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품 제1 [序品 第一]
묘법연화경 문구 / 李元燮 저 / 영산 법화사 출판부 / 불기 2541(1997).3.20
생각컨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기 어렵고, 부처님이 이를 설하심이 어렵고, 이를 전래(傳來)하여 번역함이 어렵고, 스스로 깨달음을 열기 어렵고, 스승의 강의를 듣기 어렵고, 일부나마 기술하기 어렵게 마련이다. 내가 스물 일곱에 금릉(金陵) 땅에서 『법화경 문구』의 강의를 듣잡고, 예순 아홉 살 되는 지금 단구(丹丘)에서 첨삭(添削)하니, 이를 후현(後賢)들에게 남겨 줌으로써 함께 부처님의 지혜에 이르기를 기약하는 것뿐이다.
(佛出世難 佛說是難.傳譯此難 自開悟難 聞師講難 一遍記難.余二十七於金 陵聽受.六十九 於丹丘添削.留贈後賢.共期佛慧)
자세히 경의 제목을 해석컨대, 이미 위에서 설한 바와 같다.
委釋經題 已如上說.
서(序)란 상서(庠序)라 새기니, 계위(階位) 빈주(賓主) 문답(問答)이 다 상서다.
序者訓庠序.謂階位賓主問答 悉庠序也.
세속의 처지에서 말하는 서(序)는 그렇다 해도, 경(經)의 연구자들은 불교의 도리를 따라 서(序)를 삼으니, 차서(次序) 유서(由序) 술서(述序)를 이른다. 여시(如是) 따위 오사(五事)가 경의 첫머리에 얹혀짐은 차서다. 방광(放光) 따위 육서(六瑞)는 본론(本論)을 일으키는 단서(端緖)가 되니 유서(由序)다. 문답석의(問答釋疑)는 정설(定說)의 농인(弄引)이어서 서술( 述)이다. 이 세 가지 도리를 갖추고 있기에 해석해 서(序)라 하는 것이다.
經家從義 謂次由述也. 如是等五事 冠於經首 次序也.放光六瑞 起發之端 由序也.問答釋疑 正說弄引 述也.具此三義 故稱爲序.
품(品)이란 중아함경(中阿含經)에서 발거(跋渠)라 한 그것이니, 이를 번역해 품(品)이라 했다. 품(品)이란 도리의 같은 것을 모아 한 부분에 놓은 것이다. 품(品) 중에는 혹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품도 있으니 범망경(梵網經)의 경우와 같으며, 혹은 결집(結集) 때 설정한 것이 있으니 대론(大論)과 같으며, 혹은 역경(譯經)하는 사람이 덧붙인 것이 있으니 구마라습(鳩滅什)의 경우와 같다.
지금의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은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품이요,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따위는 경의 연구가가 써넣은 것일 뿐, 역경하는 사람은 들어본 일이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여러 품(品)의 처음이므로 제일(第一)이라 했다.
品者 中阿含云跋渠 此蒜爲品. 品者 義類同者 聚在一段 故名品也. 或佛自唱品如梵網. 或結集所置 如大論. 或譯人添足 如羅什. 今藥王本事是佛唱 妙音觀音等是經家 譯人未聞. 諸品之始 故言第一.
부처님께서는 기연(機緣)을 따라 산화(散華) 관화(貫華)의 두 가지 설법을 하셨는데, 결집(結集)하는 사람은 그 설법에 의거해 이를 전하고, 논사(論師)들은 경에 의지해 서술한 것뿐이어서 다 절목(絶目)을 나누지는 않았다.
佛赴緣 作散花貫華兩說. 結集者按說傳之.論者依經申之.皆不節目.
옛 강사(講師)들은 다만 경의 도리를 자세히 설했을 뿐 문장의 단락(段落)을 나누지는 않았었는데, 만약 오로지 이런 방침만을 쓰는 경우에는 후세 사람들이 거의 경의 도리가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를 짐작 못하게 될 것이다.
古講師 但敷弘義理 不分章段.若純用此意.後生殆不識起盡.
또 부처님께서는 관화(貫華) 산화(散華)를 설하셨을 뿐이건만, 결집(結集)하는 사람들은 도리를 따라 품(品)을 세웠다.
又佛說貫散.集者隨義立品.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이르되, 「계경(契經)이 그 한 부분이요, 율(律)이 그 한 부분이요, 아비담(阿毘曇)이 그 한 부분이다.」했다. 계경을 다시 넷으로 나누니, 증일아함경 장아함경(長阿含經) 중아함경(中阿含經) 잡아함경(雜阿含經)인 바, 증일아함경에서는 인천(人天)의 인과(因果)를 밝히고, 장아함경에서는 사견(邪見)을 깨고, 중아함경에서는 깊은 도리를 밝히고, 잡아함경에서는 선정(禪定)을 밝혔다.
율(律)은 오부율(五部律)과 팔십송율(八十誦律)로 나뉘고, 아비담은 육족론(六足論) 팔건도론(八 度論)으로 나뉘니, 육족은 아함경에서 「시(施) 계(戒) 혜(慧)의 육도(六度)가 다 족(足)이다.」한 것 같고, 팔건도는 근성(根性)과 도(道)와 정(定)등의 팔종취(八種聚)를 이름이다.
增一云.契經一分.律一分.阿毘曇一分.契經更開四.謂增一長中雜.增一阿含 明人天因果.長阿含 破邪見.中阿含 明深義.雜阿含 明禪定.律開五部 及八十誦.阿毘曇 六足 八 度等.阿含謂.施戒慧六度皆足也.謂根性道定等八種聚也.
천친(天親)은 논(論)을 지어, 칠공덕(七功德)으로 서품(序品)을 나누고, 오시현(五示現)으로 방편품을 나누었으니, 다른 품(品)들도 이런 방식으로 각기 처리함이 있었다.
天親作論 以七功德分序品.五示現分方便品.其餘品 各有處分.
옛날 하서(河西)의 도빙(道憑)과 강동(江東)의 법요(法瑤)가 이 취지를 따라 경문(經文)을 나눈 바 있더니, 말대(末代)에서는 심히 번거로운 추세를 보이는 중에, 광택(光宅)에 이르러서는 더욱 자세해졌다. 이는 마치 두터운 구름이 하늘을 가리매 삼광(三光)이 그 때문에 빛을 거둔 격이니, 도를 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존중하는 바가 되지 못했다. 담란(曇鸞)이 이르기를, 「자세한 분과(分科)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여러 사석(沙石)이 티끌같이 날린다」한 것이 그것이어서, 대개 지나치거나 못 미치거나 한 것들이었다.
昔河西憑.江東瑤.取此意節目經文.末代尤煩 光宅轉細.重雰峠於太淸.三光爲之즙耀.問津者所不貴 曇鸞云.細科煙 雜礪塵飛.蓋若過若不及也.
여산(廬山)의 혜룡(慧龍)은 법화경의 글을 나누어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이라 했다. 그리고 이십 칠 품(二十七品) 전체를 오직 두 종류의 도리로 보았다. 곧 서품(序品)에서 법사품(法師品)에 이르는 내용은 언방편(言方便) 언진실(言眞實)이니, 진리는 하나인데 세 가지 진리〔三乘〕를 설했기 때문이요, 보탑품(寶塔品) 이하는 신방편(身方便) 신진실(身眞實)이니, 실은 구원불(久遠佛)이면서 근성불(近成佛)이라 말씀하신 까닭이다. 또 방편품에서 안락행품(安樂行品)에 이르기까지는 인문(因門)이요, 용출품(涌出品) 이하는 과문(果門)이라 했다.
廬山龍師.分文爲序正流通.二十七品 統唯兩種.從序至法師.言方便言眞實.理一說三故.寶塔下.身方便身眞實.實遠唱近故.又從方便 至安樂行.是因門 從踊出下 是果門.
제(齊)의 중흥사(中興寺)의 승인(僧印)과 소산사(小山寺)의 법요(法瑤)는 혜룡(慧龍)으로부터 법화경을 배웠으니, 경문을 나누는 방식도 같았다. 그리고 현창(玄暢)은 서품에서 다보품(多寶品)에 이르는 것을 인분(因分)이라 하고, 권지품(權持品)에서 신력품(神力品)에 이르기까지를 과분(果分)이라 하고, 촉루품(囑累品)에서 경의 끝까지를 호지분(護持分)이라 했다.
齊中興印.小山瑤.從龍受經分文同.玄暢從序至多寶爲因分.從勸持至神力爲果分.從囑累盡經 爲護持分.
또 논사(論師)가 있어서 이르되, 「서품에서 학무학인기품(學無學人記品)에 이르는 부분은 법화경의 본체(本體)요, 법사품에서 촉루품에 이르는 부분은 수지(受持)하는 공덕을 밝히심이요, 약왕품(藥王品)에서 경의 끝부분까지는 여러 보살의 본원(本願)을 칭찬하신 것이다.」라 했다.
又有師云.從序至學無學人記.是法華體.從法師至囑累.明受持功德.從藥王盡經.美諸菩薩本願.
또 논사가 있어서 사단(四段)으로 나누기도 하니, 처음의 품(品)을 서단(序段)이라 하고, 방편품에서 안락행품에 이르기까지가 개삼현일단(開三顯一段),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에서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에 이르는 부분이 개근현원단(開近顯遠段), 그 뒤로부터 나머지 부분이 유통단(流通段)이라 함이었다.
有師作四段.初品爲序段.從方便至安樂行.開三顯一段.從踊出訖分別功德.開近顯遠段.後去餘勢 流通段.
광택 법운(光宅法雲)은 승인(僧印)을 좇아 법화경을 배웠으나, 분과(分科)에 있어서는 처음에 경 전체를 삼단(三段)으로 나누고, 다음에 그것들을 각각 둘로 쪼갰다. 곧 서단(序段)은 통서(通序) 별서(別序)가 있음을 이르고, 정종단(正宗段)은 인문(因門) 과문(果門)이 있음을 이르고, 유통단(流通段)은 화타(化他) 자행(自行)이 있음을 이르는데, 다시 두 서(序)에는 각기 다섯이 있고, 두 정종(正宗)에는 각기 넷이 있고, 두 유통(流通)에는 각기 셋이 있다고 세분(細分) 했으므로, 합하여 이십 사 단(二十四段)이 되었다.……
光宅雲 從印受經.初三段. 次各開二.謂通序別序.正謂因門果門.流通謂化他自行.二序各五.二正各四.二流通各三.合二十四段(云云).
그러나 이 여러 사람들이 시도한 경문(經文)에 대한 분과(分科)는, 다 제멋대로의 분별에서 나온 것들이었으니, 난초와 국화가 각기 그 아리따움을 오로지하듯 자설(自說)의 우수함을 주장한다 해도, 후생(後生)들은 그것에서 시비를 가려 다투는 일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그것들은 삼익(三益)이 없고 일도(一道)를 잃고 있음이니, 삼익이란 세계 따위 삼실단(三悉檀)이요, 일도란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이다.
夫分節經文 悉是人情.蘭菊各擅其美.後生不應是非諍競.無三益 喪一道.三益者.世界等三悉檀也.一道者.第一義悉檀也.
천태 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는 법화경의 글을 나누어 셋으로 하니, 처음의 품(品)을 서분(序分)이라 하고, 방편품에서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의 십구항(十九行)의 게송에 이르는 십오 품(十五品)을 정종분(正宗分)이라 하고, 그 게송 뒤에서 경이 끝나기에 이르는 십일 품 반(十一品 半)을 유통분(流通分)이라 명명(命名)했다.
또 동시에 법화경을 크게 나누어 둘로 삼아서, 서품(序品)에서 안락행품(安樂行品)에 이르는 십사 품(十四品)은 적문(迹門)에 입각한 개권현실(開權顯實)이요,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에서 경이 끝나는 십사품(十四品)은 본문(本門)에 입각한 개권현실이라 했다.
