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2종류 – 집중하는 명상과 관법 명상
관법은 관조해 他者化시키는 명상이다. 卽自化는 배역에 몰입하는 명상이다. 그래서 어떤 배우는 배역에 너무 몰입해 극이 끝나도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 연기자는 속으로는 자신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 그래야 연기 변신을 하고 한 단계씩 성장한다. 이런 연기자는 죽느냐 사느냐 연기하면서 입금은 됐을까? 하며 또 다른 생각을 한다. 몰입하는 대상과 他者化시키는 나 이런 관조는 더운 지방 명상법의 특징이다. 위파사나 명상법도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명상법이다.
날씨가 더워 몸에 열이 축적되면 안 되는 상황이다. 열이 많이 나 병원에 가면 먼저 옷을 다 벗기고 얼음물에 집어넣는다. 열부터 낮춰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체온이 올라가면 몸의 기능들이 저하된다. 더운 나라 사람들은 長出息 내쉬는 숨이 길어지는 특징이 있다. 長出息과 관법은 Set처럼 같이 간다. 남방불교 수행은 더운 나라 수행법이라 우리와 잘 맞지 않는다. 추운 나라 사람은 어느 정도 되도 한계가 있다.
후한 말 안세고는 소승의 선관을 전래했다. 그러나 관법수행은 중국에서 하나도 안 먹힌다. 더운 지역 수행법은 추운 지역 사람들의 체질과 기후 환경이 달라 적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관법수행은 수백 년이 흐른 후 수나라 때 천태종에 의해 더운 지역 관법과 약간 다른 小止觀 마하止觀으로 확립된다. 그리고 당나라 중기 때 육조혜능 스님에 의해 남종선이 성립되면서 이후 수행문화가 바뀌기 시작한다. 그 이전은 교학 중심이었다. 추운 나라는 내쉬는 숨을 길게 하면 열을 발산하기 때문에 체온이 떨어진다. 반대로 추운 나라는 들이쉬는 숨이 중심이다. 그래서 정신을 관조하기보다 화두 같은 것에 집중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고양이가 쥐를 잡듯 화두에 집중하는 것이다. 인도와 중국의 명상문화는 이렇게 완전히 다르다. 단번에 깨치는 돈오는 중국이나 동아시아적 사유 방법이고 순차적으로 깨치는 次第는 인도적 사유 방법이다. 관법 중심이 되면 초월명상으로 가게 된다. 초월명상은 내면으로 깊이 들어 외부의 감각이 차단되면서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명상이다. 왜 인도는 나무 밑에서 명상을 하는지 이렇게 문화로 이해하면 어렵지 않다. 사람은 추우면 햇빛을 찾는다. 유럽은 일조량이 적으니 햇빛에 미치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이 일광욕 하나?
기후 환경이 다른 사람은 같은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러니 사고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인들은 팔다리가 길다. 손발이 길어야 열 배출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추운 지역은 손발이 길면 열손실이 많아 저 체온이 된다. 열은 어느 정도는 몸 내부에서 조절할 수 있지만 많아지면 죽는다. 우리는 거북이 체형이다. 몸통이 긴 것은 채식 중심 식습관 때문이다. 몸이 잘고 팔다리는 짧고 몸통은 길다. 팔등신 미인 좋은 체형 등은 판단의 문제다. 기후 환경에 따라 각기 달리 적응한 것뿐으로 최적화된 것이지 무엇이 우월한지에 대한 기준은 아니다.
오늘 날 우리는 너무 서구 쪽으로 경도되어 그들의 미감을 수용한 나머지 너무 우리를 비하하고 있다. 체형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단 잘못된 판단기준이 문제다. 조선시대 불상은 5등신이다. 그 당시 우리 모습이 그대로 불상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상 모습을 알면 그 당시 사람들의 미감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우열의 문제가 아닌 최적화의 문제다. 그런데 작금 우리나라 기후는 아열대 기후로 바뀌고 있다. 조금 있으면 배추가 없어진다는 말도 있다. 그러니 100년쯤 지나면 남방의 더운 나라 수행도 가능할지 모른다. 더운 지역의 명상은 초월 명상이다.
