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조사의 계율관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대승불교의 계율
Ⅲ. 계율 수호로서 정화운동의 인식
Ⅳ. 깨달음(悟)의 수행을 위한 계율
Ⅴ.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한 실천으로서의 계율
Ⅵ. 맺음말
Ⅰ. 들어가는 말
청담(1902-1971)조사는 禪師였다. 그는 평생을 참선수행을 한 한국 근‧현대 불교의 대표적인 선사로서 불교의 정화운동과 중생교화의 보살도 실천을 행동으로 보이신 善知識이었다.
그는 출가(1926)한 이후부터 열반(1971)에 들 때까지 한시도 화두를 놓지 않았다. 출가한 동기 또한 인생의 화두(마음)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출가하여 도를 닦는 자는 성품을 보는 것(見性)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참선수행에 몰두하였다. 그는 문자를 세우지 않았던 선사였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문자를 세웠다. 그 문자는 바로 불교정화이었다. 그는 수좌들에게 화두를 들 수 있는 수행처를 찾아주고 싶었고 왜색불교로부터 탈피하여 정법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정화의 기본 이념은 正法佛敎이었다. 부처의 바른 법은 대처승이 아닌 비구승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다. 청담조사는 정법은 계율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정혜쌍수가 아닌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닦아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계를 실천하지 않는 스님은 불교의 정법의 수행자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대처승은 기본적으로 바라이를 위반하기에 이는 정법에 맞지 않으며 승가가 비구승 중심으로 가야한다고 주창하였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전통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는 부처님의 정법은 계율을 준수하는 비구승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청담의 불교정화운동에는 계율사상이 뿌리내리고 있다. ‘淨化’에‘淨’이라는 단어자체도 계율의 보편적 용어임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는 선사이지만, 동시에 율사라고 할 수 있다. 청담조사가 한국불교의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올바른 방향제시와 혁신적인 한국불교를 이끌 수 있었던 힘은 계정혜 삼학을 통하여 불법의 정신을 체득한 남다른 도력(道力)과 정법(正法)의 안목(眼目)을 구족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논자는 이 논문에서 청담조사가 어느 일정(一定)한 原典에 사로잡히는 것을 극히 배제하고 모든 大乘律의 정신을 포괄적으로 받아드렸으리라는 근거를 위해 그의 남겨진 문집을 통해 그의 계율관을 조명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계율관은 오늘의 교단의 정화뿐만 아니라 사회정화와 불국토 실현을 위한 실천과제이다. 그래서 그 연구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청담문도회에서 편집한 『청담대종사 전서(靑潭大宗師 全書)』 권 1-8권과 대승불교의 律典을 중심으로 청담조사의 계율관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대승불교의 계율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계율로써 스승을 삼으라”고 다음과 같이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셨다.
내가 이미 經과 律을 말했으니, 너희들은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나는 항상 너희들 가운데 있는 것과 마찬가지니라. 내가 열반에 든 뒤에도 이 경과 율을 버리지 말고 서로서로 받들어 행하라. 사부대중으로서 계법을 지니는 사람은 모두 부처의 제자라고 할 것이며, 부처의 경과 도를 배우는 이는 모두 부처의 제자니라.
부처님께서 계율을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듯이, 가난한 사람이 보물을 얻은 듯이 해야 한다고 하셨다. 계율이란 계(戒, śīla)와 율(律, vinaya)이라는 두 말의 복합어이다. 계율은 원래 악을 막고 선을 행한다는 자발적인 성격을 가지는 계와 출가수행자의 생활 지침으로써 타율적 성격을 가지는 율(律)의 합성어이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계율은 삼세의 모든 불보살이 출현하신 법규이고, 모든 불자들이 生死의 근본 무명을 타파하여 法身眞如에 이르게 하는 수행의 지침인 것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고 그 깨달음의 내용은 연기법이다. 불교의 실천체계도 연기법의 세계관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 저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닫고 바른 깨달음을 이룬 뒤에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분별해 설하고 이렇게 드러내어 보이신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곧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서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고 나아가서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한다.
계율은 반드시 연기법의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실천해야 한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깨달음은 연기법의 내용을 구체적인 실천체계로 설한 것이 계율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길에 있어서 계율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은 거의 절대적인데, 다음의 結戒十句에서 입증되고 있다.
첫째, 승가를 攝取하기 위하여
둘째, 승가를 화합하게 하기 위하여
셋째, 승가를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넷째, 조복하기 어려운 자를 조복하게 하기 위하여
다섯째, 참회하는 자를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여섯째, 믿지 않는 자를 믿게 하기 위하여
일곱째, 믿는 자의 믿음을 돈독하게 하기 위하여
여덟째, 현세의 번뇌를 끊게 하기 위하여
아홉째, 미래의 탐욕과 악을 끊게 하기 위하여
열 번째, 정법을 영원히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이 結戒十句義를 통해 계율은 첫째 개개인의 올바른 깨달음의 수행을 위하여, 둘째 교단의 청정과 화합을 위하여, 셋째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넷째 정법을 영원히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법을 영원히 머무르게 하고 더욱 증장시키기 위해서 계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깨달음의 근본인 계율은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인식되어야 하고 중도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계율은 교단의 구심점이며, 불법이 相傳되는 근간이다. 불멸 후, 가섭존자가 승단의 미래를 위하여 經과 律을 결집한 후 승단의 구성원들은 율장에 의지해 수행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B.C.1세기를 전후로 일반 대중의 신앙과 삶에서 유리되고 번쇄한 이론을 중시한 僧院 중심의 부파불교를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참 정신으로 돌아가자” 라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 운동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라도 깨달음을 향해 수행할 수 있으며, 또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승보살이 지키는 계율을 ‘대승보살계’라고 한다.
초기대승불교의 경전에서는 대승보살의 실천 덕목으로써 육바라밀을 주장하고 있다. 『반야경』(A.D.404, 구마라집 역)에서는 육바라밀 안에 일체선법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설하고 있다. 『반야경』에서는 육바라밀의 개념 정의를 ‘잘 주는 것이 보시바라밀이고, 번뇌가 없는 것이 지계바라밀이며, 변함이 없는 것이 인욕바라밀, 물러남이 없는 것이 정진바라밀, 마음을 通攝하는 것이 선정바라밀이며, 모든 것을 버리고 벗어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다 라고 설하고 있다. 초기대승불교의 육바라밀은 계·정·혜 삼학을 계승하면서 당시 독립적으로 강조되었던 보시행, 인욕행, 정진행을 추가하여 육바라밀로 정비되었다고 한다.
