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하권

수선님 2021. 12. 12. 12:23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하권

 

신라국(新羅國) 사문(沙門) 원효(元曉) 지음

이인혜 번역

 

6. 진성공품(眞性空品)

[論] 진여(眞如)의 법(法)이 모든 공덕과 행덕을 갖추어 그것으로 본성(本性)을 삼기 때문에 ‘진성(眞性)’이라 하였고, 이러한 진성이 모든 명상(名相)을 끊었으므로 그런 뜻에서 ‘진성공(眞性空)’이라 하였다.

한편 이 진성은 모양을 떠났고 성품을 떠났다. 모양을 떠났다는 것은 허망한 모양[妄相]을 떠났다는 뜻이며, 성품을 떠났다는 것은 참 성품[眞性]을 떠났다는 말이다. 허망한 상을 떠났으므로 허망한 상이 공하고, 참 성품을 떠났으므로 참 성품도 공하니, 이런 이유에서 ‘진성공’이라 하였다. 지금 이 품(品)에서는 두 가지 뜻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에 이 뜻에 의거하여 품의 명칭을 세웠다.

[經] 그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보살도를 닦는 데는 명상(名相)이 없고 삼취계(三聚戒)에도 위의(威儀)가 없다면 어떻게, (보살도와 삼취계를) 받아 지니고 그것을 중생들을 위해 설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저희를 위하여 부디 설명해 주소서.”

[論] 관행을 개별적으로 밝히는 데[別明觀行] 여섯 단원이 있다. 그 중 네 번째인 허망을 버리고 실제에 들어감[遣虛入實]을 설명한 단원이 앞 장에서 끝났고, 여기서부터는 다섯 번째로 모든 성행(聖行)이 진성공(眞性空)에서 나옴을 밝힌다. 이 품(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총명한 근기들을 위해 많은 글로 자세히 설명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둔한 근기들을 위해 적은 글로 간략히 요점을 설명한 것이다. 앞의 자세한 설명에도 여섯 단원이 있다.

첫째는 삼취계(三聚戒:攝律儀戒·攝善法戒·攝衆生戒)가 진성으로부터 성립된 것임을 밝혔고, 둘째는 도품행(道品行:三十七助道品, 뒤 본문에 나오는 것과 같이 覺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덕목)이 진성(眞性)에서 성립됨을, 셋째는 여래의 가르침이 여여한 도리에 일치함을, 넷째는 보살의 지위가 본각의 이익에서 나온 것임을, 다섯째는 대반야(大般若)가 모든 인연을 끊어버린 것임을, 여섯째는 큰 선정(大禪定)이 모든 명수(名數)를 넘어선 것임을 밝혔다.

삼취계를 다루는 첫째 단원은 질문·대답·설명을 청함·설명·이해의 다섯 대목으로 나뉜다.

‘보살도를 닦는 데 명상이 없다’ 함은 모든 행을 통틀어 거론한 것이며, ‘삼취계에 위의가 없다’ 함은 계행(戒行)만 별도로 지적한 것이다. 전품(前品)에서 ‘삼취계에 들어가지만 들어갔다는 관념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 말씀과 같은 맥락이니 이것이 바로 삼계(三戒)이다.

그런데 명상도 위의도 없다면, 무슨 수로 그것을 자신이 받아 지니고, 어떻게 남에게 말해줄 수 있겠는가? 사리불이 대승의 길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수행을 시작할 때, 계(戒)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계(戒)·정(定)·혜(慧) 3학 중에서 첫 행인 계에 관하여 물은 것이다.

사리불은 여기 말로 ‘몸에서 난 아들[身子]’이라는 뜻인데, 지금 이 품(品)에서는 모든 수행 방법이 ‘법의 몸[法身]’으로부터 나왔음을 설명하기 위해 ‘몸에서 난 아들’을 등장시켜 묻게 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를 위해 설명할 테니, 이제 잘 들어라. 선남자야,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은 마음으로부터 변화하여 생겨나고, 모든 경계는 의언(意言)이 분별하는 것이니 그것을 한곳에 제어하면 모든 연(緣)이 다 끊겨 없어진다.

어째서 그런가? 선남자야, 하나인 근본이 일어나지 않고 세 가지 작용이 벌어지지 않아서 여여한 도리에 머물면, 6도(道)의 문이 닫히고 네 가지 연(緣)이 일여(一如)에 순응하여 3계(戒)가 갖추어진다.”

[論] 이 부분은 (첫 번째 질문에 이어) 두 번째, 부처님의 간략한 대답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는데, 먼저 답하고 나중에 물음을 정리한다.

‘선법과 불선법은 마음으로부터 변화하여 생겨난다’ 함은 원인이 되는 3업(業:身·口·意)의 행위가 모두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경계는 의언(意言)이 분별하는 것’이라 함은 결과로 받는 지옥·아귀·축생·수라·사람·하늘 등 여섯 갈래가 예외 없이 의(意)에서 변화되어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로 원인·결과를 지어내서 고통의 바다에 유전한다. 그러므로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고자 한다면 보살도(菩薩道)를 닦아 일여한 곳에 마음을 제어하면, 온갖 인연이 다 끊겨 없어진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름도 상도 없는 길을 닦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전체적인 설명을 했지만 개별적인 수행들[別行]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고 있으므로 ‘어째서 그런가?’하고 다시 문제를 제기하였다.

‘하나인 근본이 일어나지 않는다’ 함은 삼계(三戒)의 근본은 하나인 본각[一本覺]인데, 그것이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세 가지 작용이 벌어지지 않는다’ 함은 3계(戒)의 작용이 이미 본각에 의존하여 성립된 것이기에 그 작용은 위의로서 벌어진 상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벌이고 짓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인 본각에 순응하여 머무는데, 이런 뜻에서 ‘여여(如如)한 도리에 머문다’고 하였다. 이미 여여한 도리에 머물러 존재[有:三界]의 원인을 제거했으므로 ‘6도의 문이 닫혔다’고 하였다.

일여(一如)한 도리에는 네 가지 연[四緣]의 힘이 갖추어져 있어 일여에 순응하여 삼계(三戒)가 갖추어진다. 그러므로 ‘네 가지 연이 일여에 순응하여 삼계가 갖추어진다’고 하였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어떻게 네 가지 연이 일여에 순응하여 3취계(聚戒)가 갖추어지게 됩니까?”

[論] 이는 세 번째, (자세한 설명을) 거듭 청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가지 연이란 첫째는 택멸하는 힘[擇滅力]으로 취하는 연이니 섭율의계(攝律儀戒)이고, 둘째는 본각의 이익인 정근(淨根:선근)의 힘이 모여서 일어나는 연이니 섭선법계(攝善法戒)이고, 셋째는 본각지혜인 대비(大悲)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섭중생계(攝衆生戒)이고, 넷째는 일각(一覺)의 통달하는 지혜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여여에 순응해 머무는 것이다. 이것을 4연(緣)이라고 한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네 가지 큰 인연의 힘은 현상[事相]에 머물지 않으나 그렇다고 공용(功用)이 없지 않으며, 한곳에 고착해 있지 않으므로 그 특정한 모습을 찾아낼 수 없다.

선남자야, 이 한 가지가 6행(行)을 다 포함하고 있으니 이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지혜의 바다라고 할 것이다.”

[論] 이는 네 번째,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계(戒)의 인연을 밝혀 물음에 답한 것[正答]이고, 둘째는 말이 난 김에 (네 가지 연의 작용력이) 모든 행(行)을 다 포함한다는 사실까지 드러낸 것이다.

물음에 답한 부분에서 ‘네 가지 연[四緣]’이란 일심(一心)·본각(本覺)의 이익 중에 네 가지 힘의 작용을 갖추어 3계(戒)의 연이 되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멸의 의지(依止)가 되는 연이고, 둘째는 생(生)의 의지가 되는 연이고, 셋째는 섭(攝)의 의지가 되는 연이고, 넷째는 떠남[離]의 의지가 되는 연이다.

‘멸(滅)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모든 번뇌와는 성질이 다른 고요한 공덕이 있어서 이것을 연으로 하여 섭율의계[攝律儀戒]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생(生)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모든 선근과 성질이 일치하는 선한 공덕이 있어서 이것을 연으로 하여 섭선법계(攝善法戒)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섭(攝)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대비(大悲)를 이루는 성질이 있어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데, 이것을 연으로 하여 섭중생계(攝衆生界)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떠남[離]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반야(般若)를 이루는 성질이 있어서 모든 현상을 버리고 떠나는데, 이것을 인연으로 3취계로 하여금 모든 현상을 버리고 여여(如如)에 순응하여 머물도록 한다는 것이다.

앞의 셋은 개별적인 의의를 가진 연[別緣]이고, 뒤의 하나는 공통적인 의의를 가진 연[通緣]이다. 보살이 발심하여 3계를 받을 때, 본각의 이익에 순응하여 수지(受持)하기 때문에 이 네 가지 연[四緣]으로 3계를 갖추는 것이다.

첫째 ‘택멸하는 힘으로 취하는 연’이라 함은 본래 번뇌의 계박(繫縛)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본각이 그 자체로 택멸해탈(擇滅解脫)을 이루어 별해탈계(別解脫戒)를 취하는 작용을 갖는다는 것이다. 마치 자석이 바늘을 끌어당기듯이 일부러 생각을 내지 않더라도 힘과 작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리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 ‘본각의 이익인 정근의 힘이 모여서 일어나는 연’이라 함은 본래 깨끗한 공덕을 지닌 본각이 모든 행덕[行德]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 근본의 힘 때문에 모든 선법(善法)을 일으켜 모여 일으킨 선법의 연(緣)이 되니 이 연으로 섭선법계(攝善法戒)가 성립됨을 말한 것이다.

대의(大意)는 이상과 같고 다음에는 문장을 따라서 설명해 가겠다.

셋째 ‘본각지혜인 대비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섭중생계’라 함은 본각 중에는 세속을 두루 비추는 지혜, 즉 대비(大悲)가 있어서 항상 중생들에게 사랑의 비를 뿌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연(緣)으로 섭중생계(攝衆生戒)가 성립하므로 그렇게 말한다.

‘일각의 통달하는 지혜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여여에 순응해 머묾’이라 함은 본각 중에는 본성을 통찰하는 지혜[照通性智]가 있어서 3취계(聚戒)로 하여금 여여에 순응하여 머물게 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연은 체(體)가 법계(法界)에 두루 미치고, 작용이 만행(萬行)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큰 힘’이라고 한다. 큰 힘을 가지고 있지만 동일한 맛이라서 온갖 명상과 차별된 작용을 떠났다. 그러므로 ‘현상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현상은 없다고 할지라도 뛰어난 기능[勝能]이 있어서 출세간의 모든 수행공덕을 다 포괄하므로 ‘공용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건대 본각에만 있고 세속의 법 중에는 이러한 면이 없기 때문에 ‘한 곳을 떠나면 구(求)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상 3취계의 연(緣)을 각각 밝혔다. 다음으로는 그것이 만행(萬行)을 다 포괄함을 밝힌다. 10신(信)에서 시작하여 등각(等覺)까지 이 6위(位)에 있는 모든 행(行)은 일각(一覺)에 포함되므로, ‘이 한 가지가 6행(行)을 다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보살만 이 본각에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의 원만한 지혜도 한결같이 이 바다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이는 부처님의 깨달으신 모든 지혜의 바다’라고 하였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현상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공용이 없지 않다면, 이 법(法)은 진공(眞空)이라서 상(常)·낙(樂)·아(我)·정(淨)하니 두 가지 아[二我]를 넘어선 대반열반(大般涅槃)이며, 그 마음이 걸리는 데가 없을 터이니 이것이 큰 힘이 있는 관법[觀]이겠나이다.”

[論] 여기는 다섯 번째, (사리불이 말씀을 듣고) 이해한 것을 밝힌 부분이다. 이 중에 둘이 있다. 먼저는 순응할 일여(一如)란 법신이며, 그것이 네 가지 덕[四德:常·樂·我·淨]을 다 갖추고 있어 인아(人我)와 법아(法我)의 관념을 넘어선, 대열반임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일여(一如)에 순응해 가는 마음이 일여를 따라 모든 얽매임을 벗어났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는 크게 자재한 힘임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經] “그리고 이 각(覺)을 관(觀)하는 데는 37도품법(道品法)을 다 갖추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37도품법을 다 갖춘다. 어째서 그런가? 4념처(念處)·4정근(正勤)·4여의족(如意足)·5근(根)·5력(力)·7각(覺)·8정도(正道) 등은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여서 다 똑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각각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명칭과 수[名數] 때문에 이름과 글자를 붙이는 것이지 그 법은 얻지 못한다. 얻지 못하는 법은 한 가지 뜻으로서 문자로는 나타낼 수 없다. 문자로 나타낼 수 없는 모양은[無文之相:어떤 본에는 ‘無文之義’로 되어 있다]진실한 공성(空性)이다. 공한 성품의 뜻은 실제와 다름없이 여여(如如)하며, 여여한 도리는 모든 법을 다 갖추고 있다. 선남자야, 여여 한 도리에 머무는 자는 3고(苦)의 바다를 건넌다.”[論] 이는 두 번째 큰 단원, 도품행(道品行)이 진성(眞性)으로부터 성립됨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먼저 물음이 있고 다음에 대답이 있다.

물음에서 ‘이 각을 관하는 가운데[是觀覺中]’라 함은 순응하는 관[能順觀]과 순응할 본각[所順本覺]이니, 능(能)과 소(所)가 평등한 관(觀)과 각(覺) 가운데 37도품행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답 중에 둘이 있는데, 먼저 인정하고 다음에 해석한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두 번째인 해석 부분인데 그 중에 또 둘이 있다. 직접 해석하는 말씀과 거듭 설명하는 말씀이다.

처음에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라고 한 것은 37품(品)으로 나열된 명목들의 의미는 오직 하나인 관각(觀覺)으로서 둘이 아닌 법이기 때문이다. ‘다 똑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각각 다른 것도 아니다’ 함은 관과 각이 같은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뜻인데, 다르지 않다는 측면[不異門]에서 ‘뜻은 하나’라고 하였다.

‘명칭과 수 때문에’ 이하는 거듭 설명한 말씀이다. 넷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다르다는 뜻을 떨쳐주고, 둘째는 하나라는 뜻을 드러내고, 셋째는 하나의 뜻에 모든 법이 갖추어져 있음을 밝히고, 넷째는 하나의 뜻이 모든 잘못과 허물[過患]을 떠났음을 밝혔다.

첫째 설명 중에서 ‘명칭과 수[名數] 때문에 이름과 글자를 붙이는 것이지 그 법은 얻지 못한다’ 함은, 세간에서 닦는 도품행(道品行)의 법은 명칭과 수자를 따르기 때문에 37가지가 있으나, 보살의 각혜(覺慧)로 그 명목들을 찾아보면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설명 중에서 ‘얻지 못하는 법은 한 가지 뜻으로서 문자로는 나타낼 수 없다’ 함은, 저 별개의 법을 구하여 얻어지지 않을 때, 이 법은 일미(一味)라서 모든 말과 문자를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셋째 설명 중에 ‘문자로 나타낼 수 없는 모양은 진실한 공성’이라 함은 별개의 법으로 성립할 수 없는 능관심(能觀心)이 모든 말과 문자를 끊고 차별상(差別相)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공한 성품의 뜻은 실제와 다름없이 여여(如如)하다’ 함은 이 능관심이 실상(實相)인 여여(如如)의 도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모든 형상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본각(本覺)의 여여한 도리는 마치 금을 불려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듯이, 도품 등의 법[道品等法]을 닦아 이루는 법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여여한 도리는 모든 법을 다 갖춘다’고 하였다.

이미 여여한 도리에 머물러 모든 공덕을 다 갖추었다면 잡되게 물든 과실(過失)을 이미 떠나 있다. 그러므로 ‘여여한 도리에 머무는 자는 3고(苦)의 바다를 건넌다’고 하였다. 이것이 (거듭 설명한 부분 중) 네 번째, (하나의 뜻이) 모든 잘못과 허물을 떠났음을 말한 것이다.

이제 도품(道品)의 의미를 간략하게 네 구절로 분별하여 설명하겠다.

첫째, 37법을 10법으로 포괄한다.

둘째, 10법을 4법으로 포괄한다.

셋째, 4법을 한 뜻으로 포괄한다.

넷째, 한 뜻에 37법이 다 갖추어져 있음을 밝힌다.

1. 37법을 10법으로 포괄한다는 것은, ‘37품은 10법을 근본으로 한다……(이하 생략)’는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설에 의거한다. 여기서는 열 가지를 전개하여 서른일곱 가지를 세우는데, 그 법의 체[法體]를 논하자면 오직 열 가지뿐이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계(戒)·사(思)·수(受)·염(念)·정(定)·혜(慧)·신(信)·근(勤)·안(安)·사(捨)이다. 어떻게 이 열 가지가 서른일곱 가지로 전개되는가? 계(戒)에 정어(正語)·정업(正業)· 정명(正命) 셋이 있고, 사(思)의 종류에는 정사유(正思惟) 하나를 세우고, 수(受)에 희각분(喜覺分) 하나를 세우고, 염(念)에는 염근(念根)·염력(念力)·염각(念覺)·정념(正念)의 네 가지를 전개하고, 정(定)은 네 가지 여의족[四如意足]·정근(定根)·정력(定力)·정각(正覺)·정정(正定)의 여덟 가지로 전개하고, 혜(惠)도 네 가지 염처[四念處]·혜근(惠根)·혜력(惠力)·택법각분(擇法覺分)·정견(正見)의 여덟 가지로 전개하고, 근(勤)에도 네 가지 정근[四正勤]·정진근(精進勤)·정진력(情進力)·정진각분(情進覺分)·정정진(正精進)의 여덟 가지를 세우고, 신(信)에는 신근(信根)·신력(信力) 둘을 세우고, 안(安)과 사(捨)에 각각 하나씩 의각분(倚覺分)과 사각분(捨覺分)을 세운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섯 부류가 있다.

첫째 정(定)·혜(慧)·근(勤) 세 종류는 여덟 가지로 전개된다. 그 스물 네 가지가 이 세 종류에 소속된다. 둘째 염(念) 한 종류는 네 가지로 전개된다. 저 네 가지가 모두 일념(一念)에 포섭된다. 셋째 계(戒) 한 종류는 세 가지로 전개되는데, 세 가지로 되어 있지만 일계(一戒)에 포섭된다. 넷째 신(信) 한 종류는 두 가지로 전개된다. 신이 신근과 신력 둘을 포함한다. 다섯째 사(思)·수(受)·안(安)·사(捨) 네 종류는 하나를 세웠는데, 각각 자성(自性)에 소속된다. 이와 같이 10법이 37법을 포섭한다.2. 십법이 네 가지에 포섭된다는 것은 이렇다. 첫째는 계(戒)인데, 색법(色法)에 속하며, 밖으로 드러나는 것[表色]과 드러나지 않는 것[無表色]이 있다. 둘째는 사(思)와 수(受)인데, 변행심소(遍行心所)에 속한다. 셋째는 염(念)·정(定)·혜(慧)인데, 별경심소(別境心所)에 속한다. 넷째는 신(信) 등 넷인데, 선심소(善心所)에 속한다.

3. 네 가지 법을 한 가지 뜻에 포섭한다는 것은 이렇다. 각혜(覺慧)로써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을 추구해 보건대, 첫 색법(色法)은 그것이 방분(方分)을 갖건 아니건 다 얻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뒤 세 가지 마음 작용을 보건대, 그것이 시분(時分)을 갖건 아니건 모두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들이 아예 없는 법[無法]은 아니라 해도 얻어질 법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평등한 한 맛[平等一味]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법이 한 뜻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라고 하였다.4. 한 뜻에 37법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이렇다. 능(能)과 소(所)가 평등한 일미의 뜻으로 몸 등이 공(空)함을 관(觀)하면 4념처(念處)이며, 모든 게으름을 여의면 4정근(正勤)이며, 흩어진 생각들이 고요해지고 사라지면 여의족(如意足)이며, 불신(不信) 등을 벗어나면 5근(根)·5력(力)이며, 무명(無明) 등을 없애면 7각분(覺分)이며, 여덟 가지 그릇된 법[八邪法]을 떠나면 이것이 8정도(正道)이다.

이와 같이 모든 잡된 물듦을 멀리 떠나 한 뜻에 무량한 공덕이 구족되므로 ‘이 각(覺)을 관(觀)하는 데는 37도품의 법이 다 갖추어져 있으리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여여(如如)한 도리는 모든 법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만법은 다 글[文]이고 말[言]인데, 글과 말은 특성상 뜻[義]이 될 수 없습니다. 여실(如實)한 뜻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데, 지금 여래께서는 어떻게 설법하시나이까?”

[論] 여기서부터는 큰 단원 세 번째, 부처님의 말씀이 여여한 도리에 일치함을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물음이 있고 다음에 답이 있다.

질문 중에 ‘만법’이란 세간의 언설(言說)로 세운[安立] 법을 말한다. 말이라는 법은 도대체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문자이고 말일 뿐, 뜻이 될 수는 없다. 모든 법의 참 뜻은 언설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것이 만약 글이고 말이라면, 여기에는 참 뜻이 없을 것이며, 참 뜻이 있다면 그것은 글이나 말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설법하시겠나이까?’ 하고 물은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설하는 이유는 너와 중생이 ‘있다’거나, ‘일어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니, 이런 이유로 설한다.

나의 말은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이지 문자가 아니며[非文], 중생들의 말은 글로 된 말[文語]이지 뜻이 아니다[非義].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말은 다 공허하고, 공허한 말은 뜻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없으니, 뜻을 말하지 않는 것은 모두 헛말이 된다.

뜻과 일치하는 말은 그 실상이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고, 공이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아서 두 가지 상을 떠나 있으나 그렇다고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이 중간에 떨어져 있지 않는 법은 세 가지 상[三相]을 떠나 있으므로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없으니, 여여(如如)한 그대로 설한 것이다.

진여(眞如)는 유를 없애지 않는다. 무에서 유를 없애지 않기 때문이다. 진여는 무를 있게 하지 않는다. 유 가운데 무를 있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有)·무(無)가 있지 않으니, 유·무가 있지 않음을 설하기 때문에 진여도 있지 않다. 진여는 있게 하지도 않고 진여는 없게 하지도 않으니, 여여(如如)하게 설한다.”

[論] 두 번째로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시고 다음에 글과 뜻이 다름을 나타내신다.

먼저 (이유를 말씀하신 중에) ‘너와 중생이 있다거나, 일어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라 한 데서 ‘너’는 사리불을, ‘중생’은 모든 범부를 가리킨다. 이들에게 무위(無爲)를 설하면 법체(法體)가 있다고 생각하고, 유위(有爲)를 설하면 법상(法相)을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언설로는 참 뜻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나는 그러한 언설과는 달리 설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는 이유다.다음에는 글과 뜻이 다름을 드러내는 말씀인데, 먼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標] 뒤에 그 두 가지를 풀이한다[釋].

먼저 두 가지를 표한 가운데 ‘뜻을 담은 말이지 문자가 아니라’ 함은 말이 단지 공허한 문자[空文]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참뜻[實義]에 합당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며, ‘글로 된 말이지 뜻이 아니라’ 함은 말이 참뜻과 상관없이 공허한 문자에 그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다음으로 풀이하는 주에는 먼저 뒤에 나오는 문장들을 풀이하였다.

‘다 공허하다’ 함은 공허한 문자만 있고 참뜻이 없으므로 하신 말씀이니, 이는 ‘글로 된 말[文語]’을 풀이한 것이다. ‘뜻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없다’함은 여실(如實)한 뜻에 대해 밝히거나 이야기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니, ‘뜻이 아니다’한 말을 풀이한 것이다. 그 뒤는 결론인데, ‘모두 헛말이 된다’ 함은 개념[想]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뜻[義]에 어긋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예컨대 본 것을 못 보았다고 말하고, 못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뜻과 일치하는 말……’ 이하는 다음으로 앞에 나오는 문장들을 풀이한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는데 먼저 내용을 풀이하고[正釋], 다음에는 거듭 설명한다[重顯]. 내용을 풀이한 중에서도 먼저 ‘(단지) 문자가 아니라[非文]’한 부분을 해석하고 나중에 ‘뜻을 담은 말[義語]’이라 한 부분을 해석한다.

