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벽선사의 전심법요(傳心法要)
여기『전심법요(傳心法要)』의 입력저본은 성철스님께서 번역하신『선림보전(禪林寶典)』입니다. 내용 분류 역시『선림보전(禪林寶典)』에서 나눈 것입니다.
제1편 전심법요(傳心法要)
전심법요 해제(解題) ▲ 위로
서천 28대로 계계상승(繼繼相承)한 법등(法燈)은 달마스님을 효시(嚆矢)로하여 동토(東土)에서 그 빛을 밝히고, 장차 한 꽃이 다섯 잎이 피어날[一花開五葉] 씨앗을 비로소 뿌리시니, 이것이 달마정전(達磨正傳)의 원류(源流)입니다. 이 법은 6대로 면면히 전하여 6조 혜능대사에 이르러 그 큰 꽃을 피워, 아래로 남악(南嶽)스님과 청원(靑原)스님의 양대맥을 이루고, 다시 오가칠종(五家七宗)이 벌어져서 천하에 울창한 대선림(大禪林)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남악스님 아래서 천하 사람을 답살(踏殺)한 한 망아지가 나왔으니 그 분이 마조(馬祖)대사로서 백장(百丈)스님이 그 법을 잇고 다음으로 이 『전심법요(傳心法要)』의 설법자인 황벽(黃檗)선사가 나왔으며, 그 아래로는 조석(祖席)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임제(臨濟)선사가 출현하여 임제종의 종조(宗祖)가 된 것입니다.
달마선종(達磨禪宗)이라고 하면 한 마음의 법[一心法]을 말한 것이니, 이른바 '문자를 세우지 않고 교 밖에 따로이 전한 것[不立文字 敎外別傳]'이며,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直指人心 見性成佛]'고 하는 것입니다. 『전심법요』는 그 내용에서 달마선종의 정통사상과 육조스님께서 말씀한 식심견성(識心見性)의 돈교법문(頓敎法門)을 가장 투철하고 명료하게 설파한, 종문(宗門)의 대표서라고 예로부터 일컬어온 어록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심법요』라고 하면 『완릉록(宛陵錄)』을 포함하여 일컫는데, 그 상부(上部)를 『황벽단제선사 전심법요』 하부(下部)를 『황벽단제선사 완릉록』으로 나누어 부릅니다. 대사의 재속(在俗) 제자인 배휴(裴休 797-870)가 그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그가 강서(江西)의 종릉(鍾陵)에 관찰사로 재임할 때인 회창(會昌) 2년(842)에 용흥사(龍興寺)에서 대사께 문법하던 것을 필록(筆錄)하여 두었다가, 대사께서 입적하고 난 다음 그 대강을 대사의 문인들에게 보내어 청법(聽法) 당시의 장노(長老)들과 대중의 증명을 얻어서 세상에 유포시킨 것입니다. 배휴가 서문을 쓴 해가 대중(大中) 11년(857)이므로, 대사께서 입적한 지 2-3년 뒤로 추정됩니다.
『전심법요』는 배휴 자신이 종릉과 완릉 두 곳에서 문법하던 것을 직접 기술한 것이며, 『완릉록』은 배휴가 완릉의 개원사에서 문법하던 기록을 기저(基底)로하여 뒤에 시자들 측에서 엮은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것은 『전심법요』에서는 배휴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쓰고 있으나, 『완릉록』에서는 "배상공이 운운..." 하면서 시종일관 제3인칭으로 기술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완릉록』에서는 『전심법요』의 내용과 더러 중복된 부분이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 후반부 "대사는 본시 민현의 사람이다[師本是 中人]"로부터는 옛 유통본에는 본래 없던 부분으로서 전반부보다 분량이 더 많으며, 당 대중년간(848-859)에 또 다른 사람에 의하여 추가로 기술된 것으로 사료됩니다.
여기에서는 대사의 출생 및 출가 인연에 관해서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대사께서 초기에 천태(天台)에서 노니시던 일과 귀종(歸宗) 염관(鹽官) 남전(南泉) 등의 선사들을 찾아 제방을 역방(歷訪)하면서 문답하고 거량(擧揚)하던 대사의 기봉(機鋒)과 기연(機緣)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배휴가 홍주 개원사에서 벽화를 보고 거량하다가 개오(開悟)한 사유를 함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후반부는 송나라 원풍(元 ) 8년(1085)에 편찬되었다가 명나라 만력(萬曆) 17년(1589)에 재편된 『사가어록(四家語錄)』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 번역에 사용한 원본은 명본(明本) 『4가어록』 가운데 제4권 『황벽단제선사전심법요』 및 제5권 『황벽단제선사완릉록』을 모본으로 삼아 번역하였습니다. 원풍 8년판의 『4가어록』에는 『완릉록』의 전반부밖에 실려있지 않았으나, 명나라 때 재편하면서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 제8권에서 그 후반부를 옮겨 증보(增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4가어록』은 일명 『마조4가록』이라고도 일컫는 바, 곧 마조, 백장, 황벽, 임제 등 조계정전(曹溪正傳)의 4대(代) 조사 스님의 어록을 함께 엮은 어록으로서 임제종황룡파(黃龍派)에서 자가(自家)의 종지종통(宗旨宗統)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편찬-유포시킨 것이며 종문으 가장 핵심적인 어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광서(光緖) 9년(1883) 감로사(甘露社)에서 『법해보벌(法海寶筏)』 가운데 『전심법요』와 『완릉록』을 포함시켜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유통본은 융희(隆熙) 원년(1907) 운문사(雲門寺)에서, 그리고 융희 2년(1908) 범어사(梵魚寺)에서 간행된 『선문촬요(禪門撮要)』 상권에 『전심법요』와 『완릉록』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완릉록』의 후반부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황벽스님의 법문들은 『조당집(祖堂集)』권16,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9,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0,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 권8,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권2,3, 『4가어록(四家語錄)』 권4,5, 『오등회원(五燈會元)』 권4, 『지월록(指月錄)』 권9 등에 단편적이고 부분적이면서 내용이 서로 다르게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명나라 때 증보 재편된 『4가어록』은 『전심법요』와 『완릉록』의 교재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심법요』의 유통본은 지금까지 체제와 내용에서 크게 변질됨이 없이 유행되어 왔으나, 다만 결미(結尾)의 "어떻게 하여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如何得不落階級]" 이후의 한 단이 『4가어록』에서는 『완릉록』의 결미로 옮겨 싣고 있는 점이 다릅니다.
다음으로 황벽스님과 배휴와의 관계 및 대중황제와의 인연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황벽스님 말년의 교화 시기는 당 무종의 회창법란(會昌法難)이 자행되던 때(842-845)로서, 당시 장안과 낙양에는 각각 4개 사찰만을, 각 주에는 1주에 1개 사찰만을 남기고 모조리 폐사시켰으므로 모든 승니들은 자연히 산곡에 은거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런 관계 때문에 사실상 대사의 말년의 행리(行履)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배휴는 다시 지방장관으로 재직하다가 선종(대중황제)이 즉위하고 나서 조정의 상공(相公) 벼슬에 올라 중앙행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완릉록』에서 보인 바처럼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서 벽화를 보고 황벽스님에게 거량하던 중, 황벽스님이 "배휴야!"하고 부르자 배휴가 "예!"하고 대답하니 대사가 "어느 곳에 있는고?" 하는 말 끝에 깨치고 이 기연으로 대사의 재속제자(在俗弟子)가 된 것입니다. 그는 대사뿐만 아니라 위산 영우( 山靈祐)선사에도 귀의 하였으며, 화림 선각(華林善覺)과도 교분이 있었고, 규봉 종밀(圭峰宗密)과는 도연(道緣)이 깊었습니다.
배휴가 종릉, 완릉 두 곳에서 대사를 모시고 조석으로 문법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그 문답 내용을 필록하여 둔 것을 대사의 입멸 후 광당사(廣唐寺)의 옛 법중(法衆)의 증명을 얻어 세상에 유포시킨 것이 『전심법요』인 것입니다. 이처럼 배휴라는 훌륭한 필록자를 얻음으로서 황벽스님의 법문이 세상에 크게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중황제는 본시 당 헌종(憲宗)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열 세 살 때 형 목종(穆宗)의 용상에 올라가 장난삼아 좌하의 신하들을 읍(揖)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뒷 날 동생의 아들인 무종(武宗)으로부터 빈척( 斥)을 당하여 사지(死地)에서 구출되어 입산하고, 향엄지한(香嚴智閑) 선사 밑에서 사미가 되었다가 나중에 염관 제안(鹽官齊安)선사 회하에서 서기(書記)를 보았습니다.
당시 황벽스님은 수좌(首座)로 있었는데, 하루는 불전(佛殿)에 예배하는 대사께 대중사미가 뒤에서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고..."하는 물음으로 거량하다가 대사로부터 뺨을 두 차례 얻어맞았습니다. 뒷날 대중사미는 당나라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제 16대 선종(宣宗)입니다. 선종은 앞날의 일을 생각하고 대사께 '추행사문(추行沙門)'이란 호(號)를 내렸는데, 당시 상공으로 있던 배휴의 주청(奏請)에 의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로 개호(改號)하였던 것입니다. 대중황제는 전제(前帝)인 무종이 폐불(廢佛)을 한 탓으로 조정의 위신이 실추된 것을 다시 일으키는 데 지력하였으며, 불교를 중흥시킨 공로가 컸습니다.
『전심법요』는 구사하고 있는 언어들이 간명하고도 평이하며 격외언구(格外言句)의 고준(高峻)한 말들을 사용치 않으면서도 선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선(禪)의 개론서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조계정전의 정통 선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긴요한 어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계의 원류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이 『전심법요』를 통한 황벽스님의 문정(門庭)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당(唐) 대중(大中 ; 847-859)년간에 본주(本州) 황벽산에서 세연을 마치셨습니다. 선종(宣宗) 황제가 단제선사(斷際禪師)라고 시호를 내리고 탑호는 광업(廣業)이라 하였습니다.
전심법요 서문(序文) ▲ 위로
강서 당나라 하동 배휴(裴休)는 모으고 아울러 서문을 쓰노라.
대선사가 계셨으니 법휘는 희운(希運)이시다. 홍주 고안현 황벽산 축봉 아래 머무시니, 조계 육조의 적손이요 백장의 사법 제자이며 서당의 법질이다.
홀로 최상승(最上乘)의 패를 차고 문자의 인장을 여의셨으며 오로지 한 마음만을 전하고 다시 다른 법이 없으셨으니, 마음의 바탕이 또한 비었는지라 만 가지 인연이 함께 고요하여 마치 큰 해 바퀴가 허공 가운데 떠올라서 광명이 밝게 비추어 깨끗하기가 가느다란 먼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으셨다.
이를 증득한 이는 새롭고 오램이 없고 얕고 깊음이 없으며, 이를 설하는 이는 뜻으로 앎을 세우지 않고 종주(宗主)를 내세우지 않으며 문호를 열어젖히지 않은 채, 당장에 바로 이것이라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다음에라야 본래의 부처가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 말씀이 간명하고 그 이치가 곧으시며 그 도는 준엄하고 그 행이 고곡하시어, 사방의 학자들이 산을 바라보고 달려와 모이고 그 모습을 쳐다보고 깨치니, 왕래하는 대중의 무리가 항상 일천명이 넘었다.
내가 회창 2년 종릉에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산중으로부터 스님을 고을로 모셔 용흥사에 계시도록 하고 아침저녁으로 도를 물었으며, 대중 2년 완릉에 관찰사로 재임할 때에 다시 가서 예로써 맞이하여 관사에 모시고 개원사에 안거하도록 하여 아침저녁으로 법을 받아 물러 나와서 기록하였는데, 열 가운데 한둘밖에는 얻지 못하였다.
이를 마음의 인장[心印]으로 삼아 차고 다니면서 감히 드러내어 발표하지 못하다가, 이제 신령스런 경지에 드신 그 정묘한 뜻이 미래에 전하여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내어놓으니, 문하생인 태주·법건 스님들에게 주어서 옛산의 광당사로 돌아가 장로들과 청법 대중에게 지난 날 몸소 듣던 바와 같은지 다른지를 묻게 하였다.
때는 당나라 대중 11년 시월 초여드렛날에 쓰노라.
唐河東裵休集幷序有大禪師 法諱 希運 住洪州高安縣黃檗山鷲峰下 乃曹溪六祖之嫡孫 百丈之子西堂之姪 獨佩最上乘離文字之印 唯傳一心 更無別法 心體亦空 萬緣 俱寂 如大日輪 昇虛空中 光明 照耀 淨無纖埃 證之者 無新舊無淺深 說之者 不立義解 不立宗主 不開戶유 直下便是 動念卽乖 然後 爲本佛故 其言 簡 其理直 其道峻 其行 孤 四方學徒 望山而趨 覩相而悟 住來海衆 常千餘人 予會昌二年 廉于鍾陵 自山迎至州 게龍興寺 旦夕問道 大中二年 廉于宛陵 復去禮迎至所部 安居開元寺 旦夕受法 退而紀之 十得一二 佩爲心印 不敢發揚 今恐入神精義 不聞於未來 遂出之 授門下僧太舟法建 歸舊山之廣唐寺 問長老法衆 與往日常所親聞 同異何如也
時唐大中十一年十月初八日序
1. 한마음 깨치면 부처 ▲ 위로
황벽(黃檗: ?-850) 스님이 배휴(裵休:797-870)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마음일 뿐 거기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마음은 본래로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거나 낡음을 따질 수도 없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 넘어 바로 그 몸 그대로 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 버린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으며 재어볼 수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중생은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다. 부처에게 부처를 찾게 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붙잡는다면, 겁(劫)이 지나고 몸이 다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버리면 부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라 해서 마음이 줄지 않고, 부처라 해서 더 늘지도 않는다. 또한 육도만행(六道萬行)과 항하사(恒河沙) 같은 공덕이 본래 그 자체에 갖추어져 있어서, 닦아서 보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연을 만나면 곧 베풀고, 인연이 그치면 그대로 고요하나니, 만일 이것이 부처임을 결정코 믿질 않고 겉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하려 하고, 그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면 그 모두가 망상일 뿐 도와는 서로 어긋나게 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다시 다른 부처가 없으며, 또한 다른 어떤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은 허공같이 밝고 깨끗하여 어떤 모습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법의 몸[法體]과 어긋나는 동시에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 비롯 없는 옛날로부터 모양에 집착한 부처란 없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를 두는 것이니, 차제 있는 부처란 본래로 없다.
한마음 깨치면 다시 더 작은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한 마음으로 다름없음이 허공과 같아서, 그것에는 잡됨도 무너짐도 없고, 온 누리를 비추는 햇살과도 같다. 해가 떠올라 온 천하가 두루 밝아질 때라도 허공은 한번도 밝은 적이 없으며, 해가 져서 어둠이 온 천하를 덮을지라도 허공은 어두웠던 적이 없다. 이렇게 밝고 어두운 경계가 서로 번갈아 바뀐다 해도 허공의 성품은 툭 트이어 변하지 않는 것이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꼭 이와 같다.
만약 부처를 관(觀)하면서 깨끗하고 밝으며 속박을 벗어났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린다든가, 중생은 때묻고 어두우며 생사의 고통이 있으리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고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수많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깨닫지 못할 것인데, 이는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오직 이 한 마음일 뿐, 거기에 티끌만큼의 어떤 법도 있을 수 없으니, 이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 마음 바탕을 깨닫지 모하고 문득 마음에서 마음을 내고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악법이지 깨닫는 도가 아니다."
