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법요傳心法要 강해(1)
'한마음 깨치면 부처'
황벽黃檗: ?-850스님이 배휴裵休:797-870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마음일 뿐 거기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마음은 본래로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거나 낡음을 따질 수도 없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넘어 바로 그 몸 그대로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버린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으며 재어볼 수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중생은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다. 부처에게 부처를 찾게 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붙잡는다면 겁劫이 지나고 몸이 다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버리면 부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라 해서 마음이 줄지 않고 부처라 해서 더 늘지도 않는다.
또한 6도만행과 항하사 같은 공덕이 본래 그 자체에 갖추어져 있어서 닦아서 보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연을 만나면 곧 베풀고 인연이 그치면 그대로 고요하나니, 만일 이것이 부처임을 결정코 믿질 않고 겉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하려 하고 그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면 그 모두가 망상일 뿐 도와는 서로 어긋나게 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다시 다른 부처가 없으며 또한 다른 어떤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은 허공같이 밝고 깨끗하여 어떤 모습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법의 몸法體과 어긋나는 동시에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 비롯함이 없는 옛날로부터 모양에 집착한 부처란 없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를 두는 것이니 차제가 있는 부처란 본래로 없다. 한마음 깨치면 다시 더 작은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한 마음으로 다름없음이 허공과 같아서 그것에는 잡됨도 무너짐도 없고 온 누리를 비추는 햇살과도 같다. 해가 떠올라 온 천하가 두루 밝아질 때라도 허공은 한 번도 밝은 적이 없으며, 해가 져서 어둠이 온 천하를 덮을지라도 허공은 어두웠던 적이 없다.
이렇게 밝고 어두운 경계가 서로 번갈아 바뀐다 해도 허공의 성품은 툭 틔여 변하지 않는 것이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꼭 이와 같다. 만약 부처를 관觀하면서 깨끗하고 밝으며 속박을 벗어났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린다든가 중생은 때 묻고 어두우며 생사의 고통이 있으리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고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수많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깨닫지 못할 것인데 이는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오직 이 한마음일 뿐 거기에 티끌만큼의 어떤 법도 있을 수 없으니 이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 마음 바탕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마음에서 마음을 내고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서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악법이지 깨닫는 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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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법요傳心法要는 중국 선종 임제종의 문을 연 임제선사의 스승인 황벽선사의 법문을 기록한 책이다. 황벽의 스승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라는 철칙을 지킨 백장회해이고, 백장의 스승은 한 마리 말馬로서 천하를 짓밟아버린 마조대사이다. 임제선사는 노파심으로 가득찬 황벽선사로부터 3번에 걸쳐 몽둥이 60대를 얻어맞고서 깨달았다는 유명한 고사가 있는데, 이 법문을 기록한 배휴는 당나라의 재상인 상국相國으로서, 황벽선사의 불법을 듣고 자신도 깨달아 재가거사로서 황벽의 법을 이었으며, 그 말씀을 하나하나 다 기록하여 '마음을 전하는 불법의 요체'란 제목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황벽선사는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 순식간에 깨닫는 법을 설한다. 한 마디로 돈오頓悟 만을 널리 제창하지 잎과 가지를 찾는 단계적인 깨달음은 아예 얼씬도 하지 말라는 투로 말씀한다. 첫 법문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마음을 곧장 찔러 들어가니, 큰 근기의 수행자들은 불법이니, 도니 하는 것을 여기서 결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간단하면서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황벽의 법문에 마음의 눈을 곧장 뜨기를 기원한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마음일 뿐 거기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마음은 본래로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거나 낡음을 따질 수도 없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넘어 바로 그 몸 그대로 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버린다."
