서의 명名에 대한 인식에서든 언제나 인식은 그 대상과 함께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인식 대상은 인식되는 한에서만 그 방식대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식을 떠나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객관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식識과 경境은 상호의존성을 보인다.
인식이란 인식 주관이 인식 객관에 대해 무엇인가 알게 되는 활동 또는 그 활동 결과를 뜻한다. 이처럼 인식은 주관과 객관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하게 되는데, 그러한 인식 작용을‘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에서‘연緣’이라 한다. 그리하여 인식하는 주관은‘능히 연하는 것’으로서 능연能緣(alambaka)이 되고, 인식되는 객관은‘연해지는 것’으로서 소연所緣(alambana)이 된다. 유식은 인식 주관인 능연을 견분見分(drsti)이라고 하고 인식 객관인 소연을 상분相分(nimitta)이라고 한다.
유루식有漏識 자체가 생할 때에는 언제나 소연所緣ㆍ능연能緣의 상이 나타난다.……소연으로 나타 나는 상을 상분相分이라고 하고, 능연으로 나타나는 상을 견분見分이라고 한다.1)
그러므로 유식에서의 인식이란 능연의 식이 소연의 경을 연하는 활동으로서, 인식 주관인 견분이 인식 객관인 상분을 아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인식 활동을‘헤아림’이라는 의미에서‘량量’이라 하기도 하는데, 능히 헤아리는 능량能量(pramana)은 인식 주관을, 능량에 의해 헤아려지는 소량所量(prameya)은 인식 객관을 의미한다. 인식 활동이란 곧 능량과 소량 사이에서 성립하는‘량’이며, 그런 활동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인식 자체는 헤아림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양과量果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인식하는 주관적 측면이 식의 견분, 인식되는 객관적 측면이 식의 상분이다. 감각에 있어서나 이성적 사유에 있어서나 감각하고 사유하는 주관적 부분은 견분이 되고, 감각되거나 사유되는 객관적 부분 즉 색이나 명은 상분이 된다. 견見은 상相을 보는 것이고 상은 견에 의해 보여진 상이다. 그러므로 견분과 상분은 서로 인이 되고 과가 되는 것으로서, 상분을 떠나 견분이 따로 없고 견분을 떠나 상분이 따로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책상을 인식한다고 하면, 책상을 보는 나는 견분이고 내게 보여진 책상은 상분이다.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이라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보면, 책상을 보는 나를 떠나 책상이 따로 없고 내게 보여진 책상을 떠나 내가 따로 없다. 책상 대신 인식 대상의 총체로서의 세계를 생각하면 우리는 그 말이 의미를 한층 더 적절하게 실감할 수 있다. 즉 세계를 인식하는 나를 떠나 세계가 따로 없고, 나에 의해 인식된 세계를 떠나 내가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견분과 상분이 동시적 인과 관계에 있다고 해서 그 둘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책상을 보는 나와 내게 보여진 책상, 세계를 인식하는 나와 내게 인식된 세계는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다. 견분과 상분은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식을‘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의 관계맺음’으로 설명하는 인식론에서 궁극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가장 핵심적인 물음이 발생한다. 주관이 객관을 인식하는 것, 견분이 상분을 연緣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주관과 객관의 인식적 관계맺음 자체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예를 들어 내가 책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내가 내가 아닌 책상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주관과 객관이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는 것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인식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불붙여진 초의 경우, 타는 초와 타는 불이 동시적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고 해도 초가 불을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불이 초를 인식하는 것도 아니다. 또 나와 세계가 동시적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고 해도 내가 세계를 인식할 뿐이지 세계가 나를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견분과 상분이 서로 마주하여 의지하고 있는 동시적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객관에 대한 주관의 인식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마주 서있는 주관과 객관이 인식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 둘의 표면적 상호인과 관계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보다 심층적인 공통의 근거가 작용하고 있어야만 한다. 견분과 상분은 인식의 주와 객으로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포괄하는 공통의 근거가 작용하고 있기에 둘 사이의 관계맺음이 가능하고, 그 결과로서 인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통의 근거란 과연 무엇인가? 2)
그것은 인식적 관계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므로 인식이 발생하는 바로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인식되는 대상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관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주관과 객관의 인식적 관계맺음의 결과로서의 인식을 가지는 것은 인식주관이므로, 그러한 관계맺음의 근거 또한 주관 안에서 작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식 주관은 인식 객관과 구분되어 대립하는 주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관계맺음의 통합적 근거로서 객관을 아우르는, 즉 주객대립의 지평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주관이 주관이면서 동시에 주객 대립을 넘어 객관을 포괄할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 자체에 주목하는 수밖에 없다. 주관이 객관을 인식한다는 말은 주관이 이미 주관 밖으로 나가 있다는 말이다. 주관 밖으로, 다시말해 주객대립의 지평 너머로 초월해 있다는 말이다. 내가 세계를 인식할 때 그 세계는 곧 나에 의해 인식된 세계인 만큼 나는 이미 밖으로, 세계에로 나아가 있다.3) 주관이 나아가 있는 그 자리, 주관과 객관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그 초월의 자리가 나의 본래 자리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견분과 상분의 대립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그 둘이 분리 대립되기 이전의 주객포괄의 초월적 근거로부터 이분화되어 나타난 결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인식이란 표면적으로 보면 견분이 상분을 연하는 것이지만, 그 내적 근거로부터 보면 그러한 견상이원화 이전의 통합적 근거인 식 자체가 견상으로 이원화되는 활동, 즉 식 자체의 주관과 객관으로의 자기이분화 활동이다. 유식에서의 식의 개념 안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식識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비얍티(vijnapti)는 말 그대로 둘로 나눈다는 의미의‘비’(vi)와 알게 하다는 의미의‘얍티’(jnapti)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4) 인식이란 말 자체가 곧 스스로의 이원화 활동임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견분과 상분은 바로 이러한 식 자체의 이원화에 의해 이분된 결과이다. 5)
그렇다면 이러한 견상 또는 주객을 초월해 있는 식 자체의 이원화 활동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견과 상, 주와 객이 분리되어 있는 지평을 초월해 있으면서, 또 그렇게 구분되는 두 부분으로 스스로 이원화하는 식 자체의 활동은 과연 어떤 활동인가? 유식은 이와 같은 식 자체의 이원화 활동을 변變 또는 전변轉變(parinama)이라고 칭한다. 6)
변變은 식의 본체가 두 부분으로 전轉하는 것을 뜻한다. 7)
주객으로 이원화하는 식 자체와 이분된 두 부분에 대해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서는 호법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식체識體는 자증분自證分이다. 전변하여 상相과 견見의 두 부분이 생한다. 8)
즉 이분되는 식체는 자증분이고, 그렇게 이분화된 주객은 곧 견분과 상분이다. 그렇다면 식체는 어떻게 견상으로 이분되는가? 식이 주객으로 이원화될 때, 그 과정에서 식과 다른 것으로서 시설되는 것이 바로 식의 대상 즉 상분相分이다. 우리가 객관적ㆍ독립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식의 대상 즉 소연경은 실제로는 식 자체의 전변 결과 즉 식소변이라는 것이 유식 식전변설의 요지이다. 그리고 결국 그와 같은 식소변으로서의 대상과 마주한 인식 주관인 능연식으로서의 견분見分 역시 식 자체가 아니라 식이 전변한 결과일 뿐이다.이처럼 주객으로 관계하는 식이 소연경을 연하는 능연식能緣識이라면, 스스로 이원화하여 소연경 자체를 산출해 내는 식은 그와 구분되는 능변식能變識이다. 능연식이 주객 또는 능소의 이원적 대립 구도 속의 한 항이라면, 능변식은 그와 같이 서로 대립하는 능소, 주객을 스스로 산출해 내는 식이다. 이상의 능연식과 능변식의 위상 차이를 간략히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문제는 능연의 식과 구분되는 능변의 식이란 과연 어떤 의미의 식인가 하는 것이다. 주객분리의 지평에서 성립하는 주관적인 능연식과 달리 주객 미분의 식 자체의 활동, 그러면서 주객의 분리된 지평을 스스로 형성하는 능변식의 활동은 과연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2) 능변의 자증분과 증자증분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인식 작용을 이와 같이 견상이분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국 인식상의 견분과 상분, 즉 주관과 객관이 근원적으로 분리된 두 실체가 아니라 그 둘을 포괄하는 식 자체로부터 분화된 결과임을 의미한다. 견상의 이분화에 앞서 그 둘을 포괄하는 그들 공통의 소의所依가 곧 식 자체인데, 이 식 자체를 유식은 식의 자증분自證分이라고 한다.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은 함께 자증自證에 의거해서 일어난다. 9)
상분과 견분의 소의所依가 되는 자체를 사事라고 이름하는데, 이것이 곧 자증분自證分이다. 10)
대상으로 나타나는 상분과 그 대상을 인식하는 주관으로 나타나는 견분은 둘 다 그 공동의 근거로서의 식 자체로부터 이분된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주관과 객관, 능연과 소연이라는 분별 위에서 성립하지만, 그러한 이분의 기반에는 그 둘의 공동 근거로서의 식 자체가 미분적 통일체로서 작용한다. 이 식 자체를 자증분이라 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증自證이란 그 스스로 명증적이라는 뜻이다. 한 인식의 참을 다른 인식에 의거하여 증명하는 것을 타증他證이라고 한다면, 다른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명증적인 것을 자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식 자체를 자증분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엄밀히 말해 자증적인 것은 견분이 상분을 인식함으로써 이루어진 인식 결과, 즉 양과量果이다. 인식 객관은 소량所量이고 인식 주관은 능량能量이며 능량이 소량을 인식하여 얻은 결과가 곧 양과인데, 이 양과가 바로 자증분이다. 식 자체로부터 능량과 소량이 이원화되고 인식이 발생하여 양과가 얻어지므로, 유식은 이 셋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실체가 아님을 강조한다.
대상으로 사현한 형상인 소량所量과 능히 형상을 취하는 능량能量, 그리고 자증自證으로서의 양과 量果, 이 셋은 그 체가 따로 있지 않다. 11)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양과로서의 자증이 곧 견분과 상분의 공동의 소의인 식 자체라는 것이다. 주객이원화 활동의 근거로서의 식 자체분이 곧 그 둘의 관계맺음에서 성립하는 인식 결과로서의 자증분이 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식결과의 명증성은 인식 주관으로부터도 인식 객관으로부터도 아니고, 주객분리 이전에 그 둘을 포괄하면서 스스로 이원화하는 식 자체분에서 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인식에서의 두 항목인 견분과 상분, 주관과 객관이 그들 공동의 근거인 식 자체로부터 이분된 것이라면, 그 둘의 관계위에서 성립하는 인식은 다시 그 이분을 지양하여 그들 공동의 근거인 동일성으로 귀결된다. 그리하여 인식 결과는 자명성을 가지게 된다. 분화된 견분과 분화된 상분의 인식적 관계 맺음의 결과가 바로 그 둘의 공통적 근거인 식 자체로의 복귀이기에 그 인식 자체가 자명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식 결과에서 얻어지는 자명성은 식 자체가 부여하는 명증성이다. 그러므로 견상이분의 소의所依인 자체분은 곧 자증분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이러한 인식 과정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주객분리 이전의 식 자체가 명증적으로 확인되는 양과의 자증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꽃을 본다고 해 보자. 반성적 차원에서 생각하면,‘보는 나’와‘보여진 꽃’은 각각 견분과 상분으로서 서로 구분되는 것이다. 내게 인식된 인식 결과로서의 꽃에 대해 우리는 흔히 그 확실성의 근거를 인식에서 구하지 않고, 인식 대상인 꽃 자체에서 구한다. 예를 들어‘저기 꽃이 피어 있다’는 인식의 확실성은 그 인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 바깥의 대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인식과 무관하게 바깥에 정말로 꽃이 피어 있으면 그 인식이 참이고 아니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인식의 확실성은 객관 자체가 제공한다고 여긴다. 보라! 너의 인식과 무관하게 저 바깥에 꽃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확실성을 제공한다고 생각된 대상 자체 또는 확실성의 의식 안에서 제시된 대상 자체 역시 그 순간 그렇게 인식된 것, 즉 식의 상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확실성을 제공한다고 생각된 그 대상 역시 그 순간의 인식에 포섭되고 말기 때문이다.결국 인식의 상분을 통해 그 상분에 대한 인식인 견분의 참거짓을 가려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확실성을 갖춘 것은 그처럼 인식하는 나(견분)와 인식된 꽃(상분)을 포괄하는 식 자체일 뿐이지, 인식을 넘어서 인식 바깥에 실재하는 무엇이 아니다. 바로 그 식을 자증분이라 하며, 그것은 본래부터 견분과 상분을 포괄하고 있는 식 자체분이다. 이 포괄적 식 즉 양과의 자명성을 떠나 인식의 확실성을 구할 길은 없다. 인식 주관으로서의 견분과 인식 대상으로서의 상분은 모두 그 안에서의 분리이며 다시 그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내가 꽃을 보며 꽃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꽃을 보는 나’와‘나에 의해 보여진 꽃’이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실체론적으로 꽃과 분리된 존재라면, 즉 나와 꽃 사이를 매개할 만한 근거가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꽃을 꽃으로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꽃과 나를 매개하는 그 공동의 근거가 바로 이원화 이전의 동일성으로서의 식 자체이다. 그것이 인식 관계로 전개될 때 그 동일적 근거로부터 꽃과 내가 분리되어, 나는 인식 주관으로, 꽃은 인식 객관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식이란 이원화와 더불어 진행되는 이원화의 지양이다. 즉 내가 꽃을 본다는 것은 분리된 나와 꽃이 다시 관계맺게 되는 것이다. 이 주객 관계맺음으로서의 인식이 자기확실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인식 안에서 주객의 공동 근거인 식 자체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과로서의 식 자체가 가지는 자명성은 본래 식 자체의 주객미분성 또는 주객포괄성에서 비롯되는 자기확실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식 자체가 자증분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렇게 식 자체의 자증분이 '보는 나'와‘보여진 대상’, 즉 견분과 상분의 공동적 근거라는 것은 식 자체가 주관과 객관, 안과 밖을 포괄하는 지평이라는 의미이다. 인식 과정에서는 나와 대상이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나는 여기에, 대상은 저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식 근거로서의 식 자체는 바로 나와 대상, 여기와 저기를 포괄하는 공간 지평이다.
내가 꽃을 볼 때 그 인식의 확실성은 그냥 꽃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둘, 즉‘보여진 꽃’(상분)과‘그것을 보는 나’(견분)를 포괄하는 식 자체에서 찾아진다. 이 식 자체를 그 둘의 관계맺음의 결과인 양과로 표현하자면, 곧 대상(상분)을 보는 나(견분)를 보는 나(자증분)가 된다. 12) 그렇게 해서 자증분으로서의 양과가 주관(이곳, 즉 나)과 객관(저 곳, 즉 대상)을 포괄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자증분의 확실성은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자증분을 다시 보며 확증하는 증자증분證自證分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식이 그 자체로 자증적이라면 증자증분은 왜 필요한 것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증분과 구분되는 증자증분의 인식상의 역할과 의미가 밝혀져야 한다. 자증분이 대상 세계(상분)에 대한 주관적 인식(견분)을 확증하는 것이라면, 증자증분은 대상 세계에 대한 인식 주관인 견분을 다시 인식하는 자증분을 확증하는 것이다.그런데 대상을 인식하는 견분으로서의 나와 그 견분을 인식하는 자증분으로서의 나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이전 순간의 주관으로서 꽃을 보던 나(견분)를 지금의 내(자증분)가 기억하여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견분을 대상으로 삼아 인식하는 순간에는 이처럼 기억되는 견분과 기억하는 자증분 사이에 이전의 나와 현재의 나라는 시간적 간격이 놓여 있는데, 증자증분이란 바로 이 시간적 간격을 매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증분이 대상의 인식에서 견분(주관)과 상분(객관)을 매개하는 공동 근거이다. 견분과 상분으로의 주객 이원화가 식체識體의 공간적 이분화 즉 공간화라면, 자증분과 견분 즉 기억 주체(현재 주관)와 기억 대상(과거 주관)으로의 이원화는 식체의 시간적 이분화 즉 시간화이다. 이렇게 보면 증자증분은 식 자체가 가지는 시간화의 부분, 다시 말해 현재와 과거의 시간적 간격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 세계(상분)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은 그 인식 주관(견분)을 확증하는 자증분에서 찾아지고 그 인식 주관(견분)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은 그것(견분)을 다시 인식하는 주관(자증분)을 확증하는 증자증분에서 찾아진다. 이처럼 자증분은 나와 세계, 견분과 상분으로 이분되는 식의 공간화 활동으로서 주객을 포괄하는 공간적 지평을 함축하며, 증자증분은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 인식 하는 나(자증분)와 인식된 나(견분)로 이분되는 식의 시간화 활동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포괄하는 시간적 지평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인식에 있어서의 공간적ㆍ시간적 지평은 자증분과 증자증분의 식체 자체의 변현으로 설명되므로 그 이상의 부분을 첨가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식은 상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이라는 사분으로 완결적으로 설명된다. 13) 이상을 인식의 단계로 구분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 사분설은 우리 인식의 형식적 전변 구조를 드러내 줄 뿐 그와 같이 전변하는 능변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이제 그와 같이 전변하는 능변식을 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이제 그와 같이 전변하는 능변식을 살펴보자.
