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중생과 부처가 모두 눈송이 속에 핀 꽃이로다.

수선님 2021. 8. 15. 12:57

正信希有分 과연 참된 믿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장로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들이 이런 가르침을 듣고 참된 믿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500년 뒤에도 부처님 말씀대로 아름답게 계를 지키며 복을 짓고 사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에 믿는 마음을 내리니 이로써 부처님의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전생에 부처님 한 분 두 분 세 분 네 분 다섯 분에게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께 온갖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와 같은 가르침을 듣고 한 생각에 맑고 깨끗한 믿음을 낼 것이다.

 

무쇠 부처님은 시뻘건 용광로에서 녹아 버리고 나무 부처님은 불길 속에서 까만 재가 되며 진흙 부처님은 물속에서 뭉그러지는구나.

이 구절은 원래 조주스님이 하신 말씀이다. 무쇠 나무 진흙 부처님은 참다운 부처님들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면 참다운 부처는 이 세상 어디에서 볼 것이냐? 緣起 현상을 바로 보는 것이 正見이다. 연기를 바로 보면 거기에서 中道가 나온다.

금강경은 如是我聞으로 시작해서 應作如是觀으로 끝난다. 부처님의 진리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법도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으로 봐야 한다. 진리도 집착하면 中道 정견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금가루가 좋아도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 법상과 비법상 색신과 법신 색과 공 어느 쪽이든 집착하면 병이 된다. 不二法을 말하고 있다. 형상이 있는 부처님은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는 줄 알고 수행하면 집착 없는 無爲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무쇠불 토불 목불 그대로 나의 自性佛과 둘이 아닌 하나가 되므로 진불이 된다. 일체 모든 형상은 자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空에서 有가 나오고 유가 공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일어난 모든 번뇌망상까지 그대로 자성의 반야지혜가 된다. 목불은 불 위를 못 지나가는데 무슨 영험이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연기를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진불 가불 진리 거짓은 어디서 나왔나? 이것도 다 나의 자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自性이란 개체가 또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자성이나 불성이나 다 연기 현상이다. 연기로 보면 쇠불도 木佛도 土佛도 내 자성도 다 진불이다. 내가 진불로 보면 전체가 진불인 것이다.

 

법문을 자주 듣는 사람은 소견이 넓어지고 법에 대한 이치를 조금이라도 알아 불교적 사고를 가지고 일상을 살려고 노력한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항상 시비에 얽히고 남에게 상처를 준다. 불법도 먼저 이해가 가야 믿음도 가고 믿음이 가야 실천도 하고 증득도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서운하게 했다고 평생 안 보거나 좋다고 붙는 것이 다 단견에 빠진 모습들이다. 중생은 중생이 아니고 착각으로 인한 중생이다. 그러니 번뇌망상도 그냥 이름이고 목불 토불도 그냥 이름일 뿐 관조해 보는 나의 自性佛과 色身佛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형상불에 나의 자성을 비추어 보면 진리 그대로 광명이 되어 돌아온다. 형상불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단견에 빠지면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온다. 형상불과 나는 둘이 아니다. 그래서 황벽스님은 견성하고 나서도 계속 법당의 부처님께 절을 많이 하셨다. 연기에 통달한 사람은 전체를 한 모습으로 보기 때문에 둘로 나누지 않는다. 믿음은 참 중요하다. 화엄경에도 믿음이 근본이라 했다. 어린 사미승이 노승의 머리를 때리며 너는 아라한을 증득했노라며 장난을 치니 노승은 공손히 합장을 하자 진짜 아라한을 증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황벽희운<?~850> – 중국 당 후기의 선승. 임제 의현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황벽산에서 출가 강서에서 백장회해의 법을 이었다. 배휴가 집대성한 전심법요는 禪어록의 대표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500년 뒤는 금강경을 말한 것이다. 후 500세는 500년을 5등분한다.   

1.解脫堅固 –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첫 500세 부처의 정법이 성하여 해탈하는 사람이 많은 시기

2.禪定堅固 – 500년의 2번째 시기. 선정을 닦는 이가 많아 불법이 계속되는 시기.

3.多聞堅固 – 불멸 후 3번째 500년 불경을 독송하고 학습하는 사람이 많은 시기.

4.塔寺堅固 – 많은 절들이 지어지고 많은 탑들이 세워진 시기.

5.鬪諍堅固 - 500년의 5번째 시기. 수행승들이 자기 주장만 옳다고 싸워 불법이 자취를 감추는 시기

 

금강경이 대승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어떤 공부를 해도 믿음이 안 서면 안 된다. 한 노승이 어제 밤 꿈에 오래 전 돌아가신 부모님이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계시는 모습을 봤는데 내가 큰 죄를 지은 것 같다. 평소 부친이 술과 고기를 좋아하셨으니 사다 천도제를 지내도록 장을 봐 오라고 시켰다. 천도제가 끝나고 술과 고기를 버리지 않고 먹자 평소 노스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스님을 짝퉁스님으로 보고 모두 떠났다. 그러나 노스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한 사람들은 술이든 고기든 개의치 않고 스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법화경 방편품에 보면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들이 아라한과를 얻었는데 또 법화경을 설하신다고 한다며 떠나자 부처님은 붙잡지 않고 믿음이 약해서 그런 것이니 떠나게 두라고 말씀하신다. 눈 뜨고 귀신 본다는 말은 자기가 만든 망상에 속아 족쇄를 찬 사람들을 말한다.

