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성은 큰 곰자리고 북두칠성은 작은 곰자리다. 북두칠성은 지구와 거리가 제각각 떨어진 7개의 별들로 각기 다른 시간대에서 온 별빛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북두칠성은 사실 허상이다. 현재는 다 다른 시간대의 다 다른 정보들을 왜곡해서 보는 것이라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허상이다. 나는 여기 있는 청중을 다 같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모든 사람들은 다 다른 시간대에 있다. 현재는 현재를 볼 수 있을까?
현재는 볼 수 없다. <지금 이 시간=?>
이것이 바로 空이다. 실체는 없고 자신이 느끼는 것만 있다. 현재란 0.1초 전의 과거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는 영원히 볼 수 없다. 이와 함께 모든 것은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르기 때문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없다. 비교할 수 없다면 독립적인 하나만 있는 유일은 언제나 행복하다. 비교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준을 두고 비교할 때 힘들어진다. 모든 것은 비교될 것이 없고 그것을 아는 자체가 행복인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이 空이다. 우리는 지금 서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과거를 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두 눈이 보는 것도 다르다. 두 눈은 입체감을 만든다. 한 눈으로만 보면 입체감이 훨씬 떨어진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탁구를 잘 못 친다. 양 눈의 시력도 서로 다르다. 유기체는 완전히 같을 수가 없다. 얼굴도 한 면이 잘난 면이 따로 있다. 손금도 다르다. 자연은 모두 완벽한 좌우대칭이 불가능하다. 사람도 좌우가 약간 달라야 정감 있게 느껴지지 완전 대칭이 되면 차갑게 느껴진다. 광고는 이런 점을 이용해서 호소력을 얻는다. 그래서 로고도 약간 비대칭으로 만든다.
한 사물을 봐도 두 눈은 서로 다른 것을 본다. 다르게 보는 이유는 두 눈이 다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과거의 허상을 다르게 보고 있는 것이다. 혹시 공산품은 기계로 찍어내니 다 같지 않을까?
언뜻 보기엔 그렇지만 찍는 시간대가 다르면 조금씩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산품 역시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다. 따라서 전 우주에 똑같은 것은 없다. 그 유일성을 자각한다면 세상에 행복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이것을 존재적 행복이라 한다. 유일신이 행복한 이유는 첫째 유일한 존재이며 둘째 시간적으로 첫번째 존재라는 점 때문이다. 더 재미 있는 점은 자신이 행복한지를 모른다는 점이다.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행복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늙었지만 유일 존재란 점은 변하지 않는다. 젊어도 늙어도 우리는 유일 존재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은 실체가 없지만 현상은 존재한다. 별을 볼 때 우리는 同時的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는 수많은 시간대를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두칠성은 사실 지금 이 시간에 없을 수 있다. 또한 별은 계속 움직이므로 우리는 허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은 언제나 空이고 허상만 실존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묘하게 존재한다고 해서 眞空妙有라 하는 것이다.
眞空妙有 –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절대의 진리. 공에도 유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이렇게 존재하는 것들을 가지고 좋다 나쁘다 하는 생각들을 하며 그 다음 감정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감정들은 불행이 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사실 고통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空과 妙有는 연기관계다. 그러나 실체가 없기 때문에 결국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치 꿈을 깬 사람에겐 꿈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깨달은 자에겐 현실과 윤회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분명히 실재하는 것이다.