육바라밀 가운데 계율을 가리키는 항목은 지계바라밀이다. 지계바라밀은 초기대승의 불교도가 중시한 계율인데, 그 지계바라밀의 설명으로서는,
무엇을 시라(尸羅, śīla)바라밀이라 하는가, 수보리여,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살바야(薩婆若, sarvākārajnattā; 一切種智)에 상응하는 마음을 갖고 스스로 십선도를 행하며, 또한 남에게 십선도를 행하는 것을 가르친다. 얻을 바가 없는 연고로(無所得)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시라바라밀이라 이름 한다.
라 기술하고 보살의 계바라밀이 「十善道」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십선을 「無所得空」의 입장에서 실천할 때, 그것이 바라밀로 되는 것이다. 또 『왕생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보살마하살이 있어 초발심으로부터 곧바로 아유월치지(阿惟越致地, 不退轉地)에 이르기까지 항상 십선을 버리지 않는다.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이 있어 단나(檀那)바라밀, 시라바라밀에 머물러 전륜성왕이 되어 중생으로 하여금 십선도에 안립(安立)케 하며 또한 재물을 갖고 중생에게 보시한다.
위의 기술은 보살의 계바라밀이 십선도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대승보살의 일상적인 실천으로서 십선도를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승보살의 십선도가 自利利他를 목표로 하는 대승보살의 사고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승불교도들이 제정하고자 했던 계율은 승속(僧俗)을 포섭한 공통원리로 육바라밀이요, 십선도였다.
이상과 같이 『반야경』이 설하는 계바라밀은 십선도이지만 『대품반야』에서는 십선도의 하나하나의 덕목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 이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소품반야』「아유월치상품(阿惟越致地上品)」에서 不退轉地에 도달한 보살의 모습을 갖가지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아유월치의 보살은 끝내 3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여인의 몸을 받지 않는다. 수보리여, 이 모습을 갖고 이것을 아유월치보살이라고 알아야 하며, 또 수보리여, 아유월치보살은 스스로 살생하지 않고, 또 남으로 하여금 살생하지 않게 한다. 스스로 투도(偸盜)하지 않고, 사음(邪淫)하지 않고, 망어(妄語)도 하지 않고, 양설(兩舌)하지 않고, 악구(惡口)하지 않고, 無益語 하지 않고, 탐질(貪嫉)하지 않고, 瞋惱하지 않고, 사견(邪見)하지 않으며 또한 남으로 하여금 사견에 빠지지 않게 한다. 이 십선도를 항상 스스로 행하며 또한 남으로 하여금 행하게 한다. 이 보살은 꿈속에서도 十不善道를 행하지 않는다. 나아가 꿈속에서도 역시 항상 십선도를 행한다. 수보리여, 이 모습을 갖고 이것을 아유치보살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상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소품반야』에 기술된 것이다. 십선은 身3, 口4, 意3인데 이 가운데 口의 4가지가 『소품반야』에서는 망어, 양설, 악구, 무익어(無益語, 綺語)로 되어 있으며, 이것이 『아함경』에 나오는 십선의 순서이다. 그러나 원시불교로부터 부파불교에 있어서 5계가 틀(型)로써 고정된 때에는 단순히 자신의 악을 여의는 것만을 서약할 뿐, 다른 사람의 악을 멈추게 하는 것은 잃고 있다. 그런데 『반야경』이 십선을 계로써 채용했을 때, 이것을 자리(自利), 이타(利他)의 양면을 겸비한 형태로 바꾸어 수지(受持)한 것이다. 이 점에서 대승불교의 특질이 나타나고 있음과 동시에 원시불교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반야경』에 의해 계바라밀의 내용이 「십선도(daśa-kuśala-karmapathāḥ)」인 것을 고찰했다. 「십선계」는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러 삼취정계(三聚淨戒)의 형태로 설해지고 있다. 대승계 중에서 가장 큰 흐름을 형성하는 삼취정계의 기조가 『화엄경』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요한 대승경전 가운데 하나인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삼취정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의 세가지란, 첫째는 착하지 못함을 버리는 계요, 둘째는 착함을 생겨나게 하는 계요, 셋째는 유정을 넉넉하게 하고 이익하게 함을 내는 계이니라.
삼취정계의 구체적 명칭을 ‘轉捨不善戒’, ‘轉生善戒’, ‘轉生饒益有情戒’라고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삼취정계」를 나타내는 최초의 경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삼취정계를 주석한 세친(世親, 320-400)의 『십지경론』에서는 『십지경』의 교설을 삼취정계의 형태로 주석을 행하고 있다. 세친의 해석에 의하면 제일(第一)의 離戒淨은 십선업도를 말하고, 第二의 攝善法戒淨은 십선업도를 행하는 것이며, 第三의 利益衆生戒淨은 중생을 위해 선행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해심밀경』을 계승한 것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삼취정계」이다. 중기대승불교의 계율을 대표하는 『유가사지론』의 삼취정계에 대해 고찰해 보자.
무엇이 보살의 모든 계율이냐 하면, 보살의 계율에는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在家分戒요, 둘째는 出家分戒이다. 이것을 一切戒라고 한다. 또 곧 이 집에 있는 이와 집을 떠난 이의 두 가지 종류의 깨끗한 계율에 의하여 요약하면 세 가지로 말하나니, 첫째는 율의계요, 둘째는 섭선법계요, 셋째는 유정을 이롭게 함의 계율이다.
위와 같이 보살계율에 대해 설하면서 三聚淨戒의 명칭을 들고 있다. 律儀戒, 攝善法戒, 饒益有情戒가 그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취정계가 『유가사지론』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한 형태로 설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사지론』 보살지의 戒品에서는 보살의 실천 덕목으로 계바라밀을 설하며, 그 안에 삼취정계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대승불교의 계율은 『반야경』에서 「십선도」, 『화엄경』계통에서 성립한 三種戒가 이후 『해심밀경』을 거쳐 『유가사지론』에서 삼취정계로 성립되었다.