단지 문자가 아님을 해석한다는 것은, 아예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공허한 문자가 아니기 때문에 뜻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을 해석한다는 것은, 뜻이 말에 맞기 때문이며 말이 뜻과 같기 때문이다.

처음 해석 가운데 ‘그 실상이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다’ 함은 진여(眞如)의 실상도 공하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상 역시 공하다’고 한 뜻과 같으므로 ‘실상이 공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실상의 도리가 없지 않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고 하였다. 실상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상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공이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다’ 함은, 진공(眞空)의 이치가 실상이라는 말이다. 공이 실재한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그 진공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이 없는 것은 아니나 공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뜻과 일치하는 말은 두 가지 상을 떠나 있으나 그렇다고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함은, ‘공하지 않은 말’은 공상(空相)을 떠나 있고, ‘실상이 없는 말’은 실상을 떠나 있으므로 ‘두 가지 상을 떠났다’ 하였고, 그러나 공상과 실상의 둘 사이에 그 둘이 아닌 중간의 것을 세우지 않으므로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양 극단[二邊]을 떠났고 중간에 떨어지지도 않으므로 ‘세 가지 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닿는 곳은 이 세 가지 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이 말씀은 이 세 가지[三相]를 멀리 떠나 그 중도에 일치해 있다. 생각과 말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말이 끊긴 뜻에 묘하게 일치하므로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문자’와는 같지 않다. 이상은 ‘비문(非文)’을 풀이한 내용이다.

‘여여하게 설하는 그대로 여이다[如如如說]’ 함은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을 풀이한 것이다. 맨 앞의 ‘여(如)’는 ‘일치한다’는 말이고, 그 다음 ‘여여(如如)’는 ‘의리(義理)’를 뜻한다. 즉 앞서 세 가지 모양을 멀리 떠난 말씀은 여여한 의리에 꼭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설법은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범부의 말과는 달리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진여는 …를 없애지 않는다[如無]’ 이하는 두 번째, 거듭 설명하시는 부분이다. 먼저 비문[非文]을 설명하고 뒤에 의어(義語)를 설명해낸다.

먼저 (비문을 설명한 중에) ‘진여는 유를 없애지 않는다. 무에서 유를 없앨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함은 진여의 도리는 유(有)가 아니지만 그 진여가 본래적으로 유를 없게 한다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 즉 무법 중에서 유법을 없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는 본래 유(有)가 아닌데, 어떤 유를 없애서 무(無)에 떨어지겠는가? 그러므로 ‘실상은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다’고 한 말과 들어맞는다.

‘진여는 무를 있게 하지 않는다. 유 가운데 무를 있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함은 진여의 도리는 무(無)가 아니지만 그 진여가 근본적으로 그 무를 있게 했다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즉 유법 중에서 무법을 있게 했다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는 본래 무(無)가 아닌데, 어떤 무를 있게 해서 유에 떨어지겠는가? 그러므로 ‘공은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 말과 부합한다.

‘유·무가 있지 않다’ 함은 진여에는 유와 무가 없으므로 유가 있지 않으며, 진여에는 무와 유가 없으므로 무가 있지 않다는 말이다. 두 가지가 이미 있지 않은데, 어떻게 중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세 가지 상을 떠났다’는 말에 부합한다. 여(如)의 뜻이 이미 그러하다면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에 부합하므로 부처님의 말씀은 실로 공허한 문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비문(非文)’이란 말을 거듭 해석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명칭과 말이 이와 같이 도리에 맞으므로 후득지(後得智)에서 그러한 명칭을 가지고 진여를 사유하면 진여의 이체(理體)를 직접 관할 수 있기 때문에 4구(句) 중 구구(俱句)에 해당한다.

둘째로,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을 거듭 설명한 중에 ‘유·무가 있지 않음을 설하기 때문에 진여도 있지 않다’ 함은 부처님의 말씀이 이미 유·무가 있지 않다고 설한 것이기 때문에 진여의 이치에는 유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유(有)가 있지 않다는 것은 진여를 있게 하지 않기 때문이며, 무(無)가 있지 않다는 것은 진여를 없게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는 ‘진여를 있게 하지도 않고 진여를 없게 하지도 않는다’고 한 말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진여 는 있게 하지도 않고, 진여는 없게 하지도 않으니, 여여(如如)하게 설한다’고 하였으며, 앞에서도 ‘여여 그대로 설한다[如如如說]’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을 거듭 해석하였다.

이상으로 여섯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세 번째 (부처님의 언교가 진여의 도리에 부합함을 밝힌) 부분이 끝났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모든 중생이 일천제(一闡提)에서 시작하니, 천제의 마음이 어떤 등급의 지위[位]에 머물러야 여래(如來)와 여래의 실상에 이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제의 마음에서 여래와 여래의 실상까지 다섯 등급의 지위에 머문다.”

[論] 이하는 대단원의 네 번째, 보살 위(位)가 본각(本覺)의 이익에서 나옴을 밝힌 부분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는 대답하였다. 대답에 셋이 있으니 첫째는 수를 들어 전체를 밝힌 부분이며, 둘째는 따로따로 풀이한 부분이며, 셋째는 총괄적인 설명이다. 위 문장은 수를 들어 전체를 밝힌 부분에 해당한다. 다섯 지위[五等位]에서 ‘등(等)’은 계급을 말한다.

‘일천제에서 시작한다’ 함은 아직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을 내기 전에 있는 사람을 모두 천제(闡提)라고 부르는데, 대승(大乘)의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천제에도 크게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대원(大願)을 발한 일천제로서 항상 열반(涅槃)에 들어가지 못한 자이며, 다른 하나는 큰 믿음이 없는 일천제이다. 큰 믿음이 없는 일천제에도 둘이 있다. 첫째는 별일천제(別一闡提)로서 큰 사견(邪見)을 일으켜 선근(善根)을 끊어버린 자이며, 둘째는 통일천제(通一闡提)로서 아직 대승심을 내지 못해 큰 믿음이 없는 자에서부터 2승(乘)의 4과(果)를 얻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제의 위(位)에 들어간다.

지금 이 글에서는 마지막 경우를 두고 말하기 때문에 ‘천제의 마음에서 여래와 여래의 실상까지 다섯 등급의 지위에 머문다’고 하였다. 아직 10신(信)에 들지 않은 자는 모두 천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우선 5위(位)의 수준[分齊]를 설명한다.

첫째는 신위(信位)니, 10신행(信行)에 있다. 비록 불퇴전(不退轉)은 아니라 할지라도 큰마음을 일으킨 자들이다. 『본업경(本業經)』에서는 이들을 ‘신상보살(信相菩薩)’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사위(思位)니, 30심(心)에 있다. 모든 법이 식일 뿐[唯識]이라는 도리를 사유하지만 이들 모두 아직은 무분별의 수행을 참으로 증득하지는 못한 자들이다.

셋째는 수위(修位)니, 10지행(地行)에 있다. 진증(眞證)을 얻어 열 가지 장애를 대치(對治)하며 닦는 자들이다.

넷째는 행위(行位)니, 등각행(等覺行)에 있다. 인행(因行)은 만족되었으나 아직 과지(果地)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다.

다섯째는 사위(捨位)니, 묘각지(妙覺地)에 있다. 적멸(寂滅)을 취하지 않고 대비(大悲)로써 두루 교화[普化]하는 자들이다.

5등위(等位)를 건립하는 까닭은 퇴위(退位)냐 불퇴위냐, 증위(證位)냐 부증위냐, 등위(等位)냐 미등위냐, 인이 다 찬 지위냐[因滿位], 과가 완성된 지위냐[果圓位]의 차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데, 이 순서대로 5등위를 세운 것이다. 대의(大意)는 이와 같고 이어서 경문을 풀이하겠다.

[經] “첫째는 신위(信位)다. 이 몸 안에 진여의 종자가 망심(妄心)에 가려져 있으나 망심을 버리고 떠나면 맑은 마음이 깨끗해짐을 믿고, 모든 경계가 의언(意言)의 분별임을 아는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따로따로 풀이한 부분[別解]이다. 첫 번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믿음[信]을, 다음에는 이해[解]를 다룬다. 먼저 믿음을 설명하는데 소위 세 가지 불성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 몸 안에 진여의 씨앗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본성에 머무는 불성을 믿는 것이다. ‘진여(眞如)’는 제일의공(第一義空)을 뜻하며, 종자(種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더할 나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 無上正等覺이라고 한역함)를 뜻한다. 자신의 본성인 깨끗한 마음은 본래 법이 그렇기 때문에 ‘진여’라 하며, 3신(身:法身·報身·化身)의 결과를 초래하는 바로 그 원인이 되기 때문에 ‘종자(種子)’라 한다. 그러나 아직 발심하여 머무는 지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본성에 머문다’고 하였다. 자성이 아직 모든 장애를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망심(妄心)에 가려져 있다’고 하였다.

‘망심을 버리고 떠나면’이란 이 믿음이 불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10신(信)의 지위에서 등각(等覺)까지 점차 불신(不信)·무지(無知) 등의 장애를 벗어남에 따라 거칠고 망령된 분별심을 버리기 때문이다. ‘맑은 마음이 깨끗해짐을 믿는다’ 함은 이 믿음으로 불성을 얻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도(道)에 도달한 후 모든 때[垢]를 떠나 자성인 맑은 마음이 깨끗하고 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위 구절의 신(信)자가 아래 두 구(句)에까지 걸린다.

‘모든 경계가 의언의 분별’이라 함은 이미 세 가지의 불성을 믿는다면 유식의 도리까지 알 것이라는 뜻이다. 마음으로 취한 모든 경계가 오직 의언(意言)으로 분별해서 지어낸 것이라서, 분별을 떠난다면 있다할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經] “둘째는 사위(思位)다. 사(思)란 모든 경계가 오직 의언(意言)일 뿐이라, 의언으로 분별하여 의에 따라 나타나 보여지는 경계가 내 본식(本識)이 아님을 관찰하는 것이며, 이 본식은 법(法)도 의(義)도 아니고 소취(所取)도 능취(能取)도 아님을 아는 것이다.”

[論] 이는 사위(思位)를 설명한 것인데, 역시 두 구가 있다. 먼저 무상심사관(無相尋思觀)을 밝히고, 다음에 무생여실지(無生如實智)를 드러낸다.

처음에 나오는 ‘관찰[觀]’이란 사량관찰(思量觀察)을 말한다. ‘오직 의언일 뿐’이라 함은 인식되어진 바깥 경계[所取外境]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를 따라 나타난다’고 한 것은 바깥 경계로 나타난 상분(相分)이 견분(見分)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본식이 아니라[非我本識]’ 함은 식(識)을 떠나고 나면 바깥에 보여진 경계는 이미 나의 식[我識]이 아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본식(本識)이란 제6식을 말하는데, 3유(有)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제바보살(提婆菩薩)은 게송에서, ‘의식(意識)은 3유(有)의 근본이요, 모든 경계는 그 원인이니, 만일 경계가 없는 것임을 본다면, 3유의 종자도 자연히 사라진다’고 설하였다. 여기까지는 무상심사(無相尋思)와 여실지(如實智)를 전체적으로 설명하였고, 아래로는 그 무생도리(無生道理)를 밝힌다.‘이 본식은 법(法)도 의(義)도 아니고 소취(所取)도 능취(能取)도 아님을 아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법도 아니고 의도 아님을 안다’ 함은 설명하는 공능을 가진 법[非能詮法]도 아니고, 설명의 대상이 되는 뜻[非所詮義]도 아니라는 것이다. 명칭과 뜻이 서로가 서로에게 객(客)이 될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소취도 아니며 능취도 아님을 안다’ 함은 인식된 대상[所取塵]이 이미 없으므로 인식하는 것[能取]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식하는 쪽은 인식의 대상을 상대로 해야 하는데, 이미 상대될 것이 없어서 상대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생심사(無生尋思)와 여실지(如實智)를 전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처음 10해(解)로부터 그 위 세제일법(世第一法)에 이르기까지는 심사(尋思)와 여실한 지혜의 관(觀)을 닦는다. 이 중에도 수혜(修慧)의 관찰이 있기는 하나 아직 사찰분별(思察分別)을 완전히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사위(思位)라는 이름에 통합하였다.

[經] “셋째는 수위(修位)다. 수(修)란 항상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데, 일으키는 것과 일으켜지는 것이 동시에 행해진다. 먼저 지혜로 인도하여 모든 장애나 어려움을 물리치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論] 이는 수위(修位)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여기에도 두 구가 있다. 먼저 수상(修相)을 밝히고 뒤에 수인(修因)을 드러낸다. 여기서 수상이란 정체지(正體智)를 말한다.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운행되어[雙運] 다시는 출입이 없으므로 ‘항상 일으킨다’고 하였다. ‘일으키는 것[能起]’이라 함은 지(止)가 일으키는 공능을 갖는다는 뜻인데 관(觀)을 일으키기 때문에 한 말이다. 다음에 나오는 ‘일으켜지는 것[起]’이란 일으킴의 대상이 되는 관을 말하는데, 지와 관이 분리되지 않으므로 ‘동시’라고 하였다. 상(相)을 그치고[止] 진여[如]를 관(觀)하는 일이 반드시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상이 닦는 모습[修相]을 설명한 말이다.

이어서 수인(修因)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지관(止觀)을 동시에 운용하여 닦아갈 수 있는 이유는 먼저 가행지(加行智)를 써서 모든 장애를 물리치기 때문이다. ‘지혜로 인도한다’ 함은 가행지를 말하는데, 의언(意言)으로 분별하여 명칭과 말을 떠나지 못하므로 ‘지혜로 인도한다’고 하였다. 7지(地) 이하의 모든 보살지(菩薩地) 중에는 다 가행(加行)이 있어 먼저 숨어 있던 장애를 눌러 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장애나 어려움을 물리친다’는 것은 거칠고 무거운 장애를 덜어내고 제압한다는 말이며,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은 현행의 번뇌를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經] “넷째는 행위(行位)다. 행(行)이란 모든 수행 지위를 떠나 마음에 취하고 버림이 없는 아주 맑은 근본 이익이며, 마음의 동요가 없이 여여한, 결정된 참 성품 그대로의 대반열반(大般涅槃)이어서 그 성품이 공(空)하고 큰 것이다.”

[論] 이는 등각위(等覺位)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도 두 구(句)가 있다. 먼저 계위의 상태를 밝힌 뒤에 그 행을 밝힌다.

‘모든 수행지위를 떠났다’ 함은 행(行)이 10지(地)를 넘어섰기 때문이며, ‘마음에 취하고 버림이 없다’는 것은 이해한 바가 부처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계위를 등각행(等覺行)이라 하였다. 그 뒤 결론적으로 ‘지극히 맑은 근본 이익’이라 한 것은 본각의 마음을 가리키는데, 그 인(因)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다음으로 행(行)을 밝힌 데서 ‘마음의 동요가 없이 여여한, 결정된 참 성품’이라 함은 이 지위에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대반열반이어서 그 성품이 공하고 크다’ 함은 적멸무위(寂滅無爲)이며, 한 모습[일상]이자 모습이 없기[無相] 때문이다.

『본업경(本業經)』에서는 이를 ‘금강삼매에 들면 한 모습이자 모습이 없으며 적멸무위(寂滅無爲)하니 무구지(無垢智)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經] “다섯째는 사위(捨位)다. 사(捨)란 공성[性空]에 머물지 않고 바른 지혜[正智]가 흘러 변하는 것이며, 대비(大悲)의 여여한 상인데 그 상이 여여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며, 삼먁삼보리(三藐三菩提)에도 마음을 비워 증득하는 일조차 없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끝[邊際]이 없어 처소를 볼 수가 없으니 이것이 여래에 이른 것이다.”

[論] 이는 불지(佛地)를 설명한 부분으로 여기에도 두 구가 있다. 먼저 사(捨)의 뜻을 밝힌다. 즉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저 버리는[捨]상태를 나타낸다.

‘성품이 공하다는 데 머물지 않는다’ 함은 지혜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꺼진 재처럼 하는[灰身滅智]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량지(如量智)가 계속 흘러나와 근(根)을 따라 변역(變易)하여 불사(佛事)를 짓기 때문이다.

‘대비의 한결같은 모양은 그 여한 모습에도 머묾이 없는 것’이란 무연대비(無緣大悲)는 인아(人我)와 법아(法我)의 차별된 모양을 취하지 않으므로 ‘여여한 상’이라 하였고, 한번도 쉬지 않고 6도중생을 건네 주므로 ‘그 상이 여여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삼먁은 정(正)을, 삼(三)은 등(等)을, 보리는 각(覺)을 뜻한다. 합해서 말하자면 삼먁삼보리는 정등각(正等覺), 즉 원만하기 비할 데 없는 깨달음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머무는 일이 없으므로 ‘마음을 비워 증득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뜻 중에서 앞의 둘은 열반(涅般)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에서 버린다[捨] 하였고, 뒤의 하나는 보리(菩提)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버린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사위(捨位)의 상태를 밝힌 부분이다.

‘마음에 끝이 없다’는 것은, 일심(一心)의 원천에 돌아가면 마음의 체(體)가 두루해지는데, 시방에 두루하므로 끝이 없고[邊], 3세에 두루하므로 끝이 없다[際]고 하였다. 3세에 뻗어있으나 예와 지금의 차이가 없으며, 시방에 미치지만 여기와 저기의 차이가 없으므로 ‘처소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궁극의 과(果)는 다른 것과는 함께 하지 않고, 오직 여여함을 타고 가는 자만이 도달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여래에 이른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5등위(等位)를 각각 설명한 부분이다.

[經] “선남자야, 다섯 계위가 하나의 각[一覺]이며,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들어가니, 중생을 교화하려면 그 근본 자리[本處]를 따라야 할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전체적인 설명인데, 이 중에 둘이 있다. 하나는 본각에서 오는 것임을 직접적으로 설명한 부분이고, 또 하나는 문답을 주고받으며 거듭 설명한 부분인데 위 경문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

5위(位)의 모든 행이 본각을 떠나지 않아서 다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행(行)이 성립될 때 앞에서부터 뒤로 들어가므로 ‘들어간다[入]’고 하였다. ‘들어간다’는 것은 자리(自利)를 말하고 ‘교화한다’는 것은 이타(利他)를 말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행(行)이 다 본처(本處)를 따른다는 것이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 근본자리에 따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근본이라는 것이 본래 없으니 없는 곳에 처하여 공한 실제에 들어가 보리심을 내서 원만해지면 성도(聖道)를 이룬다. 어째서 그런가? 선남자야, 손으로 허공(虛空)을 잡는 것과 같아서,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잡을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論] 여기는 문답을 통해 거듭 설명하신 부분이다.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법(法)을 말하고 다음에는 비유를 들었다. 법(法)에 네 구절이 있다. 첫 두 구는 본처(本處)가 무처(無處)임을 밝히고, 나중의 두 구는 인과(因果)가 따라서 이루어짐을 나타냈다. ‘어째서 그런가?’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어째서’라 함은 만약 본래 무처(無處)라면 들어갈 수가 없어야 하겠고, 들어갈 수가 있다면 본처(本處)가 없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의심을 떨쳐주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해석하였다.

‘손으로 허공을 잡는다’ 한 데서 ‘손으로 잡는다’ 함은 능입(能入)의 행(行)을 비유하고, ‘허공’은 소입(所入)의 본각을 비유한다. ‘잡을 수 없다’ 함은 허공은 아무 형상이 없어서 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잡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함은 쥔 손아귀 안에 허공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본각의 이익도 이와 같아서 본래 근본자리라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며, 근본이 없는 본각은 없지 않으므로 얻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불사(佛事)를 일으키기에 앞서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하니, 이 염(念)은 본래 적멸(寂滅)이요, 적멸은 여여한 것입니다. 모든 덕을 지니고 만법을 망라하여 둘이 아닌 채로 원융(圓融)하니 불가사의합니다. 그러므로 이 법이 곧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이어서, 매우 신비한 주문[大神呪]이며 매우 밝은 주문[大明呪]이며 가장 밝은 주문[無上明呪]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동등한 주문[無等等呪]임을 알겠나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큰 단원 다섯 번째, 대반야(大般若)가 원융무이(圓融無二)하다는 사실을 설명한 부분이다. 둘로 나뉘는데 먼저 사리불이 여쭙는 부분이고, 다음에 여래께서 결론적인 대답을 하신 부분이다. 첫째 중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먼저 본각의 이익이 원융(圓融)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했음을 말하고, 다음에 그것이 대반야바라밀다임을 나타낸다.

‘불사를 일으키기에 앞서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한다’ 함이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한 부분이다. 말을 펼쳐서 불사를 하고자 할 때는 언제나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하니, 생사의 염(念)은 본래 적멸하고, 이러한 적멸은 다름 아닌 여여한 도리이며, 이 도리 중에는 본각과 시각(始覺)의 모든 덕이 다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생사의 온갖 법이 다 망라되어 있어 원융무이하므로 매우 깊고 불가사의한 것이다.

(다음으로 그것이 대반야바라밀다임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그 안에 한량없는 공덕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은 오직 본각과 시각(始覺)이 다를 바 없이 평등한 체(體)라는 뜻에서 ‘마하반야(摩訶般若)’라고 하며, 이와 같은 반야는 그 근원과 본성을 끝까지 다한 것이므로 ‘바라밀(波羅蜜:到)’이라 한다.

바라밀[到]을 구별해보면 두 가지가 있다. 즉 등각위(等覺位)에서는 만행(萬行)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기 때문이며, 묘각위(妙覺位)에서는 만덕(萬德)의 피안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등각위(等覺位)에서도 크게 두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큰 신력(神力)으로 세 가지 마[三魔:煩惱魔·五陰魔·天魔]로부터 오는 원한을 항복시키는 것이니, 경문에서 ‘매우 신비한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밝게 비추는 힘으로 4안(眼:肉眼·天眼·慧眼·法眼)의 대상을 두루 관찰하는 것이니, 경문에서 ‘매우 밝은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묘각위(妙覺位)에도 역시 두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4지(智:大圓鏡智·成所作智·妙觀察智·平等性智)가 구족하고 5안이 원만하여 법계를 남김없이 비추어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것이니, 경문에서 ‘가장 밝은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부처의 3신(身)이 드러내는 무상보리(無上菩提)는 무엇과도 동등하지 않으며 어떤 부처라도 차이가 없는 것이니, 경문에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동등한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주문[呪]이란 도(禱)이다. 세간의 신주(神呪)에도 큰 위력이 있어서 주문을 외우고 신에게 빌면 오지 않는 복(福)이 없고, 물리치지 못할 화(禍)도 없다. 이 마하반야바라밀도 마찬가지로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덕을 다 갖추어 큰 신력이 있으므로 안으로는 모든 덕이 다 갖추어지며, 밖으로는 모든 환란이 다 없어진다.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명구(名句)를 외우고 모든 부처님과 보살·신(神)을 우러러 바라는 바대로 성취되지 않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이 를 주(呪)라고 한다. 제석천(帝釋天)이 이 명구를 외우고 아수라의 군대를 물리친 사례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진여(眞如)는 공(空)한 성품이다. 성품이 공한 그 지혜의 불로 모든 번뇌를 태워 없애 평등하고 평등하니, 등각(等覺)의 3지(地)와 묘각(妙覺)의 3신(身)이 9식(識) 중에 아무 영상(影像)없이 밝고 깨끗하게 드러난다.”

[論] 여기서부터는 (사리불이 여쭙는 말에 이어 두 번째로) 여래께서 결론적으로 답하신 부분이다. 여기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체적인 설명[總述], 둘째는 개별적인 설명[別述], 셋째 전체적인 결론[總成]이다.

‘그렇다, 그렇다’라는 말씀이 총술(總述)이다.

별술(別述)에도 둘이 있는데, 먼저 인(因)이 원만한 경지에 도달함을 말하고 나중에 과(果)가 원만한 경지에 도달함을 말했다. 전자가 등각삼지(等覺三地)를 드러낸 부분이다. 무엇을 등각삼지라 하는가?