개+새+끼
북두칠성이 눈에 대한 이야기라면 개새끼는 소리에 대한 이야기다. 눈과 귀는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이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 했다. 불교는 귀에도 관심이 많다. 耳根圓通 눈은 모든 방향을 다 볼 수 없다. 8/10만 보고 뒤통수는 볼 수 없다. 반면 귀는 모든 방향을 다 들을 수 있다. 벽 뒤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관세음은 모든 소리를 듣고 구제하는 보사이란 뜻이다. 또 귀가 눈보다 더 호소력이 있다는 말도 있다. 죽기 전 맨 마지막까지 남는 감각기관이 귀다. 그래서 눈이 풀려 돌아가신 뒤라도 할 말이 있으면 귀에 대고 이야기하면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티베트 사자의 서를 읽어주는데 이는 인도식의 귀 중심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새+끼는 순차적으로 발음된다. 과거+과거+과거가 연결되어 비속어가 된다. 그런데 지난 과거를 가지고 현재 판단하는 것이 과연 맞는 말일까? 아침 점심 메뉴 기억 나나? 아침이면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과거로 돌아가서 생각할 수 있나?
과거는 한 번 쏜 화살처럼 되돌아갈 수 없다. 아침은 현재 속에 있는 과거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아침은 진짜라고 믿는 것뿐이다. 사실 아침엔 많은 왜곡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선택해서 기억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보면 당신은 어제 살인했다는 주사로 과거를 조작하면 도망 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나 살인은 믿음 속에 존재한 것이지 진실은 아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믿음 속에 존재하는 허상이다.
같이 있다 생각하지 않으면 끄달리지 않는다. 같이 있다 생각하니 자꾸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좋은 면이 많다. 발전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스스로 극복할 정도의 스트레스를 만든다는 점이다. 긍정적 사고야 말로 아편이다. 부정적 사고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만이 발전한다.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치매에 걸린다. 긍정적 사고만 하면 머리 쓸 일이 없다. 머리가 너무 청정해져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치매다.
과거라는 생각들이 나다. 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가 누적된 것이다. 이렇게 테두리를 만들어 놓고 다른 사람들이 공격해 오면 반응하는 것이 나다.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장자에 나오는 짐을 싣거나 사람을 태우지 않은 빈 배인 虛舟 같이 된다. 배가 서로 충돌해서 굉장히 화가 나 나와보니 줄이 풀려 떠내려온 사공이 없는 빈 배라면 누구에게 화를 낼 것인가? .
경전에 보면 부처님을 비방하던 바라문이 있었다. 잔치를 벌였는데 손님이 와서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에게 가나요? 주인이 처리하겠지요. 나는 당신의 욕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이처럼 고정된 내가 있으면 힘들어지지만 내가 허상임을 알면 사는 것이 어렵지 않다. 사실 현재를 직시하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는 탄력성이다. 육체적 탄력도 있지만 정신적 탄력도 있다. 탄력은 정신의 유연성을 말한다. 나이 들수록 정신은 고착화된다. 전철도 가던 길로만 다닌다. 다른 노선이 새로 생겨도 타던 노선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비방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처님은 논리적 층위가 다른 사람이다. 사람은 논리적 층위가 같으면 충돌한다. 부부싸움도 2종류가 있다. 문 닫고 싸우는 집이 있고 문 열고 싸우는 집이 있다. 문 닫고 싸우는 집은 부끄럽게 생각하는 집이고 문 열고 싸우는 집은 누가 맞는지 들어 달라는 것이다.
실체를 정확히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유연한 행동과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다.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나이 들어 사고가 고착화되면 더 경직되고 행복감은 더 떨어진다. 헬스만 운동이 아니다. 기도 명상은 정신적 운동이다. 운동의 핵심은 행복에 있다. 1차로 사람은 몸이 무너지면 행복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성취해도 건강을 잃으면 끝이다.
논리적 층위가 다르면 번뇌는 존재하지만 자유로울 수 있다. 부처님은 나중에 고행도 포기하고 명상도 포기하신다. 수정주의에 대한 포기다. 명상도 제한된 조건 속에서 보면 완전한 것이 아니다. 논리적 층위가 다르다는 말은 물 위에 떠 있는 기름과 같다는 뜻이다. 물을 없애야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어떤 파동의 물에도 떠 있는 기름과 같은 것이 자유로운 것이다. 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바위를 비켜간다. 그렇게 양보하며 바다를 이룬다. 그 바다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다.
