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중권

수선님 2021. 12. 12. 12:06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중권

 

신라국(新羅國) 사문(沙門) 원효(元曉) 지음

이인혜 번역

3. 무생행품(無生行品)

[論] 보살은 관행(觀行)이 성취되었을 때 스스로 마음 관찰할 줄을 알고 이치[理]에 따라 수행하므로 마음을 일으키는 일[生心]이 있는 것도 아니며,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 행(行)이 있는 것도 아니며 행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만 증익으로 치우친 견해[增益邊]를 떠나기 위해서 임시로 ‘무생(無生)’이라고 하였으니, 유생(有生)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무생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손감으로 치우친 견해[損減邊]를 떠나기 위해서 임시로 ‘행(行)’이라고 한 것이니, 유행(有行)의 행이 있는 것은 아니나 무행(無行)의 행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무생행품(無生行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經] 그 때 심왕보살(心王菩薩)이 삼계(三界)를 벗어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모아 합장하고 게송으로 여쭈었다.

[論] 관행(觀行)에 대하여 따로 설명[別顯]하는 여섯 개의 품 중에 제1품은 모든 경계의 모습[境相]을 버리고 무상관(無相觀)을 설명한 것인데, 앞서 끝마쳤다. 여기서부터는 제2품으로 그 일어나는 마음을 없애, 무생행(無生行)이 어떤 것인가를 밝힌 부분이다. 이에 해당하는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내용 설명[正說]이고, 둘째는 설명에 대한 찬탄[讚說]이며, 셋째는 설명을 듣고 얻는 이익[聞說得益]이다.

첫째 정설(正說)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반복해서 문답한 것(往復問答)이고, 둘째는 반대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徵問答]이며, 셋째는 보살이 이해한 것[菩薩領解]이며, 넷째는 여래가 결론을 맺는 것[如來述成]이다.

첫째 반복해서 문답한 가운데 여섯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질문[問], 두 번째는 대답[答], 세 번째는 따져 물음[難], 네 번째는 부정[拒], 다섯 번째는 다시 요청함[請], 여섯 번째는 해석[釋]이다.

처음의 질문도 둘로 나뉘는데, 먼저 앞 부분에는 경전을 기술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서문이 있다. ‘심왕보살(心王菩薩)’이란 체(體)에 따라서 이름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심왕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8식(識)의 마음이 모든 심수(心數)를 총괄적으로 제어하므로 심왕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일심(一心)의 법이 모든 덕[衆德]을 총괄적으로 포섭하므로 심왕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이 보살이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가 하나의 심왕[一心王]을 증득했기 때문에 (증득한 심왕의) 체를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지금 이 품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무생행(無生行)이므로 심왕보살이 물은 것이다.

‘삼계(三界)를 벗어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설법’이란, 들은 법(法)을 꺼내서 문제를 제기하는 발단으로 삼은 것인데, 들은 것이란 앞 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뒤의 것을 들면서 앞의 것을 반복하였으니, 즉 마지막(전품) 송(頌)에서 ‘초연히 삼계를 벗어나되……일승으로 성취한 것이로다’라고 한 문장이다.

[經] 여래께서 설하신 뜻은

세간을 벗어나 모습[相]이 없어

가히 모든 중생들에게

다 유루(有漏)를 끊게 하시네.

번뇌를 끊어 심(心)과 아(我)가 공하니

이는 생함이 없음일진대

생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무생인(無生忍)이 있겠나이까?

[論] 이 두 게송은 질문[問辭]이다. 그 가운데 첫 송은 앞에서 설한 내용을 이해한 것을 노래한 것으로서, 위의 반(半)은 전에 말한 ‘일미법인[一味之法印]’을 이해한 것이요, 아래의 반은 ‘일승소성[一乘之所成]’을 이해한 것이다. 다음 1송은 의문을 일으킨 것인데, 그 중 위의 반은 무생의 뜻[無生義]을 물은 것이고, 아래의 반은 무생의 이치를 확실히 아는 것[無生忍]에 대해 물은 것이다. 이미 생이 없다면 그것을 아는 마음[忍心]도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經] 그 때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법이 본래 생겨남이 없으며 모든 행(行)도 생겨남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무생(無生)의 행(行)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무생인(無生忍)을 얻는다고 한다면 허망(虛妄)하다고 할 것이다.”

[論] 이것은 두 번째 답(答)하신 것이다. 답하신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무생인(無生忍)의 모습[相]을 제시하고, 다음에 얻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과실을 밝힌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법이 본래 생겨남이 없다는 사실을 통달하는 것이다. 이는 선정[定]·지혜[慧]와 모든 행(行)도 역시 생겨남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생겨남이 없는 곳에서는 안다[忍]고 할 만한 행(行)이 있지 않으므로 ‘무생의 행이라고 할 것도 없다[非無生行]’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가운데에서 안다고 하는 행이 얻어진다면 이는 머묾도 없고[無住]·행함도 없는[無行] 참된 앎[眞忍]에 위배되므로 ‘허망하다’고 하였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무생인(無生忍)을 얻는 것이 허망(虛妄)하다고 하시니 얻음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면 허망이 아니겠나이다.”

[論] 세 번째는 따져 묻는 것[難]이다. 묻는 의도는 이렇다. ‘만약 얻음과 앎이 있는 것을 허망하다고 한다면, 얻음이 없고 앎이 없는 것은 허망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허망과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무소득(無所得)을 공부하는 대승의 수행자들이 이와 같이 헤아리면서 자신들은 허망하지 않다고 여기므로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런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얻음도 없고 앎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얻음이 있는 것이다. 얻음이 있으면 머묾이 있는 것이니[有得有住:다른 본에는 ‘有得有忍’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김이 있는 것이다. 얻음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얻을 법(法)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허망이 된다.”

[論] 네 번째는 부정하는 것[拒]이다. 그 중에 둘이 있다. ‘아니다[不]’라고 한 것은 직접적인 거부이고, ‘어째서 그런가?[何以故]’ 이하는 부정하는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부정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얻음도 없고 앎도 없다[無得無忍]’고 하는 저들의 생각이 비록 ‘얻음도 있고 앎도 있다[有得有忍]’할 때의 유(有)는 아니라 할지라도 ‘얻음도 없고 앎도 없다’는 무(無)를 얻는 것이다. 이미 무를 얻었다면 마음이 무에 머물고, 마음이 이 미 머무름이 있으면 이는 생겨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얻은 것이 있음[有所得]에 대해 마음이 생하므로 결국 무생무득(無生無得)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모두 허망이 된다’고 하였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앎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無忍無生] 마음이라도 허망하지 않은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論] 다섯 번째는 간청[請]이다. 논란을 제기하였으나 더 물을 길은 없고 생각은 더 나아갈 수 없으므로 우러러 여쭈어 더 이끌어 주시기를 청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앎이 없고 생겨남이 없는 마음이란, 형체[形段]가 없는 마음이다. 마치 불의 성질이 나무 속에 있으나 정해진 처소가 없듯이. 그것이 결정된 성품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름과 글자가 있을 뿐 그 성질은 얻을 수가 없다. 이런 이치를 밝히기 위하여 이름을 빌어서 말할 뿐, 그 이름도 성립할 수 없다. 마음의 특성[相]도 그러하여 그것이 있는 처소를 볼 수 없으니, 이렇게 마음을 파악한다면 그것이 생겨남이 없는 마음이다.”

[論] 이 아래는 여섯 번째로 해석[釋]이다. 그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얻음이 없다는 도리를 밝히고[開無得道理], 둘째는 생멸이 없는 도리를 보여주고[示無生道理], 셋째는 틀린 생각을 예시하고[擧非], 넷째는 바른 견해를 밝혔다[明示].

얻음이 없다는 도리를 밝힌 것에도 세 가지가 있는데, 즉 주장[法]과 비유[喩]와 비유를 주장에 대입하여 종합한 것[合]이다.

먼저 ‘앎이 없고 생겨남이 없는 마음[無忍無生心]’이란 바로 법인(法忍)에 있는 마음을 다시 한번 거론한 것이다.

‘형체가 없는 마음[心無形段]’이란 마음에 얻는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형(形)은 바탕[體]을 말하고 단(段)은 분위[分]를 말한다. 모든 연(緣)에서 마음의 바탕이나 분위를 찾아보아도 붙어 있거나 떠나 있거나 도무지 얻어지는 것이 없다. 이러한 도리에서 형단(形段)이 없다고 한 것이지, 색(色)을 말할 때 형단(形段)의 상이 없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비유에서 ‘불의 성질이 나무 속에 있으나’라는 말은 ‘아는 마음[忍心]이 이치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와 같은 뜻이다.‘정해진 처소가 없듯이’라고 한 것은 이 나무 속을 보면 모든 극미[極微]가 있으나 그 중에 전혀 불의 성질이 있는 처소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치 중에는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이 많은 법문이 있으나 그 속에서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아도 영원히 그 소재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성질이 정해진 처소를 갖지 않는다는 도리는 부처가 세상에 있건 없건 어느 때나 법성이 항상 그러한 까닭에 ‘결정된 성품’이라고 하였다. 불의 성질이란 이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건져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 성질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나무 속에는 불의 성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도리를 밝히려고 ‘불의 성질’이란 이름을 말한 것이나, 이 이름을 아무리 두드리고 쪼개 보아도 다만 글자가 있을 뿐이다. 모든 글자를 다 찾아 돌아다녀보아도 불의 성질은 얻어지지 않는다, ‘아는 마음[忍心]’이란 이름과 특성[相]도 똑같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에 ‘마음의 특성도 그러하다’고 한 것이다.

확실한 앎[忍]을 얻은 보살이 마음이 이와 같은 줄을 알면, 어떻게 그 속에서 취하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그것이 생겨남이 없는 마음[則無生心]’이라고 하였다.

[經] “선남자야, 이 마음의 본성[性]과 특성[相]은 아마륵(阿摩勒) 열매와 같아서 본래부터 자기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자기와 다른 것이 합쳐지는 데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생겨나는 원인을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일도 없는 것이다.[不因生無生:다른 본에는 ‘不因生不無生’으로 되어 있다.]

어째서 그런가? 연(緣)이 바뀌고 또 바뀌기 때문이다. 연이 일어났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연이 바뀌었다고 해서 멸하는 것도 아니니 숨고 나타나는 것이 다 모양이 없다. 근본 이치는 적멸(寂滅)하여 소재하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볼 수 없으니 결정된 성품이기 때문이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생겨남이 없는 도리를 밝힌 부분[示無生道理]인데, 여기에도 둘이 있다. 먼저는 비유[喩]이고 다음은 비유를 주장에 대입하는 부분[合]이다. 유(喩) 가운데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네 가지 부정[四不]을 설명하고 나중에는 여덟 가지 부정[八不]을 드러낸다.

‘네 가지 부정’이란 무엇인가? 연(緣)을 의지하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제 씨앗이기 때문에 남에게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므로 자타가 합해지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며, 작용이 있으므로 생겨남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는 자기가 없기 때문에 자기로부터 생긴다할 수 없으며, 이미 생겼을 때는 이미 있기 때문에 자기가 생겨날 필요가 없다. 자기에게서 생겨난다는 것이 이미 성립되지 않는데, 누구를 가리켜 남[他]이 있다고 하겠는가? 자기도 남도 이미 없는데 어찌 ‘합쳐지는 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원인이 있어서 생긴다 하는 것도 이미 되지 않는 말이니, 하물며 원인 없이 생길 수 있을까? 이런 방식으로 생겨남을 찾아보아도 전혀 찾아질 수 없다. ‘생겨나는 원인을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일도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원인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즉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생겼다고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다음으로 숨은 의심을 풀어 주는 것이다. 의문을 품은 사람은 세 번째 부정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란 무엇을 말하는가? 열매[果]가 생기는 데는 씨앗이 직접적인 원인[親因]이 되고, 흙과 물 같은 것이 간접적인 계기[疎緣]가 되어 이 둘이 합쳐진 까닭에 열매가 생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합쳐지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不共生]’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그러므로 어째서 그런가 하고 물었다.

‘연이 바뀌고 또 바뀌기 때문[緣代謝故]’이란 저 두 가지 연[親因·疎緣]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바뀐다는 뜻이다. 머무는 시간이 이미 없다면 공용(功用)이 없다. 공용이 없으므로 합쳐서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게송에서도 ‘제행(諸行)이 모두 찰나라서 머무름이 없거늘 하물며 작용이 있으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뀌고 또 바뀌는 것’을 따져보면 생겨나는 일도 없고 소멸하는 일도 없다. 어째서 그런가? 이미 잠시도 머무름이 없다면 생겨남이 없는 것이고, 생겨남이 없으므로 소멸도 없는 것이니, ‘연이 일어났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연이 바뀌었다고 해서 멸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따져들어가 보면 숨고 나타나는 일이 다 없는 것이다. 숨었을 때는 씨앗으로 흙 속에 있고, 나타날 때는 싹과 줄기로서 땅 위에 나와 있기 때문이

다. ‘근본 이치는 적멸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 나무의 뿌리와 줄기의 이치를 따져서 열매가 생기는 원인을 구하여도 결국 일어남이 없으므로 ‘적멸(寂滅)하여 소재하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결정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다. 결정성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經] “이 결정성은 또한 같은 것도 아니고[不一], 다른 것도 아니며[不異], 아주 끊어진 것도 아니고[不斷], 언제나 계속되는 것도 아니며[不常],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不入], 나오는 것도 아니며[不出], 생기는 것도 아니고[不生], 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不滅]. 모두 네 가지 비방[四謗]을 떠나 말로 표현할 길이 끊겼으니, 생함이 없는 심성(心性)도 그렇다. 어찌 생겨난다, 생겨나지 않는다, 확실한 앎이 있다, 확실한 앎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論] 다음은 여덟 가지 부정[八不]을 밝힌 것이다. 법이 원래 그러함을 앞의 네 가지로만 밝힌 것이 아니라 같으냐, 다르냐[一異] 하는 등 여덟 가지 견해를 모두 끊어준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열매[菓]와 씨[種]가 하나가 아닌 것은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르지도 않으니,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씨와 열매는 단절되어 있지도 않다[不斷]. 열매가 씨를 이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항상한 것도 아니니[不常], 열매가 생기면 씨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열매가 맺었을 때는 씨가 없기 때문이다. 열매는 씨 밖으로 나온 것도 아니니 씨일 때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으므로 생겨남이 없다. 언제나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되어 버리는 것도 아니므로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으므로 없다[無]고 말할 수 없고, 생기지 않으므로 있다[有]고 말할 수 없다. 두 가지 치우침[二邊]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고도 말할 수 없고, 또 중간에 해당되지도 않으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네 가지 비방[ 四謗]을 떠나 말로 표현할 길이 끊겼다’고 하였다.

아마륵(阿摩勒) 열매가 말로 표현할 길이 끊겼듯이, 법을 확실히 아는 마음[法忍之心]도 이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생함이 없는 심성(心性)도 그렇다’고 한 것이다.

[經] “만일 마음에 얻음이 있느니 머무름이 있느니, 또는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반야[어떤 본에는 ‘반야’라는 두 글자가 없다]를 얻지 못한 자로서 긴 밤을 지내는 사람과 같다.”

[論] 이것은 세 번째로 틀린 생각을 예시[擧非]한 대목이다. 어떤 사람이 ‘무생을 확실히 아는 마음[無生忍心]은 심체(心體)를 가지고 있으며 무생(無生)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든가, 또는 ‘생겨남이 없는 이치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심성(心性)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는 망집(妄執)으로서 보리와 반야를 가로막는다. 이 대목은 청정한 성품으로서의 깨달음[性淨菩提]과 그것을 증득하는 지혜[能證般若]를 얻지 못했음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리는 ‘처음 일어난 보리[始起菩提]를 뜻하며, 반야는 보리의 원인을 뜻하는데, 깨달음의 원인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긴 밤’에 비유하였다. 무시이래의 망상은 큰 꿈이기 때문이다.

[經] “심성을 명확히 분별하는 자는 심성이 한결같다[如]는 사실과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는 사실을 아니, 그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행[無生行]이다.”

[論] 이것은 네 번째로 바른 생각을 드러내는[顯是:明是] 것이다. ‘심성을 명확히 분별하는 자’란 자기 마음으로 자신의 심성(心性)을 잘 아는 자이다. 경에서도 ‘만약 대상을 취하는 작의[能取作意]를 가지고 반대로 대상을 취하는 그 작의를 통달한다면 이야말로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 평등하고 평등해져서 무루(無漏)의 지혜가 생기고 성제(聖諦)를 통달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심성이 한결같다는 사실을 안다’고 한 것은 스스로 관찰하는 마음을 안다는 뜻인데, 그 체의 성품[體性]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는 사실을 안다’고 한 것은, 아는 작용[能知用]도 그렇다는 것이니, 작용의 성품[用性]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체와 용이 평등하여 생겨남도 멸함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음을 관찰한다. 이런 이유로 ‘그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행[是無生行]’이라고 하였다.

위에서 네 가지 부정[四不]으로 무생(無生)을 밝힌 것은 무생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이치란 범부와 성인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한편 여기서 한결같음[如]을 아는 것으로 무생(無生)을 밝힌 것은 무생의 행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행이란 성인에게만 해당한다. 성인에게만 있는 행은 이치와 일미(一味)이며, 공통하는 이치는 지혜와 평등하니 평등한 일미이기 때문에 성인도 달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으므로 성인도 같게 할 수가 없다.

‘같게 할 수 없다[不能同’]는 것은 같지만 다른 것이요, ‘달리 할 수 없다[不能異]’는 것은 다르지만 같다는 뜻이다. ‘같음[同]’이란 다른 데서 같은 것을 알아내는 일이요, ‘다름[異]’이란 같은 데서 다른 것을 밝히는 것이다. ‘같은 데서 다른 것을 밝힌다’는 것은 같은 것을 나누어서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데서 같은 것을 알아낸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녹여서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실로 같음이란 다른 것들을 녹이는 것 이 아니기 때문에 같음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다름이란 같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름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다르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요, 같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도, 둘도 아니요 별개도 아니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만일 마음이 본래부터 한결같아[如] 행(行)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모든 행이 생겨나지 않으며, 생겨나는 행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생겨나지 않고 행도 없으니 이것이 무생행(無生行)이 아니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로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詰問答]인데 여기에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행을 들어 이치를 논란한 것[擧行難理]이고, 둘째는 증득한 것이 있느냐고 따지듯이 묻는 말씀[反詰有證]이고, 셋째는 얻은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 대답한 것[仰報無證], 넷째는 얻은 것이 있느냐고 반문한 것[反詰有得], 다섯째는 얻은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 대답한 것[仰報無得], 여섯째는 증득한 것이 없다고 진술한 것[述無證得],

일곱째는 의심나는 곳을 다시 진술한 것[更陳所疑], 여덟째는 그 의심을 결단해 준 것[決其所疑]이다.

위 경문은 첫 번째로서 행을 들어 이치를 논란한 대목이다. ‘만일 마음이 본래부터 한결같아서 행(行)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설한 행무생(行無生)의 뜻을 거론한 것이다. 즉 앞에서 ‘심성이 한결같다[如]는 사실과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는 사실을 아니, 그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행[無生行]이다’라고 한 대목으로서, 생멸하는 행에 마음이 생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무생행(無生行)의 상(相)을 직접적으로

제시한 것이다.‘모든 행이 생겨나지 않는다’ 함은 이치가 생함이 없음[理無生]을 들어 말한 것으로서, 즉 모든 중생의 5음(陰)의 모든 행(行)은 본래 생겨나는 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생겨나는 행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이치의 무생이 행의 무생과 다름을 밝힌 것이다. 말하자면 생겨난 행이란 그대로가 공(空)이라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지, 이치를 깨달아 마음을 없애서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생겨나지도 않고 행도 없으니’라고 한 것은 이치의 무생과 행의 무생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묻는 자의 뜻은 이렇다. 생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심행(心行)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무생인(無生忍)의 경우, 분별이 없기 때문에 무생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생인(無生忍)을 증득하지 못하는 범부가 아무도 없어야 할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무생(無生)으로써 무생행(無生行)을 증득하였느냐?”

[論] 이것은 두 번째로, 증득한 것이 있느냐고 따지듯이 묻는 말씀[反詰有證]이다. 묻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네가 무생인을 관하려고 들어갔을 때 모든 행이 무생이라는 이치에 의하여 무생이라는 행을 얻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반문하여 따지는 이유는, 저 보살이 이무생(理無生)은 행무생(行無生)과 다르다고 생각하여 ‘이무생이 행무생과 마찬가지냐’고 따져 묻기 때문에 ‘네가 관(觀)에 들었을 때 이(理)와 행(行)이 달라서 능(能)과 소(所)가 있더냐’고 반문하신 것이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아닙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생멸이 없는 행이란 본성[性]과 모양[相]이 공적하여 봄도 없고 들음도 없으며,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으며, 말함도 없고 설함도 없으며, 앎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데 어떻게 증득할 수 있겠나이까? 증득했다고 한다면 쟁론(諍論)이 되리니, 다툼도 없고 논함도 없어야 무생의 행이 될 것입니다.”

[論] 이것은 세 번째로, 증득이 없음을 부처님께 답한 것[奉答無證]인데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증득이 없음을 밝히고[明無證], 둘째는 잘못된 생각을 들고[擧非], 셋째는 바른 생각을 드러냈다[顯是]. 첫째 가운데도 둘이 있는데 처음에는 간단히 요지를 표하고 다음에는 풀이를 하였다.

‘생멸이 없는 행이란 본성과 모양이 공적하다’고 한 것은 총괄적으로 요지를 내세운 말이다. ‘본성이 공적하다’는 것은 마음의 체성을 관찰해보면 나고 죽는 모양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즉 앞에서 ‘심성(心性)이 한결같음을 알면’이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모양이 공적하다’는 것은 마음의 아는 작용을 관찰해보니 작용하는 모양[用相]도 역시 한결같다는 뜻이다. 즉 앞에서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이어서 열 가지 무[十無]로서 요지가 되는 첫 구를 풀이한다.

‘봄도 없고 들음도 없다’ 함은 심성의 희이[希夷]를 말한 것이다. 이(夷)하기 때문에 색(色)을 끊었으므로 상(像)을 통해 표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희(希)하기 때문에 소리를 끊었으므로 교(敎)를 통해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다’ 함은 공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밝히고, 또 생기는 것을 쫓아 버리지만 잃을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없음[四無]은 성품이 공적함[性空寂]을 풀이한 것이다.

‘말함도 없고 설함도 없다’ 함은 심과 행이 이미 고요하여 언설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며, ‘앎도 없고 모양도 없다’ 함은 심과 행이 적멸하여 2분(分)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다’ 함은 이미 분별이 없으므로 성품이라고 취할 만한 것도 없고, 모양이라고 버릴 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상 여섯 가지 없음[六無]은 모양이 공적함[相空寂]을 풀이한 것이다.