2. 능변식의 심층 분석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유식에서는 능히 전변하는 식인 능변식을 크게 셋으로 구분하여 각각 제1, 제2, 제3능변식이라고 부른다.
능변식能變識은 오직 세 종류이다. 이숙식異熟識과 사량식思量識과 요별경식了別境識이 그것이다.14)
제1능변식이 이숙식은 제8 아뢰야식이고, 제2능변식인 사량식은 제7 말나식이며, 제3능변식인 요별경식은 제6 의식과 전오식을 포함한 여섯 식(六識)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식은 모두 대상을 인식하는 능연식能緣識이면서 스스로 자신의 대상을 산출하는 능변식이라 말할 수 있다. 각각의 식이 인식하는 대상은 결국 그 스스로 산출해 낸 것이다. 아래에서는 앞의 세 능변식을 그 표층에서부터 심층으로 분석해 들어가기로 한다. 15) 각각의 식에 있어 그 견분과 상분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게 되면 그 식의 자성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유식에서 견분은 식의 작용 양상 또는 모습이란 의미에서 행상行相이라고 불리고, 상분은 식의 대상이란 의미에서 소연所緣이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각 능변식에서의 견분과 상분을 해명하는 것은 바로 그 행상과 소연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작업이 된다.
1) 분별 주체로서의 의식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唯識三十頌』에서는 제3능변식을 감각으로서의 전오식과 제6 의식을 포괄하는 여섯 인식으로 규정한 후, 그 식의 행상行相을 요경了境 즉 대상의 요별了別이라고 설명한다.
제3능변식에는 여섯 종류의 차별이 있다. 대상을 요별了別하는 것을 그 자성과 행상으로 삼는다. 16)
대상을 요별한다는 것은 곧 대상을 분별하여 인식한다는 말이다. 전오식과 제6 의식이 대상을 요별하는 식이란 의미에서 함께 제3능변식으로 묶일 수 있는 것은, 그 여섯 식이 모두 각각의 경을 갖기 때문이다. 전오식, 즉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의 대상은 각각 색경ㆍ성경ㆍ향경ㆍ미경ㆍ촉경이며, 제6 의식의 대상은 법경이다. 그러므로 여섯 식의 행상인 요별 작용에 의해 인식된 소연所緣은 바로 전오식의 오경과 제6 의식의 법경이 된다. 이 각각의 소연이 물질로서의 색법과 관념으로서의 명이라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렇다면 감각과 의식, 색과 명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고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인식 작용은 보고 듣는 것과 같은 감각 작용이다. 그리고 감각되는 대상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대상 즉 색법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의 실질적 내용들은 모두 전오식의 대상으로서 구체적이고 개체적인 물질이다.
그러나 유식에 있어 감각은 아직 완성된 인식 활동이 아니다. 감각 기관으로서의 각각의 근根만 작용한다고 해서 실제적인 인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앞에 색이 있다고 해서, 즉 안근과 색경이 갖추어져 있다고 해서 그대로 안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으로 시선의 초점이 맞춰져야 대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니, 이는 곧 감각 작용에도 의식 집중이라는 의식의 활동이 요구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의식 활동을 통해 비로소 감각이 대상 세계의 인식으로 완성된다. 또한 안식 자체는 단지 색의 표상만을 가질 뿐이며, 그 안식 대상인 색을 외적 세계 사물의 속성으로 인식하는 것은 안식 자체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감각에서는 아직 내외의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내와 외를 구분하여 각각의 분산된 오경의 감각을 하나의 대상에 대한 감각 내용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총괄적ㆍ종합적 의식 작용이 요구된다. 이 의식 작용을 통해 감각이 대상의 요별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 의식의 대상인 법경은 구체적이고 개체적인 감각 대상(자상)과 달리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공상 또는 일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구체적 감각 내용들을 정리 종합하여 세계의 형태로 구조짓는 인식 세계의 형식적 틀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7)
이와 같이 감각과 의식은 대상 세계를 분별하여 인식하는 활동이다. 대상 세계의 구체적 내용들이 감각의 대상이라면, 그 일반적 형식은 의식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물질로서의 색과 관념으로서의 명은 각각 감각과 의식의 대상이 된다. 의식의 틀에 따라 감각 대상으로서의 명은 각각 감각과 의식의 대상이 된다. 의식의 틀에 따라 감각 대상으로서의 색법이 대상 세계의 내용으로 정리되므로, 감각 역시 의식과 더불어 대상을 분별하는 제3의 능변식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결국 의식의 형식적ㆍ개념적 분별 작용에 근거해서 구체적ㆍ개별적 감각 내용들이 외적 사물의 속성으로 종합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최종적인 의식의 이러한 분별 작용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인가? 의식의 개념적 분별 활동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분별적 의식 활동의 기저에서 작용하는 감추어진 욕망은 과연 무엇인가?
2) 욕망 주체로서의 말나식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분별적 의식 활동 기저에 감추어진 욕망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어떤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분별적 의식 활동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물음이며, 이는 다시 말해 의식은 무엇에 의거하여 발생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감각을 포괄한 의식 작용이 우리 마음 표층의 식이라면, 그 기저에서 작용하는 식에 대한 물음은 곧 표층적 분별의식 또는 이성적 사유에 대한 심층 근거로서의 의지 또는 욕망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는 일반적으로 의식 또는 사유를 우리 마음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의식은 그 자체로서 투명한 거울과 같이 그 앞에 놓여 있는 실재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고, 우리의 마음 속에 생겨 나는 온갖 상념이나 욕망이나 의지를 모두 그 의식의 기반 위에 덧붙여진 부수적 첨가물 정도로 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원한다면 의식은 자신만을 남겨둔 채 욕망과 의지를 모두 제거할 수 있으며, 그렇게 남겨진 투명한 의식에 비친 세계는 바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그러나 유식은 우리의 의식 활동을 그렇게 투명하고 깨끗한 무전제의 활동이라고 보지 않으며, 인식된 대상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세계 자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우리에 의해 인식된 세계는 이미 우리 자신의 개념적 틀에 의해 분별되고 짜맞춰진 의식의 산물이며, 나아가 그와 같은 의식의 분별 활동은 아무런 전제 없이 작동하는 무제약적 활동이 아니라 그런 분별 활동을 야기시키는 무엇인가에 의지하여 발생하는 제약된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식 활동을 야기시키는 근거는 무엇인가? 즉 의식이 의지하는 소의근所依根은 무엇인가?의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말해 주듯이 의식의 소의근은 의意이다. 그러나 의식이 의에 근거한다는 말은 전오식이 오근五根에 근거한다는 것과 동일한 차원의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안식이 근거한 안근眼根은 그 자체로서 인식인 것이 아니라 단지 안식의 활동을 설명하기 위해 시설된 일종의 인식 기관일 뿐이다. 이에 반해 의식이 근거한 의意는 그 자체가 이미 인식이다. 즉 그 자체의 작용과 대상을 가지는 고유한 인식이라는 말이다. 이 의意의 자기 인식을 유식에서는 제6 의식 다음의 심층적 식이라는 의미에서 제7식 이라고 하고, 또 그냥‘의意’즉‘마나스’(manas)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이를 그대로 음역하여 말나식末那識이라고 한다. 18)말나식이 의식의 근인 의意의 식이라는 말은 곧 대상 의식의 소의근인 의意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기 의식이라는 뜻이다. 제6 의식이 의意에 근거해서 법法인 대상을 인식하는 대상 인식이라면, 제7 말나식은 그처럼 대상을 인식하던 의意 자체의 자기 의식 또는 자기 인식이다. 이 말나식의 주관적 작용인 견분과 객관적 대상인 상분은 각각 무엇인가?『유식삼십송』은 말나식의 행상과 소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제2능변식은 말나식이라고 이름한다. 이 말나식은 제1능변식(아뢰야식)에 의해 전변하여 그 제1능 변식에 연하면서, 사량思量을 그 성상性相으로 한다. 19)
여기서 말나식의 소의와 소연은 아뢰야식으로 규정되고 있으며, 그 행상은 사량思量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말나식의 고유한 인식 작용을 의식에서의 대상 요별과 구분하여 사량이라 부른 것이다. 그렇다며 사량이란 어떤 인식 작용을 말하는가? 사량의 사思는 마음의 인위적 조작을 의미한다.사思는 마음으로 하여금 조작하게 하는 것을 본성으로 한다. 20)자기 의식으로서의 말나식의 사량은 대상 의식인 제6 의식의 대상 분별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의식은 오감에 주어지는 감각 내용들을 자기 자신과 자기 밖이라는 안팎의 분별에 따라 자기 밖의 외부 세계의 현상으로 대상화시킨다. 그리고 대상화된 세계를 의식 자신이 지닌 언어적 틀에 따라 실체와 속성의 관계로 구조짓는다. 그렇게해서 외부 세계를, 그 가시적 속성들은 다양하게 변할지라도 현상 이면의 사물 자체는 변하지 않고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항상적인 것으로 실체화하고 고정화한다. 찰나생멸적인 무상한 현상을 고정적이고 항상적인 자기 자성을 가지는 것으로 실체화함으로써 인간 의식으로 하여금 그것을 그것으로 요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범주적으로 실체화된 존재를 법이라고 한다.법은 본보기적인 자성(軌持)을 말한다. 21)『성유식론술기』에서는 이 궤지軌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궤軌는 사물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본보기적 범주를 뜻하며, 지持는 사물의 자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잃지 않게 하는 것을 뜻한다. 22)법이란 곧 자기본보기적으로 자성을 유지함으로써 사물의 이해를 가능케 하는 것을 뜻한다. 즉 변하지 않는 자성을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현상 세계의 변화가 이런저런 것으로 요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본보기란 현상을 이해하는 기본 틀, 범주를 뜻한다. 개념적 동일성으로 구성된 범주 체계에 따라 질서지워짐으로써 현상 세계는 바로 그 방식대로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그런데 이처럼 찰나생멸적 현상에 대해 자성을 가진 법을 실체로 상정하여 그에 따라 현상 세계를 요별해 내는 우리의 의식 활동 근저에는 바로 자기동일적 법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유식은‘법집法執’이라고 한다. 의식의 자기 안과 밖, 자아와 외부 세계의 분별, 그리고 대상 세계를 실체와 속성의 관계로 구조짓는 분별 활동의 근저에는 이미‘자기동일적 법이 실재한다’는 헤아림, 즉 근원적 법집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 근원적 법집이 말나식의 사량에 속한다. 23)이처럼 외부 세계를 자기 자성을 가지는 실체로 고집하는 법집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법집에 따라 세계를 실체화하고 범주화하는 의식 활동 근저에 작용하는 가장 깊은 욕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욕망이다. 세계를 나의 의식 구조에 따라 분별하여 이해하려는 것은 이 세계가 바로 나의 세계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제6 의식이 의식에 담겨지는 내용을 자신 밖의 세계로 대상화하는 식이라면, 그 의식의 소의근인 의意, 즉 말나식은 바로 대상화를 행하는 자신에 대한 식인 자기 의식이다. 자기 의식으로서의 이 말나식은 바로 자기 자신을‘의식을 가지는 자', 즉‘의식된 세계를 가지는 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의식의 내용이 바뀌고 사라져도 그 자신은 항상되고 동일하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가리켜 이런저런 의식의 변화를 임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식에 대해, 그리고 그 의식 안에서 인식된 세계에 대해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주재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자아는 주인으로서 다스리는 자(主宰)를 말한다. 24)『성유식론술기』에서는 자아의 주재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주主는 아我의 체體이며, 재宰는 아我의 작용作用이다. 25)자아가 주主가 된다는 것은 자아의 체성을 가리키며, 자아가 다스리는 자라는 것은 자아의 작용을 가리킨다. 이처럼 자신을 주인으로서 다스리는 자라고 헤아리는 것이 바로 말나식의 사량이다. 이는 의식적 차원의 분별보다 더 심층에서 발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유식은 이를 말나식의 근본아집이라고 한다. 26) 이 근원적 아집으로부터 온갖 욕망과 충동, 번뇌와 고통이 야기된다.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지닌 아상我相 즉 내가 나라는 아견我見, 나를 높이고자 하는 아만我慢, 나를 사랑하는 아애我愛등이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이처럼 말나식은 대상화를 수행하는 제6 의식(대상 의식)의 근저에서 작용하는 자기 의식으로서, 바로 그 안에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무의식적인 본능과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말나식의 사량은 바로 이와 같이 세계를 객관적 실체로, 자아를 항상적 주재자로 헤아려 집착하는 번뇌적 작용을 뜻한다. 우리 마음의 표면에 등장하는 의식이란 바로 이러한 근본적 집착 위에 수행되는 제약된 분별 활동일 뿐이다. 그렇다면 말나식은 과연 무엇을 자아나 세계로 집착하고 실체화하는가? 말나식이 애착하는 그 집착의 근원적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나식의 소연은 무엇인가? 『유식삼십송』에 따르면 말나식의 소연은 곧 아뢰야식이다. 이제 문제는 바로 아뢰야식이 된다
3) 초월 주체로서의 아뢰야식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1) 아뢰야식의 발견
의식과 말나식, 다시 말해 이성과 의지 또는 사유와 욕망(집착) 이외에 우리에게 또 무슨 식이 남아 있는가? 유식은 의식이나 말나식의 심층에 한층 더 근본적인 식이 작용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런 심층의 식이 있어야 의식이나 말나식의 내용이 바뀌거나 멈춘다해도 그 식 전체가 나 자신의 식으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의식 안에 떠올렸던 식 또는 한번 의意 가운데 품었던 식들은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어디로 가는가? 그 순간이 지나가도 알게 모르게 작용을 미치고, 또 수년이 흐른 후 어느 순간 불현듯 기억나기도 하는 것이 우리가 지닌 식의 모습이다. 분명히 의식하지는 못해도 우리 역사와 더불어 남아 있는 무한한 양의 식, 그것은 분명 어딘가에 있기에 문득문득 의식으로 떠오르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끊임없이 우리의 사유와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27)
이처럼 의식이나 말나식의 심층에 존재하면서 그들 식이 남긴 흔적을 종자(bija)로서 간직하는 식을 유식에서는 제7 말나식 다음의 식이라 해서 제8식이라고 한다. 이 식은 종자들을 함장한 식이라는 의미에서 장식藏識(alaya-vijnana)이라고 불리며, 이를 음역하여‘아뢰야식’이라고 한다. 28)
아뢰야식은 잠재적인 종자들의 총체이다. 이는 의식이나 의지보다 더 깊이 감추어진 식으로서, 우리가 흔히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마음’이다. 제8 아뢰야식은 모든 식 작용의 근본 전제가 되므로 본식本識이라고도 한다.
처음 (능변식인) 아뢰야식은……일체一切의 종자식種子識이다. 29)
그러나 아뢰야식은 이처럼 단지 잠재적 종자식으로만 추론된 것, 즉 논리적 전제 또는 가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30) 본래 아뢰야식은 요가수행자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경험되고 발견된 마음 심층의 식이다. 31) 요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평상시에 의식되지 않던 무수한 영상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직접 경험하였다. 현재 내 눈앞에 있는 이 세계와 구분되는 다른 세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눈앞에 전개된다면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요가 수행자들은 수행 시에 떠오른 그 영상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그것을 관하는 마음의 영상인지 즉 마음과 하나인지, 아니며 그것이 마음 바깥의 어떤 것인지 즉 마음과 구분되는 마음 너머의 실재인지 세존에게 물었다.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물었다.“세존이시여, 모든 비바사나사마타毘鉢舍那三摩他 중에서의 영상影像 은 그 마음과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다.“선남 자여, 마땅히 다름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영상은 오직 식識일 뿐이기 때문이다. 선남 자여, 식의 대상은 오직 식이 현현한 것일 뿐이라고 나는 설한다.” 32)
바로 여기에서‘오로지 식일 뿐이다’라는‘유식唯識’(vijnapti-matra)의 개념이 처음 등장한다고 한다.33) 비바사나사마타(止觀)의 요가 수행 시에 그들이 직관한 그 영상은 마음 바깥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34) 그것은 단지 영상일 뿐이다. 그것은 식이 현현하여 나타난 결과 즉 마음의 영상이지 마음 밖의 실재가 아니다. 마음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오직 식일 뿐이다’라고‘유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요가 수행자들은 표층적 의식 활동이나 의지적 집착을 멈춤으로써 의식보다 더 깊은 마음의 세계를 들여다 본 것이다. 영상으로 나타나는 그 마음의 세계를 직관함으로써 우리 자신 안에 그런 영상을 만들어 내는 마음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표층적 의식이나 말나식보다 더 심층의 곳에 객관 세계의 영상을 산출하는 깊고 미세한 식이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선정 시에 발견된 이 마음 작용이 선정을 떠난 일상적 평상심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일상적 의식에 대상으로 나타나는 색色 등의 영상 역시 식의 현현에 불과하다는 것이 더불어 자각됨으로써 비로소‘일체유식一切唯識’이 확립된다. 35)
그들이 발견한 식 즉 대상으로 현현하는 심층의 식은 바로 우리의 일상적 의지인 말나식에 의해 자아로 간주된 식 즉 말나식의 소연인 아뢰야식이다. 그러나 아뢰야식이 이렇게‘있는’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 심층의 마음이라면 그것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째서 그러한 자기 의식으로서의 말나식의 활동을 잘못된 사량 또는 집착이라고 비난하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범부가 하기 쉬운 생각이다. 유식 역시 아뢰야식의 존재를 말할 경우 범부들의 아집이 오히려 더 고착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아타나식(아뢰야식)은 심히 깊고 미세하다. 나는 어리석은 범부에게 그것을 드러내내 말하지 않는 다.……범부가 분별해서 그것을 자아라고 집착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36)
아뢰야식은 깊고 미세하기에 직접 자각하기 힘들다. 직접 자각함이 없이 우리 안에 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개념적으로만 듣게 될 경우 혼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는 단순히 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뢰야식이 어떤 식인지, 어떤 작용을 하는 식인지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아뢰야식의 실상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뢰야식에 함장되어 있다가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종자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2) 아뢰야식과 종자
불교에서는 인간이 지은 업業은 반드시 그 보報를 받는다고 말한다. 생각에 머무른 의업意業이든 의도적으로 말이나 몸으로 지은 구업口業이나 신업身業이든 업은 그 업을 짓는 순간이 지나고 나면 동일한 형태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같은 것을 생각하고 말하거나 같은 행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업이 끝나는 순간 아무 결과 없이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럴 경우 보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우리의 업은 그 자체와는 구분되는 다른 형태의 흔적을 남긴다고 본다. 인간이 업이 남기는 흔적, 그것을 유식은‘종자’(bija)라고 말한다. 37) 이 종자를 가리켜 업이 남긴 흔적, 남겨진 습관적 기운이란 의미에서‘습기習氣’라고도 한다. 이 종자 또는 습기는 의식이나 의지보다 더 깊은 곳에 남겨진다. 이처럼 업이 남긴 종자가 함장되어 있는 곳, 또는 그 종자 자체의 흐름을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38) 업이 사라지지 않고 그 흔적인 종자로서 계속 남아 있다는 말은 그것이 어느 순간에는 다시 그 자신의 결과를 낳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종자란 아뢰야식 내에 머물러 있다가 때가 되면 그 내용에 따라 다시 자신의 결과를 낳는 세력이다.