그리고 다시 본문 적문에 각기 서분 정종분 유통분이 있다고 주장해, 적문에서는 처음의 품(品)을 서분(序分)이라 하고, 방편품에서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에 이르기까지를 정종분(正宗分)이라 하고, 법사품(法師品)에서 안락행품(安樂行品)에 이르기까지를 유통분(流通分)이라 했다.
본문(本門)의 경우는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의 처음부터 같은 품의 「미륵이 이미 이 일에 대해 물으니, 부처님께서 이제 대답하시리라」에 이르는 반품(半品)을 서분이라 명명하고, 「부처님께서 아일다(阿逸多)에 이르시되」 아래에서부터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의 게송에 이르기까지를 명명하여 정종분이라 하고, 이 뒤에서 경이 끝나는 데까지는 유통분이라 한다고 했다. 이 기술에서는 앞의 삼단(三段)을 따라 경문을 해석한다.
天台智者 分文爲三.初品爲序.方便品訖分別功德十九行偈.凡十五品半名正.從偈後盡經.凡十一品半名流通.又一時分爲二.從序至安樂行十四品.約迹開權顯實.從踊出訖經十四品.約本開權顯實.本迹各序正流通.初品爲序.方便訖授學無學人記品爲正.法師訖安樂行爲流通.通出訖彌勒已問斯事佛今答之半品名序.從佛告阿逸多下.訖分別功德品偈.名爲正.此後盡經爲流通.今記從前三段消文也.
질문.
「한 경에 어떻게 두 서(序)가 있을 수 있는가.」
대답.
「화엄경에서는 곳곳에 무리를 모아 법을 설하시고, 아함경은 편(篇)마다 여시(如是)가 붙어 있고, 대품(大品)은 전후에 부촉(付囑)하는 말씀이 있되, 다 일부(一部)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으니, 두 서(序)가 있은들 무슨 지장이 되랴. 이제 오의(五義)를 두지 않은 것은 본문(本門)이 경의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요, 적문(迹門)에서 다만 단순히 유통(流通)만을 말씀하심은 설법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니, 있고 없는 내용을 따른 것뿐이다.」
問.一經云何二序.答.華嚴處處集衆.阿含篇篇如是.大品前後付囑.皆不乖一部.兩序阿妨.今不安五義者.本門非次首故也.迹門但單流通者.說法未竟也.有無之意云爾.
이제 경문(經文)을 따라 해석하는 방법에 넷이 있으니, 첫째는 열수(列數), 둘째는 소이(所以), 셋째는 인증(引證), 넷째는 시상(示相)이다. 열수란, 첫째는 인연(因緣) 둘째는 약교(約敎) 셋째는 본적(本迹) 넷째는 관심(觀心)이니, 처음의 「여시(如是)」로부터 「이퇴(而退)」로 끝나기까지 다 사의(四意)로 경문을 해석하는 터이나, 그러면서도 이제 간략하게 써서 혹 이 중의 셋이나 둘이나 하나만을 드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요는 진의(眞意)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므로 굳이 형식에 구애되어 장황히 붓을 놀릴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今帖文爲四.一列數 二所以 三引證 四示相.列數者.一因緣 二約敎 三本跡 四觀心.始從如是 終于而退.皆以四意消文.而今略書.或三二一.貴典意 不煩筆墨.
둘째로 소이(所以)에 대하여 밝힌다.
질문.
「만약 간략히 말한다면 하나가 될 것이며, 만약 자세히 그 방법을 말한다면 네 가지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사석(四釋)을 내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
「지나치게 자세히 말하면 지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해서 퇴전(退轉)케 할 것이며, 지나치게 간략하다면 취지가 두루 미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그 중간에 서서 설하는 것에 의해 도리를 이해하기 쉽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二所以者 問 若略則一.若廣匪四.所以云何.答.廣則令智退.略則意不周 我今處中說.令義易明了.
인연석(因緣釋)은 또 감응석(感應釋)이라고도 한다. 중생에게 법화경을 받아들일 만한 근기(根機)가 없고 보면 비록 가까이 있다 해도 그 진리를 보지 못할 것이나, 부처님의 자선근(慈善根)의 힘은 멀다 해도 스스로 통하게 하시어서, 이에 감응도교(感應道交)가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연석(因緣釋)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
「대저 중생이 해탈을 구한다 할 때, 그 근기는 다양하며, 부처님께서 응현(應現)을 일으키시는 경우에도, 그 응현 또한 다양하다. 이런 도리는 아주 넓다 해야 하는데, 그 중간에 선다는 말이 있을 수 있는가.」
대답.
「그러기에 대경(大經)에서 이르되, 〈자선근의 힘에 무량한 면(面)이 있지만, 요약하면 곧 신통(神通)이 된다〉고 하셨다.」
因緣亦名感應.衆生無機 雖近不見.慈善根力 遠而自通 感應道交 故用因緣釋也.夫衆生求脫 此機衆矣.聖人起應 應亦衆矣.此義更廣 處中在何.然大經云.慈善根力有無量門.略則神通.
만약 시방(十方)의 모두를 부처님의 법으로 받아들인다면 넓기가 허공같아질 것이다.
若十方機感.曠若虛空.
이제 사바국토(娑婆國土)에 대해 논하건대, 음성불사(音聲佛事)를 지으시는데 따라 감로(甘露)의 문이 열렸은즉, 가르침에 의거해 해석하면 처중(處中)의 설이심이 명백하다.
今論娑婆國土.音聲佛事則甘露門開.依敎釋者.處中說明矣.
만약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가르침을 베푸시는 경우라면 당연히 가르침에 방편과 진실의 얕고 깊음이 같지 않은 상황이 생겨날 것이다.
若應機設敎.敎有權實淺深不同.
그러므로 모름지기 손가락을 놓아두고 달을 보며, 자취를 부정하고 근본을 찾아야 할 것이다.
須置指存月 亡跡尋本.
그러므로 승조(僧肇)가 이르되, 「본지(本地)가 아니면 적화(迹化)를 드리울 수 없으며, 적화 아니면 본지를 드러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본적석(本迹釋)을 쓰게 되는 것이다.
故肇師云.非本無以垂迹.非跡無以顯本.故用本跡釋也.
만약 적화(迹化)의 모습을 찾을진대 적화하심이 넓거니 공연히 스스로 지치지 말 것이며, 만약 본지(本地)를 찾을진대 본지는 높거니 그 높이는 다할 수 없을 것이다. 「밤낮으로 남의 보배를 헤인다 해도 자기에게는 반푼의 몫도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하신 것과 같다.
若尋迹 迹廣徒自疲勞.若尋本 本高高不可極.日夜數他寶.自無半錢分.
다만 제 마음의 높고 넓음을 관(觀)하여 무궁한 부처님의 응현(應現)을 청하는 경우에만 기연(機緣)이 이루어지고 정성이 통해서 자리(自利)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관심석(觀心釋)을 쓰는 것이다.
但觀己心之高廣. 無窮之聖應.機成致感 逮得己利.故用觀心釋也.
셋째로 인증(引證)에 대해 말하건데, 방편품(方便品)에서 이르되, 「시방제불(十方諸佛)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하시는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했다.
三引證.方便品云.十方諸佛爲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그러나 인천소승(人天小乘)은 일(一)도 아니요, 대(大)도 아니요, 또 불사(佛事)도 아니니, 중생의 감수(感受)가 이루어질 수 없다.
若人天小乘 非一非大.又非佛事 不成機感.
실상(實相)을 일(一)이라 이르며 넓음을 대(大)라 이르니, 부처님께서 이를 가리켜 하셔야 할 일〔事〕로 삼으셔서 세상에 나타나시는 일. 이를 일대사인연이라 하는 것이다.
實相名一廣博名大.佛指此爲事.出現於世.是名一大事因緣也.
방편품에 또 이르되, 「갖가지 법문(法門)으로 불도(佛道)를 설하여 보이신다.」고 했다.
又云 以種種法門.宣示於佛道.
마땅히 갖가지 가르침은 미미한 것이건 두드러진 것이건, 방편의 것이건 진실의 것이건 간에, 다 불도(佛道)를 위해 시설(施設)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當知種種聲敎.若微若著 若權若實.皆爲佛道 而作筌제.
대발열반경에 이르되, 「거친 말씀과 부드러운 말씀이 다 제일의(第一義)로 돌아간다.」고 하심이, 다 이를 이르심이다.
大經云.序言及軟語.皆歸第一義.此之謂也.
수량품(壽量品)에 이르되, 「이제 천(天) 인(人) 아수라(阿修羅) 등이 다 아르기를, 내가 젊어서 출가해 석가족의 궁으로부터 나와 가야성(伽耶城) 멀지 않은 곳에서 삼보리(三菩提)를 얻었다고 하나, 실은 내가 성불한 지 무량무변아승지겁이 지났나니, 이런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해 이롭게 함이라.」하셨다.
壽量品云.今天人阿修羅.皆謂我少出家 出釋氏宮 去伽耶城不遠 得三菩提.然我實成佛已來.無量無邊阿僧祇劫.以斯方便 導利衆生.
방편품에서 또 이르시되, 「나는 본래 서원을 세워, 널리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또 한 가지로 이 도를 얻어, 나와 똑같아 다름이 없게 해주고자 했다.」하셨다.
方便品又云.我本立誓願.普令一切衆.亦同得此道.如我等無異.
또 오백수기품(五百授記品)에 이르시되, 「안으로 보살행을 감추고 겉으로는 성문임을 나타내 보여, 실은 스스로 불국토(佛國土)를 정화(淨化)하면서도 대중들에게 삼독(三毒)이 있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고, 또 사견(邪見)에 빠진 듯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니, 내 제자들이 이렇게 방편을 통해 중생들을 교화했느니라.」하셨다.
又五百受記品云.內 菩薩行.外現是聲聞.實自淨佛土.示衆有三毒.又現邪見相.我弟子如是.方便度衆生.
이는 곧 사제(師弟)가 다 본적(本迹)을 밝힘이다.……
此則師弟皆明本迹(云云).
비유품(譬喩品)에 이르되, 「만약 사람이 있어서 너의 설하는 것을 믿는다면 곧 나를 볼 것이며, 또한 너와 비구승(比丘僧)과 모든 보살을 봄이 되리라.」하셨다.
譬喩品云.若人信汝所說.卽爲見我 亦見於汝 及比丘僧 幷諸菩薩.
마땅히 듣는 바 있음을 따라 바른 마음으로 관찰하면, 신심(信心)속에서 삼보(三寶)를 보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니, 「설하는 것을 들음」은 법보(法寶)요, 「나를 봄」은 불보(佛寶)요, 「너희들을 봄」은 승보(僧寶)다.……
當知隨有所聞 諦心觀察.於信心中 得見三寶.聞說是法寶 見我是佛寶.見汝等是僧寶(云云).
넷째로 시상(示相)은 잠시 삼단(三段)에 입각해 인연(因緣)의 모습을 보였다. 중생이 구원(久遠)의 옛날에 부처님으로부터 교묘히 불도의 인연을 심게 하시는 혜택을 입은 바 있기에, 중간에 서로 만나 다시 다른 방편으로 제일의(第一義)를 도와 드러내시어 이를 성숙케 하시고, 오늘에 천화(天華)가 비오며 땅이 진동하는 기적을 나투사 여래의 멸도(滅度)로써 이를 멸도케 하셨다.
또 다음으로 구원(久遠)을 종(種)으로 하고, 과거를 숙(熟)으로 하고, 근세를 탈(脫)로 하는 수도 있으니, 지용보살(地涌菩薩) 따위가 이것이다. 또 다음으로 중간(中間)을 종으로 하고, 사미(四味)를 숙으로 하고, 왕성(王城)을 탈로 하는 수도 있으니, 지금의 개시오입(開示悟入)된 자가 이것이다. 또 다음으로 금세(今世)를 종으로 하고, 차세(次世)를 숙으로 하고, 후세(後世)를 탈로 하는 수도 있으니, 미래에 득도(得度)하는 자가 이것이다.
