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무착(無着) 지음
진제(眞諦) 한역
변상섭 번역
섭대승론 상권
1. 의지승상(依止勝相)
1) 중명품(衆名品)
섭대승론은 아비달마의 가르침[阿毘達磨敎]이며, 대승의 수다라(修多羅)이다. 불세존 앞에
서 바르게 대승구의 정의에 들어간 보살마하살은 대승에 수승한 공덕이 있음을 대승의 교설
에 의거하여 드러내고자 하며, 이와 같이 모든 불세존께서는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설하신 것이 비길 데가 없어서 그 밖의 다른 가르침을 뛰어넘는다. 열 가지 수
승한 모습이란 첫째는 응지(應知 : 인식)의 의지(依止)가 수승한 모습이며, 둘째는 응지가
수승한 모습이며, 셋째는 응지에 들어감의 수승한 모습이며, 넷째는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의
수승한 모습이며, 다섯째는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를 닦는 것의 차별의 수승한 모습이다. 여
섯째는 닦음의 차별에 있어서 의지해야 하는 계학(戒學)의 수승한 모습이며, 일곱째는 이 가
운데 의지해야 하는 심학(心學)의 수승한 모습이며, 여덟째는 이 가운데 의지해야 하는 혜학
(慧學)의 수승한 모습이며, 아홉째는 학의 결과인 적멸의 수승한 모습이며, 열째는 지혜의
차별의 수승한 모습이다. 이 열 가지 정의의 수승한 상으로 말미암아서 여래께서 설하신 바
가 그 밖의 다른 가르침보다 우월하다. 대승에서 나타나는 수다라의 문구를 이와 같이 해석
하는 것이 진실로 불설(佛說)이다. 또한 어찌하여 이 가운데 간략하게 설명하여 대승이 그
밖의 다른 교설(敎說)보다 수승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는가? 이 간략한 해석[略釋]으로 이
러한 열 가지 정의를 드러내는 것은 오직 대승에만 있으며, 소승에는 없다. 무엇이 열 가지
인가? 아리야식을 설하여 응지의 의지의 모습이라고 하며, 첫째는 의타성(依他性)이며, 둘째
는 분별성(分別性)이며, 셋째는 진실성(眞實性)인 세 가지 자성을 설하여 응지의 상이라고
하며, 유식의 가르침을 설하여 응지에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하며, 6바라밀을 설하여 들어감
의 원인과 결과의 모습이라고 한다. 보살의 10지를 설하여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를 닦는 것
의 차별의 모습이라고 하며, 보살이 받아 지니며 수호하는 금계(禁戒)를 설하여 닦음의 차별
에 있어서의 계학(戒學)의 모습이라 하고, 수능가마(首楞伽摩)와 허공기(虛空器) 등의 정(定)
을 설하여 심학(心學)의 모습이라고 하며, 무분별지를 설하여 혜학(慧學)의 모습이라고 하며,
무주처열반을 설하여 학의 결과인 적멸의 모습이라고 한다. 세 가지 불신(佛身), 즉 자성신
(自性身)과 응신(應身) 그리고 화신(化身), 이 셋을 설하여 무분별지의 결과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열 가지 처(處)는 오직 대승에만 있어서 소승과는 다르기 때문에 제일(第
一)이라고 한다. 불세존께서는 오직 보살을 위하여 이 열 가지 정의를 설하셨다. 따라서 대
승에 의거하여 모든 불세존께서는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설하신 것이 비길
데가 없어서 그 밖의 다른 가르침을 넘어선다. 또한 다시 어찌하여 이 열 가지 수승한 모습
을 설한 것이 비길 데가 없으며, 대승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이 여래의 바른 교설은 소승이
결코 대승이 아니라고 가로막는다. 소승 가운데에서는 이 열 가지 정의를 일찍이 보지 못했
다. 하나의 정의를 따라 해석하더라도 단지 대승 가운데의 해석을 볼 따름이다. 또한 다시
이 열 가지 정의는 위없는 보리를 이끌어낼 수 있어서, 성취함이 순차적으로 뒤따라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모든 중생이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게송으로 말한
다.
응지의 의지와 상(相)과
들어감·원인과 결과·닦음의 차이와
세 가지 학(學)과 결과인 멸(滅)과
지혜가 위없는 승(乘)에 포섭된다.
열 가지 정의는 다른 곳에는 없으며,
이것이 보리(菩提)의 원인이라는 것을 본다.
따라서 대승은 부처님 말씀이며,
열 가지 정의를 설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수승하다.
어찌하여 열 가지 정의는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하여지는가? 보살은 처음으로 배움에 있어
서 마땅히 먼저 모든 법의 여실한 인연(因緣)을 관하여야 한다. 이 관으로 말미암아 12연생
(緣生)에서 총명한 지혜를 생하게 된다. 이후에 연생하는 법에서 그것의 체상(體相)을 요별
하여야 한다. 지혜로 말미암아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두 극단[二邊]의 과실을 끊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바르게 수행하여 마땅히 연하여지는 여실한 모든 상[諸相]을 통달하여야 한
다. 차후에 모든 장애로부터 해탈하게 되며, 다음에는 마음이 이미 응지(應知)의 실상을 통
달한다. 먼저 행하여졌던 6바라밀을 다시 성취하여 청정케 하고 다시 물러나 상실함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니, 의식 속의 청정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시 의식 속의 청정함에 섭지
되는 모든 바라밀을 10지의 차별에 의거하여 하나를 좇아서 3아승기겁(阿僧祇劫)을 마땅히
수행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보살의 세 가지 학(學)을 원만하게 하여야 한다. 이미 원만하여
진 것은 학의 결과인 열반과 위없는 보리를 차후에도 닦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열 가지
정의의 순서는 이와 같다. 이 순서를 설하는 가운데 모든 대승이 원만하여짐을 얻는다.
처음으로 설하는 이 응지의 의지를 세워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세존께서는 어느 곳에서
이 식을 설하셨으며, 이 식을 설하여 아리야식이라고 하셨느냐? 불세존께서는 아비달마략본
(阿毘達磨略本)의 게송에서 설하셨다.
이 계(界)는 시작함이 없는 때부터
모든 법의 의지이다.
만약 있다면 모든 도(道)가 있으며,
열반을 증득함이 있다.
아비달마 가운데 다시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 의지하고, 간직되고, 머무는
일체종자식이다.
따라서 아리야(阿梨耶)라고 한다.
나는 수승한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
이 아함의 두 게송은 식의 체와 이름을 입증한다.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이 식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하셨는가? 모든 유(有)가 생하는 부정품법(不淨品法)이 이 가운데 숨어 간직되
어 과(果)가 되기 때문이며, 이 식이 모든 법 가운데 숨고 간직되어 인(因)이 된다. 또한 다
시 모든 중생은 아상(我相)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이 식 가운데 간직되기 때문에 아리야식이
라고 한다. 아함에 해절경(解節經 : 解深密經)에 설하여진 것과 같은 게송을 읊고 있다.
집지식(執持識)은 심오하고 미세하며,
법의 종자가 항상 흐른다.
범부에게 나는 설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질[物]을 집착하여 자아[我]로 삼는다.
어찌하여 이 식을 혹은 설하여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 하는가? 모든 색이 있는 제근
[有色諸根]을 잡아 유지[執持]할 수 있어서 모든 생을 받는 취(取)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왜
냐 하면 색이 있는 모든 근은 이 식에 의해 잡아 유지되어 무너지지 않고 상실되지 않으며,
내지는 뒤의 시기에도 서로 이어져서 생을 받는 때에 취음(取陰)을 생하기 때문이다. 6도
(道)의 신(身)은 모두 이와 같은 취이며, 이 취는 식에 의해 잡아 유지되는 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타나라고 이름한다. 혹은 설하여 심(心)이라고 한다. 불세존께서 심·의(意)·식
(識)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의(意)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것과 더불어 차제연(次第
緣)의 의지를 생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멸한 식이 되며, 또한 식이 생하는 의지를 의(意)라
고 한다. 둘째는 더러움에 물드는 의가 있으며, 네 가지 번뇌와 더불어 항상 서로 응한다.
첫 번째는 신견(身見)이고, 두 번째는 아만(我慢)이며, 세 번째는 아애(我愛)이고, 네 번째는
무명(無名)이다. 이 식은 그 밖의 다른 번뇌(煩惱)인 식(識)의 의지이다. 이 번뇌인 식은 첫
째의 의지로 말미암아 생하고, 둘째의 의지로 말미암아 더러움에 물든다. 진(塵)과 차제를
연함으로 말미암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의라고 한다. 어찌하여 더러움에 물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만약 이 마음이 없다면 독행무명(獨行無明)이 있다고 말
할 수 없다. 5식과 더불어 비슷한 이 법(法)은 당연히 없다. 왜냐 하면 이 5식은 공통적으로
일시에 스스로의 의지가 있으니, 안(眼) 등은 안근(眼根)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의명(意名)은 당연히 의(義)가 없어야 한다.
또한 무상정(無想定)과 멸심정(滅心定)은 다름이 없어야 한다. 왜냐 하면 무상정(無想定)
은 더러움에 물든 마음에 의해 드러내어지는 것이 있고, 멸심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만
약 이렇지 않다면 이 두 가지 정(定)은 다르지 않아야 한다.
또한 더러움에 물듦이 없기 때문에 무상천(無想天)에서는 한 시기에 흐름도 없고 상실함
도 없음을 이루어야 한다. 그 가운데 아견과 아만 등이 없다면 그럴 수 있으리라. 또한 모든
시간 가운데 아집을 일으켜서 선과 악과 무기(無記) 가운데 두루하여야 한다.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단지 악심만이 아집 등과 더불어 상응해서만 아(我)와 아소(我所)인 이것이 있으면
행할 수 있고, 선과 무기 가운데서는 곧 행할 수 없다. 만약 두 마음을 동시에 생한다고 정
립한다면 이 과실이 없거나, 만약 여섯 번째의 식과 서로 응한다고 정립한다면 이 과실이
있다.
독행무명(獨行無明)과
이와 유사한 5식이 없고,
두 정(定)에 차별이 없으며,
의명(意名)은 의(義)가 없다.
무상천은 아집이 없다면
한 시기에 생하여 흐름이 없고,
선과 악과 무기 가운데
아집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염오심을 떠나, 있지 않다고 한다면
둘과 더불어 셋이 서로 어긋난다.
이것이 모든 곳에 없다면
아집은 생할 수 없다.
진실한 의(義)를 깨달아 보아버리면
혹장(或障)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항상 모든 곳에 행하므로
독행무명이라고 한다.
이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기 때문에 무기성에 포섭되며, 항상 4혹(惑)과 함께 서로 응한다.
색계와 무색계의 혹과 같이 유부무기(有覆無記)이다. 이 두 계의 번뇌는 사마타(奢摩他)에
소장(所藏)되기 때문에, 이 마음이 항상 생하여 없어지지[廢] 않는다.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세 번째의 체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아리야식을 성취하여 의(意)라 해야 한다. 이것에 의
지함으로써 종자를 삼아 그 밖의 다른 식이 생할 수 있다. 어찌하여 이 의를 다시 설하여
심(心)이라고 하는가? 많은 종류의 훈습종자가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성문승은
이 마음의 상(相)을 설하지 않으면서 아리야와 아타나라는 이름은 설하는가? 미세한 경계에
섭지되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성문인은 일체지지를 얻게 되는 수승한 위계(位階)가 없다.
따라서 성문인에 있어서는 이러한 교설을 떠나서도 지혜를 성취함으로 해서 본래의 원을 원
만하게 하기 때문에 위하여 설하지 않는다. 모든 보살에게는 일체지지를 얻게 되는 수승한
위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위하여 설하신다. 왜냐 하면 이 지혜를 떠난다면
위없는 보리를 얻는 이러한 곳은 없다. 또한 성문승에 있어서는 이 식을 다른 이름으로 여
래께서 일찍이 드러내셨다. 『증일아함경』에 말씀하신 것처럼 세간에서는 아리야를 기뻐하
고 즐거워하며, 아리야를 갈애(渴愛)하고, 아리야를 익히며, 아리야를 집착한다. 아리야를 멸
하기 위하여 여래께서 설하시는 바른 법을 세간은 기꺼이 듣고자 귀를 기울인다. 뜻을 지어
알고자 하여 정근(正勤)을 생하여 일으켜서 이제 아리야를 멸하여 다하는 것을 얻으며, 내지
는 여래의 바른 법과 유사한 법을 받아들여 행한다.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심으로 해서 이
첫 번째로 희유한 불가사의한 법이 세간에 드러나니 본식과 같다. 이 『여래출세사종공덕경
(如來出世四種功德經)』이 다른 정의로 말미암아 성문승에게 이 식을 이미 드러내었다.
또한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의 아함 가운데서는 근본식(根本識)이라는 다른 이름으로써
이 식을 드러내어 마치 나무가 뿌리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했고, 미사색부(彌沙塞部)도 역
시 다른 이름으로 이 식을 설하여 궁생사음(窮生死陰)이라 일컫는다. 왜냐 하면 색과 심이
어느 때에는 서로 이어짐이 단절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이 마음 가운데 그 종자는 단절되
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응지의 의지인 아타나, 아리야, 질다(質多), 근본식, 궁생사음 등의 소
승 가운데의 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아리야식이 이미 왕로(王路)를 이룬다.
또한 어떤 다른 스승은 심(心)·의(意)·식(識), 이 셋이 단지 이름만이 다르고 그 정의는
동일하다고 집착하는데, 이러한 정의는 옳지 않다. 의와 식이 그 정의가 다르다는 것은 이미
보았으니, 마땅히 심의 정의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어떤 다른 스승은 여래께서
세간에서 아리야를 희락한다고 설하신 것을 집착하여,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이 가운데 있
는 5취음(取陰)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한다. 또한 어떤 스승은 즐거움을 받음[樂受]이 탐욕과
서로 응한다는 것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집착한다. 또한 어떤 다른 스승은 신견(身見)을 설하
여 아리야라고 집착한다. 이와 같은 모든 스승들은 아함과 닦아 얻음으로 말미암아 아리야
에 미욱하여, 이와 같은 집착을 일으킨다. 소승의 가르침과 행을 따름으로 해서 이 스승이
세운 정의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리야식에 미욱하지 않다면 소승의 이
름에 있어서 이 식을 세우면 그 정의가 가장 수승하다. 어찌하여 가장 수승한가? 만약 취음
(取陰)을 잡아서 아리야라고 한다면 악취(惡趣)에서 하나의 도(道 : 趣)를 따라 한결같이 고
통을 받는 곳, 거기에서 생을 받는다. 이 취음은 가장 싫어하고 거슬릴 수 있어서, 이 취음
가운데서 한결같이 애착할 수 없으니, 중생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
는다. 왜냐 하면 그 가운데서 중생은 취음이 단절되어 생하지 않기를 항상 원한다. 만약 이
즐거움을 받음이 탐욕과 서로 응한다면 네 번째의 정[第四定]으로부터 그 위의 계(界)에 이
르기까지 모두 이 받아들임이 없다. 만약 사람이 이미 이 받아들임을 얻는다면 상계(上界)를
얻고자 구함으로 해서 곧 싫어함을 생한다. 따라서 중생이 이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한
다는 것은 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만약 신견(身見)이라면 정법 속의 사람은 무아(無我)를
즐거이 믿으니 신견은 애착할 것이 아니므로, 그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생하
지 않는다. 이 아리야식인 중생심을 스스로의 내면에 있는 자아[自內我]로 삼아 집착한다.
만약 도(道 : 途) 가운데서 한결같이 고통을 받음[苦受]을 생한다면 그는 고음(苦陰)이 영원
히 멸하여 다시 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리야식은 아애(我愛)에 의해 얽매여지기 때문에 일
찍이 자아를 멸하여 없애기를 기꺼이 바라지 않는다. 네 번째의 정(定) 이상에서 생을 받는
중생은 비록 다시 즐거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리야식 가운데서 즐거움 받기를 욕구함이
있으니, 스스로 아애를 좇아 따라서 떠나지 않는다. 또한 정법 안의 사람은 비록 다시 무아
를 기꺼이 원해 신견을 피하여 거역하더라도 아리야식 가운데에 역시 스스로 아애가 있다.
아리야라는 이름으로써 이 식을 안립하니 곧 가장 수승하게 된다. 이 이름은 아리야의 다른
이름을 성립시킨다.
2) 상품(相品)
또한 이 식의 상을 세우니,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이 상은 간략하게 설하여 세 가지가 있
다. 첫째는 자상을 세우는 것이고, 둘째는 인(因)의 상(相)을 세우는 것이고, 셋째는 과(果)
의 상(相)을 세우는 것이다. 자상을 세운다는 것은 모든 부정품법의 습기(習氣)에 의하여 그
것이 생할 수 있게 되며, 종자를 섭지하여 그릇[器]을 만드는 것을 자상이라고 한다. 인(因)
의 상을 세운다는 것은, 이 일체종자식이 부정품법을 생하기 위하여 항상 일어나서 인이 된
다. 이것을 인(因)의 상이라고 한다. 과(果)의 상을 세운다는 것은 이 식이 갖가지 부정품법
의 시작함이 없는 습기로 인하여 마침내 생할 수 있다는 것이 과(果)의 상이라고 한다.
무슨 법을 습기라고 하는가? 이 습기라는 이름은 무슨 정의를 드러내고자 하는가? 이 법
은 그것과 서로 응하여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하며, 나중에 변하여 그것이 생하는 인(因)이 된
다. 이것은 드러내어지는 것의 정의이다. 비유하건대 마(麻)가 꽃으로 훈습하는 것과 같이,
마는 꽃과 동시에 생하고 멸한다. 그것이 거듭거듭 생하여 마의 향(香)이 생하는 인이 된다.
만약 사람에게 탐욕 등의 행이 있다면 탐욕 등의 습기가 있다. 이 마음은 탐욕 등과 더불어
같이 생하고 같이 멸한다. 그것이 거듭거듭 생하여 마음의 변이를 생하는 인이 된다. 만약
문혜(聞慧)가 많은 사람[多聞人]에게 많은 습기가 있다면 거듭 들은 것을 사유하여 마음과
함께 생하고 멸한다. 그것이 거듭거듭 생하여 마음을 명료하게 생하는 인이 된다. 이러한 훈
습으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머무는 것을 얻기 때문에 이 사람은 법(法)을 지닐 수 있게 된다
고 말한다. 아리야식에서 이와 같은 도리를 알아야 한다.
이 더러움에 물든 종자는 아리야식과 같은가, 다른가? 다른 물체로 말미암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이 화합하여 비록 분별하기 어렵지만 다르지 않지 않다. 아리야식은 이
와 같이 생한다. 훈습이 생할 때에는 승묘하고 경이로운 공능이 있으니 설하여 일체종자라
고 한다.
어찌하여 아리야식은 오염된 법과 더불어 일시에 번갈아 서로 간에 인(因)이 되는가? 비
유하건대 등불이 심지와 함께 생하고 태우는 것과 같이 일시에 번갈아 서로 인이 된다. 또
한 갈대 묶음이 일시에 서로 의지하며 도우므로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본식은 훈습의
주체와 더불어 번갈아 서로 인이 된다는 그 정의도 이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식은 오
염된 법의 인이 되고, 오염된 법은 식의 인이 된다. 왜냐 하면 이 두 법을 떠나서 다른 인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훈습은 다르지도 않고 여러 종류도 아니면서, 다름이 있고 여러 종류인 모든 법
을 지어 생하는 인이 되는가? 비유하건대 많은 실로 묶은 옷이 여러 가지 색이 없었는데,
염색하는 그릇에 넣은 후에는 옷 위에 갖가지 모양이 마침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
이 아리야식은 여러 가지의 모든 법에 의해 훈습된다. 훈습할 때는 한 가지 성품으로 여러
종류가 없으나, 만약 과(果)를 생하고 물들이는 그릇이 나타나면 헤아릴 수 없는 상모(相貌)
가 아리야식에 현현한다.
대승에 있어서 이 연생(緣生)은 가장 미세하고 깊고 깊다. 간략히 설한다면 두 가지 연생
이 있다. 첫째는 분별의 자성인 연생이고, 둘째는 애(愛)와 비애(非愛)를 분별하는 것이다.
아리야식에 의지하여 모든 법(法)이 생하여 일어나는 것을 자성을 분별하는 연생이라 한다.
여러 가지 법의 인과 연의 자성을 분별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시 12연생이 있으니 애
와 비애를 분별한다고 일컫는다. 선도와 악도에서 애와 비애를 분별하여 여러 가지의 다른
인을 생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아리야식에서 첫 번째의 연생에 미혹하다면 혹은 자성
이 생사의 인이라고 집착하고, 혹은 숙작(宿作)을 집착하며, 혹은 자재하는 변화를 집착하고,
혹은 여덟 가지의 자재아(自在我)를 집착하며, 혹은 인이 없음을 집착한다. 만약 두 번째의
연생에 미혹하다면 아(我)를 짓는 것[作者]이 받는 것[受者]이라고 집착한다. 마치 여러 타고
난 맹인이 일찍이 코끼리를 본 적이 없는 것과 같아서 어떤 사람이 그것을 내보이고 그들에
게 만져보고서 깨닫게 하면, 이 맹인들은 혹은 그 코를 만지고, 혹은 그 치아를 만지고, 혹
은 그 귀를 만지고, 혹은 그 다리를 만지고, 혹은 그 꼬리를 만지며, 혹은 그 등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코끼리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물으면 맹인은 답하여 코끼리는 마
치 쟁기자루 같다고 할 것이며, 혹은 절구공이 같다고 설명할 것이고, 혹은 키 같다고 설명
할 것이고, 혹은 절구통 같다고 할 것이고, 혹은 빗자루 같다고 할 것이고, 혹은 바위덩이
같다고 설명할 것이다. 만약 두 가지의 연생과 무명을 요달하지 못하면 무명으로 타고난 맹
인은 자성을 인이라고 말하고, 혹은 숙작(宿作)이라고 말하고, 혹은 자재변화라고 말하고, 혹
은 8자재아(自在我)라고 말하고, 혹은 인이 없다고 말하고, 혹은 짓는 것이 받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리야식의 체상(體相)과 인과상(因果相)을 요달하지 못한다면 마치 저 눈먼 사람
이 코끼리의 체상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다른 설명을 하는 것과 같다. 간략하게 아리
야식의 체상을 설하면 과보식이며, 일체종자식이다. 이 식이 모든 삼계의 신(身)과 모든 6도
(道)의 4생(生)을 포섭하여 모두 다한다. 이러한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게송으로 읊어 말씀
하셨다.
외종자[外]와 내종자[內]는
두 가지에 있어서 밝게 요달하지 못한다.