첫째는 백겁위(百劫位)요, 둘째는 천겁위(千劫位)요, 셋째는 만겁위(萬劫位)이다. 『본업경(本業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자(佛子)야, 마니영락(摩尼瓔珞)이라는 이름은 등각성(等覺性) 안의 한 사람으로서 금강혜보살(金剛慧菩薩)을 지칭한다. 이 보살은 정적정(頂寂定)에 머물러 큰 원력으로 수명이 백 겁이 될 때까지 천삼매(千三昧)를 닦고 나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간다. 거기서 모든 법성(法性)과 2제(諦)·1제(諦)와 1합상(合相)과 동일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천 겁의 수명 동안 머물러 부처님의 위의(威儀)를 배우고……결국에는 부처님이 가신 곳에 들어가 부처님 도량에 앉고 3마(魔)를 넘어선다. 그리고는 다시 만 겁의 수명 동안 머물러 변화신으로 성불(成佛)하는 모습을 보이고…… 옛날의 모든 부처님과 똑같이 언제나 중도(中道)를 행하고, 대락무위(大樂無爲)를 누리게 되니 생멸(生滅)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지금 이 경에서 ‘진여는 공한 성품’이라고 한 것이 『본업경』에서 말한 첫 번째, ‘일합상(一合相)과 동일하게 되었다’는 부분과 일치한다. 즉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과 동일하게 되었으니, 2제(諦)가 1제(諦)로 원융(圓融)된 것인데, 이 1제가 바로 1합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진여공성(眞如空性)’이라고 하였다.

‘성품이 공한 그 지혜의 불로 모든 번뇌를 태워 없앤다’ 함은 『본업경』에서 말한 두 번째, ‘3마(魔)를 넘어선다’는 부분과 일치한다. ‘모든 번뇌[諸結]를 없앤다’는 것은 번뇌마(煩惱魔)를 없애는 것이다. 번뇌를 없애므로 음마(陰魔)에 매이지 않고, 이 두 가지 마를 없애므로 천마(天魔)가 자연히 항복하여 불가사의한 변역사마(變易死魔)만이 있을 뿐이다.

‘평등하고 평등하다’ 함은 『본업경』에서 말한 세 번째, ‘언제나 중도(中道)를 행한다’고 한 부분과 일치한다. 두 극단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평등하다 하였고, 항상 행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거듭 평등하다고 하였다.

‘등각의 삼지[等覺三地]’란 앞의 3지를 망라한 것인데 이 가운데 앞의 둘은 대신주(大神呪)를 말하고, 셋째는 대명주(大明呪)를 말한 것이다.

‘묘각(妙覺)’ 이하는 원만한 과(果)에 도달했음을 밝힌 것이다. ‘3신(身)’이란 법신(法身)·응신(應身)·화신(化身)이다. 모든 부처님이 3신이라는 동일한 길을 가기 때문이니, 이는 무등등주(無等等呪)란 구(句)를 기술한 것이다. ‘9식(識) 중에 아무 영상 없이 밝고 깨끗하게 드러난다’ 함은 무상명주(無上明呪)란 구를 기술한 것이다.

앞 등각위(等覺位)에서는 아직도 생멸(生滅)이 있고 아직 심원(心源)을 끝까지 드러내지 못했으므로 제8식(第八識)에 있었다가 지금 묘각(妙覺)에 이르러서는 생멸을 영원히 떠나 본각 일심(一心)의 근원에 완전히 돌아갔으므로 밝고 깨끗한 제9식(第九識)에 들어간 것이다.

한편 앞의 인위(因位)에서는 연(緣)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의 영상(影像)의 상이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지금 마음의 근원에 돌아와서는 그 본질(本質)을 체득하므로 모든 영상의 상이 다 끊겨 버린다. 그러므로 ‘아무 영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본업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자(佛子)야, 수정(水精)과 영락(瓔珞)이 안팎으로 투명하고 맑듯이, 묘각은 언제나 밝고 맑은 데 머무니 그것을 일체지(一切智)의 경지라고 한다. 항상 중도(中道)에 처하고 모든 법에서 4마(魔)를 넘어서며,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서 모든 상이 다하고, 단번에 이해하고 크게 깨달아 변화신을 끝까지 다하고 신령함을 체득하여 2신(身)으로 항상 머물면서 인연 있는 이를 교화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영락경』에서 법성신(法性身)과 응화신(應化身) 2신(身)을 세운 이유는, 법신(法身)이 나머지 다른 2신(身)을 합하여 1신(身)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경에서는 이것을 둘로 나눠놓았기 때문에 3신(身)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3신과 2신이 평등하고 평등하다. 여기까지 해서 도피안(到彼岸)에 대해 개별적으로 설명[別述]하였다.

[經] “선남자야, 이 법은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니 지(智)가 스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요한 것도 아니니, 작용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다.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義非有無:어떤 본에는 ‘非有非無’라고 되어 있다], 공상(空相)도 공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그 중생들이 이 뜻을 보고 들어오게 해야 한다. 이 뜻에 들어온 자는 여래를 본다.”

[論] 여기는 (如來述成 중 세 번째) 둘이 아닌 원융한 이치를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부분[摠成]이다.

위에서는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는 측면에서 이야기하여 인(因)이 가득 차면 과(果)가 원만해지는 차별을 밝혔다. 그런데 하나의 법이 둘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인(因)과 과(果)가 둘이 아니고 마음[心]과 경계[境]에 차별이 없다. 인과 과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인이 아니’라 하였고, 마음과 경계가 차별이 없기 때문에 ‘과가 아니’라 하였다. 그 까닭은 앞에서 말했듯이, 인과 과, 심과 경이 오직 하나인 원지(圓智) 자체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자체가 작용할 뿐이라면 무엇이 인(因)이 되고, 무엇이 연(緣)이 되랴. 또 이 지혜의 작용이 등각위에 있으면 조적혜(照寂慧)라고 하니, 아직 생멸하는 동상(動相)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묘각위에 이르면 적조혜(寂照慧)라고 부르니, 이미 제9식에 돌아와서 궁극적으로 고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둘이 아니라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라, 먼저 동(動)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후에 고요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고요함과 움직임의 작용은 그 성품이 공(空)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성품이 공하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니,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있는 것도 아니라 함은 그렇다 치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어째서 그런가? 공상(空相)도 공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원융불이(圓融不二)를 설명했다.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이하는 이 이치에 들어가기를 권한 말씀이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여래의 뜻을 관(觀)하면 어떤 흐름에도 머물지 않고, 4선(禪)을 떠나 유정천[有頂]을 넘어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법은 명칭과 수[名數]인데, 4선도 마찬가지다. 여래를 보는 자라면 여래의 마음이 자재(自在)하여 항상 멸진처에 있으면서 나오는 일도 들어가는 일도 없이 안팎이 평등함을 보기 때문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여섯 번째 대단원, 대선정(大禪定)이 모든 이름과 수(數)를 초월했음을 밝힌 부분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대답이다.

질문 중에 ‘어떤 흐름에도’라고 한 것은 3유(有:欲有·色有·無色有)를 말하는데, 잠시도 멈추지 않고 왔다 갔다 유전(流轉)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유정(有頂)’이란 비상처(非想處)를 말하는데 3유의 정상[三有頂]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답은 둘로 나뉘는데, 물은 뜻을 전면적으로 인정한 부분[總許]과 개별적으로 설명한 부분[別成]이다. 별성 중에도 간략한 설명과 자세한 해석 두 부분이 있다. 간략한 설명에도 두 구(句)가 있으니 먼저 세간의 선[世間禪]은 명수(名數)를 떠나지 못했음을 밝히고, 나중에 출세간의 선[出世禪]은 명수를 초월했음을 드러낸다.

‘여래를 보는 자’란 앞에서 말했듯이 여래의 관(觀)에 들어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여래의 마음은 자재하다’ 함은 여래의 마음이 모든 결박에서 떠나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항상 멸진처에 있다’ 함은 심법(心法)과 심수법(心數法)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오는 일도 들어가는 일도 없다’ 함은 마음의 체(體)는 이치 그대로[如]라 일어나거나 멸함이 없기 때문이다. 나오거나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게 된 사람은 내적인 마음[內心]과 바깥 경계[外境]를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간략한 설명이다.[經] “선남자야, 저런 모든 선관(禪觀)들은 다 옛날 생각에 사로잡힌 선정인데[皆爲故想定:다른 본에는 ‘皆爲想空定’이라고 되어 있다], 이 여여(如如)함은 다시 저런 선정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여여함으로 여실(如實)함을 관하면 관상(觀相)과 여상(如相)을 보지 않아서 모든 상이 이미 적멸하니 적멸이 곧 여(如)의 뜻이다.

옛 생각에 사로잡힌 저런 선정은 동(動)이지, 선(禪)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선의 본성은 온갖 동요를 떠났으므로 물들이는 것[能染]도 아니고 물든 것[所染]도 아니며, 마음법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어서 모든 분별을 떠나 본의란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觀)하는 선정이라야 선이라 할 수 있다.”

[論] 여기서부터는 자세한 해석이다. 그 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상을 대치하여 상을 떠남을 밝히고, 둘째 움직임을 대치하여 움직임을 떠남을 드러내고, 셋째 의미를 결론짓고, 넷째 명칭을 결론짓는다.

첫째 상 떠남을 밝힌 가운데서는 먼저 여러 가지 선(禪)이 취하는 상에 대해 열거하는데, ‘저런 모든 선관(禪觀)’이란 세간의 여덟 가지 선[八禪]을 말한다. ‘옛 생각에 사로잡힌 선정’이라 함은 옛날 집착을 떠나지 못해서 무시 이래의 망상으로 갖가지 상(相)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 아래는 상 떠남을 밝힌 것이다. ‘이 여여함은 다시 저런 선정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함은 여래에 들어가는 관(觀)은 능(能)과 소(所)가 평등해서 여(如)라고 하기 때문이다.

‘여여함으로 여실함을 관한다’ 함은 평등한 지혜로 여실에 통달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관상(觀相)과 여상(如相)을 보지 않는다’ 함은 평등한 일미(一味)이기 때문에 관하는[能觀] 지(智)와 관의 대상[所觀]인 여(如)의 차별상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 능(能)과 소(所)를 잊었기 때문에 견분과 상분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모든 상이 이미 적멸하다’고 하였다. 적멸하여 달라지는 일이 없으므로 이것이 여의 뜻이 된다.

‘옛 생각에 사로잡힌 저런 선정……’ 이하는 (두 번째로) 동(動)을 대치하여 동을 떠남을 드러낸 부분이다. 먼저 그 동함을 제시한다. 세간의 선(禪)은 상을 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동요하는 생각[念]이며, 동념은 고요한 것이 아니므로 참된 선이 아니다.

그 아래는 참된 선이 동(動)하는 모든 상을 떠났음을 나타낸다. ‘물들이는 것도 아니라’ 함은 동요하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물들이는 작용[能染]이 없다는 뜻이다. ‘물든 것도 아니라’ 함은 본래 고요하기 때문에 동요에 의해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이 아니라’ 함은 연하는[能緣] 마음 법[心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이 아니라’ 함은 나타난[所現] 영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 의해 모든 동요를 떠나는 것이다.

‘모든 분별을 떠나 본의란 뜻이기 때문’이란 세 번째로 의미를 결론짓는 말이다. ‘분별을 떠난다’ 함은 상을 떠난다는 뜻을 결론지은 것이니, 분별을 떠남으로 해서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의란 뜻이기 때문’이라 함은 동함을 떠난다는 뜻을 매듭지은 말이다. 본래 고요하므로 일어나거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하는 선정이라야 선이라 할 수 있다’ 함은 넷째로 이름을 매듭짓는 말이다. 선은 정려(靜慮)를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에, 상을 떠나고 동함을 떠나야 비로소 선(禪)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저 세간의 선정을 선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편의상 붙이는 이름이지 참된 선[眞禪]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진성공품[一品]을 둘로 나눈 가운데에 하나가 날카로운 근기[利根]들을 위해 긴 글로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그것을 여섯 단원으로 나누었는데 여기까지 해서 마쳤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옵니다. 여래는 항상 여실로써 중생을 교화하시는데, 이와 같이 실의(實義)는 글이 길고 뜻이 풍부하여 근기가 날카로운 중생은 닦을 수 있지만 근기가 둔한 중생은 뜻을 두기 어렵습니다. 어떤 방편으로 저 둔근기 중생들을 이 깨달음[諦]에 들게 하리까?”

[論] 여기서부터가 두 번째, 둔한 근기들을 위해 짧게 간추려서 말씀하신 부분이다. 그런데 날카로운 근기와 둔한 근기, 자세한 설명과 간략한 설명의 두 가지 문이 있다.

탐구하여 이해하는 쪽으로 논한다면 이근은 간략한 설명에, 둔근은 자세한 설명에 맞는다. 날카로운 사람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기 때문이고, 둔한 사람은 열을 들어야만 열을 알기 때문이다. 한편 말을 가지고 이해하는 쪽으로 따진다면 이근은 자세한 설명에, 둔근은 간략한 설명에 맞는다. 날카로운 사람은 많이 듣고 많이 이해하기 때문이며, 둔한 사람은 적은 분량을 외워서 모두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의도는 후자에 있다.

위 글은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대답이고, 셋째는 청(請)이고, 넷째는 설명이며, 다섯째는 대중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익을 얻음을 나타낸다.

위 경문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처음에는 부처님이 앞에서 설하신 말씀을 이해했음을 나타내고, 나중에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두다[措]’라는 것은 ‘마음을 둔다[存意]’는 뜻이다. 둔한 근기는 재주가 편협해서 긴 글과 넓은 뜻에는 뜻을 두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 말이다.

[經]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둔근기 중생에게 4구(句)로 된 게송 하나를 받아 지니게 하면 실제(實諦)에 들어가리니, 모든 불법이 이 한[一:다른 본에는 ‘四’로 되어 있다]게송에 다 들어 있다.”

[論] 이는 대답이다. 여래의 말솜씨[辯才]는 걸림 없고 자재하기 때문에 게송 하나에 모든 불법을 다 포함하니, 불법의 요지가 이 네 구 안에 있다.

둔근기에게 게송 하나를 독송하고 지니게 하여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하게 하면…… 마침내 모든 불법을 빠짐없이 알게 될 것이니, 이것을 여래의 선교방편(善巧方便)이라고 한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무엇이 네 구로 된 게송입니까? 부디 저희를 위해 설해 주소서.”

[論] 세 번째, 청(請)하는 부분이다.

[經] 이에 존자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인연으로 생긴 것[因緣所生義]

그것은 생이 아니라 멸이며[是義滅非生]

모든 생멸을 없애는 것[滅諸生滅義]

그것은 멸이 아니라 생이라네[是義生非滅].”

[論] 네 번째 (사리불의 청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이 네 구의 뜻에는 각각 설명한 것[別]과 전체적인 설명[總]이 있으니, 전자는 2문(門)의 의미를 밝힌 것이고, 후자는 일심법(一心法)을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일심이문(一心二門) 안에는 포함되지 않은 불법이란 하나도 없다. 무슨 뜻인가? 앞의 두 구는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하여 평등의 의미를 나타냈고, 뒤의 두 구는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하여 차 별문(差別門)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진과 속이 둘이 아니지만 하나를 고수하지 않는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일심(一心)이 되고, 하나를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체를 둘로 들었으니, 이런 것을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고 한다. 대의(大意)는 이와 같다.

이어서 글을 해석한다.

‘인연으로 생긴 것’이란 속제(俗諦)의 모든 법을 들어 한 말이다. ‘그것은 멸이다’ 함은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한 것이니, 생긴 것이란 본래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다. ‘생이 아니라’ 함은, 생하는 그것이 바로 멸(滅)의 이유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 생은 생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것을 찾아보아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긴 것이란 적멸이다.

‘모든 생멸을 없애는 것’이란 진제(眞諦)의 적멸한 법을 들어 말한 것이다. ‘그것은 생이라’ 함은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한 것이니, 적멸한 법은 연(綠)을 따라 생겨나기 때문이다. ‘멸이 아니라’ 함은 적멸이 생(生)의 이유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 적멸은 적멸이 아니기 때문에 적멸한 것을 찾아보아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적멸은 연(緣)을 따라 생긴 것이다.

적멸이 곧 생이란 생기지 않는 생함이다. 생긴 것이 곧 멸이란 멸하지 않는 멸함이다. 불멸의 멸이기 때문에 멸이 생이며, 불생의 생이기 때문에 생이 적멸이다.

종합해 본다면 생이 곧 적멸이지만 멸을 고수하지 않으며, 멸이 곧 생이지만 생에 머무르지 않는다. 생과 멸이 둘이 아니고, 동(動)과 적(寂)이 따로 없으니, 이런 것을 일심법(一心法)이라고 한다. 사실 둘이 아니나 그렇다고 하나를 지키는 것도 아니어서 전체가 연(緣)을 따라 일어나 움직이고, 전체가 연을 따라 적멸함을 말한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 생이 곧 적멸이고, 적멸이 곧 생이라서, 막힘도 걸림도 없으며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다.

이상으로 한 게송의 전체적인 뜻과 각 구절의 뜻을 설명하였다.

[經] 그 때 대중들이 이 게송을 듣고 모두 매우 기뻐하여 멸(滅)과 생(生)을 터득했다. 멸과 생의 반야(船若)는 성품이 공한 지혜의 바다였다.

[論] 이는 다섯째,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대중들이 이익을 얻는 대목으로서, 전체적인 뜻과 각각의 뜻이 담고 있는 도리를 이해했음을 나타낸다.

‘멸(滅)’은 ‘생긴 것이란 적멸’이라는 앞 두 구를 이해했기 때문이고, 이어서 ‘생(生)’은 ‘적멸이 (연을 따라) 생한다’ 한 뒤 두 구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뜻을 이해했음을 밝힌 말이다.

‘멸과 생의 반야’라 함은 두 가지 이해를 얻었다는 말인데, 이는 별문(別門)에 의하여 이익을 얻은 것이다. ‘성품이 공한 지혜의 바다’란 총괄적으로 관(觀)하건대, 멸하는 것이나 생하는 것이나 자기 성품을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성이 공(空)한 지혜는 끝없이 깊고 넓으므로 이를 ‘성품이 공(空)한 지혜의 바다’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은 총문(摠門)에 의하여 이익을 얻은 것이다.

7. 여래장품(如來藏品)

[論] 진(眞)과 속(俗)이 둘이 아닌 일실(一實)의 법은 모든 부처님께서 돌아가는 곳이므로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지금 이 품(品)에서는 무량한 법과 모든 행이 이 여래장 속에 귀속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들어갈 곳[所入]을 기준으로 품 이름을 붙였다.

[經] 그 때 범행장자(梵行長者)가 본제(本際)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생함의 이치는 멸하지 않으며, 멸함의 뜻은 생하지 않으니 이러한 여여함의 뜻이 바로 부처님의 보리입니다. 보리의 성품은 분별이 없으며[無分別], 그 무분별지(無分別智)는 분별이 무궁하니, 무궁한 상은 오직 분별이 멸한 것입니다. 이런 이치의 특성은 불가사의하니, 불가사의한 데라야 분별이 없나이다.”

[論] 관행(觀行)을 여섯으로 구분하여 각각 설명하는 중에 바로 앞 품에서는 모든 행이 진성공(眞性空)에서 나왔다는 것까지 설명했다. 이제 여섯 번째로는 무량한 법이 여래장에 들어감을 밝힌다. 이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모든 법과 모든 행이 한결같이 한곳으로 들어감을 설명한 부분이고, 둘째는 들어가는 행[入行]과 들어간 지[入智]의 인과(因果)의 차별을 나타낸 부분이다.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모든 법이 하나인 실제의 뜻에 들어감을 밝혔고, 둘째는 모든 행이 하나인 불도에 들어감을 밝혔다.

첫째에도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질문, 둘째는 대답, 셋째는 말씀을 듣고 이해함, 넷째는 결론적인 서술이다. 질문 중에도 두 부분이 있다. 먼저 앞에서 하신 말씀을 이해했음을 표시하고 다음에 의심나는 곳을 묻는다.

이 물음을 던진 범행장자(梵行長者)는 속인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마음이 한 맛[一味]에 머물러 있기에 이 한 맛으로 모든 맛을 다 포괄하고 있는 사람이다. 모든 맛, 즉 더럽고 먼지 묻고 속된 모든 것을 다 거쳤으면서도, 한 맛인 범정행(梵靜行) 잃지 않은 자이다. 여기서는 이런 의미를 나타내려고 그 사람을 등장시켜 묻게 한 것이다.

‘본제(本際)에서 일어났다’ 함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서 본제에 들어갔다가 이제 묻기 위해 거기서 나왔다는 말이다.

‘생함의 이치는 멸하지 않는다’ 함은 전 품의 게송 뒷부분에서 ‘그것은 멸이 아니라 생이라네’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했다는 표시이고, ‘멸함의 이치는 생하지 않는다’ 함은 게송 앞부분에서 ‘그것은 생이 아니라 멸이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했다는 표시이다.

‘이러한 여여함의 뜻’이란 게송 전체의 뜻, 즉 불멸(不滅)과 불생(不生)이 둘이 아니라는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한 말이고, 이와 같이 둘이 아닌 뜻을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보리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각(覺)은 나누거나[分] 구별하지[別] 않기 때문에 둘이 아닌 데 순응하므로 ‘무분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분별이 없는 거기서라야 분별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무분별지는 분별이 무궁하다’고 하였다. 분별이 무궁한 이유는 다만 모든 분별을 없앴기 때문이니 ‘무궁한 상은 오직 분별이 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이러한 이치의 특성은 언설을 떠나고 사려(思慮)를 초월했기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불가사의한 가운데 생각과 말을 초월하므로 분별이 없다. 이렇게 해서 앞에서 설한 게송의 의미를 이해했음을 표시하였다.

[經] “존자시여, 일체의 법수(法數)가 한량없고 끝이 없으나 끝없는 법상(法相)은 실제의 이치인 한 성품이니, 오직 이 한 성품[一性]에 머문다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論] 이는 의심나는 바를 묻는 말씀이다. 소승교(小乘敎)에는 8만(萬)의 법온(法蘊:교법의 묶음)이 있고, 한 묶음[蘊]의 양(量)에 백을 열 번 곱한 만큼의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 대승교(大乘敎)에는 8만뿐이 아니므로 ‘법수가 한량없고 끝이 없다’고 하였다. 끝없는 교법(敎法)으로 나타내는 이치는 다른 갈래가 없는, 오직 하나이며 실제인 뜻[唯一實義]이다. 교법은 많으나 오직 한 가지 성품에 머문다는 점을 매우 알기 어려우므로 그 일을 묻는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불가사의하다. 내가 갖가지 법을 설하는 이유는 미혹한 사람을 위해서 방편도(方便道)를 쓰기 때문이나 모든 법상(法相)은 실제의 이치에서 나온 하나의 지혜[一實義智]이다. 어째서 그런가? 비유컨대 한 도시에 사방으로 대문이 열려 있는 경우, 이 네 개의 대문이 모두 하나의 도시로 통하듯이 저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들어가는 갖가지 맛의 법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論] 답 중에는 주장[法]·비유[喩]·비유를 법에 종합함[合] 셋이 있다.

‘내가 갖가지 법을 설하는 이유’란 삼승교(三乘敎)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미혹한 사람을 위해서’란 아직 일미(一味)에 통달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설한다는 뜻이다. ‘방편도를 쓰기 때문’이란 모두 일미(一味)에 들어가게 하는 방편이라는 뜻이니 정관(正觀)에 들 때는 언설의 교법(敎法)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상(法相)은 실제의 이치에서 나온 하나의 지혜[一實義智]’라 함은 모든 교법에 의해 들어가는 곳의 모습은 오직 하나의 실 제인 정관(正觀)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비유 중에 ‘한 도시’란 하나인 실제의 이치다. ‘사방으로 대문이 열려 있다’ 함은, 네 가지 교(敎), 즉 삼승교(三乘敎)와 일승교(一乘敎)를 비유한 것이다. ‘네 개의 대문이 모두 하나의 도시로 통한다’ 함은 네 가지 가르침에 의하여 모두 하나의 실제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저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들어간다’고 한 것은 근기(根機)의 얕고 깊은 정도에 따라서 한 교[一敎]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 도시를 하나의 실제에 비유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백성이 들어갈 곳이며 모든 중생이 돌아갈 곳이기 때문이다.

비유를 법에 맞추는 부분[合]에서 ‘갖가지 법’이란 ‘사방의 대문’에 해당하고, ‘맛’이란 들어가는 갈래의 맛이니 ‘한 도시’에 해당한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법이 그러하다면, 제가 한 맛[一味]에 머물면 모든 맛을 포함할 수 있겠나이다.”