무생행 중에 있다면 이렇게 공적한데 어떻게 거기서 취하고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답할 때 앞에서 제기했던 논란이 논란으로서 성립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잘못을 들어 옳은 것을 나타내었으니 따져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論] 이것은 네 번째로, 얻은 것이 있느냐고 반문한 것[反詰有得]이다. 보살이 아직 아뇩보리를 얻지 못했는데 여래께서 무슨 까닭으로 ‘너는 그것을 얻었느냐’고 물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이렇다. 보살이 아직 구경보리(究竟菩提)는 얻지 못하였으나 초지(初地)의 보리는 이미 증득했다. 『법화론(法華論)』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8생(生)에서 1생(生)까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자는 초지의 보리를 증득한다. 그러므로 삼계의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떠나서 분수에 따라 진여불성을 볼 수 있는데, 이를 가리켜 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지 여래의 방편을 완전히 만족한 열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나는 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진여불성에 의하여 보리라고 한 것이며, 그것을 증득해서 보기 때문에 ‘보리를 얻는다’고 표현했다. 경에서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한 것, 이것이 보리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나이다. 왜냐하면 보리의 성품 중에는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으며, 깨달음도 없고 앎도 없으며, 분별도 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별이 없는 가운데 청정한 성품이 있고, 그 성품에는 섞여 들어감이 없으며, 언설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앎도 아니고 모름도 아닙니다. 따를만한 모든 법행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행(法行)은 처소를 보지 않으니 결정성이기 때문입니다. 얻음이나 얻지 못함이 본래 없는데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나이까?”

[論] 이것은 다섯 번째로, 얻은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 대답한 것[仰報無得]인데 언표[標]와 해석[釋]과 결론[結]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해석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얻을 대상인 보리에는 얻을 성품[所得性]이 없음을 밝히고, 나중에는 얻은 모든 행에는 얻는다는 생각[能得相]이 없음을 나타냈다.

처음에 ‘보리의 성품’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眞如)의 성품(性)이 텅 비어 걸림이 없고 그 성품이 어둠의 가림을 떠나 있기 때문에 ‘보리’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그 중에는 간직할 참된 성품이 본래 없고, 없앨 망상도 본래 없으므로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본각은 사려로 구성한 깨달음[思構之覺]을 멀리 떠났고, 홀연[率爾]히 앎도 없기 때문에 ‘깨달음도 없고 앎도 없다’고 하였다.

이미 분별하는 견(見)이 없고, 행의 대상이 되는 상(相)도 떠나 있으므로 ‘분별과 상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혹(惑)의 상에 의해 탁(濁)해지지 않으며, 본성(本性)이 더러움을 떠났으므로 ‘청정한 성품’이라고 하였다. 종(縱)으로는 생멸(生滅)이 섞여 들어오지 않으며, 횡(橫)으로는 능소(能所)가 뒤섞이지 않으므로 ‘성품에는 섞여 들어감이 없다’고 하였다.

‘언설도 없다’란, 말이라는 도구[能言]와 말이 지시하는 바[所言]가 다 끊어졌기 때문이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고 한 것은 비록 여여함이 있지는 않지만 여여함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앎도 아니고 모름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본각(本覺)이 아니며 불각(不覺)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리의 성품은 이와 같이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따를 만한 모든 법행’ 이하는 얻음을 가능케 하는 행[能得行]이 없음을 나타내는데, 전품(前品)에서 ‘6도(度)의 행(行)이 실다운 궤범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 대목에서와 같은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따를 만한 법[可法]이라고 한 것이다.‘(법행도)그렇습니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무득(無得)이라 한 의미와 같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모든 법행[一切法行]’이란 6도(度) 등의 행을 말한다. ‘처소를 보지 않음[不見處所]’이란 득(得)과 실(失), 각(覺)과 지(知), 나아가 유(有)와 무(無), 지(知)와 부지(不知) 등 행할 만한 처소를 보지 않기 때문에 보리와 평등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본래 유능득(有能得)과 불능득(不能得)이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하는 얻을 수 없는 이치를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구절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네가 말한 대로 모든 심행은 무상(無相)에 불과하니, 체(體)가 고요하고 생겨남이 없다.”

[論] 여기서부터는 여섯 번째로, 여래의 설명[如來述成]인데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설명[正述]이고, 둘째는 틀린 견해를 지적한 것[擧非]이며, 셋째는 옳은 견해를 밝힌 것[顯是]이다.

정술 중에도 셋이 있는데 처음에는 통틀어 서술했고[摠述], 다음에는 따로따로 서술하였으며[別述], 뒤에는 다시 결론을 맺었다[結成].

‘그렇다, 그렇다[如是如是]’한 데서 앞의 ‘그렇다’는 (무생을) 증득하지 못했다[無證]고 한 대목을, 뒤의 ‘그렇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다[無得]고 한 대목을 두고 한 말씀이다.

‘모든’ 이하는 두 번째인 별술(別述)이다. 먼저 무생(無生)을 말하고 뒤에는 적멸(寂滅)을 말한다. 무생이란 무생의 행[無生行]이니, 능증(能證)과 능득(能得)이 없음을 말한다. 적멸이란 적멸의 이치[寂滅理]이니 소증(所證)과 소득(所得)이 없음을 말한다.

처음에 말한 ‘모든 심행’이란 출세간의 무분별지(無分別智)와 상응하는 모든 심행을 말하는데, 어떤 모양도 취하지 않고 모양 없는 곳을 깨달아 합치[證會]하기 때문에 ‘무상(無相)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모든 심행은) 공적(空寂)을 체(體)로 하여 전혀 생함이 없기 때문에 ‘체가 고요하고 생함이 없다’고 하였다.

[經] “식(識)마다[可有識識:어떤 본에는 ‘所有諸識’이라고 되어 있다] 모두 그러하다. 어째서 그런가? 눈[眼]과 안촉(眼觸)이 모두 공적하고 식도 공적하여 움직이는 모양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모양도 없으며, 안으로 3수(受)가 없어 3수도 적멸하기 때문이다. 귀[耳]·코[鼻]·혀[舌]·몸[身]과 심(心)과 의(意)와 의식(意識), 그리고 말나식(末那識) 아리야식(阿梨耶識)도 그와 같아 모두 생기지 않으니 적멸심이며 무생심이다.”

[論] 이것은 두 번째인 (別述을 無生과 寂滅 둘로 나눈 가운데) 적멸의 의미를 설명한 것으로서, 모든 세간의 여덟 가지 식이 공적함을 말한 것이다. 이 중에도 둘이 있으니 하나는 앞의 내용에 예를 든 것이고, 둘은 자세한 해석이다.

맨 앞에 ‘식마다[識識] 모두 그러하다’고 한 것은, 존재하는 세간의 8식(識)을 모두 포함한다는 뜻으로서, ‘곳곳에서’라는 표현이 모든 곳을 다 포함하는 예와 같다. ‘그러하다’ 함은, 앞에서 말했듯이, 공적한 마음이 ‘세간을 벗어난 마음이란 생기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둘째인 자세한 해석이다. ‘눈[眼]’은 안근(眼根)을 말하고, ‘안촉(眼觸)’은 즉 변행(遍行) 중의 촉(觸)을 말하는데, 세 가지가 화합[三和]하는 데서 생긴다. 셋을 화합하게 하면서도 그것들은 흩어져 공(空)이 되므로 그것을 밝히기 위해 한 예를 든 것이다.

‘식도 공적하다’ 함은 안촉이 이미 공하므로 안식(眼識)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속 이어지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으며, 또한 한 찰나도 옮기고 움직이지 않는 적이 없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모양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모양도 없다’고 하였다.

‘안으로 3수(受)가 없다’고 한 것은 3수가 생겨나지만 그것들이 본래 적멸하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마음에 관한 모든 법수(法數) 중에서 촉(觸)과 수(受)가 가깝고 다른 것에 비해 두드러진 공능을 가지므로 이 둘을 들어서 나머지 법들을 다 포함해버린 것이다.

‘귀·코·혀·몸’이란 귀[耳]·이촉(耳觸)·이식(耳識) 등을 말한다.

‘심(心)·의(意)·의식(意識)’이란 제6식을 말한다. 미래로 보아서 심이라 부르고, 과거로 보아서 의라고 부르고, 현재로 보아서 의식이라고 부른다. 수전문(隨轉門)에 의해서 이 세 가지 이름을 들어 3세가 모두 공적함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말나식과 아리야식은 제7·제8식을 말하는데, 모두 안식과 같아서 역시 생기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자세히 해석하는 문장이다.

다음에 ‘적멸심(寂滅心)’이란, 바로 위에 나오는 ‘8식이 공적하다’는 내용을 결론짓는 말이고, ‘무생심(無生心)’이란 저 앞의 ‘체(體)가 고요하고 생겨남이 없다’는 말을 결론지은 것이다.

[經] “만약 적멸심을 일으키거나 무생심을 일으키면 이는 유생행(有生行)이지 무생행(無生行)이 아니므로 안으로 3수(受)와 3행(行)과 3계(戒)가 생긴다.”

[論] 이는 (如來述成을 正述, 擧非, 顯是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로 틀린 견해를 지적한 것[擧非]이다. 얻을 바가 있다고 여기면서 대승을 공부하는 이가 여덟 가지 식이 공적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적멸에 위배되므로 ‘적멸심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세간을 벗어난 마음이 무생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심(心)이 생겨 형상이 없는 이치를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므로 ‘무생심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다만 이것은 세간에서 유전(流轉)하는 행이라서 출세간의 무생인행[無生忍行]과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유생행…’이라고 하였다.‘3행(行)’이란 신(身)·구(口)·의(意)로 짓는 일이며, 선(善)과 불선(不善)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3계(3戒)’란 신·구·의가 그치는 것[止]이며 오직 선에만 해당한다. 이 세 가지 행(行)과 세 가지 계를 일으키는 것을 원인으로 하여 3유(有)에 태어나 3수(受)를 모두 다 받는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돌고 돌면서 벗어나지 못한다.

[經] “만약 생겨나는 마음을 적멸케 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면 마음이 항상 적멸하여 힘씀[功]도 없고 작용[用]도 없으며, 적멸의 상을 증득하지 않으며, 증득이 없다는 데[無證]도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 만한 소지가 있는 모든 곳에 머물지 않는다. 이렇게 형상이 없음을 총지(總持)하면 3수(受)가 없다. 3수 등의 세 가지가 다 적멸한지라, 청정하여 머묾도 없고, 삼매(三昧)에도 들지 않고, 좌선(坐禪)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무생(無生)이 며 무행(無行)이다.”

[論] 이것은 세 번째로, 옳은 견해를 밝힌 것[顯是]이다. ‘만약 생겨나는 마음을 적멸케 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면’이란 앞의 ‘만약 적멸심을 일으키고’란 구절과 반대로, 생하는 모든 마음을 버려서 생함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음이 항상 적멸하여 힘씀도 없고 작용도 없음’이란 앞서 ‘만약 무생심을 일으키면’이란 구절과 반대로, 생기고 소멸하고 일어나고 움직이는 모든 모습을 떠나 있으며, 작의(作意)·분별(分別)·공용(功用)도 없다는 말이다. ‘적멸의 상을 증득하지 않음’이란 일어나는 마음은 떨어버렸다 할지라도 적멸의 상을 머물러두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 ‘증득이 없다는 데도 머무르지 않음’이란 적멸의 모습을 취함이 없다고 할지라도 증득이 없는 잘못에 떨어지 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머물 만한 소지가 있는 모든 곳에 머무르지 않음’이란 머무름과 집착의 잘못을 전체적으로 밝힌 것이니, 머물 만한 곳이 어디든 다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머물 만한 소지가 있는 곳’이란, 일어남을 버리면 적멸에 머물 소지가 있고, 유증(有證)을 버리면 무증(無證)에 머물 소지가 있는데, 이와 같이 머물 만한 곳에 모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형상이 없음을 총지함’이란 공덕을 다 구족했음을 총괄해서 나타낸 것이니, 무생심이 모든 행덕(行德)을 간직하여 차별 없는 일미(一味)의 상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3수 등의 세 가지가 없다’고 한 것은 앞에서 ‘안으로 3수 등이 생기고’란 구절의 반대로, 유전하는 인과의 모습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다 적멸한지라’한 것은 3수(受) 등이 본래 공(空)함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청정하여 머묾도 없다’ 함은 통달한 마음도 공에 머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삼매에도 들지 않는다’ 함은 선정에 들려는 세간의 마음을 없앴기 때문이다. ‘좌선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함은 선(禪)의 고요함에 머무르려는 세간의 마음도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생겨나는 마음이 없으며, 또한 분별하는 행(行)도 없으므로 ‘무생이며 무행이다’라고 하였다.[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선(禪)은 움직임을 거두어 모든 환상과 혼란을 가라앉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선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論] 이것은 일곱 번째로, 의심나는 곳을 다시 진술한 것[陳疑,更陳所疑]이다. 의심하는 뜻은 이렇다. ‘모든 선정(禪定)은 들떠 동요하는 생각을 거두고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출세간 무생행의 마음에서는 선정에도 들어가 머물지 않는다는 것인가?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필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심이 있으므로 말이 난 김에 그렇게 물은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선(禪)이라고 하면 그것은 움직임[動]이니, 움직이지도 않고 선정을 닦지도 않아야 이것이 무생선(無生禪)이다. 선의 본성은 생겨남이 없으니 선을 생한다는 상을 떠난 것이다. 선의 본성은 머묾이 없는 것이니 선에 머문다는 움직임을 떠난 것이다. 선의 본성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무생(無生)과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얻는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의지하여 머무는 일이 없으며, 마음도 동요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혜이기 때문에 무생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얻는다.”[論] 이것은 여덟 번째로 의심을 결단해준 것[決疑,決其所疑]이다.

‘선이라고 하면 그것은 움직임이다’라고 말한 것은, 세간의 선은 비록 산란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경계의 모양을 취하는데, 모양을 취하는 마음이 생기면 움직임이 생기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와 같이 움직임을 일으키는 선(禪)을 떠나야 비로소 이정(理定)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무생선(無生禪)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정(理定)은 그 본성이 생겨나거나 움직임이 없는 것이므로 ‘선의 본성은 생겨남이 없다’고 하셨다. 생겨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고요함에 머무는 일도 없으므로 ‘선의 본성은 머묾이 없다’고 하셨다.

생겨남이 있으면 그것은 모습이요, 머무르고 집착함이 있으면 그것은 움직임인데, 여기서는 이것과 반대되므로 ‘선을 생한다는 상을 떠난 것’, ‘선에 머문다는 움직임을 떠난 것’이라고 하였다.

위의 모든 구(句)들은 이정의 특성[理定相]을 밝히고 있다.

‘선의 본성에 …을 알면[知禪性]’ 이하는 이(理)와 지(智)의 특성을 설명한다. 하나의 체(體)를 가지고 두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선의 본성에는 움직임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이란 선의 본성은 생겨남이 없음을 안다는 뜻이다. ‘선의 본성에는 고요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이란 선의 본성은 머묾이 없음을 안다는 뜻이다.

‘무생(無生)을 얻는다’ 함은 이치[理]의 무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얻는다’ 함은 행(行)의 무생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것 역시 의지하여 머무는 일이 없다’ 함은 무생을 아는 지혜는 이치에 의하여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니 능(能)과 소(所)를 떠났기 때문이다. ‘마음도 동요하지 않는다’ 함은 이치에 의지해 머무르지는 않지만 마음을 일으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

이상 여덟 대목이 합해서 두 번째인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詰問答]’이 된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무생반야(無生般若)는 어느 곳에든 머묾이 없으며, 모든 곳에서 떠남도 없으며, 마음에는 머무는 곳도 없으며, 머물려는 마음도 없어서 머묾도 없고 마음도 없나이다. 마음이 생겨남 없이 머무나니,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라면 무생의 머묾이라 하겠습니다.

존자시여, 심무생행(心無生行)은 불가사의하니 불가사의한 것 속에서는 말할 수 있기도 하고 말할 수 없기도 합니다.”

[論] 이는 세 번째인 보살이 이해하는 대목[菩薩領解]이다.

‘어느 곳에든[一切處]’이란 진(眞)이다, 속(俗)이다, 동(動)이다, 적(寂)이다 하는 모든 곳을 가리킨다. ‘머묾이 없다’ 함은 일체에서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떠남도 없다’ 함은 일체에서 얻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저 일체란 다 그런 것도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머무는 곳도 없다’ 함은 머무는 대상[所]으로서의 처소가 없다는 뜻이요, ‘머무르려는 마음도 없다’ 함은 머무는 주체[能]로서의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머묾도 없고 마음도 없다’ 함은 앞의 두 구절을 합쳐서 머무는 곳과 머무는 마음이 없으므로 하는 말이다.‘마음이 생겨남 없이 머문다’ 함은 무생(無生)·무주(無住)의 마음이 없지 않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란 앞에서 ‘어느 곳에든 머묾이 없으며 모든 곳에서 떠남도 없다’한 대목을 결론지은 말이니, ‘떠남이 없다’는 뜻을 가지고 머문다는 의미를 가설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무생의 머묾이라 하겠습니다’ 함은 ‘마음에 머무는 곳도 없으며……마음이 생겨남 없이 머무나니’라고 한 대목을 결론지은 말이니, 머묾이 머묾 없음이고, 머묾 없음이 머묾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심무생행은 불가사의하다’고 한 것은 언설(言說)을 여의고 사려(思慮)를 벗어나 끊었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것 속에서는 말할 수 있기도 하고 말할 수 없기도 합니다’라고 한 것은 말을 떠났고, 말 떠남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이언(離言)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이요, 이언을 여의었기 때문에 또 말할 수가 있다고 한 것이다.

‘말할 수 있다[可說]’ 함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다[不可說]’ 함은 그렇기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총괄적으로 ‘말할 수 있기도 하고 말할 수 없기도 하다[可不可說]고 하였다.

언설(言說)에는 가(可)·불가(不可)가 있다고 함과 같이 사유에도 가·불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한 가지만을 들어서 숨겨진 다른 쪽까지도 드러낸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論] 이것은 (正說을 넷으로 나눈 가운데) 네 번째로, 여래가 결론을 맺는 대목[述成,如來述成]이다.

보살이 앞에서 이해한 것이 도리에 계합할 뿐만 아니라, 위로는 부처님 말씀에 들어맞았으므로 부처님께서 ‘그렇다, 그렇다’하고 반복하셨다.

장행(長行)으로 된 정설(正說)은 이상으로 끝났다.

[經] 심왕보살이 이런 말씀을 듣고 이제껏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면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게송으로 찬탄한 부분[以偈讚說]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서문(序文)이요, 다음이 게송이다. ‘이런 말씀을 듣고’란 이 품(品)에 전체에 나온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뜻이다.

[經] 큰 지혜를 구족하신 세존께서

생함이 없는 법을 널리 설하셨으니

이제껏 듣지 못한 것을 들었사옵고

아직 설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 설하셨네.

[論] 이 아래 세 개의 송(頌)은 따로 송(頌)한 글이 아니고 다만 총괄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여기에 법(法)·비유[喩]·비유를 법에 대입시킴[合]·결론[結]의 네 부분이 있다.

첫 번째 송은 법(法)을 말씀해 주신 것을 찬탄한 것이다.

‘아직 설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 설하셨다’ 함은 비록 앞에서 광범하게 설명하였지만 지금 이 경에서는 말은 간략하나 의미는 풍부하고, 글은 간추려 있지만 이치는 자세하므로 이와 같은 묘한 법을 일찍이 설한 적이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經] 마치 맑은 감로가

간혹 한번 나타나듯이

만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려우며

듣기 또한 어려워라.

위 없는 좋은 복밭이며

최상의 훌륭한 약이어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지금 우리를 위해 말씀하셨네.

[論] 앞에서부터 두 구는 두 번째인 비유이다. ‘감로’란 불사(不死)의 약이니, 이 경이 사람들을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줌을 비유한 것이다. 다음의 네 구는 세 번째인 비유를 법에 대입시킨 부분[合]이다. ‘위 없는 좋은 복밭’이란 법을 듣는[能聞] 사람들을 찬탄한 것이다. 그리고 최상의 훌륭한 약이란 들은[所聞] 법을 말한 것이다. 아래의 두 구는 네 번째인 결론[結]에 해당한다.

[經] 그 때 대중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모두 무생(無生)과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얻었다.

[論] 이것은 세 번째, 당시 대중이 이익 얻음[時衆得益]을 밝힌 것이다. 초지에 들기 전[地前]의 범부가 이 품을 듣고 초지(初地)의 무생인(無生忍)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4. 본각리품(本覺利品)

[論] 모든 유정(有情)이 아득한 때로부터 무명(無明)의 긴 밤에 들어서 망상의 깊은 꿈만 꾸고 있다. 보살이 관(觀)을 닦아 무생(無生)을 얻었을 때, 중생(衆生)이 본래 적정하여 단지 본각(本覺)뿐임을 통달한다. 그리하여 한결같은[一如] 침상에 누워 이 본각의 이익을 가지고 중생을 도와준다. 이 품은 이러한 도리(道理)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본각리품(本覺利品)」이라고 이름하였다.

[經] 그 때 무주보살(無住菩薩)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미진실(一味眞實)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법문을 듣고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와서 여래 곁에 앉아 집중하여 잘 듣고, 맑은 경지에 들어가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論] 관행(觀行) 6품을 각각 밝힌 가운데, 여기서부터가 세 번째인 본각(本覺)의 이익을 밝힌 부분이다. 무생행(無生行)에 의지하여 본각을 알아야 일체 중생을 두루 교화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런 뜻에서 「무생행품」 다음에 이 품을 연설하셨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본각의 이익을 자세히 밝힌 부분[廣明本覺利益]이요, 둘째는 게송으로써 찬송한 부분[以偈讚頌]이며, 셋째는 그 때의 대중이 이익 얻었음[時衆得益]을 말한 것이다.

첫째에도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움직임을 통하여 고요함을 밝힌 것으로서, 본각의 이익이 무엇을 요점[宗]으로 삼는가를 간략히 지적한 부분[略標本利之宗]이다. 다른 하나는 미세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저한 데까지 본각의 이익이 지니는 뜻을 광범하게 설명한 부분[廣說本利之義]이다.

처음 약표(略標)에도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몸을 이동하는 일을 통해서 본각의 이익을 표시한 부분이요, 둘째는 말씀을 주고받음으로써 본각의 이익을 표시한 부분이요, 셋째는 빛을 내어 본각의 이익을 칭송한 부분이다.

먼저 ‘무주보살(無住菩薩)’이라 함은, 이 사람은 본각이 본래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음을 통달했으나 그렇다고 적정(寂靜)에 머무르지도 않고 항상 두루 교화를 하기 때문에 그 성품[德]에 의해서 ‘무주(無住)’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머묾이 없는 덕이 본각의 이익에 합치하므로 이 사람을 통해 그 요지[宗]를 나타낸 것이다.

‘일미진실하고 불가사의하다’ 함은 앞 품에서 설명한, ‘마음에 생함이 없는 행은 불가사의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가리킨다.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와서 여래 곁에 앉았다’ 함은, 먼저 앉았던 자리는 부처님 자리에서 멀리 있었으나 앞 품의 말씀을 듣고 나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는, 전에는 아직 심오한 법을 듣지 못하여 평범하고 어리석은 자리에 있었으므로 부처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본각의 이익을 얻어 불과(佛果) 가까이에 있게 되었음을 스스로 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집중하여 잘 듣고, 맑은 경지에 들어가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함은, 이미 부처님 자리에 왔을 때 법을 듣는 데 생각을 집중하여 본래 맑고 깨끗한 자리에 들어가 본각(本覺)의 고요함을 따라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 문장으로 본각에 들 때는 본래 움직임이 없음을 통달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얻었음을 표시한 것이다.