Ⅲ. 계율 수호로서 정화운동의 인식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실천하는 단체, 불교교단을 승가(僧伽, saṃgha)라 일컬어 왔다. 뜻으로는 화합한 무리, 화합된 단체라는 의미에서 화합대중, 和合衆, 和衆이라 하며 줄여서 중(衆)이라고 한다.
승가는 청정한 계율을 갖추고, 삼매(禪定)를 갖추며 지혜를 갖추고 해탈을 갖추며 해탈지견을 갖추어서 존경받고 공양 받을 훌륭한 복전(福田)임을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밝히고 있다.
용수(龍樹, 150-250) 보살은 그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승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엇을 일러 승가라 하는가? 승가는 중국(당시 後秦) 말로 중(衆)이니 많은 비구가 한 곳에서 화합한 것을 승가라 일컫는다. 비유하자면, 많은 나무들이 밀집한 것을 숲(林)이라 일컫지만, 하나하나의 나무(樹)를 숲이라 이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나무들이 없다면 또한 숲도 존재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하나하나의 비구를 승가(僧)라 이름하지 않으나, 또한 하나하나의 비구가 없다면 승가도 존재할 수가 없다. 여러 비구가 화합하기 때문에 승가(僧伽)의 이름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비구들이 한 곳에서 화합하는 것을 승가라 일컬으며(多 比丘一處和合是名僧伽)”, “여러 비구들이 화합하기 때문에 승가란 이름이 생겼다(諸比丘和合故僧名生)” 라는 말을 착목하여야 한다. 그 의미를 우리가 해석학적으로 ‘전체 불자(佛子; 敎團)가 화합하기 때문에 승가(僧伽)라는 일컬음이 생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가하여 오로지 淨戒, 禪定, 智慧, 解脫, 解脫知見을 체득하여 화합된 성중(聖衆)을 승보(僧寶)라고 하였다. 우리의 불자들은 훌륭한 복전인 승보의 구성원 곧 출가수행자(스님)를 복전이라 일컬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교단은 화합이 생명이므로 엄격히 말해서 불화와 분쟁이 있으면 승가라고 할 수 없다.
우리 조상들은 사찰(寺刹)을 ‘수복멸죄(修復滅罪)하고 숭신불법(崇信佛法)하는 청정한 도량’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불교에 있어서 계율의 문란은 고려후기부터 상당히 심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현상은 普照知訥(1158-1210)의 『定慧結社文』에서 잘 나타나 있다. 조선기에 들어와서는 崇儒抑佛政策으로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웠다. 이러한 와중에 1910년 8월에 나라를 잃은 이 땅의 불교는 1911년 6월 새로운 사찰령이 제정 반포됨으로써 일본 총독부의 지배 아래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총독부 사찰령에 의하여 한반도 내의 교단은 30곳(나중에 31곳)의 본사제(本寺制)로 형성되었으며,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 하여 지금까지의 종론(宗論)을 통일하고 중앙에 삼십본산회의소(三十本山會議所)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이 땅의 불교교단은 일본 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각각 30군데의 교구로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30본산회의소가 있었으나 각 본사간의 유기적인 연관관계가 결여되어 있어서, 30본산 주지들이 포교 및 교육사업의 일원화를 꾀하기 위하여 연합규제를 마련하고 30본산 연합사무소를 서울의 각황사에다 두었다. 그러나 이 연합사무소는 이름 그대로 30본산의 연합사무만을 집행하였을 뿐이지, 전국 사찰을 통할하고 전국 승려를 통제하는 권한은 없었다. 그리하여 실질적인 중앙 통제기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총무원이었다. 이 중앙총무원이 1922년 1월 각황사에 설치된 뒤, 그해 5월에는 같은 각황사에 또 불교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이 설치되었다. 몇 년 뒤에는 양원(兩院)이 하나로 뭉쳐서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이 되었다. 1929년 1월 각황사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열고, 종헌(宗憲)과 교무원(敎務院) 원칙(原則) 및 교정회법(敎正會法) 등을 제정하였으며, 7명의 교정(敎正)을 선출하여 종단 최고의 원로기관으로 하였다.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은 명실공히 중앙 통제지구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서 근본적인 어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시 총본산(總本山) 운동을 전개시키기에 이르렀다.
1941년 봄에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曹溪寺)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조선불교 선교양종이라고 불리던 종단의 이름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결정하였다. 조계종이란 한국 선종의 전통적인 명칭이었다. 1941년 4월 23일부터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사법(太古寺寺法)의 인가를 얻어 조계종으로 발족한 종단에서는 제1세 종정(宗正)을 한암중원(漢岩重遠, 1876-19951)으로 추대하고 그해 6월 6일부터 총본사인 태고사 종무원(宗務院)에서 종무(宗務)를 시작하였다. 이상은 해방전까지 일제하의 한국불교의 약사(略史)이다.
일제시대 식민정책으로 인하여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불교를 왜색화 시키려고 광분하였다. 이러한 때에 한국불교의 전통성을 유지 계승하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신 분이 용성진종(1864-1940)스님과 동산혜일(1890-1965)스님 그리고 청담스님이었다. 먼저 필자는 용성스님과 동산스님의 활동의 약사(略史)를 요약하고 청담스님의 정화운동의 인식을 고구한다.
용성스님은 사라져가는 계율을 중흥하기 위해 총독부에 건백서(建白書)를 1926년 5월, 9월 두 번이나 제출했다는 것이다. 또 스님은 『범망경』을 번역하여 유포함으로써 계율의 중흥을 위하여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산대종사의 계율수호는 용성스님의 삼취정계와 대승보살계의 정신을 계승한 계율사상을 적극 실천하였다. 동산대종사는 은사 용성스님의 계맥을 이어 받은 후(1936년) 『범망경』을 통하여 취처승들이 왜곡하고 있는 대승계율의 진의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으로 종단의 정화운동에 앞장섰다. 그 운동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게율 수호를 통한 계맥의 전승(1943년)이었고, 또 하나는 청정가풍 진작을 위한 교단의 정비운동(1954-1962)이었다.
