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불교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 불교

수선님 2022. 1. 9. 13:57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 불교- 허일범교수 화이트타라

 

- 목차 -

 

1. 머리말  

 

2. 티베트와 한국의 인적 교류 약사  

 

3.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몽골 불교  

 

4. 맺음말 허일범(진각대학교 밀교학과 교수)

 

1. 머리말 티베트·몽골의 불교문화는 13세기 이후부터 우리 나라의 불교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몽골이 고려를 지배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으나 몽골 침략 이후 우리의 불교문화는 중국 일변도의 불교문화 수용에서 탈피하여 다양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건축물의 장엄과 법구류의 제작에서는 단연 티베트·몽골적인 요소가 우세해졌다.

 

뿐만이 아니라 육자진언의 염송법은 티베트·몽골·우리 나라를 하나의 신앙벨트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찰들에 남아 있는 육자진언 관련 유적들이 말해 주고 있다. 아직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진행 단계에 있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으나 건축물의 장엄, 불상의 조성, 탑의 건립, 법구의 제작, 불화의 도화(圖畵), 수행법 등 어느 분야든 관련성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여기서 티베트·몽골의 불교문화와 관련이 있는 특징적인 것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보기로 한다.

 

첫번째로 건축물의 장엄에서 단청에 진언을 써넣고, 지붕의 기와에 진언을 새겨 넣는 방식이다.

 

두번째로 불상의 조성에서 우리 나라의 경우, 흔히 발견되지 않는 합체불(合體佛)이나 사면사방불(四面四方佛)이 조성된다.

 

세번째로 탑의 건립에서 상륜부의 양식에 티베트 불교의 촐텐 양식을 채용한 것이다.

 

네번째로 법구의 제작에서 밀교적 요소가 강한 금강저·금강령이 나타나고, 티베트 사찰의 신앙적 장엄물인 마니륜통이 법당 내에 설치된다.

 

다섯번째로 불화의 도화에서 괘불탱화 양식이 채용되었다.

 

여섯번째로 수행법에서 만다라나 진언종자를 적용한 수행법이 등장한다.

 

이와 같이 티베트·몽골불교 문화는 우리 나라의 불교문화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지위를 점하고 있다. 목차 2. 티베트와 한국의 인적 교류 약사 우리 나라는 거리상으로 티베트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문화적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티베트는 지정학적으로 인도와 중국 대륙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인도로부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불교문화 전래의 매개체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13세기에는 몽골이 티베트와 고려를 침략함으로써 문화교류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티베트 불교가 몽골에 전파되고, 그것은 다시 몽골을 통하여 우리 나라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와 티베트의 인연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신라시대 당나라에 파견된 유학승 중에는 자연스럽게 티베트 인들을 접촉할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 역사적 사실로 공식화되어 있는 신라승 김무상(金無相, 684∼762)과 티베트의 사신인 바상시의 만남이 우리들의 관심을 끈다. 여기에 대해서는 삼예사(寺)의 사지(寺誌)에 해당하는 《바세》에 상세한 기술이 있다.

 

당시 당나라의 사천성 정중사(淨衆寺)에 머물고 있던 김무상은 서기 754년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티베트의 사신들을 만났다. 귀로가 험난하여 1개월여를 그곳 정중사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 티베트의 사신들은 김무상에게 많은 것을 질문했다.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장래 티베트 정세와 불교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김무상은 티베트 불교의 장래에 대해서 인도불교가 티베트에서 주류를 이룰 것이며, 훗날 티송데첸 왕이 등장하여 불교를 널리 홍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한 김화상은 그들 사신들에게 《십선경》 《금강능단경》 《도간경》을 전해주면서 왕의 즉위시에 사용하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훗날 김무상의 예언은 적중하여 샨타락쉬타가 인도에서 들어와서 티베트에 불법을 홍포했으며, 티송데첸 왕이 즉위할 때에는 사신들이 전수받은 세 종류의 경전을 독송하자 왕은 신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정견을 가지고 신심을 돈독히 했고, 정법을 행하는 데 그침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티베트 인들은 감탄하였고, 여기서 김무상은 김화상(金和尙)이란 이름으로 삼예사의 사지에 그 이름이 남기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사람과 티베트 인이 최초로 접촉한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며, 티베트 인들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그 외에도 혜과(惠果) 화상의 제자인 신라의 오진(悟眞)은 인도로 구법순례를 떠났다가 귀로에 티베트에서 입적하였다. 그후 고려시대에는 몽골을 거쳐서 티베트 인이 들어오고, 양국간의 교류 속에서 티베트의 불교문화가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

 

1294년 티베트 승려 절사팔(折思八)이 티베트 경전과 법구류를 가지고 고려에 들어오고, 1314년에는 홍약(洪죤)이 티베트 경전 18,000권을 고려에 전해준 일이 있다. 