이상은 비록 본문(本門)이 아니긴 해도, 그 취지를 취해 말한 것뿐이다. 그 사이의 단계 단계에서 삼세(三世) 구세(九世)를 설정해, 종으로 하고 숙으로 하고 탈로 한대도 또한 무방할 것이다. 왜 그런가. 여래의 자재신통(自在神通)의 힘과 사자분신(師子奮迅) 대세위맹(大勢威猛)의 힘은 자재(自在)히 설하시는 까닭이다.
四示相者.且約三段 示因緣相.衆生久遠蒙佛善巧.令種佛道因緣.中間相値.更以異方便.助顯第一義.而成熟之.今日雨花動地.以如來滅度而滅度之.復次久遠爲種.過去爲熟.近世爲脫.地涌等是也.復次中間爲種.四味爲熟.王城爲脫.今之開示悟入者是也.復次今世爲種.次世爲熟.後世爲脫.未來得度者是也.雖未是本門.取意說耳.其間節節.作三世九世.爲種爲熟爲脫.亦應無妨.何以故.如來自在神通之力.師子奮迅大勢威猛之力.自在說也.
여시(如是) 따위 때문에 서분(序分)이 있으며, 대중의 희유(希有)한 조짐을 보고 우러러 사모해 구족도(具足道)를 듣고자 하고, 부처님께서는 근기를 따라 교화를 베푸사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개시오입(開示悟入)케 하시므로 정설분(正說分)이 있게 되며, 비단 당시에 큰 이익을 얻을 뿐 아니라, 후오백세(後五百歲)에 있어서도 멀리 묘도(妙道)의 혜택에 젖게 되므로 유통분(流通分)이 있는 것이다.
以如是等故.有序分也.衆見希有瑞.··欽渴.欲聞具足道.佛乘機設化.開示悟入佛之知見.故有正說分也.非但當時獲大利益.後五百歲 遠沾妙道 故有流通分也.
또 교상(敎相)을 보이건대, 이 서(序)는 인천(人天)의 청승(淸昇)의 가르침을 위해 서(序)가 됨이 아니며, 이승(二乘)의 소도(小道)를 위해 서가 됨도 아니며, 즉공통삼(卽空通三)을 위해 서가 됨도 아니며, 홀로 보살법(菩薩法)만을 위해 서가 됨도 아니니, 정직히 방편을 버리고 다만 무상불도(無上佛道)를 설하기 위해 서가 된 것뿐이다.
또 이 정종(正宗)은 세간(世間)의 도리를 가리켜 정종으로 함도 아니며, 반딧불 같은 석지(析智)를 가리켜 정동으로 함도 아니며, 등잔불 횃불 같은 체법지(體法智)를 가리켜 정종으로 함도 아니며, 별이나 달같은 도종지(道種智)를 가리켜 정종으로 함도 아니니, 일광(日光) 같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가리켜 정종이라 한 것이다.
또 이 유통(流通)은 양엽(楊葉) 목우(木牛) 목마(木馬)를 위해 유통이 됨이 아니며, 반자(半字)를 유통함도 아니며, 공자(共字)를 유통함도 아니며, 별자(別字)를 유통함도 아니니, 순전히 원만한 수다라(修多羅)의 만자(滿字)의 법을 유통함을 의미한다.
又示敎相者.此序非爲人天淸升作序.非爲二乘小道作序.不爲卽空通三作序.不爲獨菩薩法作序.乃爲正直捨方便 但說無上佛道作序耳.此正不指世間爲正.不指螢光析智爲正.不指燈炬體法智爲正.不指星月道種智爲正.乃指日光一切種智爲正.此流通 非爲楊葉木牛木馬 而作流通.非流通半字.非流通共字.非流通別字.純是流通圓滿修多羅滿字法也.
다음으로 본적(本迹)을 보이면, 구원(久遠)의 옛날 보살도(菩薩道)를 행하실 때에도 선불(先佛)의 법화경을 선양(宣揚)하심에 있어서 또한 삼분상중하(三分上中下)의 말이 있었으며, 또한 본적이 있었다. 다만 부처님과 부처님이 상망(相望)하시는 터이므로, 이렇다면 끝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로 성불하실 때 설하신 법화경의 삼분상중하(三分上中下)의 말을 취해, 오로지 이름하여 상(上)이라 하며, 이를 이름하여 본문(本門)이라 하게 된다.
왜 그런가. 최초로 성불하여 처음 설하는 가르침인 까닭에 상(上)이라 하며 본문이라 함이니, 이 취지는 쉽게 이해가 가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중간(中間)의 행화(行化), 곧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나 연등불(燃燈佛) 따위 부처님을 도와 법화경을 삼분(三分)을 선양한 것을 다만 이름하여 중(中)이라 하며, 다만 이름하여 적문(迹門)이라 한다. 왜 그런가. 앞에 상(上)이 있는 까닭이며, 앞에 본문이 있는 까닭이다.
또 오늘 왕사성(王舍城)에서 설하는 삼분(三分)은 다만 이름하여 하(下)라 하며, 다만 이름하여 적문이라 하고, 내지는 사자분신(師子奮迅)의 힘이 미래에 길이 설하는 삼분도 최초를 가리켜 상(上)이라 하며 본문이라 하게 된다.
次示本迹者.久遠行菩薩道時.宣揚先佛法華經.亦有三分上中下語.亦有本迹.但佛佛相望 是則無窮.別取最初成佛時 所說法華三分上中下語.專名爲上.名之爲本.何以故.最初成佛初說法故.爲上爲本.此意可知.中間行化.助大通智勝然燈等 佛宣揚法華三分者.但名爲中.但名爲迹.何以故.前有上故.前有本故.今日王城所說三分.但名爲下 但名爲迹.乃至師子奮迅之力.未來永永所說三分.亦指最初 爲上爲本.
비유컨대 큰 나무에 비록 천의 가지와 만의 잎이 있다 해도, 그 근본을 논한다면 그 가지나 잎들이 차례로 이어가면서 서로 근본이 된다고 가리킬 수는 없고, 그 모두가 똑같이 하나의 뿌리를 근본으로 하는 것과 같다. 이 비유는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譬如大樹 雖有千枝萬葉.論其根本 不得傳傳相指 同宗一根.此喩可解(云云).
다음으로 관심(觀心)의 모습을 보이면, 마땅히 제 마음에 입각해 계(戒) 정(定) 혜(慧)를 논함으로써 삼분(三分)해야 할 것이다. 곧 수행에서는 계(戒)를 초(初)로 하고, 정(定)을 중(中), 혜(慧)를 후(後)로 함이 그것이요, 법문(法門)의 경우는 혜(慧)를 본(本)으로 하고, 정(定)과 계(戒)를 적(迹)으로 한다.
次示觀心相者.當約己心 論戒定慧爲三分.修行以戒初.定中慧後.若法門 以慧爲本.定戒爲迹.
계(戒) 정(定) 혜(慧)를 각각 삼분(三分)할 수 있으니 전방편(前方便)과 백사갈마(白四·磨)와 결경(結竟)을 계의 삼분(三分)으로 하고, 이십오방편(二十五方便)과 정관(正觀) 역연(歷緣)이나 또는 백천삼매(百千三昧)에 잘 들며 나오며 머뭄을 정의 삼분으로 하고,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의 즉공(卽空) 즉가(卽假) 즉중(卽中)을 혜의 삼분으로 한다.
又戒定慧各各作三分.前方便 白四·磨 結竟.爲戒三分.二十五方便 正觀歷緣.又善入出住百千三昧等 爲定三分.因緣所生法.卽空卽假卽中 爲慧三分.
이미 삼분(三分)의 방법에 입각해 사종석(四種釋)의 모습을 보였으니 마땅히 이 도리를 써서 「여시(如是)」 아래로부터 「작례이퇴(作禮而退)」에 이르기까지를, 다 사의(四意)를 세워 글을 해석해가야 할 것이다. 다만 이 도리를 따라 비교하여 추측해 이해하기는 쉬우나 구체적인 글 하나 하나를 분별해 나타내 보이려 하면 그 말이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행자(行者)는 이를 잘 생각해야 하리니 말은 다르되 취지는 동일하여, 천 채의 수레가 바퀴자국을 같이하며, 만 가지 물이 바다에 들어오면 똑같이 짠맛이 되는 것 같다고 할 수 있다.
已約三分 示四種相.當用此義.從如是去 至作禮而退已還.悉作四意消文.但準望此義 比知則易.分別顯示 其辭則難.行者善思量之.語異意同.千車共轍 萬流鹹會者也.
서(序)에 통서(通序) 별서(別序)가 있으니, 「여시(如是)」로부터 「각좌일면(却坐一面)」에 이르는 부분은 통서요, 「이시세존(爾時世尊)」으로부터 이 품(品)의 끝에 이르기까지는 별서다.
序有通別.從如是去 至却坐一面 通序也.從爾時世尊去 至品 別序也.
통서(通序)는 여러 가르침의 경에 공통하는 서(序)요, 별서(別序)는 한 경에만 한정되는 서다.
通序 通諸敎.別序 別一經.
통서(通序)는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바, 여섯이나 일곱 부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通序爲五 或六 或七(云云).
「여시(如是)」란 들은 바의 법 자체를 든 것이다. 「아문(我聞)」이란 그 법을 수지(受持)한 사람이다. 「일시(一時)」란 그 법을 들어서 수지하는 인(因)과 연(緣)의 결합된 것이 다른 때가 아님을 이른다. 「불(佛)」이란 때에 부처님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이다. 「왕사성 기사굴산(王舍城耆··山)」이란 그 법을 들어 수지한 장소다. 「여대비구(與大比丘)」란 그 법을 들어 수지한 동반자(同伴者)다. 이는 다 인(因)과 연(緣)이 결합하여 차례로 생겨났음을 뜻한다.
如是者 擧所聞之法體.我聞者.能持之人也.一時者 聞持和合 非異時也.佛者.時從佛聞也.王城耆山 聞持之所也.與大比丘者.是聞持之伴也.此皆因緣和合 次第相生也.
이같이 [如是]
묘법연화경 문구 / 李元燮 저 / 영산 법화사 출판부 / 불기 2541(1997).3.20
또 「여시(如是)」란, 삼세의 부처님의 경 처음에는 다 「여시」가 놓이게 마련인데, 여러 부처님의 도(道)가 동일해 세속(世俗)과 다투지 않으심은 세계실단(世界悉檀)이다. 대론(大論)에 이르되, 「시방(時方)을 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신심(信心)을 생기게 한다.」라 함은 위인실단(爲人悉檀)이다.
또 외도(外道)의 아우(阿·)의 두 자(字)가 여(如)가 아니요 시(是)가 아님을 맞서서 깸은 대치실단(對治悉檀)이다. 또 「여시」란 신순(信順)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하여 믿으면〔信〕들은 가르침의 도리를 이해하며, 따르면〔順〕 사자(師資)의 도(道)가 이루어지게 마련이니, 이는 곧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이다. 인연석(因緣釋)을 시도하려면 심히 넓어져 끝이 없으므로 자세히 기재(記載)하지는 못한다…….
又如是者.三世佛經初 皆安如是 諸佛道同 不與世諍.世界悉檀也.大論云.擧時方令人生信者.爲人悉檀也.又對破外道阿歐二字不如不是.對治悉檀也.又如是者 信順之辭.信則所聞之理會.順則師資之道成.卽第一義悉檀也.因緣釋甚廣 不能具載(云云).
가르침의 종류에 입각해 해석컨대, 경(經)에 의하면 삼세(三世)의 부처님의 법은 처음에 다 「여시」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통례(通例)다.
約敎釋者.經稱三世佛法 初皆如是.
