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법요

[스크랩] 전심법요(傳心法要)

수선님 2018. 8. 19. 11:54

전심법요(傳心法要)는
황벽(黃檗)선사께서  용흥사(龍興寺)에서 법을 펴시고 있을 때인
회창(會昌) 2년(842)에
강서(江西)의 종릉(鍾陵)에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던
속가제자인 배휴(裴休 797-870)가  대사께 법을 묻고
대사께서 답을 하신 것을 받아 적어 두었다가,
대사께서 입적하고 난 다음,
당시에 대사의 법을 같이 들었던  장노(長老)들과 대중의 고증을 얻어서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었던 것입니다.
배휴가 서문을 쓴 해가 대중(大中) 11년(857)이므로,
대사께서 입적한 지 2-3년 뒤로 추정됩니다.

전심법요에 나오는 언어들이
선문답처럼 아리송한 말이나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말들을 사용치 않으면서도
마음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따로 해설을 붙일 필요도 없을 만큼
마음을 이해하는데 가장 뛰어난 어록으로 평가받고 있어서
선(禪)을 하는 자들에겐 반드시 읽어야 할 지침서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무릇 도를 배운 다는 것은 곧 우리의 본 모습을 알고자 함이요.
그 본 모습이라는 것은 곧 마음을 일컬으니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자에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어록입니다.

스님께서는 당(唐) 대중(大中 ; 847-859)년간에 본주(本州) 황벽산에서 입적하셨습니다.
선종(宣宗) 황제가 단제선사(斷際禪師)라고 시호를 내리고 탑호는 광업(廣業)이라 하였습니다.


 

한 마음 깨치면 곧 부처



師謂休曰

諸佛與一切衆生 唯是一心 更無別法 此心無始已來 不曾生 不曾滅 不靑不黃 無形無相 不屬有無 不計新舊 非長非短 非大非小 超過一切限量名言 縱跡對待 當體便是 動念卽乖 猶如虛空無有邊際 不可測度 唯此一心卽是佛 佛與衆生 更無別異 但是衆生著相外求 求之轉失


황벽(黃檗: ?-850) 대사께서 배휴(裵休:797-870)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와 일체 중생들이 오직 한마음이니 다시 별다른 법이 없다.

이 마음은 비롯함이 없는 때부터 생기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하며,

푸르지도 누르지도 않고,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는다.

옛것이니 새것이니 헤아릴 수도 없고,

길다고 할 수도 없고 짧다고 할 수도 없으며,

크다거나 작다거나 할 수도 없다.

일체의 한계와 분량과 이름이나 언어나 자취, 상대를 넘어 있어

그 몸 그대로 일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이면 바로 어긋나 버린다.


마치 허공과 같아 끝이 없어서 측량할 수가 없다

오직 이 일심이 바로 부처이며 부처와 중생이 서로 다름이 없다.


중생은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바깥에서 구하니 구하려 한 즉, 도리어 잃어버린다.


使佛覓佛 將心捉心 窮劫盡形 終不能得 不知息念忘慮 佛自現前 此心卽是佛 佛卽是衆生 爲衆生時 此心不減 爲諸佛時 此心不添 乃至六度萬行 河沙功德 本自具足 不假修添


부처로서 부처를 찾으려 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겁이 다하도록 끝내 얻지 못할 것이다.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버리면 부처가 자연히 앞에 나타나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바로 중생이다.

중생일 때에도 이 마음은 멸하지 않고 부처일 때에도 역시 이 마음이 더하지 않는다.

그리고 육도만행과 강가의 모래와 같은 공덕을 이 마음은 스스로 갖추고 있으니

닦아서 보탤 것도 없다.


遇緣卽施 緣息卽寂 若不決定信此是佛 而欲著相修行 以求功用 皆是妄想 與道相乖 此心卽是佛 更無別佛 亦無別心


인연을 만나면 곧 베풀고(작용하고) 인연이 쉬면 곧 고요해지나니

만약 이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믿지 못하고

모양(부처의 상이 따로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수행으로서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다 망상이어서 도와 더불어 서로 어긋나 버린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따로 부처가 없으며 또 다른 마음도 없다.


此心明淨 猶如虛空 無一點相貌 擧心動念 卽乖法體 卽爲著相 無始已來 無著相佛 修六度萬行 欲求成佛 卽是次第 無始已來 無次第佛 但悟一心 更無少法可得 此卽眞佛


이 마음은 밝고 맑아서 마치 허공과 같아서 한 티끌의 모양도 없다.

마음을 들어 생각을 움직이면 곧 법체와 어긋나고 바로 모양에 집착해 버리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부처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 : 다른 방법)를 두는 것이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부처에는 차제가 없으며

오직 일심을 깨달으면 다시는 더 작은 법도 얻을 수가 없으니 이 마음이 참 부처이다.