 

또한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1320년에는 몽골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티베트로 들어가게 된 충선왕을 위하여 민천사(旻天寺)에서 기도법회를 가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운명적인 것이기도 했으며, 타의에 의해서 고려인이 티베트 인들에게 알려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몽골의 세력하에 들게 된 고려는 정치적·종교적으로 몽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1275년에는 송광사의 원감국사(圓鑑國師)가 몽골을 방문하여 호비라이칸(재위 1260∼1294년)을 만나 수선사(修禪社)의 사전(寺田)문제를 해결하고 귀국한 일이 있다. 이때 티베트 어로 쓰인 통행증명서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

 

또한 1346년에는 티베트 인에 의해서 연복사(演福寺) 범종의 명문(銘文)이 새겨지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 나라에 널리 유통되고 있는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도 티베트의 자사태마(刺思?麻)와 사팔자(思八刺) 라마에 의해서 전해진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1967년에 달라이 라마 14세가 라사판 티베트 대장경 한 질을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한 일이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와 티베트는 신라시대 이래 근래에 이르기까지 인적·물적 교류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비록 올해의 방문은 무산되기는 했지만 달라이 라마 14세의 방한도 언젠가는 성사되리라 추측된다.

 

만약 달라이 라마가 우리 나라를 방문하게 된다면 이것 또한 신라시대 이후 이루어진 티베트와 우리 나라 교류사에 한 장을 여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된다.

 

목차 3.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몽골 불교 1) 티베트 문자의 전래와 한국 불교문화 현재 한국의 불교문화사 연구에서 범자(梵字)와 티베트·몽골의 문자문화에 대한 연구는 거의 초보단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전통 불교에 대한 문화연구가 회화나 미술사적 연구에 치우친 나머지 범자문화에 담긴 신앙사적 연구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고, 그 결과 우리의 문화유산 중에 전승되고 있는 문자문화를 단순히 장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에 편찬된 의식집들에서 진언들을 범자나 티베트 문자로 나타내고 있으며, 관법차제(觀法次第)와 같은 수행법에서 범자로 된 종자자(種子字)를 명상에 채용하고 있다.

 

또한 사원의 건축물이나 법구류 등에서 범자나 티베트 문자로 된 진언종자들을 활용하고 있다. 여기서 사원건축에 단청을 하고, 거기에 범자로 된 문양을 새겨 넣는 양식은 티베트를 제외한 어떤 아시아 국가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특히 고려시대 이후에는 도화(圖畵)하거나 법구를 조성할 때에도 불보살의 존형과 더불어 진언·종자를 써넣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사원건축물의 단청이나 복장유물을 봉안할 때에도 범자로 된 종자만다라(種字曼茶羅)를 사용한 예가 있다.

 

이와 같이 범자문화는 한국의 불교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문자의 유형도 다양하다. 하여튼 인도나 티베트로부터 몽골 지역을 거쳐서 전파된 나가리·실담·란차·티베트·팍파문자 등은 우리 나라의 불교관련 의식집의 찬술 및 문자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한글창제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한글의 창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문자의 형태나 계통으로 볼 때 란차·티베트·몽골문자와 어떤 형태로든 관련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란차문자는 글의 형태, 티베트·몽골문자는 철자의 조합방식에서 유사점이 매우 많다.