일제하의 교단의 사정은 승려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 사찰 내에서 처자 권속을 거느리고 생활하며, 음주, 육식과 끽연에 구애가 없는데다, 사찰시설을 유람객을 상대로 하는 영업장으로 이용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불교계의 지도층에서는 이권과 명예욕의 아수라판을 벌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것은 분명 정화의 수술이 시급한 중증(重症)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조상들은 사찰(寺刹)을 ‘수복멸죄(修福滅罪)하고 숭신불법(崇信佛法)하는 청정한 도량’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전법도생(傳法度生) 수선홍법(修禪弘法)하는 삼보상주(三寶常住)의 청정 적정(寂靜)의 불찰(佛刹)이 부처님 팔아먹는 가게(商店)가 되고 명리(名利)의 도적이 머무는 소굴이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불조(佛祖)의 정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오염된 교단을 청정하게 바로 세우자는 불퇴전의 원력으로 이운허 스님과 함께 조선불교학인대회를 발기하면서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내 나이 27세이던가 나는 근세조선 오백년 동안 천대받던 불교를 정화, 중흥시키자는 정통 불법수호(佛法守護)의 기치를 들고 전국학인대회(全國學人大會)를 열고 전국 40여개나 되는 강원(講院)을 찾아 행각의 길에 올랐다. ……그토록 많은 삼보정재(三寶淨財)가 일인독재(日人獨裁)의 착취와 억압 앞에 이름도 자취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 삼천년 정법(正法)과 불조(佛祖)의 혜명마저 깡그리 파괴될 때 나의 의분은 용솟음쳐 방관할 수 가 없어 난 많은 학인들을 거느리고 정법수호(正法守護)를 부르짖었다.
이 같은 전국학인대회를 주도한 청담스님은 그 모임이 한국불교정화운동의 시초인 동시에 그의 염원인 정화불사(淨化佛事)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그러한 확인스님들의 중흥운동도 일경(日警)의 탄압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체하여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일경(日警)들은 탄압하였을까? 그 당시 불교인들의 모임이란 항일의 주체세력과 같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청담스님은 그 운동이 일경의 탄압으로 깨어지고 난 후 강원을 1930년5월17일 수료하고 교단의 정화를 후의 일로 미루고 자기 마음의 정화(淨化) 정진에 위법망구(爲法亡軀)의 정신으로 수행에 전념했다. 불교정화는 식민지 불교 잔재의 극복을 통한 비구승 중심의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여 부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일련의 운동을 말한다.
청담조사는 계율에 근거한 정법을 강조하셨다. 정화는 정법을 구현하는 것이며, 정법을 다시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스님의 계율에 대한 중시는 불교정화운동으로 발화되었다. 스님의 정화는 대처승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계율을 지키지 않는 스님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계율에 대한 잣대는 비구승에게도 대처승과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계율의 수지 여부가 보다 중요한 기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올바른 수행자가 거처 없이 수행처를 빼앗겨 정진하지 못하고 교단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 스님에게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스님은 불교정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당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근대 한국 불교의 정화운동이란 불교와 불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교단을 구성하고 있는 승단(僧團)의 정화를 말하는 것이다. 청정하여야 할 승려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을 때, 마땅히 본사 세존께서 정하신 율법에 따라 대치되는 요소는 제거해야 한다. 이 운동이 바로 근대 한국불교의 정화이다.
위와 같이 청담스님은 정화의 개념 정의를 명쾌히 하였다.
청정하여야 할 승려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을 때, 마땅히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에 따라 배치되는 요소는 제거해야 한다고 청담스님께서는 힘주어 강조하였다. 청담스님은 정화운동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일제가 이 땅을 침략한 이래 우리나라 불교계에는 여러모로 변동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승려들이 술․고기․담배를 먹는, 특히 대처문제(帶妻問題)였다. 원칙적으로는 대처하지 않는 것, 이것은 부처님 이후 출가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이다. 글자 그대로 수천 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전통이기도 했다. 어쨌든 지간에 청정해야 하는 불법문중(佛法門中)에 훼법분자(毁法分子) 대처승이 생겨났으니 근대 한국 불교 승단에서 막행(莫行)․막식(莫食)하여 처자를 거느린 비법승배(非法僧輩)들이 종권에 등단하고 교계를 혼탁케 한 데서 마침내 호법정화(護法淨化)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청담스님은, “불법(佛法)은 청정본연(淸淨本然)을 말하는 것이다. 본래 청정(śuddhā)도 두지 않는 것이거늘, 하물며 어찌 부정(不淨)이 있겠는가. 그러나, 정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정(不淨)이 있음을 또한 어찌하랴.”고 개탄하면서 모든 종교사는 종교 본연의 근본을 좀먹는 비본질적 요소와 대결하여 싸우는 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비본질적 요소가 교단의 토대인 계율에 도전한다고 하였다. 그 당시의 교단상황을 스님은 다음과 같이 진단하였다.
일본의 한국침략과 더불어 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려는 식민지화 정책의 비호아래, 파계환법자(破戒換法者)들이 사찰을 장악하고 교단에서 당당히 호령하게 됨에 그들의 수효는 순식간에 늘어갔고, 이때부터 불교는 타락의 길로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청담스님은 이 사바세계에 피어나는 연꽃과 같이 청정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고 한국고유의 승풍(僧風)을 진작시키기 위한 정화(淨化)는 당위였다. 청담조사의 정화 순서는 스님 자신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참고가 된다.
정화불사 이념이자 행동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삼대 요목은 첫째, 청정비구들에 의한 교단정화, 둘째, 승려의 질적 향상을 위한 승려정화, 셋째, 삿된 것으로부터 올바른 신심을 돌아오게 하는 신도정화와 또 이와 같은 불교정화를 통하여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고해(苦海)에 더욱 허덕이는 만민을 건전하고 진실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정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님의 정화는 불타적(佛陀的)으로 중생을 구제하자는 것이다. 중생의 구제는 계·정·혜로 탐·진·치를 제거 미(迷)를 오(悟)로써 제거, 자비로써 모든 중생을 대하자(同體大悲)는 것이다.