2. 무심(無心)이 도(道) ▲ 위로
강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무심도인(無心道人) 한 사람에게 공양 올리는 것만 못하다. 그것은 무심한 사람에게는 일체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여(眞如) 그대로인(如如) 몸이 안으로는 목석 같아서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 같아서 어디에도 막히거나 걸리지 않으며, 주관 객관의 나뉨은 물론 일정한 방위와 처소도 없다. 후학들이 감히 법에 들어오지 못하는 까닭은 공에 떨어져 닿아 쉴 곳이 없을까 두려워해서인데, 이런 태도는 막상 벼랑을 보고는 물러나서 거기다가 널리 지견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견을 구하는 자는 쇠털처럼 많아도 정작 도를 깨친 이는 뿔과 같이 드물 것이다.
문수보살은 이치(理)에, 보현보살은(行)에 해당한다. 이치란 진공(眞空)으로서 걸림 없는 도리이고, 행실이란 형식을 벗어난 끝없는 실천을 말한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세지보살은 지혜를 상징한다. 유마(維摩)는 깨끗한 이름[淨名]이란 뜻인데, 깨끗하다는 것은 성품을[性]을 두고 하는 말이고, 이름은 모습의 측면에서 한 말이다. 성품이 모양과 다르지 않으므로, 그를 정명거사(淨名居士)라 한 것이다. 대 보살들로 상징된 위의 것들은 누구나가 가진 성품으로, 한마음을 여의지 않으니 깨치면 곧 그대로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서 깨달으려 하지 않고 마음 밖의 경계인 모양에 집착하여 오히려 도를 등지고 있다. 갠지스강의 모래란 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모래는 모든 불·보살과 제석, 범천 및 하늘 무리들이 자기를 밟고 지나간다 해도 기뻐하지 않고, 소나 양·벌레·개미 등이 자기를 밟고 지난다 해도 성내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갠지스강의 모래는 보배나 향기를 탐하지도 않으며, 똥·오줌 냄새나는 더러운 것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이 곧 무심한 마음으로서, 모든 모양을 떠난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다를 것이 없으니, 이렇게 무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그 당장 무심한 상태가 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여러 겁 동안 수행해도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의 단계적인 공부에 얽매여 해탈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증득하는 데는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법문을 듣는 즉시 한 생각에 무심(無心)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신(十信)·10주(十住)·10행(十行)·10회향(十廻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심을 얻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디거나 빠르거나 무심을 얻으면 그만이지 거기에 더 닦고 증득할 것이 없으며, 참으로 얻었다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는 것이니 당장 한 생각에 깨친 것과 10지를 거쳐 깨친 것이 효용에 있어서는 꼭 마찬가지여서 다시 더 깊고 얕음의 차이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긴 세월 동안 헛되이 괴로움을 받을 뿐이다.
선악(善惡)을 짓는 것은 모두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인데 모양에 집착하여 선악을 짓게 되면. 허망하게 윤회(輪廻)의 수고로움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한마디 말에 본래의 법을 문득 스스로 깨닫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법 그대로가 마음이어서 마음 밖에는 아무 법도 없으며, 이 마음 그대로가 법이어서 법 밖에는 어떠한 마음도 없다. 그런데 마음 그 자체는 또한 마음이라 할 것도, 무심(無心)이라 할 것도 없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없앤다면 마음이 도리어 있게 된다. 다만 묵묵히 계합(契合)할 따름이다. 모든 사유(思惟)와 이론이 끊어졌으므로 말하기를 '언어의 길이 끊기고 마음가는 곳이 없어졌다〔言語道斷 心行處滅〕'고 하였다. 이 마음이 본래 청정한 부처인데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지녔으며 꿈틀거리는 벌레까지도 불 보살과 한 몸으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망상 분별 때문에 갖가지 업과를 지을 뿐이다.
3. 근원이 청정한 마음 ▲ 위로
강서 본래 부처 자리에는 실로 그 어떤 것도 없다. 툭 트이고 고요하여 밝고 오묘하며 안락할 따름이다. 스스로 깊이 깨달으면 당장 그 자리이므로 원만구족(圓滿具足)하여 다시 모자람이 없다. 설사 삼아승지겁을 정진 수행하여 모든 지위를 거치더라도 한 생각 증득하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원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궁극의 경지에 있어서는 어떠한 것도 거기에 더 보탤 것이 없다.
깨닫고 난 다음 지난 세월의 오랜 수행을 돌이켜 보면 모두 꿈속의 허망한 짓일 뿐이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막삼보리에 있어서 실로 얻었다 할 것이 없느니라. 만약 얻은 바가 있었다면,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수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깨달음이라 한다'고 하셨다.
본래 청정한 이 마음은 중생의 세계와 부처님의 세계, 산과 물, 모양 있는 것과 없는 것 및 온 시방법계가 다 함께 평등하여 너다 나다 하는 생각이 없다. 이 본래 근원이 청정한 마음은 항상 뚜렷이 밝아 두루 비추고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聞覺知]으로 마음을 삼고, 그것에 덮이어서 끝내는 정교하고 밝은 본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에라도 무심(無心)하기만 하면, 본 마음자리가 스스로 나타나서 밝은 햇살이 공중에 떠오르듯 시방법계를 두루 비추어 장애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일거일동(一擧一動)을 마음이라고 오인하는 것이다. 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聞覺知]을 텅 비워 버리면 마음 길이 끊기어서 어느 곳에라도 들어갈 틈이 없느니라.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곳에서 본래 마음을 인식할지라도, 본래 마음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데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떠나 있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가운데 다만 견해를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 마음이나 법을 찾아서도 안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버리고 법을 취해서도 안 된다. 그리하면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離] 않으며, 머물지도 집착하지도 않으며, 종횡으로 자재(自在)하여 어느 곳이든지 도량(道場)아님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 법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 밖에 따로 깨닫고 취할 만한 법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마음을 가지고 법을 찾으면서, 마음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마음인 줄 알지 못한다.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찾지 말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는 천만 겁을 지나더라도 마침내 깨칠 날은 없을 것이다. 당장 무심함만 같지 못할 것이니, 그 자리가 본래 법이다. 마치 힘센 장사가 자기 이마에 보배 구슬이 있는 줄을 모르고 밖으로 찾아 온 시방세계를 두루 다니며 찾아도 마침내 얻지 못하다가 지혜로운 이가 그것을 가르쳐 주면 본래 구슬은 예와 다름이 없음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자기 본심(本心)을 미혹하여 그것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찾아다니면서 의식적으로 수행을 하며 차례를 밝아서 깨달으려고 하지만 억겁 동안 애써 구한다고 해도 영원히 도를 이루지 못할 터인즉 당장 무심함만 못하다.
일체의 법이 있다 할 것도 얻었다 할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머무를 것도 없으며, 주관이니 객관이니 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아야 한다. 망념(妄念)을 일으키지 않는 그 자리가 바로 깨치는 자리다. 그때 가서는 다만 본래 마음인 부처를 깨달을 뿐 많은 세월을 거친 노력은 모두 헛된 수행이다. 마치 힘센 장사가 구슬을 얻은 것은 자기가 본래 갖고 있던 구슬을 얻은 것일 뿐, 밖으로 찾아다녔던 노력과는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실제로는 얻었다 할 것이 없으나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스럽기 때문에 다섯 가지 눈[五眼]과 다섯 가지 말[五語]로써 끌어다 보였노라. 이것은 진실되이 허망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맨 으뜸되는 뜻의 이치[弟一義諦]이니라'고 하셨다.
4. 일체를 여윌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 ▲ 위로
강서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의심치 말아야 한다. 사대(四大)로 몸을 삼으나, 사대에는 '나(我)'가 없고, 그 '나'에도 또한 주재(主宰)가 없다. 그러므로 이 몸에는 '나'도 없고 '주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오음(五陰)으로 마음을 삼지만, 이 오음 역시 '나'도 '주재'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 또한 '나'도 '주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육근(六根)·육진(六塵)·육식(六識)이 화합하여 생멸(生滅)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십계(十八界)가 이미 공(空)하여 일체가 모두 공하고, 오직 본래의 마음이 있을 뿐, 맑아서 호호탕탕 걸림이 없다. 분별의 양식[識食]과 지혜의 양식[智食]이 있다. 즉 사대(四大)로 된 몸은 주림과 질병이 근심거리인데, 알맞게 영양을 공급하여 탐착을 내지 않는 것이 '지혜의 양식'이고, 제멋대로 허망한 분별심을 내어, 입에 맞는 것만 구하면서 싫어하여 버릴 줄을 모르는 것을 '분별의 양식'이라 한다.
성문(聲聞)이란 소리를 듣고 깨닫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은 자기 마음 자리를 깨닫지 못하고 설법을 듣고 거기에 알음알이를 일으킨다. 혹은 신통(神通)이나 상서로운 모양·언어·동작. 등에 의지하여 보리(菩提)·열반(涅槃)이 있다는 설법을 듣고 삼아승지겁을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려 한다. 이것은 모두 성문의 도(道)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을 성문불(聲聞佛)이라 한다. 다만 당장에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단박 깨달으면 될 뿐이다.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행도 닦을 것이 없으면, 이것이 가장 으뜸가는 도이며 참으로 여여(如如)한 부처이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 생기는 것만을 두려워하여 곧 도와는 멀어지는 것이니, 생각마다 모양이 없고 생각마다 하염없음이 곧 부처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불법을 모조리 배울 것이 아니라 오직 구함이 없고 집착이 없음을 배워야 한다. 구함이 없으면 마음이 나지 않고, 집착이 없으면 마음이 없어지지 않나니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곧 부처이니라.
5. 허공이 곧 법신(法身) ▲ 위로
팔만사천 법문은 팔만 사천 번뇌를 치료하는 것으로서, 다만 대중을 교화 인도하는 방편일 뿐 일체 법이란 본래 없다. 그러므로 여의는 것이 곧 법이요, 여의줄 아는 이가 곧 부처이다. 일체 법을 여의기만 하면 얻을 만한 법이 없으니, 도를 배우는 사람이 깨닫는 비결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마음에 어느 것이라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의 참된 법신(法身)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 비유가 바로 이것이다.
법신(法身)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인데도 '법신이 허공계에 두루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허공 가운데에 법신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법신 그대로가 허공이며 허공 그대로가 법신임을 모른다. 만약 결정코 허공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은 허공이 아니다. 그렇다고 결정코 법신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이 허공이 아니다. 다만 허공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허공이 곧 법신이니라. 법신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법신이 곧 허공이니라. 허공과 법신은 전혀 다른 모양이 없으며, 번뇌와 보리도 다른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일체의 모양을 여윔이 곧 부처이니라.
범부(凡夫)는 경계(境界)를 취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을 취하나니, 마음과 경계를 함께 잊어야만 참된 법이다. 경계를 잊기는 오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기는 매우 어렵다. 사람들이 마음을 감히 잊어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져 부여잡을 바가 없을까 두려워해서인데, 이는 공이 본래 공이랄 것도 없고, 오로지 한결 같은 참된 법계[一眞法界]임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은 비롯없는 옛날부터 허공과 수명이 같아서 한번도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있은 적도 사라진 적도 없다. 더럽거나 깨끗한 적도, 시끄럽거나 고요한 적도 없고, 젊지도 늙지도 않으며, 방위와 처소도 없고, 안팎의 구분도 없다. 또한 개수로 셀 수량이나 형상·색상·소리도 없다. 그러므로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지혜로써 알 수도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경계인 사물을 통해서 이해할 수도 없고, 또한 힘써 공부한다고 해도 다다를 수 없다.
모든 불·보살과 일체의 꿈틀거리는 벌레까지라도 똑같이 지닌 대열반의 성품이다. 이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법이니 한 생각 참됨을 여의면 모두가 망상이 된다. 마음으로써 다시 마음을 구하지 말고, 부처를 가지고 다시 부처를 구하지 말 것이며, 법을 가지고 다시 법을 구하지 말라.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당장에 무심하여 묵연히 계합(契合)할 뿐이니, 마음으로 헤아린다면 곧 어긋난다.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는 이것이 바른 견해이니, 밖으로 경계를 좇으면서 그것을 마음이라고 잘못 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도둑을 제 자식으로 잘못 아는 격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계·정·혜를 세워 말씀하신 것인데, 애초부터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인들 어디 있겠느냐?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일체법(一切法)을 말씀하신 것은 일체의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니 일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셨다. 본래 근원이 청정한 부처에다가는 다시 어떤 것도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허공이 수많은 보배구슬로 장엄할지라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성(佛性)도 허공과 같아서 비록 무량한 공덕과 지혜로써 장엄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본래 성품이 미혹되어 더더욱 보지 못할 뿐이다.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만법이 이 마음을 의지하여 건립되었으므로, 경계(境界)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끗한 성품 위에다가 경계에 대한 알음알이를 굳이 짓지 말라. 또 '정혜(定慧)의 비추는 작용이 역력히 밝고 고요하면서도 또렷하다[寂寂惺惺]'든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見聞覺知]'는 것은 모든 경계 위에서 알음알이를 짓는 것이니, 이 말은 임시로 중하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몸소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것은 모두 경계의 법이므로 유견(有見)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일체 법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짓지만 않으면, 곧 법을 보는 것이다.
6. 마음을 잊어버림 ▲ 위로
9월 1일 대사께서는 배휴(裴休)에게 말씀하셨다.
"달마스님께서는 중국에 오신 이후로 오로지 한 마음만을 말씀하셨고 한 법만을 전하셨다. 또한 부처로써 부처에게 전하실 뿐 다른 부처는 말씀하지 않으셨고, 법으로써 법을 전하시고 다른 법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법이란 설명될 수 없는 법이며, 부처란 취할 수 없는 부처로서 본래 근원이 청정한 마음이다. 오직 이 일승(一乘)만이 사실이고, 나머지 이승(二乘)은 참됨이 아니다.
반야(般若)는 지혜(智慧)라는 뜻으로서, 모양이 없는 본래 마음이다. 범부는 도(道)에 나아가지 않고 단지 육정(六情)만을 함부로 하여 육도(六道)에 빠져 방황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 모든 견해를 일으키면 곧바로 외도에 떨어진다. 또한 남(生)이 있음을 보고 없어짐으로 나아가면 성문도(聲聞道)에 떨어지고, 남(生)이 있음을 보지 않고 오로지 없어짐만을 보면 연각도(緣覺道)에 떨어진다. 법은 본시 남(生)이 없으므로 이제 또한 없어짐도 없으니, 이 두 견해를 일으키지 않아서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으며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한 마음이어야만 그런 다음에 불승(佛乘)이 된다.
범부는 모두가 경계를 좇아 마음을 내서 좋고 싫음이 있다. 만일 경계가 없기를 바란다면 그 마음을 잊어야 하고, 마음을 잊으면 경계가 텅 비며, 경계가 공적하면 곧 마음이 없어지느니라. 만약 마음을 잊지 못하고 경계만을 없애려 한다면, 경계는 없어지지 않으면서 오히려 분잡히 시끄러움만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만법은 오직 마음일 뿐이며, 그 마음조차도 얻을 수 없는데 다시 무엇을 구하겠느냐? 반야(般若)를 배우는 사람이 얻을 만한 어떤 법도 없는 줄 알게 되면, 삼승(三乘)에는 뜻이 끊어져 오직 하나의 진실뿐이다. 증득하여 깨달았다고 할 것이 없는 자리인데도 '나는 깨달았노라'고 한다면, 모두가 증상만(增上慢)을 내는 사람이다. {법화경}회상에서 옷을 떨치고 나가버린 사람들이 모두가 이러한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어서 실로 얻었다 할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그저 묵묵히 계합할 따름이다.
범부 중생들은 다만 죽는 순간에 오온(五蘊)이 모조리 비고 사대(四大)는 '나(我)'가 없음을 본다. 그러나 참된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다. 태어났다고 해서 성품이 오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고 해서 성품이 가는 것이 아니다. 담연히 둥글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한결같다. 이렇게 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단박 깨쳐 삼세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 곧 세간을 뛰어넘은 사람이다. 털끝만큼이라도 나아가는 향방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만일 모든 부처님께서 맞이해 주시는 것 같은 가지가지 신기한 모습을 보게 될지라도 역시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다만 스스로 마음을 잊고서 법계와 같아지면, 바로 자재(自在)를 얻은 것이니, 이것이 곧 요긴한 대목이다."