 

여기에 대해서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 한글창제와 관련이 있는 모든 문자들을 비교하면서 한글의 연원이 범자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2) 진언 수행법 우리 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수행법 가운데 티베트 불교와 관련이 있는 것은 역시 육자진언 관련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은 티베트에서 저작된《마니칸붐》의 가르침을 계승한 것으로 육자진언을 활용한 명상법이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마니칸붐》은 몽골을 통하여 고려에 전래되었으며, 육자진언과 관련된 모든 가르침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聖觀自在求修六字禪定)》을 비롯한 《관세음육자대명왕신주경(觀世音六字大明王神呪經)》 《육자대명왕다라니경》 《육자대명왕경(六字大明王經)》 《육자대명왕경지송법(六字大明王經持誦法)》 《육자영감대명왕경(六字靈感大明王經)》 등은 《마니칸붐》의 내용을 발췌하여 우리 나라에서 새로 편집한 찬술집이다. 

 

훗날 우리 나라에서는 이 찬술집에 의거하여 새로운 수행법을 확립했는데, 그 중에서 최근까지 활용되고 있는 것이 육자진언관념도(六字眞言觀念圖)이다.

 

이것은 육자진언에 《금강정경》 계통의 오불(五佛)을 배대하여 염송함으로써 그 공덕을 배가시키려는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에서 종자자를 몸에 안치하는 것은 마치 식물의 종자를 땅에 심었을 때 발아하여 꽃과 과실을 맺는 것과 같이 육자진언의 종자자를 몸의 여섯 부위에 새겨 넣은 다음 이 진언을 염송함으로써 종자자가 가지고 있는 공덕을 발아시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진언염송법은 수행법으로서뿐만이 아니라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범종, 기와 등에까지 새겨 넣어 육자진언의 공덕을 성취하려 했다. 범종에 그 종자자를 새겨 넣은 것은 종을 칠 때마다 그 울림이 온 법계에 울려 퍼져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오불의 가피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범종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들면 낙산사·보광사·봉선사 등의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건축에서 지붕의 기와에 육자진언을 새겨 넣는 것은 일상생활 중 항상 육자진언의 가피를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선원사, 운주사 등에서 발견된 암막새 기와와 수막새 기와를 들 수 있다. 

 

3) 합체불상(合體佛像) 우리 나라에서 조성된 불보살상 가운데에는 외형상으로 티베트의 양식과 흡사한 것들이 다수 존재한다. 특히 밀교경궤의 교설에 입각한 다면다방불(多面多方佛)은 분명히 티베트 불상의 특징을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운주사에 조성되어 있는 대석합체불(大釋合體佛)은 우리 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불상이다. 여기서 대석(大釋)이란 법신 대일여래와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한다.

 

운주사 경내에 있는 석조 건축물 안에는 지권인의 비로자나불과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이 등을 맞댄 합체불(合體佛)의 형태로 모셔져 있다.

 

이와 같은 합체불의 양상은 티베트나 몽골 등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아무래도 이와 같은 합체불을 봉안한 것은 이 사찰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의 구성으로 볼 때 대석의 합체를 통한 불교의 융화와 법신(法身)과 화신(化身)의 합체를 통한 생산, 새시대의 도래를 기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남쪽을 향해서 항마촉지인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것은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왜구의 퇴치를 위한 것이며, 북쪽을 향하여 지권인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것은 지혜의 광명으로 국가의 미래를 밝히고, 안위를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사원의 이곳 저곳에 안치되어 있는 한 쌍씩의 불상을 통하여 그 뜻을 읽을 수 있다. 이 사찰에는 보살상이 전혀 없고, 오직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의 모습뿐이다.

 

그것도 한 쌍씩 모셔져 있다. 그것은 산중턱의 와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는 와불은 마치 부부가 함께 누워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여기에 기원을 하면 자식의 출산, 시대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4) 사방불(四方佛) 우리 나라에서 사방사면존(四方四面尊)의 유래는 경기도 화성에 조성된 백제시대의 사방보살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방존은 보살상으로 경궤에서 그 전거를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경전적 전거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경기도 안성 칠장사의 석물(石物) 사방불이다. 칠장사 대웅전 앞의 사방사불석물은 그 용도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석물 위에 불상이나 탑을 안치했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단석이나 좌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석물의 정면에는 좌수 여원인(與願印), 우수 설법인(說法印)의 부처님, 측면에는 좌수 여원인, 우수 촉지인(觸地印)의 부처님, 후면에는 법계정인(法界定印)의 부처님, 또 다른 측면에는 좌수 여원인에 보주(寶珠), 우수 설법인의 부처님이 부조되어 있다.

