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번문답(風幡問答)
육조 혜능(慧能) 선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육조 혜능(慧能)이 오조 홍인(弘忍) 선사로부터 법맥을 이어받았으나 시기하는 무리들이 있어 이들을 피해 다니느라 15년을 숨어서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행자 신분으로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 나타났다.
그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나부끼자 두 승려가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한 승려는 “깃발이 펄럭이는군요.”하니,
다른 승려는 “바람이 부는 거지요.”라고 했다.
그러니 “당신 눈에는 펄럭이는 깃발이 보이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다른 승려는 “깃발에 발이 달렸습니까, 손이 달렸습니까! 깃발이 움직이는 주체라면 바람 없이도 움직일 수 있어야지요. 바람 없이 움직이지 못한다면 깃발이 주체가 아니라 바람이 주체지요.”라고 했다.
그러니 다시 그 한 승려는 “뭐요? 바람이란 것이 실체가 있다면 스님의 말을 인정하겠지만, 바람이란 일정한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결국 깃발이 펄럭이는 현상을 통해서만 바람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오. 따라서 깃발이 펄럭이는 현상을 부정하고 따로 바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스님의 말은 옳지 않소.”
이렇게 두 승려는 서로 자기주장만 옳다고 맞서고 있었다. 그때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 행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점잖은 토론에 속인이 한마디 끼어들어도 괜찮겠습니까?”
편들어줄 사람이 아쉬웠던 두 스님이 동시에 말했다. “당신이 말해 보시오. 깃발이 움직입니까, 바람이 움직입니까?”그러자 행자(혜능)가 말했다.
불시풍동(不是風動 :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불시번동(不是幡動 :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인자심동(人者心動 : 그대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풍번문답(風幡問答)이다. 문답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움직이는 건 바로 우리들 마음이라는 간결한 메시지가 시대를 초월한 울림으로 전해오고 있다. 즉, 외부 현상은 덧없고, 어쩌면 마음의 작용에 불과할 뿐이라는 불가의 진리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이란 실제 고정된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無相]. 대부분 이 사실을 모르고 대상에 고정관념[念]을 일으켜 고유한 특성을 가진 뭔가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는 헛된 관념들을 이리저리 엮어 온갖 주장을 펼친다. 그건 번뇌를 늘리는 짓일 뿐이다.
행자의 말이 떨어지자 논쟁하던 당사자는 물론 웅성이며 어느 한쪽 의견에 동조를 하고 있던 대중들은 모두 삽시간에 침묵에 빠졌다. 움직인 게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닌 마음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대승교 진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무리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이오?”
“그냥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풍번문답을 지켜본 당시 법성사 주지 인종(印宗, 627~713) 법사가 그 행자를 데리고 가서 물었다.
“두 승려 다툼의 의미는?”
이에 그 행자가 말했다.
“바람과 깃발을 두고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논쟁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지요. 이기고 지는 데에 마음이 끌려서 다툰다면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불법은 각자 스스로 깨닫고 수행해야 하는 것이지, 입으로 논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에 인종은 그 행자(혜능)를 상석으로 맞아 깊은 뜻을 물었다.
“오래전부터 황매(黃梅)의 의발(衣鉢)과 법(法)이 남방으로 갔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행자가 바로 그 오조의 법통을 이어받은 분입니까?”
이에 행자는 “부끄럽습니다.”라는 대답으로 자신이 육조임을 밝혔다. 이에 인종은 예를 갖추어 가르침을 청했다.
그런데 혜능은 15년 동안 숨어 지내느라 머리 깎을 기회가 없었다. 그 내력을 알게 된 인종은 즉시 수계의식을 갖추어 혜능을 삭발해 비구계를 내리고 스승으로 섬기는 예를 갖추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편의 드라마를 떠올리게 된다. 수계의식에 있어서 계를 내리는 승려는 스승이고, 계를 받아 승려가 되면 마땅히 그 스승의 제자가 되는 것이 불문의 법도이거늘, 스승의 입장에서 계를 준 인종이 오히려 계를 받은 혜능의 제자가 되다니, 불문 법도의 대역전극이 연출된 것이다. 이런 역전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다시없었다.
이 풍번문답이 이루어진 곳 법성사는 현재 광저우(廣州) 광효사(光孝寺)로 절 이름이 바뀌어 있다. 676년에 혜능이 머리를 깎고 정식으로 출가한 곳이다.
[출처] 풍번문답(風幡問答)|작성자 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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