[論] 이는 세 번째, 이해했음을 나타낸[領解]부분이다.

‘모든 맛을 포함한다’ 함은 모든 교[敎]의 맛을 포섭하여 일실(一實)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한 맛인 참뜻은 그 맛이[어떤 본에는 ‘味’ 자가 없다] 하나의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오지 않는 물줄기가 없기 때문이다. 장자야, 모든 법의 맛은 마치 여러 갈래 물줄기와 같아서 이름과 수량이 다르지만 그 물임에는 차이가 없다. 큰 바다에 머물면 온갖 물줄기가 다 포함되듯이 한맛[一味]에 머물면 모든 맛을 다 포함한다.”

[論] 이는 결론적인 서술[述成]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전체적인 서술[總述]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적인 서술[別成]이다. 별성 중에도 법(法)·유(喩)·합(合)의 셋이 있다. 합 중에는 둘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물줄기’에 배대시킨 부분인데, 먼저 법(法)에 배대한 다음 비유를 다시 들었다. 둘째로는 ‘온갖 물줄기가 다 포함된다’한 데 배대시킨 부분인데, 먼저 비유를 들고나서 법에 맞추어 결론짓는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모든 법이 한 맛이라면 어째서 3승(乘)의 도(道)가 있으며 그 지혜에 차이가 있나이까?”

[論] 이하는 두 번째, 모든 행(行)이 하나인 불도[一佛道]에 들어옴을 밝힌 부분이다. 먼저 묻고 다음에 대답하는데, 이 문장은 차이를 물은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강(江)·하(河)·회(淮)·해(海)에는 크기가 다르고 깊이가 달라서 이름에 차이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물이 강 속에 있으면 강수(江水)라 부르고, 물이 회(淮) 중에 있으면 회수(淮水)라 부르고, 물이 하(河) 중에 있으면 하수(河水)라 부르나, 이들이 바다에 있으면 모두에다 바닷물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법도 이와 같아서 진여(眞如)에 있을 때 모두에다 불도(佛道)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論] 두 번째로, 답에는 비유가 있고, 비유를 법에 맞추는 부분이 있다.

‘강하회(江河淮)’란 3승의 행(行)을 비유하고, ‘바다’는 불도를 비유한다. ‘크기의 차이’란 3승의 마음을 비유하니 넓고 좁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며, ‘깊이의 차이’란 3승의 지혜를 비유하니 우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이 두 가지 뜻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바다에 있으면 모두에다 바닷물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함은 저 3승이 다 같이 10지(地)의 법공진여(法空眞如)에 들어오면 3승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오직 불도라고만 부르는 일을 비유한다.

3승으로 차별된 행(行)이 모두 지전(地前)의 방편도(方便道)에서 있으나 마침내 진여를 정관(正觀)하는 경지에 다 들어가므로 삼승이 별도로 들어가는 귀착점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교법(敎法)이 한 맛에 다같이 들어가는 것과 같다. 어디가 비유이고 어디가 비유를 법과 맞춘 문장인지는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장자야, 하나의 불도(佛道)에 머물면 3행(行)에 통달한다.”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어떤 것을 3행이라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일에 따라 취하는 행[隨事取行]이고, 둘째는 식에 따라 취하는 행[隨識取行]이고, 셋째는 여여에 따라 취하는 행[隨如取行]이다.”

[論] 이하는 두 번째 들어가는 행[入行]과 들어간 지혜[入智]의 인과차별(因果差別)을 드러낸 부분이다. 그 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입행차별(入行差別)이요, 둘째는 입지차별(入智差別)이요, 셋째는 입인사용(入因事用)이며, 넷째는 입과상주(入果常住)이다.

첫째에도 세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전체적인 표방[摠標], 둘째는 질문, 셋째는 대답이다.

‘하나인 불도에 머문다’ 함은 초지(初地) 이상을 불도에 머문다고 한다. 세 가지 지혜를 갖추고 세 가지 행에 통달하기 때문이다.

답에는 개별적인 설명[別明]과 전체적인 해석[摠釋] 둘로 나뉜다.

개별적인 설명 중에, ‘일에 따라 취하는 행’이란 4제(諦)와 12연기(綠起)에 의해 인과의 일에 따라서 도품행(道品行)을 취한다는 것이다. ‘식에 따라 취하는 행’이란 모든 중생은 오직 하나인 마음이 짓는 것이므로 유식의 도리에 따라 4섭행(攝行)을 취한다는 것이다. ‘여여함에 따라 취하는 행’이란 모든 법(法)이 다 평등하므로 평등한 여여(如如)를 따라서 6도행(度行)을 취한다는 것이다. 행(行)을 마음에 포섭하기 때문에 취한다는 것이지, 능(能)·소(所)를 분별하는 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經] “장자야, 이와 같은 3행(行)은 많은 문(門)을 다 포섭하니, 어떤 법문(法門)도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행(行)에 들어가는 자는 공상(空相)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렇게 들어간 자는 여래(如來)에 들어갔다고 하겠다. 여래에 들어간 자는 그 들어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들어간 것이다[入如來者 入入不入:어떤 본에는 ‘入如來藏者 入不入故’라고 되어 있다].”

[論] 이는 3행(行)을 전체적으로 해석하는[總釋] 말씀이다.

수사행(隨事行)이란 소승문(小乘門)과 공통되는 행이고, 수식행(隨識行)이란 대승문(大乘門)에만 있는 행인데 이 둘은 다 차별문(差別門)이다. 세 번째는 평등문(平等門)이다. 이와 같은 도리(道理)로 ‘많은 문을 다 포섭한다’고 하였다.

또 도품행(道品行)은 생사에 머물지 않는 문이며, 4섭행(攝行)은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 문이며, 수여도행(隨如度行)은 평등하여 둘이 아닌 문이기 때문에 ‘어떤 법문도 여기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행(行)에 들어가는 자는 공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함은 비록 여여에 따라 행을 하지만 항상 일에 따르고 식에 따라서 행하기 때문에 공상(空相)을 취하여 적멸(寂滅)에 머물지 않는다. ‘여래에 들어갔다고 하겠다’는 것은 일에 따르고 식에 따르지만 항상 여여에 따라 평등행(平等行)을 취하기 때문에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할 만하다.

‘그 들어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들어간 것[入入不入]’이라 함은 그 들어가는 마음이 들어가지 않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능입(能入)과 소입(所入)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므로 ‘들어가지 않음[不入]’이라고 하였다. 능소가 별개로 있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므로 관심(觀心)의 측면에서 임시로 ‘들어가는 마음’이라고 이름 붙여 본 것이다. 이와 같이 들어가는 마음은 들어간다는 관념을 남겨두지 않기 때문에 ‘그 들어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들어간 것’이라 하였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가는 일은 마치 싹[苗]이 열매[實]를 맺는 것과 같아서, 들어가는 처소가 없이 본래 뿌리의 이로운 힘에 의해서 이익이 성취되어 본래 것을 얻으니, 본래의 실제[本實際]를 이루었을 때 그 지혜가 어느 정도 되나이까?”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들어가는 지혜의 차별[入智差別]을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질문하고 다음에 대답했다. 물음 중에도 먼저 앞에서 하신 말씀을 이해했음을 표시한 다음에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싹이 열매를 맺음과 같다’라고 한 것은 흡사 곡식의 싹이 이삭이 되어 열릴 때 들어가는 자[能入者]도 없고, 들어가는 곳[所入處]도 없다는 것이다. 여래장(如來識)에 드는 것도 그런 줄 알아야 한다. 싹은 본각(本覺)의 이익을 비유하고 열매는 본각을 얻음을 비유하니 들어가는 때가 평등하여 들어가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지혜가 무궁하나 간략히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여함을 따르는 정지(定智), 둘째는 방편으로 꺾어 부수는 부정지(不定智), 셋째는 전각(電覺)을 제거하는[除電覺:어떤 본에는 ‘慧除電覺’이라고 되어 있다] 열반지(涅槃地), 넷째는 실제에 들어가 도를 구족한 구경지(究竟智)다.

장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 큰 일의 작용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이는 큰 다리며 큰 나루니,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이 지혜를 써야 한다.”

[論] 이것은 두 번째인 대답인데,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즉 전체적인 표방[摠標], 개별적인 해석[別釋], 전체적인 설명[摠明]이다.

총표(摠標) 중에서 ‘그 지혜가 무궁하다’ 함은 통달한 바가 끝없기 때문에 그 지혜도 무궁하다는 말인데, 비슷한 것끼리 묶어 상대적으로 대략 분류해서 말하기 때문에 단지 넷이 된 것이다.

별현(別顯) 중에 ‘정지(定智)’란 평등성지(平等性智)다. 정관(正觀)에만 있고 방편을 짓지 않기 때문에 정지라고 한다. 말나식[末那識]의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을 대치(對治)하고 평등을 관(觀)함을 따르기 때문에 ‘여여함을 따른다[隨如]’고 하였다.

‘부정지(不定智)’란 묘관찰지(妙觀察智)다. 제6식에 있으면서 방편을 써서 진취(進取)하기 때문에 ‘부정’이라 하였고, 방편도(方便道)를 닦을 때 이름이나 일[名事] 등의 상(相)을 추적하여 꺾어 부수므로 ‘꺾어 부순다[摧破]고 하였다. 이 지혜는 사실상 방편관(方便觀)·정관(正觀)에 다 통하나 다만 정지(定智)와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는 생략하고 방편만을 들었을 뿐이다.

‘열반지(涅槃智)’란 성소작지(成所作智)다. 8상(相)을 나타내어 불사(佛事)를 하는데, 그 마지막 모습을 들어서 열반지라고 부른다. 5식(識)을 없애 이 지혜를 얻으니, 그런 뜻에서 ‘전각을 없앤다[除電覺]’고도 한다. 전각(電覺)이란 5식(識)이 번개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기 때문에 붙인 말이다.

‘구경지(究竟智)’란 대원경지(大圓鏡智)다. 마지막 지위[究竟位]에서만 이 지혜를 얻기 때문에 ‘구경’이라 하는데, 끝까지 밝히지 못한 경계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인 실제의 이치에 들어가기 때문에 ‘실제에 들어간다[入實]’ 하였으며, 나타나지 않는 경계가 없으므로 ‘도를 구족한다[具足道]’고 하였다.

다음 총명(摠明) 중에서 ‘네 가지 큰 일의 작용[四大事用]’이라 함은 작용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란 모든 부처님의 길[道]이 같기 때문이다. ‘큰 다리’란 이 네 가지 지혜로 3승(乘)의 사람들을 태우고 1승(乘)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게 하기 때문이다. ‘큰 나루’란 이 네 가지 지혜를 써서 6도(道)를 두루 거쳐가며 세간을 벗어나는 길을 보여 주고, 애욕의 강을 건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화하려는 자는 이 지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經] “장자야, 이 대용(大用)을 쓰는 데도 세 가지 큰 일이 있다. 첫째 세 가지 삼매에서는 안팎[內識·外境]이 서로를 빼앗지 않는 것이며, 둘째 대의과(大義科)에서는 도리를 따라 택멸(擇滅)하는 것이며, 셋째 여여한 혜(慧)와 정(定)에서는 자비로 양쪽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이 보리를 성취시킨다. 이 일을 행하지 않으면 저 네 가지 지혜의 바다로 들어갈 수 없으며, 모든 큰 마구니[大魔]가 틈을 타게 될 것이다. 장 자야, 너희들 대중은 성불할 때까지 잠시도 놓치지 말고 항상 닦고 익혀야 한다.”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들어가는 원인이 되는 일과 작용[入因事用]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를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장행(長行)이고, 다른 하나는 중송(重頌)이다. 장행 중에도 세 부분이 있다. 간략한 설명[略明], 거듭 설명함[重顯], 이해했음을 나타냄[領解]이다. 처음 중에도 전체적으로 표방함[摠標], 개별적으로 해석함[別解], 종합해서 밝힘[合明], 결론을 맺으면서 수행을 권함[結勸] 네 부분이 있다.

‘이 대용을 쓰라’고 한 것은 앞에서 설한 네 가지 지혜의 대용(大用)을 가리키는 말인데, 지상(地上)에서 불과(佛果)의 지위까지 해당한다.

‘세 가지 큰 일’이란 능히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하는 일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전(地前)의 4위(四位:信·住·行·廻向)에서 닦는 행(行)이다. 이 세 가지 일[三事]은 정(定)과 혜(慧)와 정·혜가 함께 행해지는 일이며 대비(大悲)를 체(體)로 한다.

먼저 ‘정(定)’이란 세 가지 삼매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서로 다른 많은 설이 있다. 혹은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이라고도 하고, 혹은 무작(無作)·무상(無相)·공공(空空)이라고도 하며, 또 혹은 공(空)·무작(無作)·무상(無相)이라고도 하는데, 편의에 따라 세운 것이라 서로 걸릴 것이 없다. 혹 3해탈(解脫)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오직 무루(無漏)에만 해당하고, 세 가지 삼매라고 부르는 경우는 유루(有漏)에도 통한다.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아래 글에서 설명하겠다.

‘안팎이 서로를 빼앗지 않는다’ 함은 내식(內識)과 외경(外境)이 함께 나타나면서 선택적으로 맞고 안 맞음을 취함으로써 모든 선근(善根)을 서로 빼앗지만, 지금은 모두가 공(空)임을 통달하여 서로 빼앗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대의과에서는 도리를 따라 택멸한다’ 함은 4대(大)와 3법문(法門:陰·界·入)에 대해서는 도리[理]에 따라 간택(簡擇:틀린 것을 배제하고 옳은 것을 선택함)하여 모든 상(相)을 깨부숨으로써 본식(本識)의 희론종자(戱論種子:虛妄分別)를 눌러 없앤 것이다. 앞의 삼삼매(三三昧)는 현행(現行)의 번뇌[纏]을 누르는 데 비해, 여기서 말하는 간택의 지혜는 종자(種子)를 누르는 것이니, 이렇게 해서 마침내 4지(智)를 이룰 때 종자를 뽑아내고 8식(識)을 (지혜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여여한 혜와 정에서는 자비로 양쪽을 이롭게 한다’ 함은 앞의 혜(慧)와 정(定)이 모두 여여(如如)한 도리에 따르기 때문에 여여한 혜, 여여한 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 중에 또 대비(大悲)를 닦는 일이 상응(相應)하여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양쪽을 이롭게 한다[俱利]’고 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대비를 떠나 정과 혜만을 닦으면 2승(乘)의 경지에 떨어지고 보살도(菩薩道)에는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또 가령 자비만 일으키고 정·혜를 닦지 않으면 범부(凡夫)의 고질[患]에 떨어져 보살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를 닦아 양쪽에 치우침을 떠나서 보살도를 닦아야 무상각(無上覺)을 이룬다.(여기까지가 두 번째인 別解에 해당한다.)그러므로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이 보리를 성취시킨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를 함께 행하지 않는 자는 생사에 머물고 열반에 집착하여 4지(智)의 대해(大海)에 흘러 들어갈 수 없으므로, 네 가지 마[四魔]가 틈을 타 들어올 수 있다. 이는 셋째로 합명(合明:총표와 별해를 합하여 설명함)에 해당하고, 그 다음 나오는 문장(“장자야, 너희들 대중 ……”)이 수행을 권하는 내용[勸修]으로서 네 번째 부분에 해당한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무엇을 세 가지 삼매라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삼매란 이른바 공삼매(空三昧)와 무작삼매(無作三昧)와 무상삼매(無相三昧)다.”

[論] 여기서부터는 거듭 설명하는 부분[重顯]인데, 두 개의 문답으로 앞의 두 문(門)을 설명하였다. 위 경문은 첫 문을 밝힌 것인데, 이 세 가지 차별에 대략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체용상(體用相)이고, 둘째는 심인과(心因果)이고, 셋째는 식견상(識見相)이다.

‘체용상’을 말하는 이유는 모든 법이 이 세 가지 법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인데, 그 체가 공하므로 공삼매를 세우고, 작용하는 바가 없으므로 무작삼매를 세우고 형상이 없으므로 무상삼매를 세운다.

‘심인과’를 말하는 이유는 인과로 일어나는 것은 심행(心行)에서 일어나기 때문인데, 심행이 공하므로 공삼매를 세우고, 모든 인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무작삼매를 세우고, 모든 과(果)를 얻을 수가 없으므로 무상삼매를 세운다.

‘식견상’을 말하는 이유는, 모든 식[諸識] 자체가 공한 까닭에 공삼매를 세우고, 견분(見分)을 제거하는 까닭에 무작삼매를 세우고, 상분(相分)을 제거하는 까닭에 무상삼매를 세운다. 이는 제3문(第三門)으로 앞에서 ‘안팎이 서로를 빼앗지 않는다[內外不相奪]’고 한 글에 맞춘 것이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무엇을 대의과(大·義·科)라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大)란 4대(大)를 말하고, 의(義)란 음(陰)·계(界)·입(入) 등을 말하고, 과(科)란 본식(本識)을 말하니 이것을 대·의·과라고 한다.”

[論] 이는 두 번째 문(門)을 설명한 것이다. 4대를 따로 세운 이유는 처음 닦아 갈 때 먼저 거친 경계를 가려내기 위해서이다. 모든 법 중에 안의 지체(支體) 등과 밖의 산하(山河) 등 색법(色法)이 가장 거칠다. 이런 법들이 4대를 떠나 있지 않음을 관(觀)하며, 이 4대가 방분(方分)을 갖건 아니건 간에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4대를 얻을 수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려내고[簡擇] 난 뒤에 미세한 뜻을 관찰한다. ‘미세한 뜻[義]’이란 음(陰)·계(界)·입(入)을 말하는데, 간략한 것과 자세한 것과 중간 것이 있다. 간략하게 묶어보면 다섯[五蘊]이고, 자세하게 관찰해 보면 열여덟[十八界]이고, 간략한 것과 자세한 것의 중간으로는 12입(入)을 관하는데, 이 모든 것이 얻어질 수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다음에 ‘등(等)’이란, 그 밖의 다른 법문인 12지(支) 등을 가리킨다. 이렇게 간택하여 관찰하는 힘 때문에 본식(本識) 안에 있는 무시(無始) 이래의 희론명언종자(戱論名言種子)를 덜어내고 누른다[損伏]. 처음에는 덜고 누르고 하다가 마침내는 끊어 없애므로[斷滅], 앞에서 도에 따라서 택멸한다[隨道擇滅]’고 하였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이런 지혜의 일은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삼계(三界)의 경지를 넘어서나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가게 합니다. 이런 법상은 분별이기 때문에 생멸하는 법이니, 분별을 떠나면 법이 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論] 이는 세 번째, 이해했음을 나타낸[領解] 부분인데 여기에 둘이 있다. 먼저는 관행(觀行)을 이해한 것이고, 다음은 경계(境界)를 이해한 것이다.

‘이런 지혜의 일’이란 이 세 가지가 4지(智)를 성취하는 일과 작용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 함은 앞의 둘[定·慧]은 자기를 이롭게 하고, 세 번째 것[大悲]은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삼계의 경지를 넘어선다’ 함은 앞의 둘, 즉 정(定)과 혜(慧)가 범부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 함은 세 번째의 대비(大悲)는 2승(乘)의 경우와 다르기 때문에 저 극단을 떠나서 보살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런……’ 이하는 저 경계를 이해했다는 말이다. 처음에 정(定)의 경계가 모든 식의 견분과 상분임을 알고, 다음에 지혜의 경계가 대(大)·의(義)·과(科)의 법임을 안다. 이런 모든 법상(法相)은 모두 생멸하는 법이니, 망분별(妄分別)로 말미암아 마음의 바다를 동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고요한 것이라서 분별을 떠난다면 빌미가 될 것이 없으니, 무엇을 근거로 생멸(生滅)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법이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經] 그 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분별로부터 생기고

다시 분별을 따라 없어지므로

모든 분별법을 없애면

이 법은 생멸이 아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入因事用을 長行과 重頌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인 중송이다. 이 중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여래께서 간략히 펴신 게송이고, 둘째는 장자가 자세히 연설한 게송이다.

지금 이 게송에서 말씀하신 ‘법’이란 일심법을 가리킨다. 허망한 분별이 마음바다를 요동시키기 때문에 생하거나 멸하는 모든 모습이 예외 없이 분별에 의해 일어나지만, 만약 본각(本覺)의 본래 고요한 쪽으로 본다면 모든 분별을 떠나 있으므로 이 법은 생하거나 멸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본래부터 모든 분별을 멸해서 생멸할 만한 원인이 없으므로 생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생(生)과 멸(滅)의 관계를 모두 분별이 지어낸 것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유가론(瑜伽論)』의 설과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는가? 『유가론』 「사소성지(思所成地)」중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남을 멸(滅)하는 작용도 없고, 스스로 멸하는 작용도 없다. 묻겠다. ‘그렇다면 갖가지 연[衆緣]이 있어서 생하고 갖가지 연이 있어서 멸하는가?’ 대답한다. ‘갖가지 연이 있으므로 생겼고, 생겨나서는 저절로 없어진다.’”

두 설이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는가?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유가론』에서는 인연(因緣) 도리를, 이 경에서는 유식(唯識) 도리를 설명한 것이므로 두 가지 설에 모두 일리가 있다.

[經] 그 때 범행장자가 게송을 듣고 매우 기뻐서 그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법은 본래 적멸이요

적멸 또한 생함이 없나이다.

생멸하는 이 모든 법

그 법은 무생(無生)이 아닙니다.

저것은 이것과 함께하지 않나니

단(斷)·상(常)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양쪽을 떠났으며

하나에 머물지도 않나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장자가 자세히 펼친 게송이다. 여덟 수로 되어 있는데 (의미상)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두 송[1,2]은 앞 내용을 직접적으로 펼친 것이고, 둘째 두 송[3,4]은 그릇된 이해[邪解]들을 깨주는 것이고, 셋째 한 송[5]은 자신이 정확히 이해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넷째 두 송[6,7]은 정설(正說)해 주신 분에게 경례를 하는 것이고, 다섯째 마지막 한 송[8]은 아직 듣지 못했던 것을 말씀해주십사 청한 것이다.

이 게송은 앞 내용을 직접적으로 펼친 첫 번째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도 세 부분이 있다. 첫째 두 구는 앞에서 부처님께서 간략히 펼친 게송 중 뒷부분을 읊은 것이고, 둘째 두 구는 그 앞부분을 읊은 것이다. 셋째 한 송은 이 두 가지 뜻을 전체적으로 연설한 것이다.

첫째에서 ‘모든 법은 본래 적멸’이란 음(陰)·계(界) 등의 법이 본래 적멸하다는 뜻이다. ‘적멸 또한 생함이 없다’ 함은 모든 법이 본래 적멸할 뿐만 아니라, 적멸하다는 도리 역시 생함이 없다는 말이다.

둘째에서 ‘생멸하는 이 모든 법’이란 음·계 등 세속법을 말한다. ‘그 법은 무생이 아니다’ 함은 분별을 따라 동(動)하여 일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진(眞)과 속(俗)이 하나가 아니라는 쪽에서 동(動)과 정(靜)이 뒤섞이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셋째에서 ‘저것은 이것과 함께하지 않는다’ 함은 생겨남 없는 저 적멸법은 이 생멸법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상에 빠지기 때문’이란, 저 적멸법이 이 생멸법과 함께한다고 주장한다면, 생멸하는 이 법은 단멸에 치우치게 되고[斷邊], 상적(常寂)한 저 법은 상주에 치우치게 된다[常邊]. 이는 2승(乘)의 잘못[過]과 같아서 중도(中道)에 위반되므로 ‘단·상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한 게송의 의미는 단과 상의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므로 ‘이것은 둘을 떠났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동정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하나에 머물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하나에 머물지도 않는 이유는, 일실(一實)인 일심(一心)의 성품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을 떠난 이유는 전체가 움직이고 전체가 고요하여 두 개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불가사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經] 법에 하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모양은 모륜(毛輸)과 같을 것이며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것과 같으니

모두 다 허망한 것입니다.

법이 없다고 본다면

이 법은 허공과 같으니

해가 없다하는 장님의 뒤바뀐 견해라

법을 거북 털과 같다고 하는 격입니다.

[論] 두 송은 둘째, 그릇된 이해들을 깨뜨려주는 말이다.