황벽은 삼세의 불조들이나 세상의 모든 중생은 오직 마음 하나로 통일되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여기에는 다른 어떤 것도 붙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마음이라고 부른다. 한 생각 움직이지만 않으면 지금 이대로 바로 부처임을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모든 중생이 이미 성불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늘을 나는 새들이나 땅을 기어다니는 개미들도 한 생각 일으키지 않으니 있는 그대로 부처인데 그것을 모르고 새끼들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먹을거리 장만에만 허덕이며 바쁘다보니 참으로 가련하다는 소리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세상 겉모습만 보지 않고 생각만 오락가락 하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편안한 부처로 살 수 있는데, 모양에 속고 이름, 관념에 속아서 갈팡질팡하면서 불안, 근심, 걱정, 공포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으니 이 일을 아는 사람들로서는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 이 세상을 뛰어넘는 일을 전혀 믿으려고도 하지 않으니 그 어리석음을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아주 막막할 때도 있다. 그래서 선에서는 최상근기 몇 사람만을 취하여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 왔으나, 이들 소수의 마이너리그식 마음 전함만으로는 중생의 갈증이 해소될 리가 없다.
깨달음이 쉽지는 않으나 그 원리를 이해하면 조그만 노력만으로도 이 중생 노릇을 벗어날 수 있는데,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진실로 여기에 귀를 기울여 헤아릴 수도 없는 세월 동안 스스로 저지르고 겪어온 괴로움을 초월해보기 바랄뿐이다. 황벽선사뿐 아니라 석가, 달마 그 누구의 말씀이라도 자기 스스로 이 맛을 체험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더구나 말이 조리가 있느니, 문장이 유려하니, 핵심을 찌르는 말이니 하는 것은 전혀 쓸데 없는 헛소리임을 먼저 알아채야 한다.
일단 자기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 몸과 마음이 있어 그것을 나로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다. 깨달은 사람도 역시 그렇다. 깨닫지 못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몸과 마음이 참된 자신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깨닫지 못한 사람과 깨달은 사람의 차이점은 전혀 없다는 말인가? 그럼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깨달은 사람은 오직 마음뿐이라고 하던데, 몸과 마음이 함께 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면 깨닫지 못한 나도 부처이고, 깨달은 부처도 중생이란 말인가? 도대체 믿을 수 없는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차이점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깨닫지 못한 자들은 이 몸과 마음이 실제 나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그것을 애지중지하여 의지하며 살아가는 반면에 깨달은 자들은 이 몸과 마음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임시로 지어진 몸과 마음일 뿐이고, 본래 텅 비어서 나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본다. 텅 빈 몸과 마음으로서 나라는 존재는 없지만 이것을 아는 본성을 마음의 눈으로 보니 이것이 바로 참된 자신임을 보는 것이다. 알고 보면 이 몸과 마음을 벗어나서 본성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이 몸과 마음, 본성, 나아가 삼라만상까지 포함하여 그대로 참나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참나이니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의지할 것도 없다는 것이 그 차이점이다.
그래서 자기 본 마음을 알고 나면 자기 육신을 비롯하여 세상 모든 것이 마음으로 보이므로 육체와 물질과 마음의 구별이 없다. 황벽의 말대로 부처나 중생이나, 무정물이나 모두 한마음일 뿐이니 다른 것은 아무것도 붙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마음 뿐이라 하여 나무, 돌, 하늘, 땅 등 현상적인 이름과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부르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는 것을 알지마는 또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고 전체가 한마음임을 보는 것이다. 이처럼 크나큰 마음이 자기 자신이니,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세상에 부처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나도 부처고, 남도 부처도, 부모, 자식, 형제, 축생, 귀신, 유령도 모두 부처로 보니 어디에 갈등이 일어나고 서로 다투며 남의 것을 뺏으려는 마음이 일어날 것인가. 그야말로 대평화요, 대배려요, 대자유의 세계임을 맛보아야 이 일을 마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깨닫지 못한 사람은 왜 이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 글쓴이는 다만 알 수 없는 세월로부터 착각하여 살아온 때문이라고 여긴다. 본 마음이 실제 자기 자신인데, 이것을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잊어버리고 이런저런 생을 살아왔기에 그 잃어버린 본 마음을 찾지 못하면 다시 영원토록 착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한결같이 사람 몸 받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부르짖는데, 오직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노력하여 이 착각의 생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믿고서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생에서 깨달아 자기 자신을 영원한 괴로움에서 구출해 내야 한다. 역대 불조들이 이 한 생각으로 수많은 생을 살아왔지만 불조라도 직접 자신을 구출해줄 수는 없다. 자기 자신안에 부처가 들어 앉아 있기 때문에 이것을 스스로 발견하고 착각에서 빠져나와야 소위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이제 스스로 그 구원의 역사를 써가면서 뒷날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호탕하게 크게 한번 웃을 날을 기약해보자.
