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상권 - 원효(元曉) 지음

수선님 2021. 11. 28. 12:47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상권

 

신라국(新羅國) 사문(沙門) 원효(元曉) 지음

이인혜 번역

 

[論] 이 경은 간략히 네 부문으로 나뉜다. 처음은 대의(大意)에 관한 서술이고, 다음은 경의 종지[宗]에 대한 설명이며, 셋째는 제목에 대한 해석이며, 넷째는 본문에 대한 풀이이다.

① 대의를 서술함[述大意]

일심(-心)의 근원은 유(有)·무(無)를 떠나 독자적으로 청정하며 3공(空)의 바다는 진(眞)·속(俗)을 융합하여 밝고 고요하다.

밝고 고요하다는 것은 둘을 융합했다고 해서 하나가 된다는 뜻은 아니요, 독자적으로 청정하다는 것은 양 극[邊]을 여의었다해서 중간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중간도 아니며 양극도 여의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법[不有之法]이라 해서 무(無)에 머무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지 않다[不無之相]해서 유(有)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하였으니, 진(眞) 아닌 사(事)가 애당초 속(俗)이었던 적이 없으며, 속(俗) 아닌 이(理)가 처음부터 진(眞)이었던 적이 없다. 둘을 융합하였으되 하나도 아니니 진·속의 성품은 그것대로 다 성립하고, 염(染)·정(淨)의 모양은 그것대로 다 갖추어진다. 양 극[邊]을 여의었으나 중간이 아니므로 유·무의 법(法)이 제각각 다 이루어지고 시(是)·비(非)의 뜻이 제각각 다 완전하다. 그러므로 깨뜨림[破]이 없되 깨뜨리지 않음이 없으며, 세움[立]이 없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가히 아무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無理之至理]이며, 그렇지 않으면서도 가장 그러한 것[不然之大然]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이 이 경에서 밝히려는 큰 의도[大意]이다. 참으로 그렇지 않으면서도 가장 그런 것이기 때문에 경의 말씀[能說]이 묘하게도 진리에 들어맞고, 없는 이치[無理]이면서도 지극한 이치이므로 경의 취지[所詮]가 시공 (時空)의 제약을 넘어선 것이다.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금강삼매(金剛三昧)’라 이름하고, 세우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대승을 망라한 경[攝大乘經]’이라 이름하며, 모든 취지가 이 두 가지 의미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한량없는 뜻을 지닌 종[無量義宗]’이라고도 이름한다. 이러한 의미들 중에서 우선 하나를 들어 제목을 붙였으므로 『금강삼매경』이라고 말한다.

② 경의 종지를 설명함[辨經宗]

이 경의 종요(宗要)를 나누어서 말할 수도 있고 종합해서 말할 수도 있다. 종합해서 말하면 일미관행(一味觀行)이 요점이 되며, 나누어서 말하면 열 가지 중층적인 법문[十重法門]이 종취[宗言]가 된다.

관행(觀行)에서 관(觀)이란 횡적인 논리로서 대상[境]과 지혜[智]에 공통되는 것이고, 행(行)은 종적인 논리[竪望]로서 인과(因果)에 걸치는 것이다. 과(果)는 다섯 가지 법[五法]이 원만함을 말하고, 인(因)은 이른바 6행(行)이 다 갖추어짐을 말한다. 지(智)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말하고, 경(境)이란 즉, 진(眞)과 속(俗)이 다 없어짐을 말한다. 진과 속이 모두 없어진다 해서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본각과 시각이 있다 해서 생겨남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생겨남이 없는 행이라 관념이 없는 데[無相]에 그윽하게 합하게 되며, 관념이 없는 법이라 본래적인 이익을 순조롭게 이룬다. ‘이익[利]’에다가 기왕에 ‘본래적[本]’이라는 말을 붙였을 때는 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실제(實際)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제(際)’에다가 기왕에 ‘실답다[實]’는 말을 썼을 때는 그것이 자성을 떠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제(眞際) 또한 공(空)하다. 모든 부처님들도 여기에 들어 있으며 모든 보살도 따라서 여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간다’ 하며, 이것이 바로 6품(品)의 대의(大意)이다.관찰해서 들어가는 문[觀門]에서, 믿고 이해하는 첫 단계로부터 등각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6행(行)을 세운다. 이 6행이 만족하게 성취될 때 9식(識)이 전환하여 때 없는 의식[無垢識]을 드러내어 깨끗한 진리의 세계[淨法界]를 이루며, 나머지 8식(識)을 전환시켜 4지(智)를 이룬다. 또한 5법(法)이 이미 원만해졌으므로 3신(身)을 구비한다

.이와 같은 원인과 결과는 대상과 지혜를 떠나있는 것이 아니며, 대상과 지혜는 둘이 아니고 오직 일미(一味)일 뿐이다. 그러므로 일미의 관행(觀行)을 이 경의 종취[宗]로 삼는다. 그러므로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대승의 법상(法相)이 없고, 한량없는 취지 중에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름이 헛되지 않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여기까지가 하나의 관(觀)에 대해 종합해서 논(論)한 것이다.

이를 다시 열 가지 문[十門]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종취로 삼는 것을 일문(一門)에서부터 하나씩 늘여 10문(門)까지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 ‘일문(一門)’이란 무엇인가? 일심(一心) 가운데 일념(一念)이 움직여 하나의 실다운 것[一實]에 순응하여, 하나의 행[一行]을 닦고 일승(一乘)에 들어가 하나의 도[一道]에 머무르며, 하나의 각[一覺]을 사용해서 일미(一味)임을 깨닫는 것이다.

‘2문(門)’이란 무엇인가? 두 언덕[二岸]에 머무르지 않고서, 두 무리[二衆]를 버리고 두 가지 아집[二我]에 집착하지 않고, 양 극단[二邊]을 떠나 2공(空)의 이치를 통달하여 2승(乘)에 떨어지지 않고 두 가지 진리[二諦]를 융화하여 두 가지 깨우쳐 들어가는 길[二入]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3문(門)’이란 스스로 3불(佛)에 귀의하여 3계(戒)를 받으며, 세 가지 큰 진리[三大諦]에 순응하여 3해탈(解脫)과 등각의 세 경지[等覺三地]와 묘각삼신(妙覺三身)을 얻고 3공취(空聚)에 들어가 3유심(有心)을 없애는 것이다.

‘4문(門)’이란 4정근(正勤)을 닦고 4신족(身足)에 들어가 네 가지 큰 연력[四大緣力]에 의지하여 4의(儀)로 항상 이롭게 하고 4선(禪)을 벗어나며 네 가지 오류[四謗]를 멀리 여의어서 네 가지 큰 서원[四弘地] 가운데서 네 가지 지혜[四智]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5문(門)’이란 5음(陰)이 생함에 따라 50악(惡)이 갖추어지기 때문에 다섯 가지 근[五根]을 심고 5력(力)을 길러 다섯 가지 공의 바다[五空海]를 건너고, 오등위(五等位)에 서서 다섯 가지 청정한 법[五淨法]을 얻고 다섯 갈래의 중생들[五道生]을 제도하는 것이다.

육·칠·팔·구 등의 문이란 무엇인가. 6바라밀[六度]을 두루 닦아 여섯 경계[六入]에 다시는 빠지지 않게 하며 7각분(覺分)을 행하여 일곱 가지 장애되는 마음[七義科]을 끊으면 8식(識)의 바다가 밝아져서 무구식[無垢識]인 9식(識)의 흐름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수행의 처음 단계인 10신위(信位)로부터 보살의 열 가지 경지[十地]에 이르도록 온갖 행(行)이 갖추어지고 모든 덕이 원만하게 성취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가지 문(門)이 이 경의 종지(宗旨)가 된다. 경문에 모두 실려 있으므로 해당 문구가 나올 때 설명하겠다.

그러나 이 뒤에서 말하는 아홉 가지 문이 모두 한 가지 문에 포섭되며 한 가지 문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하나의 관(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펼쳐 보여도 하나인 문을 더 보태는 것이 아니요, 종합해 보아도 열 가지 문에서 줄어들지 않는다. 따라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 이 경의 종요(宗要)가 된다.

③ 제목을 해석함[釋題目]

이 경의 제목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섭대승경(攝大乘經)』이라 하고, 둘은 금강삼매(金剛三昧), 셋은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 한다. 처음과 나중의 두 이름은 다음에 해석할 것이고, 우선 중간의 제목을 해석하겠는데, 그 까닭은 이 이름 하나만을 이 경의 첫머리 제목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금강이라는 말과 삼매라는 말의 두 가지가 있으므로, 먼저 금강의 뜻을 해석하고 다음에 삼매의 뜻을 해석하겠다. 금강이라는 말에 다시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먼저 말뜻을 해석하고[先釋] 다음에는 다른 것과의 차별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겠다[後簡].

금강이란 사물에 비유해서 말한 것인데, 견실(堅實)함으로 그 바탕을 삼고, 깨뜨릴 수 있는 힘으로 공용(功用)을 삼는다. 금강삼매(金剛三昧)라는 뜻도 이와 같아서 실제(實際)로 체(體)를 삼고, 뚫고 꿰뚫는 것으로 그 공능(功能)을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체를 삼는다 함은 이치를 증명하고 근원에 끝까지 다다른다[窮究]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래 본문에서 말하기를 ‘법을 증득하는 진실한 정(定)이다’ 라고 하였다.

뚫고 꿰뚫는 것으로 공능(功能)을 삼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모든 의혹을 깨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선정(禪定)을 꿰뚫는 것이다. 의혹을 깨뜨린다 함은 설명을 통하여 의심을 끊기 때문이니, 아래 본문에서 ‘결정코 의심과 후회를 끊는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선정을 꿰뚫는다 함은 이 (금강의) 선정이 다른 삼매(三昧)들을 유용하게 하기 때문이니, 마치 값진 구슬들을 꿰뚫어서 유용하게 쓰게 하는 것과 같다.

또한 『대품경(大品經)』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금강삼매라 하는가? 이 삼매에 머물면 모든 삼매를 깨뜨린다[破]” 했는데, 그 논(論)에서 해석하기를 “금강삼매는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 없는 금강석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삼매도 모든 법 가운 데 통달하지 못할 것이 없어서, 모든 삼매들을 다 유용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자거[硨磲]·마노[碼?]·유리(瑠璃)는 오직 금강석만이 뚫고 들어갈[穿入]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대품경』에서 모든 삼매를 깨뜨린다[破]고 했는데 이 말은 꿰뚫는다[穿]는 뜻이다. 그 논에서 뚫고 들어간다 함은 경에서 깨뜨린다 하는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 즉, 모든 삼매가 다 자성(自性)이 없음을 통달하여 저들 여러 가지

삼매로 하여금 스스로의 집착에서 떠나게 할 수 있으니, 이로 말미암아 걸림 없이 자재(自在)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금강삼매’라는 말뜻을 해석하였다.다음으로, 다른 것과의 차별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는 부분[簡別]에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정(定)과 혜(慧)로 간별하겠다.

[문] 금강반야와 금강삼매를 모두 금강이라고 하는데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전자는 지혜요, 후자는 선정(定)이니 이것으로 차별이 된다. 또한 금강반야는 인지(因地)와 과지(果地)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데 반해, 금강삼매는 그 위상이 과지(果地)에만 해당한다. 또 반야금강(般若金剛)은 세 가지 뜻을 갖추고 있는데 그 체(體)의 견고함, 그 작용의 날카로움, 그리고 특성의 넓고 좁음이다. 그러나 삼매금강(三昧金剛)은 이 중에 견고함과 날카로움만 취한 것이므로 이렇게 차별이 된다.

다음은 그밖에 다른 선정과 구별하겠는데,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금강삼매(金剛三昧)요, 둘째는 금강륜삼매(金剛輪三昧)이며, 셋째는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이다.

『대품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금강륜삼매란 어떤 것인가? 이 삼매에 머무를 때 모든 삼매를 부분적으로 간직할 수 있다. 여금강삼매란 어떤 것인가? 이 삼매에 머무를 때 모든 법을 꿰뚫어 통달했어도 스스로 통달했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저 논(論)에서 문답의 형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문] 세 가지 삼매를 어째서 모두 다 금강이라 말하는가?

[답] 처음에는 금강이라고만 말했고, 중간에는 금강륜(金剛輪)이라고 말했으며, 뒤에는 여금강(如金剛)이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금강삼매라 함은 모든 법을 꿰뚫었어도 꿰뚫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고 하셨고, “금강삼매는 모든 삼매를 통달할 수 있다” 하셨으며, “금강륜삼매는 모든 삼매의 바퀴[三昧輪]를 지닐 수 있다”고 하셨으니, 이 모두가 부처님 스스로 하신 말씀이다.

논(대지도론)에서 이를 해석한 자의 의도는 이렇다.

“‘여금강삼매’는 모든 번뇌와 얽매임을 끊어 다시는 나머지가 없게 한다. 마치 석제환인(釋提桓因)이 손에 금강을 잡고 아수라의 군대를 부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학인(學人)이 공부해서 마지막에 얻는 마음과 같으니, 이 마음으로부터 점차 세 가지 깨달음인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의 위없는 보리(菩提)를 얻게 되는 것이다. ‘금강삼매(金剛三昧)’는 모든 법을 깨뜨려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 다시는 몸을 받지 않는 것이니, 마치 진짜 금강이 모든 산을 깨뜨려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금강륜(金剛輪)’이란 “모든 불법(佛法)을 깨뜨려 막힐 것도 없고 걸릴 것도 없음을 뜻한다.”

내 생각에는, 여기서 모든 불법을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마치 전륜성왕이 윤보(輸寶)로 모든 왕들을 쳐부수어 다 복종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앞에서 말한 다른 두 가지 금강과는 그 뜻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다섯 가지 차별이 있다. 첫째는 비유가 다르다[喩別]. 이른바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는 군대를 쳐부순다는 비유를 사용했고 금강삼매는 산을 깨뜨린다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둘째는 법이 다르다[法別]. 여금강은 번뇌를 깨뜨리고, 금강은 다른 모든 법을 깨뜨린다고 하였다.

셋째는 지위가 다르다[位別]. 전자(여금강)는 아직 배워 익히는 지위[學位]에 해당하고, 후자(금강)는 더 배울 것이 없는 지위[無學位]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이름이 다르다[名別]. 전자의 이름은 여금강삼매이니 다른 곳에서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후자는 그저 금강삼매라고만 할 뿐, 여(如)나 유(喩)가 없다. 그 까닭은 인지(因地)와 과지(果地)에 있어서 두 가지 정(禪)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인지에는 힘들여 닦아나가는 일[功用]이 있지만 과지에는 공용이 필요치 않으니, 덜고 덜어서[損之又損之] 무위(無爲)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또한 여금강은 부분적으로 비슷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니 번뇌만 깨뜨렸을 뿐 나머지 법은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예리하다는 측면에서 금강과 동일함을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금강은) 깨뜨리지 못할 사물이 없으니, 삼매의 쓰임도 이와 같아서 깨뜨리지 못할 법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교설이 다르다[敎別]. 이른바 유학위(有學位)의 금강삼매는 『금강삼매본성청정부증불감경(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에서 설하였고, 무학위(無學位)의 금강삼매는 바로 이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에서 설하고 있다.

이제 이 경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들어가신 정은 모든 법을 깨뜨려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금강삼매라 한다. 여섯 가지 해석 가운데 이것은 지업석(持業釋)이요, 비유를 취해서 이름한 것은 인근석(隣近釋)이다. 이것으로 이 경의 제목을 삼은 것은 의주석(依主釋)이니 그것은 정(定)이 중심어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두 번째로 삼매라는 이름을 해석한 것인데,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해석이요, 둘째는 간별이다.

옛 스승이 말씀하기를 “저기에서 쓰는 삼매라는 명칭은 여기 말로는 바른 생각[正思]이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 설을 인용하는 이유는 본문의 이치[文義]와 정확히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定)에 들었을 때, 대상이 되는 경계를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바른 생각’이라고 이름한다. 『유가론(瑜伽論]』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삼마지(三摩地)란 인식하는 대상[所緣]에 대하여 자세히, 그리고 바르게 관찰하여 마음이 한 경계에 집중된 성품[心一境性]을 가리킨다.

[문] 정(定)이란 고요함[靜]이어야 하고, 고요하다 함은 한 경계[一境]에 머무름을 뜻하는 것인데, 어떻게 자세히 바르게 생각하고 관찰한다[審正思察]고 말할 수 있는가? 생각하고 살피는 작용은 마땅히 심사(尋伺)인데, 어떻게 정(定)을 설하면서 생각하고 살핀다고 할 수 있는가?

[답] 만약 하나의 경계[一境]를 지키는 것을 정(定)이라고 한다면 흐리멍덩[惛沈]한 채로 경계에 머무르는 것도 정(定)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바르게 생각하고 살피는 것을 가지고 심사(尋伺)라고 한다면, 삿된 지혜[邪慧]로 사물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심사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思察) 즉 생각하고 통찰한다는 말 속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삿되고 바른 것에 관계없이 말과 뜻으로 분별하는 것을 사찰(思察)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심사이므로 다만 분별일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올바르게 그리고 명료하게 대상[緣境]을 아는 것에 한해서 바른 생각과 통찰이라고 한다면, 이 경우는 바르다는 말이 정(定)의 작용[用]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심사는 아니다. 정(定)은 분별과 무분별에 두루 통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핀다는 것을 기준으로 저 심사를 가려내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경계에 머무른다’고 하는 것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의 경계에 머물기는 하지만 마음이 혼미하고 어두워서 자세히 살필 수 없다면 이는 흐리멍덩한 것이다. 반대로 하나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마음이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은 채로 바르고 자세히 관찰한다면, 이를 정(定)이라 이름할 수 있다. 때문에 생각해서 통찰한다는 점에서 혼침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머물러 있거나 또는 옮겨가거나 하는 특성을 가지고 마음이 정(定)에 들었다거나 산란하다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빠른 변론은 비록 빠르게 바뀌어 가지만 그 가운데 정이 있고, 느린 생각은 비록 오랫동안 경계에 머물러 있지만 사실은 산만한 것이다.