〔문〕어떤 법을 종자라고 명하는가?
〔답〕본식本識(아뢰야식)속에 있는, 자신의 과果를 친히 생할 수 있는 공능차별을 뜻한다. 39)
아뢰야식을 통해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그 안의 종자로부터 발생하는 결과이다. 아뢰야식이 어떤 세계를 그려내는가, 그리고 그 아뢰야식에 기반한 의식과 말나식이 그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읽어 내는가 하는 것도 아뢰야식 내의 종자에 달려있다.
이렇게 보면 일체 종자의 흐름으로서의 아뢰야식은, 이전의 업으로부터 심어진 종자라는 측면에서 고찰하면 곧 업의 과보果報이며, 다음의 현실적 결과를 낳을 공능차별로서의 종자라는 측면에서 고찰하면 곧 현상의 원인이다. 아뢰야식의 이와 같은 양 측면은『성유식론』제2권에서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으로 구분된다. 즉 업의 결과로서 종자들의 흐름이 형성되는 과정의 모습인 과상과, 그렇게 형성된 종자가 인因이 되어 현실로 구체화 되는 과정의 모습인 인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후자는 아뢰야식 자체의 견분과 상분으로의 이원화 과정에 해당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뢰야식의 소연과 행상을 묻는 다음 절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전자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종자의 흐름으로서의 아뢰야식은 어떻게 해서 형성되는가? 예를 들어 한 유정有情이 과연 어떤 아뢰야식을 갖고 태어나는가 하는 것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왜 어떤 유정은 사람으로, 어떤 유정은 물고기로 태어나는가? 우리는 유정의 영역을 인간과 축생 두 종류로 구분하지만, 불교는 유정의 영역을 인간 이상의‘천상’,‘인간’,그리고 인간 이하로서‘축생’이외에‘아귀’,‘수라’,‘지옥’을 덧붙여서 모두 여섯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이 여섯 영역이 유정이 윤회하게 될 육도六道이다. 유식은 유정이 어떤 영역의 존재로 태어나고, 또 그 영역 내에서도 어떤 근기의 존재로 태어나는지 결정하는 것을 종자種子라고 본다. 40)
이 때의 종자란 그 전생의 유정이 지은 업이 남긴 종자이다. 전생의 유정의 전육식이 의식적으로 지은 선업 또는 악업이 남긴 종자가 다음 생의 아뢰야식을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생의 제8식을 이끌어 오는 종자를 업종자業種子 또는 유지습기有支習氣라고 한다. 이 종자를 낳는 업은 의식적으로 행해진 선업 또는 악업이어야 하지만, 그 결과로 야기된 아뢰야식은 그 본성이 선악이 아닌 무기無記로 성숙된 결과물 즉 이숙과異熟果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업종자를 이숙습기異熟習氣라고도 부른다.41)
그러나 종자 중에는 전생의 선악의 업에 의해 심어져서 현생의 무기 아뢰야식을 이끌어오는 업종자 이외에 종자 자체가 가진 선악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결과를 내는 종자도 있는데, 이를 동일한 류의 결과를 내는 종자라는 의미에서 등류종자等類種子라고 하고 명언종자名言種子(광의의)라고 하기도 한다. 42) 이 등류종자는 다시 협의의 명언종자와 아집종자로 구분되며, 협의의 명언종자는 또다시 현경명언종자顯境名言種子와 표의명언종자表義名言種子로 구분된다. 이상 종자의 구분을 도표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43)
여기서 현경顯境과 표의表義의 명언종자란 아뢰야식이 대상 세계로 현현할 때 그 현현의 방식을 결정하는 종자를 뜻한다. 이미 제1,2장에서 논의한 대로 우리에게 인식되는 대상 세계는 물질적 대상(色)과 관념적 대상(名)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은 전오식과 제6 의식의 소연경이 된다. 다시 말해 전오식의 소연경은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물질적 색色이며, 제6 의식의 소연경은 추상적 관념으로서의 명名이다. 유식에서 아뢰야식 내의 종자로 분류한 현경명언종자와 표의명언종자는 바로 그 두 종류의 대상 세계로 현현하는 종자를 뜻한다. 즉 구체적인 물질 모습으로 현현하는 종자를 표의명언종자라고 하는 것이다. 전자는 전오식의 대상인 오경의 형상적 표상을 일으키는 종자이고, 후자는 제6 의식의 대상이 되는 개념적 언어를 일으키는 종자라고 말할 수 있다. 44)
그리고 광의의 명언종자에 포함되지만 현경명언종자나 표의명언종자에는 속하지 않는 아집종자는, 아뢰야식의 식소변으로서의 대상 세계를 아집과 법집에 따라 분별 사량하여 집착을 일으키는 종자를 뜻한다. 일체의 분별 집착은 아집이 그 근본이 되므로 그러한 집착적 종자를 아집종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현상계로 변현하고 또 그렇게 변현된 현상계를 분별 집착하게 하는 종자는 과연 어떻게 해서 아뢰야식에 심어졌을까? 유식은 등류종자를 전생이나 현생에서 제6식 또는 제7식이 의식적으로 지은 업에 의해 아뢰야식에 훈습된 종자로 간주한다. 45) 전오식의 소연경으로 화할 현경명언종자는 과거의 전오식 활동에 의해 아뢰야식에 심어진 종자이고, 제6 의식의 소연경으로 화할 표의명언종자는 마찬가지로 과거의 제6 의식 활동에 의해 아뢰야식에 심어진 종자이며, 아집종자는 또 그 나름대로 과거의 제7 말나식의 집착을 통해 아뢰야식에 훈습된 종자이다. 이렇게해서 칠전식七轉識의 활동은 그 활동의 흔적을 종자로서 아뢰야식에 남기며, 그 종자들의 흐름으로서의 아뢰야식은 종자 전체를 유지 존속시키다가 중연衆緣이 닿으면 다시 그 각각의 결과를 내게 한다. 즉 아뢰야식 안에 심어진 종자는 그 안에서 성숙하다가 바로 자과自果를 내게 마련이다.
살아 있는 것인 이상 쌀 종자, 보리 종자 등 일상적 의미의 종자들이 언젠가는 발아하여 싹을 내고 잎을 피우듯이, 아뢰야식 내의 종자 또한 그냥 끝까지 잠재적 상태에 머물러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잠재태의 종자는 중연에 따라 구체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잠재적 종자의 현실화가 곧 잠재식으로서의 아뢰야식의 현행화이다. 아뢰야식이 현행화한다는 것은 바로 아뢰야식 자체가 전변하여 능연의 견분(행상)과 소연의 상분으로 이원화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아뢰야식의 소연과 행상은 과연 무엇인가?
(3) 현행 아뢰야식의 소연과 행상
아뢰야식의 소연所緣과 행상行相에 대해『유식삼십송』은 다음과 같이 아주 간략히 언급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좀더 상세한 설명은『성유식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처음(능변식인) 아뢰야식에 대해……집수執受와 처處와 요了는 알기 어렵다. 46)
〔문〕이 식(아뢰야식)의 행상과 소연은 무엇인가?
〔답〕알기 어렵다고 말한 집수執受와 처處와 요了가 그것이다. 요는 요별了別을 뜻하며, 그것이 곧 행상이다. 식이 요별을 행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처는 처소處所를 뜻하는데, 그 것이 곧 기세간器世間이다. 유정이 의지하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집수에는 둘이 속한다. 모든 종자種子와 유근신有根身이 그것이다. 47)
아뢰야식의 행상은 대상을 요별하는 것인데, 여기서 아뢰야식의 대상, 즉 상분 또는 소연은 바로 처와 집수이다. 그 중 처는 우리가 의지해 사는 처소 즉 기세간을 의미하며, 집수는 우리 자신의 몸 즉 유근신과 여러 종자를 뜻한다. 이를 일단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신체와 기세간 그리고 종자가 아뢰야식의 상분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인 식소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종자가 아뢰야식의 상분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뢰야식의 상분으로서의 종자는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함장 유지되고 있는 종자와 그대로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자는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과정 속에 있는 잠재태의 종자인 데 반해, 상분으로서의 종자란 그런 잠재적 종자가 인연이 갖추어져 현실화된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결과로서의 현실태이기 때문이다. 잠재적 종자가 현행화하여 견상으로 이원화됨으로써 비로소 상분으로서의 종자가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신체나 기세간의 색법으로가 아니라 관념적 또는 정신적 형태로 현행화한 종자를 뜻한다. 의식이 포착하는 관념의 세계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체와 기세간이 아뢰야식의 식소변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근신은 근을 갖춘 우리의 신체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근을 색근에 제한함으로써 제6 의식의 근인 의意를 배제하고 있다. 제6 의식인 식識과 제7 말나식의 의意는 제8 아뢰야식의 심心과 마찬가지로 색色이 아닌 심心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48) 유식은 감각 능력을 갖춘 우리의 신체를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로 간주한다. 이는 곧‘인간의 신체란 인간 마음의 변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체로 나타나는 변현의 힘이 바로 마음이고, 그 마음의 변현 결과 즉 힘의 작용 결과가 신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마음과 몸은 정신과 물질의 두 실체로 서로 분리된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심층의 마음 작용을 바탕으로 해서 신체가 구성된다는 관점이다. 49)
그 다음 아뢰야식의 또 다른 상분인 기세간은 우리의 몸이 의지해서 사는 처소를 뜻한다. 세간이 우리 중생을 담은 그릇(器)과 같다는 의미에서 기세간이라고 한다. 몸이 의지한다는 말은 곧 몸의 환경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 기세간이 바로 우리가 흔히 식 외부에 그 자체로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물질 세계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세계, 즉 오감 대상으로서의 색계色界가 바로 그것이다. 50)
그런데 유식은 유근신이나 기세간을 둘 다 아뢰야식이 전변한 식소변 즉 상분이라고 간주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뢰야식의 전변은 무엇에 근거하여 일어나는가?
〔문〕만약 모든 색처 또한 식識을 그 체로 삼는다면, 무엇을 인연으로 해서 물질의 모습으로 현현 하여 하나로 견고히 상속하며 전전하는가?
〔답〕명언훈습名言熏習의 세력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51)
신체가 그 신체가 의지해 사는 세간이 아뢰야식의 전변이라는 말은 그것들이 바로 아뢰야식에 함장되어 있던 잠재적 종자가 현상으로 현실화되는‘종자의 현행 결과’라는 말이다. 종자는 이전의 업이 남긴 흔적, 즉 업력이다. 52) 그 업이 개인적 입이 남긴 종자인 불공종자不共種子일 때 개인적 신체가 형성되고 , 개인을 넘어서는 공동의 업이 남긴 종자인 공종자共種子일 때 공동의 기세간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자에 따라 신체와 기세간의 차이가 생긴다.
처處라는 것은 이숙식(아뢰야식)이 공상共相의 종자를 성숙시킨 세력에 의해 색色 등 기세간으로 변현한 것을 말한다. 외적 사대종과 그것으로 만들어진 색법이 그것이다. 53)
유근신有根身이란 것은 이숙식이 불공상不共相의 종자를 성숙시킨 세력에 의해 색근色根(승의근)과 그 근이 의지하는 처(부진근)로 변현한 것을 말한다. 내적 사대종과 그것으로 만들어진 색법이 그 것이다. 54)
다시 말해 아뢰야식 내의 종자 중 기세간으로 변현하는 종자는 모든 유정들이 함께하는 기세간으로 변현하는 종자라는 의미에서 공종자라고 하고, 외적 세계로 변현하는 종자라는 의미에서 외종外種이라고도 한다. 반면 유근신으로 변현하는 종자는 유정들에 공통적인 것이 아니라 유정 각각의 신체로 변현하는 종자라는 의미에서 불공종자라고 하고, 그것이 형성하는 신체가 기세간처럼 외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내종內種이라고도 한다. 아뢰야식 내의 불공종자가 내적으로 변현된 것이 유정들의 공통의지처가 되는 기세간이다. 이처럼 신체와 기세간을 각기 불공종자와 공종자의 변현으로 차별화하기는 하지만, 그 둘을 모두 아뢰야식의 상분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유정의 신체와 그 환경 세계를 동질의 존재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유근신이나 기세간은 둘 다 유정의 아뢰야식의 종자가 현행화하여 변현된 상분에 해당한다.
신체와 기세간이 아뢰야식 내의 종자의 변현이라는 것은 인간과 우주 존재의 시원에 대한 불교적 존재론 또는 우주론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인간 또는 우주는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는가?
기독교에 따르면 신은 인간을 만들기 며칠 전에 우주를 만들었다. 현대과학에 따르면 우주는 약 200억 년 전 빅뱅과 더불어 존재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안의 지구는 약 46억 년 전에 형성되었고 인간은 약 50만 년 전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에 따르면 인간과 그 삶의 터전인 세계는 서로 독립적인 것이고, 현대 과학에 따르면 인간과 물질의 진화 과정속에서 형성된 존재이다. 두 경우 모두 물질자체는 인간이나 생명 또는 마음으로부터 독립적인 객관 실재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오히려 물질을 유정의 업으로부터 설명한다. 이 때 유정이라 함은 인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인식 작용을 가진 존재, 즉 동물적 생명체 일체를 의미한다. 불교는 유정의 업으로부터 그 결과로서의‘유정의 신체’와 그 신체가 의지하여 살게 될‘기세간’이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나 기세간을 모두 업의 결과인 보報로 간주한다. 불교의 우주생성론, 즉 업으로부터 우주와 신체가 형성되는 과정은『구사론俱舍論』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모든 중생들의 업력이 작용함으로써 풍륜風輪이 생겼다. 그 위에 다시 모든 중생들의 업력이 작용해서 큰 구름과 비가 일어나 수레바퀴만한 물방울을 뿌리고, 이 물이 쌓여 바 퀴를 이루니 그것이 수륜水輪이다. 어떻게 해서 수륜이 옆으로 넘쳐흐르거나 흩어지지 않는가? 모 든 중생의 업력이 이를 받쳐서 넘쳐흐르거나 흩어지지 않게 함이 마치 먹은 움식이 소화 되기 전에 는 끝내 숙장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 주위에서 회전하는 풍륜으로 지탱되어 넘쳐흐르 거나 흩어지지 않음이 마치 동구미로 곡식을 담아 유지함과 같다. 중생들의 업력이 다시 작용하여 다른 바람이 일어나 그 물을 육박하고 쳐서 그 위에 금륜金輪을 결정함이 마치 끊인 우유 표면이 엉기어 막이 생기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해서 수륜이 줄면서 나머지가 금륜으로 바뀌어 수륜과 금륜 의 넓이의 양이 같아졌다. 금륜위에 아홉의 큰 산이 있는데 수미산이 그 가운데에 있고 외륜산 바 깥에 사대주가 있으며, 인간은 동서남북 사대주중 남쪽의 섬부주贍浮洲에 산다. 55)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불교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사대四大를 모두 유정의 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정의 식에 의해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사대와 그 사대로 이루어진 일체의 색계가 유정의 식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말이다. 유정의 몸이나 그 몸이 의거해서 살게 될 기세간이 모두 유정의 업에 의한 보報이기에, 그 각각을 정보正報와 의보依報라고 한다. 유정의 몸인 유근신은 그 유정의 업이 직접 낳은 결과이기에 정보이며, 기세간은 그 몸이 의거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의보가 된다.