황벽의 뒷말씀에도 나오지만 보통 무심無心, 곧 마음 없음이 도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물론 무심도 큰 벽에 가로막혀 있다는 말씀도 하지만, 마음 없음을 체득하고, 그 무심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면 지혜는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올 것이다. 무심은 보통 빈 병에 비유하곤 한다. 속이 빈 병은 병 속이 비었다는 것이지, 병 자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심도 마음이 텅 비고 깨끗하다는 뜻이지, 마음 자체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본 마음은 황벽의 말대로 본래부터 생기거나 없어질 수가 없으며, 색깔도 없고, 정해진 틀,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다니 낡았다니, 길다니 짧다니, 크다지 작다니 따질 수도 없다. 마음은 모든 개념과 언어, 상대성을 초월하여 바로 그 없는 몸(이를 법신이라고 부른다) 그대로일 뿐임을 진실로 믿어야 한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라서 기존의 지혜, 지식, 개념, 관념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버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한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 부처이다. 이것을 알고난 뒤에는 자기 마음대로 한생각, 아니 수천 수만 생각을 일으켜도 그대로 부처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보통 마음으로 알고 있는 온갖 생각, 감정, 느낌, 의식 등은 모두 잠시 생겼다가는 사라져버린다. 물론 이것들이 우리의 잠재의식(또는 심층의식) 속에 기억으로 남아서 다시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것들은 항상 변하는 것이다. 이처럼 변화하는 생각, 감정, 기억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내가 변하는 것이라면 나는 자기 자신이었다가 아니었다가 다시 자기로 돌아왔다 갔다 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셈이다. 사실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 아니 본래 부처들은 이러한 상태로 일생을 살다가 또다른 생을 찾아 갔다가 왔다 하는 노릇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우리 모두에게는 이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깨닫기만 하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세 불조들이 주야장천 가르쳐주고자 하는 우리의 본래 마음本心이다. 이것을 알면 왔다 갔다 하는 인생이 아닌, 오지도 가지도 않은 채 왔다 갔다 하는 온갖 생각, 감정, 의식들을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삶과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대자유인으로 살아간다고 온 천하에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중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제대로 알게 할까 걱정하고 조바심을 내다 보니 유마경 속의 유마대사도 병들었고, 경봉선사도 병들었고, 사실 병들지 않은 부처와 조사들이 없다. 이것에 대해 실 한올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라서 부처의 씨앗이라도 마음에 뿌려 놓으려고 역대 선지식들이 그렇게 노력해 온 것을 눈물이 날 정도로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아무튼 이 변하지 않는 본 마음을 모든 중생이 다 하나씩 가지고 있다. 이것을 알고 보면 그동안 괴롭혀온 온갖 잡된 생각, 감정, 느낌, 의식 등도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본 마음이 스스로 다 지어내고 만들어온 것이다. 그동안 깨달음을 가려 온 온갖 망상, 집착들도 다 이 본 마음의 소산물인 것이다. 그러니 이 망상과 집착들을 전혀 꺼리고 미워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번뇌가 바로 보리,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번뇌망상이 곧 본 마음이다. 그 이유는 본 마음은 마치 허공과 같이 텅 비고, 아무 모습이 없는데, 살아있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법은 생각, 감정, 의식 등으로 나투는 것이다. 다른 말로 본 마음의 작용이 이런 생각, 감정들인데 마음의 바탕과 그 작용은 둘이 아니다. 물론 바깥에 보이는 삼라만상의 모습도 이 본 마음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이것은 나중에 깨닫고 난 뒤에 스스로 확인해 봐야 한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으며 재어볼 수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중생은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다. 부처에게 부처를 찾게 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붙잡는다면 겁(劫)이 지나고 몸이 다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버리면 부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라 해서 마음이 줄지 않고 부처라 해서 더 늘지도 않는다."
