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을 찾아서] 문수사 주지 혜정 스님(도선사 조실, 원로의원)
“칭찬과 비방에 움직임이 없어야 참된 인욕”
동쪽으로 보현봉, 서쪽으로 비봉이 절을 감싼 아름다운 경관. 저 멀리 남쪽으로 한강을 지나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삼각산 문수봉(715m) 아래 둥지를 튼 문수사. 1109년(고려 예종 4년)에 탄연(坦然) 스님이 창건한 천년고찰 문수사는 오대산 문수사, 고성 문수사와 함께 우리나라 문수보살의 3대 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기도성지로 더욱 명성이 난 일화로는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 장로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어머니가 이 절에서 백일기도를 한 뒤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명성황후가 봉안한 대웅전 문수보살좌상과 영친왕 이은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봉안한 석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는 것도 영험한 기도처임을 보여준다. 게다가 조계종의 중흥조인 태고보우 국사가 이 절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실은 문수사가 문수보살의 지혜를 잉태하는 보리도량임을 웅변한다.
사시사철 참배객과 등산객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문수사는 27년 전까지만 해도 개인 소유의 암자로 퇴락한 곳이었다. 무너져 가던 문수사를 인수해 조계종 공찰로 등록한 이가 바로 혜정 스님이다. 문수사 주지 소임을 맡은 이후 스님이 중창불사를 하며 들인 불사금만 해도 40억여 원에 달한다. 홀로 공부하고 포교하며 불사한 지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세월이 흐른 지금, 문수사는 전통사찰로 지정되었고 2800여 평에 달하는 전통사찰보전지역도 확보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혜정 스님이 혼자 힘으로 묵묵히 일하고 정진하며 가람수호와 포교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선(禪)과 교(敎)를 깊고 넓게 공부한 공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대시교(一代時敎)와 선어록을 두루 연구하고 제방선원과 태국, 일본의 선원에서 참선한 실참이력이 어떤 상황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과 지혜를 갖추는 밑거름이 되었다.
선교에 막힘 없이 공부한 혜정 스님은 다양한 수행법을 직접 체험해 보고 당신에게 맞는 방편을 택해 평생 일과 수행, 포교를 겸전하며 정진해 왔다. 세상살이에 쉴 틈이 없는 불자들에게 스님은 어떤 수행방편을 권할까?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에도 삼각산을 오르내리며 포교와 불사 일정으로 바쁜 혜정 스님을 어렵게 뵙고 질문을 드렸다. 곧바로 자상하고도 명쾌한 답이 돌아온다.
“모든 수행법은 방편이 다르고 빠르고 느린 차이가 있지만 깨달음이란 귀결처는 하나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데 KTX나 버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러 방법이 있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간화선의 경우 화두는 1700 공안에 달할 정도로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화두를 선택해 꾸준히 해나가면 됩니다. 저는 하나의 주력(呪力)을 선택해 부지런히 염하면서 ‘주력하는 이것이 무엇인고?’하는 방편을 추천합니다. 예를 들어 ‘옴마니반메훔’ 주력을 할 경우 ‘옴마니반메훔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이뭣고?’ 하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출가와 재가의 모든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덕목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구도자는 원력, 참회, 정진 이 세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영명연수 선사의 <종경록(宗鏡錄)>에는 ‘말세 중생은 참회정진을 해야 수행이 잘 된다’고 하셨습니다. 절을 많이 하신 연수 선사는 모든 중생이 함께 성불하자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 절 한다’고 하셨지요. 입과 더불어 마음으로 참회하며 참된 부처님 정신으로 사회, 국가, 인류 모두 행복을 느끼도록 원력을 세워야 합니다. 이북 사람들은 물론 기독교와 같은 이교도인들도 잘 되도록 발원하는 것이 참된 원력입니다.”