[經] 그 때 부처님께서 무주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가?”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저는 근본 없는 데서 왔으며, 지금 근본이 없는 곳에 이르렀나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略標 중에) 두 번째로,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본각의 이익을 표시한 부분이다. 여기는 문(問)·답(答)·결론적인 설명[述成]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 두 번째 답하신 뜻은, 범부의 자리로부터 성인의 자리에 이르렀음을 밝힌 것이다. 성인의 자리에 도달하여 옛날과 지금을 돌이켜 보건대, 범부의 자리에 있던 옛날, 처음 믿음을 일으켜 닦아 나아갈 때는 자신의 마음이 본래 일어나거나 움직인 적이 없음을 스스로 믿었다[信]. 일어나고 움직이는 근거를 찾아보아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성인의 자리에 와서 무생(無生)을 얻었을 때는 자기 마음이 본래 생겨난 적이 없음을 체득해 알게 되었다[證]. 마음이 생기는 근거를 찾아보아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어디에서 온 본래의 기점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지금 이른 곳도 본래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미 근본[本]이 없음을 보였으니 끝[末]이 없음도 알아야 한다. 끝도 없고 근본도 없다는 것은 어디서 온 일도 없고 어디에 도달한 일도 없다는 뜻이다. 다만 부처님께서 물으신 말씀을 받들어 ‘온다’느니, ‘도달했다’느니 하는 말을 빌어 썼을 따름이다. 또 온다, 도달한다 함이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오고 도달하는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온다, 도달한다 하는 표현을 빌어서 오고 도달함이 없음을 나타냈으니, 도달한 곳과 출발한 곳이 한결같이 근본이 없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본래 어디에서 온 것이 아니며, 지금 어디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 네가 얻은 본각(本覺)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니 이는 대보살마하살(大菩薩摩訶薩)이다.”

[論] 이 부분은 결론적인 설명[述成]인데, 설명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온 곳과 도달한 곳이 이미 근본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근본 자리가 없다는 점이 같다면 옴도 없고 도달함도 없다. 어째서 그런가? 온 곳이 도달한 곳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 어디에서 온 일이 없다’고 하였다. 또 도달한 곳도 이미 온 곳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어디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한편 온 곳이 이미 근본이 없으므로 오고 오지 않고 하는 일도 없다. 또 지금 도달한 곳도 근본이 없으므로 도달하고 도달하지 않고 하는 일도 없다. 온 일도 도달한 일도 이미 없다면 본래 고요함이다. 그러므로 ‘네가 얻은 본각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다’고 말씀하셨다. 이미 본각의 이익을 얻었다면, 자신을 이롭게 하는 동시에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보살마하살’이라고 하셨다.

[經] 큰 빛을 뿜어 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시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장하다 보살이여,

지혜가 원만하여

항상 본각의 이익으로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구나.

네 가지 몸가짐 어디서든지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물러

모든 중생들을 인도하여

오지 않고 가게만 하는구나.[다른 본에는 ‘去去’가 ‘不去’라고 되어 있다]

[論] 여기는 세 번째인 여래가 빛을 뿜어 보살을 칭찬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경을 엮는 이가 서술한 부분이다. (뒤에는 게송이다.)

‘큰 빛을 뿜어 대천세계를 두루 비춘’ 이유는, 큰 지혜의 광명을 얻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세간의 어둠을 비춰 광명을 얻게 했기 때문이며, 여래께서 앞에서 하신 칭찬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장하다, 보살이여’는 무주보살(無住菩薩)을 특별히 칭찬하신 것이다. ‘지혜가 원만하다’ 함은 알았다는 관념이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네 가지 몸가짐 어디서든지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문다’ 함은,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와서 여래 곁에 앉아’라고 한 앞 서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말로 본각의 이익을 얻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오지 않고 가게만 한다’ 함은 고요하면서도 항상 교화하기 때문이다. ‘오지 않음’이란, 인도하고 교화하는데 따라 세간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서지 않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가게만 함’이란, 물러서지 않게 됨에 따라 미망의 세계에서 점점 벗어나 잘 가기[善逝]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經] 그 때 무주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무슨 이익을 운용해야 중생의 모든 정식(情識)을 전변하여 암마라(唵摩羅)에 들게 하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본각의 이익을 크게 略標와 廣說 둘로 나눠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째, 본각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演]이다. 그 중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직접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直廣]이고, 둘은 거듭 부연한 것[重演]이다. 처음의 직광에서도 먼저는 물음이고 다음은 대답이다.

‘무슨 이익을 운용해야’는, 교화하는 자가 이익을 운용하는 측면을 물은 것으로서 앞에서 ‘모든 중생을 인도하여’라고 한 구절에 대한 질문이다.

‘중생의 …를 전변하여…’라 함은 교화 받을 대상의 모든 식(識)을 전변하는 측면을 물은 것으로서 앞에서 ‘가게만 한다’라고 한 구절에 대한 질문이다.

‘모든 정식[一切情識]’이란 여덟 가지 식[八識]을 말한다.

‘암마라(唵摩羅)’란 제9식(第九識)을 말한다. 진제(眞諦) 삼장이 말한 9식의 의미는 이 글에서 나왔고, 해당 장(章: 아래 有得·無得의 집착을 떨어주는 부분)에서 설한 것과 같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여래께서는 항상 일각(一覺)으로 모든 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에 들게 한다. 어째서 그런가? 일체 중생의 본각도 항상 일각으로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 하기 때문이며, 그 정식(情識)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결정된 본성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論] 이 답은 본각이익의 뜻을 본격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正廣:直廣]이다. 그 중에도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제시[標]하고 다음에는 해석[釋]했다.

‘모든 여래께서는 항상 일각으로’라 함은 교화하는 자[能化]의 근본을 지적한 것이다. ‘모든 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에 들게 한다’ 함은 교화의 대상[所化]이 어떻게 전변하는가를 지적한 것이다.

해석 가운데도 기본적인 풀이[正釋]와 더 나아간 풀이[轉釋] 둘이 있다. 정석 중에 ‘모든 중생의 본각’ 이란 앞에서 말한, ‘교화하는 자의 근본’인 일각(一覺)을 풀이한 것이니, 모든 중생이 동일한 본각(本覺)이므로 ‘일각’이라고 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 이를 체득하고 비로소 널리 교화하기 때문에 ‘항상 …으로[常以]’라고 하였다. 이 본각으로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항상 일각으로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한다’고 한 것이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 한다’ 함은, 교화의 대상[所化]이 어떻게 전변하는가 하는 구절을 풀이한 말이다. 본각은 바로 암마라식이다. ‘본각을 얻게 한다’는 것은 들어간다[入]는 뜻을 풀이한 것이니, 본각에 들어갈 때 여덟 가지 식이 모두 본래 적멸임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 깨달음이 끝까지 갔기[究竟] 때문에 모든 식이 생기지 않으므로 ‘모든 식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이 구절은 ‘모든 식을 전변시킨다’는 뜻을 정곡으로 풀이하였다. 이 문장은 두 가지 각인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한꺼번에 나타낸다. ‘모든 중생의 본각…’이라고 한 것은 본각 쪽이고, ‘정식(情識)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깨닫게…’라고 한 것은 시각 쪽이니, 시각이 본각과 동일함을 나타낸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둘째의 전석(轉釋)인데, ‘깨달을 바가 적멸(寂滅)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始覺]’는 앞의 내용을 풀이한 것이다. 8식은 연(緣)을 따라 움직이고 바뀌는데, 결정한 성품을 찾아보면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결정된 본성은 본래 움직임이 없다’고 하였으며, 본래 움직임이 없으므로 본래 적멸이라는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여덟 가지 식 중에 하나라도 다 대상[境]을 연(緣)하여 일어나니 어떻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둘째, 거듭 부연한 부분[重演]이다. 이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시각(始覺)에 관하여 연설하고 다음에는 본각(本覺)에 관하여 연설했다.

시각에 관한 설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식이 공적함[諸識空寂]을 연설하고, 둘째는 모든 식이 생겨남이 없음[諸識無生]을 연설한다. 전자는 시각으로 깨닫는 대상[所覺]을, 후자는 깨닫게 해주는 것[能覺]으로서의 시각을 말한다.

첫 번째에 여섯 차례의 문답이 있으며, 그것을 세 문답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앞의 두 문답인데, 공적하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밝힌 것이다. 둘은 세 번째 문답인데, 같지 않다는 특성을 밝힌 것이다. 셋은 뒤의 세 문답인데, 다르지 않다는 특성을 밝힌 것이다.

처음 문답에서는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음을 밝혔는데, 그 가운데 ‘그 중에 하나라도[可一]’라는 것은 일체(一切)를 의미하니, 즉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여덟 가지 식을 말한다. ‘다 대상[境]을 연(緣)하여 일어난다’ 함은 네 가지 연[四緣] 중에 우선 연연(緣緣:所緣緣)을 가지고 부동(不動)의 문제를 논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대상이 본래 공하고, 모든 식이 본래 공하다. 공하기 때문에 연(緣)의 본성이 없는데, 어찌 연으로 하여 생기겠는가?”

[論] 이는 대상의 연을 부정하여 식이 일어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대상이 공하다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何見:어떤 본에는 ‘如何有見’으로 되어 있고, 또 다른 본에는 ‘如何言見’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다는 것이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겨남이 없고 모양도 없어 본래 자체의 이름을 붙일 수 없이 모두가 공적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특성도 마찬가지고 모든 중생의 몸도 마찬가지니, 몸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論] 이는 두 번째 문답으로서 본다는 것이 허망이고 허망이기 때문에 진공(眞空)임을 밝힌 것이다. 즉 경계가 공하기 때문에 경계가 있다고 보면 그것은 허망이요, 보는 것 역시 공하므로 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허망이라는 뜻이다.

해석 중에 전체적으로 밝힌 것[摠明]과 개별적으로 밝힌 것[別顯] 두 가지가 있다. 전체적으로 밝힌 것은 다음과 같다. 5음(陰)이니 18계(界)니 하는 현상[有]은 본래 ‘내가 색(色)이다’라는 식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데, 다만 허망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색 등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모두가 공적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개별적으로 밝힌[別顯] 중에 ‘모든 법의 특성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은 외계(外界)의 산이나 강 등 6진(塵)으로 된 법의 특성을 말한다. ‘모든 중생의 몸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은, 내계(內界)의 색(色)이나 수(受) 등 5음(陰)으로 된 몸을 말한다. 그 몸 자체도 없는데 어찌 본다는 작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대상이 공하며, 모든 몸이 공하며, 모든 식(識)이 공하다면 각(覺)도 공해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각은 (도리를) 무너뜨리거나 깨뜨리지 않는다.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에 공이 아니고 불공(不空)도 아니어서, 공·불공 따위가 없는 것이다.”

[論] 이 아래는 세 번째 문답으로, 각(覺)과 불각(不覺)이 같지 않은 특성을 밝힌 것이다. 물음의 뜻은 다음과 같다.

‘각도 공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 것은 연으로 생긴 식이 공하다면 연으로 생긴 각도 공해야 하리라는 뜻이다. 즉 식이 공하기 때문에 본다는 것도 허망하다면, 각도 공하다는 이유에서 허망이 되리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답하신 뜻은 다음과 같다. 모든 각은 도리(道理)를 깨뜨리지 않으므로 공이 되게 할 수 없으며, 한편 자성이 있지 않으므로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각에는 공(空)·불공(不空)이 없다. 그러나 모든 식은 그렇지 않아서 망령되이 모든 법을 취하기 때문에 진리에 위반되니, 공이 되게 할 만하고 버릴 만한 것이다. 이렇게 같지 않으니 어찌 서로 비슷하겠느냐는 것이다.

‘결정한 성품’이란, 진여의 본성은 파괴할 수 없으니 본성이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모양 있음을 취하므로써 공(空)을 훼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깨뜨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무성(無性)이라고 헛되이 생각하여 진(眞)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결정한 성품에서는 훼손이나 손상이 없다는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대상도 마찬가지로 공의 모습[空相]도 아니며, 공의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대상이라고 할 저것들은 성품이 본래 결정되어 있는데, 그 결정성의 뿌리는 어느 곳에도 없다.”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각(覺)도 그처럼 어느 곳에도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각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깨끗하고, 깨끗하여 각이 없다. 물질[物]도 처소가 없기 때문에 깨끗하고, 깨끗하여 색[色]도 없다.”

[論] 이 아래의 세 문답은 (각과 불각이) 다르지 않은 특성을 밝힌 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문답은 각(覺)과 경(境)이 같은 형태임을 설명하고, 뒤의 한 문답은 각과 식(識)이 같은 형태임을 나타낸다.

처음 가운데 앞의 것[제4 문답]은 대상과 각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무슨 말인가? 허망한 모든 경계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있지 않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공의 모습인들 어찌 있겠으며, 이미 공이 있지 않으니 어떻게 공이 없음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공의 모습[空相]도 아니며, 공의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각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답 중에 ‘성품이 본래 결정되어 있다’고 한 것은 본래 있지 않으므로 공의 모습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어느 곳에도 없다’고 한 것은 공이 있지 않으므로 공이 없는 것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다음 문답[제5 문답]은 각(覺)과 대상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각도 그처럼’이라고 한 것은, 각도 연으로 생기는 것이라서 본성이 공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답 중에 ‘깨끗하여 각이 없다’ 함은 공한 도리를 깨달았음을 말하는데, 모든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깨끗하다’고 하였다. 각의 본성이 공하다면 공 가운데에는 각(覺)이 없다, 색(色)이 공한 가운데 색의 모습이 없듯이.

앞에서 대상이 각과 같음을 밝힌 것은 ‘대상이 공(空)도 아니고 불공(不空)도 아니’라는 이치를 바로 앞에서 말한 ‘각은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는 이치와 동치시킨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각이 경계와 같다는 것은 ‘각의 본성이 공하여 모양이 없다’는 이치를 ‘대상이 공하여 모양 없다’는 이치에 동치시킨 것이다. 두 글이 같지 않으니 그렇게 알아야 한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마음[心]과 안식(眼識)도 그렇게 불가사의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안식도 그렇게 불가사의하다. 무슨 까닭인가? 색(色)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이름이 없는 것이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눈[眼]에도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봄[見]이 없는 것이라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마음[心]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위가 없는 것이라 일어나는 처소[起處]가 없고, 식(識)에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다. 연(緣)도 요별(了別)도 없어서 성품[性]이 모두 공적하다.”

[論] 이 세 번째[제4 문답]는 식(識)이 각(覺)과 같음을 설명한 글이다. ‘마음과 안식’이란 안식 종자(種子)가 쌓이고 모여 있는 마음과 이 종자가 일으키는 안식을 말한다. 이 둘을 들어서 그 성질이 공(空)함을 표시하였고, 그 아래로는 네 가지 연[四緣]과 관련시켜 안식이 공함을 밝혔다.

‘색에는 처소가 없다’고 한 것은 색의 성품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고, ‘청정하여 이름이 없다’고 한 것은 공(空) 중에는 색이 없기 때문이며,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함은 안근(眼根)에게 대상이 되어주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소연연(所緣緣)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눈에도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봄이 없다’ 함은, 눈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는 안근(眼根)이 없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함은 색(色)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증상연(增上緣)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마음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위가 없다’는 것은 종자가 공한 가운데는 종자가 없기 때문이며, 네 가지 연[四緣] 가운데서 으뜸이 되므로 그렇게 말했다. ‘일어나는 처소도 없다’ 함은, 식을 직접적으로 일으키는 처소가 없기 때문이니, 이는 인연(因緣)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식(識)에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다’ 함은, 이미 세 가지 연이 없어서 안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연(緣)도 요별[別]도 없다’ 함은, 색(色)을 연(緣)하여 요별(了別)하는 식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등무간연(等無間緣)과 안식(眼識)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연이란 앞 찰나에 사라진 연이고 요별이란 뒤 찰나에 생기는 분별인데 이 둘이 다 공하기 때문에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연과 식이 모두 공하기 때문에 총괄적으로 결론지어 ‘성질이 모두 공적하다’고 하셨다.

안식과 네 가지 연이 모두 공함을 설하신 것과 같이 (耳識·鼻識·舌識·身識 그리고)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설하셨다. 즉 ‘법(法:의식의 대상)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이름이 없으므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의(意)에도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보는 일이 없으므로 밖으로 나아감이 없다. 마음[心]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위가 없는 것이라 일어나는 처소[起處]가 없고, 식(識)에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다. 연(緣) 도 요별(了別)도 없어서 성질[性]이 모두 공적하다.’

여기서 ‘의(意)’란 제7식을, ‘마음’이란 제8식을 말한다. 이는 8식이 모두 공적하며 따라서 모든 각(覺)의 공함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經] “본성에는 각(覺)이 없으니 그것을 깨달으면 각이 된다. 선남자야, 각이 없음을 깨달으면 모든 식[諸識]이 (마음의 근원에) 들어간다. 어째서 그런가? 금강지(金剛智)의 경지에서 해탈도(解脫道)로 끊고, 끊고 난 후에 머묾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서 출입이 없게 되며, 마음의 처소가 없는 결정성의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경지는 밝은 유리(琉璃)같이 깨끗하고, 그 본성은 대지(大地)같이 항상 평등하고, 깨달아 묘하게 관찰하는 것이 지혜의 햇빛과 같으며,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성취되어 본각을 얻게 함이 법의 비를 크게 뿌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지혜에 든 자는 부처의 지혜 경지에 든 것이며,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어떤 식(識)도 일어나지 않는다.”

[論] 이 대목은 (始覺을 ‘諸識空寂’과 ‘諸識不生’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째로, 모든 식이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즉 본래 무명(無明)에 따라 여러 가지 식이 생겨났지만 지금 시각(始覺)에 따라서 일심(一心)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니 마음의 근원에 되돌아왔을 때는 모든 식이 일어나지 않고 그 식들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시각이 원만함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간략히 대의를 말하고[略標] 다음에 자세히 풀이한다[廣釋]. 처음 대의를 말하는 것도 둘로 나뉘는데, 처음에 ‘본성에는 각(覺)이 없으니 그것을 깨달으면 각이 된다’ 함은 시각이 원만함을 표시한 것이며, ‘각이 없음을 깨달으면 모든 식[諸識]이 (마음의 근원에) 들어간다’ 함은 모든 식(識)이 생기지 않음을 표시한 것이다.

‘본성에는 각이 없다’ 함은 공한 성품[空性]에는 식(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각도 없다는 뜻이다. 각(覺)도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이 시각의 지혜이므로 ‘깨달으면 각이 된다’고 하였다. ‘각이 없음을 깨달으면’이라 함은, 앞에서 말한 시각을 가리킨 것으로서 시각이 원만할 때 8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이 없음을 깨닫자마자 모든 식이 없어지기 때문이며, 궁극적인 곳을 깨닫자마자 마음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이 들어간다’고 하였다.‘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자세히 풀이한 부분인데 그 중에 둘이 있다. 먼저 원인이 만족하였음[因滿]을 밝히고 뒤에 결과가 원만함[果圓]을 나타냈다.

‘금강지의 경지[金剛智地]’란 등각위(等覺位)로서 시각의 인(因)이 만족한 금강유정(金剛喩定)을 가리키니, 뜻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여기서는 각(覺)의 원인과 관련시켜 금강지(智)라고 부른 것이다.

‘해탈도로 끊는다’ 함은 생기지 않는 원인이 만족한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끊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태어나면서 얻은 무명주지[生得無明住地]를 대치하는 쪽으로 말한다면, 금강심(金剛心)이 무간도(無間道)가 되고, 묘각의 첫마음이 해탈도(解脫道)가 되니 무간도 때에는 무명(無明)과 더불어 같이 있다가 해탈도가 일어날 때 비로소 끊어버린다.

한편 모든 식의 분별하는 종자[諸識戱論種子]를 대치하는 쪽으로 말한다면, 그 앞의 마음이 무간도가 되어 그 종자와 같이 일어나고 같이 사라지고 하다가 마지막 일념인 금강유정이 바로 해탈도가 되어 이 때 종자를 끊어버린다. 지금은 그 종자를 끊는다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므로 ‘금강지의 자리에서 해탈도로 끊는다[金鋼解脫道斷]’고 하였다.

이 때 이숙식(異熟識)이 나타나는 것은 그 앞생각의 종자로부터 나온 것인데, 생겨나는 인과가 때를 같이 하지 않기 때문에 이숙이 된다. 그 뒤에 이숙식이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은 이 때 모든 종자를 이미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해탈도로 끊는다’는 말이 바로 모든 식이 생기지 않는 원인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과의 원만함[果圓]을 나타낸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각(覺)이 원만함을 밝히고, 나중에는 식(識)이 생기지 않음을 나타낸다.

‘끊고 난 후에 머묾이 없는 경지에 들어간다’ 함은 금강지의 해탈도에서 종자를 끊고 난 즉시 머묾 없는 묘각(妙覺)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2제(諦) 바깥에서 홀로 무이(無二)에 있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였다. 머무름이 없는 마음으로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두 가지를 동시에 없앴기 때문에 속(俗)으로부터 나오든 진(眞)으로 들어가든 차이가 없다. 이미 출입이 없으므로 공(空)과 유(有)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그러므로 ‘마음 의 처소가 없다’고 하였다.

처소가 없는[無在] 곳은 오직 일심(一心)이며, 일심의 체는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결정성의 자리[決定性地]’라고 하였다. 일심이 나타날 때 8식이 모두 전의(轉依)하므로 그 때 네 가지 지혜가 원만해진다. 어째서 그런가? 이 일심은 어둠을 떠나서 광명(光明)을 이루므로 밝고 깨끗하여 비추지 않는 영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경지는 밝은 유리 같이 깨끗하다’ 하였으니, 이는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이 일심은 멀리 두 가지 극단[二邊]을 떠나 자타(自他)에 통달하고 평등무이(平等無二)하다. 그러므로 ‘그 본성은 대지(大地)같이 항상 평등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평등성지(平等性智)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일심(一心)은 관(觀)하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문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깨달아 묘하게 관찰하는 것이 지혜의 햇빛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묘관찰지(妙觀察智)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일심은 작위가 없으므로 남을 이롭게 하는 일에서 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성취되어 본각을 얻게 함이 법의 비를 크게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비가 만물을 적셔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이 지혜도 그와 같이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성취하고 본각을 얻게 하니, 이는 성소작지(成所作智)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지혜가 이미 원만하니 이는 시각(始覺)이 만족된 것이다.

‘이러한 지혜에 든 자…’ 이하는 이어서 모든 식(識)이 생기지 않음을 밝힌 부분이다. 이 네 가지 지혜를 얻으면 바로 묘각(妙覺)의 지위다. 그러므로 ‘부처의 지혜 경지에 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때는 이미 일심(一心)의 원천으로 되돌아갔으므로 8식의 모든 물결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에게는 어떤 식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상 두 부분으로 시각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일각(一覺)의 성스러운 힘과 네 가지 넓은 지혜의 경지[四弘智地]는 모든 중생이 본래 다 갖추고 있는 각(覺)에서 나온 이익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은 이 몸 가운데 본래 그것을 완전하게 구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본각의 뜻을 연설한 부분이다. 그 중에 두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내용설명[正明]이고, 둘째는 집착을 놓아주는 것[遣著]이다. 내용설명에도 둘이 있는데 먼저는 본각이 둘 아닌 이치[本覺無二之理]를 밝히고, 다음에는 장애를 제거하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除障入證之門]을 보여 준다. 본각이 둘이 아닌 도리에도 먼저 물음이 있고 다음에 답이 있다.