본 마음은 부모님의 몸을 빌어 태어나면서부터 달고 나오는 것이니 본래 찾고 구할 필요는 없다. 이 본 마음이 실질적인 자기 자신, 곧 참나, 진여불성, 주인공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런 이름도 다 마음이 지은 것일 뿐이다. 예수, 하나님, 부처, 알라라 해도 좋고, 마른 똥막대기, 호떡 그 무엇으로 불러도 다 한 가지이다. 황벽은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마음 가지지 않은 중생은 없으므로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자기가 모를 뿐이지 중생이 곧 부처란 소리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마음을 구할 이유도 없고, 부처가 부처를 찾을 필요도 없다. 그냥 마음을 푹 쉬고 잠시동안 생각을 잊어버리면 본 마음, 부처는 저절로 눈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참으로 쉬운 말인데 행동하기가 어렵다. 마음을 푹 쉬고, 한번 생각을 잊어버리면 된다는 이 말에 당장 모든 시비를 놓아버리면 가장 좋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생각, 느낌, 감정, 의식들도 본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온갖 잡되고 허망한 생각 때문에 공부를 하려고 해도 쉽지 않은 것이 수행자의 현 실태이다. 마음을 조금 고요히 하여 명상을 하려고 하면 일분, 오분도 안 되어 갖가지 걱정거리, 자식 생각, 부모 생각, 직장 일, 친구와 다투었던 일 등이 쉴새없이 떠올라 마음을 방해한다. 이것도 본 마음이 그동안 잘못 길들여져서 제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깊은 마음 집중 상태인 선정에 들어 생각도 말도 좀 끊어지게 만들려 해도 쉽지 않다. 사실은 이것들을 끊을 필요도 없는데, 워낙 잡다한 생각들이 정신을 어지럽히므로 고요한 마음을 직접 맛보기 위해 마음을 한 가지에 집중하여 가라앉히라는 것이다. 간화선에서 화두를 들라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지 화두 자체는 마음 깨닫는 것과 크게 관계가 없다. 그렇다고 들고 있는 화두를 다 놓아버리라는 소리는 아니다. 아직 이 일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선지식의 지도를 따르는 것이 가장 낫다.
황벽은 본래 이 본심 자체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6도만행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이 갖추어져 있어 수행하고 닦아서 보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본심과 하나로 철저히 합쳐지게 되면 그 안에 6바라밀과 해탈, 열반, 자유, 평화등 좋은 것은 모두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본 마음 하나만을 믿고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본래 다 갖추고 있으므로 수행도 공부도 필요없다는 소리이다. 이것을 6조 혜능대사는 주로 자성自性이라고 불렀는데, 모든 걸 자기 성품에 맡겨 유유자적하면서 깨달을 분이 있는 인연을 만나면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 베풀고, 그런 인연이 없으면 그냥 그대로 고요히 열반에 들어 있으니 본 마음에서 바라보면 본래 깨달을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것을 전혀 알 수 없으니 깨달음도 이야기하고 수행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부처임을 결정코 믿질 않고 겉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하려 하고 그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면 그 모두가 망상일 뿐 도와는 서로 어긋나게 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다시 다른 부처가 없으며 또한 다른 어떤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은 허공같이 밝고 깨끗하여 어떤 모습도 하고 있지 않다."
