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대종사의 정화운동의 역사적 의의」
- 목 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교단정화운동의 동기
Ⅲ. 교단정화의 이념
Ⅳ. 교단정화의 실천
Ⅴ. 교단정화운동의 역사적 의의
Ⅵ. 맺음말
Ⅰ. 들어가는 말
청담(1902-1971)대종사는 한국 근‧현대 불교사의 중심에서 대승보살도의 살아있는 실증을 행동으로 보이신 정화보살로 칭해지고 있다. 청담대종사는 일생을 불교의 정화운동과 보살도를 실천한 선각자였다.
청담대종사는 20세기의 한국에 보살로서 화현하시어 신라의 통일불교, 고려의 호국불교, 조선의 구국불교로 일관된 것을 계승하여 정화불교로 꽃피운 인욕보살이었다.
우리 문화의 원류를 이루었던 불교는 조선조 500여년의 오랜 박해와 억불(抑佛)에서도 서릿발같은 청정승가(淸淨僧家)의 전통을 이어왔었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일제(日帝)의 왜색불교에 의해 정법(正法, suddharma)은 왜곡되어 말법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정법을 세우는 것은 대승보살의 본원(本願)이라고 자각한 청담대종사는 27세시(1928년) 정화의 횃불을 들고 청정한 조계가풍(曹溪家風)을 세우는 데(1928-1962) 주도적 역할을 한 명안종사(明眼宗師)이었다. 또 스님은 통합종단을 이룩한 후(1962년)부터 입적 시(1971)까지 산중불교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불교를 이 시대의 중생과 함께하는 불교 대중화‧현대화 그리고 정법운동에 선도적인 보살행을 실천한 불교계의 최고지도자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불교정화운동은 사찰이권 다툼이 아니라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고 그 계율을 지켜나가기 위해 일어난 비구승들의 계율운동으로 ‘대처식육’에 저항한 한국불교의 청정승가 회복 운동이었다. 청담대종사의 발자취는 지난날(1928-1971) 한국불교의 역사다. 청담대종사는 당대 한국불교를 대표한다. 한국불교의 이상, 한국불교의 고민, 한국불교의 비극, 한국불교의 위대성이 청담대종사의 사상과 생활 속에 유감없이 구현되어 있다.
논자는 이 논문에서 교단정화운동의 동기는 무엇이고, 스님은 정화이념을 어떻게 실천했고 그 역사적 의의를 재종명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재조명은 끝없는 혁신을 위한 정화이다. 이 불교 정화운동은 교단의 정화뿐만 아니라 사회정화와 불국토 실현을 위한 보살도의 실천과제이다. 그래서 그 연구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청담문도회에서 편집한 『청담대종사 전서(靑潭大宗師 全書)』 권 1-8권과 대승불교의 불전을 중심으로 청담대종사의 정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Ⅱ. 교단정화운동의 동기
불교정화운동은 현대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불사(佛事)였다. 조선 오백년의 억불상황 속에서도 서릿발같은 청정승가의 전통이 일제와 일본불교의 강요와 영향아래 왜색화되어 말법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왜색불교로 훼손된 계율을 복원하고 전통선을 정립하는 회복운동이 필요했다.
청담스님은“근대 한국불교의 정화운동이란 불교와 불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교단을 구성하고 있는 승단(僧團)의 정화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개념 정의를 명쾌히 하였다. 청정하여야 할 승려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을 때, 마땅히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에 따라 배치되는 요소는 제거해야 한다고 청담스님께서는 힘주어 강조하였다. 청담스님은 정화운동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일제가 이 땅을 침략한 이래 우리나라 불교계에는 여러모로 변동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승려들이 술․고기․담배를 먹는, 특히 대처문제(帶妻問題)였다. 원칙적으로는 대처하지 않는 것, 이것은 부처님 이후 출가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이다. 글자 그대로 수천 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전통이기도 했다. 어쨌든 지간에 청정해야 하는 불법문중(佛法門中)에 훼법분자(毁法分子) 대처승이 생겨났으니 근대 한국 불교 승단에서 막행(莫行)․막식(莫食)하여 처자를 거느린 비법승배(非法僧輩)들이 종권에 등단하고 교계를 혼탁케 한 데서 마침내 호법정화(護法淨化)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청담스님은,“불법(佛法)은 청정본연(淸淨本然)을 말하는 것이다. 본래 청정(śuddhā)도 두지 않는 것이거늘, 하물며 어찌 부정(不淨)이 있겠는가. 그러나, 정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정(不淨)이 있음을 또한 어찌하랴.”고 개탄하면서 모든 종교사는 종교 본연의 근본을 좀먹는 비본질적 요소와 대결하여 싸우는 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비본질적 요소가 교단의 토대인 계율에 도전한다고 하였다. 그 당시의 교단상황을 스님은 다음과 같이 진단하였다.
일본의 한국침략과 더불어 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려는 식민지화 정책의 비호아래, 파계환법자(破戒換法者)들이 사찰을 장악하고 교단에서 당당히 호령하게 됨에 그들의 수효는 순식간에 늘어갔고, 이때부터 불교는 타락의 길로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청담스님은 이 사바세계에 피어나는 연꽃과 같이 청정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고 한국고유의 승풍(僧風)을 진작시키기 위한 정화(淨化)는 당위였다.