 

이들 부처님들은 각각 아촉불·아미타불·보생불·불공성취불의 4불이다. 여기서 보생불의 좌수에 들고 있는 보주(寶珠)를 자칫 약함(藥函)으로 보면 약사여래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보주를 들고 있는 보생불의 존형은 티베트 불교의 불상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튼 이 사방불은 《금강정경》 계통의 오불 가운데 4불을 새겨 놓은 것으로 역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5) 만다라 우리 나라에서 발견되고 있는 만다라는 《금강정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나타낸 금강계 만다라이다. 이 만다라는 우리 나라의 경우, 상원사와 기림사에서 발견된 것만이 현존하고 있다.

 

이 만다라들은 밀교의 의식에 활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채색이나 존형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만다라의 제존(諸尊)으로부터 가피를 입기 위해서 활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 중에서 조선시대 세조의 어의(御衣)에 새겨진 상원사 고려시대 금강계 만다라는 문수사리복장유물 중에서 발견된 것이며, 현재 오대산 월정사 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다. 

 

이 만다라의 가장자리에는 몽골 세조(世祖, hvo-pi-la i-kan) 지원(至元) 29년(1292)이란 문구가 쓰여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판각된 만다라 문양을 조선시대에 활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만다라의 가운데 중심원 속에는 5개의 실담종자자(悉曇種子字)가 있는데, 그것은 주존인 대일여래와 사바라밀보살을 의미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상하좌우에 있는 4개의 원 속에는 5개씩의 종자자가 있는데, 이것은 각각 아촉불·보생불·아미타불·불공성취불의 4불과 십육대금강보살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4불은 주존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네 종류로 나누어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십육대금강보살은 그 4불의 구체적인 활동상(活動相)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4불이 위치한 네 개의 원 사이 사이에 있는 네 개의 큰 글씨로 된 종자자는 내공양보살(內供養菩薩), 그 바깥쪽 두번째 부분의 팔엽연화(八葉蓮花)는 부처님의 자비를 나타내며, 그 사이에 있는 8개의 문자는 외공양보살(外供養菩薩)과 사섭보살(四攝菩薩)을 나타내는 종자자이다.

 

전체적인 만다라의 형태로 볼 때, 경전의 교설과 일치한다고 할 수 없으나 팔엽연화와 외공양보살의 위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치한다. 이와 같이 변형된 형태의 만다라는 아마도 그 용도를 수행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덕 성취를 위한 법구로 활용하려는 데에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앞의 37존 종자자 이외에 다라니와 서원문을 만다라의 외곽에 나타내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즉 만다라의 세번째 부분에는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一切如來心秘密全身舍利寶?印陀羅尼)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이 만다라의 성격이 마치 부처님의 사리와 같이 모든 공덕을 함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만다라의 가장자리에는 일반적으로 수행용 만다라에서 쓰이지 않는 동·서·남· 북의 방향을 나타내는 드리·크샤·비·바이의 사방종자자(四方種子字)를 나타내고 있다. 하여튼 이 만다라의 원형판각(原形板刻)이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 이 만다라는 몽골과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6) 괘불탱화 괘불탱화는 티베트 불교에서 널리 쓰이는 법구의 하나이다. 흔히 티베트에서는 이것을 탕카라고 하는데, 사찰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야외에 단을 설치하고, 괘불을 봉안한 다음 법회를 열었다. 우리 나라에도 이와 같은 괘불탱화가 다수 존재하며, 큰 법회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칠장사의 괘불탱화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불을 도화한 양식를 취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칠장사의 오불회괘불탱화는 비로자나삼존불을 비롯해서 불보살·호법신중·성문중의 군집(群集)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서기1628년 법형(法泂) 스님이 그린 것이다. 전체 5단으로 구성된 탱화의 상단에는 중앙의 지권인을 결한 법신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보신 노사나불과 화신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그 삼신불 사이에는 4불과 가섭, 아난을 비롯한 십대제자가 5존씩 위치하고 있다.

 

이들 윗쪽으로는 호법신인 제석·범천·팔부중·10방불이 있다. 

