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한국의 불교학자 <10> 안계현 / 황인규
한국 불교사학의 개척자*
[62호] 2015년 06월 01일 (월) | 황인규 hwinq@dongguk.edu |
1. 항상 쉬지 않고 전진하는 학자
필자는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조선조 명재상 방촌(尨村) 황희(黃喜, 1363~1452)의 시제(時祭)를 참관한 적이 있었다. 황희의 묘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황의돈 선생의 묘와 비석을 보고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그분이 바로 동국대 사학과에 재임하셨던 해원거사(海圓居士) 황의돈(黃義敦, 1890~1964) 교수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당시 유명 서예가 배길기(裵吉基) 동국대 교수가 집안 어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동국대에 관심이 가던 터였다. 선생의 후학이 남긴 글에 의하면, 해원 선생은 늘 한복차림에 검은 안경을 쓰고 염주를 가지고 다니면서 진정한 국사교육을 위해 애를 쓰셨다고 한다. 후에 알았지만 이 글에서 소개하는 안계현 선생께서도 스스로 ‘평생 면장’이라며 해원 선생처럼 도수 높은 안경을 쓰신 모습이었다.
하정(荷亭) 안계현(安啓賢, 1927~1981) 선생은 1959년 10월 무렵에 동국대 조좌호 교수의 지도 아래 동학 이용범 교수와 함께 황의돈 선생의 고희기념논총의 편찬을 담당하였고 그 책의 표제는 배길기 교수가 썼다.
필자가 동국대 국사교육과에 입학하게 된 것도 그런 인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학부에 다니면서 불교학생회(동불)의 지도교수 불교학과 목정배 교수, 성관 스님(전 동국대 상임이사)과 미산 스님(중앙승가대 교수)의 지도 아래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런 가운데 동불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한국의 불교사와 동국대의 불교사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학부 졸업 시 제출한 논고가 〈고려 사원노비고〉였다. 평등을 근본 가르침으로 하는 불교계의 사찰에 노비가 왜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자료 수집 중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이자 사원경제 연구의 대가인 이재창 교수의 〈사원노비고〉가 해원 선생의 빛바랜 고희논총에 실려 있었으며, 안계현 선생의 역작 〈여원(麗元) 관계에서 본 고려불교〉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학부 2학년 때 선생은 필자의 전공 첫 수업인 한국고대사를 가르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생께서 55세의 너무 이른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에 선생의 수업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조명기 교수가 선생의 유고집에서 “학문의 연치(年齒)는 무한이니, 짧은 인생의 운명을 서러워하지 말고 이 진리에 붙어서 영생(永生)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가”라고 하신 말씀만이 각인되고 있을 뿐이다.
안계현 선생은 1927년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서 태어났으며, 1940년부터 4년간 경복공립중학교에서 수학했다. 1944년부터 1년간 춘천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하고 1945년 4월 해방될 무렵까지 김포 송정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선생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9월 동국대 전문부 사학과에 들어가 2년간 공부하고 정부수립 보름 후인 1948년 9월 문학부에서 4년간 사학을 전공하였다. 사학과를 졸업한 후 1952년 4월에서 1953년 3월까지 피난처인 부산 해동고등학교에서 강사를 지냈다.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이라는 어수선한 시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학 연구에 매진했던 것은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슬기를 찾아보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3년 동국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해 대학원이 신설되자 선생은 같은 해 4월 불교학과 대학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56년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우리 문화의 정수이자 고려문화를 대표하는 논문 〈팔관회고〉로, 동국대 석사 학위 제1호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선생의 공부 초기에는 불교사가 아닌, 만몽사(滿蒙史)에 관심이 컸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2월 혜화전문학교 학우회 산하에 불교연구부와 더불어 대륙연구부가 설립되는 등 만몽사 연구가 붐을 이루었기 때문인 듯하다. 선생은 학과의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우고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ellendorff, 穆麟德, 1848~1901)의 저서 《만주어문전(滿洲語文典)》 등 만몽사 연구가 도리야마(鳥山喜一)의 대춘초당(待春草堂)에 소장돼 있는 희귀도서를 확보하여 끼니를 걸러가면서까지 공부하는 학문적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 선생이 전공을 바꾼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불교학과 우정상(禹貞相, 1917~1966) 교수와의 인연 때문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선생은 1951년 5월 국방 방위군을 따라 서울에서 필자의 고향이기도 한 온양으로, 또 대구로 피난을 가야 했다. 1951년 대구 피난 시절 고법원장 고재호(高在鎬, 1913~1991) 판사의 집에서 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한 우정상 교수와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한 이광린(1924~2006) 교수와 함께 생활했다.
