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들 모두 법을 공경하시고 바른 법을 의지해 사셨으니 그와 같이 바른 법 공경하는 일, 그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법”
존중경(尊重經)
[원문]
(一一八八) 如是我聞: 一時, 佛住鬱毘羅聚落, 尼連禪河側, 菩提樹下, 成佛未久. 爾時, 世尊獨靜思惟, 作是念: ‘不恭敬者, 則為大苦; 無有次序, 無他自在可畏懼者, 則於大義有所退減. 有所恭敬, 有次序, 有他自在者, 得安樂住. 有所恭敬, 有次序, 有他自在, 大義滿足. 頗有諸天․魔․梵․沙門․婆羅門, 天神․世人中, 能於我所具足戒勝․三昧勝․智慧勝․解脫勝․解脫知見勝, 令我恭敬宗重, 奉事供養, 依彼而住?’ 復作是念: ‘無有諸天․魔․梵, 沙門․婆羅門, 天神․世人能於我所戒具足勝․三昧勝․智慧勝․解脫勝․解脫知見勝, 令我恭敬宗重, 奉事供養, 依彼而住者. 唯有正法令我自覺, 成三藐三佛陀者, 我當於彼恭敬宗重, 奉事供養, 依彼而住. 所以者何? 過去如來․應․等正覺亦於正法恭敬宗重, 奉事供養, 依彼而住; 諸當來世如來․應․等正覺亦於正法恭敬宗重, 奉事供養, 依彼而住.’ 爾時, 娑婆世界主梵天王知世尊心念已, 如力士屈伸臂頃, 從梵天沒, 住於佛前, 歎言: “善哉! 如是, 世尊! 如是, 善逝! 懈怠不恭敬者, 甚為大苦, 廣說乃至大義滿足. 其實無有諸天․魔․梵, 沙門․婆羅門, 天神․世人於世尊所戒具足勝․三昧勝․智慧勝․解脫勝․解脫知見勝, 令世[尊] 恭敬宗重, 奉事供養, 依彼而住者. 唯有正法, 如來自悟成等正覺, 則是如來所應恭敬宗重, 奉事供養, 依彼而住者. 所以者何? 過去諸如來․應․等正覺亦於正法恭敬宗重, 奉事供養, 依彼而住; 諸未來如來․應․等正覺亦當於正法恭敬宗重, 奉事供養, 依彼而住. 世尊亦當於彼正法恭敬宗重, 奉事供養, 依彼而住.” 時, 梵天王復說偈言: “過去等正覺, 及未來諸佛, 現在佛世尊, 能除眾生憂. 一切恭敬法, 依正法而住; 如是恭敬者, 是則諸佛法.” 時, 梵天王聞佛所說, 歡喜隨喜, 稽首佛足, 即沒不現.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울비라(鬱毘羅) 마을의 니련선하(尼連禪河) 근처에 있는 보리수 밑에 계셨는데, 깨달음을 이룬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었다. 그때 세존께서 혼자 고요히 사색하시다가 이렇게 생각하셨다.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 차례도 모르고 남의 뜻을 두려워할 줄 모르며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큰 의리에서 타락하게 된다. 공경할 줄 알고 차례를 지키며 그것에 순종하면 그는 안락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공경할 줄 알고 차례를 지키며 남에게 순종하면 큰 의리가 만족해진다. 혹 어떤 하늘이나 악마, 범(梵), 사문(沙門), 바라문(婆羅門), 천신(天神)이나 세상 사람들 중에 내가 두루 갖춘 계율보다 낫고 삼매보다 나으며, 지혜보다 낫고 해탈보다 나으며, 해탈지견보다 나아서, 나로 하여금 공경하고 존중하게 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게 할 만한 것이 있으면 나는 그를 의지해 살리라.’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떤 하늘이나 악마,범, 사문,바라문, 천신이나 세상 사람들 중에 내가 두루 갖추고 있는 계율보다 낫고 내가 지니고 있는 삼매(三昧)나 지혜(智慧)나 해탈(解脫)이나 해탈지견(解脫知見)보다 나아서, 나로 하여금 공경하고 존중하게 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게 할 만한 것이 있어서 그를 의지해 살아야 될 만 한 자는 어느 누구도 없다. 오직 바른 법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여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 無上正等覺)를 이룩하게 하였다. 나는 마땅히 그것만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가리라. 왜냐하면 과거의 여래․응공․등정각께서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셨으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사셨기 때문이다.’
그때 사바세계의 주인인 범천왕(梵天王)이 세존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마치 역사(力士)가 팔을 굽혔다 펼 만한 짧은 시간에 범천에서 사라져 부처님 앞에 나타나 찬탄하면서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게으름을 피우며 공경하지 않는 이는 참으로 큰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 (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 큰 의리가 만족해질 것입니다. 진실로 어떤 하늘이나 악마․범, 사문․바라문, 천신이나 세상 사람들 중에, 세존께서 갖추신 계율보다 낫거나 삼매와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보다 더 나아서, 세존으로 하여금 공경하게 하고 존중하게 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할 만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갈 만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바른 법만이 있어, 세존께서 스스로 깨달아 등정각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께서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할 만한 것으로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모든 여래․응공․등정각들께서도 바른 법을 공경하였고 존중하였으며 받들어 섬겼고 공양하면서 그것만을 의지해 살았고, 미래의 모든 여래․응공․등정각들께서도 바른 법을 공경할 것이고 존중할 것이며 받들어 섬길 것이고 공양하면서 그것만을 의지해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도 마땅히 그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만을 의지해 살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그때 범천왕은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과거의 등정각이나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나
현재의 불세존께서는
중생들의 근심을 없애 주시네.