황벽은 다른 말씀은 전혀 없고, 다만 이렇게 글을 보고, 읽고, 생각하고, 느끼는 자기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을 뿐이지 무엇인가 다른 특별한 것을 찾는다고 한다면 전부 허망한 생각임을 강조한다. 두 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다. 두 개의 부처를 가진 마음도 세상에 하나도 없다. 모든 중생의 마음은 전부 한마음, 다 같은 마음이라서 중생이 부처요, 부처가 중생이다. 부처, 중생이라는 이름도 다 마음이 지은 것일뿐이다. 그런데 한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고, 맛도 볼 수 없고, 아무 모습이 없다. 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본다, 곧 견성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의 눈으로 본다고 말들을 하지만, 이것도 사람들이 따라오도록 유도하는 말이지, 실지로는 석가가 대열반경에서 손바닥 위에 놓인 암마라열매를 보듯 불성을 분명히 본다고 말한 것처럼 철저히 깨닫게 되면 스스로 눈앞에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법의 몸法體과 어긋나는 동시에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 비롯함이 없는 옛날로부터 모양에 집착한 부처란 없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를 두는 것이니 차제가 있는 부처란 본래로 없다. 한마음 깨치면 다시 더 작은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한 마음으로 다름없음이 허공과 같아서 그것에는 잡됨도 무너짐도 없고 온 누리를 비추는 햇살과도 같다. 해가 떠올라 온 천하가 두루 밝아질 때라도 허공은 한 번도 밝은 적이 없으며 해가 져서 어둠이 온 천하를 덮을지라도 허공은 어두웠던 적이 없다."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우리 본심, 곧 법신과 어긋나는 동시에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는 말씀은 첫 깨달음의 전제 조건은 한번 생각이 끊어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선지식이 깨닫기 전에는 수행자의 모든 말이나 생각을 전부 망상이라고 물리치는 이유는 이 일은 기존의 모든 사고, 개념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모든 생각을 버려야만 그나마 깨달을 분수가 있다는 것이다. 깨닫기 전에는 모든 생각과 상상하는 것을 다 놓아야 한다. '모양에 집착한다'는 것도 깨달음이 어떤 모습, 어떠한 것일까 하는 망상을 놓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떠한 이름, 개념, 관념, 모습, 모양, 형상을 붙잡고 있는 부처는 하나도 없다. 부처는 공, 곧 허공과 같은데 허공이 그 무엇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참된 부처는 계단, 계단, 단계를 거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므로, 자기 마음이 부처라는 한 마디 말에 곧바로 여래의 자리로 뛰어오르는 게 참 수행자가 가야할 길이다. 비록 지금 당장 그렇게 되지는 않더라도 깨닫는 순간에는 당장에 그렇게 된다는 소리이다. 아니, 사실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 여래 자리로 초월하는 순간, 모든 번뇌와 습기가 다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번뇌와 습기를 가진 채로 열반에 들어간다. 결국 번뇌와 습기라도 한마음과 다른 것이 아니고, 모두 자기 마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살아온 정신체계와는 완전히 탈바꿈하기 때문에 그동안의 습관, 버릇이 곧바로 없어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모든 습관, 버릇도 한마음이란 용광로에 들이부어 다 녹여버리면 나중에는 전부 없어진다. 모든 것은 공으로부터 와서 공즉색, 색즉공으로 변하다가 결국엔 모두 공으로 돌아가는 이치이다.
"이렇게 밝고 어두운 경계가 서로 번갈아 바뀐다 해도 허공의 성품은 툭 트이어 변하지 않는 것이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꼭 이와 같다. 만약 부처를 관(觀)하면서 깨끗하고 밝으며 속박을 벗어났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린다든가 중생은 때 묻고 어두우며 생사의 고통이 있으리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고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수많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깨닫지 못 할 것인데 이는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오직 이 한마음일 뿐 거기에 티끌만큼의 어떤 법도 있을 수 없으니 이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 마음 바탕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마음에서 마음을 내고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서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악법이지 깨닫는 도가 아니다."
'이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다'는 말이 이 한 편의 법문에도 수차례 반복되어 나온다. 그만큼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구나!' 라는 믿음이 가장 큰 공덕이고, 부처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임을 뜻한다. 이것을 깊이 믿으면 믿는 그대로 부처임을 믿고, 부처는 고민, 걱정을 하지 않으니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자기 부처에게 맡겨버리면 모두 공으로 돌아간다. 그 공이 바로 부처이다. 부처에게 맡겨버린다고 해서 맡기는 부처 따로 있고, 일을 떠맡는 부처 따로 있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오직 한마음, 마음 하나 뿐이라서 이 부처도 마음, 저 부처도 마음, 이 마음도 한마음, 저 마음도 한마음임을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계속 주입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허공의 성품'도 한마음일 뿐이고,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한마음이고, 마음의 바탕도 한마음이고, 깨닫는 도도 한마음이고, 깨닫지 못하는 도도 다 한마음이다. 이 한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알고보면 이 얼마나 간단명료하고, 간편한 것인가. 또한 진실, 진리가 그러한 것이니 온 우주에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요즘 세상은 워낙 일천제들이 많아서 이것을 겨자씨 만큼이라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련지. 예수도 다만 이것을 말했을 뿐이다.
다음 편엔 단박에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른 간편한 수단방법을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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