‘일각의 성스러운 힘과 네 가지 넓은 지혜의 경지’라 함은 앞에서 말한 네 가지 지혜의 뜻을 받아 가지고 한 말이다. 시각이 원만해지면 본각과 같아서 본각과 시각이 둘이 아니므로 ‘일각(一覺)’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며, 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므로 ‘성스러운 힘[聖力]’이라고 하였으며, 일각 안에 네 가지 큰 지혜가 다 갖추어져 있어 모든 공덕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지혜의 경지[智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지혜는 일심(一心)의 양(量)과 같아서 모두 미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넓은 지혜[弘智]’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일각은 다름 아닌 법신(法身)이며, 법신은 곧 중생의 본각이므로 ‘모든 중생이 본래 다 갖추고 있는 각(覺)에서 나온 이익’이라고 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성덕(性德)을 본래 다 갖추고 중생의 마음을 훈습(熏習)하여 두 가지 일[二種業]을 하기 때문에 ‘본각의 이익[本利]’이라고 이름하였다. 본각이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법신 밖으로 나가는 중생이 단 하나도 없으므로 ‘이 몸 가운데 본래 그것을 완전하게 구족하고 있다’고 하였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중생은 본래 번뇌[漏]가 없고 모든 선한 이익의 근본을 지녔지만, 지금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한 욕망의 가시[欲刺]가 있기 때문이다.”

[論] 아래는 대답인데 질문을 인정하고 설명하셨다. 본각 중에는 무량한 성덕(性德)이 있어서 3루(漏)에 의해 물들거나 동요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본래 번뇌가 없다[本來無漏]’고 하였다.

이를 근본으로 하여 모든 선한 이익이 생기므로 ‘모든 선한 이익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비록 본각은 있지만 객진(客塵)인 욕망의 가시에 덮여 있으므로 아직 스스로 본각(本覺)을 얻지 못했을 뿐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아직 본각의 이익을 얻지 못하고 (번뇌를) 채집(採集)하는 중생이 있다면 어떻게 항복시키기 어려운 그것을 항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여서 작용하든 독단적으로 작용하든 아직 분별과 오염이 있으면 정신을 돌려서 공한 도리의 굴(窟)에 머물러 항복시키기 어려운 일을 항복시켜야 한다. 마장[魔]의 결박에서 벗어나면 툭 트인 곳[露地]에 초연히 앉아 모든 식음(識陰)이 열반에 들 것이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장애를 제거하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는데 먼저는 묻고 나중에는 답했다.

물음 가운데 ‘채집[採集]’이란 3유(有)의 욕심으로 생사라는 결과를 취하기 때문에 ‘줍는다[採]’ 하였고, 이 모든 번뇌가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에 ‘모은다[集]’고 하였다. 이것들이 시작 없는 때부터 끊이지 않고 현행(現行)하므로 ‘항복시키기 어렵다[難伏]’고 말한다. 고쳐나가는 길이 겨우 생기기는 하였으나 그 힘이 미약하고 열등하기에 어떻게 항복시킬까, 이렇게 의심한 것이다.

답 중에 셋이 있으니 먼저 무엇을 조복해야 하는가를, 다음에 조복하는[能伏] 힘을, 끝으로 조복시켜 얻은 훌륭한 이익을 말한다.

‘모여서 작용하든 독단적으로 작용하든’이란, 중생의 심행에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니 어떤 때는 번뇌와 붙어 다니기 때문에 ‘모인다[集]’ 하고, 어떤 때는 미혹된 마음[惑心]을 떠나 행하므로 ‘독단적으로[獨]’라고 하였다. 번뇌를 떠났을 때도 아직은 법집(法執)이라는 분별이 있고, 번뇌와 함께 할 때는 번뇌에 물들므로 ‘분별과 오염’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는 조복하는 힘을 밝혔다. 이를테면 부처님의 경전에 의지하여 자기의 심신(心神)을 돌려서 인상(人相)과 법상(法相)을 몰아내고 두 가지 공(空)의 도리에 머물게 되므로 ‘정신을 돌려서 공한 도리의 굴에 머문다’고 하였다. 이러한 마음이 바야흐로 일어나 도리에 순응하므로 훌륭한 능력을 갖게 되지만, 저 미혹은 무시 이래로 도리를 거스르는 탓에 대적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항복시키기 어려운 것을 항복시킨다’고 하였다. 이는 지(地:十地)에 들어가기에 앞서 두 가지 장애[二障]를 없애는 것을 밝혔다. 이 조복의 길을 통해 끊는 길의 지위[斷道位]에 들어가서, 점차 종자를 뽑아내어 마침내 영영 아무것도 없게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네 가지 마장[四魔]을 멀리 떠나므로 ‘마장의 결박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다.다음에는 조복시킴으로써 얻는 훌륭한 이익을 밝힌다. 이 이익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보리의 과[菩提果]이고, 또 하나는 과과(果果)이다. ‘보리과’란 번뇌가 있는[有漏] 5음의 취락(聚落)을 훨씬 넘어서서 도량에 앉아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툭 트인 곳[露地]에 초연히 앉는다’고 하였다. ‘과과’란 위없는 깨달음으로 대열반을 증득하고 각(覺) 없음을 깨달아 모든 식이 다 (마음 근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음(識陰)이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하였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마음이 열반을 얻으면 짝이 없는 하나 뿐이라 언제나 열반에 머물 테니, 그것을 해탈이라 해야겠습니다.”

[論] 아래는 두 번째, 집착을 놓아주는[遣著] 부분인데 이 가운데 둘이 있다. 먼저 머묾이 없음을 밝혀 머묾이 있다는 집착을 버리게 하고, 뒤에는 얻을 것이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얻을 것이 있다는 집착을 제거한다. 먼저 가운데도 둘이 있는데 먼저 묻고 다음에 답한다.

물음 가운데 ‘하나뿐[獨一]’이란, 8식(識)이 전변할 때 일각(一覺)이 되기 때문이고, ‘짝이 없다’는 것은 사람·법이라는 두 집착을 여기서 멀리 떠나기 때문이다. 짝이 없는 각(覺)은 항상 열반에 머무르고, 항상 머무는 지혜는 모든 결박에서 벗어나게 되리라고, 이런 식으로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항상 열반에 머문다면 그것은 열반에 결박되는 일이다. 어째서 그런가? 열반은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이며,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은 본래 열반이다. 열반이라는 각의 분량은 본각의 분량이며, 각의 성품은 달라지지 않고 열반도 달라지지 않는다. 각에는 본래 생겨남이 없고 열반에도 생겨남이 없으며, 각에는 본래 소멸함이 없고 열반에도 소멸함이 없다. 열반과 각이 본래 다름이 없으므로 열반이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열반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으랴?

선남자야, 깨달은 자는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깨달아 중생의 때[垢]를 떠났기 때문이며, 본래 고요함이 없음을 깨달아 열반이라는 움직임[動]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 머물면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 없고, 따라서 출입하는 것도 없어서 암마라식(唵摩羅識)에 들어간다.”

[論] 이 대답에서는 머묾이 있다는 집착을 놓아주는데,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집착을 깨뜨림을 간략히 말하고 나중에 자세하게 도리를 나타낸다.

먼저 (간략히 말하는) 가운데 ‘항상 열반에 머문다면 그것은 열반에 결박되는 일’이라고 한 것은, 열반에 머무는 항상한 깨달음이 있다고 설정하면 그것이 바로 집착이라는 뜻이다. 열반에 묶여 있는데, 어떻게 항상 머묾을 해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자세하게 도리를 나타낸 말씀이다. 이치는 머묾이 없다. 그러므로 머묾이 있으면 이치에 어긋난다. 이치에 어긋나는 마음이 결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풀이하는 의도는 이와 같다. 그 중에 두 부분이 있는데 먼저 본각(本覺)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밝히고 뒤에 시각(始覺)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드러낸다.

먼저(본각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나타내는 가운데)에서는 다름이 없다[無異]는 뜻을 가지고 ‘얻을 것이 없고 머물 것이 없다’는 이치를 밝히는데, 이 ‘다름없음’의 의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본래의 이치가 다름이 없다[本理無異]는 것으로서, ‘열반은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이며,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은 본래 열반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열반이 곧 본각의 이익이며 이 본각의 이익이 본래 열반이라, 그것을 비로소 깨달을 때[始覺] 본각과 동일함을 밝힌 것이며, 다르지 않다[無異]는 이유로, 따라서 얻을 바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각의 분량이 다름이 없다[覺分無異]는 것으로서, ‘열반이라는 각의 분량은 본각의 분량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열반의 모든 덕이 다름 아닌 본각의 덕임을 밝힌 것이니, 다름이 없고 얻음이 없다는 이치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셋째는 동일한 맛으로서 다름이 없다[一味無異]는 것으로서 ‘각의 성품은 달라지지 않고 열반도 달라지지 않는다’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한 맛의 차별 없는 특성을 가진 각의 성품이 열반의 무차별성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넷째는 둘이 아닌 것으로서 다름이 없다[無二無異]는 것으로서, ‘각에는 본래 생겨남이 없고 열반에도 생겨남이 없으며, 각에는 본래 소멸함이 없고 열반에도 소멸함이 없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본래 생멸이 없는 본각이 열반의 생멸 없음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이 네 가지 무이(無異)로 보건대, (열반과 각이) 도리상 본래 다르지 않으므로 ‘열반이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열반의 각을 얻을 자[能得]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어서 ‘열반을 얻을 수 없는데’라고 함은, 열반이 얻어질[所得]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미 능득·소득이 없으니 어찌 머무는 자[能住]와 머물 곳[所住]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어떻게 머묾이 있으랴’라고 하였으며, ‘항상 머문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에는 시각(始覺)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밝힌 부분이다. 먼저 제시해 놓고 다음에 해석한다.

여기서 ‘깨달은 자’란 시각을 말한다. 해석 부분에서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깨달아’라고 함은, 생사가 본래 생함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까닭에 생사의 오염[垢]으로부터 떠났음을 말한다. ‘본래 고요함이 없음을 깨달아’라고 함은, 열반에 본래 적정함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까닭에 열반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에서도 떠났음을 말한다.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 없다’ 함은 생사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출입하는 것이 없다’ 함은, 속제(俗諦)를 유(有)로 보지도 않고, 진제(眞諦)를 공(空)으로 보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암마라식에 들어간다’ 함은, 일심의 체(體)는 양 극단[二邊]을 떠나 이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므로 ‘들어간다’고 표현하였다. 이렇게 머묾이 없어야 해탈할 수 있으므로, 열반에 머물면 결박[縛]을 벗어나지 못한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암마라식(唵摩羅識)은 (깨달아) 들어가는 처소이니, 처소가 얻어진다면 이는 법을 얻는 것이겠습니다.”

[論] 이 아래는 (첫 번째 유주의 집착을 떨쳐준 것에 이어) 두 번째 유득(有得)의 집착을 떨쳐주는 것인데 여기도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밝힌 부분이고, 둘째는 의심을 거듭 제거한 말씀이며, 셋째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말씀이고, 넷째는 결론짓는 말씀이다.

첫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물음이요 다음에는 대답이다. ‘들어간다’는 앞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뜻을 취하여, ‘무구식(無垢識)은 들어갈 곳이고, 들어갈 때는 증득하는 것이므로 얻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의심이 생기므로 이런 물음을 던진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비유를 들겠다. 여기 길 잃은 아들이 손에 돈을 쥐고도 돈이 있는 줄 모르고 시방세계를 돌아다니며 50년이나 보냈다. 가난하고 궁색하고 곤란하고 괴로워 전력을 다해 살길을 찾아 헤맸으나 몸 하나 지탱하기도 부족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이런 정황을 보고 말하였다. ‘너는 손에 돈을 쥐고도 어째서 쓰지 못하느냐? 필요하면 마음대로 충분히 쓸 수 있을 터인데’ 하자 아들은 깨닫고서 돈을 찾아 매우 기뻐하며 돈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길 잃은 아들아, 너는 좋아하지 말라. 얻은 돈은 본래 네 것이다. 네가 얻은 것이 아닌데 좋아할 게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다.”[論] 이 답에서도 무득의 의미를 셋으로 밝히고 있다. 주장[法]·비유[喩]·비유를 주장에 대입하는 부분[合]이다.

‘아니다’라고 한 것은 유득(有得)이 아님을 총괄적으로 말한 것이고,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무득(無得)을 드러내기 위하여 네 토막으로 비유를 든 것이다.

첫째는 길 잃은 아들이 돈을 가지고 있는 줄 모르고 떠돌아다니며 가난하게 고생한다는 비유이며, 둘째는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돈이 있음을 알려주고 충족하게 얻도록 한 비유이며, 셋째는 돈을 얻었다고 좋아하는 비유이며, 넷째는 그것은 새로 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 비유이다.

첫째 토막에서 ‘길 잃은 아들’이란, 모든 중생이 제 마음의 근원을 잃고 있는데, 여래께서 대비심으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듯 하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아들에 비유한 것이다. 『법화경』에 나오는 가난한 아들의 비유는 성문의 무리를 비유하는데 그쳤으나 여기에서 말한 길 잃은 아들은 모든 중생에게 다 통하는 비유이다.

‘손에 돈을 쥐고도’라는 비유는 온갖 망식(妄識)이 5박(縛)의 번뇌 때문에 집착과 분별을 일으켜 자기의 깨끗한 마음을 뒤덮어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시방세계를 돌아다님’이란 5상(相)과 5사(事)를 두루 분별함을 말한다. ‘50년이나 보냈다’는 것은 5음(陰)을 받아 50악(惡)을 일으킨 까닭이다. ‘가난[貧]’이란 세간의 선(善)을 조금밖에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궁색[窮]’이란 도무지 출세간의 재산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곤란[困]’이란 세 가지 나쁜 길[三途] 중 어디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괴로움[苦]’이란 인간이나 천상의 생을 받아 가벼 운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전력을 다해 살길을 찾아 헤맸다’ 함은, 세간의 낙을 구하여 복 받는 일에만 열중한다는 뜻이다. ‘몸을 지탱한다’ 함은 인간이나 천상의 낙을 받아 누린다는 뜻이다. ‘부족했다’ 함은, 세간의 낙을 받아 써보면 갈애(渴愛)만 더욱 늘어나고, 성한 날이 있으면 반드시 쇠할 날이 있어 옳은 이익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둘째 토막에서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라 함은, 부처님께서는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 (중생을) 자기 몸과 같이 여기는 대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위해 어진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런 정황’이란 첫 번째 토막에서 말한 일이요, ‘아들에게 말했다’는 것은 중생을 위해 대승의 가르침을 설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너는 손에 돈을 쥐고도 어째서 쓰지 못하느냐?’고 하신 뜻은, 그에게 깨끗한 마음이 있으므로 믿고 이해 해야 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필요하면 마음대로 충분히 쓸 수 있을 터인데’라고 함은, 깨끗한 마음을 쓴다면 본각의 훌륭한 이익과 법신의 혜명이 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셋째 토막에서 ‘그러자 아들은 깨닫고서’라고 한 것은 대승의 가르침을 듣고서 믿음과 이해가 생겼다는 뜻이니, 지전(地前)의 지위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돈을 찾았다’ 함은 초지(初地), 즉 통달위(通達位)에 들어갔다는 뜻으로서, 불성(佛性)과 본각의 이익을 증득해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매우 기뻐했다’고 함은 후득지(後得智) 중에 이제 막 얻을 것이라는 생각에 지극한 기쁨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돈을 얻었다고 말하였다’는 것은 관(觀)에서 나와서는 또 바른 생각을 놓쳐서 새어나옴[漏]이 있는 마음속에 있으므로 법집(法執)을 일으켜 얻은 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넷째 토막에서 ‘얻은 돈은 본래 네 것이다’라고 함은, 증득한 본각의 이익이 본래 너에게 속한 것이지 이제야 비로소 있게 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네가 얻은 것이 아닌데 좋아할 게 어디 있느냐?’ 함은, 이미 본래 너에게 속해 있었고 지금 새로 얻은 것이 아니니, 얻었다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서는 안 됨을 가르친 것이다. ‘너는 좋아하지 말라’고 한 것은 얻은 바가 있다고 분별하여 마음속으로 집착하고 기뻐함을 막아준 것이다.

[經] “선남자야, 암마라(唵摩羅)도 이와 같아서, 본래 나가는 모양이 없고 지금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옛적에 미혹했었다 하여 없던 것도 아니고, 지금 깨달았다고 하여 들어가는 것[入]도 아니다.”

[論] 세 번째는 비유를 주장에 대입하는 부분[合]인데 이 중에 전체적인 대입[總合]과 개별적인 대입[別合]이 있다. 총합 중에 ‘암마라(唵摩羅)’란 여기 말로는 ‘때가 없다[無垢]’는 뜻이다. 본각은 본래 깨끗한 것이라 그 성품이 바뀌거나 변함이 없다, 저 황금 돈[金錢]의 성품이 바뀜이 없듯이. 또 황금에는 네 가지 뜻이 있다. 본각에 있는 상·낙·아·정(常樂我淨)을 비유한 것으로, 네 토막에 나오는 ‘돈’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별합(別合)에도 네 구절이 있다.

‘본래 나가는 모양이 없다’ 함은 첫 토막 중 ‘손에 돈을 쥐고 있다’고 한 구절에 대입한 것이다. ‘지금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함은 셋째 토막에서 ‘돈을 얻었다’고 한 구절에 대입한 것이다. ‘옛적에 미혹했었다 하여 없던 것도 아니고’란, 둘째 토막에서 ‘네가 돈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쓰지 않는가?’ 한 구절에 대입한 것이다. 이는 지난날에는 잘 몰랐기 때문에 쓰지 못했으나 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깨달았다고 하여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함은 넷째 토막에서 ‘이것은 본래 네 것이지 네가 얻은 것이 아니다’한 말에 대입한 것이다. 본래부터 있던 물건이라 자기 마음 바깥으로 나가 있지 않음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본래 밖으로 나가 있던 것이 아닌데, 어찌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들어감이 있지 않으므로 얻음도 있지 않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이 길을 잃고 있음을 알았는데 어찌하여 50년 동안 시방세계를 헤매면서 가난하고 궁색하고 곤란하고 괴롭게 두었다가 이제야 알려주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0년을 지냈다는 것은 한 생각이 움직였다는 뜻이고, 시방세계를 헤맸다는 것은 끝없이 망상으로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의문 나는 점을 거듭 없애준 부분이다. 세 번의 문답으로 차례차례 의문을 풀어간다. 첫 번째 문답에서는 비유로 던진 의문에 대하여 법(法)으로 대답하였다.

‘50년 동안’이란 일념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비유한 것이요, ‘시방세계를 헤맴’이란 끝없이 망상으로 돌아다녔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는 일념을 일으키는 동안 갖가지 법에 대해 망령되게 생각하는 것이요,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그 아버지가 일깨워 준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각성을 할 수가 있었고, 망념이 다했을 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게 되었으니, 돈을 쥐고 있었음을 깨달았지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경우와 같다. 그러 므로 아버지가 사실을 알려준 것인데,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념에 50악(惡)이 갖추어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50년을 지냈다는 비유로 말하였다.

답한 뜻은 이와 같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명의 힘 때문에 4상(相)을 일으키고 4상과 무명이 합쳐지는 힘 때문에 일심을 움직여 생겨나고[生]·머물고[住]·달라지고[異]·소멸한다[滅]. 일심이 일단 움직이면 이 4상을 동반하게 되므로 ‘한 생각이 움직인다’고 하였다.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 무명의 바람 때문에 움직인다…”라고 한 『기신론』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 다. 자세한 내용은 『기신론』「별기(別記)」에 설명되어 있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어찌하여 일념의 마음이 움직이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념의 마음이 움직이면 5음(陰)이 동시에 생기고, 5음이 생기는 데서 50악이 갖추어진다.”

[論] 여기는 두 번째 문답으로 두 번째 의문을 없애준 것으로서, 고쳐야 할 악(惡)을 나타냈다. 일념(一念)의 4상(相)이 모든 생사를 포섭하므로 5음을 갖추고 50악이 있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이 문답을 시설했다. 어떻게 5음이 50악을 갖추는가? 식음(識陰)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는 8식(識)을 말한다. 수(受)·상(想)의 2음(陰)에 각각 여덟이 있어 16이 된다. 행음(行陰)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여덟은 상응(相應)이고, 하나는 불상응(不相應)이다. 이에 색음(色陰) 열일곱 을 합하면 50이 된다. ‘색음 열일곱’이란 능동적으로 만드는 주체가 되는 4대(大)와 만들어진 객체가 되는 13을 합친 것이다. ‘13’이란 5근(根)과 5진(塵)과 법에 속하는 세 가지 색[三種色]을 말한다. 즉 『현양론[顯揚聖敎說』에서 말한 율의색(律義色)과 불율의색(不律義色)과 정자재소생색(定自在所生色)의 셋을 말한다. 우선 한 면에서 50가지를 세웠는데, 이와 같은 50가지는 순전한 악(惡)으로서, 모두 다 유전하는 것이라 열반에 위배되므로 저 열반의 순전한 선(善)과는 반대가 되기 때문에 50가지를 말한다.[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끝없는 망상[遍計]으로 시방을 헤매는 것이 일념의 마음에서 생겨 50악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그 중생들로 하여금 일념을 일으키지 않게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을 안정시켜 금강지(金剛地)에 머물러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일어남이 없게 하면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할 것이니 이것이 일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論] 여기는 세 번째 문답으로 셋째 의심을 떨쳐주는 부분으로서 고쳐 나가는 길을 밝힌 것이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이란 10신(信) 이전의 모든 중생을 말한다. ‘마음을 안정시켜’라 함은 10주(住)를 넘어서면 마음이 편안히 3공(空)에 머물러 결코 물러서지 않게 되는데, 이를 ‘안정시킨다[安坐]’고 하였다. ‘금강지에 머물러’라 함은, 초지(初地) 이상의 경지에서 법신을 증득하여 금강과 같이 무너지는 모든 것들을 떠나므로 그렇게 말하였다.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일어남이 없게 함’이란 등각위(等覺位) 중에서 동요하는 망념이 본래 적정한 것임을 깨달아 다시는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함’이란 묘각위(妙覺泣)에 도달하여, 일심의 원천은 일어남도 사라짐도 없고, 또 본래 동요하는 망념이 없고 시작과 끝이 없음을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일어남도 사라짐도 없으므로 ‘항상’이라 하였고, 동요하는 망념이 없으므로 ‘편안하다’ 하였고, 시작도 끝도 없으 므로 ‘태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수행하여 구경각(究竟覺)을 얻으면 생겨났다 사라졌다 하는 망념의 네 가지 모양[四相]이 없다. 그러므로 일념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기신론』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들은 생각이 달라지는 특성[異相]을 깨달아서 생각에 이상(異相)이 없으니, 거칠게 분별하고 집착하는 특성[麤分別執着相]을 버리므로 이를 상사각(相似覺:가까이 간 깨달음)이라 한다. 법신보살(法身菩薩)들은 생각이 머무는 특성[住相]을 깨달아 생각에 주상(住相)이 없으니 분별하는 거친 생각의 특성을 떠났으므로 수분각(隨分覺:능력에 맞게 부분적으로 깨달음)이라 한다. 보살지(菩薩地)를 다 넘어섰을 경우 방편이 완성되고 일념이 상응하여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달아서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상[初相]이 없다. 미세한 생각마저 멀리 떠나므로 심성을 볼 수 있어 마음이 상주(常住)하게 되니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고 부른다.”

