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

불교용어해설 (공(空)-공(空)과 제로(0))

수선님 2021. 10. 3. 12:37

불교용어해설(공(空)-공(空)과 제로(0))

 

 공(空, 산스크리트어 sunya, sunyata) : ‘공(空)’의 산스크리트어 원어 ‘sunya’는 형용사로서 속이 텅 빈, 부풀어 오른, 공허한 등의 뜻을 가졌고, 명사 ‘sunyata’라는 공한 것, 공성(空性), 영(零)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공이란 텅 비어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절대적 무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존재는 있으되, 그것이 결정되거나 특별한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허공은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고 허공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지된다. 이 말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자니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당나라시대 현장(玄?) 법사가 처음으로 빌 공(空)자로 번역했다.

그런데 이 ‘공(空)’이라는 글자가 산스크리트 원어 ‘sunya, sunyata’의 참뜻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따라서 ‘空(공)’이라는 한자에 너무 집착하면 원래 의미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불교에 있어서 ‘공(空)’의 개념은 특수하다. 공사상(空思想)은 초기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연기설(緣起說)의 일차적 변신이요, 재해석으로서 붓다의 기본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힌 대승불교 핵심사상이다. 따라서 공사상은 대승불교를 사상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철학사상이라 단언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초기불교의 「무상, 고, 무아」라는 가르침이 대승에서는 공으로 발전한 것이다.

공은 말이나 관념에 의한 고정화를 일체 배제하는 구실을 가지고 있고, 사물에 대한 고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곧 중도(中道)의 생각에 이어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한 존재론적 또는 인식론적 무(無)의 관념과는 구별된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말을 부정한다. 그리고 공은 인연(因緣)에 대한 해석이다. 인연으로 인해 태어난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는 말로서,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모든 고정된 속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은 단순히 소극적인 허무가 아니라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 무애자재(無?自在)하는 존재방식을 시사하고 있다. 일종의 초월의 경지이다.

「공은 실체가 없다는 말이지 아무것도 없다거나 텅 빈 허공과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도 명쾌하게 밝히고 있듯이 공은 오온을 그 토대로 한다. 그래서 조견오온개공이라 했다.」- 각묵 스님

이러한 공사상을 정립한 사람이 용수(龍樹, 나가르주나/Nagarjuna, 150?-250?)이다. 불멸 후 100여년이 지나자 교리의 해석문제로 의견충돌이 일어나서 점차 교파가 분열되기 시작함으로써 부파불교시대가 시작됐다. 그리고 소위 부파불교시대의 특징인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교학이 등장해 번쇄한 논장이 무성하게 발전했고, 윤회에 있어서는 중심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겼다.

그에 따라 불멸 후 300년경에 이르자 초기불교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었던 무아론(無我論)은 차츰 세력을 잃어가는 한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법체설(法體說)을 주장하고, 독자부(犢子部)에선 생사 윤회하는 개개 존재의 인격주체로서 개아(個我, 人相,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했다.

이러한 부파불교 아비달마교학의 잘못된 교의에 반기를 든 사람이 대승불교 중관학파의 개조 용수(龍樹)였다. 그는 명저 ❮중론(中論, Madhyamaka-Sastra)❯을 통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반야경❯ 계통 공(空)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켜 부파불교의 법체설이나 개아설을 뒤집었다. 용수는 법체(法體)나 개아(個我), 개체(個體), 이런 말들은 모두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브라만의 아트만(atman-我體)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공격하면서 연기의 인연관계를 떠나서 자성(自性)이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에 「무자성(無自性) - 공(空)」이라 주장했다. 곧 공이란 자성(自性)이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공(空)은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의 법체설과 독자부의 개아설 등 유아론(有我論)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다. 즉, 부파불교에서 주장한 체성(體性)을 공격하기 위해 공(空)이란 말을 썼고, 체성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 dravya), 자아(自我, atman)’ 등과 같이 개개 인간의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공이란 말을 썼다.

용수의 공사상(空思想)을 기반으로 해 새로운 경전을 결집한 대승불교는 그 후 ‘유식(唯識)’과 ‘여래장(如來藏)’ 사상으로 발전했다. 이들에 의해 형성된 경전에서 공(空)이란 참마음(眞心), 여래장(如來藏) 혹은 불성(佛性), 이(理) 등의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공사상을 성립시킨 ❮중론(中論)❯이 주로 법의 고찰을 추구한 것과 달리 유식학 등 새로운 사상들은 공사상에 입각해 마음의 본질에 대한 규명에 중점을 두었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여래장사상과 마음의 현실적 기능분석에 중점을 둔 유식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여래장사상이고, 유식설이 아무리 뛰어난 논설이라고 해도, 공의 개념을 이론으로 이해하려 들면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불교는 원칙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의 ‘공(空)’은 알음알이로 이해하려 들면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공은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이며, 초월이고, 체득해야 하는 깨달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공을 알면 불교를 다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평생 공을 알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모르고 간 사람이 더 많다. 이론적으로 문자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바탕으로 하되 치열하고도 기나긴 수행 끝에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고 하니, 더 이상의 것을 알려면 수행을 통한 깨달음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언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 깨달음으로만 닿을 수 있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 혹은 중도(中道) 같은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할 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 그리고 내가 참고로 할 수 있는 책, 자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체계들을 동원해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예컨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연구하고 개발한 과학적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경지이다. 지금 ‘공(空)’이란 주제로 설명하고 있는 이 글도 엇비슷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공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공을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말 큰 사전에 있는 단어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이다. 때문에 불교에서 ‘깨쳐라’고 하는 말을 자꾸 하는 것이다. 깨쳐야 이해할 수 있는 경계이다. 아니면, 최소한도 지금까지의 지식체계를 다 버리고, 부처님 가르침인 또 다른 세계를 상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범부는 그래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문자로 어느 정도 알아야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게 중생들 속성이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게 되는 것인데, 역시 범부들의 중생다운 행위에 한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

공(空)의 또 다른 측면을 보자.

공이란 곧 평등(平等)을 말한다. 인간에게는 남자ㆍ여자, 착하다ㆍ악하다, 부자다ㆍ가난하다, 미남ㆍ추남, 늙은이ㆍ젊은이 등 여러 가지 분별이 있다. 그렇지마는 다른 한편으로는 위와 같은 분별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모두 인간이라고 하는 특징이다. 마찬가지로 일체사물은 가지가지로 변해가지마는 그 변해가는 것 가운데 일관(一貫)되게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즉, 변한다고 하면서도 그 변하는 과정에 어떤 순서[준거(準據)] 같은 것이 있다. 예컨대 봄(春) 다음에 반드시 여름(夏)이 오고, 여름 다음에는 가을(秋)이 온다. 이어서 겨울(冬)이 온다. 이런 순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변화 가운데에도 일관되게 변하지 않는 ― 큰 것을 포착하는 것이 공을 아는 길이 된다. 공은 초월이기 때문이다. 색(색)은 유한한 무엇인가를 말하고, 공은 무한한 무엇인가를 일컫는다.

공이라는 것은 차별이나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무차멸(無差別), 곧 평등한 무엇인가를 잡는 것을 말한다. 흔히 공(空)하다고 하니까, 모든 것이 다 허무, 허망하다며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도 있다. 영민하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정말 공(空)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천지간의 만물은 모두 다 각각 다르다. 인간도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다른 사물, 인간을 떠나서 도(道)를 구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차별 있는 사물, 인생을 떠나지 않고, 그 차별 있는 사물, 인생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그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평등한 이치를 포착하는 것이다. 결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차별 가운데서 평등한 이치를 잘 감별한 이가 혜명 수보리(慧命須菩提) 존자였다. 그래서 공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해서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칭했다.