佛與衆生 一心無異 猶如虛空無雜無壞 如大日輪照四天下 日升之時 明遍天下 虛空不曾明 日沒之時 暗遍天下 虛空不曾暗 明暗之境 自相陵奪 虛空之性 廓然不變 佛及衆生 心亦如此


부처와 중생의 한마음이 다르지 않아서

마치 허공이 섞이지도 무너지지도 않는 것과 같아

큰 해가 사방 천하를 비춤에 해가 뜨는 때에는 천하가 다 밝아지나

허공은 더 밝아지지도 않고

해가 지는 때에 천하가 모두 어두워져도

허공에는 더 어두워지지 않는 것과 같다.

밝음과 어둠의 경계는 서로 짓밟거나 빼앗으나

허공의 성품은 크고 변하지 않으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 또한 이와 같다.



若觀佛作淸淨光明解脫之相 觀衆生作垢濁暗昧生死之相 作此解者 歷河沙劫 終不得菩提 爲著相故 唯此一心 更無微塵許法可得 卽心是佛 如今學道人不悟此心體 便於心上生心 向外求佛 著相修行 皆是惡法 非菩提道


만약 부처를 볼 때에 청정하고 빛나고 밝은 해탈의 모양으로 보고

중생을 볼 때에 때 묻고 어둡고 어리석은 생사의 모양으로 본다면

이런 생각을 짓는 자는 강가의 모래만큼의 겁의 세월을 보내더라도

끝내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니, 이는 모양에 집착한 까닭이다.

오직 한 마음뿐이며 다시 티끌만큼이라도 다른 법을 얻을 수 없으니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

지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이 마음의 체를 깨닫지 못하고

다시 마음위에 마음을 내어서 바깥을 향해 부처를 구하며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하니

모두 악법이요 깨달음의 길이 아니다.

 

 

근원이 청정한 마음



本佛上實無一物 虛通寂靜 明妙安樂而已 深自悟入 直下便是 圓滿具足 更無所欠

縱使三秖精進修行 歷諸地位 及一念證時 秖證元來自佛 向上更不添得一物 卻觀歷劫功用 總是夢中妄爲 故如來云 我於阿耨菩提 實無所得 若有所得 然燈佛則不與我授記 又云 是法平等 無有高下 是名菩提卽此本源淸淨心 與衆生諸佛 世界山河 有相無相 遍十方界 一切平等 無彼我相


본래 부처의 자리에는 실로 한 물건도 없다. 허령하여 통하며 고요하고 고요하여서 밝고 세밀하며 편안할 뿐이다.

스스로 깊이 들어가 깨달으면 바로 이것밖에 없어서 원만 구족하여 다시 모자람이 없다.

비록 삼 아승지의 수행정진을 하고 모든 지위를 지난다 하더라도 한 마음 깨달을 때에는 결국 원래부터 있는 스스로의 부처(마음)를 증득할 뿐이다. 그 위에 덧붙여 한 물건도 얻을 수 없으며 도리어 수많은 세월의 노력을 본다면(깨닫기 위한 모든 노력과 세월) 모든 것이 꿈속의 망령된 일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에서 실로 얻은 바가 없느니라.

만약 얻은 바가 있었다면 연등불이 내게 수기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또 말씀하시되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어서 그 이름을 깨달음이라 한다.


고 하셨으니, 즉, 이것은 본원 청정심이니 중생과 모든 부처와 더불어, 산하대지와, 모양이 있고 모양이 없는 것들이 시방 세계에 두루 일체가 평등하여 너와 나의 상이 없느니라.


此本源淸淨心 常自圓明遍照 世人不悟 秖認見聞覺知爲心 爲見聞覺知所覆 所以不見精明本體 但直下無心 本體自現 如大日輪昇於虛空 遍照十方 更無障礙 故學道人唯認見聞覺知 施爲動作 空卻見聞覺知 卽心路絶 無入處 但於見聞覺知處認本心 然本心不屬見聞覺知 亦不離見聞覺知 但莫於見聞覺者上起見解 亦莫於見聞覺知上動念 亦莫離見聞覺知覓心 亦莫捨見聞覺知取法 不卽不離 不住不著 縱橫自在 無非道場


이 본원청정심은 항상 스스로 원만하고 밝아서 두루 비추고 있으나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여 다만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견문각지 :見聞覺知)으로 마음을 삼으니 견문각지에 덮이어서 밝고 밝은 본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단박에 무심하면 본체가 스스로 드러나니, 마치 큰 해가 허공에 떠올라 시방 세계를 두루 비춤에 장애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오직 견문각지를 알아 그것으로 행위를 하나, 도리어 견문각지를 허공에 던져 버리면(알음알이를 없애 버리면, 비워 버리면) 곧 마음의 길이 끊어져 따로 (마음을)찾아 들어갈 곳이 없느니라.(여기가 바로 그곳이다.)