여기서 금강삼매를 바른 생각과 통찰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렇다. 거기에는 바르다던가 바르지 못하다던가 하는 관념이 없고, 생각이라고도 할 수 없고 생각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지만 다만 그릇된 분별과 삿된 생각을 구분하기 위해, 또 아무 생각도 없는 허공과는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부득이 정사(正思)라고 불렀을 뿐이다. 이상과 같이 삼매라는 이름을 간략히 해석하였다.

다음으로 간별(簡別)을 통해 삼매의 뜻을 밝히는 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여러 가지 이름의 뜻을 하나씩 구별해 보는 것이요, 다음은 여러 가지 이름의 넓은 의미와 제한된 의미를 간추려 보는 것이다.

정(定)에는 대략 여덟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첫 번째는 삼마혜다(三摩慧多)로서, 여기 말로는 등인(等引)이라 한다. 흐리멍덩한 것[惛沈]과 들떠 있는 것[掉擧]의 치우침으로부터 멀리 벗어났기 때문에 등(等)이라 하고, 신통 등의 여러 가지 공덕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인(引)이라고 한다. 또한 이 등인은 후회 없는 기쁨과 안락에서 끌어내 지기 때문에 등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욕계(欲界)의 정(定)과는 다르다.

두 번째는 삼마지(三摩地)로서, 여기 말로는 등지(等持)라 한다. 등의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고, 마음을 제어하고 잘 지켜서[護持] 밖으로 치달려서 흩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등지라 이름한다. 또한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여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등지라 한다. 예전에는 삼마제(三摩提)라고 했는데, 이것 또한 등지를 뜻하는 말이다.

세 번째는 삼마발제(三摩鉢提)로서, 여기 말로는 등지(等至)라 한다. 등지(等持) 가운데서 뛰어난 지위[勝位]에 이르게[至] 되기 때문에 등지(等至)라 이름한다.

네 번째는 타연나(駄演那)로서, 여기 말로는 정려(靜慮)라 한다. 고요하게 깊이 생각하기 때문이며, 흐트러진 생각을 진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선나(禪那), 혹은 지아나(持阿那)라고 했는데 이는 지방이나 습속에 따라 말이 다를 뿐 모두 정려를 가리킨 것이다.

다섯 번째는 사마타(奢摩他)로서, 여기 말로 지(止)라고 번역한다. 마음을 경계에 멈추게 하므로 지(止)라고 이름한다.

여섯 번째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니, 마음을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게 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심일경성이라 이름한다. 예전에는 일심(-心)이라 했는데 이는 심일경성을 줄여서 말한 것이다.

일곱 번째는 정(定)이니, 대상을 살펴서 정착하기 때문에 정이라고 이름한다.

여덟 번째는 정사(正思)이니, 그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논사는 “삼매(三昧)라는 이름과 삼마제(三摩提)라는 이름은 단지 등지를 뜻하는 것일 뿐 다른 이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어째서 그런가? 예컨대 『금고경(金鼓經)』에서 열 가지 선정을 설명한 가운데, 앞의 3지(地)에서는 삼마제라 이름하고 뒤의 칠지(七地)에서는 삼매라 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이름이 만약 같은 등지(等持)의 뜻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름을 고쳐서 앞과 뒤에 각기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겠는가?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이름이 어째서 같지 않은가? 만약 지방이나 습속의 차이 때문이라면 한곳에서 두 가지 이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전을 전한 이의 시대적 전후 때문에 다르다고 한다해도, 하나의 경에 삼마제(三摩提)와 삼마지(三摩地)라는 말처럼, (하나의 개념에) 두 가지 이름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전한 이의 시대적 전후 때문에 다른 것이지 실상은 같은 말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삼매라는 이름과 삼마제라는 이름은 같은 경[ 本] 속에 있으니 어떻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앞에서 분별한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삼매의 넓은 의미와 제한된 의미를 밝힌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간략하게 네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첫째, 정(定)과 등지(等持)의 두 가지 이름이 가장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에 두루 통하며, 또한 삼계에 통하며 더 나아가서는 욕계(欲界)의 산란한 마음에도 통한다. 6위(位)의 심소(心所) 가운데 다섯 가지 별경[五別境] 중에도 삼마지가 있으며, 이것 역시 정(定)이라고 이름한다.

둘째, 심일경성 (心一境性)과 삼매(三昧)라는 두 이름은 다음으로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욕계에는 통하지만 한결같이 산란한 마음에는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주삼매(船舟三昧)와 욕계에 결박된 아홉 가지 마음가짐[心住]의 심일경성 역시 욕계의 방편심에만 통하기 때문이다.

셋째, 삼마혜다(三摩呬多)와 정려(靜慮)라는 두 이름은 좁은 의미가 있다. 욕계의 마음에는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며, 오직 가볍고 편안한 마음[輕安]에 들어가는 경지만을 취해서 지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넷째, 삼마발제(三摩跋提)와 사마타(奢摩他)라는 두 이름은 가장 협소한 의미를 가진다. 즉, 정(定)의 경지 안에도 구별이 있기 때문인데, 사마타는 네 가지 지혜로운 수행 가운데 심일경성에 통하지 않고, 삼마발제는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세 삼마지에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넓고 좁은 이름에 대해 대강 이와 같이 설명하였다. 세 번째로 제목해석을 마친다.

1. #경서품 (經序品)

④ 과문해석(科文解釋)

글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는 서분(序分)이고, 둘째는 제2품부터 이어지는 여섯 품까지의 글들이 정설분(正說分)이고, 셋째는 입총지품(入摠持品)으로서, ‘그 때 여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이하로 두 장 남짓 되는 글이 유통분이다. 또한 서분에도 두 가지 서문[序]이 있으니 통서(通序:모든 경의 서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사항)와 별서(別序:해당 경의 서문에만 있는 사항)이다.

[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에서 큰 비구승 만 명과 함께 계셨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도를 얻었는데, 그 이름은 사리불·대목건련·수보리이니 이들은 아라한이었다. 또 보살마하살 2천 명과 함께 계셨는데, 그 이름은 해탈보살·심왕보살·무주보살 등이었다. 또 장자(長者) 8만 명과 함께 있었는데, 그 이름은 범행(梵行)장자·대범행(大梵行)장자·수제(樹提)장자 등이요, 또 하늘·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인비인 등 육십만억과 함께 있었다.

[論] 통서에는 여섯 가지 일이 들어 있다. 앞의 셋은 직접 들어서 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요, 뒤의 셋은 부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앞의 셋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이와 같이[如是]이고, 둘은 내가 들었다[我聞]이며, 셋은 어느 때[一時]이다. 뒤의 셋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교주(敎主)요, 둘은 머문 곳이요, 셋은 대중들이다. 그 대중들 속에도 네 가지 부류가 있으니 하나는 성문 대중이요, 둘은 보살 대중이요, 셋은 장자 대중이요, 넷은 잡다한 무리이다. 그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통설과 같다.

[經] 그 때 존자[尊者:어떤 본에는 世尊으로 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에는 없으나 한국 불교 전서에 있는 원본주이므로 표시해 둔다. 이하 모두 같다]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모든 대중을 위하여 대승경을 말씀하셨는데, 그 경의 이름은 일미진실무상무생결정실제본각리행(一味眞實無相無生決定實際本覺利行)이었다. 만약 이 경을 듣고서 네 구절로 된 게송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서 방편을 써서 중생을 교화할 수 있게 되며 , 또한 모든 중생을 위하여 큰 선지식이 될 수 있다.

【論】이 아래는 두 번째 별서(別序)인데,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위의분(威儀分)이고, 둘째는 설경분(說經分)이고, 셋째는 입정분(入定分)이며, 넷째는 중송분(重頌分)이다. 위의분이란, 경에 ‘그 때 존자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라고 한 부분이고, 설경분이란, 경에 ‘대중을 위하여 대승경을 말씀하셨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 경의 문세(文勢)는 “그 때 세존께서 사부대중에게 둘러싸여 대승경을 설하셨는데, 그 경의 이름은 무량의(無量義)였다”라고 한 『법화경(法華經)』의 서론과 비슷하다. 그 경[법화경]을 해석한 논에서는 이 경의 이름을 두고 『법화경』의 다른 제목이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의도는 그 제목이 본격적인 설법에 앞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서분을 삼은 것이다. 이제 이 경[金剛三昧經]의 글의 형태를 보면 모두 경전을

서술하는 자의 일반적인 서문과 같다. 이에 준하여 볼 때 다른 경을 앞에서 자세히 설하고, 다음에 정(定)에 들고, 정에서 깨어나 다시 『금강삼매경』을 설했을 것이다. 경의 주된 요지를 설한 연후에 경의 이름을 설하였으니, ‘일미진실(一味眞實)…’이라는 이 경의 앞에 자세히 말씀하신 경의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경전의 대의가 비록 같다고 하지만 글 모양[文相]은 다르다. 앞에서 설명한 것은 법문을 자세히 설하여 당시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고, 뒤에서 설한 것은 법문을 요약하여 말세(末世)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앞에서 설한 자세한 경이 간략한 경의 바탕이 된다.이 설경분(說經分)의 글 형태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경의 이름에 대한 서언이고 뒤에는 경의 덕에 대한 찬탄이니, ‘만약 이 경을 듣고[若聞]’ 이하가 뒷 부분에 해당한다.

[經]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신 다음 가부좌하여 앉으시고 곧 금강삼매에 드시어 몸과 마음에 흔들림이 없으셨다.

[論] 이는 세 번째, 입정분(入定分)이다. 경을 설하시기 전에 먼저 선정[定]에 드신 까닭은, 오직 적정(寂靜)한 자만이 법을 깨달을 수 있고 또 설할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또한 성현께서 때에 맞게 침묵과 설법을 사용하여 그 두 가지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經] 그 때 대중 가운데 아가타(阿伽陀)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이 뜻을 밝히기 위하여 게송을 설하였다.

[論] 이것은 넷째 중송분(重頌分)이다. 앞에서 설한 일미의 경[一味之經]과 뒤에서 설할 경의 대의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간략한 게송으로써 앞의 자세한 경을 송(頌)하여 뒤에 간략히 경을 일으킨 것이다. 문장의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앞은 서언(序言)이고 뒤는 게송이니, 이는 경전을 기술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서문으로써 뒤의 게송을 일으킨 것이다.

아가타(阿伽陀)란 여기 말로는 무거(無去), 혹은 멸거(滅去)라는 뜻이다. 이는 약(藥)의 이름으로서 모든 병을 남김없이 없앨 수 있기 때문에 ‘무거’라고 한다. 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의 모든 번뇌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약 이름을 가지고 자기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여덟 수의 게송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의 일곱 게송은 경을 설하심을 송한 것이고, 마지막 한 게송은 정에 드심을 송한 것이다. 앞의 일곱 수 게송에도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세 게송은 전체를 밝힌 것이고, 네 게송은 따로 드러낸 것이다.

[經] 큰 자비로 가득하신 세존이시여.

지혜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시도다.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려

한 가지 진실한 이치를 설하셨는데

모두 일미의 도(道)로써 하고

끝내 소승으로써 하지 않으셨네.

설하신 뜻[義]과 맛[味]과 곳[處]은

모두 다 부실(不實)함을 떠나서

모든 부처님의 지혜로운 경지에 들어가

결정코 참 실제(實際)에 들어갔네.

듣는 자가 모두 세간을 벗어나

해탈치 못함이 없으리.

[論] 총괄적으로 위의 세 게송을 밝혀보면 네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 두 구절은 말씀하신 이의 덕을 찬탄한 것이고, 둘째 한 게송은 가르침의 도구가 되는 교설[能詮敎]을 찬탄한 것이며, 셋째 한 게송은 가르침의 내용[所詮義]을 찬탄한 것이고, 넷째 두 구절은 가르침의 훌륭한 이익을 찬탄한 것이다.

두 번째 송 중에 ‘한 가지 진실한 이치[一諦]’라고 한 것은 한마음[一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일심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문이 오직 하나의 진실[一實]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한 가지 진실한 이치[一諦]라고 하였다.

‘일미의 도[一味道]’란 유일한 승[一乘]을 말한다. 나머지 글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經]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들께서

모두 다 중생을 제도하려고

못 사람들을 위해 넓고 깊게 물어서

법의 적멸한 특성을 알게 하여

결정적인 곳에 들어가게 하셨나이다.

[論] 이 아래로 네 게송은 문답을 따로 찬탄한 것이다. 위의 다섯 구절은 물음이 넓고 깊어서 적멸을 알아 실제(實際)에 들어가게 함을 찬탄한 것이다.

[經] 여래의 지혜 방편으로

실제에 들도록 설하시니

모두 다 일승만을 따르기에

다른 잡다한 맛이 없다네.

마치 한 차례 비가 적셔주어

온갖 풀이 다 무성해지듯이

각기 다른 성질에 따라서

한 맛[一味]의 법으로 적셔주어

두루 모든 것에 충만케 하니

저 한 차례 비가 적셔주듯이

보리(菩提)의 싹 모두 자라게 하네.”

[論] 이 둘째 부분은 부처님의 답에 훌륭한 이익이 있음을 찬탄한 것이다. 그 중에 법(法)·유(喩)·합(合)의 셋이 있으니 차례대로 보면 네 구절·두 구절 ·다섯 구절이 그에 해당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금강의 맛[味:다른 본에는 昧로 되어 있다]에 들어갔으니

법과 진실한 선정을 증득한 것이라

결정코 의심과 뉘우침을 끊으니

한 법에서 도장 찍혀 나온 듯하네.

[論] 이는 둘째로 입정하심을 노래한 것이다. 위의 반은 앞에서 입정한 것을 노래하고, 뒤의 반은 뒤의 설법 일으킴을 노래한 것이다.

뒤에 설하신 교리에 두 가지 훌륭한 힘[勝能]이 있다. 하나는 마치 금강이 모든 것을 파괴하듯이, 결단코 의혹과 뉘우침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마치 금강이 파괴되지 않듯이, 일승(一乘)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아래 반의 두 구절은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냈다. 이상 서분의 글이 끝났다.

#정설분(正說分)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앞 6품은 관행을 각각 나타낸 것[別顯觀行]이요, 끝의 총지 일품은 의심을 통틀어 없애는 것[總遣疑情]이다.

이 별현은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무상법품(無相法品)으로서 무상관(無相觀)을 밝힌 것이요, 둘째는 무생행품(無生行品)으로서 무생행을 나타낸 것이며, 셋째는 본각리품(本覺利品)으로서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함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는 입실제품(入寶際品)으로서 허(虛)에서 실(實)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진성공품(眞性空品)으로서 모든 행이 참된 성품인 공(空)에서 나왔음을 밝힌 것이며, 여섯째는 여래장품(如來藏品)으로서 무량한 문[無量門]으로 여래장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문(門)으로 관(觀)과 행(行)이 두루 다 포괄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모든 망상이 무한한 과거로부터 유전(流轉)하게 된 것은 단지 형상에 집착하여 분별하는 병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흐름을 거슬러 근원에 돌아가고자 하면 먼저 모든 형상이 실체가 아님을 알게 하여 이를 없애야 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무상법(無相法)을 관해야 함을 밝힌 것이다.

비록 모든 형상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할지라도 관하는 마음을 남겨 두면 관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서 본각(本覺)에 계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없앨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둘째로 무생행(無生行)을 밝혔다.

이미 무생을 행하면 바야흐로 본각에 계합하게 되니, 이에 의지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본각의 이로움을 얻게 하기 때문에 셋째로 본각리(本覺利)의 문(門)을 밝혔다.

본각에 의지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면 중생은 허망함으로부터 실제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넷째로 실제에 들어감[入實際]을 밝혔다.

안으로의 행은 형상도 없고 일어남도 없으며, 밖으로의 교화는 본각의 이로움을 써서 실제에 들어가게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이로움으로 온갖 행이 다 갖추어지게 되는데, 이는 참된 성품에서 나와 모두 진정한 공에 순응하나니 다섯째로 참된 성품인 공[眞性空]을 밝혔다.

이 참된 성품에 의해서 온갖 행이 구비되어 여래장 일미의 근원[如來藏一味之源]에 들어가기 때문에 여섯째로 여래장(如來藏)을 밝혔다.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고 나면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 없다. 지어서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할 바도 없다. 그러므로 여섯 가지 길을 설하여 대승을 다 거두는 것이다.

한편 이 여섯 품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이른바 첫째 무상법품(無相法品)은 관의 대상이 되는 법[所觀法]을 보인 것인데, 그 법이란 이른바 일심 (一心)인 여래장의 체(體)이다.

둘째 무생행품(無生行品)은 관하는 자의 행[能觀行]을 밝힌 것인데, 이른바 6행(行)이라고 하는 무분별관(無分別觀)이다.

셋째 본각리품(本覺利品)은 일심(一心) 가운데 생멸문(生滅門)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로 입실제품(入實際品)은 일심 가운데 진여문(眞如門)을 나타낸 것이다.

