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제자의 첫 번째 사명은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배워 체득하는 것이고 두 번째 사명은 그 가르침을 널리 전해 교법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
승삭경(繩索經)
[원문]
(一○九六) 如是我聞 : 一時, 佛住波羅㮈國, 仙人住處, 鹿野苑中. 爾時, 世尊告諸比丘 : “我已解脫人天繩索, 汝等亦復, 解脫人天繩索. 汝等當行人間, 多所過度, 多所饒益, 安樂人天, 不須伴行, 一一而去. 我今亦往, 鬱鞞羅住處, 人間遊行.’ 時, 魔波旬作是念 : “沙門瞿曇, 住波羅㮈, 仙人住處, 鹿野苑中, 為諸聲聞, 如是說法 : ‘我已解脫人天繩索, 汝等亦能. 汝等各別, 人間教化, 乃至我亦當至, 鬱鞞羅住處, 人間遊行.’ 我今當往, 為作留難.’ 即化作年少, 住於佛前, 而說偈言 : “不脫作脫想, 謂呼已解脫, 為大縛所縛, 我今終不放.’ 爾時, 世尊作是念 : “惡魔波旬, 欲作嬈亂.’ 即說偈言 : “我已脫一切, 人天諸繩索, 已知汝波旬, 即自消滅去.’ 時, 魔波旬作是念 : “沙門瞿曇, 已知我心.’ 內懷憂慼, 即沒不現.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바라내국(波羅㮈國) 선인(仙人)이 살던 녹야원(鹿野苑)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인간과 천상의 속박(繩索)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인간과 천상의 속박을 벗어났다. 그대들은 인간 세상에 나가 많은 사람을 제도하고 많은 이익을 주어 인간과 하늘을 안락하게 하라. 둘이서 짝지어 다니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로 다니도록 하라. 나도 지금 울비라(鬱鞞羅) 마을로 가서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인간 세상을 유행하리라.”
그때 악마 파순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사문 구담은 바라내국의 선인이 살던 녹야원에 있으면서 여러 성문들을 위해 ‘나는 이미 인간과 천상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그렇게 되었느니라. 너희들은 각각 따로 사람들을 교화하라. …(내지)… 나도 지금 울비라 마을로 가서 인간 세상을 유행하리라’라고 이렇게 설법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지금 그곳으로 가서 그를 어려움에 빠지게 하리라.”
이런 생각을 한 파순은 곧 젊은 사람으로 변하여 부처님 앞에 서서 게송으로 말했다.
벗어나지 못하고서 벗어났다 생각하거나
이미 해탈했다고 스스로 말하면
큰 결박에 묶이게 되리니
그땐 내가 끝까지 놓아주지 않으리.
그때 세존께서는 ‘이것은 악마 파순이 나를 교란시키기 위해서 하는 짓이다’라고 생각하시고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일체의 속박인
인간과 천상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네.
네가 파순인 줄을 이미 알았으니
너 파순은 곧 스스로 사라져라.
그러자 악마 파순은 ‘사문 구담이 벌써 내 마음을 알고 있구나!’하고, 마음속에 근심 걱정을 품은 채 사라지더니 나타나지 않았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권39 제1096경 <승삭경(繩索經)>(T2, p.288a-b)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4:5 Pāsa-sutta(SN Ⅰ, pp.105-106)이다. 이 경은 빨리 <율장(Vinaya-piṭaka)>의 ‘대품(Mahāvagga)’에도 실려 있다(Vin Ⅰ, pp.20-21).
니까야에서는 경의 이름이 빠사(pāsa, ‘올가미’ 혹은 ‘속박’)로 되어 있다. 이 경의 이름인 ‘승삭(繩索)’도 ‘올가미’ ‘속박’ ‘덫’이라는 뜻이다.
<율장>에 의하면, 이 경은 세존께서 이시빠따나의 미가다야에서 첫 번째 안거를 보내고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붓다는 녹야원에서 최초로 다섯 고행자를 교화하고, 이어서 야사와 그의 친구 4명과 귀족의 자제 50명을 교화했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그래서 붓다는 자신을 포함하여 “그때 이 세상에는 61명의 아라한들이 있었다.(Vin. Ⅰ, p.20)”고 선언했다. 이로 미루어 이 경은 첫 번째 안거를 마친 60명의 아라한들에게 설한 것으로 보인다.
바라내(波羅㮈)는 바라나시(Bārāṇasī)의 음사이다. 송(宋) • 원(元) • 명(明)의 세 판본에는 ‘나(奈)’로 되어 있다. 빨리어 원음에 비추어 볼 때 ‘나(奈)’로 표기하는 것이 더 원음에 가깝다. 붓다시대 바라나시(지금의 베나레스)는 까시(Kāsi)국의 수도였다. 따라서 바라내국(波羅㮈國)으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선인주처는 이시빠따나(Isipatana)의 의역이고, 녹야원은 미가다야(Migadāya)의 의역이다. 울비라(鬱鞞羅)는 우루웰라(Uruvelā)의 음사이다. 악마 파순(惡魔波旬)은 마라 빠삐마(Māra pāpimā)의 의역이다.