나는 위 문장을 이렇게 본다. 여기서 ‘심성을 볼 수 있으며 마음이 상주한다’고 한 말이 『금강삼매경』의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할 것이다[心常安泰]’라는 문구를 풀이한 것이다. 나머지 다른 문구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해온 것에 준하여 해석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큰 단원은 본각에 대하여 부연한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아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연하면 그것이 본각의 이익입니다. 그 본각의 이익은 움직임이 없고 항상하여 없지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며, 없지도 않지만 각이 있지도 않습니다.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의 이익이며 본래의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란 것은 청정하여 오염되지 않으며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으니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인 (보살이) 이해했음을 나타낸 부분[領解]과 네 번째인 (부처님이) 결론짓는 부분[述成]이다.

‘불가사의’라고 한 것은 부처님의 깊은 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찬탄한 말이다. 그 아래는 이해한 내용을 개별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여기에도 둘이 있는데 먼저 말을 이해하고 나중에 뜻을 이해한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아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연하다’ 함은, 앞에서 ‘생각이 고요해져서 일어남이 없으면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하다’고 한 말씀을 이해한 것으로서 시각(始覺)이 궁극에 다다른 경지를 말한다. 아래 뜻을 이해한 데서 ‘그것이 본각의 이익’이라 함은,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은 뜻을 잘 이해한 것이다.

논[起信論]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념(無念)을 얻으면 심상(心相)의 생(生)·주(住)·이(異)·멸(滅)을 알게 되니, 이는 무념(無念)과 동등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각이라고 다를 것이 없으니, 생·주·이·멸의 네 가지 모습이 동시에 있어 모두 자체로 존립하지 않으므로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각(覺)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실제로 시각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은, 이 경의 ‘그것이 본각의 이익’이라고 한 문구를 해석한 것이다. ‘네 가지 모습이 동시에 있어 모두 자체로 존립하지 않으므로 본래 평등하다’고 한 말은, 이 경의 ‘그 본각의 이익에는 움직임이 없다’고 한 문구를 해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시각(始覺)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하여 없지 않게’ 된다. ‘항상하다’는 것은 곧 ‘없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항상’이라고 말했으나 딱히 있다[有]는 것은 아니므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시각(始覺)이 있다[有]는 말이 타당하지 않다면, 그렇기 때문에 각(覺)이 없지는 않다 할지라도 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각이) 없지도 않으며 각이 있지도 않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무각(無覺)의 도리를 깨달아 알면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므로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의 이익이며 본래의 깨달음’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끝까지 깨달아[究竟覺] 안다는 것은 무명(無明)의 뒤덮임을 멀리 벗어난 상태이므로 ‘청정하여 오염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청정하다는 것은 본래 밝기 때문이며,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오염 상태를 이제는 떠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다’하였으니,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생(生)과 주(住)가 없기 때문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異)와 멸(滅)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제( 眞諦)와 같고 법성(法性)과 같으므로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에’라고 한 것이다. 이미 한결같이 평등하여 언설(言說)을 떠나고 사려[慮]를 초월했으므로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앞에서 이미 부사의(不思議)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중복한 이유는 불가사의한 그것에 대해서도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그렇다’고 하신 것은 네 번째인 결론[述成]에 해당한다. 앞에서 (보살이) 듣고 이해[領解]한 내용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經] 무주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이제껏 없던 일을 얻어 게송으로 아뢰었다.

높으신 대각(大覺) 세존께서

중생들에게 무념법을 설하시니

무념과 무생의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 항상 생하여 소멸하지 않네.

일각(一覺)인 본각(本覺)의 이익으로

본각 지닌 모든 자들을 이롭게 하니

저 돈을 얻은 사람과 같아서

얻은 것이 얻은 것이 아니어라.

[論] 이는 두 번째인 게송으로 찬양하는 부분이다. 게송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두 구절은 설하신 분을 전체적으로 찬양한 것이고, 다음 네 구절은 앞에서 설해주신 법을 찬양한 것이고, 마지막 두 구절은 비유를 노래한 것이다.

‘중생들에게 무념법을 설하시니’란 모든 중생이 무념법을 이루고 구경각을 이룸을 설하신 것을 말한다.

‘무념과 무생의 마음이 되어서’라고 한 것은 나고 죽는 생각이 없어서 무생의 마음을 성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마음이 항상하여 소멸하지 않네’라 함은 앞에 설하신 글을 노래로 간추린 것으로서 경문 중에 ‘마음이 항상 편안하여……항상하여 없지 않다’ 한 부분에 해당한다. ‘생(生)’이란 있다[在]는 뜻이요, ‘멸(滅)’이란 없다[無]는 뜻이다. ‘일각인 본각의 이익으로 본각을 지닌 모든 자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본각을 지니고 있지 않은 중생은 하나도 없으므로 ‘본각을 지닌 모든 자’라 하였다.맨 아래 두 구절은 앞에서 든 네 토막의 비유를 총괄적으로 노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經] 그 때 대중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본각의 이익인 반야바라밀을 얻었다.

[論] 이는 세 번째로 법을 듣고 이익 얻음을 나타낸 것이다. 말씀하신 뜻에 따라 제각기 이익을 얻었다는 뜻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본각의 이익을 얻은 것과 시각의 반야는 평등하고 다름이 없다.

5. 입실제품(入實際品)

[論] ‘실제(實際)’란 허망[虛]을 떠났다는 말이며 궁극[究竟]이라는 뜻이다. 환(幻)을 떠난 궁극이기 때문에 ‘실제’라 하며, 가르침[敎]에 의지하여 이치[理]를 닦아 이치에 들어가고 행(行)에 들어가기 때문에 ‘들어간다[入]’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정해진 범위가 없는 것[無際]으로 범위를 삼고, 이입(二入)은 들어감이 없는 들어감이므로 「입실제품」이라고 하였다.

[經] 그 때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들은 본각의 이익에 깊이 들어가므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論] 관행(觀行)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개별적으로 설명[別顯]하는 중 세 번째인 ‘본각에 의하여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依本利物]’ 부분을 마쳤다.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인 허망에서 실제에 들어가는 부분[從虛入實]이다. 한편 앞품까지 심생멸문(心生滅門)을 밝혔다면, 지금 이 품에서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드러낸다.

글에 네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간략히 대의를 표한 것[略標大意], 둘째는 도리를 자세히 밝힌 것[廣顯道理], 셋째는 사리불이 이해한 것[身子領解], 넷째는 그 때 모인 무리들이 이익을 얻은 것[時衆得益]이다.

첫째에 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들어가게 하는 방편(方便)을 열어 보인 것이요, 뒤에는 들어 갈 실제(實際)를 보여준 것이다. 방편을 열어 보인 데에도 총체적인 표방과 개별적인 설명이 있는데, 이 글은 총체적으로 표방하여 대의(大意)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經] “때아닌 후세에 진여를 그대로 설법하면 때와 이익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다. 혹은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하며, 같지도 다르지도 않게, 상응하게 설해야 한다. 갖가지 욕정[情]과 지견[智] 가진 자들을 이끌어 살반야(薩般若:一切智)의 바다에 흘러들게 해야 하며, 제도 받을 중생들이 저 헛된 바람을 잡지 않고 모두 한 맛의 신비한 구멍[一味神孔:다른 여러 본에는 一味神乳로 되어 있다]을 바라보게 해야 한다.”[論] 여기서부터는 개별적으로 방편을 열어 보인 부분이다. 이 가운데도 네 가지 방편이 있다. 하나는 때를 아는 방편이고, 둘은 근기를 아는 방편이며, 셋은 끌어들이는 방편이고, 넷은 벗어나게 하는 방편이다.

‘때를 아는 방편[知時方便]’은 ‘때아닌 후세에 진여를 그대로 설법하면 때와 이익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후세[後]’에 세 가지 뜻이 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정법이 사라진 후, 다섯 시기로 되어 있는 500세 중 마지막 500세를 말한다. ‘때가 아니[非時]’라 한 것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때, 쉽게 깨닫지 못하는 때, 이견(異見)이 성하게 일어나 서로 비난하는 때이다. 이렇게 때아닌 때에 진여를 단도직입적으로 설법하면 시절에 맞지 않아서 이로울 것이 없다. 때와 이익이 함께하지 못하므로 ‘따라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때를 아는 방편이다.‘근기를 아는 방편[識機方便]’이란 ‘혹은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하며, 같지도 다르지도 않게, 상응하게 설해야 한다’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상대의 마음을)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하며’란 상대의 마음을 따라주는 쪽으로만 설한다면 그들의 삿된 집착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상대의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쪽으로만 설한다면 그들에게 바른 믿음을 일으켜주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올바른 신심을 얻게 하고 본래 가졌던 삿된 집착을 제거해 주려면,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기도 하면서 설해야 한다.

또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치에 따라서만 설하면 상대방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치에 따라 설하지 않는다면 도리에 위배될 터이니 어찌 바른 이해를 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믿음과 이해를 주려면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해야 한다.

만일 이견(異見)이 엇갈려 쟁론이 한창일 때 유견(有見)에 일치하게 설하면 공견(空見)과는 달라질 것이며, 반대로 공집(空執)에 일치하게 설하면 유집(有執)과 다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쪽으로 설하든 다른 쪽으로 설하든 더욱 쟁론만 조장하게 된다. 또 양쪽을 동일하다고 본다면 자체 안에서 모순을 일으켜 싸우게 되고, 반대로 양쪽을 다르다고 본다면 양쪽 모두와 말다툼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게 설해야 한다.

‘같지도 않게’라 함은 말 그대로 하면 모두 다 허용하지 않는 것이고, ‘다르지도 않게’라 함은 속뜻으로 말하자면 허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다르지 않으므로 상대방의 마음[情]에 거슬리지 않고, 같지 않으므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상대방의 마음에 대해서도, 도리에 대해서도 어긋나지 않으므로 ‘상응하게 설한다[相應如說]’고 하였다. 여기서 ‘여(如)’는 ‘이(而)’의 뜻이다.

‘끌어들이는 방편[引入方便]’이란 ‘갖가지 욕정[情]과 지견[智] 가진 자들을 이끌어 일체지의 바다에 흘러들게 한다’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갖가지 정’이란 크고 작은 욕정의 차별을 말하고 ‘갖가지 지’란 공(空)이다, 유(有)다 하는 지견의 차별을 말한다. 이러한 무리들을 이끌어 모두 도(道)의 흐름에 따라 일각(一覺)인 일체지(一切智)의 바다, 즉 무상보리의 깊고 넓은 이치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마치 온갖 냇물이 함께 바다에 흘러 들 어가면 깊고 넓은 큰 바다에서 한 맛이 되는 것과 같으므로 ‘끌어들이는 방편’이라고 한다.

‘벗어나게 하는 방편[出離方便]’이란 ‘제도 받을 중생들이 저 헛된 바람을 잡지[挹] 않고 모두 한맛의 신비한 구멍을 바라보게[庶] 해야 한다’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읍(挹)’은 ‘짐[斟]’과 같으며 취하여 받아들인다[取納]는 뜻이다. ‘헛된 바람’이란 허공에 떠도는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듯이 모든 경계가 모든 식(識)의 파랑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제도되는 중생이 이 경계의 바람을 붙들고 있었으므로 이제까지는 일어난 모든 식의 파도에 전전하다

가 이제는 그것을 취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식의 파도가 그쳐 고요해진 것이다. ‘서(庶)’란 ‘서기(庶幾)’라는 말로 희망한다는 뜻이다. ‘신비한 구멍[神孔]’이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선의 굴은 아무 할 일 없이 한적하고 고요하여 장생할 수 있는 곳으로 생사가 없는 대열반(大涅槃)의 집을 비유한 것이다. 원만하고 공적하고 평등하므로 ‘한맛[一味]’이라 하였다. 중생들로 하여금 큰 열반을 희구하고 모든 식의 파도를 멈추어 유전(流轉)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에 ‘출리방편’이라고 한다.[經] “세간은 세간이 아니며, 머묾도 처소가 있어서 머무는 것이 아니니, 5공(空)에 나오고 들어가면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법은 공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법의 성품은 없지 않기 때문이다[法性非無:어떤 본에는 ‘性非有無’로 되어 있다]. 없지 않음이 없지 않고, 없지 않은 그것이 있지도 않으니 결정된 성질이 없어서 유·무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있다, 없다를 따지는 범부나 2승(乘)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거니와 보살들의 경우 이 이익을 알면 보리를 얻는다.”[論] 이것은 (첫 번째 들어가게 하는 방편에 이어서 두 번째로) 들어갈 도리[所入道理:실제]를 밝힌 부분인데 여기에도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한 설명한 것[略明]이고, 둘째는 거듭 해석한 것[重釋], 셋째는 편견과 집착이 옳지 않음을 나타낸 것[偏執不當], 넷째는 통달한 자에게는 훌륭한 이익이 있다는 것[達者勝利]을 말한다.

첫째 간략한 설명 중에 ‘세간은 세간이 아니며’라 함은 세간의 5법(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묾도 처소가 있어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함은 열반에 상주한다는 것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행(觀行)을 닦는 사람이 5공(空)을 통달할 때 유(有)에서 나와 공(空)에 들어가기 때문에 ‘나오고 들어가면서’라고 하였다. 공을 들어갔을 때 공성(空性)을 취하지 않고, 공을 취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공을 버리지도 않으므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고 하였다.

이미 5공에 들어갔다면 어째서 취하지 않는다고 하며, 취함이 없다면 어째서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둘째로 거듭 해석하였는데, ‘모든 법은 공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법의 성품은 없지 않다’는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공에 들어감을 설하는데, 없지 않음이 없지 않고, 없지 않은 그것이 있지도 않으므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

‘없지 않다’는 것은 법성의 이치[理]가 토끼 뿔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없지 않은 그것’이란 관행자가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버리지 않은 것은 이치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있지도 않다’고 한 것은 관행자가 간직[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간직하지 않는 것은 이치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법성은 이와 같이 결정적으로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통달한 사람은 양쪽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정된 성질이 없어서, 유·무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리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

(편견과 집착이 옳지 않음을 나타낸) 셋째 중에서 ‘있다, 없다를 따지는 범부나 2승의 지혜로는’이란 범부는 유(有)를 긍정하고 공(空)을 등지며, 2승은 유(有)를 등지고 공적한 것만 따라감을 말한다. 이와 같이 유·무를 떠나지 못한 지혜를 가지고 안온한 법성을 헤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니거니와[非]’라고 하였다.

(통달한 자에게는 훌륭한 이익이 있다고 한) 넷째 가운데 ‘모든 보살’이란 지전보살(地前菩薩)을 일컫는다. 법성(法性)이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님을 아는 자는 처음 발심한 때 정각(正覺)을 이루기 때문에 ‘보리를 얻는다’고 잘라 말했다. 즉 발심을 해서 법성을 알았을 바로 그 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는다는 것인데, 이러한 뜻은 『화엄경』 「발심공덕품(發心功德品)」에 나와 있다. 위의 모든 문장에서는 언제나 ‘결정한 성품’을 말해 왔는데 여기서는 어째서 ‘결정된 성품이 없음’을 말하는가?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무결정성’이라는 사실이 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經] 그 때 대중 가운데 대력(大力)이라는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5공(空)에 출입하면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고 사실대로[如如:어떤 본에는 ‘如佛’이라 되어 있다]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5공에서 취하거나 버리지 않는 것입니까?”

[論] 이 아래는 (대의를 간략히 나타낸 데 이어) 두 번째로 도리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道理]인데 네 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顯實際義]이요, 둘째는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밝힌 부분[明趣入義]이요, 셋째는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開入之階位]이요, 넷째는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보여준 부분[示入之方便]이다.

첫째 부분도 넷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5공(空)을 밝히고, 둘은 3공(空)을 설명하고, 셋은 공이 곧 진(眞)임을 밝히고, 넷은 진이 여(如)임을 밝혔다.

첫 번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묻는 사람은 대력(大力)보살이다. 이 사람은 실제(實際)의 법문에 들어가 법계에 두루하여 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대자재(大自在)를 얻었으므로 ‘큰 힘을 가진 자[大力]’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실제를 드러내는) 이 부분에서 등장한 것이다. ‘사실대로[如如]’라 함은 부처님의 말씀이 여여한 이치[如理]에 들어맞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앞의 여(如)는 맞는다[當]는 뜻이요, 뒤의 여(如)는 도리를 가리킨다. 먼저는 이해한 내용을 말하고, 뒤에는 물음을 제기한다. 물음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오공법문(五空法門)을 묻고, 둘째는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는 뜻[無取捨義]을 물었다.[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5공(空)이란 3유(有)가 공이며, 6도(道)의 그림자가 공이며, 법상(法相)이 공이며, 명상(名相)이 공이며, 심식(心識)의 뜻이 공임을 말한다.

보살아, 이와 같은 공(空)들은 공이면서도 공에 머무르지 않으며, 공에 공상(空相)이 없다. 상(相)이 없는 법이니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겠는가? 취함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면 3공(空)에 들어가는 것이다.”

[論] 차례대로 앞의 두 물음에 답한 말씀이다. 5공으로 세 가지 진여를 나타낸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유전진여(流轉眞如)요, 둘째는 실상진여(實相眞如)요, 셋째는 유식진여(唯識眞如)이다. 이 뜻은 『현양론(顯揚論:顯揚聖敎論)』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중에 앞의 두 가지 공은 앞의 두 가지 진여이며, 뒤의 세 가지 공은 세 번째 진여이다. 무슨 뜻인가?

처음에 ‘3유가 공’이라 함은 3유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삼계에 유전하는데, 삼계의 유전에는 전후의 성질이 없고 찰나에도 머묾이 없어서 공이며 무소득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유전진여문(流轉眞如門)이다.

두 번째 ‘6도의 그림자가 공’이라 함은 선업과 악업이 각각 2품(品)이므로 6도(道)의 과보가 본체와 비슷하게 그림자를 나타내지만, 그림자는 본체를 떠난 적이 없는 것처럼 공이며 무소득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실상진여문(實相眞如門)이다.

뒤의 세 가지는 유식진여문(唯識眞如門)이다. 앞의 둘은 취하는 대상인 뜻과 이름을 버리는 것으로서, 뜻과 이름은 서로 객체만 되고 실제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공무소득)이며, 마지막 하나는 취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으로서, 능(能)과 소(所)는 상대하여 독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무소득)이라는 것이다. 유식의 도리는 가장 들어가기 힘들다. 그러므로 세 가지 공으로 나누어 설명하여 능·소를 버리게 했으니, 능소가 공하기 때문에 무분별이 된다.

‘보살아’ 이하의 답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와 같은 공들’이란, 5공(空) 전체를 들어 공의 이치[理]와 지혜[智]를 설명한 것이다. ‘공이면서도 공에 머무르지 않음’이란 공의 지혜는 머묾이 없어 이치와 평등하기 때문이다. ‘공에 공상이 없다’고 한 것은 공의 이치는 모양이 없어 지혜와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치와 지혜는 평등하여 주관[能]과 객관[所]의 모양이 없으니 어떻게 거기에 취하거나 버림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 그 경지에 들어가면 3공(空)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취함이 없는 경지’란 10지(地)를 말한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무엇이 3공(空)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3공이란 공상도 공이며[空相亦空], 공공도 공이며[空空亦空], 소공도 공임[所空亦空]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공들은 3상(相)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진실이 없지 않으니, 문자나 언어로 나타낼 길이 끊어져 불가사의하다.”

[論] 이 하나의 문답은 3공(空)을 밝힌 것이다. ‘공상도 공’이라 한 데서, ‘공상(空相)’이란 속(俗)을 버리고 진(眞)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평등한 모양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도 공하다’는 것이니,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한 것이다. 이러한 공공(空空)의 뜻은 순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데 비유할 수 있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을 ‘공공’이라 하고,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것을 공공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하는 속제(俗諦)의 차별상을 설명한 것으로서 공공의 뜻이다. 평등한 공에 대해서도 공이라 하여 세속의 차별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 차별을 ‘공공’이라 한다.‘공공도 공’이라고 한 데서 ‘공공’이란 속제(俗諦) 차별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도 공하다’는 것이니, 즉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한 것이다. 이는 장엄구를 다시 금덩어리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다.

‘소공도 공’이라고 함은, 첫 번째 공(空)에서는 공에 의해 속제가 드러났고, 두 번째 공에서는 공에 의해 진제가 드러났는데 이 두 가지가 둘이 아니므로 ‘(그것)도 공’이라고 하였다. 이는 일제(一諦)에 융합하여 하나인 법계[一法界]를 드러낸 것이다. 일법계란 일심(一心)을 말한다. 그러나 (3공 중) 첫째 공문(空門:空相亦空)에서 버린 속(俗)은 소집상(所執相)이고, 둘째 공문(空門:空空亦空)에서 융합한 속(俗)은 의타상(依他相)이다. 속제에 두 가지 상이 있기 때문에 버리는 것과 융합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다.

또한 첫째 공문에서 속(俗)을 버림으로써 드러난 진(眞)과 둘째 공문에서 속을 융합함으로써 드러난 진, 이 두 가지 문의 진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이다. 오직 진실 한 종류인 원성실성(圓成實成)이다. 그러므로 버리든 융합하든 드러난 것은 하나다. 셋째의 공은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니며,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또 이 3공(空) 중에 첫째 공은 속제중도(俗諦中道)를 드러내고, 둘째 공은 진제중도(眞諦中道)를, 셋째 공은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닌 무변(無邊) 무중(無中)한 중도(中道)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공들’이란 3공(空)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인데, 속제의 상에도 머물지 않고, 진제의 상에도 머물지 않고, 그것이 둘이 아니라는 상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3상(相)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물지 않음으로써 철저하게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진실(眞實)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 진실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진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문자나 언어로 나타낼 길이 끊어졌다’고 하였으며, 길이 끊어졌다[道斷] 는 말도 붙일 수 없으므로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였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진실이 없지 않다면 (진실이 없지 않다는) 그 상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로, 공(空)에 진(眞)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진이 있지도 않음을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묻고 뒤에 답했다.

묻는 의도는 이렇다. ‘보통 유·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상대적인 것이다. 있지 않으면 반드시 없는 것이고, 없지 않으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이치가 없지 않다고 했다면 진실한 이치가 있어야 한다.’

공부하는 이들이 대부분 늘 이렇게 생각하므로 저들의 고집을 떨쳐주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없음[無]이 없음에 머물지 않고, 없지 않다[不無] 해서 있음[有]도 아니다.[不無不有:어떤 본에는 ‘有不住有’로 되어 있다] 있지 않은 법이라 해서 없음에 머물지도 않고, 없지 않는 모습이라 해서 있음에 머물지도 않으니, 유·무로는 이치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아, 이름과 뜻이 없는 모습은 불가사의하다. 왜냐하면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이름이 없지 않고,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뜻은 뜻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論] 답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음에 대한 답[正答]이고, 둘은 그 심오함을 찬탄한 것[歎深]이다.