선생은 1953년 동국대 대학원에 입학한 후에는 불교사 및 사상사 연구에 고집스럽게 매진하였던 학문적 집념의 소유자였다. 원로 사학자였던 이기백 교수가 평한 바와 같이 선생은 항상 쉬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 학자였다. 결코 하나의 단계에 만족하지 않고 발전을 위해 꾸준한 노력과 고민으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2. 동국 사학의 진정한 교수이자 학자
앞서 기술했지만 하정 선생은 1948년 동국대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사학과는 해방 직후 불교학과, 철학과와 더불어 동국대 인문학을 대표하였는데 학과의 창설에는 역대 주임교수였던 김상기와 민영규 두 교수의 힘이 컸다. 한국사의 이병도, 이재욱, 이선근, 이홍직, 홍이섭, 유홍렬, 김성칠, 동양사의 김상기, 민영규, 채희순, 서양사의 김성식, 조의설, 오봉순, 미술사의 김용준 교수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함께하였다. 이미 동국대에는 김동화, 조명기, 김잉석 교수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사와, 권상로, 양주동 교수 등을 중심으로 국학 분야를 포함하는 인문학을 선도하고 있던 터였다.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전의 교수진으로 김영수, 김동화, 에다 도시오(江田俊雄) 등의 불교사, 동양사의 오타니 고우쇼유(大谷勝眞), 민족사회학의 아키바 다카시(秋葉陸), 한국불교사의 권상로, 학술사상사의 이능화, 이병도 선생 등이 재직하였으며, 이들로부터 사학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동국 사학은 동국대의 개교 이래 불교학을 기반으로 동양문화를 정립하자는 기본 정신을 계승하여 전통 인문학의 대표인 문(文)·사(史)·철(哲)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194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병도, 김상기, 민영규 교수가 사학과를 주도하였다. 1948년 8월에 학술지 《동국사학》이 창간되었으며, 6·25 전쟁 시기인 1951년 황의돈 선생과 조좌호 선생이 사학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황의돈 선생은 1942년 그의 나이 52세 되던 해 창씨개명의 비협력자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른 후, 조계종의 초대종정을 지낸 오대산의 중원한암(1876~1951) 스님으로부터 참선 수행을 배우면서 불교에 귀의하였다. 해원 선생은 1936년 이미 유명 일간지에 〈원효대사의 업적〉을 기고한 바 있으며(〈동아일보〉 1936. 1. 7) 1947년에 용주사, 망월사, 범어사 등에서 참선과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후에 〈역사적 대국(大局)의 동향과 불교〉(《백성욱 송수기념 불교학논문집》 1959) 〈원측대사와 원효대사〉(《불교사상》 11, 1962) 등을 연구하여 민족의 역사와 불교의 결합을 시도했다. 이를 두고 하정 선생은 해원 선생이 불교의 연기사상을 바탕으로 한 무한한 생명관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평하였다. 불교 종립학교인 동국대에 재임하는 교수들의 모범이 아닐까 한다.
서울 수복 후 얼마 안 되어 사학과를 졸업한 하정 선생은 이용범 교수와 외부의 고병익, 안정모, 이보형, 길현모, 정운룡 교수 등과 함께 동국대 사학과에 출강하였다. 그 무렵 사학과는 조좌호 교수의 책임하에 선생과 이용범 선생이 지도하고 김창수 선생 등이 주도하여 《동국사학》 제3집을 간행한 바 있다.