과거의 부처님들에게는 점교(漸敎) 돈교(頓敎) 비밀교(비密敎) 부정교(不定敎) 등의 경이 있으시고, 점교에는 또 삼장교(三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가 있으셨다.
先佛有漸頓 密不定等經.漸又三藏通別圓.
지금의 부처님 또한 그러하시다.
今佛亦爾.
여러 경이 같지 않으므로, 「여시」의 내용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諸經不同 如是亦異.
응당 하나의 열쇠로 여러 문을 똑같이 열고자 하면 안 될 것이다.
不應一匙 開於衆戶.
또 부처님과 아난(阿難)의 두 말씀이 다르지 않음을 여(如. 같다)라 하며, 문구(文句)가 그 내용인 도리를 나타냄을 시(是. 바르다)라고 한다. 이제 아난은 부처님의 어떤 말씀을 전하며, 어떤 바른 도리를 나타낸다는 것이랴. 점교(漸敎)의 말씀으로 돈교(頓敎)의 바른 도리를 전하며 편교(偏敎)의 말씀으로 원교(圓敎)의 바른 도리를 나타낼 수는 없다. 전하는 말이 만약 잘못된다면 표현은 여(如)일 수 없으며, 표현이 여(如)가 아니라면 도리가 타당성을 잃을 것이다. 이런 도리는 밝혀내기 어려우니, 모름지기 생각을 거듭해 자세히 살펴보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又佛阿難二文不異爲如.能詮詮所詮爲是.今阿難傳佛何等文.詮何等是.不可以漸文傳頓是以偏文詮圓是.傳詮若謬則文不如.文不如則理不是.此義難明.須加意詳審.
잠시 점교(漸敎)에 의거해 분별한다면, 부처님께서는 밝히시되 「속제(俗諦)에는 문자(文字)가 있되 진제(眞諦)에는 문자가 없다」고 하셨으니, 아난이 부처님의 속제의 문자를 전해 불설(佛說)괃 다름이 없으므로 여(如)라 함이요, 이 속제의 문자로 말미암아 진제의 도리를 이해하게 되므로 시(是)라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곧 삼장교(三藏敎)의 경(經) 처음에서 여시(如是)를 밝힌 내용이다.
부처님께서 밝히시되, 「색(色)에 상즉(相卽)한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이니,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어서, 둘이 없고 차별이 없다」고 하셨으니, 공과 색이 다르지 않음을 여(如)라 하며, 차별적 현상 그대로가 진리임을 시(是)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통교(通敎)의 경 처음의 여시(如是)다.
부처님이 밝히시되, 「생사(生死)는 유변(有邊)이요, 열반(涅槃)은 무변(無邊)이니, 생사의 유변에서 나와 열반의 무변에 들고, 열반의 무변에서 나와 중도(中道)에 들어간다」고 하셨으니, 아난이 이 유(有)에서 나와 무(無)에 들고, 다시 무에서 나와 중도에 들어감을 전해 불설(佛說)과 다름이 없음을 여(如)라 하며, 얕은 데로부터 깊은 도리로 들어가 그릇됨이 없음을 시(是)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별교(別敎)의 경 처음의 여시(如是)다.
부처님이 밝히시되, 「생사는 곧 열반이요, 또한 곧 중도니, 하물며 또 중도가 어찌 열반이 아니랴. 진여법계(眞如法界) 실성실제(實性實際)가 온갖 곳에 두루 미치니 불법(佛法) 아님이 없다」고 하셨으니, 아난이 이를 전해 불설과 다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여(如)라 하며, 여여부동(如如不動)인 까닭에 이름하여 시(是)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원교(圓敎)의 경 처음의 여시(如是)다.
且依漸敎分別.佛明俗有文字 眞無文字.阿難傳佛俗諦文字.與佛說不異.故名如.因此俗文會眞諦理.故名爲是.此則三藏經初.明如是也.佛明卽色是空 空卽是色 色空空色 無二無別.空色不異爲如.卽事而眞爲是.阿難傳佛文不異爲如.能詮卽所詮爲是.此則通敎經初如是也.佛明生死是有邊.涅槃是無邊.出生死有邊.入涅槃無邊.出涅槃無邊.入於中道.阿難傳此 出有入無 出無入中.與佛說無異爲如.從淺至深 無非曰是.此則別敎經初如是也.佛明生死卽涅槃.亦卽中道.況復涅槃 寧非中道.眞如法界 實性實際.遍一切處 無非佛法.阿難傳此.與佛說無異.故名爲如.如如不動 故名爲是.是則圓經初如是也.
만약 속제(俗諦)를 바꾸어 진리에 든다면 삼장교(三藏敎)의 도리일 뿐이요, 속제는 바꾸지 않은 채 곧 진리가 된다면 통교(通敎)의 도리일 뿐이요, 진리를 바꾸어 진리에 든다면 별교(別敎)의 도리일 뿐이나, 진리를 바꾸지 않은 채 진리라면 원교(圓敎)의 도리다.
若動俗入如 三藏義耳.不動俗卽是如 通敎義耳.動如入如 別敎義耳.不動如而是如 圓敎義也(云云).
돈교(頓敎)의 여시(如是)의 경우는 원교(圓敎)의 그것과 같다. 부정교(不定敎)의 여시는 경우에 따라 전후가 서로 바뀐다. 비밀교(비密敎)의 여시는 숨겨져 전해지지 않는다.
若頓如是 與圓同.不定如是 前後更互. 密者 隱而不傳.
팔교(八敎)의 그물을 펼쳐 법계(法界)의 바다에 치면서도 누락됨이 있을까 두려워 하거늘 하물며 그물의 한 눈을 어찌 단독으로 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일시에 네 사람이 쏘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 땅에 하나도 떨어지지 않게 한다 해도 감히 빠르다고는 못하리니, 둔한 노새나 절름발이 자라라면 아무리 채찍질을 한다 해도 하나조차 못 얻을 것인데 하물며 넷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敷八敎網 旦法界海.懼其有漏.況羅之一目 若爲獨張.又一時接四箭.不令墮地.未敢稱捷.策鈍驢驅跛鱉 尙不得一.何況四耶(云云).
본적(本迹)에 입각해 여시(如是)를 해석컨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시방제불(十方諸佛)들, 곧 그 부처님을 공간적으로 보건 시간적으로 보건 다 그러함에 틀림없다. 우선 시간적인 처지에서만 본대도 과거제불(過去諸佛)은 멀고 머시며, 현재제불은 넓고 넓으시며, 미래제불은 길고 기신 터이니 다 여시(如是)라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어디메가 본문(本門)이요, 어디메가 적문(迹門)이라 하랴. 잠시 적존(釋尊)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최초로 성도하시고 나서 설하신 경 처음에서 여시(如是)라 하신 것은 본문이요, 중간에 부처님이 되시어서 설하신 경과 오늘 설하시는 경 처음의 여시는 다 적문이라 할 수 있다.
또 아난이 전하는 여시는 적문이요, 부처님이 설하시는 여시는 본문이라 할 수 있다.
또 사제(師弟)의 여시에 통달함이 오늘에 시작됨이 아니며 또한 중간에 얻어짐도 아닌 것은 본문이요, 그러면서도 중간이나 오늘에 이해함은 적문이다.
約本跡釋如是者.三世十方 橫揷皆爾.過去遠遠.現在漫漫.未來永永.皆悉如是.何處是本 何處是迹.且約釋尊.最初成道.經初如是者 是本也.中間作佛說經.今日所說經初如是者.皆跡也.又阿難所傳如是者迹也.佛所說如是者 本也.又師弟通達如是.非始今日.亦非中間者本也.而中間而今日者迹也.
관심(觀心)으로 해석할 경우, 앞의 실단(悉檀)과 교(敎) 적(迹) 등의 여러 여시(如是)의 도리를 관(觀)하건대, 다 인연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그리하여 인연에서 생겨난 그것들이 바로 공(空)인 것은 곧 통교(通敎)의 관법(觀法)이다. 인연에서 생긴 그것들이 바로 공이면서 곧 가(假)가 됨은 별교(別敎)의 관법이다. 두 관법(觀法)을 방편도(方便道)로 하여, 중도제일의(中道第一義)에 들어갈 수 있어서 이제(二諦)를 둘 다 비춤은 통교이기도 하고 별교이기도 한 관법이다. 위의 것들이 다 중도임은 통교도 아니요 별교도 아닌 관법이다.
觀心釋者.觀前悉檀敎迹等諸如是義 悉是因緣生法.緣生卽空 卽通觀也.因緣卽空卽假者.別觀也.二觀爲方便道.得入中道第一義.雙照二諦者.亦通亦別觀也.上來悉是中道者 非通非別觀也.
아래의 경문(經文)에서 이르되, 「만약 사람이 있어 네가 설하는 바를 믿는다면 곧 나를 보며, 또한 너와 비구의 승단(僧團)과 모든 보살을 보는 것이 되리라.」고 하시니, 이는 곧 관행(觀行)을 보이신 명문(明文)이다.
下文云.若人信汝所說.卽得見我 亦見於汝 及比丘僧 幷諸菩薩.卽觀行之明文也.
신(信)은 곧 중생의 기연(機緣)을 논하게 되며, 견(見)은 곧 부처님 측의 응대(應對)니, 이는 곧 인연석(因緣釋)이다. 또 신(信)에 얕고 깊은 차이가 있으며, 견(見)에 방편과 진실의 구별이 있어서 갖가지로 분별함이 같지 않은 것은, 곧 가르침을 분별하는 일이어서 약교석(約敎釋)이다. 또 법화경의 글을 믿으면 곧 실상의 본지(本地)를 보리니 만약 신자(身子)의 화신(化身)을 본다면 용타(龍陀)의 본지를 보며, 만약 시성(始成)의 석존(釋尊)을 뵙는다면 또한 구성(久成)의 선불(先佛)을 뵈며, 만약 천이백의 비구와 8만의 보살을 보는 자는, 또한 그 본지를 볼 것이다.
또 경(經)을 듣고 나서 마음에 믿어 의혹함이 없어서, 이 신심(信心)이 밝고 청정함을 깨닫는 것은 곧 부처님을 뵙는 것이 되며, 혜수(慧數)가 분명함은 신자(身子)를 보는 것이 되며, 제수(諸數)가 분명함은 여러 비구를 보는 것이 되며, 자비심이 청정함은 모든 보살을 보는 것이 될 것이다. 이같이 마음에 입각해 넷으로 하여 글을 따라 해석하면 더욱 도리가 명백해지는 느낌이 든다.
信則論機.見則是應.卽因緣也.又信有淺深.見有權實.種種分別不同者.卽分別敎.又信法華之文.則見實相之本.若見身子之化.則見龍陀之本.若見始成釋尊.亦見久成先佛.若見千二百比丘 八萬菩薩者.亦見其本也.又聞經心信無疑.覺此信心明淨.卽是見佛.慧數分明 是見身子.諸數分明 是見衆比丘.慈悲心淨 是見諸菩薩.約心爲四 帖釋轉明.
만약 다른 경을 해석하는 경우라면 다만 삼의(三意)를 쓰면 될 것이니, 아직 본지(本地)를 일으켜 수적(垂迹)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경(今經)의 경우는 세 가지 해석 방법은 다른 경과 동일해도, 한 가지 해석 방법은 저 경들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네 가지 방법으로 여시(如是)를 해석함이 이것으로 끝난다…….
若釋他經 但用三意.爲未發本顯跡故.當知今經三釋與他同.一釋與彼異.四番釋如是竟(云云).
내가 듣자오니 [我聞]
묘법연화경 문구 / 李元燮 저 / 영산 법화사 출판부 / 불기 2541(1997).3.20
「내가 듣자오니」는 혹 「듣기를 이 같이 하오니」로 하는 수도 있는데, 대개 경본(經本)이 같지 않은지라 앞뒤를 서로 바꾸어 든 것뿐이다.