최근 국민의 우려를 사고 있는 구제역 파동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재앙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게 중요합니다. 100살이 넘은 의사가 TV에 나와서 ‘욕심을 내면 스트레스가 생기고 피가 흐려져 혈관이 막혀 많은 병이 생긴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듯이 평소 욕심을 줄여 마음을 청정히 하고 육식 대신 채식(菜食)을 하되, 적게 먹으며 많이 걷는 것이 좋습니다. 육식을 하면 사나워지지만, 채식을 하면 정신과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이 깨끗해져 복과 운이 저절로 들어옵니다. 맑고 좋은 생각을 하게 되면 우주의 청정한 기(氣)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밥, 물, 에너지, 공기를 비롯한 자연과 우리는 동체(同體)입니다. 우주법계와 우리는 한몸이라서 나 혼자 잘 살 수는 없어요. 불교계가 4대강 공사를 반대하고 생태계 보전을 주장하는 것도 생명과 문화재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는 것이 바로 나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지요.”
요즘도 교도소는 물론 가톨릭수도원, 사회단체 등 종교와 계층을 초월한 사람들에게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는 혜정 스님의 포교 원력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세계불교도대회에 다녀 온 은사 청담 스님이 영어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영어를 공부해 국제포교사가 되었으며, 이후 태국과 일본에서 공부하며 불교교류에도 일조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노구에도 15년째 매달 서울구치소 재소자들을 위해 법문하며 전국 사찰의 법문 요청도 마다 하지 않는다. 혜정 스님은 정치인이나 공무원, 군인, 학생을 비롯해 각계 각층의 많은 사람들을 불법의 대해로 이끌었지만, 무엇 보다 재소자 교화를 하면서 더욱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하셨다.
“정부에서 10여 년 전에 재소자 교화의 공로를 인정해 훈장을 주려했는데, 사양한 적이 있습니다. 수행자가 명예와 이익을 위해 포교 하는 건 아니니까요.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설법을 담은 <법화경>의 핵심인 ‘관세음보살품’ 즉, <관음경>을 평소에 좋아해서 ‘관세음보살 발원문’을 지은 적이 있는데, 사형수가 감형을 받아 출소한 뒤 작곡가가 되어 발원문 가사에 맞춰 작곡을 해서 노래로 만들어 보급한 적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남녀의 모습을 떠난 우주 실상(實相)의 참모습을 뜻하는데, 중생이 염원하면 모든 몸을 나퉈 자비행을 하십니다. 재소자 교화를 통해 중생의 마음 속에 간직된 불성이 조금도 물들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수행과 보살행이 차별 없는 구도행이라고 한다면, 일정 시간을 정해 정진하기 어려운 재가자들은 생활 속에서 보살행을 실천하는 구도행에 중점을 둘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보살의 바라밀행도 지혜가 없다면 복 짓는 선업(善業)에 머물 가능성도 적지 않다. 혜정 스님은 깨달음을 향한 보살행을 구체적인 일상과 결부시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지혜와 복을 함께 닦아[福慧雙修]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에게 베풀려면 뭔가 있어야 하기에 무소유(無所有)의 개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참된 무소유는 아무 것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는 하되 모든 이와 함께 나누라는 뜻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 오히려 가족이나 이웃에게 피해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걸인에게 무엇을 줄 때도 물건을 함부로 주지 말고, 반드시 곱고 따뜻한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는 사람이 겸손하고 정성을 다하면 받는 사람도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가들은 기업을 소유관념에서 관리개념으로 바꿔 사회와 국가와 더불어 발전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형과 함께 문경 봉암사에 놀러갔다가 성철 스님을 뵙고 출가했다는 혜정 스님. 지혜와 복을 함께 닦는 구도자의 길로 들어서려면 틀림 없이 남모르는 선근(善根)이 있었을 터이다. 당대의 선지식을 너무나도 쉽게 만난 출가 인연이 궁금해졌다.
“그때 봉암사에서 성철 스님을 뵙고 장삼이란 옷을 처음 보았습니다. ‘이런 옷을 입고 무엇을 하는 걸까?’ 이런 의문이 들면서 형언키 어려운 희열을 느꼈지요. 평생 못 느낀 감정과 성철 큰스님 같은 분을 뵙고 환희심에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성철 스님과의 인연을 계기로 혜정 스님은 청담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한 후, 제방의 여러 선지식들을 모시고 참선 공부를 하게 된다. 기라성 같은 고승대덕을 가까이서 모시고 공부하는 기회를 가진 것만 보아도 이미 공부의 절반은 이룬 셈. 혜정 스님이 가까이서 뵌 큰스님들은 과연 어떤 느낌이었을까.
