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확고하면 마음이 편하다
12. 선의 뿌리, 2조 혜가와 3조 승찬
집착하지 않는것이 도의 첩경
이분법에 털끝 하나 오른다면
부처됨은 하늘과 땅처럼 갈려
달마와 2조 혜가대사 문답과 도(道)
선종의 2조 혜가(慧可, 487~593) 대사는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로부터 깨달음을 인가 받고 소림사에서 9년 동안이나 달마대사를 모셨다. 지금도 중국 숭산 소림사에는 달마와 혜가 대사의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선풍보다는 달마대사가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 한 체조가 더 성하다.
소림사 주변에는 무술학교가 수십 개나 되고 전 세계에서 온 청소년 수만 명이 소림 무술을 연마하고 있다. 지금 소림사에는 선의 안목을 갖춘 눈 밝은 선지식이 없다. 중국 불교가 스스로 선종의 탄생지라 자부할지는 몰라도 공산화와 문화혁명 등의 법난으로 선의 전통이 단절되어 버렸다. 21세기 들어 중국 정부가 문화유산 복원과 관광개발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사찰을 복원하고 승려 수십만이 급증하는 등 불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모양이지만, 불교가 제대로 정신문화적인 역할을 하려면 눈 밝은 선지식이 출현하고 선풍이 되살아나야 할 것이다.
선의 안목이란 무엇인가? 여기 유명한 달마와 2조 혜가 대사의 문답으로 살펴보자.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 없이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가히 도에 들어갈 수가 있느니라(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墻壁 可以入道)”
“저는 이미 모든 인연이 다 그쳤습니다.”
“단멸을 이루지 않았느냐?”
“없습니다. 밝고 밝아 어둡지 않으며, 분명하게 깨달아 언제나 알기에 말로는 미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전하는 마음의 본체이니 다시 의심하지 말라.”
달마대사의 유명한 법문이다. 많은 불자들이 “모든 인연을 쉬고 마음을 장벽 같이 해야 도“가 성취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에서 말하는 도는 인연을 쉬고 마음을 담벼락 같이 하는 것이라 인식한다.
그런데 이것은 큰 오해다. 달마대사의 이 법문은 달을 보라는 손가락 법문이다. 마음을 장벽 같이 해야 도에 들어간다는 것이지, 마음을 장벽과 같이 하는 것이 깨달음, 도는 아니다. 달마대사의 이 법문은 깨달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을 말한 것이다.
지금 한국불교에 많은 법사들과 불자들이 ‘인연을 끊고 마음을 장벽같이 하는 도’를 말하고 추구하지 않는지? 이것은 달마대사가 말하는 단멸(斷滅)일뿐이다. 불교는 세속의 욕망이나 집착을 떠남을 말하지만, 세속의 단절과 소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단절은 불교의 중도가 아니라 외도(外道)이다.
요즘 깨달았다고 공부를 끝마쳤다고 말하는 법사들을 가끔 본다. 깨달았다고 말하는 분들은 ‘비우고 내려놓고 고요하여 아무것도 없다’는 단멸을 도, 깨달음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분들이 말하는 도, 깨달음은 달마대사가 말하는 도에 들어가는 방편을 도라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달마대사의 달을 보라는 손가락을 달로 착각하여 깨쳤다 하고 남도 그렇게 안내한다면 외도가 외도의 길을 옳다고 가르치는 격이니 속지 말아야 한다.
지금 시중에 달마대사 법어집이라 소개되고 있는 선어록들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달마대사의 행장에 대한 기록이 정확히 남아있지 않다. 이것은 ‘마구니말’이라 배척받아 독살되었다는 것이 정설인 선종 초기 사정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바가 아니나 아쉽기 그지없다. 이런 사정에 비춰볼 때 달마대사 법어집이 온전히 남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선종 역사서나 선문에 달마어록집은 온전하게 전하지 않는다. 지금 시중에 나오는 달마어록은 거의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조 혜가대사의 전법과 열반
2조 혜가대사의 문하에 한 거사가 오랫동안 법문을 듣고 있었다. 그에게는 큰 병이 있었는데, 선종의 역사서 〈조당집〉에는 ‘풍질(風疾)’, 알려지기로는 나병(문둥병)이라 한다. 이 불치병으로 거사는 평생 괴로워했는데, 전생에 지은 죄의 업보라 생각했다. 그러다 법문을 듣고는 용기를 내어 혜가대사를 찾아가 이렇게 청한다.
“제자는 불치병을 앓고 있으니 제 죄를 참회케 하여 주십시오.”
“네 죄를 가지고 오너라. 죄를 참회해 주겠다.”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의 죄는 참회가 끝났다. 그대는 그저 불ㆍ법ㆍ승 삼보에 의지하기만 하라.”