7. 법(法)은 무생(無生) ▲ 위로
10월 8일 대사께서 배휴에게 말씀하셨다.
"화성(化城)이란 이승(二乘) 및 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중생을 이끌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세운 가르침이므로, 글자 그대로 모두 변화하여 보인 성곽이다. 또한 보배가 있는 곳이란 다름 아닌 참된 마음으로서의 본래 부처이며, 자기 성품의 보배를 말한다. 이 보배는 사량분별(思量分別)에 속하지도 않으니,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세울 수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관도 객관도 없는데 어는 곳에 성(城)이 있겠느냐? 만약 '이곳을 이미 화성이라 한다면 어느 곳이 보배 있는 곳인가?' 하고 묻는다면, 보배 있는 곳이란 가리킬 수 없는 것인데, 가리킨다면 곧 방위와 처소가 있게 되므로, 참으로 보배가 있는 곳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경에서도 말씀하시기를 '가까이 있다' 고만 했을 뿐이다. 그것을 얼마라고 한정 할 수 없는 것이니, 오로지 그 자체에 계합하여 알면 되는 것이다.
천제(闡提)란 믿음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들과 이승(二乘)들은 부처님의 과『佛果』가 있음을 믿지 않으니, 그들을 모두 선근(善根)이 끊긴 천제라 한다. 보살이란 불법이 있음을 굳게 믿고 대승·소승을 차별하지 않으며, 부처와 중생을 같은 법성(法性)으로 본다. 이들을 가리켜 선근이 있는 천제(闡提)라고 한다.
대개 부처님의 설법『聲敎』을 듣고 깨닫는 사람을 성문(聲聞)이라 하고, 인연을 관찰하여 깨닫는 사람을 연각(緣覺)이라 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성문불이라 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교법(敎法)에 있어서는 깨닫는 것이 많으나, 마음 법『心法』에 있어서는 깨닫지 못하는데, 이렇게 하면 비록 겁을 지나도록 수행을 한다 해도 마침내 본래의 부처는 아니다. 만약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고서 교법에서 깨닫는다면, 마음은 가벼이 여기고 가르침만 중히 여겨 흙덩이나 쫓는 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본 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본래 마음에 계합하면 될 뿐, 법을 구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이 곧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가 마음을 가로막고 현상『事』이 본체『理』를 흐리게 하여, 의례껏 경계로부터 도망쳐 마음을 편히 하려 하고, 현상을 물리쳐서 본체를 보존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마음이 경계를 가로막고, 본체가 현상을 흐리게 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경계는 저절로 비고, 본체를 고요하게만 하면 현상은 저절로 고요해지므로 거꾸로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보통 마음을 비우려 들지 않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해서인데,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비었음을 모르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경우는 경계는 없애려고 하면서 마음은 없애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마음을 없애지 경계를 없애지 않고, 나아가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기가 지은 복덕(福德)마저도 탐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버림에는 세 등급이 있다. 즉 안팎의 몸과 마음을 다 버림이 허공과 같으며, 어디에고 집착하지 않은 다음에 곳에 따라 중생에게 응하되, 제도하는 주체도 제도될 대상도 모두 잊는 것이 '크게 버림『大捨』'이다. 만약 한편으로 도를 행하고 덕을 펴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이바지하여 놓아 버리고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중간의 버림『中捨』'이다. 또한 착한 일을 널리 행하면서도 바라는 바가 있다가 법을 듣고서 빈『空』 줄을 알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은 '작은 버림『小捨』'이다.
큰 버림은 마치 촛불이 바로 정면에 있는 것과 같아서 더 미혹될 것도 깨달을 것도 없으며, 중간 버림은 촛불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며, 작은 버림은 마치 촛불이 등뒤에 있는 것 같아서 눈앞의 구덩이나 함정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일체를 다 버린다.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과거를 버린 것이고,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현재를 버린 것이며, 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이 미래를 버린 것이니, 이른바 3세를 함께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께서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실 때로부터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였으니,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으면 아무 문체가 찍히지 않고, 그렇다고 물건에다가 도장을 찍으면 법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마음에 새기는 것이니,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새김『能』과 새겨짐『所』이 함께 계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어서, 그것을 얻은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 없음『無心』을 말하는 것이고, 얻음도 얻었다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세 몸『三身』이 있는데, 법신(法身)은 자성의 허통(虛通)한 법을, 보신(報身)은 일체 청정(淸淨)한 법을, 화신(化身)은 육도만행법을 말한다. 법신의 설법은 언어·형상·문자로써 구할 수 없으며, 설할 바도 없고 증득할 바도 없이 자성이 허통(虛通) 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한 법도 설할 만한 법이 없음을 설법이라 이름한다'고 하셨다. 보신이나 화신은 근기에 따라 감응하여 나타나고, 설하는 법 또한 현상에 따르고 근기에 알맞게 섭수하여 교화하는 것이므로, 이 모두는 참다운 법이 아니다. 그래서 '보신·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며,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고 하신 것이다.
이른바 밝고 정밀한 성품인 일정명(一精明)이 나뉘어 6화합(六和合)이 된다고 하였다. 일정명이란 바로 한 마음『一心』이요, 6화합이란 6근(根)이다. 이 6근은 각기 6진(塵)과 합하는데, 눈은 색과, 귀는 소리와, 코는 냄새와, 혀는 맛과, 몸은 촉감과, 뜻은 법과 제각기 합한다. 그런 가운데 6식(識)을 내어 18계(十八界)가 된다. 만약 이 18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 6화합이 하나로 묶이어 일정명이 된다. 일정명이란 곧 마음이다. 그런데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두 알면서도, 일정명과 6화합에 대해 알음알이만을 지어서 드디어는 교설에 묶이어 본래 마음에 계합치 못한다.
여래께서는 세간에 나타나시어 일승(一乘)의 참된 법을 말씀하시려 하나, 중생들은 부처님을 믿지 않고 비방하여 고통의 바다에 빠지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설법에 인색한 간탐( 貪)에 떨어져 중생을 위하는 것이 못된다고 하시사, 현묘한 도를 널리 베푸시고 방편을 세워 삼승(三乘)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대승과 소승의 방편이 생겼고, 깨달음에도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게 되었으나, 이것은 모두 근본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일승의 도가 있을 뿐, 나머지 둘은 참된 것이 아니다'고 하셨다. 그러나 마침내는 한 마음의 법『一心法』을 나타내시지 못했기 때문에 가섭을 불러 법좌를 함께 하시사, 따로이 그 '한 마음'을 부촉하셨으니, 이는 언설을 떠난 법이다. 이 한 가닥의 법령은 따로이 행해지는데, 만약 계합하여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즉시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8. 도(道)를 닦는 다는 것 ▲ 위로
배휴가 물었다.
"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무슨 물건이길래 수행하려 하느냐?"
"그렇다면 제방의 종사가 서로 이어받아 참선하여 도를 배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둔근기(鈍根機)를 이끌어 주는 말이니 의지할 것이 못되느니라."
"그것이 둔근기를 위한 말이라고 하신다면, 상근기(上根機)를 위해서는 무슨 법을 설하시는지요?"
"상근기라면 어디 남에게서 찾으려 하겠느냐? 저 자신마저도 얻지 못하거늘, 더구나 따로 뜻에 합당한 법이 어디 있겠느냐? '법이란 법이 무슨 모양이더냐?'고 한 경(經)의 말씀을 보지 못했느냐?"
"그렇다면 도무지 구하여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마음의 힘이 덜리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온통 끊어져 버려서 '없다는 것'도 가당치 않겠습니다."
"누가 그것을 없다 하였으며, 또 그것이 대관절 무엇이길래 너는 찾으려 하느냐?"
"스님께서는 이미 찾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서는, 어찌하여 그것을 끊지도 말라 하십니까?"
"찾지 않으면 그 자리는 바로 '쉼'인데, 누가 너더러 끊으라 하였느냐? 눈앞의 허공을 보아라. 어떻게 저것을 끊겠느냐? 여기에 알음알이를 내는구나."
"사람들로 더불어 알음알이를 내지 않음이 마땅한 것입니까?"
"내 너를 방해한 적은 한번도 없거니와, 요컨대 알음알이란 뜻[情]에 속한 것으로서 뜻이 생기면 지혜가 막히게 되느니라."
"여기에 있어서 뜻을 내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뜻을 내지 않는다면 누가 옳다고 말하겠느냐?"
9. 말에 떨어지다 ▲ 위로
" 스님께서는 제가 한 말씀이라도 드리기만 하면, 어찌해서 바로 말에 떨어진다[話墮]고 하십니까?"
"네 스스로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거늘 무슨 잘못에 떨어짐이 있겠느냐?"
10. 사문이란 무심을 얻은 사람 ▲ 위로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허다한 언설들이 모두 방편으로 대꾸한 것들이어서, 사람들에게 가리켜 보이신 실다운 법이란 아주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실다운 법이란 전도됨이 없거늘, 네 지금 묻는 곳에서 스스로 전도되고 있느니라. 그러면서 무슨 실다운 법을 찾는다는 말이냐?"
"묻는 곳에서 이미 스스로 전도된 것이라면, 스님께서 대답하신 곳은 어떠하십니까?"
"사물을 통해서 자신을 비춰볼지언정 남의 일에는 상관할 것이 없다."
그리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개와도 같아서 움직이는 물건을 보기만 하면 문득 짖어대니,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과 뭐 별다를 게 있겠느냐." 이어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이 선종은 위로부터 이제껏 이어 내려오면서 알음알이[知解]를 구하게 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도를 닦으라고만 했을 뿐인데, 사실 이것도 교화하는 방편설이니라. 그러니 도 또한 배울 수 없는 것으로서, 뜻을 두고 알음알이를 배우게 되면 도에는 도리어 어둡게 된다. 도에는 일정한 방위와 처소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대승의 마음[大乘心]이라고 하느니라.
이 마음은 안팎·중간 어디에도 있지 않으며, 실로 방위와 처소가 없는 것이니, 첫째로 알음알이를 짓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너에게 말한 것은 뜻으로 헤아림이 다해 버린 바로 그 자리가 도라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뜻으로 헤아림이 다하면 마음에는 방위도 처소도 없느니라.
이 도라는 것은 천진하여 본래 이름이 없다.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뜻으로 헤아리는데 미혹되었으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나오시어 이 일을 자상히 말씀하신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 모든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까 걱정하셔서 방편으로 '도'라는 이름을 세우셨으니,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서는 안 되느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을 잊으버려라!'고 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자연히 도에 통하고 마음을 알아 본래의 근원에 통달한 이를 사문(沙門)이라 부른다. 사문이라는 자리는 생각을 쉬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니라. 그런데도 너희들은 남의 집에 세 살이 하듯,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구하면서 배워서 얻으려하니, 될 까닭이 있겠느냐?
옛 사람들은 영민하여 한 말씀 들으면 당장에 배움을 끊었다. 그래서 그들을 '배울 것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이라고 했다. 반면 지금 사람들은 하 많은 알음알이를 구하고, 널리 글의 뜻의 캐면서 그것을 수행이라고 하지만, 넓은 지식과 견해 때문에 도리어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이는 매 것이므로 각각 말씀이 다르다. 다만 요달하여 알기만 하면 미혹되지 않느니라. 무엇보다도 주의할 것은 한 근기를 대상으로 말씀에 있어서 글자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지 말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실로 여래께서 말씀하실 만한 정해진 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종은 이런 일을 따지지 않는 것이니, 다만 마음을 그칠 줄 알면 곧 쉬는 것이요, 다시 앞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느니라."
11. 마음이 부처 ▲ 위로
배휴가 물었다.
"예로부터 마음이 부처라고들 하는데, 어느 마음이 부처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몇 개의 마음을 가졌느냐?"
"그렇다면 범부에 즉(卽)한 마음이 부처입니까, 아니면 성인(聖人)에 즉(卽) 마음이 부처입니까?"
"어느 곳에 범성(凡聖)의 마음이 있느냐?"
"지금 3승 가운데서 범·성을 말씀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어찌해서 그것이 없다고 하십니까?"
"3승을 말하는 가운데 분명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범·성의 마음이 허망하다'고 하셨느니라.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알지 못하고 아직 '있다'고 집착하여 공허한 것을 무언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어찌 허망되지 않겠느냐? 허망하기 때문에 마음이 미혹되는 것이니, 네 만약 범부의 뜻과 성인의 경계를 없애기만 한다면,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느니라.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시어 모든 사람이 다 부처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도 너희는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범·성을 집착하고 마음을 밖으로 내달리며 도리어 스스로 마음을 미혹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라고 하였으니, 한 생각 뜻이 생기면 그 즉시 6도의 다른 곳에 떨어지게 된다. 비롯없는 옛날로부터 오늘날과 한결같이 다르지 않아 어떠한 다른 법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그것을 일컬어 정등각(正等覺)을 성취했다고 하느니라."
"스님께서 말씀하신 '곧 그대로『卽』'라 함은 무슨 도리입니까?"
"너는 무슨 도리를 찾는 것이냐? 어떤 도리라도 있기만 하면 바로 곧 본래의 마음과는 달라지느니라."
"앞서 말씀하신 '시작 없는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르지 않다'고 하신 이치는 무엇입니까?"
"찾기 때문에 네 스스로 그것과 달라지는 것이니라. 네 만약 찾지 않는다면 어디에 다를 것이 있겠느냐?"
"이미 다르지 않다면, 굳이 '곧 그대로'라고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네 만약 범·성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누가 너에게 굳이 '곧 그대로'라는 말을 하겠느냐? '곧 그대로'가 '곧 그대로'가 아니라면, 마음 또한 마음이 아닌 것이니, 이런 가운데 마음과 '곧 그대로'라는 것을 다 잊으면, 네가 더 이상 무엇을 찾겠느냐?"
12.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다『以心傳心』 ▲ 위로
"망념(妄念)이 자신의 마음을 가로막는다는데 무엇으로써 망념을 없애야 합니까?"
"망념을 일으키고 그것을 없애는 것 또한 망념이 되느니라. 망념은 본래 뿌리가 없지만, 다만 분별 때문에 생긴다. 네 다만 범·성의 두 곳에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면, 자연 망념은 없어지는 것이니, 다시 그것을 어떻게 떨쳐버리겠느냐? 떨 끝만큼도 의지하여 집착함이 없으면, 이른바 '내가 두 팔을 다 버렸으니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라'고 한 것이 되느니라."
"이미 의지하여 집착함이 없다면 어떻게 역대 조사들께서는 서로 이어 받았습니까?"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느니라."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면 어찌 마음 또한 없다고 하십니까?"
"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을 마음에 전한다고 하는 것이니, 만약 이 마음을 깨치면 곧 마음도 없고 법도 없느니라."
"마음도 법도 없다면 어찌하여 전한다고 하십니까?"
"너는 마음에 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얻을 만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래서 조사께서는, '마음의 성품[心性]을 깨달았을 때에야 불가사의하리라. 요연히 사무쳐 얻을 바가 없나니, 얻었을 때라도 알았다 하지 못하노라'고 하셨느니라. 만약 이것을 너더러 알도록 한다 하여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13. 마음과 경계 ▲ 위로
"눈앞의 허공을 경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경계를 가리켜 마음을 보는 것이 어찌 없다고 하겠습니까?"
"어떤 마음을 너더러 경계 위에서 보게 하느냐? 설혹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경계를 비추는 마음일 뿐이니라. 사람이 거울로 얼굴을 비출 때처럼 눈썹과 눈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그림자일 뿐 너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거울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의지함'에 빠진다면 항상 의지할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야 언제 깨달을 수 있겠느냐? 너는 '손을 털고 그대에게 내보일 아무 것도 없구나. 수천 가지로 말한들 모두 헛수고로다.'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느냐?"