먼저 ‘없음이 없음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진실이 없지 않다[不無眞實]’고 한 구절 중에서 무(無)라는 이름이 무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없지 않다[不無]’는 이름 때문에 있음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이유로, ‘없지 않다 해서 있음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명칭을 붙일 수 없는 데다 명칭을 붙인 것이라서 ‘있다’는 의미[義]에 들어맞는 것은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있지 않은 법이라 해서 없음에 머물지도 않고’라 함은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했다 할지라도 진무(眞無)라는 법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없지 않는 모습이라 해서 있음에 머물지도 않는다’ 함은,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했다 할지라도 속유(俗有)의 모습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속(眞俗)이 유무(有無)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진실무이(眞實無二)의 이치가 없지 않고, 진속(眞俗)에 2제(諦)가 없지 않기 때문에 진실무이의 이치가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유무로는 이치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뜻없는 뜻[無義之義]을 밝힌 것이지, 이름 있는 이름[有名之名]을 가리키지 않는다.‘보살아’ 이하는 둘째, 심오함을 찬탄한 것인데 여기에도 둘이 있다. 하나는 직접 찬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찬탄을 해석한 것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이름이 없지 않다’한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름은 ‘뜻 있는 뜻’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을 가지고 ‘뜻 없는 뜻’에 맞춘 까닭에 ‘이름이 없지 않다’고 한 것이다.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뜻은 뜻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한 것은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이치는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을 일컫는 것이 아니므로 ‘뜻 없는 뜻’을 가지고 ‘이름 없는 이름’을 일컫는 까닭에 ‘뜻이 없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름과 뜻이 있지는 않지만 이름과 뜻이 없지도 않으므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진실의 여여[如]한 모습이며, 여래의 여여한 모습입니다. 여여하지만 여여에 머물지 않으니, 여여에는 여여라는 모습이 없으니, 모습에 여여함이 없으므로 여래 아닌 것도 아닙니다. 중생의 심상(心相)이라 할 때 그 상 역시 여래라면,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 진(眞)에 여(如)함이 있지 않지만 여하지 않음도 없다는 뜻을 밝힌 부분인데, 이 가운데도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물음에도 둘이 있으니 처음에는 도리를 내세우고 나중에는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如是名義]’이란 앞에서 말한 불가사의한 이름과 뜻의 특성을 말하는데, 이 이름과 뜻이 뒤바뀌는 일도 없고 변천되는 일도 없이 일치하므로 ‘진실’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주관과 객관[能所]을 멀리 떠나 한 맛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여여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평등하고 여여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여래가 체득한 것이기 때문에 ‘여래의 여여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여여하되 여여함에 머물지 않는다[如不住如]’고 한 것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여’라는 이름이 여여함이 없는 여여함이란 뜻에 해당함을 밝힌 것이다. ‘여여에는 여여라는 모습이 없으니, 모습에 여여함이 없으므로[如無如相相無如故]’라 함은, 여여의 모습이 없는 여여의 모습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여의 이름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일치하여 능소(能所)가 평등하므로 이름이건 뜻이건 ‘여래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모습에 여여함이 없다’고 한 것은 여여한 모습에는 여여함이 없다는 것으로, 여여의 모습은 바로 무상(無相)을 상(相)으로 한다. 그러므로 ‘여여에 여여라는 모습이 없다[如無如相]’ 함은 여여의 무상(無相)이 있지 않음을, ‘모습에 여여함이 없다[相無如]’ 함은 무상의 여여함이 있지 않음을 밝힌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여의 체상(體相)이 있는 것은 아니나 없지도 않으니, 여여의 체상은 이와 같이 여여의 상이 없는 여여의 상이라야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여의 이름이 된다.

‘중생의 심상(心相)이라 할 때 그 상 역시 여래’라 함은 모든 중생의 분별심상(分別心相)은 그 상이 상이 아니어서 평등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그 상 역시 여래라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물음 중에) 평등한 도리를 내세운 부분이다.

다음으로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한 구절은 의심나는 바를 질문한 부분이다. 중생의 심상(心相)이 이미 여래라면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른 경계가 없다’ 함은 무분별(無分別)을 말한다. 무분별이기 때문에 당연히 염오가 없을 테고, 염오가 없다면 삼계(三界)가 없어야 한다. 이런 의심이 났기 때문에 이 물음을 던진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중생의 마음에는 실로 다른 경계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며, 이치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에 물들기 때문에 삼계(三界)라 하고 삼계의 마음을 가리켜 ‘다른 경계’라 하니,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다. 마음에서 변화되어 생기는 것이므로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다른 경계도 없다.”

[論] 이것은 의심에 대한 답인데 앞은 인정하는 말이고[與] 뒤는 부정하는 말이다[奪]. 자성(自性)이 청정하여 본래 물듦이 없는 쪽을 들어 말했기 때문에 인정하는 말이라 했고, 외부에 의해 물들어 다른 경계가 있게 되었다는 쪽을 들어 말했기 때문에 부정하는 말이라 하였다.

‘자성이 청정하다’고 한 것은 『보성론(寶性論)』에서 경을 인용하여 “선심(善心)도 생각마다 없어져 머물지 않으므로 번뇌에 물들지 않고, 불선심(不善心)도 생각마다 없어져 머물지 않으므로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번뇌가 마음에 닿지[觸] 못하고 마음도 번뇌에 닿지 못하는데, 어떻게 법에 닿지 않고서 마음을 물들일 수 있겠는가…” 하고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으니, 이는 물들었지만 물들지 않는 측면을 나타낸 것[染而不染門]이다.

‘외부에 의해 물들었다[隨他染]’ 함은 『부인경(夫人經:勝鬘經)』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은 알기 어려우며, 저 마음이 번뇌 때문에 물드는 것도 알기 어렵다” 한 말씀과 같으니, 이는 물들지 않았지만 물든 측면을 나타낸 것[不染而染門]이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며, 이치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자성이 청정한 마음과 본각의 이치에는 모든 경계와 더러움이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경계에 물들기 때문’ 아래는 물음을 부정하는 내용이다. 먼저 불각(不覺)이 경계에 물들었음을 밝히고 나중에 불각(不覺)에 상대해서 시각(始覺)을 간략히 보여준다.

불각(不覺)을 밝힌 중에 ‘경계에 물들기 때문에 삼계(三界)라 한다’ 함은 주지번뇌(住地煩惱)에 크게 욕애주지(欲愛住地)·색애주지(色愛住地)·유애주지(有愛住地) 세 가지가 있어서 이를 근거지[住地]로 하여 삼계에 대한 애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삼계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삼계심이 생기며, 이 망심(妄心)을 바탕으로 허상의 경계[虛境]를 변화시켜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변화되어 생긴다’고 하였다.

다음은 시각(始覺)을 밝힌 것이다.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이라고 한 것은 이치에 의해서 관행(觀行)을 닦으면 망심(妄心)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경계도 없다’ 함은 망령되게 지어내던 경계도 마음 따라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말한 네 가지 문[門:五空, 三空, 空是眞, 眞是如]이 모두 (廣顯道理의 넷 중) 첫 번째, 실제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顯實際義]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마음이 깨끗한 데 있어서 모든 경계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 마음이 깨끗할 때는 삼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보살아, 마음이 경계를 일으키지 않으면 경계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이는 모든 경계는 오직 보여진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허상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趣入義]인데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향해 들어간다는 뜻을 전체적으로 밝혔으며[摠明趣入], 둘째는 취입의 뜻을 개별적으로 드러냈으며[別顯趣入], 셋째는 취입이 잘못을 떠났음[入之離過]을, 넷째는 취입이 극단을 떠났음[入之離邊]을 말한 것이다.

첫째의 총명취입에도 둘이 있다. 먼저 묻고 다음에 답했다. 물음에 ‘이 마음이 깨끗할 때는 삼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함은 초지(初地) 이상이 본래 청정함을 증득해서 보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당연히 삼계가 멸해 없어진다는 것이다. 삼계의 사상(事相)은 초지나 제8지(第八地)에서 없어지게 되고, 삼계의 자성(自性)은 등각위(等覺位)에서 없어지게 되고, 삼계의 습기 (習氣)는 묘각위(妙覺位)에서야 없어지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답에서 전체적으로 인정하는 뜻으로 ‘그렇다’고 하였다. 삼계가 없어질 때는 심(心)과 경(境)이 서로를 생성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오직 마음의 허망한 견(見)이 경계를 변화시켜 조작하는 것이니, 마음에 망령됨이 없을 때는 경계를 변화시켜 조작하지 않고, 경계가 없으므로 마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經] “보살아, 안에 중생이 없고 3성(性)이 공적하면 자기라는 무리도 없고 남이라는 무리도 없으며 …… 두 가지 들어감[二入]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로움을 얻으면 삼계가 없다.”

[論] 이 아래는 둘째, 취입의 의미를 개별적으로 밝힌 부분인데, 여기에도 둘이 있다. 하나는 수(數)를 들어 전체적으로 보여준 것이요, 둘은 문답을 통해 개별적으로 설명한 것인데 위 문장은 전자에 해당한다.

첫 대목에 ‘안에 중생이 없다’ 함은 10주위(住位)에서 안으로 인공(人空)을 얻었기 때문이며, ‘3성(性)이 공적하다’ 함은 10행위(行位)에서 안으로 법공(法空)을 얻었기 때문이다. ‘자기라는 중생도 없고 남이라는 중생도 없다’ 함은 10회향위(廻向位)에서 평등한 공(空)함을 얻어 자타(自他)와 인법(人法)의 무리에 대한 집착을 두루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무리[衆]’란, 중생을 중이라 부르기도 하고, 5음(陰)의 법 역시 5중(衆)이라 한다. 이는 공(空)에 가깝지만[相似] 아직 진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두 가지로 들어감’이란 지전(地前)·지상(地上)이 들어가는 수(數)를 통틀어 열거한 것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2입(入)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마음이 본래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들어감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2입(入)이란 첫째는 이입(理入)이고, 둘째는 행입(行入)이다. 이입(理入)이란 무엇인가? 중생이 진성(眞性)과 다르지 않지만 같지도 않고 (같고 다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객진(客塵)으로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고,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각관(覺觀)에 집중하여 머물고,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자세히 살피고, 자기도 없고 남도 없어서 범부와 성자가 둘이 아님을 알고, 금강심(金剛心)의 경지에 굳게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적정무위(寂靜無爲)하여 분별이 없으면 이를 이입(理入)이라고 한다.”

[論] 여기서부터는 문답을 통해 두 가지 들어감[二入:理入·行入]을 개별적으로 밝힌 부분이다. 물음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묻고 나중에 논란한다. 답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답하고 나중에 정리[通]한다. 답에도 세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수를 표시하고, 둘째는 이름을 열거하고, 셋째는 그 특성을 차례로 설명한다.

여기서 ‘이입(理入)’이란 이치[理]에 순응하여 믿고 이해하나 아직 증행(證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입’이라 하며, 지전(地前)의 지위에 해당한다. ‘행입(行入)’이란 이치를 증득하고 수행하여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하며 지상(地上)의 지위에 해당한다.

이입(理入)에 관한 글은 네 구절로 나뉜다. ‘중생이 진성(眞性)과 다르지 않지만 같지도 않고 (같고 다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객진(客塵)으로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고’까지는 10신(信)의 들어감을 말한다. 이 중에 ‘같지 않다[不一]’ 함은 중생의 모습이 참된 성품과 다르지 않으나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고,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不共]’ 함은 (중생과 진성이) 하나인 동시에 다르기도 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둘째 구절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각관에 집중하여 머물고[不去不來凝住覺觀]’는 10주(住)의 들어감을 말한다. (10주의 수행자는) 중생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거나 가지 않는다. 인공(人空)을 관찰하는 문에서 그 마음이 고요히 머물러 불성(佛性)이 가거나 오지 않음을 관찰하여 깨닫기 때문이다.

셋째 구절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자세히 살피고’는 10행(行)의 들어감을 말한다. 그들은 이미 법공(法空)을 얻고, 법공문(法空門)에 의하여 불성(佛性)에는 법상(法相)이 있지도 않고 공성(空性)이 없지도 않음을 자세히 관찰하기 때문이다.

넷째 구절 ‘자기도 없고 남도 없어서 범부와 성자가 둘이 아님을 알고’는 10회향위(廻向位)의 이입(理入)을 말한다. 이미 자타(自他)에 평등한 공(空)을 얻었으므로 마음이 금강과 같아져서 물러서지 않고 굳게 머문다. 『범망경(梵網經)』에서는 10금강(金剛)이라 하고, 『인왕경 (仁王經)』에서는 10견심(堅心)이라 하는데 이것이 10회향의 다른 이름이다.

[經] “행입(行入)이란 마음이 어디로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고, 영상이 흘러가거나 바뀜이 없으며, 있는 곳에서 고요히 염(念)하되 구함이 없으며, 바람이 북치듯 하더라도 대지같이 움직이지 않고, 마음[心]과 나[我]를 버리고 떠나서 중생을 제도하되 생함도 모양도 없으며, 취하거나 버리지 않음을 말한다.”

[論] ‘행입(行入)’이란 지상(地上)의 수행자가 깨달아 들어가는[證入] 행을 말한다.

‘마음이 어디에도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는다[心不傾倚]’ 함은 여리지(如理智)에서 나오는 마음은 반연하는 일이 없는데, 반연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영상이 흘러가거나 바뀜이 없다’ 함은 여리(如理)한 경계는 3제(際)를 떠나 있으므로 유전변화하는 경계의 상(像)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세간의 모든 복락(福樂)에서부터 심지어 보리대열반(菩提大涅槃)의 과(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도 원하고 바라는 것이 없고, 평등함을 통달하여 이것저것을 가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의 바람이 북처럼 두들겨 와도 움직임이 없으니 이것이 자리행(自利行)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음[心]과 나[我]를 버리고 떠나서’ 이하는 다른 사람을 들어가게 하는 행을 말한다. 2공(空)을 증득함으로써 인상(人相)과 법상(法相)을 떠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구할 능력을 갖는다. 마음에 생하는 바가 없고 경계의 모습도 없지만 그렇다고 적멸(寂滅)의 성품을 취하지도 않아서 항상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행[自利·利他]을 행입(行入)이라 한다.

[經] “보살아, 마음에 출입하는 일이 없고, 출입하는 그 마음도 없어서 들어감이 없는 데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한다.”

[論] 이것은 (첫 번째로 답을 제시하고 나서) 두 번째, 질문자의 논란을 정리하는 부분이다. 이치를 증득한 마음은 생멸을 멀리 떠나 있으므로 시작도 끝도 없는 까닭에 ‘마음에 출입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출입이 이미 없어졌다면 당연히 과거에 출입하던 마음도 없을 것이므로 ‘출입하는 그 마음도 없다’고 하였다. 전에 출입하던 마음을 떠나서 출입하지 않는 이 마음에 들어왔으므로 ‘들어감이 없는 데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렇게 해서 앞에서 제기된 논란이 잘 정리가 되었다.

[經] “보살아, 이와 같이 들어가는 법은 그 법상(法相)이 공(空)하지 않다. 공하지 않은 법은 법이 헛되게 버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없지 않은 이 법은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으며,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닌, 원래가 청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행입이 잘못을 떠나 있음을 나타낸 부분[能入離過]인데,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한 설명이고, 다음은 자세한 해석인데, 위 문장은 간략한 설명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들어가는 법’이란 출입이 없는 법, 즉 실제(實際)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이는 없지 않은 법은 능소(能所)가 평등하여 모든 잘못과 허물[過患]을 떠나 있고 모든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라’ 함은 마음과 경계가 평등하여 능소(能所)를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원래가 청정하다’ 함은 시작도 끝도 없고 모든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마음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닌, 원래 청정한 법이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空)하고 여(如)한 법은 심식(心識)의 법이 아니며, 마음이 부려서 생긴 법[心使所有:심소유법]도 아니며, 공상(空相)을 가진 법도 아니며, 색상(色相)을 가진 법도 아니며,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心不相應法]도 아니며, 마음의 무위와 상응하는 법도 아니다.[非心無爲相應法:어떤 본에는 ‘非心有爲不相應法 非心無爲是相應法’이라고 되어 있다] 나타난 영상도 아니고 드러내 보여진[顯示] 것도 아니며, 자성(自性)도 아니고 차별(差別)도 아니며, 이름[名]도 아니고 상의(相義)도 아니다. 그 까닭은 여여[如]하기 때문이다.여여하지 않은 법이라 해서 여여함 없는 것도 아니며, 어떤 유(有)든지 여여함이 없지 않아서 여여한 있음이 아닌 것 없다. 왜냐하면 뿌리라는 법과 나뭇결이라는 법은 나뭇결도 아니고 뿌리도 아니어서, 모든 쟁론(諍論)을 떠나 있어 그 모습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아, 보살아, 이와 같은 청정한 법은 생(生)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생이 아니며, 멸(滅)이 멸하게 할 수 있는 멸이 아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잘못을 떠났음을 자세히 해석한 부분이다. 먼저 묻고 다음에 답하고, 세 번째로 이해하고 네 번째로 결론을 맺는다. 답을 둘로 나누어 말하는데, 먼저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라’고 한 구절을 해석하고, 나중에 ‘원래 청정하다’고 한 구절을 해석하였다.

첫 구절의 해석도 둘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들어가는 법[入法]이 모든 마음의 영상을 떠났음을 밝히고, 나중에는 마음의 영상이 여리(如理)하지 않음이 없음을 밝혔다.

‘공하고 여한 법[空如之法]’이란 실제(實際)에 들어갔을 때 모든 모양을 멀리 떠남을 공(空)이라고 하고, 능(能)·소(所)가 평등함을 여(如)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들어가는 법이 모든 마음의 영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마음의 영상에 대략 여섯 쌍[六雙]의 차별이 있다. 첫째 심(心)과 심소(心所)가 한 쌍이요, 둘째 허공(虛空)과 색(色)이 한 쌍이요, 셋째 불상응행(不相應行)과 모든 무위(無爲)가 한 쌍이요, 넷째 영상(影像)과 본질(本質)이 한 쌍이요, 다섯째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이 한 쌍이요, 여섯째 명언(名言)과 상의(相義)가 한 쌍이다.

이 여섯 쌍 중에서 첫 번째 한 쌍은 능연(能緣)인 마음의 종류에 속하고, 나중의 다섯 쌍은 소연(所緣)인 영상의 종류에 속한다. 이 여섯 쌍에서 떠나므로 마음도 영상도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 순서대로 여섯 쌍의 구절이 있다.

‘심식의 법이 아니라’ 함은 [입(入)이] 8식(識)의 마음[心]을 떠났기 때문이고, ‘마음이 부려서 생긴 법도 아니라’ 함은 6위(位)의 심소유법(心所有法)을 떠났기 때문이다.

‘공상을 가진 법도 아니라’ 함은 색상(無色)이 없는 허공법(虛空法)을 떠났기 때문이고 ‘색상을 가진 법도 아니라’ 함은 현색(顯色)·형색(形色)·표색(表色)의 세 가지 색(色)을 떠났기 때문이다.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도 아니라’ 함은 스물네 가지 불상응행[二十四不相應行]을 떠났기 때문이고, ‘심무위와 상응하는 법도 아니라’ 함은 일곱 가지 무위법(無爲法)을 떠났기 때문이다.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것이므로 ‘심무위(心無爲)’라 하고, 세 가지 무위(無爲)의 모습과 상응하는 법이기 때문에 ‘상응법’이라고 한다. 또한 이 법이 세 가지 진여법(眞如法)을 떠났다는 것은 증문(證門)에 들어서면 세 가지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나타난 영상도 아니라’ 함은 방편관(方便觀)으로 현현(顯現)하는 본법(本法)과 동분(同分)인 영상(影像)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드러내 보여진 것도 아니라’ 함은 영상(影像)이 현시하는 본질의 법인 내용[骨鎖] 등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자성도 아니라’ 함은 색의 자성이나 심의 자성 따위를 떠났기 때문이며, ‘차별도 아니라’ 함은 무상(無常) 등의 차별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름도 아니라’ 함은 지시하는 기능[能詮]을 갖는 명(名)·구(句)·문(文)의 상을 떠났기 때문이며, ‘상의(相義)도 아니라’ 함은 이름이 지시하는 개념[所詮]과 그 이름에 해당하는 의미[義]를 떠났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 여섯 쌍의 모습을 떠난 자는 능(能)·소(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여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여하지 않은 법’ 이하는 두 번째, 마음과 영상의 법이 여리(如理)하지 않음이 없음을 밝힌 부분이다.

‘여여하지 않은 법’이란 앞에서 아니라고 한 여섯 쌍의 법상(法相)을 말한다. ‘여여함이 없는 것도 아니라’ 함은 여여한 이치는 두루 통하기 때문이다. ‘어떤 유든지 여여함이 없지 않다’ 함은 어떤 유상(有相)의 법도 여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여여한 있음이 아닌 것이 없다’ 함은 설사 여여함이 없는 법이 있다면 그것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미 여여 아닌 법이 아니므로 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하는 있음이 아닌 뜻을 해석한 것이다. ‘뿌리[根]’란 나무 뿌리를 말하며, 종자(種子)를 비유한다. ‘나뭇결[理]’이란 목리(木理)를 말하며, 나타난 법을 비유한다. 앞에서 암라과(唵羅果)의 비유에서 설한 것과 같다. ‘모든 쟁론을 떠나 그 상을 보지 않는다’ 함은 각혜(覺慧)로 구해도 얻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마음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님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법’ 이하는 이어서 원래 청정하다는 뜻을 자세히 해석한 부분이다.

‘생(生)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생이 아니라’ 함은, 생상(生相)을 떠났으므로 자체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로 멸상(滅相)을 떠났으므로 자체가 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법은 유위상(有爲相)을 떠나 있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원래 청정하다고 하였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옵니다. 이와 같은 법의 모습은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어디에 매인 것도 아니고 무엇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며,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는 모습도 아니고 가는 모습도 아니므로 불가사의하옵니다.”

[論] 다음은 세 번째, 이해했음[領解]을 나타낸 부분이다.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마음도 아니고 마음의 작용[心所]도 아니라는 뜻이니,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개별적인 체(體)로서 상응하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자성(自性)도 아니고 차별(差別)도 아니라는 뜻이니, 이 두 가지는 따로 두 개의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 매인 것도 아니라’ 함은 이름도 아니고 뜻도 아니라는 뜻이니, 이름과 뜻이 서로에게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라’ 함은 영상이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니, 영상과 본질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 짝이 되기 때문이다.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공(空)도 아니고 색(色)도 아니라는 뜻이니, 모이고 쌓이는 것은 색이 되고 흩어져 파괴되는 것은 공(空)이 되기 때문이다.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불상응(不相應)도 아니고 무위(無爲)도 아니라는 뜻이니, 불상응행(不相應行)은 생기는 것이고 모든 무위법(無爲法)은 멸(滅)에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여섯 쌍을 떠났다는 뜻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오는 모습도 아니라’ 함은 생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생이 아니기 때문이며, ‘가는 모습도 아니라’ 함은 멸이 멸하게 할 수 있는 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뒤에 말한 ‘원래 청정하다’는 뜻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처음에 ‘불가사의하옵니다’는 여여 아닌 여여[非如之如]가 마음과 언설을 떠났기 때문에 한 말이고, 뒤에 ‘불가사의하옵니다’는 마음을 떠난 마음[離心之心] 역시 그 둘을 떠났기 때문에 한 말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불가사의하다. 불가사의한 마음이라 할 때 그 마음 역시 그러하니, 어째서 그런가? 여여함[如]이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마음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다.”