물론,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으로 본래 마음을 인식하지만,

본래 마음은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에 속하지 않으며

또한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을 떠나지도 않는다.


다만,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에서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않으며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에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며,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을 떠나 따로 마음을 찾지 않으며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을 버리고 법을 취하지도 않으니,

부즉불이라.(不卽不離 : 즉하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음)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종횡으로 자재하니

도량(道場)이 아님이 없다.



世人楣 諸佛皆傳心法 將謂心上別有一法可證可取 遂將心覓法 不知心卽是法 法卽是心 不可將心更求於心 歷千萬劫 終無得日 不如當下無心 便是本法 如力士迷額內珠 向外求覓 周行十方 終不能得 智者指之 當時自見本珠如故


세상 사람들이 법을 배움에

모든 부처님들이 마음의 법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 바깥에 따로 증득하고 취할 한 법이 있다고 말하니

마침내 마음으로서 법을 찾으면서도

마음이 곧 법이요, 법이 곧 마음임을 알지 못한다.

마음으로서 다시 마음을 찾지 말라.

수천 만겁의 세월이 흘러도 끝내는 얻는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장에 무심함보다 못한 것이니 그 자리가 바로 본래 법(마음)이다.

(무심한 자리가 아니라 지금 이 마음이 그 자리임, 그것을 알면 바로 무심할 수 있음)


마치 힘센 사람이 이마에 구슬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바깥으로 구슬을 찾아서 시방으로 찾아 헤매지만 결국 얻지 못하다가

지혜로운 사람이 그것을 가르쳐 주면

그 자리에서 스스로 본래 가지고 있는 구슬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


故學道人迷自本心 不認爲佛 遂向外求覓 起功用行 依次第證 歷劫勤求 永不成道 不如當下無心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스스로의 본래 마음을 미혹하여

그것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여

바깥으로 향하여 나가 구하고 찾으니

공력을 일으키고 수행을 하여

차제의 방법에 의지하여 수많은 세월을 구하고 다니나

영원히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는 당장에 무심함과 같지 못하다.


決定知一切法本無所有 亦無所得 無依無住 無能無所


결정코 알아야 한다.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있는 바가 없고

얻을 바가 없고

의지할 바가 없고

머무는 바가 없고

주관이 없고

또한 객관이 없음을....


(본래 마음은 본래부터

있으려고 하지도 않고

얻으려고도 하지 않고

의지하려고 하지 않고

머물지도 않고

너도 없고 나도 없다.)


(왜 일체의 법이라고 하면서도 마음을 이야기할 때에는 일체의 마음이라 하지 않고 본래 마음이라 하는가?

이는 모든 법이 다 한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법이 비록 한 마음에서 나왔으나 법이 한 마음을 여읜 적이 없고

한 마음 또한 모든 법을 여읜 적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법이요 법이 마음이다.)


不動妄念 便證菩提 及證道時 秖證本心佛 歷劫功用 並是虛修 如力士得珠時 秖得本額珠 不關向外求覓之力


망념을 일으키지 않으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것이요

깨달음을 얻은 그 자리가 바로 본래 마음이 부처임을 깨닫는 곳이니,

수많은 세월의 공력과 노력들이 모두 헛된 수행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힘센 사람이 구슬을 얻을 때에

다만 본래부터 이마에 있는 구슬을 얻을 뿐이니

따로 바깥으로 구하여 찾는 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본래 부터 있던 것을 얻었을 뿐이지 수행의 시간과 노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수행하는 사람들 중에 구슬도 얻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수행한 노력과 세월을 마치 훈장처럼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곱씹어보고 돌이켜 봐야할 대목이다.


원각경 3편에 부처님께서


"선남자여, 깨달음이 성취된 까닭에 마땅히 알라,

보살은

법의 속박을 싫어하지 않으며,

법의 해탈을 구하지 않으며,

생사를 싫어하지 않으며,

열반을 좋아하지 않으며,

지계(持戒 : 계율을 지킴)하는 이를 공경하지 않으며

금계(禁戒 : 계율로 금한 것)를 범한 이를 미워하지 않으며,

오래 수행한 자를 귀히 여기지 않으며,

처음 배우는 자를 가벼이 여기지도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일체가 깨달음이기 때문이니라."


하시는 말과 통한다.)


故佛言 我於阿耨菩提 實無所得 恐人不信故 引五眼所見 五語所言 眞實不虛 是第一義諦 學道人莫疑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실로 얻은 것이 없는데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저어한 고로

다섯 가지 눈으로 본 것과 다섯 가지 말로 한 말을 끌어다 쓴 것뿐이니(계율과 수행의 방편을 씀)

이는(마음이 부처. 늘 쓰는 마음, 본래 마음,) 진실로 허망하지 않아 제일 으뜸되는 이치니라.”


하셨으니

배우는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

 

 

출처 http://beinnow.com/

 

출처 : 나 홀로 길을 걷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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