Ⅲ. 교단정화의 이념
출가는 혁범성성(革凡成聖)의 길이다. 그는 출가하여 견성한 후 그의 보임(保任)만행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누더기 옷을 걸치고 걸망에는 상비약과 삭발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머리가 긴 아기나 어른을 만나면 머리를 깎아 주고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일러주기도 했으며, 부스럼이나 상처가 난 사람을 만나면 약을 발라 주고 치료도 해주었다. 또 남의 집 처마 밑에서 한밤을 지새우며 인생무상을 되씹기도 하고 때로는 심해(深海)에 고요히 가라앉은 무딘 바위처럼 무뚝뚝한 시골 머슴들이 거처하는 사랑방에서 그들의 온갖 놀림을 받아가면서도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대꾸해주며 한 구석진 곳에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혹독한 겨울 추위에도 맨발과 홑옷으로 지냈으나 가사장삼은 꼭 입고 다녔다.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이나 사시사철 언제나…. 근세 조선 5백 년 동안 천대받던 ‘중놈’이지만 언젠가는 신라․고려시대와 같은 찬란한 불교 중흥을 이루어 3천만 겨레 모두에게 숭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중놈이, 아니 삼계(三界)의 도사(導師)와 사생(四生)의 자부(慈父)가 되겠다는 나름대로의 굳은 각오와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청담스님의 이상․고뇌․비극, 그리고 진리애․보살도․구도열․자존심․애국심 등을 읽을 수 있다. 청담스님은 신라의 원효 스님(617~686)과 같이 20세기 한국의 보살로 화현(化現)한 것이다. 청담스님은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보살의 원력으로 한국불교 5백년 왜곡된 현실을 바로 세우는 정통성 회복에 정화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것이다. 청담스님에게 있어서 불교정화 운동은 보살도를 실천하는 한 단계였다. 스님이 출가하여 불법을 체득하기 위한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수행은 중생구제의 보살정신이었다. 스님의 중생구제 보살정신은 불교정화로 나타난 것이다. 그의 삶에 있어서 일관된 정화불사(淨化佛事)는 그의 정화이념인 ‘마음철학’으로부터 나왔다. 스님은 불법을 체득한 정법의 안목에서 ‘현대인들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내가 무어냐? 제일 중요한 이 두 가지를 확실히 모르고 산다’면서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꼭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 이 두 가지만은 꼭 배워야 합니다. 부처가 되는 길이 마음 깨달아 우주에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갈 길입니다.……불교를 믿고 마음을 깨치면 생사를 초월한다. 마음을 깨치면 부처이니 석가여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칠 수 있는 법을 그대로 남기어 놓았으니 부처님 하시던 그대로 수도를 하면 된다.
스님은 인간이 꼭 해야 할 일과 꼭 가야 할 길을 마음을 깨닫는 마음 찾는 공부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자기 마음을 깨치는 일이다. 이 마음을 깨쳤을 때가 곧 부처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마음을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바로 이끌어 주고, 복 받게 해주고 잘 살릴 수 있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며, 우주를 다 내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다.
스님은 자기 마음 깨닫고 생사자유와 해탈을 얻어 영원한 자유를 체득하기 위해 계율을 지키면서 참선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님은 불법은 마음 깨닫는 공부라고 하면서 『금강경대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불법은 마음 깨치는 공부이므로 지식이나 학문하는 태도로 임해서는 석존의 깨달음을 몸소 자기 것으로 체득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그 경지에 도달해서 성불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며, 이것은 오직 석가여래 한분만이 우리에게 전해 준 소식입니다. 이제 마음 깨치는 선법에도 전문적으로 하는 달마선과 천천히 닦아 익히는 의리선(義理禪)이 있습니다. 달마선이란 마음을 곧 깨치는 선법으로서 고속으로 가는 방법이고, 의리선은 과학적, 철학적, 이론적으로 따져 볼 것 다 따져가며 닦는 행법입니다.
위에서 스님이 제시한 달마선은 조사선이며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주장하는 것이다. 스님은 항상‘마음’을 깨닫고 ‘견성’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스님은 50년 가까이 공부해 온 것이 마음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마음이란 ……열반이나 반야․불성․생명․중도․영혼 등이 함축되어 있는 표현이다. ……가장 간단하며 평범하게 그 생명의 실질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마음’이다. …우리말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생명이 있는 것’을 마음이라 한다. 한문 경전에도 ‘심즉시불(心則是佛)’ 즉 ‘마음이 곧 부처’라 했다. 선종도 그러하고, 팔만대장경도 중요 골자가 심즉시불(心則是佛)을 말한다. ……마음은 모든 것의 주체다. 이 마음은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다. 하느님에게도 구속되어 있지 않고, 부처님이나 진리에도 걸려있지 않기 때문에 이 놈이 자유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천지의 근본이 마음이고, 만사의 주체가 이 마음이다.