그릇된 이해가 매우 많지만 크게는 두 가지가 있다. 매우 깊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문자 그대로를 뜻이라 착각하고 스스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런 이들은 교화하기 어렵다. 첫째 큰 잘못은, 동정무이(動靜無二)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은 하나다, 즉 일실(一實)한 일심(一心)이다’라고 생각하여 2제(諦)의 도리를 비방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둘째 큰 잘못은 공(空)과 유(有) 2문(門)이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일실(一實)이 있는 게 하니라 2법(法)이 있다’고 생각하여 무이중도(無二中道)를 비방하고 배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그릇된 이해는 약을 먹고 오히려 병에 걸리는 것과 같다. 고치기 어려우므로 지금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밝힌다. 이 두 게송에서 차례로 그것을 설명한다.

‘법에 하나가 있다고 주장한다’ 함은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의 실제[一實]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자기 생각대로 하나의 법[一法]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송했다. ‘그 모양은 모륜과 같을 것’이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일실법의 모습이 눈병 난 사람에게 보이는 모륜(毛輪)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함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 생각하여 쫓아 달려가는 것이 미혹과 전도일 뿐인데, 일심(一心)이 있다는 생각도 그와 같기 때문이다.‘모두 다 허망한 것’이라 함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로 보는 것과 눈병 난 사람이 모륜을 보는 것과 배우는 이가 하나를 있다고 생각하는 등 이런 견해들이 똑같이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無見]를 깨뜨린다.

‘법이 없다고 본다’ 함은 앞에서 말했듯이 2제(諦)는 있고 일심법(一心法)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법은 허공과 같다’ 함은 그가 생각하는 일심이 공의 이치와 같을 것이며, 그 공리 밖에는 본래 일실(一實)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해가 없다하는 장님의 뒤바뀐 견해’란 태어날 때부터 눈 멀고 가난한 거지라서 한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해가 있다고 알려 주어도 없다고 하면서 해가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도(顚倒)일 뿐이다. 저들도 마찬가지로 본래 공(空)과 유(有)만 배우고 무이중도(無二中道)를 들어 본 적이 없어서 말해주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해를 중도(中道)에 비유한 이유는 둥근 해는 원만한 데다 큰 빛이 있어서 눈 먼 사람말고는 다 보기 때문이다. 일심(一心)도 이와 같아서 결함 없이 두루 원만하고 본각과 시각의 큰 빛이 있으므로, 믿지 않는 자 말고는 다 들어간다.

‘법을 거북 털과 같다고 하는 격’이란, 없다는 견해에 빠진 자가 일심법을 두고 ‘이름일 뿐 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 마치 거북이 털이 있다고 하는 격이라, 해가 없다고 하는 장님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經] 제가 이제 부처님 말씀을 듣고

법을 2견(見)으로 알지도 않고

중간에 의지해 머물지도 않아서

머묾 없음에서 이해합니다.

[論] 이 게송은 셋째로 자기 자신이 정확히 이해했음을 표시한 것이다.

‘법을 2견(見)으로 알지 않는다’ 함은 중도(中道)의 법은 있다, 없다는 견해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는 말이다. 즉 앞 두 번째에서 ‘해가 없다’고 한 전도견을 떠난 것이다.

‘중간에 의지해 머물지도 않는다’ 함은 양 극단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중도인 일실(一實)에 머무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견해를 깨뜨려주는 가운데) 첫 번째[8수 중 제3, 제4] 게송에서 비유로 든 눈병 난 사람과 목마른 사슴의 허망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극단에 떨어지는 과실(過失)을 떠났으므로 ‘머물 바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밝혀진 머묾 없는 이치를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머묾 없음에서 이해합니다’라 고 하였다.

[經]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 다 머묾 없음을 따르니

저도 머묾 없는 곳[無住處]을 따라

이곳에서 여래께 예배드립니다.

허공같이 동요하지 않는 지혜이신

여래의 모습에 예배하나이다.

어느 곳에도 집착 없으신 분

머묾 없는 그 몸에 예배하나이다.

[論] 이 게송은 네 번째로, 설해 주신 분에게 예배를 하는 부분인데 그 중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설법해 주신 분에게 경례하는 앞의 한 송이고, 둘째는 설법하신 분의 지혜에 경례하는 다음 두 구이고, 셋째는 설법해 주신 분의 몸에 경례하는 마지막 두 구이다.

첫째 설해 주신 분에게 경례하는 부분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 다 머묾 없음을 따른다’ 함은, 부처님의 교법이 머묾 없음에 순종(順從)하기 때문이다. ‘저도 머묾 없는 곳을 따라 이곳에서 여래께 예배드립니다’ 함은 가르침을 듣고 무주처(無住處)에 순종하게 되어, 가장 존중받을 만한 분이 여래임을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설하신 분께 이 무주처(無住處)에서 예배하는 것이다. 이 중에 ‘무주(無住)’라고 한 것은 2제(諦)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중간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 있지 않으면서도 양 극단을 떠난 것을 말하니, 이런 것을 무주처라고 한다.두 번째(설법하신 분의 지혜에 경례하는 부분)에서 ‘여래의 모습’이란, 상호(相好)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동지(不動智)를 말한다. ‘허공 같이’라 함은 여래의 지혜는 한량없고 끝없어 허공계(虛空界)와 같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한 말이다. ‘동요하지 않는다’ 함은 끝없는 3세(世)에 두루 통달했다는 뜻이다. 시간에는 흐름이 있으나 지혜의 작용은 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 번째(설법해 주신 분의 몸에 경례하는 부분)에서 ‘집착 없다[不着]’ 함은 법신(法身)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났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도……없으신’이라 함은 중간에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머묾 없는 그 몸에 예배하나이다’라고 하였다.

[經] 저는 그 어느 곳에서나

항상 모든 여래를 뵈오니

모든 여래께서는 부디

저를 위해 상법(常法)을 설해 주소서.

[論] 이는 다섯 번째로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묻는 대목이다. 그 중 앞부분에서는 항상 여래를 뵙는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고, 뒷부분에서는 상법(常法)을 말씀해주십사 청하였다.

스스로 말한 부분은 자기가 모든 극단을 떠나 머묾 없는 지혜를 얻었으므로 하나하나의 미진(微塵) 중에 항상 시방세계의 무량한 부처를 뵈오며, 시방세계의 모든 미진 중에서 무량한 부처를 보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곳에서나 항상 모든 여래를 뵈오니’라고 하였다.

“일미진(一微塵) 중에 두루 무량한 부처님을 뵈옵고, 그 일미진 중에서와 같이 일체진(一切塵) 중에서도 그러하다”고 한 『화엄경』의 말씀과 같다. 그러므로 이런 힘이 있어야 상법(常法)을 들을 만하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실 상법을 듣고자 한 것이다.

[經] 그 때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아, 너희들은 잘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상법을 설하리라.”

[論]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 입과상법(入果常法)인데, 이 중에 셋이 있다. 첫째는 여래께서 설하는 부분, 둘째는 장자가 부연하는 부분, 셋째는 대중이 이익을 얻는 부분이다. 첫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말해주겠다고 허락하는 부분과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위 문장은 허락에 해당한다.

[經] “선남자야, 상법(常法)은 상법이 아니어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문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치[諦]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고 경계로 나타난 것도 아니어서, 모든 망집(妄執)과 단견(斷見)의 경계를 떠났다. 이 법은 무상(無常)이 아니므로 모든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떠난 것이다. 모든 식(識)을 투철하게 보면 상(常)이 되나니, 이 식(識)은 항상 적멸하며, 적멸이라는 그것도 적멸하다.”

[論] 이 아래는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상과(常果)를 설명하고, 다음에 상인(常因)을 보여 준다. 먼저 상과를 설명하는 가운데 두 구절은 법상(法常)과 불상(佛常)을 말하고 있다.

처음 중에 ‘상법은 상법이 아니라’ 함은, 부처님이 스승으로 삼는 법신의 체(體)는 생멸상을 떠나 있으므로 ‘상법’이라 하고, 상주성(常住性)을 떠나 있으므로 ‘상법이 아니라’ 하였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문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 함은 설명하는[能詮] 명언(名言)을 끊었기 때문이고, ‘이치[諦]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라’ 함은 설명될[所詮] 실의(實義)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없는 것도 아니고 경계로 나타난 것도 아니어서 모든 망집(妄執)과 단견(斷見)의 경계[際]를 떠났다’ 함은 아예 없는 것[畢竟無:토끼 뿔 같은 것)도 아니며,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경계가 있지 않으므로 망집의 경계를 떠났으나, 무가 아니므로 단견의 경계를 떠난 것이다. ‘제(際)’는 경계의 다른 이름이다.‘이 법은 무상이 아니므로 모든 상견과 단견을 떠난 것이라’ 함은 무상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단견을 떠났으나, 이 법 때문에 모든 상견을 떠난다. 상견이 취한 바는 이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법상(法常)을 밝혔다. 다음에는 불상(佛常)을 드러낸 부분이다.

‘모든 식을 투철하게 보면 상(常)이 된다’ 함은 그 상법을 남김없이 보아서 완전히 보았을 때 모든 식(識)이 항상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무명을 따라 본래 고요한 마음이 동요했지만 지금 투철히 봄에 따라서 본래의 고요함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식은 항상 적멸하며’란 모든 식은 본래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생멸이 없기 때문에 성(性)이 항상 적멸하다는 뜻이다. 지금 똑똑히 보아서 그와 같은 적멸한 식(識)이 영원히 없앴으므로 ‘적멸이라는 그것도 적멸하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저 적멸식(寂滅識)이 무상한 법이므로 저것을 없앨 때 항상함을 얻기 때문이다. 이하 「총지품(總持品)」에 이르기까지 이 뜻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또 본래 적멸한 이 성품은 항상성[常性]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적멸하다’고 하였다.

[經] “선남자야, 법이 적멸한 줄 아는 자는 마음을 적멸하게 하지 않으니 마음이 항상 적멸하기 때문이다. 적멸을 얻은 자는 마음이 항상 참되게 관한다.”

[論] (常果를 설명한 데 이어서) 여기서부터는 상인(常因)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개별적인 설명[別明]과 전체적인 결론[摠結]이다. 별명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는 진증관(眞證觀)이고, 둘째는 방편관(方便觀)이다.

첫째 중에 ‘법이 적멸한 줄 아는 자’란 초지(初地) 이상에서 모든 법이 본래 적멸함을 알기 때문이다. 일어남이 없음을 이미 알기 때문에 마음을 없애지 않는다. 마음을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적멸하기 때문인데, 이는 알아야 할 것[所知]이 적멸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적멸을 얻은 자는 마음이 항상 참되게 관한다’ 함은 증득하는 마음[能證心]이 상주(常住)하여 증득할 도리[所證理]에 순응하므로 생멸하는 모양을 떠나 항상 진조관(眞照觀)을 잃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經] “(적멸을 얻은 자는) 모든 명색(名色)이 다름 아닌 어리석은 마음임을 안다. 어리석은 마음의 분별로 모든 법을 분별하므로 명색말고는 다른 것이 없음을 안다는 것이다. 법(法)이 이런 줄 알아서 문자와 언어를 따르지 않으며, 모든 마음을 오직 뜻[義]에 두어서 나[我]라고 분별하지 않는다.”

[論] 둘째로 방편관을 밝힌 가운데도 둘이 있다. 먼저 유식(唯識)의 심(尋) ·사(思)를 설명하고, 다음에 그 여실(如實)한 지혜를 나타낸다.

첫째 중에 ‘명색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한 데서 명(名)은 4온(蘊)을 말하고, 색(色)은 색온(色蘊)인데, 모든 불상응[不相應行法]은 다 임시로 세운 것[仮立]이라서 이 명색을 떠나서는 별도의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유위(有爲)의 사태들은 다 명과 색에 속한다. 이런 모든 법은 오직 한마음이 만든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면 경계도 없고, 경계를 떠나면 마음도 없다. 이러한 것을 유식(唯識)의 심사(尋思)라 한다.

『화엄경』에서는 이 뜻을 이렇게 말한다. “마음은 화가처럼 갖가지 5음(陰)을 그려낸다. 일체 세간 중에 어느 것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 마음이 그렇듯 부처도 그렇고, 부처가 그렇듯 중생도 그러하여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

여기까지 심사(尋思)를 설명하였다. 다음에는 여실지(如實智)를 나타낸다.

‘법이 이런 줄 알아서 문자와 언어를 따르지 않는다’ 함은 명언(名言)의 심사(尋思)로 이끌어지는 여실지이고, ‘모든 마음을 뜻에 두어서 나라고 분별하지 않는다’ 함은 뜻[義]의 심사로 이끌어지는 여실지이다. 인아(人我)·법아(法我) 두 가지가 모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방편관을 닦는 중에) 그것들을 분별하지 않는다.

[經] “나라는 것이 가명(仮名)임을 알면 적멸을 얻을 것이며, 적멸을 얻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을 것이다.”

[論] 이는 두 번째, 앞 두 가지를 전체적으로 결론지은 부분이다. 앞의 방편관(方便觀)으로 진관(眞觀)을 얻는 것을 결론짓고, 또 진관으로 보리과(菩提果)를 얻음을 결론지은 것이다.

[經] 그 때 범행장자가 이 말씀을 듣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명상(名相)과 분별사(分別事)

그리고 법(法)이 셋이 되며

진여(眞如)와 정묘지(正妙智)가

저것과 다섯을 이루나이다.

제가 지금 알기로 이 법들은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묶인 것이라

생멸하는 길에 들어 있으므로

이는 단(斷)이며 상(常)이 아니오나

여래께서 말씀하신 공(空)한 법은

단견과 상견을 멀리 떠났나이다.

[論] 이 글은 (入果常法을 如來說, 長者演, 大衆得益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로 장자가 연설한 부분이다. 도합 여덟 송(頌)으로 되어 있는데, 세 가지 뜻으로 나뉜다. 첫 두 송 반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가름한 것이며, 다음 다섯 송은 양 극단에 치우친 집착을 깨뜨린 것이며, 마지막 두 구는 무이관(無二觀)을 나타낸 것이다.

처음 가운데 둘이 있으니 앞의 두 송은 양 극단에 떨어진 교리를 밝힌 것이 고, 뒤의 두 구는 양 극단을 떠난 교리를 나타낸 것이다.

처음 가운데 ‘명상(名相)’은 명(名)과 구(句)와 자(字)를 말한다. 구(句)란 명(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자(字)란 명(名)이 의지하는 것인데, 모두 명(名)을 나타내주므로 ‘명상’이라고 통칭한 것이다. ‘분별사’란 모든 유루(有漏)의 마음과 마음이 만들어내는 법의 사건[心法事]을 말한다. ‘그리고 법’이란 앞의 둘을 제외한 모든 법상으로서, 명구(名句)로 나타내지거나 분별의 연(緣)이 되는 것이다. 즉 10색처(色處)와 법처(法處) 중의 색과 불상응 등 모든 법상을 말한다. 이 세 가지는 같은 부류지만 잡염상(雜染相)을 밝히기 위해 셋으로 나누어 따로따로 설명하였다.

‘진여(眞如)’란 정지(正智)의 경계를, ‘정묘지(正妙智)’란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를 말한다. ‘저것과’는 ‘저 앞의 셋과’라는 말이니, 이 뒤의 둘과 저 앞의 셋을 합하여 다섯 가지[五事]가 된다. 이는 삼승교(三乘敎)의 교문(敎門)에서 말한 법상(法相)을 열거한 것이다.

‘제가 지금 알기로는 이 법들은 단견과 상견에 묶인 것이라’ 함은 저 교문에서 말한 다섯 가지가 단견과 상견의 집착에서 떠나지 못했음을 밝힌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저 네 가지 법[진여를 제외한 나머지]은 생멸하는 모양을 띠고 있어 단견(斷見)으로 집착하는 경지를 떠나지 못하고, 진여법은 상주하는 성품이라고 하여 상견(常見)으로 취하는 경지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멸하는 길에 들어있다’고 하였다. ‘이는 단이며 상이 아니라’ 함은, 앞의 셋과 정지(正智)의 법은 다 4상(相:生·住·異·滅)을 띠고 있어 생멸의 길에 들어가므로 상변(常邊)과는 다른 단변(斷邊)임을 구별하고, 그럼으로써 진여(眞如)가 언제나 있다고 하는 길[常有道]에 들어가므로 단변과 다른 상변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공한 법은 단견과 상견을 멀리 떠났나이다’ 함은 일승(一乘)의 교설인 3공(空)의 법이 단·상 두 극단에 치우친 과실을 멀리 떠나 있음을 밝힌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에서 말했듯이 공상(空相)도 공하고, 공공(空空) 역시 공하고, 소공(所空)도 공하다는 이러한 3공은 진(眞)·속(俗)을 파괴하지 않고 그렇다고 진·속을 존립시키지도 않으며, 동(動)·정(靜)을 떠났으나 중간에 머물지도 않아서 단변과 상변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이다.

[經] 인연은 없는 것이라 나지 않으니

나지 않으므로 멸하지도 않나이다.

인연을 유(有)라고 고집하는 것은

허공에서 꽃을 따려는 격이며

석녀(石女)에게 아이를 기대하는 격이라

결국 얻을 수 없으리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양 극단에 치우친 집착을 깨뜨리는 말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 네 송은 유변(有邊)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고, 둘째 한 송은 공변(空邊)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대목이다.

첫째에도 둘이 있으니 앞의 두 송 반은 저 유(有)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고, 뒤의 한 송 반은 저 진공(眞空)을 나타낸 것이다. 첫째 가운데 또 둘이 있으니 처음 한 송 반은 인연(因緣)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고, 다음 한 송은 나머지 세 가지 연[三緣]을 깨뜨린 것이다.

처음 가운데 ‘인연은 없는 것이라 나지 않는다’ 함은 무슨 뜻인가? 본식(本識) 중의 모든 종자는 이숙식(異熟識)과 붙어있든[卽] 떨어져 있든[離] 다 얻을 수 없다. 붙어 있다면 이숙(異熟)과 같을 것이며, 떠나 있다면 토끼 뿔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붙어 있지도 않고 떠나 있지도 않다고 해도 역시 있는 것이 아니니, 병(甁)이나 집 등과 같이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로 생(生)함도 멸(滅)함도 없는 것이지만 3승(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자들은 실제로 인연종자가 있다고 고집한다. 이들은 허공에서 꽃을 따려고 하거나 석녀(石女)에게 아이 낳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다를 바 없다. 이는 ‘인연’을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중에 허공에서 꽃을 따려한다는 것은 물든 종자를 따서 없애려 함을 비유하고, 석녀에게 아이를 바란다는 것은 깨끗한 종자를 얻어서 기르려 함을 비유한다.

[經] 모든 인연을 취하는 일에서 떠나고

다른 것[他]을 따라서 멸하지도 않으며

자체인 의(義)와 대(大)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

여(如)에 의하기 때문에 실(實)을 얻습니다.

[論] 이는 나머지 세 가지 연을 깨뜨린 것이다. 모든 종자의 인연이 있다는 생각은 떠났으나 다른 세 가지 연(緣)으로부터 생긴다고 생각하면서 집착을 하면 그것도 도리에 맞지 않는다. 경(經)에서 “타(他)에 따라서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한 ‘타(他)’란 증상연(增上緣)과 소연연(所緣緣)을 가리킨다.

가령 눈[眼]에 의지하고 색(色)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길 때, 이러한 눈과 색은 식과 동시적이기는 하지만 식성[識]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타(他)’라고 한다. 등무간연(等無間緣)은 비록 식의 부류이기는 하지만 체(體)가 이미 없으므로 멸(滅)이라고 한다. ‘타(他)’니 ‘멸(滅)’이니 하는 것은 모두 자성(自性)이 없다. 그러므로 식(識)은 저것들을 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자체인 의와 대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及於己義大]’라 함은 무슨 뜻인가? 다음과 같이 잘못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온(蘊)·계(界) 등의 법은 미래세 중에 각각 자기 체(體)가 있으나 아직 생기지 않았을 뿐이다. 이 자기 체로부터 현재세에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막기 위하여, 자체의 의(義)와 대(大)를 따라 나오는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 위 구절에 나오는 ‘따르지 않는다[不從]’는 말이 여기까지 걸린다. 여기서 말하는 ‘의(義)’는 음(陰)·계(界)·입(入)을, 대(大)란 4대(大)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법들이 본래 자체(自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자체인 의와 대[己義大]’라고 하였다.

‘여에 의하기 때문에 실을 얻는다’ 함은 (범행장자) 자신이 여여한 도리에 의해 유에 대한 모든 집착을 깨뜨렸기 때문에 실의(實義)를 얻었다는 뜻이다.

[經] 그러므로 진여의 법은

항상 자재하고 여여(如如)하지만

온갖 모든 만법은

여여가 아닌 식(識)이 변화해낸 것이라

식을 떠나면 그 법이 공(空)하므로

공한 곳으로부터 설하나이다.

[論] 이는 진공법(眞空法)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는 앞에서 유(有)에 집착하는 것 모두가 허망하여 그것을 깨뜨리는 자만이 실(實)을 얻기 때문에 한 말이다. 진여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망법(妄法)이 성립되지 않는다.

‘식이 변화해낸’이란 식(識)이 이리저리 생각해내는[計] 것을 말한다. 그렇게 생각해낸 상[所計相]은 이치상[理]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망정[情]에 따라 있는 것이기에 ‘변화해낸 것[所化]’이라고 한다. 모든 법은 진여가 아니라 식이 변화해낸 것이기 때문에, 식을 떠난 법은 공(空)하고 무소유(無所有)하므로, 체가 공한 곳으로부터 진여를 설한다고 하였다.

[經] 생멸하는 모든 법을 멸하고

열반에 머물지만

대비(大悲)가 그것을 빼앗아

열반이 사라져 머물지 않게 하고

[論] 앞글에서 이미 유(有)에 대한 범부(凡夫)의 집착을 깨뜨렸으므로 이번 게송에서는 공(空)에 머무는 2승(乘)의 집착을 빼앗는다. 2승을 닦는 사람들은 육신과 지혜가 생멸하는 모든 법을 없애버리고 열반에 들어 8만겁(萬劫)을 거기 머물고, 내지 10천겁(千劫)을 머문다. 모든 부처님의 동체대비(同體大悲)로 저들의 열반을 빼앗아 마음을 다시 일으키게 하니, 마음을 일으킬 때 열반이 사라진다. 마치 큰 상인이 환술로 지어낸 성[化城]을 없애고 다시는 그 안에 머물지 않듯이. 그들이 무심(無心)일 때는 바로 깨뜨릴 수가 없으므로, 모든 부처님들이 저들의 열반을 빼앗음을 나타냈다. 그렇게 하여 아직 들어가지 못한 자들의 뜻을 막았다.

여기까지 해서 유(有)·무(無) 극단에 떨어지는 것을 깨뜨리는 말씀이 끝났다.

[經]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전변하여

여래장(如來藏)에 들게 하나이다.

[論] 이는 셋째로 무이관(無二觀)을 보여준 것이다. 이미 범성(凡聖)이 가지는 두 극단에 대한 집착을 없앴으므로 이번에는 저 범성(凡聖) 두 부류들을 능(能)·소(所)가 평등한 관(觀)에 들게 한 것이다. 위의 여덟 송이 장자(長者)가 연설한 부분이다.

[經] 그 때 대중이 이러한 뜻을 듣고 모두 정명(正命)을 얻어 여래와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갔다.

[論] 이는 (入果常法을 셋으로 나눈 가운데) 세 번째, 대중이 이익을 얻는 부분[大衆得益]이다.

‘정명을 얻었다’ 함은 유·무의 극단을 떠나고 중도(中道)의 바른 혜명[正慧命]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래에 들어갔다’ 함은 이미 부분적으로 여래의 지혜[如來智]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갔다’ 함은 본각의 깊고 넓은 뜻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8. 총지품(摠持品)

[論] 이 품(品)에서는 앞의 여러 품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하여 요점을 잃지 않고 다 지니게[摠持] 하기 때문에 「총지품(總持品)」이라 하였다.