이상의 우주 형성론을 유식의 식전변설과 연관시키자면, 우선 정보와 의보를 낳는 업이란 바로 유정의 아뢰야식 안에 남겨진 업력, 더 정확히는 아뢰야식 내의 종자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업보를 낳기 까지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업을 유부有部에서‘무표업無表業’으로 개념화하였다면 경량부는 그것을‘종자種子’라고 간주하였고, 다시 유식은 일체의 현상 세계를 그 종자의 현행 즉 아뢰야식의 변현으로 이해한 것이다. 업 또는 종자는 자아와 세계로 변현하는 정신적 힘, 우주적 에너지를 의미한다. 아뢰야식내의 종자가 현행화한다는 것은 곧 현행 아뢰야식이 유정의 신체와 그 신체를 담고 있는 세계로 변현한다는 것이다. 신체는 곧 정보로서 이를 유근신이라고 하고, 세계는 곧 의보로서 이를 기세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유식에서는 유근신과 기세간을 식의 변현으로 본다.
신체란 곧 아뢰야식의 변현이므로 아뢰야식에 따라 그 신체의 존재와 상태가 결정된다는 것을 유식에서는 안액동일安厄同一이라 표현한다. 신체의 상태는 정신인 아뢰야식의 좋은 상태(安)와 좋지 않은 상태(厄)를 그대로 반영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아가 한 유정이 어떤 종류의 유정인가, 즉 어떤 신체를 가진 유정인가 하는 것도 아뢰야식에 의해 결정된다. 유식은 불교 본래의 업설에 따라 유정의 현생을 유정의 전생에서의 업을 통해 설명한다. 현생의 유정이 인간인가 물고기인가는 그 전생의 아뢰야식의 업력의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단 그 아뢰야식을 바탕으로 한 제6 의식의 작용만이 내생의 아뢰야식에 이어질 새로운 종자를 훈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은 전생의 제6 의식이 지은 이숙업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이숙식異熟識이라고 불린다. 이숙식이란 전생의 업에 따라 이끌려진 현생의 아뢰야식이다. 생사유전의 주체가 바로 아뢰야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생의 몸인 유정의 신체는 결국 전생의 업력의 총체로서의 아뢰야식으로부터 결과된 식소변이다.
나아가 기세간도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나타나는 상분이라는 것은 곧 그것이 식소변일 뿐이지 독립적 실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유정의 식을 떠나 그 유정의 거처로서의 기세간의 존재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나의 아뢰야식이 무너지면 나의 몸도 함께 무너지므로 유근신이 식소변이라는 것은 그런대로 납득할 만하지만, 기세간은 나의 아뢰야식이 무너져도 여러 유정의 공동의 기세간으로서 계속 남아 있으므로 식소변이라는 것에 의심을 갖게 된다. 공동적 존재라는 것은 식과 무관하게 독립적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기세간의 공공성에 대해 유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모든 유정에 의해 전변된 것은 각각 다 다르지만 그 모습이 서로 유사하므로 처소處所에 차 이가 없다. 이는 마치 많은 등불의 빛이 각각 퍼져나가되 하나의 빛이 되는 것과 같다.56)
수많은 촛불이 빛을 발하고 있을 때 그 밝음은 각각의 촛불로 인한 것이지만 그 빛은 서로 구별되지 않은 채 마치 하나인 것처럼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 총체적 하나로 나타나는 빛도 각각 구별되는 개별적 촛불 이외의 다른 것으로 인한 것은 아니다. 즉 유정 공동의 기세간은 각각 구분되는 아뢰야식으로 인한 것이면서도 그런 구별이 없는 하나의 공동의 기세간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나아가 그 중 하나의 촛불이 꺼진다 해도 전체 촛불의 밝기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듯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아뢰야식이 사라진다고 해도 기세간에는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촛불 전체의 빛이 각각의 개별 촛불의 빛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듯이 전체 기세간이 각각의 아뢰야식 바깥의 실재인 것은 아니다. 57) 이처럼 유식은 인간의 신체든 그 신체가 의지해 사는 기세간이든 모두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객관적 물질이 아니라 단지 우리 아뢰야식의 변현인 상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대로 종자와 유근신과 기세간이 모두 아뢰야식의 상분이라면 아뢰야식의 견분인‘요了’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了는 아뢰야식에 의해 변현된 결과로서의 상분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주관적 활동이다. 그러므로 유식은 견분과 상분의 발생에 그 선후를 둔다.
아뢰야식은……식의 소변所變을 자신의 소연所緣으로 삼고, 행상行相은 그것(소연)에 의거해서 비 로소 일어날 수 있다.58)
아뢰야식의 견분인 요了는 아뢰야식의 상분에 의거해서 비로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식소변으로서의 대상들에 의거해 그것을 연하는 작용이 곧 능연으로서의 견분이다. 이는 아뢰야식 자체의 식전변이 행해진 후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59) 이상으로 유식에서의 세 종류의 능변식을 각각 그 견분과 상분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1) 아뢰야식의 변현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자신의 대상을 스스로 산출해 내는 식의 활동이 곧 전변이다. 그러므로 식의 소연은 바로 그 식이 전변하여 산출된 식소변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식의 경은 그 식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유식무경’이 성립한다. 이처럼 전변 주체로서의 식은 곧 능히 전변하는 식, 즉 능변식이다.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이상 논의된 각 능변식과 그 식소변의 경境을 도표화해 보자.
이상 각 식의 대상인 소연경이 그 식 자체가 스스로 전변한 결과라는 것은 결국 전변한 만큼 인식하고 인식한 만큼 전변한다는 말이 된다. 각 식이 그처럼 능히 전변하여 자기 대상을 산출해 내고 그 산출된 것을 비로소 인식하는 것이라면 모든 인식은 매순간 다 그 자체로서 참이어야 하지 않는가? 만일 색이 감각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즉 감각이 스스로 자신의 대상인 색을 산출하고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라면 착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감각상의 오류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또는 의식 대상인 법경法境이 의식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 자체가 스스로 그 법경을 산출하고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라면, 매순간의 의식 활동은 항상 참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해서 잘못된 개념 파악, 잘못된 판단 등이 있을 수 있는가? 식의 작용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경이 있다는 말인가? 내가 어느 한 순간 구체적으로 감각하지 않아도 내게 색은 있지 않은가? 내가 한 순간 사유하지 않아도 사유 세계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물음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제기된다. 감각과 제6 의식을 포함하는 제3능변식 역시 능변이므로 색과 법경을 소변所變으로 산출해 낸다. 그러한 제3능변식에 의해 전변된 경이 곧 감각 대상인 색色이며 관념적 사유 대상인 명名이다. 그 두 대상은 각각 제1,2장에서 전오식과 제6 의식의 소연경으로서 밝혀진 색과 명이다. 그런데 제8 아뢰야식의 상분으로서 다시 관념적 종자와 색법의 기세간이 논해진다. 그렇다면 전오식의 상분으로서의 색법과 아뢰야식의 상분으로서의 기세간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의식의 상분으로서의 법경과 아뢰야식의 상분으로서의 종자는 둘 다 관념적 명名에 해당하는데, 그 둘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만일 동일한 것을 다른 두 식의 소변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는 동일한 하나의 것을 이중화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이 바로 식의 전변의 의미를 서로 다른 두 의미로 구분하여 파악하는 것이다.『성유식론』에서는 그 두 의미의 차이를 인연변因緣變과 분별변分別變으로 제시하고 있다.
유루식有漏識의 전변에는 간략히 말해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인연의 세력에 따라 전변 하는 것이 고, 다른 하나는 분별의 세력의 따라 전변하는 것이다. 60)
이 인연변과 분별변의 차이가 곧 변현變現과 분별分別의 차이가 되는데, 여기서는 인연변에 해당하는 변현의 의미를 살펴보자. 인연변은 성숙된 인연 세력에 따라 전변하여 현실적 대상으로 전개된다는 의미에서‘변현’이다. 변현은 프라티바사(pratibasa)의 한역으로서 변사變似, 사현似現, 현현顯現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단어는 원래 사물의 영상을 의미하던것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단지 영상이되, 그 영상에 상응하는 객관적 사물 자체가 식을 떠나 따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상이란 바로 식이 산출한 상으로 이해되고, 그 결과 영상을 의미하던 변현의 의미가 점차적으로 그런 영상을 산출해 내는 식의 활동의 의미로 정착되었다. 객관적으로 외부에 실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가현假現, 사현似現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대상 자체로 사현하는 식은 어떤 식인가? 우리의 신체(유근신)와 대상 세계(기세간) 및 관념 세계(종자)로 전변하는 아뢰야식이 곧 그와 같은 변현의 식이다. 61) 따라서 아뢰야식의 전변은 대상 자체를 형성해 내는 존재론적 전변, 곧 변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뢰야식의 전변과정 자체가 바로 각각의 신체와 공동의 물질적 대상 세계(色) 및 관념 세계(名)로 변현하는 외화 활동인 것이다. 우리의 현상 세계는 모두 아뢰야식의 변현 결과인 식소변識所變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현상 세계를 생성하는 우리 마음의 심층의 활동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이미 형성이 완료되어 나타난 현상 세계, 즉 이미 현행화된 아뢰야식의 식소변으로서의 현상 세계이지 현상을 형성하는 마음의 활동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상 세계를 우리의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여所與라고 생각할 뿐 우리 자신의 마음이 창출해 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우리 범부가 우리 자신의 마음의 활동을 모두 다 의식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아뢰야식의 활동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 활동이기는 하되 우리가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그런 마음의 활동이다. 그렇다면 왜 나 자신의 마음의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그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것은 우리의 의식 자체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표피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보다 더 깊은 심층의 마음 활동에 대해서는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칠전식七轉識은 아뢰야식에 의거하여 일어나면서도 그 아뢰야식의 전변활동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것이 곧 우리 마음의 근본무명根本無明(avidya)이다. 62) 의식과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활동을 알지 못하기에, 그 무지로인해 아뢰야식의 전변결과인 견분과 상분을 마치 식 바깥의 객관적 실재인 듯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뢰야식의 견분을 객관적 실체인 자아로, 아뢰야식의 상분을 또 다른 객관적 실체인 세계로 집착하는데, 이것이 곧 아집과 법집이다. 63) 유식성을 자각 하지 못한 상태에서 말나식과 의식이 아집ㆍ법집에 따라 허망분별을 행하는 것이다. 불교가 처음부터 비판하여 벗어나고자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근본무명에 기반한 인간 자신의 분별인데, 이는 유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분별지가 항상 비판 대상인 것이다. 그와 같은 의식과 말나식의 분별 구조를 좀더 상세히 살펴보자
2) 의식ㆍ말나식의 분별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전변을 인연변과 분별변으로 구분할 때, 존재 현현의 인연변과 구분되는 분별변이란 바로 무명 집착에 따르는 의식과 말나식의 분별 작용을 의미한다. 아뢰야식의 인연은 식 자체가 견분과 상분, 즉 주관적 심리 활동과 물리적 대상 세계로 이분화되는 과정으로서, 그것은 인연에 따라 발생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조건이자 현상 세계로의 변현이다. 제8 아뢰야식의 분별인 이분에 따라 상분으로 현현하는 대상 세계 또는 그 상분에 대한 견분의 작용 내지 그 존재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64)
문제의 분별, 즉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허망분별은 그러한 식소변으로서의 현상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채 그 각각을 실체화하여 상일주재하는 자아 또는 임지자성의 물질 세계로 사량분별하는 것이다. 그럼 이 협의의 분별은 어떤 구조로 발생하는가?
예를 들어 누군가가 산길을 가다 길가의 무엇인가를 보고 뱀으로 알고 놀라 도망쳤다고 해 보자.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 순간 그는 뱀을 보고 도망친 것이다. 그러나 거기 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본 뱀은 그의 마음이 그려낸 것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가 본 것은 거기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무엇인가를 보긴 보았다. 즉 그가 본 것은 거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본 것은 과연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그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가 본 어떤 것 x는 분명 있는 것이지만, 그는 그 x를 x가 아니라 y인 뱀으로 보았다. 그렇게해서 그는 뱀을 보았지만, 그가 본 뱀 y는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y는 그의 마음이 그린 것일 뿐 거기 실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분별이 어떤 구조를 가지는지는 알게 된다. 무엇인가를 보면서 그 무엇(x)을 무엇(y)으로 보는가가 바로 분별인 것이다. 따라서 분별은 본래 그가 본 x와 그가 본다고 생각한 y의 두 항목으로 구성되는데, 그 둘 다가 식의 대상 즉 식소연識所緣이다. 그러므로 분별에는 서로 구분되는 두 식소연이 있게 되는데, 있는 무엇인가의 x는 본래의 인식 대상으로서의 소연所緣이며, 그것에 대한 분별 결과로서의 y는 인식 결과로서의 소연이다. 유식은 이중 전자를 소소연疏所緣이라 하고, 후자를 친소연親所緣이라 한다. 앞의 예에서 길에 있던 어떤 것 x는 소소연이며 그가 그 순간 직접 떠올린 뱀 y는 친소연이다. 친소연은 바로 그 식 자체의 소변이다. 즉 뱀을 본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식은 바로 그 식 자체가 전변한 뱀을 직접 본 것이다. 인식에 있어 소소연은 인식되어야 할 본질本質이 되고, 친소연은 인식하는 식 자체의 전변 결과로서 생겨난 분별상인 영상影像이 된다. 65)
이와 같이 분별이란 언제나‘~을 …로서 분별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이와 같이 분별이란 두 항을 지닌다. 분별은‘~를 …으로 구분하여 아는 것’인데, x를 x로 바로 알든가, 아니면 x를 아닌 것 즉 y로 잘못 하는 것이다. x를 y로 분별할 때, x는 본래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 즉 소소연이며 y는 식 자체의 인식 방식에 의해 변형되어 인식된 결과로서의 대상 즉 친소연이다. x를 x로 바로 아는 것을 자성분별自性分別이라 하고, x를 x아닌 y로 잘못 분별하는 것을 계탁분별計度分別이라 한다. 길 위에 놓여 있던 x가 노끈이었다면, 노끈을 노끈으로 바로 아는 것은 자성분별이고 노끈을 노끈 아닌 뱀으로 잘못 아는 것은 계탁분별이다.
자성분별:........ x(소소연)를 ........x(친소연)로 ........바로 인식함
계탁분별: ........x(소소연)를 ........y(친소연)로 ........잘못 인식함
유식의 인식론서인『집량론集量論』에서는 이 자성분별과 계탁분별에다 과거를 기억하는 수념분별隨念分別을 더하여 인식에서의 분별을 크게 셋으로 분류한다. 대상의 자상을 있는 그대로 현량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자성분별이라고 하는데, 전오식과 제8식은 모두 자성분별뿐이고 제6 의식이나 제7 말나식도 자성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생각을 따라 과거의 일을 다시 기억해 내는 분별을 수념분별이라고 하는데, 이는 제6 의식만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계탁분별은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자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을 사량분별하는 것으로,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만이 이런 잘못된 분별을 행한다.
제8식 ---- 자성분별
제7식 ---- 자성분별, 계탁분별
제6식 ---- 자성분별, 계탁분별, 수념분별
전5식 ---- 자성분별
이를 앞의 예와 연관시켜 보면 노끈을 뱀으로 판단한 것이 의식과 말나식의 계탁분별이다. 이것이 잘못된 판단인 까닭은 눈앞에 객관적으로 주어진 노끈을 그냥 있는 그대로의 노끈으로 알지 못하고 그에 대한 주관적 영상을 일으켜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소소연의 본질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대상 자체이고 친소연의 영상은 그에 대한 주관적 표상인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 불교가 허망분별을 비판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주관적 심상에 의해 왜곡하는 것을 비판하는 듯이 보인다. 주관적 허망분별의 지양이 곧 독립적인 객관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주관적 식을 부정하고 객관적 경을 인정하는‘무식유경無識有境’이 아닌가?
그러나 위의 비유의 의미는 보다 깊은 곳에 놓여 있다. 우리는 우리 눈앞의 현상에 대해 그것이 그냥 그렇게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돌, 이것은 나무, 저것은 나비, 저것은 뱀으로 각각의 자기본질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식은 이러한 현상 세계 자체를 독립적 객관 실재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인 식소변 즉 아뢰야식의 상분으로 이해한다. 즉 앞의 비유는 우연히 잘못 보고 잘못 판단한 뱀에 대해 그것이 뱀이 아니라 노끈이 아니냐 하는 것을 말하려 함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뱀이라고 생각하는 그 뱀은 실제로는 우리의 마음 자체가 그려낸 식소변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적으로 뱀을 보며 뱀이라고 판단했을 때, 그 판단 역시 계탁분별일 수가 있다. 그럼 여기에서는 무엇을 무엇으로 잘못 보았기에 계탁분별이 되는가?