 

세 부처님의 형상들은 모두가 다 거짓이라 무쇠 나무 진흙 부처 내 눈앞에 있는 사람. 자기 집안 값진 보배 믿을 수만 있다면야 우는 새와 산에 핀 꽃 모두가 봄이로다.  

다 한 모습이다. 이렇게 구구절절 풀어주지 않으면 중생들은 단견에 빠진다. 마조스님이 어느 날 3명의 제자를 데리고 달 구경을 갔다. 지금 이러한 때 경지가 어떠한가? 서당이 말했다. 공양 베풀기 참 좋은 때입니다. 백장도 말했다. 수행하기 참 좋은 때 같습니다. 그러나 남전스님은 소매만 툭툭 털고 말없이 돌아가 버렸다.

등신불이든 색신불이든 이대로 참된 자성불이란 뜻이다. 수행은 선정을 말한다. 한 사람은 色三昧 한 사람은 空三昧를 말하고 있다. 색삼매 속에 그대로 공삼매가 바탕이 되어 있고 공삼매 속에 그대로 색삼매가 바탕이 되어 있다. 공삼매가 그대로 색삼매와 함께 하고 있다. 그런데 색삼매니 공삼매니 중도니 정견이니 다 군더더기 소리라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물을 보면 발가벗고 바로 들어간다. 조작을  부리지 말라는 소리다. 새와 꽃은 모두 봄 속에서 만들어진 일이다. 

 

수보리야! 여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다 보시니 이 가르침을 믿는 중생들은 헤아릴 수 없는 무량복덕을 얻게 될 것이다.

 

오이씨를 심으면 오이를 딸 것이고 과일씨를 심으면 과일을 딸 것이다.

善因善果 惡因惡果 인과법문이 아니다. 원력이 작으면 자신도 제도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 업식과 분별식에 걸려 매몰되기 때문이다. 연기현상을 잘 알고 자신을 관조하는 사람은 善因善果 惡因惡果를 벗어난 대자유인의 向上一路를 얻는다. 인과를 벗어난 경지에서 나오는 말이다. 금강경은 이를 無住心이라 말하고 선가는 이를 無心 또는 平常心이라 말한다. 찰나찰나 無心이 이뤄져 善因善果 惡因惡果의 틀에 매이지 않는다.

 

한 분 두 분 천만 분의 부처님께서 모두 각각 눈이 길쭉 코가 반듯해 옛날부터 좋은 마음 닦아오더니 이제야 결실의 힘 얻게 되었네. 수보리여 수보리여! 옷을 입고 밥 먹는 일 평범한 생활 어찌하여 별스럽게 의심을 하오.

마음 밖에 어떤 법이 있다면 心法이 아니다. 모든 것은 다 본래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無生法忍이다. 남이 없는 법의 이치를 알았다는 뜻이다. 왜 남이 없을까? 본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있어 쓰니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뭐라 정할 수 없다. 대자유인이다. 허공을 나는 기러기는 동쪽 서쪽 분별심이 없다. 바람을 타고 그냥 난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써야 한다. 조그만 일에 이빨 갈아본 들 자신만 괴로울 뿐이다.

 

무착은 대승 세친은 소승을 수행했다. 형인 무착<아상가>은 세친<바수반두>을 대승으로 들게 하기 위해 많은 애를 섰다. 그렇게 해서 언제 성불하겠나? 무슨 공부를 하기에 그러십니까? 우리 스님은 일종식에 예불만 6번에 눕지도 않고 항상 장좌불와 하십니다. 나는 도를 구하지 않지만 전도망상은 일으키지 않고 항상 앉아 있지는 않지만 생활에 게으르지 않고 하루 3끼를 다 먹지만 식탐이 없다. 이 말에 바수반두 존자는 그 자리에서 깨쳤다.

 

지극한 도는 오롯하니 허공과 같아 부족한 것 넘치는 것 전혀 없노라.

무엇 때문이겠느냐? 이들 모든 중생은 다시는 나라는 모습 남이라는 모습 나와 남들이 어울려 생겨나는 우리 중생이라는 모습 또는 이들 모두의 생명이 영원할 것이라는 모습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며

4相은 모두 실체가 없는 허상으로 空한 것이다. 부족한 것도 없고 넘치는 것도 없다. 실체 없는 空을 믿으라는 소리다. 어느 화가가 장난 삼아 귀신그림을 그려놓고 나가 놀다 돌아와 방안에 있는 귀신을 보고 놀라는 형국이다. 상견에 집착하면 법상이고 단견에 집착하면 비법상이다. 모두 다 내가 그린 귀신그림과 똑같다. 내가 만들어 놓고 내가 속는 것이다. 내가 일으킨 분별심과 미움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자신을 괴롭히며 중생으로 살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14회. 설우스님. 중생과 부처가 모두 눈송이 속에 핀 꽃이로다 중에서

 

 

 

 

 

 

 

[출처] 819.중생과 부처가 모두 눈송이 속에 핀 꽃이로다|작성자 Inkf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