이제 예를 따라 네 가지 관점에서 해석컨대 대론(大論)에 이르되, 「이근(耳根)이 파괴되지 않아 멀쩡한 터에, 소리가 들릴 수 있는 곳에 있고 거기에 마음을 일으켜 듣고자 하는 작용이 발동해서, 이런 여러 연(緣)이 결합되어 듣는다는 일이 성립한다.」했으니, 그러므로 「내가 듣자오니」라 한 것이다.
질문. 「응당 〈귀로 듣자오니〉라 해야 할 것인데 왜 〈내가 듣자오니〉라 말했는가.」
대답. 「나는 이근(耳根)의 주인이므로 〈나〉를 들어 여러 연을 그 속에 포함시킨 것이다.」이는 세계실단(世界悉檀)의 해석이다.
我聞者.或聞如是 蓋經本不同 前後互擧耳.今例爲四釋.大論云.耳根不壞 聲在可聞處.作心欲聞.衆緣和合 故言我聞.問.應言耳聞.那云我聞.答.我是耳主.擧我攝衆緣.此世界釋也.
아난(阿難)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 「내가 듣자오니」라 일컬으니 대중이 다 슬퍼 부르짖어, 전에 여래를 뵙더니 이제는 「내가 듣자오니」라 일컬음을 듣는다 하여 무학(無學)들이 하늘에 날아올라 게송(偈頌)을 설했다 한다. 또 불화경(佛話經)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문수보살이 결집(結集) 때 먼저 제목을 부르고, 다음에 「이 같이 내가 듣자오니」라 일컬으니 때에 대중들이 실피 부르짖었다 했다. 이는 위인실단(爲人悉檀)의 해석이다.
阿難登高稱我聞.大衆應悲號.適見如來 今稱我聞.無學飛騰說偈.佛話經明.文殊結集先唱題 次稱如是我聞.時衆悲號 此爲人釋也.
아난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 「내가 듣자오니」라 일컬어 대중의 의혹을 제거했다고도 해석된다. 아난의 몸은 부처님과 아주 닮았으나, 부처님보다 키가 작음이 세 손가락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대중이 의혹하되, 석존께서 거듭 출현하심인가 여기기도 하며, 혹은 다른 세계의 부처님께서 이곳에 오심인가 하기도 하며, 혹은 아난이 성불함인가 여기기도 했는데, 만약 아난이 「내가 듣자오니」라 말한다면, 이 세 가지 의혹이 제거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대치실단(對治悉檀)의 해석이다.
阿難登高稱我聞遣衆疑.阿難身與佛相似.短佛三指 衆疑釋尊重出.或他方佛來.或阿難成佛.若唱我聞 三疑卽遣.此對治釋也.
아난은 학인(學人)이라 세속의 도리를 따라 「내가 듣자오니」라 일컬었던 것이나, 절대적 도리 속에는 「나」도 없고 「들음」도 없다고 해야 한다. 고래의 여러 해석들은 똑같이 인연의 한 가지 해석만을 써왔을 뿐이라 할 것이다.
阿難學人.隨俗稱我聞.第一義中無我無聞.古來衆釋 同是因緣一意耳.
가르침의 종류에 입각해 해석컨대, 석론(釋論)에서 이르되 「범부에 세 가지 아(我)가 있으니 견아(見我) 만아(慢我) 명자아(名字我)를 이른다. 그리하여 학인(學人)에게는 두 가지 아(我)가 있고, 무학(無學)에게는 한 가지 아(我)가 있는 것이 된다.」고 했다. 아난은 학인이기에 사아(邪我)는 없고, 능히 만아(慢我)는 누르는 터이나, 세속의 명자(名字)를 따라 아(我)라 일컫는대도 허물될 것은 없다. 이는 삼장교(三藏敎)의 취지를 써서 아(我)를 해석함이다.
約敎解釋者.釋論云.凡夫三種我.謂見慢名字.學人二種.無學一種.阿難是學人.無邪我 能伏慢我.隨世名字 稱我無咎.此用三藏意釋我也.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 이르되, 「사구(四句)에서 아(我)라 일컫는다면 다 사견(邪見)에 떨어진다. 부처님의 정법(正法) 중에는 본디 아(我)라는 것이 없거니,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으랴.」했다. 이는 통교(通敎)의 취지를 써서 아(我)를 해석함이다.
十住毘婆沙云.四句稱我 皆墮邪見.佛正法中無我 誰聞.此用通敎意也.
대경(大經)에 이르되, 「아난(阿難)은 다문(多聞)한 사람이라, 아(我)와 무아(無我)가 불이(不二)임을 알되, 아울러 아와 무아를 분별한다.」하셨다. 이는 별교(別敎)의 취지로 아(我)를 해석한 것이다.
大經云.阿難多聞士.知我無我而不二.雙分別我無我.此用別敎意也.
또 아난은 아(我)와 무아(無我)의 불이(不二)임을 알되, 방편으로 시자(侍者)가 되어 여래의 무애(無애)한 지혜를 전했으니, 자재한 음성으로 방편의 가르침을 전하며 진실의 가르침을 전함에 있어서 무슨 불가(不可)함이 있었으랴. 이는 원교(圓敎)의 취지를 써서 아(我)를 해석함이다.
又阿難知我無我而不二.方便爲侍者.傳持如來無 智慧.以自在音聲 傳權傳實.有何不可.此用圓敎釋我也.
또 정법념경(正法念經)에 세 가지 아난(阿難)을 밝힌 것이 있다. 아난타(阿難陀)라 함은 여기서 번역해 환희(歡喜)라 말하니 소승의 가르침을 수지하며, 아난발타(阿難跋陀)라 함은 여기서 번역해 환희현(歡喜賢)이라 말하니 뒤섞인 가르침을 수지하며, 아난사가(阿難娑伽)라 함은 여기에서 번역해 환희해(歡喜海)라 하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지한다 하여 구별했다. 여기에다가 아함경(阿含經)에서는 전장아난(典藏阿難)이 있어서 보살의 가르침을 수지한다 했으므로 대개 한 사람인 아난이 사덕(四德)을 구비하고 있음을 가리키며, 네 가지 법문(法門)을 전하여 수지함이 되니, 그 도리는 스스로 드러난다 할 수 있다…….
又正法念經.明三阿難.阿難陀 此云歡喜.持小乘藏.阿難跋陀 此云歡喜賢.受持雜藏.阿難娑伽 此云歡喜海.持佛藏.阿含經有典藏阿難.持菩薩藏.蓋指一人具於四德.傳持四法門 其義自顯(云云).
본적(本迹)에 입각해 해석컨대, 만약 회입(會入)하지 못했다면, 아난이 세속의 관례를 따라 나〔我〕라 불렀다고 말해도 된다. 그러나 만약에 수적신(垂迹身)임을 털어놓고 본신(本身)을 드러낸다면 공왕불(空王佛) 계신 곳에서 동시에 발심(發心)한 사이건만, 방편으로 법을 전하는 사람이 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어찌 못하는 일이 있으시랴.
本跡釋者.若未會入.可言阿難隨世名我.若發迹顯本.空王佛所 同時發心.方便示爲傳法之人.何所不能.
관심(觀心)에서 해석컨대, 인연에서 생겨난 사물들을 관(觀)하면, 그 모두가 즉공(卽空) 즉가(卽假) 즉중(卽中)임을 알게 된다. 즉공이란 아(我)가 무아(無我)임을 말하며, 즉가란 아(我)를 분별함을 말하며, 즉중이란 진묘(眞妙)의 아(我)다.……
觀心釋者.觀因緣所生法.卽空卽假卽中.卽空者 我無我也.卽假者 分別我也.卽中者 眞妙我也(云云).
「이 같이 내가 듣자오니」의 「듣는다」는 말을 해석컨대, 아난은 부처님께서 득도(得道)하시던 날 밤에 태어나 부처님에게 이십여 년이나 시중든 사람이므로, 부처님에게 시중들지 않았을 때의 설법은 응당 듣지 못했을 것이다. 대론(大論)에서 이르되, 「아난이 법을 결집(結集)할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부처님의 초전법륜(初轉法輪)은 내가 그때 뵙지 못했으니 이 같이 내가 외우는 가르침은 차례로 전하여 들은 것이다〉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 마땅히 그 모두를 들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釋聞者.阿難佛得道夜生.侍佛二十餘年.未侍佛時 應是不聞.大論云.阿難集法時自云.佛初轉法輪.我爾時不見.如是展轉聞.當知不悉聞也.
옛사람의 해석에 이르기를 「아난은 불각삼매(佛覺三昧)를 얻었기에, 그 힘으로 보아 스스로 능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했다.
舊解云.阿難得佛覺三昧 力自能聞.
보은경(報恩經)에 이르되, 「아난은 네 가지 소원을 들어 주시도록 요구하여, 제가 듣지 못한 경을 원컨대 부처님께서 거듭 설해 주소서 하고 말씀드렸다.」하고, 또 이르되 「부처님께서 은밀히 그를 위해 이를 설해 주셨다.」고 했다. 또 태경(胎經)에 이르되, 「부처님께서 금관(金棺)으로부터 금비(金臂)를 내사, 거듭 아난을 위해 입태상(入胎相)을 나타내 보이셨다.」했다. 이리하여 초기의 여러 경도 다 들을 수 있었거니, 하물며 그 후 다른데서 설해진 경들이겠는가.
報恩經云.阿難求四願.所未聞經 願佛重說.又云 佛口密爲說也.胎經云.佛從金棺出金臂.重爲阿難現入胎之相.諸經皆聞 況餘處說耶.
이 글에서 이르되, 「아난이 기(記)를 얻고 나서, 곧 자기의 본원(本願)을 생각해내어 옛 부처님들의 가르침을 기억함이 다 오늘에 들은 것과 같았다.」했다. 이는 인연석(因緣釋)이다.
此文云.阿難得記 卽憶本願 持先佛法 皆如今也.此因緣釋也.
만약 가르침의 종류에 입각해 해석한다면 환희아난(歡喜阿難)의 경우, 얼굴은 청정한 보름달 같으며 눈은 푸른 연꽃같아, 친히 부처님의 뜻을 받자옴이 입을 위로 하고 있는 성한 그릇과 같으며, 이를 전하여 사람을 교화함이 다른 병에 물을 쏟아붓는 것과 같으니, 이는 문문(聞聞)의 법을 전함이다.
환희현(歡喜賢)은 학지(學地)에 머물어 공(空) 무상(無相)의 원(願)을 얻어, 안(眼) 이(耳) 비(鼻) 설(舌)의 여러 감각기관에 더러움이 없으니, 문불문(聞不聞)의 법을 전함이다.
전장아난(典藏阿難)은 포함해 받은 바가 많아 큰 구름이 비를 간직한 것 같으니, 이는 불문문(不聞聞)의 법을 전함이다.
아난해(阿安海)는 다문(多聞)한 사람이라 저절로 상(常)과 무상(無常)을 이해하게 마련이니, 만약 여래께서 항상 설법하시지 않는 줄 안다면, 이를 보살로서 다문을 갖추었다고 부를 만하다. 불법의 대해(大海)의 물이 아난의 마음속에 저절로 흘러 들어옴이니, 이는 불문불문(不聞不聞)의 법을 전함이다. 지금의 경은 해아난(海阿難)의 불문불문의 묘법(妙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若約敎者.歡喜阿難.面如淨滿月.眼若靑蓮華.親承佛旨 如仰完器.傳以化人 如瀉異甁.此傳聞聞法也.歡喜賢.住學地得空無相願.眼耳鼻舌 諸根不漏.傳持聞不聞法也.典藏阿難多所含受.如大雲持雨.此傳持不聞聞法也.阿難海.是多聞士.自然能解了是常與無常.若知如來常不說法.是名菩薩具足多聞.佛法大海水.流入阿難心.此傳持不聞不聞法也.今經是海阿難.持不聞不聞之妙法也.