 

중단에는 좌측에 약사삼존과 십이신장이 있고, 우측에는 아미타삼존과 십대보살과 사천왕, 인왕이 나뉘어 위치하고 있다. 하단에는 좌측에 수월관음보살이 있고, 우측에는 지장보살이 있다. 이러한 불세계의 제존상 아래에는 현세의 성문중들과 아귀들이 엎드리거나 합장한 채 불법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우리들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탱화 중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5불개념을 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사찰의 석조 4방4면불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며, 밀교경전인 《대일경》이나 《금강정경》, 티베트 불교의 불상도화 양식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외에도 김룡사 괘불탱화나 직지사 후불탱화와 같이 탱화의 외곽에 탱화 중의 존격과 관련이 있는 진언을 새겨 넣은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양식은 티베트의 괘불 양식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이후, 그것을 토착화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한국적 탱화 양식의 하나라 할 수 있다. 

 

7) 단청 단청은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색을 기본으로 사용한 단청은 법계를 상징하는 청·황·적·백·흑의 다섯 가지 색상으로 나타내며, 불보살이 계시는 전각을 장엄할 때 활용된다. 단청의 문양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 천정의 단청을 보면 대부분 연화문양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그 속에 문자를 넣는 경우와 넣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중에서 문자를 써넣는 경우, 진언종자자는 대부분 육자진언이다.

 

그러나 선운사의 경우와 같이 대비심다라니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진언을 새겨 넣는 경우도 있으며, 사찰의 특성에 맞추어 오륜종자(五輪種子)나 불보살의 종자를 써넣는 경우도 있다. 그 중에서 티베트적 양식을 한 단청의 예는 무위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위사 극락전은 1476년(성종 7) 이전에 지어진 건물로 그 안에는 아미타불과 협시보살로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고, 벽화로 된 후불탱화와 천정의 범자문양 단청이 있다.

 

여기서 우리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범자로 새겨진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종자진언(種字眞言)이다. 

 

즉 천정에는 란자체에 가까운 문자로 아미타불의 종자자인 흐리를 중심으로 관세음보살의 진언인 옴마니파드메훔의 육자진언이 쓰여 있다. 이와 같은 진언종자의 양식은 티베트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매우 희귀하다.

 

이 양식은 티베트 불교에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부모의 관계로 보고, 석물이나 건축물에 여섯 개의 연잎을 그린 다음, 그 하나 하나의 잎에 육자진언을 새겨 넣고, 그 가운데에 아미타불의 종자자인 흐리를 안치하는 방식을 채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옴 훔 마 흐리 드메 니 파. 8) 금강저와 금강령 고려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금강저(金剛杵)와 금강령(金剛鈴)은 현재 한국불교의 의식에서는 그다지 쓰이고 있지 않으나 밀교경전에 의거한 수행법에서는 널리 쓰인다.

 

현재 우리 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금강저의 형태는 티베트 계통의 것과 당나라 계통의 것들을 응용한 한국 독자의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당나라 계통의 것을 계승한 송광사 전승 금강저의 경우, 쥐는 부분에 꽃무늬를 새겨 넣은 십각형(十角形)의 삼고금강저(三股金剛杵)이며, 제작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이 금강저의 양쪽 끝에 있는 세 개씩의 뿔은 불(佛)·연(蓮)·금(金) 삼부(三部)나 신(身)·어(語)·의밀(意密)의 삼법(三法), 탐(貪)·진(瞋)·치(痴)의 삼독(三毒) 퇴치 등을 의미한다. 나아가서 고래로 수행자가 손에 삼고저를 쥐면 마군(魔軍)들이 장난을 치지 못하며, 호마(護摩)의식이나 염송을 할 때 왼손에 금강저를 쥐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진언집(眞言集)》에 의하면 금강저를 잡을 때에는 집저진언(執杵眞言)인 “옴 바즈라 카데 하”, 금강령을 흔들 때에는 집령진언(執鈴眞言)인 “옴 바즈라 카데 훔”을 독송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밀교의 수행법에서 금강저의 용도는 항마(降魔), 삼독제거(三毒除去), 지혜발현(智慧發現)을 위한 행법(行法)에 쓰이며, 금강령은 불보살을 소청(召請)할 때 쓰인다. 송광사와 월정사에 전해지고 있는 금강령은 다 같이 손잡이의 끝 부분이 세 개의 뿔을 가진 삼고의 형태로 소청은 물론 항복이나 식재(息災)를 위한 의식에 널리 쓰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금강령에는 그것을 입증이라도 해주듯이 령(鈴)의 몸통 사방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이와 같은 한국 독자의 금강저와 금강령이 제작된 것은 고려시대 이후, 즉 티베트와 몽골불교가 전래된 이후의 일로 여겨지며, 《진언집》과 같은 의식집이 편찬되면서 밀교적 의식차제에 이것들이 활용되었다고 생각된다. 