"마음을 분명히 알았다면 비출 만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까?"
"아무 것도 없다면 어찌 더 비출 필요가 있겠느냐? 눈을 뻔히 뜨고 잠꼬대 같은 말을 하지 말라."
14. 구함이 없음 ▲ 위로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백 가지로 많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음'만 훨씬 못하니라. 도인(道人)이란 일 없는 사람이어서 실로 허다한 마음도 없고 나아가 말할 만한 도리도 없다. 더 이상 일이 없으니, 헤어져들 돌아가거라."
15. 머문 바 없이 마음이 나면 곧 부처님의 행 ▲ 위로
배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세간의 이치[世諦]입니까?"
"언어·문자에 얽매인 이치를 논하여 무엇하겠느냐? 본래 청정한 것인데, 어찌 언설을 빌려서 문답을 하겠는가? 다만 일체의 마음이 없기만 하면 번뇌 없는 지혜[無漏智]라 부른다. 네가 모든 언행에 있어 하염 있는 법[有爲法]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말하고 눈깜짝이는 것 모두가 번뇌 없는 지혜와 같으니라.
지금 말법 시대에 접어들면서 참선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대부분 온갖 소리와 빛깔에 집착하고 있다. 이래서야 어찌 자기 마음을 여의었다고 하겠느냐? 마음이 허공 같고 마른 나무와 돌덩이처럼 되어 가며, 또한 타고남은 재와 꺼진 불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바야흐로 도에 상응할 분(分)이 조금 있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한다면 뒷날 모두 염라대왕에게서 엄한 문책을 받을 때가 올 것이다. 네가 다만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을 여의기만 하면, 마음이 마치 허공에 떠있는 햇살 같아 태양이 비추지 않아도 자연히 두루 비추는 것이니, 이 어찌 힘 덜리는 일[省力事]이 아니겠느냐?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쉬어 머물 바가 없어서, 모든 부처님이 행하시는 행을 하게 되고,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 것이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자신의 청정한 법신이며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니라.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많은 지식을 배워 얻고 부지런히 고행수도하며 풀 옷을 입고 나무 먹이를 먹는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 마음을 모르는 것이니라. 이것을 모두 삿된 수행이라 하며, 정작 천마(天魔)의 권속이 되는 것이니, 이런 식으로 수행을 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지공(誌公 : 418-514)이 말하기를 '부처란 본래 자기 마음으로 짓는 것인데 어찌 문자로 인해 구해지겠는가? 설령 그렇게 해서 삼현(三賢)·사과(四果)·십지만심(十地滿心)의 지위를 얻는다 해도, 그것은 역시 범부와 성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고 하였다. 너는 보지 못하였느냐? '모든 행위가 무상하나니, 이것이 나고 없어지는 법이니라'고 하였으며, 힘이 다한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뜻대로 되지 않을 내생을 초래하리로다. 어찌 하염없는 실상의 문[無爲實相門]에 한번 뛰어넘어 여래의 지위에 바로 드는 것만 같으리오' 라고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는 이 정도의 근기가 아니므로 옛사람이 세우신 방편문에서 알음알이를 널리 배워야 하느니라. 지공이 말하기를 '세간을 뛰어 넘은 명철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대승의 법약(法藥)을 잘못 먹는 것이다.'고 하였다. 네 지금 일거일동에 항상 무심(無心)을 닦아 오래오래 되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역량이 부족하니 단박에 뛰어넘지는 못한다. 다만 3년이나 5년 혹 10년만 지나면 반드시 들어갈 곳을 얻어 자연히 알게될 것이니라. 그러나 너는 이렇게 해내지 못하고, 굳이 마음을 가지고 선(禪)을 배우고 도를 배워야 하니, 그것이 불법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시기를, '여래의 설법은 모두 사람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누런 나뭇잎을 돈이라 하여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따라서 법이란 결코 실다운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우리 종문(宗門)의 사람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너의 본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느니라. 그래서 경에 말씀하시기를, '실로 얻을 만한 조그마한 법도 없는 것을 무상정각이라 부른다' 고 하였다. 만약 이 뜻을 알아낸다면, 부처님의 도와 마구니의 도가 모두 잘못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니라.
본래 깨끗하여 환히 밝아 모남도 둥긂도 없고, 크고 작음도 길고 짧은 모양도 없으며, 번뇌(漏)도 작위(作爲)도 없고 미혹됨도 깨달음도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요연히 사무쳐 보아 한 물건도 없나니,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항하사 대천세계(大千世界)는 바다의 물거품이요, 모든 성현들은 스치는 번갯불 같도다' 한 것이다. 모든 것이 진실한 마음만 같질 못하니라. 법신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부처님·조사와 더불어 마찬가지여서 어디 떨 끝만큼이라도 모자람이 있겠느냐. 이런 내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니, 이 생을 마칠 즈음에는 내쉬는 숨이 들이쉬는 숨을 보장치 못하느니라."
16. 육조(六祖)는 어째서 조사가 되었는가? ▲ 위로
배휴가 물었다.
"혜능(慧能) 스님께서는 경전을 모르셨는데 어떻게 법의(法衣)를 전수 받고 육조가 되셨으며, 반면 신수(神秀) 스님은 500대중의 수좌(首坐)로서 교수사(敎授師)의 임무를 받아 32본(本)의 경론(經論)을 강의 할 수 있었는데 왜 법의를 전수 받지 못하였습니까?"
"신수스님에게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니, 이는 유위(有爲)의 법으로서 닦고 깨닫는 것을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조께서는 6조에게 부촉하셨느니라. 한편 6조는 당시에 다만 묵묵히 계합하여 여래께서 은밀히 주신 매우 깊은 뜻을 얻으셨으므로 그에게 법을 부촉하셨느니라.
너는 듣지 못했느냐? '법(法)이란 본래 법은 법이랄 것 없나니 법 없는 법을 또한 법이라 하느니라. 이제 법 없음을 부촉할 때에 법이다 법이다 하는 것이 일찍이 무슨 법이었던고?' 라고 하셨다. 이 뜻을 알면 바야흐로 출가자라고 부르게 되느니라.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어찌하여 도명(道明) 상좌(上座)가 대유령 꼭대기까지 달려와서 6조를 찾았겠느냐. 그때 6조스님이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 옷을 구하는가, 아니면 법인가?' 하니, 도명상좌가 '옷이 아니라 오로지 법을 위하여 왔습니다'고 하였다. 6조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잠시 마음을 거두고 선도 악도 전혀 생각하지 말라' 하시자 도명상좌가 말씀을 받드니, 6조께서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할 때 부모가 낳기 이전 명상좌의 본래 면목을 나에게 가져와 보아라' 하셨다.
도명상좌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묵연히 계합하고 문득 절하며 말하기를 '마치 물을 마셔 보고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사옵니다. 제가 5조 문하에서 30년 동안 잘못 공부하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하자, 6조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도다' 고 하셨다.
이제 조사가 서쪽에서 오시어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심이 언설에 있지 않음을 바야흐로 알 것이로다. 어찌 듣지 못했느냐? 아난이 가섭에게 묻기를 '세존께서 금란가사를 전하신 외에 따로 무슨 법을 전하셨습니까?' 하니 가섭이 아난을 불렀다. 아난이 대답하자 가섭이 말하기를 '문 앞의 깃대『刹竿』를 거꾸려뜨려 버려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조사의 표방(標榜)이니라. 몹시 총명한 아난이 30년 동안 시자(侍者)로 있으면서 많이 들어 얻은 지혜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천일 동안 닦은 너의 지혜는 하루 동안 도(道)를 닦느니만 못하다'고 하는 꾸지람을 들었다. 만약 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물 한 방울도 소화시키기 어렵다 하리라."
제2편 완릉록(宛陵錄)
1. 도는 마음 깨치는 데 있다 ▲ 위로
배상공이 황벽스님께 여쭈었다.
"산중(山中)의 사오백명 대중 가운데서 몇 명이나 스님의 법을 얻었습니까?"
대사가 말씀하셨다.
"법을 얻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도는 마음을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어찌 언설에 있겠느냐? 언설이란 다만 어린아이를 교화할 뿐이니라."
2. 자기의 마음을 알자 ▲ 위로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음이 곧 부처요 무심(無心)이 도이니라. 다만 마음을 내어서 생각을 움직인다든지, 혹은 있고[有], 길고 짧음, 너와 나, 나아가 주체니 객체니 하는 마음이 없기만 하면, 마음이 본래로 부처요 부처가 본래 마음이니라. 마음은 허공과 같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처를 따로 구하려 하지 말 것이니, 구함이 있으면 모두가 고통이니라. 설사 오랜 세월 동안 6도[六度] 만행을 실천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완전한 구경(究竟)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연의 조작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연이 다하면 덧없음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보신과 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요 또한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고 하였다. 다만 자기의 마음을 알기만 하면 나[我]라고 할 것도 없고 또한 남[人]도 없어서 본래 그대로 부처이니라."
3. 기틀을 쉬고 견해를 잊음 ▲ 위로
"성인의 무심은 곧 부처의 경지이지만 범부의 무심은 공적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까?"
"법에는 범, 성의 구별이 없으며 또한 공적한 상태에 빠지는 것도 없다. 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없다는 견해도 내지를 말라. 또한 법은 본래 없지 않으나, 있다는 견해도 내지 말라. 법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모두 뜻[情]으로 헤아리는 견해로서, 마치 허깨비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보고 듣는 것은 마치 허깨비같고, 사량하고 느끼는 것이 바로 중생이니라'고 하였다. 조사문중에 있어서는 오로지 마음을 쉬고 알음알이를 잊는 것을 논할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쉬어 버리면 부처님의 도가 융성해지고, 분별하면 마구니의 장난이 치성해지느니라."
4. 마음과 성품이 다르지 않다 ▲ 위로
"마음이 본래로 부처인데 6도만행을 다시 닦아야 합니까?"
"깨달음은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6도만행과는 상관이 없느니라. 6도만행이란 그저 교화의 방편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쪽의 일 일뿐이다. 설사 보리, 진여와 실제의 해탈법신과 나아가 10지 4과 등의 성인의 지위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교화 제도하는 방편의 문일 뿐이어서, 부처님의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느니라. 마음이 곧 그대로 부처이니 교화 제도하는 모든 방편문 가운데서 부처님의 마음이 으뜸이니라. 다만 생사, 번뇌 따위의 마음만 없으면 보리 등의 법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법은 나의 모든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니, 어찌 일체법을 쓰리오'라고 하였다.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른 것은 말하지 않으셨고, 오직 한 마음만을 말했을 뿐이며, 또한 일불승(一佛乘)만을 말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시방을 두루 살펴보아도 다시 다른 승(乘)이 없나니,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대중들은 곁가지와 잎은 없고 오로지 모두 잘 익은 열매들뿐이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뜻은 쉽게 믿기가 어렵다. 달마스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양(梁), 위(魏) 두 나라에 머물렀는데, 오직 혜가(慧可 : 487-593)스님 한 분만이 자기의 마음을 가만히 믿고 말 끝에 문득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았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함께 없음을 이름하여 큰 도라고 하느니라. 큰 도는 본래로 평등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이 하나의 참 성품으로 같다는 것을 깊이 믿어야 한다. 마음과 성품이 본래 다르지 않으므로 성품이 곧 마음이니라. 마음이 성품과 다르지 않은 사람을 일컬어 조사(祖師)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의 성품을 알았을 때 비로소 불가사의하다고 말할 수 있도다'고 하였다."
5. 모양이 있는 것은 허망하다 ▲ 위로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십니까?"
"정말로 여래께서 제도할 중생은 없느니라. 나[我]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나 아님이야 어찌 얻을 수 있겠느냐! 부처와 중생을 모두 다 얻을 수 없느니라."
"현재 부처님의 32상(相)과 중생 제도가 분명히 있는데 스님께서는 어찌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모양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허망하니, 만약 모든 모양을 보되 모양이 아닌 줄을 알면 곧 여래를 보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은 모두 네가 허망하게 지어낸 견해로서, 오로지 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한 탓으로 그같은 잘못된 견해를 내게 된 것이니라. 부처의 견해를 내는 순간 바로 부처에 끄달리고, 중생의 견해를 내는 순간 중생에 끄달린다.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견해를 내고, 더럽느니 깨끗하다느니 하는 견해를 내는 등이 모두 그 장애를 받느니라. 그것들이 너의 마음을 가로 막기 때문에 결국 윤회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원숭이가 무언가를 들었다 놨다 하느라고 쉴 때가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진정한 배움이란 모름지기 배울 것이 없어야 한다. 범부도 성인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으며, 큼도 없고 작음도 없으며 번뇌도 없고 인위적 작위도 없다. 이와 같은 한 마음 가운데서 바야흐로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하는 것이다. 설혹 네가 3승 12분의 가르침과 모든 이론들을 배운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가진 것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오직 침상 하나만을 남겨 두고 병들어 누워 있다'고 한 말은 바로 모든 견해를 일으키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어서 법의 장애를 받지 않고, 삼계의 범, 성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야만 비로소 세간을 벗어난 부처님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허공처럼 의지할 바 없음에 머리숙여, 외도의 굴레를 벗어나는도다'고 하였다.
마음이 이미 다르지 않기 때문에 법 또한 다르지 않으며, 마음이 하염 없으므로 법 또한 하염이 없다.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 말미암아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비었기 때문에 모든 법이 공하며, 천만 가지 중생들도 모두 다 같은 것이다. 온 시방의 허공계가 같은 한마음의 본체이니, 마음이란 본래 서로 다르지 않고 법 또한 다르지 않건만, 다만 너의 견해가 같질 않으므로 차별이 있게 되느니라. 비유하면 모든 하늘사람들이 다 보배 그릇으로 음식을 받아 먹지만 각자의 복덕에 따라 밥의 빛깔이 다른 것과 같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실로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무상정각이라 한다. 오로지 한 마음일 뿐, 실로 다른 모양이 없으며, 또한 광채가 빼어날 것도 없고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다. 나을 것이 없기 때문에 부처라는 모양이 없고,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모양이 없다."
"마음이야 모양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부처님의 32상(相) 80종호(種好)와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32상은 모양에 속한 것이니, '무릇 모양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라고 한 것이요, 80종호는 색깔에 속한 것이니, '만약 겉 모습으로 나를 보려 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6. 한 마음의 법 ▲ 위로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성품 자체는 같고 다름이 없으나 만약 3승의 가르침에 의거해 말한다면 부처의 성품과 중생의 성품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3승의 인과가 있어서 같고 다름이 있느니라. 그러나 만약 불승(佛乘)과 조사가 서로 전한 것에 의거해 보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고 오로지 한마음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마음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이 일승(一乘)의 도뿐이요, 2승도 없고 3승도 없느니라. 그러나 부처님의 방편설만은 제외하노라'고 하셨다
7. 모든 견해를 여읨이 무변신보살 ▲ 위로
"무변신보살(無邊身菩薩)은 왜 여래의 정수리를 보지 못합니까?"
