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스님 마지막 제자 : 법흥 스님
법흥 스님은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1959년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보성 스님이 효봉 스님의 해인사 조실 시절의 법어를 정리했다면, 법흥 스님은 효봉 스님의 동화사 조실 때의 겨울 한 철 법어를 받아 적어두었다. 또한 효봉 스님이 통영 미래사 토굴에 주석할 때, 그 회상會上의 대중 가운데 한 분이 바로 법흥 스님이다.
▶ 스님께서는 효봉 스님의 마지막 제자로 출가하셨습니다.
“일타(1929~1999) 스님의 소개장을 들고 대구 동화사로 조실이신 효봉 스님을 찾아갔어. 나를 보시더니 효봉 스님이 얼굴이 중 상想인데 이제까지 속가俗家에 있었느냐, 했어. 효봉 스님은 숙명통宿命通이 있으시거든. 전생을 아시거든. 지금은 행자니까 주지스님 모시고 심부름 잘 하고 있으라고 하셨어. 효봉 스님은 워낙 점잖으시거든. 너그럽고 원만하지. 남하고 다투고 시비한 적이 없어. 남 다투는 것을 보면 웃으시지. 시비是非해서 무슨 소용인가, 하시지.”
▶ 효봉 스님께서 법명을 주셨습니다. 어떤 말씀이 있으셨는지요.
“계를 받고 스님을 찾아갔지. 효봉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난 기억력이 아주 좋아. 잊지도 않아. 컴퓨터지. 잘 들어봐. 중 됐으면 참선하지 이 길밖에 더 있겠니. 강사가 죽을 때 후회하고 죽는다.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읽고, 바로 읽어도 생사해탈을 할 수가 없다. 기도하고 주력은 제 욕심 때문에 한다. 중은 화두를 들어야 한다. 내가 공부하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노력하라고 부탁하셨지. 또 이 세상에 종교가 많지만,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아 생사해탈하는 종교는 불교밖에 없다, 고 신심을 부탁하셨고,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셨어. 옆에서 구산 스님과 일각 스님이 나를 보고 정진 잘한다고 하셨지.”
▶ 동화사 계실 때 효봉 스님 법문을 스님께서 받아 적으셨다고 들었습니다.
“1959년도 겨울 한 철 법문을 내가 받아 적었지. 일각 스님께서 받아 적으라고 하셨어. 산중에서 비구니스님 다 내려오고, 강원 학인은 10여 명밖에 없었지. 초하루, 보름 때도 법문 하셨지. 적은 것을 효봉 스님께 보여드리고 다시 고쳤지. 한문은 법정 스님이 김달진 씨에게 보여주어서 해석을 다시 해달라고 했어.”
▶스님과 법정 스님이 동화사 효봉 스님 앞에서 처음 만났죠.
“법정 스님은 나보다 일찍 중이 됐지. 당시 법정 스님은 『선가귀감』을 번역하고 있었어. 법정 스님이 동화사에 왔는데, 그때 처음 봤어. 효봉 스님이 법정이, 법흥이 들어와라, 하셨지. 들어가니, 화두를 어떻게 들고 있느냐, 하셨어. 법정 스님이나 나는 아무 말도 못했지. 법정 스님도 생각이 책에 있었으니까. 그래 화두가 잘 안 들린다고 하니까, 공부 옳게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셨지.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어. 짐승이고, 사람이고, 남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욕을 이겨내지 못한다. 파계破戒는 파기破器라. 계행을 파기하는 것은 깨진 그릇과 마찬가지며, 깨진 그릇에 물을 퍼붓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성불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말세라 근기가 약해 대중 운력의 힘으로 스님 노릇 잘 할 수 있다. 그래서 독살이 절에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여자하고 단 둘이 있으면 이기지 못한다고.”
▶ 동화사에서 한 철 나시고, 1960년에 통영 미래사로 가셨습니다.
“그렇지. 3・15 부정 선거 투표한 후에 효봉 스님을 모시고 갔지. 한번은 미래사에서 마을 사람들과 갈등이 있었어. 미래사 땅을 놓고 마을 사람들 100여 명이 찾아와 미래사 대중들에게 행패를 부렸어. 효봉 스님에게도 아주 막무가내였어. 마침 경찰도 4・19혁명 때문에 없었어. 아주 사나왔지. 시간이 지나 경찰도 마을에 오게 되니까, 좀 안정이 되었어. 그래서 미래사 대중들이 마을 사람들 몇몇을 고소한다고 했지. 그때 효봉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 마을 사람은 속인俗人이고, 우리는 중인데, 중이 속인을 상대로 재판하면 되겠나. 중생계衆生界는 항상 그렇다, 우리가 져야 한다, 재판을 그만두라, 하셨지. 참 …, 효봉 스님 위대한 것을 거기서 알았어.”
▶ 효봉 스님께서 미래사 생활은 어떠셨는지요.
“식사는 아주 간소하셨지. 찬도 나물하고 김치였지. 스님은 전을 좋아하셨어. 늘 눕지 않으셨어. 효봉 스님은 아랫배가 이렇게 불쑥 나왔어. 구산 스님도 단전이 나왔지. 단전이 나오면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나봐. 피로하지 않다네. 우린 그게 안 돼. 건강하셨을 때는 대식가셨지. 한번은 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옆의 노장이 노스님, 국수 잡수실 때도 화두가 들립니까, 하니, 이 사람, 화두가 뭔가, 하셨다니까. 그럴 정도로 많이 잡수셨지.”
▶ 효봉 스님은 미래사에 작은 토굴 하나를 지어서 거기서 계셨다고요.
“당신 혼자서 지냈지. 그 토굴에서 보조 스님 사진 하나 모셔 놓고, 거기에 반절하면서 지냈지.”
효봉 스님은 송광사 삼일암에 주석할 때 1938년 꿈속에서 보조국사 제16세 법손인 고봉국사로부터 법문과 게송 그리고 새로운 법호를 받았다. 효봉학눌曉峰學訥. 그때까지만 해도 은사 스님이 주신 운봉원명雲峰元明이란 법명과 법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효봉 스님으로부터 조계선풍이 진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효봉 스님은 17번째 국사가 아니겠어.
출처 : 월간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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