의식과 말나식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바라보는 이 현상 세계를 식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 실재라고 간주할 경우 그것이 바로 계탁분별이 된다. 유식에 따르자면 현상 세계는 아뢰야식의 변현 결과인데, 그 식소변으로서의 현상 세계(x)를 그러한 식소변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독립적인 객관 실재(y)로 잘못 분별하기에 계탁분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과 말나식의 계탁분별을 앞서 논한 분별 구조대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끈을 노끈으로 바로 보지 못하고 뱀으로 착각하여 황급히 산길을 도망쳐 달려가듯이, 우리는 이 현상 세계가 아뢰야식의 식소변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그 식소변을 나 자신 그리고 세계 자체라고 생각하면서 집착하여 탐심을 갖고 달려들거나 염심을 갖고 달아나는 것이다. 뱀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제로는 뱀이 아니라 노끈이었음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자아와 세계로 집착하는 것이 실제로는 객관적 실유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식에 의해 변현된 식소변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유식이 허망한 계탁분별을 비판하는 것은 경의 객관적 실유성을 부정하면서 그 경을 오직 능변식의 변현 결과로서만 인정하는‘유식무경唯識無境’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의 계탁분별 역시 그 근저에서 아뢰야식이 활동하고 있음으로 인해 가능하다. 분별이나 사량은 그것이 잘못된 경우라 할지라도 이미 무엇인가가 그 잘못 분별ㆍ사량될 근거로서 주어져 있지 않다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이 인연변의 활동 결과 각 유정의 신체와 공동의 기세간과 관념 세계는 아뢰야식의 상분으로, 그리고 그런 상분을 감지하고 유지하는 활동은 아뢰야식의 견분으로 현상화된다. 문제는 의식과 말나식이 그러한 마음의 심층 활동을 자각하지 못한 채 그 활동 결과인 견분과 상분을 각기 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아와 세계로 실체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각각을 객관 실유로 간주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렇게 보면 아뢰야식의 전변은 의식이나 말나식의 전변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아뢰야식의 전변은 우리의 현상 세계를 형성해 내는 존재론적 전변으로서의 변현變現이며, 의식과 말나식의 전변은 그런 현상 세계를 인식하는 인식론적 전변으로서의 분별分別이다. 두 종류의 전변이 모두 견상으로의 이분화란 의미에서 분별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이런 광의의 분별은 의식과 말나식의 계탁분별로서의 협의의 분별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아뢰야식의 견상이원화의 분별은 인연에 따라 발생하는 전변(因緣變)으로서 의타기성에 해당하고, 의식ㆍ말나식의 분별은 그런 아뢰야식 식소변으로서의 현상을 아집과 법집에 따라 계탁분별하는 허망분별의 전변(分別變)으로서 변계소집에 해당한다. 이제 전변하는 식과 전변된 결과로서의 경의 관계를 좀더 명확히 밝혀보기로 하자.
1. 연기적 관계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아뢰야식의 변현이란 식으로부터 현상 존재를 형성해 내는 활동이다. 그리고 의식과 말나식의 분별이란 그렇게 형성된 현상 존재를 경험함으로써 분별식을 얻어 내는 활동이다. 식으로부터 존재로의 이행을 아뢰야식의 활동이라 한다면, 존재로부터 인식으로의 이행은 의식ㆍ말나식의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둘이 과연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식과 경의 관계는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식 또는 마음으로부터 현상 존재를 설명하는 관점과 현상 존재로부터 인식과 경험을 설명하는 관점이 그것이다. 전자처럼 식을 기준으로 삼고 경을 그 결과로 봄으로써 현상 세계란 단지 우리 마음의 변현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관념론’이라면, 후자처럼 경을 기준으로 삼고 식을 그 결과로 봄으로써 우리의 인식이란 단지 존재 자체의 반연일 뿐이라고 간주하는 것은‘실재론’이다. 유식은 이 중 어느 관점에 서 있는가?
인간의 존재와 인식에 대한 설명에 있어 불교는 처음부터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성립시키는 다른 조건 없이 그 자체만으로는 확고한 출발점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해 왔다. 일체를 인연의 화합으로 형성되는 결과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뢰야식 자체든 현상 세계든 모든 것은 다른 하나를 무조건적으로 산출해 내는 절대적 출발점이 아니라 다른 하나를 전제로 해서 성립하는 연기적 존재이다. 식과 경은 상호의존적이며 상호인과적인 관계로 이해된다. 우선 다음과 같은 12지 연기에서 보면 식은 명색의 조건이 된다.
無明 → 行 → 識 → 名色 → 六處 → 觸 → 受 → 愛 → 取 → 有 → 生 → 老死
여기서 제3지의 식과 제4지의 명색은 식을 연하여 명색이 생하는 관계로 설명된다. 즉 식이 명색의 조건이 되는데, 1) 이를‘명색연식생名色緣識生’(식을 연하여, 즉 식을 조건으로해서 명색이 생한다)이라 한다. 식이 인因이 되고, 명색이 과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체를 실체가 아닌 연기소생의 결과로 간주하는 불교에서는 색수상행식 각각에 대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연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렇게 해서 식온識온을 성립시키는 근거가 무엇인가도 묻게 되는데, 불교는 이에 대해 명색이라고 답한다.
〔문〕무엇에 인연하여 식음識陰(識?)이라고 하는가?
〔답〕명색名色을 인因으로 하고 명색을 연緣으로 한 것을 식음이라고 한다.2)
여기에서 주장되는 것은‘명색연식名色緣識’(명색을 연하여, 즉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이다. 즉 명색이 인이 되고, 식이 과가 된다. 그러나 12지 연기에서는 식을 인연으로 해서 명색이 생한다고 했다가 여기서는 또 명색을 인연으로 해서 식이 생한다고 한다면, 이는 순환적 설명이 아닌가? 이는 다음과 같은 순환논증의 오류에 빠진 것은 아닌가?
불교는 처음부터 이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명색은 식識을 연하여 생生하는데, 이제 다시 명색을 연하여 식이 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 가? 3)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실체론적 사유에 대항하는 연기론 자체의 논리 때문이다. 실체론이 현상의 원인을 계속 탐구해 가서 그 궁극적 원인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연기론은 그러한 궁극적 원인을 부정하면서 일체를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고 간주한다. 실체론자들이 일체의 현상 세계를 떠받드는 궁극적 지점을 찾고자 한 것은“아르키메데스는 정체 지구를 그 자리에서 움직이기 위해 단 하나의 확고부동한 점만을 요구하였다” 4)는 그들의 기본 신념에서 잘 드러난다. 태초에 자기 원인으로서의 신이 있어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이나, 빅뱅이 발생하여 그로부터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것이나, 모두 단 하나의 궁극 원인, 단 하나의 기본 원리로부터 일체 존재를 설명하고자 하는 실체론적 논리에 속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연기적 사유는 궁극 원인을 부정하고 그 원인조차도 바로 그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결과를 통해서 다시 설명하므로, 형식논리적으로 보면‘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인因이 다시 과果가 되고 과가 다시 인이 되기에 연기를‘상호인과성相互因果性’또는‘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 규정하기도 한다. 위의 물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답은 일체가 상호의존적을 주장하고 있다.
비유를 들면 세 개의 갈대가 땅에 설 때 서로 의지하여 서는 것과 같다. 하나를 치우면 둘이 설 수 없고 둘을 치우면 하나가 설 수 없으니, 서로 의지하여 선다.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음도 이와 같 다. 서로 의지하여 생장하는 것이다. 5)
이를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식을 연해서 명색이 있고, 명색을 연해서 식이 있다. 두 법이 전전해서 서로 의지하는 것은, 비유 하면 갈대 묶음이 동시에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다. 6)
이처럼 식과 명색, 즉 심층의 식과 현상적 경은 서로 인因과 과果가 되는 상호의존적 순환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 연기에서의 상호의존성의 의미는 좀더 상세하게 규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무명→행→식→명색→육처→…→노사’의 12지 연기에서 각 지가 서로 인이 되고 과가 되는 상호의존성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상호인과의 방향을 한 방향을 이해하지 않고 그 역방향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으로, 이를‘동시적同時的 상호인과’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식과 명색의 경우‘식→명색’과 동시에‘식←명색’도 성립한다는 것으로, 식과 명색이 서로 인이 되고 서로 과가 되는 것이 동시적으로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각 지들이 서로 인과 과로서 성립하는 것은 동시적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감안할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이를 계기적으로 이어지는 관계라는 의미에서‘이시적異時的 상호인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앞서의 동시적 상호인과와 구분되는 것은 12지 연기에서 인과의 방향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성립하지 그 역방향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점이다. 즉‘식→명색’만이 가능하지‘식←명색’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색이 식의 원인으로서 상호인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명색이 직접 식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명색에서 시작해서 육처와 촉을 거쳐 다시 무명과 행으로 이어지면서 결국은 식이 그 과로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즉‘명색→육처→ … →노사→무명→행→식’의 방식으로 인과 관계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이해된 이시적 상호인과에 있어서 명색의 인이 된 식과 그 명색으로 인해서 다시 생한 식은 결코 동일한 식이 아니며, 바로 이 점에서 명색과 식의 상호 관계는 이시적 상호 관계가 된다. 예를 들어‘닭이 알을 낳고, 알이 닭을 존재하게 한다’에서의 닭과 알의 상호의존 관계는 동시적이 아닌 이시적 상호인과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닭이 낳은 알과 그 알에서 자란 닭은 서로 다른 닭이기 때문이다. 닭에서 알로, 그리고 다시 알에서 닭으로 한 번의 순환이 완성될 때, 그 출발 지점의 닭과 마지막 지점의 닭은 이름만 같을 뿐 실제로는 서로 다른 닭이다. 이는 곧 여기에서의 순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된다는 것, 다시 말해 그 순환 안의 상호 관계는 동시적 상호 관계가 아니라 이시적 상호 관계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에 반해 갈대 세 개가 서로 기대섬으로써 형성되는 상호의존 관계는 이시적이 아닌 동시적 상호 관계이다. 하나에 의거해서 두 개가 서고 그 두 개에 의거해서 다시 하나가 선다고 할 때, 앞의 하나와 뒤의 하나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상호인과 관계로서 순환을 형성하는 상호 의존성은 동시적 상호의존과 이시적 상호의존으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12지 연기에서의 상호의존성은 정확히 어디에 해당하는가? 원시 경전에서부터 연기를 설할 때면 항상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다는 일방향의 인과만을 말하지 그 반대 방향의 인과를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연기설 자체가 연기 법칙에 따라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고통의 삶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고자 하는 발생론적 논리임을 감안한다면, 12지 연기에서의 상호인과 관계는 그러한 발생이 가능하게끔 하는 시간 흐름이 고려된 이시적 상호인과 관계가 아닐 수 없다 7). 연기적 상호순환 관계 속에서 무엇인가가 새롭게 발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상호인과가 동시적이 아닌 이시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12지 연기의 상호인과 관계는 서로가 규정하고 규정받는 동시적 상호인과의 닫힌 구조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변천이 가능한 이시적 상호인과의 열린 구조를 이루며, 그러므로 그 안에서 시간적ㆍ역사적 진행이 가능해진다. 8)한마디로 말해 12지 연기에서의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적 순환 관계는, 시작과 끝이 맞물린 원과 같은 닫힌 구조의 동시적 상호인과가 아니라, 시작과 끝이 어긋나 있는 나선형 원과 같이 시간적 변천과 역사성을 허용하는 이시적 상호인과이다. 그렇기에 연기의 순환 과정속에서도 시간과 더불어 진행되는 변화인 발생과 소멸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식과 명색의 상호인과적 순환 관계는 곧 심층의 식과 현상적 경의 상호순환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또 아뢰야식에 의한 현상존재로의 변현과 그렇게 변현된 현상을 전제로 한 의식과 말나식의 분별이 서로 인이 되고 과가 되는 순환 관계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뢰야식의 변현과 의식ㆍ말나식의 분별의 순환 관계를 한층 상세하게 논한 것이 곧 아뢰야식의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과 의식ㆍ말나식의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의 관계이다.
1) 종자생현행과 현행훈종자의 순환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유식 철학의 체계 가운데 앞서 논의된 식과 경의 순환 관계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종자의 현행現行과 훈습熏習의 관계이다. 현상으로 현행하거나 현행으로부터 다시 훈습될 종자란 무엇인가?
아뢰야식 내에 함장되어 있다가‘현상으로 변현하는 힘’, 나아가 의식이나 말나식에 있는‘현상을 분별하는 힘’을 종자라고 칭한 것은 그 힘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종자라고 칭하는 생명체의 씨앗에 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그루의 나무의 존재를 결정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햇빛이나 물 등의 중연衆緣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나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는 연, 즉 인연因緣은 바로 그 나무의 종자이다. 땅 밑에 심어진 종자로부터 싹이 나고 줄기가 생겨 결국 한 그루의 나무가 형성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형성된 나무는 그냥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지상의 그 나무는 다시 자신의 종자를 남기고, 그 종자는 다시 겨우내 땅 밑에 머물러 있다가 때가 되면 다시 지상으로 싹을 틔운다.
아뢰야식 내의 종자와 이 세계와의 관계는 바로 땅 밑 나무의 씨앗과 지상의 나무의 관계에 상응한다. 아뢰야식 즉 우리의 마음 안에는 무수한 종자가 함장되어 있다. 구체화되거나 현실화되지 않은 이런저런 생각들과 이런저런 욕망들이 우리 마음을 이루고 있다. 그 마음이 한시도 고정적으로 정지해 있지 않은 것은 마치 땅 밑 씨앗이 고정되어 정지해 있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것이기에 계속 변화하고 바뀌어 간다. 우리의 현상 세계가 항상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것은 아뢰야식 내에 함장되어 있는 종자, 세계로 변현할 종자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매순간 변화하며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아뢰야식 또는 종자식은 매순간 굽이쳐 흐르면서 변화하는 폭류瀑流에 비유된다.
(아뢰야식은) 항상 전변함이 폭류와 같다. 9)
매순간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하나의 연속성을 이루는 이와 같은 변화와 흐름 때문에 아뢰야식은 폭류에 비유된다. 이는 아뢰야식 내의 종자가 끊임없이 변화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뢰야식 내에서 종자가 계속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을‘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라고 한다.
살아 있는 씨앗이기에 그 생몀력이 충만하게 무르익어 때가 되면 두꺼운 지면을 뚫고 나와 한 그루 나무로 자라는 것처럼, 아뢰야식 내에서 폭류처럼 흘러가던 종자들 중 인因과 연緣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종자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의 모습으로 현상화한다. 그런데 그러한 종자의 현실화는 어느 몇몇 순간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폭류로서의 전체 아뢰야식의 흐름 속에서 끊이지 않고 현상화되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현상 세계는 우리에게 간단없는 연속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현상화되지 않은 채 전체 폭류의 흐름 속에 남겨져 있는 종자를 잠재식潛在識으로서의 아뢰야식이라고 한다면, 그 중 인연의 화합에 의해 구체적 현상 세계로 드러난 부분을 바로 그 순간의 현행식現行識으로서의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아뢰야식 내의 잠재적 종자가 구체적인 현상 세계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종자의 현행화現行化라 하며, 이를‘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 한다. 종자가 현행화한 결과가 바로 이 세계이다. 이는 세계를 아뢰야식의 외화外化, 종자의 자기실현으로 보는 것이다. 종자란 현상 세계를 창출하는‘변화 차별의 공능’이며, 현상 세계란 바로 그 공능의 자기실현이다. 종자가 현행화하여 구체적인 현상 세계를 이룬다. 현상은 종자의 현현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식은 아뢰야식이 형성하는 세계를‘아뢰야식 내에 함장되어 있던 잠재적 세력으로서의 종자들이 현상화되어 나타난 세계’, 즉 식이 전변화한 결과, 한마디로 식소변識所變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종자의 현행으로 그려진 이 세계가 우리 마음의 변현임을 의식하지 못한다. 아뢰야식의 활동 자체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주관적 활동은 감추어진 채 활동 결과만이 의식에 주어지므로, 우리는 그것이 마음 바깥의 객관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때문에 그것을 객관 자체라고 집착하여‘이것은 나, 저것은 너’, 또는‘이것은 나, 저것은 세계’라는 식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와 세계에 대한 아집과 법집이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아뢰야식의 활동성을 그 자체 그대로 올바르게 자각하지 못하는 무명 속의 의식 또는 말나식은 현상적 세계를 또다시 자신의 방식대로 사량분별한다. 그리하여 현상 세계로 변현된 종자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종자가 의식과 말나식의 분별 작용을 통해 새롭게 형성되어 마음(아뢰야식)에 심어진다. 이와 같이 의식과 말나식의 활동에 의해 우리 마음에 종자가 심어지는 과정을 유식에서는‘종자의 훈습熏習’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곧‘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이다. 땅 밑 씨앗으로부터 자라난 나무가 다시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 땅에 심는 것과 같다. 이렇게 종자를 훈습할 수 있는 식 즉 능훈식能熏識은 칠전식과 그 작용이다.
오직 칠전식七轉識과 그 심소心所만이 뛰어난 작용이 있어…… 능훈能熏이 될 수 있다.10)
그리고 육식과 말나식에 의해 훈습된 종자를 받아들이는 식 즉 소훈식所熏識은 바로 아뢰야식이다.
