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궁금한 의문이다. 몸은 내가 아니라 하는데 꼬집으면 아프니 혼란스럽다. 세상에 태어난 이치를 알려면 12연기를 알아야 한다.
無明이 있게 되면 이것을 연하여 行이 생기고 행을 연하여 識이 생기고 식으로 인하여 名色이 생기고 명색으로 인해 六入이 생기고 육입으로 인해 觸이 생기고 촉으로 인해 受가 생기고 수로 인해 愛가 생기고 애로 인해 取가 생기고 취로 인해 有가 생기고 유로 인해 生이 생기고 생으로 인해 老死憂悲惱苦가 있게 된다 <잡아함경>
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근본 원인은 무명<Avidya> 때문이다. 여기서의 識은 中陰身<영혼. 8識>이다. 몸은 5감을 통해 前5識을 일으킨다. 제6 意識은 전5식을 통해 인식하기도 하지만 제7 말나식과 제8 阿賴耶識에 의지하여 홀로 작용하기도 한다. 제6의식은 몸의 6번째 작용이라 해서 六感이라고도 한다. 밤에 잠이 들면 5感이 닫힌 형태이지만 꿈을 꾸거나 無意識의 세계로 여행을 갈 수도 있다. 제6 의식은 欲界 禪界 色界 無色界를 다 인식한다. 사람은 제6 의식이 작용해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죽음의 1단계는 의식이 혼미해지는 과정이며 2단계는 의식이 不明되어 사라지고 3단계는 의식이 사라져 죽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전5식과 제6 의식의 작용은 단절된다. 識에는 전5식 제6 意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제7 말라식 제8 阿賴耶識 등 8가지가 있다. 제8 阿賴耶識은 삶의 모든 기억정보들이 저장되는 識이다. 사람이 죽으면 6식까지는 없어지지만 제7식과 8식은 斷滅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제7식은 주관적인 자아의식이다. 제6 의식 활동이 끊어지면 제7식은 전혀 작용을 못해 어디로 가야할 지 전혀 모른다. 그러나 제8 阿賴耶識과 함께 남아 相續한다. 제7식은 제8 阿賴耶識을 항상 의지처로 삼는다.
제8 阿賴耶識은 좋다 나쁘다 분별하지 않고 저장만 한다. 번뇌와 相應하지 않는 無記性이다. 제7식은 제8 阿賴耶識을 의지하여 주관적으로 항상 思量分別을 한다. 제6의식은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짓는 놈은 바로 제7식이다. 제6의식이 아무리 分別하더라도 나라는 自我意識이 없으면 이원화된 마음에서 남과 대립해 業을 짓지 않는다. 그런데 제7식이 善惡의 業 활동과 번뇌의 감정을 일으킨다. 이렇게 선악을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사람이 죽으면 제7식과 제8 阿賴耶識은 中陰身<혼백 영혼>이 된다. 제7식은 감각기관과 分別 의식이 없어 움직일 수 없는 암흑천지의 상태가 된다.
中陰身은 저장된 業<薰習된 기억정보>에 의해 환청 환각을 일으킨다. 어떨 때 혼자 방안에 가만히 있다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神의 계시라 착각하기도 한다. 이는 제8 阿賴耶識에 저장된 기억정보가 나타나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습관 때문에 심심하면 계속 담배나 술에 눈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12연기에서 無明을 인하여 일어나는 行이라 한 것이다. 中陰身의 윤회는 生有 本有 死有 中有의 4有를 통해 반복된다. 生有는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本有는 이 세상에 출생하여 살아 있는 동안 死有는 죽는 순간 中有는 내생에 다시 태어나는 순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中有는 제7식과 제8식의 의식만 갖고 가는 상태이다.
中陰身이 있어야 부모의 교합에 의해 만들어진 수정란이 名色으로 자라날 수 있고 거꾸로 부모의 精과 血이 합쳐진 수정란이 있어야 죽은 귀신인 중음신이 새 생명을 받을 수 있다 <중아함경>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하는 능력 즉 感受할 수 있는 작용이 생긴다. 좋다 나쁘다 하는 느낌은 지금 일으킨 작용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생에서 체험하는 느낌은 전생 혹은 과거에 지었던 業力에도 기인한다. 윤회의 삶은 과거 현재 미래가 끝이 없는 영원의 세계이다. 中陰身은 薰習된 기억정보로 인해 윤회의 길로 나아간다. 윤회의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 윤회의 원인은 業 때문이다. 업이란 제8 阿賴耶識 속에 저장 薰習된 종자 기억정보를 말한다. 그렇다면 業은 왜 생길까? 업은 의도<생각>를 가진 모든 행동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는 의도를 업이라 말한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 <앙굿따라 니까야 꿰뚫는 경>
청정한 마음은 업을 만들지 않지만 한 생각을 일으키면 업이 만들어진다. 성실론은 인간의 의지가 곧 모든 業의 주체라고 말한다. 우리의 감정들이 모여 작용을 일으키고 어디든 이동한다. 인간의 수많은 생각 번뇌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貪嗔癡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대표적인 毒이다. 우리는 바로 이 3毒心 때문에 윤회의 길로 나아간다. 中陰身은 3독심이 없으면 윤회하지 않고 해탈할 수 있다. 중음신은 제8 阿賴耶識에 저장된 기억정보 때문에 윤회한다. 中陰身은 5근을 모두 갖추고 있다. 간혹 기도하다 중음신을 만날 수도 있다.