공을 어떤 분들은 무(無)라고 해석하고, 어떤 분들은 수학에서 말하는 제로(0)라고 주장하는데, 공이라고 하는 말은 무(無)도 아니고, 제로(0)의 개념도 아니다. 공(空)과 무(無)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 없다(無)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가지가지로 변해가는 것을 떠나지 않고, 그 가운데에 일관(一貫)되게 들어있는 평등ㆍ무차별의 이치(理致)조차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空)하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실체가 없어서 모양이나 형태가 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다만 무(無)는 공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무(無)와 공(空)의 의미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무(無)는 ‘존재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다. 다만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다는 말이다. 공은 말이나 관념에 의한 고정화를 일체 배제하는 구실을 가지고 있고, 사물에 대한 고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일, 곧 중도(中道)의 생각에 이어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한 존재론적 또는 인식론적 무(無)의 관념과는 구별된다.

공을 설명함에 마음에 비유해 보자. 즉,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모양이나 실체가 없다. 그렇지만 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온갖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 몸뚱이도 움직인다. 만약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면 마음이라는 말도 없어야 하며, 없다는 표현 또한 붙일 수 없다. 가만히 있으면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가 다시 생각이 일어나곤 한다. 그 원래 자리,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 그 자리의 마음이 공이다.

그러니 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그 빈자리에서 또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니 무(無)는 아니다. 다만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공(空)은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비어 있다. 비어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무(無)-없다’는 주체건 자아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몸은 분명히 있다. 또 생각도 있다. 하지만 그 실체가 공이라는 것이다. 비어 있어 공이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없는 듯 있는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산스크리트어 ‘sunya'에 해당하는 공의 참뜻에 가까운 말이다. 허공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허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텅 비어 있으나 가득 차 있다. 그 비어 있는 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충만 돼 있다. 그래서 텅 빈 마음, 그곳에서 온갖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범부중생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마음작용은 번뇌 망상이고, 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 수행이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오고 가나 분명히 현상으로는 작용하고 있다. 즉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은 ‘참다운 공’을 말하며,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묘하게 존재하는 진공묘유의 관계, 이것이 나아가면 불교 우주관이고 본질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공이라는 말은 무엇인가가 비어 있는 것을 말한다. 우주가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공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은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고, 모든 형상을 포용할 수 있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란 자기부정이며,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고, 공 자체도 공하며, 공(空)한 그것도 공한 것을 공공(空空)이라고 한다. 이를 필경공(畢竟空)이라고 한다. 구극의 공(空)이란 뜻이다.

진공묘유란 진실로 비운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비웠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움의 작용은 있다. 도인(道人)이 그 작용을 일으키면, 그에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의 번뇌 없이 마음을 내는 작용이므로 도력(道力)이라 하지만 범부중생이 작용을 하면 온갖 번뇌 망상이 덩달아 일어나므로 생각이나 행위 모든 것이 난잡할 수밖에 없다. 진공묘유의 작용은 지혜에 속하지만 군더더기가 붙은 마음작용은 번뇌일 뿐이다.

공(空)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빛[因]이 프리즘[緣]을 통과하면 7색의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果]과 같아서, 진실로 비어있다(眞空)는 것은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妙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진공묘유란 불변하는 실체 없이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며, 공(空)을 근원으로 해 존재하는 절대진리를 말한다. 공의 당체(當體-본체)는 공이 아니라 진공묘유이다. 그리고 좀 더 발전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유식학에서는 진공묘유 그 자리가 바로 자성(自性) 혹은 불성(佛性)의 자리라고 한다.

이 우주 공간이 비어있는 것이지 무(無)의 상태는 아니다. 그리고 비어있는 것 같지만 실은 꽉 차있다. 진공묘유의 상태란 말이다. 이 우주 공간엔 의식의 파장이 꽉 차 있다. 이것을 기(氣)라 할 수도 있고, 에너지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정진하면 이 우주 공간의 파장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이 깨달음이고, 신통력이기도 하다.

강(江) 상류의 개천에서 산란을 한 연어가 넓은 바다에 나가 몇 년을 있다가도 회귀할 수 있는 것이라든지, 몇 백리 밖에 팔려나간 진돗개가 되돌아 집을 찾아온다든지 하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모두 중생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부사의(不思議)한 공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 무한대의 우주공간, 그 속의 지구까지 포함한 거대한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있다. 만약 수시로 오차가 생긴다면 지구는 오래 가지 못하고 폭발해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그 근원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조화라고 하고, 이슬람교에서는 알라의 작용이라고 한다. 하느님이라고 이름 하든 알라라고 이름 하든 이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지구는 그 속에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면서 4계절이 있고, 밤낮이 연속되는 이 작용의 근원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공을 바람과 같다고 비유로써 말씀하셨다. 바람은 모양을 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이란 그 모양을 볼 수는 없지만 결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공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초심자에게는 공(空)에 관해 말해줘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불법 최고 지혜인 진여지혜(眞如智慧)는 언어나 문자로 분별하고 헤아려질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한다. 즉 반야지혜를 무분별지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진여(眞如)의 모양은 형용할 수도, 분별할 수도 없으므로 모든 생각과 분별을 초월한 참 지혜로서만 알 수 있다고 해서 무분별지라고 하며, 그것이 곧 공(空)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공(空)은 범부 중생이 추구하는 가치, 이치, 이념 이런 것을 초월한 경계이다. 때문에 어리석은 중생의 논리로는 표현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알 수도 없는, 곧 부처님의 절대불변의 경지를 말한다. 진여(眞如), 불성(佛性), 자성청정(自性淸淨), 본래면목(本來面目), 무차별절대(無差別絶對)와 같은 경계는 인간(중생)의 능력으로는 닿을 수도 없는, 인간으로서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이해하고 느낄 수도 없는 경계, 중생의 한계를 넘어선 깨달음의 경계이다. → 진공묘유(眞空妙有) 참조.

 공(空)② - 공(空)ㆍ연기(緣起)ㆍ무아(無我) : 대승불교철학의 핵심인 공사상은 대승에서 주장하는 반야지혜에 대한 규명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규명이다. 공사상을 체계화시킨 용수(龍樹)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 지혜로운 자로서 무수한 이타행(利他行)을 행한 근본 종교체험이 공에 대한 체득(體得)이라고 확신했다. 공의 체득은 윤회로부터 해탈을 가져오고 열반에 이르게 하는 근거인 것이다. 그리고 공의 체득이 가능한 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바와 같이 우리 삶이 연기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공이란 말은 없다는 의미이지만, 무엇인가가 있다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없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에게 윤회와 번뇌를 일으키는 근거로서 변하지 않는 자아(自我)나 실체(實體) 등이 본래 없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공을 체득하는 경계는 인간의 의식상 가장 깊고 높은 차원인 승의(勝義)의 경계로서, 이 경계를 체득하면 열반의 세계가 전개된다.