본적(本迹)에 입각해 해석컨대, 위의 네 가지 문(聞)에 대한 약교석(約敎釋)이 다 응적신(應迹身)의 인도이시되, 그 본지(本地)는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本跡解者.如上四聞皆迹引.而本地不可思議(云云).
관심(觀心)에 입각해 해석컨대, 인연법(因緣法)을 관(觀)함은 문문(聞聞)을 관함이요, 공(空)을 관(觀)함은 문불문(聞不聞)을 관함이요, 가(假)를 관함은 불문문(不聞聞)을 관함이요, 중(中)을 관함은 불문불문(不聞不聞)을 관함이다……. 여기서 일념(一念)의 관(觀)이란 묘관(妙觀)을 이름이다…….
觀心釋者.觀因緣法 是觀聞聞.觀空 是觀聞不聞.觀假 是觀不聞聞.觀中 是觀不聞不聞(云云).一念觀者 妙觀也(云云).
한 때, [一時]
묘법연화경 문구 / 李元燮 저 / 영산 법화사 출판부 / 불기 2541(1997).3.20
일시(一時)란 무엇인가에 대해 언급한 선인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승조(僧肇)가 말하되, 「법왕(法王)께서 운(運)을 여시매 즐겁게 만나는 때다.」라 함은, 세계실단(世界悉檀)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이르되, 「가라(迦羅)는 실시(實時)니, 이것으로 내제자(內弟子)에게 일정한 때에 먹고, 일정한 때에 옷 입을 것을 보이신다.」하니, 이는 위인실단(爲人悉檀)이다.
또 이르되, 「삼마야(三摩耶)는 가시(假時)니, 이것으로 외도(外道)의 사견(邪見)을 깨신다.」하니, 이는 대치실단(對治悉檀)이다.
만약 때와 도(道)가 합치(合致)한다면, 이는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이다…….
一時者.肇師云.法王啓運 嘉會之時者.世界也.論云.迦羅是實時.示內弟子 時食時著衣者.爲人也.三摩耶是假時.破外道邪見者.對治也.若時與道合者.第一義也(云云).
만약 견제(見諦) 이상 무학(無學) 이하의 경우라면 「하(下)의 일시(一時)」라 한다. 만약 세 사람이 함께 제일의(第一義)에 들어가는 경우라면 「중(中)의 일시」라 한다. 만약 등지(登地) 이상의 경우라면 「상(上)의 일시」라 한다. 만약 초주(初住) 이상의 경우라면 「상상(上上)의 일시」라 하는 바, 금경(今經)은 「상상의 일시」다. 이는 가르침의 종류에 입각해 분별한 것이다.
若見諦已上 無學已下.名下一時.若三人同入第一義.名中一時.若登地已上 名上一時.若初住已上.名上上一時.今經是上上一時.此約敎分別也.
본적(本迹)에 입각해 해석컨대, 앞의 모든 일시(一時)는 적불(迹佛)이 설하신 것이요, 구원실득(久遠實得)의 일시는 본불(本佛)의 그것이다.
本跡者.前諸一時 迹也.久遠實得之一時 本也.
마음을 관(觀)하여 해석컨대, 마음을 관하되 먼저 공(空)이라 보고, 다음에 가(假)라 보고, 뒤에 중도(中道)라 봄은 차제관심(次第觀心)이요, 마음을 관하되 그대로 공이요 가요 중도라 보는 것은 원묘관심(圓妙觀心)이다.
觀心釋者.觀心先空次假後中.次第觀心也.觀心卽空卽假卽中者.圓妙觀心也.
서품 제1 [序品 第一]
묘법연화경 문구 / 李元燮 저 / 영산 법화사 출판부 / 불기 2541(1997).3.20
생각컨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기 어렵고, 부처님이 이를 설하심이 어렵고, 이를 전래(傳來)하여 번역함이 어렵고, 스스로 깨달음을 열기 어렵고, 스승의 강의를 듣기 어렵고, 일부나마 기술하기 어렵게 마련이다. 내가 스물 일곱에 금릉(金陵) 땅에서 『법화경 문구』의 강의를 듣잡고, 예순 아홉 살 되는 지금 단구(丹丘)에서 첨삭(添削)하니, 이를 후현(後賢)들에게 남겨 줌으로써 함께 부처님의 지혜에 이르기를 기약하는 것뿐이다.
(佛出世難 佛說是難.傳譯此難 自開悟難 聞師講難 一遍記難.余二十七於金 陵聽受.六十九 於丹丘添削.留贈後賢.共期佛慧)
자세히 경의 제목을 해석컨대, 이미 위에서 설한 바와 같다.
委釋經題 已如上說.
서(序)란 상서(庠序)라 새기니, 계위(階位) 빈주(賓主) 문답(問答)이 다 상서다.
序者訓庠序.謂階位賓主問答 悉庠序也.
세속의 처지에서 말하는 서(序)는 그렇다 해도, 경(經)의 연구자들은 불교의 도리를 따라 서(序)를 삼으니, 차서(次序) 유서(由序) 술서(述序)를 이른다. 여시(如是) 따위 오사(五事)가 경의 첫머리에 얹혀짐은 차서다. 방광(放光) 따위 육서(六瑞)는 본론(本論)을 일으키는 단서(端緖)가 되니 유서(由序)다. 문답석의(問答釋疑)는 정설(定說)의 농인(弄引)이어서 서술( 述)이다. 이 세 가지 도리를 갖추고 있기에 해석해 서(序)라 하는 것이다.
經家從義 謂次由述也. 如是等五事 冠於經首 次序也.放光六瑞 起發之端 由序也.問答釋疑 正說弄引 述也.具此三義 故稱爲序.
품(品)이란 중아함경(中阿含經)에서 발거(跋渠)라 한 그것이니, 이를 번역해 품(品)이라 했다. 품(品)이란 도리의 같은 것을 모아 한 부분에 놓은 것이다. 품(品) 중에는 혹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품도 있으니 범망경(梵網經)의 경우와 같으며, 혹은 결집(結集) 때 설정한 것이 있으니 대론(大論)과 같으며, 혹은 역경(譯經)하는 사람이 덧붙인 것이 있으니 구마라습(鳩滅什)의 경우와 같다.
지금의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은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품이요,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따위는 경의 연구가가 써넣은 것일 뿐, 역경하는 사람은 들어본 일이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여러 품(品)의 처음이므로 제일(第一)이라 했다.
品者 中阿含云跋渠 此蒜爲品. 品者 義類同者 聚在一段 故名品也. 或佛自唱品如梵網. 或結集所置 如大論. 或譯人添足 如羅什. 今藥王本事是佛唱 妙音觀音等是經家 譯人未聞. 諸品之始 故言第一.
부처님께서는 기연(機緣)을 따라 산화(散華) 관화(貫華)의 두 가지 설법을 하셨는데, 결집(結集)하는 사람은 그 설법에 의거해 이를 전하고, 논사(論師)들은 경에 의지해 서술한 것뿐이어서 다 절목(絶目)을 나누지는 않았다.
佛赴緣 作散花貫華兩說. 結集者按說傳之.論者依經申之.皆不節目.
옛 강사(講師)들은 다만 경의 도리를 자세히 설했을 뿐 문장의 단락(段落)을 나누지는 않았었는데, 만약 오로지 이런 방침만을 쓰는 경우에는 후세 사람들이 거의 경의 도리가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를 짐작 못하게 될 것이다.
古講師 但敷弘義理 不分章段.若純用此意.後生殆不識起盡.
또 부처님께서는 관화(貫華) 산화(散華)를 설하셨을 뿐이건만, 결집(結集)하는 사람들은 도리를 따라 품(品)을 세웠다.
又佛說貫散.集者隨義立品.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이르되, 「계경(契經)이 그 한 부분이요, 율(律)이 그 한 부분이요, 아비담(阿毘曇)이 그 한 부분이다.」했다. 계경을 다시 넷으로 나누니, 증일아함경 장아함경(長阿含經) 중아함경(中阿含經) 잡아함경(雜阿含經)인 바, 증일아함경에서는 인천(人天)의 인과(因果)를 밝히고, 장아함경에서는 사견(邪見)을 깨고, 중아함경에서는 깊은 도리를 밝히고, 잡아함경에서는 선정(禪定)을 밝혔다.
율(律)은 오부율(五部律)과 팔십송율(八十誦律)로 나뉘고, 아비담은 육족론(六足論) 팔건도론(八 度論)으로 나뉘니, 육족은 아함경에서 「시(施) 계(戒) 혜(慧)의 육도(六度)가 다 족(足)이다.」한 것 같고, 팔건도는 근성(根性)과 도(道)와 정(定)등의 팔종취(八種聚)를 이름이다.
增一云.契經一分.律一分.阿毘曇一分.契經更開四.謂增一長中雜.增一阿含 明人天因果.長阿含 破邪見.中阿含 明深義.雜阿含 明禪定.律開五部 及八十誦.阿毘曇 六足 八 度等.阿含謂.施戒慧六度皆足也.謂根性道定等八種聚也.
천친(天親)은 논(論)을 지어, 칠공덕(七功德)으로 서품(序品)을 나누고, 오시현(五示現)으로 방편품을 나누었으니, 다른 품(品)들도 이런 방식으로 각기 처리함이 있었다.
天親作論 以七功德分序品.五示現分方便品.其餘品 各有處分.
옛날 하서(河西)의 도빙(道憑)과 강동(江東)의 법요(法瑤)가 이 취지를 따라 경문(經文)을 나눈 바 있더니, 말대(末代)에서는 심히 번거로운 추세를 보이는 중에, 광택(光宅)에 이르러서는 더욱 자세해졌다. 이는 마치 두터운 구름이 하늘을 가리매 삼광(三光)이 그 때문에 빛을 거둔 격이니, 도를 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존중하는 바가 되지 못했다. 담란(曇鸞)이 이르기를, 「자세한 분과(分科)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여러 사석(沙石)이 티끌같이 날린다」한 것이 그것이어서, 대개 지나치거나 못 미치거나 한 것들이었다.
昔河西憑.江東瑤.取此意節目經文.末代尤煩 光宅轉細.重雰峠於太淸.三光爲之즙耀.問津者所不貴 曇鸞云.細科煙 雜礪塵飛.蓋若過若不及也.
여산(廬山)의 혜룡(慧龍)은 법화경의 글을 나누어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이라 했다. 그리고 이십 칠 품(二十七品) 전체를 오직 두 종류의 도리로 보았다. 곧 서품(序品)에서 법사품(法師品)에 이르는 내용은 언방편(言方便) 언진실(言眞實)이니, 진리는 하나인데 세 가지 진리〔三乘〕를 설했기 때문이요, 보탑품(寶塔品) 이하는 신방편(身方便) 신진실(身眞實)이니, 실은 구원불(久遠佛)이면서 근성불(近成佛)이라 말씀하신 까닭이다. 또 방편품에서 안락행품(安樂行品)에 이르기까지는 인문(因門)이요, 용출품(涌出品) 이하는 과문(果門)이라 했다.
廬山龍師.分文爲序正流通.二十七品 統唯兩種.從序至法師.言方便言眞實.理一說三故.寶塔下.身方便身眞實.實遠唱近故.又從方便 至安樂行.是因門 從踊出下 是果門.
제(齊)의 중흥사(中興寺)의 승인(僧印)과 소산사(小山寺)의 법요(法瑤)는 혜룡(慧龍)으로부터 법화경을 배웠으니, 경문을 나누는 방식도 같았다. 그리고 현창(玄暢)은 서품에서 다보품(多寶品)에 이르는 것을 인분(因分)이라 하고, 권지품(權持品)에서 신력품(神力品)에 이르기까지를 과분(果分)이라 하고, 촉루품(囑累品)에서 경의 끝까지를 호지분(護持分)이라 했다.
齊中興印.小山瑤.從龍受經分文同.玄暢從序至多寶爲因分.從勸持至神力爲果分.從囑累盡經 爲護持分.