저의 스승님은 수십 대의 대상들이 수레를 타고 지나가도 모르셨습니다. 이 말에 부처님은 나는 깨어나 보니 내 옆에 벼락이 떨어져 소도 죽었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명상은 내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감각을 차단하는 것이다. 반면 추운 지역 명상은 活潑潑 惺惺寂寂이다. 집중하되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내면에 빠져 아무 것도 모르는 초월명상을 黑山鬼窟에 빠졌다고 판단한다. 율장에 보면 바구니들은 따로 혼자 명상하지 말라 했다. 명상에 빠진 사이 이상한 사람이 더듬을까 그런 것 때문이다. 인도 명상문화의 흐름이나 특징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인도와 중국 명상은 아주 다르다. 인도 명상엔 신통의 개념이 존재한다. 중국 명상은 관법을 통해 중도로 깨달음을 얻는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와 중도로 표현된다. 모든 것은 관계로 규정 지어진다. 地水火風 4대설은 아리안 족의 모험문화에서 시작된 듯하다. 4대설은 희랍철학에도 등장한다. 중국의 木火土金水 오행과도 비슷하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 4대설은 전 세계적으로 있는 이야기다. 4대설은 죽음과 관계되어 있다. 인도는 원래 시체를 버리는 유기 문화였다. 화장은 한참 뒤에 생긴 문화다. 화장은 아리안 족 유목민의 문화다. 윤회는 인도 원주민 문화다.
옳고 그른 장례법은 없다. 어떤 게 잔인하고 어떤 게 잔인하지 않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다 방식이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은 묻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물으니 장자는 들에서 승냥이나 까마귀가 파먹는 거나 땅 속의 개미나 땅강아지가 파먹는 거나 뭐가 다르냐고 말한다. 시체를 버리는 문화는 내세관이 뚜렷해 영혼이 다른 곳으로 간다고 생각한다. 시체는 낡은 옷과 같은데 낡은 옷 버리는 것을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반면 동아시는 죽은 후 뭔가 남는다고 생각해서 시체숭배 문화가 있다. 그래서 부관참시도 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風 바람이 빠지고 火 몸이 식고 水 물이 생기고 地 몸이 삭는다. 시체에 물이 생기는 것을 막는 것이 殮이다. 3科說은 5온 12처 18계다. 요소로 세상을 보는 설이다. 눈.귀.코.혀.몸.뜻 眼耳鼻舌身意 색.소리.냄새.맛.촉감.생각 色聲香味觸法이 12처다. 외부 사물에 반응하는 것 말고 머리만 돌아가는 것엔 뭐가 있을까?
기억 회상 추상 상상 공상 등이다. 이렇게 생각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을 法이라 한다. 12처에 識을 추가하면 18界가 된다. 관법을 통해 이런 나의 의식들을 끊어가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새끼줄처럼 연결된 것이 아니고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 새끼줄은 한 몸이지만 사슬은 하나씩 닫혀 있는 구조다. 그러나 하나를 당기면 다른 것도 같이 움직인다. 작게 봤을 때는 하나씩 된 개별 구성이지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로 본다. 이중 하나의 고리만 끊으면 작동을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저들이 말하는 깨달음이다.
오온은 色受想行識이다. 色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다. 흰색은 모든 빛을 반사할 때 검은 색은 모든 빛을 흡수할 때 인식되는 색이다. 파란 색은 파란 색만 반사할 때 인식되는 색이다. 색은 빛이 없으면 못 본다. 빛이 사물을 때리면 눈은 색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러면 눈에 想이 맺히고 行 상이 맺힌 것이 뇌파로 가면 識 기존에 있던 정보와 맞춰 결과를 도출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色受想行識 하나하나는 사슬구조처럼 연결되어 의식이 작용하는 것이다.
소리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受 소리가 내 귀로 전달되어 받아들여지면 想 울림이 맺히고 行 울림이 뇌로 전달되어 識 기존에 있던 정보를 불러와 무슨 소리라고 소리의 결과를 도출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오온은 인간의 생각 구조를 말한다. 그러나 이 작동방식에서 한 구절이라도 끊어지면 전체가 작동을 못하는 구조다. 그러니 번뇌라고 이를 만한 것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5온은 정신<내면>에 집착하는 사람이고 12처는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이고 18계는 정신과 물질 모두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모두 부처님 이전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다. 부처님은 연기설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 규정 지어진다.