단지 가명(?名)과 진실(眞實)일 따름이니,
일체 종자에는 여섯 종류가 있다.
생각생각에 멸하는 것, 모두 갖추어 있음[俱有],
다스릴 때까지 좇아 따르는 것,
결정(決定)하는 것, 인연을 관함,
스스로의 과를 이끌어 드러내는 것이다.
견고하고 무기(無記)이며 훈습할 수 있어서
훈습의 주체와 더불어 상응한다.
만약 이와 다르다면 훈습할 수 없다.
이것이 훈습의 체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6식(識)과는 상응하지 않으니,
세 가지 차별로 서로 어긋난다.
두 생각[二念]은 함께 있지 않으니,
그 밖에 생하는 경우[生起識]에도 이러하여야 한다.
이 외종자와 내종자는
생하는 인과 이끄는 인이 될 수 있다.
메말라 죽어도 여전히 상속(相續)하여
차후에 바야흐로 멸하여 다한다.
비유하건대 외종자와 같이 내종자는 그러하지 않다. 이 의미를 두 구의 게송으로 드러낸
다.
외종자에는 훈습이 없으나,
내종자는 그렇지 않다.
문(聞) 등의 훈습 없이
과를 생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이미 지음과 짓지 않음,
실(失)과 득(得)이 모두 서로 어긋난다.
내(內)와 외(外)가 성립할 수 있으므로,
내종자는 훈습이 있다.
나머지 식은 아리야식과 달라서 생기식이라고 일컬으며, 일체의 생하는 처(處)와 도는 수
용식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변론(中邊論)』의 게송이 설하는 것과 같다.
첫째는 설하여 연식(緣識)이라 하고,
둘째는 설하여 수식(受識)이라 한다.
요별하여 받아들이므로 분별이라 하고
행을 일으키는 것 등의 심법(心法)이다.
이 두 가지 식은 번갈아서 인이 된다. 대승아비달마의 게송에서 설하였다.
모든 법은 식에 숨어 간직되고
식은 법(法)에서 역시 그러하다.
이 둘은 서로 인이 되고
역시 항상 사로 과가 된다.
만약 첫 번째의 연생 가운데에서 모든 법이 식과 더불어 번갈아 인연이 된다면, 두 번째
의 연생 가운데에서 제법은 무슨 연(緣)인가? 증상연(增上緣)이다. 다시 몇 가지 연이 6식을
생할 수 있는가?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즉 증상연(增上緣)·연연(緣緣)·차제연(次第緣)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연생, 즉 첫째의 궁생사연생(窮生死緣生)과 둘째의 애증도연생(愛憎道緣
生) 그리고 셋째의 수용연생(受用緣生)은 네 가지 연을 빠짐없이 갖춘다.
3) 인증품(引證品)
이 아리야식을 이미 여러 가지 이름과 체상으로 말미암아 성립시켰다. 어떻게 이와 같은
여러 이름과 체상으로써 아리야식을 알 수 있는가? 여래께서 체상을 설하신 것도 역시 이러
하며, 생기식을 설하지 않으셨다. 만약 이 이름과 상에 의해 세워진 아리야식을 떠난다면 부
정품과 정품 등이 모두 성취되지 않으며, 번뇌의 부정품·업의 부정품·생의 부정품·세간
의 정품·출세간의 정품 등이 모두 성취되지 않는다.
어찌하여 번뇌의 부정품이 성취되지 않는가? 근본번뇌와 작은 부분의 번뇌에 의해 만들어
지는 훈습종자는 6식에서는 성취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안식은 탐욕 등의 크고 작은 두 가
지 혹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한다. 이 안식은 혹에 의해 훈습되어서 종자를 성립시킨다.
그 밖의 다른 식은 그러하지 않다. 안식이 이미 멸하고 혹은 그 밖의 다른 식이 사이에 일
어나면 훈습과 훈습의 의지는 모두 얻을 수 없다. 안식이 앞에서 이미 끊어져 현재 체가 없
으며, 혹은 그 밖의 다른 식이 사이에 끼여들어서 이미 멸하여 없는 법으로부터 탐욕이 함
께 생함이 있다는 것은 성취될 수 없다. 비유하건대 과거에 사라져 없어져버린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할 수 없음과 같다.
또한 안식이 탐욕 등과 함께 동시에 생한다고 하더라도 훈습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 하
면 이 종자는 탐욕 가운데서는 머무를 수 없으니, 탐욕은 식을 의지하기 때문이며, 탐욕은
서로 이어져서 견고하게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탐욕은 그 밖의 다른 식에서는 역시
훈습이 없다. 의지가 다르기 때문이며, 나머지 모든 식이 같이 생하고 같이 멸하지 않기 때
문이다. 같은 종류는 같은 종류와 더불어 서로 훈습하지 못한다. 일시에 같이 생하고 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식은 탐욕 등의 크고 작은 모든 혹(或)에 의해 훈습되지 않으며,
역시 같은 종류의 식에 의해 훈습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안식을 사량(思量)한다면 나머지
모든 식도 역시 이와 같이 사량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중생이 무상천(無想天) 이상으
로부터 물러나 타락하여 하계(下界)의 생을 받는다면 크고 작은 혹에 오염된 최초의 식, 이
식이 생할 때에는 종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이 혹의 훈습은 의지와 더불어 함께
이미 지나가서 멸하여 남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혹을 대하여 다스리는 식[對治識]이 이미 생하여 나머지 세간의 모든 식이 모두 사
라져 다하였다. 만약 아리야식이 없다면 이 대치식은 크고 작은 혹의 종자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자성해탈이기 때문이며, 무류심은
혹과 더불어 함께 생하고 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에 관(觀)에서 나와 세간심을 일
으킬 때 모든 혹의 훈습이 오래 전에 이미 끊어져 없어졌으니, 유류(有流)의 의식은 종자가
없이 생하는 것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연유로 아리야식을 떠나 번뇌의 오염은 이루
어질 수 없다.
또한 어찌하여 업의 염오가 성립될 수 없는가? 행을 연하여 식이 생한다는 부분이 논리를
이룰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논리가 없다면 취(取)를 연하여 유(有)가 있다는 것도 역시 논리
를 성립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업의 염오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어찌하여 생의 염오라는 이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가? 결생(結生)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부정지(不靜地)로 물러나 타락하여 마음이 중음(中陰) 가운데에 있어
서 염오의 식을 일으키므로, 마침내 생을 받을 수 있다. 이 염오가 있는 식은 중음 가운데에
서 멸한다. 이 식은 모태 가운데서 가라라(柯羅邏)에 의탁하여 변이하고 화합하여 생을 받는
다. 만약 단지 의식이 변이하여 가라라 등을 이룬다면 이 의식을 의지하여 모태 가운데서
다른 의식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이러한 정의는 없다. 모태 가운데서 일시에 두 가지 의
식이 함께 일어난다는 이러한 정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변이한 의식은 의식으로 성립될
수 없다. 의지가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오랜 시간 경계를 연하기 때문이며, 연하여지는
경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의식이 이미 변이하였다면 이 때의 의식은 가라라를
이루어서 이 식이 되니 일체법의 종자이며, 이 식을 의지하여 그 밖의 다른 식을 생하게 되
니 일체법의 종자가 된다. 네가 만약 이미 변이한 식을 이름하여 일체종자식이라고 집착한
다면 이는 곧 아리야식이다. 너는 스스로 다른 이름을 세워 일컬음으로써 의식이라고 말한
다. 만약 네가 의지의 주체인 식[能依止識]이 일체종자식이라고 집착한다면 이런 연유로 이
식은 의지함으로 말미암아서 다른 것의 인을 이룬다. 이 의지처인 식이 일체종자식이 아니
라면, 의지의 주체인 식을 일체종자식이라고 하는 정의는 옳지 않다. 따라서 이 식은 의탁하
여 생하며 변이하여 가라라를 이루니, 의식이 아니다. 단지 과보이며 역시 일체종자라는 정
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만약 중생이 이미 의탁하여 생하며, 나머지 색근(色根)을 잡아
유지할 수 있다면 과보식을 떠나서는 얻을 수 없다. 왜냐 하면 나머지 모든 식이 결정코 다
른 의지가 있으며, 오래 견고하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색근에 잡아 지니는 식[執持
識]이 없다면 역시 색근은 성립될 수 없으며, 또한 마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함께
일어서듯이 이 식과 명색(名色)은 번갈아 서로 의지하므로 이 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과보식을 떠나서는 일체의 생하려고 하거나 이미 생한 중생의 식식을 이룰 수 없다. 왜냐
하면 만약 과보식을 떠나 안식 등 가운데의 어느 하나의 식을 따른다면 삼계 가운데서 생을
받은 중생은 식사(食事)를 짓게 되는 공능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이 생으로부터 명(命)을 버리고 상정지(上靜地)에 태어난다면 산동(散動)의 염오의식으로 말
미암아 그것에서 생을 받는다. 이 염오의 산동식은 정지(靜地) 가운데서 과보식을 떠나서 그
밖의 다른 종자가 있다고 하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만약 중생이 무색계에 태어나
서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 염오심(染汚心)과 선심(善心)을 생한다면 곧 종자와 의지가
없으므로 염오와 선, 두 가지 식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 무색계에서 만약 무류심을 일으
키면 나머지 세간심이 이미 멸하여 다하니, 문득 이 도(道 : 趣)를 버려야 한다. 만약 중생
이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 가운데 생하여 불용처심(不用處心)과 무류심을 일으킨다면, 곧
두 처(處)를 버린다. 왜냐 하면 무류심은 출세심이기 때문에 비상비비상도(非想非非想道)는
그것의 의지가 아니며, 불용처도(不用處道)도 그것의 의지가 아니다. 곧바로 향하는 열반도
의지가 아니다. 또한 사람이 이미 선업을 짓거나 또는 악업으로써 수명(壽命)을 바르게 버린
다면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혹은 상향으로 혹은 하향으로 순차적인 의지의 냉촉(冷觸)이 이
루어질 수 없어야 한다. 이런 연유로 생의 염오는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서는 세울 수
없다.
어찌하여 세간의 정품이 성립하지 않는가? 중생이 만약 욕계(欲界)의 욕을 떠나지 못하면
색계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먼저 욕계의 선심을 일으켜서 욕계의 욕을 떠나기를 구하여 마
음을 관하는 것을 닦아 행한다. 이 욕계의 가행심은 색계심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지
않기 때문에 훈습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욕계의 선심은 색계의 선심의 종자가 아니다. 과
거의 색계심이 헤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밖의 다른 생과 다른 마음에 의해 사이가 가
로막혀서, 나중에 정식(淨識)의 종자를 세울 수 없게 된다. 이미 있지 않기 때문이니, 이런
연유로 이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즉 색계정심(色界靜心)의 일체종자가 과보식에 차례로 전
래하여 인연을 세우게 되며, 이 가행의 선심이 증상연(增上緣)을 세우게 된다. 이와 같이 일
체의 이욕지(離欲地) 가운데서 이와 같은 세간청정품이라는 정의를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
나서는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출세간의 정품을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세울 수 없다고 하는가? 불세존께서 "타
음(他音)을 들음과 스스로의 정사유(正思惟), 이 두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서 정견이 생함
을 얻는다"고 설하셨다. 이 타음을 들음과 정사유는 이식(耳識)과 의식, 혹은 이(耳)·의(意)
두 가지 식을 훈습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만약 사람이 듣는 대로 해석하고 정사유하면 이
때 이식(耳識)이 생할 수 없으며, 의식도 역시 생할 수 없다. 그 밖의 다른 산동분별식(散動
分別識)이 사이에 끼여들기 때문이다. 만약 정사유와 더불어 상응하여 생한다면 이 의식은
오래 전에 이미 끊어져 멸하였으며, 문혜에 의해 훈습된 것은 훈습과 함께 이미 없다. 어찌
하여 나중에 앞의 식이 종자가 되어 뒤의 식을 생할 수 있겠는가? 또한 세간심은 정사유와
상응하고, 출세정심(出世淨心)은 정견과 더불어 상응하여 어느 때건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한
다. 따라서 이 세간심은 정심(淨心)에 의해 훈습되는 것과 관계가 없다. 이미 훈습이 없으니,
출세간의 종자를 이룰 수 없어야 한다. 따라서 만약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난다면 출세간
의 정심은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가운데의 문혜와 사혜의 훈습에는 출세간
의 훈습종자를 섭지할 수 있다는 논리가 없다.
만약 염탁(染濁)을 대하여 다스리는 출세간의 정심의 인을 지을 수 있다면 어찌하여 일체
종자인 과보식이 부정품을 이루는가? 이 출세심은 예로부터 일찍이 습(習)을 생한 적이 없
기 때문에 결코 훈습이 없다. 만약 훈습이 없다면 이 출세심은 무슨 인(因)으로부터 생하는
가? 너는 이제 답하여야 한다. 가장 청정한 법계(法界)의 흐름[所流]인 바른 문훈습(聞熏習)
이 종자가 되기 때문에 출세심이 생할 수 있다. 이 문혜의 훈습은 아리야식과 같은 성질인
가? 다른 성질인가? 만약 아리야식의 성질이라면 어찌하여 이 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종자
를 이룰 수 있으며, 만약 같은 성질이 아니라면 이 문혜의 종자는 무슨 법으로써 의지를 삼
는가?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보리(菩提)의 위계에 이르러서는 이 문혜가 훈습을 생하여 하
나의 의지처를 따라 존재한다. 이 가운데서 과보식과 더불어 함께 생한다. 비유하건대 물과
우유와 같아서, 이 문훈습이 곧 본식은 아니지만 이미 이 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종자를 이
루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하품의 훈습에 의지하여, 중품의 훈습을 생하고 중품의 훈습을 의
지하여 상품의 훈습을 생한다. 왜냐 하면 거듭거듭 문(聞)과 사(思)와 수(修)를 가행하기 때
문이다. 이 문훈습이 하품과 중품과 상품이라 하더라도 법신의 종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리야식을 대하여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생한다. 따라서 아리야식의 성질에 들어가 포섭되
지 않는다. 출세간의 가장 청정한 법계가 흘러나오기 때문에, 비록 다시 세간법이지만 출세
심을 이룬다. 왜냐 하면 이 종자는 출세간의 정심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일체의 상심
(上心)의 혹을 대하여 다스리고, 일체의 악도에 생하는 것을 대하여 다스리며, 일체의 악행
(惡行)을 썩혀서 무너뜨려 대치하며, 이끌어 상속하여 이 처(處)에 생하게 할 수 있어서, 모
든 불보살을 좇아 따르며 받들어 섬기게 한다. 문훈습이 비록 세간법이지만 처음으로 관(觀)
을 닦는 보살이 얻은 것이라도 이 법은 법신이 섭지하는 것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성문과 연각(緣覺)에 의해 얻어진 것이, 해탈신이 섭지함에 속한다면 이 문훈습은 아리
야식이 아니고 법신과 해탈신이 섭지함에 속하여 이와 같이 하품으로부터 중품, 상품으로
차례로 점차 증상하고, 이와 같이 과보식은 차례로 점차 감소하여 의지가 곧 바뀐다. 만약
의지가 한결같이 바뀐다면 이 종자가 있는 과보식은 곧 종자가 없어져서 일체가 모두 멸하
여 없어진다. 만약 마치 물과 우유가 화합하는 것과 같이 본식이 본식이 아닌 것과 함께 생
하고 함께 멸한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본식은 멸하고 본식이 아닌 것은 멸하지 않는다고 하
는가? 마치 물오리가 우유를 마시는 것과 같다. 마치 세간에서 탐욕을 떠날 때에 부정지(不
靜地)의 훈습은 멸하고 정지의 훈습이 증가하여 세간의 전의(轉依)라는 논리가 이루어지듯
이 출세간의 전의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사람이 멸심정(滅心定)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식이 신을 떠나지 않는다고 설하였으
니, 과보식은 정(定) 가운데서도 신을 떠나지 않음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 하면 멸심정은 이
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는가? 만약 이 정(定)으로부터 나온
다면 식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왜냐 하면 이 과보식은 서로 이어짐이 이미 끊어졌
으니, 의탁하여 생함을 떠났을 때에는 다시 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멸심정에 마음이 있다고 설한다면 이 사람이 설하는 것은 곧 마음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 하면 정(定)이라는 정의가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상(相)과 경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며, 선근과 더불어 서로 응한다는 허물 때문이며, 악 및 무기와 더불어 서로
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상(想)과 수(受)가 생하여 일어난다는 허물 때문이며, 세 가지가 화합
함에 있어서 반드시 촉(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정에도 공능이 있기 때문이며, 단지
상(想)을 멸할 따름이라는 허물 때문이며, 신(信) 등의 선근을 작의(作意)하여 생하여 일어
난다는 허물 때문이며, 의지의 주체를 뽑아 제거하는 것은 의지처를 떠나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비유가 있기 때문이다.
일체행이 아닌 것처럼 일체행은 이와 같지 않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색심(色心)이
차례로 생하는 것은 모든 법의 종자라고 집착한다면 이 집착은 옳지 않다. 왜냐 하면 이미
앞의 과오가 있으면서 다시 다른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허물이란, 만약 사람이 무상천
으로부터 퇴타하거나 멸심정에서 나온다면 이 가운데서 집착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며, 아
라한의 최후심도 역시 성립할 수 없다. 만약 차제연(次第緣)을 떠난다면 이 집착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약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서는 정·부정품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마음이 있다는 정의가 성취되므로 앞에 설하여진 상을 믿어 알아야 한다. 이제
다시 게송을 짓는다.
보살은 선식(善識)에서
그 밖의 다른 5식(識)을 떠나
다른 마음이 없다면
전의(轉依)는 무슨 방편으로 지을 수 있는가?
만약 대치(對治)가 전의라고 한다면
멸함이 아니므로 성립하지 않는다.
과와 인이 멸(滅)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는 것은 곧 허물이다.
종자도 없고 법도 없음이,
전의가 된다고 편든다면
무(無)에 있어서 두 가지가 없기 때문에
전의라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4) 차별품(差別品)
이 아리야식의 차별은 무엇인가? 간략하게 설하여 혹은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차별이다.
세 가지란, 세 가지 훈습으로 말미암아 다르기 때문에 언설과 아견과 유분의 훈습의 차별이
라고 한다. 아견의 훈습의 차별로 말미암으며, 유분의 훈습의 차별로 말미암는다.
네 가지란 이끌어 생함[引生]·과보·연하는 상[緣相]·상모의 차별이다. 이끌어 생함의
차별이란 훈습이 새로 생함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행을 연하여 식이 생하고, 취(取)를 연
하여 유(有)가 생한다는 이러한 정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과보의 차별이란, 6도(道) 가운데
서 행(行)에 의해 이 법이 성숙한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나중에 생을 받을 때 갖고 있는 모
든 법이 생기한다는 이런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연하는 상의 차별이란 이 마음 가운데
소취(所取)는 오직 식만이 있을 뿐이다.
함께하지 않는[不共] 본식차별은 깨우쳐 생을 받음이 있는 종자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중생세계를 생하는 연(緣)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함께하는[共] 아리야식은 생을 받음이 없는
종자이며, 이것이 없다면 기세계를 생하는 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거칠고 무거운 상
식(相識)과 미세하고 가벼운 상식이 있다. 거칠고 무거운 상식이란 크고 작은 두 가지 혹의
종자를 말하며, 미세하고 가벼운 상식이란 모든 유루(有漏)의 선법종자를 말한다. 만약 이
식이 없다면 앞의 업으로 말미암은 과는 수승한 공덕이 있는 의지와 수승한 공능이 없는 의
지의 차별을 성립할 수 없다.
또한 받음이 있는 상(相)과 받음이 없는 상, 두 가지의 본식이 있다. 받음이 있는 상이란
과보를 이미 숙성시킨 선악의 종자식이며, 받음이 없는 상이란 명언(名言)이 훈습한 종자이
다. 헤아릴 수 없는 때의 희론이 종자를 생하여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식이 없다면 선
과 악의 두 가지 업을 짓든지 짓지 않든지 간에 과보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서 수용(受用)
하여 다한다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처음 생한 명언의 훈습이 생하여 일어난다는 것도
역시 성립할 수 없다.
또한 비유의 상(相)인 식이 있다. 마술, 아지랑이, 꿈의 영상, 눈병 등과 같이 비유하는 첫
번째의 식은 이러한 일과 유사하다. 만약 이 허망한 분별의 종자가 없다고 하면 이 식은 전
도된 인연을 성립하지 못한다.
또한 갖춘 상[具相]과 갖추지 않는 상[非具相]이 있으니, 만약 중생을 갖추어 얽맨다면 갖
춘 상이 있고, 만약 세간의 탐욕을 떠남을 얻는다면 손해상(損害相)이 있다. 만약 배움이 있
는 성문과 모든 보살이라면 한 부분을 멸하여 떠난 상이 있고, 만약 아라한과 연각과 여래
라면 모든 부분에서 멸하여 떠난 상이 있다. 왜냐 하면 아라한과 독각은 혹장(惑障) 하나만
을 멸하고, 여래께서는 혹장(惑障)과 지장(智障), 둘 다를 멸한다. 만약 이러한 번뇌가 없다
면 순차적으로 멸하여 다한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
어찌하여 인연은 선과 악의 두 가지 인식현상인데 과보는 오직 무부무기(無覆無記)인가?
이 무기성은 선과 악, 두 인식현상과 더불어 함께 일어나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선과 악의
두 가지 법은 스스로 번갈아서 서로 어긋난다. 만약 과보가 선과 악의 성질을 이룬다면 번
뇌를 해탈함을 얻는 방편이 없다. 또한 선과 번뇌를 일으킬 수 있는 방편이 없다. 따라서 해
탈과 얽매임이 없다. 이러한 두 가지 정의가 없기 때문에 과보식은 결정코 무부무기성이다.
2. 응지승상(應知勝相) ①
이와 같이 응지(應知 : 인식)의 의지의 수승한 모습을 이미 설하였는데, 인식의 수승한 모
습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 응지의 수승한 모습은 간략히 설해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는 의타성의 상이고, 둘째는 분별성의 상이고, 셋째는 진실성(眞實性)의 상이다.