그 분들 모두 법을 공경하시고
바른 법을 의지해 사셨으니
그와 같이 바른 법 공경하는 일
그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법입니다.
그때 범천왕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이내 사라지더니 나타나지 않았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권44 제1188경 <존중경(尊重經)>(T2, pp.321c-322a)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6:2 Gārava-sutta(SN Ⅰ, pp.138-140)이다. 또한 ≪별역잡아함경≫ 권5 제101경(T2, p.410a-b)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역의 울비라(鬱毘羅)는 우루웰라(Uruvelā)의 음사이다. ≪별역잡아함경≫에서는 우루빈나(優樓頻螺)라고 음사했다.(T2, p.410a) 니련선하(尼連禪河)는 네란자라(Nerañjarā)의 음사이다.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는 삼마삼보디(sammāsaṁbodhi)의 음사이다. 삼먁삼불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약자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즉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이 경의 핵심은 붓다께서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변에 위치한 보리수 밑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자신이 깨달은 바른 법[正法]만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은 아직 붓다께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전이기 때문에 대중을 향해 설한 것이 아니다. 붓다께서 혼자 고요히 사색하다가 생각한 것을 범천이 알아차리고 찾아와 게송으로 찬탄했다는 신화적 수법을 동원하고 있다.
이 경은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고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 언덕의 ‘아자빨라 니그로다(Ajapāla-nigrodha)’ 나무 아래에서 홀로 명상하고 있을 때, 범천 사함빠띠(Brahmā sahampati)와 나눈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SN Ⅰ, p.138) 주석서에 의하면, 이때는 깨달음을 이룬 뒤 다섯 번째 칠일(pañcama sattāha)이었다고 한다.(SA. ⅱ. 203)
니까야에 의하면, “아무도 존중할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참으로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하는가?”(SN Ⅰ, p.139)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공경하고 존중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괴롭다는 것이다.
붓다가 처음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문득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의지할만한 자가 없다는 것은 절대고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어떤 사문과 바라문을 공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해야 할까를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깨달은 ‘바른 법[正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거기에 의지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붓다는 주변을 둘러보아도 자신이 갖춘 계(戒, sīla), 정(定, samādhi), 혜(慧, paññā), 해탈(解脫, vimutti), 해탈지견(解脫知見, vimutti- ñāṇadassana)보다 뛰어난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일 자신보다 뛰어난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다면, 그를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며, 의지할 것이라고 붓다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신의 세계[神界]와 악마의 세계[魔界]와 범천의 세계[梵天界]에서도, 그리고 사문과 바라문, 신과 인간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에서도 자신보다 뛰어난 사문이나 바라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만을 의지해 살아가리라고 다짐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부처님들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였으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만을 의지해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의 부처님들도 바른 법을 공경할 것이고 존중할 것이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만을 의지해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계․정․혜․해탈․해탈지견은 수행의 다섯 단계를 말한다. 이러한 수행의 다섯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자신을 지도해 줄 스승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수행의 다섯 단계에 도달한 자는 더 이상의 스승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했기 때문이다.
한편 ≪앙굿따라 니까야≫(AN5:131)에 “여래․아라한․등정각은 법으로 위없는 법의 바퀴를 굴린다. 그 바퀴는 사문도 바라문도 천신도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다.”(AN Ⅲ, p.148)고 했다. 또한 ≪앙굿따라 니까야≫(AN5:133)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어떤 비구가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누가 전륜성왕의 왕입니까?”
“비구여, 그것은 바로 법이다.” 세존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여기 정의로운 법왕인 전륜성왕은 오직 법을 의지하고 법을 존경하고, 법을 중히 여기고, 법을 경모하고, 법을 승리의 표상으로 지니고, 법을 깃발로 가지며, 법을 지배자로 여기고, 법답게 왕가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킨다.”(AN Ⅲ, p.149)
여기서 말하는 전륜성왕의 법은 곧 붓다가 깨달은 법이다. 붓다는 최초로 녹야원에서 자신이 깨달은 ‘위없는 법의 바퀴[無上法輪]’를 굴렸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경은 불교가 정법위주의 종교임을 천명한 것이다. 붓다는 자신을 신격화시키지 않고, 자신이 깨달은 정법을 최상위에 두었다. 붓다는 일생동안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오직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依法不依人)’고 당부했던 것이다. 붓다는 입멸 직전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法)과 율(律)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N Ⅱ, p.154)
이것은 불멸후에는 붓다가 설한 ‘법(dhamma)과 율(vinaya)이 비구들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율’을 추가한 것은 출가자를 위한 가르침이다. 재가자는 붓다가 설한 ‘법’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출가자들은 붓다가 직접 제정한 율을 지키지 않으면 정법을 오랫동안 머물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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