다섯째 진성공품(眞性空品)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한꺼번에 떠나되 그 두 가지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여래장품(如來藏品)은 여러 가지 문을 거두어 들여 모두 일미임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이중(二重)의 6문(門)으로서 대승의 뜻을 남김없이 두루 포섭하였다.

그런데 이 6품(品)은 세 문으로 간추려질 수 있다. 즉 앞의 두 품[無相法品·無生行品]은 관(觀)과 행(行)의 시작과 끝을 포섭한 것이고, 다음의 두 품[本覺利品·入實際品]은 교화의 근본과 지말(枝末)을 밝힌 것이며, 마지막 두 품[眞性空品·如來藏品]은 원인을 포섭해서 결과를 이룬 것을 보인 것이다.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앞의 두 품은 형상을 버리고 근본에 돌아가는 것이고, 중간의 두 품은 근본으로부터 참된 행(行)을 일으키는 것이며, 마지막 두 품은 근본에 돌아가는 것과 근본으로부터 행을 일으키는 두 가지를 함께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둘씩 합쳐놓은 세 가지로써 대승(大乘)의 뜻을 모두 포섭한다.

이 6품은 또 두 가지 문(門)으로 요약된다. 형상과 생함이 모두 없어지는 것은 본각(本覺)의 이로움이요, 실제와 참된 공은 여래장이다.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앞의 문(세 가지 품)은 허망한 것을 버려서 바른 인(因)을 나타낸 것이고, 뒤의 문은 참된 것을 드러내어 과(果)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같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두 문으로 역시 대승을 두루 포섭한다.

이 6품을 또 오로지 일미(一味)로 볼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가? 형상과 일어남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고, 본각이라고 하지만 근본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고, 실제라고 하는 것도 그 테두리를 한정할 수 없으며, 참된 성품이라고 하여도 그 역시 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여래장의 성품인들 따로 있다고 할 것인가? 그러기에 「여래장품」에서 “이 식[是識]은 항상 적멸하고, 적멸하다는 생각마저도 적멸한 것이다”라고 했다. 「총지

품(總持品)」에서도 “제7식과 전5식이 발생하지 않고[七五不生], 제8식과 제6식이 적멸하며, 제9식의 상[九相]도 공해서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얻을 수 없는 이 일미(一味)가 이 경의 근본(宗)이며 요지가 된다. 다만 얻어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무슨 문이든지 열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무량한 뜻을 지닌 근본이 된다. 사실 일미(一味)이기는 하지만, 여섯 가지 문[六門]을 열어 놓는 까닭에 이 여섯에 의하여 과문(科文)을 나누어 해석하였다.먼저 품명에 대하여 해석하겠다. ‘무상’이라고 한 것은 무상관(無相觀)으로, 모든 관념[諸相]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다음에 ‘법(法)’이라고 한 것은 관찰할 법[所觀法]으로서, 일심법을 의미한다. ‘무상관’이란 것은 먼저 품(品)전체를 여섯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첫 분[第一分]의 뜻이며, ‘소관법’이란 뒤에 6문(門) 가운데 첫 문(第一門)의 법이다. 여기 첫 품에서는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내므로 ‘무상법품’이라고 부른다.

2. #무상법품(無相法品)

[經] 그때 존자[尊者:어떤 본에는 世尊으로 되어 있다]께서 삼매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論] 이 일품[無相法品]의 글을 세 부문으로 나누면, 첫째는 정에서 나오심을 밝히는 부분[出定分]이고, 다음은 설명을 일으키는 부분[起說分]이고, 끝으로 이익을 얻음을 밝히는 부분[得益分]이다. 처음과 끝 두 부분은 경전을 기술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서문이요, 둘째 부분이 본격적인 부처님의 말씀이다.

첫째 부분[初分]에서는 세 가지 성취를 나타낸다. 첫째는 설법의 때가 성취되었음을 밝히는 것인데 경에 ‘그 때[爾時]’라고 한 것이다. 둘째는 설법의 주인이 성취되었음을 드러내는데 경에 ‘존자(尊者)’라고 한 것이다. 다섯 가지에 원만히 통달하셔서 세상의 존경을 받는 분이며 매우 심오한 법을 이치에 맞도록 설하시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재함을 성취했음[自在成就]을 밝힌 것이니 경에 ‘삼매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 것이다. 여래께서 선정에 들어 계실 때는 아무것도 놀라게 하거나 깨울 수 없고, 선정에 머무름과 나오심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經]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法相)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다.”

[論] 이 이하는 (「무상법품」을 세 부문으로 나눈 가운데) 둘째로 본격적인 부처님의 말씀이 나오는 부분이니, 이 가운데 둘이 있다. 첫째는 장행(長行)이고, 둘째는 중송(重頌)이다. 장행 중에도 두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간략히 표방하는 부분[略標分]이요, 둘째는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說分]이다. 이 약표분(略標分) 중에서도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하나는 무상관(無相觀)을 표시한 것이요, 뒤의 것은 소관법(所觀法)을 표시한 것이다. 이 무상관을 표시한 가운데에도 두 구(句)가 있으니 앞에는 여래 스스로가 무상관에 드심을 표시한 것이고, 뒤에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무상관에 들게 한 것을 표시한다. 스스로 들어가심이란, 경에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이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諸佛智地]’란, 앞서 들어간 것과 같은 금강삼매에 상응하는 지혜를 뜻한다. 모든 공덕법(功德法)에 머무르는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진실한 법상에 들어갔다[入實法相]’고 한 이유는, 부처님의 이러한 지혜가 모든 형상을 다 깨뜨려 모든 법의 실상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결정한 성품[決定性]’이라고 한 이유는, 실다운 법상(法相)을 부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있거나 없거나를 막론하고 그 성품이 그렇기[自爾] 때문이다.

‘때문이며[故]’라는 말이 이어진 것은, ‘결정한 성품’이라는 말이 그 윗구절의 이유를 해석해주기 때문이다. 결정한 성품이 아니라면 그것은 실상이 될 수 없을 것이므로. (‘때문이며[故]’는) 또 윗구절을 연결하면서 아랫구절을 성립시킨다. 여래 스스로가 진실한 법상[實法相]에 들어가 계시므로, 남들에게도 무상(無相)의 이익을 얻게 할 수 있는 것이다.

[經] “방편과 신통으로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無相利]을 얻게 하신다.”

[論] 이는 두 번째 구절로서 다른 사람에게도 무상관(無相觀)에 들어가게 하심을 말한 것이다.

‘방편(方便)’이란 팔상방편(八相方便)이니,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내려오신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열반에 드신 것까지를 말한다.

‘신통(神通)’이란 6신통(神通)을 말하는데, 즉 3륜(輪)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을 얻게 하신다[皆無相利]’란 이와 같은 8상과 6신통이 모두 다 부처님께서 스스로 실상에 드심으로부터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상(無相)의 이익을 얻게끔 하기 때문이다. 이상 무상관(無相觀)을 표하여 마친다.

[經]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모든 2승(乘)들은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부처님과 보살만이 이를 알 수 있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인 소관법(所觀法)을 표시한 것인데 두 구절로 나뉜다. 하나는 소관법의 심오함을 직접 표시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이 심오한 법을 설하신 것이다.

‘일각의 뚜렷한 뜻[一覺了義]’이란, 일심(一心)·본각(本覺)·여래장(如來藏)을 뜻한다. 이보다 더 심오한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려움[難解]’이란 그 뜻이 매우 심오하여 2승(乘)들은 알거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기 어려움[難人]’이란 그 바탕이 매우 심오하여 부처님과 보살이라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뒤의 구절로써 앞 구절을 풀이하건대, 첫부분에서 ‘부처님의 지혜는 진실한 법상에 들어가 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일심·본각·여래장법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적멸(寂滅)을 일심(一心)이라고 하고, 일심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글에서 진실한 법상[實法相]이라고 한 것은 적멸을 의미하는 것이요, 일각의 뚜렷한 뜻이라고 한 것은 일심여래장(一心如來藏)을 뜻한다. 『법화론(法華論)』에서는 “모든 불 ·여래께서는 그 법(法)의 궁극적인 실상[究竟實相]을 알고 있다. 실상이란 여래장 법신(法身)의 체를 말하니,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경에서 ‘일각(一覺)’이라고 한 것은 모든 법이 오직 일심이요, 모든 중생이 곧 하나인 본각이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일각이라고 한 것이다. 아래에서 풀이를 통해 다시 분별하겠다.

[經] “제도할 만한 중생이면 모두 일미(一味)를 설한다.”

[論]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심오한 법을 말했음을 밝힌 것이다.

‘제도할 만한 중생[可度衆生]’이란, 여래께서 교화해야 할 중생은 모두가 일심(一心)이 유전(流轉)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모두 일미를 설함[皆說一味]’이란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교법(敎法)이 그들을 일각(一覺)의 맛[味]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본래 일각이었지만 다만 무명(無明) 때문에 꿈 속에서 유전하다가 모두 여래의 일미의 말씀을 듣고 마침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가 없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마음의 근원에 돌아왔을 때에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일미(一味)라고 하나니, 이것이 바로 일승(一乘)이다. 이상 첫 번째인 약표문(略標文)을 마친다.

[經] 그 때 해탈보살(解脫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광설분(廣說分)인데 이 가운데도 둘이 있다. 먼저는 설법을 청한 것이고 다음은 설법이다. 먼저 청함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때와 사람의 거동에 대한 것이요, 다음에는 말 꺼낸 것을 밝힌 것이다.

사람의 거동을 서술하는 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어느 때 누가 말했는가를 밝힌다[依時表人]. ‘해탈보살이란’ 모든 중생들을 똑같이 해탈케 하기 때문에 그 묻는 사람에 기탁해서 설해 주신 법[所說法]이 무엇인가를 표시한 것이다. 다음에는 예의에 관해서 말하였으니, 경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라고 한 대목이다.

[經] “존자여, 만약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는 정법(正法)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상법(像法)이 세상에 머무는 말법(末法)의 시대가 되어 5탁(濁) 중생이 가지가지 많은 악업으로 삼계에 윤회하면서 거기서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論] 아래는 둘째 부분으로, 말을 꺼내서 청(請)한 것이다. 거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어느 때를 위해서인가?’하는 시절(時節)을 말하고, 다음에 그 시대의 그들을 위해서 말씀해 주시기를 청한 것이다.

첫 번째로 시절을 든 대목 중에 ‘상법이 세상에 머무는 말법의 시대가 되었을 때’란, 이에 앞서 설한 자세한 경[廣說經]은 정법시대에 이익을 주기 위함이었는데, 지금 이 경은 상법시대를 교화하기 위해 설한다는 것이다. 시대의 두텁고 엷음에 따라 베풀어주는 교리[敎]가 다르기 때문이다.

[經] “부디 부처님의 자비로 후세의 중생을 위하여 일미(一味)요, 결정된 진실을 널리 말씀하시어 저 중생들을 똑같이 해탈하게 하소서.”

[論] 이것은 두 번째로, 널리 가르침 펴주기를 본격적으로 청한 것이다.

‘일미를 설해주십사[宣說一味]’한 것은 일각의 뚜렷한 뜻[一覺了義]의 맛[味]을 설해 주기를 청한 것이요, ‘결정된 진실[決定眞實]’이란 참된 법상[實法相]에 들어가는 관법(觀法)을 설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중생들을 똑같이 해탈하게 하소서[今彼衆生等同解脫]’란 저 상법(像法)의 말세 중생들에게도 똑같은 일미(一味)로써 마침내 해탈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건대 교(敎)에는 다음과 같은 네 구절이 있다고 하겠다.

첫째, 바로 정법(正法)시대의 중생을 교화하고 겸해서 후대의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는 교(敎)이니 이 경 앞에서 설한 경[廣說經]을 말한다.

둘째, 바로 상법(像法)시대의 중생을 교화하고 겸해서 그 전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주는 교(敎)이니 이 경 등을 말한다.

셋째, 전후(前後) 시대에 걸쳐 통틀어 교화하는 교(敎)이니 이밖에 다른 경들을 말한다.

넷째, 전후를 이롭게 하지 못하는 교(敎)이니 이상의 언급에서 제외된 가르침을 말한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나에게 세간을 벗어나는 원인[因]을 물어 중생을 교화하고, 그 중생들에게 세간을 벗어난 과(果)를 얻게 하려고 하니, 이 불가사의한 하나의 큰 일[一大事]은 네가 대자(大慈)와 대비(大悲)를 쓰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설명하지 않는다면 곧 간탐(慳貪)에 떨어질 터이니 너희들은 일심(一心)으로 자세히 들어라. 너희를 위해 설명해주겠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부분으로 여래께서 중생을 위해 설하신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질문을 찬양하시고 설하기를 허락하심이요, 다음은 청한 질문에 대하여 가르침을 펴신 것이다.

물음을 찬탄한 가운데 ‘세간을 벗어나는 원인’이란 실상(實相)에 들어가는 관(觀)을 말한다.

‘세간을 벗어난 결과’란 한 맛의 해탈[一味解脫]을 말한다.

‘이 하나의 큰 일’이란 그 이상 없다는[無上] 뜻이며 동일하다[同]는 뜻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란 언설(言說)을 떠났고, 사려(思慮)를 끊었기 때문이다. 『법화경』에서는 “제불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법화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일대사란 네 가지 뜻에 의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그 이상 없다[無上]는 뜻이다. 오직 여래의 일체지지(一切智智)를 빼고는 다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의 지견(知見)을 열어[開] 중생들이 그것을 알고서 청정함을 얻게 하려고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였다. ‘불지견(佛知見)’이란 여래께서 증득하신 것이니 여실한 지혜[如實智]로 그 뜻을 알기 때문이다.

둘째는 같다[同]는 뜻이다. 모든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보여 주고자[示] 세간에 출현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법신(法身)이 평등하다는 것은 불성·법신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알지 못한다[不知]는 뜻이다. 모든 성문과 벽지불 등은 그 진실한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곳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궁극의 유일한 불승(佛乘)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자[悟]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였다.

넷째로 불퇴전지(不退轉地)를 증득하게 한다는 뜻이다. 헤아릴 수 없는 지혜의 업(業)을 주려고 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知見)에 들게[入] 하려고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였다.”

지금 이 글 가운데에도 일대사(一大事)에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그 이상 없다[無上]는 뜻이니 위의 문장에 언급된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지혜의 경지[智地]는 실다운 법상[實法相]에 든 까닭이다.

둘째는 같다[同]는 뜻이니 경에서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了義]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셋째는 알지 못한다[不知]는 뜻이니 경에 말씀하신 것과 같이, 모든 2승(乘) 등이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는 증득케 한다[令證]는 뜻이니 제도할 만한 중생에게는 모두 일미 (一味)를 설하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질문에 대한 찬탄을 끝낸다. 다음에는 설하기를 허락하시는 부분인데, 여기에도 두 구가 있다. 첫 구는 설하지 않으면 잘못이 있게 됨을 역으로 드러낸 것이요, 다음 구는 잘 들으라며 설법 허락하심을 하기를 예사대로 밝힌 것이다.

[經] “선남자야,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교화한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 교화함이 없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아야 그 교화가 큰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부처님의 설법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무상관(無相觀)을 밝히고 나서 그 이익[無相利]을 자세히 설명하고, 다음에 일각의 마음[一覺心]을 드러내고 나서 그 일각의 뜻[一覺義]을 더 광범하게 설명한다.

무상관을 밝힌 가운데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관행(觀行)의 특성[相]을 직접적으로 설한 부분이요, 두 번째는 여러 가지 의심과 논란을 반복해서 풀어준 것이다. 첫 번째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방편관(方便觀)을 다루고, 다음은 정관(正觀)을 밝혔다. 방편관에 네 구가 있으니 맨 첫 구는 교화하는 자[能化]를 다시 들었고, 끝의 한 구는 교화가 큰 것을 찬탄하였으며, 중간의 두 구는 관(觀)의 특성을 밝혔다.

‘교화한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란 처음 관을 닦을 때에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형상을 파하라는 것이다. 즉 허깨비로 나타난 형상[幻化相]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교화함이 없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아야’란 교화한다는 생각[化相]은 이미 깨뜨렸으므로 다음에는 공상(空相)을 버리라는 것이다. 즉 교화함이 없다는 공(空)에 대해서도 역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어째서 그런가? 중생은 본래 마음이 형상[相]을 떠나 있음을 잘 알지 못하고 두루 온갖 형상을 다 취하여 생각을 움직여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먼저 모든 형상을 깨뜨리므로써 형상 취하는 마음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허깨비로 만들어진 유상(有相)은 이미 깨뜨렸으나, 아직 허깨비가 없다는 공성(空性)에 집착하여 그 공성을 취하기 때문에 공(空)에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므로 이번에는 무화공성(無化空性)까지도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라야 공을 취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필연적으로 양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無二中道]를 만나 부처님께서 들어가신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들게된다. 이렇게 교화(敎化)하기 때문에 큰 교화가 된다.

[문] 이러한 방편관은 어떤 지위[位]에 해당하는가?

[답] 우러러 믿고 닦는 경우에는 10신(信)에 해당하고, 그와 비슷한 관[相似觀]을 닦는 경우에는 30심(心)에 해당한다. 그 순수한 수행[純修]을 논한다면 4선근(善根)에 해당하니 장차 초지(初地)에 들어가게 될 가까운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문] 다른 곳에서는 3무성관(無性觀)이 있다고 설하였는데 왜 여기서는 두 가지 없음[二無:無相과 無生]만을 설하는가?