 

9) 산개 산개(傘蓋)는 흔히 일산(日傘)이라고도 부른다. 티베트에서는 팔길상문(八吉祥紋)의 하나로 불개(佛蓋)·린포체개(蓋)·탐개(塔蓋)의 세 종류가 있으며, 비와 이슬과 먼지를 막기 위해서 덮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체의 중생을 외부에서 오는 장애로부터 감싸서 보호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흔히 관정(灌頂)의 산개행도(傘蓋行道)를 할 때 사용된다. 산개행도란 관정을 내릴 때 제자에게 관정의 인명(印明)을 내린 뒤, 작은 단을 나와서 큰 단 앞에 선 제자로 하여금 만다라에 세 번 예를 표하게 한 다음, 세 번 돌게 할 때, 아사리가 산개를 들고 제자의 머리에 올려 놓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법구로서 산개가 쓰인 예는 매우 드문 일인데, 산개의 용도로 보아서 당시 법통을 계승할 때 쓰였거나 승병으로 출전한 승군들에게 불보살의 가호를 빌기 위해서 관정을 내리는 데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우리 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것 가운데 그 대표적인 예로 대흥사 박물관의 산개를 들 수 있다. 

 

10) 금고(金鼓) 고려시대 제작되어 일본의 나가사키현 보광사(普光寺)에 전해지고 있는 이 금고에는 실담종자 진언이 새겨져 있다. 제작시기는 1322년(忠肅王 9)을 전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와 몽골간의 교류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이다.

 

금고의 표면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거기에는 반야심주(般若心呪)·마니주(摩尼呪)·육자진언 등이 차례로 새겨져 있다. 

 

즉 그 첫번째 부분에는 “아 가테 가테 파라”, 두번째 부분에는 “가테 파라 삼가테 보디 스바하 훔”, 세번째 부분에는 “이 타드야타 옴 마니 마니 마하마니 스바하 옴 마니 파드메 훔(지장보살의 세계를 이루리라! 말하자면 성스런 보배 중의 보배 커다란 보배의 행운이 있으리! 성스런 보배와 연꽃이 함께하리라! 모든 장애는 사라지게 되며, 내 몸을 지켜주리라!)”이라는 종자자와 진언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 진언의 성격을 나누어 보면 반야심주를 첫번째 부분과 두번째 부분에 넣고, 세번째 부분에는 육자진언과 재보 획득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마니주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마니주는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의 일부분을 분리시켜 별개의 진언으로 활용한 것이다. 진언종자의 내용을 보면 참으로 소박하면서도 현세복락을 추구하기 위한 선인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즉 이 금고의 제작발원자는 맨 먼저 본불생(本不生)의 세계를 아자(阿字)로 나타내고 나서 반야심주를 통하여 피안이라는 곳에 완전히 이르렀을 때, 그 세계는 어떤 곳인가를 육자진언과 마니주를 통하여 표현했다. 즉 그곳은 연꽃이 만발한 세상에 자비와 재보가 충만하고, 모든 서원이 이루어진 곳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발원자의 기원을 진언과 종자자를 통하여 법구에 나타낸 것은 고려시대 이후 몽골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이루어졌다. 

 

11) 범종 우리 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범종 가운데에서 티베트와의 관련성을 분명히 해주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개성 연복사지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범종일 것이다.

 

이 범종은 북한 보물3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개성 남문의 누각에 봉안되어 있다. 이 종의 형식은 원나라의 것을 따르고 있으며, 고려시대 범종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쌍용으로 이루어진 용뉴(龍紐)의 바로 아랫부분의 동서남북면에는 각각 삼존불을 한 단위로 한 4방에 불보살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각각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아촉불·보생불·불공성취불을 중존으로 한 삼존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비로자나불·석가모니불·아미타불·약사여래라는 견해도 있으나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삼존불보살의 바로 아랫부분에는 횡(橫)으로 란차(Lancha)문자로 된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가 새겨져 있다.