청담스님의 ‘마음’은 假我(jivātman)의 ‘마음’이 아니라 ‘眞我(paramātman)의 마음’이다. 청담스님이 말하는 ‘마음’은 ‘心性’, ‘佛性’이란 뜻으로 나타낸 것으로 우주를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라는 부처님의 유심사상을 청담스님의 해석학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청담스님은 부처님의 유심사상(唯心思想)만이 무명의 암흑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마음을 여의고는 만법이 존재하지 않으니, 오직 마음을 밝히고 마음을 의지하여 만사를 자재할 수 있는 영원무궁한 대자유인이 되어서 만중생의 구세주가 되어야 하겠다. 그리고 높고 큰 원력을 굳게 다짐하여야 할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일체가 모두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면 만든 마음과 만들어진 객관이 있게 되어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또 벌어질 수 있으니, 일체유심(一切唯心)이라, 지을 조(造)자 하나를 빼버려야 알기 쉽다. 오직 마음뿐이다. 일체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불법이다.
청담스님은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일구를 주객(主客), 몸과 마음을 나누어서 보는 二元的인 분별심(vikalpa), 차별심 등을 초월(超越), 정화(淨化)하는 마음으로 해석하였다. 청담스님은 양변(兩邊)과 상대적인 대립을 초월하는 것을 ’정화(淨化)‘라고 해석(觀心釋)했다고 인지된다. 정화는 마음을 깨닫는 길밖에 없다고 다음과 같이 스님은 설하고 있다.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하여 번뇌를 쉬고 망상을 끊어야 한다. 허망한 것은 간직할 것 없다. 간직해 보아야 없어지니까 허망하지 않을 걸 찾자. 그것은 내 마음밖에 없다. 다른 건 허망하다. 우리가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도 허망이고 진리도 허망이며, 허망한 것은 전부 허물어지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다. 모든 허망에서 탈피하여 허망을 내 마음에서 버릴 때 나는 곧 내 본래 부처를 만날 수 있다. 딴 데 간 것도 아니고 다만 육체를 나라는 착각 때문에, 딴 착각을 해서 그것이 바빠진 것뿐이다. 우리는 육체를 나라고 하고, 오온(五蘊)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천당 지옥을 생사윤회하고 있다.
청담스님이 주장하는 마음을 깨닫는 것은 일체의 이원성으로부터 정화, 초월하여 일 체의 만법을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의 마음을 말한다. 이 마음은 육체를 나라하고, 오온(五蘊)을 나라고 하는 의식(ahaṃkara)의 집착에서 벗어나 일체 중생에게 동체대비(同体大悲)를 실천하는 반야의 마음이다. 청담스님의 마음은 인식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순수 지혜(prajnā-ghana)’이다. 청담스님은 그 마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일체의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한소가 무한대로 통하는 것은 우리의 전 우주가 다 이것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고 무한소․무한대로 한계가 없기 때문에 하늘․땅․태양계․은하계 할 것 없이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Kaṭha Upaniṣad』에서 설하는 바와 같이, 청정한 일심(一心)은 시공에 자유로워 극소와 극대를 다 포용하고 미세한 작용까지도 요달(了達)하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인류 5천년의 문화를 다 건설한 것이라고 청담스님은 주장하면서 그 마음을 ’天上天下 唯我獨尊‘으로 나타냈다. 그래서 청담스님은 인류의 행복과 평화는 마음의 수련에 두고 ’假我(jivātman)‘의 마음을 ’眞我(paramātman)‘의 마음으로 정화(淨化)에 있다는 방향제시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불교는 사회 정화하는 기본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너부터 나쁜데 가담하지 말고, 너 자신 하나가 정화되면 그러면 너를 대하는 사람도 다 너 같이 된다. ‘사람이 나쁘다’, ‘세상이 나쁘다’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나쁜 길로 간다는 건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입니다.
청담스님의 이러한 정화의 정신은, “만약 보살이 정토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자기의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가 청정하다”는 법문과 같은 교의이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청담스님의 정화불사(淨化佛事)는 마음의 外的 淨化와 內的 淨化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마음의 外的淨化佛事는 敎團淨化로 淸淨僧伽를 확립하는 불사(佛事)였고, 마음의 內的淨化佛事는 지계(持戒, śīla)를 통한 참선(參禪, dhyāna)으로 무명(無明, avidyā)을 타파하여 반야(般若, prajnā)를 실현하는 견성(見性, svayaṁprakāśa)佛事로 정법불교(正法佛敎)를 세우는 불사(佛事)였다. 청담스님의 정화불사는 그의 20대에 견성하는 불사에 입지(立志)를 세워 궁굴(窮屈)과 인고(忍苦)와 자약(自若)의 수련 속에서 빛을 발한 마음의 광명(自明性, svayaṃprakāśā)운동이었다.
Ⅳ. 교단정화의 실천
청담스님은 스스로 “내가 불교에 귀의한 이래의 이청담이라면 불교정화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근대 한국불교의 정화운동이란 불교와 불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교단을 구성하고 있는 승단(僧團)의 정화를 말하는 것이다”고 개념정의를 분명히 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실천하는 단체, 즉 불교교단을 상가(僧伽,saṃgha)라 칭해 왔다. 청담스님의 정화운동의 실천을 살펴보기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과제는 상가 본래의 역사성을 조명하는 일이다. 여기에서는 본고의 성격과 비중에 맞추어 상가의 개념과 역사성을 불전(佛典)에서 개괄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이런 논고(論考)는 “설령 내가 금생의 성불을 늦추는 한이 있어도 정화불사만은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는 청담스님의 원행(願行,praṇidhāna)사상을 이해하는데 첩경이 될 것이다.