그리고 공의 경계는 세속(世俗)으로서 연기의 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연기의 세계에 의거해 공의 경계가 드러난다. 공이 연기의 세계에 의거한다는 것은 철저한 연기적 사유(思惟)를 통해야 공의 경계가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연기적 사유에 의거하는 세계란 우리의 삶이 성립되는 세계이자 존재하는 세계이다. 존재하는 세계란 연기의 세계로서 존재물 상호간에 의존적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로서, 항상 변화하는 무상의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는 변하지 않는 궁극적 실체 등에 의거하는 세계가 아닌 까닭에 절대적인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가유(假有)의 세계이다. 가유의 세계로서 연기의 세속세계를 세속유(世俗有)라고 표현한다.

이 세속유로서 가유의 세계에 대해 어떠한 집착도 가지지 않고 연기적인 의식이 깊어짐에 따라 생겨나는 세계가 승의공(勝義空)의 경계이다. 이러한 승의공의 경계를 체득해야 열반의 경지에 이르고, 이 경지에서 대승보살의 이타행과 자비행은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승의공과 세속유의 경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도(中道)의 길이며, 이 중도의 길은 열반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이와 같이 공사상의 체계는 중도의 길과 열반의 길을 제시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변하지 않는 실체의 개념을 부정하는 철저한 무아(無我)의 정신이 담겨있다. 무아설은 초기불교 이래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로서 부파불교에 이르러서는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로 구분돼 논의됐다. 인간의 내면에서 의식 일체를 통괄하는 절대적인 실체로서 ‘아(我)’가 없다는 것이 인무아이다. 이 인무아 외에 부파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로서 법(法)에 대한 고찰이 생겨나,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자성(自性)을 갖는 법으로 이루어졌다는 사고가 생겨났다. 용수가 강조하는 공사상의 근저에는 인무아는 물론 법의 자성을 부정하는 법무아에 대한 개념이 담겨있다.

그리고 공의 체득은 이러한 법의 자성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부정의 의미가 담겨있다. 용수는 법무아를 법의 무자성(無自性)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연기적인 사유에 투철해 공을 체득한다는 것은 인무아와 법무아에 투철해진다는 것으로, 부처님의 근본교리인 무아설에 철저해진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공사상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와 연기에 의거해 세워졌다. 무아와 연기에 대한 철저한 이해는 공의 체득이라는 승의의 경계를 통해 열반의 길로 나아간다. 이 열반의 길은 대승보살이 실천하는 진정한 이타행과 자비행의 길인 것이다. 공사상은 부처님 깨달음의 근본체계를 대승의 입장에서 조명하고 밝힌 것으로, 이 공사상의 체계는 후대 인도사상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이태승

공은 연기의 법칙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연기는 상호의존성 상호관계성이다. 어느 누구도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는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상호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연기의 법칙성을 윤리도덕의 가치규범으로 완성된 개념이 공이다. 공은 인격의 완성이다. 나를 내 세우면 항상 상대와 갈등하고 대립한다. 나를 비우고 버려야한다. 그것이 공이다.

 공ㆍ가ㆍ중(空假中)의 원리 : 중국 수나라시대 천태대사(天台大師, 538∼597) 지의(智?)가 세운 삼관법(三觀法)을 말한다. 모든 현상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공(空),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한다는 가(假), 여기서 가는 차별상을 말한다.

그리고 공(空)이나 가(假)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이 셋을 공ㆍ가ㆍ중 3제(三諦)라 하며, 이 진리를 관찰함을 공가중 3관(三觀)이라고 한다. 파도가 바다를 떠나서 존재하지 못하듯 공(空)ㆍ가(假)ㆍ중(中)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다. 이것이 공ㆍ가ㆍ중의 원리이다. 가는 차별관, 공은 평등관, 중은 통일관을 말한다.

❮반야경❯에 공 또한 공한 것이라 가르치니, 그 공이란 무엇인가. 그 때의 공은 가 시설(假施設)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실상은 공이다. 실상은 연기하므로 고정된 실체성이 비어 있는 공이 맞지만 그 실상에 대해 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그 실상을 볼 수가 있다. 이때의 실상은 ‘가 시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실상이 공이라고 했듯이 모든 것이 공한 것인데, 그 공을 ‘붙잡고’ 있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런 걸 ‘무기공(無記空)’ 혹은 ‘공병(空病)’에 걸렸다고 한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부정의 방식이지만 ‘가 시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있긴 있다는 긍정이다. 그렇다면 진짜 실상은 무엇일까. 중관학파에서는 진짜 실상은 ‘중도’ 밖에 없다고 말한다. 중도란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다. 이렇게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적 입장을 공(진제)이라 하고, ‘가 시설’된 방편의 입장을 가(속제)라 하며, 이 두 가지 진리를 포괄해 유무 양변을 떠난 것을 중(중도)이라 한다. 이것이 중론(中論)이라고 명명한 요인이다. 이 공ㆍ가ㆍ중(空假中)을 중관학파에서는 ‘세 가지 진리’라 해 3제라 하는데, 다 ‘대등한’ 입장으로 본다.

공제(空諦) - 삼라만상은 공무(空無)해서 한 물건도 실재하는 것이 없다.

가제(假諦) - 한 물건도 실재한 것이 아니지만, 모든 현상은 뚜렷하게 있다.

중제(中諦) - 모든 법은 공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며 또 공이면서 유, 유이면서 공이다.

그리고 3관(觀)은,

공제(空諦)를 관하는 것을 공관(空觀),

가제(假諦)를 관하는 것을 가관(假觀),

중제(中諦)를 관하는 것을 중관(中觀)이라 한다. 대개 3제는 관(觀)할 바 이치에 대해 말하고, 3관은 관하는 지혜에 대해 말한다.

인간은 유일하게 반성적 사유가 가능한 생물의 종이다. 따라서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물을 수 있는 존재이다. 또한 이는 불성(佛性)의 자각 곧 해탈에 이르는 출발점이기도 한다. 이러한 반성적 사유에 의해 우주의 모든 사물을 면밀히 고찰해 보면, 그 크기가 아주 작은 양성자나 중성자에서부터 대단히 큰 천체에 이르기까지 거기엔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오직 연기(緣起)에 의해 서로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로 존재할 뿐이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으므로 제법무아(諸法無我)이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한다.

그렇다고 색이 변화해 공이 되고, 공이 변화해 색이 되는 관계는 아니다. 즉,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란 시간이 경과하면 색이 변해 공이 되고 공이 변해 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색과 공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색이 바로 공이고 공이 바로 색이라는 것이다. 공이란 색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지 색이 있는 자리를 떠나서 따로 공이 존재하지 않고, 색 역시 공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물리학의 상대론적 양자역학이 이해하는 진공(眞空)의 개념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완벽하게 차 있는 상태를 이르는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물리학자 폴 디락(Paul A M Dirac)은 진공이 실제로 텅 빈 것이 아니라 아주 약한 에너지(Zero-point energy)로 채워져 있고, 이 에너지에 의해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사라졌다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최근 한국의 연구진이 이 사실을 영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공의 자리가 바로 색의 세계이며, 색의 그 자리가 바로 공의 세계이다. 따라서 색과 공은 분리해 낼 수 있는 두 세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는 세계이다.

이와 같이 색은 곧 가(假)라 하고, 일체 모든 사물은 오직 무아(無我)여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空)이라고 하며, 또한 그 둘의 양변을 떠나면서 그 양변을 포용해 중(中)이라고 한다. 공ㆍ가ㆍ중 그것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다. 그러므로 가라 하면 공과 중이 따라 오고, 공이라 하면 가와 중이 따라 오며, 중이라 하면 가와 공이 따라 온다. 이렇듯 공과 가와 중이 거칠 것이 없이 원융무애 하니 이를 일러 공ㆍ가ㆍ중 삼제원융(空假中三諦圓融)라 한다.