선생은 방학이 되어도 연구실을 비우지 않고 항상 학문에 열정을 쏟았으며, 학회지 《동국사학》에 대한 애착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동국대의 사학적 맥락과 그 연계성이 불교에 있음을 선지적(先知的)으로 체달(體達)’하였기 때문이다. 출간 때마다 그 비용을 교수들의 얄팍한 봉급에서 갹출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으며, 제5집 발간 시에는 선생의 독일제 카메라를 맡겨 월 13%의 고리채를 빌려 간행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선생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동국 사학의 학문적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하겠다. 또한 학술지 발간 초기부터 교수와 동문 재학생이 참가하는 가운데 연구 발표회를 여는 등 활발한 연구학술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정 선생은 〈자장율사의 사적과 사상〉(1949년 제5회 발표회) 〈용주사 전답문기〉(1959년 제3회 사학대회) 등을 발표하였고, 《동국사학》에 〈원효의 저서에 보이는 인용서의 일 정리〉(《동국사학》 3, 1955) 〈팔관회고〉(《동국사학》 4, 1956) 〈여대 승관고〉(《동국사학》 5, 1957) 〈의적의 미타정토 왕생사상〉(《동국사학》 7, 1964)을 게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매년 춘·추계 정기 고적답사가 실시되는데, 선생은 1962년도 속리산 법주사 고적답사에서 이용범 선생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천문도(영조 19년 제작)를 발견하여 외국학계로부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선생은 1965년 8월부터 1966년 6월까지 미국 하버드-연경학사(哈佛-燕京學社, Harvard-Yenching Institute)에서 한국사 및 한국 불교문화사 관련 연구를 하였다. 귀국 후에는 하버드대학의 한국학의 동향에 대한 내용을 불교학과 역사학 중심으로 《동국사학》에 소개하였다. 또한 한국 전통문화 속의 불상이나 불교사상과 건축양식, 불교의 역사적 설명, 통일신라의 불교, 《고려대장경》의 간행 등 한국불교에 대한 논문을 영문으로 작성 발표하였다.
선생은 학문적 연구방법에서도 국내외 연구동향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그만의 독특한 학자적 연구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선생은 한국사 연구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국사학자들의 유기적인 결속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국내 유수 학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기백, 한우근, 김철준 등 당대의 학자들과 함께 한국사연구회를 창립, 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연구 및 섭외간사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역사학회와 진단학회 등에 〈신라승 자장에 관하여〉 〈팔관회에 대하여〉 〈신라승 경흥의 미륵정토왕생사상〉을 발표하였다.
선생은 자신의 일념으로 공부에만 전념했고 자기의 전공인 한국불교사 외에는 거의 한눈을 판 적이 없었다. 동학인 이용범 교수는 “국내외의 학회지를 통해서 하정 선생이 발표한 논문은 ‘일자 일구를 소홀히 하지 않은 세밀하고 끈질긴 고구(考究)의 소산’이었기에 누구도 그 추종을 허용치 않는 견실성을 보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또 “관점에 따라서는 천공(天空)을 달리는 듯한 문재(文才)라고 할 수는 없어도, 그가 남긴 논문은 차분한 가운데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독창적인 논지를 전개하였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학계뿐만 아니라 동국대에서 역사나 불교와 관련된 활동도 매우 열심히 하였다. 박물관장을 두 차례(1971~1973, 1980~1981) 역임하면서 황수영 교수와 문명대 교수 등과 함께 1971년 울주 대곡리 암벽을 발견하였으며, 1974년 신라 하대 9산문인 충남 보령 성주사지를 발굴하였다. 두 번째 관장 재직 시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전투와 인연이 있는 예천 용문사와 고려 원진국사 승형이 주석하였던 포항 보경사 관련 유적 유물에 대하여 학술조사를 하였다.