[論] 이것은 넷째, 결론을 맺는[述成] 부분이다. 두 번 불가사의하다고 한 말을 차례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마음’이라고 한 것은 증득[證]에 들어간 마음을 말하는데, 무심(無心)의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는 그곳에 들어가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여여함이 마음과 다르지 않다’ 함은 앞의 부사의를 풀이한 것이고, ‘마음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라’ 함은 뒤의 부사의를 해석한 것이다.

[經] “중생과 불성(佛性)은 하나도 아니며 별개도 아니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고, 생멸의 성품은 그 성품이 본래 열반이다. 성품과 모습[性相]이 본래 여여하니, 여여함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로 ‘취입이 극단을 떠났음[入之離邊]’을 말한 부분이다. 이것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불성이 하나다, 다르다 하는 양 극단[一異邊]을 떠나 있음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여여(如如)가 있다, 없다 하는 양 극단[有無邊]을 떠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첫째 부분에서도 처음에는 간략하게 설명하고[略明] 뒤에 자세히 풀이하였다[廣顯].

간략한 설명에 둘이 있다. 먼저 하나다, 별개다 함을 떠나 있음을 말하고, 뒤에는 별개임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다. 하나다·별개다를 떠나 있다는 것은 중생과 불성이 하나가 아니지만 다르지도 않음을 말한다.

‘불성’이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한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불성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을 이름한다” 하였는데, 만약 그것을 하나[一]다, 별개[異]다 한다면 모두 잘못이 되기 때문이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고……’ 한 데서부터는 별개임을 떠났다는 뜻을 풀이한 구절인데, 하나가 아니라는 뜻은 보기가 쉬우므로 이 구절은 사람들에게 불성이 별개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생멸의 성품은 그 성품이 본래 열반’이라 함은 생사(生死)가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성품과 모습[性相]이 본래 여여하니, 여여함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라 함은 중생의 인성(人性)과 생멸의 법상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經] “모든 법상(法相)은 인연을 따르는 것이라 일어남이 없다. 일어나는 상의 본성은 여여한데, 여여한 것은 움직임이 없다. 인연의 성질과 형상[性相]은 그 특성이 본래 공하여 없는 것이고, 연과 연은 공하고 공하므로 연이 일어나는 일이 없다. 연을 따르는 모든 법은 미혹한 마음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이며, 그 나타난 현상은 본래가 생긴 것이 아니니 연(緣)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마음도 법의 이치와 같아서 자체가 공하여 없는 것이다. 저 공왕 (空王:허공)이 본래 머무는 곳이 없으나 범부의 마음이 망령되게 분별하여 (있다고)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불성이 극단을 떠나 있음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이다. 여기서는 다름[異邊]을 떠났다는 쪽에 치우쳐 많은 설명을 붙이고 있다.

모든 법상(法相)은 연(緣)을 따라 생기고, 모든 과법(果法)도 연을 따라 있게 된다. 이는 생하는 일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상의 본성이 여여한데, 여여한 것은 움직임이 없다’고 하였다.

이 아래의 문장에서는 일으키는 작용을 갖는 모든 연[能起諸綠]도 공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인연의 성질과 형상은 그 특성이 본래 공하여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은 종자(種子)가 되는 인연(因緣)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연과 연은 공하고 공하므로 연이 일어나는 일이 없다’라고 한 것은 소연연(所緣緣)의 법이 하나가 아니고 많지만 모두 공하다는 뜻에서 공공(空空)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무엇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는 연(綠)이 없다.

‘연을 따르는 모든 법은 미혹한 마음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이라 함은 증상연(增上椽)과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오직 마음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시 공하다고 한 것이다. ‘그 나타난 현상은 본래가 생긴 것이 아니니 연(緣)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함은 2공(空)을 결론지은 것이다. 연(綠)이 나타내는 과(果)는 본래 생겨난 것이 아니며, 일으키는 작용을 갖는 모든 연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마음도 법의 이치와 같아서 자체가 공하여 없는 것’이라 함은 앞에서 설한 인과(因果)는 취해진 법[所取法]인데, 취해질 법이 없으므로 취하는 마음[能取心]도 공(空)하다는 것이다. 취해진 법의 공한 도리를 설한 것과 같이 취하는 마음의 본체[心體]도 이와 같다. 지금까지는 내용을 설명하였고[法], 다음에는 비유[喩]를 들고 있다.

‘공왕(空王)’이라 한 데서 공(空)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암(明暗)의 색(色)인 공계(空界)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허공법(虛空法), 즉 공왕(空王)을 말하는데, 모든 색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모든 백성의 의지처가 되는 것과 같으므로 허공을 공왕(空王)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공왕은 본래 머무는 곳이 없으나 범부의 마음으로 망령되게 분별을 하여 여기가 허공이요, 저기가 허공이라고 하니 이것은 망견(妄見)일 따름이지 사실은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인과의 모든 법도 마찬가지로 망심으로 취한 것이므로, 인(因)도 없고 과(果)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비유는 변계소집(遍計所執)에 의해 있게 된 인과(因果)를 가지고 망견처(妄見處)를 설명한 것이다.[經] “여여함의 상은 본래 있고 없고 한 것이 아니다. 있다, 없다 하는 개념[相]은 오직 심식(心識)을 보는 것이다. 보살아, (이 상은) 마음의 성품과 같이[如之心性:어떤 본에는 ‘如是心法’이라고 되어 있다] 자체가 없지도 않고 자체가 있지도 않아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보살아, 없으면서도 없지 않은 상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眞如)의 법은 아무 상도 없는 텅 빈 것이라서 2승(乘)이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論] 여기에서는 (불성이 一異의 극단을 떠났음을 밝힌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로, 여여(如如)한 법이 있다, 없다[有無]는 극단을 떠났음을 밝혔는데, 다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 구절은 여여함이 양 극단을 떠났음을 직접적으로 밝힌 것이고, 다음 구절은 유변(有邊)이 망념임을 뒤집어서 지적한 것이고, 셋째는 마음이 양 극단을 떠나 있음을 예로 들고, 넷째는 여여함이 언설을 떠났다는 사실을 환기시킨 것이다.

셋째 부분에 있는 ‘마음의 성품과 같이’란 일심의 체성과 같다는 것이다. ‘자체가 없지도 않다’ 함은 토끼 뿔과 같이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극단을 떠났음을 말한다. ‘자체가 있지도 않다’ 함은 쇠뿔과 같이 자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극단을 떠났음을 말한다. 이는 다른 상이 없기 때문에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있지 않다는 말을 할 뿐이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함은 있지 않음[不有]이 곧 없지 않음[不無]이요, 없지 않음이 곧 있지 않음이니, 이런 뜻에서 다시 합쳐서 설명한 것이다. 일심(一心)의 법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과 같이 여여(如如)한 이치도 이와 같으므로 구절의 첫머리에 ‘마음과 같이[如心]’라고 하였다.

‘없으면서도 없지 않은 상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고 한 이하는 넷째 구절로서, 여여(如如)함이 언설(言說)을 떠난 도리임을 환기시킨 부분이다. ‘없으면서도 없지 않은 상’이란 첫 구절 중 ‘본래 있고 없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을 설명하는데, 여러 가지 말들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2승(乘)이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함은 심(尋)과 사(伺) 두 가지가 작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 심·사의 두 법은 언어의 길인데, 이 두 가지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언설의 경지가 아니라고 하였다.

[經] “허공경계(虛空境界)를 안팎의 수행자들은 헤아릴 수 없고, 6행(行)을 닦는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

[論] 여기서부터는 대단원 중에 세 번째,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趣入階位]이다.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첫째는 향해 들어가는 곳이 매우 깊음을 밝혔고[明所入甚深], 둘째는 향해 들어가는 자의 지위와 행을 들었으며[擧能入位行], 셋째는 계위를 개별적으로 나타냈고[別顯階位], 넷째는 들어가는 마음을 밝혔다[覈明入心].

‘허공경계’란 텅 비어 넓고 형상이 없는 여여(如如)한 법을 ‘허공’이라고 하였다. ‘안팎의 수행자들은 헤아릴 수 없다[內外不測]’ 함은 내도(內道:불교)의 28성인[二十八聖]과 외도(外道)의 아흔다섯 종류, 이러한 부류의 범인과 성인들은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향해 들어가는 자의 지위와 행을 든) 두 번째 중에 ‘6행을 닦는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 함은 2입(入)에 들어가는 보살의 계위를 든 것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무엇이 6행(行)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10신행(信行)이고, 둘째는 10주행(住行), 셋째는 10행행 (行行), 넷째는 10회향행(廻向行), 다섯째는 10지행(地行), 여섯째는 등각행(等覺行)인데, 이렇게 행하는 사람만이 이를 알 수 있다.”

[論] 여기서는 (세 번째로) 계위를 개별적으로 밝히는데, 과위(果位)는 논하지 않고 행위(行位)만을 드러냈기 때문에 묘각지(妙覺地)는 취하지 않았다. 이 6행(行) 중 앞의 네 계위는 이입(理入)의 순서를, 다음 두 계위는 행입(行入)의 차별을 말한다. 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본업경(本業經)』에 있고, 자세한 설명은 화엄교(華嚴敎)에 나온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실제(實際)인 본각의 이익[覺利]은 출입(出入)이 없는데 어떤 법, 어떤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실제의 법이란 한계를 갖지 않는 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한계 없는 그 마음이 실제에 들어간다.”

[論] 이는 (네 번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마음을 밝힌 부분이다.

질문에서 ‘실제인 본각의 이익은 출입이 없다’ 함은 뒤의 두 계위에서 두 가지 이익행을 얻고 이치와 딱 들어맞아 출입이 없다는 뜻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법, 어떤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한 것은 들어가는 자[能入]의 심법(心法)을 정곡으로 묻는 말이다.

답에서 ‘실제의 법이란 한계를 갖지 않는 법을 말한다’ 함은 들어갈 법이 원래 한계가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시간적으로[縱]으로 말하자면 실제의 법은 3세(世)의 시간을 떠나 있기 때문에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러므로 전후가 없다[前後無際]. 공간적[橫]으로 말하자면 실제의 법은 여섯 가지 방위와 장소[동·서·남·북·상·하]를 떠나 있기 때문에 중간이나 가장자리가 없으며, 그러므로 여기와 저기가 없다[彼此無際]. 떠나지 않은 한계가 없기 때문에 끝없이 깊다[甚深無際].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끝없이 넓다[廣大無際]. 이 네 가지를 갖추었다는 뜻에서 ‘무제(無際)’라고 한다.

들어가는 마음[能入心]도 이 네 가지 뜻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실제(實際:所)에 들어가지 않는 바가 없다. 실제가 능·소의 양 극단을 떠나 있으므로 마음도 능·소의 끝[際]을 떠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들어감이 없어야 들어갈 수가 있으니 이런 의미에서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끝없는[無際] 마음에서 나온 지혜는 그 지혜가 한계가 없고[無涯], 한계없는 마음은 마음이 자재(自在)하니, 자재한 지혜라야만 실제(實際)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 범부처럼 빈약한 마음을 가진 중생은 그 마음이 매우 숨가쁘니, 무슨 법으로 다스려야 굳은 마음을 가져 실제에 들어갈 수 있게 하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실제에 들어가는 階位를 밝힌 세 번째에 이어) 들어가는 방편을 밝힌 네 번째 부분이다. 들어가는 방편이란, 10지(地)에 들기 전 네 계위[四位:10신·10주·10행·10회향)에서 닦는 이입문(理入門) 안의 방편관(方便觀)을 말한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들어가는 방편[能入方便]을 설명하고, 뒤에 방편의 훌륭한 이익[方便勝利]을 나타낸다. 앞의 능입방편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먼저 간략하게 말하고, 나중에 자세히 다룬

다.앞의 간략한 설명에도 두 부분이 있어서 먼저 질문이 나오는데, 질문 중에도 둘이 있어 첫째는 앞의 내용을 이해했음을 나타냈고, 둘째는 뒤의 내용을 물은 것이다.

앞의 이해한 내용 중에 ‘끝없음[無際]’이란 마음의 체[心體]가 끝이 없기 때문이고, ‘한계가 없음[無涯]’이란 지혜의 작용이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저들의 마음이 숨가쁜 이유는 안팎의 번뇌[使]와 거기 딸린 번뇌[隨使:隨煩惱]가 끊임없이 흘러서[流注]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하고, 하늘 바람이 바다에 북 치듯이 물결을 일으켜 큰 용을 놀라게 하듯 하기 때문이니, 크게 놀라는 그 마음 때문에 숨가쁜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보살아, 저 중생들에게 셋을 간직하고 하나를 지키게[存三守一]하여 여래선(如來禪)에 들어가게 하면 선정 때문에 마음에 숨가쁨이 없을 것이다.”

[論] 답에도 두 부분이 있다. 먼저 고쳐야 할 장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나중에 치료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숨가쁜[喘] 마음’이란 마음이 놀라고 불안하면 들고나는 호흡이 급하고 빨라지는 것을 말하는데, 6식(識)이 멈추지 않고 들떠 움직이는 것을 비유한다.

‘안팎의 번뇌[使]’란 말나식(未那識)의 네 번뇌[四使]는 안으로 자아(自我)를 반연하고, 의식(意識)의 여섯 번뇌[六使]는 밖으로 모든 대상[諸境]을 반연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거기 딸린 번뇌가 끊임없이 흘러내림’이란 분노[忿]·한스러움[恨] 등 소수번뇌(小隨煩惱)와 가라앉음[昏沈]·들뜸[掉擧] 등 대수번뇌(大隨煩惱)와 부끄러운 줄 모르는[無漸愧] 중수번뇌(中隨煩惱)가 저 번뇌[使]와 함께 따라 흘러서[等流] 현식(現識)에 모여들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 함은 근본번뇌[本使]와 수번뇌[隨惑]의 모든 현행(現行)이 본식(本識)을 훈습하여 깊고 넓게 쌓이고 모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하늘 바람이 북 치듯이 물결을 일으킨다’ 함은 업력(業力)을 받아서[感] 6진경계(塵境界)가 자동적으로 현행하기 때문에 ‘하늘바람’이라 하였고, 이 하늘바람이 수면(隨眠)의 바다를 두들겨 7식(識)의 물결을 일게 하기 때문에 ‘북 치듯이 물결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큰 용이 놀라듯하다’ 함은 무명주지(無明住地)의 힘이 가장 커서 본식(本識)에 잠재된 수면(隨眠)의 바다 밑에 머물러 있으므로 이를 ‘큰 용’이라 하였고, 이와 같은 무명이 적정(寂靜)을 위반하여 거칠게 동요하는 마음을 항상 자라나게 하기 때문에 ‘놀라게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든 인연 때문에 마음을 매우 숨가쁘게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고쳐야 할 장애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부분이었고, 이 이하는 고쳐 나가는 방편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셋을 간직하게 한다’ 함은 하늘바람[六塵境界]을 막는 방편을 가리킨다. ‘하나를 지키게 한다’ 함은 큰 용[無明住地]을 항복시키는 방편을 말한다. ‘여래선에 들게 한다’ 함은 바로 숨가쁜 병을 고치는 방편을 말한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무엇을 가리켜 셋을 간직하고[存三] 하나를 지켜[守一] 여래선에 들어간다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셋을 간직한다는 것은 세 가지 해탈[三解脫]을 간직한다는 뜻이고, 하나를 지킨다는 것은 일심의 여여함[一心如]을 지킨다는 말이다. 여래선에 든다는 것은 이치로써 마음의 여여함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실제(實際)에 들어가는 것이다.”

[論] 이 아래는 (能入方便을 略明과 廣顯으로 나눈 가운데) 방편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인데, 세 개의 문답이 있다. 첫 번째 문답에서는 수(數)를 들어 전체적인 설명을 하였다.

‘일심의 여여함을 지킨다’ 한 데서 일심법(一心法) 중에 두 가지 문(門)이 있는데, 지금은 우선 큰 용과 같은 무명(無明)의 세력을 항복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 중에서 심진여문(心眞如門)을 지키는 것을 이야기한다. 무명이 바로 일심의 여여함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지킨다’ 함은 들어갈 때는 일여(一如)의 경지를 고요히 지키고, 나올 때는 일미(一味)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를 지킴[守一]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본업경(本業經)』 「십행(十行)」중에 말씀하신 다음의 내용과 같다. “열 가지는 자재하게 큰 법륜(法輸)을 굴리는 것으로서, 보살의 3보를 말한다. 그 때 보살이 제일중도(第一中道)의 지혜를 각보(覺寶)로 삼고, 모든 법이 생겨나거나 움직임이 없음을 법칙으로 하는 것을 법보(法寶)로 삼고, 언제나 6도(道)를 다니면서 6도중생과 화합하는 것을 승보(憎寶)라 한다. 모든 중생을 부처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과거·현재·미래[三時] 어느 때든 중도일미(中道一味)를 잃지 않는 것이 이 관(觀)에서 일심진여를 지키는 작용인데, 이 관행은 10행위(行位)에 있는 자들이 닦는다. 다른 부분[門]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3해탈법(解脫法)이란 어떤 일이며, 이관삼매(理觀三昧)는 무슨 법으로부터 들어가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3해탈이란 허공해탈(虛空解脫)과 금강해탈(金剛解脫)과 반야해탈(般若解脫)이며, 이관심(理觀心)이란 마음이 청정한 이치와 동일하게 되어서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존용(存用)이며, 그것을 어떻게 관해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현상이 둘이 아님을 두고 존삼의 작용[存用]이라 한다. 내행(內行)이나 외행(外行)에 출입하는 일이 둘이 아니되, 하나의 상에도 머물지 않아서 마음에 얻거나 잃음이 없으니,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곳에 청정한 마음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관(觀)한다고 한다.”

[論] (첫 번째 문답으로 數를 들어 전체적인 설명을 한 데 이어서) 이 두 문답은 관행을 개별적으로 설명한 부분[別顯觀行]이다.

‘3해탈’이란 세 가지 지혜[三慧]로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을 포괄하기 때문에 해탈이라 한다. 『본업경(本業經)』 「십주품(十住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섯은 모든 부처님이 지켜주는 것이니 이른바 8해탈관(解脫觀)이다. 안의 가상[內仮]과 밖의 가상[外仮] 두 가지 상이 성립할 수 없음을 문혜(聞慧)를 통해서 터득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 안으로는 5음법(陰法)과 밖으로는 일체법(一切法)이 성립할 수 없음을 사 혜(思慧)를 통해 터득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 6관(觀)을 다 갖추어 색계의 5음이 공함을 수혜(修慧)를 통해 터득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4공(空)의 5음과 멸정관(滅定觀)이 모두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섯 해탈[五解脫]이라 하니 여여한 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8해탈관은 두 가지 면[二門]으로 요약된다. 이 중에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측면[事相]에서 본다면 (여덟 가지가) 모두 수혜관(修慧觀)에 속하는데, 이는 다른 데서 설하는 바와 같이 2승(乘)에게도 공통되는 관이다. 한편 3혜(慧)의 측면에서 본다면 인(人)과 법(法)이 공(空)함을 관하는 것이니, 이는 대승(大乘)의 관법으로서 지금 이 경에서 설하는 내용이다.

첫 번째 해탈은 안에 색상(色相)을 두고 밖으로 색(色) 등을 관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안으로 색 등 5음법의 형상을 둔 채로 내아(內我)가 공함을 관하는 한편, 밖으로 색 등을 둔 채 중생이 공함을 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에는 들어가기가 쉬우며 문혜(聞慧)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안의 형상·바깥의 형상 두 가지가 성립할 수 없음을 문혜를 통해 터득한다’고 하였다. 색(色) 등을 버리지 않은 채 공(空)을 관하는 것이, 허공이 색상을 버리지 않는 것과 비슷하므로 이를 허공해탈(虛空解脫)이라 한다.

두 번째 해탈은 안으로 색상을 두지 않고 밖으로 색 등을 관하는 것이다. 안으로는 색 등 5음법의 형상을 버리고, 밖으로는 모든 산하(山河) 등이 공하여 욕계(欲界)의 법은 무엇이든 공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관한다. 이 공(空)은 이해하기 힘들며 사혜(思慧)로 관한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안으로는 5음법(陰法)과 밖으로는 일체법(一切法)이 성립할 수 없음을 사혜(思慧)를 통해 터득한다’고 하였다. 안팎의 모든 법을 추적하고 분석하여 깨뜨리는 것이 금강(金剛)이 모든 색법(色法)을 깨뜨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이를 금강해탈(金剛解脫)이라 한다.나머지 여섯 해탈[後六解脫]은 모두 수혜(修慧)로 얻는다. 위 두 세계[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법이 공함을 관하기 때문에 『본업경』에서 ‘수혜의 6관(觀)’이라 하였으며, 모두 수혜를 통해 선정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총괄적으로 반야해탈(般若解脫)이라 한다.

이 가운데 여섯 가지 차별상(差別相)이 있는데 세 번째를 정해탈(淨解脫)이라고 부른다. 색계(色界)의 5음(陰)이 빛나고 깨끗하고 고요함을 몸으로 증득[身作證]하여 모두 다 공한 것임을 관하기 때문에 정해탈이라 하는데, 자기 스스로 안에서 증득한다는 뜻에서 ‘몸으로 증득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색계의 5음이 공함을 구족한 것이니, 세 번째 해탈이다’라고 하였다. 네 번째는 공처해탈(空處解說)이라 하는데 공처의 5음이 공함을 관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비상해탈(非想解脫)도 마찬가지이며, 멸정법(滅定法)도 얻어지지 않음을 관하므로 멸진해탈(滅盡解脫)이라 한다. 이상은 모두 버려야할 대상을 가지고 이름을 붙인 것이므로 『본업경』에서 ‘4공(空)의 5음(陰)과 멸정관(滅正觀)이 모두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섯 해탈[五解脫]이라 하니 여여한 상이기 때문’이라 하였다.이와 같은 세 가지 지혜로 인(人)·법(法)이 공함을 관하여 두 집착[二執:人執·法執]과 현행하는 두 속박[二縛:相應縛·能緣縛]을 항복시켜 떠나게 하므로 해탈이라고 부른다. 안팎의 모든 가법(仮法)을 이미 버렸으므로 천풍(天風)의 요동, 즉 모든 경계를 막을 수 있다.

다음에는 이관(理觀) 중에 나오는 구절을 보기로 한다.