또 논사(論師)가 있어서 이르되, 「서품에서 학무학인기품(學無學人記品)에 이르는 부분은 법화경의 본체(本體)요, 법사품에서 촉루품에 이르는 부분은 수지(受持)하는 공덕을 밝히심이요, 약왕품(藥王品)에서 경의 끝부분까지는 여러 보살의 본원(本願)을 칭찬하신 것이다.」라 했다.
又有師云.從序至學無學人記.是法華體.從法師至囑累.明受持功德.從藥王盡經.美諸菩薩本願.
또 논사가 있어서 사단(四段)으로 나누기도 하니, 처음의 품(品)을 서단(序段)이라 하고, 방편품에서 안락행품에 이르기까지가 개삼현일단(開三顯一段),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에서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에 이르는 부분이 개근현원단(開近顯遠段), 그 뒤로부터 나머지 부분이 유통단(流通段)이라 함이었다.
有師作四段.初品爲序段.從方便至安樂行.開三顯一段.從踊出訖分別功德.開近顯遠段.後去餘勢 流通段.
광택 법운(光宅法雲)은 승인(僧印)을 좇아 법화경을 배웠으나, 분과(分科)에 있어서는 처음에 경 전체를 삼단(三段)으로 나누고, 다음에 그것들을 각각 둘로 쪼갰다. 곧 서단(序段)은 통서(通序) 별서(別序)가 있음을 이르고, 정종단(正宗段)은 인문(因門) 과문(果門)이 있음을 이르고, 유통단(流通段)은 화타(化他) 자행(自行)이 있음을 이르는데, 다시 두 서(序)에는 각기 다섯이 있고, 두 정종(正宗)에는 각기 넷이 있고, 두 유통(流通)에는 각기 셋이 있다고 세분(細分) 했으므로, 합하여 이십 사 단(二十四段)이 되었다.……
光宅雲 從印受經.初三段. 次各開二.謂通序別序.正謂因門果門.流通謂化他自行.二序各五.二正各四.二流通各三.合二十四段(云云).
그러나 이 여러 사람들이 시도한 경문(經文)에 대한 분과(分科)는, 다 제멋대로의 분별에서 나온 것들이었으니, 난초와 국화가 각기 그 아리따움을 오로지하듯 자설(自說)의 우수함을 주장한다 해도, 후생(後生)들은 그것에서 시비를 가려 다투는 일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그것들은 삼익(三益)이 없고 일도(一道)를 잃고 있음이니, 삼익이란 세계 따위 삼실단(三悉檀)이요, 일도란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이다.
夫分節經文 悉是人情.蘭菊各擅其美.後生不應是非諍競.無三益 喪一道.三益者.世界等三悉檀也.一道者.第一義悉檀也.
천태 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는 법화경의 글을 나누어 셋으로 하니, 처음의 품(品)을 서분(序分)이라 하고, 방편품에서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의 십구항(十九行)의 게송에 이르는 십오 품(十五品)을 정종분(正宗分)이라 하고, 그 게송 뒤에서 경이 끝나기에 이르는 십일 품 반(十一品 半)을 유통분(流通分)이라 명명(命名)했다.
또 동시에 법화경을 크게 나누어 둘로 삼아서, 서품(序品)에서 안락행품(安樂行品)에 이르는 십사 품(十四品)은 적문(迹門)에 입각한 개권현실(開權顯實)이요,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에서 경이 끝나는 십사품(十四品)은 본문(本門)에 입각한 개권현실이라 했다.
그리고 다시 본문 적문에 각기 서분 정종분 유통분이 있다고 주장해, 적문에서는 처음의 품(品)을 서분(序分)이라 하고, 방편품에서 수학무학인기품(授學無學人記品)에 이르기까지를 정종분(正宗分)이라 하고, 법사품(法師品)에서 안락행품(安樂行品)에 이르기까지를 유통분(流通分)이라 했다.
본문(本門)의 경우는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의 처음부터 같은 품의 「미륵이 이미 이 일에 대해 물으니, 부처님께서 이제 대답하시리라」에 이르는 반품(半品)을 서분이라 명명하고, 「부처님께서 아일다(阿逸多)에 이르시되」 아래에서부터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의 게송에 이르기까지를 명명하여 정종분이라 하고, 이 뒤에서 경이 끝나는 데까지는 유통분이라 한다고 했다. 이 기술에서는 앞의 삼단(三段)을 따라 경문을 해석한다.
天台智者 分文爲三.初品爲序.方便品訖分別功德十九行偈.凡十五品半名正.從偈後盡經.凡十一品半名流通.又一時分爲二.從序至安樂行十四品.約迹開權顯實.從踊出訖經十四品.約本開權顯實.本迹各序正流通.初品爲序.方便訖授學無學人記品爲正.法師訖安樂行爲流通.通出訖彌勒已問斯事佛今答之半品名序.從佛告阿逸多下.訖分別功德品偈.名爲正.此後盡經爲流通.今記從前三段消文也.
질문.
「한 경에 어떻게 두 서(序)가 있을 수 있는가.」
대답.
「화엄경에서는 곳곳에 무리를 모아 법을 설하시고, 아함경은 편(篇)마다 여시(如是)가 붙어 있고, 대품(大品)은 전후에 부촉(付囑)하는 말씀이 있되, 다 일부(一部)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으니, 두 서(序)가 있은들 무슨 지장이 되랴. 이제 오의(五義)를 두지 않은 것은 본문(本門)이 경의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요, 적문(迹門)에서 다만 단순히 유통(流通)만을 말씀하심은 설법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니, 있고 없는 내용을 따른 것뿐이다.」
問.一經云何二序.答.華嚴處處集衆.阿含篇篇如是.大品前後付囑.皆不乖一部.兩序阿妨.今不安五義者.本門非次首故也.迹門但單流通者.說法未竟也.有無之意云爾.
이제 경문(經文)을 따라 해석하는 방법에 넷이 있으니, 첫째는 열수(列數), 둘째는 소이(所以), 셋째는 인증(引證), 넷째는 시상(示相)이다. 열수란, 첫째는 인연(因緣) 둘째는 약교(約敎) 셋째는 본적(本迹) 넷째는 관심(觀心)이니, 처음의 「여시(如是)」로부터 「이퇴(而退)」로 끝나기까지 다 사의(四意)로 경문을 해석하는 터이나, 그러면서도 이제 간략하게 써서 혹 이 중의 셋이나 둘이나 하나만을 드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요는 진의(眞意)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므로 굳이 형식에 구애되어 장황히 붓을 놀릴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今帖文爲四.一列數 二所以 三引證 四示相.列數者.一因緣 二約敎 三本跡 四觀心.始從如是 終于而退.皆以四意消文.而今略書.或三二一.貴典意 不煩筆墨.
둘째로 소이(所以)에 대하여 밝힌다.
질문.
「만약 간략히 말한다면 하나가 될 것이며, 만약 자세히 그 방법을 말한다면 네 가지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사석(四釋)을 내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
「지나치게 자세히 말하면 지혜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해서 퇴전(退轉)케 할 것이며, 지나치게 간략하다면 취지가 두루 미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그 중간에 서서 설하는 것에 의해 도리를 이해하기 쉽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二所以者 問 若略則一.若廣匪四.所以云何.答.廣則令智退.略則意不周 我今處中說.令義易明了.
인연석(因緣釋)은 또 감응석(感應釋)이라고도 한다. 중생에게 법화경을 받아들일 만한 근기(根機)가 없고 보면 비록 가까이 있다 해도 그 진리를 보지 못할 것이나, 부처님의 자선근(慈善根)의 힘은 멀다 해도 스스로 통하게 하시어서, 이에 감응도교(感應道交)가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연석(因緣釋)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
「대저 중생이 해탈을 구한다 할 때, 그 근기는 다양하며, 부처님께서 응현(應現)을 일으키시는 경우에도, 그 응현 또한 다양하다. 이런 도리는 아주 넓다 해야 하는데, 그 중간에 선다는 말이 있을 수 있는가.」
대답.
「그러기에 대경(大經)에서 이르되, 〈자선근의 힘에 무량한 면(面)이 있지만, 요약하면 곧 신통(神通)이 된다〉고 하셨다.」
因緣亦名感應.衆生無機 雖近不見.慈善根力 遠而自通 感應道交 故用因緣釋也.夫衆生求脫 此機衆矣.聖人起應 應亦衆矣.此義更廣 處中在何.然大經云.慈善根力有無量門.略則神通.
만약 시방(十方)의 모두를 부처님의 법으로 받아들인다면 넓기가 허공같아질 것이다.
若十方機感.曠若虛空.
이제 사바국토(娑婆國土)에 대해 논하건대, 음성불사(音聲佛事)를 지으시는데 따라 감로(甘露)의 문이 열렸은즉, 가르침에 의거해 해석하면 처중(處中)의 설이심이 명백하다.
今論娑婆國土.音聲佛事則甘露門開.依敎釋者.處中說明矣.
만약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가르침을 베푸시는 경우라면 당연히 가르침에 방편과 진실의 얕고 깊음이 같지 않은 상황이 생겨날 것이다.
若應機設敎.敎有權實淺深不同.
그러므로 모름지기 손가락을 놓아두고 달을 보며, 자취를 부정하고 근본을 찾아야 할 것이다.
須置指存月 亡跡尋本.
그러므로 승조(僧肇)가 이르되, 「본지(本地)가 아니면 적화(迹化)를 드리울 수 없으며, 적화 아니면 본지를 드러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본적석(本迹釋)을 쓰게 되는 것이다.
故肇師云.非本無以垂迹.非跡無以顯本.故用本跡釋也.
만약 적화(迹化)의 모습을 찾을진대 적화하심이 넓거니 공연히 스스로 지치지 말 것이며, 만약 본지(本地)를 찾을진대 본지는 높거니 그 높이는 다할 수 없을 것이다. 「밤낮으로 남의 보배를 헤인다 해도 자기에게는 반푼의 몫도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하신 것과 같다.
若尋迹 迹廣徒自疲勞.若尋本 本高高不可極.日夜數他寶.自無半錢分.
다만 제 마음의 높고 넓음을 관(觀)하여 무궁한 부처님의 응현(應現)을 청하는 경우에만 기연(機緣)이 이루어지고 정성이 통해서 자리(自利)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관심석(觀心釋)을 쓰는 것이다.
但觀己心之高廣. 無窮之聖應.機成致感 逮得己利.故用觀心釋也.
셋째로 인증(引證)에 대해 말하건데, 방편품(方便品)에서 이르되, 「시방제불(十方諸佛)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하시는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했다.
三引證.方便品云.十方諸佛爲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그러나 인천소승(人天小乘)은 일(一)도 아니요, 대(大)도 아니요, 또 불사(佛事)도 아니니, 중생의 감수(感受)가 이루어질 수 없다.
若人天小乘 非一非大.又非佛事 不成機感.
실상(實相)을 일(一)이라 이르며 넓음을 대(大)라 이르니, 부처님께서 이를 가리켜 하셔야 할 일〔事〕로 삼으셔서 세상에 나타나시는 일. 이를 일대사인연이라 하는 것이다.
實相名一廣博名大.佛指此爲事.出現於世.是名一大事因緣也.
방편품에 또 이르되, 「갖가지 법문(法門)으로 불도(佛道)를 설하여 보이신다.」고 했다.
又云 以種種法門.宣示於佛道.
마땅히 갖가지 가르침은 미미한 것이건 두드러진 것이건, 방편의 것이건 진실의 것이건 간에, 다 불도(佛道)를 위해 시설(施設)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當知種種聲敎.若微若著 若權若實.皆爲佛道 而作筌제.
대발열반경에 이르되, 「거친 말씀과 부드러운 말씀이 다 제일의(第一義)로 돌아간다.」고 하심이, 다 이를 이르심이다.
大經云.序言及軟語.皆歸第一義.此之謂也.