부처님 당시의 교단은 특별한 호칭이 없어 단지 ‘모임’, ‘무리’, ‘집회(集會)’라고 부르고 있었다. 따라서 ‘상가’라는 말이 초기 불교교단의 호칭이 된 것은 아쇼까왕(Aśoka, B.C.268~232 在位) 이래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가’라고 하는 말은, 한역불전에서는 ‘僧伽’라고 음사되어, 생략해서 ‘승(僧)’이라고도 한다. 우리 한글로는 소리음이 적당치 않아 흔히들 ‘상가’라고 쓴다. ‘상가’란 인도 사람들 사이에서 공화국이나 길드(조합)를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는데, 불교에서는 그 운영방법과 조직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상가’는 뒤에는‘붓다’․‘법’과 더불어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불(佛)․법(法)․승(僧)을 총칭하여 삼보(三寶)라고 칭하게 되었다. ‘상가’는 출가 수행자와 재가 신자로 구성되며 남녀 모두를 포함했다. 그러나 그 중심 지도자는 출가 수행자였다. 부처님의 재세시에는 모든 사람이 부처님에게 귀의하였으나 사후에는 전 교단을 지배하고 통솔한다는 것이 실제문제로서는 불가능하였고, 그가 설한 가르침과 계(戒)가 의지처가 되었다.
최초기의 불교는 아집을 버리고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이상이었다. 여기에서 아집(我執)을 떠나서, 마음의 안온함을 얻고자 한다는 방향으로 계율이 제정되었다. 당시의 출가수행자는 오로지 무일물(無一物)에 철저했었다. 그들은 세속의 욕락이나 애착을 끊은 표지로서 체발(剃髮)을 하고 있었다. 수행자가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대해서도 “마음이 침잠해서는 안된다. 또한 함부로 많은 일을 생각해도 안된다. …걸림이 없고, 청정한 행위를 궁극의 의지처로 하라”고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유롭고 활달한 경지에 서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수행하고 있었다.
원시불교에서는 인간은 욕망에 움직이고 욕망에 지배되어,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 즉 망집(妄執)을 갈애(渴愛, taṇhā)라고 했다. ‘갈애’는 인간이 목마름을 느낄 때에 물이 먹고 싶듯이 맹목적인 충동이니, 이것이 인간을 미혹하는 속박의 원인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원시불교가 출가 수행자에 대하여 설하는 윤리가 자연히 금욕적인 것으로 되었다. 욕망을 떠난 곳에 실로 위대한 즐거움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방일에 탐닉하지 말라. 애욕과 쾌락에 가까이 하지 말라.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은 보다 큰 즐거움을 얻는다.
여기에서 원시불교는 수행자에게 독신 금욕의 청정행을 실천할 것을 명하고 있다. 이것은 본래는 바라문교에서 웨다(veda)를 학습하는 자가 행하던 것이요, 자이나교에서도 계승하고 있던 것을 부처님이 받아들였다. 후의 계율의 체계에서는 출가한 수행승이 여인과 교접하면, 그것은 빠라지까(Pārājika)라고 하는 큰 죄를 범한 것이 되고, 교단에서 추방했다. 불교가 가르치는 실천은 나쁜 행위를 하지 않고 생활을 정화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에 노력하라”고도 하고, 또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행하는 사람을 세상 사람은 좋다고 보고 있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악행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악행을 하면 나중에 고통이 따른다. 선행을 하는 것이 좋다. 행한 뒤에 후회가 없다.
사문(沙門, samaṇa, śramaṇa)은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부처님은 계를 지키면서 명상(yoga)을 통하여 인생의 진리를 체득하고 성자(聖者)가 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노력하는 사람을 ‘사문(沙門, samaṇa, śramaṇa)’이라고 칭했다. 그러면 『법구경』의 가르침을 알아보자.
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성직자라 하고, 마음의 평정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사문이라 하고, 음란을 버렸기 때문에 출가라고 한다. 누더기를 입고, 야위어서 힘줄이 드러나 있고, 홀로 숲 속에서 명상에 잠겨있는 이를 나는 성직자라 부른다. 모든 속박을 벗어나고,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집착을 벗어나고, 부정(不淨)을 떠난 이를 나는 성직자라 부른다. 증오로부터 벗어나고, 종교적 의무를 다하고, 도덕적 법규를 지키고, 청정하여 자제력이 있고, 최후신(最後身)을 지닌 이를 성직자라 부른다.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의 집착에서 벗어나고 슬픔과 애착과 부정(不淨)에서 벗어난 이를 나는 성직자라 부른다. 인간적인 모든 집착을 끊고, 천상에의 집착도 초월하고, 온갖 집착에서 벗어난 이를 나는 성직자라 부른다. 중생의 삶과 죽음을 알고, 집착하지 않고 바르게 살고 깨달은 이를 나는 성직자라 부른다.