[답] 무상(無相)과 무생(無生)은 합하여 한 변[一邊]이 되니, 버려야 할 상(相)과 생(生)이 똑같이 유(有)이기 때문이다. 또 이 두 가지 관[二觀]에는 모두 심사(尋思)가 있지만 무성(無性)을 버릴 때에는 심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셋으로) 벌리거나 (둘로) 합하거나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제까지 방편관을 설하였고, 다음에는 정관을 밝히겠다.

[經]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心:法執)과 아(我:我執)를 떠나게 해야 하는 것이니, 모든 심(心)과 아(我)는 본래 공적한 것이다. 만약 공(空)한 마음을 얻으면 마음이 환상[幻]을 지어내거나 변화[化]하지 않을 것이요, 환상과 변화가 없으면 생멸 없음[無生]을 얻을 것이니, 생멸 없는 마음은 환화(幻化)가 없는 그곳에 있다.”

[論] 여기서는 정관(正觀)을 밝힌 것으로 바로 둘이 없는 모양을 관하는 것을 설명했다.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둘을 떠나게 하는 까닭이다. 소취를 떠난다는 것은 모든 인(人)·법(法)의 관념을 떠난다는 뜻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보냈기 때문에 떠났다[遣離]는 것이고, 둘은 없기 때문에 떠났다[泯離]는 것이다. ‘견리(遣離)’란 이미 취한 관념을 이제 없애 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과 아를

떠나게 해야 한다’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민리(泯離)’란 이미 취한 관념이 본래 공(空)한 까닭에 그렇게 말한다. ‘모든 심과 아는 본래 공적한 것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심아(心我)’라고 한 데서, 사람[人]을 아(我)라 하고, 법(法)을 심(心)이라고 한다. 심은 모든 법이 의지하는 주(主)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법 등이 본래 공하다는 사실을 통달하게 될 때 앞에서 취했던 관념이 일어나지 않으니, 그러므로 두 가지 떠남[離:견리와 민리]이 동시에 다 이루어진다.

소취(所取)를 떠나는 데 대해서는 이미 말하였다.

능취(能取)를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능취의 분별을 떠난다는 뜻으로서,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본래 떠났다[本離]는 뜻이요, 둘째는 비로소 떠났다[始離]는 뜻이다.

‘본리(本離)’란 심(心)과 아(我)가 본래 공함을 통달했을 때에 바로 본각(本覺)의 공적한 마음을 얻는데, 이 공적한 마음이 본래 능취를 떠났다는 것이다. 능취를 떠났으므로 본래 환화(幻化)하지 않나니, ‘만약 공(空)한 마음을 얻으면 마음이 환상[幻]을 지어내거나 변화[化]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환화하지 않는 이유는 헛것[虛]이거나 거짓[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리(始離)’란 본각인 공적심(空寂心)을 얻었을 때 능취의 분별이 다시 생길 수가 없고, 그 마음을 얻는 대로 환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환상과 변화가 없으면 생멸 없음[無生]을 얻을 것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무생(無生)의 마음을 처음으로 얻어서 본래 공적하고 변화 없는 이치에 합하기 때문에 ‘생멸 없는 마음은 환화(幻化)가 없는 그곳에 있다[在]’고 하였다. 심(心)과 경(境)을 가정하여 말하는 까닭에 ‘있다[在] ’는 말을 빌려 쓴 것이다.

능취를 비로소 떠났다[始離能取]는 것은 시각(始覺)을 뜻하고, 본래 능취를 떠난 공한 마음[本離空心]이란 본각(本覺)을 뜻한다. 뜻은 비록 두 가지가 있지만 섞여 하나의 각[一覺]을 이루는 것으로서 능소(能所)를 함께 떠났고 신구(新舊)를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시각은 곧 본각과 같은 것이니, 이 각(覺)은 생겨나거나 없어지거나[生滅] 시작하거나 끝나거나[始終] 하는 모습[相]을 영영 떠나 있으므로, 처음의 초지(初地)로부터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 다만 부분적으로 증득했느냐[分], 완전히 증득했느냐[滿]의 차이가 있을 따름임을 알아야 한다.” 『십지론(十地論)』의 본분(本分) 가운데서도 “본각 자체는 본래 공(空)이나 유(有)의 둘이 아니며 다함이 없는 것……(이하 생략)”이라고 설명하였다.

또 이 일각(一覺)에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뜻이 있으니 본각에는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진수(眞修)라는 설이 도리에 맞는 것이며, 시각에는 닦아서 이룬다는 뜻이 있으므로 신수(新修)라는 말에도 도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협한 고집에 사로잡히면 미진함이 남는다.

또 『기신론』과 『십지론』 인용은 여기서 그만두고 본문으로 돌아가 풀이하기로 한다. 이상은 무상관(無相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었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중생의 마음은 성품이 본래 공적(空寂)하고, 공적한 마음은 체 (體)에 색상(色相)이 없는데 어떻게 닦아 익혀야 공(空)한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의 자비로 저희를 위하여 부디 말씀하여 주옵소서.”

[論] 여기서부터는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의심을 풀어준 대목이다. 네 개의 문답을 통해 차례로 의심을 풀어주었는데 그 첫 질문 가운데 질문한 뜻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의 심성은 본래 공적(空寂)한데 망념(妄念)을 움직여 시작을 알 수 없는 때[無始]로부터 이래로 유전하니, 어떻게 닦아야 본심(本心)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요, 둘째는 공적한 마음은 그 바탕에 색(色)도 상(相)도 없으나 중생이 본래부터 항상 상이 있다고 집착하니 어떻

게 무(無)를 익혀서 공적한 마음을 얻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닦아 익혀야 공한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문] 여기에서 말한 중생의 마음이란 필시 6식(識) 등 생멸하는 마음일 터인데,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일심(一心)인 본각(本覺)을 알 수가 있는가?

[답] 『기신론』에 말하기를 “대승에 믿음을 일으키는 법이 있으니 그것이 중생심(衆生心)이다. 일심법(一心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하고 자세히 설명하셨다. 또 경(『능가경』)에 말씀하시기를 “적멸(寂滅)이란 일심(一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지금 이 글에서는 ‘공적한 마음은 그 바탕에 색도 상도 없는데’라고 하였으니, 말은 차이가 있으나 뜻은 같다.

‘색이 없다[無色]’고 한 이유는 형태나 색깔 등으로 나타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요, ‘상이 없다[無相]’고 한 이유는 생겨나거나 소멸되는 등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드러낸 문장이다. 위에서 중생의 마음이라고 한 것은 우선 심생멸문(心生滅門)을 든 것이다. 즉 생멸심을 가지고 진여문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품이 본래 공적(空寂)하고’라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門)은 그 체가 둘이 아니니 그러므로 모두 일심법(一心法)일 따름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마음의 온갖 모습[相]은 본래부터 근본[本]이 없으며 근본 자리[本處]가 본래 없으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 마음이 생하는 일이 없으면 그대로가 공적에 든 것이요, 공적한 마음 바탕에서는 마음의 공함을 증득한다. 선남자야, 모습 없는 마음은 무심(無心)이며 무아(無我)이니, 모든 법(法)의 모습도 이와 같으니라.”

[論] 이 답은 정답(正答)과 결답(決答) 두 가지로 나뉜다.

보살이란 해탈보살을 부르는 말이다. 아래의 글에서 부르는 말도 모두 똑 같다.

‘마음의 온갖 모습[一切心相]’이란 8식(識)이 념(念)을 일으킨 것으로서, 심(心)과 심소(心所)에 상응하는 차별된 온갖 행(行)과 상(相)을 뜻한다. 행이든 상이든 모두 네 가지 상[四相]이 있기 때문에 일체심상이라고 하였다.

‘본래부터 근본이 없으며 근본자리가 본래 없으므로[本來無本 本無本處]’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모든 심상(心相)은 종자(種子)를 근본[本]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근본 종자를 찾아보아도 영영 찾을 수가 없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이 현재에 있는 것인가, 과거에 있는 것인가? 만약 현재에 있다고 한다면 결과[果]와 같이 있을 터이니, 그렇다면 소[牛]의 두 뿔과 같이 본(本)과 말(末)의 차이가 없게 된다. 반면 과거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만들어낸 원인[作因]이 없어졌을 터이니, 그렇다면 토끼 뿔[兎角]처럼 체성(體性)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는 본래 그러한 것이므로 ‘본래부터 근본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 생멸심(生滅心)이 생겨나려면 반드시 근본 자리에 의지해야 하는데 근본 자리가 이미 없다면 생길 여지가 없다. ‘근본 자리[本處]’란 구유근(俱有根;五色根·第六識·第七識·第八識)을 말한다. 다섯 가지 색근[五色根]은 그 자체가 벌써 색법(色法)이므로 방위나 장소[方所] 여하에 불구하고 모두 얻어지지 않으며, 나머지 세 가지 소의(所依)는 모두 무색법(無色法)이므로 시간의 여하에 불구하고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근본 자리가 본래 없다’

는 말을 붙인 것이니, 이는 애초부터 근본 자리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근본 종자도 없고 근본 자리도 없다면 심상(心相)이 본래 생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이와 같이 관찰하되 생함을 얻을 수 없을 때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能觀心]도 생기지 않으니, 이 때 본래 공적한 데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다. 들어갈 바의 공적이란 일심(一心)을 말하는데, 일체가 이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지(地)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그대로 공적에 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적한 마음자리[空寂心地]’라고 한 이유는,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유전하면서 항상 모습이 있다[有相]고 집착하지만 그러나 이 문(門)에 의해 관찰하면 본래 공(空)한 마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마음의 공함을 증득한다’고 한 것이다. 마음이 공하다[心空]는 것과 공한 마음[空心]이라는 것은 말은 서로 다르지만 좌우는 있으나 모두 일심본각(一心本覺)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상은 물은 뜻에 정곡으로 답한 부분[正答]이고, 앞으로는 결론을

맺으면서 답하는 부분[結答]이다.‘모습이 없는 마음[無相之心]’이란 일심(一心)의 체(體)를 가리킨다.

‘무심무아(無心無我)’란 앞에서 ‘공적(空寂)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을 다시 결론짓는 말이다. 즉 모습 없는 마음은 심(心)·아(我)의 두 가지 모습을 떠났다는 것이다.

‘모든 법의 모습도 이와 같다[一切法相亦如是]’란 공적에 대하여 거듭 매듭짓는 구절이다. 이 심·아의 두 가지 모습만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 밖의 유위(有爲)·무위(無爲), 나아가 유상(有相)·무상(無相) 등의 상(相)도 무상심(無相心)에서는 떠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일체 중생 가운데 아(我)에 사로잡힌 자와 심(心)에 사로잡힌 자를 무슨 법으로 깨닫게 하여, 그 중생들을 이 속박[縛]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문답이다. 앞에 첫 번째 질문 중에서는 모양이 있다[有相]고 보는 견해를 깨뜨리는 문을 전체적으로 밝혔고, 지금 이 문답에서는 두 가지 결박을 떠나는 문을 개별적으로 밝혔다. 두 가지 병을 따로따로 들어 치료할 약을 물은 것이다.

‘아(我)에 사로잡힌 자’란 인집(人執)의 병이요, ‘심(心)에 사로잡힌 자’란 법집(法執)의 병이다.

‘이 속박[縛]’이란 따로따로 말하자면 인집(人執)은 추중박(麤重縛)이요, 법집(法執)은 상박(相縛)이지만, 통틀어 말하자면 두 가지 집(執)에 모두 다 추중박과 상박이 있다. 또 이 두 가지 집(執)에 모두 두 가지 박이 있으니, 그것을 상응박(相應縛)과 능연박(能緣縛)이라고 한다. 이 내용은 2장장(障章)에서 이미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인집(人執)을 다스리고 나중에 법집(法執)을 다스린다. 인집을 다스리는 가운데에도 처음에는 총괄적으로 하고 나중에는 개별적으로 한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아집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게 하라.”

[論] 이것은 총괄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는 데에 크게는 두 가지 문(門)이 있다. 첫째는 만든 자가 없이 연에 의해 생김[無作緣生]을 관하여 만든 자가 있다는 집착[作者執]을 고치는 것이니 ‘이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항상성이 없이 연에 의해 생김[無常緣生]을 관하여 항상성에 대한 집착[常住執]을 고치는 것이니 ‘이것이 생겼으므로 이것이 생긴다’라고 말하는 경우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고집이 있게 된 이래로 이 두 가지[作者執·常住執]가 근본이 되는데, 근본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모든 지말적인 것들도 따라서 없어진다.

[經] “열두 가지 인연은 본래 인과(因果)에서 생기며, 인과는 마음의 작용[心行]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마음이란 있는 것이 아니니, 하물며 몸이 있을 것인가?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며, 반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에게는 그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어라.”

[論] 이 부분은 인집(人執)을 개별적으로 다스린 것이다. 개별적으로 다스린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비를 통해 논파하는 것[況治]이요, 둘째는 추적을 통해 논파하는 것[逐治]이다. 황치(況治) 가운데서 ‘본래 인과에서 생기며’라는 구절은, 총괄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이 나오는데,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다만 인(因)과 과(果)뿐이다. 인(因)으로부터 두 가지[無明·行]와 세 가지[愛·取·有]가 나오고, 과(果)로부터 다섯 가지(識·名

色·6入·觸·受)와 두 가지(生·老死)가 나온다. 또 인(因)으로부터 10지(十支:앞의 열 가지)가 나오고 과(果)로 부터 2지(二支:뒤의 두 가지)가 설명된다. 그러므로 각 지(支)들이 따라나오는 근본은 다만 인과뿐이다.‘인과는 마음의 작용[心行]에서 일어난다[因果所起興於心行]라고 한 것은, 인과가 일어나는 데 마음의 작용이 근본이 된다는 말이다. 마음이 인(因)을 만들어 마음이 과(果)를 받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있는 것이 아니니, 하물며 몸이 있을 것인가?[心尙不有何況有身]’라고 한 것은, 위에서 말한 것에 의해 도리를 관찰하면 마음이란 것이 존립할 수 없는데 하물며 마음으로 이루어진 색신(色身)이 어떻게 있겠느냐는 뜻이다. 몸과 마음이 없는데, 하물며 어찌 나의 존재가 있겠는가? 또 마음이 있지 않으므로 인과 역시 공(空)하다. 인과도 공하거늘 어찌 나라는 존재가 있겠는가? 또 인과가 공하기 때문에 12지(支)도 공하다. 그러니 어찌 만드

는 자[作者]와 받는 자[受者] 등이 있겠는가? 경에 ‘보살이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여도 허공과 같아서 다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씀이다. 여기까지가 대비를 통해 논파하는[況破:況治] 부분이다.그러면 추적을 통한 논파[逐治]란 어떤 것인가.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를 없애주며[若有我者令滅有見]’라는 구절이 앞의 황파를 다시 거론하면서 내가 존재한다는 집착을 없애준 것이었다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없다는 견해를 없애주어라[無我者令滅無見]’한 구절은, 무아(無我)의 병까지도 추적해서 없애주는 것으로서, 이 구절이 바로 축파에 해당한다. 어째서 그렇게 하는가? 앞서 아집을 깨뜨려 외도들의 병[外道病]을 여의었는데 이번에는 무아라는 데 집착하여 2승의 병[ 乘病]에 걸렸으므로 이제 그 무(無)에 집착하는 견해를 추적하여 깨뜨린 것이다. 내가 본래 있지 않은데, 어찌 ‘내가 없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총괄적, 개별적인 두 가지 관(觀)으로 아집(我執) 없애는 부분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經]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어떤 본에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기는 성품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지는 성품을 없애주어라’라고 되어 있다]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實際]에 들어간다.”

[論] 이 아래는 마음이 있다는 견해[存心見]를 논파하는 부분인데 이 중에 두 부분이 있다. 즉 정곡으로 논파한 것[正治]과 거듭 해석한 것[重釋]이다. 2승(乘)을 닦는 사람들은 법집(法執)에 마음을 두어[存心], 생멸하는 마음이나 무상(無常)한 마음이 있다고 헤아린다. 그러므로 생멸을 논파하고, 마음이 있다는 견해를 없애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생긴다는 생각 때문에 병든 이가 있으면 앞에 있던 것이 없어졌다는 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왜냐하면 없어졌다는 저 관념에 의거하여 지금 생긴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또 뒤에 없어지는 것을 보고 현재의 마음이 있었다고 집착하는 경우에는, 그 마음이 설사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토끼 뿔과 같은 것이므로 이와 같은 견해를 깨뜨려 생긴다는 관념을 없애야 할 것이다. 생긴 일이 없는데 없어지는 일이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에 들어간다[滅是見性 卽入實際]’한 것은, 없어지는 성품 보는 것을 깨뜨리면 결코 생겨난다는 견해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생겨나는 성품 보는 것을 깨뜨리면 결코 없어진다는 견해를 취하지도 않을 것이니, 생멸을 취하지 않으면 마음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經] “어째서 그런가? 본래 생겨난 것은 없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은[어떤 본에는 ‘본래 없어지는 것은’ 이라고 되어 있다] 생겨나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으니 생겨남이 없고, 생겨나지 않으니 없어짐이 없다. 모든 법상(法相)도 마찬가지다.”

[論] 이 부분은 거듭 해석한 것[重釋]이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생긴다고 보는 자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滅性]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보는 자에게는 생긴다는 성품[心性]을 없애주느냐 하는 물음을 ‘어째서 그런가?[何以故]’라고 표현한 것이다.