中有의 몸은 미세하고 청정한 물질로 되어 있다.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中有끼리는 서로 알아본다. 혹은 극히 청정한 신통력의 눈을 가진 자는 본다 <구사론>
제8 阿賴耶識은 마음이라 형상이 없다. 중음신은 業力에 따른 妄念으로 환각과 환청을 본다. 中陰身의 눈으로는 제8 阿賴耶識의 業識을 볼 수 없다. 더 좋은 모습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습을 거부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의 모습이 보기 좋은 것이다. 이런 집착이 마음 속에 있는 한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윤회를 벗어나려면 무엇을 훈습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지은 業은 반드시 그 果報를 받는다 <중아함경 業相應品>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해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마음에 병이 들어 2가지 煩惱의 장애와 無知의 장애를 지니고 산다. 薰習된 業力으로 인해 마음에 장애가 발생한다.
중생은 4相을 가지고 산다. 나라는 생각인 我相이 계속 일어난다. 허공 중 소금 한 알갱이가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과 똑같다. 사람이라는 생각인 人相 나 말고 남이라는 생각이다. 나와 너 즉 나와 세계는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관념이다. 중생이라는 생각인 衆生相은 몸과 영혼이 共存하면서 생명활동을 하는 모든 존재를 중생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이다. 생명이라는 생각인 壽者相이다. 나의 목숨은 100년 개의 목숨은 18년 이런 식으로 삶과 생명에 집착하여 오래 살아야 하겠다고 執着하는 마음이다. 참 나는 不生不滅인데 내 몸을 나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相이 相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본다 라고 금강경에서 말하는 것이다. 중생은 我執과 더불어 현상계에 집착하는 法執이 발생한다. 이렇게 마음의 장애로 邪見 즉 4相과 我執과 法執을 일으키니 정신병이다. 그렇다면 윤회하는 삶이 과연 올바른 길인지 판단해 보자. 내 몸은 내가 아니다. 컵은 내가 아니다. 컵을 쓰는 놈이 따로 있듯 내 몸을 움직이는 주인공을 깨쳐야 한다. 佛祖께서도 몸을 움직이는 주인공을 깨쳐 생사를 벗어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윤회하지 않는 참 주인공을 깨쳐야 한다. 내가 무엇일까?
나는 마음이다. 마음은 시공을 초월해 존재한다.
마음은 일체의 生滅相을 여읜 不生不滅의 眞如이다. 바다에 바람이 불면 물방울이 생긴다. 무수히 많은 물방울들은 제각각 나라고 생각하고 다른 물방울들은 남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물방울이 본래의 물 모습으로 돌아가면 공간도 없고 시간도 없다. 물은 그대로 물이기 때문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마음은 무한정의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 그대로 오직 하나일 뿐이다. 無明業識이 일어나는 것은 과거 마음에 저장 薰習된 기억정보 때문이다. 허공 속 소금 작용을 없게 하려면 소금만 제거하면 된다. 윤회하지 않으려면 無明業識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이미 내 몸과 마음 속에는 한량없는 시간 속 선조들의 기억정보들이 薰習되어 있다.
마음을 내려 놓아라. 마음을 비워라. 그러면 마음을 어떻게 비우나? 마음 속 薰習된 기억정보들을 닦는 길은 무엇일까? 마음은 만지고 보고 느낄 수도 없다. 마음은 청소가 안 된다. 마음을 없애려고 하면 안 된다. 단지 한 생각 분별만 하지 않으면 된다. 분별하지 않으면 마음은 대립하지 않아 항상 평온하다. 그래서 佛祖께서는 마음은 닦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하지 않을 뿐이라 말씀하셨다. 마음은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에 저장하지 말라. 저장된 것들은 윤회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장시키지 않으려면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윤회를 벗어나려면 한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일체 중생의 고통의 원인은 無明 때문이다. 무명이란 業力으로 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한 생각 사라지면 그대로 寂滅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執着하지 않고 妄念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行動이 반복되면 習慣이 되고 습관이 반복되면 習氣와 種子가 되어 내 마음에 저장된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란 執着된 삶이 아닌 지혜로운 삶을 말한다. 집착하고 살면 윤회를 만든다. 윤회를 하지 않는 방법은 이 세상을 열심히 멋지게 최선을 다해 슬기롭게 살되 執着하지 않고 薰習시키지 않아서 내 마음 속에 저장시키지 않는 것이다.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집착하지 않고 훈습하지 않고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10회. 대풍 범각스님.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중에서
[출처] 697.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작성자 Ink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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