"실로 볼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무변신보살이란 곧 여래이기 때문에 응당 보지 못한다. 다만 너희에게 부처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부처라는 변견(邊見)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중생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중생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있다[有]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있다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없다[無]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없다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범부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범부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나아가 성인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성인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만 모든 견해만 없으면 그대로가 곧 가이 없는 몸[無邊身]이니라. 그러나 무엇인가 보는 곳이 있으면 곧 외도라고 부른다. 외도란 모든 견해를 즐기고 보살은 모든 견해에 있어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여래란 곧 모든 법에 여여(如如)한 뜻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미륵도 또한 그러하고 모든 성현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다. 여여하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다. 여래의 정수리는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뚜렷이 보는 것도 없으므로, 두렷하다는 변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 몸은 하염없으신 것이다. 숫자로써 헤아리는 범주에 속하지도 않지만, 다만 방편으로 허공에 비유할 뿐이니라. '원만하기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며' 한가로이 일삼을 것이 없다. 다른 경계를 억지로 끌어들여 설명하려 하지 말 것이니, 설명하려 들면 벌써 식[識]이 이뤄지고 만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식의 바다에 잠겨서 나부끼는 쑥대처럼 흘러 도네'라고 하였다. 그저 말하기를 '나는 알았으며 배워서 얻었으며, 깨달았으며, 해탈하였으며, 도의 이치를 얻었노라'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강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지만 약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질 않는다면 이런 견해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내 너에게 말하노니, 한가하여 스스로 일 없도록 하여 쓸데없이 마음을 쓰지 말라. '참됨을 구할 필요가 없나니, 오직 모든 견해를 쉴지니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봄[內見]과 밖으로 봄[外見]이 모두 잘못이며 부처의 도와 마구니의 도가 모두 나쁜 것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문수보살이 잠깐 두 견해를 일으켰다가 그만 두 철위산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문수보살은 참된 지혜의 상징이고 보현보살은 방편적인 지혜의 상징이다. 방편과 참됨이 서로서로 작용을 하여 끝내는 방편과 참됨 그것마저도 사라지고 오로지 한 마음뿐인 것이다. 마음은 결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닌데, 부처의 견해를 갖기만 하면 바로 중생의 견해를 내게 되느니라. 있다는 견해[有見], 없다는 견해[無見], 영원불변하다는 견해[常見], 단멸한다는 견해[斷見]가 바로 두 철위산 지옥을 이룬다. 이처럼 견해와 장애를 받기 때문에 역대의 조사들께서 일체 중생의 본래 몸과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바로 가리키신 것이다. 이것은 닦아서 되는것도 아니고 점차적인 단계를 밟아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밝음이나 어두움에 속하지도 않아서, 밝음이 아니기 때문에 밝음도 없으며 어둠이 아니기 때문에 어두움도 없다.
그러므로 밝음 없음[無明]도 없으며 또한 밝음 없음이 다함[無明盡]도 없다. 우리의 선가의 종문에 들어와서는 누구든지 뜻을 간절하게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것을 이름하여 법이라 하고 법을 보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며, 부처와 법이 모두 함께 없는 것을 승(僧)이라 부르며, 하릴없는 중이라 부르며, 또한 한몸의 삼보[一 三 ]라 하느니라. 대저 법을 구하는 이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아서 마땅히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하느니라.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랄 것도 없으며,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법이랄 것도 없으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승(僧)이랄 것도 없느니라."
8. 한 법도 얻을 수 없다 ▲ 위로
"스님께서는 지금 법을 말씀하고 계시거늘 어찌하여 승(僧)이랄 것도 없고 법(法)이랄 것도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네 만약 가히 설명할 만한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음성으로서 부처님을 찾는 것'이 된다. 나[我]란 것이 있다고 견해를 내면 곧 처소(處所)인 것이다. 법 또한 법이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법이란 바로 마음이니라.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이 마음의 법을 부촉할 때에 법이라 하는 법이 일찍이 무슨 법이던가.법도 없고 본래 마음도 없으면 마음, 마음 하는 법을 비로소 알리라.실로 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도량에 앉음이라고 한다. 도량이란 오직 일체의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법이 본래 공(空)한 줄을 깨닫는 것을 공여래장(空如來藏)이라 하는데,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엔들 티끌과 먼지가 있겠느냐. 만약 이 소식을 안다면 유유자적하게 소요함인들 논할 바 있겠느냐.
9. 한 물건도 없다[無一物] ▲ 위로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하신다면 한 물건도 없음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없다고 해도 맞지 않다. 깨달음이란 옳은 곳도 없으며 그렇다고 앎이 없는 것도 없다."
10.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다 ▲ 위로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너의 마음이 부처이니라. 부처는 곧 마음이니, 마음과 부처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을 떠나서는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만약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 한다면,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시어 어떻게 그것을 전수하셨습니까?"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셔서 전한 것은 오직 마음의 부처이니라. 즉 너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바로 가르쳐 주신 것이며,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조사라 부르느니라. 만약 곧바로 이 뜻을 깨닫는다면, 곧 3승의 모든 지위를 단박에 뛰어넘어서 본래의 부처인 것이니, 결코 점차로 닦음에 의지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니라."
"만약 그렇다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무슨 법을 말씀하십니까?"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시사 오로지 한 마음의 법만을 말씀하시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마하대가섭에게 그것을 은밀히 부촉하셨느니라. 이 마음법[心法]의 본체는 허공계를 다하여 온 법계를 두루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이치라고 부른다. 이러한 법을 논하건대 너는 어찌 언어, 문자로써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또한 한 기틀, 한 경계 위에서 결코 심법([心法)을 볼 수 없는 것이니, 오로지 묵묵히 계합할 따름이니라. 이 하나의 문을 얻는 것을 이름하여 하염없는 법의 문[無爲法門]이라 한다. 만약 깨쳐 알고자 한다면 다만 무심을 알아야 한다. 홀연히 깨치면 곧 되는 것이요, 만약 마음을 써서 배워 깨달으려 하면 그럴수록 더욱더 멀어지느니라. 갈라진 마음과 모든 취사(取捨)하는 마음이 없어서, 나무와 돌 같은 마음이 되어야만 비로소 도를 배울 분(分)이 있느니라."
"지금 갖가지 망념이 있는데, 스님께서 어찌하여 없다고 하십니까?"
"망념은 본시 본체가 없는 것인데, 너의 마음이 허망하게 일으킨 것이다. 만약 네가 마음이 부처임을 안다면, 마음은 본래 허망함이 없는 것이어늘, 어찌 마음을 일으켜 다시 망념을 알려 하느냐? 네 만약 마음을 내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자연히 망념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지금 바로 망념이 일어날 때 부처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네 지금 망념이 일어난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 깨달음이 바로 부처님이다. 그런 가운데 망념이 없다면, 부처 또한 없느니라.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네가 마음을 일으켜 부처의 견해를 지어서 문득 이룰만한 부처가 있다고 하며, 중생의 견해를 지어서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하는데,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 모조리 너의 견해가 작용하는 곳이기 때문이니라. 만약 일체의 견해가 없다면 부처는 어느 곳에 있겠느냐? 마치 문수가 부처라는 견해를 일으키자마자 바로 두 철위산 지옥에 떨어진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제 바로 깨달았을 때 부처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물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깨달음은 무엇으로부터 일어났느냐? 일상의 어묵동정간에 모든 소리와 빛깔이 모두 불사(佛事) 아님이 없거늘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겠느냐? 머리 위에 머리를 얹지 말며, 부리 위에 부리를 더하지 말라. 그저 다른 견해만 내지 않으면 산은 산, 물은 물, 승(僧)은 승, 속(俗)은 속일 뿐이니라. 산하대지와 일월성신이 모두 너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며, 삼천대천 세계가 모두 너의 본래 면목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곳에 허다한 일들이 있겠느냐?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눈 가득히 푸른 산이니라. 허공세계가 밝고 깨끗하여 한 터럭만큼도 너에게 견해를 짓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소리와 빛깔들이 그대로 부처님 지혜의 눈이니라. 법은 홀로 일어나지 않고 경계를 의지해야만 비로소 생긴 것이니, 경계 때문에 그 많은 지혜가 있는 것이다. 종일 말하나 일찍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종일 들으나 일찍이 무엇을 들었느냐? 그러므로 석가세존께서 49년 설법하셨어도 일찍이 한 글자도 결코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니라."
11. 보리의 마음 ▲ 위로
"만약 그렇다면 어느 곳이 깨달음입니까?"
"깨달음은 일정한 처소가 없느니라. 부처라 해서 역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며, 중생이라 해서 깨달음을 잃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은 몸으로 얻지 못하며, 마음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니, 일체중생이 그대로 깨달음의 모양이니라."
"그러면 어떻게 보리심을 냅니까?"
"보리는 얻는 것이 아니다. 네 지금 얻음이 없는 마음을 내기만 하면, 결정코 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 그대로가 보리의 마음이니라. 보리는 머물 자리가 없기 때문에 얻을 그 무엇도 없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작은 법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셨느니라'고 하셨다. 일체 중생이 본래 보리이므로, 다시 보리를 얻으려 할 필요가 없음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네 이제 보리심을 낸다는 말을 듣고 한 마음을 가지고 배워서 부처를 얻는다고 말하여, 오로지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네가 3대아승기겁을 닦는다 해도 다만 보신, 화신의 부처만을 얻을 뿐, 너의 근본 연원인 참된 성품의 부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밖으로 구하는 모양있는 부처는 그대와는 닮지 않았도다'고 하였다."
12. 수은의 비유 ▲ 위로
"본래로 이미 부처일진대 어찌하여 4생과 6도가 있어 갖가지로 형상과 모양이 같지 않습니까?"
"모든 부처님께서는 본체가 두렷하여 거기에 더 불어나고 줄어들 것이 없다. 또한 6도에 흘러들어도 곳곳마다 모두 원만하고, 여러 만물이 모두 낱낱이 부처이니라. 이것은 마치 한 덩어리의 수은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흩어졌어도 방울방울이 모두 둥근 것과 같다. 나뉘지 않았을 때에도 한 덩이였을 뿐이니, 이는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라. 온갖 형상과 모습은 마치 집과 같다. 나귀의 집을 버리고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사람의 몸을 버리고 하늘의 몸이 되기도 하며,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집은 모두 네 자신이 취하고 버리는 곳이니라. 그래서 모든 구별이 있는 것이지만, 본래 근원의 성품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느냐?"
13. 무연자비 ▲ 위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십니까?"
"부처님의 자비란 인연이 없기 때문에 큰 자비라고 한다. 사랑함[慈]이란 이룰 만한 부처가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고, 슬퍼함[悲]이란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다. 설하시는 법은 설함도 없고 보임도 없으며, 그 법을 듣는 자는 들음도 얻음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술사가 마술로 만들어 놓은 인간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법을 어떻게 '내가 선지식으로부터 말끝에서 알아차리고 이해하여 깨달았다'고 말하겠으며, 이러한 자비를 어떻게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가지고 배워서 얻겠느냐? 스스로 본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면 마침내 아무런 이익도 없느니라."
14. 정진이란? ▲ 위로
"어떤 것이 정진(精進)입니까?"
"몸과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가장 굳건한 정진이니라. 마음을 일으켜서 밖으로 구하기만 하면 '가리왕이 사냥놀이를 좋아함'이라고 부른다. 마음이 밖으로 나다니지 않는 것이 곧 인욕선인이며, 몸과 마음이 함께 없음이 곧 부처님의 도이니라."
15. 무심한 행 ▲ 위로
"만약 마음이 없으면 이 도를 행하여 얻을 수 있습니까?"
"마음없음[無心]이 바로 도를 행함이거늘 거기에 다시 더 얻고 말고 할 것이 있겠느냐? 만약 잠깐이라도 한 생각 일으키면 곧 경계이고, 한 생각 없다 하여도 경계이니라. 망령된 마음이 스스로 없어지면 더 이상 쫓아가 찾을 것이 없느니라."
16. 삼계(三界)를 벗어남 ▲ 위로
"어떤 것이 3계를 벗어나는 것입니까?"
"선과 악을 전혀 생각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곧 3계를 벗어나느니라.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신 것은 3계를 부수기 위해서이다. 만약 모든 마음이 없다면 3계 또한 없느니라. 가령 작은 티끌 하나를 100등분 부수어 그 중 99등분을 없애고 한 등분만 남았더라도, 대승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것이 못된다. 100등분이 모두 다 없어야만 대승에 있어서 비로소 잘 벗어났다고 하느니라."
17. 마음이 부처 ▲ 위로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꿈틀거리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다 불성이 있어서, 동일한 마음의 본체를 지녔느니라. 그러므로 달마스님이 인도로부터 오셔서 오직 한마음의 법만을 전하셨으니,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곧 바르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깨달음이란 수행을 빌려서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자기 마음을 알아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요, 결코 달리 구하지 말라.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 것인가?
지금 말하는 것이 바로 너의 마음이니라. 만약 말하지 않고 작용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또한 방위와 처소도 없다. 그렇다고 그저 한결같이 없는 것만도 아니다. 있으면서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조사스님께서는 '참된 성품의 마음자리[眞性心地藏]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지라. 인연에 호응하여 중생을 교화하나니, 방편으로 그것을 지혜라 부른다'고 하셨다. 만약 인연에 호응하지 않을 때라도 있고 없음을 말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바로 호응할 때라도 또한 종적이 없느니라. 이미 이런 줄 알았을진댄 '없음' 가운데 쉬어 깃든다면 곧 모든 부처님의 길을 가는 것이니라.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머문 바가 없이 그 마음이 난다'고 하셨으니, 모든 중생이 생사에 윤회하는 것은 뜻으로 반연하고 분주시 조작하는 마음이 6도에서 멈추지 못하여, 마침내 갖가지 고통을 받게 되느니라. 유마거사가 이르기를, '교화하기 힘든 사람은 원숭이처럼 의심이 많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법으로 제어한 다음에 비로소 조복시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지느니라. 그러므로 일체 법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며, 인간, 천상, 지옥, 6도, 아수라가 모두 마음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심하기만 하면 모든 반연은 단박에 쉬게 되며 망상 분별을 내지 않으면 남도 없고 나도 없으며, 욕심과 성냄도 없고, 밉고 고움도 없으며, 이김도 짐도 없느니라.
허다한 여러 가지 망상을 없애 버리기만 하면 자성(自性)은 본래부터 청정한 것이니, 곧 깨달음의 법을 수행하여 부처님과 나란히 되는 것이니라.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설사 널리 배우고 부지런히 수행하며, 나무먹이를 먹고 풀옷을 입는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자기의 마음은 알지 못한 것이니라. 그것을 모두 삿된 수행이라고 하며 모두 다 천마(天魔), 외도, 물과 뭍의 여러 귀신 노름을 하는 것이니, 이같이 수행한들 무슨 이로움이 있느냐? 지공이 말하기를 '본래 몸은 자기의 마음이 짓는 것이어늘, 어찌 문자 속에서 구하리오?' 하였다. 지금 자기 마음을 알아서 사량분별하는 망상을 쉬기만 하면 6진의 번뇌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유마경>에 이르기를 '오직 침상 하나만 두고 병들어 누워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니라. 지금 앓아 누워서 반연을 모두 쉬어 망상이 그쳐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보리이니라.
지금 만약 마음 속이 분분히 시끄러워 안정되지 않았다면, 너의 배움이 비록 3승, 4과, 10지의 모든 지위에 이르렀다 해도 아직 범, 성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함이 옳다. 모든 행위는 끝내 덧없음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은 힘이 다할 때가 있기 마련이니, 마치 화살을 공중에 쏘면 얼마 안 가 힘이 다해 땅에 도로 떨어지는 것처럼, 생사의 윤회에 다시 돌아가고 만다. 이와 같은 수행은 부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요, 헛되이 쓰라린 고초를 받을 뿐이니, 어찌 크게 잘못됨이 아니겠느냐, 지공이 말하기를 '세간에 뛰어난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대승의 법약을 잘못 먹은 것이다'고 하였다. 단지 다니고 머물고 앉아 눕는 모든 시간 가운데서 오로지 무심함을 배우기만 하면, 분별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으며, 또한 머물러 집착할 바도 없다. 종일토록 둥둥 떠오르는 가운데로 내맡겨 둔 것이, 마치 바보와도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를 모른다 하여도, 일부러 알리거나 모르게 할 필요가 없다. 마음이 마치 큰 바위덩이와 같아서 도무지 갈라진 틈이 없고, 일체 법이 너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여 홀연히 어디에도 잡착함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아야만 비로소 조금은 상응할 분(分)이 있다 하리라.