Ⅳ. 깨달음(悟)의 수행을 위한 계율
출가는 혁범성성(革凡成聖)의 길이다. 청담스님은 25세(1926년)에 출가하여 당시 불교학 최고 강원인 개운사(開雲寺)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대강백 박한영스님의 지도아래 경⦁율⦁론 3장(藏)을 두루 섭렵하고 대교과를 1930년 5월에 졸업하였다. 스님은 그곳이 일생을 입지(立志)하는 데 크게 도움을 받은 곳이라고 술회했다.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서산대사가 ‘회교귀선(會敎歸禪)’을 설한 바와 같이 인간이 꼭 해야 할 일과 꼭 가야 할 길을 마음을 깨닫는 마음 찾는 공부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자기 마음을 깨치는 일이다. 이 마음을 깨쳤을 때가 곧 부처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마음을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바로 이끌어주고, 복 받게 해주고, 잘 살릴 수 있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며, 우주를 다 내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다.
청담스님은 덕숭산 정혜사 만공(滿空)스님의 지도로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위하여 세수하는 일, 변소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참선하는 자리를 떠난 일이 없이 정진에 몰두했다고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문 앞에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목이 마르고 괴로움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이윽고 그 괴로움과 불편이 사라져갔다. 점점 무(無)의 경지로 들어갔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앉아 있어도 앉은 것 같지 않고, 오줌을 싸도 싼 것 같지 않았다. 하나의 정좌(定座)는 밥이고 정좌이면서 곧 무(無)였다.
이런 위법망구(爲法忘軀)의 3년간 정진수행의 공덕으로 청담스님은 견성(見性)의 게송(偈頌)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예부터 모든 불조(佛祖)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길가에 고탑(古塔)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
스님은 견성한 후 그의 보임(保任) 만행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누더기 옷을 걸치고 걸망에는 상비약과 삭발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머리가 긴 아기나 어른을 만나면 머리를 깎아 주고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일러주기도 했으며, 부스럼이나 상처가 난 사람을 만나면 약을 발라 주고 치료도 해주었다. 또 남의 집 처마 밑에서 한밤을 지새우며 인생무상을 되씹기도 하고 때로는 심해(深海)에 고요히 가라앉은 무딘 바위처럼 무뚝뚝한 시골 머슴들이 거처하는 사랑방에서 그들의 온갖 놀림을 받아가면서도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대꾸해주며 한 구석진 곳에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혹독한 겨울 추위에도 맨발과 홑옷으로 지냈으나 가사장삼은 꼭 입고 다녔다.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이나 사시사철 언제나…. 근세 조선 5백 년 동안 천대받던 ‘중놈’이지만 언젠가는 신라․고려시대와 같은 찬란한 불교 중흥을 이루어 3천만 겨레 모두에게 숭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중놈이, 아니 삼계(三界)의 도사(導師)와 사생(四生)의 자부(慈父)가 되겠다는 나름대로의 굳은 각오와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청담스님의 이상․고뇌․비극, 그리고 진리애․보살도․구도열․자존심․애국심 등을 읽을 수 있다. 청담스님은 신라의 원효 스님(617~686)과 같이 20세기 한국의 보살로 화현(化現)한 것이다. 청담스님은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보살의 원력으로 한국불교 5백년 왜곡된 현실을 바로 세우는 정통성 회복에 정화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것이다. 청담스님에게 있어서 불교정화 운동은 보살도를 실천하는 한 단계였다. 스님이 출가하여 불법을 체득하기 위한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수행은 중생구제의 보살정신이었다. 스님의 중생구제 보살정신은 불교정화로 나타난 것이다. 그의 삶에 있어서 일관된 정화불사(淨化佛事)는 그의 정화이념인 ‘마음철학’으로부터 나왔다. 스님은 불법을 체득한 정법의 안목에서 ‘현대인들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내가 무어냐? 제일 중요한 이 두 가지를 확실히 모르고 산다’면서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꼭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 이 두 가지만은 꼭 배워야 합니다. 부처가 되는 길이 마음 깨달아 우주에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갈 길입니다.……불교를 믿고 마음을 깨치면 생사를 초월한다. 마음을 깨치면 부처이니 석가여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칠 수 있는 법을 그대로 남기어 놓았으니 부처님 하시던 그대로 수도를 하면 된다.
스님은 인간이 꼭 해야 할 일과 꼭 가야 할 길을 마음을 깨닫는 마음 찾는 공부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자기 마음을 깨치는 일이다. 이 마음을 깨쳤을 때가 곧 부처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마음을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바로 이끌어 주고, 복 받게 해주고 잘 살릴 수 있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며, 우주를 다 내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다.
스님은 자기 마음 깨닫고 생사자유와 해탈을 얻어 영원한 자유를 체득하기 위해 계율을 지키면서 참선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님은 불법은 마음 깨닫는 공부라고 하면서 『금강경대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불법은 마음 깨치는 공부이므로 지식이나 학문하는 태도로 임해서는 석존의 깨달음을 몸소 자기 것으로 체득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그 경지에 도달해서 성불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며, 이것은 오직 석가여래 한분만이 우리에게 전해 준 소식입니다. 이제 마음 깨치는 선법에도 전문적으로 하는 달마선과 천천히 닦아 익히는 의리선(義理禪)이 있습니다. 달마선이란 마음을 곧 깨치는 선법으로서 고속으로 가는 방법이고, 의리선은 과학적, 철학적, 이론적으로 따져 볼 것 다 따져가며 닦는 행법입니다.
위에서 스님이 제시한 달마선은 조사선이며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주장하는 것이다. 스님은 항상‘마음’을 깨닫고 ‘견성’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스님은 50년 가까이 공부해 온 것이 마음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마음이란 ……열반이나 반야․불성․생명․중도․영혼 등이 함축되어 있는 표현이다. ……가장 간단하며 평범하게 그 생명의 실질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마음’이다. …우리말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생명이 있는 것’을 마음이라 한다. 한문 경전에도 ‘심즉시불(心則是佛)’ 즉 ‘마음이 곧 부처’라 했다. 선종도 그러하고, 팔만대장경도 중요 골자가 심즉시불(心則是佛)을 말한다. ……마음은 모든 것의 주체다. 이 마음은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다. 하느님에게도 구속되어 있지 않고, 부처님이나 진리에도 걸려있지 않기 때문에 이 놈이 자유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천지의 근본이 마음이고, 만사의 주체가 이 마음이다.