개+새+끼 우리는 3글자를 동시에 발음할 수 없다. 개를 말하고 새를 말하고 끼를 말한다. 새를 말하면 개를 말한 것은 과거가 되고 새를 말하는 것은 현재가 되고 끼를 말하면 개와 새를 말한 것은 과거가 되고 끼를 말하는 것은 현재가 된다. 과거 두 글자와 현재 한 글자가 결합하여 개새끼라는 한 단어가 완성된다. 그러면 욕인지 욕이 아닌지 판단이 성립된다. 욕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분위기를 판단해서 욕일 수도 있고 강아지를 말한 것일 수도 있다.
개+새+끼 글자 하나하나의 관계성에 의해 단어가 만들어지고 분위기에 따라 단어의 의미를 판단하는 것이다. 현재만 얘기하면 이 단어는 분절되어 끊어진 형태이므로 번뇌라고 할 만한 상황이 없다. 그러니 다 연기 관계다. 모든 것은 관계성 속에서 재 규정되는 것이지 실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북극성은 지구 기울기와 같은 축선이다. 그래서 북반구에서 보면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는 상태다. 남반구에서는 남극성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다. 그런데 우리는 북반구에 살기 때문에 남극성은 볼 일이 없다. 우리는 북극성 중심이다. 그래서 중국에선 북극성을 황제에 비유한다. 고정된 북극성은 황제고 주위를 도는 별은 신하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북두칠성이 있다.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것을 보고 만든 것이 윷놀이판이다. 가운데 북극성을 놓고 북두칠성을 붙인 것이다. 유목민들은 북두칠성을 보고 길을 찾는다. 유목문화는 드넓은 초지에서 길을 못 찾으면 엉뚱한 곳으로 가 생존에 너무 중요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윷놀이를 통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임실 상가 윷판형 암각화 유적>
북두칠성은 국자 모양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제각각 떨어져 있는 별들이다. 게다가 수백만 년 전의 국자 형태다. 우리는 몇 100만 년 전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북두칠성은 우리 눈엔 평면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제각각 위치가 서로 다른 입체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들은 실제 죽은 별의 잔형을 보고 있는 것으로 이미 그 자리에 없는 별일 수도 있다. 우리는 관계성 속에서 7개로 보는 것이지 실제는 전혀 관계없는 별들이다. 우리가 말하는 북두칠성은 관계성 속에 존재하는 별이지 현실 속에 존재하는 별이 아니다. 인간이 느끼는 것은 모두 관계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실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연기설이다.
이렇게 단 한 번도 실제 모양이었던 적이 없던 것이 空이란 말이다. 空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은 관계적 의미를 투사하고 있기 때문에 연기설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보면 空이고 현상적으로 보면 연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체득하면 중도라 하는 것이다. 중도란 적절성이다. 지금 틀어 놓은 에어컨을 모든 사람에게 다 맞출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 상황이 나에게 딱 맞는다면 그것이 적절성이다. 중도적으로 맞춰져 있다면 기온이란 내 머리 속에 존재하지 않지만 춥거나 덥다고 느끼면 계속 신경 쓰니 그러면 중도가 아닌 것이다.
한 마디로 중도란 건강하다는 개념과 같다. 내 몸이 존재하는지 잊고 있으면 건강한 것이다. 내가 정말 편안하다면 내 몸이 존재하는지 잊는다. 중도가 이뤄지면 그 부분에 대해 집착이 없어진다. 집착이 없어지면 행복하고 자유로워진다. 개새끼나 북두칠성처럼 관계성 속에 의미가 이뤄지는 것이 현실 속의 연기라면 본질은 실체가 없는 공이다. 이것을 자각해서 걸리지 않는 자유를 얻으면 중도를 터득한 것이 된다.
眞空妙有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실체 없이 여러 인연이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는 현상이다. 공은 허무가 아니고 0과 같은 의미다. 空은 작용은 있지만 실체는 없다. 0 자체는 값이 없지만 어떤 숫자 뒤에 붙으면 엄청 값이 올라간다. 空과 無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無는 아주 없는 것이지만 空은 실체만 없지 현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꿈을 꾸는 사람에게 꿈은 空과 같은 것이다. 꿈을 깬 사람에게 꿈은 없는<無> 것이다.
깨달은 사람에게 연기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연기는 존재하는 것이다. 眞空妙有 이 세상은 진짜 공인데 묘하게 실존한다. 이것을 자각하고 이 원리를 아는 중도적인 사람은 이로부터 벗어난다. 코페루니쿠스 같은 발상의 전환이다.
20회. 자현스님. 남방과 북방. 명상의 구분 중에서
[출처] 966.남방과 북방. 명상의 구분|작성자 Ink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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