3계의 경계를 툭 뚫고 지나기만 하면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는 것이며, 번뇌 없는 마음의 모습을 바로 샘이 없는 지혜[無漏智]라고 부른다. 인간과 천상업을 짓지 않으며, 그렇다고 지옥업을 짓지도 않으며, 나아가 일체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모든 반연이 전혀 생기지 않으면 곧 이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결같이 나지 않음[不生]만은 아니어서, 뜻 따라 날[生] 따름이니라. 경에 이르시기를 '보살은 자기 뜻대로 나는 몸을 가졌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만약 마음이 없음을 모르고 모양에 집착하여 갖가지 견해를 짓는 것은 모두 마구니의 업에 속하는 것이다. 나아가 정토의 수행[淨土佛事]을 한다 하더라도 모두 업을 짓는 것으로써, 이것을 부처의 장애[佛障]라고 하느니라. 그것이 그대의 마음을 가로막기 때문에 인과에 얽매여, 가고 머무름에 조금도 자유로움이 없다. 왜냐하면 보리 등의 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사람을 교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마치 누런 잎사귀를 돈이라하여 우는 어린아이의 울음을 억지로 그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실로 법이 있지 않음을 무상정각이라 하나니, 지금 이미 이 뜻을 알았다면 어찌 구구한 설명이 더 필요하겠느냐? 다만 인연따라 묵은 업을 녹일 뿐이요, 다시 새로운 재앙을 짓지 말라. 마음 속은 밝고 또 밝기 때문에 옛 시절의 견해를 모두 버려야 한다. 그래서 <유마경>에 이르기를 '가진 것을 없애 버린다'고 하였으며, <법화경>에서는 '20년 동안 항상 똥을 치게 하셨다'고 하였느니라. 이것은 오로지 마음 속에 지은 바 견해를 없애게 하는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희론(戱論)의 똥을 쳐서 없앤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래장은 본래 스스로 공적(空寂)하여 결코 한 법에라도 멈춰 머무르지 않으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나라도 또한 다 비었다'고 하셨느니라.
만약 부처님의 도를 닦아 배워서 얻는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견해는 전혀 맞지가 않는 것이다. 혹은 한 기연이나 한 경계를 보이기도 하며, 눈썹을 치켜뜨기도 하고 눈을 부라리기도 하여 어쩌다 서로 통하기라도 하면 곧 말하기를, '계합하여 알았다'고 하며 혹은 '선의 이치를 깨쳐서 증득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도무지 아는 게 없다가 그 사람을 대하여 무슨 도리라도 얻게 되면 마음 속이 문득 환희하여 기뻐한다. 그러나 만약 상대에게 절복당하여 상대보다 못하게 되면 속으로 섭한 생각을 품게 된다. 이처럼 마음과 뜻으로 배운 선(禪)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비록 그대가 자그마한 도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한낱 마음으로 헤아리는 법일 뿐이요, 우리 종문의 선도(禪道)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달마스님께서 면벽하신 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견처(見處)가 없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마음의 작용을 잊는 것은 부처님의 도이나, 분별망상은 마구니의 경계이다'고 하였다. 이 성품은 네가 미혹했을 때라도 결코 잃지 않으며, 그렇다고 깨쳤을 때에도 역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니라. 천진스런 자성은 본래 미혹할 것도 깨칠 것도 없으며, 온 시방의 허공계가 바로 나의 한마음의 본체이니라. 그러니 네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어찌 허공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
허공이란 본래부터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번뇌라 할 것도 인위적인 작위도 없으며, 미혹할 것도 깨칠 것도 없다. 그래서 '요연히 사무쳐 보아 한 물건도 없나니,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고 하였으며, 털끝만큼이라도 사량분별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니, 의지하여 기댈 만한 것도 없으며, 달라붙을 것도 없다. 한 줄기 맑은 흐름이 자성의 남이 없는 진리[無生法忍]이니, 어찌 머뭇거려 헤아리고 따질 수 있겠느냐! 참 부처는 입이 없기 때문에 설법할 줄 모르고, 진정으로 들음은 귀가 없으니, 뉘라서 들을 수 있겠느냐! 수고하였다. 편히들 하여라."
18. 유행(遊行) 및 기연(機緣) ▲ 위로
대사는 본시 민현( 縣) 땅의 어른이시다. 어려서 본주(本州) 땅 황벽산으로 출가하셨다. 스님의 이마 사이에 솟아 오른 점은 구슬과도 같았고, 음성과 말씨는 낭랑하고 부드러웠으며, 뜻을 깊고도 담박하셨다. 뒷날 천태산(天台山)에 노니시다가 한 스님을 만났는데, 처음인데도 오래 사귄 사람 같았다. 이윽고 함께 길을 가다가 개울물이 갑자기 불어난 곳에 이르렀다. 그때 대사께서는 석장을 짚고 멈추시니, 그 스님이 대사를 모시고 건너려고 하자,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형씨가 먼저 건너시오."
그러자 그 스님은 곧 삿갓을 물 위에 띄우고 곧장 건너가 버렸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 어쩌다 저 나한 좀놈하고 짝을 했을까? 한 몽둥이로 때려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어떤 스님이 귀종(歸宗)을 하직하는데 귀종이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가?"
"제방에 다섯 맛의 선[五味禪]을 배우러 갑니다."
"제방은 다섯 맛의 선이지만 나의 이곳은 오직 한 맛의 선이라네."
"어떤 것이 한 맛의 선입니까?"
그러자 귀종이 문득 후려쳤다. 그 스님이 소리쳤다.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귀종이 다그쳤다.
"말해 봐라, 말해봐라."
그 스님이 입을 열려고 하자 귀종은 또 몽둥이를 내리쳤다.
그 스님이 뒤에 대사의 회하에 이르자 대사께서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는가?"
"귀종에서 옵니다."
"귀종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 스님이 앞날의 이야기를 그대로 말씀드리니, 대사께서는 곧 바로 법좌에 올라가 그 인연을 들어서 말씀하셨다.
"마조스님께서 84명의 선지식을 배출하긴 했으나, 질문을 당하면 모두가 똥이나 뻘뻘 싸는 형편들인데, 그래도 귀종이 조금 나은 편이다."
대사께서 염관(鹽官 ?-842)의 회하에 있을 때에 대중(大中) 황제는 사미승으로 있었다. 대사께서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는데 그 사미승이 말하였다.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으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는 것이어늘, 장로께서는 예배하시어 무엇을 구하십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면서, 늘 이같이 예배하느니라."
"예배는 해서 무얼 하시렵니까?"
그러자 대사께서 갑자기 사미승의 뺨을 올려치니 그 사미승은
"몹시 거친 사람이군"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 무슨 도리가 있길래 네가 감히 거칠다느니 섬세하다느니 뇌까리느냐!"하고 뒤따라 또 뺨을 붙이니, 사미는 도망가 버렸다.
대사께서 제방을 행각하실 적에 남전(南泉 734-843)에 이르렀다.
하루는 점심 공양을 할 때 발우를 들고 남전의 자리에 가서 앉으셨다. 남전이 내려와 보고는 대사께 물었다.
"장로께서는 어느 시절에 도를 행하였오?"
"위음왕 부처님 이전부터입니다."
"그렇다면 내 손자뻘이 되는구먼."
그러자 대사는 곧바로 내려와 버렸다.
또 어느 날 대사께서 외출하려고 할 때에 남전이 말하였다.
"이만큼 커다란 몸집에 조금 큰 삿갓을 쓰셨군!"
"삼천대천 세계가 모두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남전의 대답이로다."
그러자 대사는 삿갓을 쓰고 곧 가버렸다.
또 하루는 대사가 차당(茶堂)에 앉아 있는데 남전이 내려와 물었다.
"정과 혜를 함께 배워서 부처님의 성품을 밝게 본다 하는데, 이 뜻이 무엇이오?"
"하루 종일 한 물건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레 바로 장로 견해인가요?"
"부끄럽습니다."
"장물[奬水] 값은 그만두어도 짚신 값은 어디서 받으란 말이오?"
그러자 대사는 문득 쉬어 버렸다.
뒷날 위산(瀉山 771-853)이 이 대화를 가지고 앙산(仰山 803-887)에게 물었다.
"황벽이 남전을 당해내지 못한 게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황벽에게는 범을 사로잡는 기틀이 있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대의 보는 바가 그만큼 장하구나!"
하루는 대중이 운력을 하는데 남전이 대사께 물었다.
"어디로 가는가?"
"채소 다듬으러 갑니다."
"무엇으로 다듬는가?"
대사가 칼을 일으켜 세우자 남전이 말하였다.
"그저 손님 노릇만 할 줄 알지 주인 노릇은 할 줄 모르는군."
그러자 대사는 세 번을 내리 두드렸다.
하루는 새로 온 스님 다섯 명이 동시에 서로 보게 되었다. 그 중에서 한 스님만은 예배를 올리지 않고 그저 손으로 원상(圓相)을 그리면서 서 있었다. 이것을 본 대사가 그에게 말씀하셨다.
"한 마리의 훌륭한 사냥개라고 말하는 줄 아느냐?"
"영양(羚羊)의 기운을 찾아왔습니다."
"영양이란 기운이 없거늘 너는 어디서 찾겠느냐?"
"영양의 발자욱을 찾아 왔습니다."
"영양은 발자욱이 없거늘 너는 어디서 찾겠느냐?"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영양입니다."
이 말을 듣자 대사는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튿날 법좌에 올라 설법을 끝내고 물러나면서 물었다.
"어제 영양을 찾던 스님은 앞으로 나오너라."
그 스님이 바로 나오자 대사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어제 너와 대화를 하다가 끝에 가서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 어떤가?"
그 스님이 말이 없자 대사께서 말을 이었다.
"본분 납승(本分衲僧)인가 했더니, 그저 뜻이나 따지는 사문이로구나."
대사께서는 일찍이 대중을 흩으시고, 홍주(洪州) 당의 개원사(開元寺)에 머물고 계셨다. 이 때에 상공 배휴거사가 어느 날 절로 들어오다가 벽화를 보고 그 절 주지스님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슨 그림입니까?"
"고승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고승들의 겉모습은 여기에 있지만, 고승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절 주지스님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배휴가 "이 곳에 선승은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한 분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상공은 마침내 대사를 청하여 뵙고, 전에 주지스님에게 물었던 일을 스님께 여쭈었다. 그러자 대사가 불렀다.
"배휴!"
"예!"
"어디에 있는고?"
상공은 이 말 끝에 깨치고 대사를 다시 청하여 개당설법을 하시게 하였다.
19. 술찌꺼기 먹는 놈 ▲ 위로
대사는 이에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모조리 술찌꺼기나 먹는 놈들이다. 이처럼 행각을 한답시고 남들의 비웃음이나 사면서 모두 이렇게 안이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구나! 세월이 한 번 가면 언제 오늘이 또 오겠느냐? 이 큰 당나라 땅 안에 선사(禪師)가 없음을 너희는 아느냐?"
이 때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제방에서 지금 선사들이 세상에 나와 여러 대중들을 바로 이끌어 지도하시거늘, 어찌하여 스님께서는 선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내 말은 선(禪)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선사(禪師)가 없다는 말이니라."
뒷날 위산이 이 인연에 대해 앙산에게 물었다.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거위왕이 젖을 고르는 솜씨는 본디 집오리 무리와는 다릅니다."
그러자 위산이 말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가려내기 어렵느니라"고 했다.
20. 배휴의 헌시 ▲ 위로
어느 날 배상공이 불상 한 구를 대사 앞에 내밀면서 호궤(胡 )합장하며 말씀드렸다.
"청하옵건대 스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배휴!"
"예!"
"내 너에게 이름을 다 지어 주었노라."
그러자 배상공은 곧 바로 절을 올렸다.
하루는 상공이 시(詩) 한 수를 대사께 지어올리자 대사께서 받으시더니 그대로 깔고 앉아 버리면서 물었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몰라야만 조금은 낫다 하겠지만, 만약 종이와 먹으로써 형용하려 한다면 우리 선문(禪門)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상공의 시가 이러하였다.
대사께서 심인을 전하신 이후로 이마에는 둥근 구슬 몸은 칠척 장신이로다.
석장을 걸어 두신 지 십년 촉나라 물가에서 쉬시고부배(浮杯)에서 오늘날 장( )의 물가를 건너왔네.일천 무리의 용상대덕들은 높은 걸음걸이 뒤따르고만리에 뻗친 향그런 꽃은 수승한 인연을 맺었도다. 스승으로 섬겨 제자 되고저 하오니 장차 법을 누구에게 부촉하시렵니까?
대사께서 대답하여 읊으셨다.
마음은 큰 바다와 같아 가이 없고 입으론 붉은 연꽃을 토하여 병든 몸 기르네. 비록 한 쌍의 일 없는 손이 있으나 한가한 사람에게 일찍이 공경히 읍(揖)한 적이 없었노라.
21. 여래의 청정선 ▲ 위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잡된 학문과 모든 반연을 물리쳐야 한다. 그리하여 결정코 구하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않아서, 아주 깊고 깊은 법을 듣더라도 맑은 바람이 귓가에 잠깐 스쳐지나간 듯이 여기어, 그것을 쫓아가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여래선(如來禪)에 매우 깊숙히 들어가 참선을 한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 것이다. 위로부터 역대의 조사들께서 오로지 한마음[一心]만을 전하셨다. 결코 두 법이 있을 수 없으니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바르게 가르치신 것이다.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지위와 차례를 단박에 뛰어 넘어서 절대로 또 다른 생각으로 흘러들어가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우리 선종의 가문에 비슷하게나마 들어오는 것이다. 너희 경망한[取次] 사람들이야 이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으로 헤아릴 때에는 그 헤아리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여 버리고, 한편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을 때에는 또 헤아리지 않는 마음의 마구니에 묶인다. 그렇다고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는 것도 아닐 때에는 또 역시 헤아리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의 마구니에 묶인다. 그러므로 마구니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마음에서 저절로 나온다'고 한 것이니라. 이것은 오직 신통없는 보살은 그 발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니라.
만약 언제든지 마음에 항상하다는 견해[常見]가 있으면 그것이 바로 상견외도(常見外道)이며, 만약 일체의 법은 공(空)하다고 관(觀)하고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견해에 빠지면 그것이 바로 단견외도(斷見外道)이다. 그러므로 '3계는 오직 마음이고 만법은 오직 식(識)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고 하는 것은 외도와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만약 최고의 법신자리에서 본다면 그것은 3현(三賢), 10성(十聖)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말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의 어리석음을 끊으셨는데, 하나는 미세하게 아는 어리석음이며 또 하나는 극히 미세하게 아는 어리석음이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이미 이와 같으셨거늘, 다시 무슨 등각이니 묘각이니 하는 차례를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저 밝음만을 추종하고 어둠을 싫어하며, 그저 깨우침만을 얻으려 하고 번뇌와 무명은 받으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고 중생들은 망념이 남아 있는 존재이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생각하면 백천 겁이 지나도록 다만 6도에 계속 윤회하여 쉴 날이 없으리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본래 근원의 자성을 비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너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부처 또한 밝음도 아니요 중생 또한 어둠도 아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밝음도 어둠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라고 해서 또한 강하지도 않고 중생이라고 해서 약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법에는 강함도 약함도 없기 때문이다. 또 부처라고 해서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중생이라 해서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지혜로움도 어리석음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나타나서는 모두들 선을 안다고 말들 하지만 입을 벌리기만하면 그대로 병통이 생기고 만다. 그리하여 근본은 말하지 않고 지말만을 말하며, 미혹함은 말하지 않고 그저 깨달음만 말하며, 본체는 말하지 않고 작용만을 말하는데 제대로 말한 것이라고는 도무지 없다.