‘본래 생겨난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本生不滅]’한 뜻은 무엇인가? 전에 생긴 마음을 찾아도 영영 얻을 수 없다. 얻을 수가 없는데 무엇을 없앤다는 말인가? 이와 같이 앞의 마음이 없어졌다는 생각을 두지 않으면 지금의 마음이 생겼다고 하는 생각에 집착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없어지지 않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不滅不生]’고 하였다. 이는 ‘없어진다는 관념을 없애준다[令滅滅性]’고 한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다음에 ‘없어지지 않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不滅不生]’고 한 것은, 앞에서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 뜻을 받아서 지금의 마음이 생겨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렇게 지금의 마음이 생하는 성품을 얻을 수가 없다면, 이 마음이 없어진다는 성품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겨나지 않으니 없어짐이 없다[不生不滅]’고 하였다. 이는 ‘생겨난다는 관념을 없애준다[令滅生性]’고 한 이유를 풀이한 것이다.

마음 법[心法]이 없어지거나 생기는 일이 없듯이, 그 밖의 모든 법도 이와 똑같이 관하기 때문에 ‘모든 법상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이다.

[문] 마음이 생긴다고 잘못 생각하면 생긴다는 이 견해만 정곡으로 깨뜨릴 것이지, 그 전에 생긴 마음[前心]이 없어졌다는 생각까지 깨뜨릴 필요가 있는가?

[답] 지금 생긴 마음은 현재 나타나 있는 것이라 깨뜨리기가 쉽지 않지만, 전심(前心)은 이미 지나간 것이라 그 공(空)함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으므로, 먼저 쉬운 것을 깨뜨려서 어려움을 없애주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로 ‘지금 생한다’는 관념을 깨뜨리고, 이것으로 ‘나중에 멸한다’는 집착을 놓아주니, 이야말로 의왕(醫王)의 뛰어난 의술이라고나 할까?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법이 생겨남을 보는 중생이 있다면 어떤 견해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까?”[어떤 본에는 “법이 없어짐을 보는 중생이 있다면 어떤 견해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까?(見法滅時 令滅何見)]”라는 여덟 글자가 더 있다.]

[論] 이 아래는 세 번째 문답이다. 앞의 문답에서는 없애야 할 그릇된 견해의 병에 관하여 밝혔고, 여기 문답에서는 그릇된 견해의 병을 없애주는 약이 무엇인가를 밝힌다.

또 앞에서는 생겨남[生]과 없어짐[滅]이라는 양 극단의 견해를 깨뜨렸고, 여기에서는 있음[有]과 없음[無]의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깨뜨린다.

지금 이렇게 묻는 의도는 관행(觀行)하는 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닦다가 법이 생겨남을 본다면 어떠한 견해를 없애야 하느냐는 것이다. ‘어떠한 견해를 없애야 하느냐’는 문장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묻는 것인데, 우선 한 쪽[生]만을 들어서 멸(滅)을 관하는 것까지도 같이 설명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법이 생기는 것을 보는 중생에게는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고, 법이 없어지는 것을 보는 중생에게는 있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어라. 이러한 견해들을 없애기만 하면 법이 진짜 없음[眞無]을 깨달아 결정한 성품[決定性]에 들고, 그렇게 되면 생겨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論] ‘법이 생기는 것을 본다[見法生時]’는 것은, 세속의 법이 인과 연에 의해 생기는 것을 바로 관찰할 때를 말한다. 이 때에는 공(空)에 집착하는 견해를 버려야 하기 때문에 ‘없다는 견해를 없애주라[令滅無見]’고 하였다.

‘법이 없어지는 것을 본다[見法滅時]’는 것은 세속의 법이 본래 멸(滅)해 있음을 바로 관찰할 때를 말한다. 이 때에는 있음에 집착하는 견해를 버려야 하므로 ‘있다는 견해를 없애주어야 한다[令滅有見]’고 하였다.

이 중에 무슨 이유로 ‘없애라[令滅]’라고 했느냐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관(觀)하는 자로 하여금 멸(滅)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관행자(觀行者)가 법이 생겼다고 볼 때 없다는 견해만을 떠나지만 생(生)을 남겨두는 것이 아니고, 또 적멸(寂滅)을 관할 때에는 있다는 견해만을 떠나지만 적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데 이 말의 의도가 있다. 어째서 그런가? 생겨남이 있다고 하자니 생은 본래 적멸(寂滅)이라 하고, 없어짐을 취하려고 하자니 멸이 곧 생기(生起)’라는 것이다. 아래와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인연으로 생긴 것이란

멸의 뜻이지 생의 뜻이 아니며

모든 생멸을 멸했다고 함은

생의 뜻이지 멸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무(有無)의 두 치우침[二邊]을 여의었으면서 그렇다고 중간에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무(無)를 떠나 유(有)를 집착[取]하거나 유(有)를 파하고 공(空)을 집착한다면 이는 거짓 공[妄空]이요, 진짜 무[眞無]는 아니다. 여기서는 유를 떠났으나 공도 남겨두지 않았으니, 이래야만 모든 법이 진짜 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법이 진짜 없음[眞無]을 깨달아’라고 하였다. ‘결정한 성품[決定性]’이란 앞에서 설명한대로다. 진공(眞空)을 얻

었을 때 마음이 생하지 않음을 관찰하여 있다, 없다하는 마음을 멀리 떠났으므로 ‘생겨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決定無生]’라고 하였다.[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저 중생들을 무생(無生)에 머물게 하면 이것이 곧 무생이나이까?”

[論] 이 아래는 네 번째 문답이다. 앞의 문답에서는 두 가지 치우침을 떠난 참된 관행[眞觀]을 밝혔다면, 여기서는 (무생에) 머문다는 생각 내는 것[生住]을 떠나지 못한 거짓 이해[妄解]를 밝혔다.

공부가 덜된 채로 관행을 닦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생각과 말로 분별하기를 ‘법(法)이 생(生)하지 않음을 관하여 산란(散亂)한 마음을 거두어들여 무생(無生)의 경계에 머물게 되었다’고 여기고 ‘이것이 무생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나중에 선정(禪定)에서 나올 때 증상만(增上慢)을 일으켜 ‘이미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병을 없애주기 위해 병을 들어서 ‘무생에 머물게 하면 이것이 무생입니까?’라고 물었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생에 머문다면 그것은 생이다. 왜냐하면 무생에도 머무름이 없어야 비로소 그것이 무생이기 때문이다.”

[論] 답에 두 가지가 있으니 간략하게 대답한 것[略答]과 거듭 자세히 설명한 것[重詳]이다. 간략하게 대답한 두 구절 가운데 위의 구는 그것이 생임을 자연스럽게 밝혔으니, 무생의 경지에 머문다는 것이 바로 분별심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 구는 거꾸로 무생을 풀이한 것이다. 만약 마음이 무생의 경지에도 머무름이 없으면 모든 분별을 여의게 되니, 이것이 무생인(無生忍)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있으면 그것은 무생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뒤집어서 해석하였다. 간략한 대답은 이 문장으로 마친다.

[經] “보살아, 무생을 생(生)한다면, 생을 가지고 생을 멸하는 것이다.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 본생(本生)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며, 그 공적함이 머무는 곳 없고 마음이 머무는 곳 없어야 이것이 무생(無生)이다.”

[論] 이것은 (답 중에서) 거듭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생(生)에 대한 자세한 해석이고, 나중은 무생에 대한 자세한 해석이다. 머무는 마음이 있어 무생의 경지에 그것이 생기면, 이것은 생멸로써 그 경계를 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비록 경계가 생기는 것을 멸(滅)하기는 했으나 멸해서 없어진 그것을 취한다면, 저 멸무(滅無)의 경계에 대해 취하는 마음[能取心]이 생긴다. 그렇다면 생과 멸이 다 같이 있는데, 어찌 무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상 두 구절은 앞에서 다룬 생을 자세히 말한 것이다.

참된 무생인(無生忍)은 그렇지 않으니, 밖으로는 소취(所取)를 멸함에 마음을 두지 않고, 안으로는 능취(能取)의 생함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生滅俱滅]’라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멸이 동시에 멸한다[俱滅]는 것은 ‘무로 돌아갔다’는 말이 아니다. 그 본래의 생을 추구해 보건대 그 생(生)이 없다는 것이다. 생이 없다면 어찌 멸(滅)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 때 본래 공적(空寂)함을 깨닫기 때문에 ‘본생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상 공적하며[本生不生心常空寂]’라고 말한 것이다.이와 같은 공적은 능(能)·소(所)가 평등하여 공(空)의 경지에 머문다 하는 마음[能住心]이 없다. 그러므로 ‘공적함이 머무는 곳이 없고[空寂無住]’라 하였으니 이렇게 되어야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생이다’라고 하였다. 이상 무생관(無生觀)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마음에 머무름이 없는데 무슨 닦고 배울 것[修學]이 있습니까? 유학(有學)이라야 합니까, 무학(無學)이라야 합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일각(一覺)의 뜻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이 가운데 여덟 개의 문답이 있는데 크게 둘로 분류하면 처음 두 문답은 일각여래장(一覺如來藏)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광범하게 설명한 것이고, 나중의 여섯 문답은 논을 의지해서 논을 일으켜[因論生論] 모든 의심과 논란을 제거한 부분이다.

지금 이 첫 물음에서는 마음이 머무름이 없다는 것을 들어 묻는다. 배울 것이 있다고 한다면 머무름이 없지 않을 터이고, 배울 것이 없다고 한다면 관행(觀行)이 아닐 터이다. 또 배움이 있다고 한다면 마음이 생겨나는 바가 있는 것이고, 배울 것이 없다고 한다면 오직 공리(空理)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생(生)함이 없는 마음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마음이 아니다. 본각(本覺)인 여래장(如來藏)이므로 그 성품이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다[性寂不動].”

[論] 여기서는 먼저 도리를 밝히고, 나중에 질문에 대답한다. 도리를 밝힌다는 것은, 머무름이 없게 되었을 때 생함이 없는 마음[無生之心]은 항상 적멸(寂滅)하여 관에서 나오는 일[出觀]이 없고, 본래 일어나지 않음을 통달하여 (관에) 비로소 들어가는 일[始入]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心無出入]’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을 관찰하여 이미 출입(出人)이 없으면 곧 본각(本覺)이요, 여래장(如來藏)인 마음 이다. 이는 시각(始覺)이 본각과 같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생함 없는 이 마음[無生心]은 이미 본각인 여래장이라, 본래 그 성품이 고요하여 다시는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으니 어찌 들락날락하며 일어나고 멈추는 일이 있겠는가? 이는 출입이 없다는 뜻을 거듭 확증하는 말이다.

[經] “유학(有學)도 아니고 무학(無學)도 아니다. 배움도 배우지 않음도 없는 것이 무학이며, 배움이 없지 않다는 그것이 바로 배울 바가 된다.”

[論] 이 부분은 묻는 뜻에 대한 정답이 되겠는데, 이 중에 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부정[遮]하고 나중에 긍정[許]한 것이다.

시작이 있어서 들어가는 것[始入]이 아니므로 학(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끝이 있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학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한편 머무는 마음[能住心]이 없으므로 학이 있는 것이 아니고, 머물지 않는 마음[無住心]이 없지도 않으므로 학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는 둘 다 ‘아니다’ 라고 부정[遮]하는 논법으로서, (잘못된 견해를) 차단하고 그치게 한 것이다.

‘배움도 배우지 않음도 없는 것이 무학(無學)’이라는 것은 배울 것[所學]이 따로 없으므로 배운다는 일[能學]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학이라는 것을 용인하였다. 그러므로 이는 학(學)이 있을 수 없다는 뜻에 의거하여 무학을 인정한 것이다.

‘배움이 없지 않다는 그것이 바로 배울 바가 된다’고 한 것은 비록 머무름이 있는 관(觀)은 아니라 할지라도 머무름이 없는 행(行)이 없지 않기 때문에 유학(有學)을 허용한 것이다.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무학) 이전의 경지에서 배울 것이다. 이는 배울 것이 없지 않다는 뜻[非無學義]에 의거하여 유학(有學)을 허용한 것이다. 이는 둘 다 허용하는 논리로서, 자재(自在)한 답변이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여래장(如來藏)의 성품이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문답이다. 앞의 문답에서는 시각(始覺)이 본각·여래장의 성품과 다르지 않음을 밝혔고, 여기에서는 여래장의 성품이 숨겨져 있고 움직이지 않음을 밝히는데 이 중에 여래장(如來藏)의 요점이 설명되어 있다.

여래장에 대해서는 두 가지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셋으로 설명하는 근거는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중생계 가운데서 세 가지 법을 보여주는데, 모두 진실하고 여여[如]하여 다름이 없고 차이가 없다. 그 셋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여래장의 본제(本際)에 상응하는 체(體)와 청정한 법이다. 이 법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며 떠나거나[離] 벗어나지[脫] 않는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법으로서, 시작 없는 본제(本際)로부터 이와 같이 청정한 것에 상응하는 법체(法體)이다.

둘째는 여래장의 본제에 상응하지 않는 체와 번뇌에 얽매여 청정하지 못한 법이다. 이는 본제와 이탈하여 상응하지 않으며 번뇌에 얽매여 청정하지 못한 법이니 오직 여래의 지혜[菩提智]로만 끊을[斷]수 있다.

셋째로 여래장의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 있게 될 법[及有]이다. 이는 모든 법의 근본이 되며, 모든 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으며[備], 모든 법을 일일이 갖추고 있어서[具] 세간을 떠나거나 벗어나지 않는 법이다.”

내 생각에 이 경문은 여래장을 세 가지 측면[門]으로 나누어 밝힌 것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거두어들이는 여래장[能攝如來藏]이다. 자성(自性)에 머물러 있을 때 여래 과지(果地)의 공덕을 다 거두어들이고 있으니, 여래를 거두어들이고 있다는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둘째는 거두어들여진 여래장[所攝如來藏]이다. 번뇌에 얽매어 청정하지 못한 법이 모두 여래의 지혜 안에 있다. 여래가 그것을 거두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여래에 속하는 법이라는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셋째는 숨겨지고 덮여진 여래장[隱覆如來藏]이니, 법신인 여래가 번뇌에 덮여 있음을 말한다. 여래가 스스로 숨었다는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부른 것이다.

진제 삼장(眞諦三藏)은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 있게 될 법’이란 경문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였다.

“일심의 체(體)는 3제(際)에 두루 하나 앞의 두 측면을 설명할 때 본제(本際)에 관해서는 이미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후제(後際)까지도 밝힌 것이다. 이 문장의 또 다른 의도는 ‘여래’라는 뜻을 나타내려는 데 있다. 즉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 라는 구절은 여(如:같다는 뜻)를, ‘있게 될 법[及有]’은 래(來:온다는 뜻)를 나타낸다.”

『불성론(佛性論)』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참다운 여[眞如]는 여(如)가 아닌 가운데 여함이 있는 것이며, 여(如) 아님이 없는 가운데도 여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2승(乘)의 여(如)는 여(如)가 아닌 가운데서는 여함이 있지만, 여(如) 아님이 없는 가운데에서는 여함이 없다. 어째서 그런가? 2승(乘)을 닦는 사람들은 허망관(虛妄觀)에 의지하여 무상(無常) 등의 모양만을 보고 그것을 진여(眞如)라고 생각하는데, 이 허망관은 인지(因地)에만 있고 과지(果地)에는 없다. 그렇다면 이 여(如)가 성립되었다가 파괴되었다가 하는 것이 된다.

보살의 여(如)는 어떤가? 보살은 허망을 떠나 진성(眞性)에 입각하여 이 여를 보므로 인과(因果) 두 곳에서 다름이 없고, 성립되거나 파괴되는 때가 없다……”

그러므로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後際平等恒]’라는 구절이 대승에서 말하는 여(如)의 뜻을 밝힌 것임을 알 수 있다.

‘있게 될 법[及有]이라는 것은 래(來:온다는 뜻)를 나타낸다’라고 한 말은, 범부의 법이 감[去]을 상대로 해서 일심(一心)이 옴을 나타낸 것이다. 범부의 법이 갔을 때는 오취온법(五取蘊法)이 과지(果地)에 이르지 못하니, 즉 가서는 오지 못하는 법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일심의 여는 과지에서도 그냥 그대로 있어 영원히 지나가 버림이 없으므로 ‘있게 될 법[及有]’이라고 하였으니, 즉 래(來)의 뜻을 밝힌 것이다. 논에서 ‘자성(自性)에

머무르면서부터 지득(至得:佛果)에 이른다’고 한 말씀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이렇게 일심은 더럽거나 깨끗한 모든 법에게 공통적인 의지처[依止]가 되므로 (앞의 『不增不減經』에서) ‘모든 법의 근본’이라 하였고, 또 본래 고요한 면으로 보아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무수한 공덕(功德) 중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하였고, 연(緣)을 따라 움직이는 면으로 보아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염법(染法) 중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을 일일이 갖추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염법(染法) 쪽에서 심체(心體)를 바라보면 두루 통할 수 없으므로 이탈하지만, 심체 쪽에서 염법을 바라보면 염법(染法)에 두루 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세간을 떠나거나[離]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떠나거나 벗어나지[脫] 않는다는 것은 숨어 갈무리되어 있다[隱藏]는 뜻이다. 여래장(如來藏)의 세 번째 측면을 설명하는 이곳에서는 일심이 움직임과 고요함에 통하며 염법과 정법에게 의지처가 됨을 전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여래장의 두 번째 측면을 설명한 곳에서는, 여래장의 움직이는 측면이 염법(染法)의 소의(所依)가 됨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여래장의 첫 번째 측면을 설명한 곳에서는, 여래장의 본래 고요한 측면이 정법(淨法)의 소의가 됨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두 번째에서 ‘본제에 상응하지 않는 체’라고 한 것은, 모든 번뇌 법이 심체(心體)를 위반한다는 뜻에서 ‘상응하지 않는다[不相應]’고 한 것이다. 일심의 체가 연을 따라 움직이는 면[隨緣動門]에서는 번뇌의 소의(所依)가 되기 때문에 그것이 상응하지 않는 법의 체가 된다.