三法印은 도장이란 뜻이다. 무상 무아 고를 제대로 인식하여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삼법인이 나오면 불교다. 원래 一切皆苦 諸行無常 諸法無我 涅槃寂靜 해서 四法印이다. 3법인과 4법인은 같은 말이다. 책을 볼 때 앞면을 보면 뒷면을 못 보고 뒷면을 보면 앞면을 못 본다. 객관적으로 보면 두 면이지만 주관적으로 보면 한 면이다. 諸行無常 諸法無我는 필수고 涅槃寂靜이 작동할 때는 一切皆苦가 작동하지 않고 一切皆苦가 작동할 때는 涅槃寂靜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三法印이라 한 것이다. 전체는 사법인이지만 자신이 인식하는 것은 삼법인이다. 그래서 삼법인인 동시에 사법인이 되는 것이다.
無常 항상한 것은 없다. 모든 인식대상은 변한다는 뜻이다. 인생 無常 그러니까 쓸쓸하고 고적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냥 변화하는 것이다. 변화엔 好不好가 있는 것이 아니다. 좋게도 바뀔 수 있고 나쁘게도 바뀔 수 있는 것이 無常이다. 늙는 변화는 슬픈 일이다. 그러나 유일 존재로 늙어가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無我 나는 실체가 없다. 인식 주체도 변한다는 뜻이다. 無常+無我=모든 것은 변한다.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한다. 시체도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 정확한 정보는 하나도 없고 다 변화하는 정보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착각과 선택적 믿음만 내 머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알면 변화의 흐름을 타고갈 수 있다. 그러면 깨닫는다. 깨달음은 고요하다. 涅槃寂靜 열반의 경지는 모든 모순을 초월한 고요하고 청정한 경지다. 유일 존재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그런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다. 번뇌를 불어서 끈 것이 열반이다. 열반은 에너지를 다 소진해 재가 된 장작과 같은 경지다. 인위적으로 억누른 번뇌는 다시 타오른다.
無常과 無我를 알면 깨달아 열반적정이 되는 것이고 모르면 충돌하는 것이다. 부모라는 관계는 불변하지만 관계성은 조금씩 변한다. 세상은 모와 자식도 조금씩 변하면서 서로 맞춰가는 것이다. 자식 나이가 60이 넘었는데도 계속 잔소리를 하면 충돌할 수밖에 없다. 변화의 흐름을 자신이 이끌어갈 수 있으면 열반이라는 고요한 행복이 된다. 잔잔한 호수에 사물이 비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집채만 한 파도가 와도 파도타기처럼 충돌하지 않고 타고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엔 번뇌도 있고 거슬리는 사람도 있지만 삼법인을 아는 사람에게 세상은 거슬림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세상의 변화를 모르고 흐름을 타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계속 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세상사 모든 일이 고통은 아니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은 유한하고 한시적이라 행복이라 말하지 않는다. 진정한 행복이라면 깨지지 않아야 한다. 변화를 인지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삼법인의 핵심이다. 반대로 변화와 충돌하면 결국 모진 세상에 봉착한다.
부처님 당시 불변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유신론자들이다. 지금도 기독교나 이슬람은 변하지 않는 唯一神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중세 교구철학에서 신은 움직이지 않는 제일자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 입장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주장이다. 재미 잇는 점은 三法印 내용 안에는 불교를 믿으라는 내용이 없다. 불교는 이런 원리를 체득하면 붓다와 같은 행복을 증득하고 체득하지 못하면 힘들게 산다는 점만 말할 뿐이다. 이 점이 유신론적 종교와 불교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유신론은 신을 믿으라는 절대적 신앙을 강조한다. 반면 불교는 행복을 얻는 이치와 방법을 말한다. 여기엔 붓다도 필요 없다. 부처님은 이런 원리의 발견자이지 발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21회. 자현스님. 불교의 인증마크 삼법인 중에서
[출처] 965.불교의 인증마크 삼법인|작성자 Ink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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