저 일체 법은 본래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금 또한 없는 것도 아니어서 반연이 생겼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며 반연이 사라졌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다. 근본이라 할 만한 것이 있지 않으니, 근본은 근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마음 또한 마음이 아니니, 마음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모양 또한 모양이 아니니, 모양은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법도 없고 본래 마음도 없어야만 비로소 마음이라 하는 마음법을 알게 된다'고 했다. 법은 곧 법이 아니요 법 아님이 곧 법이며, 법도 없고 법 아님도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마음이라 하는 마음법이니라.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허깨비인 줄 분명히 알면 곧 과거의 부처님에게로 흘러들어 간다. 과거의 부처님은 또한 있지도 않고 미래의 부처님 또한 없지도 않다. 그렇다고 또한 미래의 부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한다. 반면에 현재의 생각 생각이 일정하게 머물지 않으니 현재의 부처님이라고도 부르지 못한다. 부처님이라는 생각이 만약 일어날 때에, 그것을 두고 깨달은 것이라거나 혹은 미혹한 것이라든가, 또 이것은 좋은 것이거나 혹은 나쁜 것이라고 사량분별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문득 그것에 집착하여 끊어 버리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한 생각 갑자기 일어나면 수천 겹으로 자물쇠를 채우더라도 가둘 수가 없고, 수만발의 오랏줄로도 그것을 묶어 두지 못한다. 이미 이와 같은데 어찌 그것을 없애려고 하고 그치게 하겠는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의 이 아지랑이같은 의식이 어떻게 저 생각을 끊어 버려서, 아지랑이 같은 데다 비유하겠느냐. 너희가 가깝다고 말하면 시방세계를 두루 찾아도 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멀다고 말하면, 볼 때에 단지 눈 앞에 있어서 쫓아가면 더더욱 멀리 가 버리며, 피하려 하면 또 쫓아와서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알라. 모든 법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여 그것을 근심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앞 생각이 범부이여, 뒷 생각이 성인이라는 말처럼 손을 뒤집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3승교(三乘敎)의 종극(終極)이다. 그러나 우리 선종의 가르침에 의거하면 앞 생각 또한 범부가 아니고 뒷 생각 또한 성인이 아니며, 앞 생각이 부처가 아니고 뒷 생각이 중생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모든 빛깔이 부처님의 빛깔이며 모든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소리이다. 한 이치[理]를 들면 모든 이치가 다 그러하므로, 한 현상[事]을 보아 모든 현상을 보며, 한 마음을 보아 모든 마음을 보며, 한 도를 보아 모든 도를 보아서 모든 것이 도 아님이 없다. 또 한 티끌을 보아 시방세계의 산하대지를 보며, 한 방울의 물을 보아 시방세계에 있는 모든 성품의 물을 보며, 또한 일체의 법을 보아 일체의 마음을 본다. 모든 법이 본래 공(空)해서 마음은 없지도 않다. 없지 않음이 바로 묘하게 있는 것[妙有]이고, 있음[有] 또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있지 않음이 바로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참으로 공하면서 오묘하게 있음[眞空妙有]이니라.그렇다면 시방세계가 나의 '한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며, 티끌처럼 많은 모든 국토들이 나의 '한생각'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안과 밖을 구별하여 말하겠는가? 마치 벌꿀의 성질이 달콤해서 모든 꿀은 다 그러하므로, 이 꿀은 달고 저 꿀은 쓰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런 일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허공이 안팎이 없으니 법의 성품도 또한 그러하며, 허공이 중간이 없으니 법의 성품도 그와 같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그대로 중생이니라. 중생과 부처가 원래로 한 본체이며, 생사열반과 유위(有爲), 무위(無爲)가 원래 동일한 본체이며, 세간, 출세간과 나아가 6도, 4생과 산하대지와 유정, 무정이 또한 같은 한 본체이다. 이렇게 같다고 말하는 것은 이름과 모양이 역시 공(空)하여 있음도 공하고 없음도 공하여, 간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온 세계가 원래 똑같이 공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중생을 제도할 부처가 어디 있으며, 부처의 제도를 받을 중생이 어디에 있겠느냐? 무엇 때문에 이러한가? 만법의 자성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저절로 그렇다는 견해를 내면 곧 자연외도(自然外道)에 떨어지고, 만약 나도 없고 나의 것[我所)도 없다는 견해를 내면 3현, 10성의 지위에 떨어진다. 너희들이 지금 어찌 한 자, 한 치를 가지고 끝없는 허공을 재려 하겠는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하기를 '법과 법이 서로 다닫지 못하나니, 법은 스스로 공적함으로써 그 자리에 본래부터 머물러 있으며, 그 자리에서 스스로 참되다'고 하였느니라.
몸이 공하므로 법이 공하다고 하며, 마음이 공하므로 성품이 공하다고 하며, 몸과 마음이 모두 공하므로 법의 성품이 공하다고 하며, 나아가 천 갈래로 다른 갖가지의 말들이 모두 다 너희의 본래 마음을 여의지 않은 것이다. 지금 보리와 열반, 진여와 불성, 이승과 보살 등을 말하는 것은 모두 누런 나뭇잎을 가리켜 돈이라 하는 주먹과 손바닥의 비유에 불과하다. 주먹을 펴면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의 모든 대중들이 모두 그 속에 아무 것도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본래 한 물건도 없어서 3세(三世) 역시 있는 바 없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단도직입으로 이러한 뜻을 알아야만 된다. 그러므로 달마스님께서 인도로부터 이 땅에 오시어 여러 나라를 거치셨지만, 오직 찾아 얻으신 것은 혜가스님 한 분뿐이었다. 혜가스님에게 마음의 도장[心印]을 은밀히 전하였으니, 이는 너희의 본래 마음에 새기신 것이다. 마음으로써 법에 새기며 법으로써 마음에 새겨서, 마음이 이미 이 같으며 법 또한 이 같아서 진제(眞際)와 같고 법의 성품과 평등하다. 법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 누가 수기(授記)하는 사람이며, 누가 부처가 되는 사람이여, 누가 법을 얻는 사람이겠는가?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보리란 몸으로 얻을 수 없으니, 몸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는데, 마음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품으로도 얻을 수 없으니, 성품은 곧 바로 근본원류의 자성이 청정한 부처[本源自性淸淨佛]이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부처로써 다시 부처를 얻을 수 없으며, 모양이 없는 것으로 다시 모양이 없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또한 공함으로써 공함을 얻을 수 없고, 도로써 도를 얻을 수 없다. 본래 얻은 것이 없어서 얻은 것이 없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얻을 만한 한 법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는 다만 너희로 하여금 본 마음을 분명히 찾게 하고자 한 것이다.
당장 요달했을 때라도 요달한 모양을 얻을 수 없어서, 요달함이 없는 모양도, 요달하지 않음이 없는 모양도 또한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법을 얻은 사람은 곧 얻으나, 얻은 사람이라도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얻지 못한 사람이라도 또한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법을 예로부터 몇 사람이나 알 수 있었겠느냐? 그러므로 말하기를 '천하에 자기를 잊은 사람이 몇이더냐?'고 하였다. 지금 한 기틀, 한 경계, 한 경전, 한 가르침, 한 세대, 한 시기, 한 이름, 한 글자를 6근의 문 앞에서 알 수 있다면, 꼭두각시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한 이름, 한 모양 위에서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다면 온 시방세계를 다 찾는다 해도 이런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노라. 그와 버금갈 만한 사람이 둘도 없으므로 조사의 자리를 이으며, 또한 부처님의 종자라고 일컫나니, 순수하여 전혀 잡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왕이 부처를 이룰 때에 왕자도 역시 따라서 출가한다'고 했는데, 이 뜻을 알기가 매우 어렵느니라. 다만 너희에게 아무 것도 찾지 말도록 할 뿐이니, 찾으면 곧 잃어버린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산 위에서 한 번 소리를 질러 메아리가 울리면 곧장 산 아래로 달려 가지만 끝내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거기서 또 한 번 소리를 지르자 산 위에서 메아리가 울리며, 그는 다시 산 위로 달려 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천생만겁을 소리를 찾고 메아리를 좇는 사람일 뿐이어서 허망하게 생사에 유랑하는 자이니라. 만약 소리가 없으면 메아리도 생기지 않는다. 열반이란 들음도 앎도 없고 소리도 없어서 자취도 발자욱도 모두 끊긴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겨우 조사의 방 근처에 인접한 것이라 하겠다."
22. 양의 뿔 ▲ 위로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임금님의 창고 안에 이런 칼이 전혀 없다'고 하셨는데, 바라옵건대 그 뜻을 가르쳐 주십시오."
"임금님의 창고란 바로 허공의 성품[虛空性]이니라. 그것은 시방의 허공세계를 받아들여 모두가 다 너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 다른 말로는 임금님의 창고를 허공장보살이라고도 일컫는다. 네 만약 그것에 대해 있고 없음과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을 말한다면, 모두가 양의 뿔이 되느니라. 양의 뿔이란 바로 네가 구하여 찾는 것이니라."
배상공이 물었다.
"임금님의 창고 속에는 진짜 칼이 있습니까?"
"그것도 역시 양의 뿔이니라."
"임금님의 창고 속에 애초부터 진짜 칼이 없다면, 왕자가 그 창고에서 진짜 칼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나간 것이어늘, 어찌하여 스님께서는 그저 없다고만 말씀하십니까?"
"칼을 가지고 나갔다는 것은 여래의 심부름꾼에 비유한 것이다. 네 만약 임금님의 창고 속에서 왕자가 진짜 칼을 가지고 나갔다고 말한다면, 창고 안에 있는 허공도 함께 따라 갔을 것이니라. 그러나 본원의 허공성(虛空性)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말이겠느냐? 설령 네가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양의 뿔이니라."
23. 여래의 심부름꾼 ▲ 위로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가섭존자는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받았으니,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다."
"만약 말 전한 사람이라면 양의 뿔을 여의지 못한 사람이겠군요."
"가섭존자는 스스로 본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양의 뿔이 아니니라. 만약 여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곧 여래의 뜻을 알게 되며, 여래의 겉모습을 보는 사람은 곧 여래의 심부름꾼에 속하는 자로서 말 전하는 사람이 되느니라. 아난존자가 20여년 동안 부처님의 시자로 있었으면서도 다만 여래의 겉모양만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세간을 구제하는 것을 보는 자는 양의 뿔을 벗어나지 못하니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24. 무분별지는 얻을 수 없다 ▲ 위로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문수보살이 부처님 앞에서 칼을 든 것은 어찌 된 까닭입니까?"
"500명의 보살들이 전생을 아는 지혜를 얻어서 지난 과거 생의 업장을 볼 수 있었다. 500이란 너의 오음으로 된 몸이니라. 이 숙명을 보는 장애 때문에 부처가 되기를 구하고 보살, 열반을 구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문수보살이 지혜로써 헤아리는 칼을 가지고 부처를 봄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베어 버렸다. 그래서 '아주 잘 베어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칼입니까?"
"헤아리는 마음이 칼이다."
"헤아리는 마음이 이미 칼이라고 한다면 부처를 봄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베어 버린 것인데, 그렇다면 능히 베는 그 마음은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너의 분별이 없는 지혜로써 보는 것이 있다고 분별하는 마음을 베느니라."
"부처를 봄이 있다느니 혹은 부처를 구함이 있다느니 하는 마음을 내는 경우에는 분별이 없는 지혜의 칼로써 베는 것이지만, 그 지혜의 칼이 있는 것은 어찌 해야 합니까?"
"분별 없는 지혜로써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見]를 베어 버리면, 분별 없는 지혜도 또한 얻을 수 없느니라."
"지혜로써 지혜를 자르지 말며, 칼로써 칼을 자르지 마소서."
"칼이 스스로 칼을 베어서 칼과 칼이 서로 베어지면, 칼 또한 얻을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혜가 스스로 지혜를 베어서, 지혜와 지혜가 서로 베어지면 지혜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어미와 자식이 함께 죽는 것도 역시 이와 같느니라."
25. 견성이란? ▲ 위로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자성을 보는 것[見性]이란 무엇입니까?"
"성품이 곧 보는 것이요, 보는 것이 곧 성품이니, 성품으로써 다시 성품을 보지 말라. 또 들음이 그대로 성품이니 성품으로서 다시 성품을 들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성품이라는 견해를 내며, 능히 성품을 듣고 능히 성품을 보아서 문득 같다거나 다르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저 경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볼 수 있는 바는 다시 보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너는 어찌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얹겠느냐? 경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마치 소반 위에 구슬을 흩어 놓는 것과 같아서, 큰 구슬은 크게 둥글며, 작은 구슬은 작게 둥글어서 각각의 구슬끼리 알지 못하며, 각각 서로를 방해 하지 않아서, 일어날 때에 <내가 일어난다> 말하지 않으며, 없어질 때에 <내가 없어진다>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4생과 6도가 이렇지 않은 경우가 없느니라.
또 중생이 부처를 보지 못하고 부처가 중생을 보지 못하며, 4과(四果)가 4향(四向)을 보지 못하고 4향이 4과를 보지 못하며, 3현(三賢), 10성(十聖)이 등각과 묘각을 보지 못하고 등각과 묘각이 3현, 10성을 보지 못하며, 나아가 물이 불을 보지 못하고 불이 물을 보지 못하며, 땅이 바람을 보지 못하고 바람이 땅을 보지 못하며, 중생이 법계에 들지 못하고 부처가 법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법의 성품은 가고 옴이 없으며 능히 보는 것도 보여지는 대상도 없다. 능히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본다느니 혹은 나는 듣는다느니 말하겠느냐?
무엇보다도 선지식의 회하에서 깨닫도록 하여라. 선지식이 나에게 법을 설하시며,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셔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해 주신다. 그러나 가전연은 다만 생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실상(實相)의 법을 전하였기 때문에 유마거사에게 꾸중을 들었느니라. 분명히 말하건대, 어떤 법이라도 본래로 속박하지 않는데 어찌 풀어제칠 필요가 있겠으며, 또 본래 물들지도 않는데 굳이 맑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말하기를, '모든 법의 참다운 모양이 이와 같거늘 어찌 말로써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네가 지금 다만 시비하는 마음, 염정(染淨)을 따지는 마음을 내고 하나하나마다 알음알이를 배워 얻어서, 온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결정코 취하려고 하는 것을 곧 보게 되는데, 도대체 누가 마음의 눈을 갖추었으며,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말해 보아라. 만약 이렇게 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현격하게 다른 것이니, 다시 무슨 견성(見性)을 논하겠느냐?"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이미 성품이 그대로 보는 것이며 보는 것이 그대로 성품이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성품이 본래 장애가 없어야 하며 제한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물건이 가로막히면 곧 보지 못하고, 또 허공이 가운데서 가까우면 보고 멀어지면 보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네가 망령되게 다르다는 견해를 낸 것이니라. 만약 물건이 앞에 가로막히면 보지 못하고 그것이 없어지면 본다고 생각하여, 성품을 가로막는 장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니라. 성품이란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아니며, 법 또한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만약 견성한 사람이라면 어느 곳인들 나의 본래 성품이 아님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6도, 4생과 산하 대지가 모두 내 성품의 맑고 본체 그대로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물질[色]을 보는 것이 곧 마음[心]을 보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물질과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서 눈 앞의 물건을 없애고 나서야 비로소 보려고 하는 자들은 2승(二乘)의 무리 가운데 떨어진, 의지하여 통하려는 견해이니라. 허공 가운데서 가까우면 보고 멀면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외도에 떨어지고 만다. 분명히 말하노니,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것이니, 가까우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중생들의 성품이니라. 가까이 있어도 오히려 그렇거늘, 멀어서 볼 수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겠느냐?"
26. 한 생각 일지 않으면 곧 보리 ▲ 위로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소생(小生)이 알지 못하겠사오니, 큰스님께서는 가르쳐주십시오."