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이미 문의다라니(文義陀羅尼)를 얻었으므로 모든 품(品)에 나온 글 뜻을 총지하고, 대중이 의심 낸 곳을 기억하여 차례로 물어서 모든 의심을 잘 해결해주므로, 묻는 이를 기준으로 이 품을 ‘「총지품」’이라 하였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이르러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존자(尊者)시여, 제가 보기에 대중들은 마음에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의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여래께서 의심을 제거해주시려 하니, 제가 대중을 위해 의심나는 대로 묻겠습니다. 부처님의 자비로 불쌍히 여겨 부디 허락하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아, 네가 이렇게 중생을 구제하려고 하니, 이것은 대비(大悲)로써 그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 불가사의하다. 너는 자세히 물어라. 너를 위해 말해주겠다.”

[論] 정설분(正說分)을 크게 둘로 나누었고, 그 중 하나인 각각의 관행을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부분[別明觀行]이 앞에서 끝났다. 여기서부터는 정설분 중 두 번째로 모든 의문을 총괄적으로 해결하는 부분[摠決諸疑]이다.

이 중에도 넷이 있는데 청하는 부분[請], 허락하는 부분[許], 의심을 해결하는 부분[決], 이해하는 부분[領]이다. 위 경문에 나오는 문답은 청함과 허락함이다. 여기서 청하는 사람은 지장보살이다. 이 사람은 이미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얻었으므로, 대지[地]가 초목을 키우듯 모든 중생의 선근(善根)을 다 키우고 자라게 한다. 다라니로써 모든 공덕을 간직하고, 큰 보배 창고[藏]에 진귀한 보배가 끝없듯이 모든 중생에게 끝없이 은혜를 베푼다. 이러

한 두 가지 뜻을 따서 그의 이름을 ‘지장(地藏)’이라 한다. 지금 이 품(品)에서는 모든 의혹을 해결하여 온갖 믿음과 이해를 생기게 하고, 의심을 풀고 번뇌를 끊는 모든 보배를 꺼내서 법을 구하는 대중에게 베풀므로 뜻이 그의 이름과 맞기 때문에 그가 등장해서 청하고 물은 것이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은 어찌하여 연(緣)으로 생기지 않습니까?”

그 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설하셨다.

만약 법이 연으로 생긴 것이라면

연을 떠나서는 법이 없으리라.

법의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연(緣)이 법을 생할 수 있으랴.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갖가지 의심을 정면으로 결단하는 부분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6품(品)에서 일어난 여섯 가지 의심을 역순으로 결단하고, 둘째는 한 품에서 일어난 세 가지 의심을 순서대로 결단한다.

첫째 가운데 또 둘이 있으니, 첫째는 따로 결단하는 것이고, 둘째는 전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처음 따로 결단하는 중에서는 여섯 품의 여섯 가지 의심을 따로따로 결단하는데, 뒤에서부터 앞으로 점차 거슬러 올라가는 차례로 한다. 지금 이 문답은 「여래장품」에서 일어나는 의문을 결단한 것이다.

「여래장품」에서 ‘인연은 없는 것이라 생기지 않으니, 생기지 않으므로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생기게 하는 인연이 있다고 집착하여, 그 과(果)가 어떻게 인연으로 생긴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이가 있으므로, (지장보살이) 저들의 의심에 따라 연생(綠生)에 관하여 물은 것이다. 여래께서는 한 게송으로 이 의심을 바로 결단했다.

이 게송 중 위의 반은 그들의 본래 고집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아래 반에서는 그 여세를 타고 연으로 생긴다는[緣生] 견해를 깨뜨렸다. 그렇게 하신 의도는 연(緣)이 법(法)을 생(生)하지 않는다고 하면, 토끼 뿔 같은 무법(無法)을 기대하겠기에, 이와 같은 비량(比量)으로 저들의 의심을 결단해준 것이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법이 만약 생기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법을 설하되 그 법이 마음에서 생긴다고 하십니까?”

이에 존자(尊者)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에서 생긴 이 법,

이 법은 능취와 소취이니

취(醉)한 눈에 보이는 헛꽃과 같아라.

이 법도 그러하여 저것과는 같지 않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진성공품(眞性空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결단한 것이다. 「진성공품」에서 “내가 법을 설하는 이유는 너희 중생이 있다거나 일어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내가 법을 설한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저 글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실 때, 설하는 그 법이 부처님의 마음에서 생기고 있는데, 어찌하여 법이 무생(無生)이라고 하시는가?”라는 의문을 낼 수가 있다. 이러한 의문을 제거하기 위하여 게송

을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의심을 단도직입적으로 떨쳐주는 부분[直遣]이고, 둘째는 거듭 결단해주는 부분[重決]이다. 첫 게송은 직견이다.‘마음에서 생긴 이 법, 이 법은 능취와 소취’라 함은 지금 너희들이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긴 법’이란, 마치 술 취한 눈에 보이는 헛꽃과 같이, 단지 망심(妄心)이 취하는 것[能取]과 그 대상[所取]이라는 것이다.

‘이 법도 그러하여 저것과는 같지 않다’ 함은 너희가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긴 법’은 저 헛꽃과 같은데, 이 법도 그러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 아니며, 너희가 생각하는 생함[生]과 같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너희가 생각하는 법은 헛꽃과 같이 (망심에 의해) 취해진 바이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반면, 내가 설하는 법은 말과 생각이 끊어져서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다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법이 그렇다면 그 법은 상대가 없을 것이며[無待], 상대가 없는 법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겠나이다.”

이에 존자께서 게송으로 설하셨다.

법에는 본래 유무(有無)가 없고

자타(自他)도 그러하다.

시작도 아니요, 또한 끝도 아니며

성패(成敗)가 머무르지 않느니라.

[論] 이는 (첫 번째 直遣에 이어) 두 번째 거듭 결단해주는 부분[重決]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따져 묻고[難], 다음에 의심을 결단[決]한다.

따져 묻는 의도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언교(言敎)의 법이 소취(所取)가 아니기 때문에 헛꽃과는 달리 아예 없는 것[畢竟無]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법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한다. 상대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진여(眞如)와 같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게(偈)를 설하셨다.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다. ‘내가 설한 법은 명언(名言)을 끊었으므로 그 법에 본래 있고 없음, 자기와 남, 시작과 끝이 없다. 이루어짐에나 무너짐에나 머물지 않는데, 어떻게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논란하는 자가 든 이유[因]가 자기주장을 증명하는 데 맞지 않는 오류[相違過]를 범했음을 드러낸다. 무슨 말인가? 법에는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없다.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소취가 없는 것과 같이, 또는 진여와 같이. 이와 같은 도리로 저 논란은 성립되지 않는다. 논란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의심했던 바가 해결되었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의 모습은 본래 열반이며, 열반과 공상(空相)도 그러하여 이러한 법들이 없으니 그 법이 여여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법이 없으니 그 법이 여여하다.”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입실제품(入實際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하는 글이다. 「입실제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력보살(大力菩薩)이 “중생의 심상(心相)은 여래(如來)와 같으므로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을 것입니다” 하자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그렇다. 중생의 마음에는 실로 다른 경계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본래 깨끗하기 때문이며, 이치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혹 이 글을 보고 이런 의심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다. ‘본래 깨끗한 마음이란 바로 이치와 같다[如理]. 본래 청정한 자성열반(自性涅槃)이거늘, 열반을 또 공하여 없게 만든다면 그것은 그릇된 무[邪無]가 될 것이다’라고. 이러한 의심을 몰아내기 위해 모두 여여하다고 말씀하셨다.글에 네 부분이 있다. 묻고[問], 허락하고[許], 이해하고[領解], 결론짓는[述成] 부분이다. 첫째, 묻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공(空)의 이치로 본다면 모든 법의 모양은 본래 청정한 열반이다. 다시 열반과 그 공한 모양을 융합하면 열반과 공(空)의 차별이 없어져 일미법이므로 이 법은 여여한 것이리라’ 이렇게 고집하는 것에 반론을 펴기 위해 물음을 던진 것이다. 둘째, 답에서는 물은 그대로라고 허락을 하신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나이다. 이와 같이 여여한 모양은 함께하는 것[共]도 함께하지 않는 것[不共]도 아니며, 뜻으로 취한 것[意取]과 업으로 취한 것[業取]이 모두 공적(空寂)하며, 공적한 마음법은 구취(俱取)·불구취(不俱取)도 적멸할 것입니다.”

[論] 이는 셋째로 지장보살이 이해한 부분인데, 숨은 논란을 제거하기 위해 한 말이다. 혹시 앞 설명을 듣고 이렇게 따질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본래 열반(涅槃)이 이미 일여(一如)한데, 만약 열반과 그 공상(空相)을 융합하면 제2의 여(如)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여(如)가 함께하는가, 함께하지 않는가? 함께 한다면 두 개가 병립하므로 여여한 이치가 아닐 것이며, 함께하지 않는다면 오직 하나의 여(如)이기 때문에 공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이런 논란을 제거하기 위해 ‘함께 하는 것도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함은 두 가지 여[二如]가 없기 때문이며,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 함은 둘 다 없애기 위해서이다. 없앤 것은 둘이지만 없앤 곳은 둘이 없다. 그러므로 저들의 논란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뜻으로 취한 것과 업으로 취한 것이 모두 공적하다’함은 둘 다 없앴으나 없앤 곳은 둘이 없음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뜻으로 취함[意取]’이란 열반을 가리킨다. 적멸을 연하는 마음으로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업으로 취함[業取]’이란 생사를 말한다. 모든 번뇌의 업으로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공하니, 공적하여 둘이 없다.

‘공적한 마음법은 구취(俱取)·불구취(不俱取)도 적멸할 것이라’ 함은, 일심법 역시 그 하나를 고수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생사와 열반은 공적하여 둘이 없으니 둘 없는 곳이 바로 일심법이다. 일심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 그러나 두 문을 동시에 취한다면 둘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심(心)을 얻을 수 없다. 두 문을 폐기하여 다 취하지 않는다 해도 무(無)는 심이 아니기 때문에 심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뜻에서 둘 없는 마음법은 동시에 취하는 것과 동시에 취하지 않는 것에서도 적멸하다.

[經] 이 때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공적한 모든 법,

이 법은 적멸하나 공하지 않으니

저 마음이 공하지 않을 때

마음이 있지 않음을 얻는다.

[論] 이는 네 번째, 여래가 결론짓는 부분이다.

‘공적한 모든 법’이란 생사와 열반의 모든 공적한 법을 말한다. ‘이 법은 적멸하나 공하지 않다’ 함은 둘 아닌 심법은 아예 없는 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법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바로 그 때 마음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앞서 ‘구취와 불구취가 모두 적멸일 것이라’한 말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經] 이 때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이 법은 3제(諦)가 아니니 색이 공하고 심도 적멸합니다. 이 법[색법·심법]이 본래 적멸해 있을 때 이 법[본각]도 적멸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고

저것(본각)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니

이런 곳에는

저런 것이 있지 않네.

[論] 이는 네 번째 결단으로서 「본각리품(本覺利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풀어준 부분이다. 「본각리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무주보살(無住菩薩)이 “모든 경계가 공하며, 모든 몸이 공하며, 모든 식(識)이 공하다면 각(覺)도 공해야 할 것입니다”하자, 부처님께서 “일각(一覺)이라고 할 만한 것은 훼손되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공도 아니고 공 아닌 것도 아니어서, 공이다 불공이다 할 것이 없다”라고 하셨다. 이 글을 빌미로 거기에 이런 의심을 낼 수 있다. ‘일심 역시 있는 것이 아니라서 적멸하다면, 어째서 앞에서는 일각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색(色)과 심(心)의 공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는가?’라고. 여기서는 이렇게 의심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져 본 것이다.‘이 법은 3제가 아니라’ 함은 앞 게송에서 ‘일심법은 색·심과 같은 식으로 공한 것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3제(諦)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제의 문(門)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색제(色諦)와 심제(心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둘째는 유제(有諦)와 무제(無諦)와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이다. 셋째는 이 품(品) 중 뒤의 글에서 설한 것과 같다.

지금 묻는 뜻은 이 세 가지 중 첫째 문에 의거하고 있다.

‘색이 공하고 심도 적멸하다’ 함은 이 법[一心法]이 이미 3제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상(色相)이 본래 공하고 심(心)도 적멸(寂滅)이므로 이 색법과 심법이 본래 적멸할 때 일심법도 마땅히 적멸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게송에서 ‘마음이 있지 않다’고 했으므로 곧 앞에서 말한 ‘공과 같지 않다’고 한 것은 헛된 말이 될 뿐이다. 이와 같이 의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물리치기 위해 이 게송에서는 그것과 같지 않음을 밝혔다.

‘법은 본래 자성이 없다’ 함은 색법(色法)과 심법(心法)이 본래 자성이 없다는 말이다. ‘저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 함은 저 본각(本覺)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란 뜻이다. 생긴 색과 심은 차별상(差別相)인데 저 본각의 마음은 형상과 성품을 떠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차별된 곳에는 저렇게 형상을 떠난 일각(一覺)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색과 심의 차별상을 공(空)하게 할 때, 형상을 떠난 일각마저 같이 쫓아버릴 수는 없다. 이러한 도리로 보건대 앞에서 한 말은 헛말이 아니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면 어째서 동일하지 않나이까?”

이에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이 머무는 곳은 아무데도 없으며

상(相)과 수(數)는 공하므로 없는 것이다.

명(名)과 설(說), 이 두 가지와 법은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이니라.

[論] 이것은 다섯 번째, 「무생행품(無生行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한 것이다. 「무생행품」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연(緣)이 일어난다[起]고 해서 생하는 것도 아니고, 연이 없어진다[謝]고 해서 멸하는 것도 아니다. 존재가 처소를 갖는 것이 아니라서 머무는 것을 보지 못하니, 결정성(決定性)이기 때문이다. 이 결정성은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 글을 보고 이런 의심을 낼 수 있다. ‘색(色)·심(心) 등의 법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평등하고 결정한 실성(實性)이다. 이는 횡적으로 색·심의 차이가 없고, 종적으로 생·멸의 구별이 없음을 의미한다. 차이가 없고 구별이 없다면 일미(一味)로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마땅하겠지만 어째서 동일하지 않다고 하느냐?’하는 의심이다.

송(頌)에서는 이에 대하여 동일하지 않다는 뜻을 나타낸다.

‘법이 머무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함은 모든 법의 머묾과 머무는 곳이 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相)과 수(數)는 공하므로 없는 것’이라 함은 색심(色心) 등의 상(相)과 일이(一異) 등의 수(數)가 다 공하므로 없다는 것이다. 상과 수가 이미 없는데 어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또 색(色)이 없으므로 심상(心相)도 없다. 이미 다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인가? 그런데 ‘명(名)과 설(說) 두 가지와 설한 법이 있다’는 것은 취하는[能取] 망심(妄心)이 취한 것[所取]이지 여실한 뜻[實義]에서 하나니, 둘이니 하는 것이 아니다. ‘명(名)과 설(說)’이라 한 데서 명(名)은 설명하는 기능[詮用]으로서 의식(意識)이 취하는 것이며, 설(說)은 말소리[語聲]로서 이식(耳識)이 요별하는 것이다. 하나라고 하자니 이 두 가지가 있고, 그 가운데 설명되는[所詮] 법도 있다. 이와 같은 수(數)는 망심(妄心)이 취하는 것이지 저 실의(實義)에 이러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가운데 일미(一味)가 있겠는가?[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상(法相)은 양쪽 언덕[二岸]에 머물지 않으며, 중류(中流)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심식(心識)도 그러하다면 어째서 모든 경계가 식으로부터 생긴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식이 무언가를 생겨나게 한다면 이 식도 무언가로부터 생겨난 것일텐데 어떻게 무생(無生)의 식이 무언가를 생겨나게도 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기도 하겠습니까?”

이에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소생(所生)과 능생(能生) 두 가지는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라

모두 본래 이름뿐이요 자성(自性)이 없으니

있다고 취(取)하면 헛꽃이나 허깨비니라.

식(識)이 생기기 전에는

경계도 그 때는 생기지 않고

경계가 생기기 전에는

그 때는 식 역시 멸해 있다.

저 두 가지 다 본래 없는 것이라

있게 하지 못하며 생하게 하지 못한다.

생함이 없으니 식도 없는데

어떻게 경계가 그것을 따라 있으랴.

[論] 이것은 여섯 번째 「무상법품(無相法品)」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해결한 부분이다. 그 품(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무엇이 생멸려지(生滅慮知)의 모양입니까?” 라는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이치에는 가부(可不)가 없다. 만약 가부가 있다면 갖가지 망념[念]이 생기는 것이니, 천사만려(千思萬慮)가 바로 생멸(生滅)의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뒤의 말을 근거로 저 말에 이런 의심을 낼 수 있다. ‘만약 식(識)이 가부의 경 계를 생기게 하고 경계의 모양이 다시 여러 가지 망념의 식을 생기게 한다면, 심식(心識)에 생멸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양쪽 언덕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가? 모든 심식이 생함도 멸함도 없다면 어떻게 모든 식(識)이 경계를 생기게 하는가?’ 이러한 의심에서 위와 같이 물은 것이다.

‘양쪽 언덕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기 때문이다. ‘중류에도 머물지 않는다’ 함은 하나도 아니기 때문이다. 심식(心識)도 이와 같아서 생하고 멸함이 없는데, 어떻게 식에서 생겨나는 가부의 경계가 있다 하겠는가? 만약 식이 경계를 생기게 한다면 식도 경계로부터 생겨날텐데, 어떻게 무생(無生)의 식이 (경계를) 생기게 하고 (경계로부터) 생겨나겠는가? 이러한 의심을 내쫓기 위하여 세 게송을 설하셨다. 이 세 게송은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한 게송은 그 도리를 보여주는 것이요, 나중의 두 게송은 형상이 집착을 생기게 하는 것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 둘은 능연과 소연이라’ 함은 ‘식(識)은 능생(能生)이고, 경계는 소생(所生)’이라는 너희들의 생각은 망심에서 취한[妄取]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다 본래 이름 뿐이요,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있다고 집착한다면 헛꽃이나 환상을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격이다. 그러므로 생겨남이 없고 멸함이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집착을 깨뜨리는 가운데 ‘식(識)이 생기기 전에는 경계도 생기지 않고’라 함은 능생(能生)의 식이 아직 있지 않을 때는 소생(所生)의 경계도 그 때는 생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경계가 생기기 전에는 그 때는 식 역시 멸해 있다’ 함은 능생의 경계가 아직 있지 않을 때는 그 소생의 식도 그 때는 멸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멸(滅)이란 적멸(寂滅)로서 본래 없음을 뜻한다.

‘저 두 가지 다 본래 없는 것이라 있게 하지 못하며[不有] 생하게 하지 못한다[無有]’ 함은 저 두 가지 능생이 본래 다 없는 것이라, 이미 무언가를 생기게 할 능력[能生]이 없다면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불유(不有)’라 하였고, 있게 하지 못하므로 다음 찰나에 생기게 함이 없으니 그러므로 ‘무유(無有)’라 하였다. ‘생함이 없으니 식도 없다’ 함은 생기게 한다는 이치가 이미 없는데 어떻게 식이 있을 수 있느냐는 뜻이다. 식이 없으므로 경계가 그것을 따라서 있지 않다.이 중에는 두 가지 논증식[比量]이 있다. 하나는 이렇다. ‘식은 생하지 않는다. 생겨나게 하는 공능[能生]이 없기 때문이다. 불탄 종자[燋種]와 같이.’ 또 하나는 이렇다. ‘경계는 일어나지 않는다. 근거[所從]가 없기 때문이다. 거북 털과 같이.’ 이상 여섯 대목은 의심들을 따로따로 해결한 부분이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법상(法相)은 이와 같이 안팎이 다 공(空)하며, 경(境)·지(智) 두 가지 허다한 것들은 본래 적멸합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실상(實相)의 진공(眞空)은 그와 같은 법들이 모인 것이 아니겠습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설법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확정짓는 부분[摠定所說]이다. 위 여섯 가지 의문의 해결이 병(病)이 아니라 약임을 총괄적으로 판정한 것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정하고, 다음에 그것이 약이라는 사실을 확정한다. 앞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지장보살이) 자세히 묻는 부분이고 다음은 (여래께서) 확정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법상은 이와 같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씀하신 여섯 부분의 법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했음을 나타낸다. ‘안팎’이라 한 이유는 식(識)은 안이고 경계는 밖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허다한 것들’이란 경계와 지혜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모인 것이 아니라[非集]’ 함은 잡되고 물든 생사의 질환을 모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공(空)에 집착하여 도리어 여러 가지 환난을 모아 놓은 것과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여실(如實)한 법은 무색(無色)이며, 무주(無住)이며, 소집(所集)이 아니며, 능집(能集)도 아니며, 의(義)가 아니며, 대[大:어떤 본에는 ‘文’으로 되어 있다]도 아니며, 하나의 근본인 과법[科法:어떤 본에는 ‘科’가 ‘利’로 되어 있다]이며, 깊은 공덕의 더미[聚]이다.”

[論] 이는 여래께서 확정적으로 인정하는 부분[定許]이다. 유(有)에 집착하는 병을 내지 않기 때문에 ‘무색’이라 하였고, 악취공에 집착하는 환란을 떠났기 때문에 ‘무주’라 하였다. 고제(苦諦)가 공하기 때문에 ‘소집(所集)이 아니라’ 하였고, 집제(集諦)가 공하기 때문에 ‘능집(能集)이 아니라’ 하였다.

음(陰)·계(界) 등의 차별된 뜻을 떠났기 때문에 ‘의가 아니라[非義]’ 하였고, 지·수·화·풍(地水火風) 등 지어내는 상[能造相]을 떠났기 때문에 ‘대가 아니라[非大]’ 하였다.

‘하나의 근본인 과법[一本科法]’이란 하나의 본각[一本覺]을 말한다. 이것을 뿌리로 삼아 모든 작용과 모든 공덕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科)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잡염(雜染)의 과로서 모든 본식(本識)을 말하니 그 뜻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고, 둘째는 순정(純淨)의 과로서 하나의 본각을 말하니 이 글에서 설한 것과 같다.

저 본식 중에는 모든 잡염의 종자가 쌓여 있고, 이 본각 중에는 오직 매우 깊은 성품의 공덕 더미만 있다. 형상과 성품을 떠났으므로 ‘깊다’ 하고,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많기 때문에 ‘더미’라 하였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고 불가사의한 더미입니다. 제7식과 제5식이 생하지 않으며, 제8식과 제6식이 적멸하며, 제9식의 상(相)이 공하여 없습니다. 유(有)도 공하여 있지 않고 무(無)도 공하여 있지 않으니, 존자께서 설하신 대로 법(法)과 의(義)가 모두 공하나이다.

공에 들어가 행이 없으나 그렇다고 모든 업(業)을 잃지는 않으며, 아(我)와 아소(我所), 능·소의 신견(身見)이 없고 안팎의 번뇌가 모두 다 고요하며, 따라서 바라는 마음 또한 그칩니다. 이러한 이관(理觀)은 혜(慧)와 정(定)이 진실하고 여여하니, 존자께서 항상 설하신 이러한 공법(空法)은 좋은 약이 되겠습니니다.”

[論] 이 부분은 이 법이 약(藥)이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보살이 자세히 묻고, 다음에 여래께서 그 물은 뜻을 승인하신다.

물음은 셋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앞에서 말한 깊은 공덕의 더미[深功德聚]를 이해한 것이고, 둘째는 이어서 이관(理觀)에 깊이 들어감을 밝힌 것이고, 셋째는 양약(良藥)의 훌륭한 효능[德]을 묻는 것이다. 첫째 부분도 총표(摠標)와 별현(別顯), 그리고 다시 총결하는 부분[摠結]의 셋으로 나뉜다.

‘불가사의한 더미’는 형상을 떠나고 성품을 떠난 공덕을 총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별현(別顯) 중에서는 먼저 모습을 떠났음을 밝히고 나중에 성품을 떠났음을 드러낸다.