※가시설(假施設, prajnapti) : 방편시설(方便施設-임시로 세운 이론)을 말한다. → 일심삼관법(一心三觀法) 참조.

 공(空, 산스크리트어 sunya) 개념의 특징 : ‘공(空)’의 산스크리트어 원어 ‘sunya’는 형용사로서 속이 텅 빈, 부풀어 오른, 공허한 등의 뜻을 가졌고, 명사 ‘sunyata’는 공한 것, 공성(空性), 영(零)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공이란 텅 비어있다는 뜻이 되겠다. 이것은 절대적 무(無) 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존재는 있으되, 그것이 결정되거나 특별한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자니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당나라시대 현장(玄?) 법사가 빌 공(空)자로 번역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사상을 정립한 사람이 AD 2세기 중관학(中觀學)을 수립한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이다.

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에서는 법체설(法體說)을 주장하고, 독자부에선 윤회하는 인격 주체로 개아(個我,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했다. 용수는 아를 비판하면서 법체니 개체니 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이는 곧 「무자성(無自性) - 공」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이 ‘공(空)’이라는 글자가 산스크리트 원어 ‘sunya, sunyata’의 참뜻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따라서 ‘空(공)’이라는 한자에 너무 집착하면 원래 의미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공(空)이란 말은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 dravya), 본성(本性, prakti), 자아(自我, atman)라고 하는 것들과 같이 인간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체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대승불교의 근본교의로 현상계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생멸하는 존재이며(연기하는 존재), 고정 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고, 사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라 했다. 따라서 공이나 중도(中道)는 연기법의 연장이다. 초기불교의 「무상, 고, 무아」라는 가르침이 대승에서는 공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무(無)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공이라고 하는 말은 무의 개념이 아니다. 공(空)과 무(無),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게 어렵다. 없다(無)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공(空)하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실체가 없어서 모양이나 형태가 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다만 무(無)는 공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무(無)와 공(空)의 의미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무는 ‘존재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다. 다만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다는 말이다. 공은 없는 게 아고, 비어있다는 말이다. 비어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즉, 공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본성이 공하다, 비어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공은 불이(不二) ― 이원적 대립의 극복으로 요약된다. ❮반야심경❯에서도 공을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설명한다. 부증불감은 증가와 감소를 동시에 부정하는 것으로 이와 같이 대립되는 개념 전체를 동시에 부정함으로써 공은 새로운 차원의 철학으로 전개된다.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절대 평등(平等)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공’ 혹은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할 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경험한 것, 그리고 내가 참고로 할 수 있는 사전이나 책, 자료들을 동원해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예컨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연구하고 개발한 과학적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경지이다. 지금 ❮공(空)❯이란 제목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글도 엇비슷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공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공을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말 큰 사전에 있는 단어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이다. 때문에 불교에서 ‘깨쳐라’고 하는 말을 자꾸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지식체계를 다 버리고, 또 다른 부처님 가르침의 세계를 상상해야 한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말을 부정한다. 우리의 몸은 분명히 있다. 또 생각도 있다. 하지만 그 실체가 없다. 우리 몸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 몸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계속 변한다, 흐른다, ― 즉, 연기한다. 따라서 비실체이다. 연기하는 것의 특징은 혼자 존재할 수 없고, 의존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이다. 즉, 실체가 없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공은 ‘무상, 무아, 비어 있다, 흐른다’라고 표현한다. 공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불교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고 한다. 그러나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물은 비어있는 곳으로 흐르는 속성을 가졌다. 비어 있는 곳을 채우기 위해 흐른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면 높낮이가 있지만 그 본질에서 보면 물이라고 하는 것은 빈 곳을 채운다. 웅덩이를 만나면 웅덩이를 채우고, 채워지면 넘쳐서 다시 흐른다. 비어있는 곳으로 흐르는 것이 공의 속성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렇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은 그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불교에서는 현상적 차원에서 이렇게 실체가 없음을 이름 해 공(空)이라고 한다.

사람이나 자연, 모든 것이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찰나찰나 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면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영원한 ‘나’와 영원한 ‘나의 것’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무상하며, 변화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어떠한 것에도 ‘영원한 나’ ‘영원한 나의 것’이 없다 - 무아(無我)라는 이 사실 ― 그것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셨거나 나타나지 않았거나 관계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참다운 진리이다. 무아(無我)란 그 스스로의 자아(自我)가 없기 때문이며, 자아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空)이라 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직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일체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 본성이 공하며, 또한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고 관하라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세계나 자신을 대하면서 실체론적 사고를 중단할 때,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도 알맹이가 없구나 하고 진실하게 느낄 때, 공이 작동한다. 공은 말이나 관념에 의한 고정화를 일체 배제하는 구실을 가지고 있고, 공이나 중도는 속박을 부수는 도구이며, 사물에 대한 고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곧 중도(中道)의 생각에 이어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한 존재론적 또는 인식론적 무(無)의 관념과는 구별된다.

공이란 곧 평등(平等)을 말한다. 인간에게는 착하다ㆍ악하다, 부자다ㆍ빈자다, 미남ㆍ추남, 남ㆍ녀 등 여러 가지 분별이 있다. 그렇지마는 여기엔 모두 인간이라고 하는 평등한 면이 있다. 또 일체의 사물은 가지가지로 변해가지마는 그 변해가는 것 가운데 일관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변한다고 하는 그 변하는 과정에는 어떤 준거(準據)의 틀, 곧 어떤 원칙이 있다. 예컨대 봄 다음에 반드시 여름이 오고, 여름 다음에는 반드시 가을이 온다. 이어서 겨울이 온다. 이 순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변화 가운데를 일관해서 변하지 않는 큰 것을 포착하는 것이 공을 아는 길이 된다.

공이라는 것은 차별이나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무차멸, 곧 평등한 무엇인가를 잡는 것을 말한다. 흔히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니까, 모든 것이 다 허무ㆍ허망하다며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이 있다. 영민하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정말 공(空)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에서 ‘색(色)’이란 모양을 뜻하며, 곧 차별을 뜻한다. ‘즉(卽)’은 떨어지지 않음(不離)을 의미한다. ‘공(空)’은 평등, 즉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부언하면 차별이 있는 것, 곧 가지가지로 변해가는 것을 떠나지 않고, 그 가운데를 일관해 있는 평등의 이치를 구한다는 것이 곧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색(색)은 유한한 무엇인가를 말하고, 공은 무한한 무엇인가를 일컫는다.

천지간의 만물이 다 각각 다르다. 인간도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다른 인간을 떠나서 도(道)를 구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차별 있는 인생을 떠나지 않고, 그 차별 있는 인생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그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평등한 이치를 포착하는 것이다. 결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차별 가운데서 평등한 이치를 잘 분별하는 장점을 갖춘 이가 혜명 수보리(慧命須菩提) 존자였다. 그래서 공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해서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칭했다.