청담스님의 ‘마음’은 假我(jivātman)의 ‘마음’이 아니라 ‘眞我(paramātman)의 마음’이다. 청담스님이 말하는 ‘마음’은 ‘心性’, ‘佛性’이란 뜻으로 나타낸 것으로 우주를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라는 부처님의 유심사상을 청담스님의 해석학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청담스님은 부처님의 유심사상(唯心思想)만이 무명의 암흑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마음을 여의고는 만법이 존재하지 않으니, 오직 마음을 밝히고 마음을 의지하여 만사를 자재할 수 있는 영원무궁한 대자유인이 되어서 만중생의 구세주가 되어야 하겠다. 그리고 높고 큰 원력을 굳게 다짐하여야 할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일체가 모두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면 만든 마음과 만들어진 객관이 있게 되어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또 벌어질 수 있으니, 일체유심(一切唯心)이라, 지을 조(造)자 하나를 빼버려야 알기 쉽다. 오직 마음뿐이다. 일체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불법이다.
청담스님은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일구를 주객(主客), 몸과 마음을 나누어서 보는 二元的인 분별심(vikalpa), 차별심 등을 초월(超越), 정화(淨化)하는 마음으로 해석하였다. 청담스님은 양변(兩邊)과 상대적인 대립을 초월하는 것을 ’정화(淨化)‘라고 해석(觀心釋)했다고 인지된다. 정화는 마음을 깨닫는 길밖에 없다고 다음과 같이 스님은 설하고 있다.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하여 번뇌를 쉬고 망상을 끊어야 한다. 허망한 것은 간직할 것 없다. 간직해 보아야 없어지니까 허망하지 않을 걸 찾자. 그것은 내 마음밖에 없다. 다른 건 허망하다. 우리가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도 허망이고 진리도 허망이며, 허망한 것은 전부 허물어지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다. 모든 허망에서 탈피하여 허망을 내 마음에서 버릴 때 나는 곧 내 본래 부처를 만날 수 있다. 딴 데 간 것도 아니고 다만 육체를 나라는 착각 때문에, 딴 착각을 해서 그것이 바빠진 것뿐이다. 우리는 육체를 나라고 하고, 오온(五蘊)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천당 지옥을 생사윤회하고 있다.
청담스님이 주장하는 마음을 깨닫는 것은 일체의 이원성으로부터 정화, 초월하여 일체의 만법을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의 마음을 말한다. 이 마음은 육체를 나라하고, 오온(五蘊)을 나라고 하는 의식(ahaṃkara)의 집착에서 벗어나 일체 중생에게 동체대비(同体大悲)를 실천하는 반야의 마음이다. 청담스님의 마음은 인식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순수 지혜(prajnā-ghana)’이다. 청담스님은 그 마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일체의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한소가 무한대로 통하는 것은 우리의 전 우주가 다 이것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고 무한소․무한대로 한계가 없기 때문에 하늘․땅․태양계․은하계 할 것 없이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Kaṭha Upaniṣad』에서 설하는 바와 같이, 청정한 일심(一心)은 시공에 자유로워 극소와 극대를 다 포용하고 미세한 작용까지도 요달(了達)하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인류 5천년의 문화를 다 건설한 것이라고 청담스님은 주장하면서 그 마음을 ’天上天下 唯我獨尊‘으로 나타냈다. 그래서 청담스님은 인류의 행복과 평화는 마음의 수련에 두고 ’假我(jivātman)‘의 마음을 ’眞我(paramātman)‘의 마음으로 정화(淨化)에 있다는 방향제시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불교는 사회 정화하는 기본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너부터 나쁜데 가담하지 말고, 너 자신 하나가 정화되면 그러면 너를 대하는 사람도 다 너 같이 된다. ‘사람이 나쁘다’, ‘세상이 나쁘다’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나쁜 길로 간다는 건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입니다.
청담스님의 이러한 정화의 정신은, “만약 보살이 정토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자기의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가 청정하다”는 법문과 같은 교의이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청담스님의 정화불사(淨化佛事)는 마음의 外的 淨化와 內的 淨化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마음의 外的淨化佛事는 敎團淨化로 淸淨僧伽를 확립하는 불사(佛事)였고, 마음의 內的淨化佛事는 지계(持戒, śīla)를 통한 참선(參禪, dhyāna)으로 무명(無明, avidyā)을 타파하여 반야(般若, prajnā)를 실현하는 견성(見性, svayaṁprakāśa)佛事로 정법불교(正法佛敎)를 세우는 불사(佛事)였다. 청담스님의 정화불사는 그의 20대에 견성하는 불사에 입지(立志)를 세워 궁굴(窮屈)과 인고(忍苦)와 자약(自若)의 수련 속에서 빛을 발한 마음의 광명(自明性, svayaṃprakāśā)운동이었다.
Ⅴ.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한 실천으로서의 계율
『화엄경』에 있어서도 ‘계(戒)’는 오로지 「십선도」로 보여 지고 있으며 특히 「이구지(離垢地)」에 있어서 그것은 분명하다. 「이세간품」에서는 「십종계」를 설하고 있는데, 즉 『60화엄』권 37에서는
보살마하살에 십종계(十種戒)가 있다. 무엇을 열 가지라 하는가? 이른바 보리심을 무너뜨리지 않는 계, 성문·연각의 경지를 여의는 계, 일체중생을 요익(饒益)하게 관찰하는 계, 일체중생을 불타의 법에 머물게 하는 계, 일체 보살의 계를 배우는 계, 모든 것에 있어서 소유하지 않는 계, 모든 선근(善根)을 깨달음에로 회향하는 계, 일체 여래의 몸에 집착하지 않는 계이다.