먼저 (모습 떠났음을 밝히는) 가운데 ‘제7식과 제5식이 생하지 않는다’ 함은 두 가지 지말적인 식[末識]이 공함을 합해서 말한 것이다. 항상 작용하는 식[恒行識] 중에서는 제7식이 지말이 되고, 항상 작용하지 않는 식[不恒行] 중에서는 전5식이 지말이 되기 때문이다. ‘제6식과 제8식이 적멸하다’ 함은 두 가지 본식(本識)이 고요함을 합해서 설명한 것이다. 항행식 중에서는 제8식이 근본이 되고 불항행식 중에서는 제6식이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성품을 떠났음을 드러낸다. ‘제9식의 상이 공하여 없다’ 함은 제9식의 상 또한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유도 공하여 있지 않다’ 함은 모습 떠났음을 거듭 말한 것이다. 상(相)을 갖는 여덟 가지 식[八識]의 법이 공하여 있다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무도 공하여 있지 않다’ 함은 성품을 떠났음을 거듭 설명한 것이다. 모습을 갖지 않는 제9식의 성품이 공하여 있다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심(一心)이 이와 같이 형상을 떠났고 성품을 떠났으므로 무량한 공덕의 더미가 되니 이러한 것을 두고 부사의취(不思議聚)라고 부른다.

‘존자께서 설하신 대로 법과 의가 모두 공하다’ 함은 셋째로 모습과 성품을 떠났음을 전체적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다음에는 이관(理觀)을 밝히는데 이 중에 둘이 있다. 하나는 개별적으로 설명한 부분이고, 또 하나는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부분이다. 별명 가운데 3 구가 있다.

‘공에 들어가 행이 없으나 그렇다고 모든 업(業)을 잃지는 않는다’ 함은 공삼매(空三昧)를 말한다. 이관으로 공(空)에 들어가 능·소의 작용이 없다. 능·소가 없기는 하지만 6바라밀 등의 업(業)을 잃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음에는 무상삼매(無相三昧)를 밝힌다. ‘아와 아소, 능소의 신견이 없다’ 함은 견(見)에 속한 모든 번뇌의 모습을 떠나고, 아상과 아소상이 지니는 능견(能見)·소견(所見)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안팎의 번뇌가 모두 다 고요하다’ 함은 애(愛)에 속한 모든 결사(結使)의 모습을 떠났음을 말한다. 안쪽으로 얽어매는[結] 모든 번뇌와 바깥쪽으로 부려먹는[使] 모든 번뇌 등 삼계 번뇌의 모습들이 공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를 ‘무상삼매’라고 부른다.

‘따라서 바라는 마음 또한 그친다’ 함은 무원삼매(無願三昧)를 설명한 것이다. 삼계의 법이 모두 적정(寂靜)하기 때문에 원하고 구하는 마음이 자연히 영구하게 멈춰버린다. 이런 것을 ‘무원삼매’라고 한다.

‘이러한 이관(理觀)은 혜와 정이 진실하고 여여하다’ 함은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구절이다. 앞에서 본 세 가지 삼매는 모두 이관으로서, 지(止)와 관(觀)에 치우침이 없으며, 능·소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자께서 항상 설하신 이러한 공법은 좋은 약입니다’ 함은 셋째 자세히 여쭙는 말이다. 이와 같은 공법(空法)은 모든 공덕을 갖추어 모든 번뇌[結使]를 치료하는 것이므로 양약이 되지 않겠나이까 하고 묻는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공하기 때문이다. 공성(空性)이 생함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생함이 없으며, 공성이 멸함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멸함이 없으며, 공성이 머묾이 없으므로 마음 또한 머묾이 없으며, 공성이 작위가 없으므로[無爲] 마음도 작위가 없다. 공(空)하여 출입이 없어서 모든 득실(得失)을 떠났으며, 음(陰)·계(界)·입(入) 등이 모두 다 없는 것이다. 마음이 여여하여 집착하지 않음도 이와 같다. 보살아, 내가 여러 가지 공(空)을 설하는 것은 갖가지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서이다.”[論] 이는 여래께서 확정하고 허락하는 부분인데, 여기에도 셋이 있다. 첫째는 전체적으로 허락한 부분[摠許](이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허락한 부분[別許], 셋째는 의심을 결단하여 확정하는 부분[決定])이다.

‘공하기 때문’이란 양약(良藥)이 되는 것은 오직 공이기 때문이며, 유(有)는 병을 낳기 때문이다.

‘공성(空性)……’ 이하는 둘째 별허(別許)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다. 먼저 ‘공’이라는 양약을 먹었기 때문에 유전(流轉)하는 좋지 않은 결과를 떠남을 밝히고, 다음에는 ‘공’이라는 양약을 먹었기 때문에 집착이라는 원인의 병을 치료함을 밝힌다.

처음 중에 ‘공성이 생함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생함이 없다’ 함은 공에 들어간 마음은 공과 같아서 생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 멸함 없음을 따라서 마음이 항상 멸함이 없으니, 생멸은 바로 무상(無常)의 뜻이기 때문에 저 둘을 뒤집어서 상(常)이라고 하였다.

‘마음 또한 머묾이 없다’ 함은 처음과 끝의 모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머무는 모양도 없다는 말이니, 이는 3상(相)을 떠났음을 따로따로 설명한 것이다. ‘마음도 작위가 없다’ 함은 저 세 가지 유위상(有爲相)을 떠났음을 총괄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는 공이라는 약을 먹고 덧없다고 생각하는 병[無常病]을 고침을 밝힌 것이다.

다음에는 집착하는 병도 떠났음을 밝히는 대목이다. ‘출입이 없다’ 함은 출관(出觀)과 입관(入觀)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득실을 떠났다’ 함은 새 것을 얻고 낡은 것을 잃었다는 생각을 떠났다는 말이다.

‘마음이 여여하여 집착하지 않음도 이와 같다’ 함은 관하는 마음도 공의 이치와 같아서 출입득실(出入得失)의 모양을 취하지 않으며, 음(陰)·계(界)·입(入) 등의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공이라는 약을 먹고 집착하는 병을 떠났음을 밝힌 것이다.

‘내가 여러 가지 공(空)을 설하는 것은 갖가지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서’라고 한 구절은 셋째, 결론지어 확정하는 부분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공의 이치는 둘이 아니지만 다섯 가지, 세 가지 등으로 공을 말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유(有)에 집착하는 병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병이 여러 가지이므로 공을 설할 때도 그에 따라 많은 공을 설한 것이다.

또 이치는 실로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건만, 다만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 억지로 공(空)이라 하였다. 이는 공이라는 말에 공성(空性)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모든 공에 대한 가르침을 결론짓는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아지랑이가 물이 아님을 알듯이 유(有)가 실(實)이 아님을 알고, (나무 안에) 화성(火性)의 왕[王:다른 본에는 ‘生’이라고 되어 있다]이 있음을 알듯이 실(實)이 비무(非無)임을 안다면, 이와 같이 관(觀)하는 자를 지혜로운 자라 하겠나이까?”

[論] 여섯 품(品)에 걸친 여섯 가지 의문을 역순[逆]으로 해결하는 중에 의심을 각각 풀어주고[別決] 전체적으로 확정짓는[摠定] 부분까지가 앞에서 끝났다.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로, 한 품(品)에서 일어난 세 가지 의문을 순서대로 제거해 가는 부분이다. 이 중에 세 부분이 있다. 즉 「여래장품」 하나에서 세 가지 의문이 일어나므로 차례로 그것을 없애가기 때문이다.

첫째 의문은 이렇다. 저 범행장자(梵行長者)가 게송에서 “법에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지랑이를 물로 본 것과 같이 미혹에서 일어난 뒤바뀐 생각이다”라고 한 것과 “법을 없다고 본다면, 그것은 장님이 해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뒤바뀐 생각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여 이런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 ‘장자는 속인이니 이와 같은 판단이 망견(妄見)이 되나이까, 진지(眞知)가 되나이까?’하는 것이다. 이같이 의심하여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므로 그런 이의 의심을 쫓아버리기 위해 (지장보살이)그 일을 들어 물은 것이다. 아지랑이와 물의 비유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실이 무가 아님을 안다[知實非無]’ 함은 일실(一實)의 뜻과 성[義性]이 무(無)가 아님을 안다는 것이다. 그가 ‘실(實)이 없다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자는, 마치 해가 없다고 잘못 아는 장님과 같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장자가 실(實)이 없지 않음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없지 않다는 뜻을 화성(火性)의 왕에 비유한다. 나무 속에 불[火大]의 성품이 있는데, 나무를 쪼개고 나누어서 찾아보아도 불의 모습은 없다. 그러나 실은 나무 속에 화성이 없지 않아 비벼서 구하면 불이 반드시 나타난다. 일심(一心)도 그와 같아서 모든 모양을 분석해보아도 심성(心性)을 얻을 수가 없으나 사실은 모든 법 중에 마음이 없지 않으니 도를 닦아 찾아보면 일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불의 성품은 모습을 감추고 있으나 세력이 커서 마치 나라의 주인과 같으므로 ‘왕’이라고 하였다. 양 극단을 떠난 장자의 이러한 관(觀)이 지혜로운가 하고 물은 것이다.[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참된 관[眞觀]으로 하나의 적멸을 관하기 때문이다. 모양 있는 것과 모양 없는 것을 동등하게 공(空)으로 취(取)하니, 공을 닦으므로 언제나 놓치지 않고 부처를 보며, 부처를 보기 때문에 3류(流)를 따라가지 않는다.”

[論] 부처님의 대답에도 둘이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결정 내리는 부분[直決]과 이유를 해석하는 부분[釋決]이다.

‘그렇다’한 것은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결정을 내린 말이며, ‘왜냐 하면’ 이하는 지혜로운 이유를 풀이한 것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다. 간략한 해석[略釋]과 자세한 설명[廣演]이다.

처음 (略釋) 가운데 ‘하나의 적멸을 관한다’ 함은 일심법이 적멸하다는 뜻을 관(觀)하기 때문이다. ‘모양 있는 것과 모양 없는 것을 동등하게 공으로 취한다’ 함은 모양이 있는 속(俗)과 모양이 없는 진(眞)을 동등하게 존립시키지 않아서 하나로 융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空)을 닦아 불심(佛心)에 어김없이 따르므로 한번도 놓친 적 없이 항상 불신(佛身)을 본다. 그러므로 ‘놓치지 않고 부처를 본다’고 하였다.

항상 부처를 보기 때문에 더욱 공관(空觀)이 늘고, 공관이 늘어나면 갖가지 유(有)와는 위배되므로 ‘3류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3류(流)’란 삼계(三界)의 번뇌를 다 포섭한 것으로, 욕류(欲流)·유류(有流)·무명류(無明流)를 말한다. 그 뜻은 일반적인 설과 같다.

[經] “대승(大乘) 중에 3해탈(解脫)의 도(道)는 하나의 체(體)로서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이며, 공이므로 모양도 없으며, 모양이 없으므로 작위도 없으며, 작위가 없으므로 구함도 없고, 구함이 없으므로 바람도 없다. 이 업(業)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을 뵙기 때문에 미래에 정토(淨土)에 태어난다.

보살아, 이 깊은 법에서 3화(化)를 부지런히 닦으면 혜(慧)와 정(定)이 원만히 이루어져 삼계(三界)를 초월한다.”

[論] 이것은 둘째, 자세한 설명[廣演]인데,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3해탈도(解脫道)를 닦아 얻는 훌륭한 이익[勝利]을 밝히고, 다음에는 3화(化)를 부지런히 닦아 얻는 훌륭한 이익을 드러낸다.

‘하나의 체로서 자성이 없다[一體無性]’ 함은 저 소승(小乘)의 3해탈문이 각각 다른 체(體)를 가지며 자성이 있는 데 반해, 대승보살의 관행(觀行)은 하나의 체임을 드러낸 것이다. 마음을 관(觀)하여 자성이 없다는 사실을 증득했을 때 뜻에 따라 세 가지 해탈을 가설할 뿐이다. 그 체성(體性)을 잊었다는 뜻에서 공해탈(空解脫)을 세우고, 체상(體相)을 잊었다는 뜻에서 무상해탈(無相解脫)을 세우고, 체용(體用)을 잊었다는 뜻에서 무작해탈(無作解脫 )을 세우니 이것을 무원해탈(無願解脫)이라고도 한다.

오직 하나인 무분별관(無分別觀)으로 모든 법의 체성(體性)·체상(體相) ·체용(體用)을 버리게 하지 않는 바 없으며, 융합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3해탈문을 건립한다.

‘이 업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다’ 함은 모든 체·상·용을 잊은 까닭에 관(觀)에서 나와 세속에 관여하는 마음을 정화하여 물듦과 집착을 떠난다는 뜻이다. 이렇듯 물들고 집착함을 떠난 마음이면 보불(報佛)을 볼 수 있고, 보불을 보게 되므로 정토(淨土)에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을 3해탈도의 뛰어난 이익이라고 한다.

‘이 깊은 법에서 3화를 부지런히 닦는다’ 함은 공법(空法)에 있어서 3공(空)을 부지런히 닦는다는 말이다. 무엇이 3화인가? 공상도 공함[空相亦空]을 닦는 것이 그 첫째 화[一化]요, 공공도 공함[空空亦空]을 닦는 것이 둘째 화[二化]요, 공해진 것도 공함[所空亦空]을 닦는 것이 셋째 화[三化]이다. 닦는다는 뜻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으므로 따로 논하지 않는다. 3화를 부지런히 닦아 가면 일심(一心)을 통달하고, 일심을 통달하기 때문에 혜(慧)와 정(定)이 원만히 이루어진다. 원만히 이루어진 경지에서 삼계를 벗어나니, 이것이 3화를 부지런히 닦아 얻는 뛰어난 이익이다.[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무생무멸(無生無滅)은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이 생멸을 멸하여 생멸이 다 없어지고 나면 적멸이 항상할 터이며, 항상하므로 끊기지 않을 것입니다. 끊기지 않는 이 법은 삼계의 모든 움직이는 법과 움직이지 않는 법을 떠나 있습니다.

유위법(有爲法)을 불구덩이 피하듯 하려면 어떤 법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꾸짖고[呵責] 저 일문(一門)으로 들어가야 하나이까?”

[論] 여기서부터는 「여래장품(如來藏品)」에서 일어나는 둘째 의문에 대한 해명이다. 그 품(品)에서 “식(識)을 확실히 보면 그것은 항상하다. 이 식이 항상 적멸하니, 적멸한 그것 또한 적멸하다”고 하였는데, 이 글을 근거로 이런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 ‘그와 같이 항상 머무는 적멸의 법은 비록 기뻐하고 즐길 만하지만, 이것은 잘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중생의 마음은 거칠고 얕아서 조복(調伏)하기 힘든데 어떻게 마음을 길들여 그 문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빙자하여 (지장보살이) 이런 물음을 던진 것이다.

질문은 둘로 나뉜다. 처음은 과(果)가 멀다는 것을 표시하고 다음은 들어가는 인(因)을 물었다.

‘무생무멸은 무상한 것’이란 앞에서 말한 ‘식(識)이 항상 적멸하다’고 한 말을 이해한 것이다. 본래 적멸하기 때문에 생함도 멸함도 없다. 그러나 본래 항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상(無常)이 된다.

‘이 생멸을 멸하여 생멸이 다 없어지고 나면 적멸이 항상하다’고 함은 앞에서 말한 ‘적멸한 그것도 적멸하다’는 말을 이해한 것이며, 또 ‘식(識)을 확실히 보면 그것은 항상하다’고 한 말을 이해한 것이다.

‘유위법……’ 이하는 저 일문(一門)으로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물은 말이다. 앞에서도 방편정관(方便正觀)을 설하긴 했으나 간략하기 때문에 다시 자세히 설해주시기를 청하였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세 가지 큰 일[三大事]에서 자기 마음을 꾸짖어야 하고, 세 가지 큰 진리[三大諦]에 그 행(行)을 들어가게 해야 한다.”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세 가지 일에서 자기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까?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세 가지 진리에 하나의 행[一行]을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일이란 첫째 인(因)을 말하고, 둘째 과(果)를 말하며, 셋째 식(識)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은 본래부터 공하여 없는 것이라서 나[我]의 진아(眞我)가 아닌데, 어찌하여 이에 대하여 좋아하고 물든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이 세 가지 일을 관할 때,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 고해(苦海)에 표류한다고 보아서, 이와 같은 일로 항상 스스로를 꾸짖는다. 세 가지 진리란 무엇인가? 첫째는 보리의 길로서, 불평등한 진리가 아닌 평등한 진리다. 둘째는 삿된 지혜로 얻는 진리가 아니라 크게 깨달은 바른 지혜로 얻는 진리다. 셋째는 잡된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가 아니라 혜(慧)와 정(定)이 다르지 않은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다. 이와 같은 3제(諦)로 불도를 닦아 가면 그 사람은 이 법에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다. 정각의 지혜를 얻고서 크고 지극한 자비[大極慈)를 흘려 보내니 자리(自利)·이타(利他)가 다 갖추어져 부처의 깨달음을 성취한다.”

[論] 이 글은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물음이고, 다음은 답이고, 셋째는 청(請)이고, 넷째는 설명[說]이다. 이 마지막 설명 부분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꾸짖고 싫어하는 방편[呵厭方便]을 말하고 다음에 향해 들어가는 방편[趣入方便]을 보여 준다.

이 첫 번째 꾸짖고 싫어하는 방편을 설하는 가운데 ‘인(因)’이란 5계(戒)와 10선(善)의 인을 말하고, ‘과(果)’란 인간·천신들이 누리는 부유하고 즐거운 과를 말하고, 식(識)이란 이 인과를 간직하는 것, 즉 본식(本識)을 말한다. 중생은 이 본식을 자기의 내아[內我]라고 착각하고 있으나, 이것의 성품은 공하기 때문에 ‘나’가 아니다. 무아(無我)의 도리라야 비로소 그것이 참된 나[眞我]이다. 그러므로 나 아닌 것에 대하여 애착하고 물들어서는 안 된다.‘세 가지 일을 관할 때,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라 함은 네 가지 얽매임[四繫] 때문에 이정(理定)에 지장을 줌으로써 저 세 가지 일[因 ·果·識]들을 고해(苦海)로 표류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네 가지 얽매임[四繫]이란 무엇인가? 『대법론(對法論)』「제품(諦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계에 네 가지가 있다. 탐욕신계(貪慾身繫)·진에신계(瞋恚身繫)·계금취신계(戒禁取身繫)·차실집취신계(此實執取身繫)로, 정의성신(定意性身)을 장애하므로 계(繫)라고 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 때문에 정심(定心)의 자성신(自性身)을 장애하기 때문에 계(繫)라고 한 것이지, 색신(色身)에 장애를 주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네 가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재물(財物) 등을 탐애(貪愛)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둘째, 싸움질과 옳지 못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셋째, 수도할 때 행하기 어려운 계금(戒禁)으로 고뇌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넷째, 바른 이치를 따르지 않고 경계를 추구(推求)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저마다 달리 보기 때문에 그 인식할 대상에 대하여 바른 이치대로 보지 않고, 갖가지로 헤아려 망령되게 집착을 일으켜 이것만이 진(眞)이고, 다른 것들은 다 어리석고 망령된 것이라고 여긴다. 이런 이유로 마음이 산란하고 동요한다. 무엇에 대해서 산란하고 동요하는가? 정심(定心)의 여실한 지견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일로 항상 스스로를 꾸짖는다’ 함은 네 가지 계박에 휘말려 있음을 가책하고, 세 가지[因·果·識]에 표류하는 일에 염증을 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해서 꾸짖고 싫어하는 방편[呵厭方便]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향해 들어가는 방편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 진리[三諦]를 자세히 깨닫는 데 있다.

‘첫째는 보리의 길[道]로서, 불평등한 진리가 아닌 평등한 진리다’ 함은 무슨 뜻인가?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자성이 맑은 보리[性正菩提]는 크게 통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도(道)’라 하였고, 모든 중생이 이 성품과 같아서 궁극적인 이 길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불평등이 아닌 평등’이라고 하였다. 이는 2승(乘)들이 따로따로 향해 들어가는 일을 대치(對治)한 것이다.

‘둘째는 삿된 지혜로 얻는 진리가 아니라 크게 깨달은 바른 지혜로 얻는 진리’라 함은, 일체지(一切智)인 대각(大覺)의 과(果)는 오직 평등을 증득하는 바른 지혜로 얻는 것이지, 명제(冥諦)나 대유(大有) 등을 사유하는 삿된 지혜로 얻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모든 외도(外道)의 고집을 대치한 것이다.

‘셋째는 잡된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가 아니라 혜(慧)와 정(定)이 다르지 않은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라 함은 바른 지혜를 얻어 평등에 들어갈 때 혜(慧)와 정(定)이 원융하여 별개의 행상(行相)이 없어야 비로소 평등제(平等諦)에 참되게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는 세간에서 분별하듯 심왕(心王)과 심수(心數)를 별개의 체로 보고 정과 혜(慧)의 다른 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잡행은 참되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 증득하지 못하고서 증득했다고 여기는 증상만(增上慢)에 사로잡힌 세간의 관행(觀行)을 대치(對治)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를 통틀어 진리[諦]라고 부르는 이유는 자세히 살펴 깨달아 가는 관(觀)으로 보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다른 집착들을 두루 대치해야만 유일한 부처님의 길을 바로 닦아 간다. 그러므로 ‘3제로 불도를 닦아간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도를 닦아 얻어진 과(果)를 드러낸다.

‘그 사람은 이 법에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다’ 함은 자리(自利)인 지덕(智德)의 과(果)를 드러낸 것으로, 3법(法)에서 불도(佛道)를 닦으면 정각(正覺)의 열매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정각의 지혜를 얻고서 크고 지극한 자비[大極慈)를 흘려 보낸다’ 함은 이타(利他)인 은덕(恩德)의 과를 나타낸 것으로, 크고 지극한 무연(無緣)의 자비를 두루 흘려 보내 법계에 가득 차게 하여 이익을 주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

‘자리와 이타가 다 갖추어져 부처의 깨달음을 성취한다’ 함은 앞의 둘을 묶어서 결론지은 것이다. 자리와 이타의 두 이익이 원만하여 등각(等覺)을 이루기 때문이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이와 같은 법은 인과 연이 없습니다. 연이라는 법이 없다면 인도 일어나지 않을텐데 어떻게 움직이지 않는 법[不動法]으로 여래(如來)에 드나이까?[入:어떤 본에는 ‘得入’으로 되어 있다]”

[論] 이 부분은 「여래장품」에서 생긴 세 번째 의문을 제거한 것이다.

저 품의 게송 끝머리에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전변하여 여래장에 들어간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붙들고 이런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의 길이란 평등한 진리로서 여래장을 뜻한다. 이는 인과 연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것인데 어찌하여 저 품에서는 능취와 소취를 전변하는 것을 원인으로 하여 여래장법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가?’ 이렇게 의심을 내므로 (지장보살이) 그렇게 물었다.

‘인과 연이 없다’ 함은 평등하기 때문에 인연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 평등하므로 나머지 연(緣)이 없고, 나머지 연이 없으므로 인(因)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일어남도 움직임도 없는 저 법에 인연을 가지고 여래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인의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인과 연을 의지하므로 부동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經] 그 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설하셨다.

모든 법의 모양은

성품이 공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이 법은 지금 이 때 있는 것이나

이 때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라.

법에는 다른 때가 없으니

다른 때에 일어나지 않고

법에는 동(動)·부동(不動)이 없어서

성품이 공적(空寂)하므로 적멸이니라.

성품이 공하여 적멸한 때

이 법이 이 때 나타나나니

모양을 떠났으므로 고요히[寂靜] 머물며

적정에 머물기 때문에 연(緣)을 따르지 않는다.

[論] 이 아래는 여래께서 정면으로 의심을 결단(決斷)한 부분이다. 여기서는 평등하고 부동하지만 득입(得入)할 수 있다는 뜻을 설명하신다.

여덟 수의 게송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의 세 게송은 약설(略說)이고, 뒤의 다섯 게송은 광선(廣宣)이다.

약설 중에도 둘이 있으니, 앞 두 게송은 부동(不動)의 뜻을 밝히고, 뒤 한 게 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드러낸다.

앞의 것에도 표(標)·석(釋)·결(結)의 세 부분이 있다. 첫 두 구는 부동의 뜻을 표방한 것이요, 다음의 네 구는 부동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 법은 지금 이 때 있는 것이나 이 때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 한 데서 ‘이 때[是時]’란 ‘이 시간[此世]’, 즉 현재를 말한다. 그런데 이 현재라는 시간은 언제나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를 분석해서 제거하면 중간(中間)이 없다. 마치 빛과 그늘[光陰]을 제거하면 중간처(中間處)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때’에 일어남이란 있을 수가 없다.