‘…와 번뇌에 읽혀 청정하지 못한 법’이라고 한 것은, 의지하는[能依:染法] 법이 심체에 의지해 전전하면서 스스로 심체를 얽어매고 따라서 물들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능의(能依)와 소의(所依)의 법을 함께 취하여 여래장의 두 번째 체라고 본 것이다.

‘오직 여래의 지혜[菩提智]로만 끊을[斷] 수 있다’는 것은, 오직 해탈도(解脫道)에서만 올바로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러한 뜻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첫 번째에서 ‘본제에 상응하는 체’라고 한 것은 (일심의 체가) 본래 고요하다는 면[本來靜門]에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덕(德)이 갖추어져 있어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이니, 이는 공덕에 상응하는 체(體)이다.

‘…와 청정법(及淸淨法)’이란 능의(能依) 공덕이 본래 염법을 떠나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능의와 소의의 법을 함께 취하여 여래장의 첫 번째 체라고 본 것이다.

‘이 법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며 떠나거나[離] 벗어나지[脫] 않는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법’이라고 한 것은 상응(相應)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며, 법신(法身)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니, (일심의 체가)모든 공덕법(功德法)과 상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윗글에서 말한 것과 같이, 불법(佛法)의 떠나지 않는 면, 벗어나지 않는 면, 끊어지지 않는 면, 다르지 않는 면, 불가사의한 면과 상응하므로 법신(法身)이라고 부른다. 무슨 뜻인가? 이 일심( 一心)의 체(體)에는 크게 보아 다섯 가지 특성[相]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 특성인가?

첫째는 취하는 대상[所取]의 차별된 모습을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취하는 자[能取]의 분별하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셋째는 3세제(世際)에 두루 미쳐 평등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넷째는 허공계(虛空界)와 같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다섯째는 있다[有], 없다[無], 전체다[一], 개별이다[異]하는 따위의 극단에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마음이 가는 곳을 벗어나 있고, 언어의 길을 초월하여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본래 공덕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도 심체와 상응하는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낱낱의 공덕이 소취(所取)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법신과 떠나 있지 않는 것이니, 앞서 본 첫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경에서 ‘떠나지 않는다[不離]’고 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둘째는 낱낱의 공덕이 능취(能取)의 집착을 벗어났기 때문에 법신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앞에서의 두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不脫]’고 한 것이 그 뜻이다.

셋째는 이 낱낱의 공덕이 3세제(世際)에 두루 미쳐 시간적[縱]으로 보아 전후의 단절이 없는 것이니, 앞서 말한 세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끊어지지 않는다[不斷]’고 하였다.

넷째는 이 낱낱의 공덕이 허공계와 같아서 공간적[橫]으로 여기다 저기다 하는 차이가 없으니, 네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不異]’고 하였다.

다섯째는 낱낱의 공덕이 모두 극단[邊]을 떠나 있어 사량(思量)의 경계가 아니며 언어의 길을 넘어서 있으니, 이는 다섯 번째 특징과 상응한다. 경에 ‘부사의(不思義)’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한다.

모든 공덕법에는 이 다섯 가지 뜻이 있어 (일심의) 체(體)와 별개가 아니라 한 맛[一味]에 융통되므로, 이런 이유에서 ‘상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지 심왕(心王)과 심수(心數)가 개별적인 체로서 상응하는 것과는 다르다.

지금 여기에서 ‘떠나거나 벗어나지 않는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법[不離不脫智不思議法]’이라고 한 것은 모든 공덕 중에 각(覺)의 의미를 추려서 다섯 가지 상응 중에 세 가지 뜻만을 요약한 것이다. 이상이 첫 번째인 능섭여래장[能攝藏]이다. 여기까지 여래장의 뜻을 세 가지 측면에서 간략히 설명하였다.

여래장의 뜻을 두 측면으로 설명하는 것[二門]에 대해 『부인경(夫人經:勝鬘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여래장(空如來藏)이란 (법신을) 떠나 있거나[離] 벗어나 있거나[脫] 다르거나[異]한 모든 번뇌장(煩惱藏)을 말한다.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란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 다르지 않은 불가사의한 불법을 말한다.”

위 경문을 나는 이렇게 해석하겠다.

모든 번뇌법(煩惱法)은 다 허망하니, 경계[境]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허(虛)라 하고 체(體)가 산란하기 때문에 망(妄)이라 한다. 거짓[妄]이기 때문에 참[眞]이 없고, 헛것[虛]이기 때문에 실다움[實]이 없다. 진실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고, 여래를 숨겨 덮고 있으므로 여래장(如來藏)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공’이란 진(眞)을 숨겨 덮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번뇌의 경계는 실답지 않은 형상[相]인데 그것이 법신(法身)을 떠나 있기 때문에 ‘떠나 있거나[若離]’라 하였다. 모든 번뇌의 체는 망령된 집착에 결박되어 법신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벗어나 있거나[若脫]’라고 하였다. ‘다르거나[若異]’라고 함은 앞서 말한 허망의 차별과 분별이 법신의 평등한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면에서 (법신과) 상응하지 않으므로 이를 진실이 없다 하고, (여래장의) 공한 측면으로 보는 것이다.

‘불공(不空)’이란 모든 공덕이 체(體)와 상응함을 말한다. 체가 망령되지 않기 때문에 참이며, 경계가 헛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다운 것이다. 진실하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不空]’고 하며, 여래가 숨겨져 있으므로 여래장이라고 한다.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라는 등의 문구는 여래장의 공하지 않은 측면을 풀이한 것이다. 그 뜻은 세 가지로 여래장을 설명한 대목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여기서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의 체는 앞에 세 가지로 설명한 중에서 첫 번째 법[能攝如來藏]에 해당하고, 여기 공여래장의 뜻은 저곳의 두 번째[所攝如來藏]에 해당한다. 그리고 세 가지 여래장 중 ‘숨겨 덮고 있다[隱覆]’는 의미는 세 번째에 들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앞(셋으로 설명한 것)에서는 첫 번째·두 번째를 가지고 능섭(能攝)과 소섭(所攝)의 두 가지 뜻을 구별한 반면, 여래장을 두 가지로 설명하는 여기서는 공[空;妄法]이 진실을 덮고있다는 측면을 드러내려고 덮는 쪽[能覆]과 덮이는 쪽[所覆] 두 가지로 구별한 것이다. 또 이 두 경[不增不減經과 勝鬘經]이 서로 다른 의미를 드러내려 했기 때문에 두 가지로 설명하거나 세 가지로 설명하는 양쪽의 해석이 다른 것이다. 부연설명은 여기서 그치고 다시 본문해석으로 돌아가겠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장(如來藏)이란 무엇인가? 생멸하는 사려[慮知]의 모습을 말한다. 이치를 숨겨서 드러나지 못하게 하므로 여래장이라 하며, 그 본성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論] ‘생멸하는 사려의 특성’이란 공여래장(空如來藏)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는 숨기는 쪽[能隱義]만 드러냈을 뿐, 이것을 여래장이라는 이름으로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치를 숨겨서 드러나지 못하게 하므로 여래장이라’ 함은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을 말하는데, 숨겨진 쪽[所隱義]을 잡아서 여래장이라 이름하였다.

‘본성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란 여래장의 성품이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변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이 여래장의 성품에는 다섯 가지 의미가 있으니 『무상론(無相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

첫째는 종류(種類)의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병(甁)이니 옷이니 하는 따위의 모든 색법(色法)이 4대(大:지·수·화·풍)를 떠나지 않고 모두 네 가지 요소를 성품으로 삼듯이, 중생은 하나의 계[一界]를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1계로 종류를 삼고 있기 때문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는 체류(體類)의 뜻이라 하였고, 『불성론(佛性論)』에서는 자성(自性)의 뜻이라고 하였는데, 말은 다른 것 같으나 뜻에는 다름이 없다.

둘째는 인(因)의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나무에는 타는 성질이 있어 불에게 원인이 되는 까닭에 이것을 그 본성이라고 말하듯, 성인의 모든 무루법(無漏法)은 이 본성을 인(因)으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위 두 논(論)에서 한결같이 인이라고 부른다.

셋째는 생긴다[生]는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진금(眞金)을 단련하여 장식품을 만들 때 만들어진 장식품은 금을 본성으로 한다. 이 계(界)도 그와 같아서 과지(果地)의 오분법신(五分法身)을 낳게 하니, 법신이 생기는 것은 이 계를 본성으로 한다.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는 생(生)의 뜻이라 하였고, 『불성론(佛性論)』에서는 지득(至得)의 뜻이라 하였다. 과(果) 전에 있다는 뜻에서 쓰는 인(因)의 개념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미 생겼 다’는 뜻에 의해 지득(至得)이라고 부른 것이다.

넷째는 바뀌지 않는다[不改]는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마치 금강보(金剛寶)의 성질이 일겁(一劫) 동안 한결같이 머물면서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듯이, 이 계(界)가 3세(世)에 평등하게 머물면서 세간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출세간에서도 다 없어지지 않는다. 저 두 논(論)에서는 진실(眞實)의 뜻이라고 하였으니, 진실하다는 것은 파괴되지 않는다[不壞]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다섯째는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密藏]는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황석(黃石) 중에는 진짜 금의 성질이 있으나 그 광석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이익을 얻을 수가 없다. 녹이고 단련함에 따라서 보배로 쓸 수 있게 되므로 그 본성은 숨겨진 뜻이 있다고 한다. 여래장의 본성도 이와 같아 감싸고 있는 것[纏]을 벗겨내지 않으면 밖에서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 때문에 물이 들지만 그 감싸고 있는 것을 깨뜨려 본성에 맞닥뜨리면 안에 이루어진 청정함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성이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는 뜻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성론』에서는 비밀(秘密)이라 하였고, 『섭대승론』에서는 감추어져 있다[藏]고 하였으니 뜻은 같으나 말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 이 글에서 말하는 본성[性]이란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寂不動]’는 것은 간략하게 위의 마지막 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고요함’은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일각(一覺:여래장)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광범하게 설명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무엇이 생멸하는 사려의 모습[生滅慮知相]입니까?”

[論] 이 아래부터는 여섯 가지 질문과 여섯 가지 대답이 나오는데, 인론생론(因論生論)으로 모든 의심과 논란을 풀어준다. 이는 첫 번째 문답으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숨게 하는 것[能隱]이 사려[慮知]임을 밝혔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이치에는 긍정[可]과 부정[不]이 없다. 긍정과 부정이 있다면 모든 망념이 생겨나니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곧 생멸하는 모습이다.”

[論] 이 답은 두 겹으로 되어 있으니, 먼저는 간략하게 답하고[略答] 나중에는 자세하게 설명한다[廣演]. 간략한 대답에 두 구가 있는데, 먼저 무엇을 미혹하고 있는지[所迷]를 말한다. 미혹의 대상이 되는 이치는 마음가는 곳이 사라진 것이므로 ‘이치에는 긍정과 부정이 없다’고 하였다. 가(可)란 옳다[是]는 것이요, 부(不)란 그르다[非]는 뜻이다. 이치는 4구(句)를 끊고 모든 시비를 떠나 있어 분별심으로 닿을 곳이 아니다.

다음에는 무엇이 미혹하는가[能迷]를 밝혔다. ‘옳고 그름이 있으면 모든 망념이 생긴다’는 것은 무명(無明)이 있어서 평등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 더러운 마음[六染心]을 함께 일으킨다는 뜻이다.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생각이 곧 생멸하는 모습’이라고 함은 여섯 가지 더러운 마음에 거친 것[麤]과 미세한 것[細]이 있다고 할지라도 평등함을 거스르기는 마찬가지라, 이것이 생멸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멸의 모습을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마음과 상응하는 거친[麤] 생멸상이며, 둘째는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미세한[細] 생멸상이다. 여기서 거친 것 중의 거친 것[麤中之麤]은 범부의 경계이고, 거친 것 중의 미세한 것[麤中之細]과 미세한 것 중의 거친 것[細中之麤]은 보살의 경계이고, 미세한 것 중의 미세한 것[細中之細]은 부처의 경계이다.

이 두 가지 생멸은 무명(無明)의 훈습(薰習)에 의하여 생기게 되니, 이른바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한다는 것이다. 인에 의한다는 것은 불각(不覺)의 뜻이고, 연에 의한다는 것은 망령되게 경계를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이 없어지면 연도 없어진다. 인이 없어지므로 상응하지 않는 마음[不相應心]이 사라지고, 연이 없어지므로 상응하는 마음[相應心]이 사라진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마음과 상응하는 거친 생멸상’이란 세 가지 상응염(相應染)을 말하고,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미세한 생멸상’이란 세 가지 불상응염(不相應染)이다. ‘거친 것 중의 거친 것’이란, 집상응염(執相應染)과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으로서 모두 6식(識)에 있으므로 범부의 경계이다. ‘거친 것 중의 미세한 것’이란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으로서 제7식(第七識)에 있으며, ‘미세한 것 중의 거친 것’이란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과 능견심불상응염 (能見心不相應染)이며, ‘미세한 것 중의 미세한 것’이란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이 셋은 모두 제8식(第八識)의 자리에 있다. 이 중에 세 가지 미세한 생멸은 무명(無明)이라는 바람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인(因)이 없어지므로 불상응심(不相應心)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또 세 가지 거친 생멸은 경계(境界)의 바람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연(緣)이 없어지므로 상응심(相應心)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기신론소(起信論疏 )』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금 이 경에서 ‘천 가지 생각’이라고 한 것은 모든 불상응염의 미세한 분별을 다 포함했기 때문이며, ‘만 가지 생각’이라고 한 것은 모든 상응염심의 거친 분별을 다 포함했기 때문인데, 둘 다 동요하는 생각의 모습[動念之相]이므로 ‘생멸하는 모습[生滅相]’이라고 하였다.

[經] “보살아, 본각의 성품과 모습[性相]을 살펴보았더니 이치[理]가 자연히 만족되어 있다. 그러니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은 도의 이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헛되이 움직이고 산란케 하여 본래의 심왕(心王)을 잃는다.”

[論] 이 아래로는 자세한 설명인데, 여기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생멸의 모습에 대비해서 이치가 만족되어 있음을 밝혔고, 둘째는 이치가 만족한데 대비해서 물든 마음에는 결여가 있음을 밝혔으며, 셋째는 이치를 따라 물든 마음을 없애서 동요를 버리고 고요한 길로 들어서게 하는 이익[利]을 설명하였다.

처음에 ‘보살’이라고 한 것은 해탈보살을 부른 말이다. ‘본각의 성상을 관찰했다[觀本性相]’고 한 것은, 부처님께서 본각(本覺) 여래장성(如來藏性)을 관하셨다는 말이다. ‘이치가 자연히 만족되어 있다[理自滿足]’고 한 것은, 관찰한 바 본각 여래장의 이치에 무량한 성품의 공덕이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다는 말이다. 『기신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또한 진여(眞如) 자체의 모습은 본래부터 자성에 저절로 일체의 공덕을 만족하고 있다. 이른바 그 자체

에 큰 지혜의 빛이라는 뜻이 있고,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뜻이 있으며, 진실로 안다는 뜻이 있고, 자성이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이라는 뜻이 있으며, 상(常)·낙(樂)·아(我)·정(淨)의 뜻이 있고, 청량하고 불변하고 자재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불법, 즉 떠나지 않고, 끊어지지 않으며, 다르지 않은 불가사의한 불법을 구족하고 있으며 …… 조금도 모자람 없이 만족해 있는 까닭에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표현하며, 여래의 법신이라고도 부른다.” 지금 이 『금강삼매경』에서는 ‘이치가 자연히 만족되어 있다[理自滿足]’고 하여 총괄적으로 그와 같은 공덕이 만족되어 있음을 나타냈다. 첫 단락[생멸의 모습에 대비해서 이치가 만족되어 있음을 밝힘(對生滅相 顯理滿足)]을 마친다.다음으로 생멸하는 동념(動念)의 잘못을 밝힌다. 여기에서는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음을 전체적으로 밝혔다. 『기신론』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풀이하였다.

[문] ‘진여는 그 체(體)가 평등하여 모든 모양을 떠나 있다’고 위에서 말했는데, 이번에는 어째서 체에는 그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사실 이러한 모든 공덕의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차별의 모양은 없다. 똑같은 한 맛[一味]이라 유일한 진여일 뿐이다. 무슨 뜻인가? 분별하는 일이 없으므로 분별상(分別相)을 떠났으니 그러므로 둘이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차별을 말할 수 있는가? 업식(業識)에 의지해서 생멸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어떻게 나타내는가? 모든 법은 본래 마음뿐[唯心]이어서 사실은 모습[相]과 생각[念]이 없다. 그러나 허망한 마음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생각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본다. 이런 뜻에서 무명(無明)이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본성[心性]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이 큰 지혜의 광명[大智慧光明]이다. 만약 마음에 소견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게 되지만 심성(心性)이 소견[見]을 여의면 법계를 두루 비춘다. 그러므로 마음에 동요가 있으면 진실되게 아는 것이 못 되고, 자성(自性)이 없어서 상(常)·낙(樂)·아(我)·정(淨)하지도 못하며 ……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허망한 생각의 오염[妄染]을 다 갖추게 된다.