이러한 상가는 청정한 계(淨戒)와 삼매(禪定)을 갖추며 지혜(智慧)와 해탈(解脫)을 갖추며 해탈지견(解脫知見)을 다 갖추어서 존경받고 공양 받을 훌륭한 복전(福田)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 불자들이 예불을 드릴 때 오분향례(五分香禮)를 올리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여래의 성중(聖衆)은 선업을 성취하고 바른 이치에 수순(隨順)하여 삿된 행업(行業)이 없으며, 상하가 화목하고 모든 법을 성취한다.
이러한 여래성중(如來聖衆) 즉 승보(僧寶)는 선업을 성취하고 바른 이치에 수순하여 사업(邪業)이 없으며 상하가 화목하고 법(法)과 법(法)이 성취되었으므로, 정계(淨戒)와 삼매(三昧)와 지혜(智慧)와 해탈(解脫)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이 모두 구족(具足)되어 세상의 공경과 공양을 받게 되는 훌륭한 복전(福田)이라는 것이다. 부처님(佛寶)과 부처님의 가르침(法寶)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교단(如來聖衆)도 삼보이므로 세상(世間)의 복전(福田)이다.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도 스님을 복전이라고 칭한 사례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선교의 복전을 모아 성안의 거리에 불경을 독경(諷誦)하며 다니는 것을 경행이라 일컫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상가 곧 불교교단은 부처님과 그 가르침인 진리를 믿고 실천함으로써 스스로를 깨닫고(自覺) 또 널리 불법(佛法)을 전법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는 화합된 정법불자(正法佛子)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불자들은 상가의 구성원 곧 출가수행자(스님)를 복전이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상가는 하나의 불법세계(佛法世界)를 완성하려는 화합된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불자들은 모두가 보리심을 발하여 오욕(五慾)의 경계에 물들지 않고 자비심으로 일체중생을 이익과 안락하게 하는 복전상가(福田僧伽)를 이루는데 한 멤버가 되는 것이 도리이다.
그러나 한일 합방이후 우리 불교계의 지도층은 이권과 명예욕의 아수라판을 벌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 근대 한국불교승단에서 막행(莫行)․막식(莫食)하여 처자를 거느린 비법승배(非法僧輩)들이 종권에 등단하고 교계를 혼탁케 하므로 한국고유의 승풍(僧風)과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기 위해 청담스님은 外的 정화불사에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논자는 청담스님의 정화불사 실천을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논술하는 것이 논지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첫 단계는 27세 시(1928년) 정화의 횃불을 들고 청정한 조계가풍(曹溪家風)을 세우는 시기(1962년)까지이다. 이 시기를 논자는 ‘왜색의 불교교단’에서 ‘자존의 불교교단’으로 탈바꿈시켜 형식상으로 청정상가를 확립한 기간으로 보고자 한다. 청담스님은 교단 정화불사를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이라 하여 민족과 불교를 불이(advaita)的 世界로 보고 민족 속에 내재하고 있는 애국심을 불교 속에 淨化心으로 승화(昇華)시키고자 하였다. 청담스님이 정화의 횃불을 든 시기부터 통합종단이 탄생하기까지의 교단상황은 본사나 말사 중에도 재산이 많은 절의 주지들은 거의가 대지주처럼 부유했고 고관들처럼 권력이 따랐으며 그들 중에는 처첩을 거느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는 대부분의 일반 스님들까지도 속성명에 장가를 들었으며 절에서 목탁을 치고 가사 장삼을 입었을 때만 스님이지 일상생활은 재가자와 다름이 없었다. 이런 승려 俗化현상은 광복이후 더 심하였다고 한다. 급변하는 사회현상과 자유주의적 풍조의 영향아래 승려 속화현상은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6.25 전쟁을 겪은 뒤의 僧風은 문란해져서 승려는 재(齋)지내고 불공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직업인으로 전락하여 부처님의 유풍(遺風)을 팔아먹고 사는 장사꾼으로 변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화가 시급한 곳은 사원(寺院)이요, 정화대상은 취처한 승려들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전통적으로 사원을 ‘수복멸죄(修福滅罪)하고 숭신불법(崇信佛法)하는 청정한 도량’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전법도생(傳法度生)․수선홍법(修善弘法)하는 도량이 부처님 팔아먹는 가게(商店)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래서 청담스님은 마치 초기 대승불교운동가들이 부파불교도들의 소승적 수행태도를 파사현정(破邪顯正)하여 앞에서 고찰한 초기 불교의 근본정신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과 같이 수행풍토를 정립하기 위하여 순교정신으로 한국불교의 정화운동에 전념하였다. 그 구체적인 사례는 김광식의 “청담스님과 불교정화운동”에서 고구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논자는 위에서 실천의 정신만을 논술했다. 이런 청담스님의 위법망구(爲法亡軀)의 순교자적 정화이념 실천으로 대한불교 조계종은 1962년에 공식적으로 통합종단으로 출발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명실상부한 교단으로 확립되었다.