라 하고 있다. 여기서는 「십종계」라 하면서도 여덟 가지를 내세우고 있을 뿐이지만 『80화엄』에서는 나아가 ‘일체법을 사유하여 취착(取着)을 여의는 계, 제근율의계(諸根律儀戒)’를 더하여 이것을 열 가지다 한다고 하고 있다. 『화엄경』에서는 두 번째를 「이승지(二乘地)를 멀리 여의는 계」라 하고 있다. 모든 보살은 성문·연각의 교리와 계를 버린다는 결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계의 본질은 ‘결의(決意)’다. 성문·연각의 뜻을 버린다는 것은 『화엄경』뿐만 아니라 『반야경』을 비롯하여 광범위한 대승경전에서 되풀이하여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60화엄』의 「이세간품」이나 『80화엄』의 「이세간품」에서는 십선에 대한 설명 가운데, ‘일체중생을 요익(饒益)하게 관찰하는 계(饒益觀察 一切衆生戒)’가 공이 내포되어 있다. 앞에서 고찰한 ‘結戒十句義’를 통해서 인지되는 것은 계율은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한 것이다.
초기 대승경전에서는 이론보다는 신앙과 실천을 중요시했으며, 이론이 설해지더라도 그것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신앙실천의 기초를 위한 이론이었다. 그래서 대승은 성문승이 阿羅漢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데에 대하여, 菩薩乘을 세우며 부처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菩薩은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 즉 九類衆生들을 제도한다고 하는 利他行을 강조하는 행동주의적 불교를 제창하고 있다. 이것은 從來의 部派佛敎가 나만이 혹은 내가 소속한 집단만이 해탈할 수 있다는 일체의 차별의식이나 특권의식을 거부한 대승불교의 출발정신이며 宗旨인 것이다. 이런 대승정신은 ‘自利利他 覺行圓滿’이라는 언명으로 대변된다. 이런 정신은 나의 깨달음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廻向(pariṇāma)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一切諸法의 空觀에서 보면 濟度하는 자와 濟度받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金剛經』에서는 설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小乘(Hīnayāna)중에서도 說一切有部(Sarvāstivāda)라는 部派가 주장한 ‘我空法有’의 주장을 破邪顯正하려는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러므로 대승정신은 보살정신이요, 보살정신이 바로 반야사상이며,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보살은 보살도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數로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를 한다고 해도, 여기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보살의 마음을 발하여, 이 경을 지니고 그 사구게 등이라도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준다면 그 복이 저 칠보의 복보다 나으리라.
위의 내용은 『金剛經』의 성립 당시 부파불교 교단은 王(rāja) 長者(śreṣṭha)들의 후원 아래 출가자들이 안정된 생활을 바탕으로 사원에서 아비다르마 교학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실천은 형식화되었던 것을 통박하면서 法施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法施의 실천은 ‘自覺覺他覺行圓滿’하기 때문이다. 보살에게 있어 자기를 위해 깨달음을 구하는 ‘上求菩提’의 ‘自利行’과 남을 위해서 자비행을 실천하는 ‘下化衆生’의 ‘利他行’ 은 둘이면서 둘이 아닌 불가분으로 ‘自利卽利他 自利利他圓滿’이다. ‘自他不二’, ‘自他平等’ 정신은 空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보살의 이타행으로 활용되어 온 대승불교의 근본정신이다.
『金剛經』에서는 재가․출가라는 분별된 입장을 버리고 법(dharma)의 자각과 보살행을 강조하면서 이 경의 四句偈 하나라도 외우고 타인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공덕(puṇya)은 七寶의 財施보다도 더 크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金剛經』의 이론이 신앙과 실천을 중요시하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이것은 대승불교 보살운동의 진보적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 깨달음의 보편화․대중화를 시도한 바람직한 역사의 전개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초기대승불교운동의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청담 스님은 20세기 한국의 대승보살로서 육체를 중심으로 한 ‘假我’에서 ‘참나(眞我)’발견을 강조하는 한국불교를 淨化하여 傳法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들어보아도 宗派佛敎가 되어서 각각 설명 방법과 수행양식이 달라서 한국불교와 같은 참된 부처님의 정신은 들어볼 수 없다. 동남아 소승불교도 各宗 各派마다 그 주장이 다르고 한 조각의 불교밖에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바삐 한국불교를 바로 세워서 道人이 많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 한국불교의 정신이 온 세계에 널리 퍼졌을 때 인류의 평화는 비로소 올 것이다. 나는 오늘의 세계를 지도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진리의 寶庫가 한국불교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육체가 내가 아닌 줄 알고, 마음자리가 나인 것을 강조하는 한국불교를 실천하고 전법하자.
청담 스님은 보살의 이타행이란 불법을 널리 알려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에 들게 하여 離苦得樂케 하는 데에 있다고 했다. 그러한 방법의 일환으로 청담 스님은 元曉(617-686) 스님이 신라불교의 사상과 이론을 會通하여 和諍佛敎를 일으켰듯이 1930년이래 타락한 한국불교 교단의 淨化와 正法化를 위해 일생(1930-1971)을 다 바치셨다.
청담 스님은 일생을 오직 누더기 하나로 오후불식과 장좌불와의 수행을 하시면서 한시도 自利利他의 修行에 여념이 없으셨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佛法의 正法化와 大衆化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함이 없는 인욕보살이었다. 청담 스님은 한국불교의 찬란한 전통을 되살려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교단 자체 정화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하시면서 正法의 傳法化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다.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혁이 한국불교의 내부에서 일어나야 한다. 불교란 世尊만을 모시고 개인의 영욕을 취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런 종교였다면 세존은 우루벨라촌의 보리수 아래에서 그의 正覺을 가짐으로써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그 正覺을 가짐으로써 오히려 世俗으로 내려와 四海大衆들과 만났다. 그의 정각은 세속인을 깨우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데에 뜻이 있었다. 세존이 사해대중과 만났다는 사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존은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그의 정각을 가졌다. 그러므로 오늘의 불교 역시 오늘의 대중을 만나기 위해서 正覺을 가져야 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청담 스님은 “중생제도를 위해 成佛을 한 생 미루더라도 한국불교의 敎團淨化와 正法의 大衆化를 위해 기필코 완수하겠다”는 願行의 삶을 일생 실천하였다. 청담 스님은 중생을 고통에서 구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解脫이며 願이라고 강조하였다.