이보다 앞서, 1962년 3월 창립된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개소 시 김법린 총장, 조명기 소장, 이기영 간사, 장원규, 김내석·양주동, 김동화, 김영수, 권상로, 조좌호, 황수영, 황성기, 이용범, 이동림, 한상련 등 동국대 교수들과 함께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우정상, 홍정식, 이재창, 김기동 등 교수들과 함께 기관지인 《불교학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하정 선생은 불교학계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한국불교전서》의 편찬 사업에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동국대의 불교학자와 불교문학자, 불교사학자의 결집인 편찬위원회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당시 총장인 정재각 교수 이하 부위원장 황수영 교수의 주도하에 홍정식, 이재창, 이기영, 김운학, 이지관, 김한주, 박경훈, 신정균 교수 등과 간사로 목정배, 권기종 등이 함께 참여하였다. 1973년에는 《한국불교전서》 편찬을 위한 예비 목록집이라 할 수 있는 《한국불교 찬술문헌 총록》 편찬 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백성욱(1897~1981) 총장 재임 시(1953~1961) 조명기 교수와 《고려대장경》 보존을 위한 《능엄경》 《원각경》 《법화경》 등의 경전 번역사업에 동참했다. 특히 선생은 1975년에는 개교 7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이선근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여 발족한 《고려대장경》 영인본 완간추진위원회가 구성되자 조명기, 우정상, 이용범교수 등과 함께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조명기 총장 재직 시인 1965년 9월에 선생은 우정상, 이용범, 이재창, 남도영, 김영태 교수 등과 함께 《동대 60년사》를 간행한 바 있었다. 1975년 10월 14일부터 1976년 5월까지 이루어진 《동대 70년사》 편찬 사업도 선생과 이용범, 남도영, 목정배, 송혁 등 문·사·철 전공 교수들의 참여하에 이루어졌다. 동국 인문학 전통의 표본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선생은 본업인 학문 학술연구는 물론이거니와 교내외 학회 및 학술연구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동국의 사학을 대표하는 불교사학자였다.
3. 역사학자 최초의 불교사상사 연구
하정 선생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국대 전문부 2년 과정과 문학부 4년의 사학과를 졸업한 후 다시 대학원 불교학과에 입학해 동국대 석사 1호로 특기되고 있다. 그가 쓴 학위논문은 〈팔관회고〉이다. 1975년 그간 연구한 불교사 중에서 정토사상을 정리해 〈신라 정토왕생사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일본 야마구치대학(山口大學)의 니노미야 히로마사(二宮啓任) 교수가 선생의 석사학위 논문에 매료되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정토학의 대가인 교토불교대학의 에타니 류카이(惠谷隆戒, 1902~1979) 교수는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을 극찬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1959년 동국대 사학과 교수가 된 이래 40여 편의 불교학술 논문과 자료 10여 편, 연구 4편, 영문 논문 6편과 20여 편의 교양논문, 그리고 5편의 저술과 1편의 번역서, 국사개설서 3편(2편은 공저)이라는 업적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 신라의 고승 원측, 원효, 자장, 의상 등의 사상과, 연등회와 팔관회 등 불교의례 및 승관제도 등에 관련한 연구가 주목된다. 특히 《신라 정토사상사 연구》(아세아문화사, 1976; 현음사 1987, 재간), 《한국불교사 연구》(동화출판공사, 1982), 《한국 불교사상사 연구》(동국대출판부, 1983)가 대표적인 저서라고 하겠다.
《신라 정토사상사 연구》는 박사논문을 재정리한 것이며, 《한국불교사 연구》는 《한국사》(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대계》 《인물 한국사》 등에 실린 글들을 모은 논문집이다. 그리고 《한국불교사상사연구》는 〈고구려불교의 전개〉 〈신라불교의 제 문제〉 〈고려시대의 불교의식〉 등 사상사와 관련된 논문들을 묶은 것이다.
《신라 정토사상사 연구》는 원효, 경흥, 의적, 법위, 현일의 미륵정토 왕생사상과 신라 정토교학의 제 문제를 다루었다. 길희성 교수는 선생의 신라 정토사상 연구에 대하여 “정토교학의 핵심 논점들을 중심으로 하여 신라 정토사상가들의 교설을 상호 비교해 가면서 잘 정리해 놓고 있다”고 평하였다. 이미 정평이 나 있듯이 신라의 정토사상은 선생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연구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 정토학의 대가도 극찬하였다. 다만 선생이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를 원효의 저술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부정하고 있어서 아쉬울 뿐이다.
《한국불교사 연구》는 신라불교의 전개, 고려불교의 새로운 전개, 억불하의 조선불교를 다룬 유고집이다. 길희성 교수는 “안계현은 해박한 지식으로 한국불교사의 사회적, 시대적 배경과 토착적 전개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김영태, 박종홍, 안계현의 연구는 상호보완적 성격을 띤다 해도 좋으며, 이 셋을 통해 이제 우리는 한국불교사의 다양한 측면들과 함께 그 대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은 진정한 불교사학 연구의 개척자이자 한국의 사상사의 대가였다.