그 두 번째 단계는 통합종단을 확립한 후(1962년)부터 입적 시(1971년) 까지 이다. 정화의 두 번째 단계는 승려교육의 현대화, 역경사업의 현대화, 포교사업의 현대화로 청정상가(淸淨僧伽 )의 기풍(氣風)을 진작시키는 불사이다. 이런 정화불사의 3대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불사를 위하여 청담스님은 해인사에 총림을 설립하도록 역할하고, 동국대학교에 종비생(宗費生)을 파견하여 교육받게 했으며, 역경사업을 위해 동국대학교에 역경원을 설치하게 하고, 도선사에는 참회하고 기도하는 호국참회원(護國懺悔院)을 종단 최초로 설립했다.
그러나 청담스님은 불교종단의 내부사정이 침체하며 정화정신이 퇴보하고 있는 것에 깊은 상심에 빠졌다. 교단 내에 산문중심 내지 회동파 등 분파현상이 나타나고 계율정신이 희박해져서 지계(持戒)를 의식하지 않고 막행 막식하는 승려들이 나타나 세간의 비난이 곳곳에서 들렸다. 이런 연유로 청담스님은 “정화종단(淨化宗團)이 망화종단(亡化宗團)되어간다”고 한탄하시면서 1969년 7월 5일 열린 제 20차 임시 중앙종회에 종단의 유신재건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종회는 청담스님의 유신재건안을 깊이 새겨보지도 않은 채 거의 묵살시켜 버렸다. 그래서 청담스님은, “이 모든 사태를 나 스스로의 잘못으로 여기고 뼈저린 참회의 마음으로 종단을 떠나 불교 현대화․정화불사의 기치를 또다시 들게 됨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소명하고 있다.
‘정화’란 먼저 교단을 정화하여 안으로 ‘수도승단(修道僧團)․정법불교(正法佛敎)’를 확립하고, 밖으로 새로운 교화운동을 일으키어 ‘인간개조(人間改造)․도의 재건(道義再建)․사회정화(社會淨化)’의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조국재건(祖國再建)의 터전을 마련하고, 나아가서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화가 발기(發起)된 뒤 10여 년간, 여러 가지 장애로 이념대로 구현되지 못하던 중, 7년 전에 정화이념을 근본으로 하여 통합종단(統合宗團)이 이룩되었으나, 그 뒤에 정화재건의 근본이념과는 달리 승풍(僧風)과 질서를 바로잡지 못한 채 앞으로의 전망과 방향은 흐리고 현재에 와서는 더욱이 혼미(昏迷)하여 전진보다 퇴영(退嬰)이 있을 뿐이니, 이를 보고 개탄치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나 자신이 정화의 횃불잡이로서, 조계종원로로서 그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로서는 장로(長老)의 명분이 무척 부끄럽기만 했다. …허수아비 종도(宗徒)나 장로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그 종단 권외로 물러서는 것이 명분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기에, 종단에서 탈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현 조계종단 테두리를 벗어날지언정 ‘조계종지(曹溪宗旨)’와 불조(佛祖)의 교지(敎旨)에서 이탈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역사적 과업을 등진다는 것은 아니다. 이 몸으로서 한국불교의 재건에 이바지할 길이 있다면 이차돈(異次頓)의 사신(捨身)과 보우대사(普雨大師)의 순교(殉敎)를 사양치 않을 것이다. 이 몸은 이미 부처님께 바친 것,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건 없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하던 포은 선생의 애국심(愛國心)이나 나의 애종심(愛宗心)은 서로 닮은 점이 있으리라.
이런 청담스님의 애종우교(愛宗憂敎)하는 마음을 그 누가 진의를 알 수 있으며, 나타낼 수 있을까. 1969년 8월 12일에 발표한 조계종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조계종탈퇴성명’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청천벽력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모든 보도기관이 일제히 대서특필로 보도하였고, 이 소식은 종도(宗徒)들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도 크게 놀라며 한국불교와 조계종을 걱정하는 관심의 우려의 소리가 높았었다. 이런 우려의 여론으로 종단의 정화주체세력들은 단결하여 청담스님을 1970년 장로회의 의장으로 추대했다가 7월 종회에서 다시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때 스님은 ‘종단만 잘 되게 한다면 조계사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총무원장이 된 청담스님은 실로 의욕적으로 종단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열정을 불태웠다고 당시 교무부장에 재직 중이었던 월주(月珠)스님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총무원장을 보필한 나는 교화재도연구를 위한 세미나를 거듭 열어 각계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여 제도개혁안을 만들고 불교성전도 간행했다. 종립 동국대학교를 승려교육에 활용하는 방안을 세우고, 기성승려의 재교육도 시행했다. 기존 강원의 교과과정에 외전(外典) 교양과목을 다양하게 도입하는 커리큘럼도 만들고, 선(禪)과 교(敎)를 쌍수하고 전문화하는 제도와 법계를 정하고 법계를 나타내는 휘장도 고안했다. 포교사단을 조직하여 포교사를 임명하고 포교사 양성방안도 세웠다. 이런 모든 일들을 교화제도 연구라는 개념으로 묶어, 성안된 것을 문서화하면서 연구를 진행해갔다. 정화종단 출범이래 이때처럼 활발하게 교화사업이 펼쳐진 일은 그때까지 없었다.
