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 혈맥론血脈論 2
2. "부처는 자기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 마음을 떠나 어떻게 부처를 찾겠는가? 앞 부처나 뒷 부처는 단지 그 마음 하나만을 말씀하였으니,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요, 부처가 곧 마음佛卽是心이며, 마음 밖에 부처 없고, 부처 밖에 마음 없다.
만약 마음을 떠나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그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외에 부처가 없다면 어찌 부처라는 소견을 낼 수 있겠는가? 이는 서로를 속여서 본래 마음本心을 알지 못하고 무정물無情物 따위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만약 믿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니 아무 이익이 없다.
부처는 허물이 없으나 중생이 뒤바뀌어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다. 만약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을 안다면 마음 밖에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다. 부처가 부처를 제도하지 못하니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알지 못한다. 다만 바깥의 부처를 찾는 것은 모두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을 몰라서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지니고 부처에게 절하지 말며, 마음을 가지고 염불하지도 말라.
부처는 경을 읽지 않으며, 부처는 계를 지니지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지니는 것도, 범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선악을 짓지도 않는다. 만일 부처를 찾으려면 모름지기 성품을 보아야見性 곧 부처가 된다.
만약 견성하지 못하고 염불하거나, 경을 읽거나, 재계齋戒를 지키거나 계를 지키는 것은 아무 이익이 없다. 염불은 왕생하는 인과를 얻고, 경을 읽으면 총명해지며,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나고, 보시하면 복의 과보를 받지만 부처는 끝내 찾을 수 없다. 만약 스스로 밝게 깨닫지 못했으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가 생사의 근본을 깨쳐야 한다. 만약 견성하지 못했다면 선지식이라 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12부 경을 다 외운다 해도 생사를 벗어날 수 없고, 삼계를 윤회하며 고통을 받으며 그것을 벗어날 기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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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마음이 바로 본래 부처이다. 마음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자기 마음만 알면 모두 부처이다. 그런데 마음은 본래 아무 모습도, 소리도, 냄새도, 맛도, 감각도, 뜻도 없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데 이것을 어떻게 찾는다는 것인가?
달마는 '마음을 떠나서 어떻게 부처를 찾을까?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요, 부처가 곧 마음佛卽是心이며, 마음 밖에 부처 없고, 부처 밖에 마음 없다'고 하여 마음=부처라는 등식을 세웠는데, 이것을 찾는 방법만 안다면 부처되기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그러면 마음, 자기 부처를 찾는 방법을 한번 진지하게 함께 모색해보자.
일단 자기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음 또는 정신, 성품이라고 불러도 마찬가지인데, 깨달은 부처가 말하는 마음이나 아직 깨달음이 무엇인지 실감 나지 않는 범부의 마음이나 다 똑같아서 다른 점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내 마음 다르고, 네 마음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마음 씀씀이는 서로 다를지언정 그 본 바탕은 모두 평등하고, 동일하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래서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것이지, 부처 마음, 일반 사람 마음 따로따로 라면 불조佛祖들이 마음=부처라고 말할 리가 없다.
우리의 마음 씀씀이는 사람에 따라 차별되어 좋은 것을 보고 기뻐 날뛰는 이가 있는 반면 똑같은 일에 시큰둥하거나 냉소를 띄는 등 그 쓰는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이같이 생각이나 감정을 표출하는 등 겉으로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을 마음작용이라고 부른다. 사물을 보거나 소리를 듣고 인지하고, 식별하고, 생각하고, 반응을 나타내고, 행동으로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스스로 느껴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찾고자 하는 마음=부처는 이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본체 또는 바탕이라 하는데, 그 모습이나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과 같아서 만져볼 수도, 느껴볼 수도 없기 때문에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이때문에 마음을 찾거나 알기는 아주 어렵다고 여기는데, 마음을 찾지 말고 그 작용에서 이것을 보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간편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이 없으면 마음작용이란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작용을 보면 이것을 일으키는 본래 바탕을 유추하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마음작용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우선 마음은 진실로 허공과 같아서 그 모습도, 감각도, 맛도 없고, 아무 빛깔이나 소리, 냄새도 없는 것임을 가슴속에 깊이 뿌리박아야 한다. 그 다음 마음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찾을 수도 없지만 이것의 작용으로 인해 우리가 일상생활을 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을 또한 각인시켜야 한다. 세계사 가운데 우수한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들이 많이 점철했지만 그 누구도 이 마음을 사실대로 규명한 이들은 없었고, 오직 깨달은 이들만이 그 진실을 파헤쳤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글을 읽는 이들도 다만 이 진리만을 알려고 해야 한다.
마음작용은 드러나지 않는 곳이 없지만, 대표적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잡고, 발로 걷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눈, 귀, 코, 손, 발 등은 각각 하나의 도구로서, 눈은 빛을 통과시키고,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통과시키고, 손과 발은 연장으로 사용하여 무엇을 잡고 쥐며 휘두르거나 밭을 일구거나 뛰고 걷고 한다. 실지로 보고 듣고 잡고 걷는 일을 관장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역할인 것이다. 비유로서 몸은 하나의 기계이고, 그 기계를 조작하는 것은 마음이란 엔지니어이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잡고 걷는 곳에서 마음작용을 볼 수 있고, 실제로 여기서 마음, 성품을 보는 사람은 부처가 된 것이다.