 

그 바로 밑에는 란차문자로 된 불정존승다라니와 티베트 문자로 된 오불진언(五佛眞言)이 새겨져 있다. 종의 아랫부분에는 종명(鍾銘)을 새기고, 그 아래에 섬세한 파도물결 무늬가 둘러싸고 있다. 종의 맨 아랫부분은 반원을 그리고 그 사이에 팔궤를 나타내고 있다. 

 

이 종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2년인 몽골의 순종(1346) 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범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찬문(撰文)은 이곡(李穀)이 짓고, 서(書)는 성사달(成師達)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원에서 파견된 자정원사(資正院使) 강공(姜公), 좌장고부사(左藏庫副使) 신예(辛裔) 등이 연복사의 대종(大鐘)이 오래되고 낡았기 때문에 금강산에서 개주(改鑄)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글자는 해서체(楷書體)로 쓰여 있다.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티베트 문자로 된 오불진언(五佛眞言)이다. 이 진언은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범종에서 발견된 예가 없으며, 《금강정경》계통의 수행법이 행해진 티베트·몽골 지역에서만 이와 같은 양식을 채용하고 있다. 

 

12) 윤장대(輪藏臺)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윤장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티베트 인들의 신앙생활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마니륜통(摩尼輪筒)이다.

 

최근에는 용문사의 윤장대와 그 형식은 다르지만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티베트의 것을 채용한 마니륜통을 제작하여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법구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일본에도 용문사의 윤장대와 같은 형태의 것이 남아 있다. 아마도 이것들은 티베트에서 전래되어 몽골, 고려를 거처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은 티베트의 것과 크기와 형태에서 큰 차이가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고려시대 예천 용문사에 설치된 것이 유일하게 전래되고 있다. 윤장대가 만들어진 것은 고려시대 명종 20년(1190)년의 일이며, 전설에 의하면 이 윤장대를 돌리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며, 윤장대를 못보고 죽으면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는다고 한다.

 

현재 대장전에는 한 쌍의 윤장대가 있는데 전체가 팔각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속에는 경전을 넣을 수 있는 공간과 돌릴 수 있는 손잡이가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윤장대도 티베트의 마니륜통과 같이 그것을 돌림으로써 공덕을 쌓으려고 했던 당시의 법구였다고 생각된다.

 

목차 4. 맺음말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티베트 불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던 부분에서 여러 모로 한국불교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오지에 위치한 티베트는 그들이 처한 환경적 악조건을 정신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불교를 수용하였으며, 그 속에서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창출해 냈다. 그들은 7세기 초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문자를 제정하고, 산스크리트로 된 경전들을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세계 최대의 분량과 정확성을 가진 티베트 대장경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내부적으로 경전과 수행법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경율론 삼장의 분량과 맞먹을 정도의 찬술집을 편찬해냈다. 근래에 와서는 달라이 라마 14세를 중심으로 티베트 불교의 세계화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참으로 불교를 통한 정신문화의 위대함이 티베트 인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아니할 수 없다.

 

우리들은 과거 몽골을 통해서 전래된 우리 문화 속의 티베트 불교문화를 재조명하면서 티베트 불교의 가치를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허일범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및 일본 高野山大學 대학원 밀교학과 졸업. 밀교학박사·밀교전법아사리. 현재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연구위원·진각대학 밀교학과 교수. 역서 및 논저로 《불교 속의 밀교》 《밀교의 역사》 《티베트어의 기초와 실천》 《고전티베트어》 《망월사본 진언집 연구》 《몽골불교의 고려 전래 연구》 《카마라시라 수습차제역주》 《라사판 티베트대장경 연구》 등이 있다. -------------------------------------------------------------------------------- ▶ 출처 문헌 - 계간 『불교평론』 2000년 겨울호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 불교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 불교- 허일범교수 화이트타라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 불교 - 목차 - 1. 머리말 2. 티베트와 한국의 인적 교류 약사 3.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몽골 불교 4. 맺음말 허일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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