의타성의 상이란, 본식이 종자가 되며 허망분별에 의해 섭지되는 모든 식의 차별이다. 무
엇이 차별이 되는가? 즉 신식(身識)·신자식(身者識)·수자식(受者識)·응수식(應受識)·정
수식(正受識)·세식(世識)·수식(數識)·처식(處識)·언설식(言說識)·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
)·선악양도생사식(善惡兩道生死識)이다. 신식·신자식·수자식·응수식·정수식·세식·수
식·처식·언설식 등의 이와 같은 식들은 언설로 훈습된 종자로 인하여 생하고 자타차별식
은 아견이 훈습한 종자로 인하여 생하며, 선악양도생사식은 유분(有分)의 훈습종자로 말미암
아 생한다. 이와 같은 여러 식들로 말미암아 일체의 계(界)와 도(道 : 途)는 번뇌에 의해 섭
지된다. 의타성이 상이 되어 허망한 분별이 곧 현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식들은 허망한 분별에 의해 섭지되지만, 유식(唯識)이 체가 된다. 있지 않는 허
망한 진(塵)이 현현하는 의지가 이름하여 의타성의 상(相)이다. 분별성상이란 실제로 진이
없으나, 오직 식만이 있는 체(體)가 현현하여 진이 되는 것을 분별성의 상(相)이라고 한다.
진실성상이란 의타성이다. 이 진(塵)의 상이 영원히 있는 것이 없으나, 이것이 실제로 없지
않음으로 해서 진실성의 상(相)이라고 한다.
신식과 신자식과 수자식으로 말미암아서 안(眼) 등의 6내계(內界)를 섭지한다는 것을 알
아야 하며, 응수식으로써 색 등 6외계(外界)를 섭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정수식으로써
안 등 6식계(識界)를 섭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식들이 근본이 되고, 그 외의 다
른 식은 이 식의 차별이다.
이와 같이 많은 식들은 유식(唯識)이다. 진(塵) 등이 없기 때문이다. 꿈 속의 꿈들과 같다.
모든 바깥의 진을 떠나 한결같이 유식이다. 여러 가지의 색·소리·향기·맛·느낌과 집·
숲·땅·산 등의 모든 진이 여실하게 현현하지만 이 가운데 하나의 진도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비유로 말미암아 일체처는 오직 식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말들
로 말미암아서 마술·아지랑이·눈병 등의 비유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이 보게
되는 진(塵)은 일체처에 오직 식이다. 꿈 속의 진과 같아서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꿈 속의
진은 오직 식이라는 것을 요별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깨어 있을 때 어째서 이와 같지 않는가? 이러한 의미가 없지 않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이미 진여지각(眞如智覺)을 얻었으면 이러한 깨어 있음이 없지 않다. 마치 사람이 바
로 꿈 속에 있어서 깨어나지 않으면 이 깨달음은 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사람이 이미
깨어나면 마침내 이 깨우침이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진여지각을 얻지 못하면 이러한 깨우
침은 역시 없다. 만약 사람이 진여지각을 이미 얻게 되면 이러한 깨달음은 반드시 있다. 만
약 사람이 진여지각을 얻지 못하면 오직 식만이 있는 가운데서 어찌하여 추론적인 지식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는가? 성스러운 가르침과 진리로 말미암아서 가히 추리하여 헤아릴 수
있다. 성스러운 가르침이란 『십지경』 가운데 불세존께서 "불자여, 삼계란 오직 식만이 있
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
또한 『해절경』에서 설하신 것과 같다. "이 때 미륵보살마하살은 불세존께 여쭈었다. '세
존이시여, 이 색상(色相)이 정심(定心)이 연한 바의 경계라면 마음과 다른 것입니까?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까?' 불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심과 다르지 않다. 왜냐 하면 나
는 오직 식만이 있다고 설하였으니, 이 색상의 경계는 식에 의해 현현하여지는 것이다.' 미
륵보살이 이르기를 '세존이시여, 정경계(定境界)의 색상이 다르지 않다면 어찌하여 이 식이
이 식을 취하여 경계를 삼는다고 하십니까?' 불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그 밖의 다
른 법을 취할 수 있는 법은 있지 않다. 비록 이 식을 취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변하여 생하여서 진(塵)과 같이 현현한다.' 마치 면(面)에 의해서 면을 보면서 나는 그림자
를 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그림자는 또 다른[異] 면과 같이 현현한다. 정심도 역시 이
러하니, 진과 같이 현현하는 것은 정심과 다르다고 말한다.'"이러한 아함과 성립된 도리로
말미암아 유식의 정의가 드러난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이 때 관(觀)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의 관 가운데 있으면서, 만약 청색과 황색 등 널리 들
어오는 색상을 본다면 곧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지, 파란 것과 노란 것 등의 색(色)인 그
밖의 다른 경계를 보는 것이 아니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일체의 식 가운데서 보살은 유
식을 이와 같이 추론하여 아는 것을 일으켜야 한다. 푸른 색과 노란 색에 대한 식은 보는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억지식이 아니다. 문혜와 사혜의 두 위계에서는 기억하
는 의식(意識)인 이 식은 과거의 경계를 연하여 과거의 경계와 같이 일어난다. 따라서 유식
의 정의가 성립할 수 있다. 이 추론적인 지식으로 말미암아서 보살이 진여지각을 얻지 못한
다 하더라도 유식의 정의에 대해 추론하여 앎[比智]를 생할 수 있다.
이 여러 가지 식을 앞에서 이미 설하였는데, 예를 들어 마술과 꿈 등과 같은 것들 가운데
서 안식 등의 식이 유식의 정의를 이룰 수 있는가? 안식과 색식 등의 식에는 색이 있는데,
어찌하여 유식의 정의를 볼 수 있다고 하는가? 이 식들은 아함과 도리로 말미암아 앞에서와
같이 알아야 한다. 만약 색이 식이라면 어찌하여 색과 같이 현현하는가? 어찌하여 서로 이
어져 굳게 머무르며, 앞의 것과 뒤의 것이 서로 같은가? 전도(顚倒) 등의 번뇌의 의지로 말
미암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의(義)가 없는 곳에서 의를 일으키는 전도가 성립할
수 없다. 만약 의(義)의 전도가 없다면 혹장 및 지장, 이 두 가지 번뇌가 곧 성립할 수 없다.
만약 두 가지 장애가 없다면 청정품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식은 이와 같이
생하여 일어난다는 것이 옳다고 믿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어지러운 인(因)과 어지러운 체(體),
색식과 색이 없는 식,
만약 앞의 식이 없다면
뒤의 식도 생할 수 없다.
어찌하여 산식·신자식·수자식·응수식·정수식은 모든 생하는 곳에서 다시 서로 긴밀하
게 화합하여 생한다고 하는가? 생을 받아 드러나는 바를 충분히 갖추었기 때문이다. 어찌하
여 세식(世識) 등은 앞에서 설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차별이 생하는가? 시작함이 없는 때로
부터 생사가 서로 이어져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며, 섭지되는 중생계가 헤아릴 수 없기 때문
이며, 섭지하여지는 기세계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며, 섭지된 것을 헤아릴 수 없이 작사
(作事)하여 다시 서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며, 섭지된 차별을 헤아릴 수 없이 섭지하고 받
아들여 쓰기 때문이며, 섭지하여진 애착과 미움의 업과 과보를 헤아릴 수 없이 받아 쓰기
때문이며, 섭지된 차별을 헤아릴 수 없는 생과 사가 증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식들을 바르게 판별하여야, 유식의 정의를 성립시키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세 가지 모습
이 있으니, 모든 식은 곧 유식을 이룬다.
오직 식량(識量)만이 있음이니, 바깥의 진(塵)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둘이 있음이니,
즉 상식(相識)과 견식(見識)에 의해 섭지되기 때문이다. 종종(種種)은 섭지된 것을 서로 생
하기 때문이다. 이 정의는 어떠한가? 이 모든 식은 진이 없기 때문에 유식을 이루지만, 상이
있고 견이 있어서 안 등의 모든 식이 색 등으로써 상이 되기 때문이며, 안 등의 모든 식이
모든 식으로써 견이 되기 때문이다. 의식은 모든 안식에서부터 법식까지로써 상이 되기 때
문이며, 의식(意識)은 의식으로써 견이 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이와 같이 말하는가? 의식
이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며, 모든 식과 같은 진분(塵分)을 생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
송으로 읊는다.
유량(唯量)과 유이(唯二) 그리고 종종(種種)에 들어감을
관을 행하는 사람은 설한다.
유식에 통달했을 때와
식을 굴복시켜 떠난 위계에서.
모든 스승은 이 의식이 여러 가지의 의지로부터 생하여 일어나므로 종종이란 이름을 얻는
다고 설명한다. 비유하건대 의업을 지음과 같이 신업과 구업 등의 업의 이름을 얻는다. 이
식이 모든 의지에서 생하는 여러 가지 상모는 두 가지 인식현상[法]과 유사하게 나타난다.
첫째는 진(塵)과 같이 나타나고, 둘째는 분별과 같이 나타난다. 모든 처(處)는 촉(觸)과 같이
나타난다. 만약 유색계에 있다면 의식은 신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한다. 비유하건대 색이 있
는 모든 근은 신을 의지하여 생하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멀리 행함과 홀로 행함은
신 없이 빈 굴 속에 머무르니,
길들여 굴복시키기 어려운 것을 길들여 굴복시키므로
곧 마귀의 속박에서 해탈한다.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안 등의 5근에 연하여지는 경계, 하나하나의 경계를 의식
이 취하여 분별할 수 있어서 의식은 그것을 생하는 인이 된다. 다시 다른 설명이 있으니, 12
입(入)을 분별하여 설한 것 가운데 이 6식의 모임을 설하여 의입(意入)이라고 한다. 이 처가
본식을 안립하여 의식(義識)이 된다. 이 가운데의 모든 식을 설하여 상식(相識)이라고 한다.
의식(意識)과 의지식(依止識)은 견식(見識)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이 상식은 견이 생하는 인이며, 진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견(見)을 생하는 의지의 작용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모든 식은 유식(唯識)을 이룬다. 어찌하여 모든 진이 눈앞에 나타나는데, 이것
이 있지 않음을 아는가? 불세존께서 설하신 것처럼 만약 보살이 네 가지 가르침과 더불어
상응한다면 모든 식에 차별적 대상[塵]이 없음을 찾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서로 다른 인식의 상을 아는 것이다. 마치 아귀·축생·사람·하늘과 같
이, 같은 경계에서 견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경계가 없는 인식을 보기 때문이다. 마
치 과거·미래·꿈·그림자의 대상에 있어서와 같다. 셋째는 공용을 떠나서는 전도가 이루
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앎으로 해서, 마치 실제로 있는 진 가운데서 진을 연하여 식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공용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전도를 이루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넷째는 3혜(慧)를 좇아서 의(義)를 알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첫째는
모든 성인은 관에 들어 마음의 자재함을 얻으니, 원락자재로 말미암아 원하고 즐거워하는
대로 대상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둘째는 관을 행하는 사람이 이미 사마타를 얻
었다면 인식현상[法]을 관하는 가행을 닦으니, 오직 사유를 따라 실체적 대상[義]이 나타나
기 때문이다. 셋째는 만약 사람이 무분별지를 얻어서 무분별관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모든
진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경계 등의 실체적 대상[義]이 3혜를 따름으로 해서, 그리고 앞에
서 유식의 논리가 성취된다는 것을 끌어와 입증함으로 말미암아서, 오직 식만이 있고 진이
없음을 안다. 이 가운데 여섯 구의 게송이 있어, 앞의 논리를 거듭 드러낸다. 이 게송, 즉 아
귀·축생·인·천 등과 같은 게송은 뒤에 의혜학승상장(依慧學勝相章)에서 자세히 분별하여
설하게 될 것이다.
섭대승론 중권
2. 응지승상 ②
유식(唯識)인데도 불구하고 진과 같이 나타나는 의지를 설하여 의타성(依他性)이라고 한
다. 어찌하여 의타가 이루어지며, 무슨 인연을 설하여 의타라고 하는가? 스스로 훈습한 종자
로부터 생하기 때문에, 인연에 매여 딸린 것이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생한다 하더라도
한 순간이 지나도록 자재할 수 있는 공능이 없기 때문에 의타라고 이름한다. 만약 분별성이
의타에 의해 실제로 있지 않으면서 차별적 대상[塵]과 같이 나타난다면 어찌하여 분별을 이
룬다고 하는가? 어떠한 인연으로 설하여 분별이라고 하는가? 헤아릴 수 없는 상모(相貌)이
다. 의식이 분별하여 전도가 생하는 인이기 때문에 분별을 이룬다. 자상이 없이 오직 분별을
보기 때문에 설하여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진실성은 분별성이 영원히 있지 않는 것이 상(相)
이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진실을 이룬다고 하는가? 어떤 인연을 설하여 진실이라고 이르는
가? 없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진실을 이룬다. 청정한 경계를 성취함으로 해서 모
든 선법 가운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승의(勝義)를 성취하기 때문에 설하여 진실이라고 한
다.
또한 만약 분별과 소분별(所分別)이 있다면 분별성이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무슨 법이 분
별이고, 무슨 인식현상[法]이 소분별인가? 무슨 인식현상을 분별성이라고 하는가? 의식이 분
별이다. 세 가지 분별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이 식은 스스로 언설로 훈습하여 종자가 되며, 또한 모든 식이 언설로 훈습하
여 종자가 되므로 따라서 이것이 생한다. 끝없는 분별이 모든 처를 분별함으로 말미암아 단
지 분별한다고 이름하므로 설하여 분별이라고 한다.
이 의타는 단지 분별되는 것[所分別]이다. 이 인이 의타성을 이룰 수 있어서 분별되는 것
이다. 이 가운데서 분별성이라고 이름한다. 어찌하여 분별로 이 의타성이 만물상과 같다는
것을 헤아려 알 수 있는가? 어떤 경계를 연하는가? 무슨 상모를 집착하는가? 무엇을 관하
여 보는가? 어찌하여 연기한다고 하는가? 어떻게 언설한다고 하는가? 어떻게 증익(增益)하
는가? 이름 등의 경계로 말미암아, 의타성 가운데서 상을 집착함으로 말미암아서, 결정하고
판단하여 견해를 일으킴으로 말미암아서, 언설을 각관(覺觀)하여 연기함으로 말미암아서, 견
등의 네 가지 언설로 말미암아, 실제로 있지 않는 차별적 대상[塵]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헤
아리는 것을 증익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因)으로 말미암아 분별할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자성은 어떠한가? 다른 것과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지도 않다.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하여야 할 것이다.
의타성을 의타라고 이름하는 다른 정의가 있다. 이것이 분별을 이루는 다른 정의가 있으
며, 이것이 진실을 이루는 다른 정의가 있다.
어떤 다른 정의가 있어서 이것을 의타라고 설하는가? 훈습종자로부터 생하여 다른 것에
매여 묶이기 때문이다.
다시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이것이 분별을 이루며, 이 의타성이 분별의 인이 되는가? 분별
되는 것이기 때문에 분별을 이룬다.
다시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이것이 진실을 이루며, 이 의타성이 혹은 진실을 이루는가? 분
별되는 것과 같이 실제로 이와 같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이 하나의 식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여러 가지 식의 상모가 이루
어지는가? 본식의 식은 나머지 생기식(生起識)의 갖가지 상모이기 때문이며, 다시 이 상모를
원인으로 하여 생하기 때문이다.
의타성은 몇 가지가 있는가? 간략하게 설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훈습종자에 매여
딸린 것이고, 둘째는 정품이나 부정품에 매여 딸리는 것이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매여 딸림으로 말미암아 설하여 의타성이라고 한다.
분별성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성을 분별함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둘째는 차
별을 분별함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진실성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성을 성취함이고, 둘째는 청정을 성취함이다. 다
시 분별에는 네 가지를 이룸이 있으니, 첫째는 자성을 분별함이고, 둘째는 차별을 분별함이
고, 셋째는 지각이 있음이고, 넷째는 지각이 없음이다. 지각이 있음이란 명언(名言)을 요별할
수 있는 중생의 분별이고, 지각이 없음이란 명언을 요별할 수 없는 중생의 분별이다.
또한 다시 분별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름에 의거해 실체적 대상[義]의 자성을 분
별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이 이름이 이 물(物)을 일컫는 것과 같다. 둘째는 실체적 대상에
의해 이름의 자성을 분별한다. 마치 이 실체적 대상은 이 이름에 속하는 것과 같다. 셋째는
이름에 의해 이름의 자성을 분별함이다. 마치 실체적 대상의 이름을 분별하여 인식하지 못
하는 것과 같다. 넷째는 실체적 대상에 의해 실체적 대상의 자성을 분별함이다. 마치 명의
(名義)를 분별하여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다섯째는 두 가지에 의해 두 가지의 자성을
분별함이다. 마치 이 이름과 이 실체적 대상은 무엇의 실체적 대상이며, 무엇의 이름인가 하
는 것과 같다.
모든 분별을 포섭한다면 다시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본분별이며, 본식을 일컫는다. 둘
째는 상의 분별이니, 색 등의 식을 일컫는다. 셋째는 의지와 드러내 보이는 분별이니, 의지
가 있는 안 등의 식식을 일컫는다. 넷째는 상이 변이하는 분별이니, 즉 늙음 등의 변이, 괴
로움과 즐거움 등을 받아들임, 욕 등의 혹, 원죄와 시절 등의 변이와 지옥 등 그리고 욕계
등의 변이이다. 다섯째는 의지와 드러내 보임이 변이하는 분별이니, 즉 앞에 설하여진 변이
와 같이 변이를 일으켜서 분별한다. 여섯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끌어오는 분별이니, 즉 바
르지 않는 법(法 : 교법)의 종류를 듣고, 바른 교법의 종류를 듣는 분별이다. 일곱째는 이치
에 맞지 않는 분별이니, 즉 바른 법 밖의 사람이 바르지 않는 법의 종류를 분별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이치에 맞는 분별이니, 바른 법 속의 사람이 바른 법의 부류를 듣는 분별이다. 아
홉째는 결정하여 판단하고 집착하는 분별이니,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의 종류를 말한다. 신
견이 근본이 되어 62견(見)과 더불어 상응하여 분별한다. 열째는 산동(散動)의 분별이니, 보
살의 열 가지 분별을 일컫는다. 상이 없는 산동·상이 있는 산동·증익의 산동·손감의 산
동·하나라고 집착하는 산동·다르다고 집착하는 산동·공통된다는 산동·다르다는 산동·
이름과 같이 실체적 대상을 일으키는 산동·실체적 대상과 같이 이름을 일으키는 산동·이
러한 열 가지 산동분별을 대하여 다스리기 위하여 모든 반야바라밀의 가르침 가운데서 불세
존께서는 이 열 가지 산동분별을 대하여 다스릴 수 있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설하셨다.
『반야바라밀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반야바라밀경』의 정의를 갖추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하는가? 사리불이여, 이 보살은 실제로 있으
나 보살은 보살이 있다는 것을 보지 않는다. 보살의 명을 보지 않으며, 반야바라밀을 보지
않는다. 행을 보지 않으며, 행하지 않음도 보지 않는다. 색을 보지 않으며, 수(受)·상(想)·
행(行)·식(識)도 보지 않는다. 왜냐 하면 색은 자성으로 말미암아서 공하지, 공을 말미암아
서 공한 것이 아니다. 이 색은 공하여 색이 아니며, 색이 공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 왜냐 하면 사리불이여, 이것은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색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자성이 생함이 없고 멸함도 없으며, 더러움이 없고 깨끗함도 없
다. 거짓으로 세운 이름을 대하여 모든 인식현상을 분별한다. 거짓으로 세운 객(客)인 이름
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식현상을 좇아 언설한다. 여여(如如)하게 좇아 언설하며, 이와 같이
집착한다. 이 모든 이름과 같이 보살은 보지 않으니, 만약 보지 않는다면 집착도 생하지 않
는다. 색에서부터 식까지를 관함과 같이, 이와 같이 관(觀)을 짓는다. 이 『반야바라밀경』의
문구로 말미암아서 열 가지 분별의 논리를 좇아 따라서 사유하여야 한다.
만약 이러한 다른 의미로 말미암아서 의타성(依他性)이 세 가지 자성이 있음을 이룬다면
이 세 가지 자성은 어떠한가? 이 자성에 세 가지 다름이 있으면서 서로 섞임을 이루지 않으
니, 서로 섞인다는 논리가 없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이 자성은 의타를 이룬다.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분별과 진실을 이루지 않는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이 자성이 분별을 이룬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의타와 진실을 이루지 않는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이 자성이 진실을
이룬다. 이것을 말미암아서 의타와 분별을 이루지 않는다.
이 의타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분별성(分別性)으로 말미암아 인식현상[法]과 같이 나
타나지만 분별성과 같은 체(體)가 아니다. 이름을 얻기 전에는 실체적 대상[義]에서는 앎[智]
을 얻지 못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식현상의 체는 이름과 하나이며, 곧 이 실체적 대상과는
서로 다르다. 이름이 많기 때문에 만약 이름이 실체적 대상과 하나라고 한다면 이름이 이미
많으니, 실체적 대상도 많아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체가 서로 다르다. 이름이 정하
여지지 않음으로 해서 체가 서로 섞인다는 이런 정의는 서로 어긋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이름에 앞서는 지각[智]이 없으므로,
이름이 많고 이름이 정하여지지 않음으로 해서
같은 체, 많은 체, 섞여 있는 체가 서로 어긋남으로 말미암아
같은 체가 아니라는 정의가 성립한다.
인식현상[法]이 유(有)와 같이 나타남이 없다면
더러움이 없고 깨끗함이 있다.
따라서 마술에 비유하고
역시 허공에 비유함으로써 설명한다.
어찌하여 이와 같이 나타나는데 실제로는 있지 않다고 하는가? 의타성의 모든 종류가 없
지는 않다. 만약 의타성이 없다면 진실성(眞實性)도 역시 없다.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은 성립
되지 않는다. 만약 의타성과 진실성이 없다면 곧 염오품(染汚品)과 청정품(淸淨品)이 없다는
과실이 된다. 이 두 가지 성품은 없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따라서 모든 것이 없지 않
다. 이 가운데서 게송으로 읊는다.
만약 의타성이 없다면
진실성도 역시 없으며,
곧 항상 염오와 청정이라는
두 가지 성품이 없다.
모든 불세존께서 대승 가운데 『비불략경(?佛略經)』을 설하셨다. 이 경 가운데 "어떻게
분별성을 알아야 하는가? 있지 않는 성품의 종류라고 설명함으로써 이 자성을 마땅히 안다.
어떻게 의타성을 알아야 하는가? 마술, 신기루, 꿈의 영상, 그림자, 메아리, 물 속의 달, 변화
를 설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성이 이 비유들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마땅히
진실성을 안다고 하는가? 네 가지 청정한 법을 설명함으로 말미암아 이 자성을 알 수 있다"
고 말씀하셨다.