오직 이숙식(아뢰야식)만이 ……종자를 훈습받을 수 있다. 11)
이렇게 보면 종자와 현행 간에는 세 가지 관계가 성립한다. 현행식에서부터 종자가 심어지는 현행훈종자의 과정과, 그렇게 훈습된 종자가 생멸을 거듭하며 새로운 종자로 성숙해 가는 종자생종자의 과정, 그리고 그 성숙된 종자가 드디어 현행식으로 화하는 종자생현행의 과정이 그것이다. 그런데 현행훈종자나 종자생현행에 있어서는 그 각각이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즉 현행훈종자에서 현행하는 순간과 그 현행으로 인해 종자가 훈습되는 순간은 같은 순간이며, 종자생현행에서 종자가 현실화하는 순간과 현행이 성립되는 순간은 동시적인 것이다. 반면 종자생종자에 있어서는 인으로서의 앞의 종자가 멸하고 그 다음 종자가 과로서 발생하는데, 그 인과 과의 종자는 동시적이 아니라 이시적異時的이다. 그래야만 생멸하면서 성숙하는 종자의 흐름이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
이와 같은 세 과정을 잠재적 종자와 현행식이라는 측면에서만 고찰할 경우, 종자생현행과 현행훈종자는 마치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순환적 관계인 듯 이해될 수도 있다. 거기에다 종자생종자의 과정을 덧붙이면 종자와 현행 간의 관계는 흔히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도표화된다.
이와 같이 보면 종자생현행과 현행훈종자의 순환은 마치 시작과 끝이 맞물린 하나의 원처럼 보인다. 만일 종자와 현행이 정말로 이러한 순환 구조를 이룬다면 현행화한 종자와 그 현행 후 다시 심어질 종자는 동일한 종자가 되고,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는 단지 무의식적 종자 차원에서만 일어날 뿐 현행식 자체는 종자의 흐름에 아무런 변화도 야기시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종자와 현행 간의 순환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현상으로의 변현인 종자생현행에서의 현행은 아뢰야식의 현행인데 반해 현행훈종자에서의 현행은 능훈식으로서의 칠전식으로, 그 현행식의 식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이처럼 현행식 자체가 구분되므로 현행을 일으키는 종자와 현행을 통해 새로 훈습된 종자 역시 동일한 종자가 아니게 되는데, 이는 곧 종자 흐름상의 변화가 단지 잠재적 차원에서의 종자생종자 과정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행식의 차원에서도 발생 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이 점을 감안하면 종자생현행과 현행훈종자의 순환은 위에서와 같이 시작과 끝이 맞물리는 하나의 폐쇄된 평면적 원일수가 없다. 따라서 종자식과 현행식의 순환은 그 순환 관계 속에 있는 현행식 자체를 구분함으로써 아뢰야식의 변현과 칠전식의 분별 간의 순환으로 좀더 정확하게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변현(인연법)과 분별(분별변)의 순환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종자생현행으로 표현될 수 있는 종자의 가장 근본적 현행화는 근본식으로서의 아뢰야식의 현행화이다. 13) 앞에서 논의한 대로 아뢰야식의 상분과 견분으로의 이원화 과정인 변현이 곧 아뢰야식의 현행화 과정인 것이다. 아뢰야식의 변현을 통해 현상 세계, 즉 개인적 신체와 그 신체가 몸담고 있는 기세간(상분)이 형성되고, 그렇게 형성된 세계를 연하는 마음의 작용(견분)이 발생하는 것이다.
상분인 기세간과 견분인 마음의 작용, 이 둘은 아뢰야식 자체의 변현결과이다. 그런데 이 식의 활동성을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 인해 그들 식소변을 각각 별개의 실체인 것으로 집착하여 사량분별하는 현행식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의식과 말나식의 작용이다. 이를 이뢰야식의 변현과 구분하여 의식과 말나식의 분별이라고 한다. 앞서 논의하였듯이 현행훈종자로서 종자를 훈습하는 현행식은 현행 아뢰야식이 아니라 바로 현상을 집착 분별하는 현행 의식과 말나식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종자생현행의 근본 현행식은 현상으로 변현하는 현행 아뢰야식이며, 현행훈종자의 현행식은 현상을 분별하는 능훈으로서의 의식과 말나식이다. 이처럼 아뢰야식의 변현과 의식ㆍ말나식의 분별은 분명히 서로 구분되는 것이므로, 종자생현행과 현행훈종자 또는 변현과 분별의 순환 관계는 유식학자들에 의해 흔히 그려지듯 다음과 같은 시작과 끝이 서로 맞물리는 원으로 표현되어서는 안된다.
그 순환 구조를 이런 방식으로 읽어서는 안되는 까닭은, 이 경우 현행식으로서의 아뢰야식의 변현과 현행식으로서의 의식ㆍ말나식의 분별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식학 서적에 이런 도표가 등장하는 것은 현행식으로서의 아뢰야식의 의미가 올바로 이해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아뢰야식의 전변은 단지 종자생종자의 활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자생현행의 변현이라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이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아뢰야식을 단지 잠재적 종자의 흐름으로서의 아뢰야식만으로 간주하고 종자가 현행화하는 변현 과정으로서의 현행 아뢰야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단지 종자식, 잠재식으로만 이해하고 현행 아뢰야식의 측면을 간과한 것이다. 14)
이처럼 아뢰야식을 단순히 잠재식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객관 실재라고 간주되는 현상 세계란 것이 실은 아뢰야식의 전변 결과 즉 식소변일 뿐이라고 설명하는 유식의 기본 원리에 이미 어긋난다. 아뢰야식을 단지 잠재식만으로 간주함으로써 현상세계(신체와 기세간과 종자)로 전변하는 현행 아뢰야식의 활동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고, 결국에는 현상 세계의 존재 자체가 현행 아뢰야식의 식소변이라는‘유식무경’에 함축된 존재론적 의미를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식이 존재론이 아닌 단순한 인식론 또는 심리 분석으로 축소 이해되고 만다. 15) 현상 세계로 변현하는 현행식으로서의 아뢰야식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 내면서 아뢰야식의 변현과 의식ㆍ말나식의 분별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종자생현행과 현행훈종자 또는 변현과 분별의 순환을 그려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이와 같이 변현(종자생현행)과 분별(현행훈종자)간에 성립하는 순환이 그리는 원은 앞서와 같이 시작과 끝이 맞물린 완료된 원이 아니라 각 순간마다 변화의 여지가 남겨지는, 시작과 끝 사이에 틈새가 존재하는 그런 나선형 원이 된다. 즉 현행화한 종자와는 구별되는 다른 종자가 훈습될 수 있게끔 변화의 여지가 남겨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 안에도 역시 순환은 존재한다. 현행 아뢰야식의 변현과 현행 의식ㆍ말나식의 분별은 한 시점에서 놓고 볼 때에는 분명 서로 구분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인식 과정을 시간적ㆍ역사적으로 살펴볼 때에는 그 둘은 그렇게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뢰야식 내에 함장되어 있다가 현상 세계로 변현하게 된 종자는 결국 의식과 말나식의 분별 과정을 통해 심어진 종자이기 때문이다. 현상으로 변현할 종자가 이미 분별소산의 종자라면, 존재 생성과 그 존재에 대한 인식, 즉 변현과 분별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순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분별적 인식을 통해 형성된 종자가 아뢰야식에 심어졌다가 다시 그것이 현상으로 현현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변현과 분별 사이에 순환이 존재하는 것은 현행 아뢰야식의 상분인 신체와 기세간으로 변현할 종자가 근원적으로는 우리의 의식이나 말나식의 분별 속에 성립하는 명언종자이기 때문이다. 개념적 분별을 통해 형성되고 훈습된 명언종자가 아뢰야식 내에서 성숙하여 현상 세계로 변현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오감을 통해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이 존재하는 현상 세계는, 즉 자상自相으로 드러나는 대상 세계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의식적ㆍ의지적 분별 작용속에서 형성된 개념의 현현 결과이다. 우리가 개념적으로 분별하고 집착하는 대로 우리의 대상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식의 작용을 특정 순간의 단면으로 볼 경우 아뢰야식의 변현에 의해 형성된 현상 세계와 그에 대한 의식ㆍ말나식의 작용안에서 사량분별된 인식 대상은 서로 다른 것으로 구별되지만, 발생학적으로 또는 통시간적으로 고찰해 볼 경우 그 존재와 인식은 본질적으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의식적 분별을 많이 행할수록 현현하는 대상 세계 자체는 더욱더 분별적으로 되고, 의지적 집착을 많이 행할수록 현현하는 현상 세계 자체는 더욱더 집착적으로 되는 것이다.
아뢰야식의 변현과 의식ㆍ말나식의 분별 사이에서 순환을 현성하는 결적적 요인은 바로 우리 식의 활동을 주도하는 종자이다. 의식ㆍ말나식의 분별 작용을 통해 아뢰야식 안에 심어졌다가 다시 현상 세계로 변변하게 되는 종자, 즉 명언종자인 것이다. 여기서‘명언名言’이 함의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또 그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사량분별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명언, 즉 개념 또는 언어라는 것이다. 아뢰야식이 그려 놓은 세계,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 그것이 우리의 마음인 아뢰야식 안에 갖추어진 개념적 힘, 즉 종자의 발현이다. 이처럼 우리가 보는 세계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명언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통찰이‘유식무경’의 핵심을 이룬다. ‘무경無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식 대상인 경境은 마음 바깥의 실유實有가 아니라 가유假有라는 것이다. 여기서 가假란 가설 또는 시설을 뜻한다. 아와 법을 시설하는 근본 원동력이 바로 종자 즉 명언(개념 내지 관념)인 것이다.
이러한 유식의 통찰은 현대 철학의 통찰과 통하는 바가 있다. 현대의 우리들 역시 세계를 보는 방식 또는 세계를 읽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언어 또는 개념이라고 이해한다. 우리가 세계를 읽어 내고 분별 해석하는 방식은 우리 자신이 가진 언어 또는 개념적 틀에 의해 규정된다. 복잡하고 자세한 개념적 틀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 세계관 또한 더욱 복잡하고 자세해진다. 상세한 개념적 틀을 갖춘 자에게 세계는 상세하게, 투박한 개념적 틀을 갖춘 자에게 세계는 투박하게 보여진다. 누군가에게는 몇 개의 점으로 보이는 색깔 배합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문장이나 단순한 낙서로 보일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인간에게 마시는 물로 보이는 것이 물고기에게는 거주할 만한 집이나 길로 보이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아귀에게는 피와 고름으로 보이고 천인에게는 맑은 수정처럼 보일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서 단지 다르게 해석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세계는 일단 보이고 나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는 그 방식대로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험을 규정하는 그러한 개념은 불변적 의미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가? 16) 유식에서는 그 개념 자체가 다시 경험의 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현상 세계로 현현할 종자는 불변의 의미로서 우리에게 본래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의식ㆍ말나식의 분별 작용에 의해 우리 마음에 심어진 잔재들일 뿐이다. 의식이나 말나식이 세계를 읽고 해석하는 방식의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그 경험의 흔적들은 점차적으로 세계가 마음 안에서 그런 방식으로 현상하게끔 만든다. 그렇게 해서 세계가 보여지는 방식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개념을 가졌는가에 따라 세계를 달리 읽어 내게 되지만, 역으로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읽어 내는가에 따라 세계를 읽어 내는 개념 또한 달라지게 된다. 즉 개념에 따라 경험이 바뀌고, 그 경험의 축적에 따라 다시 개념이 바뀐다. 종자에 따라 세계의 현상 방식이 달라지며, 그렇게 현상한 세계의 경험에 따라 또 다른 종자가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개념이 우리의 경험을 규정하고 우리의 경험이 다시 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은 일종의 순환이다. 서로가 인이 되고 과가 되는 상호인과적 또는 상호의존적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식과 경, 존재와 인식이 서로 순환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는 그 순환고리 안에 갇혀 버린 존재란 말인가? 우리가 어떤 세계를 형성하는가를 우리의 이전 경험이 어떠했는가에 의해 결정되고,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가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형성해 놓았는가에 의해 결정되고……, 이런 식으로 존재와 인식이 서로를 규정하며 순환을 이룰 때 그 안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일체가 상호의존적 연기 관계 안에 맞물려 있다면 그 규정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이는 곧 과거의 업業에 의해 현재의 행위가 규정되고 이 현재의 행위가 다시 미래를 규정하는 업이 된다면, 그러한 업의 순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과거 업에 의한 규정으로부터의 벗어남, 인과적 필연성에 의해 규정받지 않음을‘인과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또는‘업으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한다면, 인간에게 자유 또는 해탈은 과연 존재하는가? 현상으로 전변하는 아뢰야식의 변현과 그 현상을 인식하는 의식ㆍ말나식의 분별 간의 순환 구조를 간파한 유식에 있어 해탈이란 과연 무엇인가?
1) 식의 삼성과 전의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유식에서의 해탈은 번뇌와 무명으로부터 열반과 지혜로 전환하는 전의轉依(asraya-parivrtti)로 설명된다. 무명과 번뇌가 있는 한 우리의 삶은 업의 순환성으로부터, 그리고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전의란 바로 그와 같은 번뇌를 열반으로, 무명을 지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두 가지 추중장애추重障碍(번뇌장과 소지장)를 끊음으로써 능히 의타기依他起상의 변계소집遍計所 執을 버리고 능히 의타기상의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얻는다. 번뇌장煩惱障을 전환하여 대열반大涅槃 을 얻고 소지장所知障을 전환하여 대지혜大智慧를 증득한다. 17)
유식은 전의의 의미를 식識의 참된 본성, 즉 식의 실성實性을 통해 해명한다. 즉 현상으로 변현하는 식의 자성과 그런 현상을 집착 분별하는 식의 자성을 각각 의타기성依他起性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설명한 후, 전자로부터 후자를 배제함으로써 남겨지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을 해탈적 식의 자성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식의 삼자성三自性에 대해 좀더 상술해 보자.
현상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모두 각각의 위치에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저것과 무관하고 저것은 이것과 무관하게 각각 독립적 존재인 듯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현상 사물들이 실제로 그와 같이 실유성을 가지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는 연기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것도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을 갖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연衆緣에 따라 생한다는 것이다. 현상이란 이와 같이 인연에 따라 생하게 된 비실체적 현상이다. 이처럼 자신 이외의 중연이 갖추어져 생하게 되는 것을 유식은‘다른 것에 의지하여 생한다’는 의미에서‘의타기성依他起性’(Paratantra-svabhava)이라고 한다.
연緣을 따라 생하므로 의타기依他起라 한다. 18)
그렇다면 현상을 형성하는 중연 중 가장 근본적인 직접적 원인, 즉 인因은 무엇인가? 현상을 형성하는 직접적 원인을 그대로 현상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현상으로 변현하는 아뢰야식과 그 안에 함장된 종자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일반 연기설과는 다른 유식의 특징이다. 유식에 따르면 존재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은 바로 식의 종자이다. 그러므로 일체 존재는 아뢰야식 내의 종자가 변현하여 이루어진 식소변識所變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자아 또는 세계라고 실체화하는 것은 아뢰야식 자체의 전변에 의한 식소변으로서의 견분과 상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아뢰야식 또는 마음을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식은 이러한 현상을 실유實有가 아니라 가假로서 시설된 것, 즉 가유假有라고 말한다. 아뢰야식 내의 종자가 중연에 따라 현상으로 전변하는 변현 과정은 바로 인연 세력에 따라 발생하는 의타기 활동이다. 이처럼 아뢰야식의 변현으로서 현상이 생기하는 원리가 바로 의타기성이다.
그런데 이처럼 인연의 화합으로, 즉 의타기로서 발생하는 아뢰야식의 견분과 상분에 대해 그 실상을 알지 못하는 무명에 쌓인 범부는, 마치 그 둘이 서로 독립적인 상주불변의 객관적 실체인 듯 착각한다. 상일주재의 자아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객관 물질 세계 또는 관념 세계가 유정의식을 떠나 그 자체로서 상주하는 것처럼 계탁분별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뢰야식의 식소변으로서의 현상을 그 현상 근거로서의 식을 사상한 채 실체화하고 고정화하여 집착ㆍ분별하는 것을‘두루 계산하여 집착한다’는 의미에서‘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Parikalpita-svabhava)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이 집착된 상일주재의 자아나 항속적 객관 세계가 그렇게 변현하는 식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바로‘유식무경唯識無境’이 의미하는 바이다.
각종 변계(분별)에 의해 각종 사물을 변계한다. 그렇게 변계소집된 것은 자성自性이 있지 않다. 19)
이와 같이 아뢰야식의 견상분見相分을 실체화하고 계탁분별하는 식은 앞서 논의하였듯이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이다. 따라서 변계소집성의 식, 즉 능히 변계遍計하는 식은 바로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이 된다.