《한국 불교사상사 연구》는 제1편 삼국시대의 불교사상, 제2편 고려불교의 연구,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에서는 삼국불교의 전개와 신라 대중불교의 제 문제를, 제2편에서는 원효와 경흥의 미륵정토 왕생사상을, 제3편에서는 고려시대의 불교의식과 고려불교의 제 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은 불교 위주의 일방적인 연구에서 탈피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불교사를 연구하였다. 뛰어난 안목으로 불교학과 사학을 겸비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교학자 목정배 교수는 선생을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한국불교 교단의 발달에 대하여는 역사학자들이, 한국불교의 교리에 대하여는 불교학자들이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양 측면의 유기적인 연관 아래 한국불교의 사상사적 연구의 측면이 심층화하지 못하였으나, 그(안계현 선생)에 의하여 이러한 경향이 불식되고 한국불교 교리사의 연구가 진일보하였다.” 이 같은 평가에서 보듯 불교학계가 당대 사회를 무시한 채 철학적 연구에 그치거나, 역사학계가 사적 접근만을 중시하여 사상이나 교학적 내용이 빈곤을 면치 못한 단점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하여, 선생은 불교학 내지 불교사상과 역사학 분야를 아울러 회통한 최초의 불교사학자였다. 예컨대 〈불교의 수용과 특질〉 〈한국사에 있어서 불교의 위치〉 등의 논고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한국문화사 대계》의 불교 편 가운데 선생이 저술한 〈고대 불교사〉는 김영태 선생의 《한국불교사》(하)와 더불어 한국불교의 개설서이다.
그 밖에 동국역경원을 통해 《한국 승군보》(동국역경원, 1966)와 번역서 《사명대사 임란기(현대불교신서 19)》(동국역경원, 1979)를 발간하였다.
《한국 승군보》는 머리말이나 서론, 목차 등이 없고 677쪽에서 시작하여 738쪽에 달한다. 제1장 군사 면에서 본 신라불교, 제2장 고려시대 승군, 제3장 조선시대 승군 편으로 이루어졌는데, 제3장이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선생이 후에 〈조선전기 승군〉이라는 논고를 발표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우리 역사에서 승려의 국가적 역할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나아가 승군 사명대사의 사적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의 사적을 모아 편저한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 1681~ ?)의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을 선생이 번역한 것이 《사명대사 임란기》이다.
조명기 교수가 밝힌 바와 같이 선생은 학문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자료 수집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유일한 ‘낙(樂)’이었다고 하였다. 사학도로서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작업인 자료 수집을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신라불교의 윤곽을 모색하고자 고승 승장(勝莊)에 관한 저술의 편린을 찾아내 집록하였다. 승장이 《금광명최승왕경소(金光明最勝王經疏)》를 찬술하였지만 전해지지 않았던 것인데 선생이 일본 학승들의 저술 속에서 관련 제 기록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불교학보》 부록으로 2회에 걸쳐 실렸으며, 《한국불교전서》에 다시 실렸다.
선생은 신라불교 외에도 고려불교의 기본사료인 《고려사》 불교 관계 사료를 모아 재정리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사학연구실에서는 안계현 선생의 지도하에 《고려사》에서 불교에 관한 기사를 발췌해서 사학연구 자료에 공(供)코자 초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미 일제 강점기에 퇴경당 권상로가 세가 편을 중심으로 불교 관련 기사를 뽑아 정리하였으나, 열전과 지(志)는 포함시키지 못하였었다.
선생은 세가와 지를 포함한 보강작업을 거쳐 《동국사학》에 부록으로 7회에 걸쳐 게재하였다. 그 후 동국대 《석림》 편집실에서 창간 10주년을 기념하여 열전을 포함해 보강 작업을 한 후, 《동국사학》에 실린 선생의 원고 및 미정리된 옛 원고와 대조 교열하여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그 후 동국대 역사교육과 출신 효탄 스님이 다시 재료를 검토 및 보강하여 역주와 원문본 2책을 출간하였다. 하지만 석림회 간행본에서도 그러하였지만 《고려사》 권61~권72(禮志, 樂志, 輿服志) 부분이 누락되었다. 특히 예지의 상원연등회의식(권69, 지23, 예11), 중동 팔관의식(권69, 지23, 예11) 악지의 사원 연등(권72, 지26, 여복1) 등 불교의례의 핵심을 이루는 연등회와 팔관회 부분이 누락되었다.