네 가지 청정이란 첫째는 이 인식현상이 본래 자성이 청정하므로 여여·공·실제·무상·
진실·법계라고 일컫는다. 둘째는 때가 없는 청정이다. 이 인식현상은 모든 객진(客塵)의 장
애인 때를 벗어나 떠났다고 말한다. 셋째는 지극하게 얻은 도의 청정이다. 모든 도를 돕는
교법과 모든 바라밀 등이다. 넷째는 도가 생하는 경계의 청정이다. 바르게 설명하여 대승법
을 일컫는다. 왜냐 하면 이러한 설명은 청정한 인(因)이기 때문이다. 청정한 법계의 흐름이
기 때문에 분별이 아니고 이 네 가지 청정한 인식현상으로 말미암아 의타가 아니다. 모든
청정한 법을 섭지하여 모두 다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마술 등은 의타를 드러내고,
없다고 말한 것은 분별을 드러낸다.
만약 네 가지 청정을 설한다면
이 설명은 진실에 속한다.
청정은 본성,
때가 없음, 도(道), 인연으로 말미암는다.
모든 청정한 법은
네 가지가 모두 섭지하는 품류이다.
무슨 인(因)과 무슨 연(緣)이 의타성인가? 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다른 허망한 의혹
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타성에 대해서 마술 등의 비유로 드러내는 바이다. 다른 무엇이 의타
성에 대해서 허망한 의심을 생한다고 하는가? 의타성에 대한 모든 설명 가운데 이와 같은
허망한 의심이 있다.
만약 실제로 사물이 없다면 어찌하여 경계를 이룬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마술의 비유를 설한다.
만약 경계가 없다면 심(心)과 심법(心法)은 어떻게 생할 수 있다고 하는가? 이 의문을 해
결하기 위하여 신기루의 비유를 설한다.
만약 실제로 대상이 없다면 애착과 애착하지 않음의 수용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꿈의 영상의 비유를 설한다.
만약 실제로 인식현상이 없다면 선과 악의 두 가지 업과 애착과 애착하지 않음의 과보는
어찌하여 생할 수 있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거울 그림자[影]의 비유
를 설한다.
실제로 인식현상[法]이 없다면 어떻게 여러 가지의 앎(지각)이 생한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림자의 비유를 설한다.
실제의 인식현상이 없다면 어찌하여 여러 가지 언설이 일어난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메아리의 비유를 설명한다.
만약 실제로 인식현상[法]이 없다면 어떻게 진실한 인식현상을 연하여 정심(定心)의 경계
를 이룬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물 속의 달의 비유를 설명한다.
만약 실제로 인식현상이 없다면 어떻게 모든 보살이 마음을 일으켜서 전도된 마음 없이
남을 위하여 이익된 일을 지어 6도(道)에서 생을 받는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변화의 비유를 설한다.
『바라문문경(婆羅門問經)』 가운데서 "세존께서는 무슨 의미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는가?
여래는 생사를 보지 않고 열반도 보지 않는다. 차별이 없다는 의미에서 의타성 가운데서 분
별성에 의해 그리고 진실성에 의해 생사가 되고 열반이 된다. 왜냐 하면 이 의타성은 분별
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생사를 이루고, 진실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열반을 이룬다"라고 말씀
하셨다.
아비달마수다라(阿毘達磨修多羅) 가운데서 불세존께서 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
다. 첫째는 염오의 부분이고, 둘째는 청정의 부분이고, 셋째는 염오와 청정의 부분이다. 무슨
의미에서 이 세 부분을 말씀하셨는가? 의타성 가운데서 분별성은 염오의 부분이 되고, 진실
성은 청정의 부분이 된다. 의타성은 염오와 청정의 부분이 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세 부
분을 말씀하셨다.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 무엇으로 비유하는가? 금이 흙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으로 비유한
다. 비유하건대 금이 흙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 가운데서 세 가지 인식현상이 있음을 보는
것과 같다. 첫째는 지계(地界)이며, 둘째는 금이고, 셋째는 흙이다. 지계 가운데 흙은 있지
않으나 나타난다. 금은 실제로 존재하나 나타나지 않는다. 이 흙을 만약 불로 태워 정련하면
흙은 곧 보이지 않고 금의 모습이 스스로 드러난다. 이 지계는 흙이 나타날 때에는 허망한
상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고, 금이 나타날 때에는 진실한 상으로 나타난다. 이렇기 때문에 지
계에는 두 부분이 있다.
이와 같이 본식이 무분별지인 불로 태워 정련되지 않았을 때에는 이 식은 허망한 분별성
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지만 진실성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지 않는다. 무분별지인 불로써 태워
정련된다면 이 식은 진실성을 성취함으로써 나타나지, 허망한 분별성으로 말미암아 나타나
지 않는다. 이 때문에 허망한 분별인 식, 곧 의타성은 두 가지 구분이 있다. 비유하건대 금
이 흙에 감추어진 가운데 있는 지계와 같다. 또한 어느 곳에서는 모든 인식현상[法]이 항상
머문다고 말씀하셨고, 어느 곳에서는 모든 인식현상이 항상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곳
에서는 항상하지 않으면서 항상하지 않지도 않다고 설명하셨다. 무슨 의미에 의거해서 항상
하다고 말씀하셨는가? 이 의타성은 진실성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항상 머무르고, 분별성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항상하지 않다. 이 두 가지 자성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항상하지 않고 항
상하지 않지도 않다. 마치 이와 같은 의미로써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이 둘이 아니라고 설
명한다. 이와 같이 고통과 즐거움이 둘이 아니고,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공과 공하지 않음
이 둘이 아니고, 자아가 있고 자아가 없음이 둘이 아니며, 깨끗함과 깨끗하지 않음이 둘이
아니며, 자성이 있고 자성이 없음이 둘이 아니며, 생함이 있고 생함이 없음이 둘이 아니며,
멸함이 있고 멸함이 없음이 둘이 아니며, 본래 고요하고 맑음과 고요하고 맑지 않음이 둘이
아니며, 본래 열반인 것과 열반이 아닌 것이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고 말
씀하셨다. 이것들과 같은 차별로 말미암아서,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의미가 비밀한 말씀
으로 이 세 가지 자성으로 말미암아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 등을 좇아 분명하게 깨달아서
바르게 설명하셨다. 앞에서와 같이 해석하여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법이 실제로 있지 않는 것과 같이,
그러면서도 그것이 여러 가지로 현현하는 것같이,
이 인식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는 의미를 설명한다.
한 부분에 의거하여 설명하므로
혹은 있다고 하고 혹은 있지 않다고 말하며,
두 부분에 의거하여 설명하므로
있지 않으며 있지 않지도 않다고 말한다.
나타남과 같이 있지 않기 때문에
영구히 없다고 말하며,
나타남과 같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없지 않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체가 있지 않음으로 해서
스스로의 체가 머물지 않기 때문에,
취함과 같이 있지 않기 때문에
세 가지 성품은 자성이 없음을 이룬다.
무성(無性)으로 말미암아
앞의 것이 뒤의 것의 의지가 됨을 이룬다.
생함과 멸함이 없어 본래 깨끗하며,
스스로의 성품이 열반이다.
또한 다시 네 가지 뜻[四意]과 네 가지 의지[四依]가 있어서 모든 불세존의 가르침을 마땅
히 좇아 결정코 요달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는 평등하다는 뜻이다. 마치 어떤 설명에서와 같
이 옛날 그 때에 나는 비바시(毘婆尸)라고 이름하였으며, 오래 전에 이미 성불하였다.
둘째는 다른 때의 의미이다. 비유하자면 다음의 설명과 같다. 만약 사람이 많은 보배로운
부처님의 명호를 염송하여 지니면 결정코 위없는 깨달음에서 다시 물러나 타락하지 않는다.
다시 어떤 가르침에서는 오직 발원함으로 해서 편안하고 즐거운 부처님의 땅에 가서 생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셋째는 다른 정의의 뜻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설명에서와 같이 항하에 있는 모래알의 수
만큼 모든 부처님을 섬김으로써 대승의 가르침의 정의에 있어서 깨달아 마침을 생할 수 있
다.
넷째는 중생이 기꺼이 바라는 뜻이다. 비유하건대 여래께서 먼저 한 사람을 위하여 보시
를 찬탄했다가 뒤에 돌이켜 비방하는 것과 같다. 보시의 계율과 나머지 수행도 이와 같아서
네 가지 뜻이라고 이름한다.
네 가지 의지란 첫째는 들어가게 하는 의지이다. 비유하건대 대승과 소승 가운데서 불세
존께서는 인식 주관과 인식현상의 두 가지와 공통된 상과 개별적인 상인 두 가지 상에 의해
세속제(世俗諦)를 섭지한다고 말씀하셨다. 둘째는 상(相)의 의지이다. 말씀하신 대로 인식현
상의 모습 가운데는 반드시 세 가지 모습이 있다. 셋째는 대하여 다스림의 의지이다. 이 가
운데 8만 4천의 중생의 번뇌가 행함을 다스리는 것을 드러낸다. 넷째는 뒤집는 의지이다. 이
가운데서 다른 정의를 설명하므로 언어와 문자로써 다른 정의를 드러낸다. 마치 게송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아사리(阿娑離) 사라마다야(娑羅摩多耶)
비발야사자(毘跋耶斯者) 수치다(修?多)
리시야자(離施那者) 승가리다(僧柯履多)
라반디보디물다마(羅槃底菩提物多摩)
만약 사람이 대승의 인식현상을 자세히 해석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 상으로 간략히 설명하
니, 마땅히 이와 같이 해석하여야 한다. 첫째는 연하여 생하는 체의 모습을 널리 이해하여야
한다. 둘째는 인연에 의하여 이미 생기한 모든 현상의 참다운 모습을 자세히 이해하여야 한
다. 셋째는 설명하여진 모든 정의가 성립한다는 것을 자세히 이해하여야 한다. 연하여 생하
는 체의 모습을 자세히 이해한다는 것은 게송에서 설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다. 훈습(熏習)하
여 생하여지는 모든 인식현상, 이것은 저것으로부터 생한다. 이와 같이 과보식과 생기식은
다시 상호간에 원인이 됨으로써 생한다. 인연에 의해 이미 생하여진 모든 인식현상[法]의 실
상을 자세히 해석한다. 모든 인식현상이란 생기식이 상이 되어 상이 있으며, 견식(見識)이
자성이 되는 것이다. 다시 모든 인식현상을 의지하여 상이 되며, 분별이 상이 되고, 법이(法
爾)가 상이 된다. 이러한 언설로 말미암아 세 가지 자성 가운데서 모든 현상의 체상이 나타
날 것이다. 게송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상이 있고 견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마땅히 인식현상의 세 가지 모습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이 인식현상의 모습을 해설할 수 있다고 하는가? 분별성은 의타성 가운데 실제로
있는 것이 없고 진실성은 이 가운데 실제로 있다. 이 둘이 있지 않으며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없으면서 얻고 보지 못하면서 이미 본다. 진여가 동시에 자연히 이루어진다. 의타성 가운
데서 분별성이 없기 때문에 진실성이 있음으로 해서 만약 그것을 보면 이것을 보지 못하고,
만약 그것을 보지 않으면 이것을 본다. 게송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의타 가운데 분별이 없고
단지 진실이 있기 때문에
얻지 못하며 얻는다.
이 가운데 둘이 평등하다.
설하여진 모든 정의가 성립함을 자세히 해석한다는 것은 마치 처음에 설하여진 문구와 같
이 나머지 구절로 말미암아서도 분별을 드러내 보이니, 혹은 공덕이라는 근거[依止]로 말미
암으며, 혹은 사(事)로 인한 실체적 대상[義]이라는 근거로 말미암는다.
공덕의 근거라는 것은 불세존의 공덕인 가장 청정한 지혜를 자세히 설명한다.
둘이 없는 행이며, 상이 없는 인식현상은 수승하게 의행(意行)에 의거하는 것이며, 부처님
의 위계[佛住]에 머무르며, 모든 부처님과 평등함을 이르러 얻으며, 장애가 없는 행위를 행
하며, 가르침[法]을 깨뜨리거나 대신하여 바꿀 수 없으며, 경계를 다르게 변화시킬 수 없으
며, 성립된 가르침을 사유할 수 없으며, 삼세의 평등에 이르며, 모든 세계에서 몸을 나투며,
모든 인식현상에 있어서 지혜는 장애가 없으며, 모든 행은 지혜와 더불어 상응하며, 가르침
의 지혜를 의심하지 않으며, 신(身)을 분별할 수 없으며, 모든 보살이 받게 되는 지혜이며,
둘이 없는 불주(佛住)의 바라밀에 이르며, 무차별한 여래의 해탈지(解脫智)의 궁극에 이르며,
이미 끝없는 불지(佛地)의 평등을 얻으며, 법계(法界)가 뛰어남이며, 허공계가 뒤의 변제(邊
際)가 되니, 가장 청정한 지혜이다. 이와 같이 첫 구절은 나머지 구절을 근거로 하여 차례로
분별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바르게 설명한다면 가르침의 정의
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청정한 지혜란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지혜이니, 모든 인
식현상에서 청정하며 요별하지 않음이 없다. 이와 같은 본래의 정의는 스물한 가지 부처님
의 공덕에 포섭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지각되는 것[所知 : 인식]에서 모든 장애가 없는 행이 일어나는 공덕, 유와 무에 있어서
두 가지 상이 없는 진여의 가장 청정함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 공용을 말미암지 않으면서
여래의 일을 버리지 않는 부처님의 위계의 공덕, 법신에 있어서 의지와 뜻과 작용[事]이
차별 없는 공덕, 모든 장애에 대하여 다스림을 닦아 익힌 공덕,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 세간에서 생하지만 세간의 인식현상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공덕, 바른 가르침을
세우는 공덕,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하는 네 가지 선교(善巧)의 공덕, 모든 세계에서 응신과
화신을 나타내는 공덕, 다른 사람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공덕, 여러 가지 행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공덕, 미래의 가르침에서도 지혜를 일으키는 공덕,
중생을 따라 기꺼이 나타내는 공덕, 헤아릴 수 없는 보살의 의지인 중생을 바르게 교화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공덕,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을 성취하는 공덕, 중생의 뜻(의지)을 좇아서
순수하고 깨끗한 불토(佛土)를 나타내는 공덕, 떠날 수 없고 다른 처(處)가 없는 세 가지 불신
佛身)의 공덕, 생사가 끊어진 시기에 모든 중생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공덕, 그리고 다함이
없는 공덕이다.
사(事)로 인한 실체적 대상[義]을 의지한다는 것은, 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만약 보살이
서른두 가지 인식현상과 상응한다면 설하여 보살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모든 중생에 있어서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의지와 더불어 상응한다.
1) 일체지지(一切智智)에 들어가게 하는 뜻[意志]이며, 2) 내가 지금 어떠한 견처[處] 가운
데 맞닿더라도 이와 같은 지혜와 상응하며, 3) 고만심(高慢心)을 버리며, 4) 올바른 의지가
견고하며, 5) 연민하는 의지를 거짓되게 짓지 않는다. 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탐내지 않으
며, ②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있어서 평등한 뜻이며, ③ 착하고 우애로운 의지를 영원히 지
어서, 이에 무여열반에 이른다. 6) 헤아려서 이야기하고 기뻐 웃으며 먼저 말하며, 7) 모든
중생에 대하여 자비로움[慈悲]에 다름이 없으며, 8) 짓는 일에 있어서 물러서는 약한 마음이
없으며, 9) 물리어 싫증이 나는 마음이 없으며, 10) 정의(바른 교의)를 들음에 만족함이 없
다. 11) 스스로 죄를 지음에 대해서는 그 과오를 드러낼 수 있으며, 남이 죄를 지음에 대해
서 의심하여 꾸짖어 책망하지 않으며, 12) 모든 위의(威儀) 가운데서 항상 보리심을 지니며,
13) 과보를 구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며, 모든 두려움과 6도에 생함에 얽매이지 않으며, 금하는
계율을 받아 지니고, 모든 중생에 있어 인욕(忍辱)함에 장애됨이 없으며, 정진에 있어서 모든
선법의 행을 이끌어 섭지하게 된다.
그리고 방편과 더불어 상응하는 지혜와 4섭(攝)에 상응하는 방편을 더불어서, 삼마디(三摩
提 : 삼매)를 닦아 무색정을 멸하여 떠난다. 14) 계율을 지키고 지키지 않음에 있어서 선우
(善友 : 善知識)는 둘이 없으니, ① 선지식을 받들어 모시며, ② 공경하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들으며, ③ 공경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아란야처(阿蘭若處)에 머물며, ④ 세간에 드물게 있는
것에 대하여 편안하게 즐기는 마음이 생하지 않으며, ⑤ 하품의 승[小乘]에 대해서는 희락심
을 내지 않고 대승의 가르침에 대해서 실다운 공덕을 관하며, ⑥ 악한 친구를 멀리 여의고
선우(善友)를 공경하여 섬긴다. 15) 네 가지 범주(梵住)를 항상 다스리니, ① 무량심을 청정
하게 닦으며, ② 항상 5신통의 지혜를 유희하며, ③ 항상 지혜에 의지하여 행한다. 16) 바른
행에 머무는 중생에 대해서든지, 바른 행에 머물지 않는 중생에 대해서든지 버리고 떠나는
마음이 없으니, ① 대중을 이끌어 섭지하며, ② 한결같이 결정하여 언설하며, ③ 사실을 공
경하며, ④먼저 공경하여 보살심을 행한다.1)
이러한 여러 법과 더불어 상응하는 것을 설하여 보살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문구로
말미암아 앞에 설한 첫 구절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 구절을 해설함이란 모든 중생에게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의지를 일컫는다. 이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의지의 문구에는 달
리 열여섯 문구가 있어서, 드러내어진 업을 해설하고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열여
섯 가지 업을 해설한다는 것은 첫 번째는 전전행업(傳傳行業)이며, 두 번째는 무도업(無倒
業)이며, 세 번째는 남의 섬김[事]을 말미암지 않고 스스로 행하는 업[不由他事自行業]이며,
네 번째는 무너뜨릴 수 없는 업[不可壞業]이다. 다섯 번째는 욕구하지 않는 업[無求欲業]이
니, 세 가지 해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보은을 탐내지 않으며, 둘째는 은덕이 있거
나 없거나 간에 중생에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생하지 않으며, 셋째는 계속하여 따라
행하여 이에 여러 가지 다른 생함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여섯 번째는 처를 따라 언설과 상
응하는 업[隨處相應言說業]이라고 한다. 두 구절의 해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곱
번째는 고통이 있거나 즐거움이 있거나 간에 둘이 없는 중생의 평등한 업[有苦有樂無二衆生
平等業]이라고 한다. 여덟 번째는 하열함이 없는 업[無下劣業]이라고 한다. 아홉 번째는 물
러나 바꾸게 할 수 없는 업[不可令退轉業]이라고 한다. 열 번째는 방편을 섭지하는 업[攝方
便業]이라고 한다. 열한 번째는 싫증내고 미워함에 대하여 다스려지는 업[厭惡所對治業]이라
고 하며, 두 구절의 해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열두 번째는 틈이 없이 사량하는 업
[無間思量業]이라고 한다. 열세 번째는 뛰어난 위계(位階)를 행하여 나아가는 업[行進勝位業]
이라고 하며, 일곱 구절의 해석이 있다. 6바라밀을 바르게 닦아 가행하며, 사섭을 공경하여
행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열네 번째는 방편을 성취하는 업[成就方便業]이라고 하며,
여섯 구절의 해석이 있으니, 선지식을 섬기고, 바른 가르침을 자세히 들으며, 아란야처에 머
무르며, 삿된 각관을 멀리 여의며, 정사유(正思惟)의 공덕에 두 구절이 있으며, 선우를 받들
어 모시는 공덕에 두 구절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열다섯 번째는 드러내어 성취하는
업[顯成就業]이며, 세 구절의 해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청정하게
닦아서, 위덕(威德)을 얻으며, 공덕을 증득한다. 열여섯 번째는 남을 안립하는 업[安立他業]
이며, 네 구절의 해석이 있으니, 대중을 이끌어 포섭하며, 의심 없이 바르게 가르치고 배우
는 곳[處]을 세우며, 가르침과 재물을 모두 섭지하며, 염오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
다. 이러한 문구들과 같이 처음에 설한 문구를 해설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가
운데 게송으로 설한다.
앞에 설명한 것과 같이 구절을 취하니,
덕(德)을 따라 구절에 차별이 있고,
앞에 설명함과 같이 구절을 취하니,
정의가 다르므로 구절이 다르다.
3. 응지입승상(應知入勝相)
위와 같이 이미 응지승상(應知勝相)을 설하였다. 어떻게 응지입승상(應知入勝相)을 알아야
하는가? 다문(多聞)에 훈습된 의지는 아리야식에 섭지되지 않으면서 아리야식과 같이 종자
를 이루며, 정사유(正思惟)에 의해 섭지되며, 가르침[法]과 실체적 대상[義]과 같이 드러나는
상에 의해 생하여지며, 취하여진 것[所取]과 같은 종류이며, 견이 있으며, 의언분별(意言分
別)이다.
어떤 사람이 응지(應知 : 인식)의 상에 들어갈 수 있는가? 대승의 다문훈습(多聞熏習)이
서로 이어지고 헤아릴 수 없이 세상에 나오신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여 높이 섬김을 이미 얻
으며, 정위(正位)를 결정코 믿고 즐거워함[信樂]에 이미 들어가며, 선근을 잘 성숙시키고 닦
아 익히고 늘리며 키움으로 해서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올바르게 얻는다.
모든 보살은 어느 처(處)에서 유식관에 들어가는가? 가르침과 같이 실체적 대상과 같이
봄으로써 상을 드러내므로 의언분별하는 대승의 인식현상의 상이 생하여진다. 원락행지(願
樂行地)에 들어간 사람은 들음[聞]을 따라 믿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며, 견도(見道)는 이치와
같이 통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수도(修道)는 모든 장애를 대하여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
며, 구경도(究竟道) 가운데라는 것은 장애와 더러움을 나와 떠나서 가장 청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식현상[一切法]은 오직 식만이 있다. 설명하는 것과 같이 문혜를 따라서 믿고 즐거워
하기 때문이며, 이치와 같이 통달하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대하여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
며, 장애와 더러움을 나와 떠나서 가장 청정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선근력을 지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세 가지 모양의 연마심
(鍊磨心)이 있기 때문이며, 4처의 장애를 멸하여 없애기 때문이며, 가르침과 실체적 대상을
연하여 경계가 되고 틈이 없이 닦고 공경하여 사마타비바사나(奢摩他毘鉢舍那 : 定慧)를 닦
아 멋대로 거리낌 없이 놀지 않기 때문이다. 시방세계를 세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세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도(人道)에 있는 중생이 순간순간에 위없는 보리를 증득(證得)한다.