오직 제6식과 제7식의 심품心品에만 능히 변계鞭計함이 있다. 20)
제7 말나식의 근본무명에서 비롯되는 아집과 법집이 바탕이 되고 그 위에 의식적 분별이 더해지게 되면 자아 및 세계를 자체 존재로 분별 집착하게 된다. 이렇게 의타기에 의해 생긴 가유假有가 무명에 쌓인 허망한 뜻(妄情)에 따라 실유實有로 간주되지만 실제의 이치로는 그것이 무無라는 의미에서 그러한 변계소집을‘정유리무情有理無’라고 말한다. 문제는 그와 같은 아뢰야식의 활동을 알지 못하는 무명을 벗어나 실상을 자각함으로써 허망분별의 변계소집을 극복하는 일이다. 즉 인연에 따라 변현된 의타기의 현상 세계를 욕망과 집착에 따라 허망분별하지 않은 채 그 모습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아집과 법집을 벗어 버린 의타기의 현실 자체를 유식은‘원성실성圓成實性’(Pariniapanna-svabhava) 이라고 한다.‘두루 원만함’의 원圓과‘성취된 모습’의 성成과‘진실한 모습’의 실實의 의미를 합하여 원성실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공二空(我空과 法空)에서 나타나는 원만하고 성취된 모든 법의 참다운 성품을 원성실성圓成實性 이라고 한다. 21)
아我와 법法이 의타기의 가유假有이고 실아실법의 실유實有가 아니라는 것을 앎으로써 변계소집을 벗어나면,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서 그 여여如如한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 현상의 참된 모습을 원성실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집과 법집에 기반한 의식과 말나식의 허망한 계탁분별을 벗어나면 현상은 삼층 아뢰야식 내의 종자의 변현으로, 인연변의 의타기소생으로 원만성취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의타기로부터 변계소집을 떠나면, 즉 아집ㆍ법집의 실체화를 떠나면 그것이 곧 원성실성이다.
이것(원성실성)은 의타기성에서 앞의 변계소집성을 멀리 떠난 것이다. 이공二空(我空과 法空)을 통 해 드러나는 진여眞如를 그 자성으로 삼는다.22)
인연에 따라 생하는 식識의 의타기성과 그 의타기에 따라 현현하는 현상 자체는 주관의 변계소집을 떠나 그 자체로 보면 원만구족한 것이다. 따라서 유식에 있어 전의轉依란 의타기에서 변계소집을 제거하고 원성실성만이 남겨지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23) 이처럼 의타기를 중심으로 해서 전의가 가능한 것은 의타기가 변계소집으로 나아가는 염오染汚적 분별성과 원성실성으로 나아가는 청정한 진실성의 양 측면을 지니기 때문이다. 의타기에 포함되어 있는 이 양 측면, 즉 생사를 이루게 될‘분별성’의 부분과 열반을 이루게 될‘진실성’의 부분을 유식은 각기 염분의타染分依他와 정분의타淨分依他라고 부른다. 염분의타의 분별성은 곧 변계소집성을, 정분의타의 진실성은 곧 원성실성의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의타기는 염染과 정淨의 양 측면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일체의 염분의타染分依他와 정분의타淨分依他가 모두 그러한 의타기에 포함된다.24)
따라서 전의는 의타기의 일부인 염오성을 버리고 의타기의 다른 부분인 청정성을 취해 가는 과정이다. 즉 의타기에서 변계소집의 염오의타기를 버리고 원성실의 청정의타기를 얻는 것이 전의인 것이다.
(轉依의) 의依는 소의所依를 뜻하는데, 곧 의타기로서 염정법의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염은 허망한 변계소집을 뜻하며, 정은 진실한 원성실성을 뜻한다. 전轉은 두 부분의 전사轉捨와 전득轉得을 뜻한다. 계속하여 무분별지를 닦아 본식 중의 두 추중장애를 끊으므로 능히 의타기상의 변계소집을 전사하고 의타기상의 원성실성을 전득한다.25)
이러한 전의 과정을 간단히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염분의타기를 버리고 정분의타기를 얻는 전의를 달리‘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표현한다. 즉 염분의타기로서 발생하는 번뇌적 앎인 유루有漏의 지식知識을 버리고, 정분의타기의 번뇌ㆍ집착이 없는 무루無漏의 지혜智慧를 얻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전의를 통해 변화된 집착 없는 식을‘지혜智慧’라고 한다.
결국 유식에 있어 전의란 현상에 대한 앎을 그 자체로 모두 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 현상 자체가 단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허망 집착을 벗은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구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집착된 식, 즉 식에서의 집착만이 부정되는 것이다. 집착을 제거함으로써 식을 지혜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26) 그렇지 않고 만일 우리의 식에 의해 변현된 세계와 그러한 식 작용을 모두 다 버려야 한다면, 곧 변현된 경境과 변현하는 식識을 모두 떠나야 한다면 어디에서 열반을 구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유식은 의타기 중에서 집착되지 않은 청정분을 원성실성으로 인정하고, 집착을 떠나 청정의타기를 얻는 것을 전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타기 중의 염오분을 제하고 청정분만을 얻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순환 속의 해탈의 길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의타기에서 염오의 변계소집을 제거하고 청정분을 획득하는 전의轉依의 수행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의타기에서 변계소집에 상응하는 염분의타기를 버리고 원성실성에 상응하는 정분의타기를 얻는 전의가 가능하자면, 우선 의타기상에서 청정분과 염오분이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전사轉捨할 변계소집성과 전득轉得할 원성실성이 확연히 구분되어야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의타기와 변계소집이 그렇게 간단히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타기는 곧 현상으로 전변하는 아뢰야식의 변현을 뜻하고 변계소집은 곧 현상을 집착ㆍ사량하는 의식과 말나식의 분별을 의미하는데, 앞서 논의한 대로 변현과 분별은 서로 순환관계에 있다. 다시 말해서 변현의 의타기와 분별의 변계소집이 서로 순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현현하는 대상 세계는 바로 의타기하는 종자의 현행인데, 그 종자 자체는 바로 우리의 분별적 의식이 낳은 결과이므로 의타기 안에는 이미 변계소집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의타기 중에서 어디까지가 염오의타기이고 어디까지가 청정의타기인지를 확연히 구분해 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만일 세계가 우리의 분별 작용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 실재였다면, 달리 말해 존재 생성의 의타기가 그 존재를 분별 집착하는 우리의 변계소집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진행되는 원리였다면 의타기의 청정분과 염오분을 구분하는 작업은 쉽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변계소집 결과의 종자(분별 종자, 인식 종자)를 떠나 현상 세계로 변현되는 종자(변현 종자, 존재 종자)가 따로 있었다면, 즉 우리의 분별과 무관하게 세계가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었다면 의타기로부터 염오의 부분을 제거하고 청정의 부분만을 취하는 전의轉依는 비교적 간단히 수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주관적 집착이나 분별을 가라앉히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객관 세계만을 보기만 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존재 생성의 의타기는 이미 변계소집의 분별에 의해 물들어 있다. 현상으로 의타기하는 종자는 곧 분별하는 마음 작용이 남긴 종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현상 세계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것이 분별을 벗어난 순수한 청정의타기의 생성인지, 아니면 분별ㆍ망집에 의해 발생한 염오의타기의 결과인지를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27) 의타기와 변계소집이 종자를 매개로 서로를 규정하는 순환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앞서 논의한 아뢰야식의 변현과 의식ㆍ말나식의 분별 간의 순환과 일치한다.
도표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의타기로서 변현된 현상 세계와 그것에 대한 의식ㆍ말나식의 분별 작용이 구분되는 것은 의식 표층에서의 일이다. 아뢰야식의 활동성 자체를 자각하지 못하는 무명의 의식에 있어서 현상 세계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독립적 객관 실유로 간주되고, 인식은 단지 주관적 의식 현상으로만 간주된다. 그리고 그러한 범부 의식으로 삼성三性을 해석하면, 의타기는 객관적 현상 세계의 생성 원리로 해석되고 변계소집은 집착으로 오도된 주관적 인식 원리로 해석되며, 전의는 모든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 인식 태도로의 전환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객관 세계의 실유성을 부정하며 그것을 심층 아뢰야식의 식전변 결과로 설명하는 유식에 따르면, 그와 같은 경과 식, 존재와 인식, 객관과 주관의 이원론은 아뢰야식의 활동을 알지 못하는 무명에서 비롯된 이원화일 뿐이다. 우리의 인식 경계인 객관적 존재는 그와 같이 인식하는 심층 아뢰야식의 작용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을 떠난 객관적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곧 유식무경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식과 경, 또는 인식과 존재가 분리되지 않는 심층 아뢰야식의 차원에서 그 둘의 순환 관계가 성립한다. 객관 세계로 변현할 아뢰야식 내의 종자는 바로 그러한 객관 세계에 대한 분별적 인식 결과로서 심어진 종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심층에서 작용하는 변현의 의타기는 이미 분별의 변계소집에 의해 물들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의타기상에서 변계소집의 염분의타기를 제거하고 원성실의 정분의타기를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심층 종자가 현상 세계로 변현하고, 그렇게 변현된 현상에 대한 분별적 경험이 다시 종자를 남기고, 또다시 그 종자가 현상 세계로 변현하는 방식으로 순환적 상호규정이 반복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그 순환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전의를 가능하게 하는 염오와 청정의 구분은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논의한 대로 변현과 분별, 의타기와 변계소집 간의 순환을 인정한다면 염오와 청정, 변계소집과 원성실성의 구분은 결코 의타기를 일으키는 종자 또는 의타기 자체, 나아가 의타기 결과로서의 현상 자체안에서 구할 수는 없다. 의타기의 발생 근거로서의 염오종자와 청정종자를 구분한다거나, 의타기 자체의 발생을 변계소집의 염오의타기나 원성실성의 청정의타기로 구분한다거나, 아니면 의타기의 결과인 현상 자체를 염오의 현상이나 청정한 현상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이다. 28) 문제는 현상 세계 자체가 어떤 인연 또는 어떤 종자에 의해 현상으로 현현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의타기에 있어 염오와 청정의 구분은 현재 순간의 의타기에 대해 그 과거를 소급해 올라감으로써 대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변계소집과 원성실성, 염오와 청정의 구분이 의타기를 일으키는 종자 자체에서 또는 종자로 인한 의타기 결과의 현상 자체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 남은 길은 그러한 현상에 대한 우리의 현재적 의식 상태의 차이에서 구하는 수 밖에 없다. 즉 문제는 의타기의 현상을 지금 의타기의 것으로서 자각하느냐 자각하지 못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의타기를 의타기로서 자각한다는 말은 현상 자체가 의타기하는 식의 변현이라는 사실, 즉 일체의 유식성을 자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의식 심층에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아뢰야식의 활동을 의식적으로 직관한다는 뜻이다. 현재의 외적ㆍ물리적 현상 세계나 내적ㆍ심리적 현상 세계에 대해 그런 현상 세계를 일으킨 아뢰야식의 의타기적 변현 과정 자체를 자각한다는 뜻이다.
아뢰야식의 변현 활동 자체를 자각함으로써 심층의 무명이 제거되고, 그리하여 식소변의 현상을 실체화하여 집착하는 변계소집이 극복된다. 아뢰야식의 변현 결과인 현상이 바로 아뢰야식의 변현 그 자체로서 올바르게 인식되므로 더 이상 의식이나 말나식의 변계소집에 의한 왜곡된 분별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타기의 과정 자체가 자각되었을 경우의 의타기는 집착 없는 청정의타기가 되고, 자각되지 못하여 무명 속에 진행되는 의타기는 집착이 따르는 염오의타기가 된다. 결국 의타기의 발생 자체가 염오냐 청정이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의타기를 의타기로서 자각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 의식의 활동이 집착에 물든 염오인지 집착을 벗어난 청정인지 구분되는 것이다. 29) 의타기의 과정이 의식 차원에서 자각되어 의식ㆍ말나식의 변계소집적 왜곡이 발생하지 않는 경우를 앞서의 순환과 구분하여 도표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는 곧 아뢰야식의 변현 활동이 그대로 자각될 경우 변현된 현실에 대한 의식ㆍ말나식의 왜곡된 분별이 사라지게 됨을 뜻한다. 다시 말해 무명에서 발생하던 이원화의 분할선(중간의 점선), 즉 경과 식 또는 존재와 인식을 이원화하던 분할선이 사라지면서 일체는 존재하는 대로 인식되고 인식되는 대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의식과 말나식의 분별은 이제 현상을 왜곡시키는 계탁분별이 아니라 자성분별이며, 그 파악된 대상은 이제 독영경獨影境이나 대질경帶質境이 아니라 식소변으로서의 현상 자체인 성경性境이다. 현상의 영상이 아닌 본질을 인식하는 것이다. 30)
이처럼 유식성을 자각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변계소집을 벗어난다는 것은 의식 표층에서 성립하는 존재와 인식, 경과 식, 객관과 주관의 이원론을 극복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단순히 이원론을 의식 표층의 차원에서 개념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심층에서 현상으로 변현하는 아뢰야식의 활동성을 직접 자각함으로써 그 둘을 분리시키던 무명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 이는 마음 깊이 무의식 차원에서 작용하는 심층식의 활동과 흐름을 꿰뚫어 보는 내적 직관이다. 내적 직관이란 곧 의타기의 원리를 단지 개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의타기하는 아뢰야식의 발생 자체를 내적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의타기하는 아뢰야식의 변현 과정 자체를 내적으로 자각하게 되면 종자가 어떻게 객관적 현상 세계로 변현하는지를 알게 되는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상 세계가 바로 식소변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 의식 차원에서는 아뢰야식의 변현 과정이란 다만 마음의 심층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적 활동으로 인식될 뿐 그 변현 과정 자체로서 인식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의 의식은 무명無明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무명을 명明으로 전환시킨 사람들, 즉 아뢰야식을 바로 아뢰야식 그대로 직관한 사람들은 바로 요가를 수행하던 유식행唯識行 수행자들이었다. 그들은 표면적 심리 활동을 정지시키고 내성內省함으로써 심층 활동을 내적으로 직관하였다. 표층적 의식의 심층에서 작용하는 의지적, 욕망적 또는 무의식적 마음의 흐름을 그대로 읽어 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식 실천으로서의‘유식관’이 지향하는 바이다. 곧 지관止觀의 방식으로 자신의 의식 표층에서부터 심층으로 침잠하여 아뢰야식의 흐름을 내적으로 직관하는 것이다. 유식성의 자각이란 바로 이와 같은 심층 활동의 자각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내적 자각은『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세속제世俗諦와 구분되는 승의제勝義諦를 설명하기 위해 언급된‘스스로의 내적 증득’(自內證)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자내증은 범부가 행하는 개념적 분별로서의 심사尋思와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이미 그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내가 말한 승의勝義는 모든 성자가 스스로 내적으로 증득한 바이다. 심사尋思는 모든 중생이 전전 하여 증득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법용法湧이여, 이 도리에 따라 마땅히 알라. 승의는 일체 심사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31)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자내증自內證이 승의勝義에 이르는 깨달음의 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유식성의 자각과 더불어 생겨나는 변화는 무엇인가? 내적으로 증득되어야 할 마음의 본체란, 곧 현상으로 변현하는 아뢰야식의 본성과 그 활동성이다. 내적으로 직관하고자 하는 아뢰야식의 흐름이란, 그 안에 심어진 업종자業種子를 따라 과거로 소급하여 무한히 이어지는 모든 시간적 지평을 포괄할 뿐 아니라 각 시간대에서 획득된 공업종자共業種子를 통해 무한히 확대되는 모든 공간적 지평을 포괄하는 마음이다. 무한히 펼쳐지는 전체 시간과 전체 공간의 지평을 포괄하는 무한한 마음, 전체 우주를 형성하는 힘과 그안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된다는 의미에서 그 무한한 마음은‘우주적 마음’또는‘신적神的마음’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유식에서는 이를‘일심一心’이라 표현한다.‘유식’이란 결국 이 일심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처에서 오로지 일심一心일 뿐이라고 설한다.32)
일심이란 개체적 표층 의식의 심층에서 작용하되 그 시ㆍ공간적 포괄성으로 인해 이미 개체적 제한성을 넘어 보편성을 지닌 초월적 마음이다. 다시 말해 개체의 심층에서 현상 구성력으로서 작동하는 우주적 에너지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적 의식의 심층에서 작용하는 현상 구성의 아뢰야식을 내적으로 자각한다는 것은 곧 그 개체적 의식이 스스로 현상적으로 제한된 개체성을 넘어 보편적인 우주적 마음으로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상적 존재이면서도 그 마음이 현상초월적 주체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성의 자각으로서의 유식관의 수행은 단순한 이론적 차원을 넘어서서 수행적 차원의 실천 행위가 된다. 33)
이렇게 해서 획득된 보편적 관점에서 보게 되면 현상 전체는 그 심층에서 상호의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일련의 현상 계열일 뿐이다. 따라서 그 현상 전체의 어느 한 부분을 자아나 법으로 분별하여 집착하거나 배척하는 탐심이나 염심이 멸하게 된다. 즉 전의의 결과 개인적 관점에서의 부분 현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짐으로써 번뇌장의 욕망이 극복되고, 무의식적 심층 활동인 현상 전체의 흐름을 자각함으로써 소지장의 무명이 사라지게 된다. 전의를 통해서 번뇌장을 멸해 열반을 증득하고, 소지장을 멸해 보리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두 가지 추중장애?重障碍(번뇌장과 소지장)를 끊음으로써 능히 의타기상의 변계소집을 버리고 능 히 의타기상의 원성실성을 얻는다. 번뇌장煩惱障을 전환하여 대열반大涅槃을 얻고, 소지장所知障을 전환하여 대지혜大智慧를 증득한다. 34)
유식성을 자각한 마음은 자신의 개체적인 사적 관점을 넘어서서 전체 현상을 하나의 통일적 지평으로 인식하는 참다운 지혜의 눈을 얻게 된다. 관계 단절적인 고립된 자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독립적인 객관 물자체로서의 사물 역시 실재하지 않는다는 아공ㆍ법공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집과 법집을 벗은 아공과 법공 속에서 드러나는 진리가 곧 진여眞如(tathata)이다.