‘법에는 다른 때가 없으니, 다른 때에 일어나지 않는다’ 한 데서 ‘다른 때’란 소위 과거와 미래를 말한다. 미래는 아직 있지 않으므로 일어남이 없고, 과거는 이미 없으므로 일어남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런 이치에서 법(法)에는 일어나고 움직이는 일이 없다. 생하고 일어나는 움직임이 이미 없으므로, 영원히 머물며 움직이지 않음도 당연히 없다. 그러므로 ‘법에는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없어서, 성품이 공적하므로 적멸하다’고 하였다.

이 두 구는 부동(不動)의 뜻을 매듭지은 것이다.

다음 한 게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밝힌 것이다.

‘성품이 공하여 적멸한 때’란 성품이 공하여 적멸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았을 때라는 말이다. 부동(不動)의 법이 이 때 나타나는데, 마음에 나타나므로 득입(得入)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위의 반은 ‘득입’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법(法)이 모든 상(相)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모든 상을 떠났으므로 적정(寂靜)한 채로 머물며, 적정에 머물기 때문에 항상 연(緣)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들어감이 있다고는 하지만 연을 떠났다는 뜻을 버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아래 반은 연을 떠나 있다는 의미를 밝히고 있다.

[經] 연(緣)에 의해 일어난 모든 법

이 법에는 연(緣)이 생기지 않으니

인연은 생멸이라 머묾이 없으며

생멸하는 성품은 공적하기 때문이다.

연의 성품은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며

그 연은 본래 연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法)의 일어남은 연 때문이 아니며

연이 일어나지 않음도 그러하다네.

인연으로 생긴 법

이 법은 인연이니

인연으로 생멸의 모습을 나타내나

그것은 생멸이 없다네.

[論] 이 아래는 (略說에 이어) 두 번째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宣]인데, 이 중에도 둘이 있다. 앞 세 게송은 부동(不動)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 다음 두 게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편다.

처음에도 둘이 있으니 앞 두 게송은 근본을 따져보아도 얻어지지 않음을 가지고 부동의 뜻을 나타내고, 뒤 한 게송은 지말을 따져보아도 얻어지지 않음을 가지고 부동의 뜻을 나타낸다.

처음에도 셋이 있으니 표방·해석·결론이다. ‘연(緣)에 의해 일어난 모든 법, 이 법에는 연(緣)이 생기지 않는다’ 함은, 여러 가지 과법(果法)에는 그 연(緣)이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다음의 네 구는 생하지 않는다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인연은 생멸이라 머묾이 없다’ 함은 모든 인연은 생멸하여 머물지 않는 것이므로 과(果)를 낳는 공능이 없다는 뜻이다. ‘생멸하는 성품은 공적하기 때문’이라 함은 머물지 않기 때문에 생멸이 없으니, 성품이 공적하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시 과를 낳지 않는다는 뜻이다.

‘연의 성품은 능연과 소연’이라 한 데서, 인연의 종자(種子)가 숨어 있는 것을 ‘성품’이라고 한다. 증상연(增上緣)의 근(根)이 경계를 대하는 공능을 가지므로 그것을 ‘능연(能緣)’이라 하고, 연이 되는 경계[所緣境界]는 근의 대상[所對]이기 때문에 ‘소연(所緣)’이라고 한다.

차제연(次第緣:等無間緣)은 법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종자인 성품의 연(緣)과 그 능·소의 두 연은 모두 본연(本緣)이 일어난 것이므로, ‘그 연은 본래 연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근본이 되는 모든 연 역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생멸하며, 그 자성이 공(空)하기 때문에 과법을 생하는 작용이 없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뜻에서 연에는 생겨남이 없다는 뜻을 말한다.

‘그러므로 법이 일어남은 연 때문이 아니라’ 함은 과법(果法)의 일어남이 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님을 결론짓는 말이다. ‘연이 일어나지 않음도 그러하다’ 함은 연이 일어남 없는 것도 그 과법과 동일함을 결론짓는 말이다.

다음 한 게송은 지말을 따져보아도 얻어지지 않음을 들어 부동(不動)을 나타낸 부분이다. ‘인연으로 생긴 법, 이 법은 인연이니’란 모든 과법도 인연이 된다는 사실을 밝힌 말이니, 뒤에 생하는 법에 대하여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법이 이미 인연이 되고 나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생멸하는 성품이 공하다’. 그러므로 ‘인연으로 생멸하는 모습을 나타내나, 그것은 생멸이 없다’고 하였다.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할[略說] 때는 과법(果法)이 공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냈고, 지금 자세히 설명하는[廣宣] 데서는 인연설(因緣說)을 가지고 모든 법의 인과(因果)가 부동한 것이 곧 평등한 보리의 길이며, 이 법 말고 따로 구할 깨달음이 있지 않음을 밝히려 하였다. 이것이 이 게송의 대의(大意)이다.

조법사(肇法師:僧肇)가 이렇게 말하였다. “도(道)가 먼 것인가? 일마다 진(眞)이다. 성(聖)이 먼 것인가? 체득하면 신(神)이로다.”

[經] 저 여여의 진실한 모습은

본래 출몰(出沒)이 없건만

모든 법이 이 때에

스스로 출몰을 내느니라.

그러므로 지극히 청정한 근본은

본래 여러 힘에 기인하지 않나니

나중에 얻을 그 자리에서는

얻는다 해도 본래 얻은 것을 얻느니라.

[論] (不動의 뜻을 밝힌 데 이어) 이 두 게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편 것이다. 그 중에 셋이 있으니, 첫째 한 송은 움직임이 있는 저 모든 법에 대하여 진여(眞如)의 부동함을 나타낸 것이고, 둘째 그 다음 두 구는 움직이지 않는 근본이 모든 연을 상대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고, 셋째 마지막 두 구는 연(緣)을 떠난 법에 득입(得入)의 의미가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나중에 얻을 그 자리[後得處]’란 도를 닦은 뒤에 얻는 지위를 말한다.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가운데 ‘적멸시’라 한 것을 여기서는 ‘후득지처(後得之處)’로 표현한 것이다. 이미 적멸이라면 어찌 장소와 때가 있겠는가만, 때와 장소를 떠났기 때문에 ‘때와 곳’이라는 개념을 빌려서 설명했을 뿐이다.

‘얻는다 해도 본래 얻은 것을 얻는다’ 함은 시각(始覺)이 완성[究竟]되었다는 뜻에서 ‘얻었다[得]’고 하였는데, 이는 능득(能得)을 말한다. 시각이 완성되면 본각(本覺)과 같아지는데, 이런 이유에서 ‘본래 얻은 것[本得]을 얻는다’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세 번째 의심을 해결하는 부분이었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즐거워졌다. 모든 대중들도 의문을 품는 자가 없었는데, 대중의 이런 마음을 알고 나서 지장보살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대중들이 품은 의심을 내 알았기에

정성껏 간절히 물었더니

여래께서 자비로운 선심으로

남김없이 분별해주시어

이 두 무리들 모두가

다들 분명히 알아들었네.

내가 이제 확실히 안 곳에서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교화하여

매우 자비로우신 부처님 같이

본원(本願)을 버리지 않을 것이니

중생을 외아들처럼 여기는 경지에서

번뇌 속에 머물고자 하네.

[論] 이는 네 번째, 지장보살이 이해했음을 나타낸 부분[領解]이다. 이 세 송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의 한 송 반은 앞에서 의문을 해결한 이익에 관해 매듭짓고, 다음의 한 송 반은 나중에 널리 교화할 행(行)에 대해 말한 것이다.

‘중생을 외아들처럼 여기는 경지[一子地]’란 초지(初地) 이상에서 일체 중생이 평등함을 이미 깨달았으므로 그 중생들을 외아들 보듯이 한다는 뜻이다. 이를 가리켜 청정증상의락(淸淨增上意樂)이라고 하는데, 비유적인 표현으로 그 마음을 ‘외아들같이 여기는 경지’라고 한 것이다.

‘번뇌 속에 머문다’ 함은 보살은 모든 법의 평등함을 얻었다고는 할지라도 방편의 힘을 쓰기 때문에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번뇌와 수면(隨眠)을 버리고 열반에 들어가면 본원(本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유가론(瑜伽論)』 삼마혜다(三摩呬多) 결택분(決擇分) 중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멸진등지(滅盡等至)는 무루(無漏)라고 해야 한다. 번뇌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응하지 않으므로 연할 대상이 없다. 모든 번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원행지(遠行地)에 들어온 보살만 빼고는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이생(異生)들도 행할 수 없다. 보살은 출세간법을 일으켜 현실로 앞에 나타나게 하나 방편선교(方便善巧)의 힘 때문에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버리지 않는다[不捨]’고 한 것은 아라한처럼 완전히 버리는 것과는 다르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지, 전혀 버리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설한 것과 같다.

버리지 않기 때문에 ‘번뇌에 머문다’고 하였으니, 그럼으로써 열반에 들지 않고 시방세계를 두루 교화하기 때문이다.

이 한 권의 경을 크게 (서분·정설분·유통분)셋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인 정설분(正說分)이 여기서 끝났다.

[經] 이 때 여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불가사의하니 항상 대비[大悲:어떤 본에는 ‘大慈’라고 되어 있다]로 중생의 고통을 뽑아 준다. 이 경전의 법을 간직하고 이 보살의 이름을 외우는 중생은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고 모든 장애와 곤란이 다 없어질 것이다. 다른 잡념 없이 오로지 이 경만 염(念)하며 법대로 닦고 익히는 중생이 있다면, 그 때 보살이 항상 몸을 변화로 나타내서 잠시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를 위해 법을 설하고 그를 보호하여, 위없이 바르고 온전한 깨달음[阿 耨多羅三藐三善提]을 속히 얻게 할 것이다.”

[論] 이 아래는 세 번째, 유통분(流通分)이다. 그 중에 여섯 부분이 있다.

첫째는 사람을 칭찬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중에게 권유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이름을 세워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는 수지(受持)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참회로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받들어 행함으로써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위 경문은 첫째로 사람을 칭찬하여 유통하게 한 부분인데, 이 경을 유통하게 하는 보살에게 네 가지 훌륭한 공덕이 있음을 칭찬한다. 대비(大悲)로 일체중생을 빠짐없이 교화하는 공덕, 이 경을 간직하는 자를 별도로 도와 주는 공덕, 몸을 변화시켜 설법하는 공덕, 궁극적인 결과를 얻게 하는 공덕이다.

[經] “너희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모두 이와 같은 대승(大乘)의 결정된 요의(了義)를 닦고 익히게 해야 한다.”

[論] 이는 두 번째, 대중들에게 권유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결정된 요의’란 가장 깊고, 가장 궁극적이어서 이보다 더할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한 말이다.

[經] 그 때 아난(阿難)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래께서 설하신 대승의 복 더미는 결정코 모든 번뇌를 끊어버리며, 무생(無生)의 본각(本覺) 이익은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법을 무슨 경이라 이름해야 하며, 이 경을 수지(受持:마음속에 이해하고 새김)하면 얼마만한 복(福)을 얻나이까? 부처님의 자비로 저희를 위해 부디 말씀해 주소서.”

[論] 이는 세 번째, 이름을 세워 유통하게 한 것이다. 먼저 묻고 뒤에 대답했다. 물음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이해한 것을 나타내고[領解], 나중에 물음을 던진다.

이해한 중에서는 이 경이 가지는 네 가지 훌륭한 공능을 밝힌다. 첫째는 이 경을 간직하는 자로 하여금 무량한 복을 얻게 하는 것이니, 경에서 ‘대승의 복 더미’라고 하였다. 둘째는 이 경을 간직하는 자로 하여금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버리게 하는 것이니, 경에서 ‘결정코 모든 번뇌를 끊는다’고 하였다. 셋째는 밝히신 취지가 바로 본각(本覺)의 이익이라는 것이니, 경에서 ‘무생의 본각 이익‘이라고 하였다. 넷째는 밝히신 가르침이 사량(思量)하기 어렵다는 것이니 경에서 ‘불가사의’라고 하였다.다음으로 물음 가운데서는 두 가지 일을 물었다. 먼저 경의 요점[經要]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여 경(經)의 이름을 물었고, 다음에 복을 구해 이 경을 수지하였고 이 경을 지녀 얻는 복을 물었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 경의 이름은 불가사의하니, 과거 모든 부처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이며,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게 한다. 이 경을 지니는 중생이 있다면 그는 다른 모든 경에서 바라고 찾을 것이 없다.

이 경전의 법은 많은 법을 총지(摠持)하며, 모든 경의 요점[要]을 다 포함하니, 이 모든 경의 법 중에서 법의 계종(繫宗)이 된다. 이 경의 이름을 『섭

대승경(攝大乘經)』이라고 하며, 또 『금강삼매(金剛三昧)』,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 부른다.”

[論] 여기서부터는 대답인데,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다. 차례로 두 가지 물음에 대답한다. 첫 번째 대답에 또 둘이 있으니 먼저 이름과 뜻을 찬탄하고, 다음에 이름을 세운다.

명의(名義)를 찬양한 가운데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총괄적으로 이름을 찬탄하고 다음에 개별적으로 의미를 설명한다.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게 한다[能入……]’ 이하는 개별적으로 의미를 설명한 것인데, 세 가지 뜻을 밝힌다.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게 한다……바라고 찾을 것이 없다’ 함은 ‘금강삼매’라는 이름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깨뜨리지 않는 법이 없고, 끝까지 밝히지 않는 이치가 없으므로 여래의 지해[智海]로 들어가게 하고 이 밖에 더 희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경전의 법은 많은 법을 총지하며, 모든 경의 요점을 포함한다’고 한 것은 ‘섭대승경(攝大乘經)’이란 이름의 뜻을 나타낸다. ‘법의 계종’이라고 한 것은 ‘무량의종(無量義宗)’이란 이름의 뜻을 나타낸다.

이 두 이름의 뜻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앞의 것이 모든 경의 뜻을 광범하게 포함한다는 뜻을 밝힌 데 비해, 뒤의 것은 모든 경이 종주[宗]로 삼는 극치임을 밝혔다.

다음에 세 가지 이름을 들었으니, 그 중 자세한 것은 앞의 2문(門) 중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하였다.

[經] “이 경전을 수지(受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백천의 모든 부처님을 수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공덕은 허공같이 끝이 없고 불가사의하니, 내가 부탁하는 것이 바로 이 경전이다.”

[論] 이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이 중에 네 가지 훌륭한 덕을 밝힌다.

첫째는 이 경은 모든 부처의 마음을 포함한다는 뜻에서, 부처를 수지하는 뛰어난 덕[持佛勝德]을 갖는다. 경에서는 ‘백천의 모든 부처님을 수지한다고할 수 있다’고 하였다. 둘째는 이 경이 넓고 큰 뛰어난 덕[廣大勝德]을 갖는다는 것이니, 경에서 ‘끝이 없다’고 하였다. 셋째는 매우 깊은 뛰어난 덕[甚深勝德]을 갖는다는 것이니, 경에서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넷째는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뛰어난 덕[無比勝德]을 갖는다는 것이니, 경에서 ‘바로 이 경전’이라고 하였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어떤 마음으로 행해야 하며,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수지(受持)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 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마음에 얻고 잃는 것이 없고, 항상 범행(梵行)을 닦으며, 희론(戱論)에 대해서도 항상 맑은 마음을 즐기며, 마을에 들어가도 마음이 항상 선정에 있으며, 또 집안에 머물러 살아도 3유(有)에 집착하지 않는다.”

[論] 여기서부터는 수지(受持)하므로써 유통하게 하는 것이니, 그 중에 둘이 있다. 첫째는 수지하는 일을 직접적으로 설명한 부분이고, 둘째는 문답을 통해서 거듭 설명한 부분이다.

첫 번째 것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물음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경을 수지하는 사람의 심행(心行)에 관해 묻고 나중에 경을 수지하는 사람의 복리(福利)에 관하여 묻는다.

답 중에서는 차례로 이 두 가지 물음에 대답을 해 가는데, 첫 번째 답 가운데서는 다섯 가지 심행(心行)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첫째로 (이 경을 수지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장단점[長短]을 보지 않기 때문에 마음속에 얻고 잃음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안으로 상(相)을 여읜 깨끗한 행을 닦기 때문에 항상 청정한 행을 닦는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동(動)에 있으면서도 부동(不動)하기 때문에 항상 고요한 마음을 즐긴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산란한 경계에 들어갔어도 산란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정에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탁한 곳에 거처하면서도 물들지 않기 때문에 3유(有)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經] “이 사람에게는 현세(現世)에 다섯 가지 복(福)이 있다. 첫째는 대중에게 존경을 받으며, 둘째는 육신이 횡액을 당하거나 요절하지 않으며, 셋째는 그릇된 논의에 잘 대답할 줄 알며, 넷째는 기꺼이 중생을 제도하고, 다섯째로는 성도(聖道)에 들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이 경을 수지한다.”

[論] 이는 둘째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앞에서 든 다섯 가지 심행(心行)에 따라서 이 다섯 가지 복을 얻는다.

첫째는 (이 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보지 않기 때문에 대중의 존경을 받는다. 둘째는 항상 상을 떠난 행을 닦기 때문에 몸이 횡액을 당하거나 요절하지 않는다. 셋째는 고요한 마음을 즐기기 때문에 그릇된 논리에 대하여 답변을 잘한다. 넷째는 산란한 곳에 들어가서도 항상 선정에 있기 때문에 중생들을 즐겨 제도한다. 다섯째는 3유(有)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聖道)에 들어간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그런 사람은 중생들을 제도할 때 공양을 받을 수 있습니까?[得受供不:어떤 본에는 ‘供’ 아래 ‘養’이 붙어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사람은 중생에게 큰 복전(福田)이 되며, 언제나 큰 지혜를 발휘하며, 방편[權]과 진실[實]을 함께 연설하니, 이들은 4의승(依僧)으로서 모든 공양(供養) 뿐만 아니라 머리와 눈과 골수와 뇌수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도 다 받을 수 있거늘, 어찌 옷이나 밥을 받을 수 없겠는가?

선남자야, 이런 사람은 너희의 선지식이며, 너희의 교량(橋梁)이거늘 어찌하여 범부가 되어 공양하지 않으랴.”

[論] 이 아래는 문답을 통해 거듭 밝힌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복전의 체(體)가 무엇인가를 밝혔고, 다음에 복(福)을 낳는 능력에 관하여 말했다. 이 부분은 첫 번째 대답이다.

‘4의승(依憎)’에서 첫째의 의지할 대상[第一依]은 번뇌성(煩惱性)을 갖춘 지전(地前)의 지위를 말하고, 나머지 3의(依)는 지상(地上)의 지위를 말하니, 『열반경(涅槃經)』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이 경을 수지하는 저 사람에게 공양하면, 그 사람은 얼마나 되는 복을 받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城) 안을 가득 채울 만큼의 금은으로 보시하는 자가 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이 경에서 네 글귀로 된 게송 하나를 수지(受持)한 그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 [供養是人:어떤 본에는 ‘供養是人’ 대신에 ‘不可思議’가 들어가 있다]보다는 못하다.”

[論] 이는 두 번째, 경을 수지하는 자가 많은 복을 생기게 한다는 사실을 밝힌 부분이다. 성 안을 가득 채운 금은으로 경을 수지하지 않는 자에게 보시하여 얻는 복(福)은 밥 한 끼와 옷 한 벌로 이 네 글귀로 된 게송 하나를 수지하는 이에게 공양하여 얻는 복보다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經] “선남자야, 모든 중생들에게 이 경을 수지하게 한다면, 마음이 항상 선정에 있어서 본심(本心)을 잃지 않을 것이다. 본심을 잃는다면 참회할 것이니, 참회의 법은 맑고 시원하다[淸凉].”

[論] 이 아래는 참회하므로써 이 경을 유통하게 하는 부분[懺悔流通]이다. 이 중에 둘이 있는데, 먼저 참회의 공덕을 찬양하고, 둘째로는 문답을 통해 거듭 밝힌다. 참회의 공덕을 말한 가운데 ‘청량(淸凉)’이라고 한 것은 불선(不善)의 원인이 되는 혼침과 탁함을 없앴기 때문에 ‘맑다[淸]’ 하였고, 생사의 결과인 뜨거운 고뇌를 떠났으므로 ‘시원하다[凉]’고 하였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먼저 지은 죄를 참회하면 그것은 과거(過去)에 들어가지 않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깜깜한 방에 등불이 밝게 켜지면 어둠이 즉시 사라지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앞에서 지은 모든 죄들을 뉘우친다고 해서 그것들이 과거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말라.”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문답을 통해 거듭 설명하는 부분[往復重顯]이다. 여기에 두 차례의 문답이 있다. 첫 번째는 참회의 도리를 드러냈고, 두 번째는 참회하는 행법(行法)을 나타낸 것이다.

이 중에서 질문한 뜻은 앞서 지은 죄를 뉘우치는 것을 참회라고 한다면, 앞서 지은 죄는 과거 속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뜻이다. ‘먼저’라는 것은 과거에 들어갔으므로 지금이 아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는데 어떻게 참회가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답에서 ‘그렇다’ 하신 것은 이와 같이 앞에서 저지른 죄가 과거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無]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서 지은 죄는 본식(本識)에 훈습(熏習)되고, 그 종자(種子)가 항상 흘러서 현재에 이른다. 이러한 이치로 보아 그것은 과거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지금 참회하여 다스리는 능력이 생기면 그 죄의 종자를 현재에 흘러 내려오지 않게 할 수 있다. 마치 등불이 켜지자 캄캄한 방의 어둠이 이내 사라지듯이, 그 죄의 종자가 현재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야 비로소 과거에 들어가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은 죄를 참회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앞서 있었던 것을 앞서 있었던 것이 아니게 할 수는 없으므로 참회로는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먼저 있었던 것을 지금에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을 뿐인데,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 참회의 행이다.

이는 번뇌를 끊는다[斷結]는 뜻과는 다르다. 번뇌를 끊는 것은 생멸도(生滅道)라는 면에서,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을 현재에까지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여기서 말하는 참회는 상속도(相續道)라는 면에서, 앞서 있었던 것을 현재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한 번뇌를 끊는 것이 종자를 영구히 끊어버린다는 뜻인데 비해, 앞서 지은 죄를 뉘우치는 것은 종자의 커지고 강해지는 기능을 덜어내고 눌러서 현재에 이르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어떻게 하는 것을 참회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진실관(眞實觀)에 들어가는 것이다. 한번 이 관(觀)에 들 때 모든 죄가 사라지고 모든 나쁜 길을 떠나 정토(淨士)에 태어나서 속히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이루게 된다.”

[論] 이는 둘째, 참회하는 법[行法]이다.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행법(行法)을 설명하고 나중에 참회로 얻는 훌륭한 이익을 보여 준다.

‘이 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진실관에 든다’ 함은 금강삼매(金剛三昧)의 가르침[敎旨]에 의해 모든 법상(法相)을 깨뜨리는 것을 진실에 든다고 하였다. 이는 지전(地前)보살이 닦는 상사진관(相似眞觀)이다.

‘한번 이 관에 들 때 모든 죄가 사라진다’ 함은 모든 죄장(罪障)이 망상(妄想)으로부터 생겼으나 이제 모든 상을 깨뜨리고 진실관(眞實觀)에 들어가서 모든 망상경계를 단번에 깨뜨리므로 모든 죄가 싹 없어진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훌륭한 이익에 관하여 설명한 것인데 여기에 두 구가 있다.

‘모든 나쁜 길을 떠나 정토에 태어난다’ 함은 화보(華報)를 얻는다는 뜻이고,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善提)를 이루게 된다’ 함은 과보(果報)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經]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자 아난과 여러 보살과 사부대중(四部大衆)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마음에 확신을 얻어,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하며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였다.

[論] 이는 받들어 행함으로써 유통하는 부분인데, 여기에 네 구가 있다. 법을 듣고 기뻤기 때문에 ‘매우 기뻐했다’ 하였고, 모든 의혹을 떠났기 때문에 ‘마음에 확신을 얻었다’ 하였고, 법을 중히 여기고 사람을 존경하기 때문에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하였다’ 하였고, 행할 때 더욱 기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였다’고 하였다.

매우 깊고 미묘한 금강의 가르침

이제 받들어 믿고 간략히 기술하오니

이 선근[善] 법계에 두루하여

모든 중생 남김없이 이롭게 하여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