이것을 첫 번째의 연마심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바른 의지(意志)로 말미암아 보시 등의 모든 바라밀을 반드시 생하여 자라게 함을
얻으니, 내가 믿고 즐거워하여 이미 견고하게 머무름을 얻은 것이다. 나는 이러한 바른 의지
로 말미암아 보시 등의 바라밀을 닦아 익혀서 나아가 원만함을 얻으므로 곧 어렵지 않게 된
다. 이것을 두 번째의 연마심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사람이 많은 선법과 더불어 상응한다면 뒤에 명(命)을 버렸을 때 모든 생을 받는 가
운데에서 애착할 수 있는 부유함[富]과 즐거움[樂]이 자연히 이루어진다. 이 사람이 장애가
있는 선(善)을 얻는다는 이러한 정의가 오히려 이루어져야 할 것이나, 어찌하여 나는 원만한
선과 장애가 없는 선을 얻는다고 하며, 모든 뜻과 같이 애착할 만한 부유함과 즐거움을 마
땅히 이루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것을 세 번째의 연마심이라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
로 읊는다.
인도(人道) 가운데의 중생은
생각생각에 보리를 증득한다.
처소(處所)가 세어 헤아림을 넘어서기 때문에
하열한 마음이 없다.
착한 마음의 사람은 믿고 즐거워하여
보시 등의 바라밀을 생할 수 있고
뛰어난 사람은 이러한 뜻을 얻어
보시 등을 닦을 수 있다.
만약 착한 사람이 죽을 때
곧 뛰어난 부유함과 즐거움을 얻는다.
멸위(滅位)의 원만하고 깨끗한 선(善),
이러한 정의는 어찌하여 없는가?
네 번째의 처의 장애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성문승(聲聞乘)과 독각승(獨覺乘)의 사
유를 버려 떠났기 때문에 삿된 사유가 멸한다. 대승 가운데서 믿는 마음을 생하고 결정코
마음을 깨닫기 때문에 모든 삿된 뜻과 의혹을 멸한다. 이러한 듣는 것[所聞]과 사유하는 것
[所思]의 모든 인식현상[法] 가운데 아집(我執)과 아소집(我所執)의 삿된 집착을 버려 떠나기
때문에 법집(法執)을 멸하여 제거한다. 안립하여 눈앞에 나타나 머무는 모든 상과 사유를 모
두 분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분별을 제거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드러나 머무르고 안립한
모든 상과 사유를
지혜로운 사람은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가르침과 실체적 대상을 연하여 경계가 된다. 무슨 인과 무슨 방편으로 들어감을 얻는가?
문훈습(聞熏習)의 종류는 정사유에 섭지되며, 가르침과 실체와 같이 나타나며, 견이 있는 의
언분별(意言分別)이기 때문이다. 네 가지 심사(尋思)로 말미암는다. 이름과 실체의 자성(自
性)과 차별(差別)을 말하며, 거짓으로 심사를 세운다. 네 가지 여실지(如實智)로 말미암으니,
이름과 실체적 대상과 자성 그리고 차별이다. 여실지는 네 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 이것들과 같이 실체적 대상에 이미 들어가 이해했다면 곧 가행(加行)을 닦아
유식관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관 가운데서 의언분별하여 문자와 언설[字言] 그리고 실체
적 대상과 같이 나타난다. 이 가운데 이 문자와 언설의 상(相)은 단지 의언분별일 따름이다.
이와 같은 통달을 얻는다. 이 실체적 대상은 이름과 언설에 의지하는 단지 의언분별일 따름
이다. 역시 이와 같이 통달한다. 이 이름과 실체적 대상의 자성과 차별은 단지 거짓으로 설
한 것이며, 양(量)이 된다. 역시 이와 같이 통달한다. 다시 이러한 위계 가운데서 단지 의언
분별만 증득(證得)한다. 이 관을 행하는 사람은 이름과 실체적 대상을 보지 않고, 자성과 차
별의 가설도 보지 않는다. 실상(實相)으로 말미암아 자성과 차별의 정의가 있음을 얻을 수
없을 따름이다. 네 가지 심사와 네 가지 여실지로 말미암아 의언분별에 있어서 이름과 실체
적 대상과 같이 나타나므로 유식관에 들어감을 얻는다.
유식관 가운데서는 무슨 인식현상에 들어가며, 무슨 인식현상과 같이 들어갈 수 있는가?
단지 유량에 들어가며, 상(相)과 견(見)의 두 가지 인식현상이며, 여러 가지 상모이며, 명과
의, 자성과 차별의 가설, 자성과 차별의 대상, 이 여섯 가지의 상에는 실체[義]가 없기 때문
이다. 이러한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있지 않아 실체적 대상이 된다. 일시에 갖가지 상
모와 같이 나타나고 생하기 때문에, 마치 어둠 속의 등나무가 뱀과 같이 나타나는 것과 같
다. 마치 등나무 가운데 뱀이 곧 허망하여 실제로 있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
이 이미 이러한 등나무의 의미를 요별한다면 먼저의 뱀이라는 산란한 지각[亂智]은 경계를
연하지 않고 일어났다가 곧 문득 사멸하여 단지 등나무라는 지각(知覺)만이 있다. 이러한 등
나무의 지혜는 허망하여 실제의 경계가 없다고 미세하게 분석함으로 말미암는다. 왜냐 하면
단지 색(色)과 향(香)과 미(味)와 촉(觸)의 상이기 때문에 만약 마음이 이 경계를 연한다면
등나무의 지각은 역시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이미 이와 같이 보아서 여섯 상이 이름과 같이 실체적 대상과 같이 의언분별로 나타
나는 것을 굴복시켜 없앤다면 마치 뱀이라는 지각과 같은 차별적 대상[塵]의 지각이 생하지
않는다. 여섯 가지 상을 굴복시켜 멸한 실체적 대상 가운데에서 이 유식의 지각이 역시 등
나무라는 지각과 같은 것을 굴복시켜 없앨 수 있어야 한다. 진여의 지각에 의하여 이와 같
이 보살은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나타나는 의언분별의 모습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분별성에
들어감을 얻고, 유식의 실체적 대상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서 의타성에 들어감을 얻는다. 어
찌하여 진실성에 들어감을 얻는가? 만약 유식의 상(想)을 버렸다면 이 때의 의언분별은 먼
저 들은 것[所聞 : 문혜]의 인식현상이 훈습한 종류이다.
보살은 이미 차별적 대상[塵]의 상(想)을 요별하여 굴복하여 없앤다. 모든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나타나는 것도 다시 생하는 연(緣)이 없기 때문에 생할 수 없다. 따라서 유식과 같은
의언분별도 역시 생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보살은 모든 실체적 대상[義]과 명
(名) 가운데서 오직 무분별에 머문다.
무분별지로 말미암아 진여(眞如)인 법계(法界)를 증득할 수 있다. 이 때 보살은 평등하고
평등하다. 능연과 소연이 무분별지를 생한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보살은 진실성에 들어
감을 얻는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인식현상과 인식 주관과 가르침[法]과 실체적 대상[義],
자성[性]과 간략한 명(名)과 상세한 명,
깨끗하지 않은 것과 깨끗한 것과 구경(究竟)의 것,
열 가지 명은 차별적인 경계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유식관(唯識觀)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응지승상(應知勝相)에 들어감을
얻는다. 이 상(相)에 들어감으로 해서 처음에 환희지(歡喜地)에 들어감을 얻어서 바르게 법
계를 통달하며, 시방의 모든 부처와 여래의 집안에 생할 수 있으며, 모든 거듭 생하는 마음
이 평등함을 얻어서 모든 보살의 마음의 평등함을 얻으며, 모든 부처와 여래의 마음의 평등
을 얻는다. 이러한 관(觀)을 보살의 견도(見道)라고 이름한다.
또한 어떠한 이유로 보살은 유식관에 드는가? 궁극을 꿰뚫는 인식현상을 연하여 경계가
됨으로 말미암아 세간을 벗어난 사마타(奢摩他 : 定)와 비발사나(毘鉢舍那 : 慧)의 지혜이기
때문에, 무분별지로 말미암아 뒤에 얻어지는 갖가지 상식(相識)이 상(相)이 되는 지혜이기
때문에, 본래의 아리야식 가운데 모든 유(有)의 인(因)인 모든 인식현상의 종자를 함께 제거
하여 멸하게 되며, 법신을 촉(觸)할 수 있는 모든 인식현상의 종자를 생하고 키우게 되며,
의지를 바꾸게[轉依] 되며, 모든 여래의 바른 가르침을 얻게 되며,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
게 된다. 따라서 유식관에 들어간다.
무분별지의 뒤에 얻어진 지[無分別後所得智]란 본식과 생하여진 모든 식식(識識)과 상식
(相識)의 상 가운데서 마술과 변화 등의 비유와 같이 관하므로 자성은 전도가 없다. 이러한
논리로 말미암아 보살은 마술사가 모든 마술에 있어서 스스로 요달하여 전도가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상의 인연과 과 가운데서 만약 바르게 설할 때에는 치우침과 전도가 없다.
이 때 유식관의 위계 가운데 바르게 들어가는 것에는 네 가지의 삼마제(三摩提)가 있는데,
이것은 네 가지 통달분의 선근의 의지이다.
보살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네 가지 심사(尋思)로 말미암아 낮은 품류의 대상이 없는
관[無塵觀]인 인(忍)에 있어서 빛을 얻은 삼마제가 난(煖)의 행을 통달한 부분의 선근의 의
지이다. 최상품의 차별적 대상이 없는 관인 인(忍)에 있어서 빛을 증장하는 삼마제가 정(頂)
의 행을 통달하는 부분의 선근의 의지이다. 네 가지 여실지에서 보살은 이미 유식관에 들어
차별적 대상이 없음을 요별하기 때문에 진실한 실체적 대상, 이 한 부분에 바르게 들어간다.
삼마제를 두루 꿰뚫어 행하니, 이것은 비안립제(非安立諦)를 따르는 인(忍)의 의지이다. 이
삼마제의 맨 나중의 찰나(刹那)는 유식의 상(想)을 깨달아 굴복시키므로 틈이 없는 삼마제
라고 바꾸어 이름한다. 세간 제일의 인식현상의 의지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네 가지 삼마제가 보살이 비안립제의 관(觀)에 들어가기에 앞선 방편이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초지에 들어간다면 이미 견도(見道)를 얻어 유식에 들어감을 통달할 수 있다.
보살은 어떻게 관행(觀行)을 닦아 익혀서 수도(修道)에 들어가는가? 보살의 10지에 있어
서 부처님께서 자세히 설하여 안립하신 인식현상의 상[法相]과 같이 모든 여래께서 설하신
대승 십이부 경전을 섭지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눈앞에 드러날 수 있다. 설하여진 통(通)과
별(別)의 두 가지 경계를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궁극에 통달한 경계를 연하여 생기함으로 말
미암아, 출세간의 무분별지와 무분별지의 뒤에 얻어지는 사마타비발사나의 지혜로 말미암아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백천(百千)의 구지 대겁(俱?大劫) 가운데 거듭거듭 닦아 익힘에
의거함으로 말미암아 예전과 지금 얻어진 전의(轉依)로 말미암아, 세 가지 불신(佛身)을 얻
기 위해서는 다시 가행을 닦아야 한다.
성문의 견도라는 것과 보살의 견도라는 것의 차별은 무엇인가? 성문과 보살의 견도에는
열한 가지의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열한 가지인가? 첫 번째는 경계로 말
미암은 차별이니, 대승의 가르침[法]을 연하여 경계가 됨을 말한다. 두 번째는 의지로 말미
암은 차별이니, 큰 복덕과 지혜의 자량에 의하여 의지가 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는 통달
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인식 주관이 자성이 없음[人無我]과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法無我]
을 통달하는 것을 말한다. 네 번째는 열반으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무주처열반을 섭지하여
머무는 곳[住處]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다섯 번째는 지(地)의 차별이니, 10지(地)에 의해 벗
어나 떠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는 청정으로 말미암는 차별이니, 번뇌
의 습기(習氣)를 없애는 것과 정토를 다스려서 청정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여덟 번째는 모든
중생에 대하여 얻는 평등심으로 말미암는 차별이니, 중생을 성숙하게 하여 가행한 공덕과
선근을 버리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아홉 번째는 태어남을 받는 것으로 말미암은 차별이
니, 여래의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 태어남이 되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드러나 나타남으로 말
미암은 차별이니, 불자의 대집륜(大集輪) 가운데서 바른 교법(敎法)을 섭지하여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음을 말한다. 열한 번째는 과보(果報)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어떤 것도 함께 할 수 없는 여래의 법, 그리고 무량한 공덕이 생
겨나서 과(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두 구의 게송으로 읊는다.
이름[名]과 실체적 대상[義]은 서로간에 객(客)이 됨을
보살은 심사(尋思)하여야 하며,
두 가지가 오직 양(量)일 뿐이라는 것과
그 두 가지의 가설을 관하여야 한다.
이것으로부터 참다운 지혜가 생겨나,
차별적 대상의 분별인 세 가지를 떠난다.
만약 이것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본다면
3무성(無性)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바른 가르침인 두 게송은 분별관론이 설하는 것과 같다.
보살은 적정위[靜位]에 있어서
마음이 오직 환영일 따름이라는 것을 관한다.
바깥의 차별적 대상의 상을 버려 떠나고
오직 스스로의 상념을 결정코 관(觀)한다.
보살은 안에 머무르며
소취(所取)가 있지 않음에 들어가고
다시 능취(能取)가 공(空)함을 관하여,
뒤에 둘이 없음을 촉(觸)하여 얻는다.
또한 『대승장엄경론』에 설하여진 다섯 구의 게송이 이러한 도를 드러낸다.
보살은 복덕과 지혜를 낳아 키워서
두 가지 자량(資粮)이 헤아릴 수 없을 때
인식현상에 있어서 사유하는 마음이 끊어지기 때문에
실체적 대상의 품류[義類]가 분별의 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실체적 대상의 부류가 단지 분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으므로
유식 가운데 사의(似義)에 머무를 수 있다.
따라서 관을 행하는 사람은 법계를 증득하여
두 가지 상과 둘이 없음[無二]을 여읠 수 있다.
마음을 떠나서 그 밖의 것이 없음을 알면
이러함으로 말미암아 곧 마음이 있지 않음을 본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두 가지가 있지 않음을 보아서
둘이 없는 진실한 법계에 머무를 수 있다.
분별이 없는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에 두루 항상 평등하게 행하므로,
빽빽하게 허물이 모여 있는 성질에 의거하는 더러움[染]을
마치 약이 독을 없앨 수 있는 것처럼 떠나보내고 없앤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른 법(法 : 교법)이 올바르게 세워져서
편안한 마음은 법계에 뿌리를 두고
억념(憶念)이 오직 분별에 지나지 않음을 이미 알아서
지혜로운 사람은 공덕의 해안(海岸)에 이른다.
4. 입인과승상(入因果勝相)
이와 같이 입응지승상(入應知勝相)을 이미 설하였다. 입인과승상(入因果勝相)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6바라밀, 즉 다나(陀那 : 보시)·시라(尸羅 : 지계)·찬제(?提 : 인욕)·비리야(毘
梨耶 : 정진)·지가나(持訶那 : 선정)·반라야(般羅若 : 반야)바라밀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
어찌하여 6바라밀로 말미암아서 유식에 들어갈 수 있고, 다시 어찌하여 6바라밀이 유식의
과에 들어감을 이루는가? 이러한 정법 내에 있는 보살은 부유하고 즐거운 마음에 대하여 집
착하지 않고, 계율에 있어서 과실을 범하는 마음이 없고, 고통에 있어서 무너지는 마음이 없
으며, 바른 수행에 있어서 게으른 마음이 없고, 이러한 산란한 인 가운데에서 머물러 살지
않기 때문에, 한마음으로 이치에 맞게 간택한 모든 교법을 항상 행하여 유식관에 들어갈 수
있다. 6바라밀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보살은 이미 유식지에 들어가서, 다음에 청정한 신락
의 뜻이 두루 섭지하는 6바라밀을 얻는다. 이렇기 때문에 이 사이에 설령 6바라밀의 가행공
용(加行功用)을 떠난다 하더라도 바른 설법을 신락하여 소중히 사랑하며, 기쁘게 따르며, 얻
기를 바라며, 사유함으로 해서, 항상 쉼 없이 행하기 때문에 6바라밀을 수행하여 궁극에는
원만하여진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원만하고 새하얀 법을 닦고 익혀서
예리하고 빠른 인(忍)을 얻을 수 있으니
보살은 스스로의 승(乘)의 깊고
넓은 큰 가르침에 있어서
오직 분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얽매임이 없는 지혜를 얻으므로
낙신(樂信)의 청정이며,
청정의지(淸淨意地)라고 일컫는다.
보살은 인식현상[法]의 흐름에 있어서
앞에서나 뒤에서나 모든 부처님을 본다.
이미 보리(菩提)가 가까이에 있음을 알아
어려움이 없이 쉽게 얻기 때문이다.
어째서 바라밀은 여섯 개만이 있다고 안립하는가? 여섯 가지 혹장(惑障)을 다스릴 수 있
기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의 교법이 생하여 일어나는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며, 그리고 뒤좇
아 따라서 모든 중생을 성숙케 하기 위해서이다.
수행할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다스리기 위하여 보시와 지계의 두 바라밀을 세
운다. 수행할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란 재물과 가족을 거느림에 대한 욕심과 집착
이다.
이미 수행할 마음을 일으켰다면 물러서려는 약한 마음의 원인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인
욕과 정진의 두 바라밀을 세운다. 물러나 약해지는 마음의 원인이란 생사중생(生死衆生)이
어기고 거스르는 고통스런 일을 말하며, 오랜 시간 바른 법을 도와주는 가행(加行)에서 오는
피곤함과 나태함을 말한다.
만약 이미 행하고 물러나 약해지지 않는 마음을 내어 일으켰다면 무너져 잃어버리는 마음
의 원인을 다스리기 위하여 선정과 지혜의 두 바라밀을 세운다. 무너져 잃어버리는 마음의
원인이란 산란하고 삿된 지혜이다. 이렇기 때문에 여섯 가지 미혹한 장애를 다스리기 위해
서 여섯 가지 바라밀을 세운다.
모든 부처님의 교법이 생겨나 일어나는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앞의 네 바
라밀은 산란하지 않는 원인이다. 다시 하나의 바라밀은 산란하지 않음의 체이다. 이러한 산
란하지 않음을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법의 진리를 실답게 깨우쳐 마칠 수 있어서 모든 여래
의 바른 법이 모두 생하여 일어날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모든 불법이 생하여 일어나는 의
지처가 되므로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세우는 것이다.
뒤좇아 따라서 모든 중생을 성숙케 하는 의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보시바라밀로 말미암아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지계바라밀로 말미암아 중생을 괴롭히지 않으며, 인욕바라밀로 말미
암아 그로 하여금 헐뜯고 욕되게 하는 것을 편안히 받아들여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을 일으
키지 않게 하며, 정진바라밀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선근을 생하게 하고 그들의 악근(惡根)을
없앨 수 있으며 이러한 이익된 원인으로 말미암아 모든 중생을 다스려 굴복시킬 수 있다.
다시 그들의 마음이 아직 고요함을 얻지 못하였다면 고요하게 하고, 이미 고요함을 얻었
다면 해탈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선정과 지혜의 바라밀을 세운다. 이 여섯 바라밀로 말미암
아 보살은 중생을 바르게 가르치므로 성숙시킬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뒤좇아 따라서 모든
중생을 성숙케 하는 의지가 되므로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세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세우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6바라밀의 상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여섯 가지의 가장 수승함으로 말미암아 6바라밀
의 공통된 상이 여섯 가지 있다. 첫째는 의지로 말미암아 비길 데가 없음이니, 위없는 보리
심을 의지하여 일어남을 일컫는다. 둘째는 품류로 말미암아 비길 데가 없음이니, 하나하나의
바라밀을 간단히 설명하면 모두 세 가지 품류가 있는데 보살은 모두 갖추어 수행한다. 셋째
는 행하는 일이 비길 데 없음이니, 모든 중생을 안락하고 이익되게 하는 일을 말한다. 보살
이 행하는 모든 바라밀은 다 이 두 가지 일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넷째는 방편으로 말미
암아 견줄 수 없음이니, 무분별지를 일컫는다. 보살이 행하는 바라밀은 모두가 무분별지가
섭지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회향(廻向)으로 말미암아 견줄 수 없음이니, 위없는 보리를 회향
하는 것을 말한다. 보살에 의해 행하여지는 모든 바라밀은 결정코 일체지(一切智)인 과(果)
로 바꾸어 향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청정으로 말미암아 비길 데 없음이니, 혹장과 지장이
영원히 사라져 남음이 없음을 말한다. 보살이 행하는 모든 바라밀 부분부분이 혹장과 지장
을 제거하여 마침내 모두 없어지기 때문이다.
보시가 바라밀인가? 바라밀이 보시인가? 보시이면서 바라밀이 아닌 것이 있고, 바라밀이
면서 보시가 아닌 것이 있으며, 보시이면서 바라밀인 것이 있고, 보시도 아니면서 바라밀도
아닌 것이 있다. 보시 가운데의 네 구절과 같이 나머지 바라밀도 역시 네 구절이 있다는 것
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6바라밀을 이와 같은 차례로 설명하는가? 앞에 있는 바라밀이 차례대로 뒤에 있
는 바라밀을 생하기 때문이며, 또한 다시 앞의 바라밀들이 뒤의 바라밀들로 말미암아 청정
해지기 때문이다.
무슨 뜻으로 6바라밀의 의미를 세웠는가? 이 의미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모든 세간과
성문승과 독각승의 보시 등의 선근 가운데 가장 수승하여 비길 데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바라밀이라고 널리 불린다.
아까워하는 마음과 질투하는 마음 그리고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고통을 깨뜨려 없앨 수
있기 때문에 타(陀)라고 하며, 다시 큰 재산의 주인이 될 수 있고 복과 덕의 자량을 끌어당
길 수 있기 때문에 나(那)라고 한다. 삿된 계율과 악도(惡道)를 해탈하게[寂靜] 할 수 있기
때문에 시(尸)라고 하며, 다시 선도와 삼마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라(羅)라고 한다.
성내는 마음과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없앨 수 있기 때문에 찬(?)이라고 하며, 다시 나와
남이 평화로운 일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제(提)라고 일컫는다. 나태함과 모든 나쁜 법을
제거하여 없애므로 비(毘)라고 하며, 다시 행하여 멋대로 지내버리지 않아서 헤아릴 수 없는
바른 법을 일으켜 늘리므로 이야(梨耶)라고 한다. 산란을 없애버릴 수 있기 때문에 지가(持
訶)라고 하며, 다시 마음을 이끌어서 내면의 경계에 머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나(那)라고
일컫는다. 모든 견행(見行)을 없앨 수 있고 삿된 지혜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반라(般羅)
라고 일컬으며, 참다운 상을 연할 수 있어서 그 품류를 따라 모든 인식현상을 알기 때문에
야(若)라고 일컫는다.