이에 필자가 하정 선생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자료가 누락된 부분을 《동국사학》에 게재하였다. 필자의 하정 선생 추모논고 이후 정성 어린 작업이었으며, 조만간 하정 선생의 작업분과 필자의 것이 종합, 정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4. 한국불교 사상사학의 개척
불교 종립학교인 동국의 불교사학 전통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초의 불교전문학교인 동국대의 불교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개교 이래 동국대와 관련이 깊은 학자들도 동국대의 교수진으로 활동하였다. 대표적으로 권상로, 이능화, 최남선, 김영수, 조명기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찬술한 대표적인 저서는 1953년 초대 동국대학교 총장에 재임하였던 권상로의 《조선불교약사》(1917) 1권, 명진학교 이래 중앙불전 강사이던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상중·하 2책(1918), 1918년 이후 중앙학림 교수를 거쳐 동국대 학장을 지낸 김영수의 《조선불교사고(朝鮮佛敎史藁)》(1930년대 초), 중앙불전 강사였던 최남선의 〈조선불교-동방문화사상에 있는 그 지위〉(《불교〉 74, 1930) 등이다.
선생이 1948년 9월 동국대 학부에 입학한 이후 총장은 허영호(1945~1948, 11), 김영수(1946. 12~1950. 4), 김동화(1950. 5~1952. 5), 권상로(1952. 6~1953. 7), 백성욱(1953. 7~1961. 7) 등 모두 불교학 내지 불교사 전공 교수였다. 선생은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1953년에 대학원 불교학과에 입학하였다. 승격된 동국대의 초대 총장에는 권상로 교수가, 불교대학장(1954~1960)에는 조명기 교수가 취임하였다. 석사과정 불교학과의 강의는 조명기(대각국사 사상연구, 한국불교사)와 김잉석(화엄학개설, 화엄오교장), 이홍직(한국 불교고고학) 교수가 맡았다. 선생의 스승인 조명기 교수는 중앙불전을 졸업하고 1938년부터 강사, 1945년부터 혜화전문학교 강사를 거쳐 불교학과장, 불교대학장에 보임되었다.
조명기(중앙불전 1회) 교수가 재학하였던 중앙불전 출신의 인물들에 의하여 불교학 내지 불교사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즉, 정두석(중앙불전 1회, 제3대 동국대 총장) 장원규(중앙불전 7회,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홍정식(중앙불전 10회,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등의 불교학 연구자와 정종(중앙불전 8회, 동국대 철학과 교수) 등이 동국의 불교 인문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명진학교에 입학하여 중앙불전(1923~1944) 교수를 하였다. 특히 조명기 교수는 광복 후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1962), 《고려 대각국사와 천태사상》(1964) 등의 저술을 내놓는 등 한국불교사에 큰 획을 그었다. 즉 김영수와 권상로, 이능화는 불교학을 기반으로 한국의 불교사학을 개척했고 조명기 교수에 의해 불교사학이 학문적으로 정립되었다.
조명기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선생은 조명기 교수와 우정상 교수 3인이 뜻을 함께하여 한족의 정신, 한족의 불교사상을 탐구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문물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문화를, 현재를 통하여 미래까지 연구하고 발굴하고 다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였으며, 민족정신의 골수가 무엇이며, 혈육이 무엇인가 파헤쳐 보고자 맹서하였다”고 한다. 동국대에서 간행한 《고려대장경》 편찬에도 참여하여 밤을 새운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선생은 학문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자료의 수장을 풍부히 하였으며, 그의 수많은 논문은 모두가 손수 발굴한 새로운 자료를 활용하여 역작을 남겼다. “한국불교의 이해 없이는 한국문화의 올바른 사실을 밝힐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선생은 관계 분야 자료를 두루 수집하고 그와 같은 자료를 통하여 한국불교의 발전과정을 구명함은 물론, 불교가 한국사회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를 철저히 연구한” 불교사학자였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하정 선생은 역사학도로서 불교학자 김영태 교수와 더불어 조명기 교수를 계승한 최고의 한국 불교사학자였다고 하겠다. ■
황인규 /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동국대에서 석·박사학위 취득. 한국 중세사와 불교교육 및 문화사상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 《고려후기·조선초 불교사연구》 《고려시대 불교계와 불교문화》 《조선시대 불교계 고승과 비구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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