알고 보면, 보고 듣고 잡고 걷는 데뿐만 아니라, 모든 마음 씀씀이, 곧 사물, 소리를 인지하고, 식별하고, 생각하고, 반응을 나타내고, 말하고, 행동으로 움직이는 것이 모두 마음작용이다. 눈썹을 깜박이거나, 코를 훌쩍이거나, 숨을 들이고 내쉬거나, 손가락을 들거나, 발가락을 깔딱깔딱거리거나, 주먹을 내지르고, 고함을 지르는 것도 모두 그 작용이므로, 이 수많은 작용 가운데 단 한 군데에서만이라도 알아챌 수 있다면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
사람 몸뚱이는 양자과학적으로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의 입자로 입증된 쿼크quark가 거의 무한대로 모인 집합체이다. 이 허공성의 쿼크는 물질이라서 아무 지각이 없다. 지각知覺이 없는 쿼크로 이루어진 눈, 귀, 코, 혀, 몸도 똑같은 물질로서 지각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지각이 없는 것은 '나' 자신일 수가 없고, 알고 깨닫고 하는 것은 마음=부처라는 진실을 거머쥐어야 한다. 세상에 진리란 게 있으면 이것뿐이니, 그래서 석가는 태어나자마자 유아독존唯我獨尊을 부르짖었다. 이것 하나만이 참 생명이요, 세상 모든 것은 다 헛것이라는 뜻이다.
달마대사의 제자인 바라제 존자와 이견왕異見王 간의 대화를 살펴본다.
이견왕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성품을 보는 사람이 부처입니다.”
“대사는 성품을 보았습니까?”
“저는 이미 성품을 보았습니다.”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나는 보지 못합니까?”
“지금 작용하고 있는데도 왕이 스스로 보지를 못합니다.”
“만약 작용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것이 나타날 때는 여덟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 여덟 가지의 길을 말해 주시오.”
바라제 존자가 게송으로 대답한다.
“태胎속에서는 몸이요, 세상에 나와서는 사람이요, 눈으로는 본다 하고, 귀로는 듣는다 하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입으로는 말을 하며, 손으로는 움켜잡고, 발로는 걷고, 펼치면 세계를 덮고, 거두어들이면 티끌 속에 들어가며, 아는 이는 이를 불성佛性이라 하고, 알지 못하는 이는 정혼情魂이라고 합니다.”
본 마음이 바로 성품이요, 불성佛性이라 부른다. 과학적으로 허공성의 쿼크quark로 쌓인 몸뚱이는 자신이 아님을 확인하면 몸을 다 잊어버리고 오직 남는 것은 마음 하나 뿐인데, 마음조차 허공임을 깊이 믿어 들어가면 자신의 성품, 불성이 밖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때가 되어야 비로소 모든 의심을 끊고 서서히 불도佛道에 들어간다.
고려말 선문염송을 지은 진각 혜심대사가 설했다.
“눈앞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거늘 어찌 분별하며 모색할 필요가 있겠는가? 바로 앞에 나타난 것을 지금 마음대로 써먹고 있거늘 어찌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앞의 부처나 뒤의 부처나 이것으로써 진리의 등불을 전했고, 대승의 경전과 소승의 경전도 그것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런 까닭에 ‘오로지 이 하나의 일만이 진실한 것이며 나머지 그 어떤 것도 진실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여러분은 알겠는가?”
확실하게 깨쳐서 눈앞에 불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찾을 필요가 없음을 알겠지만, 성품이 드러나지 않아도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믿고, 일상생활 가운데 수많은 마음작용 속에서 성품을 잡아챌 수 있다면 다시 찾을 이유가 없음을 분명히 본다. 그래서 구지는 한 손가락을 들었고, 석가는 꽃 한 송이를 들었으며, 덕산은 주장자를 내리쳤고, 임제는 고함을 질렀다. 여기서 마음작용 아닌 것이 없음을 분명히 보고 곧바로 여래의 땅에 들어가야 한다. 이제는 화두처럼 빙 둘러가지 말고 직방으로 통하는 길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면 부처라는 이름도 본래 없다. 마음=부처라는 이름도 사람이 지어서 쓸 뿐이라는 뜻이다. 본래 허공이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어찌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냐는 소리다. 무정물無情物인 몸뚱이가 '나'라는 생각만 벗어나면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것이다.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남도 속이고, 자신도 속이는 것이니 세상에 아무 이익이 없다.
중생은 자기 자신이 뒤바뀌어 있음을 전혀 모른다. 내 몸, 내 마음을 써서 이렇게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슨 부처니, 깨달음이니,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고 부르짖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런 자들은 세존도 어찌할 수 없는 천제闡提라서 육도를 원없이 돌고 돌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자라도 부처 씨앗 하나만은 심어놓아야 한다. 결국은 돌고 돌아서 여러분과 같이 자신을 찾는 여정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내 마음이 부처인 줄을 안다면 아무 일이 없는 보통사람이 된다. 부처는 일을 끝마친 범부이다. 중생이 본래 부처이니, 중생을 버리지도 않아 중생, 부처를 따지지 않는다.
'성품을 보면 자기 부처를 발견하니
손을 들고 발을 드리움에 한가닥 빛이 있다.
자신을 떠나 말이나 문자에서 얼쩡거리면
불성은 억겁의 감옥 생활 벗어나지 못하리.'
[출처] '달마 혈맥론血脈論 2'|작성자 Su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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