이러한 뜻에 대비해서 심성(心性)에 동요가 없으면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온갖 청정한 공덕상이 나타난다. 만약 마음에 생멸이 일어나서 다시 앞의 법에 대해 생각할 만하다는 견해를 가지면, 모자라는 것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정법(淨法)의 무량한 공덕은 다름 아닌 일심(一心)이며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으므로 만족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법신여래(法身知來)의 장(藏)이라고 부른다.”

지금 이 경에서 ‘헛되이 움직이고 산란케 함’이란,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진실한 앎이 아니며, 자성이 없으면 상(常)·낙(樂)·아(我)·정(淨)이 아니기 때문에 ‘동(動)’이라고 하였다. 마음이 소견을 일으키면 불견(不見)의 모습[相]이 있으므로 ‘난(亂)’이라고 하였다.

‘본래의 심왕을 잃음’이란, 무량한 공덕이 일심(一心)인데, 일심이 주(主)가 되므로 ‘심왕(心王)’이라고 하며, 생멸심이 동요하고 산란하면 이 심왕에 위반되어 다시 돌아갈 수가 없으므로 ‘잃는다[失]’고 하였다.

[經] “그러나 사려(思慮)가 없으면 생멸이 없고, 실제와 같아져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모든 식(識)이 안정되고 고요하여 끊임없는 흐름[流注]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섯 가지 깨끗한 법을 얻는데, 이를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論] 이 아래는 셋째 부분으로 이치에 순종하여 오염을 없앰으로써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들어감을 밝힌 것이다. 이 중에도 둘이 있으니 정곡으로 설명한 부분[正顯]과 거듭 설명해서 결론짓는 부분[重成]인데, 위의 경문은 전자에 해당하며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들어감을 밝힌다.

‘사려가 없으면[若無思慮]’이란, 초지(初地)에서 불지(佛地)까지 점차로 일심의 평등한 법계에 순응하여 모든 사려분별(思慮分別)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생멸이 없다[卽無生滅]’고 한 것은, 앞에서의 사려로 말미암아 생멸의 모습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려가 없으므로 영원히 분별이 없고, 두 가지 생멸(生滅)을 다 온전히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여기서부터는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어서 미래가 다하도록 다시는 동요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실제와 같아져서 일어나지 않는다[如實不起]’고 하였다.

두 가지 생멸이 끝까지 다 종식되었을 때 여덟 가지의 식의 움직임이 모두 다 고요한 상태로 되돌아가고, 끊임없이 흐르던 여섯 염심[六染]이 영원히 끊어져 일어나지 않으므로 ‘모든 식(識)이 안정되고 고요하여 끊임없는 흐름[流注]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끊임없는 흐름이 생기지 않으니 법계가 원만하게 나타나고, 모든 식(識)이 안정되니 4지(智)가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깨끗한 법을 얻는다[得五法淨]’고 말한 것이다. 싣고 나르는[運載] 공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총괄하는 의미에서 ‘대승(大乘)’이라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들어간다’ 라고 한 부분을 정곡으로 설명한 것이다.

[經] “보살아, 5법[法]의 청정함에 들어가면 마음에 망념이 없으며, 망념이 없으면 곧 여래께서 자각하신 거룩한 지혜[聖智]의 경지에 들어간다.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모든 것이 본래부터 생기지 않음을 잘 알 것이요,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알면 망상이 없어진다.”

[論] 이것은 거듭 설명해서 결론짓는 부분[重顯:重成]인데 세 구가 있다. 첫째 ‘5법의 청정함에 들어가면 마음에 망념이 없다’는 것은 일심의 근원에 돌아갔을 때는 망념의 불각(不覺)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망념이 없으면 곧 여래께서 자각하신 거룩한 지혜의 경지에 든다’고 한 것은 불각이 다했을 때 시각(始覺)의 원만한 지혜 경지에 들기 때문에 한 말이요, 불각을 상대로 시각의 원만함을 드러낸 것이다.

셋째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일체가 본래부터 생기지 않음을 잘 알고’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알면 망상이 없어진다’ 하였는데, 이는 시각이 원만할 때 불각의 네 가지 상이 망념을 일으키나 본래 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곧 본래부터 망상이란 없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시각이 본각(本覺)과 다르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중생을 각(覺)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본래부터 생각 생각이 계속 잇달아 생겨나서 한번도 생각을 떠난 일이 없기 때문에 시작 없는 때로부터의 무명[無始無明]이라고 한다. 생각이 없어지면 심상(心相)의 생(生)·주(住)·이(異)·멸(滅)을 알게 되니 무념(無念)과 같아지기 때문이며, 사실상 시각(始覺)의 다름이 없이 네 가지 모습이 독자적으로 존립하지 못하고 동시에 있어 본래 평등하여 일각(一覺)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위 글을 이렇게 생각한다.

이 중에서 ‘생각이 없어지면 심상의 생주이멸을 알 것’이라 함은, 이 경에서 ‘모든 것이 …임을 잘 안다[善知一切]’라고 한 말을 나타낸다. ‘사실상 시각과 다름이 없다’고 한 것은 이 경에서 ‘본래 생기지 않음을 잘 알면’이라고 한 말을 나타낸다. 또한 ‘네 가지 모습이 독자적으로 존립하지 못하고 동시에 있어 본래 평등하여 일각(一覺)과 같아지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이 경에서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알면 망념이 없어진다’고 한 말을 나타낸 것이다. 꿈속에 강을 건너는 비유도 이런 맥락에서 설해져야 한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망상(妄想)이 없으면 멈추고[止] 그치게[息]하는 일도 없겠습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여섯 문답 중에) 둘째 문답인데, 멈춤과 그침이 없음을 밝혔다. 본래 망상이 없다면 멈추게 할 대상[所止]이 없고, 멈추게 할 대상이 없으면 멈추는 일[能止]도 없다. 멈추는 일이 없으므로 시각(始覺)도 당연히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지는 것이 이 질문의 의도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허망[妄]이란 본래 생겨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치게 할 만한[息] 허망이 없으며, 마음이 본래 무심임을 알면 멈추게 할 만한 마음도 없다. 나뉨[分]이 없고 구별[別]이 없어 현식(現識)이 생기지 않는다. 멈추게[止]할만한 생이 없으니 그것이 멈춤 없는 것이다. 그렇다해서 멈춤이 없는 것[無止]도 아니다. 왜냐하면 멈춤 없음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論] 이렇게 답한 의도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멈출 것이 없음을 허락하고 나중에 멈출 것이 없음을 부정한다. 허락한다는 것은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부정한다는 것은 시각이 그대로 본각은 아니기 때문이다.

허락하는 말씀에서 그침과 멈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허망은 일어나 동요하니까 그치게 해야 하고, 마음은 흩어져 달아나므로 멈추게 해야 한다. 그러나 본래 일어남[起]도 없고, 달아남[馳]도 없으므로 그치게 해야 할 것도 멈추게 해야 할 것도 없다.

‘나눔이 없다[無分]’고 한 것은 견분(見分)과 나뉘어진 상분(相分)이 없다는 뜻이다. ‘구별이 없다[無別]’고 한 것은 상분과 구별되는 견분이 없다는 뜻이다. 상분과 견분이 나뉘거나 구별되는 일이 없다면 현재의 식[現識]이 본래 생기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의 식이 생기지 않음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다같이 알기 때문에 현재를 들어서 본래 생하지 않음[本不生]을 밝힌 것이다.

이미 멈추어야 할[所止] 불각(不覺)이 생기는 일이 없으므로 멈추게 하는[能止] 시각(始覺)도 따로 있지 않으니, 따로 있지 않다는 입장에서 질문의 뜻을 긍정한 것이다. ‘그렇다해서 멈춤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다르지 않은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멈춤 없음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생기는 일 없는 망심(妄心)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생기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저 무생(無生)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무생(無生)만은 아니기 때문에 멈출 바가 없지 않다. 그런 까닭에 멈추게 하는 각(覺)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답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만약 멈출 것이 없는 것을 멈추게 한다면 멈춘다[止]는 것이 곧 생기는 것[生]이 될 터인데 어찌 무생(無生)이라고 하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셋째 문답으로서 무생관(無生觀)을 밝혔다. 만약에 멈추게 하는 각(覺)이 있다고 한다면 멈춤의 관(觀)이 생길 것이니, 불각(不覺)의 일어남을 막았다 할지라도 이번에는 다시 시각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생관(無生觀)을 증득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따져 묻는 이의 의도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멈추는 그것이 바로 생기는 것이기는 하나 멈추고 난 후에는 멈춤이 없다. 멈춤이 없는[無止] 거기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름이 없는 거기에도 머물지 않으니 어찌 생(生)한다 하겠는가?”

[論] 이 답에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먼저는 인정하고[與], 나중에는 부정한다[奪]. 인정한다는 것은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許]한 것이다. 방편관(方便觀)에서는 멈추게 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세제일법(世第一 法)을 닦을 때는 식(識)이 생기는 것을 멈추어 식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멈추게 하는 마음[能止心]이 무(無)를 취하여 생기니, 멈추는 바로 그 순간에는 생겨남을 긍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멈추는 그것이 바로 생기는 것 ’이라고 하였다.

이 한 생각을 넘어서면 무(無)를 취하지 않으니, 무를 취하지 않으므로 취하는 마음[取心]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멈추고 난 후에는 멈춤이 없다’고 하였다. 이 때는 일체의 분별을 멀리 떠나기 때문에 무지(無止)의 무(無)에도 머물지 않고, 스스로 머무름이 없다는 마음도 취하지 않아 능소(能所)가 영원히 끊어지니 평등하고도 평등하다. 이런 때 생겨난다고 할 그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답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생겨남이 없는 마음은 무엇을 취하고 버리며, 어떤 법상(法相)에 머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겨남이 없는 마음은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며, 마음 아닌 데[不心] 머물고 법 아닌 데[不法]에 머문다.”

[論] 이것은 네 번째 문답인데 더하는 견해와 덜어내는 견해를 버리게 한 것이다. 이를테면 모든 학자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관(觀)에 드는 마음은 모습 없는 이치[無相理]를 취하고, 모습 있는 모든 일[事]을 버린다’고. 이와 같은 증익견(增益見)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不取不捨]’고 하였다.

혹은 이러한 생각을 하는 수도 있다. ‘관(觀)에 들어 있을 때는 도무지 머무를 법이 없고, 머무는 마음도 없다. 그렇다면 필경무(畢竟無)와 다름이 없다’고. 더하거나 덜어내는 이런 식의 소견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음 아닌 데 머물고 법 아닌 데 머문다’고 하였다. 머무름이 있지 않다 할지라도 머무름이 없는 것이 아니니, 머무름이 없지 않으므로 머문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마음 아닌 데 머물며, 법 아닌 데 머문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바로 마음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며, 법을 내지 않는 것이 법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다섯 번째 문답인데 의심나는 생각을 거듭 떨쳐주는 것이다. ‘이미 머문다고 했다면 그것은 마음이요, 법일 것이다. 그런데 마음도 법도 아니라고 한다면 머물지 않는다[不住]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이 말씀은 너무 심오하니 어떻게 믿고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의문의 골자이다.

부처님께서 답하신 뜻은, 증득하는 주체인 관심[觀心]이 있어도 안 되고, 증득의 대상이 되는 이법(理法)이 있어도 안 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내지[生] 않는다, 법을 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낸다[生]는 것은 지닌다[存]는 뜻과 같다.

언제나 마음과 법을 내지 않는다고 하면 혹 실념(失念)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므로 ‘마음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며, 법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머문다[住]는 말은 항상하다[恒]는 말과 같다. 항상하여 물러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머문다고 한다. 머문다[住]는 뜻이 이렇게 마음 아닌 데에 순응하니 그 사이에 무슨 어긋남이 있으랴. 이렇게 해서 물음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아래부터는 이 이치를 거듭 설명한다.

[經] “선남자야, 마음과 법을 내지 않으면 의지(依止)가 없고, 아무 행(行)에도 머물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다른 모습이 없다. 비유하면 저 허공이 움직이거나 머무는 일이 없고, 또 무엇을 일으키거나 만드는 일이 없어 여기다 저기다 할 것이 없다는 것과 같다. 공(空)한 마음의 눈을 얻고 법이 공한 몸[法空身]을 얻으면 5음(陰)과 6입(入)이 모두 다 공적해질 것이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서 거듭 설명하는 것[重顯]인데,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모든 상을 멀리 떠나 3세에 두루 미침을 밝히고, 다음에는 법계에 수순해서 6바라밀을 남김 없이 닦음을 밝혔다.

첫 부분에도 세 구가 있으니, 즉 법(法)과 유(喩)와 합(合)이다. ‘마음과 법을 내지 않음’이란 앞서 질문에 답한 구절을 반복해 서두를 꺼낸 것이다.

‘의지가 없다’란 횡적으로 보았을 때 의지하는 주체[能依]와 의지할 대상[所依]의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 ‘아무 행에도 머물지 않음’이란 종적으로 보았을 때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행이 없다는 뜻이다. 과거와 미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공적하다’ 하였고, 능(能)과 소(所)가 없기 때문에 ‘다른 모습이 없다’고 하였다. ‘비유하면…저’ 이하는, 비유를 끌어오는 두 번째 부분이다. ‘움직이거나 머무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은 세간의 허공 이 무위(無爲) 상주(常住)하여 앞서 멸했다가 뒤에 생하는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모든 행(行)에 머물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또 의지할 주체에도 의지할 대상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은 ‘의지(依止)가 없다’고 한 말씀에 비유한 것이다.

‘일으키거나 만드는 일이 없음’이란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다’는 말과 같다. ‘여기다 저기다 할 것이 없음’이란 ‘다른 모습이 없다’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이 허공을 들어서 불생관(不生觀)을 비유한 것이다.

합(合:주장과 비유를 맞추는 것)에서 ‘공한 마음의 눈을 얻었다’는 것은 능관심(能觀心:내가 관찰을 하노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관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법이 공한 몸을 얻음’이란 소관법(所觀法:관찰할 법이 있다는 생각)이 생기지 않으므로 평등한 법신을 얻는다는 뜻이다.

‘5음이 모두 공하다’란 공한 마음의 눈을 얻어서 3세의 5음이 공하다는 사실을 통달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니, 앞에서 ‘허공이 무엇을 일으키거나 만들어내는 일이 없다’한 비유에 대응하는 구절이다.

‘6입이 모두 공함’이란 법이 공한 몸을 얻어서 안팎에 두루하여 6입이 공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허공에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다’고 한 비유에 대응하는 구절이다.

[經] “선남자야, 공한 법을 닦는 자는 삼계에 의지하지 않으며, 계상(戒相)에 머물지 않으며, 청정하여 생각이 없으며, 다잡지도 않고 풀어주지도 않으며, 그 성품이 금강과 같으며, 3보(寶)를 무너뜨리지 않으니, 공심(空心)이 움직이지 않고 6바라밀(波羅蜜)을 갖춘다.”

[論] 이것은 두 번째로 6도(度)를 빠짐없이 닦음을 밝히는 부분이다.

‘공한 법을 닦는 자’란 앞에서 말한 공적한 마음을 되새긴 것이다. 그 이하는 6도를 갖춘 것을 따로 나타내는 부분이다. 삼계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보시바라밀[施度]을 갖추며, 계상(戒相)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지계바라밀[戒度]을 갖추며, 청정하여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인욕바라밀[忍度]을 갖추며, 다잡지도 않고 풀어버리지도 않기 때문에 정진바라밀[精進]을 갖추며, 성품이 금강과 같기 때문에 선정바라밀[禪定]을 갖추며, 3보를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般若]을 갖춘다.

어째서 그런가? 오직 관하는 마음 하나가 법으로 삼을 만한 것을 두루 비추어서 온갖 쟁론을 끊었기 때문에 3보를 구비하며, 3보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의 공한 마음은 별달리 움직이거나 일으키는 일 없이 6도를 갖추기 때문에 ‘공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6바라밀을 갖춘다’고 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6바라밀은 모두 모양이 있는데, 모양이 있는 법으로 세간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내가 말한 6바라밀은 모양이 없고[無相] 애써 노력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無爲].”

[論] 이 아래는 여섯 번째 문답으로서 세간을 벗어나는 6바라밀의 의미를 거듭 설명한 것이다. 묻는 자는 의심을 빌미로 결단을 보기 위해 세간에서 닦는 6바라밀의 현상[事相]을 가지고 출세간의 마음에 6바라밀을 어떻게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의심을 내놓은 것이다. 답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간략하게 표방하고, 둘째는 자세히 해석했는데 이 문장은 간략하게 표방한 것이다.

#무상(無相)이란 주고[施] 받는[受] 것 등 3륜의 모양[三輪相]을 여읜 것을 말한다.

‘#무위(無爲)’란 생(生)·주(住) 등 세 가지 유위(有爲)가 없음을 말한다. 내가 앞에서 ‘일심(一心)에 6바라밀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상(無相)이며 무위(無爲)이기 때문이다. 이 6도(度)는 곧 출세간이므로 세간의 유상(有相)·유위(有爲)와는 다르다.

[經] “어째서 그런가? 욕심을 떠난 경지에 잘 들어가서 마음이 항상 청정하고, 진실한 말의 방편과 본각의 이익으로 사람들을 이롭게 하니 이것이 단바라밀(檀波羅蜜:보시바라밀)이다.”