공사상은 인간의 그릇된 입장을 파사(破邪)해 현정(顯正)하는 데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현상계에 집착하면 그것이 공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또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 또한 공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집착하는 여러 가지 대상이 본질적으로 공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대립적인 상대의식이 공하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상대를 넘어선 절대 또한 공한 것임을 가르치는 것으로 공은 가설적인 이름을 붙여 공이라고 한 것일 따름이며, 공 자체는 진리가 아니고 진리를 밝히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반야경❯ ‘문승품 제18’에서 다음과 같이, 즉 “일체의 존재[法]는 공이며, 그 공도 또한 공이다. 상(常)도 아니요, 멸(滅)도 아닌 까닭이다. 무엇으로 그렇게 되는가. 성품 스스로가 그러하므로, 저절로 그렇게 되기[성자이(性自爾)] 때문이다. 이를 공공(空空)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공 역시 공한 것이므로 공을 집착해서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공성(空性)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에 낀 갖가지 분별망상의 때를 씻어내기 위해 공의 가르침에 의지하지만 그런 공의 가르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공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것, 다시 말해 공견(空見)을 갖는 것 역시 또 다른 망상분별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공도 역시 공하다”고 가르친다.

공이란 자기부정이며,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며, 공 자체도 공하며,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공은 인연에 대한 해석이다. 인연으로 인해 태어난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는 말로서,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모든 고정된 속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은 단순히 소극적인 허무가 아니라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 무애자재(無?自在)한 절대적인 존재방식을 시사하고 있다. 공은 집착하지 않는 것, 얽매이지 않는 것, 머물지 않는 것이다. 공이란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며, 공 자체도 공하며,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오고 가나 분명히 현상으로는 작용하나니, 즉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은 참다운 공을 말하며,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묘하게 존재하는 진공묘유의 관계, 이것이 나아가면 불교의 우주관이고 본질관이기도 하다.

진공묘유란 진실로 비운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목탁을 보라 텅 비어 있어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이다. 범종각의 범종을 보라 속이 텅 비어 일승원음(一乘圓音)의 완성된 음운(音韻)이 나는 것이다. 텅 빈 충만, 비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며,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원리라 한다. 텅 비어 있으면 남에게 아름답고 내게 고요하다.

비웠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움의 작용은 있다. 도인(道人)이 그 작용을 일으키면 그에는 아상(我相) ,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의 번뇌 없이 마음을 내는 작용이므로 도력(道力)이라 하지만 범부중생이 작용을 하면 온갖 망념이 덩달아 일어나므로 생각이나 행위, 모든 것이 난잡할 수밖에 없다. 진공묘유의 작용은 지혜에 속하지만 군더더기가 붙은 마음의 작용은 번뇌일 뿐이다.

공(空)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빛[因]이 프리즘[緣]을 통과하면 7색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果]과 같아서 진실로 비어있다(眞空)는 것은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妙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진공묘유란 불변하는 실체 없이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며, 공을 근원으로 해서 존재한다. 공의 당체(當體-본체)는 공이 아니라 진공묘유이다. 그리고 좀 더 발전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진공묘유 그 자리가 바로 불성(佛性)의 자리를 말한다.

이 무한대의 우주공간, 그 속의 지구까지 포함한 거대한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있다. 만약 수시로 오차가 생긴다면 지구는 오래 가지 못하고 폭발해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그 근원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조화라고 하고, 이슬람교에서는 알라의 작용이라고 한다. 하느님이라고 이름 하든 알라라고 이름 하든 이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지구는 그 속에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면서 4계절이 있고, 밤낮이 연속되는 이 작용의 근원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반야심경❯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란 말이 나온다.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이라는 의미이다. 제법의 본질이 곧 공상(空相)이라는 말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공 한 것이라는 말이다. 공은 본래모습이 없지만, 중생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공한 모습이란 용어를 쓴 것고, 공한 모습이라서 불생불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공한 모양은 바로 불생불멸을 비롯한 남 녀, 남 북, 밤 낮 등 온갖 상대개념을 다 포함하고 있다. 공한 본질 속에는 이 모든 것을 흡수함과 동시에 표상으로 확산시키는 상반된 작용을 갖고 있다. 그만큼 공은 역동적이다.

그리고 일체법이 존재하는 모양이 바로 공이기 때문에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며,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본질에 있어서 생성과 소멸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 이면에 모든 현상은 생할 수도 있고, 멸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본래 공이기 때문이다.

공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공에 관한 이 책 저 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공이란 이런 것이라고 똑 부러지게 말한 책이 없다. 이 글도 그렇지만 기껏해야 공의 특징을 나열하는 정도이다. 왜 그런가. 불교는 원칙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의 ‘공(空)’을 이론적으로 혹은 알음알이로 이해하려 들면 이해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공은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이며, 체득해야 하는 깨달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공을 알면 불교를 다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평생 공을 알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모르고 간 사람이 더 많다. 이론적으로 문자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바탕으로 하되 치열하고도 기나긴 수행 끝에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더 이상의 것을 알려면 수행을 통한 깨달음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언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공이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만 닿은 수 있는 영역이다.

일체가 공하다는 관찰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해 얻어지는 것으로 이것은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단계가 아니라 지혜의 완성에 도달한 경지에서 얻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야지혜로서 공관은 용수와 그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있어 이제설(二諦說)의 입장에서 명확히 그 구분이 요구됐던 것이다. 이처럼 반야경계 경전은 법의 공을 주장하고 있으며, 공관은 반야바라밀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지혜인 것이다.

「우리가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우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온갖 집착에서, 작은 명예에서, 사소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기를 텅 비울 때 모든 것이 비로소 하나가 되며, 자기를 텅 비울 때 그 어떤 것에도 대립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기 자신이 드러난다. 즉, 텅 비울 때 오묘한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모든 고난으로부터 해탈된 자기, 모순과 갈등을 벗어버린 자기, 개체인 자기로부터 전체인 자기로 변신이 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는 길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자기실현의 길이고, 형성의 길이다. 부처는 단지 먼저 이루어진 인격일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온전한 인간에 이르는 길이다.」 - 법정 스님의 ❮일기일회❯ 중에서

우리 중생은 ‘내 것’이라 할 게 하나도 없고,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인 양 여기면서 가지고 지키려고 발버둥 치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다. 때문에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한다. 고집도 욕심도 사랑까지도 모두 탁 놓아버려야 한다. 그게 바로 공의 영역이다.

 공겁(空劫) : 우주는 일정하게 네 가지 주기를 반복하면서 성ㆍ주ㆍ괴ㆍ공(成住壞空) 하는데, 이 우주가 성립했다가 무(無)로 돌아가는 기간을 성겁(成劫)ㆍ주겁(住劫)ㆍ괴겁(壞劫)ㆍ공겁(空劫)으로 나누어 이를 사겁(四劫)이라 한다.

각 겁(各劫)은 제가끔 20소겁(小劫)으로 이루어져 있고, 20소겁을 1중겁(中劫)이라 하고, 4중겁을 1대겁(大劫)이라 하므로 결국 한 우주는 1대겁(大劫)을 시간단위로 해서 생성소멸하고 있다.

그리고 1소급(小劫)의 기간은 사람의 수명이 8만 4천세부터 백 년마다 한 살씩 감소돼 10세에 이르고, 10세로부터 다시 백 년에 한 살씩 늘어나 8만 4천세가 되는 긴 기간이다. 따라서 실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긴 시간의 상징적인 개념이다.