청담스님은 종단행정외의 교화활동도 대단했다. 스님은 “중생을 제도하는 데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느냐”고 하시면서 남녀․노소․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상대가 원하는 곳이면 먼 길을 야간에도 구애받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은 설법할 때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마음이 부처다’라는 마음법을 설하고, 금강경․신심명․능엄경 등을 설하였으며 본인의 정화이념을 설명했다.
청담스님의 정화이념 실천은 곧 구세행(救世行)이었다. 스님의 구세행은 71년 11월 1군 사령부 군 법당 준공식에서 한신 육군대장을 비롯한 장병과 시민 등 천 여명의 청법대중들에게 ‘육신은 유한하나 법신은 영원하다’는 법문을 사자후 하시고, 그날 서울로 돌아오시다가 열반한 것으로 증명된다. 이와 같이 청담스님은 마치 부처님이 ‘길’에서 태어나 ‘길’을 묻다가 ‘길’을 깨달아 중생들에게 ‘길’을 안내하다가 ‘길’에서 열반하신 것과 같이 보살의 원행(願行, praṇidhāna)의 삶을 일생 실천하였다.
스님은 모든 사람은 누구나 ‘가아(假我,jivātman)’의 망견(mithyādṛṣṭi)에서 벗어나 마음의 주인공을 찾는 ‘진아(眞我 , paramātman)'를 발견하는 정견(samyagdṛṣṭi)의 수행을 하면 누구나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중생의 생활에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네 가지 고통과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무엇을 구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 육신을 ‘나’로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는 온갖 번뇌의 고통이 있다. 이와 같은 온갖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중생들의 세상이기 때문에 이것을 ‘고(苦)’라 하고, ‘고제(苦諦)’라고 하는 것이다. 중생들의 괴로움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육체를 ‘나’라고 하는 착각(prajnapti)에 있다. 그래서 탐욕으로 살고, 기분으로 살고, 어리석게 살게 되어 온갖 번뇌를 일으킨다. 이러한 번뇌와 무명(無明, avidyā)이 중생들을 괴롭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되는데, 이것을 ‘집(集)’, ‘집체(集諦)’라고 한다.
인생의 괴로움은 우리가 ‘마음’을 깨치고 나면 사라지게 되고, ‘열반(涅槃, nirvāṇa)'과 해탈(解脫, mokṣa)의 이상세계를 이루게 되는데, 이것을 ‘멸(滅)’이라 하고 ‘멸제(滅諦)’라고 하는 것이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완전히 끊어버리면 그때는 부처가 되고, 현실 세계 일체의 현상계가 다 ’환(幻)‘인 것을 알게 되어 전지전능해진다.
위와 같이 불교의 수행은 깨침(見性)이 목표이다. 스님은 “마음을 깨쳐야 인간으로서 하고 싶은 일을 다 마친 것이다. 알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모자람 없이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 진 것이다. 그러면 ‘마음’이 모두 쉬어진다”고 하시면서 깨달음(見性)은 마음을 깨치는 것이고, 마음을 깨친다는 것은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하셨다. 이런 마음을 원효(元曉, 617~686)스님은 귀일심원(歸一心源)이라고 주장했다.
청담스님은 우주의 원리인 마음자리를 한국불교에서처럼 이렇게 확실하고 분명하게 설명하는 불교가 현재는 이 지구상에 없다고 하시면서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들어보아도 종파불교(宗派佛敎)가 되어서 각각 설명방법과 수행양식이 달라서 한국불교와 같은 참된 부처님의 정신은 들어볼 수 없다. 동남아 소승불교도 각종(各宗) 각파(各派)마다 그 주장이 다르고 한 조각의 불교밖에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바삐 한국불교를 바로 세워서 도인(道人)이 많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
한국불교의 정신이 온 세계에 널리 퍼졌을 때 인류의 평화는 비로소 올 것이다. 나는 오늘의 세계를 지도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진리의 보고(寶庫)가 한국불교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육체가 내가 아닌 줄 알고, 마음자리가 나인 것을 강조하는 한국불교를 실천하고 전법하자.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의 우수성을 설하면서 한국불교를 바로 세워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도인(道人)을 많이 배출하도록 하는 불사(佛事)가 정화이념 실천의 골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의 찬란한 전통을 되살려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교단이 도인(道人)을 많이 배출하도록 불사하는 것이 당위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혁이 한국불교의 내부에서 일어나야 한다. 불교란 세존(世尊)만을 모시고 개인의 영욕을 취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런 종교였다면 세존은 우루벨라촌의 보리수 아래에서 그의 정각(正覺)을 가짐으로써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그 정각을 가짐으로써 오히려 세속(世俗)으로 내려와 사해대중(四海大衆)들과 만났다. 그의 정각은 세속인을 깨우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데에 뜻이 있었다. 세존이 사해대중과 만났다는 사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존은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그의 정각을 가졌다. 그러므로 오늘의 불교 역시 오늘의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정각(正覺)을 가져야 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청담스님 정화이념의 실천에서 대승불교의 요체인 보살도(菩薩道)의 전형(典型)을 볼 수 있다. 청담스님은 이런 보살도의 정신을 가지고 20세기 한국의 보살 화신으로서 모든 중생들에게 보리심(菩提心)을 발할 것을 권하고, 인연 따라 조그마한 암자, 학생회, 교도소, 군부대 등 가릴 것 없이 그 몸을 안 나타낸 곳 없이 (處染常淨)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실천한 인욕보살(忍辱菩薩)이었다.