‘마음이 청정한 이치와 동일하게 되어서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란 형상 없는[無相]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마음에 분별이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마음과 현상으로 드러난 일이 둘이 아님을 존용이라 한다’ 함은 존삼(存三)의 작용이 가지는 탁월한 능력을 가리킨다. 존삼의 작용을 아직 얻지 못한 자라면 마음을 고요히 하여 공(空)을 관한다 할지라도 현상[事]에 닥치면 정념을 잃는다. 아(我)와 아소(我所)를 취하고, 마음에 맞고 경계와 거슬리는 경계에 집착하여 천풍에 움직이게 되고, 마음과 현상이 각각 다르게 된다. 반면 3해탈(解脫)을 능숙하게 잘 닦는 자라면 관(觀)에서 나와 현상에 맞 닥뜨리더라도 관을 닦은 힘이 아직 남아있어서[存] 나다, 남이다 하는 형상을 취하지 않으며 좋다, 나쁘다 하는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풍의 두들김에 흔들리지 않고, 들어가고 나오는 차별을 동시에 잊어버리며, 마음과 현상이 둘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존삼의 작용’이라고 한다.

이 관법은 10신위(信位)에서 닦는데, 존용(存用)이 이루어지는 것은 10주위(住位)에서다. 『본업경』 10주위 중 이 관법을 설명한 내용과 같다.

‘내행(內行)……’ 이하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으로, 관(觀)의 상(相)을 밝히는 내용이다. ‘내행’이란 관에 들어가 적조(寂照)함을 보는 행이고, ‘외행’이란 관에서 나와 중생을 교화하는 행이다. ‘둘이 아니다’ 함은 나오거나 들어가거나 중도(中道)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본업경』 10향(向)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 번째, 자재(白在)한 지혜를 가지고 모든 중생을 교화하니, 이를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라고 한다. 반야(般若)로써 중도에 처하여 모든 법이 둘 아님을 관찰하고 통달하며, 그 지혜가 점점 성숙하여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므로 ‘제일의제에 근접한 관[相似第一義諦觀]이라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중도제일의제관은 아니다……” 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상에도 머물지 않는다[不住一相]’ 함은 2제관(二諦觀)을 닦기 때문이고, ‘마음에 얻거나 잃음이 없다[心無得失]’ 함은 평등관(平等觀)을 닦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방편관에 의지하므로 초지(初地)의 법류(法流)에 진입한다. 그러므로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곳에 청정한 마음이 흘러 들어간다’고 하였다.

『본업경』에서는 3관(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仮)로부터 공(空)에 들어가는 것을 2제관이라 하고, 공으로부터 가에 들어가는 것을 평등관이라 하는데, 이 두 가지 관은 방편도(方便道)이다. 이 두 가지 공관(空觀)으로 중도제일의제관에 들어가니, 2제(諦)를 동시에 비추어 마음마다 적멸하여 초지 법류(法流)에 진입(進入)한다……” 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중에서 ‘2제관’이란 속(俗)을 버리고 진(眞)을 관하는 것이므로 정체지(正體智)의 방편이고, ‘평등관’이란 진을 융(融)하여 속(俗)을 관하는 것이므로 후득지(後得智)의 방편이다. 속이 허깨비 같음을 관하여 얻거나 잃음을 취하지 않으며, 옳거나 그름이 없으므로 평등이라 한다.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곳’이란 초지의 다른 이름이다. 어째서 그런가? 초지가 바로 10지라서 일시에 10중법계(重法界)에 바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10지가 바로 초지라서 완성된 그대로 초문(初門)에게 들어갈 곳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진실로 10지가 초지라는 뜻에서 ‘하나’라 했고, 초지가 10지라는 뜻에서 ‘하나가 아니라’고 했으니, 그러므로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곳’이라 하였다. 두 가지 방편에 의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곳에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 마음이 흘러 들어간다[淨心流入]’고 하였다. 여기서는 첫 관과 마지막 관만을 자세히 이야기했으나 중간의 한 관은 이에 준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經] “보살아, 이런 사람은 두 개의 형상에 머물지 않으니, 출가(出家)하지 않았더라도 재가(在家)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법복(法服)이 없고,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를 다 갖추지 않고, 포살(布薩)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 마음에서 무위(無爲)의 자자(自恣)를 하여 성인의 과위[聖果]를 얻는다. (이런 사람은) 2승(乘)에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가는데, 뒤에 가서 지(地)를 다 채우면 부처의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방편의 뛰어난 이익[方便勝利]을 설명한 부분이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이 넷이 있다. 과를 얻는 뛰어난 이익[得果勝利]·공양을 얻는 뛰어난 이익[得供勝利]·허물이 없는 뛰어난 이익[無患勝利]·머묾이 없는 뛰어난 이익[無住勝利]이다.

첫째 득과승리에도 네 가지 뛰어난 이익이 있다.

하나는 ‘극단을 떠난 데서 오는 뛰어난 이익[離邊勝利]’인데 도(道)·속(俗) 어느 편의 모습에도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경(經)에서 ‘이런 사람은 두 개의 형상에 머물지 않으니, 출가(出家)하지 않았더라도 재가(在家)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둘은 ‘자재하게 되는 뛰어난 이익[自在勝利]’인데 교문(敎門)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으로 도리를 결판하여, 아무 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법복(法服)이 없고……성인의 과위를 얻는다’고 하였다.

셋은 ‘도에 들어가는 뛰어난 이익[入道勝利]’인데 경에서 ‘2승(乘)에 머물지 않고 보살도(菩薩道)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넷은 ‘과를 얻는 뛰어난 이익[得果勝利]’인데 경에서 ‘뒤에 가서 지(地)를 다 채우면 부처의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나이다. 이런 사람은 출가한 것이 아니면서도 출가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열반의 집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보리좌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심지어 사문들도 마땅히 존경하고 공양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 하면 열반의 집에 들어가 마음이 삼계(三界)를 일으키고, 여래의 옷을 입고서 법공(法空)의 자리에 들고, 보리좌에 앉아 정각(正覺) 일지(一地)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 나[二我]를 초월했거늘 어찌 사문이라 해서 존경하고 공양하지 않겠는가?”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득공승리(得供勝利)인데, 세 가지 훌륭한 덕[勝德]을 얻어서 복전(福田)이 될 만하고, 모든 도인[道]과 속인[俗]에게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이 글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보살이 복전(福田)임을 밝히고, 다음에는 2승(乘)은 볼 수 없음을 나타내고, 끝으로 보살만이 볼 수 있음을 드러낸다.

처음에서는 세 가지 복전이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열반의 집에 들어가 마음이 삼계를 일으킨다’ 함은 3해탈(解脫)로서, 존삼(存三)의 작용[用]을 말한다. 삼계가 공적(空寂)한 것을 ‘열반의 집’이라 하니, 안심하고 몸을 맡겨 살 수 있는 깨끗한 곳이므로 하는 말이다. 3해탈관으로 삼계가 공(空)한 곳에 들어갔으나 깨달음에 빠지지 않고 세속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삼계를 빠짐없이 교화하므로 ‘마음이 삼계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삼계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지만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으므로 이것이 존용(存用)이다.‘여래의 옷을 입고 법공의 자리에 들어간다’ 함은 일심의 여여함을 지키는[守一] 관이다. 삼계를 두루 다니며 널리 교화할 때 인욕(忍尋)의 옷을 입고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으며, 법공(法空)에 귀환해 들어가 일심의 여여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말한 “유화(柔和)와 인욕(忍辱)의 옷”과 같은 맥락이다.

‘보리좌에 앉아 정각일지에 올라간다’ 함은 여래선(如來禪)인 이관(理觀)의 마음을 말한다. 즉 법공에 앉아 방편을 더욱 닦아서 초지에 올라 정각의 진실관을 수행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모든 법이 공함을 자리로 삼는다”고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3위(位)는 모두 2공(空)을 관하여, 인아(人我)·법아(法我)의 두 집착을 눌러 없앴기 때문에 ‘마음이 두 가지 나[二我]를 초월했다’고 하였다. 두 가지 나를 초월했으므로 번뇌를 끊는 덕[斷德]이 구족하고, 3관(觀)을 닦았기 때문에 지혜의 덕[智德]이 겸비된다. 그러므로 도인과 속인의 복전이 될 만하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일지(一地)와 공의 바다[空海]를 2승을 닦는 사람은 보지 못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저 2승을 닦는 사람은 삼매(三昧)에 맛들여 거기에 집착하고 삼매의 몸을 얻으므로, 저 공해와 일지에 마치 술병난 사람처럼 정신 없이 취해 깨어나지 못한 채 수겁(數劫)이 지난 뒤에도 깨어나지 못하다가 술기운이 가시고 나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 행을 닦은 뒤에야 불신(佛身)을 얻는다.”

[論] 이 대목은 2승(乘)은 볼 수 없음을 밝힌 부분이다. 먼저 물음이 있고 나중에 대답한다.

질문 중에 ‘일지(一地)’란 오르는 지위(地位)를 말하는데, 10지(地)가 곧 초지(初地)이므로 ‘일지’라고 하였다. ‘공해(空海)’란 앞서 말한 바 3관(觀)을 통해 들어가는 공이 매우 깊고 넓고 크므로 ‘바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란 2승은 보지 못한다는 물음을 긍정하신 말씀이다. 그 다음은 2승이 보지 못하는 이유를 풀이한 말씀이다.

‘삼매에 맛들여 거기에 집착한다’ 함은 고요한 선정(禪定)을 좋아해서 이에 집착하고 적정(寂靜)으로만 향하는 것이다. ‘삼매의 몸을 얻음’이란 어떤 것인가? 즐겨 쫓아가는 바에 따라 멸심정(滅心定)에 들어가고, 열반에 들어가서 몸과 마음을 식어버린 재처럼 없애고[灰身滅智], 몸과 마음이 멸한 곳에 멸정(滅定)의 체(體)가 생겨 심과 심법을 막는데, 이런 것을 두고 삼매신(三昧身)을 얻는다고 한다. 고요함을 즐기는 훈습(薰習)이 본식(本識) 안에 있어서 이것 때문에 술병 난 사람이 술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듯이 공해와 일지(一地)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수겁(數劫)이 지난 뒤에도 깨어나지 못하다가’라 함은 수다원(須陀洹)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8만 겁을 머물고……아라한(阿羅漢)은 2만 겁을 머물고 벽지불은 만 겁 동안 열반에 머물러 깨닫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를 전체적으로 표현하여 ‘수겁이 지난 뒤에도’라고 하였다.

‘술기운이 가시고 나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 행을 닦는다’ 함은 즐겨 애착하고 훈습(薰習)하는 정도가 두터우냐 가벼우냐에 따라 그 애착의 기운이 차차 없어져 다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며, 마음을 일으켰을 때 마음을 돌려 대승에 들어가 그제야 앞서 말한 3종관행(種觀行)을 닦는다는 것이다. 『능가경 (楞伽經)』 게송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술에 취한 사람이 술기운이 가신 뒤에야 부처의 위없는 몸이 다름 아닌 내 진법신(眞法身)임을 깨닫는 것과 같다(이하 생략).”[經] “그런 사람은 천제(闡提)를 버리고 곧 6행(行)에 들어가고, 닦아 나아가는 곳에서 한 생각 깨끗한 마음으로 마침내 명백해지며, 금강지혜의 힘으로 아비발치(阿鞞跋致)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니 그 자비가 다함이 없다.”

[論] 이 부분에서는 (2승이 보지 못하는 데 반해, 보살은 볼 수 있음을 밝히는데) 보살종성(菩薩種性)을 가진 사람이 천제의 믿지 못하는 장애를 버림으로써 6행의 첫 단계인 10신(信)에 들어가고, 닦아 나아가는 곳[修行地]에서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을 발하는데, 그것이 10주(住)의 초발심(初發心)이다. ‘마침내 명백해짐’이란 10행위(行位)에서 모든 행위가 밝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금강지혜의 힘’이란 10회향(廻過)의 견고한 지력(智力)을 말한다. ‘아비발치’ 초지(初地) 이상에서 참되게 증득[眞證]해서 물러남이 없기 때문이다.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니 그 자비가 다함이 없다’ 함은 전위(前位)에서 이타행(利他行)을 하기 때문이니, 2승(乘)이 하지 못하는 것과 구별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이런 사람은 마땅히 계(戒)를 고수하지 않을 것이니 저 사문을 공경하는 일이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를 설하는 자는 선(善)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며, 바다에 파도가 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사람의 마음자리는 8식(識)의 바다가 맑아지고, 9식(識)의 흐름이 맑아져서 바람이 움직일 수 없고 파도가 일지 않는다.

계의 성품은 공한 것이므로 이를 지키는 자는 미혹되고 전도된 자라 하겠다. 그러나 저 사람에게는 제7식(第七識)과 제6식(第六識)이 생기지 않아서 모든 번뇌가 사라져 조용하며, 3불(佛)을 떠나지 않고 보리심을 발하며, 3무상(無相) 가운데 마음 따라 깊이 들어가서 3보를 존경하고 위의(威儀)를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사문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

보살아, 저 어진 사람은 세간의 움직이는 법에도 머물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법에도 머물지 않으며, 3공취(空聚)에 들어가 3유(有:삼계)의 마음을 없앤다.”

[論] 이것은 세 번째, 허물을 떠난 뛰어난 이익[離患勝利]을 설명한 부분으로서, 인과(因果)를 잘못 이해하는 범부의 허물을 떠난 것을 말한다.

‘계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 함은 앞서 (得果勝利를 설명한 부분에서)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를 다 갖추지 않았더라도…’라고 한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저 사문을 공경하는 일이 없겠다’ 함은 계를 지키지 않으므로 계를 지키는 이를 공경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앞의 물음을 허용하고, 다음에는 뒤의 물음을 부정한다.

‘계를 설하는 자’란 남을 위해 계를 설하는 사람으로, 성문(聲聞)들을 가리킨다. 자기가 계 지키는 것을 자랑삼아 파계한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 때문에 ‘선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람은 모든 법이 공(空)함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면(隨眠)의 바다 위에 7식(識)의 물결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바다에 파도가 인다’고 하였다. 이는 계를 지킨다는 사람의 과실을 보여준 것이다.

‘저 사람의 마음자리’란 보살의 마음을 가리킨다. 모든 법이 공함을 증득하여 대지(大地)에 들어가므로 제8식 내의 두 가지 집착[能取·所取]과 분별기(分別起)의 번뇌[隨眠]가 모두 없어지는 까닭에 ‘8식의 바다가 맑아진다[澂]’고 하였다. 징(澂)은 징(澄)이다. 분별 없는 지혜로서 본각에 깨달아 들어가서 지(地)마다 증장하여 모든 더러움을 떠나기 때문에 ‘9식의 흐름이 맑다’고 하였으니, 본각(本覺)이 바로 제9식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분별이 없어서 경계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바람이 움직일 수 없다’고 하였으며, 바람이 움직이지 못하므로 물든 제7식(第七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파도가 일지 않는다’고 하였다.이 사람은 이미 모든 법이 공함을 증득하고, 일곱 가지 계성(戒性)이 모두 공적(空寂)함을 통달했기 때문에 ‘계의 성품은 공한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성문(聖聞)은 법공을 통달하지 못하여 계성(戒性)이 있다고 집착하고는 자신이 잘 지킨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지키는 자는 미혹되고 전도되었다’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첫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계를 지키지 않는 것이 과실(過失)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저 사람’ 이하는 이어서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으로 교만함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제7식과 제6식이 생기지 않는다’ 함은, 말라식[제7식]의 네 가지 미혹이 현행하지 않기 때문이며, 견혹(見惑)의 종자가 이미 끊어져서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가 사라져 조용함[諸集滅定]’이란 생기식(生起識:前六識)의 모든 심(心)과 심소(心所) 등의 쌓임이 다 없어지고 이정(理定)에 들었기 때문이다.

‘3불을 떠나지 않고 보리심을 발한다’ 함은 발심한 이래로 두루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여래장불(如來藏佛)이 바로 모든 중생이라 여기고 저 발심에 의해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교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 가지 무상[三無相]에 마음이 순응하여 깊이 들어간다’ 함은 행입(行入)을 얻었을 때 무명(無明)의 뿌리를 뽑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3해탈(解脫) 중에서 일심법(一心法)에 순응하여 깊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3보를 깊이 존경하는 것이니, 형상으로 된 부처[佛]와 종이나 천에 쓰여진 법(法)과 네 종류의 수행자[僧] 등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사문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으니, 3불에 의하여 발심했기 때문에 교만의 뿌리인 무명의 씨앗을 뽑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원인[因]의 잘못됨을 떠남에 대해 밝혔고, 이제부터는 과보[果]의 잘못됨을 떠남에 대해 밝힌다.

‘세간의 움직이는 법에도 머물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법에도 머물지 않는다’한 데서, ‘움직이는 법’이란 욕계의 인천(人天)이 누리는 부와 쾌락을 말하는데, 산심(散心)으로 닦아 얻은 선한 과보[善果]이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법’이란 색계와 무색계의 적정(寂靜)의 과(果)를 말하는데, 정심(定心)으로 닦아 얻은 선한 과보이기 때문이다. 그 둘에 다 집착하지 않으므로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3공취에 들어간다’ 함은 앞에서 말했듯이 점 점 더 증입(增入)하기 때문에 취(聚)라고 하였으며, 집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겨나지도 않게 하니, 이런 이유에서 ‘3유(有)의 마음을 없앤다’고 하였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저 어진 사람은 과만족덕불(果滿足德佛)과 여래장불(如來藏佛)과 형상불(形像佛), 이러한 부처님 앞에서 보리심을 내서 3취계(聚戒)에 들어갔지만 그러한 관념[相]에 머물지 않으며, 3유심(有心)을 멸하였지만 고요한 자리에 기거하지 않으며, 제도할 중생을 버리지 않고 고르지 못한 땅에 들어가니 불가사의하나이다.”

[論] 이는 네 번째, 머묾이 없는 뛰어난 이익을[無住勝利] 설명한 부분이다. 이 중에도 두 부분이 있다. 먼저 위에 말한 내용을 이해했음을 밝히고 뒤에 머물지 않음을 밝힌다. 이해했음을 밝힌 데도 두 구가 있으니 먼저는 ‘3불을 떠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이해한 내용이다.

‘과만족덕불’이란 시각(始覺)이 완성[究竟]되어 만 가지 덕이 원만하기 때문이다. ‘여래장불’이란 모든 중생이 본래 본각(本覺)이기 때문이다. ‘형상불’이란 금·은·진흙·나무 등으로 세존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인과(因果)와 이사(理事)에 빠지는 것이 없다.

‘3취계에 들어갔지만 그러한 관념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앞에서 계의 성품이 공하다고 한 말씀을 이해한 것으로서, 계(戒)에 들어가는 네 가지 연이 계상(戒相)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3취계(聚戒)의 네 가지 연은 다음 품에서 설명할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머묾 없는 뛰어난 이익을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3공취(空聚)에 들어가 3유심(有心)을 없앴지만 고요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6도(度)의 저 숨가쁜 중생들이 살고 있는 곳을 두루 왕래하니 이곳을 ‘고르지 못한 땅’이라고 하였다. 미혹(迷惑)을 남겨둔 채 업(業)에 얽매이지 않고 그 땅에 생(生)을 받으므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미혹을 남겨둔다는 말은, 소승의 수행자들처럼 그것을 빨리 없애는 것이 아니라 3무수대겁 동안에 점차로 미혹을 없애 보리를 얻을 때에 가서야 다 없어진다는 뜻이지, 금강지 이상에서 한결같이 끊지 않는 경지를 두고 ‘남겨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經] 그 사리불(舍利佛)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나서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반야(船若)의 바다가 구족하건만

열반의 성(城)에 머물지 않는다네.

마치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나지 않듯이.

모든 부처님, 한량없는 세월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서

세간을 제도한 후에야 부처 되시니

마치 연꽃이 진흙에서 피듯 하네.

저 6행(行)의 경지들은

보살이 닦는 것이요

저 3공취(空聚)는

보리로 가는 곧은 길[直道]이어라.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사리불이 말씀을 이해했음을 나타낸 부분[身子領解]인데, 소승들에게 큰마음[大心:대승심]을 내게 하기 때문(에 사리불이 등장한 것)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것이고, 또 하나는 결론짓는 말[述成]이다.

첫 번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앞의 세 게송은 이제껏 설하신 내용을 찬탄한 구절이고, 뒤의 두 게송은 자기의 발심을 진술한 것이다. 앞 세 게송도 셋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앞 두 게송으로 무주도(無住道)를 찬탄한 것이고, 그 다음 두 구절은 6행위(行位)를 찬탄한 것이고, 마지막 두 구절은 3공취(空聚)를 찬탄한 것이다.

첫 번째 가운데 ‘반야의 바다가 구족하다’ 함은 3해탈(解脫)이 3혜(慧)를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함은 삼계의 마음을 멸하되 고요한 곳에 살지 않기 때문에 한 말이다. ‘높은 언덕에 나지 않는다’ 함은, 저 2승(乘)들은 번뇌의 진흙에서 벗어났지만 8만 겁을 발심(發心)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 함은 두 가지 이생[二二生] 중에 속히 번뇌를 끊어 없애버리는 2승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연꽃이 진흙에서 피듯이’라 함은 미혹이 남아 있음으로써 고르지 못한 땅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남김없이 보살행을 닦아서 그것으로 보리의 열매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행(行)과 3취(聚)를 말했으니 문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나 이제 부처님 설하신 대로

머물지 않는 데 머무네.

왔던 곳에 또 다시 와서

모든 행을 갖춘 뒤에야 나가리다.

또 저 중생들로 하여금

나처럼 둘 없이 하나가 되게 하여

앞에 온 자나 뒤에 올 자나

모두 다 정각(正覺)에 오르게 하리.

[論] 여기는 사리불이 자기의 발심을 진술한 부분이다. 그 중에 첫 두 구절은 지금 발심하는 자리를 말한 것이요, 이어지는 반 게송과 한 게송은 그 후의 수행을 표시한 것이다.

‘나 이제 머물지 않는 데 머문다’ 함은 지금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큰마음을 일으킨 것이 고요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 마음에 머문 것이기에 그렇게 말했다.

‘왔던 곳에 또 다시 왔다’ 함은 시작이 없는 때부터 유전(流轉)해 온 곳에서 내가 이미 떠났다가 지금 다시 와서 3계(界)에 들어와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뜻한다. 변제정(邊際定)의 힘으로 받은 몸을 연장하여 알맞은 곳에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모든 행을 갖춘 뒤에야 나가리다’ 함은 보살의 모든 행(行)을 구족한 후에 이 몸을 벗어나 불신(佛身)을 얻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앞에 온 자’는 과거의 선근(善根)이 이미 성숙한 자를 말한다. ‘뒤에 올 자’는 미래세에 가서야 성숙할 사람을 말한다. 미래가 다할 때까지 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經] 그 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불가사의로다. 네가 이 다음에 보살도(菩薩道)를 이루어 한량없는 중생들을 생사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論] (첫 번째 사리불의 이해에 이어) 두 번째, 부처님께서 사리불의 말을 인정하면서 끝맺음을 하신 부분이다.

[經] 그 때 대중이 모두 보리를 깨닫고 소승의 무리들이 5공(空)의 바다에 들어갔다.

[論] 이 부분은 네 번째, 당시 대중이 이익 얻었음을 밝힌 부분이다.

‘대중(大衆)’이란 대승(大乘)의 무리를 말한다. ‘보리를 깨달았다’ 함은 일지(一地)의 보리심에 깨달아 들어갔다는 말이다. ‘소승의 무리들……’이란 성문(聲聞)의 무리가 세 가지 진여(眞如)의 문(門)에 들어갔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