특히 괴겁의 시대가 지나면 공겁의 시대가 오는데, 공겁은 불교 우주관을 토대로 한 공막기(空漠期)를 말한다. 이 공막기는 세계가 파괴돼 아무 것도 없는 허공만이 존재하는 상태로 지속되는 지극히 긴 기간이다. 공겁 다음에는 다시 80겁을 주기로 성ㆍ주ㆍ괴ㆍ공이 반복돼 이 세계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것이다. → 사겁(四劫) 참조.

 공견(空見) : 공(空)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공을 깨닫지 못하고, 머릿속 이해 수준에 머물면 자칫 허무감에 빠질 수 있다. 즉, 공의 극단에 치우쳐 허무주의에 빠진 공의 세계관이라는 의미에서 공견이라고 부른다. 자칫 이러한 공견에 빠질 경우 모든 가치판단이 상실돼 선악의 구분을 무시하는 폐인이 될 수도 있다. 이는 공을 잘못 이해해 공(空)에 집착하다가, 공에 사로잡힌 그릇된 견해로서 근본적으로 공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므로 공병(空病)이라 할 수 있다. 용수(龍樹, 나가르주나)는 이런 공견의 위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공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해서(不能正觀空) 자기 스스로를 해친다(鈍根則自害). 주문을 잘못 외거나(如不善呪術) 독사를 잘못 잡는 것처럼(不善捉毒蛇).”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처럼 설익은 무당이 주문을 잘못 욀 경우 병을 치료하기는커녕 화를 부를 수도 있다. 또 독사를 잡을 때 물리지 않기 위해서 머리가 움직이지 않게 목을 꽉 쥐어야 한다. 실수로 다른 곳을 잡을 경우 오히려 독사에게 물린다. 공의 진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올바로 이해할 경우에는 우리를 지혜롭게 만들어 주고 삶과 죽음의 고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기사회생의 명약과 같은 역할을 하지만, 잘못 이해할 경우 독약이 돼 우리 몸과 마음을 해칠 수가 있다.

이와 비슷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느 날 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초라한 행색으로 밥이나 한술 얻어먹으려고 어느 사찰을 방문했는데, 그 절의 주지가 돈 있어 뵈는 신도는 극진이 접대하면서 행색이 초라한 자기는 박대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지에게 따졌다고 한다. 분별하지 말라는 절간에서 사람을 이렇게 차별해서 되느냐고, 그러자 주지 왈, “대접을 하는 게 안하는 것이요, 안하는 게 하는 것이올시다.”라고 어쭙잖게 공의 도리를 써 먹은 것이다.

그러자 박문수가 주지의 머리를 딱! 소리가 나도록 갈겨주면서, “이놈아 그러면 때리는 게 안 때리는 거고, 안 때리는 게 때리는 거다.” 라고 하면서 혼쭐을 냈단다.

이처럼 깊은 의미를 품은 공의 도리가 깊은 이치를 모르는 자에겐 한갓 말장난의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다. 기초가 부실하고 수행력이 없이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해 내지 못하면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만큼 공의 도리는 어려운 것이다.

❮중론(中論)❯ 제13 관행품(觀行品)에서 용수는 진제적(眞諦的) 조망을 속제적(俗諦的) 규범으로 착각하는 공견(공의 세계관)의 위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세계관[견해]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大聖說空法), 공의 진리를 말씀하셨다(爲離諸見故). 그러나 만일 공을 다시 자신의 세계관으로 삼는 자가 있다면(若復見有空), 어떤 부처님도 그런 자를 구제하지 못하신다(諸佛所不化).”

공(空)이란 마치 빨랫비누와 같다. 얼룩진 옷에 묻은 때를 빨 때 비누를 이용해 때를 지운다. 그러나 때가 지워졌다고 해서 빨래가 끝난 것이 아니다. 때를 지우기 위해 사용했던 비눗기를 말끔히 헹구어 내야 한다. 공의 가르침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 사고방식에 낀 갖가지 망상분별의 때를 씻어 내기 위해 공의 가르침에 의지하지만 그런 공의 가르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공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것, 다시 말해 공견(空見)을 갖는 것 역시 또 다른 망상분별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공도 역시 공하다”고 가르친다.

언어와 분별로 이루어진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마치 뗏목과 같은 것이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경고하고 논증하기 위해 공의 가르침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경고와 논증은 공의 가르침 그 자체에 대해서도 적용돼야 한다. 공의 가르침 역시 언어와 분별에 의해 표출된 것이기에 또 다른 뗏목일 뿐이다. 그래서 용수(龍樹)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공의 가르침이 범하는 논리적 오류를 다음과 같이 드러냈다.

“만일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若有不空法), 공한 것이 있으리라(則應有空法). 그러나 공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實無不空法), 어떻게 공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何得有空法).”

모든 것이 공하다는 말은 공하지 않은 것은 전혀 없다는 말과 그 의미가 같다. 그런데 공한 것이 있으려면 공하지 않은 것이 있어야 한다. 마치 긴 것이 있으려면 길지 않은 것, 즉 짧은 것이 있어야 하고, 호랑이라는 생각이 존재하려면 호랑이 아닌 것이 존재해야 하듯이… . 그런데 모든 것이 공하다면, 공하지 않은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기에 공이라는 말이 무의미해지고 만다. 모든 것에 공하다고 말할 필요도 없어진다. 모든 것은 공할 것도 없다. 이것이 진정한 공의 의미이다. 공이라는 말에 의해 모든 것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분별을 세척해 주지만, 공 역시 자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 공병(空病) 참조.

 공공(空空) : ❮반야경(般若經)❯에 나오는 십팔공(十八空)의 하나로서, 공(空)에 대한 분별이나 집착이 끊어진 상태이며, 공도 또한 공함을 말한다.

공사상(空思想)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교리이다.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멸하는 존재이며, 고정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다. 사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이때의 공은 고락(苦樂)과 유무(有無)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이며,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다. 공의 사상은 인간의 그릇된 입장을 파사(破邪)하여 현정(顯正)하는데 있는 것이므로 어떤 사람이 현상계에 집착하면 그것이 공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또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 또한 공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사람들이 집착하는 가지가지 대상이 본질적으로 공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반야경❯에서 설한 18공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이다.

-우선 사물을 감각하고 지각하는 인간의 육근(六根)이 공하다(內空).

-다음으로는 육근의 대상이 되는 육경(六境)이 공하다(外空).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관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집착의 대상이 공함을 밝히고, 마침내는 그 공도 또한 공임(空空)을 설한다. 이는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그리고 그것에 의지한 아(我)와 아소(我所) 모두 실체가 없고, 자성(自性)이 없는 공(空)한 것인데, 그 공(空) 또한 공(空)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공은 마치 비누와 같아서 공이라는 비누로 분별이라는 때를 빨았으면 그 공의 비눗기도 다시 헹궈내야 한다[공공]. 공의 가치가 남아 있으면 가치판단이 상실된 악취공(惡趣空)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의 사고방식에 낀 갖가지 망상분별의 때를 씻어 내기 위해 공의 가르침에 의지하지만 그런 공의 가르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공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것, 다시 말해 공견(空見)을 갖는 것 역시 또 다른 망상분별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공도 역시 공하다”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반야경❯ 문승품 제18에는 “일체의 존재[法]는 공이며, 그 공도 또한 공이다. 상(常)도 아니요, 멸(滅)도 아닌 까닭이다. 무엇으로 그렇게 되는가. 성품 스스로가 그러하므로, 저절로 그렇게 되기[성자이(性自爾)] 때문이다. 이를 공공이라 부른다.”라고 했다. 이는 모든 사물이 공하다고 하는 관념에 집착해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빠져버리는 공병(空病)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설이다.