“한암 스님은 수행자들과 함께 일상을 같이한 분이셨습니다. 늘 대중과 함께 빗자루를 들고 청소도 하시고, 흐르는 물도 아껴 쓰라고 당부하셨지요. 성철 스님은 아는 것이 많아서 무척 해박하셨습니다. 하지만 ‘팔만 장경을 거꾸로 외워도 생사를 초월하는 일에는 소용 없다'고 하셨지요. 서옹 스님은 늘 자상하시고 모든 면에 관찰력이 뛰어나셨고, <임제록> 특강 하시는 걸 좋아하셨지요. 운허 스님은 바다 처럼 포용력이 큰 분이셨고, 운허 스님과 경봉 스님께 강(講)을 받아 내가 나름의 안목을 갖추게 된 것 같습니다. 도인(道人)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그분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상하게 볼 것도 없고 오로지 법(法)의 잣대로 살펴야 합니다. 겉으로 본 단견과 편견으로 평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철 스님의 절친(切親)이자 은사인 청담 스님의 가르침 역시 묻지 않을 수 없다.
“큰스님은 6바라밀과 인욕, 하심 공부와 포교의 원력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늘 자상하셔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가리지 않고 한 사람이건 백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법문하시는 걸 좋아하셨는데, 한번은 건강이 걱정 되어 이런 말씀을 올렸습니다.
‘법문 듣는 사람의 근기를 보면서 차별을 두고 설법하는 것이 옳은 방편 아닙니까?’
‘니가 보기엔 사람의 근기에 차별이 있어 보이겠지만, 내가 보긴 다 똑같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입을 다문 적이 있습니다.”
‘인욕(忍辱)보살’로 유명한 청담 스님의 제자 답게 인욕과 하심이 몸과 마음에 배인 혜정 스님. 스님이 배우고 실천해 온 ‘인욕’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인내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세속에서 생각하는 인내와 참된 인욕은 좀 다릅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났을 때, 감정을 참는 건 인욕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나를 완전히 잊고 마음 자체에 움직임이 없어야 참된 인욕입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 칭찬과 비방에도 흔들림이 없어야지요. <금강경>에서도 부처님께서 팔 다리가 잘리는 고통에서 무심하셨듯이, 참된 인욕은 성불한 경지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입에 올리는 ‘인욕’ 하나도 실답게 실천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하물려 팔만 장경에 등장하는 무수한 법문들을 삶속에 실현한다는 것을 말해서 무엇하랴. 하지만 이론은 방대할지언정 실천은 오히려 간단할 지 모른다. 독자들에게 주는 혜정 스님의 당부 속에 골자가 들어있었다.
“흘러가는 시간은 회복이 불가하니 함부로 살아선 안됩니다. 하루, 한 시간을 살아도 참되게 살아야지요. 생명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가치 있게 살아가는 것이 보살정신 아니겠습니까. ‘도인은 못될지언정 부처님이 보여주신 깨달음의 길에서 절대 이탈하진 말아야지’하는 마음가짐으로 쉬지 말고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혜정 스님은 노구를 이끌고 삼각산과 저잣거리 사이에서 참다운 삶을 몸으로 보여줄 것이다. 평범 속의 비범은 한결같은 마음과 오롯한 실천에 있음을 문수굴 안의 문수보살이 일러주는 것만 같다. ‘날마다 산등성이를 다니면서 산을 찾지 말라.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을 묻지 말지어다.’ 용과 뱀이 섞여 있는 마을에서 용으로 살 것인가, 뱀으로 살 것인가? 하하하!
■ 혜정 스님은
1931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48년 문경 봉암사에서 청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종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60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해인사 승가대학을 마치고 중앙종회의원, 국제포교사, 동화사 주지 등을 역임한 스님은 2007년 원로의원에 선출됐다. 27년간 문수사 주지 소임을 맡아 중창한 스님은 가람 수호와 함께 수행과 포교를 한결같이 실천해 왔다. 현재 도선사 조실, 문수사 주지로서 15년간 서울구치소 재소자를 교화하고 북한산을 찾는 등산객에게 무료로 점심을 제공하고 설법하며 후학을 인도하고 있다.
[출처: 현대불교 201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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