수량품(壽量品)에 이르되, 「이제 천(天) 인(人) 아수라(阿修羅) 등이 다 아르기를, 내가 젊어서 출가해 석가족의 궁으로부터 나와 가야성(伽耶城) 멀지 않은 곳에서 삼보리(三菩提)를 얻었다고 하나, 실은 내가 성불한 지 무량무변아승지겁이 지났나니, 이런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해 이롭게 함이라.」하셨다.
壽量品云.今天人阿修羅.皆謂我少出家 出釋氏宮 去伽耶城不遠 得三菩提.然我實成佛已來.無量無邊阿僧祇劫.以斯方便 導利衆生.
방편품에서 또 이르시되, 「나는 본래 서원을 세워, 널리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또 한 가지로 이 도를 얻어, 나와 똑같아 다름이 없게 해주고자 했다.」하셨다.
方便品又云.我本立誓願.普令一切衆.亦同得此道.如我等無異.
또 오백수기품(五百授記品)에 이르시되, 「안으로 보살행을 감추고 겉으로는 성문임을 나타내 보여, 실은 스스로 불국토(佛國土)를 정화(淨化)하면서도 대중들에게 삼독(三毒)이 있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고, 또 사견(邪見)에 빠진 듯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니, 내 제자들이 이렇게 방편을 통해 중생들을 교화했느니라.」하셨다.
又五百受記品云.內 菩薩行.外現是聲聞.實自淨佛土.示衆有三毒.又現邪見相.我弟子如是.方便度衆生.
이는 곧 사제(師弟)가 다 본적(本迹)을 밝힘이다.……
此則師弟皆明本迹(云云).
비유품(譬喩品)에 이르되, 「만약 사람이 있어서 너의 설하는 것을 믿는다면 곧 나를 볼 것이며, 또한 너와 비구승(比丘僧)과 모든 보살을 봄이 되리라.」하셨다.
譬喩品云.若人信汝所說.卽爲見我 亦見於汝 及比丘僧 幷諸菩薩.
마땅히 듣는 바 있음을 따라 바른 마음으로 관찰하면, 신심(信心)속에서 삼보(三寶)를 보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니, 「설하는 것을 들음」은 법보(法寶)요, 「나를 봄」은 불보(佛寶)요, 「너희들을 봄」은 승보(僧寶)다.……
當知隨有所聞 諦心觀察.於信心中 得見三寶.聞說是法寶 見我是佛寶.見汝等是僧寶(云云).
넷째로 시상(示相)은 잠시 삼단(三段)에 입각해 인연(因緣)의 모습을 보였다. 중생이 구원(久遠)의 옛날에 부처님으로부터 교묘히 불도의 인연을 심게 하시는 혜택을 입은 바 있기에, 중간에 서로 만나 다시 다른 방편으로 제일의(第一義)를 도와 드러내시어 이를 성숙케 하시고, 오늘에 천화(天華)가 비오며 땅이 진동하는 기적을 나투사 여래의 멸도(滅度)로써 이를 멸도케 하셨다.
또 다음으로 구원(久遠)을 종(種)으로 하고, 과거를 숙(熟)으로 하고, 근세를 탈(脫)로 하는 수도 있으니, 지용보살(地涌菩薩) 따위가 이것이다. 또 다음으로 중간(中間)을 종으로 하고, 사미(四味)를 숙으로 하고, 왕성(王城)을 탈로 하는 수도 있으니, 지금의 개시오입(開示悟入)된 자가 이것이다. 또 다음으로 금세(今世)를 종으로 하고, 차세(次世)를 숙으로 하고, 후세(後世)를 탈로 하는 수도 있으니, 미래에 득도(得度)하는 자가 이것이다.
이상은 비록 본문(本門)이 아니긴 해도, 그 취지를 취해 말한 것뿐이다. 그 사이의 단계 단계에서 삼세(三世) 구세(九世)를 설정해, 종으로 하고 숙으로 하고 탈로 한대도 또한 무방할 것이다. 왜 그런가. 여래의 자재신통(自在神通)의 힘과 사자분신(師子奮迅) 대세위맹(大勢威猛)의 힘은 자재(自在)히 설하시는 까닭이다.
四示相者.且約三段 示因緣相.衆生久遠蒙佛善巧.令種佛道因緣.中間相値.更以異方便.助顯第一義.而成熟之.今日雨花動地.以如來滅度而滅度之.復次久遠爲種.過去爲熟.近世爲脫.地涌等是也.復次中間爲種.四味爲熟.王城爲脫.今之開示悟入者是也.復次今世爲種.次世爲熟.後世爲脫.未來得度者是也.雖未是本門.取意說耳.其間節節.作三世九世.爲種爲熟爲脫.亦應無妨.何以故.如來自在神通之力.師子奮迅大勢威猛之力.自在說也.
여시(如是) 따위 때문에 서분(序分)이 있으며, 대중의 희유(希有)한 조짐을 보고 우러러 사모해 구족도(具足道)를 듣고자 하고, 부처님께서는 근기를 따라 교화를 베푸사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개시오입(開示悟入)케 하시므로 정설분(正說分)이 있게 되며, 비단 당시에 큰 이익을 얻을 뿐 아니라, 후오백세(後五百歲)에 있어서도 멀리 묘도(妙道)의 혜택에 젖게 되므로 유통분(流通分)이 있는 것이다.
以如是等故.有序分也.衆見希有瑞.··欽渴.欲聞具足道.佛乘機設化.開示悟入佛之知見.故有正說分也.非但當時獲大利益.後五百歲 遠沾妙道 故有流通分也.
또 교상(敎相)을 보이건대, 이 서(序)는 인천(人天)의 청승(淸昇)의 가르침을 위해 서(序)가 됨이 아니며, 이승(二乘)의 소도(小道)를 위해 서가 됨도 아니며, 즉공통삼(卽空通三)을 위해 서가 됨도 아니며, 홀로 보살법(菩薩法)만을 위해 서가 됨도 아니니, 정직히 방편을 버리고 다만 무상불도(無上佛道)를 설하기 위해 서가 된 것뿐이다.
또 이 정종(正宗)은 세간(世間)의 도리를 가리켜 정종으로 함도 아니며, 반딧불 같은 석지(析智)를 가리켜 정동으로 함도 아니며, 등잔불 횃불 같은 체법지(體法智)를 가리켜 정종으로 함도 아니며, 별이나 달같은 도종지(道種智)를 가리켜 정종으로 함도 아니니, 일광(日光) 같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가리켜 정종이라 한 것이다.
또 이 유통(流通)은 양엽(楊葉) 목우(木牛) 목마(木馬)를 위해 유통이 됨이 아니며, 반자(半字)를 유통함도 아니며, 공자(共字)를 유통함도 아니며, 별자(別字)를 유통함도 아니니, 순전히 원만한 수다라(修多羅)의 만자(滿字)의 법을 유통함을 의미한다.
又示敎相者.此序非爲人天淸升作序.非爲二乘小道作序.不爲卽空通三作序.不爲獨菩薩法作序.乃爲正直捨方便 但說無上佛道作序耳.此正不指世間爲正.不指螢光析智爲正.不指燈炬體法智爲正.不指星月道種智爲正.乃指日光一切種智爲正.此流通 非爲楊葉木牛木馬 而作流通.非流通半字.非流通共字.非流通別字.純是流通圓滿修多羅滿字法也.
다음으로 본적(本迹)을 보이면, 구원(久遠)의 옛날 보살도(菩薩道)를 행하실 때에도 선불(先佛)의 법화경을 선양(宣揚)하심에 있어서 또한 삼분상중하(三分上中下)의 말이 있었으며, 또한 본적이 있었다. 다만 부처님과 부처님이 상망(相望)하시는 터이므로, 이렇다면 끝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로 성불하실 때 설하신 법화경의 삼분상중하(三分上中下)의 말을 취해, 오로지 이름하여 상(上)이라 하며, 이를 이름하여 본문(本門)이라 하게 된다.
왜 그런가. 최초로 성불하여 처음 설하는 가르침인 까닭에 상(上)이라 하며 본문이라 함이니, 이 취지는 쉽게 이해가 가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중간(中間)의 행화(行化), 곧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나 연등불(燃燈佛) 따위 부처님을 도와 법화경을 삼분(三分)을 선양한 것을 다만 이름하여 중(中)이라 하며, 다만 이름하여 적문(迹門)이라 한다. 왜 그런가. 앞에 상(上)이 있는 까닭이며, 앞에 본문이 있는 까닭이다.
또 오늘 왕사성(王舍城)에서 설하는 삼분(三分)은 다만 이름하여 하(下)라 하며, 다만 이름하여 적문이라 하고, 내지는 사자분신(師子奮迅)의 힘이 미래에 길이 설하는 삼분도 최초를 가리켜 상(上)이라 하며 본문이라 하게 된다.
次示本迹者.久遠行菩薩道時.宣揚先佛法華經.亦有三分上中下語.亦有本迹.但佛佛相望 是則無窮.別取最初成佛時 所說法華三分上中下語.專名爲上.名之爲本.何以故.最初成佛初說法故.爲上爲本.此意可知.中間行化.助大通智勝然燈等 佛宣揚法華三分者.但名爲中.但名爲迹.何以故.前有上故.前有本故.今日王城所說三分.但名爲下 但名爲迹.乃至師子奮迅之力.未來永永所說三分.亦指最初 爲上爲本.
비유컨대 큰 나무에 비록 천의 가지와 만의 잎이 있다 해도, 그 근본을 논한다면 그 가지나 잎들이 차례로 이어가면서 서로 근본이 된다고 가리킬 수는 없고, 그 모두가 똑같이 하나의 뿌리를 근본으로 하는 것과 같다. 이 비유는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譬如大樹 雖有千枝萬葉.論其根本 不得傳傳相指 同宗一根.此喩可解(云云).
다음으로 관심(觀心)의 모습을 보이면, 마땅히 제 마음에 입각해 계(戒) 정(定) 혜(慧)를 논함으로써 삼분(三分)해야 할 것이다. 곧 수행에서는 계(戒)를 초(初)로 하고, 정(定)을 중(中), 혜(慧)를 후(後)로 함이 그것이요, 법문(法門)의 경우는 혜(慧)를 본(本)으로 하고, 정(定)과 계(戒)를 적(迹)으로 한다.
次示觀心相者.當約己心 論戒定慧爲三分.修行以戒初.定中慧後.若法門 以慧爲本.定戒爲迹.
계(戒) 정(定) 혜(慧)를 각각 삼분(三分)할 수 있으니 전방편(前方便)과 백사갈마(白四·磨)와 결경(結竟)을 계의 삼분(三分)으로 하고, 이십오방편(二十五方便)과 정관(正觀) 역연(歷緣)이나 또는 백천삼매(百千三昧)에 잘 들며 나오며 머뭄을 정의 삼분으로 하고,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의 즉공(卽空) 즉가(卽假) 즉중(卽中)을 혜의 삼분으로 한다.
又戒定慧各各作三分.前方便 白四·磨 結竟.爲戒三分.二十五方便 正觀歷緣.又善入出住百千三昧等 爲定三分.因緣所生法.卽空卽假卽中 爲慧三分.
이미 삼분(三分)의 방법에 입각해 사종석(四種釋)의 모습을 보였으니 마땅히 이 도리를 써서 「여시(如是)」 아래로부터 「작례이퇴(作禮而退)」에 이르기까지를, 다 사의(四意)를 세워 글을 해석해가야 할 것이다. 다만 이 도리를 따라 비교하여 추측해 이해하기는 쉬우나 구체적인 글 하나 하나를 분별해 나타내 보이려 하면 그 말이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행자(行者)는 이를 잘 생각해야 하리니 말은 다르되 취지는 동일하여, 천 채의 수레가 바퀴자국을 같이하며, 만 가지 물이 바다에 들어오면 똑같이 짠맛이 되는 것 같다고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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