 공공적적(空空寂寂) : 불변하는 고유한 실체가 없는 상태를 말하며, 줄여서 공적(空寂)이라 한다. 공적(空寂)하다에서 ‘공(空)’은 이차별(離差別), 곧 차별을 떠남을 뜻하고, ‘적(寂)’은 이변화(離變化), 곧 변화를 떠남을 말한다. 그러니까 공적(空寂)이라는 말은 차별을 떠나고 변화를 떠나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실의 도(道), 곧 진여(眞如)를 말한다.

그리고「성(性)과 상(相)이 공적(空寂)하여」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성(性)이란 불변의 본체를 말하는데 비해,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 모습을 말한다. 따라서 공적이린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모두 그 실체가 공무(空無)해 아무 것도 생각하고 분별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평등하고 변하지 않는 상주불변체를 확고하게 포착하는 것을 이른 바 불교 신앙의 이상(理想)으로 ‘성(性)과 상(相)이 공적(空寂)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공공적적해 찾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했다. 즉,

우주 만물이 모두 실체가 없고, 비어 있어 불변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마음이 텅 비어 매우 고요하다는 말이다.

번뇌나 집착이 없이 무아무심(無我無心)이라는 뜻이다.

즉, 우주에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모두 그 실체가 공무(空無)해 아무것도 생각하고 분별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청화(淸華) 스님은 우주에 형상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모두 그 실체가 공무(空無)해 아무것도 분별할 것이 없으므로 분별하는 마음을 여의어라 하셨다. 그것이 곧 공공적적(空空寂寂)이다. 그러니 이 몸은 공적(空寂)해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진실한 것도 없다. 이번 생에 잠시 인연 따라 나왔다가 인연이 다 되면 인연 따라 갈 뿐인 것이다. → 공적(空寂) 참조.

 공(空)과 무(無) : 공(空)과 무(無)는 다르다. 중생들은 견해에 집착하고, 그 견해의 가장 큰 두 줄기는 있다(有)와 없다(無)이다. 중생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은

있다(有)와 없다(無) 이 두 가지에 박혀 있다.

깨달음이 곧 공(空)이다. 공(空)이 곧 깨달음의 근본 핵심이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공(空)을 들으면 공(空)을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 여긴다. 깨달음이 전혀 없어 공(空)이 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핵심 진리를 한마디로 말하면, 공(空)이다. 공이 곧 지혜이며, 해탈의 뿌리이다. 이것은 대승, 소승, 금강승 모두에게 공통사항이다. 공(空)이 아니면 해탈의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승경전에서도 나와 있다시피, 삼해탈문이 바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 無作)이다. 해탈할 수 있는 문(門)이 바로 삼해탈문이고, 그 세 가지가 바로 공ㆍ무상ㆍ무원이다. 공ㆍ무상ㆍ무원은 다 같은 뜻이다. 공하기에 모습이 없고, 공하기에 바람(작위)이 없다는 의미이다. 다만 부처님의 자비로써 중생의 성향에 따라 문을 세 개 열어놓으신 것일 뿐이다.

왜 공(空)인가바로 인과 연이 화합해서 생겨났으므로 거기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어서 공이다.

왜 무상(無相)인가비어 있으니 거기엔 그 어떠한 모양(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무원(無願=無作)인가비어 모습이 없는데 뭘 짓거나 뭘 바란다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은 결국 다 같은 뜻이다. 단 하나를 세 가지로 표현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해탈의 문은 공(空)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공(空)은 비었다는 의미고, 무(無)는 없다는 뜻이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구성돼 있다. 몸이 무(無)일까. 몸은 없지 않다. 몸은 아주 없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몸이 항상 영원한가. 영원히 있는가(有). 중생들은 영원하다고 여긴다. 영원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몸에 집착한다. 몸이 영원하지 않다고 확실히 안다면, 몸에 집착할 수가 없다.

몸은 변한다. 몸은 항상 변해간다. 그래서 몸이 병들고, 늙어간다. 몸과 마음이 변해가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게 어리석은 중생이다. 몸은 아주 없는 무(無)가 아니다. 그렇다고 영원한 실체가 있는(有)도 아니다. 그러나 중생은 진리를 몰라서 항상 유무(有無), 이 두 가지 견해에 매달려 있다. 몸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실체가 있어서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몸의 존재방식은바로 공(空)이다.

몸은 공(空)한 것이다. 이게 진실이다. 몸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몸은 공한 것이다. 몸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니 몸은 허깨비와 같다. 그래서 ❮금강경❯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했다. 이 몸은 꿈ㆍ허깨비ㆍ거품ㆍ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꿈ㆍ허깨비ㆍ거품ㆍ그림자는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다. 이게 바로 공의 뜻이다. 이와 같이 몸의 존재방식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바로 공한 것이다. 이렇게 공과 무는 완전히 다르다.

유는 상주론(常住論), 무는 단멸론(斷滅論), 공은 중도(中道)이다. 중도란 유무 양쪽에 치우치지 않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한 중도의 뜻은 그 어떤 견해를 가지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겨우 유무 양쪽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모든 견해에 집착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 공(空)과 연기(緣起) : ‘공(空)’은 인연(因緣)을 말한다. 인연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공은 실체가 없다. 공 현상은 공이다. 인연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공은 곧 인연에 대한 해석이다. 공이라는 말은 실체가 없다는 말이고, 실체가 없다는 말은 인연이라는 말이다.

왜 인연은 실체가 없는가돌을 조각해서 사람 모습을 만들면 돌이 사람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니라 석수가 사람으로 다듬었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인연이라는 말은 의지해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것을 연기(緣起)라고 한다. 인연 연(緣)자 일어날 기(起)자이다.

연(緣)은 의지한다는 뜻으로 석수에 의지해서 돌이 사람이 됐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의지해서 조성된 것이고, 석수가 없으면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우리말 ❮춘향전❯ 가사에 미륵님이 살찌는 것은 석수쟁이 솜씨에 매였다 이런 말이 있다. 돌이 미륵이 되는데 돌미륵도 그냥 미륵이 되는 게 아니라 석수쟁이가 다듬는 대로 되는 것이다. 그게 연기라는 말이다. 이 ‘연기’를 여러 다른 분야에 적용해도 다 들어맞게 돼 있다.

어머니는 아들과 딸에 의지해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아들딸이 없으면 어머니가 될 수 없다. 마누라는 남편 때문에 마누라가 되는 것이고, 남편은 아내 때문에 남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의지해서 된다. 그래서 의지해서 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우주관이고 본질관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현상관이고 세계관이다. 그러니까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저것이 있고 저것으로 말미암아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이것의 실체가 아니고, 저것은 저것의 실체가 아니다. 이게 공(空)이다.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다. 죽음을 떠나서 삶의 실체가 없고 삶을 떠나서 죽음의 실체가 없다. 그러니까 실체가 없고 공이다.

이 말을 어려운 말을 써서 자성(自性)이 없다고 한다. 실체가 자성이다. 그래서 실체가 없다는 말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한다. 그 무자성의 내용이 연기이다. 그리고 무자성은 바로 공이다. 따라서 이 공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남을 말한다. 인연법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인연이니까 현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색(色)은 현상인데, 색은 말하자면 석수를 잘 만나면 예쁜 사람으로 다듬어지고 고약한 석수를 만나면 고약한 모양으로 다듬어지며, 석수 나름으로 모양이 된다. 돌은 아무 힘이 없다. 그래서 공이다.