어떻게 모든 바라밀을 닦아 익히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간략하게 설명하니, 닦아 익힘
에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가행방법수(加行方法修)이며, 둘째는 신락
수(信樂修)이며, 셋째는 사유수(思惟修)이며, 넷째는 방편승지수(方便勝智修)이며, 다섯째는
남에게 이익되는 일을 닦음[利益他事修]이다. 이 가운데 앞의 네 가지 닦음은 앞에서와 같이
알아야 한다. 이익타사수(利益他事修)란 부처님의 공용이 없는 마음을 말하며, 여래의 일을
버리지 않는다. 모든 바라밀을 닦아 익혀서 원만위(圓滿位) 가운데 이르러 다시 모든 바라밀
을 닦는다.
또한 다시 사유수습(思惟修習)이란 애중(愛重)과 수희(隨喜)·원득(願得)의 사유이며 6의
(意)가 닦은 것을 섭지하는 것이다. 6의란 첫째는 넓고 큰 뜻이고, 둘째는 긴 시간의 뜻이며,
셋째는 환희의 뜻이며, 넷째는 은덕이 있는 뜻이며, 다섯째는 큰 의지의 뜻이며, 여섯째는
착하고 우호적인 뜻이다. 넓고 큰 뜻이란 만약 보살이 약간의 아승기겁에서 위없는 보리를
얻을 수 있다면 이러한 시간이 한 찰나찰나가 되는데, 보살은 이 시간 가운데서 찰나찰나에
항상 신명(身命)을 버린다. 그리고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세계에 가득한 일곱 가지 보물을
베풀어 처음 마음을 냈을 때부터 궁극의 청량한 보리에 들어가 머물 때까지 여래를 봉양한
다. 그래도 보살의 베풀려는 의지는 오히려 만족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많은 시간의 찰나찰
나가 삼천대천세계의 맹렬한 불로 가득하여도 보살은 그 가운데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4
위의(威儀)를 행한다. 모든 생활의 도구가 없어도 지계·인욕·정진·삼마제·반야심을 보살
은 항상 눈앞에 드러내 닦아서 궁극의 청량한 보리에 들어가 머물 때까지 보살의 지계와 인
욕의 의지는 역시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이 싫어함도 만족함도 없는 마음이며, 보살의 넓고
큰 의지이다.
만약 보살이 처음 발심할 때부터 성불할 때까지 싫어함도 만족함도 없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이것이 보살의 긴 시간의 뜻이다.
만약 보살이 6바라밀로 말미암아 남을 이익되게 했다면 항상 비길 데 없는 환희를 일으켜
서 중생으로 하여금 그 마음에 어느 것도 이를 수 없는 환희를 더하게 한다. 이것이 보살의
환희하는 뜻이다.
만약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여 이미 중생을 이익되게 했다면 중생이 그에게 커다란 은덕
이 있음을 보지만 자신이 중생에게 은혜가 있음을 보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의 은덕이 있는
뜻이라고 한다.
만약 보살이 6바라밀로부터 생하여진 공덕선근을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 주었다면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써 회향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고 소중한 과보를 얻게 한다. 이것을
보살의 큰 의지의 뜻이라고 말한다.
만약 보살이 행한 6바라밀의 공덕선근을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얻게 하여 그들이 위없는
보리를 회향하게 된다면 이것은 보살의 착하고 우호적인 뜻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뜻으로 섭지하는 애중사유(愛重思惟)로 말미암아 보살은 닦아 익힌다.
보살의 수희(隨喜)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면 보살은 6의가 생하는 공덕과 선근을 닦아 가행
한다. 이것이 보살의 6의가 섭지하는 수희사유라고 일컫는다. 만약 보살이 모든 중생으로 하
여금 6의가 섭지하는 6바라밀을 수행하기를 원하고, 자신도 6의가 섭지하는 6바라밀을 수행
하기를 원한다면 가행을 닦아 익혀서 이에 성불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보살의 6의가 섭지하
는 원득(願得)사유이다. 만약 사람이 6의가 섭지하는 보살의 사유를 듣고 닦아 익힐 수 있다
면 한 생각에 믿는 마음을 일으킨다. 이러한 사람은 곧 헤아릴 수 없고 끝없는 복덕의 덩어
리를 얻어서 모든 악업의 장애를 남김없이 무너뜨려 없앨 것이다. 만약 사람이 듣기만 해도
오히려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복덕을 얻는데, 하물며 보살의 모든 수행함이겠는가.
어떻게 모든 바라밀의 차별을 알아야 하는가? 각기 세 가지 품성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차별을 안다. 보시의 세 가지 성품이란 첫째는 교법의 보시이고, 둘째는 재물의 보시이며,
셋째는 무외(無畏)의 보시이다.
지계의 세 가지 성품이란 첫째는 계율을 지키어 보호함이고, 둘째는 선법의 계율을 섭지
함이며, 셋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계율을 섭지하는 것이다.
인욕의 세 가지 성품이란 첫째는 남이 헐뜯고 욕함을 참는 것이고, 둘째는 고통을 편안하
게 받아들이는 인욕이고, 셋째는 인식현상을 자세히 보아 살피는 인욕이다.
정진의 세 가지 성품이란 첫째는 용맹하게 애써 힘쓰는 정진이고, 둘째는 가행하는 정진
이며, 셋째는 하락하지 않고 무너지기 어려우며 만족하지 않는 정진이다.
선정의 세 가지 품류란 첫째는 안락하게 머무는 선정이고, 둘째는 신통을 이끄는 선정이
며, 셋째는 남을 이익되게 함을 좇는 선정이다.
반야의 세 가지 품류란 첫째는 분별이 없는 가행반야이고, 둘째는 분별이 없는 반야이며,
셋째는 분별이 없는 뒤에 얻는 반야이다.
어떻게 모든 바라밀이 포섭한다는 의미를 알 수 있는가? 모든 바른 교법은 6바라밀의 포
섭함에 들어간다. 그것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며, 그것들은 6바라밀에 의해 펼쳐지는 과보이
기 때문이며, 모든 바른 법이 좇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바라밀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 모든 미혹을 포섭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
가? 그것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며, 그것이 생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그것에 의해 펼쳐
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든 바라밀의 공덕을 알아야 하는가? 만약 보살이 생사를 윤회하더라도 큰 부호
의 위치에서 자재함에 포함되고, 크게 생함에 포함되며, 큰 권속과 무리 대중에 포함되며,
크게 생계를 꾸려가는 사업을 성취함에 포함되며, 질병과 고뇌가 없고 욕심이 작음 등에 포
함되며, 모든 공예와 학문에 대한 총명한 지혜에 포함된다. 여의(如意)이며, 부유함과 즐거움
을 잃지 않으며, 중생을 이익되게 함으로써 바른 일을 삼기 때문이며, 보살이 수행하는 6바
라밀의 공덕 내지는 궁극에 들어가 머무는 청량한 보리는 항상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든 바라밀이 다시 서로를 드러낸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가? 세존께서는 혹은 보
시라는 이름으로 모든 바라밀을 설하셨고, 혹은 지계라는 이름으로, 혹은 인욕이라는 이름으
로, 혹은 정진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선정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반야라는 이름으로 모든 바
라밀을 설하셨다.
여래께서는 무슨 뜻에서 이와 같이 설하셨는가?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 방편 가운데 모
든 나머지 바라밀이 모두 모여서 보조하여 이루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여래께서 설하신 의
도이다. 이 가운데 우타나 게송을 읊는다.
위계[位]·수(數)·상(狀)·순서와
이름·닦음·차별·포섭함과
대하여 다스림·공덕과
서로를 드러냄이 모든 바라밀의 정의이다.
섭대승론 하권
5. 입인과수차별승상(入因果修差別勝相)
이와 같이 이미 인과에 들어가는 수승한 모습을 설하였다. 어떻게 인과에 들어가는 닦음
의 차별을 알아야 하는가? 열 가지 보살지(菩薩地)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 무엇이 열 가지
인가? 첫째는 환희지(歡喜地)이며, 둘째는 무구지(無垢地)이며, 셋째는 명염지(明焰地)이며,
넷째는 소연지(燒然地)이며, 다섯째는 난승지(難勝地)이며, 여섯째는 현전지(現前地)이며, 일
곱째는 원행지(遠行地)이며, 여덟째는 부동지(不動地)이며, 아홉째는 선혜지(善慧地)이며, 열
째는 법운지(法雲地)이다. 이러한 정의로 모든 지를 성립시켜 열 가지가 되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10지의 장애인 열 가지 무명을 대하여 다스리기 위함이다. 열 가지 모습에
나타나는 법계에 열 가지 무명이 있어서 오히려 장애가 된다. 무엇으로 법계의 열 가지 상
(相)을 드러내는가? 초지(初地)에서는 모든 것에 두루 가득하다는 의미로 말미암아서 법계
를 알아야 한다. 2지(地)에서는 가장 수승하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3지(地)에서는 수승한
흐름의 의미로 말미암는다. 4지(地)에서는 섭지함이 없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5지(地)에서
는 서로 이어져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6지(地)에서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없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7지(地)에서는 여러 가지 법이 다름이 없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8지
(地)에서는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9지(地)에서는 선정의 자재를 근
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으며, 토자재(土自在)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으며, 지자
재(智自在)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10지(地)에서는 업자재(業自在)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고, 다라니문과 삼마제문의 자재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아 법
계를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두루 가득하고 가장 수승하다는 정의와
수승한 흐름과 섭지하지 않는다는 것,
다름이 없다는 것과 더럽고 깨끗함이 없다는 것,
여러 가지 법과 다르지 않음,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것,
네 가지 자재의 근거라는 정의,
업자재의 근거,
삼마제를 총지(摠持)한다.
이 두 게송과 같이 『중변분별론』에 의거하여 깨달아 알아야 한다. 또한 다시 이 무명은
이승(二乘)에서는 더러움에 물듦이 아니지만 보살에서는 더러움에 물듦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초지를 환희(歡喜)라고 하는가? 처음으로 자신과 남에게 이익되는 공능(功能)을
얻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2지를 무구(無垢)라고 일컫는가? 이 지는 보살의 계율을 범하는 더러움[垢]을 멀
리 떠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3지를 명염(明焰)이라고 하는가? 삼마제와 삼마발제의 의지로부터 물러남이 없
기 때문이며, 큰 법광명(法光明)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4지를 소연(燒然)이라고 하는가? 보리의 법을 도와서 모든 장애를 태워 없애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5지를 난승(難勝)이라고 하는가? 다시 서로 어긋나는 진제와 속제의 두 지혜를
합하며, 어려운 것을 합하여 서로 상응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6지를 현전(現前)이라고 하는가? 12연행의 지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며, 반야바
라밀이 현전하여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7지를 원행(遠行)이라고 하는가? 공용이 행하는 마지막 끝에 도달하여 있기 때
문이다.
어찌하여 8지를 부동(不動)이라고 하는가? 모든 상과 뜻을 일으키는 공용이 움직일 수 없
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9지를 선혜(善慧)라고 하는가? 가장 수승한 무애해가 지혜의 근거가 되기 때문
이다.
어찌하여 10지를 법운(法雲)이라고 하는가? 경계를 연하여 꿰뚫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
을 안다. 모든 다라니문과 삼마제문이 장(藏)이 되기 때문에 구름에 비유한다. 허공과 같이
거친 장애를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며, 법신을 원만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지(地)를 얻은 모습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네 가지 상으로 말미암으니, 첫째는 이
미 신락(信樂)의 상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하나하나의 지에서 신락을 결정코 생하기 때문이
다. 둘째는 이미 얻은 행의 상으로 말미암아 지와 더불어 상응하는 열 가지 법의 바른 행을
얻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미 얻은 통달의 상으로 말미암아 먼저 초지에서 진여인 법계를 통
달했을 때 모든 지를 통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이미 얻어진 성취의 상으로 말미암
아 이 10지는 모두 궁극의 수행에 이미 이르렀기 때문이다.
모든 지를 닦는 모습은 어떠하다고 알아야 하는가? 모든 보살은 각각의 진 가운데서 사마
타비바사나를 닦아 익힌다. 각각에는 닦아 익혀서 이룰 수 있는 다섯 가지 상이 있다. 무엇
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집총수(集摠修)이며, 둘째는 무상수(無相修)이며, 셋째는 무공용
수(無功用修)이며, 넷째는 치성수(熾盛修)이며, 다섯째는 부지족수(不知足修)이다. 마땅히 모
든 지에 있어서 이러한 다섯 가지 닦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다섯 가지 닦음이
생하는 다섯 가지 인식현상이 과보가 된다.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찰나찰나 법에 의거하
는 모든 추중(?重)을 무너뜨릴 수 있음이며, 둘째는 갖가지 어지러운 상념으로부터 벗어난
법락을 얻을 수 있음이며, 셋째는 모든
곳에서 헤아릴 수 없고 분별이 없는 상인 선법(善法)의 광명을 볼 수 있음이다. 넷째는 분별
된 것과 똑같은 법상이 바뀌어 청정분(淸淨分)을 얻어 항상 서로 이어져 생하는 원만함을
이루고 법신을 성취함이다. 다섯째는 상품 가운데서 점차 늘어나서 최상상품(最上上品)의 인
연이 모이게 됨이다. 10지에서는 10바라밀을 닦아 차례대로 이루어지고 앞의 6지에서는 6바
라밀이 있다는 것은 차례로 설명한 것과 같다.
뒤의 4지(地)에는 네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구화구사라(?和拘舍羅)바라밀이니, 6바
라밀에 의해 생장되는 선근 공덕이며,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 모두 평등하게 하고 모든 중생
을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게 한다. 둘째는 바니타나(波尼他那)바라밀이니, 이 바라밀은 미래
세에 6바라밀을 생하는 연을 감응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착한 원을 이끌어 섭지한다. 셋째
는 바라(婆羅)바라밀이니, 사유하여 간택하는 힘과 닦아 익히는 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바라
밀을 굴복시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6바라밀을 이끌어 서로 이어 생할 수 있어서 빈틈이
없다. 넷째는 야나(若那)바라밀이니, 이 바라밀은 앞의 6바라밀의 지혜를 성립시킬 수 있으
며, 보살로 하여금 큰 집회에서 법락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중생을 성숙시킬 수 있게 한다.
뒤의 네 가지 바라밀은 무분별후지(無分別後智)를 섭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바
라밀이 모든 지 가운데서 서로 다른 시기에 닦아 익힌다. 바라밀장(波羅蜜藏)의 장경으로부
터 이 법문이 모든 의미를 자세히 드러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얼마만한 시간 동안에 10지를 수행하여 바른 행이 원만함을 얻는가? 다섯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혹은 3아승기겁을 수행하여 원만하여지고 혹은 7아승기겁을 혹은 33아승기겁을 수
행하여야 한다. 다섯 종류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원행지를 행하는 사람은 1아승기겁에 채워
지고, 청정의행(淸淨意行)을 행하는 사람과 유상행(有相行)을 행하는 사람 그리고 무상행을
행하는 사람은 6지 내지 7지에서 두 번째의 아승기겁에 채워지며, 이 뒤로부터 무공용을 행
하는 사람 내지 10지는 세 번째의 아승기겁에 채워진다.
또한 다시 어찌하여 7아승기겁을 말하는가? 지 이전에 셋이 있고 지 가운데 넷이 있다.
지 이전의 셋이란 하나는 부정(不定)아승기이고, 둘은 정(定)아승기며, 셋은 수기(授記)아승
기이다. 지 가운데 있는 넷이란 첫째는 실제(實諦)에 의거하는 아승기이고, 둘째는 사(捨)에
의거하는 아승기이며, 셋째는 적정(寂靜)에 의거하는 아승기이며, 넷째는 지혜에 의거하는
아승기이다.
또한 어찌하여 다시 30아승기를 말하는가? 방편 가운데 3아승기가 있으니, 첫째는 신행
(信行)의 아승기이고, 둘째는 정진행(精進行)의 아승기이며, 셋째는 취향행(趣向行)의 아승기
이다. 10지 가운데의 각 지지에 3아승기가 있으니 들어감과 머무름과 나옴이라고 일컫는다.
이와 같은 아승기를 수행하여 10지의 정행이 원만하다.
선근력과 선원력이 있어서
마음이 견고하게 나아가 증상하며,
세 가지 아승기를 지나
바른 행이 성취된다고 설한다.
6. 의계학승상(依戒學勝相)
이와 같이 인과에 들어가는 닦음의 차별을 이미 설명하였다. 계학에 의한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마땅히 보살지에서 바르게 받는 보살계품 가운데서 설하는 것과 같이 알아
야 할 것이다.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네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보살계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품류의 차별이며, 둘째는 함께하고 함께하지 않는
배우는 곳의 차별이며, 셋째는 넓고 큼의 차별이며, 넷째는 매우 깊음의 차별이다.
품류의 차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을 섭지하는 계율이며, 둘
째는 선법을 섭지하는 계율이며, 셋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섭지하는 계율이다. 이
가운데 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을 섭지하는 계율이 나머지 두 가지 계율의 근거라는 것을 알
아야 한다. 선법을 섭지하는 계율은 불법을 생하여 일으킬 수 있는 의지이며, 중생을 이익되
게 하는 것을 섭지하는 계율은 중생을 성숙시키는 근거이다.
함께 배우는 곳의 계율이란 보살이 성죄(性罪)를 멀리 여의는 것을 말한다. 함께 배우지
않는 곳의 계율이란 보살이 계율로 세워진 제죄(制罪)를 멀리 떠나는 것이다. 이 계율 가운
데 성문은 이곳이 죄가 되지만 보살은 죄가 되지 않기도 하고, 혹은 보살은 이 곳이 죄가
되지만 성문은 죄가 되지 않는다. 보살은 몸과 입과 뜻의 세 가지 품류를 다스림을 계율로
삼고, 성문은 단지 몸과 입만을 다스리는 것을 계율로 삼는다. 따라서 보살은 심지(心地)가
죄를 범하는 것이 있지만 성문은 곧 이러한 일이 없다.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가지고 있는
신·구·의업의 일이 중생에게 이익을 생하면 잘못이 없다. 보살은 이 업을 모두 받아 배우
고 수행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함께하고 함께하지 않는 계율의 차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넓고 큼의 차별이란 네 가지 큼으로 말미암아 네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
는 여러 가지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배우는 곳의 넓고 큼이다. 둘째는 헤아릴 수 없는 복
덕을 섭지할 수 있는 넓고 큼이다. 셋째는 모든 중생을 포섭하여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지의 넓고 큼이다. 넷째는 위없는 보리의 근거가 넓고 큼이다.
매우 깊은 차별이란 만약 보살의 이러한 방편이 수승한 지혜로 말미암아 살생 등의 열 가
지 일을 행하더라도 더럽혀지는 과실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생하여 위없는 보리의
수승한 과보를 빠르게 얻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다시 변화(變化)에 의해 만들어지는 신업(身
業)과 구업(口業)이 있으니, 이것이 보살의 매우 깊은 계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계
율로 말미암아 보살은 어느 때는 대왕의 위에 바로 머물러서 혹은 여러 가지로 중생을 협박
하고 괴롭히는 것을 드러내어 중생을 계율 가운데 안립하게 한다. 혹은 여러 가지의 본생
(本生)을 드러내어 남을 핍박하고 괴롭히며 상대를 핍박하고 괴롭히며 원망함으로 말미암아
남으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고 이익되며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다른 사람에게 믿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우선이 되고, 뒤에 삼승의 성스러운 도 가운데서 그들의 선근이 성숙되게 한
다. 이것을 보살의 매우 깊은 계율의 차별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네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보살이 받아 지니는 계율의 차별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다
시 이러한 네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다시 차별이 있어서 헤아릴 수 없다. 보살계의 차별은
『비나야구사비불략경(毘那耶瞿沙毘佛略經)』 가운데 설한 것과 같다.
7. 의심학승상(依心學勝相)
이와 같이 이미 계학에 의한 차별을 설명하였다. 심학에 의한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
가? 간략하게 설하여 여섯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
는 경계의 차별이고, 둘째는 많은 품류의 차별이고, 셋째는 대하여 다스림의 차별이고, 넷째
는 좇아 씀의 차별이며, 다섯째는 좇아 이끄는 차별이고, 여섯째는 사(事)로 말미암은 차별
이다.
경계의 차별이란 대승법을 연하여 경계가 되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많은 품류의 차별이란
대승광삼마제(大乘光三摩提), 복덕(福德)을 모으는 왕(王)삼마제, 현호(賢護)삼마제, 수능가마
(首楞伽摩)삼마제, 갖가지 삼마제의 품류를 포섭하기 때문이다. 대하여 다스림의 차별이란
모든 인식현상을 연하여 통경(通境)의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쐐기로써 쐐기를 빼내는 방편
과 같기 때문이며, 본식 가운데서 모든 추중의 장애를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좇아서 사
용하는 차별이란 현세에 삼마제의 즐거움에 오래 안주하며 뜻대로 수승한 곳에서 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좇아 끌어당기는 차별이란 모든 세계에 장애가 없는 신통(神通)을 이끌어올
수 있음이다. 사의 차별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움직이게 하며, 빛을 비추며, 두루 가득하며,
드러내 보이며, 움직여 변하며, 갔다가 돌아오며, 먼 것을 재촉하여 가깝게 만들며, 거친 것
을 바꾸어 미세한 것으로 만들며, 미세한 것을 바꾸어 거친 것으로 만든다. 모든 색(色)을
몸 속에 들어가게 하며, 그들과 비슷한 같은 무리로 큰 집회에 들어가며, 혹은 드러내고 혹
은 감추며, 여덟 가지 자재를 갖춘다. 다른 신통력을 굴복시키고 가로막으며, 혹은 그들에게
말 잘하는 재주를 주기도 하고 생각함을 주기도 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혹은 광
명을 비추고 상을 갖춘 큰 신통을 끌어당길 수 있으며, 모든 행하기 어려운 것을 이끌어 바
르게 행할 수 있으니, 열 가지 어려운 수행을 섭지하여 바르게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스스로 받는 어려운 수행이니, 보리(菩提)의 좋은 서원을 스
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돌이킬 수 없는 수행이니, 생사의 많은 고통으로 말미암
아 물러나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등지지 않는 어려운 수행이니, 중생이 악을 짓더
라도 한결같이 그를 대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눈앞에 드러난 어려운 수행이니, 중생을 원망
할 일이 있어 눈앞에 드러나도 모든 이익되는 일을 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더러움
이 없는 어려운 수행이니, 보살은 세간에서 살더라도 세속의 법에 물들여지지 않기 때문이
다. 여섯째는 신락(信樂)의 어려운 수행이니, 도달함이 없는 대승을 행하여 넓고 크며 매우
깊은 의미를 신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통달의 어려운 수행이니, 인식 주관과 인식
현상의 두 가지 자성이 없음을 통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수각(隨覺)의 어려운 수
행이니,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깊고 깊은 불료의경(不了義經)을 이치에 맞게 판별하기 때문
이다. 아홉째는 떠나지 않고 더렵혀지지도 않는 수행이니, 생사를 끊지 않으며 생사에 오염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열째는 가행의 어려운 수행이니,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모든 장
애를 해탈한 가운데 머물러서 공용을 짓지 아니하고도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행
할 수 있으며, 이에 궁생사후제(窮生死後際)에 이르며, 이와 같은 가행을 즐거이 닦기 때문
이다.