[論] 이 아래는 자세하게 해석한 것인데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는 따로 따로 해석하고[別釋], 나중에는 총괄적으로 밝힌다[摠明].

‘어째서 그런가?’란 물음을 제기하여 말을 꺼낸 것으로, 이미 여섯 개의 법수[六數]가 있는데 어째서 무상이라고 하느냐는 뜻이다. 진여에 전의(轉依)하는 것을 두고 ‘욕심을 떠났다’고 하는데, 3유(有)의 욕(欲)을 떠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체(體)를 관찰하여 이해했기 때문에 ‘잘 들어갔다’고 하였다. 다시는 들어가고 나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이라고 하였다. 3륜(輸)의 때[垢]를

벗어났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위에서는 ‘삼계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이치에 맞게 설하므로 ‘진실한 말[實語]’이라 하였다. 솜씨 있게 편리하게 인도하므로 ‘방편(方便)’이라 하였는데, 공용(功用)이 없을지라도 근기에 맞게 말을 꺼내는 것이 마치 하늘의 북과 같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모든 중생이 오직 하나인 본각(本覺)이며,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일각(一覺)으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에 ‘본각의 이로움으로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출세간의 단바라밀(檀波羅蜜)이라고 한다.[經] “지극한 생각[至念]이 견고하여 마음이 항상 머무르지 않으며, 청정하고 물들지 않아 삼계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이 시바라밀(尸波羅蜜)이다.”

[論] 중생을 가엾게 생각하기를 외아들을 보듯이 하는 까닭에 ‘지극한 생각이 견고하다’고 하는 것이다.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 열반에 머물지 않으므로 ‘마음이 항상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2승(乘)의 과실을 예방하는 것이다.

밝고 철저하게 마음을 관찰하여 모든 번뇌[諸漏]에 뒤섞이지 않으므로 ‘청정하고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육도(六道)에 두루 걸쳐 다니지만 모두 공적한 경지를 통달하였으므로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범부의 악을 멈추게 한 것이다. 이는 범부와 성현의 계상(戒相)에 머무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위에서도 ‘계상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을 출세간의 시바라밀(尸波羅蜜)이라고 한다.

[經] “공(空)을 닦아 번뇌의 얽힘[結]을 끊으며, 세속의 모든 것[諸有]에 의지하지 않고, 3업을 적정(寂靜)하게 하며, 몸에도 마음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이다.”

[論] 위의 두 구는 공한 이치에 평안히 있어 모든 번뇌를 여읜 것이요, 아래 두 구는 3업을 고요하게 하고 몸과 마음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이니 모두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뜻이다. 위에서는 이를 ‘청정하여 아무 생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經] “명수(名數:法數)를 떠나고 공견(空見)과 유견(有見)을 끊어서 5음(陰)이 공(空)한 데 깊이 들어가니 이것이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이다.”

[論] 위 두 구는 거친 것[麤]을 여의고 정밀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한 데 들어간다’는 것은 나아간다[進]는 뜻이다. 위에서는 이를 ‘다잡지도 않고 놓아버리지도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출세간의 정진바라밀[精進度]이다.

[經] “공적함을 모두 떠나 어떤 공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마음이 무(無)에 처하여 대공(大空)에 있으니[心處無 在大空:어떤 본에는 ‘心處無住 不住大空’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선바라밀[禪波羅蜜]이다.”

[論] ‘공적함을 모두 떠난다’는 것은 응화(應化)해서 생(生)을 받을 때 3유(有)에 두루 미치기 때문이다. ‘어떤 공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5공(空)에 막히지 않고[不滯] 항상 시방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중생을 교화하는 선(禪)을 밝힌 것이다.

‘마음이 무에 처함[心處無]’이란 몸은 비록 3유에 걸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이무(理無)에 처함이니, ‘이무(理無)’란 이(理)가 3유의 모습을 끊었다는 뜻이다. ‘대공(大空)에 있다’는 것은 항상 시방에서 교화를 할지라도 마음이 대공에 있다는 것이니, 대공이란 시방의 큰 모습으로서 공하다는 뜻이다. 이는 불법(佛法)을 성취하는 선(禪)을 밝힌 것이다.

몸은 비록 무언가를 일으키고 만든다 할지라도 마음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으니 이를 위에서 ‘성품이 금강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대공에는 대략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의 두 공을 대공이라고 한다. 『잡아함(雜阿含)』의 「대공경(大空經)」과 『유가론(瑜伽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둘째 반야바라밀공을 대공이라고 부른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고, 『능가경(楞伽經)』에서도 역시 같은 설명을 하였다.

셋째 기세계의 공함[器世界空]을 대공이라고 한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고 『중변론(中邊論)』에서도 같은 설명을 하였다.

넷째 아뢰야식의 공함[阿梨耶識空]을 대공이라고 부른다. 『십지론(十地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다섯째 시방(十方)의 모습이 공함을 대공이라 부른다. 『지도론(智度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지금 이 경문은 다섯 번째에 해당하나, 우선 편의에 따라 이렇게 설명했을 뿐이다.

[經] “마음에 마음이라는 상[心相]이 없으나 허공을 취하지 않으며, 모든 행(行)이 생하지 않으나 적멸(寂滅)을 증득[證]하지도 않으며, 마음에 출입이 없으므로 본성[性]이 항상 평등하며, 모든 법의 실제가 한결같이 결정된 성품이므로, 그 어떤 단계[諸地]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반야바라밀(船若波羅蜜)이다.”

[論] ‘마음에 마음이라는 상이 없다’는 것은, 자기 내면을 관할 때 마음의 상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허공을 취하지 않음’이란 마음이 비어 있다는 공성(空性)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증도혜(證道慧)라 한다.

‘모든 행이 생하지 않음’이란 모든 행이 본래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적멸을 증득하지도 않음’이란 무생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밖을 교화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교도혜(敎道慧)라고 한다.

‘마음에 출입이 없으므로 본성이 항상 평등하다’는 것은 앞의 2도(道)가 항상 서로 분리되지 않음을 말한다. 움직이면서도 언제나 고요하고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움직이므로 출입이 없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항상 병행하되 한편에 치우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본성이 항상 평등하다’고 하였다.

‘모든 법의 실제가 한결같이 결정된 성품’이란 증득하는 도의 항상 고요한 상(相)을 설명한 것이니, 그 상은 진제(眞諦)와 같고 법성(法性)과 동등하다.

‘그 어떤 단계[諸地]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도 머물지 않음’이란 가르치는 교리가 항상 움직이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니, 10중법계(重法界)에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적조혜(寂照慧)에 머물러 지체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 가운데에는 깨달아 비춘다는 뜻과 법으로 삼을 만하다는 뜻과 쟁론을 끊었다는 뜻이 구비되어 있다. 이를 위에서는 ‘3보를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을 출세간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이상 6바라밀에 대한 개별적인 설명을 마친다.

[經] “선남자야, 이 6바라밀은 모두 본각(本覺)의 이로움을 얻어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가 초연히 세간을 벗어나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총괄적인 설명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6도(度)가 해탈과 동일함을 밝히고, 다음에 해탈이 곧 열반임을 드러낸다. ‘모두 본각의 이로움을 얻어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6바라밀을 처음 닦아 모두 본각과 같아지고, 본각 자체가 그대로 드러나 본각의 이익이 행해지기 때문에 여래장에 들어가는데, 그 본성이 본래 고요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바뀌거나 전변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이 6바라밀은 본각의 이로움을 얻기 때문에 망념과 유전(流轉)하는 모양을 멀리 떠난다. 그러므로 ‘초연히 세간을 벗어난다’고 하였다. 또한 법성(法性)에 들어가기 때문에 법계(法界)에 두루 미쳐 모양이 없고 작위가 없으며, 결박됨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고 하였다.

[經] “선남자야, 이와 같은 해탈법의 모습은 모두 상(相)도 없고 행(行)도 없으며, 또한 벗어났다거나[解], 벗어나지 못했다는[不解] 구별이 없다. 이를 이름하여 해탈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해탈의 모습은 형상도 없고 작용도 없으며, 동요도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고요한 열반이지만 그렇다고 열반의 모양을 취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論] 둘째는 해탈이 곧 열반임을 밝힌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해탈을 말하고 다음에 열반을 말한다. ‘모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한 것은, 6도의 행은 모두 본각과 동일한 것인데 본각의 모습이 상(相)과 성(性)을 떠나 있기 때문에 상(相)이 없다고 하였다. 6도의 행은 닦음도 떠났고, 행함도 떠난 것이므로 행(行)이 없다고 하였다. 행과 상이 모두 끊어졌으므로 ‘모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하였다. 해탈법의 모습이 이미 이와 같으니 어찌 결박을 떠난 벗어남[解]이 있으며, 또 어찌 벗어나지 못한 결

박이 있으랴. 그러므로 ‘벗어났다거나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왜냐 하면’은, 어째서 6도의 행을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하느냐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여, 그와 같은 6도는 단지 해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반이기도 하기 때문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해탈의 모습이 무상하고 무행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해탈을 지적한 것이요, ‘동요도 없고[無動] 산란함도 없어서[無亂] 고요한[寂靜] 열반[涅槃]’이란 열반에 관한 설명이다. 앞에서 설한 6도의 행이란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본래 적정한 열반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미 6도가 열반이라면 어찌 모습과 행이 있겠는가? 동요하고 산란한 모습을 떠났으므로 적정이라고 하고, 또 그 적정한 본성마저도 떠났으므로 열반의 상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6도·해탈·열반은 초지(初地)에서 시작하여 불지(佛地)까지 이른다. 여기서 열반이라고 한 것은 네 가지 뜻 중에서 본래 청정한 열반, 즉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해탈(解脫)을 가리킨다. 자재하다는 뜻과 장애가 없다는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무애해탈(無碍解脫)이라고 말한다.[經] 해탈의 뜻이 대단히 많아서 쌍도(雙道) 중의 해탈이 있고 3점(點) 중의 해탈이 있으며 오분법신(五分法身) 중의 해탈이 있고 십종해탈문(十種解脫門) 중의 해탈이 있는데, 그 같은 여러 문 가운데 어느 문에 해당하는가?

[論] 이는 3사(事) 중의 해탈이다. 해탈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는 6도의 행에 3사의 덕(德)이 있음을 드러내려고 한 것인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초지(初地)에서 이미 얻고 묘각위(妙覺位)에 이르러 마지막의 완성을 보는 것이다. 경에서도 “보살이 대열반에 머물면 큰 뜻을 세울 수 있다…”하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이제껏 없던 일이라고 크게 기뻐하면서 뜻을 다시 펴기 위하여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깨달음을 구족하신 세존께서

대중을 위하여 법을 설명하시되

모두 다 일승(一乘)에 대한 설법이요

이승(二乘)의 도는 설하지 않으셨네.

일미(一味)의 모양 없는 이로움은

마치 저 큰 허공[大虛空]과 같아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제각기 다른 성품[性]을 따라

모두 다 근본 자리를 얻게 하시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거듭 송한 것[重頌]이다. 먼저 경을 서술하는 자의 서문이 있고 게송이 시작된다. 게송은 모두 7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앞의 여섯 게송은 개별적인 게송이고, 뒤의 한 게송은 총괄하는 게송이다. 이 게송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 2송 1구는(장행 중에서 논지를 간략하게 표시했던) 약표(畧標)의 부분이고, 둘째 3송 3구는 뒤의 자세한 해석 부분[廣釋]을 노래 한 것이다. 약표 중에서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法相)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며, 방편과 신통으로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無相利]을 얻게 하신다’라고 하신 것은 지금 이 게송 중에서는 첫 1송으로 노래한다. 또한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모든 2승들은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부처님과 보살만이 이를 알 수 있으니) 제도할 만한 중생이면 모두 일미(一味)를 설한다’라고 하신 말씀은 지금 이 게송에서는 세 가지 뜻[三義:法·喩·合]으로 노래한다. 즉 앞의 1구는 법(法), 다음 2구는 유(喩), 끝의 2구는 합(合)에 해당한다.

[經] 저와 같이 마음[心]과 나[我]를 떠나면

하나의 법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모든 행(行)이

모두 다 본각(本覺)의 이로움[利]을 얻게 하여

상(相)과 견(見) 두 가지를 다 끊어 버리네.

[論] 이 아래는 자세히 해석한 부분을 송한 것인데 이 가운데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다섯 구는 무상관(無相觀)을 설명한 것이고, 다음 두 구 반은 일각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무상관을 설명하는 게송에도 정광(正廣)과 중현(重顯)이 있다. 지금 처음 두 구절은 정광의 글이다. 정광 중에도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방편관(方便觀)을, 다음에 정관(正觀)을 밝힌다.

지금 이 게송 가운데 정관을 노래한 것은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心:法執)과 아(我:我執)를 떠나게 해야 한다…’고 하고 능소(能所)를 떠나는 것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 이 두 구가 바로 그 문장들을 노래한 것이다.

또한 이 게송에서 ‘하나의 법[一法]’이란 유(有)와 무(無)의 극단을 멀리 떠난 하나의 중도관(中道觀)을 뜻하니, 마음(心)·나[我] 두 가지 집착에서 멀리 떠나도록 한 것이다.

다음에는 거듭 설명하는 글 중에 네 개의 문답이 있는데, 지금 두 구는 두 번째 문답을 노래한 것이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모든 행(行)’이라는 것은 저 첫 번째 답 가운데 ‘마음의 온갖 모습[相]은 본래부터 근본[本]이 없으며… (근본 자리[本處]가 본래 없으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한 글에 해당하며 동행총상관(同行總相觀)이다. 둘째 문답 중에서 ‘아집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게 하라’ 한 것과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며, 반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 잡힌 이에게는 그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어라.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한 글 등은 이행별상관(異行別相觀)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동행(同行)과 이행(異行)은 들어가는 곳[實際]에 차이가 없으므로 ‘모두 본각의 이로움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앞에서 ‘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實際]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이 게송에서 ‘상(相)과 견(見) 두 가지를 다 끊어버린다’고 한 것은 나중의 두 번째 문답의 게송이다. 셋째 답 중에서 말하기를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것을 그대로 게송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2견(二見:有見·無見)을 없앤다고 말한다. 또한 넷째 답 중에서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 본생(本生)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 상 공적(空寂)하며, 그 공적함이 머무는 곳 없고… ’라 했는데, 지금 그것을 송하여 두 가지 상[二相]을 끊었다고 한 것이다.

[經] 적정한 열반에 있어도

증득했다는 생각에도 머물지 않고

결정한 자리에 들어가

상(相)도 없고 행(行)도 없네.

[論] 이 아래의 2송 반은 일각(一覺)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일각을 자세히 설명한 중에도 정광(正廣)과 중현(重顯)이 있는데 지금 이 게송은 중현만을 노래하고 있다. 중현문 가운데에도 여섯 개의 문답이 있다. 이 중에 두 부분이 있으니 앞의 1송으로 여섯 번째 답을 노래하고, 다음 1송 반으로 다섯 번째 답을 노래하고, 그 전의 네 문답은 노래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여섯 번째 답 중에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가 초연히 세간을 벗어나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 해탈의 모습은 형상도 없고 작용도 없으며, 동요도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고요한 열반이지만 그렇다고 열반의

모양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게송에서는 순서를 거꾸로 노래한 것이다.

[經] 공한 마음의 고요한 경지에서는

적멸하여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

저 금강의 본성과 같아

3보를 무너뜨리는 일 없이

6바라밀을 모두 다 갖추어

모든 중생을 제도하네.

[論] 이 게송은 다섯 번째 답에 대한 노래이다. 저 경문에 말하기를 ‘마음과 법을 내지 않으면 의지(依止)가 없고, 아무 행(行)에도 머물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다른 모습이 없다. 그 성품이 금강과 같으며, 3보(寶)를 무너뜨리지 않으니, 공심(空心)이 움직이지 않고 6바라밀(波羅蜜)을 갖춘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게송에서 이 내용을 순서대로 노래한 것이다.

[經] 초연히 삼계를 벗어나되

다 소승으로써 하지 않고

한 가지 맛의 법인(法印)뿐이니

일승으로 성취한 것이로다.

[論] 이 1송은 총괄하는 게송이다. 앞의 1품[無相法品] 전체의 요지를 총괄적으로 노래한 것이니, 그 요지에 대한 해석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經] 그 때 대중이 이러한 뜻을 설하시는 것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마음[心]과 나[我]에 대한 집착을 떠나 공(空)과 무상(無相)에 들어갔다. 마음이 넓고 활달해져서 모두 결정성을 얻어 결박을 끊고 번뇌를 다 없앴다.

[論] 이 일품[無相法品] 속에는 세 부분이 있는데 그 중 두 부분은 앞에서 다 해석하였고, 이것은 세 번째로 그 때의 대중들이 이익 얻음을 나타낸 부분이다.

‘마음과 나에 대한 집착을 떠났다’는 것은, 2공(空)의 진여(眞如)를 증득함을 말한다. ‘결박[結]을 끊고 번뇌[漏]를 다 없앴다’고 한 것은, 견혹(見惑)과 수혹(修惑) 두 가지 의혹을 끊어버린 까닭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초지(初地), 즉 견도(見道)에 들어갈 때 견혹을 정곡으로 끊고 겸해서 수혹까지도 끊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이 내용은 『미륵소문론(彌勒所問論)』에서 말한 것과 같고, 더 자세한 내용은 『이장장(二障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