스님은 “단 한 사람이라도 제도 받지 않은 중생이 있는 한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정법불교(正法佛敎)를 세우는 데 일생을 다 바치셨다.
Ⅴ. 교단정화운동의 역사적 의의
정화운동은 한일합방(1910)이후 잃어버렸던 청정승가의 전통을 되찾기 위한 수행수찰을 확보하려는 순수한 열정으로 이루어졌다. 그 운동은 선풍진작을 통한 승단의 법통과 기풍을 세우는 운동이었다. 그래서 그 운동으로 삼보정재가 수호되어 사찰이 명실상부한 수도장이 되었다.
정화종단은 오늘의 조계종단으로 탄생되어 지계정신과 민족정신을 되살려 한국불교 전통을 계승하는 종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개인에게 정화는 마음에 있어서는 三毒의 때를 씻어버리는 것이고, 몸에 있어서는 十惡을 제거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으로 화합된 무리가 모여서 수행하는 집단을 승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승단의 기풍을 진작시키는데 청담대종사가 역할을 한 것이 20세기의 한국공간에서 의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승단의 정화는 개인에겐 上求菩提의 길로, 집단에겐 下化衆生의 典範을 보여주는 일이다. 1962년 통합종단이후 조계종단은 정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방안으로 종단 3대 지표, 즉 도제양성, 포교, 역경으로 정착시켰다. 이렇듯이 외형적인 정화는 이루어졌지만 그 내적인 정신수행의 측면에서는 미진하였다. 승단자체의 再淨化가 필요할 즈음 의식 있는 스님들에 의하여 ‘世代佛敎同人會’가 1963년 9월에 발족을 하였다. 3차 총회는 1965년 1월 19일 개운사에서 개최되었다. 그 회에서 회장은 강석주, 부회장은 최동일과 문정영을 선출하면서 종단에 불교정화를 계승하려는 건의서를 채택하였다. 그러면 그 회에서 채택한 강령을 알아보도록 한다.
一, 우리는 佛陀의 敎示를 받들어 修道와 敎化로써 佛祖의 慧命을 계승한다.
二, 우리는 正法守護와 宗團復興을 위하여 身命을 바친다.
三, 우리는 時代의 要請에 依한 한국불교의 현대화 具顯에 매진한다.
그런데 이 동인회의 고문에 청담대종사가 선출 되었다. 이 단체는 불교정화를 계승하려는 성격이 강하였다. 청담대종사는 승려의 수행, 종단에서의 정화정신 계승을 매섭게 강조하였다.
4장 교단정화의 실천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청담대종사는 불교정화운동에서 정화사상의 태동, 백용성과 송만공의 정화사상의 구현, 수행도량확보라는 정화불사의 메시지 구현, 정화정신의 견인 등을 수행하였다. 이런 역할은 다른 스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사례이었다. 출가자들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을 깨달아 후세에 전함으로써 청정승단을 유지하는 것이 본분이기 때문이다.
Ⅵ. 맺음말
청담대종사의 승단평화운동(1954 ~ 1962)은 한일합방이후 일제에 대항해서 만든 임제종의 결성과 용성(1864 ~ 1940)의 건백서, 만공(1871 ~ 1946)의 간화선 수행, 그리고 봉암사 결사로 이어진 수행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수행정신은 일제하에서 쇠락해진 지계정신과 민족정신을 되살려 한국불교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것이다.
이런 정신을 계승한 것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미군정 등을 거치면서 변질된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한 운동이었다.
수행자는 항상 자신의 부처를 실현하기 위하여 찰라 찰라 새로워져야 한다. 예불대참회문에 나오는 “제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나거나 성문연각 보살지위 구함아니요 오직오직 최상승을 의지하옵고 아뇩다라삼보리심 냄이오이다. 원합노니 시방세계 모든 중생이 모두 함께 무상보리 얻어지이다.”라는 원으로 염염상속하는 수행의 전범을 청담대종사가 指南하였다.
스님의 정화불사는 대승불교의 보살도의 전형이었다. 이런 보살도의 실천은 스님께서 20대에 견성하는 불사에 입지를 세워 인고(忍苦)와 자약(自若)의 수련 속에서 빛을 발한 마음의 광명(自明性, svayaṁprakāśa)운동이었다. 스님의 정화불사는 1700여년 한국불교 전통의 법등(法燈)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당대의 문제를 회통하는 20세기 보살사상의 전범이다. 20세기 한국불교사에서 청담대종사와 같이 한국 불교를 자신의 피와 살로 느끼면서 보살행을 실천한 분이 얼마나 될까?
오늘의 우리 불자는 청담대종사의 정화사상을 새로운 정화운동으로 해석하여 현대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한 정화결사의 나침반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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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 靑潭大宗師全書(卷數, 페이지數)
Gītā : The Bhagavadgī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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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담대종사의 정화운동의 역사적 의의|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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