수각의 어려운 수행에서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설하신 불료의경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
가 무엇인가? 보살은 이치를 좇아 깨우치고 살펴야 한다. 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찌하여
보살은 한 물건도 훼손하지 않고, 한 사람에게도 베풀지 않는가? 보살이 올바르게 수없이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보시할 수 있으려면 그러하여야 한다. 따라서 시방세계에서 보시행
을 닦아 서로 이어져 생하여 일어난다. 어찌하여 보살은 참다운 보시를 행하는 것을 즐거워
하는가? 보살이 모든 보시를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보시에 대해 믿는 마음[信施心]으로 행하는가? 보살이 모든 부처님과 여래를 믿는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어떻게 보살은 보시를 일으켜 행하는가? 보살은 보시 가운데 자
신을 채찍질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한다. 보살은 어찌하여 항상 보시를 즐기는가[遊戱]? 보
살이 보시할 때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하다. 보살은 어떻게 보시를 크게 행할 수 있는가?
만약 보살이 바라(婆羅)의 상념을 떠난다면 그러하다. 어떻게 보살은 보시에 있어서 청정하
다고 하는가? 만약 보살이 탐욕과 인색함을 울파제(鬱波提)한다면 그러하다. 보살은 어떻게
보시에 머물 수 있는가? 보살이 구경후제(究竟後際)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어떻게
보살이 보시에 있어서 자재하는가? 만약 보살이 보시에 있어서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
러하다. 어떻게 보시에 있어서 다함이 없는가? 보살은 다함이 없음 가운데에 머물지 않는다
면 그러하다. 지금까지 보시에서와 같이 지계 내지는 반야에 대해서도 이치에 맞게 알아야
한다.
다시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어째서 보살은 살생을 하는가? 만약 보살이 명(命)이
있는 중생이 서로 이어지는 것을 끊는다면 그럴 수도 있다. 어찌하여 보살은 남이 주지 않
은 것을 빼앗는가? 만약 보살이 남이 주지 않은 중생을 스스로 빼앗는다면 그러할 수도 있
다. 어찌하여 보살이 삿된 음란함을 행하는가? 만약 보살이 욕망의 대상[欲塵]에 대하여 삿
된 의(意) 등을 일으킨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이 허망한 말[妄語]을 할 수 있는가? 만
약 보살이 허망한 것을 말할 수 있어서 거짓이 된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두 가지
말[兩舌]을 행하는가? 만약 보살이 항상 가장 궁극적인 공적한 곳에 머문다면 그러하다. 어
찌하여 보살이 파류사(波留師)에 머물 수 있는가? 만약 보살이 알려진 피안(彼岸)에 머문다
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서로 응하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만약 보살이 모든 법
을 나누어 깨뜨려서 종류에 따라 해석할 수 있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아비지가루
(阿毘持訶婁)를 행하는가? 만약 보살이 거듭거듭 스스로 위없는 모든 선정을 얻게 한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미워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가? 만약 보살이 자신과 남
의 심지(心地)에서 모든 혹을 해칠 수 있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삿된 견해를 일으
키는가? 만약 보살이 모든 곳에서 두루 행하는 삿된 성질을 이치에 맞게 관찰한다면 그러하
다. 또한 어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불법은 매우 깊다"라고 하셨다. 무엇이 매우 깊음인
가? 이 논서 가운데서 스스로 모든 불법을 자세히 분별한다.
법신이 항상 머물기 때문에, 일체 불법이 항상 머문다는 것은 성품이 된다. 모든 부처님의
법은 모든 것을 끊음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모든 장애가 끊어져 다하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
님의 법은 생하여 일어나는 것이 성품이 된다. 화신이 항상 생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은 얻을 수 있음이 성품이 된다. 중생의 8만 4천 번뇌를 모두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은 탐욕이 있는 것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탐욕이 있는 중생을 사랑하고 포섭하여
스스로의 체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은 성냄이 있는 것을 성품으로 삼으며, 모든
불법은 어리석음이 있는 것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모든 불법은 범부의 인식현상으로써 성품
을 삼는다. 모든 불법은 더러운 집착이 없음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진여를 성취하여 모든 장
애가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은 물들고 집착할 수 없어서 모든 부처님께서 세
상에 출현하더라도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는다. 따라서 부처님의 법이 매우 깊다고 말한다.
바라밀을 수행하고, 중생을 성숙시키며, 불토를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법을 이끌어 섭지하기 위하여 보살삼마제의 업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8. 의혜학승상(依慧學勝相)
이와 같이 이미 의정학차별(依定學差別)을 설하였다. 의혜학차별(依慧學差別)은 어떻게 알
아야 하는가? 무분별지의 자성·의지·연기·경계·상모·입구난(立救難)·섭지·반류(伴
類)·과보·등류(等流)·출리(出離)·구경(究竟)·행선(行善)·가행·무분별지 뒤에 얻는 지
혜의 공덕·무차별의 가행·무분별지와 후득지의 비유·위덕·공용 없는 짓는 사(事)의 매
우 깊은 의미로 말미암아 마땅히 의지하는 혜학의 차별을 알아야 하며, 의지하는 혜학의 차
별로 말미암아 무분별지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무분별지의 자성은 다섯 가지의 상을 떠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섯 가지 상이란 첫째
는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둘째는 각관지(覺觀地)가 아니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셋째는 멸상수정(滅想受定)의 적정이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넷째는
색(色)의 자성이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진실한 실체적 대상[眞實義]에서의 다
른 분별이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상을 떠난 지혜 가운데서, 무분별지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설하여진 무분별지의 자성 가운데서 게송으로 읊어 말한
다.
모든 보살의 자성인
다섯 가지의 상을 떠난
무분별지의 자성은
진실한 실체적 대상에서 분별이 없다.
모든 보살의 의지(依止)는
마음도 아니고 마음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 무분별지는
사유가 빠른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의 인연은
언어가 있는 문훈습(聞熏習)으로
무분별지이며,
이치에 맞게 바르게 사유함이다.
모든 보살의 경계는
있다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법성이다.
이 무분별지는
두 가지의 자성이 없는 진여이다.
모든 보살의 상모는
진여의 경계 가운데이다.
이 무분별지는
상이 없고 차별이 없다.
상응하는 자성인 실체적 대상이
분별의 대상이며, 다른 것은 없다.
문자들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실체적 대상과 상응함이 성립하므로
언설을 떠나서는
지혜가 인식된 것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언어에 있어서 같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은 언설할 수 없다.
모든 보살이 섭지하는 것은
이 무분별지다.
이후로 얻는 행을 지켜서
궁극에까지 생장하게 된다.
모든 보살의 반려[伴]가 되는 것들은
설하여 두 가지 도이며,
이 무분별지는
다섯 가지 바라밀의 품류이다.
모든 보살의 과보는
부처님의 두 가지 원만한 모임[圓聚]에 있어서
이 무분별지를
가행함으로 말미암아 이르러 얻는다.
보살의 등류과(等流果)는
뒤에 생하는 가운데서
이 무분별지가
점차 수승하게 바뀌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모든 보살의 벗어나 떠나는 것이
얻음과 성취함과 상응하기 때문에
이 무분별지가
10지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보살의 구경(究竟)은
청정한 세 가지 신(身)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이 무분별지가
지극히 수승하고 자재(自在)하기 때문이다.
허공과 같이 더럽혀지지 않는
이 무분별지는
갖가지 무거운 악업에 물들지 않는다.
오직 믿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허공과 같이 청정한
이 무분별지는
모든 장애를 해탈한다.
얻음과 성취함으로 말미암음이다.
허공과 같이 물들지 않는
이 무분별지는
만약 세간에 출현한다고 하더라도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는다.
벙어리가 진(塵 : 차별적 대상)을 받아들이고자 구하는 것과 같고,
벙어리가 대상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벙어리가 아닌 사람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세 가지 지혜를 이와 같이 비유한다.
어리석은 사람이 대상을 받아들이고자 구하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사람이 바르게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세 가지 지혜를 이와 같이 비유한다.
다섯 가지 식이 대상을 받아들이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다섯 가지 식이 대상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다섯이 아닌 것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세 가지 지혜를 이와 같이 비유한다.
식별하지 못하면서 이해하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읽어서 바르게 법(法 : 인식현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며,
받아들인 법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차례로 세 가지 지혜를 비유한다.
사람이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처럼
무분별도 역시 이러하다.
사람이 눈을 바르게 뜨고 있는 것처럼
후득지(後得智)도 역시 이러하다.
무분별은 허공과 같아서
물듦·장애·변이·변제(邊際)가 없다.
허공 가운데 차별적 대상성[色]이 드러나듯이
후득지도 역시 이러하다.
비유하건대 마니(摩尼)와 하늘의 북[天鼓]이
사유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을 이루듯이
이와 같이 분별하지 아니하고
갖가지 불사(佛事)를 이룬다.
이것이 아니며 이것이 아님도 아니다.
지혜가 아니며 지혜가 아님도 아니다.
경계와 더불어 차별이 없으니,
이 지혜를 무분별이라고 일컫는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法 : 인식현상)의 자성이
무분별하다고 설하셨다.
분별의 대상[所分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없으면 분별도 없다.
이 가운데의 무분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행의 무분별지이고, 둘째는 무분별지이
며, 셋째는 무분별후지이다. 가행이 무분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인연(因緣)과 인통(引通)
과 수습(數習)의 힘이 차별을 생하여 일으키기 때문이다. 무분별지에도 역시 세 가지가 있으
니, 지족(知足)과 무전도(無顚倒)와 무희론(無戱論)의 무분별의 차별 때문이다.
무분별후지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통달(通達), 억지(憶持), 성립(成立), 상잡(相雜), 여의
(如意)의 드러내 보임의 차별 때문이다. 무분별지를 이루어 세우기 위하여 다시 다른 게송을
읊는다.
아귀·축생·인간과
모든 하늘[天] 등이 응하는 것과 같이
경계는 하나이나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 경계들을 성립하는 것을 허용한다.
과거와 미래에
꿈과 두 그림자 가운데
지혜는 있지 않는 경계를 연한다.
이것은 변하지 아니하고 경계가 된다.
만약 차별적 대상이 성립하여 경계가 된다면
무분별지는 없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불과(佛果)가
마땅히 얻어지는 이러한 처(處)는 없다.
자재를 얻은 보살은
원락(願樂)의 힘으로 말미암아
여의지(如意地) 등을 이룬다.
선정을 얻은 사람도 역시 이러하다.
간택(簡擇)을 성취한 사람은
지혜가 있고 선정을 얻은 사람이다.
내면에서 모든 인식현상을 사유하여
실체적 대상[義]과 같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분별을 닦을 때에
모든 실체적 대상은 드러나지 않으니
차별적 대상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식(識)도 없다.
이 무분별지는 곧 반야바라밀이다. 이름이 다를 뿐 실체는 같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처
럼,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문다면 처에 머물지 않는 수행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바라
밀을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다.
무엇이 처에 머물지 않는 수행이며, 나머지 바라밀을 원만하게 수행하게 하는가? 다섯 가
지 처를 떠나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외도의 아집처(我執處)를 떠나는 것이며, 둘째는 진여
를 보지 못한 보살의 분별처를 떠남이며, 셋째는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극단의 처[二邊處]
를 떠남이며, 넷째는 오직 혹장(惑障)만을 없애고 만족함을 아는 행의 처[知足行處]를 떠남
이며, 다섯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관하지 않고 무여열반처(無餘涅槃處)에 머무는
것을 떠남이다.
성문승의 지혜와 보살의 지혜의 차별은 어떠한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분별의 차별로
말미암아 음(陰) 등의 모든 법문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며, 한 부분이 아닌 차별로 말미암
아 두 가지 공(空)의 진여를 통달하여 모든 인식되는 상[所知相]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의지하기 때문이며, 머묾이 없는 차별로 말미암아 무주처열반에
머물기 때문이며, 항상하다는 차별로 말미암아 무여열반에서 끊어지고 다하는 변제(邊際)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위없는 차별로 말미암아 실제로 이보다 수승한 다른 승(乘)은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지혜의 다섯 가지 수승한 차이로 말미암아
대비(大悲)에 의거하여 복을 닦는다.
세간과 출세간의 부유함과 즐거움,
이것이 멀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보살이 세간에 실제로 있다면 역시 다시 알 수 있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계학과
정학과 혜학의 공덕의 모임[聚]에 의거하여 상응한다면 열 가지 자재에 도달하여 모든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에 있어서 비길 데 없는 수승한 능력을 얻는다.
어찌하여 세간 가운데서 중생이 무거운 고통과 어려움을 당함이 있는가? 보살은 그 중생
들에게 업(業)이 있어서 수승하고 즐거운 과(果)를 장애하고 고통스러운 보(報)를 감수(感
受)할 수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보살은 이와 같이 비록 그들에게 즐거움을 모두 베풀
더라도 곧 그들이 선을 일으키는 것을 장애한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보살은 그들이 즐거
움을 갖추지 않아도 생사를 싫어하고 미워함을 눈앞에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
며, 보살은 그들에게 즐거움을 모두 베푼다고 하더라도 모든 악법을 생하여 키우는 인연이
라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만약 그들에게 즐거움을 모두 베푼다면 곧 나머지 헤아릴 수 없
는 중생을 핍박하고 해치는 인연이 된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살은 이와 같이
수승한 능력이 없지 않다. 세간에서도 역시 이러한 중생이 나타남이 있다. 이 가운데 게송으
로 읊는다.
업(業)이 선을 장애함,
싫어함을 나타냄, 악법이 늘어남,
남을 해치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 중생은 보살의 보시를 감수(感受)할 수 없다.
9. 학과적멸승상(學果寂滅勝相)
이와 같이 혜학에 의한 차별을 이미 설명하였다. 적멸의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모든 보살의 혹이 멸하는 것이 곧 무주처열반이다. 이것의 모습은 어떠한가? 혹을 버리고
떠나면서 생사를 버리고 떠나지 않으며, 둘이 의지하는 것의 전의(轉依)가 상이 된다. 이 가
운데 생사는 의타성의 부정품인 한 부분을 체로 삼으며, 열반은 의타성의 정품인 한 부분을
체로 삼는다. 본의(本依)란 정품과 부정품의 두 부분을 갖춘 의타성이다. 전의란 대치를 일
으킬 때에 이 의타성은 부정품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본성을 영원히 바꾸며 정품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본성을 영원히 이룬다. 만약 이 전의를 간략하게 설한다면 여섯 가지의 전변이 있
다. 첫째는 힘을 더하고 혹의 공능을 줄이는 전변이니, 신락위(信樂位)를 좇아서 문훈습의
힘에 머물기 때문이다. 번뇌가 있으니 부끄러워하고 행하여 부끄러워함으로 말미암아 약하
게 행하거나 혹은 영원히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통달의 전변이니, 이미 지(地)에 오
른 모든 보살을 말한다. 진실과 허망이 드러나는 것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전변은
초지로부터 6지까지다. 셋째는 수습(修習)의 전변이니, 아직 장애를 떠나지 못한 사람으로
말미암으며 모든 상이 현현하지 않고 진실이 현현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 전변은 7지로
부터 10지까지이다. 넷째는 과가 원만한 전변이니, 이미 장애를 떠난 사람으로 말미암으며
모든 상이 현현하지 않고 청정한 진여가 드러나서 모든 상의 자재에 도달하여 얻는 의지이
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하열한 전변이니, 성문은 인식 주관이 자성이 없음[人無我]을 통달하
였기 때문에 한결같이 생사를 배척하여 영원히 생사를 버리고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여섯
째는 넓고 큰 전변이니, 보살은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法無我]을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 적정의 공덕을 관하기 때문이며, 버리고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 하열한 전변의 위계에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
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살의 법을 지나쳐 떠나며, 낮은 승(乘)의 사람들과 똑같은 해탈을
얻는다. 이것이 과실이 된다.
모든 보살이 넓고 큰 전변의 위계에 있다면 무슨 공덕이 있는가? 생사의 법 가운데서 스
스로 전의하여 의지가 되기 때문에 모든 자재를 얻으며, 모든 도 가운데서 모든 신(身)을 드
러낼 수 있으며, 세간의 부유함과 즐거움에서 그리고 삼승에서 여러 가지 교화의 방편인 승
능(勝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바른 가르침에 안립할 수 있다. 이것이 넓고 큰 전변의 공덕
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범부에 있어서 진실을 엎어버리고
그들에게 허망을 드러낸다.
보살에 있어서 한결같이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드러낸다.
허망과 진실을
드러내지 않고, 드러낸다.
보살의 전의이며,
뜻과 같이 해탈하기 때문이다.
생사와 열반에서
지혜를 일으킨다면 평등하다.
생사가 곧 열반이니,
이 둘에는 이것과 저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사에서
버리지 않고 버리지 않음도 없다.
열반에서도 이와 같으니,
얻음이 없고 얻지 않음도 없다.
10. 지차별승상(智差別勝相)
이와 같이 이미 적멸의 차별을 설하였다. 지혜의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부처님의
세 가지 신(身)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자성의 신이며, 둘째는 수
용(受用)하는 신이며, 셋째는 변화하는 신이다.
이 가운데 자성신이란 모든 여래의 법신이다. 모든 인식현상에 있어서 자재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수용신이란 모든 부처님의 여러 가지 토(土)와 대인집륜(大人集輪)에 의지하여 드러내어
지며, 이것은 법신으로써 의지를 삼으며, 모든 불토의 청정한 대승의 인식현상이 즐거움을
받고 씀을 받는 인이기 때문이다.
변화신이란 법신으로써 의지를 삼는다. 도솔타천(兜率陀天)에 머무는 것으로부터 물러나
생을 받으며, 배움을 받고 탐욕의 대상을 받으며, 출가하여 외도(外道)에게 가서 닦게 된 고
행과 위없는 보리를 얻어 법륜을 굴리고 큰 반열반(般涅槃) 등의 사(事)에 의해 드러내어지
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갖는 법신은 어떤 모습인가? 만약 그 모습을 간략하게 설한다면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울타나(鬱陀那)의 게송을 읊는다.
상(相)·증득(證得)·자재(自在)와
의지(依止)·섭지(攝持)와
차별(差別)·덕(德)·심심(甚深)과
억념[念]·업(業) 등이 부처님의 몸을 밝힌다.
다섯 가지 상이란 첫째는 법신은 전의로써 상을 삼는다. 모든 장애와 부정품분의 의타성
이 이미 멸하여 모든 장애를 해탈한다. 모든 법에 있어서 자재를 얻어 능(能)이 되며, 청정
성인 부분의 의타성인 전의가 상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희고 맑은 법을 상으로 삼는다. 6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법신에게 열 가지
자재를 얻기에 이르러 승능(勝能)을 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무엇이 열인가? 첫째는 명(命)의
자재이며, 둘째는 심(心)의 자재이며, 셋째는 재물의 자재이니, 이 셋은 보시바라밀이 원만함
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넷째는 업의 자재이며, 다섯째는 생의 자재이니, 이 둘은 지계
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다. 여섯째는 욕락(欲樂)의 자재이니, 인욕바
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일곱째는 원(願)의 자재이니, 정진바라밀이 원만
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통혜(通慧)의 자재이니, 이 5신통(神通)에 의하여 섭지되며,
선정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아홉째는 지혜의 자재이고, 열째는 법의
자재이니, 이 둘은 반야바라밀이 원만함으로 이룰 수 있다.
셋째는 둘이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 두 가지 상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식현상이 있는
바가 없으며 공(空)한 상이 없지 않아서 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유위(有爲)와 무위
(無爲)의 두 가지가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 혹과 업의 모임에 의해 생하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자재를 얻음으로 해서 유위의 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같다, 다르다는
두 가지가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의지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헤아
릴 수 없는 의지로 말미암아 이것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아집이 없기 때문에
그 가운데 의지의 다름이 없다.
앞에서 많은 의지를 증명하였듯이
거짓 이름으로 설하니 하나가 아니다.
성정(性情)과 가행(加行)이 다르지만 허망됨이 없고,
원만하며, 시작이 없기 때문에
같지 않으며,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많지도 않으며, 진여에 의지한다.
넷째는 항상 머무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 진여의 청정한 상이기 때문이며, 예전의 원(願)
을 끌어당기고 꿰뚫어서 가장 궁극이 되기 때문이며, 마땅히 바른 일을 행하여 끝마치지 않
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사의(思議)할 수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 이 진여의 청정은 스스로 증득한 지혜에
의하여 아는 것이기 때문이며, 비유(譬喩)할 수 없기 때문이며, 각관(覺觀)이 행하는 곳이 아
니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이 법신을 깨우쳐[證] 얻는[得] 것은 어떠한가? 처음부터 얻어진 것으로부터의
촉인가? 서로 섞인 대승법을 연하여 경계가 되는 무분별지와 무분별 뒤에 얻어지는 지혜는
5상수(相修)를 성숙(成熟)하게 닦고 익혀서 모든 지(地)에서 자량(資糧)을 잘 모으며, 미세하
여 깨뜨리기 어려운 장애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금강(金剛)을 삼마제에 비유한다. 다시
이 삼마제는 뒤에 모든 장애를 멸하여 떠나기 때문에 이 때에 의지가 전변함으로 말미암아
깨달아 얻음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법신은 몇 가지의 자재(自在)가 있어서 그 가운데서 자재하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다섯 가지 자재가 있으며, 그 가운데서 자재를 얻는다. 첫째는 정토(淨土), 자신을 드러내 보
임, 상호(相好)나 변제(邊際)가 없는 음성, 볼 수 없는 정수리의 자재이니, 색음(色陰)의 의
지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실하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큰 안락함에 머무는 자재이
니, 수음(修陰)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모든 명자(名字)와 문구(文句)의 모임
[聚]들 가운데 모두 갖추어서 바르게 설하는 자재이니, 상(相)의 차별을 집착하는 상음(想陰)
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변화시킴[變化]과 고쳐서 바꿈[改易]과 큰 모임을 이
끌어 섭지함과 하얗고 깨끗한 품류를 끌어당김의 자재이니, 행음(行陰)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현료지(顯了智)·평등지(平等智)·회관지(廻觀智)·작사지(作事智)의 자
재이니, 식음(識陰)이 의지를 전하기 때문이다.