"내게는 한 물건도 없어서, 이제까지 남들에게 한 물건도 전혀 가르켜 준 바가 없다. 너는 한량없는 세월 전부터 그저 남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이해하려고만 하니, 이야말로 스승과 제자가 함께 왕의 난[王難]에 빠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너는 다만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 생각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받음이 없는 몸이며, 한 생각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생각 없는 몸이니라. 절대로 인위적인 조작에 휩쓸리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행함이 없는 몸이며, 요리조리 따지고 분별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식(識)이 없는 몸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달리 한 생각 일으키기만 하면 그대로 12인연에 빠져들어서, 무명이 행을 연하여 서로 인(因)이 되기도 하고 또 과(果)가 되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늙음과 죽음이 서로서로 인이 되기도 하고 과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선재동자가 110곳에서 선지식을 구했지만, 다만 12인연 속에서만 구하다가 최후에 미륵보살을 만났었다. 그러자 미륵보살이 문수보살을 찾아뵈라고 다시 가르켜 주었다. 문수보살이란 다름 아닌 바로 너의 근본 무명이니라.
만약 마음과 마음이 각기 달라서 그저 밖으로만 선지식을 구하는 자는, 한 생각이 갓 일어났다가는 꺼지고 꺼졌다가는 또 생긴다. 그러므로 너희 비구들도 생, 노, 병, 사 하기도 하여 인과의 값을 치뤄 오면서 마침내는 다섯 갈래[五聚)의 생멸을 당한다. 다섯 갈래란 5음(五陰)이니 한 생각 일어나지 않으면 곧 18계(界)가 공하여 이 몸 그대로가 보리의 꽃 열매이며, 또한 이 마음이 그대로 신령스런 지혜이며 신령스런 보리좌이니라. 그러나 만약 집착하는 바가 있으면 이 몸은 곧 송장이 되고, 마음은 송장 지키는 귀신이 되고 만다."
27.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 ▲ 위로
"유마거사가 잠자코 있으니 문수보살이 찬탄하기를 '이것이야말로 둘 아닌 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이로다'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둘 아닌 법문이란 바로 너의 본 마음이니라. 그러니 법을 설했느니 혹은 설하지 않았느니 하는 것은 기멸(起滅)이 있는 것이다. 말 없을 때에는 나타내 보인 것이 없으므로 문수보살이 찬탄한 것이니라."
"유마거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소리가 단멸된 것이 아닙니까?"
"말이 곧 침묵이고 침묵이 그대로 말이다. 말과 침묵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소리의 실제 성품도 역시 단멸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라. 문수보살이 본래 들음[本聞]도 역시 단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일찌기 말하지 않은 때가 없다'고 하신 것은 여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법이 곧 말씀이니, 법과 말씀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나아가 보신, 화신, 보살, 성문과 산하대지와 물, 새, 수풀이 일시에 법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도 설법이고 침묵도 설법이어서, 종일 설법하나 일찍이 설한 바가 없다. 이미 이와 같다면 말없음으로써 근본을 삼느니라."
28. 한 마음의 법 가운데서 방편으로 장엄하다 ▲ 위로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성문이 3계에서는 모습을 감추지만, 보리에 있어 감추지 못하는 까닭은 어찌된 것입니까?"
"여기서 말한 모습이란 바탕이니라. 성문들이 다만 3계의 견도혹(見道惑)과 수도혹(修道惑)을 끊을 수 있어 이미 번뇌를 여의긴 하였으나, 보리에 있어서는 모습을 감추지 못한 까닭이니라. 그래서 보리 가운데서 마왕에게 붙들리어 숲 속에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보리를 미세하게 본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니라. 그런데 보살들은 3계와 보리에 있어서 결정코 버리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느니라. 취하지 않으므로 7대(七大)가운데서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하고, 버리지않으므로 외도, 마구니가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다. 네 다만 한 법에라도 집착하려 하면 흔적[印子]이 벌써 생기게 된다. 있음[有]에다 도장을 찍으면 곧 6도, 4생의 무늬가 나오고, 공(空)에다 도장을 찍으면 곧 모양 없는 무늬가 나타나느니라. 만약 모든 사물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이 도장은 허공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어서, 공(空)이 본래 공이 아니고 도장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닌 줄을 다만 알지니라. 시방 허공 세계의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심은 번갯불을 보는 것과 같으며, 꿈틀거리는 모든 벌레를 보는 것은 메아리와 마찬가지이며, 시방의 셀 수 없는 많은 국토를 보는 것은 흡사 바다 가운데 한 방울 물과 같은 것이다. 매우 기폭 깊은 법문을 듣더라도 허깨비와 같아서,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으며, 법과 법이 서로 다르지 않고, 나아가 천만 가지의 경론(經論)이 오로지 너의 한 마음 때문이니라. 모든 모양을 결코 취하지 않으므로, 말하기를 '이와 같은 한 마음 속에서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한다'고 하였느니라."
29. 인욕선인 ▲ 위로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뚱이가 토막토막 잘리었다'는 경우는 어떤 것입니까?"
"선인(仙人)이란 곧 너의 마음이며, 가리왕이란 구하기를 좋아하는 마음이니라. 그리고 왕위를 지키지 않는다고 함은 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이니라. 그런데 요사이 공부하는 이들이 덕과 공을 쌓지는 않고, 보는 것마다 배워서 알려고 하니 가리왕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물질을 볼 때는 선인의 눈을 멀게 하고, 소리를 들을 때는 선인의 귀를 먹게 한다. 나아가 무엇을 느껴 알 때에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마디마디 갈기갈기 찢겨진다고 한 것이니라."
"선인이 참을 때는 마디마디 갈기갈기 찢김이 없어서, 한 마음으로 참았느니 혹은 참지 않았느니 하는 말은 가당치 않겠습니다."
"네가 남이 없는 견해[無生見]을 내어서, 인욕을 닦는 견해거나 구할 것이 없다는 견해를 내는 것은 모두 손상을 주는 것이니라."
"선인도 몸을 잘리울 때 아픔을 느낍니까? 만약 이런 가운데 고통을 받는 사람이 없다면 누가 고ㅌ을 받습니까?"
"네가 이미 고통받을 것이 없다면 나타나서 도대체 무엇을 찾는 것이냐?"
30. 한 법도 얻을 수 없음이 곧 수기 ▲ 위로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연등부처님이 수기하신 때는 오백세(五百歲) 이내입니까, 오백세 밖입니까?"
"오백세 이내에 수기를 받을 수 없느니라. 이른바 수기라 하는 것은 너의 근본을 결정코 잊어 버리지 않아서, 하염있는 법도 잃지 않고 보리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세간과 세간 아님을 모두 요달했기 때문에 오백세 밖을 벗어나서 따로 수기를 얻을 수 없고, 또한 오백세 이내에도 수기를 얻지 못한다."
"세간 3제(三際)의 모양을 요달할 수 없습니까?"
"한 법도 얻을 수 없느니라."
"그런데 무엇 때문에 경(經)에서 오백세(五百歲)를 지난다고 자주 말씀하시어, 앞뒤로 시간을 길게 말씀하셨습니까?"
"오백세(五百歲)가 길로 멀어서 오히려 아직은 선인(仙人)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연등부처님께서 수기하실 때는 실로 얻었다할 작은 법도 없느니라."
31. 법신은 얻을 수 없다 ▲ 위로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교(敎)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억겁 동안 전도된 생각을 녹이어서, 3대 아승기 겁을 거치지 않고 법신을 얻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약 3대 아승기의 헤아릴 수 없는 겁을 통하여 수행을 함으로서 증득한 바가 있는 자는, 간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이 지난다 하더라도 깨닫지 못한다. 만약 한 찰나 사이에 법신을 획득하여 곧바로 분명하게 깨달아 성품을 보는 것은 오히려 3승교(三乘敎)의 극치를 이룬 말씀이다. 왜냐하면 가히 얻을 수 있는 법신을 보기 때문에 모두가 불요의교(不了義敎)에 속하는 것이니라."
32. 물을 마셔보아야 물맛을 안다 ▲ 위로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법을 보고 단박에 깨달은 사람은 조사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조사의 뜻은 허공 밖을 벗어났느니라."
"그러면 한계가 있습니까?"
"한계가 없느니라. 이는 모두 일정한 숫자로 헤아리는 대대(對待)하는 법이니라.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한량이 있지도 않고 한량이 없음도 아니며 한량이 있고 없음이 아님도 아니어서, 대대가 끊어졌기 때문이다'하였다. 너희 요즘 배우는 사람들이 3승교 밖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는데, 어찌 선사라 부를 수 있겠느냐?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겠다. 으뜸으로 선을 수행하는 사람일진댄, 함부로 망령되이 다른 견해를 내지 말라. 마치 어떤 사람이 물을 마셔보면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움직이거나 머물러 있거나 한 찰나 사이에 생각생각이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하다면 윤회를 면치 못하느니라."
33. 참된 사리(舍利)는 볼 수 없다 ▲ 위로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부처님의 몸은 하염이 없기 때문에 모든 숫자적인 개념으로 한정할 수가 없거늘, 어찌하여 부처님 몸의 사리가 여덟섬 너말이 됩니까?"
"네가 이런 견해를 낸다면, 그저 껍데기 사리만 볼 뿐 참된 사리는 보질 못하느니라."
"사리가 본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노력하여 얻은 결과입니까?"
"본래 있는 것도 아니며 노력하여 수행의 결과로 얻으신 것도 아니니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부처님 사리는 그토록 잘 다듬어졌고 그토록 정교로와서, 금빛 사리가 항상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사께서 꾸짖어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견해를 가지고서 어찌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허공에 사리가 있는 것을 일찍이 보았느냐? 모든 부처님의 마음은 큰 허공과 같은데 무슨 사리를 찾는 것이냐?"
"지금에도 분명히 눈으로 사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슨 법입니까?"
"그것은 너의 망상심이 일어나서 사리라고 보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화상께서는 사리가 있습니까? 청컨대 내보여 주십시오."
"참 사리는 보기 어렵느니라. 네가 다만 열 손가락으로 수미산의 높은 봉우리를 한꺼번에 움켜쥐어 그것을 부수어 가루로 만든다면 비로소 참 사리를 보게 되리라."
34. 일체처에 마음이 나지 않음 ▲ 위로
"대저 참선해서 도를 닦는 이는 모름지기 어디에서나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다만 '마음의 작용을 잊으면 곧 부처님의 도가 융성하고, 사량분별하면 곧 마구니의 도가 치성해진다'하는 것만은 논할 뿐이니, 끝내는 털끝만큼한 작은 법도 얻지 못하니라."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조사께서 어떤 사람에게 법을 전하여 부촉하셨습니까?"
"사람에게 줄 법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어찌하여 2조(二祖) 혜가스님이 달마스님께 마음을 편안하게 해달라고 청했습니까?"
"네가 만약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2조께서는 분명히 마음을 찾아서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찾으려 해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달마스님께서, '너의 마음을 이미 편하게 해주었노라'고 하신 것이니라. 만일 얻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생멸법으로 돌아가고 만다."
35. 조계문하생(曹溪門下生) ▲ 위로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구경에 무명을 얻으십니까?"
"무명이란 바로 모든 부처님들께서 도를 얻으신 자리이니라. 그러므로 연기법이 바로 도량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한 티끌 한 빛깔이 그대로가 가이 없는 진리의 성품이니라. 발을 들었다 놓는 것이 모두 도량을 여의지 않나니, 도량이란 얻은 바가 없는 것이니라. 내 너에게 말하노니, 다만 이 얻은 바 없는 자리를 도량에 앉아 있음이라고 하느니라."
"무명이란 밝음입니까, 어두움입니까?"
"밝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두움도 아니다. 밝음과 어두움이란 서로 바뀌어서 갈아드는 법이니라. 그렇다고 무명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것이다. 밝지 않음이 곧 본래의 밝음이어서,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느니라. 이 한마디 말이 온천하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비록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사리불과 같아서, 모두 함께 헤아려 사량할지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측량할 수 없도다'라고 했다. 부처님의 걸림 없는 지혜를 허공을 벗어나 너희들이 언어 문자로는 따져볼 수가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한량과 같은 삼천대천 세계에 갑자기 어떤 보살이 출현하여, 한 번 걸터앉으매 모든 삼천대천 세계를 걸터앉아버린다 해도, 보현보살의 한 털구멍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네가 지금 무슨 본래의 이치를 가지고서 그것을 배우려고 하겠느냐?"
"말씀대로 배워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둘이 없는 본원의 성품으로 돌아가지만, 방편에는 여러 문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둘이 없는 본원의 성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무명의 참 성품이니, 이것은 바로 모든 부처님의 성품이니라. 또 방편에 여러 문이 있다는 뜻은, 성문들은 무명이 생겼다 없어진다고 보며, 연각들은 다만 무명이 없어지는 것만을 보고 무명이 생기는 것은 보지 못하여 생각마다 적멸을 증득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이 종일 생겨나나 그 남이 없음을 보시고, 또 그것이 종일 없어지지만 그 없어짐이 없는 것임을 보아서,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음이 곧 대승의 최고 과(果)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과(果)가 가득 차면 깨달음이 원만하고, 꽃이 피면 세계가 일어나서, 한발짝 드니 그대로가 부처요, 한발짝 내리니 그대로가 중생이도다'고 하는 것이니라.모든 부처님을 양족존(兩足尊)이라 부르는 것은 이(理)의 측면에도 구족하시고, 사(事)의 측면에도 구족하시며, 나아가 중생에도 구족하시고 나고 죽음에도 구족하시며, 모든 것에 다 구족하시니 구족하시므로 구할 것이 없느니라. 그대들이 지금 생각생각에 부처는 배우려 하면서 중생을 싫어하니, 만약 중생을 싫어하면 이것이야말로 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어, 똥치는 그릇을 들고 희론의 똥을 제거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다만 너희들에게 옛부터 알음알이로 배워서 알려는 마음과 도를 보려는 마음을 없애려고 그러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마음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나면 희론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며, 또한 똥을 내다버린다고 하느니라. 이는 다만 너희로 하여금 마음을 내지않게 하시는 것이다. 또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저절로 큰 지혜가 완성된다는 것은,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분별을 결코 내지 않아서 일체를 모두 분별치 않아야만 비로소 우리 조계의 문하에 들어오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옛부터 성인들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법을 조금은 행하였다'고 하신 것이다. 때문에 행함 없음[無行]이 나의 법문(法門)이니라. 오로지 한 마음의 문일 따름이니, 모든 사람이 이 문에 이르러서는, 모두 감히 들어오지는 못하나 전혀 없었다고 말하지는 말라. 다만 얻은 사람이 적을 뿐이니, 얻은 자는 곧 부처이니라. 편히 하여라."
36. 계급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 위로
"어떻게 해야 수행의 등급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종일토록 밥을 먹되 일찍이 한 톨의 쌀알도 씹은 바가 없으며, 종일토록 걸어다니지만 일찍이 한 조각의 땅도 밟은 바가 없다. 이러할 때에 나와 남 등의 구별이 사라져, 종일토록 갖가지 일을 하면서도 그 경계에 현혹되지 않아야만 비로소 자유자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생각생각 모든 모양을 보지 않아서 앞뒤의 3제(三際)를 헤아리지 말라. 과거는 감이 없으며 현재는 머무름이 없고 미래는 옴이 없으니, 편안하고 단엄하게 앉아 움직이는 대로 내맡겨 얽매이지 않아야만 비로소 해탈했다고 할 수 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이 문중의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서도 오로지 서너명만이 얻었을 뿐이니라. 만약 도 닦기를 일삼지 않는다면 재앙을 받을 날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힘을 다하여 모름지기 금생에 도업을 마칠 것이요, 뉘라서 누겁토록 나머지 재앙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느니라."스님께서는 당(唐) 대중(大中 ; 847-859)년간에 본주(本州) 황벽산에서 세연을 마치셨다. 선종(宣宗) 황제가 단제선사(斷際禪師)라고 시호를 내리고 탑호는 광업(廣業)이라 하였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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