Ⅵ. 맺음말
청담조사(1902-1971)의 발자취는 한국 근·현대불교의 역사이다. 청담조사는 당대(1928-1971)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으로서 한국불교의 이상, 한국불교의 고민, 한국불교의 비극, 한국불교의 위대성이 스님의 사상과 생활 속에 구현되어 있다. 청담조사는 삼학(三學) 균수를 통해서 그 시대의 문제를 회통(會通)하면서 1700년의 한국불교 전통의 법등(法燈)을 지켜 새로운 정법불교의 좌표를 정립한 칸트(Kant, 1720-1804)적 정화보살이었다. 청담조사는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서 볼 때 그 이전의 삼학의 가르침이 그에게 흘러들어 갔고, 그 이후의 모든 보살사상이 그로부터 흘러 나왔다. 청담조사는 한국 근·현대 불교사의 중심에서 대승보살도의 살아있는 실증을 행동으로 보이신 인욕의 보살이었다.
청담스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해야 할 인생일대사(人生一大事)를 부처님의 정법심인(正法心印)을 체득하여 일생 동안 중생을 제도하자”라는 서원으로 출가하여 선조들의 삼학 균수를 통해서 마음철학을 확립하고 이를 전하시다가 일생을 마치셨다. 스님의 삼취정계 계율 정신은 청정승가와 정법수호라는 정화불사의 선봉장으로 나타났다.
스님의 마음철학은 1700여년 한국불교·전통의 법등(法燈)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당대의 문제를 회통하는 20세기 보살상의 전형이다. 20세기 한국불교사에서 청담조사와 같이 누가 한국불교를 그의 피와 살로 느끼면서 보살행을 실천한 분이 얼마나 될까? 오늘날 한국불교는 청담조사와 같은 삼학을 실천하는 구도자를 갈구한다. 그래서 필자는 청담조사가 『마음』에서 불교의 정신으로 인류 평화와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 제시를 다음과 같이 한 내용을 조사의 유훈(遺訓)으로 삼고자 한다.
인류 불행의 근원이 되는 암흑의 유물사상(唯物思想)을 배제하고 인류 평화와 행복에 기여하기 위하여 다음 세 가지 불사(佛事)를 작여(作與)하고자 한다.
첫째, 영원불멸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생사의 고통을 초극하여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를 얻음으로써, 치열한 생존 경쟁이 빚어내는 전쟁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조절하여 평화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한다.
둘째, 생사윤회가 지속됨을 확신케 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대서원력(大誓願力)을 발휘케 한다.
셋째, 인과응보는 우주 만유가 흥망 성쇠하는 법리이며 진리임을 철저히 신해(信解)케 하여, 인류로 하여금 윤리관·도덕관·사회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함으로써 인류 사회의 질서 유지에 만전을 기한다. 이 인연 공덕으로 일체 중생과 더불어 다함께 ‘성불’의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바이다.
참 고 문 헌
<약 호 표>
CD : 靑潭大宗師全書(卷數, 페이지數)
Gītā : The Bhagavadgītā
HD : 韓國佛敎全書(卷數, 페이지數, 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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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潭大宗師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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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청담조사(1902-1971)의 발자취는 한국 근·현대 불교의 역사이다. 청담조사의 행적, 업적, 영향은 다양하고 지대하다. 본 연구는 그 중에서 청담조사의 계율에 대한 업적을 요약 정리하여 오늘의 한국불교도가 어떻게 인식하고 계승하여야 할 내용을 살펴보려는 글이다.
청담조사의 계율 분야에 대한 행적은 1928년 조선불교학인 대회를 발기하면서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불조(佛祖)의 정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정화불사(淨化佛事)를 시작하였다. 정화의 기본 이념은 정법불교이었다. 청담조사의 정법은 계율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그 당시 교단의 사조인 정혜쌍수를 계·정·혜 삼학을 균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담조사의 계율사상은 용성진종(1864-1940)스님과 동산혜일(1890-1965)스님의 영향으로 삼취정계를 불타적(佛陀的)으로 중생을 구제하자는 것이다. 중생의 구제는 계·정·혜로 탐·진·치를 제거, 미(迷)를 오(悟)로써 제거, 자비로써 모든 중생을 동체대비(同體大悲)하자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불자는 청담조사와 같이 한국불교와 인류를 자기의 피와 살로 느끼면서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 계승해야 할 일이다.
주제어: 청담조사, 삼학균수, 계율수호, 정법불교, 정화불사, 삼취정계, 동체대비
Chung-Dam’s Thought on the Buddhism Precept
Kim, Sun-Keun
Abstract
Venerable Chung-dam(1902-1971) become a Bhikkhu in order to seek ‘Mind’ after his eyes were opened by the sermon of ‘Mind’ and awakened ‘Mind’ in 1934. Ever since his enlightenment, he preached the sermon of ‘Mind’ for about 40years(1928-1971), and become a Forbearance Bodhisattva himself, who saved the way of Bodhisattva in 20th century Korea.
Who else might have felt like him that all koreans are this own flesh and blood? His way of Bodhisattva came from ‘the mindphilosophy-his purification thought’. Buddha’s spiritualism was construct as venerable Chung-dam’s ‘Mind’ on his own words.
Venerable Chung-dam’s performances, achievements, and influences are diverse and enormous. Among venerable Chung-dam’s various achievements, first of all, this research study to attempts to summarise his achievement on the Buddhism precept.
Regarding to Chung-dam’s performance on the Buddhism precept, it was a good example for him to prevent the spread of the Japanese Buddhism regime that would allow Buddhist Bhikkhus to take wives and eat meats around the Korean Buddhism regime.
Therefore, he made continues efforts in the establishment and maintenance of the Korean Buddhism order.
He tried to send the important message of keeping the Korean Buddhism precept towards Bhikkhus and common Buddhism believers wherever he stayed there.
There is a clear depiction of Mahāyāna Buddhist preparation for the Bodhisattva precepts in the formation process of three comprehensive precepts. Especially, we could observe various conflicts on the establishment of the basic perception of the three comprehensive precepts. The self ordination would probably be a good solution for the conflicts. Chung-dam’s Thought on the Buddhism precept still has preserved in the recent Korean Buddhism.
Key-words: Venerable Chung-dam, Precept keeping, Buddhism purification The three fold pure precepts, Bodhisattva-precepts, The formation process of three comprehensive precep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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