이 법신은 몇 가지 법을 의지로 삼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오직 세 가지이니, 모든 부처
님과 여래의 여러 가지 머무는 곳[住處]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다섯 가지 기쁨을 받는다.
모든 인(因)은 스스로의 계(界)를 얻기 때문에
이승은 깨닫지[證] 못함으로 해서 기쁨이 없다.
기쁨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불계(佛界)를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공능이 무량함과 행하여야 하는 일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법의 훌륭한 맛과 바라던 덕(德)을 이루는 것으로 말미암아,
가장 수승한 기쁨을 얻어 잃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가 다함이 없음을 항상 본다.
여러 가지 수용신(受用身)의 의지가 모든 보살의 선근을 성숙시키게 되기 때문이며, 여러
가지 화신의 의지는 성문과 독각의 선근을 많이 성숙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이 법신을 섭지
하는 불법이 몇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
는 청정한 부류의 법이니, 아리야식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법신을 증득하기 때문이
다. 둘째는 과보의 부류인 법[果報類法]이니, 색이 있는 근[有色根]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
이며, 과보인 수승한 지혜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머무는 부류의 법[住類法]이니, 욕계
의 대상[欲塵]을 받아들여 행하는[行]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헤아릴 수 없는 지혜가 머
물기 때문이다. 넷째는 자재하는 부류의 법[自在類法]이니, 여러 가지 업 등을 섭지하여 자
재하는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시방세계에서 걸림이 없는 6신
통의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언설하는 부류의 법[言說類法]이니, 모든 언설을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중생의 마음을
만족하게 채울 수 있는 바른 설법의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뽑아내어 구제하
는 부류의 법[拔濟類法]이니, 모든 재앙과 횡액과 과실을 뽑아내어 구제하려는 뜻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이 모든 중생의 재앙과 횡액과 과실을 뽑아내어 구제하는 지혜가 자재
하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법신이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부류의 법에 포섭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차별이 있다고 말할 수 있기도 하고, 차별이 없다고 말할 수 있
기도 하다. 의지와 뜻을 씀[意用] 그리고 업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아
야 한다. 헤아릴 수 없는 정각(正覺) 등의 일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법신과 같이 수용신도 역시 이러하다. 의지와 업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는 것
을 알아야 한다. 의지 주체의 차별로 말미암아 차별이 없지 않으니, 헤아릴 수 없는 의지가
전의하기 때문이다. 변화신은 수용신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법신은 몇 가지 공덕과 더불어 상응한다고 알아야 하는가? 가장 청정한 4무량(無量)과
더불어 상응하며 8해탈(解脫)·8제입(制入)·10일체입(一切入)·무쟁(無諍)삼마제·원지(願
智)·4무해해(四無?解)·6통혜(通慧)·32대인상(大人相)·80소상(小相)·네 가지 모든 상이
청정함[四種一切相淸淨]·10력(力)·4무외(無畏)·4무호(無護)·3념처(念處)·습기를 뽑아내
어 없앰[拔除習氣]·잊고 상실함이 없는 법[無忘失法]·대비(大悲)·18불공법(不共法)·모든
상이 가장 수승한 지혜[一切相最勝智] 등의 모든 인식현상[法]과 더불어 상응한다. 이 가운
데 게송으로 읊는다.
중생에 대하여 크게 연민하며[大悲],
모든 결박(結縛)의 의(意)를 떠나지만
중생의 의(意)를 떠나지 않으며,
이익되고 즐거운 의를 얻으므로 엎드려 예경한다.
모든 장애를 해탈하고
세간의 지혜를 항복시킨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應知]에 지혜가 두루 가득하고
마음을 해탈하였으므로 엎드려 절한다.
모든 중생에게서 남음이 없이
모든 혹을 멸할 수 있으며,
혹을 해치며, 더러움에 물듦이 있는 것(중생)을
항상 연민하므로 엎드려 절한다.
공용(功用)이 없고 집착이 없으며,
장애도 없어서 항상 적정(寂淨)하다.
모든 중생의 어려운 문제[難問]를
풀어줄 수 있으므로 나는 엎드려 절한다.
대상[依 : 所依]과 인식 주관[能依]에 대해
응하여 말과 지혜를 설한다.
설함에 있어서 장애가 없으므로
설하는 사람에게 나는 엎드려 절한다.
모든 중생은 존귀한 사람을 보고서
믿고 존경하여 수승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봄으로 해서 맑은 마음을 생할 수 있으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따라서 그들의 품류와 음성을 따라
감[往]과 돌이킴[還] 그리고 벗어나 떠남[出離]을 행하며,
네 가지 모든 상의 청정을 깨달아 알아
모든 중생을 바르게 가르치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수명(壽命)·머묾[住]·버림[捨]을 섭지하여
변화하고 자성을 고쳐서[改性],
정(定)과 지혜의 자재를 얻은
세존께 나는 엎드려 절한다.
방편과 귀의(歸依)와 깨끗함 가운데서
중생을 장애하며
대승에서 벗어나 떠난
마귀를 물리치므로 나는 엎드려 절한다.
지혜[智]·멸(滅)·벗어나 떠남[出離]과
장사(障事)를 드러내어 설할 수 있으니,
나와 남에게 이익되고
삿됨을 항복시키므로 나는 엎드려 절한다.
제지함 없이도 과실이 없고
더러움과 흐림이 없으니 머묾이 없으며,
모든 법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고,
희론(戱論)이 없으니 엎드려 절한다.
대중 가운데서 남을 굴복시키고자 설하실 때
두 가지 혹을 멀리 떠나고,
보호하지 않아도 잊고 상실하지 않으며,
대중을 포섭하므로 나는 엎드려 절한다.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존귀하신 분은 때를 기다려서 지나가지 않으며,
짓는 것이 항상 허망하지 않고,
미혹이 없으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모든 행하고 머무는 것에 있어서
원만한 지혜는 사(事)가 아닌 것이 없으며,
모든 세상을 두루 아는
실체(實體)이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밤과 낮의 여섯 시간 가운데
모든 중생계를 관하여
크게 연민함과 더불어 상응하여
이익되고 즐거운 의(意)에 나는 예경합니다.
행(行)으로 말미암거나 얻음[得]으로 말미암거나
지혜로 말미암거나 사[事]로 말미암거나
모든 것에서 이승에 대하여
비길 수 없으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3신(身)으로 말미암아 존귀하신 분은
3덕(德)의 상을 갖추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에 이른다.
모든 법(法 : 敎法)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심을
능히 제거할 수 있으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계박(繫縛)이 없으니 과실이 없고,
거침과 흐림이 없으니 머묾이 없으며,
모든 법에서 흔들림이 없고,
희론이 없으니 엎드려 절한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단지 이것들과 같은 공덕하고만 상응하는 것이 아니고, 다시 그 밖
의 다른 공덕과 더불어 상응한다. 자성과 인(因)과 과(果)와 업과 상응하고 사[事]와 행(行)
의 공덕과 상응한다. 따라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위없는 공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존귀한 분은 진여를 성취하고
모든 지(地)를 닦아 벗어나 떠나고,
다른 사람과 비길 수 없는 위에 이르러서
모든 중생을 해탈시킨다.
다함이 없음 등의 공덕과
서로 응하여 세상에 나타나니,
3륜(輪)에서는 쉽게 볼 수 있으나
인간과 천상에서는 보기 힘들다.
또한 다시 여래 법신의 깊고 깊음이 가장 깊고 깊다. 이 깊고 깊음을 어떻게 볼 수 있는
가?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부처님께서는 생함이 없음으로써 생함을 삼고,
머묾이 없음으로써 머묾을 삼으며,
공용 없이 사(事)를 지으며,
네 번째의 식(食)으로 식을 삼는다.
다름이 없고 역시 헤아릴 수 없으며,
헤아려 셀 수 없지만 하나의 사(事)이다.
가장 견고하면서도 견고하지 않은 업이어서
위가 없으며, 3신과 서로 응한다.
하나의 법도 깨달을 수 있음이 없으며,
모든 것이 깨달음이 아닌 것이 없어서
한 생각 한 생각이 헤아릴 수 없지만
유(有)가 있지 않음이 드러내어진다.
탐욕이 없으니 탐욕을 떠남[離欲] 또한 없으며,
탐욕에 의해 벗어나 떠남[出離]을 얻는다.
이미 탐욕과 무욕(無欲)을 알았기 때문에
탐욕의 법여(法如)에 들어간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5음(陰)을 넘어서서
5음 가운데 머무신다.
음(陰)과 더불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음을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드신다.
모든 부처님의 일은 서로 섞여서
마치 큰 바다의 물과 같다.
나는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이미 지었고, 현재 짓고 있으며,
마땅히 지어야 한다는 이러한 생각이 없다.
과실로 말미암아 세존께서 현현하지 않는 것이
마치 깨어진 그릇의 달과 같고,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하니,
법광(法光)으로 말미암아 해와 같다.
마치 불과 같이 혹은 정각을 얻는 것을 드러내고,
혹은 열반을 얻는 것을 드러내지만
이 두 가지가 실제로 있지 않으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머무시기 때문이다.
여래께서는 나쁜 사(事)에 있어서나
인도(人道)와 악도(惡道)에 있어서나
범행(梵行)이 아닌 인식현상에 있어서
제일(第一)의 머묾과 자성[我]에 머무신다.
부처님께서 모든 처(處)에 행하시거나,
역시 하나의 처에도 행하지 않으시거나,
모든 생함에서 드러나는 것은
6근(根)의 경계가 아니다.
모든 혹을 이미 멸하여 굴복시키니
마치 독이 주술(呪術)로써 방해되는 것과 같다.
혹으로 말미암아 혹을 다함에 이르니,
부처님께서는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하신다.
이치[諦]와 혹이 깨달음의 부분[覺分]을 이루고,
생사가 열반이 되어
큰 방편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사의(思議)하기 어렵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열두 가지 깊고 깊음이 생부주업주심심(生不住業住甚深)·안립수
업(安立數業)심심·정각(正覺)심심·이욕(離欲)심심·음멸(陰滅)심심·성숙(成熟)심심·현현(
顯現)심심·보리열반현현(菩提涅槃顯現)심심·주(住)심심·현현자체(顯現自體)심심·멸혹(滅
惑)심심·불가사의(不可思議)심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보살은 법신을 연하여 부처님을 억념(憶念)한다. 이 억념은 몇 가지 상을 연하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모든 보살은 법신에 의하여 부처님에게 일곱 가지 상이 있음을 억념하는
것을 닦아 익힌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든 인식현상에 있어
서 비길 데 없는 자재에 도달하므로 이와 같이 부처님을 억념하는 것을 닦아 익힌다. 이 억
념이 법신과 더불어 하나를 이루게 하기 때문에 닦아 익힌다고 말한다. 모든 세계에서 장애
가 없고 변제가 없는 6신통의 지혜를 이르러 얻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장애를 당하거나 원인을 갖추지 못한
모든 중생계가
두 가지 정(定) 가운데 머물면
모든 부처님을 자재하지 못한다.
둘째는 여래의 신(身)이 항상 머무니, 진여로 말미암아 빈틈 없이 모든 더러움을 해탈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여래께서는 가장 과실이 없으니, 모든 혹장과 지장을 영원히 서로 떠났기
때문이다. 넷째는 모든 여래의 일은 공용이 없이 이루어지므로 공용을 말미암지 않고 항상
바른 일을 일으켜서 영원히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여래의 큰 부유함과 즐거움의
위계[富樂位]이니, 모든 불토(佛土)의 가장 미묘하고 청정함이 부유함과 즐거움이 되기 때문
이다. 여섯째는 여래께서는 가장 더러움에 집착함[染著]이 없으시니, 티끌이 허공을 더럽힐
수 없는 것과 같이 세간에 나와 나타내지만 모든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일곱
째는 여래께서는 세간에서 큰 일의 씀을 가지시니, 위없는 보리와 큰 열반에 드는 것을 나
타내 이룸[現成]으로 말미암아 성숙하지 못한 중생을 성숙시키고, 이미 성숙한 중생은 해탈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여래의 마음을 좇아 따르니,
원만한 덕이 항상하고, 상실하지 않는다.
공용이 없이
중생에게 큰 법의 즐거움을 베풀 수 있다.
두루 행하여 장애가 없고,
많은 사람을 평등하고 이익되게 한다.
모든 것은 여러 부처님이라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억념을 연한다.
또한 다시 모든 부처님과 여래 정토의 청정, 그 상은 어떠하다고 알아야 하는가? 백천 가
지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살장(菩薩藏)을 연기 가운데서 설한다. 불세존께서는 두루
미치는 광명의 7보로 장엄한 곳에 계시며, 큰 광명을 발할 수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세계
를 널리 비추니, 헤아릴 수 없는 신묘하게 장식한 계(界)와 처(處)가 각각 성립한다. 큰 성
곽의 변제(邊際)는 길이를 재고 용적을 달 수 없으니, 삼계의 행하는 곳을 벗어나 넘어선다.
출출세간[出出世]의 바른 인식현상의 공능에 의해 생하여지므로 가장 청정하고 자재하는
유식으로써 상을 삼는다. 여래에 의해 진정(鎭定)되며, 보살이 안락하게 머무는 곳이다.
헤아릴 수 없는 천(天)·용(龍)·야차(夜叉)·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羅伽)·사람과 사람이 아닌 이[人非人] 등에 의해 행하여지며, 큰 교법의 맛과
기쁨 그리고 즐거움을 지니게 된다
모든 중생의 모든 이익되는 일을 작용[用]으로 삼는다. 모든 번뇌와 재앙과 횡액으로부터
떠나게 되며, 모든 마귀가 행하는 곳이 아니며, 모든 장엄보다 수승한 여래의 장엄에 의지하
는 곳이다. 큰 사념과 지혜 그리고 행을 벗어나 떠나서, 큰 사마타비바사나를 올라탄다. 크
게 비었고 상이 없으며 원이 없는 해탈문이 들어가는 곳이다.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모임
으로 장엄하여진 큰 연꽃의 왕으로 의지를 삼는다. 여래께서는 대보중각(大寶重閣)에서 머무
신다. 이와 같은 정토의 청정은 색상(色相)의 원만하고 깨끗함·형모(刑貌)·양(量)·처(
處)·인(因)·과(果)·주체[主]·도움[助]·권속(眷屬)·지님[持]·업(業)·이익·두려움이 없
음·머무는 곳·길·탈 것[乘]·문(門)·의지(依止)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드러낸다. 앞의 문
구로 말미암아 이것들과 같이 원만하고 깨끗함이 모두 현현한다. 또한 다시 이와 같이 정토
의 청정함을 받아들여 쓰므로 한결같이 깨끗하고, 한결같이 즐겁고, 한결같이 상실함이 없
고, 한결같이 자재하다.
또한 다시 모든 부처님의 법계에는 다섯 가지 업이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첫째는 재
앙과 횡액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오직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소경, 벙어리,
미친 것 등의 질병과 재앙 그리고 횡액을 멸하고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악도를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악처(惡處)로부터 끌어당겨 뽑아내어 선처에
안립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방편이 아닌 행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모든 외도들의 방편이 아닌 가행
을 항복시켜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안립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신견(身見)을 행하는 것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삼계를 넘어 건너가게 되며,
성스러운 도의 방편으로 인도하는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승(乘)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다른 승을 치우쳐 수행하고자 하는 모든
보살과 근(根)과 성(性)을 아직 정하지 못한 성문(聲聞), 그들이 대승을 수행하도록 안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업에 있어서 모든 부처님·여래께서는 모두 이 업
과 함께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인(因)·의지[依]·일[事]·의(義)·모든 행(行)이
다르기 때문에 세간에서 허용되는 업이 다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차이는 부처님에게는 없다.
따라서 세상의 장수[世將]는 동일한 업이다.
만약 이러하다면 성문과 독각에 의해 함께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많은 덕(德)은
모든 부처님의 법신과 서로 응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무슨 뜻으로써 그들에게 모두 일승
으로 나아가서 불승(佛乘)과 더불어 같다고 설하시는가?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성(性)을 정하지 못한 성문과
모든 나머지 보살을
대승으로 이끌어 포섭하여
자성을 정하므로 일승이라 설한다.
인식현상[法]과 무아(無我) 그리고 해탈
등 때문에 근성(根性)이 같지 않으므로
두 가지 의미의 열반을 얻으므로
궁극[究竟]에 일승을 설한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하나의 법신을 함께한다면 어찌하여 부처님에 있
어서 세대[世]의 수가 같지 않는가?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하나의 계 가운데 둘이 없기 때문에
동시에 원인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차례로 성불한다는 것은 이치가 아니기 때문에
한때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신다는 의미가 성립한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한결같이 열반도 아니며, 한결같이 열반이 아님도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모든 장애를 떠나고,
마땅히 지어서 마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열반이며,
한결같이 열반이 아니다.
어찌하여 수용신은 자성신을 이루지 않는가? 여섯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첫
째는 색신(色身)과 행신(行身)으로 말미암아 현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헤아릴 수 없는 대
집처(大集處)의 차별로 말미암아 현현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들의 욕락(欲樂)을 따라서 보
므로 현현하는 자성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는 다르고 다른 견(見)의 자성이 변동하여
현현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보살과 성문과 하늘 등의 갖가지 큰 집회에서 서로 섞여 화합
할 때에 서로 섞여 현현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아리야식과 생기식에서 전의를 본다는 것
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용신은 자성신을 이룬다는 도리는 없다.
어찌하여 변화신은 자성신을 이루지 않는가? 여덟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첫째는 모든 보살은 오래 전부터 도솔타천도(兜率陀天道)와 인도(人道) 가운데 무퇴삼마
제(無退三摩提)를 얻어서 생을 받으므로 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둘째는 모든 보살이 오래 전부터 항상 기억하고 예전에 머물던 방서(方書), 계산, 수량, 인
상(印相), 공예, 논서를 탐욕의 차별적 대상 가운데서 행하고, 탐욕의 차별적 대상 가운데서
받아들여 쓰는 것을 보살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셋째는 모든 보살은 오래 전부터 이미 삿된 교법과 바른 교법을 식별하였으니, 외도들에
의해 받들어 모셔지는 그 사람에게 가서 스승을 삼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넷째는 모든 보살은 오래 전부터 삼승의 성스러운 도의 바른 이치를 이미 통달하여 도를
구하게 되기 때문에 허망한 고행(苦行)을 닦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다섯째는 모든 보살이 백 구지(拘?)의 염부제(閻浮提)를 버리고 한 처(處)에서 위없는 보
리와 법륜을 굴리는 것을 얻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여섯째는 만약 위없는 보리의 방편을 드러냄을 떠나서 단지 화신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마
침내 불사(佛事)를 행한다면, 마땅히 도솔타천에서 정각(正覺)을 이루어야 한다.
일곱째는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모든 염부제 가운데 평등하게 출
현하시지 않는가? 만약 다른 곳에 출현하시지 않는다면 이러한 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아함
과 도리는 없다.
여덟째는 만약 화신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두 여래께서 하나의 세계에 함께 나타나신
다는 것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네 가지 천(天) 아래에 하나의 세계를 포섭하므로 마치 전
륜왕이 하나의 세계에서 하나의 주인 혹은 다른 주인과 함께 생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
다. 모든 부처님도 역시 이러하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은
평등하게 많은 태(胎)에 들어가니,
상(相)을 갖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
세간에 내보이신다.
여섯 가지 원인이 있어서 모든 불세존께서는 화신 가운데 영원히 머무실 수 없다. 첫째는
바른 사(事)의 궁극이기 때문에, 이미 해탈하여 중생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둘째는 만약
이미 해탈을 얻어서 열반에 들기를 구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열반에 들려는 의지를 버리게
하고, 항상 불신(佛身)에 머물기를 얻고자 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들
이 부처님에 대하여 갖는 경망하고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깊
고 깊은 진여인 법과 바르게 설한 교법을 통달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중
생으로 하여금 불신(佛身)에 대하여 독실하게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거듭 보아서 만족해하
는 것을 없애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바르게 설한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앎
으로 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향하여 지극한 정진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
다. 여섯째는 그들로 하여금 속히 성숙한 위계를 얻어 이르게 하여, 스스로를 향하여 짐을
버리지 않고 지극히 정진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궁극적인 바른 사(事)로 말미암아
열반을 즐기는 것을 제거하게 되어
부처님을 가벼이 교만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게 하고
돈독하게 믿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게 하며
신(身)을 지향하여 정진하게 하고
빠르게 성숙하게 하기 위해
모든 부처님께서는 화신에 있어서
한결같이 머물지 않기를 바라신다.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발원하고 수행함으로 말미암아 위없는 보리를 찾아 구하지만,
한결같이 열반에 든다는 이러한 일은 도리에 맞지 않다. 본래의 원과 수행과 서로 어긋나는
과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수용신과 변화신은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머무는
법으로써 신을 삼는가? 응신과 화신은 항상 법신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응신으로 말미암아
버리고 떠나지 않기 때문이며, 화신으로 말미암아 거듭 일어나 드러나기 때문이다. 항상 즐
거움을 받고 항상 음식을 베풀듯이 두 가지 신은 항상 머문다는 것을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법신이 시작함이 없는 때로부터 차별이 없고 세어 헤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법신을 얻기 위한 공용을 짓지 아니하여서는 안 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평등하고 헤아릴 수 없는
이 원인을 중생이 힘써 닦지 않는다면
증득은 항상 원인을 이루지 않으며,
바른 원인을 끊어 제거하니, 도리에 맞지 않다.
『아비달마대승장경』 가운데 섭대승(攝大乘)이라고 한다. 이것은 궁극[究竟]을 바르게
설한다.
[출처] 섭대승론(攝大乘論) |작성자 무구
'유식30송 (론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유식론(成唯識論) 해제 (0) | 2022.03.27 |
---|---|
무착보살(無着菩薩), 세친보살(世親菩薩) (0) | 2022.03.27 |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 한자경 저 / 자료입력:박미숙 (0) | 2021.11.28 |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과 제9식 아마라식(阿摩羅識)> (0) | 2021.07.18 |
제7식 - 말나식(末那識, 산스크리트어 manas-vijnana)이란 (0) | 2021.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