이공二空(아공과 법공)을 통해 드러나는 진여眞如가 곧 성(원성실성)이다. 35)
그렇다면 이처럼 전의를 통해 얻어진 원성실성의 진여와 그 진여가 바라보는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인가?
3) 진여와 일진법계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전의를 통해 이집二執을 버린 이공二空의 깨달음에서 보면 일체 존재는 그 자체로서 진실성을 가진 것이다. 심층식의 활동이 그대로 자각됨으로써 무명이 벗겨진 밝음 안에서는 주와 객, 식과 경, 자아와 세계, 인식과 존재의 이원론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존재하는 것은 그대로 인식된 것이고 인식된 것은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집착 분별을 떠난 밝음 안에서는 인식과 존재, 식과 경이 하나인 것이다. 바로 이 하나를 이원화하던 무명으로부터 벗어나 허망분별의 변계소집성이 제거된 상태의 마음, 이와 같이 유식성을 자각한 마음이 곧 진여심眞如心이다. 36)경은 식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외적 경은 내적 심층식의 변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식과 경, 주와 객이 둘이 아니고 자아와 세계가 둘이 아니다. 유식무경이 말하고자 하는 이와 같은 본래의 일원론을 단지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심층식의 활동을 자각함으로써 실천적으로 증득한 마음이 바로 진여심이다. 37) 전의 이전에는‘아뢰야식의 견분’을 자아라고 집착하던 마음이 전의 이후에는 그 실상을 자각함으로써‘진여’를 소연으로 삼게 된다. 따라서 유식에서의 진여란 식 또는 심의 실상일 뿐이지 심 바깥에 따로 실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처럼 색법과 불상응행법뿐만 아니라 진여로 대변되는 무위법까지도 심식을 떠나 따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유식무경’이 성립한다.그러므로 무위無爲가 (심 바깥에)반드시 존재한다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모든 무위는 알려지는 성 품이기 때문이다. 또는 색심色心 등을 통해 드러나는 실성實性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색심 등과 마찬가지로 색심 등을 떠나 무위성無爲性이 실재한다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38)이와 같이 유식성을 자각한 진여심으로 바라본 현상은 더 이상 변계소집된 염오의 현상이 아니라 진여적 일심의 현현인 하나의 참된 법계이다. 그러므로 유식은 아공ㆍ법공을 통해 드러나는 진여를 증득의 승의제로 보고 다시 그 진여를 통해 현상하는 일진법계一眞法界를 승의의 승의제로 간주한다.증득證得의 승의제勝義諦는 두 가지 공空에서 드러나는 진여眞如이고 ……승의勝義의 승의제는 일 진법계一眞法界이다. 39)이렇게 보면 유식이 지향하는 유식성의 자각은 바로 생멸의 개체적 심성 안에서 절대보편적 진여심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체 현상이 의타기로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 현상 중의 일부인 자아나 사물은 관계 단절적인 개별 실체가 아니라는 것, 그 아공ㆍ법공을 자각함으로써 집착을 벗어나 청정한 원성실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아나 세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일체의 현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식성을 깨달아 전의를 이룸으로써 해탈과 열반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다.해탈이란 현상적 구속, 인과적 필연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현상 전체를 형성하는 아뢰야식의 우주적 에너지를 내적으로 자각함으로써, 단지 그 힘에 의해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힘의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적 활동을 의식화하여 자각하지 않고서는 자유를 얻을 수 없다. 그것을 자각한 주체가 바로 진여이다. 진여란 아공ㆍ법공을 깨달아 일체 현상의 경계 밖에 선 마음, 즉 현상초월적인 보편적 일심一心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 진여의 눈으로 보면, 다시 말해 유식성을 깨달아 일체 현상이 식의 변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면 일체 현상이 다시 구제된다. 특정 부분으로 집착됨이 없는 현상 그 자체는 두루 원만한 원성실성의 현상, 곧 하나의 참된 법계이다. 그리하여 의타기로 변현된 현상 자체가 다시 긍정된다. 결국 의타기의 정분과 염분의 차이는 의타기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우리 마음 안에서 발생하는 그 의타기의 과정을, 다시 말해 그 인과 연의 연관고리를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에서 비롯된다. 사태 발생의 전반적 연관 관계를 알고 나면 부분적 사태에 대한 선별적 애착이나 탐착에 이끌리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특정 대상에 대해 애愛나 증憎이 느껴지는 순간 그러한 특정 감정에 매달려 가지 않고 그와 같은 감정이 생기게 되는 전체적 인연 관계를 알게 된다면, 그것도 현행을 거쳐 전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인연 관계를 깨달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알아도 인연 결과로서의 애나 증은 그대로 남을 것이지만, 무명無明에서 비롯되는 집착은 없어질 것이며 집착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조업造業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적으로 업이 멸하여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과정이 자각되지 않은 무명 속의 의타기는 그 다음의 분별적 업을 이끄는 염오의타기가 되고, 과정이 자각되어 무명을 벗은 의타기는 인연에 따라 그저 그렇게 존재할 뿐 변계소집의 새로운 업을 산출하지 않는 청정의타기가 된다.그러므로 문제는 아뢰야식의 활동성을 자각함으로써 무명을 극복하는 일이다. 무명을 통해 분리되어 있는 식과 경, 주와 객, 자아와 세계의 이원성을 극복하고 그 원래의 하나됨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둘이 원래 하나라는 것이 유식무경의 본래적 의미이다. 경은 식의 소변이므로 식과 경은 본래 하나이다. 단지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즉 경으로 전변하며 유지되는 일심을 자각하지 못하기에, 그 무명으로 인해 식과 경, 주과 객이 분리된 것처럼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명을 벗고 보면 그 둘이 본래 하나였음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지혜는 밖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되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혜 안에 드러나는 참된 세계 역시 밖에서 다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마음이 변현해 내던 이 현상 세계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따라서 현상에 대한 일체의 앎은 무명으로 인한 집착이 베제된 차원에서 다시 긍정된다. 자각된 의타기는 곧 청정의타기이므로, 그 의타기에 따라 변현하는 현상 세계에 대한 인식은 변계소집을 벗은 무분별후득지가 된다. 깨달은 자는 다시 이 무분별후득지로써 의타기의 생사를 사는 중생의 고苦를 더불어 알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근본무분별지로서의 지혜와 함께해야만 하는 보살의 자비慈悲를 뜻한다. 40)이와 같이 유식학파가‘유식무경’으로써 논하고자 한 것은 일체 현상 존재의 유식성이지만, 그러한 유식성을 밝힘으로써 궁극적으로 얻고자 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유식성의 내적 자각 즉 마음와 활동성에 관한 내적 직관이다. 이 유식성의 자각이 곧 아공ㆍ법공의 깨달음이다. 그 이공二空을 통해 진여심 즉 일심一心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성유식론成唯識論』서두에서 저자는 그 논서를 서술하는 목적이 바로 이공二空의 해명임을 강조한다.지금 이 논서를 짓는 이유는 이공二空에 미혹하고 잘못 생각하는 자로 하여금 바른 이해를 내게 하 기 위함이다. 41)
이공 속에 현현하는 진여를 깨닫는다는 것은 곧 자신 안의 진여심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가리는 무명을 걷어내고 그 안의 청정심을 회복하는 길을 유식에서는 바로 그 마음 자체의 본 모습을 내적으로 자각하는 유식성의 자각에서 구한 것이다. 현상으로 변현하는 마음이 활동성을 자각함으로써만 그 변현된 자아나 세계의 공성空性과 가성假性을 알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현상 세계에 대한 집착과 그 집착에서 오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와 같이 유식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곧 자기 마음의 활동을 단 한점의 무의식적 잔재도 남기지 않은 채 투명하게 통찰하는 것이다. 그처럼 투명해진 마음, 세계가 어떻게 마음의 활동을 통해 현현하게 되는가를 여실히 직관하는 그 진여심에서는, 나와 세계, 주관과 객관, 식과 경의 관계가 둘도 아니요 하나도 아닌 묘妙의 관계가 된다.
※ 맺는 말
한자경 저/자료입력:박미숙
‘유식무경唯識無境’은 대승 불교 유식唯識의 기본 관념으로서 일종의 유심唯心 사상이다. 유심 사상은 원시 근본 불교의‘중심경색重心輕色’으로부터 발전한 대승 불교의 핵심 사상으로, 유식뿐 아니라 대승의 다른 종파들 역시 그와 같은 유심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화엄華嚴의‘삼계유심三界唯心’이나‘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천태天台의‘일념삼천一念三千’,선종禪宗의‘견성성불見性成佛’등은 모두 그러한 유심 사상을 보여 주는 예이다. 이처럼 불교는 언제나 중생 안에 내재된 각성과 해탈의 주체로서의 마음, 즉 일심一心을 강조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유식은 그 유심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완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1) 이는 유식이 요가승들의 수행적 통찰로부터 출발하여 그 통찰 내용을 인식논리학적 치밀함으로 이론화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상 세계, 인연과 업보로 얽혀 있는 이 연기의 세계는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절대적 운명이 아니다. 우리는 비록 인과필연성이나 업에 따라 현상적 삶을 영위해 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업과 윤회로부터의 해탈, 현상으로부터의 초월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현상이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그야말로 현상 또는 가상假象에 불과한 것이라는 자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현상 세계가 궁극적 실재가 아닌 공에 기반한 가상이라는 것은 이 세계 또는 세계 속의 우리의 삶이 일종의 꿈과 같다는 것을 말해준다. 꿈꾸는 자의 무의식이 표출이라는 의미를 제거하고 나면 꿈 그 자체는 아무런 객관성도 지니지 않듯이, 무명에 휩싸여 무시이래로 지어온 업을 떠나 생각하면 우리의 현상 세계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실유성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과 이 우주가 꿈과 같은 가상이라는 자각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밤새 꾼 꿈이 꿈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기 때문이다. 인생의 꿈으로부터 깨어난 적이 없다면, 현상 세계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다면, 인생과 우주 전반을 놓고 그것을‘꿈이다’또는‘가상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요가승들의 수행적 통찰 또는 불교적 돈오가 제 몫을 하게 된다. 그것은 현상의 경계를 따라 무한히 확대되어 가던 마음이 어느 순간 일체의 한정된 현상을 넘어서서 무한으로 비약하게 되는 지적 체험이다. 유한한 현상을 넘어서는 그 무한과 절대의 관점에서 보면, 현상은 업이 빚어내는 가상이자 무명이 그려내는 환상으로 드러날 것이며, 가상이 가상임을 자각하는 그 마음 본체만은 그러한 현상을 넘어서는 자유라는 초월성의 자각이 있게 될 것이다.
그 깨달음의 유식적 표현이 바로‘유식무경’이다. 그러나 유식 논사들의 위대함은 그 깨달음 자체에 있지 않다. 인간이 존재하는 전세계 그 어느 곳에 그와 같은 깨달음이 없는 곳이 있겠는가? 그들의 위대함은 단순히 수행적 깨달음의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깨달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이론화하고 체계화했다는 데 있다.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말로 드러내고자 한 것, 말을 떠난 진여眞如를 방편적 말로써 표현하고자 한 것, 현상초월적 깨달음의 의미를 현상 세계의 분석을 통해 밝혀 내고자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유식무경은 수행적 깨달음의 내용인 동시에 일체가 가상임을 논증하는 이론적 작업이기도 하다. 유식에서는 현상 세계가 그것을 지각하는 인식 주관의 마음을 떠나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론적ㆍ의미론적으로 논증하고 그와 같은 현상초월적 주체의 심층 구조를 이론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불교 인식론과 의미론과 존재론 그리고 심성론과 실천론을 두루 포괄하는 하나의 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유식의‘유식무경’이 함축하고 있는 철학적 의미를 이론적으로 고찰하였다.특히‘유식무경’은‘법체항유法體恒有, 삼세실유三世實有’를 주장한 유부의 실재론과 가장 직접적으로 대립되는 것이므로, 경의 비실유성을 밝힌 제1장과 2장에서는 유부적 실재론에 대한 유식의 비판과 함께 유부와는 다른 방식으로 경을 설명하는 유식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개체적 색법을 형성하는 궁극 실재로서의 극미가 객관적 실유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색법 자체의 비실유성을 말해 주는 것이며, 보편적 법체를 형성하는 보편 개념으로서의 명구문신名句文身이 말을 떠나 그 자체로서 객관적 실유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 역시 우리의 마음(心法)을 떠난 객관 실재가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둘은 모두 우리 마음의 인식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 즉 소연경所緣境으로서의 그 둘은 그것을 연하는 능연식能緣識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 색법은 전오식의 대상일 뿐이며, 관념적 개념은 제6 의식의 대상일 뿐이다. 보편적 개념이 객관 실유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념적 분별이 고정된 객관 의미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언어적 분별에 따라 임시적으로 시설된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일체의 개념적 분별은 허망분별이 되며, 그러한 허망분별에 기초한 언어의 의미는 근원적으로 비유적일 뿐이다.
경이 객관 실유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假로서 시설된 것에 불과하다면 그렇게 가假를 시설하는 식의 활동은 과연 어떠한가? 이를 해명한 부분이 바로 제3장 식의 심층 구조 분석이다. 경이 식소변이라면 식은 그와 같이 전변하는 식인데, 유식에서의 식이란 단지 우리 의식에 떠오르는 표층적 식, 즉 감각이나 대상 의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표층적 의식 심층에서 작용하는 욕망과 집착의 자기 의식 곧 제7 말나식이 있고, 그 욕망의 심층에서 작용하면 전체 삶과 역사를 꾸려 가는 인격적 동일성의 주체인 제8 아뢰야식이 있다. 특히 경을 산출하는 식의 활동인 전변에서는 아뢰야식의 변현과 의식ㆍ말나식의 분별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1장과 2장이 유식무경 중의 무경無境에 치중하여 경境을 가假로서 설명한 것이라면 제3장은 그러한 가假를 설정하는 식識을 분석함으로써 유식唯識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어지는 제4장은 경과 식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더 명료화해 본 부분이다. 전오식의 대상으로서의 물질적 경을 색色으로, 제6 의식의 대상으로서의 관념적 경을 명名으로 구분하였을 때, 문제는 명색의 경과 식의 관계이다. 이 명색과 식은 이미 근본 불교에서부터 순환관계로서 논의 되어 온 것인데, 이 순환이 유식에서는‘아뢰야식의 변현’과 ‘의식ㆍ말나식의 분별’의 순환, 즉 아뢰야식 내의 잠재적 종자로부터 현상 세계로의 변현 과정을 의미하는‘종자생현행’과 다시 그 현상 세계에 대한 의식ㆍ말나식이 분별에 의해 아뢰야식 내에 종자를 훈습하는 과정인‘현행훈종자’의 순환으로 드러난다. 이 순환 구조 속에서 유식이 파악한 식의 실성은 과연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일체가 식의 변현이라는 자각, 곧 유식성의 자각이다. 자아나 세계가 의타기의 식의 변현 결과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우리는 자아나 세계를 떠나지 않고서도 그에 대한 집착을 멸하고 원성실성을 회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식성의 자각이 번뇌와 무명을 멸하는 해탈의 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유식성의 진정한 자각은 바로 개체적 자신 안에 내재된 보편적 일심을 깨닫는 것이다. 개체 내의 초월적 정신, 개체 내의 자유를 자각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집과 법집을 극복할 수 있다. 이는 곧 유한한 의식으로부터 무한한 정신으로의 비약이며, 자신 안에 내재된 초월적 본질의 회복이기도 하다. 개체 안에 보편이 내재함을, 유한 안에 무한이 내재함을 자각하는 것이다. 단지 숲 속의 나무들과 뒤섞여 있을 뿐이라면 숲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흐르는 물 속에 잠겨 그냥 흘러갈 뿐이라면 자신을 포함한 일체가 유전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울창한 숲 밖의 한 점, 흐르는 물 밖의 한 점을 현상초월적 시점으로 갖고 있지 않다면 전체의 관망은 불가능하다. 현상 전체의 존재 원리ㅡ 상호규정적 연기의 원리ㅡ를 자각한다는 것, 아뢰야식의 변현과 의식ㆍ말나식의 분별이 지닌 삶의 순환성을 자각한다는 것, 업과 윤회의 원리를 자각한다는 것은, 그 자각 주체가 이미 현상 세계에 대한 초월적 시점을 지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전체를 자각하는 눈은 전체의 경계를 넘어선 초월, 무한의 시점에 서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한한 일체의 현상을 넘어서서 무한으로 비약하게 되는 초월의 경험이 바로 유식성의 자각이다. 초월의 경험은 곧 경계 너머로의 자유의 자각이며, 해탈의 깨달음이다. 그와 같은 현상초월적 눈의 주체는 우주 바깥의 신도 아니고 우주를 창조한 브라흐만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누구나의 마음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진실한 성품 곧 불성이자 여래장이며, 한마디로 말해 일심一心이다. 이것이 바로 유식의‘유식무경’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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