이 경은 ‘전도선언(傳道宣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화적 수법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길을 떠나라는 선언을 실행에 옮기려고 할 때 악마 파순이 나타나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와 제자들은 악마 파순의 교란에 동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내용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후대에 이러한 신화적 수법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경과 대응하는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두 개의 경이 실려 있는데, 후자의 경이 한역과 더 가깝다. <상윳따 니까야>에 수록되어 있는 ‘빠사-숫따(Pāsa-sutta)’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 머물고 계셨다.
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나는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한길로 가지 마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뜻과 문장이 훌륭한 법을 설하라. 오로지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 눈에 티끌 없이 태어난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웰라의 세나니가마(將軍村)로 갈 것이다.”
4. 그러자 마라 빠삐만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게송으로 말했다.
“그대는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에 걸렸도다. 사문이여, 그대는 거대한 속박에 걸렸나니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도다.”
5. [세존]“나는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으로부터 벗어났도다. 나는 거대한 속박에서 벗어났나니 끝장을 내는 자여, 그대가 패했도다.”
6. 그러자 마라 빠삐만은 “세존께서는 나를 알아버리셨구나. 선서께서는 나를 알아버리셨구나.”라면서 괴로워하고 실망해 거기서 바로 사라졌다.(SN Ⅰ, pp.105-106; Vin Ⅰ, pp.20-21)
다음은 위 경문을 분석한 내용이다.(아래 내용은 마성, <왕초보 초기불교 박사 되다>, 서울 : 민족사, 2012, pp.280-284에 수록돼 있다.)
위에서 인용한 전도 선언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인천(人天)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다. 둘째 부분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라는 것이다. 셋째 부분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라는 것이다. 넷째 부분은 뛰어난 사람도 법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는데, 그들도 법을 들으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부분은 나도 법을 펴기 위해서 우루웰라의 세나니가마로 간다는 것이다.
첫째 부분은 신들과 인간들의 모든 덫[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다. 신들의 속박은 바라문들이 주장하던 상견(常見)을 말하고, 인간들의 속박은 사문들이 주장하던 단견(斷見)을 말한다. 따라서 신들과 인간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은 상견과 단견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전법자의 자격’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사실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는 붓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전법자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해 본 결과 번뇌로부터 벗어났다는 체험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앎과 체험이 없으면 남을 교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부분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왜 불교를 포교해야 하는가?’라는 ‘전도의 목적’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불교의 존재 이유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전도 선언의 핵심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라는 대목은 곧 대승불교의 근본이념과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전도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펼쳐야만 한다.
셋째 부분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뜻과 문장이 훌륭한 법을 설하라. 오로지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전법의 방법’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합리성과 객관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하지 않으면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다른 종교에서처럼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해야 한다.’는 것은 서론 • 본론 • 결론을 갖춘 논리 정연한 가르침을 말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로지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는 대목은 전법자가 청정한 범행을 몸소 실천하라는 의미이다. 아무리 입으로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했다 할지라도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감화를 시킬 수가 없다. 모름지기 전법자는 청정한 범행을 드러내어 모든 사람들을 감화시켜야만 한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처럼 불교는 다른 종교의 교화방법과 다른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불교사 2,500여 년 동안 불교를 전파함에 있어서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박해를 가하지도 않았다. 불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법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것은 모두 이 전도 선언에 담겨져 있는 ‘전법의 방법’을 그 제자들이 바르게 실천했기 때문이다.
넷째 부분은 “눈에 티끌 없이 태어난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대목이다. 이 부분은 더러움에 덜 물든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법을 만나기만 하면 곧바로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화의 대상’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부분은 붓다가 금후의 예정을 말씀한 대목이다. 이른바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웰라의 세나니가마로 가리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붓다가 제자들에게 몸소 실천해 보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른 종교 지도자처럼 자신은 가만히 있고 다른 제자들에게 전도를 위해 떠나라고 독촉하는 것이 아니라 붓다 자신도 몸소 전도의 길로 나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붓다는 깨달음을 이룬 이후 45년 동안 교화를 위해 길에서 길로 유행했다. 붓다는 단 하루도 편안히 쉬지 않고 끝없이 법을 전하기 위해 유행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끝으로 불제자의 첫 번째 사명은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배워 체득하는 것이고, 두 번째 사명은 그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전해 붓다의 교법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마 성 <팔리문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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