또 다리 놓는 사람 만나면 돌이 다리가 된다. 다리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석수의 노력을 통해서 다리가 된다.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나무가 기둥이 되는 것도 그냥 되는 게 아니라 목수에 의해서 기둥이 된다. 돌이나 나무(色)는 인연을 만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될 수 없다. 그래서 공이라는 것이다.

공은 연기의 법칙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연기는 상호의존성 상호관계성이다. 어느 누구도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는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상호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연기의 법칙성을 윤리도덕의 가치규범으로 완성된 개념이 공이다. 공은 인격의 완성이다. 나를 내 세우면 항상 상대와 갈등하고 대립한다. 나를 비우고 버려야한다. 그것이 공이다.

같은 밀가루인데 빵도 되고 수제비도 되고 칼국수도 되고 범벅도 된다. 이게 전부 인연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본질을 무자성이라 하는 것이다. 곧 스스로의 본성이 없고 인연에 의지해서 이루어짐을 말한다.

「불교에서 "실체가 없다"고 하는 설명이 공(空)에 관해 행해지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부파불교인들이 이 ‘실체’라는 개념을 중요시해서 이 실체라는 것에 어떤 의미로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실체라는 사고를 부정하고 파괴함으로써 어떤 대상을 실체화하는 것을 타파하는 도구로 순야(Sunya-공)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즉 실천적인 면에서 말하면 실체라는 사고는 실천의 경우에는 "사로잡힘(집착)"이라는 것이 된다. 실체라는 것은 사로잡힘으로써 개물(個物)로부터 추상돼 성립된다. 예컨대 시계라는 것은 시각을 표현한다는 개념을 추구해나감으로써 개개의 시계로부터 시계의 실체가 탄생한다. 그래서 공(空)이란 것을 실천적인 의미로 보면 사로잡힘을 없애는,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공을 설명하는데 실체가 없다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실천적인 표현이다. 부파불교시대의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실체를 생각하고 또는 실천에서도 어떤 제약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자세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그것을 배척하며 나아가서는 부처님의 원음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슬로건으로서 대승불교의, 그리고 ❮반야경❯의 공이 설해지고 주장됐다.

❮반야경❯을 보면 거기에 많이 나오는 공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설명이 전혀 돼있지 않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실천적으로 사로잡히지 않음(無執着)이라는 표현, 이것은 간단한 듯하나 막상 그것을 실천하려면 매우 어렵다.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그 일에 열중하면 그것은 거꾸로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전혀 설명할 수 가 없다. 그러므로 ❮반야경❯은 거듭 거듭 공(空)이라는 것으로도 부족해 다시 한 번 공이라고 말하고 마침내 "공은 역시 공이다"라고 말한다.

"사로잡히지 않는다" 또는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을 어떠한 형태로 논리적으로 또 실천과 결부시켜 훌륭하게 설명하느냐 하는 문제는 초기 ❮반야경❯ 시기에는 적지 않는 무리가 따랐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가르주나(용수)라는 뛰어난 학자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공(空)의 논리는 마침내 용수라는 사람에 의해서 우수한 이론으로 성립됐다.

용수는 ❮중론(中論)❯이라는 책에서 공(空)의 이론을 "연기"라는 것을 도입해 설명했다. 연기(緣起)는 불교의 중심사상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이 원인이고 이것이 결과라든가 이것이 이유이고 이것이 귀결이라든가, 그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 초기불교에서는 연기가 논해졌다. 또한 인연이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원인과 조건, 그리고 결과라는 것을 포함한 개념으로서의 연기(緣起)는 초기불교시대를 지나 점점 발전돼 왔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고 하면, 그는 어머니이며, 딸이며, 아내이다, 그밖에도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 서 있다. 즉, 넓게는 국민이고 유권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다양한 한 여자를 하나의 고정된 존재로서 볼 수는 없다. 용수는 ❮중론(中論)❯이라는 책에서 이것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했다. 그러함으로써 어떤 고정된 견해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했다.

이런 용수의 학설에 따라 앞에서 말한 "논리적으로 실체를 부정한다"는 것과 "실천적으로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 두 가지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중론❯은 대승불교에서 지극히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전부 450송의 시로 돼있고, 그것이 27장으로 나누어 있다.…

❮중론❯은 공을 연기설로 설명했고, 그때까지 ❮반야경❯을 설했던 사람들은 이로 인해 공(空)의 참뜻을 바로 이해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공(空)에도 사로잡히지 않게 됐다.」- 실론섬

 공(空)과 제로(0) : 불교에서는 이 유(有)와 무(無) 이외에 또 하나의 사고방식을 만들고 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것이 공(空 = 0. Sunya)이다. 예를들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수학적으로 말해 숫자의 가장 기초 단위는 1이라는 숫자이다. 여기에 대응되는 것은 마이너스 1이라는 숫자이다. 즉, 마이너스 1이 있고 그리고 마이너스 2라는 식이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수는 1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0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십이라고 할 때는 1 다음에 0을 쓴다. 백일 때는 1 다음에 0을 두 개 붙여 100이라고 쓴다. 그 뒤 101, 102로 써 나간다.

이것은 희랍이나 로마에서 백이라고 할 때 C 를 쓰고 II 를 쓰는 것과 전혀 다른 방법이다. 인도에서는 백이라든가 C 라든가 하는 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1과 0이라는 문자를 나란히 놓고 한마디로 자리에 따라 수를 포현해 가면서 101, 102… 또는 그 이상의 어떤 큰 수도 모두 그것만으로 처리할 수 있게 돼 있다. 여기에는 인도에서 발견한 0이 교묘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숫자의 자리 잡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로(0)란 플러스 1과 마이너스 1의 중강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 0에 대응하는 숫자는 없다. 1에는 반드시 마이너스 1이라는 식의 대응하는 것이 있는데 0에는 플러스 0도 마이너스 0도 없다. 이 0 이라는 숫자는 인도인이 발견하고 아라비아인이 인도로부터 배워서 유럽에 전했다.

그런데 이 0이야말로 ❮반야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순야(sunya), 즉 공이다. ‘순야’라는 말 자체가 숫자의 0을 뜻한다. 0이라는 것은 대단히 재미있는 숫자이다. 우리가 흔히들 102라고 할 때 십 자리를 차지하는 수는 없으므로 0을 쓴다. 그런데 없다고 해서 떼어 버리면 12가 된다. 전혀 다른 수가 돼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도무지 제거할 수가 없는 것이 0이라는 숫자이다.

이처럼 0은 실은 없지만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그 실물에 상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없는데도 그것을 제거할 수가 없다. 이른바 아무것에도 대응하지 않고 또한 실물이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그러한 것이 0이라는 숫자이다. 이것이 범어에서 말하는 순야(Sunya)라는 것이다. - 실론섬

 

 

 

 

 

 

 

 

10. 불교용어해설(공(空)-공(空)과 제로(0))

10. 불교용어해설(공(空)-공(空)과 제로(0))        공(空, 산스크리트어 sunya, sunyata) : ‘공(空)’의 산스크리트어 원어 ‘sunya’는 형용사로서 속이 텅 빈, 부풀어 오른, 공허한 등의 뜻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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