이말 끝에 불치병을 앓고 있던 거사는 언하대오 한다. 이조는 그를 인가하고 출가케 하고는 ‘그대는 승보(僧寶)이니 승찬(僧璨)’이라 이름하였다.
선종의 3조 승찬대사는 바로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세상에 등장한다. 그는 평생 불치병으로 마음 고생을 하며 살았는데,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혜가대사를 만나 법문을 듣고 용기를 내어 찾아가 참회를 청하다 문답 끝에 확철대오하였다. ‘내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나도 있고, 병도 있고, 전생도 죄도 있다고 양변에 집착하여 괴롭게 살았는데, ‘나’라고 할 것이 없는 무아를 깨치니 나도 병도 전생도 죄도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부처님처럼 온갖 속박에서 해탈하여 영원한 대자유인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 조사도 부처님처럼 무아, 무상을 깨친 것이지 무슨 특별한 도를 깨친 것이 아니다.
선종 역사서에는 불치병을 앓았던 승찬대사는 무아를 깨치고 출가하여 3대 조사가 된 뒤에 자연스럽게 그 병도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부처님의 무아 공 도리는 이와 같이 전생과 금생의 죄와 병의 고통에서 해탈의 길을 제시한 것이고, 승찬대사는 불치병을 앓던 거사의 몸이었으나 그 가르침대로 깨치고 대자유인이 된 것이다.
이렇게 승찬대사의 깨달음을 인가하고 전법한 뒤 2조 혜가대사는 “업도(당시 수도)로 가서 묵은 빚을 갚겠다”며 34년 동안이나 일정한 사찰 없이 인연 따라 저자거리를 떠돌며 중생을 교화했다. 어느 때 변화(辯和)법사가 업도 광구사에서 〈열반경〉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혜가대사가 나타나 법을 설하니 강의 듣는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갔다. 이에 법사가 불만을 품고 고을 현령에게 “저 사견을 가진 사람이 나의 강석을 어지럽혔소”하고 고하니, 현령은 사람을 시켜 혜가대사를 시해했다. 이때 2조 혜가대사의 나이 107세였고 수나라시대였다.
불치병 환자가 3조되어 〈신심명〉 설하다
삼조 승찬(僧璨, ?~606)대사는 〈신심명(信心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심명〉은 부처님이 중도를 깨치고 설한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4언절구 584자로 잘 집약해 놓아 불교에 믿음을 내어 발심하고 깨달음까지 수행하는데 고준한 지침이 된다. 또한 선어록 중 아름다운 문장으로 선의 종지를 잘 드러내어 선을 공부하는 이에게는 필독서이다. 〈신심명〉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단지 간택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이 깨달아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한 중도는 어렵지 않다. 단지 차별 없이 미움과 사랑의 양변을 떠나면 통연히 명백하다. 도는 본래 쉽다. 단지 ‘어렵다-쉽다’, ‘안다-모른다’ 하는 양변에 집착하지만 않으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은 무아 공을 깨달아 삶과 죽음도 해탈한 것이다. 우리도 부처나 조사 스님처럼 연기, 무아로 보고 행하면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된다. 그런데 어째서 그러지 못하고 생사의 괴로움을 받고 사는가? ‘나’라고 할 것이 본래 없는데 ‘나’와 ‘나의 것’이 있다고 착각에 빠져 집착하고 있으니 병들고 나이 들고 죽는 괴로움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머리털만큼이라도 내가 있다는 착각에 빠지면 하늘과 땅처럼 벌어져 영원히 해탈할 수가 없다. 중생이 본래 부처인데 중생과 부처를 다르다는 이분법에 털끝만큼이라도 집착하면 중생이 부처되는 것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 벌어진다.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으리라.”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 스스로 중생이라 착각에 빠져 중생이니 부처니 시비하면 괴로움이 일어난다. 소승이니 대승이니, 초기경전이니 대승경전이니, 간화선이니 위빠사나니, 참선이니 염불이니 시비하면 갈등하고 괴로움이 일어난다. 빈부와 좌우, 남녀, 여야, 남북도 마찬가지다. 양극단에 집착하여 시비하면 대립과 갈등을 멈출 수 없고 평화와 행복은 요원하다. 양극단을 떠나되 아우르는 중도 지혜를 밝혀야 괴로움에서 행복으로 바뀔 수 있다.
“믿는 마음은 둘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중생이 본래 부처라 믿는 마음, 부처님이 깨친 마음과 나의 마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믿음, 신심이 돈독할수록 내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는 믿음도 확고해진다. 부처님과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이 확고할수록 흔들림도 줄어 수행도 잘되고 마음도 가볍고 편안해진다. 초발심이 그대로 정각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선의 3조 승찬대사의 〈신심명〉은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부처님이나 조사 선이나 중도를 근본으로 하는 것이다.
▶ 한줄 요약
무아로 보고 행하면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된다.
[출처] 2조 혜가와 3조 승찬|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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